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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윤리학

: 벤야민과 데리다 (1)

翻訳倫理学

ベンヤミンとデリダ

후지모토 카즈이사(藤本一勇)

 

* 이 글은 두 번에 걸쳐 발표된 것이다. 원문은 인터넷 검색 요망.

*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쪽수만 가리키는 각주는 모두 본문으로 옮겼다.

* 초역일 뿐이다. 

 

 

발터 벤야민은 문예비평, 예술비평, 미디어론, 사회철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사상가이지만, 또한 그는 비교적 수수한 영역인 번역론에서도 단 한편의 짧은 텍스트 게다가 자신이 번역한 보들레르 번역서에 붙인 서문이라는 위상을 지닌 텍스트 에 의해 후세에 영향을 주고 있다. 오늘날, 번역연구(translation studies)가 화려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으나, ‘번역의 문제가 각광을 받고 하나의 학문영역으로서 인지되기에 이르는 데 있어서 벤야민이나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되는 조지 스타이너의 바벨 후에[각주:1]의 힘이 크다. 또한 견실한 번역학의 전문적기술적 연구의 발전에 덧붙여, 자크 데리다 같은 철학자에 의한, 번역이 지닌 사상적문화적 의의의 부각(close-up)도 빼놓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번역학의 전문기술적인 고찰이 아니라, 번역을 둘러싼 철학적 고찰의 맥락의 하나로서, 벤야민과 데리다의 번역 사상을 소묘한다. 번역이라는 일견 기술적으로 보이는 작업에서 그들은 어떤 사상적철학적 가능성을 보았는가? 그 커다란 방향성을 밝혀보자.

우선 (1)에서는 벤야민의 번역사상의 틀을 번역자의 사명속에서 탐구하기로 한다. 그런 다음 (2)에서는 데리다의 번역론을 프쉬케에 수록된 바벨의 탑타자의 단일언어사용이라는 두 개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벤야민과의 관계성을 논의한다.

 

전달론의 문제점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Die Aufgabe des Übersetzeis), 보들레르의 파리의 풍경의 스스로의 번역에 붙인 서문이다. 벤야민의 개별 연구로서는, 이 번역의 경위와 배경도 흥미롭고, 또한 번역자가 스스로의 번역의 서문에 번역론을 썼다는 자기 언급적인 메타계층구조에 대한 논의도 재미있으나, 여기서는 벤야민의 주장의 내용을 추출하는 것에 집중하자.

[* 국역본은 번역자의 과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잘 알려져 있듯이, 벤야민은 번역의 본질은 의미전달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은 무엇인가를 전달하려 한다는 의도를, 의미를 최대한 도외시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원작은 번역가에 있어서, 원작이 번역자와 그의 번역작품을, 전달될 수 있는 것이 부과하는 노고와 질서로부터 이미 해방하고 있는 한에서만, 본질적인 것이다.

(ヴァルター・ベンヤミン翻訳者使命, ベンヤミン・コレクション2, 浅井健二郎編訳, 三宅晶子久保哲司内村博信西村龍一訳, ちくま学芸文庫, 1996, 405. 이하 벤야민의 텍스트로부터의 인용은 이 번역을 따르지만, 논의의 맥락에 비춰 약간 수정을 가했다.)

* 국역본 : ... 번역은 무엇인가를 전달하려는 의도, 즉 의미를 아주 상당한 정도로 도외시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 그런 정도에서 원작은 단지 그것이 전달의 노력과 전달할 내용의 질서에서 번역자와 그의 작품을 이미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번역에 본질적이다(137쪽).


상식적이고 전통적인 번역관이나 통역관에서는, 번역이나 통역이 번역하는대상은 번역되는 언어(번역학의 용어로 말하면 기점 언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나 내용(메시지)이며, 이것을 번역하는 쪽의 언어(마찬가지로 번역학의 용어로는 목표 언어’)전사하고, ‘옮겨놓는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경우, 번역가능성은 상이한 두 개의 언어에 걸쳐 있으며, 3자의 위치에 선 초월적인 의미(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의해 보증된다. 상이한 두 개의 개별 언어는, 3심급에 있는 의미의, 두 개의 상이한 표현이며, 이 두 개의 표현의 연락소통이나 그 적절함은 이 제3심급에 의해 최종적으로 판단(심판)되는 동시에 보증된다.

이것은 곧 알게 되겠지만, 복수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일자로 회수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복수의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려고 꾀하는 신학적 구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말하면, 현실의 복수적 존재자들은, 이것들을 초월하는 이데아로부터 그 존재 기반(실재성)을 부여받는(메텍시스) 가상물이다. 또 기독교신학으로 말하면, 현세의 모든 복수적 존재자는, 유일자인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두 경우 모두, 이런 복수적 존재자들의 궁극적 존재 이유(의미), 이데아든 신이든, 어떤 일자가 쥐고 있다. 언어론의 역사에서 자주 원용되는 전설로 말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의 탑의 완성된 형태라고나 할까.

