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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대린 테네브의 「고양이, 눈빛,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1/3) 


ダリン・テネフ「猫、眼差し、そして死」への応答

글쓴이 : 大杉重男, 南谷奉良, 山本潤




1. 大杉重男의 응답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하고 있기에, 데리다를 기점으로 하는 동시에 종점으로도 하고 있는 ‘고양이’를 둘러싼 세계문학적 계보학 속에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자리매김 되는 것은 매우 많은 것을 자극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표하신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나, 고양이의 관점에서 쓴다는 몇 겹이나 불가능한 행위에 대한 테네브 씨의 분석을 듣고서, 소세키의 텍스트에서 ‘고양이’와 ‘눈빛’과 ‘죽음’의 주제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다만 이번에 발표하신 것에서는 데리다론이 중심이고, 소세키에 대해서는 필요 최소한의 언급에 그치셨다고 생각하기에, 보충적으로 소세키의 텍스트에서 고양이가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를 돌이켜보고 확인하면서 코멘트하고 싶습니다.

 우선 오늘의 말씀을 듣고, 제가 상기한 것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7장에서, 고양이가 공중목욕탕을 들여다보는[覗く]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테네브 씨도 읽으신 것 같은데요, 여기서 고양이는 남탕을 들여다보고 “그림도 되지 않은 대량의 아담들”이 알몸으로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의 테마의 기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알몸을 고양이에게 보인다는 데리다의 에피소드와 비교하면 여러 가지로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공중목욕탕을 들여다볼 때 고양이는 옷을 입음으로써 복장의 동물이 되고, 인간은 거꾸로 알몸이 되면 “고양이에 못지않은 짐승”이 된다고 말합니다. 반면 고양이 자신은 벗지도 못하는 ‘털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알몸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짐승’도 될 수 없습니다. ‘동믈’보다 ‘인간’이 ‘짐승’이라는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털옷’이라는 기묘한 형상이 제시되는데, 이 ‘털옷’이 알몸도 옷도 아니라 ‘눈빛’을 교란하는 매우 애매한 옵스큐어(obscure)인 것입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9장 말미에서, 고양이는 ‘독심술’을 발휘하여 주인의 마음을 읽는데요, 그 방법은 육안으로 읽는 게 아니라, 털옷을 주인의 배에 비벼댐으로써 ‘심안(心眼)’에 주인의 마음이 비친다는 것이며, 여기서는 ‘털옷’ 그 자체가 ‘눈빛’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에피소드도 오늘 말씀하신 ‘보기’의 불가능성으로서의 맹목과 인식 사이의 관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데리다의 고양이는 암코양이이며, 고양이와 여성은 전통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됐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수고양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르(Murr)도 수고양이이고, 블랑쇼의 고양이도 수컷처럼 보입니다만, 말하는 고양이는 수컷이고, 침묵하는 고양이는 암컷이라는 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까요?

