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3. 스놉

 

어떤 동물도 스놉일 수 없다.

알렉상드르 코제브

 

 

코제브는 제자이자 라이벌인 바타이유가 죽은 지 6년이 된 1968, 헤겔철학입문2판 출판을 기회로 삼아 인간의 동물되기man’s becoming animal라는 문제로 되돌아갔다. 더욱이 이 두 번째의 재검토는 1판의 각주에 또 다시 각주를 덧붙이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만일 헤겔철학입문이라는 텍스트가 본질적으로 레이몽 크노Queneau가 수집한 노트들로 구성됐다고 한다면, 이 책에서 각주는 분명히 코제브가 자기 손으로 집필한 유일한 부분일 것이다). 코제브는 첫 번째 각주가 애매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의 종언에서 본래적 의미에서의properly so called인간이 사라질 것임에 틀림없다고 받아들인다면, ‘나머지 모든 것’(예술, 사랑, 놀이)이 무한정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정합성이 없다.

 

만일 «인간»이 또 다시 동물이 된다면, 인간의 예술, 사랑, 놀이도 또 다시 순수하게 자연적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종언 이후 마치 새가 둥지를 틀고 거미가 그물을 짜듯이 인간도 건물과 예술작품을 구축할 것이라고 인정되어야만 할 것이며, 또한 개구리와 매미의 방식을 쫒아 음악회를 열 것이고, 새끼 동물들이 노는 것처럼 놀 것이며, 성숙한 짐승처럼 사랑[성교]을 탐닉할 것이라고 인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모든 것이 “«인간»행복하게 만든다고는 말할 수 없다. (풍요와 완벽한 안전을 누리며 살아갈) 호모 사피엔스 종이라는 포스트 역사[역사 이후]의 동물들은 예술적이고 에로틱하며 놀기 좋아하는 행태의 결과에 만족할 것이라고, 그리고 정의상 이와 마찬가지로, 이런 행태에 만족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고유한[본래적인proper] 의미에서 인간의 결정적인[명확한] 절멸definitive annihilation은 인간 언어의 사라짐[소멸], 그리고 꿀벌의 언어에 견줄 수 있는 음성신호나 동작신호로 인간의 언어가 대체됨을 수반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경우에 코제브는 철학 즉 지혜의 사랑 만이 아니라 그 어떤 종류의 지혜의 가능성 자체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코제브의] 각주는 역사의 종언과 세계의 현재 상태에 관해 일련의 테제를 분절하는데, 이 테제에서는 절대적인[흔들림 없는] 진지함, 그리고 이와 동일한 정도의 절대적인 아이러니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판의 각주(1946)를 쓴 직후에 곧바로 이 저자가 헤겔-맑스주의적 역사의 종언을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완결된 어떤 것으로 이해했음을 배운다. 예나전투(1806) 이후, 인류의 전위는 인간의 역사적 진화의 종언에 실질적으로virtually 도달했다. 그 후에 일어난 모든 것 양차 세계대전, 나치즘, 러시아의 소비에트화를 포함하여 은 가장 선진화된 유럽 나라들의 입장에 세계의 나머지 부분들더러 발맞추어 나가게끔 가속화했던 과정a process of accelerated alignment에 다름 아니었다[아니라는 점을 대표했다]. 하지만 (코제브가 프랑스 정부의 고위인사가 되었던 때인) 1948년부터 1958년 사이에, 미국 여행과 소련 여행을 거듭하면서 그는 이제 포스트 역사의 조건[상황]에 도달하는 길에서 소련인과 중국인은 아직 가난하지만 급속도로 풍요로움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국인인반면에, 미국은 맑스주의적 공산주의의 최종단계에 이미 도달했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이 확신으로 인해 그는 이렇게 결론짓게 됐다.

