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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 인간과 동물

L’aperto

L’uomo e l’animale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 옮김

* 영어판으로 1.

인용은 금함



2. 무두인 Acephalous

 

조르주 바타이유는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상패부(賞牌部, Cabinet des Médailles)에서 볼 수 있었던 동물의 머리를 한 아르콘들이라는 그노시스파의 조각상들에서 강한 충격을 받고, 1930년에 도큐먼트지에 그것에 관한 기사를 할애했다. 그노시스파의 신화학에서 아르콘들은 물질계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악마적인 존재자(entità)이며, 이 물질계에서는 빛나고 영적인 원소들이 어둡고 신체적[물적]인 요소들 속에 갇혀서 뒤섞여 있다. 그노시스의 저차적 유물론base materialism에는 인간과 짐승의 모습forms을 혼합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경향의 증명으로서 게재된 이미지들은 바타이유의 캡션에 따르면, “오리의 머리를 한 세 개의 아르콘들”, “이아오 판모르페우스 신panmorphous Iao”, “다리는 인간이고 몸뚱아리는 뱀이며 머리는 닭인 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마리의 동물 머리를 올린 머리 없는 신acephalous god topped with two animal heads을 재현한다. 이로부터 6년 후, 잡지 아세팔창간호의 표지, 앙드레 마송André Masson이 드로잉한 표지는 머리 없는 나체의 인간 형상을 보여줬는데, 이것은 바타이유가 몇몇 친구들과 꾸며낸 성스러운 음모의 휘장insignia이었다. 인간의 머리로부터의 도망man’s evasion of his head(“죄수가 감옥으로부터 도망치듯이 인간은 머리로부터 도주했다”[Bataille, 6]라고 강령 같은 텍스트에서는 선언하고 있다)은 동물성으로의 복귀를 반드시 함의[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잡지의 3-4월호 도판illustrations에서는 창간호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형상이, 이번에는 황소의 근엄한 머리를 달고 있었다bears. 이 도판은 바로 바타이유의 기획 전체에 따른[전체가 동반하는accompanies] 또 하나의 아포리아를 증언하는 것이다.

[저차적 유물론도큐먼트(Documents)지 제2년차(1930) 1호에 게재된 저차적 유물론과 그노시스파에서 바타이유는 그노시스파의 본질을 이루는 질료를, 헤겔의 관념론적 체계에 있어서의 고차의 원리에 대립하는 저차의 요소로서, 적극적인 원리로, 즉 어둠 개념과 악 개념에 수렴시킨다. 참고로 이아오 판모르페우스 신이란, 바타이유의 설명에 따르면, 창세기의 신과 동일시되는 저주받은 신이며, 일곱 개의 유성(遊星)에 둘러싸인 환상적인 동물군상으로서 표상된다. 또 일설에는 유대인이 숭배한 당나귀의 머리를 한 신이라고도 한다See Georges Bataille, “Base Materialism and Gnosticism,” in Visions of Excess, ed. Allan Stoekl, trans. Allan Stoekl with Carl R. Lovitt and Donald M. Leslie, J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5), 45-52 ; original in Bataille, “Le bas matérialisme et la gnose,” in OEuvres complètes, vol. 1, Premiers écrits, 1922-1940 (Paris: Gallimard, 1970), 220-26.

바타이유는 고등연구원에서 헤겔에 관한 코제브의 강의를 청강했는데, 그 중심적 테마 중 하나가 실제로 역사의 종언이라는 문제, 그리고 역사 이후(post-storico)의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이 취하게 될 형상이라는 문제였다. 역사 이후란, 바로 호모 사피엔스 종이라는 동물이 인간이 된다는 인내심 강한 노동과 부정의 과정을 거쳐, 그것이 마침내 완성에 도달할 때이다[완성을 맞이하는 새벽이다]. 코제브는 자신의 특징적인 몸짓 중 하나에서 1938-39년의 강의에 대한 주석을 오로지 이 문제에만 바친다[이 중심적 문제만을 위해, 1938-39년의 강의에 대한 주석에 바치고 있는 코제브의 몸짓에는, 그에게 특유한 것이 있다].

 

역사의 종언에서 «인간»의 소멸[사라짐]우주적인 파국[우주 전체의 종말]이 아니다. , 자연의 «세계»는 모든 영원성에서 왔던 것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물학적인 파국조차도 아니다. , «인간»«자연»이나 주어진 «존재»조화를 이루는 동물로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사라지는[소멸하는] 것은 고유하게 불리던[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 즉 주어진 것을 부정하는 «행동(Action[활동]이며 «오류», 아니 더 일반적으로는 «객체[대상]»대립된 «주체»이다. 사실상 인간적인 «시간»이나 «역사»의 종언, 즉 고유하게 불리던[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 혹은 자유롭고 역사적인 «개인»의 결정적인 근절definitive annihilation은 단적으로 말해서 이 용어의 강한 의미에 있어서 «행동(Action[활동]중단[폐기cessat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실천적으로는, 전쟁들과 피비린내 나는 혁명들[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혁명]의 소멸[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의 소멸이기도 하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 이상 본질적으로 바꾸지 않게 됐기 때문에, 인간이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의 기초에 있는 (참된) 원리들을 바꿀 아무런 이유도 더 이상 없게 된다. 그러나 나머지(rest) 모든 것, 즉 예술, 사랑, 놀이 등은 무한정하게 보존된다. 요컨대 «인간»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것 말이다. (Kojève, 434-35)

