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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부터 2000년까지 자크 데리다는 사형 문제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했다. 데리다는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철학사를 돌이켜볼 때 사형폐지론이 의존할 수 있는 철학 텍스트를 찾기란 상당히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들'은 대체로 사형의 필연성, 필수성을 보여주는 이론을 갖고 있는 반면, 사형의 부당성을 보여주는 이론은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또, 사정이 이러하다면 철학자이자 사형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문제에 대해 어떤 사상을 수립할 수 있을까? 과거 철학자들의 사형옹호론이나 존치론에 필적하는 수준에서까지, <철학적> 수준에서 사형폐지론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할까? 데리다가 사형 문제에 천착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이런 의문, 또는 갈증이었으리라. (또 어떻게 보면 <법의 힘>이나 <우정의 정치>, <맑스의 유령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데리다의 정치적 프로젝트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에 관해서는 차분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사형 문제에 관한 데리다의 언급을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텍스트는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솔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 <입장들>은 지금 내게 없는 관계로 확인 불가능.) 대신 엘리자베스 루디네스코와 행한 대담집인 Negotiations(Stanford Univ Press, 2002)의 8장이 사형 문제를 다루고 있다. 40쪽 분량의 이 장은 대담이기는 해도 데리다의 사형론의 특징이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실제로 이 대담은 사형론 세미나가 진행되던 시기와도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또한 영어권 자료로는 http://www.cardozo.yu.edu/life/winter2001/derrida/ 이 있다. 그 내용은 아래에 소개한 글과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이것을 읽어봐도 될 것이다. 
그리고 http://www.triestecontemporanea.it/pag20-e.htm 도 참고하면 될 것이다.
또한 사형문제를 주권, 예외상태와 관련지어 논하고 있는 것으로는 http://works.bepress.com/cgi/viewcontent.cgi?article=1002&context=maurizio_vito 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사형 문제에 관한 데리다의 논의에 좀 일찍부터 주목을 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松葉祥一, 「사형ㆍ주권ㆍ구출」, <현대사상> 2004년 3월호, 守中高明, <법>(이와나미, 2004) 등이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이 텍스트들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몇몇 자료들을 취합하는 것으로부터 우선 시작해 보자. (며칠 안에 소개할 글에서는 주로 칸트의 사형론을 해체/탈구축하는 데리다의 모습이 잘 드러날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자 아래에서 한국어로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다음의 사이트를 클릭하면 될 것이다.

http://www.miraisha.co.jp/derrida/toda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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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여기에서 우리의 눈을 즉각 사로잡는 것은 데리다가 사형폐지라는 문제영역에서 무엇을 문제로 삼고 있는가이다. 다시 지적하지만, 데리다는 분명히 사형폐지론에 찬성하고 있다. 데리다가 겨냥하는 것은 사형폐지론이 그 의도와는 반대로 사형폐지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탈구축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여 폭로하는 것이다. 즉, 사형제도가 유지될 수 있는 도주길을 사형폐지론이 내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를 드러내는 것.

이를 위한 독해의 대상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사형폐지론자의 선조라고 일컬어지는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1764), 프랑스의 열렬한 사형폐지론자인 빅토르 위고의 헌법제정의회에서의 발언(1848)을 시작으로 한 텍스트, 로베르 바탕데르가 뷔페와 보땅(탈옥을 꾀할 무렵 교도관을 살해한 죄수)의 변호를 한 경위를 기록한 <사형집행>(1973), 장 쥬네의 <꽃의 노틀담>(1948),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1942),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덕의 계보>(1887),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죽음에의 권리>(1948), 그리고 또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나 「세계인권선언」(1948) 등이다. 처형기계 길로틴의 발명자 조제프 이냐스 길로틴의 발언이나 길로틴의 비유화된 다양한 현상, 유고를 풍자한 보들레르의 비평 등도 분석의 대상으로 되었다.

