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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고유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2)

- 베르그손에서 들뢰즈로 : 유물론의 가능성

ドゥルーズ固有哲学とは()

ベルクソンからドゥルーズへ : 唯物論可能性

자이츠 오사무(財津理, 法政大学教授)

듣고 정리이부키 히로카즈(伊吹浩一)

정황347

 


들뢰즈 고유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2.pdf



―― 저번에는 흄의 경험론을 중심으로 하여 들뢰즈가 흄의 철학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형태로 자신의 사상 속에 섭취하고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인 이번에는 들뢰즈 안에서 그것도 특히 거대한 철학자로서 자리매김 되고 있는 베르그손을 중심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자이츠 : 저번에는 동시에 들뢰즈에게서의 유물론의 가능성이라는 테마를 주고 그것을 의식하면서 말씀드렸는데요, 이번에도 계속해서 이 테마를 내걸고 그것에 조준을 맞추면서 고찰을 전개하고 싶습니다. 이때 전제에 두고 싶은 것은 레닌은 고려 밖에 둔다는 것, 경제활동을 유물론적 하부구조로 간주하는 입장을 유보하고, 옆으로 치워둔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서, 말하자면, 들뢰즈가 아카데믹한 철학적 전통 속에서, 어떻게 크리에이티브한 전망을 열고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때 전통적인 철학과 대비하는 데 있어서 다시 데카르트의 철학을 거론하고 구체적으로 비교하기 위한 최적의 예로서 그 심신이원론, 즉 신체=물체와 정신 사이의 이원론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 대해, 베르그손이 어떻게 변경을 강요하고 있느냐라는 관점에서 들뢰즈-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유물론에 바싹 다가서려 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최근 신경 쓰이는 것이 있으므로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들뢰즈 읽기 방식, 이해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는 것이며, 우선 그것을 확인해두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첫째로 내재적 이해이며, 이것은 들뢰즈의 텍스트를 따라 들뢰즈를 이해한다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의 것은 들뢰즈에게서의 외부 텍스트에 대한 연락을 통해, 들뢰즈의 관점에서 그 외부 텍스트를 해석하고, 이로부터 다시 들뢰즈로 돌아온다는 방식입니다. 들뢰즈는 수많은 사상가나 다른 학문 분야로 자신의 사색의 영역을 넓히고, 이것들과 함께 아장스망(agancement, 이종적인 것의 조합)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뢰즈와 하이데거를 대비해보면, 제게는, 하이데거는 일종의 블랙홀처럼 보입니다. 하이데거는 들뢰즈처럼, 하이데거 이전의 다양한 철학이나 다른 학문영역과 아장스망을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말하는 바의 존재의 의미가 그 자신의 관점에서 밝혀질 때까지는, 다른 모든 학문적 내용에 대해 이른바 판단중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죽을 때까지 존재의 의미를 명언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것을 명언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하겠죠. 결과적으로 하이데거의 신봉자는, 하이데거의 죽음에 의해 뒤쳐졌으며[고립됐으며], 그의 사후도 하이데거 철학의 암흑 속에 속박되었습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을 하이데거라는 블랙홀에 빨아들이는 듯한 «하이데거 교»라고 해야 할 경향이 보입니다. 독자의 모든 관심을, 하이데거 이외의

독자의 관심의 모두 하이데거 이외의 것으로 돌려지지 않도록 하고, 하이데거가 시사하는 존재의 의미에만 집중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대해, 또한 존재의 의미의 원리적 암흑에 대해, 만일 기회가 있다면 자세하게 논하고 싶습니다만,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죠.

반면 들뢰즈의 자세는 다르네요. 들뢰즈의 사상은, 그 안에 들어가면 그 안에 있으면서 바로 바깥으로 나옵니다. 거꾸로 보면, 바깥에 있으면서 안에 있다는 식입니다. 들뢰즈 자신의 서술의 구조는 마치 양파껍질 같은 것이며, 그의 사상은 무수한 사상가나 연구자들이 가졌던 것의 축적에 의해 성립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뢰즈 사상의 고유성은, 들뢰즈 자신의 관점에 의한 이종적인 것의 조합의 방식에 있다고도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들뢰즈에게서의 외부 텍스트에 대한 연락에 의해, 들뢰즈가 외부로부터 끌어온 것을, 예를 들어 스피노자나 니체나 칸트나 베르그손을, 들뢰즈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동시에 그로부터 들뢰즈 사상을 이해해본다는 당연히 하나의 필요한 작업이 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방식은, 들뢰즈의 관점을 참고하여, 그러나 들뢰즈의 말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의 각각이 자신의 분야에서의 창조활동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분야는, 학문의 분야라도 좋고, 예술의 분야도 좋고, 일상생활이라도 좋고, 그것은 다양하죠.

