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창렬씨가 메신저로 정리해 보낸 것을 기초로 이재원씨가 이쁘게, 일목요연하게 재정리한 것을 (이미지는 빼고)그대로 가져온다. http://blog.naver.com/virilio73/80096351868


지난 2008년 4월 5~6일 영국의 켄트대학교에서 국제회의가 열린 적이 있다. 아시는 분들은 이미 다 아시겠지만 그 주제는 이름하여
“오늘날의 이탈리아 사상: 생명정치, 니힐리즘, 제국”(Italian Thought Today: Biopolitics, Nihilism, Empire)이었다. 요컨대 조르조 아감벤(생명정치), 지아니 바티모(니힐리즘), 안토니오 네그(제국) 등 영미국에서 ‘핫’한 아이템으로 떠오른 이탈리아 출신 사상가들에 대한 국제회의였다. 첫 번째 날에 6명, 두 번째 날에 6명, 총 12명이 발표를 했는데 이 중 비이탈리아권 학자는 쉐인 웰러(영국 켄트대학교)와 티모시 머피(미국 오클라호마대학교) 둘뿐이었다. 요컨대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이 국제회의의 실질적인 토론을 이끈 것. 토론회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징적으로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침략’(Italian Invasion)이라고 할 만했다. 

이 국제회의의 결과물이 얼마 전 호주의 출판사 re.press에서 <이탈리아적 특이성: 니힐리즘과 생명정치 사이에서>(The Italian Difference: Between Nihilism and Biopolitics)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국제회의의 발표자 목록과 이 단행본의 필자 목록이 다르다는 점(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이 책이 나온 뒤, 얼마 전인 11월 30일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이탈리아와 생명정치”(Italie et biopolitique)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일전의 국제회의-단행본 ‘동지들’이 주도한 이날의 토론회 선수들은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로렌조 키에자, 알베르토 토스카노였다. 뉴페이스인 브루노 베사노 역시 이탈리아인으로서 베를린에서 활동 중이다. 에스포지토와 키에자는 도서출판 난장의 필자들이기도 한데다, 일전 국제회의-단행본의 한국어판 출간을 국제회의 준비기간 중인 2008년 2월부터 논의 중이었던지라(논의가 막바지 단계에 왔다) 기록 차원에서 최근의 토론회 내용을 기록해둔다. 아래 내용은 (역시 도서출판 난장의 필자이자 기획위원이기도 한) 파리1대학 박사과정 중의 양창렬 씨가 현장에서 정리한 내용이다(양 특파원, 수고했어요~! ㅎㅎㅎ). 그리고 중간중간 대괄호([  ]) 안의 내용은 창렬씨의 코멘트(혹은 내 나름대로의 추임새) 내용이다. 

[기조발제]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 1950~  )

오늘날 이탈리아 사상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상의 모든 개념이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건 아니다. 생명정치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미셸 푸코,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탈리아와 생명정치인가?] 독일의 해석학,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초기와 현재를 비교해보라.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 프랑스 철학은 훌륭하지만, 자기-지시적이고, 외부로 열려 있지 않다. 1930년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등의 언어적 전회가 독일, 영국, 프랑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이탈리아 사상은 이 영향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이탈리아에서 생명정치 논의가 활발해질 수 있었던 토대 중 하나였을 것이다.]

프레데릭 봄즈는 최근 저서에서 프랑스 철학의 두 경향, 즉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축(앙리 베르그송, 질 들뢰즈 등)과 수학·단절을 중심으로 하는 축(장 카바예스, 알랭 바디우 등)을 나눴다. 그러나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암비스타 비코, 토마소 캄파넬라 등, 이탈리아 사상은 예전부터 ‘삶/생명’과 ‘정치/역사’의 관계, 다시 말해서 삶/생명과 역사/정치의 긴장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거기서 삶/생명의 우위를 고민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기원 때문에 오늘날 생명정치로의 발전이 쉬웠을 것이다.

 들뢰즈는 영토화 대 탈영토화를 말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는 달리 오랫동안 국민국가가 성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처음부터 이탈리아 사상은 ‘구성적 탈중심화,’ ‘구성적 탈영토화’를 견지했는지 모른다. 이 점에서 다른 국가들의 사상과는 다르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철학과 정치가 처음부터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16~18세기, 최근의 경우 베네데토 크로체, 안토니오 그람시 등 모든 철학자들이 ‘정치’와 맞닥뜨려야 했고, 권력에 대한 저항을 보여줬다.

