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ltitude/Solitude

: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네그리, 포콕, 알튀세르

우지 켄다(王寺賢太, 사회사상사·프랑스문학)

현대사상, 20137월 특집호, 129-143頁(각주는 생략했다)



국가를 세우려면 혼자가 아니고서는 안 된다.”

마키아벨리

공산주의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알튀세르

 

시대착오적인 사상사가 : 구성적 권력vs 마키아벨리적 모멘트

구성적 권력 : 근대성의 대안들에 관한 논고(Le pouvoir constituant : Essai sur les alternatives de la modernité)(1992)의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뿌리 깊게 시대착오적인 사상가이다. 소련 붕괴의 이듬해, 역사의 종언이 운운되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의 한복판에서, 마키아벨리에서 레닌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정치사상사를 다시 말하고, 그것을 결코 끝나지 않는 혁명 사상의 계보로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지하듯이, 네그리는 이 책에서 구성된 권력에 대해 구성하는 권력편에 서서, 근대사에는 구성하는 권력과 그 주체인 다중이 편재한다고 주장한다. 네그리가 혁명을 어쩔 수 없이 수렴収束시키는 인과의 계열에 역공을 가하면서, 되풀이하여 혁명의 사전(事前)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구성적 권력의 사상사가에게 특유한 시대착오가 있다. 종종 과감한 단정이나 무리가 추론에 의해 이뤄지는 이 시대착오를 파악하고, 네그리의 작업이 지닌 결점을 들춰내는 일은 쉽다. 다만 그 때에는 역사가가 사후로부터, 객관적으로 역사를 말하려고 할수록 역사, 혹은 시간의 어떤 차원이 간과된다는 것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그리의 시대착오는 바로 그런 차원, 인간 주체가 그 안에서 존재하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역사시간의 창조적인 차원을 탈환하기 위한 방법이다. 1990년대,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이었던 구성적 권력의 사상사가가, 2000년대에 반-전지구화 운동의 사상가로 일약 시대의 인물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구성적 권력맑스를 넘어선 맑스(1978)와 스피노자론인 야생의 아노말리(1981)를 이어받아 네그리 개인의 작업의 집대성을 이루며, 2000년대에 연달아 간행된 마이클 하트와의 공저 제국3부작의 현대정치경제론을 예고하는 전회점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서 중심에 놓인 구성적 권력이나 다중이라는 개념이 스피노자에 관한 정치적 독해로부터 도출됐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구성적 권력에서 제국이후의 연결을 나타내는 것은 네그리/하트의 가장 논쟁적인 개념인 제국이며, 다중에서 <제국>의 정치적 재편성의 도식을 제공하는 일자소수자다수자로 구성된 폴리비오스적 혼합정체론이며, 공통체에서 제창되는 소유 없는 공화국공화국개념이다. 왜냐하면 구성적 권력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발단하고, 마키아벨리를 거쳐 근대 초기의 대서양 양안에 계승된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근대혁명사상의 계보로 고쳐 읽은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때 네그리에게 최대의 참조항은 마키아벨리적 모멘트(1976)J. G. A. 포콕이다. 근대 초기의 유럽과 미국에서, 공공선의 실현에 헌신하는 시민의 멸사봉공의 군사적·정치적 에토스 에서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보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추적하며, 공화국의 통일을 방어하는 시민의 ,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공화국의 통일을 위협하는 운명사이의 대립도식으로부터 역사주의의 생성을 묘사해낸 정치사상사가이다. 여기서 역사주의는 역사의 운동에 인간의 활동을 관여시키고, 역사 자체를 새로운 가치나 규범을 산출하는 것으로 그려내는 시도를 가리킨다.

실제로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에서, 포콕을 좇아, 16세기 피렌체의 마키아벨리로부터 청교도혁명기 잉글랜드의 해링턴을 거쳐, 미국독립혁명의 이데올로그들까지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따라간 후, 그것에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관한 사상사적 분석을 접목하고 있다. 포콕에 의한 고전적 공화주의 재고가 자연법론과 계약론의 계보를 중시하는 서구정치사상사에서 법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이의제기인 한, 이미 스피노자론에서 -법제주의를 선명하게 했던 네그리가 마키아벨리적 모멘트에서 큰 자극을 받은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원래 17세기 네덜란드의 공화주의자 스피노자의 정치적 구성 la constitution”의 논리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론에서 헌법제정권력 le pouvoir constituant”을 법학적인 틀로부터 뽑아내어, 정치체를 구성하는 다중의 힘으로서 위치시킨 후에, 네그리는 포콕에 의거하면서, 구성적 권력을 근대혁명사상의 계보에 부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히려 포콕과 네그리의 차이일 것이다. 그 차이는 미국독립선언혁명으로 책을 닫는 마키아벨리적 모멘트대서양적인 전망과 러시아 혁명을 시야에 넣은 구성적 권력대륙적인 전망을 대비하는 것만으로도 분명해진다. 그 차이는 아렌트의 혁명론이 말하는 정치혁명사회혁명의 계보의 차이이기도 하다. 원래 운명에 대한 의 되풀이되는 패배를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역사주의에 근거한 보수주의를 표방하게 되는 포콕과 의 에토스를 본성상 끝나지 않는 혁명의 잠재력에 결부시키는 네그리는 정치적 입장이 전적으로 다르다. 이하에서는 구성적 권력에서 전개되는 마키아벨리론에 초점을 맞추서 네그리가 얼마나 포콕을 뒤따르면서도 포콕과 갈라서는가를 밝히고 싶다. 이 두 사람에게 마키아벨리는 각각의 책 전체의 테마를 단숨에 제시하는 사상가이며, 그곳에서는 모두 시간과의 관계에서 의 정치학이 문제가 되는 이상, 네그리의 근대혁명 사상사의 특이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것보다 더 나은 소재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우리는 또 한 명, 네그리의 시대착오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던 어떤 철학자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1990, 네그리가 책임 편집자 중 한 명이던 잡지 전미래의 창간호에 게재된 마키아벨리의 고독 La solitude de Machiavel의 저자 루이 알튀세르이다. 아이러니한 공화주의의 역사가와, 고독 속에서 죽음의 침대에 있었던 맑스주의 철학자 사이에서, 바닥없이 낙관주의적으로도 비치는 다중 la multitude’의 사상가가 스스로 껴안으려고 한 고독을 분명히 밝히는 것 이것이야말로 본고의 목표이다.

 

변동의 정치학 : 정치이론가의 탄생

덕과 운명 : 마키아벨리적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의 구성적 권력의 마키아벨리론의 중심에는 군주론로마사논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놓여 있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마키아벨리 해석사에서의 큰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했다. 한편으로, “이탈리아적 전통을 이어받은 자는 마키아벨리즘책으로 유명한 군주론을 특권시하고, 이 책에서 획득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개념이 마키아벨리의 전체 저작을 지배한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이탈리아적 전통에는 데 산크티스(Francesco de Sanctis)부터 그람시를 거쳐 트론티까지 포함되어 있지만, 그 끄트머리에는 그람시를 토대로 하면서 군주론의 저작을 국민국가시작의 사상가로 위치시킨 알튀세르도 연이어 있다. 다른 한편,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소재로 공화국론을 전개하는 로마사논고를 중시한 영미의 연구자들은 이 책의 공화주의를 마키아멜리의 중심적 사상으로 평가하면서, 군주론을 이론적으로 애매한 상황적 산물로 간주한다. 이런 연구자들 중 최대 거물이 포콕이다. 즉 네그리에게 군주론로마사 논고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알튀세르와 포콕 사이에서 마키아벨리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에 다름없으며, 그 반대도 또한 참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네그리가 갑작스럽게 이 커다란 문제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일단 군주론이전,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 시절까지로 소급해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적·이론적 경력을 하나하나 추적해간다는 점이다. 게다가 네그리는 로마사 논고이후, 피렌체사를 필두로 하는 후기의 저작에 대해서도 논급하기 때문에, 이 마키아벨리론은 마치 피렌체의 정치사상가에 대한 응축된 이론적 전기(biography)의 양상을 띤다. 알튀세르에게서도 포콕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마키아벨리의 에 대한 이런 관심을 통해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처럼 우뚝 일어서고 부서지며, 재차 더욱 강고하게 일어서려고 하는 모습을 그려내려고 하는 것이다.

 

잰 걸음의 태양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표면을 이미 1494번이나 돌았네. / 그 이후, 서로 다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인들에게 문을 열었고, 야만인들에게 짓밟히는 고통을 겪었다네.

 

마키아벨리의 10년사(1504)에서 인용한 이 문장을 네그리는 자신의 마키아벨리론의 첫머리에 둔다. 1494년 프랑스군 침공에 직면해 용병으로 맞선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맥없이 패배했다는 것을 전하는 구절이다. 그것을 계기로 시작된 11차에 걸친 이탈리아 전쟁은 유럽에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립을 중심축으로 한 세력균형의 체계를 산출하고, 이탈리아의 공화국들로부터 알프스 북부에서 할거[거점을 두고 활동]한 군주정 국가로 결정적으로 패권을 이행시켰다. 이 사건이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과 신대륙발견(1492)과 더불어, 근대 유럽의 기점으로 지목된 것도 그 때문이다. 포콕은 이미,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지배가 일단 붕괴한 1494년부터 근대 공화주의 사상의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그리에게 이 날짜는 단순히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정치상황의 변화의 지표가 아니라 근대의 가장 근원적인 소여가 개시된 날짜이다. 그 주어진 이름이 바로 변동[변전] mutatio’이다. 10년사의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 이후에 변동의 시작을 돌이켜봤듯이, 네그리는 근대의 끝에서부터 근대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거기에서 변동을 찾아내고 있다.

다만, 마키아벨리는 결코 변동을 소여로서 찾아낸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미 외교관 시절의 제언에서, 그는 무력양식(良識)’의 종합에 정치적 변동을 관장하는 활동적 원리가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관찰의 대상이든 활동의 대상이든, 거기서는 변동이 주체에 대립하는 객체에 머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더 중요한 한 걸음은, 주객의 대립 이전의 차원에서 변동을 파악하고, 주체의 활동을 변동과 일치시키고, ‘변동그 자체를 통째로 주체화하는 곳에 있을 것이다. 네그리가 자연주의적 지평으로부터 역사적 구조로라고 부르는 이 이행과 더불어, “변동은 인간이 그 내부에서 활동하고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고 그렇게 구성된 현실을 돌파해서는 새로운 현실을 다시 구성하는 박동에 의해 획기화된 역동적인 과정이 된다. 피렌체에서, 혹은 신성 로마 제국이나 프랑스 왕국의 궁정에서, 역사적 회고를 감안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현실을 분석하고, 그 장래를 점쳤을 때, 마키아벨리는 이미 변동그 자체, ‘시간그 자체에 구성하는 권력이 내재한다는 입장을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키아벨리가 이 역사의 역동성을 제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긴 과정을 경과해야 했으며, ‘생명의 철학같은 역사주의로 마키아벨리의 정치가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긴장의 누적이며, 폭발의 기대이며, 기성 질서와 균형의 파탄으로 향하는 잠재력을 품고 있는 중층적 결정의 힘이 존재자 하에서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그런 중층적 결정의 힘 = 위로부터의 결정의 힘 la surdétermination”을 체현하는 군주의 정치기술을, 1502년부터 1504년에 걸쳐 체류한 체사레 보르자의 궁정에서 목격했다. 시간 속에서 비롯되고 변동하는 상황 속에서 호기(好機)를 붙잡고, 시간을 지배하기 위한 그 기술 , ‘운명에 맞서는 의 관찰과 더불어, 마키아벨리는 또한, 관습에 의한 것도 계약에 의한 것도 아니라 활동 그 자체에 입각하여 자기를 유지하는 새로운 주권의 개념을 품게 된다.