미국식 생활방식역사 이후의 시대에 특유한고유한 생활유형이며, «세계»에 있어서 미국의 현전은 모든 인류의 미래에 걸친 영원한 현재[‘영원한 현재인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동물성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확실성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1956년에 간 일본 여행은 [그가 품고 있었던] 전망perspective을 더욱 변화시켰다. 일본에서 코제브는 자신의 눈으로, 비록 포스트 역사[]이라는 조건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를 그치지 않았던 어떤 사회[일본]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포스트역사의일본문명은 미국식 생활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일본에는 더 이상 유럽적혹은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도 도덕도 정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수 형태에서의 속물들(스노비즘)자연적이거나 동물적인소여(주어진 바)를 부정하는 규율을 창출했다. 이것은 효과라는 면에 있어서 일본이나 다른 곳에서 역사적행동을 통해 생겨났던 것, 즉 전쟁과 혁명적 투쟁 또는 강제노동에서 생겨났던 것을 훨씬 능가했다. 확실히 노가쿠(能樂)나 다도(茶道)나 꽃꽂이(華道) 등과 같은 일본 특유의 스노비즘의 정점(이에 필적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은 귀족과 부유층의 배타적 전유물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지속적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본인들은 예외 없이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역사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내용을 모두 상실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극단적(궁극적)으로 보면 모든 일본인은 순수한 스노비즘에 의해 원리적으로는 완전히 아무 대가도 없는자살을 행할 수 있다(사무라이의 고전적 칼épéee은 비행기나 어뢰로 바뀔 수 있다). 이런 자살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내용을 가진 역사적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수행되는 투쟁 속에서 무릅쓰게 되는 생명의 위험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일본과 서구 세계 사이에서 최근 시작된 상호교류는 결국 일본인의 재야만인화(일본인을 야만인으로 다시 간주하는 것)가 아니라 (러시아인들도 포함하여) 서구인들의 일본인화로 귀착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그 어떤 동물도 스놉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일본인화된포스트-역사적 시대는 분명히 인간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것의 자연스런뒷받침 역할을 했던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라는 동물들이 있는 한, “고유하게 그렇게 불리는 인간의 경정적인 무화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위의 주석에서 말했듯이, “자연이나 주어진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동물살아 있는 존재이되 결코 인간적이지는 않다.

코제브가 포스트 역사[역사 이후]의 조건을 기술하려 시도할 때마다 매번 바타이유는 웃음거리가 된[다른 이들의 웃음거리를 산] 어조 때문에 자기 스승을 비난하곤 했는데, 이 각주에서는 [코제브의] 이런 어조가 정점에 도달한다. 여기서는 미국식 생활양식이 동물적인 생명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며[등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식 스노비즘snobbery이라는 형태로 인간이 역사에 실존하는 것 자체가 더 세련된 (설령 어쩌면 패러디적일지라도) 판본의 사용 없는[아무 쓸모없는] 부정성과 닮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용 없는[아무 쓸모없는] 부정성을 바타이유는 확실히 더 천진난만한ingenuous 방식으로 정의하려고 애썼는데, 코제브의 눈에는 나쁜 취향으로 비춰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이 포스트 역사적 형상이 지닌 이론적 함축에 관해 성찰해 보자. 무엇보다 우선, 역사라는 드라마에서 인류의 생존은 역사와 그 종언 사이에서 메시아의 천년왕국을 상기시키는 초역사ultrahistory라는 언저리를 도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전통에서도 천년왕국은 메시아의 최후의 사건과 영원한 생명 사이에서 수립될 것이라고 얘기된다(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인 테마들로 가득 채워진 솔로비예프Solov’yev의 철학에 자신의 첫 번째 작성을 헌사한 어떤 철학자[코제브]에게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이 초역사라는 언저리ultrahistorical fringe에서 인간이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다[인간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뒷받침[지렛대support]으로서 기능해야만 하는 호모 사피엔스종이라는 동물의 생존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코제브의 헤겔 독해에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정의된 종이 아니며, 또한 확실하게 주어진given once and for all 실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은 인간학적인[인간화된]anthropophorous’ 동물성과 이 동물성으로부터 신체를 취하는 인간성을 매번 적어도 잠재적으로virtually 분리하는 내적 휴지기[중간지대, caesurae]에 의해 항상 이미 절단되어 있는 변증법적 긴장의 장이다. 인간은 이 긴장에서만 역사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 인간은 자신을 뒷받침하는 인간학적 동물을 초월하고 변형하는 정도에서만 인간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록 부정의 행위action를 통해서긴 하지만, 자기 자신의 동물성을 지배하고 결국에는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바로 이런 의미에서 코제브는 인간은 동물의 치명적인 질병이다고 쓸 수 있었다).

