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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선언

* 출처 : http://mondediplo.com/2004/12/02why

* 글쓴이 :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원제 : History: a new age of reason

이른바 “문명의 충돌”에서부터 현재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위기에 이르기까지, 혹은 실존적 불안에서부터 귀속 집단으로의 퇴행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현상들은 역사가에게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재구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과거 수십 년에 걸쳐 역사학에서도 상대주의가 커져 왔다. 많은 경우 그것은 정치적인 합의(콘센서스)와 결탁해 왔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역사관을 밝혀 갈 “이성의 공동전선”이다. 현대의 위대한 역사가 중 한 사람인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한다. 아래의 글은 홉스봄이 2004년 11월 13일, 맑스주의 역사학에 관한 영국 학술원 세미나에서 행한 폐회 연설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편집부]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일이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맑스의 유명한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테제는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을 계속해서 계발해 왔다. 1880년대 이후 맑스주의에 귀의한 대부분의 지식인은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과 더불어, 확실히 세계를 변혁하길 바랬다. 역사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 무렵에는 이러한 운동의 대다수가 맑스주의의 영향 하에서 대중적인 정치세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 무렵 민중사나 노동자사 등은 당연히 좌파의 관심을 불러 모았음에도 원래 맑스주의적 역사해석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변혁을 바라는 역사가는 정치운동과의 공동 투쟁을 통해 이러한 연구영역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갔다. 그러나 1890년대를 지나면서 사회혁명가이길 그친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맑스주의도 동시에 내다 버렸다.

지식인의 관여를 재연시킨 것은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이다. 대륙 유럽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이후 공식적으로 맑스주의를 기각한 것은 1950년대, 또는 이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그 사이에 먼저 소련에서, 그 다음에는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공산권에서 공식적 맑스주의 역사관이라는 것이 탄생했다. 파시즘 시기에는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반체제투쟁이 이러한 움직임에 순풍이 되어 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선진국의 경우 50년대에 접어들어 침체되었지만(제3세계에서는 계속되었다), 대학교육의 보급과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60년대가 되자 다시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대학의 중심부에서 대거 양산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급진주의자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맑스주의자였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맑스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맑스주의의 부흥이라는 기운은 70년대에 정점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직후에는 또 다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반맑스주의의 거대한 물결이 다시 생겨났다. 이러한 물결의 최대 영향은 인간사회를 조직하는 특정한 방법의 성공을 역사적 분석에 의해 예언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이런 신념을 견지한 신자유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완전히 매장시켰다는 점에 있다. 역사는 목적론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운동과 사회혁명 운동의 향후의 불확실한 전망에서 보면, 정치적 동기에 입각한 맑스주의가 다시 부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너무도 서양 중심주의적인 관점은 피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내 책에 대한 수요를 보면, 맑스주의는 80년대부터는 한국과 대만에서, 90년대부터는 터키에서, 오늘날에는 아랍권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를 해석하다”는 맑스주의의 또 다른 측면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나온 역사는 약간 다르지만, 사태는 “세계를 변혁하다”는 측면과 닮아 있다. 여기에서 초점이 된 것은 역사학에서의 반(反)랑케주의의 발흥이다. 맑스주의가 반랑케주의의 조류에 대해 맡았던 역할의 중요성은 그다지 충분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그 역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실증주의, 즉 현실의 객관적 구조는 이른바 명백하다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을 거론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사물이 왜 그렇게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실제로는 어떠했는가”를 발견하면 된다고 한다. 모든 역사가에게 역사서술이 객관적 현실, 즉 과거에 실제로 생긴 것의 기술을 의미하는 점 그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맑스주의 역사학의 출발점은 개별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의식”에 있다. 맑스주의 역사학이 제기한 물음이란 역사학의 전통이나 사회적․문화적 환경이 다르면, 거기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의식, 패러다임이나 개념이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왜,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점에 있었다.

다른 하나는, 맑스주의 역사학이 역사학을 여러 가지 사회과학에 가교를 놓고 인간사회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종합적인 학문의 일익으로 삼고자 목표로 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로렌스 스톤[1920~1999. 고명하고 권위 있는 사회역사가이며, 저서로는 ≪영국 혁명의 원인≫(1972), ≪가족․성․결혼의 사회사≫(1977) 등이 있다.]의 말을 빌리면, 역사학의 목적은 “<왜>라는 큰 물음”이어야만 했다. 역사학 그 자체가 역사의 이러한 ‘사회적 전회turn’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계기를 부여한 것은 여러 가지 사회과학이었다. 그 당시 새로운 분야로 유행하고 있었던 사회과학은 모두 진화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었다. 즉 역사적 관점인 것이다.

