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3/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를 살면서

우츠미 그런데 치바 씨는 들뢰즈의 흄론에 주목하셨네요그리고 흄철학에서 절단의 계기를 끄집어내고들뢰즈에게서 생기론이나 잠재성의 파시즘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측면을 찾아냈다.

 

치바 그렇습니다모종의 픽션론으로서의 흄론이었습니다.

 

우츠미 흄은 낱개의[개개별별의] 세계를 연합에 의해 묶으려고[통합·정리하려고] 했습니다만그 통합정리할 때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치바 씨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거론한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흄의 경우, 파트그래피컬[パトグラフィカル, 바이오그래피컬의 오식인 듯. 즉, 전기적인]한 얘기인데요, 18세부터 23세까지 꽤 힘겨운 우울 상태에 있었고어쩌면 이인증(離人症)을 경험했습니다이인증에서는 사물을 서로 이어주는 아교랄까치바 씨의 말로는 ’ 같은 것이 누락되어 있습니다그것이 흄의 어소시에이션론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일단 아이러니적인 파괴를 경험한 곳에서부터 턴(turn)해온다유머적인 턴(turn)이랄까대타자 또는 초월론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은 통합·결말[まとまり]마조히즘에 있어서의 억압을 변형하는 듯한 턴(turn)입니다그 언저리의 모습이살아가는 지혜랄까경험론의 진면목이 아닐까 합니다만.

 

치바 제 말투에서 유머를 흄의 맥락으로 연결한다면어떤 우연적으로 생겨난 연합을그렇게 해도 좋다고 한다는 것입니다그 정의나 시스템을 묻겠다고 생각한다면근거는 없습니다어떤 우연의 마주침즉 최초의 자체성애적인 것이 생길 때의 외부와의 마주침의 우연성 같은 것으로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것을 떠맡고우연히 뭔가와 뭔가가 서로 달라붙게 됐을 때그로부터 연쇄적으로 다른 것이 또한 달라붙게 되는 것을 좋다고 한다모든 것은 근가가 없다고 하는 곳으로 향해서 비판을 캐고 들어가는 아이러니만을 하다 보면 엉망진창이 되며모든 것이 붕괴되기 때문에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대조적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유머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츠미 초월론적인 타자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후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네요.

 

마츠모토 : ‘일단은’ 식으로.

 

치바 그렇죠저는 어드혹(ad hoc)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생각해보면제가 전에 기고한 트랜스어딕션 동물-성의 생성변화(トランスアディクション───動物-生成変化(現代思想特集=人間/動物分割線, 2009年 7月号)와도 공명하네요. S1을 되풀이하는 것은 중독적이라고 밀러는 말하고 있으니까요제가 생각한 어딕션(addiction)도 그런 의미에서의 어떤 특이적인 증상이며또한 크리에이션(creation)과 결부된다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의 얘기로 말하면, S1이 몸을 옥죄어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변형하여 다른 크리에이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될 가능성을 트랜스어딕션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우츠미 단독의 S1에는 그런 어딕션적·에크리튀르적인 측면과 더불어그런 단순한 외침으로서의 측면도 있습니다외침은 마츠모토 씨의 논의에서 원-상징계의 + - + - … 라는 곳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거기에서 상징적인 심급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 “이 칭얼거림[외침]은 이런 의미예요라고 어머니가 유닛(unit)화한다. “배가 고프구나라고어머니도 칭얼거림이 매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그런 감각적인 차이에 배가 고프다라는 상징적 유닛을 덧씌운다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함으로써칭얼거림이 배가 고프다가 된다그러나 자폐증의 경우는 그런 응답이 없기에칭얼거림인 채인 것입니다.

 

마츠모토 그래서 늑대!”, “늑대!”라고 외칠 뿐이다.

 

치바 그리고 똑같은 그 외침이 온갖 것에 적용 가능해진다면.

 

우츠미 자폐증의 언어적인 측면은 매우 다양하네요.

 

마츠모토 정형발달처럼 S1과 S2가 연쇄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자폐증자에게는 하나뿐인 S1과 알고리즘적인 S2가 존재하며그 양자 사이에서 이러저러한 언어의 병리가 생겨나는 거죠그것은 거꾸로 정형발달이 무엇인지를 겉으로 드러내는[해명하는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도 되죠.

     조금 전 치바 씨의 트랜스어딕션” 말씀을 듣고서 생각한 건데요인프라크리틱 서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포스트인문학으로(インフラクリテイーク序説───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からポスト人文学)(思想地図β』, vol. 1, 2011)에서는 장애를 짊어지게 된 후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썼습니다그 논의는 S1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치바 역시그곳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통할지도 모르겠네요그곳은 말라부에게서 얻은 발상입니다만.

 

마츠모토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S1에서 다른 것이 발생한다는 느낌이겠죠아니면 S1 자체가 유물론적으로 고쳐 써진다는 것일까요?

 

치바 그런 식으로 연결한다면, S1의 변형을 생각했던 게 되겠죠말라부를 좇아 말한다면데리다적인 똑같은 흔적의 이전(移転)오배송[誤配] 모델이 아니고흔적 그 자체가 변형되어 버렸다는 그녀의 모델을 구별하지요그리고 원래 S1을 복수 갖고 있거나, S1을 새롭게 추가한다는 것도제 테마입니다마츠모도 씨의 논의에서도라캉과 가타리의 대비에서특이성을 단수적으로 생각하는가 복수적으로 생각하는가라는 갈림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네요제가 여기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라캉에게는 S1이라는 말을 ‘essaim(무리)’라는 단어로 바꿔 부르는 말놀이가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하나이면서도 거기에는 뭔가 무리성이 있다는 것일까요?

 

마츠모토 : ‘essaim’이 라캉파 에서 사용되는 경우기본적으로는 스키조프레니인 자의 언어사용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말 하나하나가 현실계의 수준에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서 서로 분절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언어의 병리의 행방言語病理行方『유이티카ユリイカ, 2012年 9月号)에 적은 사례인데요제가 전에 본 사춘기 유형의 환자로환청을 호소했습니다그 사람은 어느 날, “소리를 질러서[말을 걸어서] 잡아주세요[をかけられたのでってください]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걸다[かける]라는 말이, “물을 뒤집어썼으니까 닦아줘[をかけられたからいてくれ]라고 할 때의 걸다[かける]라는 뉘앙스가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비유적인 의미에서 걸리는[かけられる]’ 것이었을 터인 목소리라는 말이 현실계와 직접적으로 이어지고물질화되는 언어사용이 모든 곳에서 이뤄지고메타포로 말하지 못하게 된다시니피앙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バラバラになり]그것 자체로 자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정신분열증의 정신병리로 말하면아마 콘크리티즘concretism(구상화 경향具象化傾向)이 될 것입니다.

     다만처음에 언어가 들어올 때하나의 언어만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할 수 있으니까요밀러조차, ‘essaim’에 관해서클로스프스키=니체적인 주체의 동일성의 산란散乱을 말하고 있습니다.

 

치바 과연 그렇군요복수의 언어가 상처로서이른바 폴리트라우마틱’[polytraumatic]한 형태에서 들어온다인프라크리틱(infracritique) 서설」 무렵저는 폴리트라우마티즘과 모노트라우마티즘이라는 대비를 했고, 50년대의 라캉은 전형적으로는 모노트라우마틱한 이론으로서 수용됐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들뢰즈=가타리특히 가타리는폴리트라우마티즘을 도입했다는 것이 제 견해였습니다.

 

마츠모토 그것은 재미있네요라캉은 1974년에 외상(traumatisme)을 구멍-외상(trou-matisme)’이라고 말합니다불가능한 것즉 존재하지 않는 성관계로서의 외상은 구멍이라고 말이죠그러면 언어의 도입에 의해 구멍이 몇 개 비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어요들뢰즈=가타리의 라캉 비판에 연결하면외상은 사실 다공적[구멍이 여럿]이고 이러저러한 곳에서 누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됩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 씨는 존재론적우편적(存在論的郵便的)(新潮社, 1998)에서 불가능한 것은 부정신학에서처럼 하나인가아니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그 뒤에 나온 토가와 유키(十川幸司) 씨의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精神分抵抗)(青土社, 2000)각주에서 히로키 씨의 논의를 다루었습니다라캉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을 통해 불가능한 것과 하나[한 가지] 만날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것은 하나뿐이라고 해도동시에 불가능한 것은 복수적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왜냐하면 각 주체는 각각에 있어서 상이한특이적인 정신분석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이죠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신분석이라는 리미트(limit, 극한속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은 하나이게 되지만다른 한편 가타리는 집단성에 대해 생각하며시니피앙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그러면 불가능한 것이 단수인가 복수인가라는 대립은정신분석과 스키조분석의 양자에 있어서의 임상의 장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합니다개인의 정신분석이라면 역시 시니피앙의 주체를 원칙으로서 다루기 때문에구멍=불가능한 것은 하나가 되는 셈이지만라 보르도 병원처럼 집단적 실천에서 하면 복수가 된다.

