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1/3) (2/3) (3/3)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대린 테네브의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3/3)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への応答

글쓴이 :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




3. 야먀모토 준(山本潤)의 논평


 제 전공은 독일중세문학으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텍스트는 제임스 조이스나 나쓰메 소세키의 텍스트와는 달리, 데리다의 것과는 직접 관계는 없지만, 테네브 선생님의 강연과 그 주제가 되는 고양이에 관해서, 중세연구자로서의 시선에서 코멘트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고양이에 대해서인데요, ‘고양이라고 했을 경우,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 개체적 존재로서의 고양이가 존재하는 동시에, 그 배후에는 고양이가 표상하는 이미지의 확대[펼쳐짐]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느냐가 문제 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양이를 보면서 그것에 관련시켜 떠올리는 것은, 보고 있는 주체의 문화적 배경에 의거하며, 또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동화되어 있습니다. 방금 소세키의 고양이와 데리다의 고양이가 화제가 됐습니다만, 소세키와 데리다가 갖고 있는 문화적 배경은 당연히 다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인식하는 고양이는 저절로 다른 것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유럽 그리고 특히 중세에서 고양이’, 심지어 동물에 관한 인식이 무엇이었는지를 간단하게 코멘트하고 싶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동물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선 경험적 관찰과 그 후의 생물학적 파악이라는 관점에 의한 것이 머리에 떠오르지만, 중세에는 이런 관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전고대에는,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박물지[Historia Animalium, 동물지] , 경험적 관찰로부터 동물의 생태를 밝히려고 한 시도도 있었지만, 그런 저작은 중세 유럽에는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동물에 대한 지식들이란, 결코 자기 목적적으로 추구되는, 즉 동물이라는 존재 자체의 파악을 최종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반드시 신의 세계 창조와 신의 세계 구원 계획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중세 사람들이 동물 속에서 읽어냈던 것은, 세계에 대한 신의 시선이며, 동물은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미디어[매개물]였던 것입니다. 동물이라는, 인간과는 의사소통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를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가는, 신이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인간과 동물을 그 속에서 어떻게 위치시키는가, 그리고 그런 것을 존재시키는 세계를 어떤 것으로서 인식했는가에 연결됩니다. 이 배경을 이루는 것이, 모든 존재는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동물에 관한 이해는, 동물 우화담의 형식으로 중세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하고 전해졌습니다. 옛날에는 2세기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피지오로고스[자연학자]는 다양한 동물이나 광물의 특성을 소개하면서, 그것에 기독교적인 맥락을 주는 것이며, 중세에 이르기까지 범유럽적으로 수용되며, 기독교의 포교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책 등의 영향 아래에서 동물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이 수립됐기에, 중세에서의 동물 이해는 기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은 죄다 기독교적인 세계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유럽 전역이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 들어간 것은 대략 10세기 무렵으로 보입니다만, 그때까지 축적된 비기독교적인 동물 이해라는 것도 당연히 존재했습니다. 다름 아닌 동물의 종으로서의 고양이는 이집트 기원으로 생각됐으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원래 고양이는 바스테트(Bastet) 신의 성스러운 짐승[인간을 재앙으로부터 지키는 짐승]으로서, 또한 새끼가 많다는 등의 특징 때문에, 풍요의 상징으로 숭배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리고 고양이는 아마도 켈트족을 통해서 이집트나 중동으로부터, 즉 유럽의 외부로부터 초래된 동물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이미 집고양이로서 고양이는 유럽인의 생활에 결부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고양이는 풍요나 다산의 상징성이 계승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해로운 짐승으로 간주된 쥐를 잡는 등 인간에게 유용한, 긍정적인 존재로 인식됐습니다. 또한 중세 초기에도 각지의 궁정에서 애완동물로서 키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런 고양이는 유럽에는 원래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보다 훨씬 더 시간축을 거슬러 올라간 고대에 탄생한 신화를 살펴보면, 적어도 게르만 계열의 신화에는 고양이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된 고양이는 북유럽 신화의 여신 프레야(Freya)가 타는 수레를 끄는 살쾡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살쾡이는 집고양이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이런 세속인들의 긍정적인 인식과는 정반대로, 기독교 교회는 고양이가 야행성이고, 바로 고양이눈빛의 발신원이 된 어둠에서 빛나는 을 마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고양이를 악마와 결부시켜 생각될 수 있는 존재로서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중세의 상징론(symbolism)에서는, ‘고양이한테는 쥐의 모습을 한 인간의 영혼을 쫓아다니는 악마로서의 의미가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긍정적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고양이, 악마와 결부시켜 생각되는 종교적으로 부정적인 존재로서의 고양이라는, 상반된 고양이에 대한 시선이 중세에는 병존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에 관한 인식은 점차 후자, 즉 교회의 견해를 따른, 부정적인 것으로 통합되어 버렸습니다. 그 한 가지 계기가 된 것은 13세기의 설교자 레겐스부르크의 베르홀트(Berthold von Regensburg)에 의한, ‘이단자의 상징으로서의 고양이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렇게 비판할 때 베르홀트가 사용한 논리는, 어원적 결부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 베르홀트는, 중세 독일어에서의 이단자 ketzer’고양이 katze’를 어원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이라고 하며, ‘이단자고양이를 동질적인 것으로 제시한 거죠. 중세 독일어의 ‘ketzer’는 라틴어의 가타리파 cathari’에서 유래했고, 이 시점에서 이미 때때로 고양이 cattus’와 관련시키게 됩니다만, 이것은 순수하게 어원학적 견지에서 보면,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전성기 이후 고양이이단자와 연관 속에 놓이게 됐습니다. 게다가 베르홀트는 이 시기에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유행을, ‘고양이의 숨결의 확산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양이는 중세 초기의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로부터, ‘악마의 화신, ‘해로운 짐승으로 변모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악마성이 극에 도달한 것이, 마녀가 키우는 마()로서의 고양이파악입니다. 마녀 사냥을 할 때, 마녀 혐의를 받은 인간과 함께 고양이도 고문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이전의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로서의 고양이로부터도 이교도의 성스러운 짐승으로서의 고양이’, 그리고 기독교적 견지로부터의 악마와 결부되는 고양이그런 다양한 고양이의 이미지를 유럽의 문화전통은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 데리다의 사고의 배후에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데리다가 욕실에서 고양이를 봤을 때, 그에게 찾아온 감각의 배후에는, 그런 유럽의 문화적 깊이, 문화의 기억의 존재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논점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역시 왜 데리다의 고양이는 암고양이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아까부터 화제로 삼고 있는 유럽의 문화전통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속에, 자발적으로 얘기하는’, 즉 발언자로서의 고양이는 대체로 암고양이입니다. 일례로, 독일 후기 낭만파의 작가 E. T. A. 호프만의 소설 암고양이 무르의 인생관의 무르를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말하면, 그가 서 있는 문화적 위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라는 문제가 있습니다만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 암고양이입니다. 이런 관찰로부터는, 문화적 표상으로서의 고양이에 있어서의 성()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과연 데리다는 기르던 고양이가 만약 숫고양이였다면, 그에게 수치의 감정은 생겨났을까요?

고양이의 성을 생각하는 하나의 재료를 다시 중세 유럽에서 찾고 싶습니다. 중세에서, 숫고양이와 암고양이는 어떤 것으로 인식됐을까요? 일괄해서 고양이내로 통합되었는가, 아니면 수컷암컷이라는 성차(性差)에 근거하여 각각 다른 것으로 파악되었을까요? 그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시인[詩作] 활동을 한 데어 슈트리커(Der Stricker)라는 시인입니다. 그는 여러 장르에 걸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요, 그 일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동물우화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숫고양이암고양이각각을 주역 또는 주제로 하는 단편이 있습니다. ‘숫고양이의 이야기는 숫고양이와 암여우의 대화라는 형태로 적혀 있으며, 그 안에서는 숫고양이의 오만함이 주제가 되는데요, 이 숫고양이는 스스로 소리를 내는 주체, ‘이야기의 주체입니다. 반면 암고양이에 관한 단편은 교훈담이며, 거기서의 암고양이는 부정(不貞[순결하지 않음])’의 상징으로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만 숫고양이의 경우와는 달리, 거기서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것은 작품의 화자이며, 암고양이는 얘기되는 대상, 즉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며, 자발적으로 얘기하는주체가 아닙니다. 이 예는, 중세에서 고양이는 성차에 따라 전혀 상이한 모두 부정적인 존재라는 공통항은 있지만 파악이 이뤄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일 중세의 여성 신비가 힐데가르트 폰 빈겐(Hildegard von Bingen)은 저작 󰡔동물에 대해󰡕에서 고양이를 언급했습니다. 수녀원의 원장이며, 또한 의학·약학에도 정통하고 작곡까지도 한, 중세 유럽의 유수의 슬기로운 여성으로 일컬어진 힐데가르트가 고양이에 대해 말한 서술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고양이에 대해서, “고양이는 체액 때문에 따듯하다기보다는 차가운 존재이다. 그리고 나쁜 체액을 갖고 있어서, 공기의 정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공기의 정령도 고양이를 겁내지 않는다. 개구리나 뱀과 친근성이 있다. 그리고 마르고 차가운 자신의 성질 때문에 여름의 더위에 시달리면, 그 차가운 체액 때문에 개구리나 뱀의 체액을 핥으며, 그것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그런 체액 때문에 그 살덩어리는 독성을 가진다라고 적었습니다.

이상으로 독일 중세를 중심으로, 유럽의 문화 전통 속에서의 고양이에 대한 다양한 파악을 소개했습니다. 유럽인의 고양이에 대한 시선의 문화적 배경의 일단을 전달하고 고양이에 관한 텍스트에 대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었다면 다행입니다.

山本潤首都大学東京准教授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1/3) (2/3)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대린 테네브의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2/3)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への応答

글쓴이 :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




2. 미나미타니 요시미(南谷奉良)의 응답


 이번에 테네브 선생님의 원고 번역을 담당한 미나미타니입니다. 전공분야는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인스로, 현재는 근대적 동물‘(modern animals)이라는 관점에서 조이스의 텍스트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상상이나 하셨을지 모르겠는데요, 이번 번역 작업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학부생도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은 조이스와 관련시켜 코멘트를 하는 것이기에, 율리시즈를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알 수 있게끔, “3분만에 알 수 있는 율리시즈의 복잡함이라는 얘기를 생각해 봤습니다. 원하신다면 그 설명으로, 테네브 선생님의 원고에 대한 비판을 대체하고 싶습니다. 율리시즈의 복잡함이 제대로 반영되고 있느냐는 비판입니다.

 

우선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싶은데요, 저릂 봐주시겠습니까? 어떤 비유를 도입하고 싶은데요, 우선 [율리시즈의 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이 책의 페이지를 비유적으로 대지라고 생각하고, ‘대지위에 문자가 심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대지위의 문자에 의해, 1904616일의 더블린에서 일어난 사건이 수행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이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거나 쇼핑을 하거나 요리를 하는 등, 각각은 뭐라고 말하지는 않으나, 더블린 시민들의 일상적 생활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하 세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율리시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밑바탕으로 하며, 그것이 모종의 지층으로서 지상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조이스 연구에서는 이런 신화적 대응을 호메릭 패러렐[homeric parrels, 호메로스적 평행]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오뒷세우스와 텔레마코스가 각각, 블룸과 스티븐이라는 두 명의 주인공에 대응하며,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말, 플롯이나 모티프가 영양의 공급원이 되어 지상의 문자에 들여오게 됩니다.

그리고 오뒷세이아아래에는, 무수한 문학이나 예술, 역사적 담론 등의 뿌리가 퍼져 있는 인터-텍스추얼리티의 지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야기 속에서 스티븐에게 빛이 있었을 때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맥베스가 지상을 향해 뿌리를 뻗고, ‘호메릭 패러렐의 지층의 뿌리와 얽히면서, 대지의 문자에 의미나 이미지를 보급합니다. 이 두 개의 지층이 말하자면 가장 단순한 율리시즈의 지하 구조입니다.

더욱이 율리시즈를 복잡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야기의 뿌리가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소설을 생각할 때에는, 가령 화자에 의한 땅의 글과 등장인물의 말(직접화법과 간접화법)로 이루어져 있는 19세기적인 소설이 상기됩니다만, 율리시즈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호메릭 패러렐의 지층, ‘인터-텍스추얼리티의 지층을 설명했습니다만, 더욱이 그 밑에는 세 층의 이야기의 지층이 잠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에 등장인물과는 구별되는, 이른바 화자의 지층이 있습니다. 소설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서술하고 정리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화자를 상상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결코 굳건한 화자[이야기꾼]가 아닙니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등장인물과 연관지어 찰스 삼촌의 원리라고 불리는 것인데요, 화자가 사용하는 어구가 반드시 그 화자의 어휘인 것은 아니고, 어떤 때에는 얘기의 진행에 있어서 조명을 받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그런 어구라든가, 그들의 사고언어에서 생길 수 있는 통사법(syntax)을 지상의 글에 반영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화자는 또한 등장인물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말을 내적 독백으로서 그대로 지표에 토해내거나, 혹은 그 또는 그녀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하자면 지하수로서 억압하기도 합니다.

이미 충분히 복잡한데요, 이 이야기의 지층의 가장 바깥쪽에 어레인저라고 불리는 수수께끼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등장인물도 화자도 작자도 아니고, 율리시즈라는 출판물이 가진 문자정보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데리다도 율리시즈 그라모폰에서 비슷한 것을 말합니다만, 율리시즈의 텍스트에는 막대한 참조관계와 잠재적 인과관계에 의한 그물망 조직이 퍼져 있습니다. 어레인저는 그 복잡한 그물망 조직의 특정한 부분을 부각시킴으로써, 독해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삽화에 나오는 말이, 다른 삽화에 나오는 말과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거나, 어떤 장면에서 수백 쪽 떨어진 앞의 대목을 예시적으로 문자 속에 반영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외부로부터의 노골적인 조작이 있기에, 우리 독자는 페이지 사이나 삽화 사이의 복잡하게 뒤얽힘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마지막인데요, 텍스트의 최하층에는 작가 조이스의 지층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겁니다. 작가가 자신의 전기적 기반을 연동시켜 지표로 영양분을 보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금 편의적으로 지층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는데요, 명확한 서열이 있거나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율리시즈라는 텍스트 아래에는 호메릭 패러렐의 지층, ‘인터 텍스추얼리티의 지층, ‘작가 율리시즈라는 지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율리시즈의 복잡함을 쉽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결론입니다. 이런 복수의 지층들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뿌리가 서로 얽힌 결과가, 대지위의 문자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단어를 뽑아내는 것만으로도 고구마 뿌리는 아니지만 바로 지하로부터 줄줄이 뽑히게 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조이스 연구에서는 이런 뿌리를 아주 민감하게 다룹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어나 글을 인용하고 다른 대지로 이식할 때, 우리는 그 문자의 뿌리에 붙어 있는 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인용합니다. 이른바 신경을 그 뿌리와 동화시키는 것 마냥, 신중한 손놀림으로 빼내는 것을 능사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테네브 선생님의 원고로 눈을 돌리면,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서는, 이 복잡한 뿌리가 끊기는 것 아니냐고 하는 게 제 비판입니다. 구체적인 비판 대목인데요, 테네브 선생님은 고양이가 발화하는 므크그나오(Mkgnao)’, ‘므르크그나오(Mrkgnao)’, ‘므크르크그나오(Mkrkgnao)’에 관해서, “조이스는 인간에게는 거의 발음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블룸의 고양이는 의인법으로 묘사되는 고양이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어떤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율리시즈의 복잡성에서 보면, 그것은 과연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저는 의문이 듭니다. 그것은 객관주의적으로 재현된 목소리인가? 도대체 누가 적은 말인지, 이것들이 중요한 해석 요건입니다.

고양이의 발화 ‘Mkgnao!’를 문자 그대로 하면 무슨 말인가? 우선 고양이는 자주 일본어의 표기처럼 ~’하고는 울지 않죠. 그런 게 아니고, [고양이의 울음소리 흉내를 내고] ‘*****’이라고 울죠?(웃음) 그렇지만 그 소리를 문자로 적는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인간의 언어의 변별 음소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편의상 ‘Mkgnao!’라고 음을 들어맞게 해서 모방적으로 고양이의 소리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Mkgnao!’라는 음소를 선택해서, 이 대지 위에 옮겨 적는 것인가? 이것에 답하려면, 앞서 설명한 복잡한 이야기의 뿌리에 의한 해석이 필요해집니다.

원문을 재확인해보면, 블룸이 직접화법으로 Milk for the pussens, he said.”라고 하며, “, 우유를 줄께라고 고양이한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서, 혹은 응답같은 것으로서, “Mkgnao!, the cat cried.”와 고양이의 이 묘사됩니다. , ‘Mkgnao!’는 일차적으로는 약간 철자는 다르지만 밀크’(Milk)를 달라고 조르는 고양이의 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Mkgnao!’라고 적고 있는 것은 블룸일 수 없습니다. 블룸의 의식을 통한 고양이의 말을, 화자나 어레인저‘Mkgnao!’라는 문자로 적는 것입니다.