근대화를 목표로 한 공동 전선

맑스주의는 잘못되었고 무비판적인 객관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렇지만, 맑스를 지식사회학의 아버지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맑스주의가 위에서 서술한 역사학의 두 가지 동향 중 첫 번째 측면에 기여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나아가 맑스주의 사상에서 가장 알려진 영향(경제적. 사회적 요인의 중시)은 맑스주의적 분석이 역사학의 이러한 경향을 강화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맑스 사상 특유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경제적․사회적 요인의 중시는 오히려 1890년대부터 두드러지게 되며, 1950년대와 60년대에 정점을 맞았던, 보다 일반적인 역사학 운동의 일환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학문의 변혁자가 되었던 내 세대의 역사가는 이러한 역사학 운동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회적․경제적 요인을 중시하는 역사학의 흐름은 맑스주의의 틀을 훨씬 뛰어넘었다. 사회경제사의 학술잡지 간행이나 연구기관의 창설을 맑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가 지지했던 경우도 있었다. 가령 1893년의 독일에서 ≪계간 사회경제(Vierteljahrschrift)≫의 창간이 이런 예이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는 사정이 상당히 달랐다. 독일에서조차 극히 강한 역사 지향을 띤 경제학파도 맑스주의적 접근방법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경제사나 다른 여러 ‘사회과학’이 명확하게 사회혁명적인 지향을 띠었던 것은 19세기, 나아가 20세기의 제3세계(19세기에는 러시아와 발칸제국들) 뿐이다. 즉, 맑스 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제3세계의 경제사 분야였다. 그렇지만 어떤 나라든 맑스주의 역사학자의 관심은 하부구조(경제적 인프라)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것과 상부구조가 만들어낸 관계에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맑스주의자는 역사가 중에서는 항상 소수파였다.

역사학에 대한 맑스의 영향은 오히려 그가 던진 물음을 (그와는 다른 답변을 제시했든 아니든) 다룬 역사가나 사회과학 연구자를 통해 퍼지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맑스주의 역사학은 사회인류학이라는 다른 학문 분야의 기여, 또는 막스 베버 등 맑스의 영향을 받고 맑스를 보완하고자 했던 사상가에 의해 칼 카우츠키나 V. 플레하노프 시대부터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내가 이러한 역사학의 전반적 흐름을 강조하는 것은 그 내부 또는 학파들의 내부에 있는 차이를 과소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다. 역사학의 근대화에 힘쓴 사람들은 모두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같은 지적 투쟁에 가담해 왔다. 이러한 동일한 기반 위에서 그들은 각각 독자적인 방법론을 주조해 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라면 인문지리학, 뒤르켐 사회학, 통계학(아날학파와 라 브루스), 서독이라면 ‘역사사회학’과 같은 베버사회학, 나아가 영국이라면 공산당원의 역사학자가 의거한 맑스주의를 거론할 수 있다. 그들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영국 역사학의 근대화의 담당자가 되어 맑스주의 역사학의 주요한 학술잡지를 창간했던 것이다.

역사학의 근대화에 기여한 그들은 마이클 포스턴[마이클 포스턴은 1937년부터 캠브리지 대학의 경제사 강좌를 담당했다. 페르낭 브로델과 함께 경제사 국제 학회 창설에 힘을 쏟았다.]과 그의 제자 맑스주의자들처럼, 대립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에서의 보수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전선의 동료라고 서로를 인정했다. 이러한 진보를 위한 공동 전선은 역사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1952년 ≪과거와 현재>(Past & Present)의 발간으로 연결되었다. 이 학술잡지가 성공을 거둔 것은 이 잡지의 창간에 종사한 소장 맑스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의 배타성을 단호하게 배척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달랐지만 소장 역사학 개혁자들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도 있다. 역사학의 공동 전선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차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그들은 잘 간파했던 것이다. 이러한 진보를 위한 공동 전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70년대에 이르는 동안에, 스톤이 “역사적 담론의 성질의 일대 전환”이라고 부를 정도로 눈부신 진전을 이루었다. 그 기세는 질적 연구로부터 양적 연구, 미시역사로부터 거시역사, 구조분석으로부터 역사 이야기의 분석, 사회적 문제로부터 문화적 주제로의 변화가 생겨난 1985년의 위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근대화를 목표로 한 공동 전선은 사회경제사처럼 비맑스주의적 학파도 포함하여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맑스식의 ‘큰 물음’의 영향을 시작으로 하여 역사학의 주류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자가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선전하지 않는 한, 특정한 역사 연구가 맑스주의자에 의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분간하기 곤란한 경우가 자주 있게 되었다. … 언젠가 맑스주의자가 쓴 역사인가 아닌가를 누구도 문제로 삼지 않는 때가 올 것을 나는 즐겁게 기다리고 싶다.”[홉스봄, ≪역사론≫, 민음사] 하지만 여기에도 적었듯이, 우리들은 그러한 유토피아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오히려 반대로, 맑스주의가 역사학에 무엇을 초래할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더 한층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역사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새로운 축이 밝혀짐에 따라 지금까지의 역사학이 상정해 왔던 과제 설정이 크게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보편주의의 위험