그러나 네그리가 마키아벨리에게 한층 더 중요한 전기(轉機)라고 생각하는 것은 1503년의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이었다. 그의 아버지교황 알렉상드르 6세 사후, 우유부단을 드러내고, 순식간에 상황이 그를 앞질러간 자신의 영웅의 모습과 더불어,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있어서의 의지주체적 기투의 중요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는 역사적 시간을 내면화하고, 인간적 시간에 통합하고, 공공연하게 드러난 잠재력을 특이한 것으로 하는 것이다.” 이후,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관찰자이기를 그만두고, 이탈리아의 종속상태를 타개하는 길을 물색한다. 정치이론가로서든, 스스로 활동의 주체로서,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본 잠재력을 제 것으로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권력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구성적 주체로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탐구는 1512, 스페인군의 이탈리아 침공에 뒤이어 피렌체의 공화적 정부가 붕괴하고 메디치가가 권력에 복귀하는 것과 더불어 훨씬 절박해졌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궁정에서 쫓겨나고, 투옥의 쓰라림과 조우한 이 위기적 상황 속에서 씨름했는데, 우선 공화국의 책』 ― 『로마사 논고』 ― 을 썼고, 이어서 투옥 이후, 공화국의 책을 중단하고 쓰게 된 군주론이었다, 이렇게 네그리는 단정한다. 이리하여 군주론객관적인 한계와 주관적인 절망의 특이성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지어진다. “마키아벨리의 고독이 우리의 시야에 부상하는 것이다.

 

구성적 원리의 고독 : 군주론

군주론을 논하는 데 있어서 네그리는 맨 처음에,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la principauté”가 폴리비오스 식의 정체 분류론에서 말하는 군주정귀족정도 아니고, 따라서 공화국의 책이 다루는 공화국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새로운 군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고찰은 변동을 위로부터 결정하는 역사적 주체”, 혹은 변동을 위로부터 결정하는 원리에 바쳐지고 있다. 네그리에게 군주론구성적 원리의 책이며, 정치체를 정치체로서 구성하는 기초조건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론적책인 것이다.

하기야 이 해석 자체가 반드시 네그리의 독자적인 것만은 아닐 터이다. ‘새로운 군주에 대한 논의를, 활동 그 자체에 의해 정당성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정치적 혁신자에 대한 고찰로 위치시키는 포콕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국민적 국가의 시작을 사고한 책으로 위치시키는 알튀세르도, 그다지 다른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렌트도 서양 근대에서 최초로 국가의 창설을 사고한 인물로 마키아벨리를 위치시켰다. 그러나 이 구성적 원리의 급진성을 평가하면서 네그리가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군주론에 내포된 아포리아이며, 실천적인 불능(不能)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불능을 지적할 때에, 네그리가 참조를 요구하는 것이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이다.

 

이 원리가 지닌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존재론적 깊이를 부정하려고 한다든가, 그 고독과 기투의 반전이 얼마나 강력한 삶의 원천을 나타내는가를 잊자는 것이 아니다[주는 여기에 붙는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혁신은 귀결의 공허 위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나 그 때문에 절망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실제,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원리는 여기에서 전복적이며, 전복적인 로 머문다. 그의 사고의 운동은 적대의 운동이지 경향의 운동이 아니며, 위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해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혹은 그 해결을 찾아내려고 해도 미리 그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서 마키아벨리의 고독과 기투의 반전은, 혹은 (훗날 출판된 마키아벨리와 우리에 입각해 말한다면) 실천적·이론적인 불능역능의 교착은, 그가 자기 스스로는 해결 불가능한 물음을 제기한 점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달성[성취]된 사실로서의 국가의 정당성을 묻는 근대의 모든 정치철학자들과 갈라서며, ‘고독속에서, “성취[달성]되어야 할 사실로서의 국가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현실적인 조건을 사고했기 때문에, 새로운 국가의 시작의 불가능성과 더불어, 시작에 있어서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효(実効)적인 힘을 폭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말투는 충분히 알고 있기에, 네그리는 이렇게 매우 알튀세르적인 반전에 그치려고 하지 않는다. ‘역능 = 잠재력 la puissance’다중 la multitude’의 사상가 네그리에게 알튀세르의 불능 l’impuissance’고독 la solitude’은 너무도 관념적으로 비쳤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때, 네그리의 유물론이 시간과의 관계에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군주론에는 전복의 운동만 있으며 경향의 운동이 결여되어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위기를 인식하면서 해결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구성적 원리가 시간의 울타리 바깥에 놓여 있으며, 마키아벨리의 고독이 무엇보다도 역사적 과정으로부터의 고립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알튀세르와 네그리의 관계와 관련된 한, 사태는 조금 복잡하다. ‘역능불능, 혹은 고독다중, 구성적 권력에 있어서도 또한, 서로를 뒷받침하면서, 끊임없이 반전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네그리에게서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네그리는 마키아벨리론의 말미에서 다시 알튀세르를 호출하고, 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성원을 보내게 되는데, 그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제 잠시 동안 네그리의 논의를 추적해야 한다.

일단 군주론의 한계를 시간으로부터의 고립, 역사적 과정으로부터의 고립에 견줘본 뒤에, 네그리는 이 책의 존재론적 깊이와 실천적인 불능의 교착을 더욱 파고들어 검토한다. 그때 네그리가 우선 주의하는 것은 구성적 원리와 군사력의 연결이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새로운 군주의 국가는 무엇보다도 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은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구성적 원리무장한 덕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마키아벨리에게서의 군사력 문제에 대해서 아렌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네그리는 그것을 기피해야 할 정치적 폭력의 행사 문제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그 배경에는, 시민은 스스로 무기를 취해 공화국을 방어하는 전사여야 한다는 주장에 고전적 공화주의의 한 가지 핵심을 인정한 포콕의 고찰이 똬리를 틀고 있음이 틀림없다. 실제로 포콕을 따라 말하면, 유럽의 군주정 국가가 국왕 상비군을 정비했던 시대에 시민의 민병조직에서 공화국의 자유의 요체를 본 마키아벨리의 관점으로, 근대주권국가에 의한 정당성 있는 폭력 행사의 독점”(베버)에 근본적인 이의를 들이는 현대적인 사정거리도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그리는 이 구성적 원리와 군사력의 연결에서 마키아벨리의 한계를 간파한다. 정말로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에게서도 군사력의 문제는 단순한 폭력행사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군사력은 정치체를 조직화하고, 그 구성원의 을 함양하므로 평상시에도 국가의 구성의 역동성을 체현하기 때문이다.새로운 군주에게 이 절대적인 원리인 이상, 군사력이 절대화된 것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의 점에 있다. 무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군주를 위한 것인가, 인민을 위한 것인가?” 군주론의 마키아벨리는 이 가장 긴요한 물음에 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 네그리는 민주정의 선택 그 자체의 포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는 더 나아가 군주론의 인식론적 한계도 지적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무장하고 덕이 높은 군주에게 구성적 원리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그 군주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거기에서는 분명히, 힘이 인식을 낳고, 인식이 힘을 낳는다는 직관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새로운 군주는 단순히 국가의 저자일 뿐 아니라 논리와 언어의, 혹은 윤리와 법률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다만, 체사레 보르자라고 생각되는 정치적 영웅을 모델로, 군주가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을 역설하는 데 머문다. 그리고 이 윤리적 호소는 구성적 원리의 존재론적 차원 파고 들어갈수록 강조되고 공회전하게 되는 것이다.

강렬한 군사주의와 극단적인 주관주의 네그리가 군주론의 한계로 보고 있는 것은 네그리 자신도 포함한 70년대의 좌익운동의 조류들을 생각나게도 하는 그런 전복으로의 과격한 경도이다. 구성적 원리의 운동은, 흡사 체사레 보르자가 순식간에 몰락했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장애에 부딪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 장애의 유래를 물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의 사고의 운동, 끊임없이 새롭게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려고 더 한층 군사력과 주관성에 박차를 걸고, “전방으로의 도주를 결행한다.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 하에서 실행되는 작전의 절대성 외에 기초를 갖지 않는 이 [구성적] 원리는 항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구성적 권력이란 모든 한계의 돌파이며, 결코 편히 쉬지 않는 의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그리는 이 구성적 원리전방으로의 도주에 불모의 과격주의의 귀결을 보고 그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전방으로의 도주에서 군주론의 중심적인 주제를 간파한다. ‘구성적 원리의 비극이라고도, ‘덕의 비극이라고도, ‘정치적인 것의 비극이라고도 불리는 주제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비극은 필연적이다.”구성적 원리가 자신의 활동에 의해,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하는 이상, 그 활동 자체는 창조되어야 할 가치의 직전에, 진위와 선악의 저편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그 활동은 항상 사후의 관점에서 판가름될 수밖에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성적 원리는 항상 우연적인 상황에서 사물의 실효적인 원리”(마키아벨리)에 직면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원리의 활동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활동 그 자체를 배반하고, 되풀이되는 활동에 대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네그리더러 말하게 하면, 군주론의 마키아벨리가, 다양한 상황을 열거하고, 지칠 줄 모르게 권모술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시도하면서, 항상 뜻대로는 안 되는 결과의 배신에 우롱당할 수밖에 없는, 이런 구성적 원리의 비극을 눈여겨봤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네그리의 비극에 대한 고찰은, 틀림없이 마키아벨리적 모멘트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포콕은 이미, 군주론의 주제가, 부단한 행위의 연속에 의해 자기 정통화를 꾀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닌 정치적 혁신자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항상 결과의 타율 행위의 결과가 바로 그 행위의 의도를 배반한다는 것 에 의해 아이러니컬하게 배반당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님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포콕에게 있어서 거기에, ‘운명을 앞에 둔 의 불행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 불행의 인식이야말로 정치질서의 정통화는 단기적인 혁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기적인 지속 속에서 관용에 의해 도모되는 것에 다름없다고 하는, 포콕의 역사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입장의 배경에 똬리를 틀고 있다. 아무래도 위대한 역사가에 어울리는 사후의 사상이다.

포콕과 더불어 구성적 원리의 위기를 눈여겨보면서, 네그리는 이 역사가의 비관주의를 단호하게 물리치려고 한다. 정말이지, 군주론의 말미에서 이나 자유의지에 의한 운명의 지배의 가능성이 역설되고, 도래할 새로운 군주에 이탈리아 재건의 꿈이 맡겨져 있다는 것을 보고, 네그리는 거기에서 마키아벨리의 막다른 골목을 볼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은 을 단념하고, ‘구성적 원리를 포기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네그리에게 있어서, 군주론에서는 구성적 원리절대성이 철저하게 추구되지 않고 끝나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군사력이나 주관의 절대화 등에는 전혀 없다. 그와 반대로, 절대화가 불철저했다는 것, 그리고 운명에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구성적 원리가 시간의 울타리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이야말로 문제이다. 이리하여 군주론에서 로마사 논고로의 행적이, ‘구성적 원리의 심화의 과정으로서 독해된다. 마키아벨리는 고독의 사상가로부터 다중의 사상가로, 그리고 스피노자보다 훨씬 선구적으로 절대적 통치로서의 민주정의 사상가로 변모하는 것이다.

 

다중의 분리로부터 민주정의 구성으로 : 로마사논고

다만 네그리의 군주론로마사논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단순한 직선적 도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네그리에게서 군주론의 사정거리는, 로마사논고와의 상호관계에 놓여서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로마사논고의 사정거리도, 군주론이 가져온 질적인 비약없이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콕은 로마사논고에서의 로마를 여러 공화국들 중의 새로운 군주에 빗댔다. 네그리는 그 비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1512년부터 1513년에 쓴 군주론공화국의 책, 군주론이전에 기획되고, 일단 중단된 후에 1515년부터 1517년에 완성한 로마사논고의 생성과정 속에 다시 놓는 것이다.