 다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무르(Murr)들과도 다른 특이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첫머리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라는 문장입니다. 테네브 씨는 이 문장 뒤에 이어진, 인간이 고양이에 의해서 처음 보이게 되는 장면을 아주 상징적인 것으로서도 거론하고 계십니다만, “이름은 아직 없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인용하실 뿐 특별히 해석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고양이의 ‘자(서)전’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고양이에게 이름이 아직 없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것이 아닐까요? 이름이 없다면 고양이는 자신이 쓴 이 자(서)전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명이 없는 ‘자(서)전’이란 무엇일까요? 더욱이 이 고양이는 단순히 이름이 없는 것만이 아니고, 이름이 없는 것에 자각적인 고양이이며, 이름이 없는 데 유명해져버린 것에 자각적인 고양이입니다. 『동물을 쫓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동물이다]』의 일본어판이 나왔기에 재빨리 사서 읽었는데요, 거기서 데리다는 창세기를 인용하고, 동물이라는 것의 비애, 상실, 멜랑콜리를, 이름이 부여될 수 없는 무력감에서 보고 있습니다만, 이름이 붙지 않은 소세키의 고양이 이야기에도, 그 유머의 그림자에 항상 멜랑콜리가 뒤따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이렇게 이름이 없다는 것을 소세키의 문화적 정체성의 분열과 결부시키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오늘 하신 발표에서 소세키 문학은 명예롭게도 서구문학의 전통의 일부에 보태지고 있습니다만, 이름 없는 고양이는 과연 정말로 그 전통에 충분히 속하는가?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중단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그것이 ‘카테르 무르[E. T. A. 호프만의 Lebensansichten des Katers Murr = The Life and Opinions of the Tomcat Murr]’의 모방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적이 있다고도 말합니다. 실증적으로 어떻든 간에, 이 고양이는 무르(murr)보다 자신을 열등한 존재라고 자기 정의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며, 그리고 고양이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 열등의식의 상징이 아닌가. 이 고양이는 이름이 없음으로써, 옵스큐어(obscure)적, 그늘에 사는 사람 같은 존재이며, 그것은 서구 문학의 전통에 대한 일본 근대문학의 옵스큐어(obscure)적인, 그늘에 사는 사람과도 같은 위상을 나타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등장하는 ‘나[吾輩]’ 이외의 고양이는, 미케코[三毛子; 백색·흑색·갈색이 섞인 털을 가진 고양이], 쿠로[黒]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그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 만담[落語]에 나오는 듯한 전통적인 일본문화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이름 없는 ‘나[吾輩]’는 서구문학의 전통에 대해서도 일본문화의 전통에 대해서도 옵스큐어(obscure)적인, 잘 보이지 않고 확실치 않은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죠.

 이 옵스큐어(obscure)적인 성격은, 고양이의 성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나[吾輩]’라고 자신을 부릅니다. 테네브 씨는 ‘humble I’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나[吾輩]’는 영어로는 I라고 번역되는 것이 통상적인 것 같아요.1) 그러나 일본어의 ‘나[吾輩]’는 결코 humble한 I가 아니라, 일본어의 수많은 1인칭 중에서도 가장 남성적인 1인칭 중 하나입니다. 그것을 남성적이 아니라 소심한 고양이가 사용한다는 것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최초의 유머가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고양이는 ‘나[吾輩]’라는 과도하게 남성적인 1인칭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서구적 의미에서도 일본적 의미에서도 ‘수컷’답지 않은 본질을 은폐하는 동시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고양이의 성적인 모호함은 고양이가 알몸의 남자들을 쳐다보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그것은 알몸의 남자들이 설령 이 고양이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거울상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는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컷 고양이가 알몸의 남자들을 ‘쳐다보다’라는 행위를, 성적 도착과 무관한 부끄러운 것이 조금도 없는 건전함에 있어서 묘사하는 것은, 소세키에게 알몸을 보거나 보여주거나 하는 것이, 데리다의 수치의 체험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일면에서는 당시 일본의 검열제도와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양이가 여탕을 들여다보는(『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발표보다 조금 뒤에 체포된 ‘데바카메(出歯亀, 뻐드렁니를 한 술꾼)’라는 유명한 성범죄자는, 여탕을 들여다본 상습범이었기에 ‘자연주의’에 비유됐습니다) 장면을 쓰는 것을 소세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소세키적인 고유성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나중의 『풀베개(草枕)』에서 여주인공 나미(那美) 씨가 목욕탕에 들어오는 장면을 쓰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도 수치의 감정은 ‘몰인정’의 이름 아래 배제되고 있습니다).

* 위키피디아 번역出歯亀(데바가메 또는 데바카메)는 메이지시대에 발생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남성의 별명. 혹은 이 별명이 바뀌어 관음증과 이를 취미로 하는 것, 관음증처럼 병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피핑 톰(Peeping Tom)'이라는 말이 대체로 이것에 해당된다.