그러나 바벨의 신화가 이야기하듯이, ‘은 완성되지 못하고, 언어는 다수어로 분산되며, 사람들은 대지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그런 산종이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번역이 가능해지며, 필요해진다. ‘번역가능성은 오히려 의미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에서 생긴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만일 제3자의 심급으로서의 의미(진리)가 언어들을 관통하고 있다면, 번역을 할 것도 없이 각각의 언어에 있어서 의미의 파악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원래 번역의 필요는 없다. 또 언어들이 각각의 입장을 넘어선 일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언어행위는 의미되어야 할 일자(소기, 시니피에)표현’, ‘표상’, ‘능기/시니피앙로 간주되기 때문에, 원작도 번역과 마찬가지로 일개의 복사[모사]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번역과 동렬의 지위에 놓이고, 설령 원작이 번역 이상의 가치나 힘을 갖더라도, 그것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전달을 번역의 본질이나 가능성의 원천으로 보는 것은 (이런 사고방식은 좁게는 번역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일반에 대한 상식이기도 한데) 거꾸로 번역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빼앗는 것이다.

 

원작이 전달에 전념하는 것이면 그럴수록, 번역에 있어서 이바지하는 것은 갈수록 줄어들고, 마침내 그 의미의 완전한 우위가, 어디까지나 형식으로 이루어진 번역의 지렛대가 되기는커녕, 번역은 헛된 일이 되고 만다(409).

* 국역본 : 원작의 언어가 가치와 품위를 적게 지니면 지닐수록, 그것이 전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여기서 번역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적으며, 결국에 그러한 [의역이 추구하는] 의미의 비중이 과도하게 커짐으로써 그것이 풍부한 형식의 번역을 위한 지렛대가 되기는커녕 번역을 좌초시킨다(141쪽).

 

전달 불가능한 것

벤야민은 번역 가능성의 근원이 오히려 전달 불가능성’, 심지어 번역 불가능성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원작에는 번역에 있어서 전달 이상의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이 본질적인 핵심은, 번역 그 자체에 있어서 더 이상 번역 불가능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 번역에서 전달에 관련된 요소를 가능한 한 추출해서, 그것을 번역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번역자의 작업이 목표로 한 것은 건드려질 수 없는 채로 남겨진다. 그것은 원작의 시인의 말과 마찬가지로, 치환(Obertragung[번역]) 불가능한 것이다(399).

* 국역본 : ... 어떤 한 번역에서 전달을 넘어서는 무엇이 놓여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본질적인 핵은 그 번역 자체에서 다시금 번역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번역에서 전달에 해당하는 부분을 얼마든지 뽑아내어 이를 번역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번역자의 작업이 지향한 어떤 것이 건드릴 수 없는 채 남는다. 그것은 원작과 작가의 말처럼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닌데... (131쪽)

 

벤야민은 전달이라는 개념을 위에서 봤듯이, ‘의미전달로 좁게 파악하고 있으며, 더욱이 의미개념이나 사물등의 의미되어야 할 것으로서만 파악하고 있다. 이런 파악방식 자체는, 전달을 의미로부터 규정하고, 의미도 전달로부터 규정한다는 점에서 순환논법이다. 물론 이 순환논법은 전통적인 전달론, 의미론 자신의 논법이기 때문에, 벤야민의 책임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의미나 전달의 개념에 대해, 벤야민 자신은 전통적인 순환논법을 비판하는 데 머물러 있으며, 울타리를 탈각하는[장벽을 부숴뜨리는] 더 새로운 의미전달개념을 구축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벤야민의 논의 구성은 데리다의 탈구축이 안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제를 이미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지레 짐작해서는 안 되는 것은, 벤야민은 전달 가능한 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번역에 있어서 전달 이상의 것이라든가 번역으로부터 전달에 관련된 요소를 가능한 한 추출해서라는 문장에는, 번역에 있어서 전달 가능한 것이 있다고 하는 전제가 언뜻 엿보인다. 그러나 벤야민에게서 전달 가능한 것은 번역의 본질이 아니다. 번역에 있어서, 전달 가능한 것은 번역의 전부가 아니라 그 일부에 불과하다. 번역에 있어서 전달 가능한 것이 번역을 성립시킨다고 생각하면 본말전도인 것이라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언어와 각각의 언어에 의한 형성물에는, 전달 가능한 것 외에, 전달 불가능한 것 이 존재하는 것이다”(406)["모든 언어와 그 형성물들에는 전달 가능한 것 이외에 전달 불가능한 어떤 것, ...이 남아 있다"(138쪽)].

