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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에서 도래할 정의로

: 데리다의 책임과 정의에 관한 사유

応答からたるべき正義

―― デリダの責任正義をめぐる思考――

Realizing Justice by Responding to the Other

Jacques Derrida's Philosophical Thinking on Responsibility and Justice

 

노부유키 카키기(柿木伸之)

Hiroshima Journal of International Studies Volume 10 2004

 

. 지금 왜 도래할 정의인가?

. 타자에 대한 응답에 기초한 탈구축적 정치적 실천으로

. ‘법의 힘을 지켜보기

. 정의에 대한 호명, 그 응답과 책임의 아포리아

. 응답으로서의 사유에서 새로운 정의로

 

 

1. 도래할 정의인가?

어떤 하나의, 그리고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내세우는 그 사람이 그것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율스런 힘을 행사하고 있다. 21세기가 시작한 이래, 도대체 몇 번이나 그런 광경을 목격했던가.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과 인종청소가 끊이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흔히 전쟁의 세기라고 불렸던 20세기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한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너무도 손쉽게 그들인 타자들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되어 버렸다. 오늘날 정의라는 말은 대테러 전쟁이나 성전聖戰을 일으키고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어떤 특정한 우리를 위해 정당화하는, 알맹이 없는 슬로건으로 변해버렸다.

미국의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유럽의 거리에는 도저히 떨어뜨릴 수 없는 강력한 폭탄의 비를 퍼붓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무한한 정의라는 말을 보자.[주1] 그것은 이 무한한 정의작전으로 실행에 옮기고자 할 때 그 총책임자가 말한 것, 우리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아군이 될 것인가라는 말로 상징되듯이, ‘우리테러리스트’·‘인 그들을 구별하는 것, 이 구별이 무한하게 이뤄지는 것, 그리하여 그들편으로 분류된 타자들이 무한하게 배제되고 있는 것이 이 세계의 신질서임을 증표하는 게 아닐까?[주2]그렇다면 이 무한한 정의란 타자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부정의를 통해 우리의 지위와 권익을 확보하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는 것, 바꿔 말하면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어떤 전체주의적 정당의 슬로건이라고 말했던 전쟁은 평화다와 같은 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주3]

[주1]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침략과 나란히 오폭에 의해 몇몇 마을과 집들이 파괴되고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고 보고하는 가운데, 작가인 헨미 요(辺見庸)가 제기한, “전술핵 수준의 위력이 있는 대형폭탄을 아프가니스탄보다 수백배나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그러한[유럽 등의] 현대 도시에 투하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200218일자 아사히신문)은 중요하다. 이 폭탄의 사용 때문에 미국정부에 의한 명령의 선별을 느끼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주2] 걸프전쟁 당시에 제창되고 미국과 그 동맹국에 의한 이른바 대테러전쟁이 실현시키고자 한 냉전 후의 신세계질서西谷(2002)에 따르면, 대항해시대 이후 “5세기에 걸친 서양에 의한 세계의 일원화, 세계전쟁에 의해 완료된 세계의 일원화를 서구 국가들의 헤게모니에서 영속화하고자 하는 지배체제”(18)인 동시에, “이 질서가 부담/짐의 형태로 빛에 쪼이기 시작한 비문명세계이물질을 철저하게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결속한, 항구적인 전쟁의 체제”(21)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정의란 자신의 손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증오하는 이물질을 산출하면서 그 이물질을 언제까지나 배제하는 전쟁, 즉 칼 슈미트적인 예외상태를 항구화하는 것이 질서이며 정의라고 선언하는 말이라고 할 것이다

[주3] 미국정부가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서 계획했던 아프가니스탄 공격 작전은 당초 무한한 정의작전이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아랍만이 무한한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무슬림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불후의 자유작전으로 개칭되었다. 그렇지만 무한한 정의라고 말하든, ‘불후의 자유라고 말하든, ‘미국적 생활양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의자유의 타자를 얼마든지 희생시켜도 좋다는 무시무시한 산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산술이 초래한 희생을 위해/때문에 미국적 생활양식의 은총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테러에 대한 끝나지 않는 공포에 빠뜨리는 것에 관해서는 Roy(2001)를 참조

