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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간은 교육되어야 할 유일한 피조물이다. 동물은 그들의 힘을 갖게 되자마자 규칙적으로, 즉 그들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 힘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새끼제비가 알에서 막 기어 나와 아직 눈조차 뜨지 못할 때 그들의 배설물을 둥지 밖으로 버릴 줄 아는 것을 보면 사실 경탄할 만하다. 그러므로 동물은 전혀 양육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양육이란 아이들이 그들의 힘을 해롭게 사용하지 않도록 양친이 배려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동물이 태어났을 때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운다면, 그 소리에 유인된 늑대나 다른 맹수의 먹이가 될 것이 틀림없다.
훈육 또는 계도(啓導)가 동물성을 인성(人性)으로 바꾸어 놓는다. 동물에게는 모든 것이 본능이다. 그 어떤 다른 이성이 그 모든 것을 배려해 놓았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이성이 필요하다. 인간은 본능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행동계획을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바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야생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대신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훈육은 인간이 그의 동물적 충동으로 인해 그가 지닌 인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예를 들어, 훈육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거칠게 분별없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어야 한다.
야만성은 법칙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훈육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법칙에 복종시키는 것이며, 법칙의 강제를 느끼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훈육은 일찍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를 우선 학교에 보내는 것은 거기서 그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용히 앉아 있고 지시 받는 것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데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결코 어린이들이 장차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에 대한 강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얼마동안 자유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정도이다. 바로 그 때문에 매우 일찍이 훈육이 필요하다. 일찍이 훈육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인간을 변화시키기란 어렵다. 그런 사람은 제멋대로 된다. 우리는 그것을 미개한 나라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이 비록 유럽인들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봉사해 왔다 하더라도 결코 유럽인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루소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를 향한 고귀한 성향은 아니다. 그것은 동물성이 인간성을 아직 어느 정도 자체 내에 발달시키지 못한 그 어떤 야만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찍부터 이성의 규칙에 따르는 데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릴 때 맘대로 내버려두고 거절하지 않게 되면 인간은 어느 정도의 야만성을 평생 동안 지니게 된다. 
                                                                                                 ―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교육학 강의>

<나> 나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과거 교육의 전형적 문제점들, 즉 과거 교육은 아이들의 태도를 수동적이게 한다는 것, 아이들을 기계적으로 집단화한다는 것, 커리큘럼과 교육방법이 획일적이라는 것을 약간 과장(誇張)했는지도 모르겠으나, 분명히 밝혔다. 과거의 교육을 요약하면, 무게 중심이 아이들 이외의 것에 있었다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무게 중심이 교사, 교과서, 그밖의 무엇이든, 특히 아이들 자신의 직접적인 본능과 활동 이외의 것에 있었다. 그런 이상, 아이들의 생활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학습에 관해서는 많은 것이 말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교는 아이들이 생활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간주된다. 그런데 오늘날, 거대한 변혁이 우리 교육에 도래하고 있다.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천체의 중심이 지구에서 태양으로 이동했을 때와 비교할 수 있는 변혁이며, 혁명이다. 이럴 때마다 아이들이 태양이 되며, 그 주변을 교육의 제반 행위가 회전한다. 아이들이 중심이고, 그 중심의 주변에 제반 행위가 조직되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정, 즉 부모가 모두 총명하고, 아이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분간하고,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가정이, 여기에 있다고 하자. 그런 가정에서는 아이들은 가족 사이의 대화나 그 가족의 관습을 통해 사물을 배울 것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은 이러저러한 발언을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질문이 오가며, 자신이 잘못 생각한 점이 있다면 정정한다. 