당장 네그리는 로마사에서 소재를 취하는 로마사논고의 정치적 고찰이 고대를 모델로 하는 온갖 사고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의 서론에서 얘기되는 고대인의 범례는 인간 본성이나 정념에 대한 보편적인 사정거리를 가진 고찰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며, 마키아벨리는 이 정념론을 매개로, 역사 속에 주체를 우뚝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로마사논고에서는, 경험론적인 동시에 규범적인 군주론의 인식론적 한계가 처음부터 돌파되는 것이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로마사논고1편에서 제시되는 마키아벨리의 정체론이, 폴리비오스적인 도식으로부터 이탈한다는 지적이다. 정말이지, 거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분류에 기초하여, 군주정에서 폭적, 폭정에서 귀족정과 과두정, 나아가 민주정과 무정부상태로의 순환이 얘기되고 있다. 또한 그 정체의 부패의 순환에 맞서는 최선의 정체로서, 로마공화국의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혼합정체의 우위조차 역설될 것이다. 그러나 네그리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러나 [혼합정체의 분석에 있어서] 민주정 원리의 도입은 전적으로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바로 혁명이다. 왜냐하면 그 헌정은 혼합적인 한에서, 가장 완성된 공화국을 형성했다. 이 완성에 이른 것은 인민과 원로원의 분열 la désunion에 의해서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열로부터 소요로 가득 찬 공화국이 생기고, 소요로부터 공화국에서의 자유를 방어하는 좋은 질서가 생긴다. 이리하여 로마사논고의 고명한 테제가 민주정의 원리의 도입과 결부되는 것이다. 다만 그때, 일반적으로는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균형에 기초한 헌정론의 틀을 돌파할 때까지 극화(劇化)시킨다. 그 결과, ‘la constitution’은 이제 헌정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성의 문제로서 논해진다.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그 돌파를 수행하는 것이, 로마사논고117·18장이었다. “부패한 인민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에는, 자유를 계속 시키는 것은 곤란하다고 역설한 뒤, 또한 부패한 도시국가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정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보존할 수 있는가, 또한 자유로운 정체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에는 그것을 도입할 수 있는가라고 마키아벨리가 묻는 대목이다. 네그리는 거기에서, 폴리비오스적인 순환사관, 정체의 부패아 자유의 상실을 필연으로 보는 역사가의 비관주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혐오를 읽어낸다.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공화국의 책을 중단하고, 군주론에 씨름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군주론은 이리하여 폴리비오스적인 비관주의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넘어서고, ‘부패와 자유의 상실을 필연적인 것으로 하는 순환사관을 거부하는 책으로서 재파악된다. 그때 동시에, ‘시간의 절단군주에 의한 위로부터의 결정이라는 군주론의 주제가, 역사 속의 주체의 활동의 계기를 강조하고, 그 주체의 구성 그 자체에 정치적 활동의 중심적 과제를 보는 입장과 결부되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군주론구성적 원리는 인민과 원로원 사이에서 발견된 분열을 극화하고,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균형론의 틀로부터 다수자=다중을 분리하여, ‘인민의 창설을 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던 구성적 원리가 인민이라는 신체를 획득하고, 민주정을 창조하기 위한 구성적 권력으로서 재정의된다. 그것과 더불어 구성적 권력의 주체는 인민 그 자체, 혹은 인민을 구성하려고 하는 다중그 자체가 된다. ‘군주는 이 구성의 원리=시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사논고1편에 민주정으로의 지향을 확인한 후, 네그리는 2편의 을 둘러싼 고찰에 대해, 거기에서는 다중이야말로 의 집단적 주체로서 위치지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은 더 이상 단순히 운명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끊임없이 대치되는 장애를, ‘운명에 기대면서 극복하는 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덕은 산 노동이며, 생명에 대립하여 견고한 것으로 된 전통이나 권력을 조금씩 파괴할 수 있다.”, 혹은 구성적 권력다중이라는 집단적 주체와 더불어, 역사의 과정을 통해 현실화하는 경향의 운동, 혹은 자기 결정을 요구하는 투쟁이 된다. 여기에는 네그리에 의한 고전적 공화주의의 급진화가, 맑스를 넘어선 맑스의 도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혼합정체에 기초한 공화국의 통치체제가, 교환가치로 환원된 죽은 노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사이클에 비유되며, ‘다중이 영위하는 공동의 삶 그 자체가, 삶의 재생산을 자본의 재생산과정으로부터 점차 분리시키는 산 노동고유의 생산 사이클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구성적 권력, 민주정구성, 로마사논고3편의 과제로서 부상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과제는, “르네상스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어디까지나 근대적인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유를 가져다준 르네상스에 편승하면서, 특히 = 운명 la foritune’의 축적이 가져다준 나쁜 귀결에 맞서, ‘자유의 원리로 회귀하면서, ‘의 주체의 구성울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때, 네그리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군사의 조직화를 통한 다중의 집단적 주체로서의 구성이다. 이제 무장한 덕은 공화국 내부의 조직화와 의 함양이라는 문제계에 명확하게 결부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네그리는 이미 민주정은 강하게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명제를 거론하면서, 이 민주정에서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을 갖고서 조국의 방어에 종사하는 인민 그 자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때, 인민의 구성 요건, 민주정적인 자유의 구성요건으로 간주되는 것이 평등이다. “다중이 부패하지 않는 도시국가에서는 모든 것을 기능시키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평등이 지배하는 도시국가에서는 군주국을 만들 수는 없으며, 평등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공화국을 만들 수 없다.” 네그리에게 있어서는 이 고찰이야말로, 마키아벨리를 민주정의 예언자로 위치시키는 것을 허용한 것이었다.

그 선행하는 논의를 계승하면서,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한 가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로마사논고3편에서의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고대 그리스-로마 이후의 공화주의의 판에 박힌 정형화로부터 분리되고, ‘의 축적의 해악에 맞서 평등을 유지하고, 시민의 을 함양하고, 민주적인 공화국의 구성으로 향하는 정치=경제학의 효시로 위치지어진다. 네그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가난의 정치=경제학이, 마키아벨리의 군사적 고찰을 정치적인 정념론에 접속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난의 옹호는 공화국에서의 군사력 유지의 요구에 뿌리를 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가난이 가져다주는 은 자유를 요구하는 정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정념론에 정치적 구성에 대한 고찰의 요체를 간파했던 자신의 스피노자론과 평행하여, 정념의 정치에 대한 고찰에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권력론의 정점을 찾아낸다. 거기서 마키아벨리는 정념을 억제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을 현실의 구축, 새로운 현실의 구축을 향해 해방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해방된 정념은 공화국 속에 소요를 산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념은 욕망사랑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 한,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 정념적 주체인 다중, 그 자체 유동적이고 시간적인 존재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타성[관성]이나 객관성과는 무관하게, 공화국을 위협하는 부패와 자유의 상실에, 부단한 재창설, 부단한 개혁을 갖고 맞설 수도 있다. ‘의 주체를 집단적인 것으로 하고, 그 집단적 주체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념적인 양상에 있어서 파악함으로써, 마키아벨리는 시간의 주체화를, 즉 민주적인 자기 통치의 과정으로서의 역사적 과정의 절대화를 철저하게 추진해나간다. 네그리에 따르면,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로마사논고117~18장에서 환기된 질적 비약의 도달점인 것이다.

위와 같은 분석을, 또 다시 포콕과 맞댈 수 있을 것이다. 포콕도 로마사논고순환을 피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완전히 균형을 이룬 정체를 어떻게 수립하는가라는 폴리비오스적인 문제설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지적한 뒤, 마키아벨리가 새로운 군주를 포함한 일체의 초월적인 차원의 개입 없이, 단지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정치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논했기 때문이다. 포콕에게서는, 그런 인식이야말로 군주론이상으로 파괴적인 로마사논고의 핵심에 있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포콕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관심은, 제국적 확대에 의해 일정한 기간 동안 자기를 유지하는 것에 성공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유를 상실하게 된 로마공화국의 역사의 변천을, 그 특이한 헌정의 ()균형에 기초한 것으로서 분석하는 데 있으며, 원로원과 인민 사이의 분열도 군사-경제-정념-정치를 잇는 론의 분석도 이 점, 포콕의 분석은 분명히 네그리를 선취하고 있는데 그 헌정론·역사론의 틀을 흔드는 것이 아니다. 포콕이 집단적인 역사과정에 정치질서를 창조하고, 정통화하는 힘을 인정하더라도, 그 힘은 최종적으로 과거의 역사적 순환의 설명원리를 제공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포콕은 로마사논고에 공화주의적인 현양을 간파하기는커녕 오히려 로마의 길에는 최종적인 쇠퇴에 대한 보증은 없다. 그러나 예상할 수 있는 근미래에 있어서는, 로마의 길은 더 현명하며, 더 영광으로 가득 찬 길이다라는 아이러니한 인식을 간파하게 됐다.

로마사논고론에서도 또한, 네그리가, 최종적으로 운명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의 불행을 내다보는 포콕의 고전적 공화주의론을 전도하고, 그 틀을 돌파하고, ‘구성적 권력에까지 철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네그리에게서, 마키아벨리는 결단코 역사철학자가 아니며, 정치적인 이론가=활동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네그리의 포콕에 대한 이런 관계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폴리비오스적인 균형론으로부터의 다중의 분리에 로마사논고의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을 인정한 네그리는, 동시에 그 마키아벨리의 논의가, 그람시가 말하듯이 민주적 결정의 주체형성으로 향하는지, 포콕이 보듯이 간신히 균형론의 틀 안에서의 다수자의 역할의 강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는 애매하다고 일부러 주석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유일한 해결의 길은 이런 애매함을 불식하는 것이 아니라 극화시키는 것이다.” 애매함의 극화는 단순히 공화주의적인 다수자=다중의 역할의 강조를 자의적으로 민주정의 구성으로 고쳐 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마, 고전적인 공화주의의 틀로부터 다중분리하고, 그 정치적 주체화를 도모하려고 하는 네그리의 시도에 내재하는 애매함이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가 그 애매함의 이론적·실천적인 사정거리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를 겨냥한 고찰이다. 그리고 포콕도 알튀세르도 논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 저작의 독해를 통해서, 네그리는 다시 이 두 명의 선행자와 교착하게 된다.

 