타이핑을 해야 한다(타이포그래피컬)는 이유 때문에 ‘Mkgnao!’밀크를 원해를 의미한다고 암시되었을 때, 독자는 어레인저에 의해 다른 삽화로 초대된다는 것이 판명합니다. 어레인저는 독자의 주의를 밀크에 걸게 함으로써, 첫 번째 삽화의 마테로 탑의 옥상에서 마라카이 말리건이 휘저어 뒤섞인 면도용 흰 액체를, 게다가 마테로 탑에서 마시는 밀크[우유]를 상기시킴으로써, 첫 번째 삽화와 네 번째 삽화가 서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특히 고양이의 발화가 ‘Mrkrgnao!’이 됐을 때 명확해졌는데요, 이곳에는 호메릭 패러렐(homeric parallels)’의 지층이 영향을 미쳤으며, (마라카이 말리건에게 부여되는 신화적 대응의 속성으로서) 상인이나 도둑의 비호자인 메르쿠리우스(Mercurius)’의 철자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삽화에서 블룸은 고양이가 생각하고 있을 법한 것을, “Prr. Scratch my head. Prr.”(“[목구멍으로 소리를 내며] 프르르. 내 머리를 긁어 달라고. 프르르.”)라고 대변하는 것처럼, 그 고양이에게 말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직접 화법의 므크그나오’(Mkgnao!) ‘므르크그나오’(Mrkgnao!) ‘므르크라그나오’(Mrkrgnao!)의 발화도 그렇고, 고양이의 로 간주된 발화는 모두 인간중심적으로 들리며, 인간중심적으로 적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블룸의 고양이는 그 어떤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라는 결론은 끌어내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삽화로 뻗고 있는 뿌리가 잘라져버린 것은 아닌가, 이것이 제 비판입니다.

또한 율리시즈의 복잡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블룸의 발언의 근본에 연결된 동물론의 계보에 대해 조금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블룸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에 대해 이 녀석들은 인간이 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이 녀석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녀석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대목은 몽테뉴의 저작에서 인용한 것임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물과 인간의 동등성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의미하는 바를, 웬만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도 또한, 대체로 비슷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끼리 완전히 흡족한 의사소통이 존재하고, 게다가 같은 종류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 사이에서도 상호 이해가 성립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宮下志郎 訳, レーモン・スボンの弁護, 白水社, 2010).

 

일찍이 16세기의 시점에서 몽테뉴는 인간과 동물의 서열이나 인간에게 특유하다고 간주되는 역능에 회의의 시선을 보내고, 동물에게 뛰어난 추론·공감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블룸이 몽테뉴를 인용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가축업자로서 일했던 경험도 있으며,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물 전반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육·수송·도살·정육이라는 과정에 있어서 동물들이 받을 수 있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고려하고, 거리에서 보이는 동물의 보건소 시설 “Dogs’ home”(“더블린 동물학대 방지 협회가 운영하는 유기견이나 유기 고양이를 관리하는 시설)에 의식을 기울이는 등, 블룸은 동물의 고통을 하나의 중요한 근대적 사회문제로서 파악했습니다.

블룸이 생각하는 동물의 고통이라는 문제가 의식적인 운동에 끌어들여지게 된 것은, 그것이 기독교의 자선정신과 합류한 19세기 초반부터입니다. 사실 율리시즈가 간행된 1922년부터 100년 전인 1822년에는, 최초의 동물법인 마틴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법안을 제기한 아일랜드의 하원의원인 리처드 마틴에게서 따온 통칭입니다만, 이 법이 기본적인 원안이 되어, 이후, 세계 각국으로 근대적인 동물법으로 수출됩니다. 블룸과 고양이의 주고받기를 볼 때에는, 이런 19세기적인 동물론의 수맥도 동시에 사정거리에 넣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南谷奉良一橋大学博士課程)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자크 데리다 사후 10년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

猫、眼差し、そして死

ダリン・テネフ

(訳=南谷奉良)

일본어 번역본은 여기를 클릭.


ダリン・テネフ講演会「文学理論において、いかにしてモデルを構築するべきか?」報告 星野 太

1

 이 논고에서 나는 여러분 ― 이런 나를, 이 대학에, 그리고 이 세미나에 초대해준 여러분 ― 과 함께, 다종다양한 고양이들에게 우리의 눈빛[눈길, 시선]을 향하고 싶다. 이 ‘맹도묘[盲導猫, 시각 장애인의 길을 안내해주는 고양이]’가 되어주는 것이, 데리다의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이하 『동물을 쫓다』로 약칭]의 고양이이다.1) 나는 그녀의 흔적을 쫓음으로써, 고양이의 본질이 아니라, 고양이에 얽힌 전통과 담론 속에서 어떤 윤곽을 이루는, 고양이의 단독성을 추구하고 싶다. 그런 담론의 계보를 망라하여 제시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며,2) 데리다의 저작에 등장하는 고양이를,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이 맺는 관계를, 그 전통과 담론이 고유한 모습으로 부각시키는 모양을 보여주고 싶다.

 이런 기획의 관심 중 하나에는, 데리다 자신의 타자와 ‘단독적인 것’의 이해를 고려하면서 그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단독성’을 생각하는 것이 있다. 데리다의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의 발간 후에는 이 책에 대한 엄청난 양의 비평이 작성되고, 이 프랑스 철학자가 묘사하는, 고양이와 함께 사는 장면이 되풀이되어 논해졌다. 현실에서 일어난, 그러나 상상적이기도 한 이 장면은, 지금은 꽤 유명한 에피소드가 됐다. 어느 날 아침의 데리다의 집의 욕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데리다의 고양이 ― 암코양이 ― 가 “그녀의 아침을 달라고”, 욕실에 있는 그의 뒤를 따라오자, 거기서 그녀는 데리다가 알몸인 것을 보고 “욕실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L’animal... p. 30-31 ; The Animal... p. 13; 『動物を追う』 34頁. 이하 프랑스어판, 영어판, 일본어판의 순서로 인용 쪽수를 표기한다). 고양이에게 알몸이라는 것을 보이고, 그 철학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것은 그가 마침 알몸의 상태를 고양이에게 보였기에 부끄럽게 느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자체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수치의 경험은, 데리다가 부르는 바의 ‘수치의 반사’(『동물을 쫓다』 18頁)를 산출한다. 데리다는 그 고양이가 진짜 고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어떤 의미에서 “본질의 고양이”라고 말하는지를 명확히 하려고 한다 ― “알몸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실재의 고양이이다’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그 대체 불가능한 단독성[singularity]을 각인[표시]하기 위해서이다[cʼest pour marquer son irremblaçable singularité]”[L’animal...26/9/2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데리다가 그의 고양이와의 현실적/상상적인 장면을 제시하고 있는 [프랑스의] 스리지 라 살에서의 연구집회를 앞두고, 『죽음을 주다』(1990)의 시점에서, 이미 고양이와 단독성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 “다양한 단독자에게, 즉 저 사람이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나 저 사람, 어떤 남성 또는 어떤 여성에, 이런 나를 결부시키는 것은 언제까지나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 당신이 몇 년 동안 매일아침 먹이를 주며 키우고 있는 고양이를 위해, 시시각각 전 세계의 다른 고양이들이 굶어죽고 있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우카이의 번역을 참고로 일부 변경함].3) 고양이를 이용한 예증은 놀라운 것이 아니지만, 『동물을 쫓다』를 읽은 후에는, 위의 인용은 다시금 이채를 내뿜는 것 같다. 『죽음을 주다』에 후속되는 『동물을 쫓다』가 밝히는 것은, 위의 인용부 안에 있는 ‘당신’도 또한, 자[서]전적인 ‘나’로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데리다는 마치, 내가 얘기하는 것은 나와 내 고양이에 대해서이다, 라고도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주다』에 그려지고 있는, 그가 고양이에 먹이를 주고 있는 아침 장면은, 『동물을 쫓다』에서 그려진 아침 욕실의 장면 뒤에 일어났다고 추측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후자의 장면에서 데리다는, 이 단독적인 고양이에 의해, 각인[표시]되는 ― 비유적인 고양이가 아니라 ― 실재하는 고양에 의해, 자신의 알몸을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단독성으로서의 고양이를 생각하는 것에는, 그것으로서 고유한 곤란한 문제가 뒤따른다. 우리가, 이 구체적인, 단독적인 고양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예를 들어 타자성(otherness)이나 전적인 타자[the wholly other) 같은 일반 개념의 도식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타성[他性, alterity]이나 타자성[otherness], 타자[the other]라는, 현재에는 매우 많이 보급되어 있는 개념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단독성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데리다가 『동물을 쫓다』에서 착수하려고 한 문제의 하나이다. 실제로 데리다가 “그들이 ‘동물’이라고, 그리고 예를 들어 ‘고양이’라고 부르는, 전적인 다른 것”[plus autre que tout autre, 전적으로 다른 것보다 더 다른 것]이라고 말할 때(L’animal... 29/11/31), 그것은 모종의, 데리다가 자신에게 겨눈 비판이 되고 있지 않은가. 혹은 매우 안이하게 타자성의 개념을 사용하고, 마치 그 타자가 형이상학과 서양적 사고의 모든 문제에 대한 보편적 해답인 양 행동하는 해석자들에 대한 비판이 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데리다의 저작에 있는 문구를 알맹이가 없는 채, 무비판적인 형태로 반추하기를 원하지 않은 독자에게, 단독성과 타자의 관계를 재개념화하는 것은, 진지하게 물어야 할 과제이다. ‘타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텍스트는 존재할까? 후기 데리다에게, 그런 텍스트가 과연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만약 ‘다른 것’의 단독성을, 일반개념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면, 그때 일반적 ‘타자’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후기 데리다의 저작이 되면, 타자성을 각각의 구체적인 타자로, 그때마다 단독적인 타자로 분해되는 ― 탈구축이라고 해야 할까? ―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데리다가 단독적인 이 타자 저 타자에 대해 말할 때에는 ― 그것이 아이와 고양이이든, 혹은 유령이든 ― 그때마다 자(서)전적인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을 쫓다』의 고양이의 사례에서 명백하다. 데리다는 (사실 한 마리 이상의) 고양이를 길렀다.4) 다만 자(서)전(autobiography)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데리다 식의 어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단순한 개성[individuality]이나 개체[個] 자기성(ipseity)의 저쪽에 있고, 자기(auto) 속에 각인되면서도, 자기를 구성하는 타자나 단독성이 혼성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서)전이다. 데리다는 ‘나’의 존재에 선행하는 ‘나’ 속의 ‘타자’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하나 이상의 타자가, 하나 이상의 단독성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상관적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상관적으로 관계하는 형상(figure]을 ‘공형상’[configuration]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양한 공형상이, ‘자(서)전’의 ‘자기’를 형성하는 가운데, 동시에 철학적 사색이 개시되는 것이다. 어떤 철학도 자(서)전적인 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어떤 공형상의 흔적을 재-추적하는 것은, 단순히 자(서)전적 사실 속에서 대답을 찾아낸다기보다는, 개념상의 고고학적 실천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 논고에서는 “왜 고양이인가?”에 대해 나는 대답을 삼가고, 그렇게 묻지도 않겠다. 다만 그 공형상이란 무엇인가, 데리다와 함께 있는 고양이의 자(서)전적인 공형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공형상은 자(서)전적이지만 ― 혹은 바로 이 때문에 ― 끊임없이 다른 저작이나, 상이한 전통을 참조하면서, 다양한 담론에 의해 중층결정되고 있다. 그 중 하나로서, 고양이에 얽힌 담론이 있다. 『동물을 쫓다』의 첫머리에서 데리다는 그 담론(혹은 ‘담론들’이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항상 하나 이상의 담론이 있기 때문이다)을 명확한 형태로 언급하고 있다. 이 담론 속에서 고양이들은, 우의(寓意)나 은유, 환유로서 사용될 뿐 아니라, 야생의 동물과 길들여진 동물의 경계라는 까다로운 분리선을 지시하는 수단으로서, 혹은 애완동물이나 신성한 존재의 화신으로서도 유용되기도 한다. 또한 이에 덧붙여, “고양이의 눈을 통해 보다”라는 시도에서 이용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이 공형상 중에서도, 내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요소 중 세 가지, 즉 ‘고양이’와 ‘눈빛’과 그리고 ‘죽음’을 다루겠다. 이 세 가지가 함의하는 바인 단독적인 공형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철학적 진술을 재-구축해보자.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을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고양이와 눈빛, 죽음의 공형상은, 희미한 윤곽이기는 하지만 이미 데리다의 저작의 꽤 초기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74년에 출판된 『조종』5)의 첫머리, 리토레 사전으로부터의 인용에서,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이 이미 상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리토레 사전에서 공형상을 끄집어낸 구절을 인용하면, 영역판에서는 다음과 같다.


Catafalque(명사) 관(棺)이나 죽은 자를 본 뜬 상을 두기 위해, 경의를 표시하고 교회의 중앙에 설치된 단[台]. … <어원> 이탈리아어 catafalco ; 속(俗) 라틴어 catafaltus, catafaldus, cadafalle, cadapallus, cadaphallus, chafallus. 뒤 강주[17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문헌학자 사전 편찬자)에 따르면 cata는 속 라틴어의 catus, 동물과 연관지어 ‘고양이’로 불리는 전투용 무기에서 유래한다. 또 디에츠에 따르면 catere(보기, 주시하기)에서 파생된다. 가장[du reste], catus(고양이)와 cater(주시하기)는 같은 어근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 두 개의 어원은 일치한다. 남은 falco에 대해서는 속 라틴어의 이형(異形)들에 p이 나타나는 것부터가 독일어 balk(balcon을 참조)에서만 있을 수 있다. catafalque는 교수대(scaffold)와 같은 단어이다(échafaud을 참조).6)

 

물론 이것은 그저 인용이며, 데리다 자신이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종』이 이용하는 논리는 그런 주장을 뿌리친다. 데리다가 리트레 사전 안의 이 항목을 인용하게 된 이유, 그리고 그의 텍스트상에서는 어떤 부분을 괄호에 넣고, 어떤 부분은 그대로 두고 있는(예를 들면 고양이(catus)와 바라보다(catere)에 공통되는 어근을 데리다는 언급한다) 이유를 생각하면, 이 인용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처럼 ‘죽음’과 관련된 ‘눈빛’과 ‘고양이’가 있다. 어원적으로는 고양이와 눈빛은 동일한 것이며, 이것이 죽은 자의 신체를 눕힌 관이 놓인 단의 토대가 된다. 이 단 위에서 죽은 자는 바라보이고, 아마도 명예를 얻게 된다. 마치 고양이가 바라보이게 되고 있는 것처럼. 이미 여기서, 죽은 자의 몸의 문제와 그것에 대해 이루어져야 할 조치가, 적절한 처치 방법이 암묵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단 위에 놓여 있는 동안] 시체는 땅에 매장하거나, 화장해서 재로 할 것이냐는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죽은 자는 높은 장소로, 지상보다 높은 곳에 있는 대 위에서 허공에 매달려지고宙吊りにされ,7) 그 모습은 마치, 두 번째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하다. 환상적인 장면이 독자 앞에는 확 열리고, 어떤 환상이 이미 그 효력을 발하기 시작한다. [죽은 자를 향한] 눈빛(주시하는 것)은 마비된다. 마치 그 자신의 한계의 끝을 보려는 것처럼. 죽은 자의 얼굴에 떠오르는 죽음을 바라보며, 죽음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하는 양. 이중으로 된 환상상의 주시하는 시선이 삶의 문턱‘과’ 죽음의 문턱에 쏟아진다.

 아마 내가 지금 한 『조종』의 몇 구절의 해석은 상당히 자의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데리다가 1974년의 『조종』 이후, ‘고양이’과 ‘눈빛’, 그리고 ‘죽음’의 공형상을 다루지 않을 때의 얘기이다.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는 때때로 세 가지 요소 중 두 가지만 명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샛길』8)에서는 고양이와 눈빛, 「애도의 힘에 의해」9)에서는 눈빛과 죽음, 『죽음을 주다』에서는 고양이와 죽음처럼.


2

 여기서 구체적인 고양이들로 눈을 돌리고 싶지만, 내가 ‘고양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코 ‘진짜 고양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대부분 경우, 우의(寓意)와 은유, 환유로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작품에 등장하는 고양이가 그대로 고양이인지, 다른 뭔가를 상징하고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으레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문학에 내재하는 하나의 위험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것과는 다른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실은 때로 고양이의 불가해함으로 여겨지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고양이는 수수께끼 같고, 인간은 고양이를 바라보지만 고양이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고양이에 얽힌 담론은 아마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여기에서 일단 언급해야 할 것은 보들레르의 고양이에 대한 시 『악의 꽃』과 보르헤스의 소네트 「한 마리의 고양이에게」 등의 작품에서 보듯이, 근대 시대에 이르러서도, 고양이에 얽힌 담론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수수께끼로서, 비밀로서 간주되는 고양이는, 이중적 역할을 맡는다. 한편으로, 고양이는 그 자신에 주목을 끌고, 점점 더 정체모를 것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고양이가 수수께끼와 비밀을 안고 있는 한, 고양이는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서 머문다. 달리 말하면, 그런 고양이는 타자로서 머물며, 기지(旣知)의 것 혹은 알 수 있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에 머문다. 이리하여 고양이는 우의(寓意)나 수사적인 장치를 불러들이는, 뭔가 다른 것 ― 여성 혹은 단순히 초상적인 것 ― 으로 그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른바 고양이의 우아함이나 품위도 그 위에 보태지고, 고양이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이 여성과의 유비를 만들어내는 것을 가능케 해 왔다. 물론 여성을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서 보는 것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프로방스 시와 함께 유럽에 처음 나타난 어떤 조류의 역사적 산물이며, 단테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등 당대의 시인들은, 그들이 사랑한 여성을, 자신들에게는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어서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서 묘사했다.10) 그래서 아마 유럽에서의 최초의 유명한 고양이들이,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고양이인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단테의 고양이는 그 앞발로 촛불을 쥐고, 단테의 저녁식사와 독서를 비춰졌다고 전해지는데, 페트라르카의 고양이가 되면, 그 고양이는 라우라[연애서정시 『칸초니에레Canzoniere』에 등장하는 영원의 여성]의 라이벌이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다. 페트라르카는 그의 고양이에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고, 그 무덤에 “어떤 토스카나 시인의 마음에는 이중적 사랑의 불길이 타올랐다. 바깥인 큰 불길을 이런 나를 위해. 안인 작은 불길을 라우라를 위해”라는 묘비명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도 고양이와 죽음이 결부되어 있는데, 고양이는 무덤 아래서 소리를 내는 미라로서,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sur-vivre) 고양이이다. 고양이를 미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미라는 죽은 사람을 구현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중지시키고, 죽음의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죽은 자를 나타내는 미라는, 사체가 그것 자신의 이미지로 변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체 그 자체는 땅속에 묻히지 않고, 또한 화장되지도 않고, 아직도 자신의 죽음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는 듯하다.

