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선언

* 출처 : http://mondediplo.com/2004/12/02why

* 글쓴이 :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원제 : History: a new age of reason

이른바 “문명의 충돌”에서부터 현재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위기에 이르기까지, 혹은 실존적 불안에서부터 귀속 집단으로의 퇴행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현상들은 역사가에게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재구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과거 수십 년에 걸쳐 역사학에서도 상대주의가 커져 왔다. 많은 경우 그것은 정치적인 합의(콘센서스)와 결탁해 왔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역사관을 밝혀 갈 “이성의 공동전선”이다. 현대의 위대한 역사가 중 한 사람인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한다. 아래의 글은 홉스봄이 2004년 11월 13일, 맑스주의 역사학에 관한 영국 학술원 세미나에서 행한 폐회 연설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편집부]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일이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맑스의 유명한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테제는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을 계속해서 계발해 왔다. 1880년대 이후 맑스주의에 귀의한 대부분의 지식인은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과 더불어, 확실히 세계를 변혁하길 바랬다. 역사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 무렵에는 이러한 운동의 대다수가 맑스주의의 영향 하에서 대중적인 정치세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 무렵 민중사나 노동자사 등은 당연히 좌파의 관심을 불러 모았음에도 원래 맑스주의적 역사해석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변혁을 바라는 역사가는 정치운동과의 공동 투쟁을 통해 이러한 연구영역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갔다. 그러나 1890년대를 지나면서 사회혁명가이길 그친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맑스주의도 동시에 내다 버렸다.

지식인의 관여를 재연시킨 것은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이다. 대륙 유럽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이후 공식적으로 맑스주의를 기각한 것은 1950년대, 또는 이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그 사이에 먼저 소련에서, 그 다음에는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공산권에서 공식적 맑스주의 역사관이라는 것이 탄생했다. 파시즘 시기에는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반체제투쟁이 이러한 움직임에 순풍이 되어 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선진국의 경우 50년대에 접어들어 침체되었지만(제3세계에서는 계속되었다), 대학교육의 보급과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60년대가 되자 다시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대학의 중심부에서 대거 양산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급진주의자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맑스주의자였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맑스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맑스주의의 부흥이라는 기운은 70년대에 정점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직후에는 또 다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반맑스주의의 거대한 물결이 다시 생겨났다. 이러한 물결의 최대 영향은 인간사회를 조직하는 특정한 방법의 성공을 역사적 분석에 의해 예언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이런 신념을 견지한 신자유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완전히 매장시켰다는 점에 있다. 역사는 목적론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운동과 사회혁명 운동의 향후의 불확실한 전망에서 보면, 정치적 동기에 입각한 맑스주의가 다시 부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너무도 서양 중심주의적인 관점은 피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내 책에 대한 수요를 보면, 맑스주의는 80년대부터는 한국과 대만에서, 90년대부터는 터키에서, 오늘날에는 아랍권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를 해석하다”는 맑스주의의 또 다른 측면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나온 역사는 약간 다르지만, 사태는 “세계를 변혁하다”는 측면과 닮아 있다. 여기에서 초점이 된 것은 역사학에서의 반(反)랑케주의의 발흥이다. 맑스주의가 반랑케주의의 조류에 대해 맡았던 역할의 중요성은 그다지 충분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그 역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실증주의, 즉 현실의 객관적 구조는 이른바 명백하다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을 거론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사물이 왜 그렇게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실제로는 어떠했는가”를 발견하면 된다고 한다. 모든 역사가에게 역사서술이 객관적 현실, 즉 과거에 실제로 생긴 것의 기술을 의미하는 점 그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맑스주의 역사학의 출발점은 개별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의식”에 있다. 맑스주의 역사학이 제기한 물음이란 역사학의 전통이나 사회적․문화적 환경이 다르면, 거기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의식, 패러다임이나 개념이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왜,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점에 있었다.

다른 하나는, 맑스주의 역사학이 역사학을 여러 가지 사회과학에 가교를 놓고 인간사회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종합적인 학문의 일익으로 삼고자 목표로 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로렌스 스톤[1920~1999. 고명하고 권위 있는 사회역사가이며, 저서로는 ≪영국 혁명의 원인≫(1972), ≪가족․성․결혼의 사회사≫(1977) 등이 있다.]의 말을 빌리면, 역사학의 목적은 “<왜>라는 큰 물음”이어야만 했다. 역사학 그 자체가 역사의 이러한 ‘사회적 전회turn’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계기를 부여한 것은 여러 가지 사회과학이었다. 그 당시 새로운 분야로 유행하고 있었던 사회과학은 모두 진화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었다. 즉 역사적 관점인 것이다.