 

[기조발표 뒤 <이탈리아적 특이성>에 수록된 몇몇 글들 요약]

 

네그리의 존재론은 선형적이고, 지나치게 도발적이다(“이탈리아적 특이성”). 토스카노는 적대의 문제를 다뤘고(“봉기의 연대기: 트론티, 네그리, 그리고 적대의 주체”), 키에자는 바티모, 아감벤, 네그리에게서 나타나는 신학적인 영향을 다뤘다(“조르조 아감벤의 프란체스코파적 존재론”). 예를 들어 아감벤은 최근 오이코노미아의 섭리적 패러다임을 말하고 있고, 심지어 그가 대안으로 말한 ‘세속화’도 결국 신학 용어 아닌가(비록 그것이 신학에서 가치절하됐던 것이라 하더라도)? 파올로 비르노는 인간의 본성에 주목하면서 인격적/인칭적이지 않은 주체성을 탐구하고 있다(“자연-역사적 도식: ‘새로운 글로벌’ 운동과 생물학적 불변항”).

 

 

[발언 1] 로렌조 키에자(Lorenzo Chiesa)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오늘날 이탈리아 사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파졸리니는 일찍기 ‘성스러운 삶/생명’을 개념화했다. [이 성스러운 삶/생명과 인구 증가,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경제 문제를 가지고 키에사가 파졸리니의 생명정치론을 분석했음. 파졸리니 얘기는 에스포지토도 책에서 하는 모양임. 아감벤과 파솔리니의 관계도 예사롭지 않고, 아무튼 파솔리니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


아감벤은 생명정치의 계보학을 그리지만 지나치게 회의주의적이다. 반면 에스포지토는 <비오스>에서 파솔리니의 교훈을 따르며 해방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즉, 긍정적인 생명정치가 가능한가의 문제. 에스포지토가 그 책 후반부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를 분석하는 것도 주목해봐야 한다. 
 

 

[발언 2]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

 
생명정치라는 단어가 오늘날 여러 영역에서 너무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수용소, 안락사, 출생, 나치, 생명/유전공학 등 도처에 생명정치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의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글에서 노동의 재생산, 노동의 규율 문제를 다뤘다. 이것은 생명정치론으로 확대해서 독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마시모 카치아리는 <아우트아우트>(Aut Aut)에 수록된 글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이탈리아 수용 또는 영향력을 비판했다. 들뢰즈-가타리의 ‘생산의 생기론’을 비판한 것이다. 여기에 카치아리는 ‘부정성의 사유’를 맞세웠다. 하지만 카치아리는 푸코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 또는 생명정치론의 다양한 양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늘날 생명정치의 양상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고전적인 입장: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 네그리와 하트는 스피노자적인 다중 개념을 쓰고, 프랑스 철학에서 차용한 개념, 테마를 사용한다. 이들의 논의는 맑스주의와 상대적으로 쉽게 양립 가능하다. 예를 들어 네그리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그륀트리세) 독해를 통해 산노동 대 죽은 노동의 적대를 얘기한다던가,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을 중요한 개념으로 제시한다. 이 입장은 "구성 권력의 생명정치"로 요약될 수 있다.

(2) 자연주의적 입장: 파올로 비르노. 비르노는 인간 본성, 능력 개념을 통해 정치를 다시 사유하려 한다. 맑스 이전의 유물론, 특히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등에서 개념을 끌어온다. 이 입장은 ‘인간의 인지적-언어적 능력의 생명정치’로 요약될 수 있다.


(3) 미분적 영성주의: 마우리지오 라자라토. 라자라토는 네그리와는 다소 다르다. 라자라토는 가브리엘 타르드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입장은 ‘잠재성의 생명정치’라고 할 수 있다.

생명정치 개념이 여러 나라에서 굉장히 상이한 맥락에서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분과학문을 넘어서는 횡단성’을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런 사용의 ‘모호함/중의성’도 주목해야 한다.
 

 

[발언 3] 브루노 베사나(Bruno Besana)

 

[이 친구 발표는 뭔가 내용은 있는 것 같은데, 말이 너무 빠르고 체계적이지 않아서 알아듣기 어려웠음. 이 친구 역시 초반에 철학과 정치의 ‘이접’(disjonction)이 중요하다, <이탈리아적 특이성> 서문에서 이탈리아의 현재 상황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탈리아는 국가의 현전을 숨김없이 전시하면서 규범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등등 애기하면서 카치아리를 비판함. 주요 요지는 카치아리는 바깥에 위치하면서 부정성의 현전만을 주장하므로 어떤 저항도 행위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집단토론] 에스포지토, 키에자, 토스카노, 베사나, 그리고 청중들

 

에스포지토: 철학에서는 아나크로니즘이 중요하다. 기원과 동시대성, 동시대성과 기원을 함께 놓고 사유하기. 나는 이점에서 아감벤의 주장에 동의한다.