이러한 읽기 방식, 이해 방식이 있다는 것을 제안한 뒤, 잠시 쓴 소리를 해야겠습니다. 제 자신은 젊은 연구자라고 계속 생각했습니다만, 어느덧 나이만 먹었습니다. , 저보다 물리적으로 젊다는 의미에서 현재의 젊은 들뢰즈 연구자가 활약하게 됐습니다만, 그 몇 사람에게 보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지적해둡니다. 그것은 언뜻 보면, 두 개의 외부 텍스트에 대한 연결에 관련된 해석의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의 것이 행해지고 있다. , 들뢰즈가 인용하고 있는 것에 대한, 혹은 관계가 있는 것 같은 것에 대한 «환원 작업»일 뿐인 것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종의 «환원주의»에 빠지는 젊은 연구자들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들뢰즈의 관점에서 외부 텍스트를 다시 읽고, 그로부터 들뢰즈를 고쳐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언저리에 들뢰즈의 원료가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들뢰즈 이외의 것으로 해소해버리고 있다. 이것은 들뢰즈를 일본적 아카데미즘의 한 가지 방식으로 처리하는 입장이네요. 그것은 결국, 들뢰즈의 사상을, 해당 연구자 동료의 수준으로 낮춰버리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클로소브스키는 니체에 대해 들뢰즈보다도 더 대단한 것을 말했으며, 들뢰즈는 거기에서 배웠구나를 발견하고”, 일종의 아는 체 하는 얼굴을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들뢰즈를 원료로 삼아, 자신이 공부한 성과를 연구자 동료에게 과시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들뢰즈의 내재적 이해를 멀리하게 되죠.

다소 격한 비판을 했습니다만, 이것을 읽으면 몇몇 젊은 연구자들로부터 제게 차이와 반복을 번역했다고 해서 권위자인 양 행세하지 말라는 욕설이 날아올 것 같습니다. 또한 들뢰즈 고유의 철학을 왜 자이츠(財津)가 말할 권리를 갖고 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죠. 이 있어야 할 반론에 대해서는, 저는 들뢰즈 고유의 철학을 말할 권리는 없다고만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 들뢰즈의 지시에 따라서 철학과 사상의 연구를, “도래할 민중을 생각하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도래할 민중이 구체적으로 어떤 민중인가는, 그 설계도는 업어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선동되고 싶어하거나 영합을 요구하는 한에서의 대중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게 훈고학자라는 고마운 칭호를 수여해주신 평론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로서는, 저를 사상 연구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배우는 민중의 한 명으로서, 또한 배우는 민중과 함께, 들뢰즈의 시네마의 번역과 연구를, 그리고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의 번역과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성과는 조만간 인터넷에 무료 공개하겠습니다. 관련된 출판사의 양해를 얻었습니다. 다시, 젊은 연구자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자네들은 자기 논문에, 무턱대고 외국어 원문의 이름이나 참고문헌을, 그것도 외국어인 채로, 마치 훈장을 붙인 것처럼 달고 있지만, 도대체 들뢰즈를 누구를 향해 연구하고 있느냐고. 그것은 도래할 민중을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닌가라고.

 

――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독해 방식이나 이해 방법은?

자이츠 : 내재적 이해인 동시에 외재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배우는 민중의 하나로서, 제 나름의 단면 이번에는 유물론의 가능성이라는 테마로 에서 읽어나간다는 것이며, 이것은 환원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그렇군요. 바로 들뢰즈 자신의 관점에 의한 이종적인 조합, 들뢰즈 철학의 고유성의식하가”, 들뢰즈를 읽어나가는 것이니까요. 그런 전제가 되는 읽기 방식, 이해 방식을 확인해 둔 다음, 그러면 바로 본론에 들어가죠.

우선 처음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관련되는 한에서의 베르그손의 철학 자체, 거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자이츠 :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베르그손의 독창성을 확인하기 위해, 우선 그것과 대비하는 데에 최적인 데카르트를 등장시키겠습니다.