근대화를 목표로 한 공동 전선

맑스주의는 잘못되었고 무비판적인 객관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렇지만, 맑스를 지식사회학의 아버지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맑스주의가 위에서 서술한 역사학의 두 가지 동향 중 첫 번째 측면에 기여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나아가 맑스주의 사상에서 가장 알려진 영향(경제적. 사회적 요인의 중시)은 맑스주의적 분석이 역사학의 이러한 경향을 강화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맑스 사상 특유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경제적․사회적 요인의 중시는 오히려 1890년대부터 두드러지게 되며, 1950년대와 60년대에 정점을 맞았던, 보다 일반적인 역사학 운동의 일환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학문의 변혁자가 되었던 내 세대의 역사가는 이러한 역사학 운동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회적․경제적 요인을 중시하는 역사학의 흐름은 맑스주의의 틀을 훨씬 뛰어넘었다. 사회경제사의 학술잡지 간행이나 연구기관의 창설을 맑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가 지지했던 경우도 있었다. 가령 1893년의 독일에서 ≪계간 사회경제(Vierteljahrschrift)≫의 창간이 이런 예이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는 사정이 상당히 달랐다. 독일에서조차 극히 강한 역사 지향을 띤 경제학파도 맑스주의적 접근방법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경제사나 다른 여러 ‘사회과학’이 명확하게 사회혁명적인 지향을 띠었던 것은 19세기, 나아가 20세기의 제3세계(19세기에는 러시아와 발칸제국들) 뿐이다. 즉, 맑스 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제3세계의 경제사 분야였다. 그렇지만 어떤 나라든 맑스주의 역사학자의 관심은 하부구조(경제적 인프라)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것과 상부구조가 만들어낸 관계에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맑스주의자는 역사가 중에서는 항상 소수파였다.

역사학에 대한 맑스의 영향은 오히려 그가 던진 물음을 (그와는 다른 답변을 제시했든 아니든) 다룬 역사가나 사회과학 연구자를 통해 퍼지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맑스주의 역사학은 사회인류학이라는 다른 학문 분야의 기여, 또는 막스 베버 등 맑스의 영향을 받고 맑스를 보완하고자 했던 사상가에 의해 칼 카우츠키나 V. 플레하노프 시대부터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내가 이러한 역사학의 전반적 흐름을 강조하는 것은 그 내부 또는 학파들의 내부에 있는 차이를 과소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다. 역사학의 근대화에 힘쓴 사람들은 모두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같은 지적 투쟁에 가담해 왔다. 이러한 동일한 기반 위에서 그들은 각각 독자적인 방법론을 주조해 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라면 인문지리학, 뒤르켐 사회학, 통계학(아날학파와 라 브루스), 서독이라면 ‘역사사회학’과 같은 베버사회학, 나아가 영국이라면 공산당원의 역사학자가 의거한 맑스주의를 거론할 수 있다. 그들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영국 역사학의 근대화의 담당자가 되어 맑스주의 역사학의 주요한 학술잡지를 창간했던 것이다.

역사학의 근대화에 기여한 그들은 마이클 포스턴[마이클 포스턴은 1937년부터 캠브리지 대학의 경제사 강좌를 담당했다. 페르낭 브로델과 함께 경제사 국제 학회 창설에 힘을 쏟았다.]과 그의 제자 맑스주의자들처럼, 대립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에서의 보수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전선의 동료라고 서로를 인정했다. 이러한 진보를 위한 공동 전선은 역사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1952년 ≪과거와 현재>(Past & Present)의 발간으로 연결되었다. 이 학술잡지가 성공을 거둔 것은 이 잡지의 창간에 종사한 소장 맑스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의 배타성을 단호하게 배척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달랐지만 소장 역사학 개혁자들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도 있다. 역사학의 공동 전선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차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그들은 잘 간파했던 것이다. 이러한 진보를 위한 공동 전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70년대에 이르는 동안에, 스톤이 “역사적 담론의 성질의 일대 전환”이라고 부를 정도로 눈부신 진전을 이루었다. 그 기세는 질적 연구로부터 양적 연구, 미시역사로부터 거시역사, 구조분석으로부터 역사 이야기의 분석, 사회적 문제로부터 문화적 주제로의 변화가 생겨난 1985년의 위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근대화를 목표로 한 공동 전선은 사회경제사처럼 비맑스주의적 학파도 포함하여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맑스식의 ‘큰 물음’의 영향을 시작으로 하여 역사학의 주류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자가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선전하지 않는 한, 특정한 역사 연구가 맑스주의자에 의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분간하기 곤란한 경우가 자주 있게 되었다. … 언젠가 맑스주의자가 쓴 역사인가 아닌가를 누구도 문제로 삼지 않는 때가 올 것을 나는 즐겁게 기다리고 싶다.”[홉스봄, ≪역사론≫, 민음사] 하지만 여기에도 적었듯이, 우리들은 그러한 유토피아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오히려 반대로, 맑스주의가 역사학에 무엇을 초래할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더 한층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역사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새로운 축이 밝혀짐에 따라 지금까지의 역사학이 상정해 왔던 과제 설정이 크게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보편주의의 위험