청중 1: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생명정치는 사회학이나 구체적 역사 분석에 집중하는 반면, 이탈리아의 경우 생명정치는 철학의 차원에서 심화되고 있다. 이것이 일종의 기여가 아닐까?

키에자: 부정적인 생명정치론, 즉 아감벤의 타나토폴리틱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긍정적 생명정치론, 즉 네그리의 것이 있다. 이 둘 사이에 에스포지토가 위치한다.

토스카노: 네그리의 다중, 아감벤의 난민 등 각 사상가의 ‘사유 스타일’도 그런 차이에 한 몫 하는 듯.

베사나: 네그리에게 사회는 이미 어느 정도 동질적이다. 레닌과 달리 네그리가 보기에 사회 안에는 ‘약한 고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네그리에게는 ‘카이로스’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결국 사건적 사유나 메시아주의로 흐르지 않겠는가?

에스포지토한나 아렌트에게 ‘출생’은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반면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생물학적 현상인 동시에 공동체가 면역화(immunisation)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출생은 바로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봄즈: 생명정치와 생명권력, 또는 긍정적 생명정치와 부정적 생명정치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과연 정치 대 생명의 대립으로 그것을 풀 수 있겠는가? 생명정치는 완전히 긍정적이지도, 완전히 부정적이지도 않은 길을 찾아내야 한다. 자크 데리다의 세미나가 최근 <짐승과 주권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여기서 데리다는 푸코와 아감벤을 비판한다. 내 생각에는 정의(justice)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하나의 기준이 될 것 같다.

에스포지토: 생명에 대한 정치(생명권력)과 생명의 정치(생명정치)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은 ‘법률’과 ‘규범’이다. 법률(jus)은 주체에게 초월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다. 규범(나는 이 개념을 조르주 캉길렘에게서 끌어오는데)은 주체에 내재적이다. 즉, 부과되는-초월적인 법률과 삶의 내재적 규범이 대립되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콜로키엄에서 데리다 대 아감벤이라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거기에는 사실 데리다와 푸코 사이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장-뤽 낭시, 아감벤, 나는 베네치아에서 있었던 어느 저녁 식사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다. 낭시의 말에 따르면 데리다는 푸코가 “철학자가 아니라 역사가다”라고 했다고 한다. 데리다는 말년에 푸코를 넘어서고 싶었던 것 같다.

봄즈: 법률/규범을 각각 초월적/내재적으로 구별하는 것의 기준이 또 필요해지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규범(화)의 경우에도 정치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규범화가 있고, 생명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규범화가 있지 않겠는가? 여전히 그 질문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키에자: 긍정적 생명정치를 판별하는 내재적 기준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 기준은 내 생각에 “법률에 대한 삶의 우위”가 아닐까 한다. 아감벤은 삶-의-형태가 ‘법률-의-형태’를 완수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에는 생기론적 위험이 있다. 더욱이 아감벤이 말하는 삶-의-형태는 비트겐슈타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공학의 [누구? 잘 들리지 않았음]에게 있어서 삶-의-형태라는 단어는 일종의 주인기표 노릇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끝)


 

※ 기조발제에서 에스포지토도 언급했고, 집단토론에서도 출몰하는 봄즈(Frédéric Worms, 1964~)는 릴3대학의 교수이자 이번 파리 토론회의 주최단체인 국제현대프랑스철학연구소(Centre international d'étude de la philosophie française contemporaine, CIEPFC)의 책임자이기도 하다(CIEPFC는 바디우가 설립한 단체이다. 공식 블로그에 가면 재미 있는 논문들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봄즈의 ‘최근 저서’란 <20세기 프랑스 철학>(La philosophie en France au XXe siecle, Paris: Gallimard, 2008)을 말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책인데 무려 643쪽이나 된다(도서출판 길에서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 봄즈가 언급한 데리다의 세미나 <짐승과 주권자>(La bête et le souverain: Séminaire, vol.1. 2001-2002, Paris: Galilée, 2008) 역시 만만찮은 분량이다. 467쪽. 진작에 영역본도 나왔는데 제목 자체에서 이탈리아 발(發) 생명정치론에 대한 도전의식이 보인다(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의 한 장을 “추방령과 늑대”에 할애한 것을 상기해보라). 표지는 영역본이 맘에 든다.