이처럼 힘 있는 사람의 손에 건네진 정의라는 말이, 이제 그들에 대한 부정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폭력의 위장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힘 있는 자가 말하는 정의와는 다른 정의는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정의일까? 이 글에서 매달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물음이다. 이를 위해 자크 데리다가 1980년대 말경부터 전개한 법의 탈구축(déconstruction)’을 둘러싼 사고와, 이것에 이어서 펼쳐진 책임의 아포리아(apories de la responsabilité)’를 둘러싼 사고를 밑바탕으로 삼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데리다가 1920년대 초반에 쓰여진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서 법이 실효성을 지닌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에, 법 외부의 타자를, 법이 설정한 경계의 바깥으로 배제하고 내던지는 힘 또는 폭력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을 간파한 다음에, ‘정의(justice/Gerechtigkeit)’를 결코 동일한 평면 위에 서 있지 않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법의 탈구축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다.[주4이처럼 법 자체에 내재하는 타자를 배제하는 힘을 통찰하는데 있어서 정의를, 법 외적인 타자와의 사이에서 말해야만 하는 것으로 탐구하는 시도는 정의를 법과 손쉽게 동일시하고 정의를 동일한 평면 위에서 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즉 동류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지금까지의 철학적 정의론의 전통에 비춰본다면, 이것이야말로 법 외적인것이리라. 그렇지만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이 법 외적인정의론의 시도이지 않을까?