데카르트는 물체와 정신을, 본질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구별해두고, 더욱이 그런 관계 맺음들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이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에는 아포리아가 있다고 지적되고 있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데카르트의 입장에 머물러 있는 한 이 아포리아는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데카르트는 물체와 정신을 구별하고, 물체는 3차원적 공간에 자리매김 되는 ’, 3차원적인 양을 가지고 있는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 정신은 3차원적인 양을 갖고 있지 않는 ’, 원리적으로 벡터 공간에 자리 잡을 수 없는 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정신 혹은 마음은 단지 의지하거나 이해하거나 상상하거나 감각하거나 등등, 뭉뚱그려 사고하는것을 본질로 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전제를 인정한다면, 적어도 난문이 두 개 나옵니다. 우선 공간성 없는 정신의 작용인 의지가, 즉 비물체적=비신체적인 정신 작용이. 정신성이 전혀 없는 물체=신체에 어떻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과를 잡으려고 의지하면 손이라는 자신의 물체가 움직인다. 신체라는 물체는 자기(라는 애매한 것)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비물체적인 정신이 손이라는 자신의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다면, 원리상, 그 밖의 어떤 물체도 움직이게 할 가능성이 나오는 것 아닌가. 합리주의자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우리는 그다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오컬티즘이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난문은 반영론입니다. 왜 정신적인 3차원적 물체가 공간성을 전혀 갖지 않는 정신 속에서 재현전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이상과 같이, 미리 물체와 정신을 원리적으로 구별해 놓고 이것들의 관계를 생각해간다고 하는 입장을 넘어서려고 한 것이 바로 베르크손입니다. 그 해결책이 물질과 기억에서 제시된 이마주(이미지)’라는 개념입니다. ‘이마주라는 개념은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완화하고, ‘물질과 정신의 연속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제출된 것입니다. 데카르트적 물체가 아니라 베르그손적 물질의 총체가 이마주인데요, 이것은 영미의 연구자들로부터, 애매한 문학적 표현에 기대는 베르그손적 개념의 하나라며 혐오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앞에 보이는 사과는 이마주이며, 우리의 신체도 이마주이며, 따라서 뇌도 이마주이며, 기억의 내용도 이마주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베르그손은 물질이라는 말을 꽤 애매하게 쓰고 있으니, 더더욱 골치 아픕니다. 이마주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베르그손의 물질기억의 구별과 그 관계가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양자의 관계의 내용이 물질과 기억의 사상 전체를 구성해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제부터 풀어나갑시다.

여기서 몇 가지 프랑스어를 꺼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프랑스어를 알지 못해도, 제 논지는 알게 될 겁니다. , ‘물질 matiére’이란 이완(느슨함), relâchement’이며, 그것에 대해 지속 durée’이 있고, 이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파악되는 의식’(혹은 의식상태)이며, ‘응축 contraction’(기존에는 수축으로 번역되었다)이라고 합니다. 이 응축 contraction에 관해 들뢰즈는, ‘수축으로 번역하는 일면적이며, 근본적으로는 누적적으로 융합해가는 것이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순간적, 계기적 물질적 사건이 어떤 근원적인 주관성의 수준에서 받아들여지며, 보존되고 융합되어 간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저는 contraction축약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사실은 아직도 적절한 번역어를 못 찾았어요.

그러면 지속부터 살펴보죠.

 

―― 지속이란 의식의 작동의 가능 깊은 수준의 것이죠.

자이츠 : ,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베르그손의 지속이란 개념은, 우선 초기의 시간과 자유 :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서의 베르그손은, 다소 데카르트를 닮았으며, 물질적 외부세계와 정신적인 내면세계를 구별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은, ‘표층적인 자아깊은 자아로 성립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표층적인 자아는 외부세계와 하고 있습니다. 외부세계 그 자체는, 공간적인 것이며, 거기에서 생기는 계기(繼起)적인 현상은 수량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운동도 위치의 이동이라는 것이 됩니다. , 외부세계의 모든 것은, 공간적으로, 수량적으로, 즉 숫자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표층적인 자아는, 그런 외부세계와 접하고 있다면, 그로부터의 영향이 아무래도 내면세계에 미치겠죠. 거기서 우리는 자아 혹은 순수의식에 있어서의 순수지속, 본래는 상호침투적 상태로서 살고 있을 것인데도, 수량적, 대상적으로 표상하게 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그것으로는 자아의 진짜 모습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런 셈이어서, 진정한 지속은 내적으로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하는 것이라고 주장됩니다. 아무튼 정신의 순수 지속은 결코 상호 외재적인 순간의 연속도 아니고, 공간적으로도, 수량적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것을 초기에는 말했던 것입니다만,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의 단계가 되면, 어떤 전환을 행합니다. 그는 외부세계와 내면세계를 어떻게든 연속시키고 싶다는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직관과 지각이라는 말이, 이른바 서로 뒤바뀌어버린다. 시간과 자유에서는 직관이 외적 세계에, 지각이 내적 세계에 대응했습니다만, 물질과 기억이 되면, 그것이 역전됩니다.