이런 조심을 한 위에서, 벤야민이 말하는 번역 불가능한 것을 생각해보자. 그가 끄집어낸 번역의 본질로서의 번역 불가능한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면, 흔히 말해지듯이 (이것도 번역의 의미론적 정의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이다) 원문이 지닌 다의성, 미묘한 뉘앙스, 음영, 함축, 문장의 리듬 등의, 일반적으로 행간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벤야민의 문장 그 자체는, 이것들의 어떤 해석도 배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그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다. 또한 원문의 자구 배열을 말하는 것일까? 벤야민은 축자성(축자적 번역)’에 매달리고 있기에, 이것을 번역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고 싶어지지만, 그러나 자구의 모습과 그 배열이 번역 불가능한 것임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들을 그대로 재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원문을 그대로 제시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번역이 아니다.

또한 아까 번역의 본질의 논의로부터 벤야민이 배제하는 것처럼 생각된 의미’(의미로서 지향되는 것)도 번역 불가능한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의미란 말이 말하려고 하는 지시대상, 예를 들어 물자체를 가리키는데, 물자체가 엄밀하게는 인식 불가능하다는 것은 칸트 철학 이후의 상식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번역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물 자체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유형의 의미론적 번역관을 벤야민은 비판했던 것이다. 벤야민은 그의 번역론을 분명히 인식 비판과 결부시켰다.

 

원작과 번역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식 비판이 모사이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할 때 걷게 되는 사고과정과, 그 의도에 있어서 더 닮은 고찰이 이뤄져야 한다. 인식비판에 있어서, 인식은 현실적인 것의 모사인 경우에는 객관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객관성을 주장하는 권리조차도 없다는 것이 제시된다면, 이 고찰에 있어서는, 번역은 그 궁극적 본질로서 원작과의 유사를 지향하는 한, 원래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394-395).

* 국역본 : 원작과 번역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식비판이 모사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하는 사고 과정과 전적으로 유사한 의도를 갖는 어떤 숙고를 해볼 수 있다. 그러한 인식비판을 통해 인식에서 객관성이란 그것이 현실적인 것의 모사 속에 존재할 것 같으면 성립할 수 없고, 심지어 여기서 번역이 원작과의 유사성을 그 자신의 마지막 본질에 따라 추구할 경우 어떠한 번역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입증될 수 있다(127쪽). 

 

벤야민의 번역론은 번역의 인식비판론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 번역=표상이라는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며, 벤야민이 말하는 번역 불가능한 것, 번역 불가능성이란, 표상 불가능한 것, 표상 불가능성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확하다. 따라서 번역 불가능한 것을 앞에 둔 번역의 완수 불가능성이 번역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벤야민의 아이러니한 번역관은, 결코 모순어법이 아니다. 그것은 표상 불가능한 것이 번역을 요구하고, 번역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로 취해야 할 것이다. , 표상 불가능한 것을 건드리고자 하기 때문에 번역인 것이며, 즉 번역은 변형, 변환, 전이, 치환을 통해, 표상 불가능한 것을 구멍’, ‘구덩이로서 부각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의 임계

의미자구배열이든 행간이든, 아무튼 벤야민의 번역론의 사고대상은, 표상 불가능한 것의 일반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표상 불가능한 것에 부딪치는 번역의 한계=경계이다. 한계와 경계의 의미를 아울러서 여기서는 임계라고 부르기로 하자. 번역의 임계를 묻는 벤야민의 사고는, 노하우로서의 번역술을 논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한데, 더욱이 개별의 번역 방식을 논하는 번역연구도 아니다. 분명히 번역을 메타의 시점에서 사고하고 있다. 벤야민의 번역론이 실천적 번역자들이나 실제적 번역 메커니즘의 연구자들에게서 평판이 나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행위의 임계를 묻는 사고는, 그 행위의 실천에 직접 도움이 되지는 않으며, 또한 메커니즘의 분석을 가능케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주저하게 하며 저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벤야민은 번역의 사명이 아니라 번역가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벤야민의 관심은 번역의 메커니즘이나 테크놀로지에 있는 게 아니라, 번역에 있어서의 윤리나 철학에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번역의 불가능성의 문제가 언어에 있어서의 폭력의 문제라는 것을 들이댄다. ‘번역 불가능한 것은 번역의 피하기 힘든 한계를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번역의 경계선상에 있어서의 폭력도 보여주는 것이다. ‘번역 불가능한 것에 대해 언급한 후, 벤야민은 이렇게 계속한다.

 

번역의 언어는 그 내실을, 넉넉한 주름을 갖춘 왕의 망토처럼 감싼다. 왜냐하면 번역의 언어는 그것 자신보다도 고차적인 언어를 의미하고, 그것에 의해 그 자신의 내용에 대해 부적당하고 폭력적이고 이질적인 것에 머물기 때문이다(399).

* 국역본 : 번역의 언어는 마치 주름들이 잡혀 있는 널따란 왕의 외투처럼 그것의 내용을 감싼다. 왜냐하면 번역의 언어는 그 언어 자체보다 더 상위의 언어를 의미하며, 그로써 번역 자신의 내용에 어울리지 않고 강압적이며 낯선 채로 머물기 때문이다(132쪽). 