다중과 고독 : 피렌체사

네그리는 이 피렌체사(1525-1527 완성), 군주론로마사논고를 거쳐 완전한 표현을 얻은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의 책으로 위치시킨다.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의 근간에는, ‘사물의 질서구성적 권력에 의해 구성된 산물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으며, 그 인식은, 이미 본 듯한 시간의 주체화, 역사의 주체화의 귀결에 다름 아니다. 마키아벨 리가 정치적인 이론가=활동가라고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가 실천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인식하고, 그 인식에 의해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열고, 인식과 실천의 일치를 체현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더 나아가, 이런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역사유물론이라고 바꿔 말한다. 로마나 아테네 이상으로 다수의 분열을 품고 있었던 피렌체의 공화국이, 바로 이 분열 그 자체를 동력으로서 발전을 이룩해왔다는 것을 강조할 때, 마키아벨리는 계급투쟁에 역사의 동력을 보는, 맑스적인 인식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피렌체사의 해석에 있어서, 네그리는 다시금, 이 책의 구성 그 자체에 들어 있는 균열에 눈길을 머문다. 그 서문도 증언하고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당초 이 역사서를 1434년의 코지모 디 메디치의 개선(凱旋)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에서의 메디치가 지배의 획기(劃期) 에서부터 얘기했는데, 그 당초의 예정을 변경하고, 1434년까지의 피렌체사 서술에 몰두하게 됐다는 것이다. 피렌체사는 그것이 구성된후의 모습에 거스르며, “구성하는마키아벨리의 사고의 운동을 좇아 재독해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네그리는 우선 피렌체사후반부의 독해에 착수한다. 처음에 다뤄지는 것은, 이 후반부의 첫머리, 51장의 첫 구절이다. 마키아벨리는 거기에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국가의 끊임없는 요동을,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사물의 끊임없는 동요에 빗대고, 그것을 덕의 성쇠의 순환과도 결부시켰다. 거기에서 폴리비오스적이라기보다는 -소크라테스적냄새를 맡는 네그리는 이 자연주의비관주의피렌체사의 출발점이 있다고 단정한다. 로마사논고에서 폴리비오스적인 순환사관으로부터 벗어나 다중분리구성으로 향했듯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도 또한, 이 회귀하는 비관주의내다보면서 이로부터 몸을 떼어내고 역사유물론의 정교화로 향하는 것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피렌체사후반부의 서두에는 마키아벨리의 자연주의, 의뢰주이기도 한 메디치가에 대한 예찬이 현저하게 간파된다. 서술이 기본적으로 연대기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연주의와 메디치가 예찬은 뒤로 갈수록 사라지고, 정치분석은 보다 생동감을 띠게 된다. 7편의 로렌초 디 메디치의 시대의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균형의 분석에는, 마키아벨리의 중요한 전기(轉機)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8편에서의 파치(Pazzi)의 음모의 분석에서는, 이미 유물론적이고 근대적인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 뚜렷하게 간파된다고 말한다. 거기에서 마키아벨리의 서술의 대상이 된 것은, 메디치가에 맞선 귀족집단의 반란과 메디치가에 가담한 민중봉기의 대결이었다. 거기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두 개의 구성적 권력이 격돌하는 것이며, 그 격돌을 배경으로서, “엄숙하고도 쾌락적이기도 하며, 두 명의 상반되는 인간이 있을 수 없는 결합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인간, 로렌초 디 메디치의 정치적 이 분석된다 네그리는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피렌체사후반부의 운동을 소묘하면서, 네그리는 전반부로 되돌아가며, 특히 코지모 디 메디치의 개선(凱旋)까지의 15세기의 피렌체 정치사의 분석에 입각해, 마키아벨리의 역사유물론의 주요한 논점을 지적한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15세기 중반까지, 확대된 교황권 하에서 이탈리아는 분열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군주들은 나태 속에서 비열한 무기사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침체하는 이 중세적 시간을 끊어내고, 제도의 변동을 초래한 것이,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계급투쟁의 전개였다. 실제로 피렌체사3권의 치옴피의 난(Tumulto dei Ciompi)의 서술에는, 모직물업이 번창한 당시의 피렌체의 계급분석에 의거하여, 마키아벨리가 부유민영세민을 두 개의 정치적 주체로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네그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이런 유물론적인 계급분석 이상으로,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진 마키아벨리의 정치-경제적 진단이다. , “피렌체는 혼합정체를 획득할 수 없다.” 근대적인 시장의 발전은, 계급투쟁의 심화가 혼합정체적인 균형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고, 그저 부유자의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뿐이었다. 떨쳐 일어난 영세민은 무장 해제되어버린 한에서, 더 이상 급진적인 민주정도 실현의 가능성을 단념해버렸다. 바로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양식적인 이데올로기의 중간적인 길을 따라 좋은 법률과 좋은 질서를 대신해 유일자의 덕에 호소하고, 메디치가 지배의 현황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소수자인 귀족의 패배와, ‘다수자=다중인 인민의 주변화를 통해 메디치가의 발흥이 묘사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로렌체 디 메디치가 체현하는 있을 수 없는 결합이 전망된다. 네그리는 바로 여기에 마키아벨리의 사상의 핵심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리하여 마키아벨리의 사상의 중심적 모멘트에 도달했다. 이상이 현실화되기 위한 조건이 갖춰지고, 덕이 역사가 된 경우라도, 종합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발견에 말이다. 이상이 조금이라도 현실화되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결합으로서일 뿐이며, 예외적인 경우로서 시간과 더불어 곧바로 소진한다. 단절은 사실상 종합보다도 훨씬 더 현실적인 것이다. 구성적 권력이 실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쟁란, 봉기, 군주 등처럼 잠깐 동안의 일일 뿐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마키아벨리의 역사유물론은 결코 역사적 변증법으로는 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종합과 지양의 모멘트를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단절이야말로 구성적인 것이다.

 

군주론에서 구성적 원리로서의 을 발견하고, 구성적 원리의 위기에 직면한 후, 로마사논고에서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 절대적인 구성적 과정을 파악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는 이 구성적 과정의 원동력으로서 계급투쟁을 찾아냈다. 그러나 구성적 권력의 탐구에 바쳐진 이 행로는, 피렌체사에서 결국 실패에 직면한다. 마키아벨리에 있어서는, ‘계급투쟁이 종합되거나 지양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중이 담지하는 구성적 권력 = 구성하는 권력구성된 권력이 된 순간에, ‘구성적 권력으로부터 이반(離反)하기 때문이다. ‘덕의 비극이 회귀한다. 실제로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담론이 근대정치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저 그가 처음으로 의지와 미래에 대한 기획으로서 잠재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특히, 의지와 결과, 덕과 운명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문제적인 것으로서 삼았기 때문인 것이다.” ‘단절종합보다도 현실적인 한에서, 모든 종합은 모름지기 일시적인 것, 사이비 융화로만 있을 수 있다. 주체화를 요구하는 다중의 운동은, 최종적으로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네그리에게서는, 이 미완성이야말로, 단절이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 지양이 있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복음이다. 그것은 계급투쟁이 끝날 수 없다는 것, 다중의 주체화의 과정이 열려 있는 것, 비판적인 과정으로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에서 포콕에 대한 네그리의 애매한 가까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네그리는 포콕처럼 구성적 과정의 중핵에 있는 단절을 헌정론의 틀 속에 가두고, 단절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된 공화국의 성쇠를 관조하며, ‘덕의 비극을 비관주의적으로 확인하며 끝나지는 않는다. 네그리에게서 계급투쟁은 어디까지나 다중에 의해 담지되는 주체적인 투쟁이며, ‘계급투쟁이야말로 헌정을 포함한 모든 제도의 근간에 있다. 그렇지만 단절, ‘한 명·소수자·다수자사이의 균형론의 테두리 안에 집어넣은 포콕이, 네그리가 고전적 공화주의를 계급투쟁의 중심에 있어서 재해석할 때의 중요한 참조항이 된다는 것도 의심스럽지 않다. 포콕은 균형의 관념에 의거하기 때문에, 헌정의 중심에 파고든 단절그 자체를 소거하는 것이 아니며, 바로 그렇기에, 공화국의 질서가 항상 허약한 균형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공화국의 유지를 위해서는 시민이 항상 직접적으로 헌정의 유지를 담지하는 이 높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 그렇지만 그 의 활동은, 뜻대로 되지 않는 귀결에 농락당하고, ‘운명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 인식 위에 서서 보수주의를 선택하는 포콕에게, 네그리는 단호하게 등을 돌린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회귀하는 비관주의,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권력의 탐구의 배후에 항상 들러붙어 있었던 만큼, 포콕은 네그리에게 있어서 친근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네그리는 계속해서 말한다. 단절치유하기 어려움, 어이없게도 구성적 권력의 비판적 권능의 끝이 없음을 보려고 하는 낙관주의를, 마키아벨리는 반드시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다. “구성적인 잠재력의 닫혀 있음은, 그에게 있어서는 다중의 힘과 그 기획의 내재적인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잠재력에 대립하는 장애로부터, 즉 지금 여기서 다중이 주체가 되는 것의 무능력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정치적 기투에 실패나 패배자였다. 다중의 주체화, 민주정의 구성을 향한 모든 탐구는, 결국 마키아벨리를 자신의 이상의 실현을 방해하는 객관적 현실에 직면하게 했을 뿐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어디까지나 고독했던 것이다. ,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그 고독 속에서도, 결코 구성적 권력의 사상을 손에서 떼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의 패배를 웃음과 더불어 받아들이고, 연애의 욕망의 놀이를 통해 개개의 주체에게 숨겨져 있는 힘을 응시하는 희극작품도, 주권을 법적인 정통화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시민의 군사로의 참여에 의해 계속 구성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전술론(Dell’arte della guerra), 혹은 또한 구성적 권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불가결한 적합적 주체의 신화적 이미지를 제출하는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La vita di Castruccio Castracani da Lucca), 마키아벨리의 불굴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그 사정은, 1527, 스페인군의 이탈리아 침공에 뒤이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개혁되지 못하고 종언한 것을 지켜본 뒤에도 변함이 없다. 말년의 사신(私信)모든 것은 멸할 것이다라는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그가 결코 쾌활함도 부드러움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삶을 그 종국까지 추적하면서,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의 마키아벨리론의 말미에서, 다시금 마키아벨리의 고독의 알튀세르에게 인사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근대의 어떤 작가가 말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여느 때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근대 절대주의 국가의 사상가도, 구성을 요구하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도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원리와 민주정의 모든 조건의 부재의 이론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재, 이 공허로부터, 마키아벨리는 문자 그대로 주체의 욕망을 탈취하고, 그것을 프로그램으로서 구성한다. 마키아벨리에게서 구성적 권력은 그런 것이었다.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마키아벨리는 절대주의의 사상가도, 구성을 향하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도 아니며, 원리와 민주정의, 달성[성취]되어야 할 사실로서의 새로운 국가를 실현하는 조건의 부재의 이론가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뛰어난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였던 것이다 단절치유하기 어려움이야말로 구성적 권력을 끝이 없는 운동을 향해 휘몰아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우리로서는 이 논의에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네그리에게서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조건의 부재야말로, 주체의 욕망을 새로운 정치적 구성을 향해 활기를 북돋는다. 여기서 네그리는, 알튀세르에 대해, 포콕에 대해 행했던 것과 완전히 닮은 전도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 『구성적 권력집필 당시의 네그리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사후 간행된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의 독자는, 이것과 똑같은 전도를 알튀세르 자신이 수행했음을 알고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일련의 마키아벨리론에서, 마키아벨리의 실천적인 불능과 이론적인 역능의 반전에 멈춰 섰던 알튀세르는, 그의 우연성의 유물론에 대한 논고에서는, “성취[달성]해야 할 사실로서의 새로운 국가건설의 조건의 부재를 인식한 마키아벨리야말로 성취[달성]된 사실로서의 기존의 국가의 근간에 있는 조건의 부재혹은 우연성을 폭로하는 것이며, 조건의 부재그 자체 없이 우연성의 필연성의 인식에 의해, 항상 머물러 있는/그치고 있는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객관적 조건의 부재로부터 주체의 욕망으로 향하는 네그리와, 그 동일한 조건의 부재를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우연성에서 찾아내는 알튀세르의 차이는 있더라도, 네그리에 의한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의 전도는, 이 알지 못했던 알튀세르 자신에 의한 알튀세르의 전도에 정확하게 선행하며, 그것을 정확하게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의 구절에서 네그리의 관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더 이상 구성의 정치적 존재론도, 구성과정으로서의 역사도 아니다. 그런 다중구성적 권력이 전개되는 장소 바로 앞에서, ‘다중구성적 권력에 대한 사색을 가다듬은 마키아벨리 그 사람의 고독에야말로, 네그리는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정치적 기투에 실패하고, 그 기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의 부재에 직면하면서도 여전히, 거기에서 새로운 욕망의 주체를 찾아내려는 주체의 고독이다. 그런 고독 la solitude’한 주체야말로 다중 la multitude’의 주체화를 요구하는 모든 이론적=정치적 활동의 출발점에 있다. 그런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또한, 네그리 자신의 고독일 것이다. 사실 네그리는 다시금 알튀세르와 함께 이렇게 말한다. “마키아벨리를 읽을 때, 우리는 우리를 잊은 듯 그에게 사로잡힌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뭔가 억압된 것에 대한 친근감, 저 기묘한 친근감이다.” 마키아벨리가 억압된 사상가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은, 바로 그가 정치적인 것의 존재의 근간에, ‘조건의 부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포콕도, 알튀세르도, 그리고 네그리도 또한, 그 억압될 사상가의 인식에 주목한다. “마키아벨리, 모든 억압을 넘어서 정치를 사고하려고 하는 자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존재론의 지평의 이름인 것이며, 바로 그 지평에서, 네그리는 포콕이나 알튀세르와 함께, 정치의 비극과 동시에 그 가능성이, 혹은 정치의 가능성과 더불어 그 비극이 한꺼번에 개시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정치적 양가성을 둘러싼 교착과 반전에 이것 이상으로 계속 구애되는 것은,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을 것이다. 네그리는 마키아벨리의 뒤를 쫓아, ‘고독에서 다중으로의 길을 쾌활하게 밟고 나선다. 바닥없이 쾌활한 낙관주의 끝에, 끝도 없는 계급투쟁의 장소가 열려 있을 것이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지금 알튀세르를 열다

アルチュセールを

마토바 아키히로(的場昭弘)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정황200312월호


지금 알튀세르를 열다 - 정황 2003년 1-2월호.pdf


 