그런데 저는 물질과 기억의 세계는, 그 모든 것이 물()아 아니라 과정이라고 본다면, 꽤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베르그손이 말하는 순수지각이라는 과정을 기축으로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기억의 개재 없이 행해지는 지각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베르그손은 꽤 애매하게 말합니다만, 문학적인 서술을 하고 있으며, 제 자신도 베르그손에 관해 이러하다고 단언하는 데에 꽤 망설임이 있습니다만, , 상당히 단순화해서 정리했습니다. 이하에서의 제 해설의 거북함을 참작해주십시오.

기억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우선 다음의 것을 이해해주십시오. ‘순수지각이란 물질로부터 직접적, 순간적인 비전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수지각에 있어서의 이마주의 발생이 있습니다. 이 순수지각에 있어서의 이마주는 물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것입니다. 그런데, ‘순수지각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이완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과학이 규정하고 있는 물질’, 혹은 물체의 규정이 가능해집니다. 베르그손에서 가장 애매한 것은 인간의 주관성이 일절 개재하지 않은 물질적 세계조차 수학적으로 표현되면서 감성적인 성질들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관성이 삭제된 물질적 이마주란 무엇인가, 그 언저리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은가, 확실히 문제가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지각기억의 개입에 의해 응축된다(기존의 번역어로 말하면 수축한다). 더구나 거기에 생활상의 이해관계가 개입하면, 순수지각은 구체적인 지각이 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입니다. 이것도 또한 이마주입니다. ‘순수지각의 수준에서의 이마주가 있고, 또한 구체적인 지각의 수준에서의 이마주도 있습니다.

 

―― 얘기가 약간 복잡하니까,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십시오. 베르그손은 물질과 정신을 연속한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라는 문제의식이 있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마주라는 개념이 있으며, 그리고 이 이마주에는 순수지각으로서의 이마주순수지각이 더 압축된 구체적인 지각으로서의 이마주의 두 종류가 있다는 거네요.

자이츠 :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물질과 지속(의식)”의 문제로 돌아가죠. 들뢰즈는 물질과 지속은 본성상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 “본성상의 차이입니다. 들뢰즈가 본성상의 차이라고 할 때는 일단 물질과 지속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십시오. 그러나 곧장, 들뢰즈는 얘기를 밀고 나가, 물질과 지속의 차이는 표면적 차이일 뿐, 진짜 본성상의 차이지속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 물질과 정신의 연속성이라는 문제의식이 이 발언의 배경에 있다고 .

자이츠 : 지속으로서의 본성상의 차이분할되면 본성을 바꿔버린다는 잠재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까부터 순수지각을 기축에 있어서 본다는 전제 아래서 얘기를 풀어왔습니다. 또한 시간과 자유에서는 심층의 자아와 표층의 자아의 구별이 있다고 말했어요. 이는 어찌 보면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라는 사고방식 같지만 사실은, 베르그손에게도 들뢰즈에게도 별로 친숙하지 않고 그들의 사상을 해석할 때에는 취해서는 안 되는 관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해되기 쉬운 이 도면을 편의적으로 채용해서 얘기를 진척시킵시다.

순수 지각을 완화하면, 훨씬 더 물질적인 것 쪽으로 나아가며, 순수 지각이 기억의 개입에 의해 응축되고 어떤 무게를 갖고 생활상의 이해가 들어옴으로써 구체적인 지각이 되며,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이 된다. 제가 보기에 이런 논의의 수준이 차이와 반복2장에 있는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서 고쳐 읽혀지고, 활용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 베르그손의 물질과 정신의 연속성이라는 문제의식이 들뢰즈에게 유입되고, 그것이 시간론으로서 전개된다는 것이군요.