더욱이 아이들은 가정의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함으로써, 근면, 질서, 타인의 권리와 사상을 존중하는 관습을 익히고, 더욱이 자기의 활동을 가정 전체의 이해에 복종시킨다는 기본적 관습도 몸에 익힌다. 이상적인 가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작업실이 따로 있고, 아이들은 거기에서 구성적인 본능을 작동시킬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작은 실험실도 있고, 그 실험실에서 아이들의 여러 가지 의문이 해답으로 이끌릴 것이다. 아이들의 생활은 바깥을 향해 확대되며, 정원으로까지, 이웃집 정원이나 숲에까지 이른다. 아이들은 소풍을 나아기고 걷고 말한다. 그때 뜰 밖의 넓은 세계가 그의 앞에 펼쳐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말한 모든 사태를 조직화고, 일반화해 본다면, 거기에는 이상적 학교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이상적 학교의 창설에, 신비적인 것 등은 하나도 없으며, 교육학과 교육이론에 있어서 신기한 발견도 없다. 그것은 단순히 대부분의 가정에서 어떤 이유 때문에 비교적 빈약하게, 우연하게 행해지고 있는 것을 조직적으로, 나아가 대규모로, 잘 생각해서 확실한 방법으로 행하는 과제에 불과하다. 우선 첫째로, 이상적 가정이 확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의 생활을 최대한 자유롭고 최대한 풍요로운 사회생활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은 대세(大勢)의 어른과 그리고 더 대세(大勢)의 아이들과 접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가정이라는 환경 속의 작업이나 관계는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 특별히 선발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주된 목적은 다른 것에 있고, 아이들이 이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것은 부가적인 것이다. 이로부터 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교에서야 비로소 아이들의 생활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목적으로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을 촉진하는 모든 수단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다. 학습은 어떤 것인가라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확실히 학습은 행해진다. 하지만 생활하는 것이 첫 번째이다. 학습은 생활을 통해, 또한 생활과 관련하여 행해진다. 이처럼 아이들의 생활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조직화하게 되면, 아이들은 어떤 것은 접어두고, 많은 책상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진 교실에 착석하고, 침묵을 지키며 교사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니, 확실히 그 반대이다. …<중략>…
아이들은 곧 여기저기 뛰어 돌아다니며, 물건을 넘어뜨리고, 모든 종류의 활동을 시작한다. 아이들은 곧 격렬하게 활동적이기 때문에, 교육이란 아이들의 여러 활동을 파악하고, 그러한 활동에 방향을 부여한다. 지도에 의해, 즉 조직적으로 다루게 됨으로써, 아이들의 여러 활동은 산만하게 되기도 하고, 단순히 충동적 발견에 그대로 내맡겨두기도 하는 것을 그만두고, 여러 가치 있는 결과로 향하게 된다.
                                                                                                                   ― 존 듀이, <학교와 사회>

<다> [새로운 학습이론은] 놀이와 공부 사이의 구분을 가능한 한 없애는 일 ― 전자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 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이것에 의해 교육의 위기를 초래했다.] 놀이는 아이들이 세계 속에서 제몫을 감당하는 가장 활기 넘치고 적절한 방식으로, 또한 아이라는 실존체로부터 자발적으로 진화하는 활동의 유일한 형태로 간주되어 왔다. 오로지 놀이를 통해 학습될 수 있는 것만이 [아이들의] 활기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아이의 특징적인 활동은 놀이 속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아이를 수동적인 태도로 몰아가는 옛날식의 학습법은 아이가 자신의 유희적 독창성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략>…
함(doing)과 앎(knowing) 사이의 연관성이 무엇이든 혹은 실용주의 공식의 타당성이 무엇이든 교육, 즉 아이의 학습방식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중략>… 어린이의 세계를 절대적으로 만들기 쉽다. 여기서도 아이들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구실로 아이들은 성인들의 세계에서 내쫓기고, 그들의 세계라고 불리는 곳에 부자연스럽게 남겨진다. 그것이 하나의 세계로 불릴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아이를 뒤에 남겨두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렇게 할 경우 가르침과 배움으로 이루어지는 성인과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관계가 끊어지고, 동시에 아이는 발달 중인 인간이고 유년기는 성인기를 준비하는 일시적인 단계라는 사실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략>…
아이가 아직 세계와 친분을 쌓지 못했다면 아이는 점차적으로 세계에 소개되어야 한다. 그가 새로운 성원인 한, [세계는] 이 새로운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성숙하도록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교육자들은 한 세계의 대표자로서 젊은이와의 관계 위에 서 있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세계를 만들지 않았더라도, 심지어 은밀히 혹은 공개적으로 기존의 세계가 아닌 다른 모습의 세계를 원할지라도, 교육자들은 세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책임은 교육자들에게 자의적으로 지워진 것이 아니다. 그러한 책임은 어른들이 계속해서 변하는 세계 속으로 젊은이들을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속에 함축되어 있다. 세계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아이를 갖지 말아야 하며 그들에게 교육의 역할을 맡겨서도 안 된다.