 고양이와 여성이 어떤 형태로든 유비를 이루는 전통은 근대의 도처에서 볼 수 있으며, 보들레르부터, 훌리오 코르타사르, 미셸 투르니에에 이르기까지 찾아볼 수 있다. 『동물을 좇다』에서 데리다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와 여성을 환유적으로 연결한다. 고양이의 시선[눈빛]에 노출된 알몸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은, 여성이 그 욕실에 들어왔다고 한다면, 훨씬 더 참기 어려운 것이 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 “그런데 이런 나, 수컷인 이런 나는 깨달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방에 여자가 있기에, 고양이에 대한 관계 속에, 내가 알몸인 것을 보고 있는 알몸의 고양이, 그리고 내가 알몸인 것을 그것 자체가 보고 있는, 그것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알몸의 고양이의 눈빛 속에, 모종의 불이 켜졌듯이. 그 불은 빛나고, 향기처럼 방안을 맴돌기 시작한 질투의 연기와 함께”(86/58/113). 이로부터 데리다는 다음 장면으로 옮겨간다. 그가 고양이의 눈빛[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그 방에, 고양이 외에 거울도 있다고 하는 장면이다. 이 두 개의 상황에서 흥미로운 것은, 어느 쪽이든 데리다는 고양이와 거울,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기보다는, 그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 장면의 기술을,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 “나는 여자이며, 그 여자는 또한 남자이다”(86/58/113). 거울도 또한 방 안에 있는 두 번째 장면에서는,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그때, 모든 남자, 모든 여자가, 몇 명, 몇 마리인지 모르다. 그리고 나는 주장한다, 자(서)전이 시작된 것은 그때라고” 말해진다(86/58/113). 이처럼 데리다는 고양이와 여성 사이에 병행관계를 만들어내는 전통을 집어들어 그것을 탈구시켜 가는데, 그때, 그가 묘사하는 두 개의 상황의 잠재적인 연결, 고양이와 여성, 고양이와 거울의 연결을 설명하는 것은 없다. 언뜻 보면 데리다는 여성과 거울의 역할의 공통점을 듦으로써 은근히 고양이와 여성이 비슷하다는 것을 내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가 고양이에게 있어서 거울이라면, 여자는 남자에 대해 고양이를 반사할 것이다. 남자는 보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면, 보이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니까. 거울 속의 이중화에 의해, 여성은 고양이로, 고양이는 여성으로 모습을 바꾼다. 다른 한편, 이런 해석이 들어맞는 것은, 거울 속에 누가 반사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아는 한에서, 즉 우리가 남자 주인공의 관점을 특정하고, 이것과 동일화할 수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데리다의 이야기 속에서, 이것은 난점이다. 거울이든 여성이든, 데리다가 그 방에 제3자를 입실시킨 순간에, 남성의 관점이라는 입장은 중지되고宙づりにされ, 동시에 여성과 고양이의 안정된 병행관계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중지된다宙吊りにされる. 그때 우리에게는 더 이상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 누가 누구를 반사하고 있는가를 모르게 된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그때, 모든 남자, 모든 여자가, 몇 명, 몇 마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남성은 ‘여성’ 혹은 ‘그녀 ―― 고양이’, ‘나비[고양이의 애칭]’가 되고 있다. 마치 그가 거울인 그를 반사하는 거울이 반사를 반사하듯이. 이때, 고양이의 반사와 여성의 반사, 그리고 남성의 반사가 있다. 단 데리다는 고양이가 보고 있을 것, 고양이가 말할지도 모르는 것, 고양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고양이의 눈빛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 이 고양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데리다는 그 고양이가 몇 살인지, 어느 정도의 사이즈인지, 그 털 색깔에 대해, 그 고양이가 어디서 잠을 자고 먹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입장, 그 자신의 자기를 불안정하게 하는 형태로 그 장면을 묘사하는데, 그가 상대하고 있는 그 고양이라는 타자에 대해, 그 어떤 형태로도 지배적인 지식을 가진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녀를 이해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데리다가 그의 고양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때, 그는 그 단독적인 생물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양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고양이의 눈빛/시선에 홀린 사태는 결코 데리다의 사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며, 포나 보들레르,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의 작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근대문학은 특히 고양이의 눈빛에 매료된 구절이 있다. 고양이에 얽힌 담론에는 두 개의 전통이 있는 듯하다. 즉, 하나에는 고양이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전통이, 다른 하나에는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보려고 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어떤 전통에서는, 시인의 응시 대상이 된 고양이의 응시가 그려진다. 고양이에게 바라보여지고, 시인이나 작가는 그 눈빛에 매료되지만, 그들은 그 고양이를 외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포, 보들레르, 릴케, 보르헤스, 코르타사르는 이 전통의 일족이다. 고양이가 이쪽을 바라보거나, 세계를 바라보거나 할 때, 이런 작가들의 누구 한 명도, 그 고양이 자체에 보이는 것을 말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페트라르카의 고양이에 이어진 근대문학은, 고양이의 눈빛에 매료됨으로써, 또한 별개의 전통을 산출하고 있으며, 어떤 시인이나 작가들은 마치 고양이의 내부의 관점에서 묘사하는 시도를 실천해왔다. 이 작가들은 고양이에게 언어 능력을 주고, 고양이를 자(서)전적 동물로 변신시킨 것이다. 그 내적 관점의 장치에는, 고양이에게 말하게 하고, 고양이에게 보이는 것을 서술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전통에 대해서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루드비히 티크의 희극 『장화 신은 고양이』부터, 현재에도 인기 있는 아동문학, 제임스 보웬의 『내 이름은 밥』 같은 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보웬의 책에서는 저자와 함께 살게 된 고양이 밥의 얘기가 말해진다.11) 이런 전통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E.T.A.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일 것이다.12) 그 이후도, 고양이의 자(서)전을 쓴다는 시도를 한다는 작가들이 있으며, 예를 들어 이폴리트 텐의 『어떤 고양이의 생애와 그 철학적 의견』13)이나, 20세기 초반에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같은 작품이 있다.14)

 지금 언급한 작품은 모두, 고양이의 관점에서 보는 것, 고양이에게 말하게 하는 것, 고양이에게 언어를 주는 것은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즉, 어떤 작품에서든 고양이의 자(서)전은 그 시각의 탄생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든, 첫 장면은, 처음으로 고양이가 눈을 뜨는 곳에서 시작된다. 시각의 탄생은 우의화의 탄생인 동시에, ‘시각이 없는 상태’를 마치 허구적으로 만들어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我輩は猫である)』의 고양이한테 눈을 돌려보자. 다음의 인용에서 보듯이, 고양이의 자(서)전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이와 동시에 시각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왠지 어둡고 눅눅한 곳에서 야옹 야옹 했던 것만은 기억한다.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것을 봤다.” 고양이가 기억하고 있는 첫 번째 것은, 어둑어둑하고 습한 곳에서 울었던 기억이다. 이 장면은 그 이야기를 나[我輩]라는 거만한 ‘나[私]’의 인칭을 사용해, ‘나는[我輩は]’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고양이가, 처음으로 인간을 보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주목해야 할 것이 여럿 보인다. 하나는, 여기서의 눈길의 대상이 인간이며, 인간이 고양이에 의해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이 고양이에게 바라보인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주인공의 모델은 소세키 자신이다. 이처럼 고양이에게 [주인공이] 보인다는 것에 강하게 [마음이] 끌리는 사태가,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써져 있다. 두 번째 점에서는, 그 사람이 그 장면에서 언급되는 유일한 눈길[눈빛]의 대상이라는 것이 거론된다. 세 번째 점의 중요한 사실은, 그 장소가 어둑하고,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다. 고양이는 어둠 속에서도 본다고 간주되지만, 이 장면에서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이다. 독자는 오히려 이 고양이와 인간이 만나는 장면을, 똑똑히 시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만들어진다. 인간이 그 새끼 고양이를 손에 들고 옮길 때 그 인간의 얼굴을 겨우 몸을 구부려 볼 기회가 되자 고양이는 그 얼굴이 ― 적어도 고양이한테 ― 얼마나 기묘한지를 소묘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무엇이 보일까? 적어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그 대답이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1장에서는 주인이 고양이 스케치를 시작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인용하면,


그는 지금 나의 윤곽을 다 그리고 얼굴 주위를 형형색색으로 수놓고 있다. 나는 자백한다. 나는 고양이로서 결코 최상의 성과가 아니다. 키와 좋은 출신과 좋은 얼굴 생김새라고 말해도 굳이 다른 고양이보다 뛰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아무리 못생긴 나라도, 지금 내 주인이 묘사하고 있는 묘한 모습은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어. 첫째, 색이 다르다. 나는 페르시아산 고양이처럼 노란색을 포함한 담회색에다 옻과 같은 무늬의 피부를 갖고 있다. 이것만은 누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주인의 채색을 보면, 노란색도 아니고 검은 색도 아니고, 회색도 아니고 갈색도 아니며, 그렇다고 이것들을 섞은 색도 아니다. 그저 일종의 색깔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평할 방법이 없는 색깔이다. 게다가 신기한 일은, 눈이 없다. 더욱이 이것은 자고 있는 것을 스케치했으니까 무리가 없지만, 눈 같은 곳조차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먼 고양이인지 잠자는 고양이인지 분명치 않은 것이다.15)

彼は今吾輩の輪廓をかき上げて顔のあたりを色彩っている。吾輩は自白する。吾輩は猫として決して上乗の出来ではない。背といい毛並といい顔の造作といいあえて他の猫にまさるとは決して思っておらん。しかしいくら不器量の吾輩でも、今吾輩の主人に描き出されつつあるような妙な姿とは、どうしても思われない。第一色が違う。吾輩はペルシャ産の猫のごとく黄を含める淡灰色に漆のごとき斑入りの皮膚を有している。これだけは誰が見ても疑うべからざる事実と思う。しかるに今主人の彩色を見ると、黄でもなければ黒でもない、灰色でもなければ褐色でもない、さればとてこれらを交ぜた色でもない。ただ一種の色であるというよりほかに評し方のない色である。その上不思議な事は眼がない。もっともこれは寝ているところを写生したのだから無理もないが眼らしい所さえ見えないから盲猫だか寝ている猫だか判然しないのである。


이 구절은 본래라면 자세하게 논해야 할 대목이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 사항에 머무르고 싶다. (1) 이 장면에서 고양이는 자신이 그려진 스케치를 보고 있다. 거울을 보는 고양이, 텔레비전에 비치는 자신 이외의 다른 고양이를 보는 고양이 등과 같은 데리다의 문제의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세키의 고양이는 그림에 그려진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묘한 사태이다. 그 그림은 고양이 자신을 닮지 않고, 고양이 자신과는 달리 보이기 때문에. 어떻게 다를까? 지적해야 할 것은 다음 두 가지 점이다. (2) 하나는 이 그림에 그려진 고양이에게 눈이 없다는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은지, 그저 자고 있는지는 판별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 그 고양이한테는 눈이 없다.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인간은, 고양이의 보는 방식에,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에 관해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는 그저 눈을 그리지 않을 뿐 아니라, 고양이의 눈을 보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3) 두 번째는 고양이의 색을 잘못 그렸다. 즉, 주인의 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주인은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을 볼(see)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나가 보면, 이 ‘보다’라는 것의 문맥에서는 또 하나 인용해야 할 장면이, 2장의 첫머리에 있다. 새해를 맞아 주인은 어떤 친구가 그림으로 그린 연하장 엽서를 받는다. 그의 친구는 화가였으나, 주인은 고양이의 머리도 꼬리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엽서를 본 순간에 자신의 모습을 훌륭하게 그린 그림이라고 이해한다.


주인은 그림엽서의 색깔에는 감복했으나, 그려져 있는 동물의 정체는 모르기에, 아까부터 고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무지 모를 그림엽서라고 생각하면서, 졸린 눈을 품위 있게 뜨고, 천천히 내려다보니 영락없이 자신의 초상화이다. … 누가 봐도 고양이에 다름없다. 조금 안식이 있다면, 고양이 중에서도 다른 고양이가 아니라 나[吾輩]라는 것이 분명히 알기 쉽게 훌륭하게 그려져 있다. 이렇게나 명료한 일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나 고심하느냐 생각하자, 조금 인간이 더 안타깝다.16)

主人は絵はがきの色には感服したが、かいてある動物の正体が分らぬので、さっきから苦心をしたものと見える。そんな分らぬ絵はがきかと思いながら、寝ていた眼を上品になかば開いて、落ちつき払って見ると紛れもない、自分の肖像だ。[…中略…]誰が見たって猫に相違ない。少し眼識のあるものなら、猫のうちでもほかの猫じゃない吾輩である事が判然とわかるように立派にかいてある。このくらい明瞭な事を分らずにかくまで苦心するかと思うと、少し人間が気の毒になる。


 (화가가 아니더라도) 그 인간[사람]은 고양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라면 자신이 기르고 있는 고양이를 인식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고양이는 주인에게 이 그림이, 고양이의 그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지만, 주인은 고양이가 전하려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장면은 인간이 어떤 고양이와 다른 고양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또한 원리적으로 고양이의 성질을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생각할 소지를 마련하고 있다. 고양이의 관점에서 보라고 하는 욕망은, 번번이, 그 불가능성에 의해 이중화된다. 고양이의 관점에서 그리려고 하면, 그 작가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며, 고양이에 대해 맹목이 되어버린다.

 고양이의 눈빛에 끌리는 근대문학의 강한 관심의 곁에는 언제나, 고양이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의 불가능성의 인식이 붙어 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대문학에 있어서, 고양이의 눈빛, 혹은 고양이에 대한 눈빛에, 시각적인 문제가 항상 생기는 까닭이다.

 고양이의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은 곧 고양이에게 그것으로서의 언어를 준다는 것이다. 외부의 관점에서 그려진 고양이와 내부의 관점에서 그려진 고양이를 구별하는 것은 대체로 얘기할 수 있는 고양이와 얘기할 수 없는 고양이의 구분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호프만이나 이폴리트 텐, 소세키의 고양이처럼 고양이가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루이스 캐롤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묘사되는, 항상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검은 아기 고양이도 있다. 데리다도 『동물을 쫓다(動物を追う)』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그 작품 속에서 앨리스는 검은 고양이가 ‘네’를 의미하는가, ‘아니오’를 의미하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는 고양이가 있는 반면, 항상 같은 소리를 발성할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고양이가 있다고 하는 구도가 근대문학 속에는 존재한다.