[주4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경계설정/획정(Grenzsetzung)’법정립적 폭력(rechtssetzende Gewalt)’ 일반의 원현상(Urphänomen)으로 간주한다(Benjamin 1921: 198). 어떤 정의를 힘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즉 하나의 법을 세우는 것 자체가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힘 또는 폭력의 행사이며, 그 힘은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다. 법은 강제력이 있는 말로 제도적 질서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이 법질서의 내부에서 그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정의를 실효적인 힘을 갖춘 것으로 구현시키는 것인데, 그와 동시에 하나의 법질서의 경계를 설정하고, 그 외부를, 법 바깥의 타자들을 유기(遺棄)하는 것이다. 이러한 벤야민의 통찰이 법은 탈구축 가능하며, ‘정의가 아니다라고 하는 데리다의 법의 힘의 논의에 커다란 영감을 주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적법성과 균등성을 정의로 간주하고, 이것을 국가 공동체의 자유로운 그 때문에 여성이나 노예를 배제한 구성원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시작으로, 전통적인 정의론의 상당수는 기존의 법을 정의의 조건으로 간주하고 어떤 법질서의 내부에서만 적용되는 정의만을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법의 존재에 입각하여 정의를 말한다면, 현행 법 자체의 올바름, 즉 법의 정의를 정초할 수 없으며, 더구나 법의 존재 자체가 법질서로 편입되지 않은 타자를 배제하는 힘 또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간파할 수 없게 된다. 이와 반대로, 현대의 정의론을 대표하는 논자인 존 롤즈는 미국의 공민권 운동이나 베트남 반전운동의 고조를 배경으로, ‘정의’, 즉 그가 말한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가 실현되는 것이 법의 성립조건이자 법이 기초한 공동체의 성립 조건이라고 논했다. 법이 정의의 조건이 아니라 정의가 법의 조건인 것이다. 확실히 정의의 실현을 법의 성립 조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법의 폭력을 다만 사회의 소수자나 이른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 것이다. 그렇지만 롤즈의 정의론은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법 그 자체가 늘 정당화될 수 없는 힘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힘이 손쉽게 법 외적인타자에 대한 부정의한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까지 주제화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무지의 베일을 쓰고 있는 일정한 원초적 상태를 상정한다는 것은 그가 동일한 평면 위에서 법을 공유할 수 있는 인간들 사이에서만 정의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정의를 하나의 법의 형태로 말하는 것이 너무도 손쉽게 법 외적인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전화하고 있는 현재에서 요구되는 것은 법의 형태로 정의를 말하는 것 자체가 행사하는 힘을 급진적으로 떠내밀며, 그것을 살펴본 위에서, 정의의 가능성을, 여기에 있는 자본에 있어서 늘 미래의 존재이며, 자신 앞에 늘 법 외적인방식으로 도래하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요구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실제로 데리다는 정의는 그러한 타자와의 사이에 도래’(avenir)로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가 도래하는 것 없이 정의는 없다”(Derrida 1994 : 60). 그에게는 이 도래할정의야말로 법질서의 성립조건인 것이다.[주5]  또한 여기서 데리다의 사유를 다루는 이유로서, 그가 타자에 대한 책임(responsabilité/Verantwortung)’을 떠맡는 것을, ‘법의 탈구축을 통해서 이 도래할정의로 향하게 하는 출발점으로 간주한는 것, 나아가 그가 이 책임을 떠맡는 것과 관련된 어려움도 지적한다는 점도 거론해야만 한다.[주6]  여기서 책임이란 무엇보다 우선 타자에 대한 응답 가능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주7]  그에 따르면, 타자에 응하는 것, 그것은 우선 타자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리하여 타자에 대해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은 이 타자에 대한 자신의 응답 가능성, 즉 책임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실제의 응답은 법의 탈구축이라는 형태로 수행된다. , 타자가 정의에 호소하는 것을 듣고, 그것에 반응하는 형태로 기존의 법을 일단 해체하고 법에 정의를 새롭게 체현시키려고 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책임이 도출될 수 있다. 데리다는 이렇게 타자에 응답하고, 이 세계에 정의를 실현시키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난점을 책임의 아포리아로 묘사한다. 우리는 전면적으로, 그야말로 무한하게 정의로운 방식으로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는 없다. 어떤 타자에 대해 응답하고자 할 때, 그 밖의 타자들을 희생시키고, 이 타자들에 대해서는 부정의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타자에 응답하는 것을 통해 도래할 정의로 향한다는 것은, 그러한 자기 자신 속의 모순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하여 아포리아를 견뎌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의로 향하는 것이 타자에 대한 책임에 기초한다는 것임을 책임 자체의 성립으로부터 밝히며 이와 더불어 책임을 떠맡는 것에 들러붙어 있는 곤란을 은폐하지 않고 내밀어내는 사유도, 좁은 소견인 한에서 데리다 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정도로까지 철저한 사유야말로 21세기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정의로 향한 자기 자신의 사유의 가능성을 자기 비판적으로 이것이야말로 칸트의 비판과도 닮은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확인해보기 위해서, 우선 실마리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주5서구형이상학의 전통의 틀 안에 있는 정의론과 데리다의 도래할 정의를 둘러싼 논의 사이의 이러한 대비에 관해서 (2002)를 참조. 또한 타자가 자기에 대해 늘 법 바깥의 존재로서 나타난다는 것을 레비나스(1971)는 타자의 얼굴(visage)’이라고 표현한다. “나의 내부인 타자의 관념을 초과하는 타자가 현전하는 그런 방식을 우리는 여기서 얼굴이라고 호칭한다”(43). 

[주6오카노(岡野, 2002)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Arendt 1998: 63)에서 법이 고대 그리스에서 본래 공적 영역사적 영역을 나누는 경계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고, 법이 그 자체로 경계로서의 이분법에 기초하여, ‘법 바깥의 사람을 법의 효과로서 산출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岡野2002: 60)고 지적하고, 그 배타적인 폭력을 비판할 수 있는 지점을 법 바깥의타자에 응답하는 것, 그리고 그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탐색한다. 이 논고를 쓰는 데 있어서 이 논의로부터 많은 시사점을 얻었음을 적어둔다

[주7데리다가 책임응답 가능성으로서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 가라타니(柄谷, 2001)는 이렇게 말한다. “책임은 타자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타난다. 오히려 타자에의 응답이라는 것이 사람을 자유의 차원으로 몰아넣는다”(182).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응답 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책임을 냉전 이후의 증언의 시대에서 일본인전후 책임으로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타자들과의 사이에 새로운 평화로 나아가는 관계들을 구축할 가능성에 관해서는 다카하시(高橋, 1999)를 참조