 

번역이란 기점언어를 목표언어로 변형하는 작업인 이상, 거기에는 일종의 폭력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변형의 폭력을 두려워해 번역의 작업을 포기해버리면, 원작의 위광(威光)은 생겨나지 않는다. 번역은 스스로가 휘두르는 변형의 폭력을 자각하고 떠맡으면서도 그 폭력에 대해 협박을 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을 원작인 채로 전이시킨다는 불가능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 번역이 번역인 이상, 스스로가 원문의 대체자(데리다라면 대체보충supplément‘이라고 말할 것이다)임을 은폐말소하고, 원문을 탈취하거나 개작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자신이 휘두르는 변형의 폭력 속에서, 그래도 원문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상 불가능한 충실성에 계속 빙의된다는 충실성 말하자면, 충실성에 대한 충실성이야말로 번역자의 사명이다. 그것은 번역의 임계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에 계속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역과 원작의 상호 확증

이런 번역의 행위는, 이른바 원작의 증언, 원작의 영광의 증언이라는 의미를 띤다. 벤야민에 따르면, 번역이란 그것이 존재함으로써 원작을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드높이는 것이다.

 

번역은 원작을 어떤 하나의 언어영역으로 이식한다. 그것은 적어도 원작이 이 영역으로부터 더 이상 어떤 치환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이 영역으로 오로지 새롭게, 다른 부분에 이르기까지 드높여질 수 있는 한에서 아이러니한 의미에서 더 궁극적인 언어영역인 것이다(400).

* 국역본 : 따라서 번역은 원작을 어떤 ― 아이러니하고 ― 보다 궁극적인 언어 영역으로 옮겨 심는 작업인데, 그것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원작을 그 영역으로부터 더 이상 어떤 번역을 통해서도 옮길 수 없고 오로지 그 영역 속으로 항상 새로이, 그리고 다른 부분들에서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32쪽).

 

벤야민은 번역이 원작보다 사후의 존재임을 지적한다(당연한 것이지만). 그리고 번역은 원작이 그 삶 이후에도 사후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번역은 원작에서 유래한다. 게다가 원작의 삶이라기보다 그 <살아남음 Überleben>에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번역은 원작보다 나중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며 번역은 그 작품의 <사후의 삶 Fortleben>의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삶과 그 사후의 삶이라는 사고방식은, 은유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번역에 있어서, 원작의 삶은 그 항상 새롭고 최종적인, 가장 포괄적인 발전단계에 도달한다(392-393).

* 국역본 : ... 번역은 원작에서 나온다. 그것도 원작의 삶에서라기보다 원작의 '사후의 삶'에서 나온다. 번역은 그렇지 않아도 원작보다 뒤늦게 생겨나며, ... 번역은 그것들의 사후의 삶의 단계를 지칭하게 마련이다. 완전히 비은유적인 객관성 속에서 예술작품의 삶과 사후의 삶에 대한 생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 번역들은 그것들이 매개 이상의 것일 경우 한 작품이 사후의 삶에서 자신의 명성의 시대에 도달했을 때 탄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들은 열악한 번역자들이 자신들의 작업에 요구하곤 하듯이 명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명성 덕택에 생겨난다. 그 번역들 속에서 원작의 삶은 언제나 새롭게 자신의 가장 뒤늦으면서 포괄적인 전개의 단계에 도달한다(124-125쪽). 

 

번역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원작이 번역될 정도로 값어치가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어야만 하지만, 그러나 번역이 없다면, 원작의 탁월성은 제시되지 않으며, 현전하지 않는다. 번역은 원작의 사후에 도래하며, 원작의 삶을 소생시키고, 오래토록 살게 하며, 명성이나 영광이 높아지는 것을 가능케 한다. 여기서는 원작과 번역이 공존관계, 상호확증관계에 있다.

이것이 유대-기독교(특히 유대교)에서의, 창조자인 신과 증언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관계의 유비라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사의 오더(order)인 신은 세계를 창조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업(작품)을 기리는 관객으로서의 증언자를 원했다. 그래서 신은 세계라는 작품 전체를 대충 만든 후, 증언자로서의 인간을 만들고, 로고스를 주고, 자신의 작품을 기리게 만든다. 인간은 신의 업의 증언자로서 존재 이유를 부여받고, 신은 증언자인 인간에 의해 그 존재나 힘을 확증받는다. 이런 신과 인간의 교류, 상호 승인의 증표가 계약의 책인 성서가 된다.