1. 알튀세르 재부상의 의미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맑스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혁신했다는 점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습니다만, 데리다가 맑스의 유령들을 냈을 무렵부터, 기존의 맑스 연구와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7, 8년 전에 갑자기 재부상하게 됐습니다. 데리다를 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의 문맥에서 맑스가 다시인기를 끌게 됐는데요, 그 열쇠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알튀세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리다는 정치와 우정에서 자신의 탈구축적인 사상의 근원이 알튀세르에 있다고 말했으며, 알튀세르와 자신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데리다 이외의 현대사상가들도 반드시 어디선가에서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런 상황에서 맑스의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등의 논의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마토바 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알튀세르가 실제로(actual) 활약했던 당시, 맑스 프로파겐더(propaganda)를 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때의 수용되는 방식이란, 주로 데리다를 경유해 수용되고 있는 현재의 방식과는 사뭇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그런 간극에 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마토바 : 맑스를 위하여에는 헤겔 신화”(mythe)라는 흥미로운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맑스 연구자의 대부분은, 맑스가 헤겔을 열심히 읽고, 헤겔의 지평에서 헤겔을 넘어서고, 또한 포이어바흐를 넘어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이라는 전제에 서 있습니다만, 이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헤겔적이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알튀세르가 다른 논자를 비판할 때에도 볼 수 있습니다만, 맑스가 헤겔의 논리에 올라타 있다고 한다면, 왜 헤겔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관념론인 헤겔을 물구나무 세워서, 그 방법론만을 받아들여 현실적인 문제를 추구한다고 해서는 헤겔을 넘어선 것이 되지 않는다. 헤겔을 넘어선다는 것은 변증법을 포함한 헤겔의 이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맑스가 헤겔주의자였다면, 맑스가 헤겔의 방법론을 넘어선 논의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맑스는 사실상 헤겔의 방법론을 수용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문제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헤겔을 외부로부터 붕괴시키는 형태로 넘어섰다. 그것이 맑스의 새로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포이어바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맑스는 포이어바흐주의자가 아니라, 포이어바흐를 넘어섰다.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어 갈 때에는 이런 형태 밖에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맑스 연구자에게 헤겔 신화란 헤겔주의자 맑스의 신화이며, “포이어바흐 신화란 포이어바흐주의자 맑스의 신화입니다만, 이런 알튀세르적 관점에서는 우선 맑스에게서의 신화를 얘기하는 접점이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맑스에 대한 알튀세르의 연구 방법은 원래는 몽테스키외 연구의 방법에서 시작됩니다. 우선 왜 몽테스키외는 위대한가?”라고 묻습니다. 알튀세르에게는 문제틀(Problématiqu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만, “질문을 어떤 형태로 내는 것인가?”입니다. 알튀세르의 경우 그 패턴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을 말할 때, 그 인물이 그 시대에 얼마나 뛰어나고 그 뛰어난 방식의 패턴으로서 그 시대에 있어서 그 시대의 지평을 열어젖힌 인물이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몽테스키외가 위대했느냐 하면, 몽테스키외는 그의 시대에 일반적으로 말해졌던 법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제안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시대까지의 법은, 자연법 체계이든 무엇이든, 결국 권력자 쪽이 준 명령이나 도덕적 체계를 법이라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몽테스키외는 그런 명령으로서의 도덕 체계를 수행하기 위한 법을 산산조각 내어 분해하고, 그것과는 관계없는 일반적인 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몽테스키외는 세계 각지의 법을 분석했다. 중국, 독일 등에서도 각각의 법체계는 일반적인 법이 아니라 개별적인 법이었다. 그것은 권력자가 요구한 개별 도덕moral을 법체계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넘어서는 법체계를 몽테스키외 나름의 문제틀로서 내놨다. 이 문제야말로 새로운 지평으로, 법이 관습과 권력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틀에 의해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 몽테스키외의 위대함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의 것을 마키아벨리에 관해서도, 프로이트에 관해서도, 레닌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고 알튀세르는 주장하는데요,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분석은 알기 쉽다. 어떤 인물을 분석할 때 그 인물이 어떤 문제설정을 했는지, 그 문제설정이 새롭다면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게 되는 것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문제를 내는 그 제기방식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알튀세르 책의 번역은 맑스를 위하여가 인문서원(人文書院)에서 1968, 『『자본을 읽자가 합동출판(合同出版)에서 1974년에 출판됐는데요, 그때 우리가 문제 삼은 말은 인식론적 단절 coupure épistémologique”입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수고45년부터 46년에 걸친 독일 이데올로기사이에는 단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무렵의 우리는 이 단절을 지금 말하는 것처럼 문제틀problematique로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제설정으로서 맑스는 문제를 냈다. 그 무렵 우리가 문제 삼았던 것은 문제를 낸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했다”, 45년 이후 맑스의 방법은 전부 바뀐 것이며, 거기에 이미 해결이 있다고 파악했습니다. 그렇게 파악했기에, 우리 맑스 연구자들 가운데 알튀세르의 위치는, 마침 그 무렵의 히로마츠 와타루 씨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만, “소외론에서 물상화론으로인지, 혹은 인식론적 단절인지는 별도로 하고, 단절 문제를 해결한 인물로서였다. , 맑스는 헤겔적 물구나무서기를 극복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재 문제인 것은, 앞서도 얘기했듯이 알튀세르가 스케일이 꽤 크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입니다. 그 제기방식에 물음이 있었지만, 아마 그 당시의 우리는 그런 물음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나카마사 : “인식론적 단절의 의의가 소외론과 물상화론의 상관관계와 엮여서 이해되고, “문제계를 찾아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죠. “현대사상에 있어서는, 곧바로 대답을 내는 이론은 오히려 수상쩍어 보이며, 오히려 문제계를 찾아내는 것이 [높게] 평가받네요. 히로마츠 와타루 씨도 소외론에서 물상화론이라는 식으로, 맑스의 철학에서의 변화를 일종의 발전형으로 파악했습니다만, 반면 알튀세르는 단절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나 일본에서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은 단절자체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를 위한 단절이라고 파악한 것 같습니다만.

 

마토바 : 맑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르가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당시 Recherche Internationale라는 프랑스 잡지에서 소비에트의 연구자가 한 초기 맑스 연구의 번역을 모은 특집이 편성됐는데요, 거기에는 나중에 경제학철학수고의 연구로 매우 유명해진 라핀이라는 인물의 논문 등도 들어 있습니다만, 그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비판의 최대 포인트는, 그들이 발전론적 이해로 초기 맑스, 후기 맑스를 이해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튀세르가 제기하고 있는 단절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맑스에게는 그때그때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우연적(contingence)인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그는 후방적 회귀(retour en arrière)”라고 합니다. 연구할 때 앞을 향해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뒤를 향해 회귀한다. 앞으로 회귀하는 것은, 앞을 향해 발전한다는 것을 전제로 회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로[뒤를 향해] 회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상가를 사상가답게 하는 것은 그의 이론사가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사상가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현실적 연구를 한편으로 진행함으로써, 맑스 안에서 경제학철학수고로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로 나아갈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그런데 라핀 등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소련 사람들은 후기 맑스 쪽에 입장을 두고 있고, 반드시 자본에 도달한다는 것을 전제에 두고 초기 맑스를 읽어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아무리 기다려도 후기로 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우발적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시대에 구속되어 있는 이상, 그 인물이 오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때 맑스 전기를 쓴 오귀스트 코르뉘의 연구가 매우 도움이 됐다고 말합니다. 그런 연구 스타일이 나오지 않으면 다음으로 나아갈 스텝은 없다고. 코르뉘의 책을 읽으면, 맑스는 반드시 자본에 도달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우발적인 부분이 있다, 어쩌면 맑스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갔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파헤치는 스타일로 쓰인 것이 오귀스트 코르뉘가 쓴 전기이다. 발전된 후기 맑스로부터 초기 맑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초기는 초기로서 독립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초기의 문제설정입니다. 맑스는 문제를 설정했는데도 풀리지 않지요. 그것은 그때까지의 철학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의 경제학으로는 어떤가 하면, 그 방법론으로도 안 됩니다. 기존의 19세기까지의 지식을 모아 봐도, 이런 도구들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거기에서 깊은 심연을 보아버린 맑스는 이로부터 새로운 지평에 들어간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 시대의 도구를 써서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지평에 있는데, 맑스만은 그 시대의 도구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지식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인식론적 단절이 찾아온다는 것이며, 그래서 답을 낼 수 없게 된다. 히로마츠 씨의 경우는, 물상화라는 형태로 후기가 전개된다고 합니다만, 거기서는 또한 물상화는 맑스에게 무엇인가?”, “물상화에 의해 무엇이 열리는가?”라는 물음이 생기며, 그것에 대해 대답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만, 실제로 대답해 보면 진부한 것이 될 가능성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알튀세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맑스는 새로운 방법론을 초조해하면서 만들어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 그 시대는 고독하고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백년 후, 이백년 후에 처음으로 이해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을 당시의 우리는 그가 설정한 도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지금의 포스트모던이 제기한 방법론이나 도구를 사용하면 40년 전의 알튀세르의 물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알튀세르도 반쯤은 맑스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2. 주체/객체 도식과 비가시의 구조

나카마사 : 인식론적 단절을 알기[이해하기] 힘든 이유에는, 맑스주의적인 주체/객체론과의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맑스는 인식론적 단절전에는 주체/객체의 틀 속에서 사고했습니다만, 단절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틀 속에서 사고하게 되며, 거기서 상부구조/하부구조의 얘기가 나옵니다. 기존의 맑스 이해에서는, 상부구조/하부구조가 주체/객체의 틀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고 있던 게 아닐까요? 이마무라 히토시(今村仁司) 씨 등도 지적했듯이, 알튀세르는 주체/객체 관계가 구조속에서 생기는 것이지, 주체/객체 중 어느 쪽이 먼저냐 하는 문제의 제기방식으로는 구조를 둘러싼 문제계는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맑스 이해에서는 하부구조 결정론이 제창되고, “하부구조라는 객체”, 저쪽에 의해 규정된다고 간주됐다. 역사적으로 봐서, 하부구조=객체결정론적인 맑스주의 이해는 언제 무렵부터 지배적이게 됐을까요?

 

마토바 : 19세기 말, 당시 사회민주당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엥겔스의 반뒤링론입니다만, 그것을 경유해서 맑스로 갔습니다. 반뒤링론을 읽게 된 것이냐 하면, 그것 이전에 다윈의 진화론을 읽고, 모두 공부모임을 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맑스가 읽혔습니다만, 맑스까지 도달한 사람은 적었다. 졸저 미완의 맑스(未完のマルクス)(2000)에서 언급했습니다만, 당시 사회민주당 안에서는 맑스 자신의 저작이 거의 읽히지 않았으며, 맑스에 관한 책, 특히 반뒤링론이 읽혀졌다. 그 즈음부터 그런 하구부조의 우위성이라는 생각이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물사관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반면, 알튀세르는 중층적 결정(surdetermination[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을 냄으로써 새로운 사고방식을 열었습니다만, 그 알튀세르조차도 최종심급에서의 결정”(dernière instance)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급도 고육지책의 번역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경우의 경우라는 의미입니다. 이러저러한 경우가 있지만, 마지막 경우에서 정하는 것이 최종심급이라고 한다면, 뭐라 말하든 아무래도 최종심급은 경제적 하부구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종이라고. 맑스를 위하여에서 엥겔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엥겔스도 그 언저리에 관해 고민하고 있고, 하부구조가 결정하는 경우는 어떤 국면에 한정되어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다면적이라고. 우리는 오히려 엥겔스보다도 맑스의 경제학비판서설에 나오는 그리스시대는 그토록 생산력이 낮았는데도 왜 그토록 문화가 꽃피웠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냅니다. 그런 물음을 제기하면서, 그 한편으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이 의문은 사실 엥겔스도 갖고 있었다. 경우를 나누어 치밀하게 논의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우리가 이해한 알튀세르의 공헌은, 하부구조/상부구조라는 아주 대략적인 논의에 대해, 경우 경우에 따라 역전되는 경우도 있고 또 하부구조가 결정하는 경우도 있으며, 그 경우를 나눠서 전개한 것입니다. 역시 알튀세르가 알튀세르인 곳, 달리 말하면 그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자칭하는 까닭은, 마지막에서는 경제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곳입니다. 역시 그는 거기서 유물론자로서 논진을 펴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19세기부터 20세기에 전개된 프랑스의 사상은 당치도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베르그손부터 시작되어 이윽고 포스트모던으로 연결되는 철학은 직관 등등을 주장하는 관념론이기 때문이라고. 왜 유물론 철학은 발전하지 못했는가? “나는 그런 흐름에 대해 유물론 철학에서 노력한다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대부분의 세밀한 논의 속에서는 유물론적 결정을 버리고 있지만, 최종심급을 주장하는 한에서 최후의 유물론자로서 그 성채를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까요?