 

치바 제 논의라면한 개인 속에 복수의 구멍이 있다는 사고방식에 집착하는데요그렇기에 해리(解離)나 다중인격을 문제 삼았던 것이죠.

      90년대 말 경은페르소나의 다중성이 인터넷이나 버추얼한 것의 등장으로 강하게 의식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 씨의 복수성에 대한 논의도멀티레이어(multi-layer)한 상황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죠저도 그 시기에 청춘기를 보냈기에그런 감각을 어떻게 이론과 결부시키면 좋을까줄곧 생각했습니다.

 

우츠미 우리는 본래 이디어트(idiot, 백치) 같은 것이며거기에 조금만 공약 가능한 곳이 있다는 거죠실제로 자신의 경험을 이른바 의식의 흐름처럼 관찰해 보면,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같은 매우 기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He war”가 아니라 “Ich denke” 같은 녀석이항상 가만히 들러붙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오히려 그것들이 불가사의랄까어째서 그럴게 될까그런 의미에서의 일자여라”, “개체여라는 명령법이 지금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지만향후 그것이 어떻게 될까?

 

다른 방식으로?

치바 여기서 저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오늘의 일련의 화제는 특이성단독성각각의 별개[それぞれパラバラ]라는 방향을 향합니다만굳이 나쁘게 말한다면결국 사람 각각이라는 얘기가 되며그것은 이론적 퇴행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만일 이론에 재미가 있다면다소 폭력적이라고 할지라도복수의 것에 걸친 어떤 일반화를 행하는 곳에 있으며결국 임상의 현장에서 개개의 것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례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면이론의 [종언]이 아닌가라고 말이죠마츠모토 씨는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마츠모토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모든 것은 싱귤라리티이다라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결론이 되면이론은 죽어버립니다라캉이 목표로 한 것은자기 자신의 분석에서 얻어진 싱귤라리티가 있다며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정신분석의 이론 자체를 갱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점입니다분석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싱귤라리티에 도달한 곳으로부터 새롭게 이론을 가다듬어 내어야 합니다그것이 분석가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가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분석가마다 주목의 중점이 다르다는 거네요그것은 분석가 자신의 생톰의 반영이며그것을 밑천으로 클라이언트와 관계함으로써변화를 야기한다.

 

마츠모토 그렇군요좀 더 근원적으로는학파 속에서 다른 분석가와 공유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다른 분석가와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분석가를 차례로 산출한다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분석가는 다시 새롭게 자신의 특이성과 만나서 정신분석 이론을 갱신한다이른바 영구혁명입니다.

 

치바 그래서 궁금한데요각각의 분석가가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고다른 분석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클라이언트와 마주대하려고 하며그 다른 방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요?

 

마츠모토 예를 들면라캉의 단시간 세션은그가 특이적으로 발견한 방식이죠.

 

치바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는 장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마츠모토 : 24시간 내구(耐久) 정신분석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분석가도 있을지 모르죠(웃음).

 

치바 그래서 효과를 올리도록 별난 분석가가 나와도 원리적으로는 더 좋다고.

 

우츠미 치바 씨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치바 씨가 부분대상과 팔루스적 대상 사이에 기관 없는 신체”, 또는 전체화하지 않는 정리[모둠]를 놓고 있는 곳에 주목하고 싶습니다한쪽에 부분대상으로서의 현실적인 것이 있고다른 한쪽에 팔루스적인 대상으로서의 상징적인 것이 있다고 하며그 중간에 기관 없는 신체가 있다저는 팔루스적 전체성과 전체 대상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클라인이 말하는 부분대상은 오히려 기관 없는 신체와 닮은 곳이 있습니다.

 

치바 지금의 3항도식에서는클라인의 부분대상은팔루스적 통일과 전체화하지 않은 정리[모둠] 둘 다를 거듭[중첩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저의 해석입니다.

 

우츠미 아까 말한 아이러니적 잠재성과 분화·현동성의 중간에 유모적 개체화가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치바 글쎄요그것을 저는 특히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현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상상적인 것혹은 요도[尿道]적인 것을 넣는 곳이 급소라고 하죠이 구도는 두 사람의 책에서 공통된 것으로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그리고 치료가 어디를 목표로 하는 것이냐 하면각각의 별개バラバラ의 단편으로부터 자그마한 [turn, 선회]을 만드는버추얼리티 쪽으로 확산하면서도, [갔던 길을] 약간 되짚어와서 기관 없는 신체 쪽으로 간다아마 여기에 싱귤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흄도 데카르트도 비슷한 것을 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흄의 경우이인증(離人症)적으로 각각의 별개가 된[산산조각 난] 단편을 어소시에이트[associate, 연합]합니다만그렇다고 강력한 자기는 만들지 않는다일단 다발 같은 자신으로 좋다고 한다데카르트가 과장적인 회의를 하는 곳은 급진적인 사디즘이죠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하고어느 정도의 네거티비티[부정성]을 견딜 수 있는가그 위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물음 아래에서마지막으로 잠깐 그래도 생각하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turn, 선회]한다. “코기토” 등이라고 잘난 체 하는 느낌이 아닌 것입니다그저 자그마한잠깐 동안 생각한다는 형식뿐으로아무런 내실도 갖지 못하는미결정의 중지[허공에 붕 떠있는 것]로서 코기토가 산출된다마지막은 신이라는 상징적인 것을 증명하고 보증인으로 합니다만그것은 그가 정말로 했는가 여부는 의문입니다.

 

치바 그렇게 하면-코기토-회의(악령)상징-상상-현실이라는 3항도식을 할 수 있다.

 

우츠미 그렇네요흄의 경우는 공간이 단편화하는 반면데카르트의 경우는악령이 시간적으로 절단하는 건데요이런 아이러니에서 유머로 [turn, 선회]한다는 도식이 임상적으로도 생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치바 단편화를 거쳐서가까스로 정리[모둠, 종합]로 돌아간다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고 저라면 말할 것제 논의의 경우그 차원은 특히 상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판타슴이죠라캉파에서는판타슴의 횡단이라는 논의가 될까요?

 

마츠모토 판타슴의 횡단의 경우는모든 상징체계의 폐절까지를 지향하는 아이러니이죠모조리 없애버리는 듯한.

 

치바 그래도 뭔가가 남죠?

 

마츠모토 외상적인 핵이 남는다그 잔여를 꺼내기 위해라캉은 생톰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죠우츠미 씨가 지금 말했듯이조금 돌아온다고 할까당분간의 정리[모둠, 통일]를 만든다고 할까.

 

우츠미 생톰 그 자체가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는 논의가 아닙니까?

 

마츠모토 콩시스탕스[consistance]의 이마지네르(imaginaire)라는 논의이죠(フィリップ・ジュリアンラカンフロイトへの回帰誠信書房). 밀러는 타투나 피어스로 무너지고 있는 신체의 고리를 지탱해도 되잖아라고도 말합니다.

 

우츠미 들뢰즈에게 공백의 [바둑판] 칸(case vide)”이라는 개념이 있죠단적으로 말하면상상력은 빈 그릇이 있어야 비로소 기능할 수 있습니다제가 자주 드는 사례로, “나는 퍼즐에 비유하면 빈 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혹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포화되어 버린다는 것 같습니다이것이 자폐증 스펙트럼에 있어서의 상상의 부자유의 원형입니다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그렇게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었고지금은 그 세계로부터 탈출하고 있습니다만이번에는 정형자의 얄팍한 세계いい加減世界에 들어가는 것의 고통이 있다후설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그는 이 방의 건너편この部屋こう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혹은 자신에게는 등이 없다がない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습니다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혹은 집들의 건너편에 사람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든가.