벤야민이 역설한 원작과 번역의 관계는 신(창조)와 인간(증언)의 관계에 대응한다. 사실 벤야민은 번역의 모델을 신의 말과의 관계 속에서 보고 있다(390, 401을 참조). 그러나 역점은 이동하고 있다. 유대-기독교의 정통(正統)에서 신의 창조는 절대적으로 자율적이다. 그러나 벤야민에게서는 마치 증언이 증언되어야 할 것(원작)의 가치를 그때마다 창조해가는 것 같지 않은가. “번역에 있어서, 원작의 삶은 그 항상 새롭게 최종적인, 가장 포괄적인 발전 단계에 도달한다.” 원작을 번역이, 기원을 말단이, ‘흔적으로서, ‘에크리튀르로서 입증해가는 운동은, 그것을 더욱 급진적으로 한다면, 데리다가 대체보충이라고 부른 것이 되리라. ‘유래는 이미 경유인 것이다.

벤야민의 논의를 더욱 급진적으로 하면, 원작은 번역의 시련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살아남게 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기독교의 전통에서는, 당연히 시련을 받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인데, 여기서는 번역뿐 아니라 (번역이 시련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원작도 번역의 시련을 받는다[겪는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뛰어난 번역을 산출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원작은 번역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전자는 자명한 것이다. 뛰어난 번역을 다시 산출할 수 있는가 여부는 원작의 힘에 달려 있다. 후자에 대해서는, 원작은 그것이 완전히 번역되어 버리지 못한다면, 원작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원작은, 뛰어난 번역이 아무리 밀려오더라도, 반드시 그 잔여, ‘번역 불가능한 저항의 부분이 없으면 오리지널(original)할 수가 없다. 원작이 원작인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저항력을 가진 점에 있다. 원작의 풍요로운 저항력 때문에, 상이한 무수한 번역이 산출되는 것이다. 저항 없이 하나의 번역으로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소진되는] 작품에서는 원작으로서의 힘이 약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번역으로 소진되지 않는 잠재력을 가져야만 다수의 번역을 산출할 수 있다. 이 저항의 잠재력을 많이 갖고 있는 작품이야말로 뛰어난 원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작품이 얼마나 저항의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번역의 시련에 부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원작과 번역의 상호 확증 관계는 단순한 한통속이나 예정조화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엄격한 시련을 주는 관계라고 말해도 좋다. 게다가 그것은 항쟁이나 전쟁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분유=분할의 공동성을 구성하는 관계이다.

 

순수언어

그러므로 번역은 원작의 모사copy가 아니다. “번역은 하나의 고유한 형식이며, 번역자의 사명도 또한 하나의 고유한 사명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401)["번역이 하나의 고유한 형식이라면 번역자의 과제도 작가의 과제와 확연히 구별된느 고유한 과제로 파악될 수 있다"(133쪽)]. “번역은 언어활동의 자유 속에서 충실한 법칙을 따르면서 그 가장 고유한 궤도를 따라 걷는다”(408)["번역도 ... 충실성의 법칙에 따라 언어운동의 자유 속에서 그 고유한 궤도를 따라간다"(139쪽)]. 그것은 표상이면서 표상의 임계를 돌파하려고 하는 특이한 욕망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번역 불가능한 것,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요구하고, 자신의 한계까지, 경계선상에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달 불가능한 것의 도래를 오로지 희구하는 기도와도 같은 작업이다. 그것을 전적인 타자의 도래에 대한 기원(祈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벤야민에 있어서, 기도를 잘 보여주는 용어가 순수언어이다. ‘순수언어라는 개념은 많은 논자를 끌어드ㅡㄹ이면서도, 번역자의 사명에서도 특히 난해한 개념으로 유명하다. 벤야민에 의한 순수언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순수언어란 스스로는 더 이상 무엇도 지향하지 않고, 무엇도 표현하지 않고, 표현을 갖지 않은 창조적인 단어로서, 모든 언어 하에서 지향되는 것인데, 이 순수언어에 있어서 마침내, 모든 전달, 모든 의미, 모든 지향은, 이것들이 모조리 소멸하도록 정해진 하나의 층에 도달한다(407).

* 국역본 : 더 이상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며 표현할 수 없는 말, 창조적인 말로서 모든 언어 속에 의도된 것이라 할 이 순수언어 속에 결국 모든 전달, 모든 의미, 그리고 모든 의도가 하나의 층위에서 만나며, 이 층위에서 그것들은 소멸하게끔 되어 있다(139쪽). 

 

순수언어란 그 자체가 존재 자체와 일체가 되는, 주관과 객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기호와 의미,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그런 신적 로고스의 이미지로 이해되고 있다. 그것은 지금 거론한 이항대립을 전제하는 전달’, ‘의미’, ‘지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언어이며, 언어가 그대로 존재의 창조인 언어이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얘기될 때의 =로고스이다.