방법론의 관점에서 최대의 폐해는 역사에서 생긴 것, 아니 생기고 있는 것과, 이러한 사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능력 사이에 벽이 생겨버렸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 벽을 만들어냈던 것은 객관적인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즉, 역사의 현실이란 역사의 관찰자가 그 때마다 다양한 목적에 의해 구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언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즉 과거의 세계를 포함하여 우리들이 세계를 기술하는 유일한 수단인 개념이 지닌 한계에 항상 우리들은 속박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고는 역사가가 의미 있는 견해를 말하는 근거로 될 수 있는, 역사에서의 도식이나 규칙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 자체를 매장해 버린다. 또 그렇게 이론적이지 않은 주장도 동일한 자세를 초래하게 된다. 즉, 과거의 역사는 우연에 의해 크게 좌우되며,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일어난 이상 일반화 등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암묵적으로 모든 학문을 표적으로 하고 있다. 고색창연한 역사관으로 퇴행하는 것에 불과한 볼품없는 기획에 관해서는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귀추(帰趨)는 정치적․군사적인 고도의 의사결정자의 재량이나 모든 시대를 관통한다는 관념 또는 ‘가치’에 귀속된다. 혹은 역사학 연구는 과거로의 자기 이입을 기조로 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한 시도로 환원되어 버린다.

오늘날의 역사학에 밀어닥친 첫 번째 정치적 위기는 ‘반-보편주의’이다. 즉, ‘어떤 사실에 대해서든 진실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는 주장이다. 반-보편주의는 당연히 정체성 집단이 다양한 역사를 형성하는데 있어서는 매혹적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의 주안점은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떠한 점에서’ 그것이 특정 집단과 관련되어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역사관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합리적 설명보다도 이 사실이 일으킨 ‘의미’이다. 즉,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타자에 대항하는 형태로 자기를 정의하는 공동체(종교, 종족/에스니티, 국민, 성별, 생활양식 등)에 귀속하는 자가 어떻게 느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상대주의는 이처럼 정체성 집단의 역사에 있어서 매력적이다. 과거 30년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역사에 관한 엄청난 허위나 신화가 날조되는 경향이 정점을 맞이했다. 모두 감정으로 인해 왜곡된 것이었다. 이러한 신화 속에는 힌두교 중심주의 정권 하의 인도[인도 인민당(BJP)은 1999년부터 2004년 5월까지 연방 정부의 다수당을 차지했다.]나 미국,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명백하게 위험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종교적 원리주의를 수반한 것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새로운 내셔널리즘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내셔널리스트, 페미니스트, 게이, 흑인 등 특정집단의 역사의 일부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 헛소리나 거짓말을 낳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문화연구 분야에서 극히 흥미로운 새로운 역사적 전개를 낳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제이 윈터[콜롬비아(뉴욕) 대학교수. 20세기 역사, 특히 ‘기억의 장’의 전문가이기도 하다.]는 이것을 “현대사 연구에서의 기억의 유행boom”이라고 불렀다. 피에르 노라가 편찬한 ≪기억의 장≫은 그 좋은 예이다.[≪기억의 장≫, Gallimard, 전체 3권, 1984, 1986, 1993)]

이러한 편향을 앞에 두고, 역사학을 인류의 변용에 관한 합리적 연구라고 확신한 사람들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 나아가 더 넓게는 역사학이 지닌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자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에 대해서 공동 전선을 형성해야 할 시기에 와 있다. 상대주의자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 중에는 좌파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역사가의 내부에는 예상 외의 정치적 분란이 일어날 위험도 있다. 그래도 맑스주의자 의한 접근방법은 1950년대나 60년대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공동 전선을 펼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역사가에게 계속해서 큰 영향을 주었던 브로델 이후의 아날학파나 ‘구조기능주의적 사회인류학’ 등, 전선을 같이 하고 있었던 다른 학파가 이탈한 현재, 맑스주의 접근방법의 의의는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학파는 포스트 모던적 주관성에 대한 심취에 의해 큰 혼란을 겪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역사 이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동안, 역사가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인류의 진화의 역사가 자연과학의 진보에 의해 새롭게 집중조명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진화생물학이 개척한 퍼스펙티브

첫 번째 요인은 DNA 해석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종으로서 출현한 이래의 연대사가 보다 정밀하게 확정되고, 아프리카를 기원으로 한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세계로 퍼지게 되었고 문자사료가 출현하기 이전에 어떠한 발달을 이루었는지가 해명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지질학적․고생물학적 척도에서 말해서 인류 탄생 때부터의 시간이 놀라울 정도로 짧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고, 또한 신다윈주의적 사회생물학[영국의 박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은 자연 도태에 의한 종의 진화를 주창했다.]의 환원주의 해석도 거부되기에 이르렀다.