    이른바 장애의 세 쌍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운데상상력의 장애는 매우 조잡한 취급방식을 하고 있습니다수집벽이나 철도 마니아 등흥미 관심의 폭이 좁다든가곧바로 그런 얘기가 되어버립니다그런 게 아니라경험 속에 빈 눈금을 어떻게 만들까이렇게 그들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마츠모토 빈 칸이 있어서 처음으로 전개되는 유형의 공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죠.

 

우츠미 다른 식으로 공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츠모토 당사자인 후지이 히로코(藤家寛子) 씨는분명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보이는 수많은 집의 각각에 가정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고 썼네요집이 일 뿐이고그 속에는 가정이 있고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공상이 미치는 공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일까요?

 

우츠미 그것을 가진다고 포지티브하게 파악되지 않을까요정형으로 이끌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작업이 아니니까.

 

마츠모토 공상하는 공백의 칸이 없는 대신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우츠미 후설의 현상학도 하나의 예일 수 있죠가령 타인의 마음도 지금 보이고 있는 세계의 건너편이니까그에게 있어서는 자명한 것은 아닌 겁니다.

 

치바 얼마나 그것이 임시로 마련된 것인가에 대한 이론 구성이 되는 거네요.

 

우츠미 또 한 명을 거론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일까요그의 논리철학논고는 명제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도중에논리에서 윤리로 문제가 이행합니다이 전회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죽음이라는 것에 직면하여다시금 개체화가 촉진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관은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하듯이한계라는 막간隙間가까스로 자신의 장소가 확보되고 있습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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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고유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2)

- 베르그손에서 들뢰즈로 : 유물론의 가능성

ドゥルーズ固有哲学とは()

ベルクソンからドゥルーズへ : 唯物論可能性

자이츠 오사무(財津理, 法政大学教授)

듣고 정리이부키 히로카즈(伊吹浩一)

정황347

 


들뢰즈 고유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2.pdf



―― 저번에는 흄의 경험론을 중심으로 하여 들뢰즈가 흄의 철학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형태로 자신의 사상 속에 섭취하고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인 이번에는 들뢰즈 안에서 그것도 특히 거대한 철학자로서 자리매김 되고 있는 베르그손을 중심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자이츠 : 저번에는 동시에 들뢰즈에게서의 유물론의 가능성이라는 테마를 주고 그것을 의식하면서 말씀드렸는데요, 이번에도 계속해서 이 테마를 내걸고 그것에 조준을 맞추면서 고찰을 전개하고 싶습니다. 이때 전제에 두고 싶은 것은 레닌은 고려 밖에 둔다는 것, 경제활동을 유물론적 하부구조로 간주하는 입장을 유보하고, 옆으로 치워둔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서, 말하자면, 들뢰즈가 아카데믹한 철학적 전통 속에서, 어떻게 크리에이티브한 전망을 열고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때 전통적인 철학과 대비하는 데 있어서 다시 데카르트의 철학을 거론하고 구체적으로 비교하기 위한 최적의 예로서 그 심신이원론, 즉 신체=물체와 정신 사이의 이원론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 대해, 베르그손이 어떻게 변경을 강요하고 있느냐라는 관점에서 들뢰즈-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유물론에 바싹 다가서려 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최근 신경 쓰이는 것이 있으므로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들뢰즈 읽기 방식, 이해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는 것이며, 우선 그것을 확인해두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첫째로 내재적 이해이며, 이것은 들뢰즈의 텍스트를 따라 들뢰즈를 이해한다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의 것은 들뢰즈에게서의 외부 텍스트에 대한 연락을 통해, 들뢰즈의 관점에서 그 외부 텍스트를 해석하고, 이로부터 다시 들뢰즈로 돌아온다는 방식입니다. 들뢰즈는 수많은 사상가나 다른 학문 분야로 자신의 사색의 영역을 넓히고, 이것들과 함께 아장스망(agancement, 이종적인 것의 조합)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뢰즈와 하이데거를 대비해보면, 제게는, 하이데거는 일종의 블랙홀처럼 보입니다. 하이데거는 들뢰즈처럼, 하이데거 이전의 다양한 철학이나 다른 학문영역과 아장스망을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말하는 바의 존재의 의미가 그 자신의 관점에서 밝혀질 때까지는, 다른 모든 학문적 내용에 대해 이른바 판단중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죽을 때까지 존재의 의미를 명언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것을 명언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하겠죠. 결과적으로 하이데거의 신봉자는, 하이데거의 죽음에 의해 뒤쳐졌으며[고립됐으며], 그의 사후도 하이데거 철학의 암흑 속에 속박되었습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을 하이데거라는 블랙홀에 빨아들이는 듯한 «하이데거 교»라고 해야 할 경향이 보입니다. 독자의 모든 관심을, 하이데거 이외의

독자의 관심의 모두 하이데거 이외의 것으로 돌려지지 않도록 하고, 하이데거가 시사하는 존재의 의미에만 집중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대해, 또한 존재의 의미의 원리적 암흑에 대해, 만일 기회가 있다면 자세하게 논하고 싶습니다만,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죠.

반면 들뢰즈의 자세는 다르네요. 들뢰즈의 사상은, 그 안에 들어가면 그 안에 있으면서 바로 바깥으로 나옵니다. 거꾸로 보면, 바깥에 있으면서 안에 있다는 식입니다. 들뢰즈 자신의 서술의 구조는 마치 양파껍질 같은 것이며, 그의 사상은 무수한 사상가나 연구자들이 가졌던 것의 축적에 의해 성립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뢰즈 사상의 고유성은, 들뢰즈 자신의 관점에 의한 이종적인 것의 조합의 방식에 있다고도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들뢰즈에게서의 외부 텍스트에 대한 연락에 의해, 들뢰즈가 외부로부터 끌어온 것을, 예를 들어 스피노자나 니체나 칸트나 베르그손을, 들뢰즈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동시에 그로부터 들뢰즈 사상을 이해해본다는 당연히 하나의 필요한 작업이 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방식은, 들뢰즈의 관점을 참고하여, 그러나 들뢰즈의 말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의 각각이 자신의 분야에서의 창조활동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분야는, 학문의 분야라도 좋고, 예술의 분야도 좋고, 일상생활이라도 좋고, 그것은 다양하죠.

이러한 읽기 방식, 이해 방식이 있다는 것을 제안한 뒤, 잠시 쓴 소리를 해야겠습니다. 제 자신은 젊은 연구자라고 계속 생각했습니다만, 어느덧 나이만 먹었습니다. , 저보다 물리적으로 젊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젊은 들뢰즈 연구자가 활약하게 됐습니다만, 그 몇 사람에게 보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지적해둡니다. 그것은 언뜻 보면, 두 개의 외부 텍스트에 대한 연결에 관련된 해석의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의 것이 행해지고 있다. , 들뢰즈가 인용하고 있는 것에 대한, 혹은 관계가 있는 것 같은 것에 대한 «환원 작업»일 뿐인 것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종의 «환원주의»에 빠지는 젊은 연구자들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들뢰즈의 관점에서 외부 텍스트를 다시 읽고, 그로부터 들뢰즈를 고쳐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언저리에 들뢰즈의 원료가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들뢰즈 이외의 것으로 해소해버리고 있다. 이것은 들뢰즈를 일본적 아카데미즘의 한 가지 방식으로 처리하는 입장이네요. 그것은 결국, 들뢰즈의 사상을, 해당 연구자 동료의 수준으로 낮춰버리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클로소브스키는 니체에 대해 들뢰즈보다도 더 대단한 것을 말했으며, 들뢰즈는 거기에서 배웠구나를 발견하고”, 일종의 아는 체 하는 얼굴을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들뢰즈를 원료로 삼아, 자신이 공부한 성과를 연구자 동료에게 과시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들뢰즈의 내재적 이해를 멀리하게 되죠.