사형폐지론을 뒷받침하는 전형적 논거로는 “사형은 잔혹하다”는 견해가 있다. 가령 미국 헌법에서는 “너무 잔혹한 처벌”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는데, 1972년에 사형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던 것은 사형이 이 조항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사형집행 방법을 기술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잔혹하지 않은 처벌이 가능해지자 1977년에는 다시 사형이 부활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기술적 개선이란 바로 마취에 의한 안락사를 도입한 것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신체에는 이제 “너무도 잔혹한” 형벌이란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 점에서 사형폐지론의 이른바 ‘잔혹 이데올로기’를 탈구축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비판한다. 잔혹함은 피를 본다는 것(공적 권력이 공적으로 피를 본다는 것)과 결부되어 왔다. 안토넹 아르토라면 ‘잔혹극’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경향은 잔혹함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조금씩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권력은 법을 받는 사람이 죽는 것은 지켜보기를 원한다”는 원칙에는 어떠한 변경도 가해지지 않았다. 분명히 길로틴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피를 보는 사형에서 전기의자나 약물주사를 사용하는 것으로 기술은 ‘진보’했으며, ‘피를 보는 것’은 점차 없어지고 있으며, 공개처형은 일찍이 한정된 관계자만이 참석하는 상황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처형에 입회하는 사람이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가령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처형 그 자체는 잠재적으로 예전보다 훨씬 더 스펙타클한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사형수가 자살하려고 하면 처벌을 받는다는 관습이 존재하는 것도 권력이 살해를 스펙타클화할 수 있는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형폐지론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논의는 “사형은 비인도적이다”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어떤 국면에서는 무력함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서는 길로틴의 발명에 관해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길로틴이 이 기계를 발명한 이유는 원래 이를 통한 것이 처형보다 훨씬 ‘인도적’일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고통이 한 순간으로 응축되며(길로틴의 주장에 따르면 이 기계로 인한 참수(斬首)는 순간적이기 때문에 사형수는 자신의 목이 언제 날라갔는지 알지도 못하고 칼이 목덜미를 쳤다는 것만을 느낄 뿐이라고 한다), 더욱이 기계장치를 사용함으로써 형벌에 평등성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인도적인 것”은 인간의 ‘존엄’ 또는 ‘인간다움’, 법이 인간에게 부여한 ‘응분의’, ‘걸맞는’ 모습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사형은 확실히 이 ‘존엄’을 위해 요청되어 왔다. 플라톤의 <법률>편에서도 사형에도 해당되지 못하는 자는 인간의 존엄성에도 해당하지 못하는 자라고 했다. 칸트의 경우도 사형은 법에 있어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빼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법제도는 사형을 요청함으로써야 비로소 인간과 비인간을 판별하는 힘을 (즉 법의 기준을) 획득한다고 간주되었다. 사형수는 처벌됨으로써 겨우 인간의 존엄성을 획득한다.

사형제도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존엄’의 논리를 반대로 이용하는 전통도 있다. 즉, 사형수란 사회에 대한 공적(公敵)에 필적하는 자이며, 말하자면 인간의 공동성의 외부에 놓여있는 자, 전쟁상태에서의 적, 예외상태에서 존엄 없이 배제되어야 하는 자라는 것이다. 사형은 한 시민을 공적으로 간주하여 이루어지는 전쟁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장-자크 루소나 베카리아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사형의 정당화는 사형에 처해지는 자를 다른 신앙을 가진 자로 간주함으로써 진행되기도 했다. 이것도 예외화의 권력의 행사의 한 가지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예외화란 사면의 권력으로서도 보존된다. 사면이란 권력자가 생살여탈권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이다. 여기에서의 주권권력이란 단순히 살해하는 권력이 아니라 살해하는 것도 사면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권력, 살해한다는 결정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이다.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사람으로서 주권자가 정립되는 것은 바야흐로 신학의 유산으로서의 정치적 제도이다. (여기에서 칼 슈미트에 대한 논의가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약점을 지닌 사형폐지론을 새롭게 전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데리다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논의를 전개한다. 하나는 ‘이익’과 관련된 논의이며, 다른 하나는 ‘감각’과 관련된 논의이다. 보들레르나 니체는 사형폐지론자에 대해서 짖궂은 태도를 취한다. 그것은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너희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이익’이 결국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이익”을 역이용하여 어떤 의미에서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이러한 “이익”이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범례 그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칸트에게 있어서 법의 범례가 이러한 “이익”을 부정한다. 칸트는 인간의 삶의 존엄은 모든 이익(이해관계, 이자)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한다. 칸트의 법 체계에서 사형이 부정되지 않는 것은, 사형이 이익을 배제하는 곳에 놓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법(司法)은 그 총체가 사적인 복수가 아닌 판단의 장소이기 때문에, 이익이 없는 장소로 상정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때 사적 이익에 의해 판결이 좌우된다면 법제도는 그 자체로 자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이익을 결여한 장은 어떤 감추어진 이익에 의해 작동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익을 ‘순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러한 ‘순익’의 논리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미적 판단 자체가 이익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한다. 쇼펜하우어를 경유하여 니체가 공격했던 것이 미 또는 감각에 대한 이러한 “이익의 배제”라는 칸트의 자세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순익”에 기초한 사형은 권리 주체를 발생시킨 상업으로부터의 파생물일지도 모른다. 사형을 형법이 아니라 상법의 파생물로 간주함으로써 사형이 지닌 경제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비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단순히 계산된 사형 ―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이 제도는 점점 더 ‘순익’에 기반한 계산으로 환원되고 있다 ― 을 비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외에는 없다.