 마치 주권자에 대한 ‘짐승의 은유’를 계보학적으로 따져보는 듯한 이 책은 라 퐁텐느의 우화 속 짐승들(특히 “늑대와 양”), 토머스 홉스의 논의에 나오는 성서 속의 바다괴물 리바이어던,  D. H. 로렌스의 시에 나오는 뱀, 장-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환기시키는 늑대[이리]인간, 그리고 무엇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 유명한 은유인 ‘여우-군주’의 형상을 통해서 주권자와 짐승의 연관관계를 파헤친다(이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요컨대 군주나 짐승이나 ‘법’에 종속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군주는 법 위에 군림하며, 짐승은 법 외부에 위치한다). 이런 기본 전제를 통해서 데리다가 푸코와 아감벤을 어떻게 공략하는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할 만하다. 프랑스의 경우 데리다의 세미나는 시리즈로 계속 나올 계획이라고 하는데(몇 권이 될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워낙 많은 세미나를 한 양반이라), 국역본 데리다 세미나를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짐승과 주권자>는 많은 출판사들이 관심을 보일 것 같지만 말이다.

 

※※※ <이탈리아적 특이성>에 글이 실리지 않은 런던 국제회의의 참석자들은 앞서 말한 웰러와 머피 말고도 5명이다. 오즈렌 푸포박(얀반에이크아카데미), 마르게리타 파스쿠치(런던대학교/뉴욕대학교), 세르지오 벤베누토(이탈리아과학연구위원회), 안드레아 푸마갈리(파비아대학교), 젤리카 수믹 리하(루블라냐대학교) 등이다. 그러니까 국제회의 참석자 12명 중 7명이 빠지고, 5명(네그리, 피에르 알도 로바티, 루이자 무라로, 마리오 트론티, 파울로 비르노)이 새로 들어와 <이탈리아적 특이성>의 필자는 총 10명이 됐다. 국제회의의 5명이 빠진 이유는 대충 발표논문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다.

1. Ozren Pupovac, “Machiavelli, Negri, Althusser: Encounters and Detours”

2. Margherita Pascucci, “The Real Richness: Politics and the Subject”

3. Sergio Benvenuto, “The Drive Towards the Real: Philosophy in the Epoch of Bio-techno-logies and Bio-politics”

4. Andrea Fumagalli, “Bioeconomy and the Valorisation Process”

5. Jelica Sumic Riha, “Giorgio Agamben's Politics of the Remnant”

 