다소 격한 비판을 했습니다만, 이것을 읽으면 몇몇 젊은 연구자들로부터 제게 차이와 반복을 번역했다고 해서 권위자인 양 행세하지 말라는 욕설이 날아올 것 같습니다. 또한 들뢰즈 고유의 철학을 왜 자이츠(財津)가 말할 권리를 갖고 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죠. 이 있어야 할 반론에 대해서는, 저는 들뢰즈 고유의 철학을 말할 권리는 없다고만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 들뢰즈의 지시에 따라서 철학과 사상의 연구를, “도래할 민중을 생각하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도래할 민중이 구체적으로 어떤 민중인가는, 그 설계도는 업어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선동되고 싶어하거나 영합을 요구하는 한에서의 대중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게 훈고학자라는 고마운 칭호를 수여해주신 평론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로서는, 저를 사상 연구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배우는 민중의 한 명으로서, 또한 배우는 민중과 함께, 들뢰즈의 시네마의 번역과 연구를, 그리고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의 번역과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성과는 조만간 인터넷에 무료 공개하겠습니다. 관련된 출판사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다시, 젊은 연구자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자네들은 자기 논문에, 무턱대고 외국어 원문의 이름이나 참고문헌을, 그것도 외국어인 채로, 마치 훈장을 붙인 것처럼 달고 있지만, 도대체 들뢰즈를 누구를 향해 연구하고 있느냐고. 그것은 도래할 민중을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닌가라고.

 

――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독해 방식이나 이해 방법은?

자이츠 : 내재적 이해인 동시에 외재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배우는 민중의 하나로서, 제 나름의 단면 이번에는 유물론의 가능성이라는 테마로 에서 읽어나간다는 것이며, 이것은 환원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그렇군요. 바로 들뢰즈 자신의 관점에 의한 이종적인 조합, 들뢰즈 철학의 고유성의식하가”, 들뢰즈를 읽어나가는 것이니까요. 그런 전제가 되는 읽기 방식, 이해 방식을 확인해 둔 다음, 그러면 바로 본론에 들어가죠.

우선 처음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관련되는 한에서의 베르그손의 철학 자체, 거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자이츠 :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베르그손의 독창성을 확인하기 위해, 우선 그것과 대비하는 데에 최적인 데카르트를 등장시키겠습니다.

데카르트는 물체와 정신을, 본질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구별해두고, 더욱이 그런 관계 맺음들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이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에는 아포리아가 있다고 지적되고 있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데카르트의 입장에 머물러 있는 한 이 아포리아는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데카르트는 물체와 정신을 구별하고, 물체는 3차원적 공간에 자리매김 되는 ’, 3차원적인 양을 가지고 있는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정신은 3차원적인 양을 갖고 있지 않는 ’, 원리적으로 벡터 공간에 자리 잡을 수 없는 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정신 혹은 마음은 단지 의지하거나 이해하거나 상상하거나 감각하거나 등등, 뭉뚱그려 사고하는것을 본질로 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전제를 인정한다면, 적어도 난문이 두 개 나옵니다. 우선 공간성 없는 정신의 작용인 의지가, 즉 비물체적=비신체적인 정신 작용이. 정신성이 전혀 없는 물체=신체에 어떻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과를 잡으려고 의지하면 손이라는 자신의 물체가 움직인다. 신체라는 물체는 자기(라는 애매한 것)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비물체적인 정신이 손이라는 자신의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면, 원리상, 그 밖의 어떤 물체도 움직이게 할 가능성이 나오는 것 아닌가. 합리주의자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우리는 그다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오컬티즘이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난문은 반영론입니다. 왜 정신적인 3차원적 물체가 공간성을 전혀 갖지 않는 정신 속에서 재현전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이상과 같이, 미리 물체와 정신을 원리적으로 구별해 놓고 이것들의 관계를 생각해간다고 하는 입장을 넘어서려고 한 것이 바로 베르크손입니다. 그 해결책이 물질과 기억에서 제시된 이마주(이미지)’라는 개념입니다. ‘이마주라는 개념은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완화하고, ‘물질과 정신의 연속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제출된 것입니다. 데카르트적 물체가 아니라 베르그손적 물질의 총체가 이마주인데요, 이것은 영미의 연구자들로부터, 애매한 문학적 표현에 기대는 베르그손적 개념의 하나라며 혐오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앞에 보이는 사과는 이마주이며, 우리의 신체도 이마주이며, 따라서 뇌도 이마주이며, 기억의 내용도 이마주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베르그손은 물질이라는 말을 꽤 애매하게 쓰고 있으니, 더더욱 골치 아픕니다. 이마주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베르그손의 물질기억의 구별과 그 관계가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양자의 관계의 내용이 물질과 기억의 사상 전체를 구성해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제부터 풀어나갑시다.

여기서 몇 가지 프랑스어를 꺼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프랑스어를 알지 못해도, 제 논지는 알게 될 겁니다. , ‘물질 matiére’이란 이완(느슨함), relâchement’이며, 그것에 대해 지속 durée’이 있고, 이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파악되는 의식’(혹은 의식상태)이며, ‘응축 contraction’(기존에는 수축으로 번역되었다)이라고 합니다. 이 응축 contraction에 관해 들뢰즈는, ‘수축으로 번역하는 일면적이며, 근본적으로는 누적적으로 융합해가는 것이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순간적, 계기적 물질적 사건이 어떤 근원적인 주관성의 수준에서 받아들여지며, 보존되고 융합되어 간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저는 contraction축약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사실은 아직도 적절한 번역어를 못 찾았어요.

그러면 지속부터 살펴보죠.

 

―― 지속이란 의식의 작동의 가능 깊은 수준의 것이죠.

자이츠 : ,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베르그손의 지속이란 개념은, 우선 초기의 시간과 자유 :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서의 베르그손은, 다소 데카르트를 닮았으며, 물질적 외부세계와 정신적인 내면세계를 구별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은, ‘표층적인 자아깊은 자아로 성립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표층적인 자아는 외부세계와 하고 있습니다. 외부세계 그 자체는, 공간적인 것이며, 거기에서 생기는 계기(繼起)적인 현상은 수량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운동도 위치의 이동이라는 것이 됩니다. , 외부세계의 모든 것은, 공간적으로, 수량적으로, 즉 숫자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표층적인 자아는, 그런 외부세계와 접하고 있다면, 그로부터의 영향이 아무래도 내면세계에 미치겠죠. 거기서 우리는 자아 혹은 순수의식에 있어서의 순수지속, 본래는 상호침투적 상태로서 살고 있을 것인데도, 수량적, 대상적으로 표상하게 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그것으로는 자아의 진짜 모습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런 셈이어서, 진정한 지속은 내적으로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하는 것이라고 주장됩니다. 아무튼 정신의 순수 지속은 결코 상호 외재적인 순간의 연속도 아니고, 공간적으로도, 수량적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것을 초기에는 말했던 것입니다만,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의 단계가 되면, 어떤 전환을 행합니다. 그는 외부세계와 내면세계를 어떻게든 연속시키고 싶다는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직관과 지각이라는 말이, 이른바 서로 뒤바뀌어버린다. 시간과 자유에서는 직관이 외적 세계에, 지각이 내적 세계에 대응했습니다만, 물질과 기억이 되면, 그것이 역전됩니다.

그런데 저는 물질과 기억의 세계는, 그 모든 것이 물()아 아니라 과정이라고 본다면, 꽤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베르그손이 말하는 순수지각이라는 과정을 기축으로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기억의 개재 없이 행해지는 지각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베르그손은 꽤 애매하게 말합니다만, 문학적인 서술을 하고 있으며, 제 자신도 베르그손에 관해 이러하다고 단언하는 데에 꽤 망설임이 있습니다만, , 상당히 단순화해서 정리했습니다. 이하에서의 제 해설의 거북함을 참작해주십시오.

기억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우선 다음의 것을 이해해주십시오. ‘순수지각이란 물질로부터 직접적, 순간적인 비전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수지각에 있어서의 이마주의 발생이 있습니다. 이 순수지각에 있어서의 이마주는 물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것입니다. 그런데, ‘순수지각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이완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과학이 규정하고 있는 물질’, 혹은 물체의 규정이 가능해집니다. 베르그손에서 가장 애매한 것은 인간의 주관성이 일절 개재하지 않은 물질적 세계조차 수학적으로 표현되면서 감성적인 성질들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관성이 삭제된 물질적 이마주란 무엇인가, 그 언저리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가, 확실히 문제가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지각기억의 개입에 의해 응축된다(기존의 번역어로 말하면 수축한다). 더구나 거기에 생활상의 이해관계가 개입하면, 순수지각은 구체적인 지각이 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입니다. 이것도 또한 이마주입니다. ‘순수지각의 수준에서의 이마주가 있고, 또한 구체적인 지각의 수준에서의 이마주도 있습니다.