방법론의 관점에서 최대의 폐해는 역사에서 생긴 것, 아니 생기고 있는 것과, 이러한 사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능력 사이에 벽이 생겨버렸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 벽을 만들어냈던 것은 객관적인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즉, 역사의 현실이란 역사의 관찰자가 그 때마다 다양한 목적에 의해 구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언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즉 과거의 세계를 포함하여 우리들이 세계를 기술하는 유일한 수단인 개념이 지닌 한계에 항상 우리들은 속박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고는 역사가가 의미 있는 견해를 말하는 근거로 될 수 있는, 역사에서의 도식이나 규칙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 자체를 매장해 버린다. 또 그렇게 이론적이지 않은 주장도 동일한 자세를 초래하게 된다. 즉, 과거의 역사는 우연에 의해 크게 좌우되며,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일어난 이상 일반화 등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암묵적으로 모든 학문을 표적으로 하고 있다. 고색창연한 역사관으로 퇴행하는 것에 불과한 볼품없는 기획에 관해서는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귀추(帰趨)는 정치적․군사적인 고도의 의사결정자의 재량이나 모든 시대를 관통한다는 관념 또는 ‘가치’에 귀속된다. 혹은 역사학 연구는 과거로의 자기 이입을 기조로 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한 시도로 환원되어 버린다.

오늘날의 역사학에 밀어닥친 첫 번째 정치적 위기는 ‘반-보편주의’이다. 즉, ‘어떤 사실에 대해서든 진실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는 주장이다. 반-보편주의는 당연히 정체성 집단이 다양한 역사를 형성하는데 있어서는 매혹적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의 주안점은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떠한 점에서’ 그것이 특정 집단과 관련되어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역사관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합리적 설명보다도 이 사실이 일으킨 ‘의미’이다. 즉,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타자에 대항하는 형태로 자기를 정의하는 공동체(종교, 종족/에스니티, 국민, 성별, 생활양식 등)에 귀속하는 자가 어떻게 느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상대주의는 이처럼 정체성 집단의 역사에 있어서 매력적이다. 과거 30년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역사에 관한 엄청난 허위나 신화가 날조되는 경향이 정점을 맞이했다. 모두 감정으로 인해 왜곡된 것이었다. 이러한 신화 속에는 힌두교 중심주의 정권 하의 인도[인도 인민당(BJP)은 1999년부터 2004년 5월까지 연방 정부의 다수당을 차지했다.]나 미국,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명백하게 위험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종교적 원리주의를 수반한 것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새로운 내셔널리즘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내셔널리스트, 페미니스트, 게이, 흑인 등 특정집단의 역사의 일부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 헛소리나 거짓말을 낳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문화연구 분야에서 극히 흥미로운 새로운 역사적 전개를 낳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제이 윈터[콜롬비아(뉴욕) 대학교수. 20세기 역사, 특히 ‘기억의 장’의 전문가이기도 하다.]는 이것을 “현대사 연구에서의 기억의 유행boom”이라고 불렀다. 피에르 노라가 편찬한 ≪기억의 장≫은 그 좋은 예이다.[≪기억의 장≫, Gallimard, 전체 3권, 1984, 1986, 1993)]

이러한 편향을 앞에 두고, 역사학을 인류의 변용에 관한 합리적 연구라고 확신한 사람들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 나아가 더 넓게는 역사학이 지닌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자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에 대해서 공동 전선을 형성해야 할 시기에 와 있다. 상대주의자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 중에는 좌파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역사가의 내부에는 예상 외의 정치적 분란이 일어날 위험도 있다. 그래도 맑스주의자 의한 접근방법은 1950년대나 60년대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공동 전선을 펼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역사가에게 계속해서 큰 영향을 주었던 브로델 이후의 아날학파나 ‘구조기능주의적 사회인류학’ 등, 전선을 같이 하고 있었던 다른 학파가 이탈한 현재, 맑스주의 접근방법의 의의는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학파는 포스트 모던적 주관성에 대한 심취에 의해 큰 혼란을 겪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역사 이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동안, 역사가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인류의 진화의 역사가 자연과학의 진보에 의해 새롭게 집중조명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진화생물학이 개척한 퍼스펙티브

첫 번째 요인은 DNA 해석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종으로서 출현한 이래의 연대사가 보다 정밀하게 확정되고, 아프리카를 기원으로 한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세계로 퍼지게 되었고 문자사료가 출현하기 이전에 어떠한 발달을 이루었는지가 해명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지질학적․고생물학적 척도에서 말해서 인류 탄생 때부터의 시간이 놀라울 정도로 짧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고, 또한 신다윈주의적 사회생물학[영국의 박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은 자연 도태에 의한 종의 진화를 주창했다.]의 환원주의 해석도 거부되기에 이르렀다.