그런데 이렇게 데리다의 책임과 정의를 둘러싼 사유를 더듬어가는 논고의 목적도, 여기서 말하고 싶다. 이 논고는 지금까지 정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법 그 자체에 내재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일 수 있는 힘을 끝까지 지켜본 위에서, 정의를 항상 미래로서 도래할 타자에 대한 응답을 기점으로 하여 추구되어야 할 도래해야 할정의로서 파악하는 것인 동시에, 이 정의를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며 추구하는 데 있어서의 피하기 힘든 어려움을 지적하는 데리다의 사고를 더듬어가며, 그것을 통해 한줌의 사람들의 이익을 대표하고 부정의를 정당화하는 정의가 목소리 높여 말해지는 가운데, 정의가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정의에 대한 요청이 점점 절박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향해 말할 수 있는 정의의 장소를, 타자로부터의 그러한 새로운 정의에의 요청을 귀 기울여 듣고, 그것에 응답하는 가운데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만일을 위해 덧붙여 둔다면, 여기서 법 그 자체에 내재하는 힘에 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결코 법의 의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어떤 하나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라고 불리는 것에 관해 비판적 고찰을 가하는 것을 통해 법에 새로운 정의를 체현시켜 가는, 도래할 정의를 향해 법을 재구축할 가능성을, 그 어려움도 놓치지 않으면서 법의 바깥인 타자와의 사이에 열고자 하는 것이다.[주8]

[주8] 이런 점에서 여기서의 시도는 부정의한 법도 법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법을 정의로의 기획으로 파악하는 이노우에 타츠오(井上達夫)의 논의와도 공명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법이 기획하는 것은 단순한 질서유지나 예견 불가능성 보장도, 사랑이나 행복의 성취도 아니고, 아니 그것 이상으로, 정의의 실현이다”(井上2003: i). 다만 그렇게 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의 개념의 철학적 재검토가, 더 나아가 탈구축이 필요하다는 것도 여기서 보여주면 좋을 것이다



. 타자에 대한 응답에 기초한 탈구축적 정치적 실천으로

데리다는 2001년에 프랑크푸르트시에서 아도르노상을 받았는데, 그 수상에 즈음하여 Die Welt 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기묘하게도 아도르노의 생일인 911일에 미국의 중심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한없는 애도를 표명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한 대답이 다소나마 맹목적인 군사적 대답으로 한정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의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치의 변화를. 정치적 전환만이 미래에 대해 이렇게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공격을 불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정치의 변화’, ‘정치적 전환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데리다는 테러리즘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변하는 형태로, 그 변화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관계를, 서구의 나라들, 미국이나 유럽의 나라들과 이슬람-아랍 국가들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유럽인들은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관계를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주9]  좁은 구역에 가둬지고, 가난한 생활을 강제하는 잠정적 자치 정부 통치 하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 압도적인 부와 힘을 휘두르는 이스라엘 국가는 보복이라는 미명하에 노골적으로 군대를 파병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이름하에 유대인의 이주를 추진하며, 총과 불도저로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역을 침식하고, 그 토지와 생활의 터전을 빼앗아 왔다.[주10]  그것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떤 유효한 움직임도 하지 않았던 유럽의 정치적 자세가 이제 추궁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에 사람들의 공정한 관계가 도입되지 않는 한, 또 세계에 편재한 부의 압도적인 불균형이 시정되지 않는 한, 타자와의 사이의 도랑[간극] 위에 축적된 증오의 절망적인 분출은, 지금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반복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관계를 올바른 것으로 바꾸도록, 이스라엘에, 그 사람들에게 촉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관계를 올바른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데리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치의 변화또는 서구의 풍요로운 나라들과 이슬람-아랍 국가들의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전환이라는 말로 생각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게 부연할 수 있을 것이다.