 

―― 얘기가 약간 복잡하니까,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십시오. 베르그손은 물질과 정신을 연속한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라는 문제의식이 있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마주라는 개념이 있으며, 그리고 이 이마주에는 순수지각으로서의 이마주순수지각이 더 압축된 구체적인 지각으로서의 이마주의 두 종류가 있다는 거네요.

자이츠 :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물질과 지속(의식)”의 문제로 돌아가죠. 들뢰즈는 물질과 지속은 본성상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 “본성상의 차이입니다. 들뢰즈가 본성상의 차이라고 할 때는 일단 물질과 지속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십시오. 그러나 곧장, 들뢰즈는 얘기를 밀고 나가, 물질과 지속의 차이는 표면적 차이일 뿐, 진짜 본성상의 차이지속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 물질과 정신의 연속성이라는 문제의식이 이 발언의 배경에 있다고 .

자이츠 : 지속으로서의 본성상의 차이분할되면 본성을 바꿔버린다는 잠재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까부터 순수지각을 기축에 있어서 본다는 전제 아래서 얘기를 풀어왔습니다. 또한 시간과 자유에서는 심층의 자아와 표층의 자아의 구별이 있다고 말했어요. 이는 어찌 보면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라는 사고방식 같지만 사실은, 베르그손에게도 들뢰즈에게도 별로 친숙하지 않고 그들의 사상을 해석할 때에는 취해서는 안 되는 관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해되기 쉬운 이 도면을 편의적으로 채용해서 얘기를 진척시킵시다.

순수 지각을 완화하면, 훨씬 더 물질적인 것 쪽으로 나아가며, 순수 지각이 기억의 개입에 의해 응축되고 어떤 무게를 갖고 생활상의 이해가 들어옴으로써 구체적인 지각이 되며,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이 된다. 제가 보기에 이런 논의의 수준이 차이와 반복2장에 있는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서 고쳐 읽혀지고, 활용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 베르그손의 물질과 정신의 연속성이라는 문제의식이 들뢰즈에게 유입되고, 그것이 시간론으로서 전개된다는 것이군요.

자이츠 : 그렇습니다. 그럼, 들뢰즈의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이것은 2장의 그것 자신을 향한 반복에서 얘기되고 있는데요, 제 자신, 이 제목의 번역이 좋은지 나쁜지 아직도 자신이 없습니다. 이 표제의 원어는 La répetition pour elle-même인데요, 이것은 헤겔의 말투를 닮았습니다. “그것 자신으로 향한다, 헤겔적인 혹은 사르트르적인 대자라고 번역됩니다. 과거 향자(向自)’라는 번역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것 자신으로 향한다라는 번역을 할당했습니다. 그나저나 여기서 주관성의 어떤 독특한 수준이 분석되고 있습니다. 들뢰즈에게서 시간의 종합에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세 가지가 있고, 첫 번째 종합은 살고 있는 현재”, 두 번째 종합은 순수과거”, 세 번째 종합은 미래가 되며, 각각 현재론, 과거론, 미래론이 되고 있다. 거기서 현재에 대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이 첫 번째 종합은 아주 재미있는 곳으로, 그 이면에는, 분명히 메를로-퐁티의 지각론을 넘어서는 기획이 숨겨져 있네요.

우선 앞서 말한, 물질적인, 순간적인 계기(繼起)를 거론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틱톡, 틱톡, 틱톡등의 시계소리, 이런 물질적 수준을 상정합니다. “이 울리고 그것이 소멸하고 다음의 에 울린다. 이렇게 물질계에서의 일종의 반복에는 자기 보존이 없습니다. 전의 순간적인 현상은 금방 사라지고, 다음의 순간적인 현상이 나타나며, 또한 금방 사라집니다.

들뢰즈는 더 나아가, 어떤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을 상정하고, 이를 관조하는 정신이라고도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관조하는 정신이란 흄과 마찬가지로 작용의 주체인 자아따위가 전혀 아니고, 그런 것이 없는 곳에서의 관조이며, 일종의 과정입니다. 들뢰즈는 이것을 수동적인 주관성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관성이 아닙니다만, 의지라든가 이해, 지능의 수준의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가 아닙니다. 전혀 주관성이 개재하지 않는 물질적 수준의 틱톡, 원초적인 감성에 인상으로서 들어오면, 최초의 관조하는 정신에 보존되며, 다음의 이 오면, 이전의 과 이 이 누적적으로 포개진다. 이처럼 차례대로, 이전의 순간적인 인상이 보존되고, 새로운 인상으로 융합되어간다. 여기에 베르그손이 말하는 축약(응축, 수축)’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물질적 수준에서의 반복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다름=차이가 근원적인 주관성에 발생합니다. 들뢰즈는, 그것은 일반성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성이란, 차례대로 오는 인상들의 개별성, 특수성에는 구속되지 않는 일종의 효과=결과입니다. 단순한 물질적 수준의 특수한, 혹은 개별적, 구체적인 계기적 현상이, 관조라는 수준에서 인상으로서 거둬들여지고[받아들여지고], 그것이 누적적으로는 융합되어 가면, 새로운 것, 즉 변화, ‘차이가 생산된다. 차이가 우선은 일반성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일반성은 물질적 계기에는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시간 규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인상들은 순간마다 누적되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항상 살아 있는 현재속에서 인상들이 과거라고 규정되어 보존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것은 후설의 내적 시간의 현상학에서의 과거론을 전제로 한 논의입니다. 근원적인 감성=주고나성은 항상 살아 있는 현재입니다. 차이와 반복2장의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의 수준에서는, 인간은 언제나 현재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것은 제 예로 설명해보면, 제가 수업의 시작 시간을 신경 쓰면서 교실에 들어갈 때, 그 교실을 객관화하고, 교실을 중심화하고 자신의 자릿수를 합니다만, 그러나 앉자마자, 설령 자신이 교실의 구석에 앉더라도, 그곳이 자신에게 여기이며 지금이며, 즉 자신이 교실의 시공의 중심이 됩니다. 이것을 가장 깊은 곳에서 생각해보면, 나 없는 주관성의 항상적인 살고 있는 현재’, ‘살고 있는 지금, 근저의 시간적인 장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산 현재속에, 점점 순간적인 인상을 보존하고, 그것이 과거라는 시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산 현재의 내부에 성립하며, 그 외부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게다가 틱톡이 어느 정도 계속된 후, ‘에서 물질적 현상이 멈춥니다. 그러면 주관성 속에서도 에서 멈추는가. 멈추지 않습니다. 자동적(automatic)으로 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야구선수의 타격 같은 것으로, 직구만 던져지고 있다면, 직구가 점점 의식 속에 누적되어가고, 이번에는 커브를 던지게 되면, 직구를 예상하고 있기에, 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근원적인 감성의 수준에서 축약이 이뤄지면, 이해도 의지도 작동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미래를 기대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 현재의 내부에 과거의 차원과 미래의 차원이 성립된다. 여기서, 과거, 현재, 미래가 병렬해 있다거나,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는 일상적인 관념은 우선 제거됩니다. 그 대신, ‘산 현재속에 과거가 성립되며, 과거의 무게에 의해 미래를 예기/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이 주창됩니다. 이 수준에서는, 표층 수준에서의 지성이나, 상식적인 기억이나, 이로부터 의지적인 예상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삽입해봅시다. 이런 사고방식은 관념론인가, 아니면 유물론이가?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차이와 반복2장에 있는 아비투스, 수동적 종합, 축약, 관념이라는 절의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지각감각의 구별이 이뤄지고 있으며, 매우 복잡하지만 과감하게 단순화하겠습니다.