과거 1만년 사이에, 특히 과거 10세대에 걸친 집단․개인의 생활의 변용은 너무도 크며, 순전한 다윈 진화론에서의 유전자 메커니즘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러한 변용은 획득형질의 유전이 유전자 메커니즘이 아니라 문화적 메커니즘에 의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라마르크[프랑스의 박물학자 라마르크(1744~1829)는 종의 불변성을 처음으로 부정했다.]가 다윈에게 보복을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현상에 ‘유전자’가 아니라 ‘밈’[신다윈주의의 대표논객인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밈’은 기억의 기본단위이며, 개체의 유전형질의 존속을 담당하는 유전자처럼 문화의 존속과 전달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된다.]이라는 생물학적 견해를 펼쳐보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화적 형질의 전달 메커니즘은 생물학적 형질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DNA 혁명에 의해 인류 진화의 연구에 특수한 역사적 기법이 불려들여지게 되었다. 그것에 따라 세계의 역사를 기술하는 합리적 틀도 주어졌다. 그것은 특정한 환경이나 지역이 아니라 복잡한 지구를 총체적으로 연구대상으로 삼는 역사이다. 이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생물학적 진화를 상이한 방법에 따라 연장한 것이 된다.

과거 수십년 동안, 자연과학의 전 영역에 미친 ‘역사화’에 의해서 역사학과 자연과학의 구분은 상당히 약해졌다. 새로운 진화생물학은 그러한 구별을 완전히 일소했다. DNA 혁명의 학제적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카발리-스포르차(Luigi Luca Cavalli-Sforza)는 “전통적으로 정반대의 문화로 간주되었던 과학과 인문학을 시작으로 다른 분야로 나뉘어져 왔던 다양한 연구 중에 많은 공통항이 발견되는 것은 지적인 기쁨이다.”고 말한다. 요컨대 이 새로운 생물학은 역사학이 과학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관한 무의미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새로운 생물학에 의해, 우리들은 인류의 진화에 관해 고고학자와 선사(先史)학자가 채용해 온 기본적 접근방법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즉,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양식 및 인류에 의한 환경의 통제 증대에 관한 연구이다. 그 요점은 맑스가 제시했던 문제로 되돌아오는 것에 있다. 즉, 생산기술, 커뮤니케이션, 사회의 조직화(나아가 군사력)의 거대한 혁신에 의거한 ‘생산양식’(실제로 어떻게 부르든)이야말로 인류 진화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문제이다. 맑스가 이해하고 있듯이, 이러한 혁신은 스스로 발생해 온 것도, 또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물질적, 문화적 힘들과 생산관계는 불가분의 것이다. 혁신이란 개별 역사를 만들어낸 남녀들의 활동 그 자체이며, 진공 속이나 물질적 생활의 외부, 또는 과거 역사의 날조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역사의 새로운 관점(perspective)은 과거를 배우는 자의 근본적인 목표로 돌아가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도달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더라도. 그 목표란 “모든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전체 활동이 나누기 힘들게 교착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전체의 역사’를 그리는 것이다. 이 목표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이 맑스주의자만은 아니었지만(브로델도 그랬다), 그 중 한 사람인 피에르 빌라가 말하듯이[Pierre Vilar, ≪건설 중인 역사 ― 맑스주의 접근방법과 경기순환문제≫, Gallimard/Seuil, 1982 등 참조], 이것을 가장 끈질기게 추구한 것은 맑스주의자들이었다.

역사의 이러한 새로운 퍼스펙티브가 제기한 중요한 문제 중에서, 우리를 인류의 역사적 발전으로 되돌아가게 만든 것이 근원적이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이란 두 가지 힘의 경합이다. 한편으로는 신석기시대부터 핵 시대에 이르기까지, 호모 사피엔스의 변용의 원인이 되어 왔던 힘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집단과 사회환경의 재생산 및 안정성을 변함없이 유지한 힘들이 있다.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후자는 전자를 순조롭게 억제해 왔다. 바로 이것이 이론적 문제의 중심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힘들의 균형이 한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울고 있다. 이 불균형은 어쩌면 인간의 이해력의 범위를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인간의 사회적․정치적 제도의 통제력을 확실하게 능가하고 있다. 20세기에서 인류의 기획의 의도치 않은, 혹은 바라지 않았던 결과까지 이해가 미치지 못했던 맑스주의 역사가는 이번에야말로 그러한 실천적 경험을 양식으로 삼아 우리들이 어떻게 이러한 사태에 도달했는가에 대한 이해에 기여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2004년 12월호)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노동의 종말