[주9위의 인용은 Derrida(2001)로부터. 아도르노상 수상 기념 강연(Derrida 2002)에서 그는 인터뷰와 마찬가지로 “911일의 희생자들에게 무조건의 동정을 보냅니다라고 하면서, “그래도 이 범죄를 앞에 두고선 그 누구도 억울하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37)고 말한다. 그가 그 누구도 억울하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점에 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것이다

[주10이 점에 관해서는 무엇보다 마리 오카(, 2001)를 참조

그런데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올바른 것으로 바꿔가는 정치의 변화정치적 전환그 자체를, 데리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것에 관해서는 다른 인터뷰에서 그가 한 발언이 실마리가 될 것이다. 거기서 그는 법에 정의를 체현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법은 결코 정의로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정의는 법률에 귀착시킬 수 없으며, 법률과의 관계에서는 정의의 과잉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구체적이고 실효적이기 위해서는 법률이나 입법에 의해 구현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나는 시도했습니다. 물론, 어떠한 법률도 정의에 적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외침은 아닌 게 아니라 무한하기 때문입니다”(Derrida 1999b : 105).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법은 타자와의 관계를 규정한다.[주11]  그러한 법에 정의를 체현시켜야만 한다. 그렇다면 정치의 변화정치적 전환이라는 말로 데리다가 생각하는 것은, 우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실효적인 법에 정의를 체현시켜가는 정치적 실천이다. 더욱이 그것이 변화또는 전환일 때, 그 실천 속에는 거기서 정해져 있는 법을 바꾸는 것, 즉 타자들 사이에 있는 기존의 경계를 해체하고 타자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포함된다.[주12]  이것을 데리다는 법의 탈구축(해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주11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5(1925: 1129a-1130a)에서 정의를 기본적으로 타자를 향한 덕이라고 정의한 후, 그것이 타자와의 공평한 관계를 규정하는 법의 형태로 실현된다고 말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즈마 히로키(, 2002)을 참조. 또한 아렌트는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법을 상이한 존재 사이에 있는 관계라고 정의한 점에 주목한다(Arendt 1998: 190-191).

[주12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적인 활동(action)’에 관해, 그것은 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일체의 제한을 해방하고 일체의 경계선을 돌파한다는 경향이 내재한다”(Arendt 1998: 190)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아렌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법의 탈구축과 그것에 의한 타자와의 관계의 새로운 구축이야말로 시작으로서의 정치의 본뜻이라는 것이 되는데, 오카노 야요(岡野, 2002)는 법 그 자체에 내재한 힘을 응시하면서 그런 의미에서의 정치를, 나아가 타자에의 응답에, 즉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윤리에 연결시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에 정의를 체현시키는 정치적 실천이 타자로부터의 정의의 외침에 응답하는 형태로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데리다가 암시한다는 점이다. 나중에 드러나듯이, ‘정의의 외침을 경청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것이 이 정치적 실천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타자와의 사이에 있는 정의에의 길의 출발점에 있는 것은, 타자에의, 정의의 외침에의 응답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은 국가의 힘 등이 아니라 우리 한 명 한 명의 타자에의 응답 가능성인 것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이처럼 법에 정의를 체현시킬 것을 요구하는 한편, 법은 결코 정의와 합치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정의를 말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할 법, 이것이 정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한 가지로는, ‘타자라는 존재가 늘 자기에 대해, 또한 그것이 품은 관념들에 대해 바로 타자로서,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그 때문에 기성의 법으로 회수될 수 없는 방식으로 도래하는 이상, 정의의 외침무한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경계를 획정하고 타자와의 사이의 어떤 일정한 관계를 한정하는 법은, 그것에 결코 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주13]  나아가 데리다는 그 자체로 무한한 타자로부터의 정의의 외침무한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법의 기원에, 즉 법이 구속력이 있는 /법률/법칙(loi)’으로서 존재하는 것의 시작에,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그러한 힘이 존재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법은 결코 정의와 완전하게 겹칠 수 없는 것이다. 1989년에 뉴욕의 카도조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탈구축과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콜로키엄의 기조강연으로 발표되고 나중에 법의 힘 : ‘권위의 신화적 기초1부에 수록된 /권리로부터 정의로는 법의 존재 그 자체 속에 그렇게 늘 타자에 대한 폭력이 있을 수 있는 힘의 소재를 확정하는 동시에, 법의 탈구축속에서 정의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자 하는 것이었다.[주14]  그 텍스트는 미국에서 법학의 다양한 분야에 데리다의 탈구축이론을 적용하고자 하는 비판법학(critical legal studies)’의 운동이 왕성해졌던 것을 배경으로 발표되고, 비판법학학파에 속한 법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이와 동시에 데리다의 탈구축자체의 최초의 모티프를 표면에 드러나게 해 주기도 했다.[주15] 탈구축이라는 프로그램은 원래 처음부터 타자와의 사이에 있는 정의를 향해서, ‘으로서의 힘을 지닌 구조나 계층질서를 뒤흔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정의를 법의 형태로 말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을 통해서 법의 바깥인 타자와의 사이에 있는 정의를 향한 법의 탈구축의 가능성을 여는 텍스트로서 /권리로부터 정의로에 주목하고 싶다.