근저에 신체의 수준이 상정되고 있습니다. 신체의 수준에서, 축약의 과정, 즉 시간의 종합 과정이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언뜻 황당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물, , , 공기를 재확인하고 표상=재현전화하기 전에, 게다가, 그것들을 감각하기 전에, 축약된 물이며, 땅이며, 공기이다. 모든 유기체는, 그 수용적 요소에 있어서도 지각적인 요소에 있어서도, 또한 그뿐만 아니라, 그 내장에 있어서도, 축약의, 과거 파악의, 그리고 기대의 총합인 것이다”(123). 인간은 축약된 물, 땅 등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야만적인, 혹은 신비적인 가설이 전혀 없다”(125)고 잘라 말하고 있듯이, 인간은 축약된 물 등이라는 것은 농담도, 단순한 비유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신체 외의 물질적인 과정이 신체 내의 과정에 거둬들여지는[받아들여지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신체 자체를 원초적인 감성이라고 보면, 신체가 외부로부터 입력된 그 내용을 누적하는 것처럼, 근대철학이 생각했던 의식, 혹은 이해작용이나 기억이 작동하기 이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축약, 혹은 지금 말한 축약이 이미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의 신체는 외부와 교류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물질적인 것을 외부로부터 거둬들여 배출합니다만, 그런 생리적인 과정을, 베르그손에게서의 순수 의식의 축약의 과정과 똑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동시에 이 신체적인 과정이, 즉 원초적인 감성이, 감각의 수준, 더 나아가 들뢰즈가 말하는 표상=재현전화 représentation라는 능동적 이해, 해석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체에 있어서의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의 과정을 상정하나는 데에, 들뢰즈 철학의 모종의 유물론적인 출발점이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 신체라는 이 정신(의식) 이전에 존재하고, 더욱이 이것을 규정하고 있다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이군요.

자이츠 : 그렇군요.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단순한 이 아니라 물질적인 과정이, 들뢰즈적 유물론의 이며, 그것은 일단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만, 정신 이전적인 것이라기보다, 정신과 동시적이며, 연속적이라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동물이 목이 말라서 물을 원하고 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 경우, 이미, 신체적=유기체적=물질적 수준에서,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의 수준에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의 과정, 즉 축약, 즉 수동적 종합이 행해집니다. 들뢰즈는 거기서 축약되는 것은 signe가 된다고 말합니다. 해석을 위해 signe, 저는 이것을 표시라고 번역했습니다. 종래, 기호학에서는 기호라고 번역된 것입니다. 표시라고 번역했느냐 하면, 근거로서 니체를 들먹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요,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죠. 어쨌든, 베르그손의 축약의 내용인 이마주, 들뢰즈에 있어서는 표시입니다. ‘표시감각되기도 하고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고, 결코 신호가 아닙니다. ‘해석은 지성의 수준에서 행해지며, 항상 능동적으로 행해집니다. 거듭 말하자면, 신체 수준에서의 과정은, 이미 수동적 주관성의 종합과 동형적 과정이며, 그 내용은, 베르그손적인 이마주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이 표시를 이룬다. 그것이 감각되고 지각되고 더욱이 능동적으로 지성에 의해 해석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이 마른 동물이나 인간이 물을 원해서 찾으려고 할 때, ‘H2O’를 생각하고 찾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연과학적으로 H2O라고 표시되는 물질과, 목이 마른 동물들이 찾고 있는 물질은 닮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박한 유물론은, 자연과학적으로 H2O라고 표현되는 물질과, 목이 마른 동물이 원하는 표시혹은 이마주로서의 중에서 어느 쪽을 진짜 ()’이라고 해석합니까?

 

―― 혹은 둘 다 ()’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이츠 : 들뢰즈는 이 양자는 닮은 것도 닮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체는 외부의 물질적 사건을 받아들이고, 신체 안에서의 축약 과정에 의해 이마주’=‘표시형성합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자연과학적 물질 그 자체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동물은, 표시감각하여 을 찾아내고, 고등동물일수록 그것을 해석하여 학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의 틱톡이라는 시계소리의 예로 말한 것은, 일견 관념론으로 보입니다만,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원초적으로는, 신체로서의 물체에서 생기는 유물론적 과정입니다. 이렇게 들뢰즈에 있어서는, 유물론은, 신체적 수준에서의, 혹은 생명적 감성의 수준에서의 과정으로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에, 베르그손에서 들뢰즈로 흐르고 있는, 유물론적으로 해석 가능한 사상 경향의 하나, 구체적으로는 베르그손에게서의 순서 지각의 사고방식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 신체라는 물질적 수준에서의 과정이 기반이 되고, 감각이나 이해나 해석 등의 정신적 행위가 형성된다, 혹은 그것을 규정한다는 것이네요. ‘해석이라는 정신에 있어서의 독자성에 주목함으로써 거꾸로 물질적인 것(=신체)과의 연속성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역시 하부구조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이라는, 전통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이 반복되어 버리지 않나요?

자이츠 : 아니오. 들뢰즈는 신체=물체와 정신 사이의 관계를, 그런 변증법적 관계로서 파악하지는 않습니다. 과연 신체=생명적 감성이 하부구조로 보입니다만, 그러나 신체 수준의 과정이, 감각 수준, 지각 수준, 이해 수준, 욕구 수준 각각에서, 유사하지 않고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각각의 과정이 서로 간섭한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이것은 알튀세르의 중층적 결정의 사고방식을 생각나게 합니다만, ‘변증법모순의 개념이 배제되고 있으니까, ‘중층적 결정과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 그렇군요. 그러면 다시, 신체=물체의 수준에서의 수동적 종합과 시간론 사이의 연결을 설명해주실 수 없을까요?

자이츠 :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에 있어서의 수동적 종합의 시간은, ‘산 현재입니다만, 여기서 또한, 데카르트를 등장시켜서,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의식과 매우 가깝고, 데카르트의 디지털적 시간론과 대비하면서 얘기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데카르트는, 시간은 순간=지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지금, 다음의 지금, 다음다음의 지금으로 계속된다. 그렇기에, 과거는 이전의 지금이며, 미래는 다가오는 지금이 된다. 그래서 시간을 인위적으로 멈춰보는, 예를 들어 시계를 보면 4413초가 됩니다만, 여기서 시간을 멈췄다고 합니다. 4413초는 1초 전의 과거, 4411초는 2초 전의 과거라는 식으로 소멸된 과거가, 염주알처럼 줄곧 옛날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만, 그것은 역시 1초 후, 2초 후와 미래로 향해 염주알처럼 이어져 있다. 이처럼 지금이 가장 리얼리티가 있는 것입니다만, 과거는 소멸한 것, 미래는 이윽고 오는 것처럼, 이것들은 역시 지금을 중심으로 병렬된 직선적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것이 데카르트의 시간론,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의식입니다.

이 논의를 둘러싸고 철학 영역에서는 이상한 논의가 있었고, 순간이란 몇 분의 1초인가? 순간에는 시간적 양이 있는가? 전혀 시간적인 양이 없고, 나타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인가? 양이 없다면, 왜 존재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그것을 지각할 수 있는가? 등등. 이러저러하게 논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당한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당시, 데카르트의 반론자는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순간과 순간은 이어져 있는가, 아니면 끊어져 있는가? 혹은 1초 전의 세계는 지금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끊어져 있는가? 세계는 시간적으로 연속인가, 단절인가? 이런 매우 혹독한 문제를 제출받은 데카르트는 단절 쪽을 취했다, 즉 일종의 디지털 이론을 취했던 것입니다. 각 순간은 나타나는 동시에 소멸하고, 더욱이 수량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미분개념의 선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철학사에서는 라이프니츠의 방향으로 가는 철학적 표현이죠.

그러면 미래는 어떻게 약속되는가? 지금이라는 순간은 소멸한 채로는 안 되는가, 그리고 세계는 소멸한 채로는 안 되는가? 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거기서 데카르트는 신의 창조설을 제출합니다. 신은 무로부터 세계를 창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일회성이 아니라, 각 순간마다 창조가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근대철학은 이처럼 때때로 어려울 때면 신을 찾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신화적인 설명입니다만, 그러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단절을 넣지 않으면 변화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변화란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것, 상이한 것입니다. 전면적으로 달라져버린다면, 거기에서 변화를 식별할 수는 없죠. 예를 들어 한 소년이 성인이 되고 늙어갈 때, 거기에는 어딘가 똑같은 것이 없으면, 똑같은 인물이 변화한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의 연속창조설은, 이런 의미에서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무척이나 편리한 것입니다. , 단절에 의해 차이를 설명하고 연속창조에 의해 동일성을 보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산 현재라는 장을 상정합니다. 게다가 이것은 움직이는 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런 현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산 현재는 자신의 시간에 있어서 구성하는 과거에서 미래로, 그 때문에 바로 개별적인 것(과거)에서 일반적인 것(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120). “시간이 현재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조금씩 겹쳐진 도약을 통해, 현재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132).