 이런 문맥 속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에서 고양이를 작품에 등장시키는 방법을 보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레오폴드 블룸이 처음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번째 에피소드 「칼립소」에는 그가 키우는 고양이도 등장한다. 이 네 번째 삽화는 블룸과 그의 고양이를 그린 장면에서 시작되며, 고양이는 블룸에게 먹이를 요구한다. 자유간접화법을 사용함으로써, 조이스는 블룸의 사고를 통해 고양이를 그리고 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블룸의 머리에는 오가는 한편, 그 고양이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저 되풀이해서 ‘야옹’이라고 울 뿐이다. 고양이는 같은 음성을 반복해서 발화한다. 하지만 조이스는 그 ‘야옹’이라는 음을 그때마다 다른 형태로 재현하고, 독자에게는 ‘므크그나오(Mkgnao)’, ‘므그크나오(Mgknao)’, ‘므크르크그나오(Mkrkgnao)’ 등과 같은, 고양이의 주장을 음절로 나타내고, 먹이를 주지 않는 블룸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음의 잇따름이 주어진다. 이리하여 소세키의 고양이의 웅변과도, 앨리스의 검은 고양이처럼 무의미한 같은 음의 반복과도 상이한 줄거리가 마련된다. 이때 고양이는 같은 음을 되풀이하고, 그것을 조금씩 바꾸고, 그녀의 욕구를 전하려고 한다. 고양이는 그 욕구를 전할 때, 일부러 인간의 언어를 줄 필요가 없다. 조이스는 인간에게는 거의 발음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블룸의 고양이는 의인법으로 묘사되는 고양이로부터는 거리가 멀고, 어떤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

 일단 언어나 이해와 같은 문제가 도입되면, 텍스트에는 고양이의 눈빛에 대한 강한 관심도 또한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블룸의 사고 속에 ― “이 녀석은 인간이 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이 녀석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이 녀석은 자신이 이해한 것은 모조리 알고 있다. 원망스러운 것도 있어서, … 이 녀석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탑 정도의 높이? 아니 아냐, 나를 뛰어넘는 것도 할 수 있어.” 바로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블룸은 고양이에게 보여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 그리고 이 순간에, 블룸은, 고양이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고양이에게는 그가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모른다고 인정한다. 그 질문에는 일단 답이 이어지고, 다시 의문으로서 “높은 탑이?”라고 적혀 있다. 블룸이 즉각 부인하는 이 대답 속에는, 동물의 지배에 얽힌 모든 담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높은 탑은 인간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런 생각 자체는 즉각 블룸에 의해 부정된다. 그리고 단순히 부정한다기보다는, “아니 아냐, 나를 뛰어넘는 것도 할 수 있어”라고 덧붙임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서열이 뒤집힐 가능성을 시사하고, 게다가 고양이로부터 [인간에게] 발신되는 것[예를 들어 고양이의 말이나 행동, 눈빛]가, 예상 불가능한, 인간을 앞지르는[추월하는] 듯한 존재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고양이의 눈빛이 다시금 하나의 주제가 된 바로 뒤에, 이번에는 눈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 “그녀는 간절히 바라마지 않은, 부끄러운 듯한 눈을 끔벅이고 이쪽을 바라보며, 불쌍하고 길게 ‘뮤’라고 울고, 그에게 우윳빛 이빨을 보여줬다. 가만히 보면서, 그 검고 가느다랗고 긴 두 눈은 강한 욕망 때문에 점점 가늘어지고, 마침내 두 개의 초록색 보석이 됐다”17)〔U 4: 33-35〕. 보석으로 바뀐 눈은 완전히 대상화되어가지만, 그것은 마치 부끄러움의 의식에 습격당하는 것을 막고, 자꾸자꾸 다가오는 눈빛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양이의 눈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블룸의 관심은 고양이의 수염으로 옮아가고, 이 수염에 의해, 빛이라는 문제 자체의, 본다[視る]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는 테마가 도입된다. ― “고양이의 그것을 자르면, 쥐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일까? 왜 그럴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거야, 첨단이”〔U 4: 40-41〕. 이 마지막 부분에는, 빛을 가져오며, 주위를 보게끔 하는 고양이와 같은, 예로부터의 전통적 울림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가설로 제기하는 것은, 이런 고양이의 눈빛에 대한 강한 관심, 고양이를 바라볼 때 나타나는 시각의 문제, 그리고 빛을 가져오는 존재로서의 고양이는, 일체적인, 동일의 현상이 되고 있다. 고양이가 보는 것을 가능케 하고, 그 시력 자체가 모종의 빛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고양이는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고양이의 눈빛은 때로, 보이지 않는 것, 맹목인 것 등과 같은 문제와 밀접하게 이어진다. 나쓰메 소세키의 눈이 없는 상태에서 그려진 고양이는, 바로 이런 문제의 우의(寓意)라고 할 수 있다.

 조이스 자신도 또한, 기묘한 형태로 고양이와 시각의 문제를 연계시킨다. 『율리시스』에서 조이스는 고양이가 보는 것에 질문을 던지고 그 문제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채로 하고 있다. 앞서 인용했듯이, 블룸은 “이 녀석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몰리 블룸이 이 문제를 변주하여 다룬다. ― “…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까, 저렇게 바라보고 계단의 맨 위에 앉아서 쭉……”〔U 18: 936-38〕.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이 어떻게 고양이에게 보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고양이가 보는 것의 차이가 문제가 된다. 그 때문에 특히 인간을 바라본다는 문제가 아니게 되며, 일반적으로 세계를 쳐다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서는 조이스가 그 자신의 시각에 담고 있던 모종의 불안을 간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양이에게는 인간보다 많은 것은 보이지 않은가, 인간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는지 여부를 묻는 가운데, 마치 조이스가 자기 자신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감각을 표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보려고 생각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감각이다.

 안타깝게도 조이스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의 눈에 생긴 문제는, 1922년(2월 2일)의 『율리시스』 출판 이후, 점점 더 심각해졌다. 1922년 9월에 해리엇 쇼 위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이스는 자신의 눈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리고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시도 덧붙여져 있다.


― 지미 조이스, 지미 조이스, 어디 갔었어?

― 여왕님을 보러[만나러] 런던에 가고 있었어.

― 지미 조이스, 지미 조이스, 뭘 봤는지 들려줄래?

― 유스턴 호텔에서 놋쇠 침대를 봤어.18)


–Jimmy Joyce, Jimmy Joyce, where have you been?

–Iʼve been to London to see the queen –

–Jimmy Joyce, Jimmy Joyce, what saw you, tell?

–I saw a brass bed in the Euston Hotel.


 이 짧은 시가 어떤 영어의 유명한 동요의 개사곡이 아니라면, 나는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이 되고 있는 동요의 가사는 ―


새끼 고양이야, 새끼 고양이야, 어디 갔어?

여왕님을 [직접] 보러 런던에 갔었어.

새끼 고양이야, 새끼 고양이야, 너는 거기서 뭘 했어?

여왕님의 의자 밑에서 새앙쥐를 놀라게 했어.


Pussy cat, pussy cat, where have you been?

I've been to London to look at the Queen.

Pussy cat, pussy cat, what did you do there?

I frightened a little mouse, under the chair.


― 왜냐하면, ‘지미 조이스’는 원래 ‘새끼 고양이야’였다. 조이스는 자신을 고양이에 포개놓고 있는 듯 보인다. 정말로 조이스는 1922년 8월 중반에, 눈의 보양을 위해서도 파리를 거쳐 런던을 여행했다.19) 그러나 일은 계획대로 옮겨지지는 않았고, 그의 건강상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조이스는 아내와 함께 유스턴 호텔에 머물렀으며, 그 이름을 이 시에 등장시킨다.20)여기서 일어나는 원래의 시와는 다른 어구로의 치환은, 고양이와 조이스의 이름을 치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이다. “무엇을 했어?”라는 질문 대신에 “무엇을 봤어?”라는 식으로, ‘보다’를 강조하는 의문으로 치환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언뜻 보기에 그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원래 있던 쥐를 쫓아간다는 능동적 행동은, 어떤 장소에 구애받고 있는 수동성을 포함한 어구로 치환되고 있다. 동요의 원문을 거의 허물어뜨리지 않고 사용되는 곳은 두 번째 행뿐이지만, 그래도 “to look at”에서 “to see”로의 변경을 확인할 수 있다. 앞을 바라보지만, 그가 가로누운 초라한 침대보다 먼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도 말하는 것 같다.

 원래 시의 “여왕님을 이 눈으로 본다”(“to look at the queen”)라는 표현은 유명한 속담 “a cat may look at the queen”(“a cat may look at a king”의 다른 판본에서, “아무리 신분이 미천한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권리가 있다”의 의미)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조이스는 이 표현을 다른 곳에서도 이용하는데, 해리엇 쇼 위버에게 보낸 시에서는, 거의 대부분을 원문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이번에는 그가 보고 싶은 것은 ― 마치 고양이처럼 ― 뭐든지 바라볼 수 있고, 누구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다만 유일한 문제는, 이런 [시각의] 자유가 생기는 것은, 그가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이다. 조이스=고양이는, 고양이의 눈빛을 얻었으나, 그 보상으로 그의 시각을 잃는 것이다.

 이처럼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맹목이라는 것은 조이스의 생애에서 자(서)전적으로 복잡하게 보인다.

 … 슬슬 데리다로 화제를 되돌리기로 하자.



3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고양이라는 동물이 죽음과 눈빛에 관계가 있다고 여기는, 고양이에 얽힌 문학적 담론의 전통을 살펴봤다. 눈빛이든, 죽음이든, 고양이는 그 경계 자체를 문제화하고, 끊임없이 그 경계선을, 삶과 죽음 사이를, 바라보는 것과 바라보이는 것 사이를, 보는 것과 맹목인 것을 횡단한다. 데리다가 굳이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텍스트는 확실히 이 전통을 계승시키고 있다.

 『동물을 쫓다』에서 데리다는 거듭 되풀이하여 눈빛(주시하다)을, 보는 것(pour voir), 그리고 맹목인 것으로 되돌아간다. 그때 데리다는 일반적 혹은 추상적인 의미에서 눈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고양이의, 단독적인 고양이의 눈빛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데리다 앞에 있는 고양이는 어떤 의미에서 맹목[눈이 멀었음]이며, 그녀는 바라보고 있을 뿐, 보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는 말한다. ― “[그 눈빛은] 보는 자의, 환시자(幻視者)의, 혹은 극도로 명민한 장님[盲者]의 눈빛인지도 모른다”[Un regard de voyant, de visionnaire ou dʼaveugle extra-lucide.”](L’animal…, 4/18/18).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맹목이며, 보는 자이다. 보는 자와 환시자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지금 여기가 아니다. 그들은 직접적인 소여의 것의 저편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맹목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환시자와 장님을 동시에 고양이의 눈빛 속에서 찾아내는 위의 인용 대목보다 1페이지 앞에, 그가 이미 예견과 맹목을 관계시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고양이의 눈빛이 아니라, 데리다 자신의 눈빛이다. Cerisy la salle의 연구집회에서의 제목은 얼핏 보면 무작위적 선택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미리 마련된 것 같은 순서로, 말하자면 ‘신의 뜻 = 기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한 뒤, 그 “정체불명의 선견지명을, 맹목이면서도 제대로 함께 형상을 이루는 것이 미리 형상을 이루어가는 과정”[une obscure prévoyance, le procès dʼune aveugle mais sûe préonfiguration dans la configuration,”]에 대해 말한다(L’animal…, 2/17/16-17). 물론 이 “정체불명의 선견지명”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데리다 그 자신인 것이다. 이때 다시 예견과 맹목이 함께 일어나지만, 그것은 보고 있는 고양이 쪽에서가 아니라, 고양이에게 보이고 있는 데리다의 예견과 맹목으로서 함께 일어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 보이는 것과 맹목인 것에 붙어다니는 복잡한 관계 속에는, 어떤 자(서)전적인 기원이 있는 듯이 보인다.

 데리다의 텍스트에서는 다른 사항에서도 많이 일어나지만, 이런 ‘예견’이나 ‘맹목’ 등과 같은 문구는 모두, 그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 지금까지 썼던 다른 텍스트를 암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번 회의 경우에는, 데리다가 맹목과 시각〔vision〕의 문제에 참여한 텍스트, 예를 들어 『장님의 기억』에 눈을 돌리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역시 첫머리에서, 데리다는 맹목이라는 것을 예견에 관계시킨다. ― “장님은 보는 자이며, 때로, 환시자의 직을 맡는 경우가 있다.”21) 예견이라는 행위에서는, 뭔가가 맹목의 차원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보는 자가 지닌 환시적인 시각”에 의해, 보는 자는 “가시의 현재의 건너편”이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22) 그 때문에 보는 자에게 보이는 광경은, 모종의 ‘전망[내다보임]’〔sur-view〕으로서, 너무 보이는 동시에 끝까지 지켜본다. 보는 자에게는 현전하지 않고 비가시의 대상이 보이지만, 현전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가시의 대상도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예견에는 그 내부에서부터 따라다녔던 맹목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경우, 맹목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장님의 기억』에서 데리다는 보이는 것, 시각, (그림의) 소묘에 내부로부터 따라다니는, 비가시의 양태를 추구하고 있다. “그린 선의 수사학”으로 통하는 묘선[描線, 그린 선]의 비가시성이 있으며, 그때 바로 묘선[그린 선]퇴인함[退引, 뒤로 그어짐]으로써 발화나 담론의 공간이 열린다. 발화나 담론은 시각에 대한 ‘근원적 대체보충’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항상, 비가시의 담론의 침투를 받고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 고양이에 얽힌 문학의 담론에서 그렇듯이.

 그러나 [원래 보이는 것, 시각, 소묘에 내재하는 비가시성 이전에] 그 전 단계에서조차, “보이는 것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이질적인”23) 비가시성이, 보이는 것의 핵심에 있는 절대적인 비가시성이, 보이는 것에 따라다니는 맹점이 존재한다. 그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마주로서의 이마주는, 애초의 처음부터 폐허가 될 운명에 있다. “폐허는 처음 응시되는 순간부터 나타나는 이미지에서 생기는 것이다.”24) 그래서 애초의 시작부터, 시각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결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또 두 개의 보완적인 논의를 감안해야 한다. 하나는 “바라보다”〔looking〕와 “보다”〔seeing〕의 구별에 대해, 또 하나는 이미지가 지닌 특수한 성격에 관련된 것이다.

 고양이의 눈빛에 얽힌 문학의 담론을 재축하는 가운데, 나는 “바라보다”와 “보다”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루지 않았으나, 이 재구축의 작업을 끝냈을 때, 『동물을 쫓다』에서 논지를 다시 전개시켰을 때, 그 구별의 필요성이 다시금 명확해진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구별을 다른 텍스트에서 소묘하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특히 『촉각에 대해 : 장-뤽 낭시를 건드리다』의 처음 장에 관심을 겨누고 싶다. 거기서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눈빛(주시)뿐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는 타자에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자의 눈빛은 접근 가능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로부터의 시점(視点)으로부터만 가능할 뿐이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은 고양이의 눈빛을 바라봄으로써 가능해지지만, 그 내부로부터의 시점(視点), 즉 그녀가 바라보는 것이 [이쪽에] 보이게 되려면, 픽션의 장치 없이는 불가능한 채로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고양이에 얽힌 문학의 담론을 재구축하는 가운데 말한 것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데리다는 거기서 멈춰 서지 않는다. 그는 다른 구별을, 이번에는 눈과 눈빛의 구별을 도입한다. 우리가 눈을 볼 때, 그 눈빛은 보이지 않은 채이지만, 그 눈 자체는 색이나 모양 같은 속성을 지닌 대상물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 눈이 아니라, [그 눈이 이쪽에 눈빛을 쏟는] 응시를 보려고 하면, 우리는 맹목이 되며, 보일 터인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이도록 노력하면, 그 행위 고유의 맹목성이 산출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주시하는 것이 도둑맞은 것”이다(le dérobement de ce qui vous regarde).25) 응시와 그 눈이 함께 보인다고 믿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매혹이라는 주문에, 데리다가 부르는 “매혹의 사랑”에 사로잡히며,26) 더 이상 보인다기보다는, 닿는[접촉되는] 것에 가까워진다. 눈은 눈빛과는 다르며, 닿을[접촉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가설은 확실히 데리다가 고양이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에 해당한다. 그에게는 고양이의 응시가 보이고,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래서 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고양이의 눈의 색을 기술하지도 않고, 수염 색깔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고양이는, 그녀의 응시에 의해, 맹목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녀의 비가시성이, 그녀의 비가시성이 눈에 보임으로써, 그녀의 존재는 이미지로, 고양이에 얽힌 문학의 담론의 전통에 의해 중층결정되는 이미지로 바뀌어버린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데리다의 욕실로 들어가는 이 단독적인 고양이가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이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양이는 어디까지나 실재하며, “또한 동시에” 상상적인 듯한 고양이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도, 데리다가 ‘이미지’ 개념에 바친 몇 안 되는 텍스트 중의 하나에 눈을 돌리고 싶다. 「애도의 힘에 의해」라는 제목의 텍스트는 그의 친구 루이 마랑(Louis Marin)이 죽은 후의 1993년에 작성된 것이다.27) 거기서는 ‘보다’와 ‘바라보다’의 문제가, 이미지의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제기된다. 이 텍스트에서 데리다는 이미지에는 ‘존재’로는 환원할 수 없는 힘 또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가능성, 절대적인 ‘가능태(뒤나미스)’이다. ― “죽음만이, 아니 오히려 애도가, 즉 이미 앞자리를 차지한 죽음만이, 이런 절대적인 ‘가능태’ ― 힘, 효력, 그것으로서의 가능성, 그것 없이는 이미지의 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 절대적인 가능태가 들어설 공간을 열 수 있다.”28) 즉, 죽음과 애도만이, 이미지가 지닌 절대적인 가능태에 공간을 열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처음으로 “죽음만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죽음이 아니라 애도가”라고 엄밀한 형태로 바꿔 말한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다, 죽음 “그 자체”라고 말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은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이 아니라, 앞서서 죽음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 즉 애도가, 라고 하는 것이다. 애도는 그러므로 죽음에 앞서 있는 죽음이다. 죽음 “그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으나, 애도는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도는 불가능성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논의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하이데거에 의한 죽음의 ‘이해’에 대한 반론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발전시킨 죽음의 ‘이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나중에 데리다의 『아포리아』에서 전개되지만, 이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애도의 힘에 의해」를 집필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이란, 실존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며, 죽음이란 그때마다 나 자신의 것(Jemeinigkeit = 각자성各自性)이다. 나 이외의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타자의 죽음을, 그것으로서 고유한, 순수한 죽음으로서 경험될 수 없다. 그것 자신의 죽음의 불가능성과의 관계로서, “죽음에 임하는 존재(Sein zum Tode[죽음을 향한 존재])”는 현존재가 그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불가능성의 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 현존재가 자신에 선행하는 방법이다. 이리하여 “죽음에 임하는 존재”는 다른 온갖 가능성의 근거가 되어 현존재의 실존을 지탱하고, “~로서-구조”를 가능케 하는 현존재의 이해를 뒷받침한다. “~로서-구조”란 곧, 현존재에, 있는 것을 ‘무엇인가’로서 보게 하고, 사물을 ‘그것으로서’ 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현존재는, 그것으로서 고유한 의미에서 죽을 수는 없는 동물과는 달리, 그것 자신의 죽음에 대해 순수한 관계를 갖는다고 간주된다. 동물에 있어서 죽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존재 이해를 갖지 못하고, 한편으로 현존재에 있어서 그것 자신의 실존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있는 죽음은, 참된, 그것으로서 고유한 존재 이해의 조건이 된다.

