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나가하라 유타카


2013년 9월 30일 초판발행



목차

1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이치다 요시히코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2. 세계공화국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라!보다 약 8년 전에, 하버마스는 유럽을 둘러싼 또 다른 인상 깊은 정치문서를 발표했다. 인상 깊음의 절반은 그가 초고를 쓴 그 우리의 전후 부흥 : 유럽의 재생(20035)에서, 그와 오랜 논적이었던 자크 데리다가 공저자로서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 있지만(데리다가 초안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주로 건강문제에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눈에서 볼 때, 이 문서는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라!와의 거리에 있어서야말로 인상 깊다. 정치 문서의 안목으로서의 상황적 주장을 비교했을 때, 정반대의 것을 호소하고 있다. 2011년의 문서에 관해서는 이미 봤던 대로이다. 국민투표가 타국의 정치가의 압력에 의해 중지됐고, 그리스인은 주권을 행사할 기회를 빼앗겼다. , EU의 상황은 주권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다.

이에 대해 2003년의 문서는 주권이 EU를 재생이 필요할 정도로 빈사瀕死의 상태에 사로잡혔다는 진단을 기조로 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스페인의 총리가 독주하여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와 가담을 공공연하게 표명하고, 내심 전쟁에 흥미를 가지고 기웃거리던정부들의 등을 떠밀고, ‘불량배불량배의 전쟁에 EU 전체를 끌어들인 데에 있다. 그 표명은 유럽의 공동 외교를 좌절에 몰아넣고, 매파 미국과 비둘기기파 유럽, 신적인 칼과 인도주의의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힘든 일련의 분업체제를 완성시켰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했을 거라던) 주권, 미국의 (전쟁 개시 결단을 내린) 주권, 스페인의 (누구에게 정의가 있는가, 누구를 퇴장시켜야 하는가를 선택하고 그것을 표명하는) 주권을 앞두고, “차이들을 승인하는 것, 타자를 그 타자성에 있어서 서로 승인하는 것정체성/동일성이라고 해야 하며, “유럽적 공공성은 패배했다. “국가폭력의 행사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전지구적 수준에서도, 주권의 행동 범위를 상호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EU의 간주권적 통치원리는 일국의 총리의 배반 이것도 주권의 행사일 것이다 때문에 좌절한 것이다. 그래서 전후에 기대를 걸었던 재생의 호소이다.

데리다가 좀 더 살았더라면(2004년 사망), 이 대조contrast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가 서명한 2003년의 공동문서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거의 무게를 갖지 않았으나, 차이나 타자성을 승인하는 것, 그리고 간주권적 통치를 이 문서의 민주주의개념으로 간주한다고 본다면(그렇게 봐도 나쁜 이유가 데리다에게 있을까), 그 대답은 생전의 저작에서 충분하게 추측하여 헤아릴 수 있다. 2002년의 불량배들이다. 거기서는 민주주의가 깊은 자기면역성의 병을 앓고 있다고 간주됐다(앞의 책, 3. 민주제의 타자, 대신하다 : 대체와 교체). 이를 테면,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 자살적이다 등등. 예를 들어,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의 승리를 눈앞에 둔 선거과정을 군부가 정지시킨 알제리. 정지시키지 않으면, 알제리의 민주주의는 확실하게 하나의 끝을 맞이했을 것이다. 정지는 실제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선거과정의 정지는 민주주의의 정지이다. 게다가 이라크. 불량국가를 쫓아내지 않으면 중동에 민주주의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무력 공격을 받지도 않은 국가들이 하나의 주권국가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주권국가 간의 민주주의에 반한다.