점점 감소되어 가는 사형에서의 ‘잔혹함’이나 ‘이익’을 종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형폐지론를 위해 유용하는 것이 요구된다. 원래 ‘순익’이 아니라 ‘이익’은 상업에서의 ‘약속’과 분리할 수 없다. 미리 계산되는 것에 맡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에 있어서 항상 전제되고 있으며, 경제로 간주되는 것으로부터 항상 도피하는 것이다. (순수한 계산은 이것을 보이지 않게 한다.) 상업에서의 ‘신용’ ― 종교적인 ‘믿음’은 이로부터 파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 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데리다는 ‘믿음’과 ‘잔혹함’이 반대물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러한 반대물의 부재가 ‘순익’의 경제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며, 그 경제의 한계 내에서 사형폐지론을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이미 탈구축 가능한 것에 머무를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탈구축을 행하는데 있어서 뒷받침이 되는 ‘이익’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 원래 ‘책임’의 정체인데 ―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이익이며, 감각에 대한 이익이다.

사형폐지론이 유효한 효과를 갖지 못하는 것은 마취에 의한 안락사가 서서히 광범위하게 채용되고 있다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잔혹함으로 인해 비난을 받은 사형제도는 그러한 잔혹함이 감각과 결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감각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을 유지한다는 길을 선택한다. 마취(감각의 말소)만 하게 되면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지닌 의미(여기에서는 잔혹함)에 관해서 언급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식이다. 여기에서 사형제도에 반대하여 요구해야 할 것은, 확실히 여기에서 빼앗기게 된 것, 즉 감각이다. 이 감각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기 위해서는, 데리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으로서의 두 가지 형상을 거론한다. 하나는 실제의 ‘사형수(condamne a mort)’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을 비유로 한 “죽음으로 단죄된 자(condamne a mourir)”, 즉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이다. 데리다는 이 두 개의 차이를 강조한다. 어느 쪽이든 죽는다고 정해져 있으나, 후자는 자신이 언제 죽는가에 대해 알지 못할 가능성을 계속 가지고 있는 반면에, 전자는 자신이 죽는 순간이 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자신은 그 시간을 알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죽음의 순간이 정해진다고 하는 것에 대한 앎의 유무가 양자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모든 수동성을, 모든 감각을 기초짓는다. 사형수는 자신의 죽음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되는 것의 불가능성을 빼앗긴다고 말해도 좋다. 그리고 오늘날 제도는 이러한 ‘감각’의 박탈 장치를 은폐하듯이, 미리 ‘감각’을 빼앗는 수단을 채용하여 ‘잔혹함’을 말소하려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작동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을 계산 속에 집어넣는 권력이다. 지금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다. 그 저항은 일종의 ‘이익’에 의거함으로써, 즉 일종의 ‘책임’ ―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앎의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 ― 에 의거함으로써 나오게 된다. 마취의 ‘친절함’과는 상이한, 감각(그것은 ‘잔혹함’이 되기도 한다)을 상실하지 않은 존재의 힘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사형폐지가 주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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