 

나카마사 : 이렇게 생각하면, 맑스도 후기가 되어서도 주체/객체 도식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부분이 있다는 게 되죠. 맑스 자신이 주체/객체의 이미지를 상부구조/하부구조에 덧씌우고 있는 곳이 있으며, 그것을 알튀세르 자신도, 이마무라 씨는 완전히 분리하고 있는 듯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질질 끌고 있다는 것이네요.

 

마토바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베르그손에서 시작되어 사르트르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철학의 흐름은 관념론적인 곳으로 갑니다. 반면, 한편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유물론자로서 마지막까지 성을 지키는 이 고고함이 없다면 아마 알튀세르는 알튀세르로서의 논진을 펴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포스트모던적인 논의 속에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만, 다만 자신의 위치를 유물론이라는 곳에 두고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최종심급(최후의 경우)에서의 그것이지, 그의 전체는 거기에는 없습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구조라는 추상적인 말을 쓰고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역시 하부구조라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그의 구조이해를 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구조의 의미가 기존의 하부구조와는 꽤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이미지된 하부구조는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장에서의 노동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존재와 결부되어 있었습니다만, 알튀세르의 구조, 아무래도 그것으로만 수렴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자본을 읽자에서 제자 랑시에르가 있습니다만,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관계성은 비가시의 X”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부구조는 조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으로, 인간들이 보면 우연성을 포함한 것 같다. 그런 관점을 알튀세르가 냈다고 하는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토바 : 최근 유고집 번역이 조금씩 출판되고 있는데요, 그 안에 불확정적인 유물론(1988)이라는 번역서가 있습니다(또는 철학에 대해, 1994). 바로 그 제목이 그렇죠. 그가 살인사건을 일으켜 공개적으로 글을 내지 않을 때 멕시코의 여성 연구자 페르난다 나바로와 서신교환한 것이 편집, 출판된 것인데요, 이 안에서, 확정되고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유물론이 아니라, 사뿐사뿐[훨훨 날아] 움직이는 우발적인 것에 올라타는 유물론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나중에 바뀐 것이 아니고, 아마 60년대부터 줄곧 갖고 있고, 그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여유가 없었고 [그럴] 도구도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ppareils Idéologiques d’Etat)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중층적 결정[과잉결정]을 하는 가운데, 문화적 이니셔티브를 국가 나름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우리의 사상 행동을 결정해간다. 이런 용어에 의해 당시는 유물론적 철학 속에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잘 설명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은 60년대, 70년대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혁명운동이 쇠퇴하는 가운데, 그 원인을 묻고, 말이 궁색해졌을 때 이용하는 아주 편리한 말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개념에 대해 설명한 책이 니시카와(西川) 씨 등에 의해 번역된 것은 1975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현재에는 이 개념을 재생산에 대해(1995)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매우 자세하게 논의했던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 문화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문화가 어떻게 그 시대의 지배구조에 편입되는가, 단순히 편입된다고 말할 뿐이라면 그 자체로 결정론이 되는 것입니다만, 거기서 매우 자세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문화연구에서 하는 하위문화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 미공인의 문화입니다. 이 미공인의 문화가 하위문화인 것은, 정통적인 문화가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스튜어트 홀은 영국에 충분한 이론이 없기에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고, 이론을 알튀세르로부터 빌려왔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구조를 통해 중층적으로[과잉]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생산력으로 전부 결정된다고 하는 스탈린주의적인 조잡한 논리와는 일단 거리를 둔다. 이와 동시에, “휴머니즘적인 맑스주의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 알튀세르는 양동작전을 편 것입니다. 프랑스공산당의 주류파, 즉 유로코뮤니즘 중에서는 가장 소련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대항할 때는, “구조를 통한 중층적 결정[과잉결정]”을 주장하고, 그 반대의 극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는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전략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마토바 : 알튀세르는 휴머니즘 비판을 했습니다만,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전후의 계몽의 흐름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맑스주의입니다. “맑스주의는 넘어설 수 없다고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입니다. 맑스주의와 휴머니즘은 68년 혁명까지는 전후 세계를 지배하던 기본 원리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 인권을 지킨다고 하는 게 휴머니즘이며, 그 공격 지점은 소련의 수용소이며, 혹은 나치 시대의 수용소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체 비판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맑스주의입니다. 근대주의는 잘못되지 않았다. 근대가 나치를 산출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치가 생겨난 것은 근대가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근대를 더욱 철저하게 하면 나치와 같은 체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근대를 가장 철저하게 한 것이 맑스주의이다, 맑스주의는 근대라는 전제 위에 서면 완성 형태로서 우리의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이 두 가지 흐름을 접목하고, 당시 지적 세계를 지배한 사르트르는 무적입니다. 그것에 대해 서서히 결함이 보이게 됐다.

알튀세르도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포지션, 1976). 맑스주의가 갖고 있던 근대주의의 꿈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렸다. 근대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우리의 생활이 좋아지며, 이와 동시에 미래를 약속해준다는 사고방식을, 중층적 결정[과잉결정] 등의 개념을 제출함으로써 알튀세르는 뒤집어버렸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입니다. 존 루이스에게 답함(1973)이라는 저작이 있습니다만, 존 루이스는 맑스 연구자 중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왜 알튀세르가 그를 거론했느냐 하면, 이런 속류적인 인물을 거론함으로써 맑스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알튀세르는 이 존 루이스에게 답함을 사용해 이듬해의 강의를 합니다만, 그 강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까도 이름을 거론한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의 교훈(1974)을 씁니다. 이 존 루이스가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의 전형이며,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이다고 주장한다. 반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었다면, 철저한 인간주의이고, 맑스의 자연관은 여기서 무너져버린다. 학위논문이나 경제학철학수고의 글을 잘 읽어보라고. 인간은 자연에 작동을 가하지만, 자연도 인간에게 작동을 가한다. 자연과 인간은 일체가 되어 있으며, 인간이 자연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인간주의일 뿐인 게 결코 아니라 서로 영향을 준다. 이를 맑스가 몰라서 인간주의에 빠졌다고 한다면, 맑스의 저작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잘 읽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휴머니즘이라는 말로 인권 등의 사상을 맑스주의 속에서 읽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을 극복하겠다는 더욱 큰 관점을 갖고 있으며, 자연 속에 인간을 두고 또한 인간을 자연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지금까지의 근대주의가 빠져 있었던 아포리아를 극복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약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이었다면 이렇게 시시한 사상은 없는 것이라는 형태로 비판합니다.

이런 양동작전으로 전후의 사상을 만든 맑스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양대 조류에 대해 한 방을 먹였다. 이것이 만약 완벽한 비판이 됐다면, 사르트르를 하나의 대표로 한 전후의 많은 사상이 결여하고 있고 이로부터 노도(怒濤)처럼 68년을 향해 새로운 사상이 나올 가능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알튀세르는 기본적인 부분에서 그런 방향으로 나갈 준비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아마 그 작업은 푸코나 데리다에게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3. 휴머니즘과 맑스에게서의 자연

나카마사 : 현재에는 데리다 등이 서구적인 인간성개념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성의 유형을 만든 뒤, 이를 지키려고 하는 논의를 전개하는 휴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말하기때문에 별다른 저항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대사상에 있어서는, 보통 얘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70년대 전후의 시기에 인권사상이나 인간성이라는 생각 자체를 해체하는 방향을 노골적으로 내세웠다면, 아마 상당히 떴을 겁니다. 당시에는 이런 주장이 맑스주의의 맥락에서는 매우 통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알튀세르는 굳이 한 겁니다. 일본에서는 아마 그 면이 수용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마토바 : 그렇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다라고는 말하기 힘드네요. 마찬가지로 맑스주의 안에서 맑스주의는 휴머니즘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도 어렵네요. 그것은 휴머니즘 안에는 보편적인 것이 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은, 자연환경 문제에서 보이듯이, 자연에 대해 인간의 힘이 너무 커지는 가운데, 인간 자체가 지닌 자연성이 강조되기에 이른 시대, 구체적으로는 70년대 이후군요, 그런 시대가 되어서 처음 말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스탈린이 한 격렬한 탄압에 대해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소련인들은 인권을 빼앗기고 있다는 비판이 있고, 그에 대해 소련인들은 자신들도 인간주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하고, 둘 다 인간주의가 기본이 됐으며, 그 안에서는 반인간주의를 말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을 넘어서 자연으로. 과거의 학위논문이나 초기논문의 독해에서는 인간주의가 암묵적인 전제가 되고 있으며, 맑스의 자연 개념을 슈미트가 써서 일본에서도 그것이 자주 읽히고 있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놀랍고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맑스의 인간 개념에 관한 책은 지천에 널려 있고,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맑스의 자연 개념이 이해되기에 이른 것은 7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가 현재의 맑스주의자 속에서 문제가 된다.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지가 알튀세르의 문제틀problematique을 이해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관건이 되지 않는가 싶습니다.

 

나카마사 : 그때의 자연이란 이른바 객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시야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부분으로 회수될 수 없는, 대문자의 자연이죠. 그 부분도 여전히 그다지 이해되지 않았네요. “자연이라고 하면, “객체로서의 자연이라고 지레 짐작되고, 곧바로 노동과 결부됩니다. 인간이 자연으로서인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자연이 아니며, 인식할 수 없는 외부에 있는 것이 자연이며, 그것과 어떤 식으로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이 경철수고에서도 문제가 됩니다만, 그런 부분이 길다는 것, 그때까지도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눈여겨보고 있었다.

 

마토바 : 저는 그것을 부재”absence, 혹은 침묵”silence이라고 말합니다. 알튀세르가 확장한 영역의 하나는 정신분석입니다. 그는 정신분석에 흥미를 갖고 있고, 에콜 노르말을 나와 거기서 강사(사감, 비서)를 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폴리체르(Politzer)라는 정신분석학자입니다. 그리고 몽테스키외에 관한 책을 쓴 몇 년 후에 에콜 노르말에 라캉을 불러와서 정신분석 강의를 하게 합니다(1963-4). 알튀세르가 문제 삼은 것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은 성립하느냐 아니냐?”라는 문제입니다. 정신분석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부분, 즉 인간이 갖고 있는 우리가 전부 알고 있다라는 곳에서부터 누락된 부분, 즉 무의식을 문제 삼는다. 이 부재의 부분을 학문으로서 성립하게 만드는 것은 큰 일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오해됐다, 프로이트는 19세기에 그것을 예감했지만, 당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논의를 하고, 인식할 수 없는 학문은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쓴 것은 학문으로서 간주되지 않는다, 이른바 사이비학문이라고 생각됐다. 이 사이비라고 생각됐던 것을 학문으로서 인식할 수 있게 한 것은 라캉이며, 바로 라캉에 의해 부재 문제가 학문적인 것으로서 제기될 수 있게 됐다. 그런 곳에서 라캉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데, 또 다른 선구자로서의 프로이트에게도 의의가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문제로서 이 세계에는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홀로 뒹굴고 있을 뿐이다. 뒹굴고 있는 우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우리의 알 수 없는 것이 자연이죠. 이런 사고방식이 알튀세르에게 떠올랐던 이유는 정신분석의 영향입니다. 그것은 푸코에게도 도착한 1950년대에 에콜 노르말에서 배웠던 사람들의 방향이었던 거죠. 다만 이런 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알튀세르의 책을 읽었을 때에는 이해 못했던 겁니다.