EU를 둘러싼 두 개의 정치문서를 염두에 두면서,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을 패러프레이즈해보자. 주권자를 실정적으로 성립시키는 것은, 그 주권자가 누구든 민주주의이며, 데모스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는 지고적인 지배권으로서의 주권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하나의 통치 이념일 수 있다. , 주권이란 민주주의의 자기일 것이다. 그 주권이 민주주의의 타자가 되어 버린 사태를 두 개의 문서가 보여주는 대조contrast는 부각시키고 있다. 맨 먼저, 주권과의 일체성으로부터 우리를 주권적 공공성으로 조금 떼어낸 민주주의는 주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2003). 그 다음으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그 민주주의가, 바로 간주권적 공공성의 이름으로, 주권의 공격에 착수하는 것이다(2011). 하버마스적 어휘인 간주권적 통치나 그것에 일치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는 공공성불량배들의 데리다는 이렇게 표현한다. “보편적인, 심지어 국민국가적 구조로부터 독립한 민주주의의 이런 세계정치적(=코스모폴리탄적인) 차원”(강조는 인용자). 두 사람의 어휘가 이렇게 상통한다고 상정해야만 2003년 문서에 데리다가 서명한 것을 납득할 수 있다(이 상통으로부터 무엇을 독해할 수 있는가는 나중에 보자). 아무튼 주권과 민주주의의 분리는 아무리 민주주의 개념을 주권 개념에 구속되지 않는 차이나 타자의 승인으로 확장하더라도 이는 자기자기의 분리에 다름 아니며, 그 확장 자체에 의해서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을 높여버릴 것이다. ‘민주주의의 타자란 우선 민주주의의 자기라는 것을 주권으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해방은 깨닫게 해줄 것이다. 시민사회의 수세기 동안의 역사적 성숙과, 홀로코스트를 정점으로 하는 그 비참한 이면(裏面)이 가능케 하고 또 요구하기도 한 민주주의 개념의 확장, 주권을 넘어선 지평으로의 그 이동이, 민주주의에, 스스로 뿌리치고 달아났을 터인 과거의 제약, 이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했을 터인 뿌리를 썩게 하고, 스스로를 공동화(空洞化)시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2011년의 문서는 비통한 외침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 에 의해 증언하고 있다. 불량배들의 논리는 이런 진단을 이 문서에 내린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도마에 올린 베니 레비(목자의 살해)나 장-클로드 밀네르(민주주의적 유럽의 범죄적 경향), 혹은 앞 절에서 우리가 거론한 레지스 드브레 등의 논자들의 프랑스적 공화주의(주권주의적 공화주의)는 이런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에 대한 바로 면역 반응일 수도 있다. ‘자기면역성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그 자체를 타자화해버리는 것이다. ‘공화국의 타자로 말이다. 그들은 전체주의자나 신권정치의 옹호자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민주주의자로서, 공공정신을 시들게 하고 사적 개인의 사회생활의 양식으로 전락한 민주주의의 현재를 증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민주주의에 공화주의의 이름을 준다는 공통성에 의해 하나의 사상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토크빌 이후의 민주주의 비판을 프랑스 혁명의 옹호 요체는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의 옹호 와 공존시키는 특수한 프랑스적 이데올로기이다. 데리다에게 자기면역성은 분명히 민주주의의 결함 본성적 역설paradox 에 불과하지만, ‘불량배이라크를 처벌하고 쫓아내려고 하는 미국도 불량배라고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한에서, 역설은 자기파괴 경향뿐 아니라 재생의 계기도 포함했다. 두 사람의 불량배는 모두 민주주의의 자기라고 하는, 견딜 수 없는 현황 인식의 그 견딜 수 없음은 자기의 내부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전쟁은 그 자체가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힘든 분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도 또한 자기면역적 반응이며(타인의 전쟁이라면 방치해두면 된다, 어처구니없다고 한탄할 뿐이어도 된다), 바로 그것이 정의의 계기이라고 데리다는 자기를 완전히 타자화하여 문제를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하는 공화주의자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가 이용했던 공화주의 개념의 특성을 세 가지 차이를 통해 더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 이데올로기로서의 공화주의는 국가주권과 민주주의의 괴리에 대한 거부에 의해 특징지을 수 있는데, 우리의 공화주의 개념에는 원래 공화국의 주권이 필요 없다. 그것은 이미 봤듯이, 군주에게도 귀족에게도 민중에게도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체제의 개념이며, 주권이 아닌 현실권력 (real power) 사이의 차이, 경합, 모순을 집합체의 권력의 확장으로 변환하려고 한다. 이 점에서, 헌법에 주권 규정을 포함하지 않고서도, 원리적으로 얼마든지 State(=국가)를 연방에 환영하며 맞아들일 수 있는 미국은, 우리가 말하는 공화국의 한 가지 모델일 것이다. United States를 하나의 주권국가로 만드는 것은 국제관계’(하버마스의 간주권적지평)일 뿐이다. 공화국의 내적 구성에 주권은 필요 없으며, “자유의 구성 Constitutio Libertatis”으로서의 공화국 헌법은 사회계약이 아닌 개인 간 동맹이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 국가 간 조약과 마찬가지로 간주권적인 맹약이며, 맹약에 의해 성립된 사회에 개인이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특히 주권은 넘겨주지 않는 특수한 사회계약 경제인(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의 사회설립계약 같은 이다. 아무튼 주권과는 다른 지평에 서서, 혹은 그 지평으로 나가려고 하는 정치적 의지에 있어서,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데리다-하버마스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이 공통성을 좀 더 뒤쫓아보자. 데리다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이란, 정체로서의 민주주의(의회제)를 특징짓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정체의 밑바탕에 있으며, 특정한 현재의 정체(군주정, 귀족적, 민주정), 그것에 대한 면역 반응으로서/에 의해 유지시키는 메커니즘이다. 게다가 정체의 창설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적 과정의 일부를 이룰 것이다. 어떤 새로운 정체도, 민주주의의 자기인 주권자(국가 그 자체여도 신이어도 상관없다)의 이름에 의해, 현재의 정체에 의한 이 자기에 대한 공격에 맞선 방어=대항공격으로서 수립된다. 쿠데타조차도 근본적으로 정확하게는 근본에 있어서만 민주주의적이다. 이런 자기면역성이란, 우리의 용어법으로는, 세 정체 모두가 품고 있는 부패로의 경향이며, 또한 그 부패에 맞서는 이며, 정체의 순환을 출현시키는 정체 일반의, 혹은 정치라는 것의 본성적 위기에 다름없다. 자기면역성은 우리가 말하는 공화정체의 특성이기도 하다[주].