세계 경제는 노동의 본질이 급진적으로 변하는 한가운데에 놓여 있으며, 이는 미래 사회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온다. 산업화시기에 대규모의 인간 노동력은 기계와 더불어 기본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였다. 접속의 시대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로봇, 나노 테크놀로지, 생명 공학 등과 같은 형태의 지능적 기계들이 농업, 제조업 및 서비스 부문에서 사람의 노동력을 점차 대신하고 있다. 농장, 공장 및 다수의 화이트칼라 서비스 산업 부문은 빠른 속도로 자동화되어 가고 있다. 21세기에는 반복적인 단순 업무에서부터 고도로 개념적인 전문 업무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 값싸고 보다 효율적인 기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값싼 노동자라고 할지라도 이들을 대체하는 온라인 기술만큼 저렴하지는 않을 것이다. 21세기 중반까지 상거래 부문에서는 현재 고용된 인력의 일부만을 운용하여 제품과 기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과 가용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2050년쯤이면 전통적인 산업 부문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 전체 성인 인구의 5퍼센트 정도밖에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가 거의 필요치 않는 농장, 공장 및 사무실이 일반화될 것이다.
물론 다가올 시기에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제품과 서비스가 나타날 것이며, 새로운 직업적 능력, 특히 보다 정교화된 지식 분야의 능력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노동 부문은 엘리트 지향적이고 그 수에 있어서도 제한적이다. 우리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회사 정문과 서비스센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20세기의 일상적인 장면을 결코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직업들 역시 기술적 대체 앞에서는 점차 취약해지고 있다. 정교한 진단 기술은 이전까지만 해도 의사, 간호사, 기술자들이 실험실에서 사용했던 방법을 대체하고 있다. CAD(Computer Aided Design)는 많은 제도사와 기술자들을 없애버렸다. 예전에는 회계사들이 했던 전형적인 업무의 대부분은 새로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의해 이루어진다. 매우 유능한 전문가들이 아직까지는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영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전문가들은 지적 기술이 보다 적합하고, 빠르고, 저렴한 대안으로 판명됨에 따라 도태될 것이다. 미래의 노동력은 점차 소규모 대행업자처럼 될 것이다.
산업화 사회는 노예 노동의 종말을 이끌었다. 접속의 시대는 대량 임금 노동을 끝낼 것이다. 이는 지적 기술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 들어감에 따라 세계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기회이자 도전이다. 다음 세대가 고생스러운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해방됨에 따라 인류는 두 번째 르네상스 시대로 진입하게 되거나 또는 엄청난 사회적 분열과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점진적으로 자동화되는 세계 경제 속에서 쓰임이 적거나 아니면 전혀 쓸모가 없는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용의 미래에 대응하기 위한 몇 가지 선택안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각각의 대안은 사람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노동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나 다가올 미래 사회에서 인간이 어떤 역할과 공헌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을 탐색해야 한다.