 『아포리아』에서는 현존재의 죽음은, 가장 그것으로서 고유한 것도, 순수한 죽음도, 그때마다 “나만”인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비록 현존재의 죽음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죽는 것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이기를 그치고,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그것으로서 고유한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것은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다. 죽음은 결코 나의 것일 수 없고, 이런 의미에서, 현존재는 동물에 비해 죽음에 대한 더 순수한 관계를 갖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것으로서 현존재에는 가능한 것, 다른 어떤 형식의 존재자나 산 것에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 그러므로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 실제로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라면, 그것은 또한 그것으로서 나타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것으로서만 소멸해버리는 ‘그것으로서’에 대해서 지닌 관계는, 현존재의 실존의 비본래적인 형식에도 본래적인 형식에도 공통되는 특징이며, 또한 모든 양태의 죽음의 경험(그것으로서 고유하게 죽는 것〔Sterben; Dying〕, 소멸하는 것〔Verenden; Perishing〕, 목숨을 잃는 것〔Ableben; Demise〕에도 공통되는 특징이며, 게다가 현존재의 외부에 있는, 온갖 산 것 일반에도 공통되는 특징인 것이다. … 동물도 죽는 것이다29)) 게다가 ”나 자신의 죽음“은 나의 능력이 미치는 영역에는 없다. 때문에 현존재에 있어서, 나 자신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 사이에 순수한 구별은 있을 수 없다. 불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죽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데리다가, 현존재가 자신에 앞서고, 그것 자신의 죽음 ―타자의 죽음이 앞서고,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고유하고 비고유한 죽음을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죽음 ― 예기하는 방법을 재-해석하는 까닭이다. 데리다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


왜냐하면, 반대로, 만일 죽음이 불가능성의 가능성이고, 그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그것으로서의 불가능성이, 그것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가능성인 것이라면, 인간은 혹은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그것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관계를 갖는 것은 결코 할 수 없고, 그저 멸하는 것, 목숨을 잃는 것, 그리고 (더 이상 타자가 아닌) 타자의 죽음에 대해서만 관계를 갖게 된다. 타자의 죽음은 이렇게 다시 ‘시작’의 죽음에, 항상 시작으로서의 죽음이 된다. … 타자의 죽음, ‘나’ 속에 있는 타자의 죽음은, 근원적으로 ‘나의 죽음’이라는 연사(連辞) 속에서 명명되는 유일한 죽음이다. 이것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결과에도 불구하고.30)


 이처럼 애도는 죽음에 관한 데리다의 텍스트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타자의 죽음의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애도는, 나 자신의 죽음에 선행할 뿐 아니라, 나에 앞서서, 나의 ‘자아’에도 선행한다. 이미지의 힘의 기반은, 앞서서 각인된 죽음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렇게 근원적인 애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미지가 나타나려면, 그 사람의 죽음[落命, 목숨을 잃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타자의 죽음 그 자체가 이미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이미지는, 가능한 타자의 죽음을 각인해버리기 때문에. 데리다는 어떤 육체가 이미지로 변용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루이 마랑의 개념의 하나인 “상상적 변용”을 다루고 있다. 마랑의 이론에서는, 어떤 육체를 이미지로 변용시킨다. “이 기층적인 힘은, 상상적 변용의 혜택을 입고, 상상적 변용의 결과로서 생긴다. 그 기초는 무엇보다 우선 상상적이다. 그 힘은 원래 시작부터 상상적이고, 환상적이다.”31) 왜 데리다는 여기서 “환상적”(phantasmatic)이라고 말하는 걸까? 어쩌면 여기서의 환상은, 신체가 이미 그런 바의 이미지를 가리킬 것이다. 환상의 문제는, 고양이의 공형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중요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건드리고 싶다.

 그러나 『아포리아』에서의 이미지의 분석에는, 이미지에 대해 말했던 것과, 고양이와 맹목에 대해 말했던 것을 관련시킬 수 있는 대목이 갑자기 나타난다. 텍스트의 어떤 대목에서, 데리다는 말한다. ― “우리에게 이미지는, 그것이 보이고 있는 것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32)[“Lʼimage est voyante, plus que visible. Lʼimage nous regarde”]. 일독하면 이 두 개의 문장은 놀라운 것으로 보이지만, 어느 쪽의 문장도, 이미지와 애도의 관계의 개념적 발전과 완전히 조화하고 있는 것이다. 애도는 타자인 자가 우리에 앞서서 각인되는 방법이다. 애도는 우리 자신의 죽어야 할 운명과의 관계로서도 또한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의 힘은, 우리 자신의 비-역능의 일부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앞서서 각인될 수 없는 것의] 불가능성의 일부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인데, 애도가 내미는[제출하는] 목적지를 보여주라고 말할 때, 애도는 언뜻 보면 우리로부터 타자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방향은 역방향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 자신 속에 들어서고,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은 타자이다. 그래서 만일 데리다가 말하듯이, 이미지의 힘이 절대적인 가능태라면, 이미지가 우리에게 제출되고[내밀어지고] 있으며, [맞은편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맞은편에서] 우리를 횡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애도에 있어서 애도하는[슬퍼하는] 사람은, 죽은 자에 의해, 죽은 자의 이미지에 의해 바라보이고 있는 이미지로 전환된 그/녀 자신인 것이다. 데리다는 이 문맥에서 거울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나, 여기서는 고양이와 거울, 그리고 여성 사이에 생기는 복잡함에도 비슷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타자를 바라볼 때,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게 된다. 타자가 이미 내 안에 있고, 나를 변용시키기 때문에. 타자의 눈빛은 타자로부터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은 내 안에 있다. 타자는 이렇게 실재하는 타자인 동시에 환상적인 타자이다. ― 타자는 내 앞에 앞서서, 단독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 안에 있으며, 나의 시선(주시)을 보내는[내미는], 나의 애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바라보이고 있다, 그렇게 내가 말했다. 루이 마랑에 따르면, 그때마다, 단독적으로. 그가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 속에서[En nous]. 그가 내 안에서 바라본다. [“Il regarde en nous”] … 그때마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 우리가 그러한 바의 사람을 향해 ―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 그 사람은 전적인 타자이며, 무한한 타자이다.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죽음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그에게 믿음을 두고, 그를 넘어서고, 그를 이 무한의 이타성[他性] 속에서 멀리해 왔다. … 그것은 과잉과 비대칭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루이 마랑이 우리에게 쏟은 눈빛을 받는다[“nous portons en nous-même le regard que Louis Marin porte sur nous”].”33) 타자의 죽음에 의해서, 내 속에서 타자의 이타성[他性]이 숨겨진다[제공된다]. 그것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자기로부터 떼어놓아진다. 일반적인 타자가 있는 동시에, 타자는 그때마다 단독적이기도 하다. 무한의 이타성[他性]은 그/녀의 단독성을, 이 개개의 구체적인 존재나 존재자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타성[他性]과 단독성의 관계를 통해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에, 이타성[他性]은, 단독성의 개념화의 한 방법이 되며, 그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모종의 개념으로 지양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애도의 힘에 대해」와 『동물을 쫓다』 같은 텍스트 사이의 차이의 하나인데, 후자에 있어서 데리다는 “plus autre que tout autre”이라는 문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plus autre que tout autre”란 무슨 의미일까. 물론 이것을, 데이비드 윌스를 좇아, “어떤 것보다도 가장”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적인 다른 것 이상으로 다름”과 같이〔『動物を追う』 31頁〕. 그러나 만약 “전적인 타자의 로고스”가 충분하지 않은 점에 대해, 데리다의 설명 의무를 고려하고 있다면(“un autre sans altérité”117/161), 우리가 동물에 대해 생각하고, 타자성 없는 타자로서의 동물에 대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경우에는, 우리는 다른 선택지의 가능성을, 즉 “plus autre que tout autre”라는 문구를 “전적인 타자 이상의”라고 번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애도는 앞서 말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에게도 향하고 있다. 이미지의 힘은 일방향적이지만, 동시에 ― 이때야말로 환상이 나타나는 시간인데 ― 타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라는 연사(連辞)에 있어서 명명되는 유일한 죽음이며, 그리하여 “죽음의 저편에 있는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해진다. 이처럼 살아 있고, 내게는, 나 자신의 죽음이 보이는, 이렇게 살아 있고, 내게는, 나 자신의 죽은 육체가, 나의 장례식이 ‘보인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그의 세미나의 마지막에서 장대한 분석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로 이 환상이다. 거기서 그는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아니, 오히려 나의 사체를 상상하는” 시도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과 상상하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상정되는 구별”을 등한시하고, 죽음을 생각하면, 거기에 상상과 환상이 은연중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34) 상상과 환상은, 〔단순한 자기촉발이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 한〕 “자기-이타-촉발”(auto-hetero-affective, 自己―異他―触発)을 전제하고 있으며, 데리다가 말하듯이 “우리는 ‘자기-이타-촉발’의 차원 없이는 환상을 생각할 수 없다.”35) 본고에서는 이런 ‘자기-이타-촉발’을, 눈빛에서, 이미지에서, 애도에서 봤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우리 속에 존재하는 타자를 통해 맺어지는데, 이것을 우리에게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데리다가 특히 주안을 두는 환상은, 시신[遺体]에 생길 수 있는 환상이다. 우리의 문화에 있어서의 실제적으로 두 가지 방법, 즉 매장과 화장이다.



4

 모리스 블랑쇼〔1907-2003〕가 죽은 것은 데리다가 세미나에서 위의 테마에 대해 그의 사색을 전개시킨 때였다. 데리다는 블랑쇼의 화장에 입회하고, 조사(悼辞)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서거 이틀 후에는 블랑쇼에 관한 긴 세미나를 했다(데리다는 그 내용을 나중에 개최된 강연에서 발표했다.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이 세미나의 종반부에서 블랑쇼에 대해 논의하는 가운데, 데리다가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의 초판에서부터 길게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 속에서는, 고양이의 환상과 눈빛의 환상, 더욱이 죽음의 환상과 자기 자신의 매장의 환상 등과 같은 형상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설 속에서, 한밤중에 주인공 토마가 외출했을 때,36) 그를 본 유일한 자는 장님 같은 고양이였다. 그 고양이가 그의 뒤를 따라다닌다.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토마 뒤를 쫓아다니는 가운데, 고양이는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고, 그 몸은 인간의 몸으로, 고양이 자신도 모르는 목소리가 고양이의 안쪽에서 말하기 시작하고, 고양이의 영혼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과정에 대해, 이어서 고양이 자신을 다시 떠밀어내고, 고양이 자신이 횡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허공에 대한 감상을 말한다. 고양이는 변신을 계속하면서, 이제 “고등한 고양이”가 됐다고 고양이는 말한다. 그 고양이 자신이 거대한 머리로, 고양이 자신한테 시선을 보내는 거대한 머리로, 시선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 눈빛으로 계속 바뀐다고 말한다. 눈빛이 고양이 그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고양이 자신에 의해 “나는 죽는다, 죽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양이는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다시금 지면에 쓰러진 불상한 고양이가 된다. 그리고 이 고양이는 토마를 마지막으로 슬쩍 쳐다본다. 토마는 맨손으로 땅에 무덤을 파고, 그를 또한 “고등한 고양이”라고 부른다. 고양이가 독백을 끝내자, 장면은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토마의 묘사로 옮겨지고, 구멍을 다 판 그는 그 무덤에 들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그 자신의 이미지가, 그의 분신이 되고, 바로 그 자신의 외형을 가진 무덤의 허무에 의해, 그는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사실 그는 죽었고, 동시에 또한 죽음의 현실로부터 떠밀려났다”(菅野昭正訳, 131頁).37) 그는 어찌어찌해서 무덤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지만, 마침내는 죽는 것도 소생한 것도 깨닫고, 무덤에서 벗어난다. “그림에 그려진 채색된 미라”처럼, 마치 라자로ラザロ인 것처럼.

 데리다는 세미나에서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의 “내가 죽기”에는 “터무니없는 환상〔phantasm〕”이 있다고 말하고, 이 사례에는 “동물되기”, “자(서)전적 동물되기”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그의 작품에서 인용한 장대한 구절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지 않고, 인용 후에는 하이데거의 “지배”〔walten〕를 다루고, 그것을 블랑쇼의 “중성적인 것”〔neuter〕이라는 문제에 접속시키고 있다.

 이때 고양이에 대해, 혹은 고양이가 맹목인 것에 대해, 그리고 불가능한 죽음이 반복되는 장면에 대해, 더 나아가 고양이와 인간이 서로 거울 사본鏡写し[거울처럼 그대로 복제한 것]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해, 데리다로부터 조금도 언급이 없는 것은 꽤 기묘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침묵은, 블랑쇼의 소설의 장면이, 고양이와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해 데리다가 말해야 했던 모든 것에 있어서 계열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왜 데리다는 한마디로 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두 개의 원고(세미나판과 강연판)을 주의깊게 비교하면, 독자는 세 가지 사항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는 문장에 가해진 작은 변경점, 또한 “강연판 원고”에서 블랑쇼의 소설로부터 갑자기 ‘지배’와 중성적인 것으로 이행하기 전에 아주 짧은 구절이 추가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블랑쇼의 텍스트를 인용할 때, 어떤 부분을 여러 차례 생략하고 있는 점이다.

 (1) 데리다는 그의 세미나에서, 블랑쇼의 소설 장면을 할 때, 그 소설에는 들뢰즈라면 “동물되기”라고도 부르는 것에 관한 “엄청난 환상”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여기에는 이야기꾼이라는 ‘동물되기’, 이야기꾼이라는 ‘자(서)전적 동물되기’에 대해 설명한다.38) 블랑쇼의 강연에서 읽혀진 세미나 원고에는, 약간의 변경이 가해진다. ― 이야기꾼이라는 ‘동물되기’, 들뢰즈라면 그렇게 부를 것인데, 나로서는 ‘자(서)전적 동물되기’, 그렇게 부르고 싶다.”39) 주목해야 할 것은, 데리다는 분명히 그의 사상인 자(서)전적 동물의 개념으로 얘기를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게 부르고 싶다[dirait je pour ma part]”고 데리다는 말한다. 즉, 이 개념은 데리다 자신이 발명한 것이다. 게다가 “강연판 원고”에서는 “이야기꾼”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어 있다. 데리다는 여기서, 어떤 읽기의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즉, 블랑쇼의 이야기를 해석할 때, 데리다 자신의 ‘나’를 도입함으로써, 그것을 그 자신의 ― 자(서)전적으로 ― “동물되기”와 연관시키는 읽기를. 데리다는 “자(서)전적 동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자(서)전적 동물이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맹목의 고양이가 나오는 장면에 자(서)전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당히 애매한 형태로 데리다가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블랑쇼의 고양이가 데리다에게 있어서 자(서)전적인 고양이가 된 것처럼.

 (2) 강연판 원고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지배’의 문제에 대해 되풀이하여 논지를 전개시킨다. 이 개념은 그의 세미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련을 갖는데, 그런 전개를 행하는 이유는 블랑쇼에 관한 강연에서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이 강연이 행해질 때〕 이 이행에 이유를 부여하기 위해 몇 줄의 문장을 보태고, “그것으로서”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인간과 동물의 차이의 기원으로서의 “그것으로서”이며, 그것이 있어서야 비로소, 그 차이가 소설의 장면과 이어지는 것이다.40) 한 가지는 맹목의 고양이와 그의 무덤을 파는 토마의 관계가, 또한 그 한편에서는 “그것으로서”의 문제가 있고, 이것들은 모두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데리다 자신은 그 연결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3) 세 번째의 변경에 대해 말하면, 데리다는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고양이에 얽힌 에피소드를 인용할 때, 세 개의 단락을 생략하고 있다. 실제로, 이 세 개의 단락은 모두 고양이의 눈과 눈빛에 관련된 것이다. 데리다는 세미나와 강연 둘 다의 경우에도, 이 단락의 인용을 생략하고 있다. 처음 생략된 구절은, 고양이의 눈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며, “한쪽 눈은 닫혀 있고, 다른 쪽 눈은 피에 젖어 있다”고 하며, 그 두 눈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하는 감각을 얻었다”고 적혀 있다.41) 두 번째의 생략된 구절에서는, 고양이가 뛰어넘을 수 없는 허무에 사로잡힌 감각을 고양이가 이야기하며, 미리 예건하는 능력을 잃은 것이 그려져 있다. ― “이리하여 이제 나는, 눈빛 없는 존재이다”[“Et maintenant je suis un être sans regard”].42) 그리고 고양이가 그 혀/언어가 맹목(의 사람의 것)이라는 목소리도 또한 들려온다. ― “langue dʼaveugle.” 세 번째의 생략된 구절은, 고양이 자신이 거대한 머리가 된 것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그 고양이가 머리라기보다는 눈빛이 됐다고 말하는 장면이다[“au lieu dʼun tête, semble nʼêtre quʼun regard”].43) 어떤 경우든, 눈빛과 그 시선이 문제가 되며, 어떤 경우든, 어떤 시점(視点)에서, 불가피하게 허구적이 되는 고양이의 시점(視点)에서, 보이는 것과 맹목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블랑쇼의 고양이의 “자(서)전되기”와 눈빛과 맹목이 강조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관계에 대해서 거의 정신분석적인 독해를 가하고 싶은 부분이다. 아마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그것으로서”의 문제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블랑쇼에 관한 데리다의 텍스트에 있어서,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두 번째의 변경점의 기초가 되는 “그것으로서”의 문제이다.