과거 1만년 사이에, 특히 과거 10세대에 걸친 집단․개인의 생활의 변용은 너무도 크며, 순전한 다윈 진화론에서의 유전자 메커니즘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러한 변용은 획득형질의 유전이 유전자 메커니즘이 아니라 문화적 메커니즘에 의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라마르크[프랑스의 박물학자 라마르크(1744~1829)는 종의 불변성을 처음으로 부정했다.]가 다윈에게 보복을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현상에 ‘유전자’가 아니라 ‘밈’[신다윈주의의 대표논객인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밈’은 기억의 기본단위이며, 개체의 유전형질의 존속을 담당하는 유전자처럼 문화의 존속과 전달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된다.]이라는 생물학적 견해를 펼쳐보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화적 형질의 전달 메커니즘은 생물학적 형질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DNA 혁명에 의해 인류 진화의 연구에 특수한 역사적 기법이 불려들여지게 되었다. 그것에 따라 세계의 역사를 기술하는 합리적 틀도 주어졌다. 그것은 특정한 환경이나 지역이 아니라 복잡한 지구를 총체적으로 연구대상으로 삼는 역사이다. 이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생물학적 진화를 상이한 방법에 따라 연장한 것이 된다.

과거 수십년 동안, 자연과학의 전 영역에 미친 ‘역사화’에 의해서 역사학과 자연과학의 구분은 상당히 약해졌다. 새로운 진화생물학은 그러한 구별을 완전히 일소했다. DNA 혁명의 학제적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카발리-스포르차(Luigi Luca Cavalli-Sforza)는 “전통적으로 정반대의 문화로 간주되었던 과학과 인문학을 시작으로 다른 분야로 나뉘어져 왔던 다양한 연구 중에 많은 공통항이 발견되는 것은 지적인 기쁨이다.”고 말한다. 요컨대 이 새로운 생물학은 역사학이 과학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관한 무의미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새로운 생물학에 의해, 우리들은 인류의 진화에 관해 고고학자와 선사(先史)학자가 채용해 온 기본적 접근방법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즉,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의 양식 및 인류에 의한 환경의 통제 증대에 관한 연구이다. 그 요점은 맑스가 제시했던 문제로 되돌아오는 것에 있다. 즉, 생산기술, 커뮤니케이션, 사회의 조직화(나아가 군사력)의 거대한 혁신에 의거한 ‘생산양식’(실제로 어떻게 부르든)이야말로 인류 진화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문제이다. 맑스가 이해하고 있듯이, 이러한 혁신은 스스로 발생해 온 것도, 또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물질적, 문화적 힘들과 생산관계는 불가분의 것이다. 혁신이란 개별 역사를 만들어낸 남녀들의 활동 그 자체이며, 진공 속이나 물질적 생활의 외부, 또는 과거 역사의 날조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역사의 새로운 관점(perspective)은 과거를 배우는 자의 근본적인 목표로 돌아가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도달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더라도. 그 목표란 “모든 역사”가 아니라 인류의 전체 활동이 나누기 힘들게 교착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전체의 역사’를 그리는 것이다. 이 목표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이 맑스주의자만은 아니었지만(브로델도 그랬다), 그 중 한 사람인 피에르 빌라가 말하듯이[Pierre Vilar, ≪건설 중인 역사 ― 맑스주의 접근방법과 경기순환문제≫, Gallimard/Seuil, 1982 등 참조], 이것을 가장 끈질기게 추구한 것은 맑스주의자들이었다.

역사의 이러한 새로운 퍼스펙티브가 제기한 중요한 문제 중에서, 우리를 인류의 역사적 발전으로 되돌아가게 만든 것이 근원적이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이란 두 가지 힘의 경합이다. 한편으로는 신석기시대부터 핵 시대에 이르기까지, 호모 사피엔스의 변용의 원인이 되어 왔던 힘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집단과 사회환경의 재생산 및 안정성을 변함없이 유지한 힘들이 있다.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후자는 전자를 순조롭게 억제해 왔다. 바로 이것이 이론적 문제의 중심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힘들의 균형이 한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울고 있다. 이 불균형은 어쩌면 인간의 이해력의 범위를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인간의 사회적․정치적 제도의 통제력을 확실하게 능가하고 있다. 20세기에서 인류의 기획의 의도치 않은, 혹은 바라지 않았던 결과까지 이해가 미치지 못했던 맑스주의 역사가는 이번에야말로 그러한 실천적 경험을 양식으로 삼아 우리들이 어떻게 이러한 사태에 도달했는가에 대한 이해에 기여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200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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