이런 순수언어는 모든 언어 아래서 지향되는 것이다. 모든 개별 언어는 순수 언어를 동경한다(402)[134쪽]. 그것은 원작이라는 것, 원문이라는 것도 아니다. 원문도 개별 언어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원문의 원어도 순수언어를 내포하면서도 덮어 감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원문도 번역도 구조상의 자격은 동등하다. 그러나 번역 언어는 그 대체보충적인 입장 때문에, 원작 이상으로, 모든 언어가 지향하는 순수언어에 대한 동경을 강하게 지닌다. 이런 점에서는 번역이 순수언어에 대한 지향이라는 언어 일반의 지향 구조를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벤야민은 원작에 있어서는, ‘창작에 있어서는, ‘시인의 행위에 있어서는, 언어가 그 내실에 대한 연관으로 직접적으로 향하는 반면, 번역에 있어서는, 언어가 지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문의 언어이며, 직접적인 내실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창작의 지향은 결코 언어 그 자체, 언어의 전체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직접적으로, 언어에 관련된 특정한 내실의 연관으로 향한다. 하지만 번역은, 창작과는 달리 이른바 언어 그 자체의 깊은 숲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번역은 이 숲의 외부에 있으며, 이 숲에 대치하며, 그리고 이 숲에 발을 내딛는 것도 아니며, 그때마다 번역의 언어 자신 속의 메아리가 다른 언어로 쓰여진 작품의 반향을 울리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소에 서서, 원작을 불러들인다. 번역의 지향은, 창작의 지향과는 뭔가 다른 것을, 즉 다른 언어로 쓰여진 개별 예술작품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언어 전체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그것 자신이 다른 지향이기도 하다. , 시인의 지향은 소박한, 시원적인, 직감적인 지향이며, 번역자의 지향은 파생적인, 궁극적인, 이념적인 지향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언어를 저 하나의 진정한 언어로 통합한다는 장대한 모티프가 그의 작업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401-402).

* 국역본 : 문학작품의 의도는 결코 언어 자체, 그 언어의 총체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언어적 의미 연관만 직접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은 문학작품과는 달리 자신이 마치 언어 내부의 숲속 자체에 있는 듯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숲의 외부에서 그 숲과 대면한다고 여기며 그 숲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서 원작을 불러들이는데, 자신의 언어로 울리는 메아리가 낯선 [원작의] 언어로 쓰인 작품에 대한 반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불러들인다. 번역의 의돈느 문학작품의 의도와는 무언가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 즉 낯선 [번역자의] 언어로 재현된 개개 예술작품의 언어 전체를 지향하는 것만 아니다. 번역의 의도는 그 자체가 또 다른 것이기도 하다. 즉 작가의 의도가 소박하고 일차적이며 구체적이라면 번역자의 의도는 파생된 것이고 궁극적이며 이념적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언어들을 하나의 진정한 언어로 통합하려는 거대한 동기가 그의 작업을 채우기 때문이다(133-134쪽). 

 

저 하나의 진정한 언어순수언어이다. 개별 언어는 그 언어구조, 문화구조, 역사상황 등에 대한 구속에 의해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지향의 방식은 다양한 것이다. 그렇지만 언어들은 지향하는 그 방식에 있어서 서로 보완하고 조화롭게 합일되는”(402)["스스로 의도하는 방식에서 보완되고 화해되어 서로 합일되는"(134쪽)] 것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 성과가 순수언어라고 불린다.


언어들 사이의 모든 역사를 넘어선 친연성의 성질은, 각각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개별 언어에 있어서, 그때마다 하나의, 더욱이 동일한 것이 지향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일한 것은, 개별적인 언어들로는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언어들이 서로 보완하는 이러저러한 지향(intention)의 총체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곧 <순수언어(die reine Sprache)>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언어들의 모든 개별 요소가, 즉 단어, 문장, 문맥이 서로 배제하는 반면, 언어들은 그 지향 자체에 있어서 서로 보완하는 것이다(396-397).

* 국역본 : 오히려 언어들의 초역사적 근친성은 각각의 언어에서 전체 언어로서 그때그때 어떤 똑같은 것이, 그럼에도 그 언어들 가운에 어떤 개별 언어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언어들이 서로 보충하는 의도의 총체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똑같은 것이 의도되어 있다는 점에 바탕을 둔다. 그것은 곧 순수언어이다. 즉 서로 낯선 언어들의 모든 개별적 요소들, 단어, 문장, 구문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반면, 이 언어들은 그것들의 의도 자체에서는 서로 보완한다(129쪽). 

 

순수언어에 대한 지향은, 서로 다르며, 세계는 분산된 언어들을 어떤 친연성’, ‘공동성속에 둔다. “각각의 언어는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오리하게, 모든 역사적인 연관과는 무관하게, 언어들이 말하고(Sagen) 있는 것에 있어서 서로 친연성을 갖고 있다”(394)["언어들은 서로 낯설지 않고 선험적으로, 그리고 모든 역사적 관계를 차치하더라도 그 언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 서로 근친관계에 있다"(126쪽)]. 이것은 새로운 바벨의 탑의 건설을 이미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순수언어라는 지향 대상은, 벤야민이 인용하고 있는 의 사례(394)[130쪽]와는 다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언어는 어디까지나 언어들의 동경으로서, 꿈으로서 지향되는 것이다. 번역의 언어(목표언어)는 스스로의 언어가 번역대상의 언어(기점언어)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하는, 불가능한 꿈을 꾼다. 하지만 이것은 번역에 한정되지 않고, 무릇 언어인 이상, 모든 언어(원작, 창작도 포함해)가 지닌 꿈이다. 번역은 언어일반이 가진 이 불가능한 과제(표현매체와 대상 사이의 합치, 기호와 존재의 즉융(即融)), 범례적으로 부각시키는 각별한 통로이며, ‘아케이드이다.