6. Shane Weller, “The Art and Ethics of Distortion: Heidegger, Derrida, Vattimo”

7. Timothy Murphy, “Pedagogy of the Moltitude: Negri on Stage”

요컨대 빠진 사람들의 발표논문은 ‘이탈리아적 특이성’보다는 그 응용에 좀더 초점이 맞춰진 그런 내용이었던 셈. <이탈리아적 특이성>은 그보다는 오히려 그 특이성의 스펙트럼을 더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글들이 전면에 배치됐다. 그러니 어떤 점에서 그 국제회의와 <이탈리아적 특이성>은 그야말로 ‘특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대로는 아니지만 무관하지도 않은 연결의 끈이 있다고나 할까? 이런 국제회의가 심심찮게 개최되는 현지(!?)가 부러우면서도 배아프다.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 틈나는 대로 아감벤의 Remnants of Auschwitz : The Witness and the Archive, trans., Haniel Heller-Roazen, Zone Books를 옮긴다. 일단 영역본으로 옮긴 후에, 불역본과 대조하여 차이가 있는 경우에만 한하여 불역본으로 수정을 할 것이다. 인용의 편의를 위해 영역본의 쪽수를 병기한다. (2009. 07. 18 작업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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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쪽.
2-24. 미셸 푸코는 우리 시대에서 죽음의 영락(零落, degradation)에 관해 정치적 용어를 사용해 하나의 설명을 제시한다. 이 설명은 죽음의 영락을 근대 시대에서의 권력의 변형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영토적 주권이라는 전통적 형태에서의 권력은 본질적으로 생살여탈의 권리(the right over life and death)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는 무엇보다도 죽음 쪽에서 행사된다는 의미에서, 즉 죽일 권리의 보류로서 삶과 간접적으로만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정의상 비대칭적이다. 이 때문에 푸코는 죽게 만들면서 살게 내버려둔다to make die and to let live는 정식에 의해 주권을 특징짓는다. 17세기와 경찰학[치안통치의 학]의 탄생과 더불어, 신민들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배려[돌봄]가 국가들의 메커니즘과 계산에서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자, 주권적 권력은 푸코가 '생권력'bio-pouvoir이라고 부른 것으로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죽게 만들면서 살게 내버려둔다to kill and to let live는 고대의 권리는, 근대의 생정치biopolitique를 정의하는 것이자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둔다to make and to let live는 정식에 의해 [83쪽] 표현될 수 있는 정반대의 모델을 낳는다[정반대의 모델에 그 자리를 물려준다]. "주권의 법권리droit에 있어서 죽음은 주권자[군주]의 절대권력이 가장 빛을 발하던 지점이었던 반면에, 이제는 그와 반대로 죽음은 개인이 권력으로부터 빠져나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고, 이른바 자신이 가장 사적인 부분에 갇히는 순간이 됩니다."(Foucaut 1997: 221/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김상운 옮김, 난장, 근간 ; 박정자 옮김, 동문선, "과거에 죽음이 군주의 절대권을 떠들썩하게 과시하는 계기였다면, 이제 죽음은 한 개인이 모든 권력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떨어져 가장 사적인 존재로 웅크리고 있는 순간이 되었다."] 이리하여 죽음은 점차 격하disqualification되어 간다. 죽음은 개인과 가족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적인 제식rite의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하여 죽음은 이제 감추어진 어떤 것, 일종의 사적인 부끄러움으로 변형된다.
두 개의 권력 모델들이 충돌하는 지점은 바로 [스페인의 총독] 프랑코의 죽음이다. 여기에서 우리 시대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고대의 생살여탈의 주권적 권리를 체현했던 자[프랑코]는 새로운 의료적, 생정치적 권력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생정치적 권력은 "인간을 살게 만드는데" 잘 성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들을 살게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푸코에게 이 두 권력들은, 독재자의 신체에서는 일시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듯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이질적인 채로 남아 있다. 이 둘의 구별[차이]은 근대의 여명기에서, 하나의 체제에서 다른 체제로의 이행을 정의하는 일련의 개념적 대립들(개별 신체/인구[주민], 규율/조절메커니즘, 인간-신체man-body/인간-종들)을 산출한다. 당연히 푸코는 이 두 권력들과 테크닉들이 어떤 경우들에서는 서로의 내부로 통합될 수 있음을 완벽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개념적으로는 여전히 구별된 채로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러한 이질성은 우리 시대의 강력한 전체주의 국가들, 특히 나치 국가에 대한 분석과 대결하는 것이 문제로 되자마자, 문제적problematic이게 된다. 히틀러의 독일에서는, 살게 만드는 생권력의 전례 없는 절대화가 죽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일반화[전면화]와 교차하며, 따라서 생정치는 죽음정치와 즉각[직접적으로, 무매개적으로] 일치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일치는 진정한 역설을 재현하는데, [84쪽] 이 역설은 모든 역설들이 그러하듯이, 설명을 요구한다. 