블루칼라의 종말
미국 최초의 위대한 노동운동가인 곰퍼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노동자를 위한 그의 평생의 노력을 형성하는 데 있어 심대한 영향을 미친 어린 시절의 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 있어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 중 하나는 기계가 발명되어 견직물 직공의 기술을 대체해 버리고 그들의 일자리마저 빼앗아 갔을 때 그들에게 닥친 커다란 어려움이었다. 자신의 일을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어떤 방법도 없었다. 불행과 공포가 마을을 온통 죽음의 무거운 공기로 감싸 안았다. 좁은 거리엔 일자리 없이 무리를 지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산업혁명의 시작부터, 기계 및 무생명의 에너지가 생산을 촉진하고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줄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계들은 인간의 손길이 필요 없었고 많은 상품을 거의 자동적으로 만들어냈다. 노동자들은 단순히 재료를 기계에 넣고 기계가 제품을 만들고 포장하게 하는 것이었다.
1881년 제임스 본색은 인간의 노동 없이 담배를 자동으로 마는 담배 기계를 특허냈다. 그 담배 기계는 순환식 테이프 위에 있는 담배를 잡아내어, 둥근 모양으로 압축시키고 테이프와 종이로 감아 담배 모양을 만들고 종이에 풀칠을 한 다음 긴 담배 막대를 적절한 담대 길이로 자르는 덮개 튜브로 옮겨 놓는다. 1880년대 말 경, 연속 공정의 기계가 매일 12만 개의 담배를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숙련공은 하루 기껏해야 3000개의 담배를 만들 수 있었다. 새로운 기계는 너무나 생산적이어서 30대도 안 되는 기계가 소수의 노동자만을 이용해 1885년 전국의 담배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
연속 공정 기술로 제조업은 새롭고 급진적인 접근법을 도입하게 되었다. 인력 요소를 거의 투입하지 않고 또는 전혀 투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동화에 의한 기계적 생산 방식은 더 이상 이상주의적인 꿈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정보와 통신 기술로 훨씬 더 정교한 연속 공정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실상 모든 주요 제조 활동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기계에 의해 서서히 대체되어 왔다. 오늘날 전 세계 수많은 노동자들은 경제적 격변기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기술의 도입으로 점점 밀려나버린다. 다가오는 21세기 중엽쯤이면 블루칼라는 역사에서 사라져 버리는, 제3차 산업혁명과 보다 높은 기술 능률을 향한 끊임없는 행진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최후의 서비스 노동자
40년 이상이나 서비스 산업은 제조업의 일자리 손실을 흡수해왔다.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기업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추세가 계속되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들의 희망은, 새로운 정보 기술이 서비스 산업 자체에 진입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서비스 관련 전 산업에 걸쳐 인력을 대체함에 따라 희미해지고 있다.
AT&T는 6000명 이상의 장거리 교환수를 컴퓨터화된 음성 식별 기술로 대체 중이라고 발표했다. 장거리 교환수의 1/3을 없애는 것 이외에도 이 회사는 11개 주의 31개 사무소를 폐쇄하고 400명의 관리직을 줄였다고 발표했다. 뉴저지에 있는 AT&T의 벨 연구소에 의해 새로이 개발된 신형 로봇 기술은 핵심 단어를 구별하여 통화자의 요청에 답변할 수 있다.
새로운 실리콘 교환수는 AT&T가 최근 들어 40퍼센트나 적은 인력으로 50퍼센트 이상이 증가한 통화를 처리할 수 있게끔 하였다. 1950년 과 1980년대 초 사이에 AT&T는 노동력을 대체하는 기술을 도입하여 서비스 산업을 주도해왔다. 이 기간 중에 회사는 전국적으로 14만 명 이상의 교환수를 없애버렸다. 남아 있는 교환수의 상당 수도 1990년대 말경이면 해고 통지서를 받을 운명이다.
광섬유 케이블 네트워크, 디지털 교환 시스템, 디지털 전송, 위성 통신 및 사무 자동화를 포함한 최근의 기술 혁신은 연간 약 5.9퍼센트의 생산성 향상을 유지해 통신 산업이 새로운 첨단 기술 경제의 중요한 속도 조절자 중 하나가 되게끔 하였다. 생산성의 극적인 향상으로 전화 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8년 사이에 고용이 17만 9800명이 줄어들었다.
실업자 중의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기술 혁신의 결과로 해고된 설치공 및 수리공이었다. 이미 조립된 모듈식 장비의 도입으로 수리가 한결 편해졌고 유지 관리도 덜 필요하게 되었다. 플러그 내장형 전화기는 설치를 위해 항시 방문해야 하는 필요성을 없앴다. 신속한 접속 기능을 가진 매설된 전화선은 수리의 필요성을 줄이고 신속한 수리가 가능하게 했다. 첨단의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디지털 교환 시스템은 전화의 서비스 양을 대폭 늘리는 한편 단위당 소요 노동력을 현격히 줄였다. 이는 중앙 사무실에 보다 적은 수의 설치공 및 수리공이 필요하다는 것은 의미한다. 중앙의 수리 사무실에 있는 근로자 수는 2000년 경이면 20퍼센트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초기 형성 단계이기는 하지만 제3차 산업혁명은 농업, 제조업 및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밀쳐 내고 있다. 새로운 기술은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전 세계적 노동력 감소와 함께 첨단 기술을 따라 세계 경제 시스템을 혁신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아직까지, 현재의 리엔지니어링과 자동화의 물결은 다가올 시대에 있어 생산성을 가속화하는 한편 더욱 더 많은 수의 노동자가 세계 경제에 있어 불필요하고 관련이 없게끔 만드는 기술 혁신의 바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미래에 있어 첨단의 계산기와 로봇 공학, 지구를 감싸안은 통합 전자 네트워크가 더욱 더 많은 경제적 과정에 적용되어 만들고, 움직이고, 팔고, 서비스하는 데 있어 직접적으로 인간이 참여할 여지를 더욱 더 적게 만들고 있다.