 

불가능한 메시아주의

벤야민의 바벨의 탑은 잃어버린 바벨의 탑이다.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추억에 의해, 언어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낭만주의나 유대신비주의 사상을 방불케 한다. 낭만주의와의 관련은 독일 비애극의 근원이나 그 밖의 논문을 보면 분명하며, 번역자의 사명에서도 번역과 낭만파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다(400-401)[132-133쪽]. 유대신비주의와의 관련은, 숄렘과의 관계로부터 이것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이 두 개의 관련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지는 않으나, 아래의 대목이 숄렘을 통한 유대신비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은 많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다.

 

하나의 그릇 조각을 조합하려면, 이 조작들은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서로 합치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번역은 원작의 의미에 스스로를 닮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랑을 갖고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이 갖고 있는 지향하는 방식을 자신의 언어 속에 형성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작과 번역은, 마치 그 조각이 하나의 그릇의 파편으로 인정되듯이, 하나의 더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404-405).

* 국역본 : 즉 어떤 사기그릇의 파편들이 다시 합쳐져 완성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미세한 파편 부분들이 하나하나 이어져야 하면서 그 파편들이 서로 닮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번역도 원작의 의미에 스스로를 비슷하게 만드는 대신 애정을 가지고 또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에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동화시켜 원작과 번역 양자가 마치 사기그릇의 파편이 사기그릇의 일부를 이루듯이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136-137쪽). 

 

우리는 여기서는 유대신비주의와의 관련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바벨의 탑의 더욱 일반적인 이미지와 결부시켜두려고 할 뿐인데, 벤야민의 순수언어론에는, 잃어버린 그릇에 대한 향수가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실낙원으로 대표되는 기원의 상실의 얘기가 아니다. ‘순수언어는 과거 어딘가에 실재했던 역사상의 어떤 기원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미래, ‘종말의 언어이다. 벤야민은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지향되는 것이, 다양한 지향하는 방식[=언어들] 모두의 조화 가운데에서, 순수언어로서 나타날 수 있게 될때이다(398)["의도된 것이 모든 의도하는 방식들의 조화에서 순수언어로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130쪽)].

 

그때까지, 지향되는 것은 언어들 속에 숨어 있는 채이다. 그러나 만일 언어들이 이렇게 해서, 그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에 도달할 때까지 성장한다면, 그때야말로 번역은, 작품들의 영원한 사후의 삶과 언어들의 무한한 활성화에 의해 불타오르며, 끊임없이 새롭게, 언어들의 저 성스러운 생장(生長)을 검증하는 것이다(同頁).

* 국역본 : 그처럼 오랫동안 그 의도된 것은 언어들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언어들이 이처럼 그것들의 역사의 메시아적 종점에 이를 때까지 성장한다면, 작품들의 영원한 사후의 삶에서, 그리고 언어들의 무한한 생기에서 점화되면서 항상 새롭게 언어들의 성스러운 성장을 시험해보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130쪽). 

 

잃어버린 기원이 종말의 메시아적 때에 있어서 회복된다는 종말-목적론도 유대-기독교의 역사 이야기이다. 벤야민에게 그 향수가, 잔재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벤야민은 전통적인 종말-목적론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이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의 때는, 그 자체로서는, 즉 역사상의, 시간축상의 사건으로서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고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질성[언어들의 이질성]순간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은, 인간에게는 거절되고 있다. 혹은 어찌됐든 그것을 직접 지향할 수는 없다”(同頁)["이러한 이질성을 이처럼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해결하는 방식과는 또 다른 해결방식, 어떤 순간적이고 궁극적인 해결방식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거나 어쨌든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는 없다(131쪽)]. ‘순수언어가 출현하는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일시적이고 잠정적해결은 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 항상 이미 그것은 생겨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번역의 순간인 것이다. 더 나아가 번역의 지금 여기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그때마다 메시아적 종말구원완전한 구원으로서는 불가능한 구원’, 그래도 무가 아닌 어떤 누력으로서의 구원(혹은 구원의 기원)의 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번역은 언어들의 이질성과 대결하는 하나의, 아무튼 잠정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번역은 모든 언어 결합의 궁극적, 최종적, 결정적인 단계로 향하는 스스로의 방향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同頁).