움직이는 산 현재가 항상 성립하고, 과거도 미래도 이것의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산 현재의 안쪽에 과거가 보존되고, 과거라는 차원이 성립한다. 축적된 과거의 무게에 의해, 산 현재의 내부에서 자동적으로automatic 미래가 기대된다. 모종의 심리학에서는, 과거는 요컨대 기억의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미래는 예기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심리학적 설명에 대해, 들뢰즈는 후설의 시간론을 바탕으로, 앞서 말했듯이, 우선 근원적인 유기체의 수준으로까지 내려가고, ‘산 현재라는 장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 말했습니다만, 들뢰즈는 물질과 지속의 차이는 표면적인 차이일 뿐이며, 진짜 본성상의 차이지속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베르그손적 지속은 상호침투적은 변화하는 상태입니다. 의식의 지속은 결코 데카르트적인 상호외재적 순간의 연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와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신체의 수준에서의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에 있어서의 산 현재는 또한 지속이며, ‘본성상의 차이이며, ‘자기와의 차이이며,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변화의 논거와는 상이한 것의, 들뢰즈적인 변화의 논거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들뢰즈의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의 첫 번째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들뢰즈의 시간론 전부를 얘기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들뢰즈의 시간론은 첫 번째 종합에 있어서의 산 현재를 근저에 둔 시간론, 두 번째의 종합에 있어서의 베르그손의 순수과거를 근저에 둔 과거론, 그리고 세 번째의 종합으로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근저에 둔 미래론이 되고 있습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이런 세 가지 시간론을 내놓은 다음, 정신분석의 무의식 이론에 의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시간론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이와 반복2장은 아직 본격적으로 분석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라캉과 들뢰즈의 관계는, 제 번역에서도 주를 붙일 수 없었습니다. 지금 라캉을 원문으로 다시 읽고 있기에 머지않아 자세한 분석을 하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 대한 해설은, 아직 아무래도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만, 다음번에는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의 이야기로 옮겨가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에 일러두고 싶은데요, 제 해설로 들뢰즈를 알았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제 얘기는 어디까지나 들뢰즈 자신의 책을 읽으라는 권유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다음번에는 지금까지 건드리지 않았던 베르그손의 기억이라는 개념과 관련됩니다. 거기서 들뢰즈의 수수께끼 같은 과거론을 살펴봅시다.

 

―― 과연, 드디어 차이와 반복의 핵심 중의 핵심으로 들어가네요. 저번에는 흄, 그리고 이번에는 베르그손을 통해 들뢰즈의 사상의 고유성을 독해해냈습니다. 다음번은 또 다시 베르그손이 등장하고, 과거에 있어서의 반복론으로 돌입하겠네요. 어려운 영역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인데요, 너무 기대됩니다. 이번에도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7월호에 수록되었던 글이다. 지금도 공개되어 있는 글이지만, 한국어판이 별도의 저작권 계약을 맺고 재출간되고 있는 형국인지라, 요청이 들어오면 삭제해야 할 수도 있다. 원래 학생들에게 수업자료로 제공하기 위해 옮긴 것인만큼 직역이 아니라 의역을 서슴치 않았다. 따라서 꼼꼼한 독해를 원한다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서 원문과 대조해 읽어보면 될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지는 의문이지만..ㅎㅎ

* http://www.monde-diplomatique.fr/2006/07/SAPIR/13645
* 글쓴이 : 자끄 사피에르(Jacques Sapir)