그렇지만 포스트역사에서 인간의 동물성은 무엇이 되는가? 일본식 스놉과 그의 동물적 신체 사이에는, 그리고 일본식 스놉[의 신체]과 바타이유가 힐끗 본 무두(無頭)의 생명체creature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지만 코제브는 인간과 인간학적 동물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부정과 죽음의 측면을 특권시하며, 근대성에서 인간(또는 코제브에게는 «국가»)이 자신의 고유한 동물적인 생명을 배려하기 시작하는 과정을 간과하고, 이와 반대로 푸코가 생명권력이라고 불렀던 것, 즉 자연적 생명이 관건이 되는 과정을 간과하는 듯이 보인다. 어쩌면 인간학적 동물의 신체(노예의 신체)는 관념론이 사유에 유산처럼 남긴 해결되지 못한 나머지remnant이며, 우리 시대의 철학의 아포리아는 동물성과 인간성 사이에 환원할 수 없이 그어져 있고 이 둘 사이에서 분할되어 있는 이 신체의 아포리아와 일치한다.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Now, several voyages of comparison made (between 1948 and l958) to the United States and the U.S.S.R. gave me the impression that if the Americans give the appearance of rich Sino-Soviets, it is because the Russians and the Chinese are only Americans who are still poor but are rapidly proceeding to get richer. I was led to conclude from this that the “American way of life” was the type of life specific to the post-historical period, the actual presence of the United States in the World prefiguring the “eternal present” future of all of humanity. Thus, Man's return to animality appeared no longer as a possibility that was yet to come, but as a certainty that was already present.

그런데 나는 (1948년에서 1958년 사이에) 미국과 소련을 여러 번 여행하고 비교해 본 결과, 미국인에게서 부유한 중국-소련의 모습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소련인이나 중국인이 아직은 가난하지만 급속도로 풍요로움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나는 이런 결론을 끌어냈다. 즉, ‘미국식 생활양식’은 포스트역사 시대의 고유한 생활양식이라는 것, 미국이 현실로서 세계에 현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인류전체의 ‘영원히 현존하는’ 미래를 예시하는 것이라는 결론. 따라서 인간이 동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현전하는 확실성으로서 나타났다.

It was following a recent voyage to Japan (1959) that I had a radical change of opinion on this point. There I was able to observe a Society that is one of a kind, because it alone has for almost three centuries experienced life at the “end of History” ― that is, in the absence of all civil or external war (following the liquidation of feudalism by the roturier Hideyoshi and the artificial isolation of the country conceived and realized by his noble successor Yiyeasu). Now, the existence of the Japanese nobles, who ceased to risk their lives (even in duel) and yet did not for that begin to work, was anything but animal.

내가 이에 대한 견해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최근(1959년) 일본을 여행한 후이다. 나는 거기서 유일무이한 사회를 볼 수 있었다. 왜 유일무이한가 하면, 일본이 (농민/평민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봉건제’가 청산되고, 그의 후계자이자 원래 무사/귀족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쇄국이 구상되어 실현된 후) 거의 3세기 동안 ‘역사의 종말’에서 삶을 경험했던 ― 즉 어떤 내전도 대외전쟁도 없는 생활을 경험한 유일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무사/귀족은 자신의 목숨을 (심지어 결투에서조차) 위험에 빠뜨리길 멈췄지만 그렇다고 노동을 하기 시작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들의 실존은 완전히 동물적이었다.