교육의 장에서 세계에 대한 책임은 권위의 형태를 취한다. 교육자의 권위와 교사의 자격요건은 같은 것이 아니다. 비록 자격의 척도가 권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지라도 최고의 자격요건은 결코 스스로 권위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교사의 자격요건은 세계에 대해 알고 그것을 타인에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지만, 그의 권위는 세계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일에 달려 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교사의 책임은 [세계 내] 모든 성인 거주자의 대표로서 아이들에게 세계에 관한 세부사항을 알려주면서 ‘이것이 우리의 세계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략>…
근대 세계의 교육문제는 교육이 본질적으로 권위나 전통을 무시할 수 없는 반면에 권위에 의해 구조화되지도 않고, 전통으로 함께 묶이지도 않은 세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사와 교육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하나의 세계에서 아이들, 그리고 젊은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 그들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취하는 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교육의 영역을 다른 영역, 무엇보다도 공적․정치적 삶의 영역에서 확실하게 떼어내야 한다. 그것은 교육의 영역에는 적합하지만 일반적 타당성은 없고 성인의 세계에 대해 일반적 타당성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권위의 개념과 과거에 대한 태도만을 교육의 영역에 적용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이것의 첫 번째 결과는 학교의 기능이 아이들에게 살아가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일 것이다. 세계는 오래되었고 언제나 아이들보다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존이 현재 속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머물게 될 것인가와 무관하게 배움은 과거로 향할 수밖에 없다. 둘째, 아이와 성인 사이에 그어진 선이 시사하는 바는 성인을 교육할 수도 없고 아이들을 성인처럼 다룰 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선이 마치 아이들이 성인들과 같은 세계에서 살지 않는 것처럼, 마치 유년기가 자체의 법칙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자율적인 인간 상태인 것처럼 아이들을 성인의 공동체에서 분리하는 벽으로 자라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중략>…
교육은 우리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질만큼 세계를 사랑할지, 같은 이유로 [세계의] 경신(更新) 없이, 즉 새롭고 젊은 사람들의 도래 없이는 파멸이 불가피한 세계를 구할지를 결정하는 지점이다. 또한 교육은 우리가 아이들을 우리의 세계로부터 내쫓아 그들이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이 뭔가 새로운 일, 뭔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공통의 세계를 새롭게 하는 임무를 담당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킬 정도로 그들을 사랑할지를 결정하는 지점인 것이다.
                                                                                                       ―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사이>

논제 : 교육하는 자(부모, 교사)와 학습하는 자(아이, 학생)의 관계에 관하여, 제시문 <가> ~ <다>의 사고방식의 공통점과 차이점 또는 대립점에 관해 900자 내외로 서술하시오.


<예시답안>
듀이는 교육이 아이들의 생활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는 반면, 칸트와 아렌트는 어른이 아이들을 교화하여 어른의 세계로 이끌 필요가 있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다만, 아렌트의 논의는 듀이식 교육이론에 대한 반박으로, 교육을 하는 쪽인 어른의 책임과 태도를 강조하는 내용인 반면, 칸트는 교육의 주된 목적을 아이들의 사유의 자유에서 찾고 있기에 둘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교육이란 소여로서의 인간을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아이가 스스로 사유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때문에 교육하는 자는 학습하는 자에게 복종을 하게끔 강제해야만 하는데, 이는 아이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반면 듀이는 교육이란 아이들의 생활이나 활동에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교육에서는 학습하는 자가 중심이며, 교육하는 자는 아이들의 생활을 최대한 자유롭고, 풍요로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그것을 조직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듀이의 교육관에서 교육하는 자는 소극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아렌트는 이러한 듀이식 교육이론에 관해, 거기에서는 아이들의 세계가 절대화되고, 아이들은 인공적으로 그들만의 세계에 갖혀버리게 된다고 비판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동 시절은 성인에 이르는 준비단계이며, 아이는 세계로 인도되어야만 한다. 교육하는 자는 학습하는 자에게 기존의 세계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으며, 교육하는 자가 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책임은 권위라는 형태를 취한다. 교육의 영역에서 어른은 권위를 체현하고, 과거를 지키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제시문 <다>는 교육에서 어른과 아이의 관계 중에서 교육하는 자인 어른에 역점을 두고 있을 뿐, 학습하는 자인 아이가 교육을 통해 세계에 어떻게 적응해 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아렌트의 논의는 칸트와 다르다. 칸트의 교육론에서는 교육하는 자가 부과하는 강제는 학습하는 자의 자유를 목적으로 한다고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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