자이츠 : 그렇습니다. 그럼, 들뢰즈의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이것은 2장의 그것 자신을 향한 반복에서 얘기되고 있는데요, 제 자신, 이 제목의 번역이 좋은지 나쁜지 아직도 자신이 없습니다. 이 표제의 원어는 La répetition pour elle-même인데요, 이것은 헤겔의 말투를 닮았습니다. “그것 자신으로 향한다, 헤겔적인 혹은 사르트르적인 대자라고 번역됩니다. 과거 향자(向自)’라는 번역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것 자신으로 향한다라는 번역을 할당했습니다. 그나저나 여기서 주관성의 어떤 독특한 수준이 분석되고 있습니다. 들뢰즈에게서 시간의 종합에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세 가지가 있고, 첫 번째 종합은 살고 있는 현재”, 두 번째 종합은 순수과거”, 세 번째 종합은 미래가 되며, 각각 현재론, 과거론, 미래론이 되고 있다. 거기서 현재에 대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이 첫 번째 종합은 아주 재미있는 곳으로, 그 이면에는, 분명히 메를로-퐁티의 지각론을 넘어서는 기획이 숨겨져 있네요.

우선 앞서 말한, 물질적인, 순간적인 계기(繼起)를 거론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틱톡, 틱톡, 틱톡등의 시계소리, 이런 물질적 수준을 상정합니다. “이 울리고 그것이 소멸하고 다음의 에 울린다. 이렇게 물질계에서의 일종의 반복에는 자기 보존이 없습니다. 전의 순간적인 현상은 금방 사라지고, 다음의 순간적인 현상이 나타나며, 또한 금방 사라집니다.

들뢰즈는 더 나아가, 어떤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을 상정하고, 이를 관조하는 정신이라고도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관조하는 정신이란 흄과 마찬가지로 작용의 주체인 자아따위가 전혀 아니고, 그런 것이 없는 곳에서의 관조이며, 일종의 과정입니다. 들뢰즈는 이것을 수동적인 주관성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관성이 아닙니다만, 의지라든가 이해, 지능의 수준의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가 아닙니다. 전혀 주관성이 개재하지 않는 물질적 수준의 틱톡, 원초적인 감성에 인상으로서 들어오면, 최초의 관조하는 정신에 보존되며, 다음의 이 오면, 이전의 과 이 이 누적적으로 포개진다. 이처럼 차례대로, 이전의 순간적인 인상이 보존되고, 새로운 인상으로 융합되어간다. 여기에 베르그손이 말하는 축약(응축, 수축)’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물질적 수준에서의 반복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다름=차이가 근원적인 주관성에 발생합니다. 들뢰즈는, 그것은 일반성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성이란, 차례대로 오는 인상들의 개별성, 특수성에는 구속되지 않는 일종의 효과=결과입니다. 단순한 물질적 수준의 특수한, 혹은 개별적, 구체적인 계기적 현상이, 관조라는 수준에서 인상으로서 거둬들여지고[받아들여지고], 그것이 누적적으로는 융합되어 가면, 새로운 것, 즉 변화, ‘차이가 생산된다. 차이가 우선은 일반성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일반성은 물질적 계기에는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시간 규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인상들은 순간마다 누적되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항상 살아 있는 현재속에서 인상들이 과거라고 규정되어 보존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것은 후설의 내적 시간의 현상학에서의 과거론을 전제로 한 논의입니다. 근원적인 감성=주고나성은 항상 살아 있는 현재입니다. 차이와 반복2장의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의 수준에서는, 인간은 언제나 현재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것은 제 예로 설명해보면, 제가 수업의 시작 시간을 신경 쓰면서 교실에 들어갈 때, 그 교실을 객관화하고, 교실을 중심화하고 자신의 자릿수를 합니다만, 그러나 앉자마자, 설령 자신이 교실의 구석에 앉더라도, 그곳이 자신에게 여기이며 지금이며, 즉 자신이 교실의 시공의 중심이 됩니다. 이것을 가장 깊은 곳에서 생각해보면, 나 없는 주관성의 항상적인 살고 있는 현재’, ‘살고 있는 지금, 근저의 시간적인 장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산 현재속에, 점점 순간적인 인상을 보존하고, 그것이 과거라는 시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산 현재의 내부에 성립하며, 그 외부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게다가 틱톡이 어느 정도 계속된 후, ‘에서 물질적 현상이 멈춥니다. 그러면 주관성 속에서도 에서 멈추는가. 멈추지 않습니다. 자동적(automatic)으로 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야구선수의 타격 같은 것으로, 직구만 던져지고 있다면, 직구가 점점 의식 속에 누적되어가고, 이번에는 커브를 던지게 되면, 직구를 예상하고 있기에, 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근원적인 감성의 수준에서 축약이 이뤄지면, 이해도 의지도 작동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미래를 기대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 현재의 내부에 과거의 차원과 미래의 차원이 성립된다. 여기서, 과거, 현재, 미래가 병렬해 있다거나,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는 일상적인 관념은 우선 제거됩니다. 그 대신, ‘산 현재속에 과거가 성립되며, 과거의 무게에 의해 미래를 예기/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이 주창됩니다. 이 수준에서는, 표층 수준에서의 지성이나, 상식적인 기억이나, 이로부터 의지적인 예상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삽입해봅시다. 이런 사고방식은 관념론인가, 아니면 유물론이가?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차이와 반복2장에 있는 아비투스, 수동적 종합, 축약, 관념이라는 절의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지각감각의 구별이 이뤄지고 있으며, 매우 복잡하지만 과감하게 단순화하겠습니다.