 그것이 하이데거에 대한 언급임은 명백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에 그것으로서 고유한 것은, 죽음과의 관계이며,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과의 관계이다. 현존재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을 구성하는 것은, 이 관계에 있어서이다. 이런 가능성이 ‘이해’(Verstehen)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현존재의 세 가지 결정적인 현실적 요소 중 하나. 남은 두 개는 정태성情態性/심경〔state of mind〕과 퇴락〔falling〕이다). “~로서-구조”, 또는 “그것으로서”의 구조를 ‘봄’〔Sight, 視〕이나 ‘예견’〔Foresight〕에 결부시키는 것이 ‘이해’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모든 ‘봄’[alle Sicht]이 원래 뜻에서는 이해에도 기초한”44) 것이지만(細谷訳, 319頁),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봄’은 가능성을 기투하는 것이며, 우리의 ‘이해’라는 기반 위에 존재하는 것을 해석하는 것을 돕는다. 이런 의미에서 ‘봄’은 “그것으로서”와 관련을 가진다. ‘봄’은 ‘그것으로서’의 사물에 접근할 수 있는 현존재의 가능성을 기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봄’은 존재의 ‘개시성’(Erschlossenheit)과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가능성의 기투는 “~으로서-구조”를, 세 개의 서로 얽힌 “선-구조” ― ‘앞서 가짐(Vorhabe), 앞서 봄(Vorsicht), 앞서 잡음(Vorgriff)의 관계로 연결시킨다. 예견 ― 앞서 가짐과 앞서[先] 개념을 잇는 중간항 ― 은 앞서서 봄으로써, “이해되는 것을 해석 가능한 것으로서 고정시키고”, “내 것으로 하는 행위[Zueigunung45)]〔고유화〕”를 선도한다. 이리하여 현존재는 “그것으로서”를 가진 목적으로, 예견적으로 사항의 점유와 파악을 선도한다.

 블랑쇼의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에서의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이렇게 ‘이해’라는 개념의 이해에 있어서 이뤄진,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초기의 주석으로 읽을 수 있다. 블랑쇼의 텍스트에서는 “그것으로서”의 죽음에 접근할 방도는 없다. 토마는 “죽음의 현실로부터 떠밀려지고”, 단순히 떠밀려난다/거부된다고 할 뿐 아니라, 그것은, 죽어 있는 “~로서”의 그 자신의 이미지이며, 토마에 죽음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치 고양이에 의해 “앞서서” 반복되듯이, 토마의 섬뜩한[어쩐지 기분 나쁜, 편치 않은] 경험이 반복되는 모양이다. 고양이의 독백은 실제로, 토마에게 일어나는 것의 예언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예견이 예언이 되며, ‘봄’은 언어가 된다. 그리고 이 언어는 맹목이며, 장님의 언어가 된다. 죽음에 관해서 그것 자신이 맹목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인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예견은, 현재에 대한 맹목과 결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환상이라는 맹목과도 결부된다. 우리는 그 환상 속에서 우리 자신을,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해 접근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나의 관계는, 내 속에 이미 있는 타자의 존재방식에 근거하고 있다. 데리다는 원래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시점(時点)부터, “타자와의 관계나 죽음과의 관계는, 동일한 개구부이다”46)고 말했다. 타자, 예를 들어 동물, 예를 들어 고양이는, 나 자신과 더불어 있는 내게, 나의 종언이라는 심연에 있는 나와 대면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이, “어떤 바닥없는 눈빛에 못지않게, ‘동물의’라고 말해지는 이 눈빛은, 타자의 눈으로서, 인간적인 것의 심연의 한계를 내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비인간적 또는 몰인간적인 것, 인간의 종언의 무수함들”을 주기 때문이다(L’animal…, 30/12/33).

 『동물을 쫓다』에서 데리다가 강조한 것은, 나를 열고, 내 속에 죽음을 기입하는 것은, 추상적인,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타자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때마다 유일한 타자, 그러므로 ‘이타성[他性]’조차도 아니고, 그저 이 혹은 저, 단독적인 것에 대한 관계는,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내게 모종의 일반적인 것으로 아직 잔존해 있는 듯한(다른 고양이들이나 다른 국어나 언어, 다른 철학자들 등과 같은) 다른 온갖 단독적인 것을, 그들을 단독적인 것으로 하지 않은 희생을 나더러 치르게 한다고 해서, 그 관계는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윤리적인 것으로부터 종교적인 것으로 이행할 때,47) 즉 그가 신앙의 도약을 했을 때의, 데리다에 의한 키에르케고르 해석법이다. 그 신앙의 도약은, 이 프랑스의 철학자의 경우에는, 신의 전능성이나 초월적인 신과는 결부되지 않고, 오히려 약하고, 여리고, 상처 받기 쉽고, 그때마다 개개의 존재이며, 경험적으로, 그리고 자(서)전적으로도 나를 각인해 온 것과 결부됐다. 이것은 즉 비오스〔사회적∙정치적 삶〕가, 개개인의 ‘생명’ 또는 ‘생활’이, ‘자기[自]’ 속에, ‘자기성’ 속에, 죽음을, 타자를 ‘기입한다’(graphein)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자(서)전에는, ‘자-타-사-생-기’(auto-hetero-thanato-bio-graphy, 自―他―死―生―記)가 동시적으로 혼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데리다가 “산 것들의 또 다른 사고에, 산 것들의, 이것들의 자기성에 대한, 이것들의 autos에 대한 … 관계”를 강조하는 점을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L’animal…, 173/126/234). 내가 보기에, 눈빛이 데리다를 가로지름으로써, 동물이나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질문, 그리고 희생과 죽음의 물음이 갑작스레 열리는 곳으로 그를 유도한 것은 ― 거의 대부분을 저 환상적이고 실재하는 고양이가 맡고 있지만 ― 그래도 역시 동시에, 그 고양이 이전에 존재한 고양이, 그 고양이를 쫓고 있는 고양이들, 즉 고양이를 그리는 문학의 담론을 모두 통틀어, 저 전통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고양이의 눈빛 ― 우리는 맹목이 되는 바의 눈빛 ― 은 우리의 시야로부터 벗어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도덕성과 맺고 있는 관계의 맹점이 되고 있는 장소에, 우리의 단독적인 것을 제출한다. 그리고 이 눈빛은, 우리에게 내던져져 있는 동시에, 우리로부터 환상적으로 발생하는 이 눈빛은, 그때마다 단독적이다. 절대적으로 개개의, 근원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이(tode ti), 욕실의 이 고양이가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환상의 여백을 연다. 결코 개념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환상에 있어서 열려진 여백을. 고양이가 아니다, 고양이가 아닌 것이다. 전적인 타자도 아니고, 어쩌면 타자조차도 아니다. 우리가 만난 단독성은, 하나의/한 명의 타자라고조차 부르지 마라. 그것이 나와 만난 순간, 그것이 나를 바라보고, 내가 보이는 순간, 그것은 순식간에 나를 건드리고, 나를 가로지르며, 내게 속하지 않는 나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단독적으로 어울린다, 서로의 장소를 교환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도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를.



〔범례〕

1. 본고는 2014년 12월 3일에 首都大学東京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에서 읽은 원고 “The Cat, The Look, andDeath: (Variation on a Derridean Theme)”의 번역이다.

2. 본고에서 참조되는 데리다의 주요 텍스트는 원전 프랑스어판으로서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Paris: Galilée, 2006; L’animal…,로 약칭), 일본어판으로서 『動物を追う、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鵜飼哲訳, 筑摩書房, 2014 年;『動物を追う』로 약칭), 영어판 Jacques Derrida,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trans. David Wills(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 The Animal…,로 약칭)을 각각 저본으로 삼고, 인용할 때에는 필요할 경우에는 프랑스어/영어/일본어로 기재했다.

3. 본문 안의 [ ]는 저자가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Paris: Galilée, 2006.에서 원문의 인용을 할 때 사용했다.

4. 본문 안의 “ ”는 저자의 인용을, ( )은 저자의 원어표기 및 보충을, 〔 〕는 역자에 의한 주석을 나타낸다. 저자 ダリン・テネフ의 원문 안에서 이탤릭으로 강조된 대목은 굵은 글씨로 나타냈다.


〔인용・참고문헌〕

본고의 번역에 있어서는 이하의 문헌을 참조했다. 작품으로부터의 인용은, 특히 거절당하지 않은 한 원저 뒤에 적은 ( ) 안의 번역서를 사용하고, 적절하게 필요할 경우에만 역자가 기존 번역에 약간의 변경을 가했고 이를 각주에 적었다.


Blanchot, Maurice. Thomas l’bscur. Première version, 1941, Paris: Gallimard, 2005.(「謎の男トマ」菅野昭正訳、『ベケット・ブランショ』<筑摩世界文学体系82 >所収、筑摩書房、1982 年、121-65 頁)

Derrida, Jacques. De la grammatologie, Paris: Seuil, 1967. ; English translation : Of grammatology, trans. G. Ch. Spivak.(『グラマトロジーについて』(上・下)足立和浩訳、現代思潮社、1972 年)

_______, Mémoires d’veugle. L’utoportrait et autres ruines.(『盲者の記憶―自画像およびその他の廃墟』みすず書房、鵜飼哲訳、1998 年)

_______, Aporias, trans. Thomas Dutoit.(『アポリア 死す―「眞理の諸限界」を「で/相」待―期する』港道隆訳、2000 年)

_______, Donner la mort, Paris: Galilée, 1999; The Gift of Death(『死を与える』廣瀬浩司・林好雄訳、ちくま学芸文庫、2004 年)

_______, Le toucher  English translation : Jacques Derrida, On Touching.( 『触覚、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に触れる』松葉祥一・榊原達哉ほか訳、青土社、2006 年)

_______, L’animal que donc je suis.(『動物を追う、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鵜飼哲訳、筑摩書房、2014 年)

Heidegger, Martin. Sein und Zeit. ; English translation: Being and Time, trans. John Macquarrie & Edward Robinson.(『存在と時間』(上・下)細谷貞雄、筑摩書房、1994 年)


〔著者紹介〕

다린 테네브ダリン・テネフ(Darin Tenev)는 비교문학과 서구현대사상을 주전공으로 하며, 현재는 소피아대학 조교수. 저작으로 조이스와 엘리엇, 불가리아 시인 아타나스 달체프의 문학작품, 볼프강 이자,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론, 후설, 하이데거, 장-뤽 낭시 등의 존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나 라캉의 정신분석 등을 비교문학적으로 논한 문학원론 『허구와 이미지, 모델』(Фикция и образ. Модели [Fiction and Image. Models], Пловдив: Жанет 45 [Plovdiv: Zhanet 45], 2012), 가능성이나 증여, 상상력 등과 같은 주제로부터의 데리다론 『탈선 : 자크 데리다론』(Отклонения. Опити върху Жак Дерида [Digressions. Essays on Jacques Derrida], София: Изток-Запад [Sofia: Iztok-Zapad], 2013)이 있다. 일역본으로서 「애도된 영토 : 일본 아방가르드 잡지 『아』의 경우喪われる領土――日本アヴァンギャルド雑誌『亞』の場合」(小川寛大訳・高木信編『日本文学からの批評理論――亡霊・想起・記憶』笠間書院, 2014년)가 있다. 또한 テネフ 씨는 그동안 萩原朔太郎, 高村光太郎, 谷川俊太郎 등의 시인과, 西田幾多郎와 三木清 등의 철학자의 작품의 불가리아어 번역을 했다.


Darin Tenev, “The Cat, the Look, and Death”. Reprinted by permission of Darin Tenev.

訳=南谷奉良(一橋大学博士課程)


1)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Paris: Galilée, 2006. 본고에서는 이하 원문 프랑스어판을 L’animal…이라고 표기하고, 영어판에는 Jacques Derrida,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trans. David Will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을, 일본어판에는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動物を追う、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鵜飼哲訳, 筑摩書房, 2014년을 참고했으며, 인용 때에는 쪽수를 프랑스어/영어/일본어의 순서로 빗금과 더불어 표기한다.

2) 아마 고양이에 얽힌 망라적인 계보학 연구를 한 최초의 시도에는 일찍이 1920년대 초반에 집필된 Carl van Vechten, The Tiger in the House, New York: Alfred A. Knopf, 1968 (1920)가 있다. 유익한 책이지만, 꽤 나이브한 필치로 써져 있는 점은 아쉽다. 그렇지만 고양이에 관한 연구서로서는 초석이 되는 저작이다.

3)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Paris: Galilée, 1999, p. 101; Derrida, The Gift of Death, trans. David Wills, Chicago: U of Chicago Press, 1995, p. 71. 1990년에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이 텍스트에서 이미 고양이가 등장하고 있다.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In: L’thique du don. Colloque de Royaumont décembre, Paris: Métailié-Transition, 1992, p. 70.를 참조.

4) “리조랑지스(Ris-Orangis)의 묘지 안내도에는 생전에 그가 길렀던 모든 고양이의 무덤이 있다”(Benoît Peeters, Derrida, Paris: Flammarion, 2010, p. 518).

5) Jacques Derrida, Glas, Paris: Galilée, 1974 ;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Glas, trans. John P. Leavey, Jr., Richard Rand,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6.

6) Ibid., p. 8bi for the French, p. 2bi for the English edition.

7) [옮긴이] 일본어에서 ‘宙吊りにする[글자 그대로는 <허공에 매달다>]’, ‘宙吊りにされる[글자 그대로는 <허공에 매달리다>]’는 대체로 영어의 suspend, 즉 ‘중지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렇지 않은 경우도 제법 있는데, 여기서도 그렇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구 그대로 번역해야 했다. 물론 영어 원문을 보면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8) Catherine Malabou, Jacques Derrida, Counterpath. Travelling with Jacques Derrida, trans. D. Wills, Stanford :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p.56에는 “And, as every morning, with only a cat for a witness. Here his name is Settembrino.”라는 기술이 있다.

9) Jacques Derrida, « À force de deuil »,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Paris: Galilée, 2003, pp.177-204;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By Force of Mourning”, The Work of Mourning, edited and translated by Pascale-Anne Brault and Michael Naas,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pp.139-64.

10) Miglena Nikolchina, Devi, ritsari, kralitsi (Maidens, Knights, and Queens), Plovdiv: Janet 45, 2014를 참조.

11) James Bowen & Garry Jenkins, My Name is Bob, London: Red Fox Picture Books, 2014.

12) E. T. A. 호프만,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 양장본(The Life and Opinions of the Tomcat Murr)』, 김선형 옮김, 경남대학교출판부, 2010.

13) Hippolyte Taine, Vie et Opinions Politiques d’un Chat, 1858.

14) 夏目漱石, 『吾輩は猫である』, 東京, 角川文庫, 1972.

15) 同上16-17頁.

16) 同上26頁.

17) James Joyce, Ulysses. Hans Walter Gabler, ed. (Random House: New York, 1982)〔이하 본문 안에서 『율리시스』를 인용할 때에는 약호 U에 이어 삽화 수와 행수를 적는다.〕

18) James Joyce, Poems and Shorter Writings, London: Faber & Faber, 1991, p. 128.

19) Richard Ellmann, James Joyce, Oxford: Oxford UP, 1983, pp. 536-37.

20) ibid, p. 536.

21) Jacques Derrida, Memoirs of the Blind, op.cit., p. 2.

22) Ibid., p. 47.

23) Ibid., p. 51.

24) Ibid., p. 68.

25) Jacques Derrida, Memoirs of the Blind, op.cit., p. 65. (Jacques Derrida, Mémoires d’aveugle. L’autoportrait et autres ruines, Louvre,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1990, p. 69.)

26) Jacques Derrida, Le toucher, op. cit., p.13; English translation: Jacques Derrida, On Touching, op. cit., p.3.

27) 다음의 문헌을 참조. Jacques Derrida, « À force de deuil », Chaque fois unique, la fin du monde, Paris: Galilée, 2003, pp. 177-204 ; English translation : Jacques Derrida, « By Force of Mourning », The Work of Mourning, Chicago : U of Chicago Press, pp. 139-63.

28) Ibid., p. 182 for the French; p. 146 for the English text.

29) Jacques Derrida, Aporias, trans. Thomas Dutoi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75.

30) Ibid., p. 76.

31) Ibid., p. 188 for the French; p. 151 for the English text.

32) Ibid., p. 199 for the French; p. 160 for the English text.

33) Ibid., p. 200 for the French; p. 161 for the English text.

34) 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Vol.II, op.cit., p. 176.

35) Ibid., p. 244.

36) 『수수께끼의 사람 토마』의 원저에는 초판 :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Première version, 1941, Paris: Gallimard, 2005, pp. 72-79; 2판 :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Paris: Gallimard, 1950, pp. 34-42을 사용했다. 영어판은 2판만 입수 가능하며, Maurice Blanchot, Thomas the Obscure, trans. Robert Lamberton, The Station Hill Blanchot Reader, ed. Georg Quasha, Station Hill: Barrytown, 1999, pp. 71-75을 참조. 〔일역본으로는 門間広明訳『謎の男トマ 一九四一年初版』(叢書・エクリチュールの冒険)月曜社、2014년이 있다.〕

37) Ibid., pp. 77-78 for the first edition; p. 40 for the second edition; pp. 73-74 for the English translation.

38) 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Vol.II, op.cit., p. 266.

39) Jacques Derrida, Parages, Paris: Galilée, 2003, p. 295.

40) Ibid., p. 299.

41) Maurice Blanchot, Thomas l’obscur. Première version, 1941, op. cit., p. 73. 이 대목은 2판에서는 없어졌다.

42) Ibid., p. 74. (Lamberton translates: “And now I am a dull-eyed creature.”, p. 71.)

43) ibid., p. 75.

44)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1986 (1927), S. 147; English translation: 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 John Macquarrie & Edward Robinson, New York: Harper Collins, 1962, p. 187.

45) Heidegger, Sein un Zeit, op.cit., S. 150; Being and Time, op. cit., p. 191.

46) 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Paris: Seuil, 1967, p. 265. English translation : Of grammatology, trans. G. Ch. Spivak, Baltimore and London : John Hopkins UP, 1997, p. 187.