[주13데리다가 여기서 타자로부터의 정의의 부름무한하다고 말하는데, ‘존재론전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자아의 내적 관념을 늘 능가하는 무한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타자를 말하는 레비나스의 타자론(cf. Lévinas 1971: 43)의 메아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주14데리다의 법의 힘 : 권위의 신비적 기초1부인 /권리로부터 정의로, 1990년에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분교에서의 콜로키엄 나치즘과 궁극의 해결’ : 표상의 한계를 탐색한다에서 발표된 원고에 기초한 2벤야민의 고유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에는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탈구축적재해석이 제시되어 있다. 추기(追記)’에서 신적 폭력을 말하는 벤야민의 사상과 나치의 궁극의 해결을 연결시킨 것에 관해서는 벤야민 연구자들의 반론을 불러왔으며, 또한 데리다의 신의 폭력의 해석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이러한 반론의 하나로서 Menninghaus(1992)를 거론하는데 그치며, 데리다에 의한 벤야민 해석의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을 것이다

[주15이 점에 관해서는 다카하시(高橋, 1998: 180-188)를 참조

 

III. ‘법의 힘을 지켜보기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법의 탈구축을 전개하기에 즈음해, “[](loix)이 신봉되는 것은 그것들이 정의에 들어맞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들이 법이기 때문이다라는 몽테뉴의 에세의 말을 인용한다. 몽테뉴에 따르면, 오로지 그것이 법이다라는 동어반복적인 신비적 기초이외에는 법의 기초가 없으며, 그 때문에 법은 그 자체로서 정의에 기초한 것일 수 없다. 오히려 그렇게 법이 이라는 것, 즉 법이 구속력을 지닌 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 속에 해석의 폭력(violence interprétative)’ (Derrida 1994: 33)이라고 말해야 하고 또 결코 정당할 수 없는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에게 몽테뉴가 말한 법의 신비적 기초란 법이 그 존립의 근저에 있어서 힘이나 권력이나 폭력 등과 보다 내적이고 복잡한 관계를 지닌다”(Derrida 1994: 32)는 것, 그리고 이러한 힘에 보증을 줄 수 없는”(Derrida 1994: 33) 것을 알아맞히는 말인 것이다. 법에 이러한 정당화활 수 없는 힘이 내재한다는 것은 법이 계속해서 사람들의 인 동안에는 결코 물어질 수 없다. 자명한 인 한에서, 기초에 있는 힘은 신비라는 것에 머문다.