첨단 기술의 승자와 패자
사실상 모든 기업의 지도자와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제3차 산업혁명의 극적인 기술 진보가 확산효과(Trickle-down Effect)를 지녀 제품의 원가를 싸게 하고 소비자의 수요 증대를 촉진하는 한편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냄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보수를 주는 새로운 하이테크 직업 및 산업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일자리를 잃거나 일자리를 찾기가 힘든 많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기술의 확산 개념이란 어떠한 위안도 주지 못한다.
주주들은 신기술과 생산성 향상으로 커다란 이익을 보았지만 그 혜택이 보통의 노동자들에게 흘러들어 가지 못했다. 1980년대에 제조업 부문의 시간당 임금액은 7.78달러에서 7.69달러로 줄어들었다. 1980년대 말에는 미국 노동력의 거의 10퍼센트가 풀타임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 반실업 상태에 있거나 시간제 노동을 하고 있었다.
1989년과 1993년 사이에 18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제조 부문에서 일자리를 잃었는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동화의 희생물로, 미국의 고용주 및 외국 회사에 의해 해고되었다. 외국 기업의 고도로 자동화된 공장과 보다 값싼 운영비로 인해 미국의 기업은 업무를 축소하고 노동자를 해고해야만 했다.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가운데 1/3만이 서비스 부문에서 그것도 20퍼센트나 삭감된 임금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더욱 더 많은 통계가 사실상 모든 부문에서 노동력이 감퇴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구상의 노동력과 경쟁해야 하는 미국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깝게 경제적 생존의 한계 지대로 밀려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1979년 미국의 주당 평균 임금은 387달러였다. 1989년에는 그 임금이 335달러로 떨어졌다. 1973년과 1993년간의 20년 동안 미국의 블루칼라 종업원은 15퍼센트의 구매력을 상실했다.
많은 노동자에게 있어 린 생산은 비참한 환경으로 몰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1994년의 보고서에서 조사 통계국은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4인 가족 기준 최저 생계비 수준인 연간 1만 3000달러를 벌지 못하는 사람이 1979년과 1992년 사이에 50퍼센트가 증가했다고 한다. 조사 통계국이 놀라운 것으로 부른 이 보고서는 미국 노동력의 몰락에 대한 또 다른 극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경제학자들은 그와 같은 몰락을 제조업 일자리의 감소와 세계 경제의 국제화에 그 탓을 돌린다. 미국 노동자로부터 빼앗은 부를 기업의 경영자나 주주들에게 강제적으로 배분함으로써 보수적 경제학자인 번스와 같은 이는 “1980년대에는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강압된 복종심을 주입시키기 위해 기업에 대한 충성심이 이용되는 한편 미국의 기업 엘리트들은 호화롭게 살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기만 했던” 살찐 고양이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다.
수백만의 도시 및 농촌의 사람들이 가난으로 고생하고 점점 더 많은 교외의 중산층 임금 소득자들의 리엔지니어링의 상처와 기술 대체의 충격을 느끼고 있을 때, 소수의 엘리트 미국 지식 노동자와 기업가 및 회사의 경영자들은 첨단의 새로운 국제 경쟁의 혜택을 거두어 들이고 있다. 그들은 그들 주위의 사회적 혼란에서 멀리 떨어져서 풍족한 인생을 구가하고 있다. 미국이 발견한 놀랄만한 새로운 환경은 라이시 노동부 장관으로 하여금 “이제 더 이상 똑같은 경제생활을 영위하지 않는 동일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것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새로운 사회계약
고정된 지형과 공간적 근거를 갖고 있는 민족국가는 너무 둔해서 세계 시장의 재빠른 속도를 주도하거나 그에 대응할 수 없다. 반면에 세계 기업들은 본질적으로 공간적이라기보다는 시간적인 제도이다. 세계 기업들은 특정 사회나 특정 공간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세계 기업들은 새로운 준정치적 제도로서 정보와 통신의 통제에 입각하여 사람들과 공간에 대해서 거대한 권력을 행사한다. 유연성과 이동성을 자랑하는 세계 기업은 모든 나라의 통상기관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생산 거점과 시장을 재빠르고 손쉽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전할 수 있다.
정부와 기업 간의 변화하는 관계는 새로운 국제 무역 협정들을 보면 점점 더 명확해진다. 이 협정들은 점점 더 많은 권력들을 민족국가로부터 세계 기업들로 이전시키고 있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마스트리트 협정(Maastricht Accord)은 지구촌에 있어서 권력 패턴의 변화 지표들이다. 이러한 무역 협정 하에서 다국적 기업들의 자유로운 무역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진다면 민족국가의 통치권과 관련된 수백 개의 법률들이 무효화된다. 따라서 10여 개의 국가에서 유권자들의 격렬한 공식적인 항의가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역 협정으로 인해서 애써 획득해 놓은 노동, 환경, 건강 등과 관련된 법률들이 일거에 무효화되기 때문이다.
민족국가의 지역 정치적 역할이 감소되는 것과 동시에 고용주로서의 국가의 역할도 감소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기 부채의 누적과 증대하는 재정 적자로 인하여 정부는 일자리 창출과 구매력을 촉진시키기 위한 야심적인 공공 지출에 점점 인색해지고 있다. 세계의 모든 산업 국가에서 중앙 정부는 ‘시장의 보증자’라는 전통적인 과업 수행을 점점 꺼려하고 있다. 동시에 다국적 기업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도 줄어들고 있으며 자국 시민들의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힘도 감소하고 있다.
노동자 대중과 중앙 정부의 시장에서의 역할 감소는 사회 계약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강요할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산업 시대를 통틀어 시장 관계가 전통적 관계를 대체했고 인간의 가치는 거의 전적으로 상업적 관점에서 측정되었다. 그러나 ‘시간 판매’의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확립된 상업적 관계의 총체적 연결망도 위협받게 된다. 시장 보증자로서 중앙 정부의 역할이 감소하기 때문에 정부 제도들도 시민 생활에 의미 있게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의 사명을 재정립해야 한다. 지구촌 모든 국가들의 긴급한 과제는 정치 기구들을 엄격한 시장 중심적 지향으로부터 탈피시키는 것이다.