* 국역본 : 이로써 물론 모든 번역은 언어들의 이질성과 대결하는 모종의 임시적 방식일 뿐이라는 점이 인정된 셈이다. 이러한 이질성을 이처럼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해결하는 방식과는 또 다른 해결방식, 어떤 순간적이고 궁극적인 해결방식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거나 어쨌든 직접적으로 추구할 수는 없다(130-131쪽)

 

번역자에게는 번역에 있어서 순수언어의 씨앗을 성숙시킨다는 과제”(403)["번역 속에서 순수언어의 씨앗들이 익어가도록 한다는 과제"(135쪽)]가 부과된다. 과제=사명”(Aufgabe), 단순히 상실된 기원을 회상하는 것도, 미래의 종말의 때의 현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이 언어들의 번역 속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순수언어를 형성된 형태에 있어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 이것이 번역이 짊어진 강력한, 더욱이 유일한 힘인 것(407)["순수언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일, 이것이야말로 번역이 지닌 엄청나면서 유일한 능력"(138-139쪽)]이지만, 그것은 산종된 개별언어의, 개별 번역의 지금 여기에서, 기다림 없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번역의 지금 여기의 작업이 이뤄짐으로써, 번역은 스스로가 순수언어를 지향하여 작업을 하면서도, 그 작업이 결코 순수언어일 수 없었다는 것을 그때마다 돌이켜 생각하고, 또한 새롭게 스스로를 순수언어라고 부르게 하면서 기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스스로의 좌절과거’(이것은 원리적인 실패이며, 단순한 실책이 아니다)를 용수철[계기]미래에 기투하는 것인데, ‘기는 그 미래도 반드시 좌절과거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가운데에서의 기획이다. 이 목표(goal) 없는 기투, 미래에의 열림의 운동 그 자체,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불가능한) ‘역사의 메시아적 종말의 때이며, ‘순수언어의 때가 아닐까.

우리는 나중에 이런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데리다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과 결부시켜, 그 관련성을 논하기로 한다.

 

타자의 언어

아무튼 벤야민의 번역론은 언어가 지닌 근원적인 타자성으로 우리를 꼬드기는 것처럼 생각된다. “순수언어란 그런 언어의 타자성을 집약한 생각이 아닐까? ‘순수언어는 번역의 언어가 목표로 하면서도, 실현 불가능한, 타자로서의 언어였다(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도래할 언어[각주:2]일까?).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순수언어는 원작의 언어에 있어서도 타자의 언어인 것이다.

 

이질적인 언어의 내부에 속박되어 있는 그 순수언어를 스스로의 언어 속에서 구원하는 것, 작품 속에 갇힌 것을 언어 치환 속에서 해방하는 것이, 번역자의 사명에 다름없다. 이 사명을 위해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썩은 울타리를 부숴뜨린다(407-408).

* 국역본 : 낯선 [원작의] 언어 마력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순수언어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해방시키고 또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이다. 이 순수언어를 위해 번역자는 자신의 언어의 낡은 장벽을 무너뜨린다(139쪽). 

 

번역은 그 변형 작업에 있어서, 원문이 원문 자신에 있어서도 보지 못했던 부분을 부각시킨다. 원작의 언어도 또한 하나의 개별 언어인 이상, 원문에 있어서도 순수언어이며, 스스로가 내포하면서도, 혹은 스스로가 체현하고 있으면서도, 원문만으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언어이다. 번역은 이 원문의 원문 자체에 대한 타자성을 조사한다. 복수의 번역이 있으며, 그 수만큼 원문은 그 풍성한 양상을 드러낸다. 그것은 원문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프리즘을 형성할 것이다. 원문과 그것을 둘러싼 다수다양한 번역이 빚어내는 다면체 그것이 저 다양한 지양하는 모든 방식의 조화 속에서, 순수언어로서 나타나는것 아닐까? 벤야민은 조화라고 말하는데, 물론 이 다면체는 결코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긴장이나 충돌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체고정된 전체가 아니라 항상 그때마다, 번역의 개별성을 따라 변모하는 전체 , 분열과 과리를 토대로 하는 동적인 일체성’(데리다는 타자의 언어의 단일성이라고 말한다)을 형성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다수다양한 타자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분유=분할체는, 개별 언어의 타자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성을 구축한다. <타자의 언어> 혹은 <언어의 타자성>에 대한 지향은, 데리다의 번역론과, 어떤 관계를 맞부딪치며 맺을까?

 

이상으로 베냥민의 번역자의 사명의 독해를 통해, 번역의 문제에서 타자의 언어의 문제에 이르렀는데, (2)에서는 데리다에게서의 타자의 언어론에서 출발해, 그의 번역론으로 접근해보자.

 

 

  1. ジョージ・スタイナー, 『パベルの後に : 言葉と翻訳の諸相』, 全二巻, 亀山健吉訳, 法政大学出版局, 上巻 1999년, 下巻 2009년. [본문으로]
  2. デリダ, 『たった一つの、私のものではない言葉ーー他者の単一言語使用』, 守中高明訳, 岩波書店, 2001년. 128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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