“Post-historical” Japanese civilization undertook way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American way.” No doubt, there were no longer in Japan any Religion, Morals, or Politics in the "European" or "historical" sense of these words. But snobbery in its pure form created disciplines negating the “natural” or “animal” given which in effectiveness far surpassed those that arose, in Japan or elsewhere, from “historical” Action ― that is, from warlike and revolutionary Fights or from forced Work. To be sure, the peaks (equalled nowhere else) of specifically Japanese snobbery ― the Noh Theater, the ceremony of tea, and the art of bouquets of flowers ― were and still remain the exclusive prerogative of the nobles and the rich. But in spite of persistent economic and political inequalities, all Japanese without exception are currently in a position to live according to totally formalized values ― that is, values completely empty of all “human” content in the “historical” sense. Thus, in the extreme, every Japanese is in principle capable of committing, from pure snobbery, a perfectly “gratuitous” suicide (the classical épée of the samurai can be replaced by an airplane or a torpedo),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the risk of life in a Fight waged for the sake of “historical” values that have social or political content. This seems to allow one to believe that the recently begun interaction between Japan and the Western World will finally lead not to a rebarbarization of the Japanese but to a “Japanization” of the Westerners (including the Russians).

‘포스트역사의’ 일본문명은 ‘미국식 생활양식’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일본에는 더 이상 ‘유럽적’ 혹은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도 도덕도 정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수 형태에서의 속물들(스노비즘)은 ‘자연적’이거나 ‘동물적인’ 소여(주어진 바)를 부정하는 규율을 창출했다. 이것은 효과라는 면에 있어서 일본이나 다른 곳에서 ‘역사적’ 행동을 통해 생겨났던 것, 즉 전쟁과 혁명적 투쟁 또는 강제노동에서 생겨났던 것을 훨씬 능가했다. 확실히 노가쿠(能樂)나 다도(茶道)나 꽃꽂이(華道) 등과 같은 일본 특유의 스노비즘의 정점(이에 필적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은 귀족과 부유층의 배타적 전유물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지속적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본인들은 예외 없이 완전히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즉 ‘역사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적’인 내용을 모두 상실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극단적(궁극적)으로 보면 모든 일본인은 순수한 스노비즘에 의해 원리적으로는 완전히 ‘아무 대가도 없는’ 자살을 행할 수 있다(사무라이의 고전적 칼épéee은 비행기나 어뢰로 바뀔 수 있다). 이런 자살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내용을 가진 ‘역사적’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수행되는 투쟁 속에서 무릅쓰게 되는 생명의 위험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일본과 서구 세계 사이에서 최근 시작된 상호교류는 결국 일본인의 재야만인화(일본인을 야만인으로 다시 간주하는 것)가 아니라 (러시아인들도 포함하여) 서구인들의 ‘일본인화’로 귀착될 것으로 보인다.

Now, since no animal can be a snob, every “Japanized” post-historical period would be specifically human. Hence there would be no “definitive annihilation of Man properly so-called,” as long as there were animals of the species Homo sapiens that could serve as the “natural” support for what is human in men. But, as I said in the above Note, an “animal that is in harmony with Nature or given Being” is a living being that is in no way human, To remain human, Man must remain a “Subject opposed to the Object” even if “Action negating the given and Error” disappears. This means that, while henceforth speaking in an adequate fashion of everything that is given to him, post-historical Man must continue to detach “form” from “content,” doing so no longer in order actively to transform the latter, but so that he may oppose himself as a pure “form” to himself and to others taken as “content” of any sort.

오늘날 그 어떤 동물도 스놉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일본인화된’ 포스트-역사적 시대는 분명히 인간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것의 ‘자연스런’ 뒷받침 역할을 했던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라는 동물들이 있는 한, “고유하게 그렇게 불리는 인간의 경정적인 무화”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위의 주석에서 말했듯이, “자연이나 주어진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동물”은 살아 있는 존재이되 결코 인간적이지는 않다. 인간적인 채로 머물러 있으려면, 인간은 설령 “소여(주어진 것)를 부정하는 행동과 오류”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대상과 대립된 주체”로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다음을 뜻한다.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 적합한 방식으로 말을 동안에도 포스트-역사적 인간은 ‘내용’으로부터 ‘형식’을 계속해서 떼어내야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내용’을 적극적으로 변형하는 게 아니라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대립시킬 것이며, 모든 종류의 ‘내용’으로서 받아들여진 타인에게 대립시켜야만 한다.

(영어판, 160~161쪽)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