[주] 우정의 정치(1988-89년도의 데리다 세미나 기록을 정리한 저작. 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 訳, みすず書房, 2003)에는 민주주의와 정체들의 관계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초한 약간 뉘앙스가 다른 서술이 있다.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은 각각 부친적 관계, 남자와 아내의 관계, 형제 사이의 관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는, 세 개의 관계 사이에는, 파생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정치적’(이것은 많은 경우 민주제적이라고 번역된다)은 형제 사이의 관계이며, “정치적인 것 그 자체, 형제애, 민주주의, 이것들 사이에 있는 상호적 포함 관계, -속적 관계는, 거의 동어반복적=동일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다(2, 九頁)라고 말한다. , ‘정치적인 것 그 자체는 민주주의적이며, 세 정체의 구별은 (근원적?) 민주주의에 선행한다고도 읽을 수 있다. 데리다에게서, 이윽고 형제 간의 관계에, ‘자기면역성이 발견될 수 있을까? 형제들의 유산상속을 둘러싼 혈육 간의 싸움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일까

그러나 데리다에게 자기면역성은 결코 그 자체의 정체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기면역적 과정차연의 운동의 하나로 여겨지며, ‘도래할 민주주의가 결코 미래의 현재의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신체 corps’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기면역성은 항상 도래할것에 머무는 민주주의()바닥 그 자체이며, 정치에 있어서의 시간(‘시대’)과 공간(각 정체)의 차이를 산출하면서, 그 차이 속에 ()장소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로서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본질주의는, 근대에 있어서는 특히 마키아벨리가 정치 노선화한 현실의 공화주의를 무시하지 않을까? 또한 삼권분립의 사상조차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닐까? 마키아벨리는 데리다 식으로 바꿔 말한다면, 세 정체 각각의 부패경향을 상호적으로 공격시키는 자기면역시스템으로 공화국을 구상한 것이다. 그것은 로마에서조차 자기파괴했듯이, ‘자기면역성의 병인 부패로부터 쾌유할 수는 없으나, 민주주의의 자기면역성이 재생의 계기를 간직하고 있었듯이, ‘부패에 맞서는 도 또한 갖추고 있으며(‘부패 부패에 다름 아니다), 그 혼합정체는 부패의 상호공격을 의 생산시스템으로 변환하려고 한다. 공화국의 확장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민주주의의 자기 면역 과정에 끝이 없듯이, 공화국은 지속한다. ‘도래할 민주주의가 결코 현실화되지 않듯이, 공화국의 확장에는 목적goal이 없으며, 확장의 지속 속에서만 부패를 능가한다. 목표goal가 없는 것은, 반드시 언젠가 우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확장 과정을 어디선가 자기파괴 과정으로 반전시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마키아벨리적 공화국은, 언젠가는 끝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인, 뒤집어보면 도래할 민주주의가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기파괴’-‘부패재생’-‘의 균형 시스템이다. 근대의 삼권분립은 그 후계였을 것이다.