 또한 이번에는 소세키에 있어서의 웅변적으로 말하는 고양이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소세키는 또다른 유형의 고양이, 즉 포나 보들레르의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바라보는 존재로서의 고양이에 대해서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긴 봄날의 소품[永日小品]』 속의 ‘고양이의 무덤’이라는 에세이로, 여기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이 된 고양이가 병으로 죽는 얘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 에세이는 바로 ‘고양이’와 ‘눈빛’과 ‘죽음’의 이야기[서사]입니다. 여기서는 고양이는 이야기하는 고양이가 아니라, 침묵하고 자신 속에 틀어박힌 고양이이며, 더욱이 그 ‘눈빛’은 매우 옵스큐어(obscure)한, 불투명하고 탁한 것이라고 써져 있습니다. 즉, “그 눈알은, 어떤 때든 정원의 숲을 보고 있으나, 그는 아마 나뭇잎도 줄기의 형태도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푸성귀가 달린 노란 눈동자를, 멍하니 한곳에 가라앉히고 있을 뿐이다その眼付きは、何時でも庭の植込みを見てゐるが、彼は恐らく木の葉も、幹の形も意識してゐなかつたのだらう、青味がかつた黄色い瞳子を、ぼんやりと一と所に落ち着けてゐるのみである”라고 써져 있는데요, 이 고양이는, 세계를 볼 수 없게 되며, 아이들이나 아내도 고양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는,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는 존재로서, 소세키에 의해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시선의 엇갈림은 흥미롭습니다. 고양이를 보지 않는 아이들은 고양이가 죽자, 부재하게 된 고양이에게서 눈을 돌려서[관심을 돌려서], 무덤을 만들고 애도의 몸짓을 한다. 소세키 자신은 애도하지도 않고 그 모습을 싸늘하게 보고 있을 뿐입니다.

 참고로 말년의 에세이 『유리문 안에서(硝子戸の中)』 28장에 따르면, 나쓰메가(家)에서는 세 번째 고양이를 기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양이의 무덤」에서 자세하게 그 죽음의 모습이 묘사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이 된 고양이인데요, 두 번째는 새끼 고양이 중에 집안사람이 완쾌됐을 때 밟아서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눈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밟아 죽은 고양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검은 고양이로, 피부병에 걸려 털이 빠지고 벌거숭이가 되어버립니다. 소세키는 안락사시키는 편이 좋다고 가족에게 말하지만, 실행되지 않은 와중에 소세키 자신이 병들어 누워버리고, 회복해서 고양이를 보자, 고양이도 피부병이 치유되어 원래대로 검은 고양이가 되고 있습니다. 소세키는 자신과 고양이의 병의 경과에서 인연을 보게 됩니다.

 이런 고양이들은 아마 모두 수컷 고양이로, 여성적인 것과는 관련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성인 가족들은 무시되고 매몰차게 밀려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집안에서 고립된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을 소세키 자신의 위상과 겹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세키 자신도 그 고양이들에게 상냥했던 것은 아닙니다. 소세키는 그저 보고 있을 뿐입니다. 소세키의 이런 위상은 『마작 유랑기(満漢ところどころ)』(소세키가 제국주의·식민지주의에 대한 헌신commitment을 무방비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좋든 나쁘든 유명한 텍스트입니다)에서 소세키가 길거리에서 부당을 당한 중국인 노인(거기서 소세키가 주목하는 노인의 “우울하다기보다는 땅바닥을 보고 있는曇よりと地面の上を見てゐた” “눈”은 ‘고양이의 무덤’에서의 고양이의 눈빛과 유사합니다)을 다른 중국인이 에워싸고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을 잔인하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잠자코 그 자리를 떠나는 위상과 겹칩니다.