 

바타이유와 코제브의 의견대립disagreement은 인간의 죽음에서 살아남아 역사의 종언에서 또 다시 동물이 되는 나머지(rest)’(resto)와 관련된다[역사의 종언에서 인간으로서는 죽더라도 다시금 동물이 되어 살아남는다는 나머지(rest)’와 관련된다]. 사실상 스승보다 다섯 살 위인 이 학생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은, “예술, 사랑, 놀이(남다른 아우라에 휘감겨서wrapped in an aura of exceptionality, 아세팔과 이보다 2년 뒤의 콜레주드소시올로지Collège de Sociologie에서 핵심적인 관심사가 됐던 것인) 웃음, 황홀, 사치와 마찬가지로 초인적이기를, 부정적이기를, 성스러운 것이기를 그쳤고, 단순히 동물적 실천으로 돌려보내졌다는 것이었다. 비웃음을 사는 것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파리 교외outskirts의 숲에서 죽음을 앞에 둔 기쁨joy in the face of death을 실천하고, 그 후 유럽의 위기의 한복판에서도 유럽 인민이 신화의 낡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교하는 마법사의 제자sorcerer’s apprentices역할을 한 마흔 살 가량의 초심자들로 이루어진 소집단에게, 이들의 특권화된 경험에서 찰라에서만 얼핏 보인 무두(無頭)의 존재는 아마 인간적 존재일 수도 신적 존재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이 무두의 존재는 결단코 동물적일 수도 없었다.

물론 여기서도 쟁점은 헤겔에 대한 해석이었는데, 이 분야에서 코제브의 권위는 유달리 위협적이었다. 만일 역사가 변증법적 부정의 인내심 강한 작동에 다름 아니고, 인간이 이런 부정하는[부정적인] 활동action에 있어서 주체이자 관건에 다름 아니라면, 역사의 완성[종결]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종언을 수반한다[함축한다]. 그리고 시간의 문턱에서 이런 종언을 만족스럽게 관조하는 현자의 얼굴은 암브로시아 사본의 세밀화에서처럼 필연적으로 동물의 주둥이[얼굴]snout 속으로 사라진다[사라질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1937126일자 코제브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타이유는 사용 없는 부정성”[negatività senza impiego; 또한 채용되지 않은 부정성unemployed negativity”]이라는 관념에 대해 내기를 걸어야만 했다. , [어떻게 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역사의 종언에서 생존한 부정성이라는 관념, 이것에 대해 바타이유가 자신의 생명 외에는 다른 어떤 증거도 제공할 수 없는 부정성이라는 관념에 대해 내기를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열린 상처가 바로 제 삶입니다.”

 

저는 역사가 지금부터 완성된다는 것을 (오로지 그럴듯한 가설인 양) 인정합니다(다만, 그 에필로그에 관해서는 얘기가 다릅니다만). 하지만 저는 그것을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마음에 그리고 있습니다. 헤겔이 말하듯이, 만일 활동action(‘행위doing’)이 부정성이라면, ‘할 수 있는 것을 더 이상 아무것도갖고 있지 못한 자의 부정성이 사라질[의미가 없어질] 것인지 아니면 일련의 사용 없는 부정성이라는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인지 여부에 관한 질문이 생겨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즉 제 자신을 이런 사용 없는 부정성이라고만 결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제 자신이 이런 사용 없는 부정성에 다름 아니기에, 제게는 앞의 선택지 중 어느 한쪽 밖에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그렇다고 해서 제가 제 자신을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헤겔이 그런 가능성을 예견했다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가능성을 자신이 기술한 과정의 종언에 위치시키지 않습니다. 저는 제 삶 혹은 오히려 제 삶의 포기aborting, 제 삶인 열린 상처 이 그 자체에 의해 헤겔의 닫힌 체계에 대한 반박을 구성한다고 상상합니다. (Hollier, 111).

 

그래서 역사의 종언은 에로티시즘, 웃음, 죽음을 앞둔 기쁨 같은 형식에서 나머지remnant로서 인간의 부정성이 보존되는 하나의 에필로그를 포함한다[가져온다]. 이 에필로그의 불분명한 빛 아래에서, 지고하고 자기 의식적인[자기 의식을 지닌 지고의] 현자는 눈앞에서 다시금 스쳐지나가는 동물들의 머리가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경건한 사람들[hommes farouchement religieux], ‘연인들혹은 마법사의 제자들이라는 무두(아세팔)의 형상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에필로그도 [그 자체로] 연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 발각된다. 이제 전쟁이 불가피해진 1939, 콜레주드소시올로지의 선언은 대대적인 거세(devirilization)’의 한 가지 형식으로서의 전쟁을 앞두고 수동성과 반작용의 부재[무저항]를 표명함으로써denouncing, 뜻하지 않게 자신들의 무능을 누설한다betrays its impotence. 거세에서 인간은 이른바 도살장에서 의식을 차렸으나 체념해버린 양conscious sheep resigned to the slaughterhouse”(Hollier, 58-59)으로 변형된다. 코제브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기는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이제 또 다시 동물이 된다[동물로 돌아갔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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