일상사에 있어서 시장 부문과 정부가 아주 작은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를 상상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것이다. 두 제도는 우리 생활의 모든 측면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100년 전만 해도 사회생활에 있어서 그 역할은 몹시 제한되어 있었다. 결국 기업과 민족국가는 산업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금세기를 통틀어 기업과 민족국가는 이전에 수천 개의 지역 공동체가 협력해서 수행해오던 기능과 역할을 대체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사람들의 근본적인 욕구를 보장해 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시민들은 세계 시장의 물리력과 미약하고 무능한 중앙정부의 권위에 대항할 활기 있는 공동체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향후 수십 년 이내에 시장과 정부의 역할 축소는 두 가지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취업자들은 노동 시간 단축과 함께 보다 많은 레저 시간을 갖게 될 것이고 이를 대중오락과 소비 생활에 투자할 것이다. 반면에 증가하는 실업자들과 잠재적 실업자들은 하층 계급 속으로 마주비하게 내던져지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서 비공식 경제에 의존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임시직에 종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과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사회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지만 건강한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증가함에 따라서 마약과 매춘이 계속 증가할 것이다. 정부는 이들의 호소를 묵살할 것이다. 정부의 투자 우선순위는 북지와 일자리 창조가 아니라 경찰력 강화와 감옥 건설이 될 것이다.
많은 산업 국가들이 처해 있는 이 경로가 불가피한 것일 수는 없다. 제3차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적 희생의 충격을 완충시키는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 취업자들의 노동 시간이 단축되고 실업자들의 유휴 시간이 증가함에 따라서 사적 부문 및 공적 부문 바깥에서 수백만 명의 미사용 노동력을 건설적으로 이용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들의 재능과 에너지는 수천 개의 지역 공동체의 재건과 시장 및 공공 부문과는 독립적으로 번창하는 제3의 힘을 창출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제 3부문
미국 정치에는 공동체에 기반을 둔 강력한 제3의 힘의 토대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공공 부문과 사적 부문에만 협소하게 주의가 집중되었지만 미국인의 생활에는 제3부문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 형성기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지금은 21세기의 사회 계약 재형성에 도움을 줄 명백한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제3부문은 독립적 또는 자원적 부문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부문은 공동체 연대가 금전적 장치를 대체하고 ‘자신의 시간을 남에게 주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서비스를 타인에게 판매하는 데 근거한 인위적인 시장 관계를 대체하는 영역이다. 한때는 국가 수립에 핵심적이었던 이 부문은 최근에는 시장과 정부의 지배에 의해서 계속 침식당해 왔고 공공 생활의 주변부로 전락해 왔다. 최소한 이용 가능한 노동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두 부문의 중요성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제3부문의 부흥 및 변형 가능성과 이것을 활기찬 탈시장 시대의 창조를 위한 견인차로 이용할 가능성을 신중하게 탐색해야 한다.
제3부문은 이미 사회에 널리 침투해있다. 공동체 활동은 사회 서비스, 건강, 교육과 연구, 예술, 종교, 변호 활동 등 전 범위에서 수행되고 있다. 공동체 서비스 조직은 고령자, 장애자, 정신병자, 불우 아동, 무주택자와 빈민들을 지원하고 있다. 자원 봉사자들이 낡은 아파트를 보수하고 저소득층용 새 주택을 세우고 있다. 수만 명의 미국인 자원 봉사자들이 공공 병원에서 에이즈 환자를 포함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수천 명이 양부모로 봉사하거나 혹은 고아원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가출 소년 또는 고민이 있는 소년들에 대한 카운슬링의 제공이나 문맹 퇴치 운동을 위한 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주간 혹은 방과 후 탁아 센터에서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급식도 제공한다. 점점 많은 미국인들이 위기 센터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강도 및 강간 피해자와 부인 및 아동 학대의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공공 보호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필요한 의류품을 제공하고 있다. 많은 미국인들이 알코올 혹은 약물 중독자의 갱생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변호사, 회계사, 의사, 경영자 등 전문가들이 자발적 조직에 지원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의 자원 재생 활동, 에너지 절약 활동, 반공해 운동, 동물 보호 등 환경 보호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불만 처리와 대중의 인식과 법률 개선을 위한 조직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경제 활동 행위의 구성을 GNP 구성으로 보면 기업 부문이 80퍼센트, 정부 부문이 14퍼센트임에 비하여 제3부문이 6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제3부문은 총 고용의 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이 부문의 피고용자는 건설, 전기, 수송 또는 섬유나 의류 산업보다 더 많다. 제3부문의 자산은 현재 연방 정부의 약 1/2에 해당된다. 1980년대 초반 예일 대학교의 경제학자 루드니에 의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자발적 조직들의 지출이 7개국만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GNP보다 더 많다고 한다. 비록 제3부문이 총고용과 총수익 면에서 정부 부문의 절반밖에 안되지만 최근에 정부나 사적 부문보다 2배나 더 급속하게 성장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공동체 서비스는 전통적 형태의 노동에 대한 혁명적인 대안이다. 노예, 농노, 임금 노동자와 달리 강제성도 없고 금전적인 관계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도움 행위이자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로서 스스로 원해서 하는 행위이며 금전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경제에서의 선물 주기와 유사하다. 공동체 서비스는 세상만사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나오며 개인의 부채 의식에 의해서 동기화된다. 이것이 종종 수혜자와 후원자 간의 경제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교환이다. 이 점이 공동체 서비스와 물질적 내지 금전적 교환이자 경제적 손익이 사회적 결과보다 우선시되는 시장 행위와의 차이이다.
자발적 조직들은 다른 나라들에도 존재하고 있고 중대한 사회적 힘으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미국만큼 잘 발달되어 있지는 않다. 미국인들은 자발적 조직들을 개인적 관계가 풍요롭게 되고 지위가 성취될 수 있는 피난처로 생각해왔고 따라서 공동체 의식이 창출될 수 있었다. 제 3부문은 다양한 이해를 지닌 미국인들을 응집력 있는 사회적 일체감으로 결집시켜 주는 결속력이자 사회적 접착제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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