본질적으로는 살게 만드는 것을 그 목표로 하는 권력이 어떻게 무조건적 죽음의 권력을 실행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푸코가 1976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이 물음에 대해 제시한 답변은, 인종주의란 바로 생권력이 인간-종(human species)이라는 생물학적 연속체에 단절(caesura)을 표시하게끔 해주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살게 만드는' 체제 속에 전쟁의 원리를 재도입한다는 것이다. "인간-종이라는 생물학적 연속체에서 인종의 등장과 구별, 위계질서의 설정, 즉 어떤 인종은 우등하다고 간주되고 어떤 인종은 반대로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것은, 권력이 그것에 대한 배려에 착수했던 생물학적 영역을 단편화하는 방식입니다. 이것들은 인구의 내부에서 상이한 집단들을 서로 갈라놓는[구별하는] 방식입니다. 요컨대 바로 생물학적 영역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어떤 영역 내부에서 생물학적인 유형의 단절을 수행하는 것입니다."(p. 227; 박정자 옮김 : "인간이라는 종류의 생물학적 연속체 안에 여러 인종들이 나타나고, 인종들을 구별하며, 등급을 매기고, 좋은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이 모든 것은 권력이 떠맡은 생물학적 영역을 조각내는 방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인구 안의 여러 집단들을 서로 어긋나게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생물학적 영역 내붕 역시 생물학적인 휴지(休止)를 도입하는 것이다.")
푸코의 분석을 더 발전시켜 보자. 생정치의 영역을 분할하는 근본적 단절은 인민popolo과 인구popolazione 사이의 단절이다. 이 단절은 인민의 한 가운데에서 인구[주민]을 밝게 드러내는 것[출현시키는 것]에, 즉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신체를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인 신체로 변형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런 생물학적 신체의 충산과 사망, 건강과 질병이 규제되어야만 한다. 생권력의 탄생과 더불어 모든 인민은 인구[주민]에 의해 이중화된다[인구라는 분신을 낳는다]. 즉, 모든 민주주의적인democratic 인민은 동시에 인구통계학적인demographic 인민인 것이다. 나치의 제국에서, [독일 민족의 유전적 건강의 보호]에 관한 1933년의 법률은 바로 이러한 단절을 완벽하게 표시한다. 곧바로 뒤따라나온 단절은 모든 시민이라는 집합 속에서, "아리아 혈통"의 시민들을 "비-아리아 혈통"의 시민과 구별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어진 단절은 "비-아리아 혈통"의 시민들의 집합 속에서 순혈의 유대인(Volljuden)을 혼혈(Mischlinge : 조부모 중에서 한 명만 유대인인 자, 또는 조부모 모두 유대인이지만 아버지가 유대인이 아니고 1935년 9월 15일 현재 유대인 배우자가 없는 자)로부터 분리하면서 "비-아리아 혈통"의 시민 집합을 관통한다. 생정치적 단절은 본질적으로 이동적mobile이며, 생물학적 연속체 속에서  [85쪽] 개별 사례마다 더 나아간 지대를 분리한다. 이러한 지대는 점증하는 품위[존엄성]박탈(Entwürdignung)과 영락의 과정에 대응한다. 이렇게 하여 비-아리아인은 유대인으로 이행하며, 유대인은 강제이주자(umgesiedelt, ausgesiedelt)로 이행하며, 강제이주자는 수감자(Häftling)로 이행하며, 생정치적 단절은 마침내 수용소에서 그 최후의 한계에 이른다. 이 한계가 무젤만이다. 수감자가 무젤만으로 되는 지점에, 인종주의적 생정치는 이른바 인종을 초월하며, 더 이상 단절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어떤 문턱으로 진입한다. 여기에서 인민과 인구 사이의 동요하는 연결은 마침내 깨지며, 우리는 어떤 특수한 담지자나 주체에 할당될 수 없는, 혹은 또 다른 단절에 의해 분할될 수 없는 절대적인 생정치적 실체와 같은 어떤 것이 출현함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나치의 생정치 체제에서 수용소의 결정적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수용소는 죽음과 절멸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무젤만을 생산하는 자리, 즉 생물학적 연속체 속에 분리될 수 있는 궁극의 생정치적 실체를 생산하는 자리이다. 무젤만을 넘어서면 오로지 가스실만이 있다[무젤만의 맞은 편에 있는 것은 오직 가스실뿐이다].
1937년 비밀회의 동안에, 히틀러는 극단적인 생정치적 개념을 처음으로 정식화한다. 이것은 잘 고찰할 값어치가 있다. 히틀러는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 대해 언급하면서 volkloser Raum, 민족 없는 공간(a spcae empty of people)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특이한/기묘한singular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황무지와 같은 것, 거주자가 없는 지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가 언급했던 지역은 여러 인민들peoples이나 국민들nationalities로 가득 차populate 있다.) 히틀러의 "민족 없는 공간peopleless space"은 오히려 근본적인 생정치적 강렬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강렬도는 모든 공간 속에 존속될 수 있으며, 이 강렬도를 통해 인민들은 주민들로 이행하고 주민들은 무젤만들로 이행한다. 달리 말하면 volkloser Raum은 수용소의 내연동력driving force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어떤 결정적인/명확한determinate [86쪽] 지리적 공간으로 일단 파악되면, 그 지리적 공간을 절대적인 생정치적 공간으로, 즉 인간의 삶이 모든 배정가능한 생정치적 정체성[동일성]을 초월하게 되는 삶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Lebensraum und Todesraum으로 변형시켜 버리는 생정치적 기계로 이해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죽음은 단순한 부수현상일 뿐이다.(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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