근저에 신체의 수준이 상정되고 있습니다. 신체의 수준에서, 축약의 과정, 즉 시간의 종합 과정이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언뜻 황당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물, , , 공기를 재확인하고 표상=재현전화하기 전에, 게다가, 그것들을 감각하기 전에, 축약된 물이며, 땅이며, 공기이다. 모든 유기체는, 그 수용적 요소에 있어서도 지각적인 요소에 있어서도, 또한 그뿐만 아니라, 그 내장에 있어서도, 축약의, 과거 파악의, 그리고 기대의 총합인 것이다”(123). 인간은 축약된 물, 땅 등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야만적인, 혹은 신비적인 가설이 전혀 없다”(125)고 잘라 말하고 있듯이, 인간은 축약된 물 등이라는 것은 농담도, 단순한 비유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신체 외의 물질적인 과정이 신체 내의 과정에 거둬들여지는[받아들여지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신체 자체를 원초적인 감성이라고 보면, 신체가 외부로부터 입력된 그 내용을 누적하는 것처럼, 근대철학이 생각했던 의식, 혹은 이해작용이나 기억이 작동하기 이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축약, 혹은 지금 말한 축약이 이미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의 신체는 외부와 교류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물질적인 것을 외부로부터 거둬들여 배출합니다만, 그런 생리적인 과정을, 베르그손에게서의 순수 의식의 축약의 과정과 똑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동시에 이 신체적인 과정이, 즉 원초적인 감성이, 감각의 수준, 더 나아가 들뢰즈가 말하는 표상=재현전화 représentation라는 능동적 이해, 해석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체에 있어서의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의 과정을 상정하나는 데에, 들뢰즈 철학의 모종의 유물론적인 출발점이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 신체라는 이 정신(의식) 이전에 존재하고, 더욱이 이것을 규정하고 있다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이군요.

자이츠 : 그렇군요.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단순한 이 아니라 물질적인 과정이, 들뢰즈적 유물론의 이며, 그것은 일단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만, 정신 이전적인 것이라기보다, 정신과 동시적이며, 연속적이라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동물이 목이 말라서 물을 원하고 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 경우, 이미, 신체적=유기체적=물질적 수준에서,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의 수준에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의 과정, 즉 축약, 즉 수동적 종합이 행해집니다. 들뢰즈는 거기서 축약되는 것은 signe가 된다고 말합니다. 해석을 위해 signe, 저는 이것을 표시라고 번역했습니다. 종래, 기호학에서는 기호라고 번역된 것입니다. 표시라고 번역했느냐 하면, 근거로서 니체를 들먹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요,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죠. 어쨌든, 베르그손의 축약의 내용인 이마주, 들뢰즈에 있어서는 표시입니다. ‘표시감각되기도 하고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고, 결코 신호가 아닙니다. ‘해석은 지성의 수준에서 행해지며, 항상 능동적으로 행해집니다. 거듭 말하자면, 신체 수준에서의 과정은, 이미 수동적 주관성의 종합과 동형적 과정이며, 그 내용은, 베르그손적인 이마주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이것이 표시를 이룬다. 그것이 감각되고 지각되고 더욱이 능동적으로 지성에 의해 해석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이 마른 동물이나 인간이 물을 원해서 찾으려고 할 때, ‘H2O’를 생각하고 찾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연과학적으로 H2O라고 표시되는 물질과, 목이 마른 동물들이 찾고 있는 물질은 닮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박한 유물론은, 자연과학적으로 H2O라고 표현되는 물질과, 목이 마른 동물이 원하는 표시혹은 이마주로서의 중에서 어느 쪽을 진짜 ()’이라고 해석합니까?