 

나카마사 : 마르쿠제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꺼내들었습니다만, 마르쿠제 본인이 그렇게 주장했는지 여부는 별개로 치고, 마르쿠제를 경유한 맑스와 프로이트의 결부에 있어서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어느새 자연충동같은 것이 되어버려서, 자연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숨은 욕망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프로이트 자신에게도, “무의식을 자연과학적으로 기술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프로이트 이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억압된 자연충동해방한다는 형태로, 맑스주의적 객체결정론의 맥락에 올라탄 것입니다. 이것이 독일, 미국을 경유해 일본에도 들어왔습니다. 알튀세르의, 라캉을 경유한 프로이트 이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아에게 있어서 완전히 이질적인 타자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 마르쿠제 경유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죠. 이것이 구조개념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마토바 : 그렇군요. 프로이트가 오해된 부분은 또한 프로이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리비도 즉 억압된 성, 잠재의식은 새로운 인간이 재구성되기 위한, 승화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러한 잠재의식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은 성장한다. 억압된 잠재의식을 해방한다는 방향을 향하는 프로이트 해석에 대해, 그런 것은 해방도 뭣도 아니고 마치 바다처럼 우리 속에 확산되고 있는 부재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다. 그 부분이 스피노자와 관련되는 대목입니다. 인간이 모르는 지식은 많이 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일부만을 알려고 한다. 그것에 의해 이 세계를 해석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르는 영역이 많이 있다. 그런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에 알튀세르와 스피노자가 상통하는 대목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발상의 계기로서 프로이트가 있었던 것과 동시에 마키아벨리가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고독(마키아벨리의 고독, 1998년 수록)이라는 논문이 있는데요, “왜 마키아벨리는 고독한가?” 문제설정으로서는 방금 전의 것과 같습니다만, 마키아벨리는 군주제 국가의 모습이 일반적인 국가의 모습이라고 생각됐던 시대에 군주제 국가를 넘어서는 일반적인 국가를, 군주제 국가도 잘 되고 있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생각하려고 했다. 군주는 국가를 만들었을 때, 거기에서 민주제를 실현하고, 마침내 군주는 그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1400년대부터 1500년대에 걸쳐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이런 국가를 이해할 수 있는 군주는 없었다. 바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로부터도 포기되고 고독했다. 17세기의 스피노자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지평을 엶으로써 고독했다.

이런 분석 패턴은 알튀세르의 인물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패턴입니다. 각각 그 시대의 획을 긋는 사상가의 사상은 그 시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썼기 때문에, 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다. 그 사상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 시대의 말로는 표기할 수 없는 것, 즉 쓰이지 않은 것, 쓰고 있는 것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쓰고 있는 데도 그 시대에는 독파되지 못한 것이다. 행간 속에 있는 부재의 부분을 읽어내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의 작업이며, 이 독해를 한 손으로 받아들인 것이 알튀세르라는 그 사람 아닐까요.

 

4. 징후적 독해의 고독

마토바 : 알튀세르는 맑스 속에서, 맑스가 썼지만 읽히지 않았던 것을 오로지 읽고자 했다. Pour Marx(1965), 옛날의 일역본 제목은 되살아난 맑스(るマルクス)였습니다만 정확하게는 역시 맑스를 위하여이죠. 알튀세르는 바로 맑스를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선언하기 위해 이 책을 썼으니까요. 독파되지 못한 부분이 앞서 말한 부재의 부분입니다. 많은 사상가는 까닭 모를 것을 많이 남겼으며, 그 부분이 이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하고 이것으로 맑스를 이해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그로부터 넘쳐흐르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알튀세르의 문제틀입니다.

 

나카마사 : 맑스 자신도 보통의 주체의 의식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을 이데올로기라든가 하부구조라는 개념을 갖고 설명하려 했습니다. 다만 그런 맑스 자신도, “그의 시대의 문제계를 질질 끌고 있었기 때문에 딱 잘라 표현할 수 없었다. 표현할 수 없으며, 맑스 자신도 몰랐던 부분, 바로 무의식의 부분이, 그가 쓴 것=에크리튀르 속에 나오는 것을 알튀세르가 징후적 독해로 읽어낸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의도를 재구성한다는 맑스 이해는 부정합니다만, 그렇다면 거기에서 읽어내야 할 것을 읽어낸다는 생각은 과연 있었을까? 데리다라면 읽어내야하는지 여부는 아무래도 좋고, 이쪽이 멋대로 읽어냈다는 것이 됩니다. 알튀세르는 거기까지는 가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토바 : 징후적 독해(lecture symptomale)『『자본을 읽자(1965)의 서두에 있는데요, 이것은 지금도 사용하는 말로, 1960년대부터 활발해진 언어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징후적 독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떤 것을 비판할 때, 그 사람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그 사람 자신이 알지 못하고 그것을 꺼내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한 것이나 말하고자 하지 않은 것도 포함해, 전혀 그것과는 관계가 없이, 요컨대 그 사람이 전혀 알고 있지 못한 것(그 사람에게 부재한 것)을 우리가 읽어 들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후자이며,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넘어가서 새로운 시대에 태어난 독자가 그 본질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장인의 기술입니다만, 문제는 알튀세르가 맑스의 작품에 관해 각각 세세하게 했느냐 하면, 의문입니다. 공산주의자 선언에 대해서도,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징후적 독해를 한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자본뿐입니다. 그것도 징후적 독해라는 추상적인 방법론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독일 이데올로기경철수고에 대해 징후적 독해를 하면 어찌 되느냐를 알고 싶습니다만, 결국 그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고 내용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알튀세르는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맑스의 개념들에 대한 그의 독해방식으로서는 징후적 독해를 살리지 못하고, 그 시대의 맑스주의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사상적철학적 에크리튀르와, 문학이나 일반인이 쓴 것을 구별했습니다. 데리다는 공산주의자 선언속의 Gespenst요괴가 아니라 유령이라고 읽을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전개합니다만, 데리다가 하고 있는 것을 맑스 자신이 의식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데리다는 맑스의 시대에 Gespenst라는 말이 어떤 사회적 외연을 갖고 있었는가라는 곳까지 문맥을 넓혀가고, 그로부터 자기 나름의 독해를 확대해 간다. 그에 비해 알튀세르는 그런 독해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지만, 스스로는 그런 읽기를 실천할 수 없는 바가 있네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곳에서 해묵은 논의를 또 다시 꺼낸다. 가장 중요한 점이 이해되기가 어렵다는 것인 양 스스로 고안해내고 있는 부분이 있네요.

 

마토바 : 알튀세르는 맑스의 개별 저작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은 없습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1845년까지의 초기 맑스, 그 이후 경제학비판까지의 성숙해지고 있는 맑스, 그리고 성숙한 맑스, 이렇게 셋으로 나눕니다. 이 나누는 방식은 매우 당연한 분류입니다. 만일 우리가 알튀세르를 위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문제제기를 맑스의 세 가지 시기구분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세기의 맑스가, 19세기를 갑자기 뛰어넘어 21세기, 22세기까지 가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기하고 스스로도 까닭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을 발견한 알튀세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맑스주의자들이 논하기보다는 훨씬 더 넓게 철학자가 논의하는 편이 좋다. 세세한 부분에서 맑스의 저작에 대해 알튀세르가 새로운 전개를 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알튀세르를 위치시켜도 의미가 없다. 굳이 그의 인식론적 단절을 비약하여 해석하고, 인식론적 절단 이후의 맑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이나 자본이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더욱 날아올라, 21세기나 22세기에 있어서 새로운 문제설정을 하고 있는 맑스라고 말해 본다면 어떨까? 이쪽이 더 살아있죠.

 

나카마사 : 그 부분이 좀체 이해되기 어렵네요. 알튀세르는 절반은 맑스 해석자의 틀을 넘어 새로운 문제계를 세우고 있지만, 기존의 맑스주의의 스타일을 채용한 탓에, “새로운부분이 좀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자주 얘기되듯이, 그 자신이 공산당에 집착하고, 공산당 주류파와 그토록 대립했지만, 공산당에 계속 남았다. 68년 혁명 이후, 그토록 데데하고 시시하다고 말해지는 공산당에 힘썼기에 그가 스탈린주의적으로 이해되고 말았다. 반드시 실제의 정치적 행동이 스탈린주의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당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파악되어 버렸다, 그렇게 처신해버립니다. 그가 당에 집착한 것은 그의 맑스주의관에서 도출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수준에서의 얘기가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인간관계인지, 그 언저리를 알기 어렵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토바 : 어려운 부분이네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1992)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얘기한다.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1940-5)을 보내며, 여기서 돌아와서 에콜 노르말에 복학하고, 거기서 엘렌느라는 여성과 서로 알게 됩니다. 그 전에 가톨릭의 어느 쪽이냐 하면 우파에 가까운 운동에 참여합니다. 1946년 로마로 가서 당시의 교황 피우스 12세를 알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얘기가 아니고, 조금 전의 세대에게는 악시옹 프랑세즈같은 단체에 들어가면서, 오른쪽으로 가거나 왼쪽으로 가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이 무렵 엘렌느에게 듣고서 공산당에 갑니다만, 꽤 흔들리는 부분이 있다. 이 부근은 부땅의 알튀세르 전기(1992)에 자세하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어느 정도 확신적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거꾸로 들어감으로써 그의 당에 대한 충성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 수준보다도 이론 수준에서 순화하고 있다. 이론 수준에서 귀의해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문제인 것은, 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사람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입니다. 30년 전과 달리 현재에서는 알튀세르의 인생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예전에 저는 너무 강조했습니다만(알튀세르와 맑스アルチュセールとマルクス, 情況, 11월호, 1999), 그에게는 겉의 세계와 속[]의 세계가 있고, 속의 세계란 복잡한 여성의 문제이며 겉의 세계란 공산당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중층적인 구조가 있으며, 이 구조 속에서 알튀세르를 보면, 무엇하나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남녀관계를 보면, 기존의 도덕으로 보면 괘씸한 남자로, 흔들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으로의 귀의라는 대목에서는 매우 성실하게 오랫동안 당원생활을 보낸다. 이 낙차이죠. 에콜 노르말의 수업도 할 때에는 확실히 하지만, 갑자기 정신병원에 들어가거나 애인한테 간다. 발리바르 등이 본 교사로서의 그는 뛰어난 교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잘 하느냐 하면 갑자기 어딘가로 가버리는 변해버린 교사였다. 이런 이중성 속에서 그의 공산당을 자리매김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본래는 떠나가고 있고, 흔들리고 있는 인간상에서 봐도 떠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이겠고, 바로 그가 말하는 불확정적인 유물론, 불확정적인 요소이겠죠. 이 사람만큼 사후에 겉과 속이 사라지고, 모두 폭로되어 버린 학자는 없다고나 할까, 바로 불확정적인 부분이 없고, 유물론적인 결정을 할 수 없는 인물은 없다. 이상하게 표현하자면, 삶의 방식 자체가 포스트모던적입니다.

 

나카마사 : 알튀세르는 국가나 문화의 이데올로기성을 논하는 대신, “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적으로는 논하지 않고, 이것과는 별도의 틀에서 다루는 것 같아요. 이것이야말로 은 그에게 있어서 비가시적인 구조였는지도 모릅니다만, 당에 대해 종교적으로 귀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마토바 : 그에게는 에콜 노르말에 있었을 때에 푸코 등을 공산당에 넣은 책임이 있습니다. 푸코 등은 나갑니다만, 알튀세르는 머물러 있었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는 책임을 다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중국의 문화대학명이 있었습니다만, 소련은 안 되지만 중국에는 아직 미래가 있다고 함으로써 중국에 접근한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중국에 지나치게 접근하면 공산당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 급진적인 방향으로 향하면서, 중요한 부분에서는 당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불가해한 부분이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알튀세르는, 육체를 초월한 지성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믿고, 이 세계에 완전하게 살려고 한 인간이 아닌가라고. 지성의 세계 속에서는 현실을 일단 무시하고,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그가 쓴 것은 분명히 말하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몽테스키외도 마키아벨리도, 그 시대에 살면서도 그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을 머릿속에서 만들고, 이 머릿속에 게임 같은 완벽한 세계를 만들었다. 이 게임의 세계에 들어가면 좋습니다만, 들어가지 않는 인간으로부터 보면, 이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세계야말로 그에게 진짜 실재라고 한다면, 이 게임 속에 그가 생각한 공산당이나 공산주의가 있다면, 그에게는 만족이며, 현실과의 낙차는 없다. 보통의 인간은, 자신의 이론에 대해 현실이 다르다면 이상하다고 느낍니다만, 그에게는 머릿속으로 도망치는 핑계거리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고독한 생활 속에서 점차 증식되는 머리의 세계가 있다. 보통의 인간도 그런 것은 있습니다만, 그의 경우, 지성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멋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특화되어 간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5. 알튀세르의 신체

나카마사 : 그가 보고 있는 문제계가 너무 앞서 나가고, 실제의 그의 행동 형태와 괴리가 생기고, 행동면의 기반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중층적 구조로서 분석할 수 없게 된다. 당초 나치즘에 존재자체의 발생을 봤던 하이데거가 현실의 나치즘이 자신이 생각한 나치즘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서도 좀체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것도 비슷한 바가 있습니다. 마토바 씨가 말씀하신 것은, 알튀세르가 평가되는 면도 있습니다만, 비판되어야 할 면도 있습니다. 본인의 신체성에 대한 고찰이 분명히 결여되어 있다. 알튀세르 안에는 자신은 신체를 갖고 있고 세계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의식이 없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현대사상이라면, 인식의 수준을 바꿔도 결국은 자신도 신체를 갖고 세계에 편입되어 있다, 그러한 자신의 신체성을 메타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가 곧바로 나옵니다. 그런 관점이 알튀세르로부터는 좀체 보이지 않고, 신체를 갖고 있지 않은 투명 인간처럼 현실 속에 있는 것 같군요.