47)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op. cit. (The Gift of Death, op. cit.)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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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2)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이 글은 자크 데리다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좌담회의 기록으로일본의 사상』 2014년 12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원래 각주는 없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헌 등은 각주로 옮겼습니다

 


II. 동물론이 지닌 의미

무엇을 지향[목표]하는가

미야자키 : 지금의 번역론부터 동물론으로 화제를 연결시키고 싶습니다. 우카이 씨는 앞서 언급한 L’animal que donc je suis을 번역하셨는데, 이것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언어론도 번역론도 아닙니다. 데리다의 작업 속에는 다른 페이스의 것으로, 생명이라는 언어를 넘어선 리얼한 것에 대한 데리다의 직접적인 접근법이 보이는 것이라며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번역하신 우카이 씨께서 전체의 인상을 포함해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카이 : 이 책은 19977월에 스리지 라 살(Cerisy-la-salle)에서 열린 콜로퀴에서 한 강연인 자서전적 동물[自伝的動物]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하지만 텍스트 상의 문제가 있어서, 콜로퀴의 보고서로서 출판된 책[각주:1]에는 실제로 말한 것 외에 성서해석에 관한, 강연에서는 생략된 부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콜로퀴의 마지막 날, 요청(request)에 응해 즉흥적으로 한 하이데거론도 있습니다. 이번에 번역한 책은 이것들을 합쳐서 저자의 사후에 출판된 하이브드리한 책입니다.

  미야자키 씨는 언어론에서 동물론으로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특히 서양에서는 언어를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전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언어론은 1960년대부터 이 전통의 인간중심주의적인 구조를 문제 삼았습니다. 에크리튀르(기록, écriture)의 사유도 이로부터 성장해 온 셈이기에, 데리다 자신의 이 책 속에도 동물은 항상 계속해서 자신의 물음이었다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주로 5명의 철학자이 동물에 대해 한 언급이 분석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 칸트, 하이데거, 레비나스, 라캉입니다. 번역하면서 느꼈습니다만, 이런 라인업을 어떤 원근법으로 본다면, 데리다의 사유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선택됐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에 관해서는 다소 유보가 필요한데요, [데카르트가] 모든 점에서 자신의 대극에 있는 철학자라고 반드시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어떤 가까움조차 느끼고 있었던 거겠죠. 이들 사상가들은, 그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동물에 관해서는 심하게 멀다이 책 전체를 통해 그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이 미묘한 거리입니다.

 

미야자키 : 데카르트는 코기토의 철학자로, 신체와 정신의 분할이 기초(base)에 있다고 여겨지지만, 데카르트의 신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이죠.

 

우카이 : 정념론등이 바로 그렇죠.

 

미야자키 :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얼마나 비-이원론적인 것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가, 혹은 비-이원론적인 것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는가가 동물론을 통해 보이게 됩니다. 단순한 동물기계론이 아닌 동물론은 오히려 데카르트를 상대로 함으로써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카이 : 물론 데카르트 연구자로부터는 비판이 있었습니다만, 데카르트를 다룬 부분은 이 책에서도 가장 힘이 들어가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책에서 데리다는 어떤 작업을 했는가. 지금까지 그가 했던 것과 공통점도 많습니다만, 5명의 철학자들이 동물에 관해 여기서는 아무래도 정신분석적 용어가 필요합니다만 부인(否認)’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몸짓을 드러내고 있는 곳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5장과 성찰두 번째에서 보이는 동물기계론을 다른 테제로 대치하고 단순히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어떤 대목에서 데카르트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듯한 것과는 다른 것을 말해버리는가에 주의합니다. 그와 같은, 이른바 징후()적 독해의 실천입니다. 다만, 실제로 번역한다면, 예를 들어 라캉의 한 구절에 관해 데리다는 여기서는 불안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한 번 읽고서는 [그렇게] 느낄 수 없었습니다(웃음). 이런 상태이기에, 꽤 미묘한 독해방식을 하고 있습니다만, 번역자로서는, 그러면 인용되는 라캉의 텍스트를 불안이 느껴지도록 번역해야 할까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도중, 과연 이것은 확실히 부인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다른 저자의 텍스트를 번역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경험으로, 데리다를 번역하는 것, 혹은 데리다를 읽는 것은 모종의 전이(轉移)’의 경험이기도 하며, 요컨대 최면술과 같은 곳도 있습니다. 작업의 결과는 읽어주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 책의 베이스가 되고 있는 강연을 한 콜로퀴는 []전적 동물이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말했습니다만, ‘[]동물이라는 두 개의 주제는 데리다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이 점에 관해, 최근 일본어 번역본이 나온 엘렌 식수(1937년 생)와 데리다의 공저 베일(원저는 1998)[각주:2]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식수의 사부아르(Savoir)라는 작은 텍스트의 뒷부분에, 데리다가 1990년대 중반 브라질로 강연 차 여행을 했을 때 기록한 일기식의 텍스트가 붙어 있는 책으로, 맹인의 기억 : 자화상 및 그 밖의 폐허(원저 1990)[각주:3]의 속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제목이 된 베일’, 이것은 당시 프랑스에서는 주지하듯이 정치문제였던 것을 생각해야만 하겠죠. 베일이라고 하면 이슬람의 것만이 부각되기 쉽습니다만, 쿠란에는 머리에 쓴 베일에 관해 예언자의 친족 여성 이외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일신교의 성전 속에서 처음 나온 것은 사실 바울이며, 여성을 베일에 의해 격리하는 사상은 오히려 기독교에서 생겨났습니다. 본서에 수록된 누에라는 텍스트에서 데리다는 바울의 여러 가지 서한과 프로이트의 텍스트 독해에다가, 알제리에서 지낸 소년시절에 누에를 길렀던 자서전적 이야기를 포갭니다. 누에는 페니스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내뱉은 섬유로 감싼다는 의미에서 성적인 결정 불가능성을 체현합니다. 이 기묘한 관찰이 데리다 자신의 성적인 성숙 과정과 어떻게 겹치는지를 상당히 외설스런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지만, 다소 거칠게 말하면, 인간의 자서전동물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원래 있을 수 있느냐라는 것이 여기서의 데리다의 물음입니다. 동물에게 보여졌다는 것이 말해야 할 경험으로 생겨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부인의 시작이겠고, 데리다가 다룬 철학자들만 해도 동물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론가로서는 동물의 경험을 말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이라는 자[]전적 텍스트를 남겼다는 의미에서는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억압하지 않았던 철학자로서 데리다에게 가까운존재입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동물이 없는 세계를 가정하기도 합니다. 데리다는 방법서설에 관한 의문에 응답하는 데카르트의 1638년의 편지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데카르트는 코기토가 사유 실체인 이상, 이미 연장에 편입되어 있는 신체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가 살아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숨을 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때 앞에서 니시야마(西山) 씨가 말한 나는 있다, 고로 나는 죽는다라는, 목소리와 현상에서 후설에 입각해 제시된 테제의 함의가 동물론이라는 틀 속에서, 데카르트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철학사와의 관계

고쿠분 : 앞서 우카이 씨가 데리다의 주변성(marginality)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가 항상 거인을 다룬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후설, 데카르트, 칸트처럼 철학자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예를 들어 우시아와 그람메(Ousia et Gramme)(철학의 여백수록)라면, 통속적인 시간 개념과 그렇지 않은 시간 개념은 결국 구별할 수 없다는 형태로 철학사의 한복판에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탈구축하고, 철학사의 정경 자체를 바꾸게 된다는 방식입니다. 반면, 제가 열심히 씨름하고 있는 들뢰즈는 원래 데카르트는 거론하지 않고 스피노자를 논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루지 않고 루크레티우스에 대해 논하기도 합니다. 이로부터 들뢰즈의 방식은 주변적인가(marginal) 아닌가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단순히 선호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논의 대상의 선택에 관한 차이는 아주 흥미로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선호도 있을 것이고, 체질[기질] 같은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왕도(王道)의 철학사를 피하고 다른 철학사를 만들고자 합니다만, 데리다는 정반대로, 왕도의 철학사를 정면 돌파하려 합니다. 철학사적 텍스트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을 내면에서부터 뚫고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쿠분 : 이것에 관해 굳이 우직한 의문을 제시한다면, 형이상학을 탈구축한 뒤에 철학은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철학은 이제 타락했다, 그래서 예전에 있던 지식을 사랑하는 것(필레인 토 소폰[φιλείν τό σοφόν])”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데리다는 탈구축 이후의 철학의 광경을 어떻게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을까. 들뢰즈는 나는 형이상학자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철학이란 결국 형이상학이라고 들뢰즈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하이데거의 정통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형이상학과 대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 대결의 형태가 탈구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탈구축 후에 철학은 어떻게 되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계속 탈구축하는가, 아니면 다른 철학이 나타나는가? 이것은 데리다를 아는 사람이 품고 있는 소박한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 철학의 거인[거장]을 거론한 것은 교직(敎職)[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정도 있겠죠. 특히 1960년대는 아그레가시옹(교수자격시험) 대책의 복습교사였기에, 수험자용의 기본적인 철학사 수업을 했습니다. 게다가 데리다는 전통주의자라고 공언하고 있어서, 과도한 도그마와 보수(保守)에 이르지 않는 한, 구축된 것을 존중했습니다. 게다가 형이상학에 대해 말하면, 하이데거와 달리 데리다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형이상학은 목적() 없는 마감(clôture sans fin)”이며, 목적론으로 초극하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융통성 있고 거침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형이상학의 마감은 항상 어딘가에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기본적 이해입니다. 항상 탈구축의 도상에 있는 형이상학과 더불어, 철학은 어떻게 되느냐라는 견해입니다.

 

미야자키 : 결정적인 탈구축이라는 것은 없다. 이미지로서는,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물가와도 같은 .

 

우카이 : “To be continued”라는 느낌이군요.

 

미야자키 : 탈구축하면 도그마가 돌아오고, 그것을 다시 밀어낸다는 과정이 항상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느새 해안선은 침식되고, 지형이 바뀌어 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요.

 

고쿠분 : 그런 것이겠네요. 그런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와 부끄러움[수치]’

미야자키 : 동물론에 관해 우카이 씨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서전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책에서 데리다로서는 드물게 논한 대목에 관해서입니다. 패싱룸[passing room]에서 기르고 있는 고양이에게 알몸을 보이게 됐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에피소드가 얘기되고 있고, 더욱이 그것이 중심적인 문제 같은 형태로 파악되고[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텍스트를 기반(base)으로 접근하는 데리다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특이합니다. 우카이 씨에게는 <알몸>의 스승[각주:4]이라는 글이 있습니다만, 이 부끄러움에는 단순히 알몸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거나, 기르던 고양이에게 보여졌기 때문이라고는 끝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자체의 부끄러움을 노출시키는 경험이라고도 말해도 좋을까요. 그 체험이 동물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다른 저작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이루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겁니다.

 

우카이 : 이 책에는 고양이가 몇 차례 나옵니다. 처음은 아마 들뢰즈와의 관계를 암암리에 가정하고,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거울나라의 엘리스가 다뤄집니다. 집에서 고양에게 알몸을 보여줬을 때의 부끄러움에 관해서도 거듭 논합니다만, 그때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됩니다. 거기에 인간의 여성이 있었다면, 혹은 거기에 거울이 있었다면, 부끄러움은 더 커진다 등등, 마치 최악의 부끄러움을 상상하고 기뻐하는 듯합니다. 철학을 논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악화되어가는 부끄러움의 얘기로 돌아가고 또 다시 철학을 논한다고 하는 기묘한 순환이 보입니다. 확실히 자신을 알몸으로 할 각오가 없는 자서전등은 의미가 없기에, 이 주제들은 데리다의 루소에 대한 애착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예전의 할례고백[각주:5]에서는 자신의 할례에 관해 장황하게 말한 다음, “이렇게 자신의 페니스 얘기를 구체적으로 한 철학자가 있었을까등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퀴니코스파적 측면도 그에게는 있으며, 철학의 실천으로서 사람들 앞에서 알몸이 되어 보여주는 것도, 어쩌면 어떤 숨겨진 전통을 떠맡겠다고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데리다의 집에는 1980년대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마리에는 루크레티우스”(Lucirèce)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만, 다른 한 마리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아들인 피에르는 오이디푸스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집에서 왜 고양이는 그리스-로마계의 이름을 부여받았는지,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데리다 집의 정원에 있는 고양이의 무덤이 훗날 영화에 나옵니다만,[각주:6] 그 두 마리가 죽은 후, 아마 새로운 고양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텍스트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건이 강연 직전에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겠죠.

   “부끄러움의 문제를 생각할 경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943)에 있는 부끄러움의 현상학적 서술을 고려해야 하며, 데리다도 유대인성에 관한 강연 아브라함, 또 다른 사람의[각주:7]에서 이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르트르뿐 아니라 라캉, 알튀세르, 푸코, 레비나스 등, 프랑스에는 시선[응시]”의 사유의 전통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 있고, [데리다] 자신도 그 전통 속에 있지만, 그 중 가장 이단적이지 않을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동물론에서 중요한 점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동물을 명명하기 직전이라는 시간이 설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 이전의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 이 무대를 설정한 신 자신은 그늘에 숨어서 그 과정을 예의주시 하고 있습니다. 이 신의 행동거지의 괴이함에 데리다는 관심을 기울입니다. 데리다 자신은 언급하지 않습니다만, 쿠란에서는 이 장면이 고쳐 써져 있습니다. 아담이 동물에 이름을 붙였다고는 하지 않고, 그 대신 아담의 귀에다[귀 밑에서] 신이 동물의 이름을 속삭이고 있습니다(쿠란2 암소). 창세기를 읽는 한에서는, 이름을 붙이는 능력을 인간이 신에게서 부여받고, 그 능력이 여기서 처음으로 발휘됐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 자체, 신의 전능성에 대한 침범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순수한 일신교이고자 했던 이슬람의 시원적인 종교적 직관 속에 있는 것입니다. 데리다는 똑같은 대목에 천착하면서, 인간이 이름을 붙일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그 순간 세계는 끝나버릴지도 모릅니다. 혹은 처음으로 의미가 개시되고 원래 역사가 시작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역사 이전의 묵시록적 사건의 가능성이, 고양이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장면과 겹쳐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리지 라 살의 강연에서는, 데리다가 제자들 앞에서 상상적인 스트립을 하고 있는 꼴이었기 때문에, 모두 올게 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일면 최후의 만찬과 비슷합니다만, 제자들은 형제가 아니라 동물의 위치에 놓여지고, 스승인 사람이 이것이 내 신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논문(어떤 정동의 미래 : <부끄러움>의 역사성에 관해)[각주:8]에서, 여기에는 죄의 문화부끄러움의 문화같은 기존의 이분법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된 제2차 대전 이후의 사상이 표현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가설을 세워 봤습니다. 들뢰즈도 말년에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이라는 모티프를 프리모 레비로부터 인용해서 중요한 고찰을 남겼습니다만,[각주:9] 하나의 시대의 사상으로서, 데리다도 같은 작업을 다른 스타일로 시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인종주의(racism)가 거세지고 있고 대항(counter) 행동의 참가자도 늘고 있습니다만,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 부끄럽다고 적힌 플랜카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입에 담기 쉬운 방식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것을 덮어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을 덮어둘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부끄러움, 책임=응답 가능성, 그리고 동물의 물음 사이에는 어떤 깊은 연결이 상정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 ‘시선[응시]’에 관해서는 미국의 사상가인 대너 해러웨이가 일본어로도 번역된 개와 사람이 만날 때 : 이종협동의 정치(원저 2008)[각주:10]라는 책에서, 고양이에게 보여진 데리다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상당히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데리다는 고양이에게 보여져도 자신의 느꼈던 부끄러움에 관해 물음을 제기했지만, 왜 고양이의 편에 서서 시선[응시]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동물학의 지식도 도입한 다음에 고양이의 시선에 관해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셈인데, 데리다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에 서서 탈구축하려고 했습니다.

 

우카이 : 데리다는 타자론의 하나의 전개로서 했기 때문이죠.

 

미야자키 :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데리다의 입장에서 보면, 해러웨이의 접근법은 너무 섣부르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대칭(symmetry)을 너무 간단하게 뛰어넘어버리는 것이니까요. 데리다는 철학의 역사 속에서, 혹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이 어떻게 흔들려 왔는가를 항상 묻습니다.

 

우카이 : 그런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알몸[벌거벗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 책에는 관철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 알몸(벌거벗음)은 바로 신체적 경계선이죠. 다양한 인간학적 가치가 기입되고 변용되는 경계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동물학적인 것을 들여오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해러웨이는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동물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하며, 철학적 담론을 중지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대신 데리다의 작업을 동물해방론이나 동물권리론 등의 접근법과 접속시키기 힘든 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카이 : 이것과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영어권에서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홀로코스트와 포스트모던 : 역사, 문학, 철학은 어떻게 응답했는가[각주:11]의 저자 로버트 이글스턴 씨가 이 책이 영국에서 ‘huge impact’였다고 듣고서는 놀란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어권에서는 그런 느낌은 받지 않습니다. 같은 시기에 철학적 동물론을 했던 사람으로서는 예를 들어 티에리 곤티에 등이 있고, 동물론을 축으로 몽테뉴와 데카르트 사이에서 사상사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자세하게 검토한 박사논문[각주:12]을 출판합니다. 하지만 그런 곤티에도 최근의 저작 동물의 질문 : 현대의 논쟁의 기원[각주:13]에서는 인간의 고유성이나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동물을 []하는 것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새로운 인간주의의 정초로 향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동물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이 분석철학적인 것과 대항하면서 존재해왔고, 거기에서 데리다의 작업을 수용하는 지평이 준비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프랑스어권에서 방어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많은 것은 역력합니다.