“경쟁은 판매를 촉진하며 기업이 판로를 개척하게끔 하며, 바로 이것에 의해 고용이 촉진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에도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덕목들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신앙에, 이해관계에 가까운 원리처럼 보인다. 경쟁은 좋은 말이라는 도그마 아래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의 논의에 의문을 품을 수 없으며, 기업의 선택을 강제하게 된다.
권위의 논증처럼 활용되는 경제학의 그럴싸한 ‘공리’는 정치적 토론을 오염시켜 왔다. 예를 들면 보호주의, 공공 기업이 완수하는 적극적인 역할, 국가에 의한 개입 정책 등, 어떤 종류의 테마는 논의의 대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경제적인 ‘공리’는 ‘객관적’인 특징을 갖기에 정치적 대립을 초월해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러한 경제적 ‘공리’가 정말로 사회과학적인 기반에 입각해 있다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도 자연계의 법칙에 회의를 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 있는 지반이 의심스럽다면 그때까지의 논의에서 점하고 있던 지위는 사기일 뿐만 아니라 반민주주의적인 약탈 행위라고 말해야 할 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적 책임을 질 리가 없는 ‘전문가’라는 일부 소수파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경제학이 과학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경제 연구는 규칙에 복종하여 논증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Bruce J. Caldwell, “Economic methodology : Rationale, foundations, prospects,” in Uskali Maki, Bo Gustafsson and Christian Knudsen, Rationality, Institutions & Economic Methodology, Routledge, London and New York, 1993.]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경제학 사상은 이러한 절차를 무시하는 것에 성공하기에 이르렀다.[Daniel M. Hausman, The Inexact and Separate Science of Econom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UK), 1994, 특히 제13장의 “On dogmatism in ectoproctes : The case of preference reversals”를 참조.]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말할 때의 가장 중요한 공리는 경쟁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명제이며[Frederic Lordon, “Et les lendemains n'ont pas chante...,”, Le Monde diplomatique, mai 2005.], 그것은 거시경제에서는 자유무역, 미시경제에서는 유연성을 중시해야 할 근거로 간주된다. 유럽 헌법 초안의 작성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가 경쟁을 최대의 원칙으로 내세웠던 것도 그러한 발상에 근거하고 있다. 경쟁이라는 테마는 근대 경제 사상에서 오래된 쟁점이다. 하지만 이들 경제학자들은 일정한 상황에서 특정 결과를 실현할 때 경쟁이 개개인의 행위를 조화시킬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라면 경쟁이라는 테마는 현실에 입각한 쟁점일 수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경우 경쟁이 하는 역할은 하나의 도그마로 되어 버렸다. 즉, 경쟁이 절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것의 구체적인 실행 조건을 초월해 버린 것으로 정립된 것이다.
이러한 도그마의 기원은 18세기에 고전파 경제학을 만든 데이비드·흄, 베르나르 드 멘드빌(Bernard de Mandeville)과 아담 스미스의 저작에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극히 이기적인 목적에 자극을 받은 개인들 간의 경쟁이 자동적으로 집단에게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자유무역에 관한 흄의 최초의 일반이론, 멘드빌의 ‘벌의 우화’, 스미스의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러한 생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세 사람의 입론은 검증되지 않았다.
국제 무역은 자동적으로 균형에 이른다는 흄의 이론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옹호자에 의해서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어떤 비현실적인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로 경제 주체는 즉각적으로, 또한 완전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둘째로, 공급과 수요의 사이, 또 공급․수요 각각의 내부 조정은 일체의 비용이 들지 않는 순간에 실현된다. 흄의 이론에서는, 다양한 재화와 용역은 수요 측면과 공급 측면 양 쪽에서 보았을 때 완전히 대체가능하다는 것이 전제로 깔려 있다.
벌이 알지 못한 채 둥지를 만들듯이, 개인적 욕심(에고나 야심)은 때로 의도치 않게 ‘공익’으로 전환된다는 멘드빌의 설도 순전히 문학적 공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담 스미스에 이르면 ‘보이지 않는 손’의 메커니즘(시장은 그때가지 생각할 수 있었던 시스템보다도 적합하게 생산과 소비를 자연스럽게 배분한다고 한다)을 논증했던 적도 없으며, 역사가 장-클로드 페로가 말했듯이, 과학적 담론을 구축하기 위해 종교적인 난문(아포리아)를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Jean-Claude Perrot, Une histoire intellectuelle de l'economie politique (XVIIe-XVIIIe siecle),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 (EHESS), Paris, 1992].
이 세 사람은 의사-자연적인 ‘법칙’을 주장함으로써 실제로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흄은 자유 무역에 의해서 만인의 행복을 달성할 수 있게 되면 국가 간의 분쟁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David Hume, Political Discourses, Edinburgh, 1952. 또, Jean-Claude Perrot, Une histoire intellectuelle de l'economie politique, op. cit 의 흄과 튀르고에 대한 논고도 참조.]. 멘드빌과 스미스는 사회가 경쟁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편성되면 계몽 전제군주와 그 전제 정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흄의 평화주의, 멘드빌과 스미스의 전제군주제에 대한 저항에는 찬성할 할 수밖에 없지만, 의도적으로 수단으로 이용한 의사-과학적인 담론을 논증으로 잘못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경쟁에 대한 이론은 다양하게 나타나, 세 개의 학파가 생겨났다. 지금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첫 번째 학파는, 경쟁의 메커니즘이 개개의 수요와 공급을 균형에 이르게 한다는 레옹 왈라스(1834~1910)에게서 시작된다. 이어서 빌프레도 파레토(1848~1923)는 경쟁에 의한 경제적 균형이 필연적으로 사회적 균형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즉, 현실의 경제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 절대적인 처방적인 존재하며, 경쟁이 경제와 사회 모두에서 최적화를 실현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이의를 제기할 길은 닫혀져 버렸다[Jacques Sapir, Les Trous noirs de la science economique, Albin Michel, Paris, 2000를 보라].
두 번째 사상의 조류는 왈라스-파레토 이론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것이 루드비히 폰 미제스(1881~1973)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 학파로 불리는 것이다. 이들은 경쟁이 자생적인 메커니즘이 아니라 효율이 좋지 않은 수단을 제거하는 신다윈주의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학파는 경쟁이 무엇보다도 새로운 혁신(innovation)의 동학이며, 새롭고 보다 적절한 것의 출현에 의해 과거의 해결책의 파괴를 촉진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는 균형 따위는 아무런 문제로 되지 않았으며, 경쟁은 ‘창조적 파괴’라고 불리는 경제활동의 항상적인 혁명으로 간주된다. 이 이론의 최대 공헌자인 요제프 슘페터(1883~1950)는 18세기의 사상가와 동일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경제를 비정치화하고, 개인들의 의식적이면서 협동적인 행동 대신에 전적으로 내재적인 ‘법칙’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고 보았다[Jacques Genereux, Les Vraies Lois de l'economie, Seuil, Paris, 2002를 보라].
그러나 이 세 학파는 양립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틀을 가지고 있다. 사실 1940~50년대에 현대의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초를 확립한 케네스 애로우와 제라르 드브루, 이 두 사람에 의한 왈라스-파레토 이론에 근거한 가설을 인정한다면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쟁 이론도, 슘페터의 경쟁 이론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하이에크의 주장에 서게 되면, 균형에 관한 이론들을 포함할 수 없다. 이처럼 세 학파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쇄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난제는 각 학파의 출발 전제이다. 일반 균형 이론은 경제 주체가 완전무결한 정보를 지닌다고 하지만, 전지전능하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이다. 그러나 이 전제는 이들의 경쟁 이론의 근저에 놓여져 있다. 경제 주체가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인 정보만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시장은 효율적인 것이 아니게 되며, 경쟁은 불안정을 낳고, 또 공적인 직접 개입이 요청되게 된다. 이것은 오랫동안 이론가들이 인정해 온 바이다[Sandford J. Grossman and Joseph Stiglitz, “On the impossibility of informationally efficient markets”, in American Economic Review, Pittsburgh, vol.44, no 2, 1980].
각 학파의 이론이 필요로 하는 그 밖의 전제에도 문제가 있다. 애로우와 드브루의 모델은 개인의 선호 순서가 개인적인 배경이나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재화 A를 재화 B보다, 재화 B를 재화 C보다 좋아한다면, 그 순서는 어떤 경우에도 동일하며 동일한 선택지에 대응하는 선호는 항상 불변이라고 한다. 하이에크가 상정한 선별 과정에서도 우리의 선호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은 완전히 유사하며, 따라서 어떤 경험에서의 선호가 다른 경험에서 바뀌지 않는다. 시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을 불문하고 우리는 모든 경험에 대해 동일한 기억을 보존한다.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반응은 과거 경험의 평균치에 입각한 것이며, 어떤 개별적인 돌출치를 취하지 않는다.
슘페터의 모델 역시 우리의 선호 구조가 혁신(innovation)의 충격에 의해 변화하지는 않는다고 가정한다. 안전보다 이득을 우선하든가 아니면 그 반대이든가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혁신(innovation)에 의해 초래된 재화가 과거의 재화로는 제공할 수 없었던 용역을 확대했기 때문에 만족의 정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개인의 행동에 대한 이러한 가설군은 크게 의심을 받게 되며[Daniel Kahneman, “New challenges to the rationality assumption,” and Amos Tversky, “Rational theory and constructive choice,” in Kenneth J. Arrow, Enrico Colombatto, Mark Perlman and Christian Schmidt (eds.), The Rational Foundations of Economic Behaviour, Saint Martin’s Press, New York, 1996.], 엄밀한 순서와 반복 가능성이라고 하는 과학 실험의 조건을 올바르게 충족한 검증에 의해 유효성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두 종류의 치료에 대한 우리의 선호는 각각의 조치에 의해 목숨이 늘어나는가, 죽을 위험이 있는가에 의해 크게 달라진다. 어떤 재화에 대해 우리가 지불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금액은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총액 자체는 아니다. 이득에 대한 선호이냐 안전에 대한 선호이냐는 실제로는 크게 흔들린다. 혹은 제비뽑기를 할 때 항상 같은 태도를 나타낸다고 가정되는 피실험자는 얻을 수 있는 금전이나 현물 등에 의해서 실제로는 전략을 자주 바꾸게 된다. 의료에서는 둔하고 길게 지속되는 통증보다는 날카로워도 짧은 통증이 기억에 남기 힘들다. 이러한 일련의 견해들은 신고전파 모델의 가정(선호와 전략의 고정성) 뿐만이 아니라, 하이에크와 슘페터의 모델이 지닌 가정까지도 뒤집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선호는 선택을 할 때의 상황(프레이밍 효과)이나, 소유한 재화(소유 효과)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의 인지 체계는 점진적인 변화보다 돌출적인 개별 상황에 반응한다. 새로운 요소가 출현하면 선택의 모델은 항상 재편되는 것이다.

부정의 전략
어떤 상황에서도 반응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하는 ‘행위자 모델’, 즉 세 학파의 이론의 근저에 있는 가정은 광범위하고도 반박할 수 없는 형태로 부정되었다. 이것은 과거 30년간 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룩된 가장 중요한 진보의 하나였다. 그러나 많은 경제학자는 자기의 모델을 근저에서 뒤흔드는 결론을 부정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이들은 과학자이기를 그쳐 버렸다.[Daniel M. Hausman, The Inexact and Separate Science of Economics, op. cit., Chapter 13. 또, Hazel Henderson, “Prix Nobel d'economie, l'imposture,” Le Monde diplomatique, fevrier 2005도 참조.] 경제활동을 편성할 때 경쟁이 근본적인 역할을 하다는 것은 가설이 아니라 종교에 가까운 신앙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21세기에 들어서, 18세기 후반과도 닮은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인간 사회의 생산, 교환, 소비의 양식을 연구한다는 정당한 학문적 기획이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왜곡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민영화[Nina Bachkatov, “Le Kremlin contre les oligarques,” Le Monde diplomatique, decembre 2003.],나 엔론 사건[Tom Frank, “Enron aux mille et une escroqueries,” Le Monde diplomatique, fevrier 2002.], 월드컴과 파르마랫트 등의 스캔들에 얼마나 많은 ‘전문가’가 관여하고 있었는가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흄이나 멘드빌, 스미스에 비해서 이들의 계속적 목적은 고귀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권력이라는 이름의 금괴, 혹은 문자 그대로 금괴를 위해서 자신의 학문을 더럽히고, 이처럼 경제학을 매도하고 있는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중의 큰 죄를 저질렀다. 하나는 사회에 심대한 손해를 끼치는 신화를 마치 과학적 진리인 양, 즉 ‘공리’인 양 가장한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죄이다. 게다가 경제활동의 진정한 학술적인 연구의 정당한 근거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게 함으로써 연구라는 이념 자체에 대해 범한 죄이다.

* 논술 관련 문제 : 2006 서울대학교 정시 논술 http://admission.snu.ac.kr/filedata/2006jnonsul.hwp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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