 

마토바 : 그는 아내를 죽이고 그 재판에서 정신병이라고 함으로써 책임능력이 없게 되어 죄를 면합니다만, 그것에 대해 그 자신이 얘기한 대목에서, 자신은 책임능력이 없다non lieu, 세상의 것이 아니다가 됐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자기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옛날부터 있지 않았던, “루이Louis”라는 자신의 이름도 옛날 자신의 어머니의 애인의 이름이다. 그리고 프랑스어로 루이는 그lui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죽은 애인처럼 키웠다. 나는 어머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오랫동안 non-lieu였다. 그런 나는 여성에 대해 줄곧 늦깎이이고, non lieu였다. 사귀는 여성에 대해서도 가벼운 형태로 흘러갔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신체성을 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자기정당화이며, 그런 인간은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종심급이 실재라면, 실재란 그에게 있어서는 파리의 현실 생활입니다. Non-lieu라는 것은 그의 이론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혼처럼 존재할 뿐이라는 것은, 그의 바로 모든 학문 자체가 현실과의 접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최종심급이라는 위태로운 곳에 접점은 있지만, 그 최종심급을 빼면 둥실둥실 날아가 버리게 된다. 그러나 날아가는 내용은 매우 아름답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우리는 물려받는 바가 있지만. 이 이론은 화제는 제공합니다만,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없는 것은 지면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나름대로 맑스를 마음대로 읽은 것입니다만, 마음대로 읽는 것은 상관없으나, 알튀세르의 신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 언저리는 벤사이드가 절대적 사상의 세계에서 행했던 알튀세르 비판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논문집 アルチュセール, 1999).

 

나카마사 : 달리 말하면, 최종심급 자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울려 퍼질 뿐이며, 이쪽은 그것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만, 심급이니까 어떤 판결을 내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들렸을 뿐이다고 말한다고 생각하면 말해버린다. 그리하면 모든 것은 탁상공론이 될 수 있다. 알튀세르 자신은 제대로 전개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최종심급을 심급답게 하려면, 개개인이 마음대로 듣고 있는 것만으로는 심급으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기능시키는 장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알튀세르에게 그런 장치로 통하는 뭔가의 아이디어가 있고, 그것을 우리가 징후적으로 독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양상을 띠는 것일까요?

 

마토바 : 알튀세르는 혁명에 대해 두 개의 서로 모순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최종심급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것을 혁명으로 끌고 가려면, 그것만으로는 할 수 없다, 어떤 주체의 작동이 필요하다고. 그 주체란 지식인의 지도, 이른바 전위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에 의해 민중을 이끌어 혁명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한편으로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민중 쪽에서부터의 목소리가 있고, 그것에 지식인은 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알튀세르처럼 자기 변호에 능한 인간들이 본다면, 인텔리에 대한 숭배가 있으며, 그것은 볼셰비키적 혁명으로 이어집니다만, 지식인이 혁명을 추진하고 민중은 그것을 따라가면 된다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있고, 자기 모순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 그러나 어느 쪽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기모순은 어떤 사상가에게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다만 지식인이나 전위가 혁명을 수행한다는 방향에 내기를 걸었다는 면에, 오히려 그의 지성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가 레닌과 철학(1969)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레닌이 이탈리아로 망명했을 때, 이탈리아에 있는 러시아인이 카리브섬에서 의회를 하고 있으니까 그 장소로 와서 철학에 대해 떠들어달라고 고리키가 레닌에게 부탁합니다. 레닌은 거기로 가서 철학에 대해 지껄일지 고민합니다. 레닌은 자신은 철학을 실천하려 하고 있고, 그렇다면 철학에 대해 지껄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껄이는 수준을 넘어선 곳에 있는 철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철학이 있다면 묵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레닌은 가지 않았습니다. 가지 않았던 것이 레닌의 뛰어난 부분입니다. 맑스주의에 있어서의 철학은 사실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이라면 하나의 합리적인 논의로서 민중에게 이야기되는 일종의 게임이 된다. 그러나 맑스의 철학은 그런 것을 넘어선 현실을 바꾸는 뭔가이다. 철학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레닌은 철학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 그것을 레닌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레닌은 뛰어나다는 게 됩니다.

이처럼 알튀세르의 사고 패턴은 항상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인간이 위대하다고 말할 때에는, 그 위대한 인간은 그 시대의 인간들의 사고의 지평을 뛰어넘어 역설적으로 물음을 역전시키는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패턴은 알튀세르의 가장 알튀세르적인 부분입니다. 모든 뛰어난 인간들은 미래에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으며, 그를 돕는 것은 미래의 인간뿐이다. 살고 있는 시대에는 누구 하나 이해하는 친구를 갖지 못하고, 친구는 미래에만 있을 뿐이다. 이 미래의 친구와의 연관,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 등의 5세기에 걸친 이해의 우정 연합이 친구를 만들고, 그것 이외에는 전혀 친구가 아닌, 맑스도 마키아벨리도 스피노자도, 그리고 레닌도 그런 의미에서 고독하다.

 

나카마사 : 너무 고독해졌을 때, 어떻게 대중의 목소리를 듣나요? 어딘가에서 대중의 목소리를 들어두느냐면, 맑스주의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곳이 있네요.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이라는 것을 끈질기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지식인이나 혁명가가 자신의 머리로 구성하는 권력이 아니라 다중(multitude)으로부터 저절로 구성되는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진정한 혁명으로는 안 되니까요. 알튀세르의 최종심급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라고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외부로부터 끌고와야 할 것이 아닐까요? 알튀세르의 제자인 발리바르 등은, 스피노자의 다중의 얘기와 결부시키고, 대중적인 것으로부터 끌고 온다는 유형의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만, 알튀세르 자신은 그런 인식은 전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토바 : 알튀세르는 중세의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감으로서 에콜 노르말에 입주하면서, 학생들에게 철학을 이야기하고, 바로 현실과의 접점을 갖지 않은 곳에서 그는 우위성을 가진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일종의 이상적인 세계에서,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이치를 가득 채워 일을 밀고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의 접점이 상실되고 있다. 이 현실과의 연결을 어떻게 갖는가가 50년대부터 60년대에 전개하는 그의 여성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가 숨지고 전기가 나오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알 수 있게 된 것이고, 나오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다. 에른스트 만델이 제4인터내셔널의 대빵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으며, 그의 말투도 포함해 운동가로서의 카리스마성이 있다. 그러나 글쓰기로서의 카리스마성은 없다. 그에 반해 알튀세르는 오로지 글쓰기로서카리스마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희소한 인물입니다. 그 자신이 그런 자신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것을 연기하고, 현실과의 접점을 갖지 않는 곳에 이지적인 곳에서 구축했다. 프랑스의 인구 5천만 명 중에 뛰어난 지성을 지닌 인간이 몇 명 있고, 그 몇 명만을 소중히 하고, 그 몇 명은 미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프랑스에는 있습니다. 그런 선택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연기하고, 모두에게 그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카리스마성이 있다.

 

나카마사 : “철학으로서는 그 편이 철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튀세르 이후의 세대가 되면 그것은 좀체 주장하기 어려워졌다. 역시 알튀세르는 마토바 씨가 말씀하시듯이, 자신 이외의 타자로서,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인간을 설정하지 않는다. 그의 시야에 있는 것은, 아득한 옛날의 역사적 인물이라든가, 미래의 위대한 인물이네요. 위대한 지성 연합 속의 타자인 것이며, 이른바 아래로부터나타나는 타자라는 이미지에는 아무래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이 알튀세르의 좋은 부분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다.

 

마토바 : 알튀세르는 초엘리트라는 것을 자인하고, 그것을 연기했습니다만,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프랑스의 국토가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는 대개 엘리트입니다. 베르그손도 프랑스에서 대대로 이어져온 엘리트이며, 사르트르도 엘리트이지만 베르그손보다 떨어진다. 알튀세르는 사르트르보다 더욱 떨어지는 셋째, 넷째의 엘리트입니다만, 삶의 방식으로서는 더욱 엘리트 같다. 알튀세르처럼 에콜 노르말의 조수가 되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오히려 파리대학의 선생이 되고, 장차 콜레주드프랑스의 선생이 되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쪽이 좋은 것입니다. 확실히 우수한 인간은 에콜 노르말에 몰려듭니다만, 여기서는 교사로서의 지위는 오르지 않는다. 중세의 수도사처럼 여기에 있던 인간은 어딘가 어긋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긋난 태도를 승인해주는 지적인 분위기가 당시의 프랑스에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알튀세르 사상의 현행성

アルチュセール思想のアクチュアリティ

再生産についてイデオロギーと国家のイデオロギー諸装置をめぐって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오나카 가즈야(大中一彌)

곤노 히카루(今野晃)야마카 아유무(山家歩)

[사회] 이부키 히로카즈(伊吹浩一)

정황200589월호

 

알튀세르 사상의 액추얼리티.pdf


이부키 : 저번에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해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출판되었는데요, 오늘은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 선생을 비롯해 저도 포함한 번역자 모두가 모였기에, 이 책을 둘러싸고 다양하게 논의하고 싶습니다.

알튀세르는 꽤 예전에 니시카와 선생이 번역한 이데올로기의 국가와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논문이 있었습니다. 당초 이 이데올로기론은 2권으로 구성될 대작으로 계획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 계획은 끝가지 완수되지 못하고, 1권만이 초고로 작성됐습니다. 게다가 초고 단계에서 단념되고, 포인트가 될 만한 것만을 엮어 만들어 세상에 선보이게 된 것이 그 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고라고는 하지만, 그 완성도는 매우 높다. 그래서 최근 알튀세르의 유고가 본국인 프랑스에서 차례대로 간행되고 있는데요, 이 책도 그런 가운데 무려 10년 전 프랑스에서 출판됐다. 그것에 발맞춰서 우리나라에서도 차례대로 번역이 출판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번에 이 책이 간행됐습니다. 책의 띠에도 적혀 있듯이, 바로 여기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전모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알튀세르 사상의 중요성은 새삼 물을 것도 없고, 확실히 그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특히 이데올로기론이 가장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지금도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그 영향이 너무도 넓고 다방면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확인하는 것 자체가 어려움을 겪지만, 뭐랄까 사정이 좋은 이번의 번역자분들은 각자 전문 영역이 다르고, 각각의 전문영역에서, 또한 독자적인 방향성에서 알튀세르 사상에 씨름하고 계십니다. 각자가 거기서 얻은 것을 여기에 제시해주는 것만으로도 알튀세르 사상이 지닌 넓이와 심도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우리나라에서 알튀세르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서, 그 주춧돌을 놓으신 니시카와 선생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이번에 함께 이 작업을 해주시는 와중에, 다양한 것을 가르쳐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자해설을 읽으면 아시겠지만, 니시카와 선생의 알튀세르에 대한 남다른 생각.’ 번역 작업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