   데리다도 동물학적 식견은 참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동물 일반을 기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별 동물, 개체로서의 동물과의 관련을 탐색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은 그를 위한 작업의 공간을 여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때 그는, 예를 들어 언어처럼 인간에게 고유하고 알려진 것에 관해, 그것은 동물에게도 있다는 형태로 동물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라는 것을 인간이 정말로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척시킵니다. 그것은 이 책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철학적 동물론의 영역에서 매우 좋은 작업을 해 왔던 플로랑스 뷔르가의 현상학적 동물론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녀는 최근 또 하나의 실존[각주:14]이라는 책을 썼습니다만, 그 속에서 메를로 퐁티의 행동의 구조(1942)[각주:15]에서 동물의 실존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데리다의 작업을 토대로 재독해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설정은 자칫하면 동물들 중에서 어디까지 실존이 인정되느냐라는 얘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에서 문헌학자인 하인츠 비스만(Heinz Wismann, 1935-)이 시사하듯이, 예를 들어 온혈동물냉혈동물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집니다. 이런 작업으로부터도 얻는 바는 적지 않겠지만, 데리다 자신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방향으로 논의를 열고 있습니다.

 

자연과학과의 관계

고쿠분 : 데리다의 동물론이 경계선을 묻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그대로 좋으며, 저도 별다른 반론도 없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 논의에 그다지 큰 자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해두는 것이 정직한 감상입니다. 뭐든지 들뢰즈와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교사였던 들뢰즈가 쓴 교과서 본능과 제도(원서 1953)를 보면, 연어 연구나 거미 연구, 심지어 호르몬에 관한 연구 등, 이런 논의가 많이 나오며, 아주 구체적으로 동물과 본능의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교과서이기 때문에, 질문을 제기하고 학생들더러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그런 구체적 연구를 통해, 예를 들어 본능은 개체의 이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종의 이익이 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고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과 동물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저는 들뢰즈다운 방식이 재미있다고 느껴집니다. 데리다가 어디까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생각하는 것은, 탈구축이기 때문에 탈구축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만.

 

미야자키 : 일단 거기[이 논의]로 들어가보죠.

 

고쿠분 : 반면, 들뢰즈는 동물의 곁으로 바싹 다가섭니다. 물론 그런 것을 정말로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할지도 모르며, 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의문에 부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인간에게 고유한 것을 의문에 부친다는 논의 방식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면, 예를 들어 본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언제 이르게 되는가라는 소박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래도 동물과 인간에 관한 탈구축적인 방식에는 한계를 느낍니다. 탈구축적인 방식이 향하고 있는 소재와 그렇지 않은 소재가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정치에 관해서는 그 유효성을 강하게 느낍니다. 저는 정치상황에 대해 발언을 요구받았을 때, 기본적으로 탈구축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이 대상이 될 경우,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가 하면, 아무래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철학의 연구자는 동물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원래 연결이 거의 없잖아요. 연어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과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한테 가서 얘기를 들으면, 알 수 있는 게 많습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자신의 경험에 천착하고,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에게 보여지는 경험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도 상관없으나, 들뢰즈였다면 연어 연구자에게서 얘기를 듣기도 하고, 거미 연구서를 읽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들뢰즈와의 대비에 관해서는 데리다의 강의록 짐승과 주권자에서는 들뢰즈가 정말로 동물을 묻고 있는지, 그 어조는 인간주의의 틀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뤄지고 있네요.

 

니시야마 : 들뢰즈는 어리석음(bêtise)은 동물성이 아니다. 동물을 어리석은존재로 만들지 않는 특유한 형식들에 의해, 동물은 지켜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어리석음을 진리나 오류의 판단과는 다른 초월론적 물음으로 간주합니다. 데리다는 이런 어리석음의 규정에서 들뢰즈의 인간주의를 지적하고, 오히려 어리석음의 주제에 인간과 동물의 식별 불가능한 경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쿠분 : 확실히 그런 의문은 있지요. 그것은 그래도 물어보면 좋겠지만, 앞의 탈구축적인 방식으로 향하는 소재와 향하지 않는 소재가 있는 게 아니냐는 논점에 관해 한 가지 말하면, 푸코가 구조주의에 관해 재미있는 것을 말하고 있고, 구조주의라는 것은 수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조주의는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 대상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하는 것예요. , 구조주의적으로 파악하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탈구축적으로 다룬 것이 유효한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니시야마 : 데리다의 항상 변함없는 질문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라마톨로지에 관해는 바로 자연과 문화의 경첩[이음매]을 묻고 있으며, 인간의 종언(철학의 여백수록)에서는 인간의 극한(limit)을 복수형으로 열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의 한계를 다양한 단절이나 이질적인 선에 의해 열고, ‘이성이나 로고스’, ‘기술’, ‘상실[]등과 같은 하나의 대립점을 자르고, 형이상학적이고 고전적인 인간주의(humanism)로 회귀하지 않는다는 것은 초기부터의 설정이죠.

   다른 한편, 동물의 물음에 관해서는, 자연과학과의 관계는 항상 궁금하네요. 아무리 철학자의 텍스트를 읽더라도, 생명과학의 전문가에게 물으면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남습니다. 실제로, 같은 대학의 생물학 동료에게 인간과 동물은 뭐가 다른가?”라고 물어보면, “차이는 없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동물도 웃으며, 언어도 기술도 갖고 있으며, 상실[, 애도]의 작업도 한다고 말이죠. 물론 실증과학으로서의 생물학과는 상이한 수준에서 텍스트의 탈구축이 있고, 그것은 그것으로 유효합니다만.

 

우카이 : 실제로 철학과 동물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동물 자체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이죠.

 

고쿠분 : 그렇습니다.

 

우카이 :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動物誌)가 철학적 전통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특이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모두 자신이 조사한 것이 아니며, 어부와 사냥꾼, 목축인, 양봉가 등의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겁니다. 오늘날, 다른 한편에서는 동물에 관한 인간의 지식은 어디서 종합되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화의 동물적 기원[각주:16]의 저자인 도미니크 레스텔은 마사이족 사람들과 함께 사자 사냥을 하러 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마사이족 사람들이 사자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알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동물행동학자는 자기네의 지식이 동물에 관한 모든 지식 중에서 특권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아주 방어적으로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물과의 관계도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철학적 개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레스텔은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났을 때, 그는 데리다의 동물론을 몰랐기에 소개를 해줬습니다만, 고양이의 에피소드를 알고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설문조사였습니다. “동물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실증연구와 함께 레스텔은 동물을 다룬 소수자적인 철학자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채식주의의 문제도, 서양철학 속에는 확실히 있습니다. 근대의 철학에서는 주변화되어 버린 주제입니다만.

 

고쿠분 : 앙케트 따위를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거네요.

 

우카이 : 정말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데리다의 논의가 역시 탄탄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른 분야에 갖고 가도 제대로 통용된다는 것이죠. 제 자신의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도래할 민주주의 : 코다이라시 도로(都道) 328호선과 근대정치철학의 문제들[각주:17]에서는 도로문제라는 아주 구체적인 토픽을 다뤘습니다만, 그 속에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을 넣어도 잘 될 것입니다. 데리다는 인문과학의 서클 속에서 밖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강조하고 싶은 점이죠.

 

미야자키 : 독자의 문제도 있죠.

 

고쿠분 : 그렇습니다. 독자가 가두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는 데리다에 대해 사람들이 품고 있는 소박한 의문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습니다. 그것에 노출되지 않으면, 연구자 서클에서 밖에는 통용되지 않는 얘기로 끝나버립니다.

 

니시야마 : 응용 가능성과 관련해 말하면, 아까부터 지적되고 있듯이, 미국을 시작으로 하는 앵글로색슨계와 데리다 사상의 접속이라는 의미에서는 동물의 테마는 침투하기 쉽습니다. 이유는 4가지로, 벤담부터 피터 싱거에 이르는 동물론의 공리주의적 해석의 전통이 있다는 것,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이 반-휴머니즘과 친화력이 좋다는 것, 인간을 남자로서 표현하는 것의 탈구축이 페미니즘과 친근성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동물의 권리 문제와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데리다는 도래할 세계를 위하여에서도 말하듯이,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권리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등의 가치 전환을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탈구축의 전략은 항상 이중으로, 더욱이 대립하는 이항의 결정 불가능한 문턱까지 따지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권리 확장과는 다른 방식과 발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미야자키 : 대형 유인원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피터 싱거와 같은 논의[각주:18]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종차별을 들여올 위험이 있습니다. 원래 권리는 인간의 편의 사정에 의해 산출된 개념이며, 오히려 그런 한계로부터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1. L’animal autobiographique : autour de Jacques Derrida, sous la direction de Mariel-Louise Mallet, Galilée, 1999. [본문으로]
  2. Hélène Cixous et Jacques Derrida, Voiles, Galilée, 1998.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Mémoires d’aveugle : L’autoportrait et autres ruines,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1990. [본문으로]
  4. 鵜飼哲, 「<裸>の師」, 『思想』 2005년 1월호 ; 『자키 데리다의 무덤(ジャッキー ・デリダの墓)』, みすず書房, 2014년 수록. [본문으로]
  5. «Circonfession», in Geoffrey Bennington et Jacques Derrida, Jacques Derrida, Seuil, 1991. [본문으로]
  6. 사파 파티(Safaa Fathy) 감독의 『데리다, 다른 곳에서(D’ailleurs, Derrida)』, 2000년. ‘객지에서’로 옮겨질 수도 있다. [본문으로]
  7. «Abraham, l’autre», in Judéités : question pour Jacques Derrida, sous la direction de Joseph Cohen et Raphael Zagury-Orly, Galilée, 2003. [본문으로]
  8. 「ある情動の未来──〈恥〉の歴史性をめぐって」, 『思想別冊トレイシーズ』 제1호, 2000년 1월 ; 『主権のかなたで』, 岩波書版, 2008년 수록. [본문으로]
  9. [옮긴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참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책에서 프리모 레비를 인용하면서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은 레비가 체험했던 아우슈비츠의 극한상황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장면에서도 느껴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자신의 시대의 외부에 있다고는 느끼지 않으며, 외부에 있기는커녕 반대로, 우리는 자신의 시대와 부끄러운 타협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부끄러움의 감정이,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이다. 우리는 희생자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희생자 앞에서(devant)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카이 사토시는 『주권의 저편에서(主権のかなたで)』에서, “희생자 앞에서 책임이 있다”에서 “앞에서”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우카이는 ‘앞에서’에서다가 ‘전방에서’를 덧붙이고, “희생자 앞에서, 전방에서 책임이 있다”고 번역한다. 그는 “전방에서”를 덧붙임으로써, 여기에 “아직 없다/아니다”가 울려 퍼지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 같다. 한편,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감정(sentiment)이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라는 말에서, 우리는 카프카의 소설, 특히 『소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부끄러워야 할 비열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동물들을 행하는(으르렁거리다, [구멍을] 파다, 방긋거리다, 경련을 일으키다)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 카프카의 단편소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동물들에 눈을 돌리라고 역설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들의 공저인 『카프카 : 소수자 문학을 위하여』가 아니었던가. 부끄러움이 나 자신의 존재방식을 넘어서고, 인간이라는 것 자체로까지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동물을 행하다(faire l’animal)”일 뿐이라는 말은 강렬하다. [본문으로]
  10. Donna J. Haraway, When Species Mee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8. [『犬と人が出会うとき──異種協働のポリティクス』] [본문으로]
  11. Robert Eaglestone, The Holocaust and the Postmodern, OUP Oxford, 2003. [『ホロコーストとポストモダン──歴史・文学・哲学はどう応答したか』, 田尻芳樹・太田晋 訳, みすず書房, 2013년]. [본문으로]
  12. Thierry Gontier, De l’homme à l’animal : Montaigne et Descartes, ou, les paradoxes de la philosophie moderne sur la nature des animaux, Vrin, 1998. [본문으로]
  13. Thierry Gontier, La question des l’animal : les origines du débat moderne, Hermann, 2011. [본문으로]
  14. Florence Burgat, Une autre existence : la condition animale, Albin Michel, 2012. [본문으로]
  15. Maurice Merleau-Ponty, La structure du comportment, PUF, 1942 7e éd. en 1972. [본문으로]
  16. Dominique Lestel, Les origines animales de la culture, Flammarion, 2001. [본문으로]
  17. 『来るべき民主主義──小平市都道328号線と近代政治哲学の諸問題』, 幻冬舎新書, 2013년. [옮긴이] 한자가 道路가 아니라 都道이다. 우리 식으로는 ‘국도’나 ‘지방도로’에 해당되는 듯하다. [본문으로]
  18. Paola Cavalieri & Peter Singer, eds., The Great Ape Project: Equality Beyond Humanity, St. Martin's Griffin; St Martin’s Gri edition, 1994 [パオラ カヴァリエリ & ピーター・シンガー) 편, 『大型類人猿の権利宣言』, 원저 1993년/山内友三郎・間関利貞敗 訳, 昭和堂, 2001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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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사후 10


20012-511-00 표지 및 목차 - 번역.pdf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 松田智裕, 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 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 大江倫子, 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 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 吉松覚)


6. 자크 데리다, 동물성의 시학 :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 桐谷慧)


7.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 横田祐美子, 松田智裕, 亀井大輔)

 

*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首都大学東京人文科学研究科

2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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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西山雄二

 

프랑스의 사상가 자크 데리다(1930-2004)가 세상을 뜬 뒤 최근 10여 년 동안, 그 연구는 뚜렷하게 진전되고 있다.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교 및 프랑스의 현대출판자료연구소(IMEC)에서 귀중한 자료가 보존되어 공개됨으로써, 미공개의 중요 자료가 연구 대상이 됐다. 또한 데리다의 세미나 원고나 자세한 전기의 출판, 연구서의 발간 등, 출판물의 양도 늘고 있다. 그리고 국제회의인 DerridaToday가 격년으로 개최되고, 데리다 사상을 둘러싼 국제적인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일본에서의 상황에 관해서는 데리다의 사후, 오랫동안 번역되지 않았던 주저가 차례대로 번역됐다. 초기의 중요한 논집인 󰡔철학의 여백󰡕, 󰡔산종󰡕, 중기의 실천적 저작인 󰡔우편엽서󰡕, 그리고 탈구축의 정치적 개입이 나타나는 󰡔맑스의 유령들󰡕, 󰡔불량배들󰡕 등이다. 데리다를 일본어로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점점 더 충실해지고, 젊은 연구자들도 늘고 있다.

사후 10년째에 해당되는 2014년에는 세계 각지에서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되고, 간행물이나 번역, 잡지 특집이 다수 출판됐다. 필자는 2014년도(平成26年度) 首都大学東京傾斜的研究費学長裁量枠(ミニ研究環)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 사상의 국제적 공동연구(ジャック・デリダの脱構築思想国際的共同研究)의 조성을 받아, 각지에서의 행사에 참여하고, 연구 교류를 했다. 본 간행물은 데리다에 관한 일련의 논구는 이 傾斜的研究費의 연구성과이다. 필자가 해외에서 참가한 데리다 관련 행사는 다음과 같다.

 

1) 워크숍, 민주주의의 질문 : 데리다 / 랑시에르(Journée dʼétude: La question de la démocratie: Derrida / Rancière) 2014329Maison Heinrich Heine, Paris 주최 = 국제철학콜레주, 立命館大学

2) 4Derrida Today 회의 (4th Derrida Today Conference) 2014528-31Fordham University, New York

3) 국제심포지엄 자크 데리다 사후 10(International Conference: Commemorating the 10th anniversary of Jacques Derridaʼs death) 2014927上海交通大学(Shanghai Jiao Tong University), 상해 주최 = 上海交通大学哲学科 欧洲文化高等研究院

4) 국제심포지엄 도래할 데리다 : 열린 질문들(Colloque international : Derrida à venir, Questions ouvertes) 2014101-4일 고등사범학교, 파리 주최 = 파리고등사범학교, 현대출판자료연구소

5) 국제심포지엄 그가 어디에 있어도, 데리다와 함께 사고하다Colloque : Penser avec Derrida, où quʼ il soit 20141211-13일 현대출판자료연구소(IMEC), , 프랑스 주최 = 국제철학콜레주, 현대출판자료연구소

 

필자가 실제로 이런 행사에 참여하여 깊은 감명을 받은 발표원고, 필자가 교류한 연구자의 기 출판된 논고를 6편 골라 허가를 얻어 본 잡지에 번역했다.

또한 傾斜的研究費에 의한 기획으로서, 불가리아의 탁월한 데리다 연구자인 대린 테네브(소피아대학 조교수) 씨를 초빙하여 연속 세미나를 벌였다. 본 잡지에는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2014123, 首都大学東京),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Derridative)(2014125, 立命館大学)이 수록됐다. 전자의 강연에 대해서는,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가 각각의 전문분야에서 유익한 논평을 해주셨다. 대린 씨의 충실한 세미나를 기점으로 인문사회계의 전문분야의 울타리를 넘은, 비교문학적인 접근법의 매력이 반영된 것이었다.

번역에 관해서는 특히 젊은 연구자들에게 의뢰했는데, 모든 번역자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번역원고를 작성해주셨다. 매년 판에 박힌 대학의 잡지의 존재 의의는 때로 불분명하지만, 이렇게 젊고 청순한 공헌에 의해 잡지가 충실해지고, 또한 젊은이들에게 인센티브가 되는 것은 실로 이상적이다. 여러분의 참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西山雄二首都大学東京准教授)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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