 

―― 혹은 둘 다 ()’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이츠 : 들뢰즈는 이 양자는 닮은 것도 닮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체는 외부의 물질적 사건을 받아들이고, 신체 안에서의 축약 과정에 의해 이마주’=‘표시형성합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자연과학적 물질 그 자체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동물은, 표시감각하여 을 찾아내고, 고등동물일수록 그것을 해석하여 학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의 틱톡이라는 시계소리의 예로 말한 것은, 일견 관념론으로 보입니다만,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원초적으로는, 신체로서의 물체에서 생기는 유물론적 과정입니다. 이렇게 들뢰즈에 있어서는, 유물론은, 신체적 수준에서의, 혹은 생명적 감성의 수준에서의 과정으로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에, 베르그손에서 들뢰즈로 흐르고 있는, 유물론적으로 해석 가능한 사상 경향의 하나, 구체적으로는 베르그손에게서의 순서 지각의 사고방식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 신체라는 물질적 수준에서의 과정이 기반이 되고, 감각이나 이해나 해석 등의 정신적 행위가 형성된다, 혹은 그것을 규정한다는 것이네요. ‘해석이라는 정신에 있어서의 독자성에 주목함으로써 거꾸로 물질적인 것(=신체)과의 연속성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역시 하부구조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이라는, 전통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이 반복되어 버리지 않나요?

자이츠 : 아니오. 들뢰즈는 신체=물체와 정신 사이의 관계를, 그런 변증법적 관계로서 파악하지는 않습니다. 과연 신체=생명적 감성이 하부구조로 보입니다만, 그러나 신체 수준의 과정이, 감각 수준, 지각 수준, 이해 수준, 욕구 수준 각각에서, 유사하지 않고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각각의 과정이 서로 간섭한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이것은 알튀세르의 중층적 결정의 사고방식을 생각나게 합니다만, ‘변증법모순의 개념이 배제되고 있으니까, ‘중층적 결정과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 그렇군요. 그러면 다시, 신체=물체의 수준에서의 수동적 종합과 시간론 사이의 연결을 설명해주실 수 없을까요?

자이츠 :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에 있어서의 수동적 종합의 시간은, ‘산 현재입니다만, 여기서 또한, 데카르트를 등장시켜서,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의식과 매우 가깝고, 데카르트의 디지털적 시간론과 대비하면서 얘기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데카르트는, 시간은 순간=지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지금, 다음의 지금, 다음다음의 지금으로 계속된다. 그렇기에, 과거는 이전의 지금이며, 미래는 다가오는 지금이 된다. 그래서 시간을 인위적으로 멈춰보는, 예를 들어 시계를 보면 4413초가 됩니다만, 여기서 시간을 멈췄다고 합니다. 4413초는 1초 전의 과거, 4411초는 2초 전의 과거라는 식으로 소멸된 과거가, 염주알처럼 줄곧 옛날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만, 그것은 역시 1초 후, 2초 후와 미래로 향해 염주알처럼 이어져 있다. 이처럼 지금이 가장 리얼리티가 있는 것입니다만, 과거는 소멸한 것, 미래는 이윽고 오는 것처럼, 이것들은 역시 지금을 중심으로 병렬된 직선적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것이 데카르트의 시간론,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의식입니다.

이 논의를 둘러싸고 철학 영역에서는 이상한 논의가 있었고, 순간이란 몇 분의 1초인가? 순간에는 시간적 양이 있는가? 전혀 시간적인 양이 없고, 나타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인가? 양이 없다면, 왜 존재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그것을 지각할 수 있는가? 등등. 이러저러하게 논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당한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당시, 데카르트의 반론자는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순간과 순간은 이어져 있는가, 아니면 끊어져 있는가? 혹은 1초 전의 세계는 지금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끊어져 있는가? 세계는 시간적으로 연속인가, 단절인가? 이런 매우 혹독한 문제를 제출받은 데카르트는 단절 쪽을 취했다, 즉 일종의 디지털 이론을 취했던 것입니다. 각 순간은 나타나는 동시에 소멸하고, 더욱이 수량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미분개념의 선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철학사에서는 라이프니츠의 방향으로 가는 철학적 표현이죠.