즉 우리의 공화주의는 데리다의 민주주의도래할 민주주의자기면역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둘 다 와 달리, 정체로서 실재한다. 뭐랄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실재하는 시스템을 공화주의의 이름에 의해 규정(identification)했다. 이것이 두 번째 차이이다. 이 공화주의는 그러므로, 그 점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데리다와 프랑스적 공화주의 둘 다에 대해 거리를 취하려고 하는 랑시에르의 제비뽑기노선과도 다르다. “아무나=누구든 좋은 누군가 le n’importe qui”가 정치를 담당하는, 이 플라톤에서 유래한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와도 다르다. 세 번째 차이이다. 플라톤은 그런 체제가 실현되면 자유와 존엄을 깨달은 말[]이나 당나귀가 길을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닥치게 된다고 하는 이유로 그것을 배척했다. 즉 플라톤에게 제비뽑기민주주의는 단적으로 정치 질서 랑시에르는 그것을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부르는데 의 부재이며, 랑시에르는 이 아나르시アナルシ=무질서를 하나의 긍정성으로 뒤집어버리고,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와 비슷한, 결코 미래의 현재의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 체제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는 어디까지나, 역사상 거의 어디에서도 있으며 그리고 언제든 있는 n’importe où et n’importe quand 체제의 호칭이다. 랑시에르의 제비뽑기민주주의는 주권의 거처를 둘러싼 고찰 끝에 주권을 삭제하지도 않고 특정한 어딘가에 존속시키지도 않는, 더 정확하게는 주권의 존재와 부재를 균형 혹은 일치시키는 체제이며, 그 있을 수 없는 도래 가능성에 의해 도래할 민주주의의 일종이며, 또한 그 부정적 보편성, 보편적 부정성에 의해, 민주주의와 주권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프랑스적 공화주의의 일종 또는 극한(limit)를 형성한다. 프랑스적 공화주의가 일치의 순수한 긍정성=실정성을 추구하는 반면, 랑시에르의 공화주의는 똑같은 일치를, 데리다의 자기면역성과 마찬가지로, 바닥 없는 바닥에 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들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 이른바 그 평범함, 흔해빠진 착상에 있어서 강력한 사상이며, 주권 개념이 데리다-랑시에르-프랑스적 공화주의를 하나의 에피스테메로 결합시키고 있다고 한다면, 있는지 없는지를 포함해, 주권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온 또 다른 에피스테메를 이룬다. 그것은 주권을 아무래도 좋은것으로 한다는 문제 관심에 의해서 정체의 제도를 실제로 설계해온 에피스테메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정치적으로 봐서, 어디에 효과를 나타내는 것일까? 어디까지나 주권을 자기로 하는 민주주의의 추구와, 주권의 보류에 의해 성립하는 공화주의를 가상의 적으로 하는 노선은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명하지 않다. 그런 공화주의에 대해서, ‘도래할 민주주의노선에 더 저항한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콕이 꼼꼼하게 계보를 추적하고, 네그리가 그것을 전제로 그의 구성적 권력의 개념사를 그려낸, 근대의 공화주의는 마키아벨리적 계기로서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게다가 미국으로 계승되며, 지정학적으로는 오늘날 세계정치에 있어서 앵글로색슨 동맹의 확장을 요구하는 커먼웰스에 사상적 주형[거푸집]을 계속 제공하고 있으며, 전지구적 자본주의노선에 대해,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세우고, EU에 기대를 걸면서 저항하는 자세는 현대의 양식을 거의 대표하고 있다는 감이 있다. 그것은, 얼마간의 효과를 낳는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분명히 객관적인 대항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진행 중인 투쟁의 귀추를 전망하기에는 너무 빠른 감도 있다. 예를 들어 아랍의 봄에는 민주주의파의 승리라고 정리해버릴 수 없는 요인이 너무도 많다. 무엇보다 그것은 반란의 전지구화라고도 불러야 할 과정 속에 있으며, 과정을 가속시키고, ‘주권원리의 세계적 후퇴를 우리에게 고한 것이다. 그래도 이라크 전쟁과 그리스 위기 후에도 아직, 하버마스를 필두로 하여 EU간주권적 통치를 체념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이라크로부터의 철수를 단적인 특징으로 하는, 공화국의 군사적 확장노선의 분명한 후퇴 경향에 동반된 이 대립축은 점점 더 많은 기대를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물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민주주의공화주의에 대한 유효한 맞수(counter)가 될까? 대립축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효과들은 당사자가 기대하는 그대로일까? 우리가 민주주의의 존엄을 구하자!”라는 정치 문서에서 간파한 것은, 채무 문제가 양자의 차이를 실질적으로 소거하고 있다는, 기대와는 거꾸로 나아가는 경향에 다름 아니다. 본서가 무엇보다도 경제를 문제 삼는 까닭도, 똑같은 질문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경제로 한걸음 더 내딛기 전에, 1993년에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도래할 민주주의노선이 어떻게 되어 왔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를 대표 선수로 하는 민주주의’ vs 영미가 인솔하는 공화주의라는 도식이 형태를 이루는 데에는 맑스의 유령들이 적잖은 역할을 해 왔을 터이다. “우리는 오늘날 모두 사회주의자이다라고 주류 언론이 말할 정도로. ‘도래할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주권국가를 광신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공화주의와 확장을 요구하는 커먼웰스”(전지구적 자본주의) 양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을 사상적으로 지목했을 것이다. ‘경제라는 바닥을 참조하여 그 파탄을 주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유하게 정치적인 수준에서, 혹은 간주권적이고 세계정치적인 차원에서, 이미 20년의 역사를 지닌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현재가 어떤지는 확인해 두어야 한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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