 소세키의 텍스트에서 보는 권한을 갖는 것은 소세키뿐이고, 고양이도, 제3자도 보이는 존재이며, 소세키를 되쳐다보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소세키가, 데리다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양이에 대해 쓰면서, 데리다가 고양이의 눈빛, 불가능한 맹목의 그 눈빛과 만나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를 열었던 반면, 소세키는 고양이의 시선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데리다가 보여져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소세키는 (아브라함처럼인지는 차치하고) 타자가 자신을 보는 것을 죄로서 금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강연에서 분석하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고양이의 그림에 눈빛이 그려져 있지 않은 에피소드는, 그것과 관련되는 것처럼 제게는 보입니다. 소세키는 고양이의 눈빛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쓰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요? 소세키의 후기 작품인 『마음』에는 그 주인공 ‘선생’이 ‘연구적인 눈’으로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특징적인 묘사가 있습니다만, 이 ‘연구적인 눈’이란 고양이의 눈빛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일찍이 ‘선생’은 친구 K를 ‘다른 유사 사람과의 무술 시합[他流試合]’ 같은 (‘연구적’이라는 것과 같은 뜻의 비유)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배신한 것이며, 그리고 그 K의 자살 현장을 목격한 ‘선생’의 ‘눈’은 “유리로 만든 의안(義眼)처럼 움직이는 능력을 잃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알고 스스로 두 눈을 으깨버린 오이디푸스처럼 ‘선생’은 ‘연구적인 눈’으로 K를 관찰하고 자살로 몰아간 죄에 의해 상징적으로 장님이 된다는 벌을 받는 것이며(‘아내’가 된 ‘아가씨’에 대해서 불능이 된 ‘선생’은 ‘거세’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이 교훈을 자신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타자로서 택한 ‘나’에게 전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타자는, 단독적으로 보이면서, 독자의 누구나 (‘사모님’을 제외한) 그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을 가짐으로써, 전적인 타자로 회수되는 것처럼 보인다. 테네브 씨의 말씀으로는 데리다는, 말년이 되어 전적인 타자·일반적인 타자를, 단독적인 타자로 탈구축해가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소세키는 오히려 말년이 되어 단독적인 타자를 전적인 타자·일반적인 타자로 탈구축해가는 것(「측천거사(則天去私)」?)으로 기울었던 것은 아닌가. 이것은 소세키에 대해 네거티브적인, 비판적인 생각일지도 모릅니다만, 일본의 국민작가인 소세키가 끌어안은 사각(死角)이며, 맹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오늘 말씀하신 것을 토대로 ‘고양이’와 ‘눈빛’과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소세키의 텍스트를 해석해봤습니다. 강연의 주제에서 크게 일탈한 엉뚱한 해석이 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번에 말씀하신 것은, 제가 소세키를 읽는 데 있어서 매우 시사적인 힌트로 가득 차 있었기에 감사드립니다.

(大杉重男=首都大学東京教授)


1) 소세키는 1908년 5월 17일이라는 날짜가 붙은 [영에게 보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ハ猫デアル] 헌사]에서, 영이라는 인물(미국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Herein, a cat speaks in the first person plural, we. Whether regal or editorial, it is beyond the ken of the auther to see. Gargantua, Quixote and Tristram Shandy, each has had his day. It is high time this feline King lay in peace upon a shelf in Mr Youngʼ s library. And may all his catspaw-philosophy as well as his quaint language, ever remain hieroglyphic in the eyes of the occidentals!”(『소세키전집(漱石全集)』 26권). 이 헌사는 소세키가 ‘나[吾輩]’라는 말을 1인칭 복수인 ‘we’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we’는 왕의 자기칭호로, 신문의 논설문의 1인칭이기도 하다(Whether regal or editorial, it is beyond the ken of the auther to see). 그러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영역자들은, 소세키의 의도를 무시하고 ‘나[吾輩]’를 ‘I’로 번역해왔다. 그것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화자인 고양이를 가르강튀아(Gargantua)나 돈키호테, 트리스트람 샌디(Tristram Shandy)와 동격의 ‘고양이의 왕’(feline King)으로 진단한 소세키의 유머(와 동시에 서구문학에 대한 일본인으로서의 내셔널리스틱한 프라이드)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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