그러면 미래는 어떻게 약속되는가? 지금이라는 순간은 소멸한 채로는 안 되는가, 그리고 세계는 소멸한 채로는 안 되는가? 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거기서 데카르트는 신의 창조설을 제출합니다. 신은 무로부터 세계를 창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일회성이 아니라, 각 순간마다 창조가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근대철학은 이처럼 때때로 어려울 때면 신을 찾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신화적인 설명입니다만, 그러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단절을 넣지 않으면 변화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변화란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것, 상이한 것입니다. 전면적으로 달라져버린다면, 거기에서 변화를 식별할 수는 없죠. 예를 들어 한 소년이 성인이 되고 늙어갈 때, 거기에는 어딘가 똑같은 것이 없으면, 똑같은 인물이 변화한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의 연속창조설은, 이런 의미에서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무척이나 편리한 것입니다. , 단절에 의해 차이를 설명하고 연속창조에 의해 동일성을 보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산 현재라는 장을 상정합니다. 게다가 이것은 움직이는 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런 현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산 현재는 자신의 시간에 있어서 구성하는 과거에서 미래로, 그 때문에 바로 개별적인 것(과거)에서 일반적인 것(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120). “시간이 현재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조금씩 겹쳐진 도약을 통해, 현재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132).

움직이는 산 현재가 항상 성립하고, 과거도 미래도 이것의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산 현재의 안쪽에 과거가 보존되고, 과거라는 차원이 성립한다. 축적된 과거의 무게에 의해, 산 현재의 내부에서 자동적으로automatic 미래가 기대된다. 모종의 심리학에서는, 과거는 요컨대 기억의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미래는 예기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심리학적 설명에 대해, 들뢰즈는 후설의 시간론을 바탕으로, 앞서 말했듯이, 우선 근원적인 유기체의 수준으로까지 내려가고, ‘산 현재라는 장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 말했습니다만, 들뢰즈는 물질과 지속의 차이는 표면적인 차이일 뿐이며, 진짜 본성상의 차이지속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베르그손적 지속은 상호침투적은 변화하는 상태입니다. 의식의 지속은 결코 데카르트적인 상호외재적 순간의 연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와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신체의 수준에서의 원초적인 생명적 감성에 있어서의 산 현재는 또한 지속이며, ‘본성상의 차이이며, ‘자기와의 차이이며,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변화의 논거와는 상이한 것의, 들뢰즈적인 변화의 논거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들뢰즈의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의 첫 번째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들뢰즈의 시간론 전부를 얘기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들뢰즈의 시간론은 첫 번째 종합에 있어서의 산 현재를 근저에 둔 시간론, 두 번째의 종합에 있어서의 베르그손의 순수과거를 근저에 둔 과거론, 그리고 세 번째의 종합으로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근저에 둔 미래론이 되고 있습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이런 세 가지 시간론을 내놓은 다음, 정신분석의 무의식 이론에 의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시간론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이와 반복2장은 아직 본격적으로 분석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라캉과 들뢰즈의 관계는, 제 번역에서도 주를 붙일 수 없었습니다. 지금 라캉을 원문으로 다시 읽고 있기에 머지않아 자세한 분석을 하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 대한 해설은, 아직 아무래도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만, 다음번에는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의 이야기로 옮겨가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에 일러두고 싶은데요, 제 해설로 들뢰즈를 알았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제 얘기는 어디까지나 들뢰즈 자신의 책을 읽으라는 권유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다음번에는 지금까지 건드리지 않았던 베르그손의 기억이라는 개념과 관련됩니다. 거기서 들뢰즈의 수수께끼 같은 과거론을 살펴봅시다.

 

―― 과연, 드디어 차이와 반복의 핵심 중의 핵심으로 들어가네요. 저번에는 흄, 그리고 이번에는 베르그손을 통해 들뢰즈의 사상의 고유성을 독해해냈습니다. 다음번은 또 다시 베르그손이 등장하고, 과거에 있어서의 반복론으로 돌입하겠네요. 어려운 영역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인데요, 너무 기대됩니다. 이번에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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