 그렇다면 왜 데리다에게 법의 신비적 기초를 이루는 힘이 해석의 그것일까? 그것은 법이라는 것이, ‘법해석이 행해짐으로써 비로소 효력이 있는 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석은 법으로서 말해진 말을 어떤 상황에 적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법을 해석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상황을 앞에 두고, 어떤 법의 말을, 그 상황에 타당한 것으로서 늘 새롭게 찾아내고, 그것을 당사자에게 효력이 있는 것으로서 상황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어떠한 법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육법전서에 단순히 쓰여져 있는 것만으로 끝나는 법을, ‘이라고 부를 수 없는 없다. 어떤 상황에 적용하는 법해석이 행해질 때에야 비로소 그 주체는 쓰여져 있는 말을 이라고 파악하는 자라면 누구든 개의치 않을 것이다 거기에 쓰여져 있는 법조문은 상황의 당사자에게 으로서의 강제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법이 이러한 적용으로서의 해석과 더불어, 늘 새롭게 효력이 있는 으로서 출현할 때, 즉 법이 어떤 정의를 말하기 시작할 때, “하나의 행위수행적인 힘(une force performative)”(Derrida 1994:32)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수행적 힘이란 늘 해석의 힘이며, 신봉하라고/하듯이 호소하는 힘이다”(Derrida 1994: 32)라고 말한다. 법의 해석 그렇다면 이것은 적용인 동시에 이미 행위수행(performance)인 해석(interprétation)인데 은 그 법이 지배하는 장을 출현시키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법이 어떤 정의를 말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 그 법을 따른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사람들을 강제하는 힘을 갖고 있는 발화수행인 것이다. 더욱이 법을 신봉하는것 속에는 그 법이 어떤 상황을 향해서 말을 건네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장래에 걸쳐서 줄곧 동일하게 해석되고 동일한 구속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법의 해석이 그 법의 지배 하에 놓여야 할 사람들에게 미치는 힘은 특정한 행동을 강제하기도 하고 금지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 강제력을 지닌 법이 늘 정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믿는다는 것을, 즉 그 전제를 묻지 않도록 명령하는 힘이기도 하다는 점이 된다. 데리다식으로 말한다면, 하나의 법의 출현이란 그 법이 자신의 소리를 듣는반복에의 구속이 자명한 것으로서 공유되는 것이다.[주16]

[주16이러한 법의 음성중심주의에 관해 나카마사 마사키(仲正, 2003: 101-104)를 참조

 이처럼 데리다에 따르면, 사람들에 대해서 특정한 행동을 강제하고 더욱이 자기 자신의 정의의 자명성을 신봉하는 것을 강제하는 해석의 힘이 하나의 의 말이 효력이 있는 법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할 때 늘 작동하며,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법의 존재의 기초를 이루는 힘 자체를 정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떤 정의를 말하는 법이란, 그 자체로서는 사람들을 정의로 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봉하게끔 호소하는 힘으로서, 법의 자기 보존에 사람들을, 가타부타를 말하지 않고 말려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는 법의 힘을 해석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법의 존재 그 자체 속에,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말했던 법정립적 폭력법보전적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이 서로 긴밀하게 유착된 형태로 작동하는 것이다.[주17]  법은 기존의 법이든 새롭게 수립된 법이든, 그것을 어떤 상황에 적용하는 해석에 의해 늘 새롭게 말해진다. 그리고 이 발화행위에는 그 법이 반복하고 마찬가지로 준수되는 것을 강제하는 힘이 포함되어 있다. ‘인도적이라고 말해지는 법도, 그것이 인 한에서, 이러한 힘을 사람들에게 미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더욱이 이 힘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정의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언제나 폭력으로서 고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벤야민에 따르면 법은 늘 이런 법의 신비적 기초를 이루는 힘을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음이 망각되면, 법질서는 쉽게 부정의한 폭력의 체계가 되어버린다. “법적 제도 속에는 폭력이 잠재해 있다는 의식이 소멸하면, 그 법적 제도는 타락한다”(Benjamin 1921:190). 그렇게 되면, 어떤 법질서가 계속해서 정의로운 것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폭력을 이른바 탈신비화하여 바로잡는 자기의 탈구축이 끊임없이 요구되게 될 것이다.

[주17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법정립적 폭력법보전적 폭력을 구별하고자 하는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벤야민에 대해 극히 비판적으로, “/권리를 정초하는, 또는 그것을 정립하는 폭력(법정립적 폭력)은 법/권리를 유지하는 폭력(법보존적 폭력)을 포괄해야만 하며, 또한 그것과 손을 뗄 수 없다”(Derrida 1994: 93-94)고 말한다

 그런데 법의 존립의 근저를 이루는 힘은, 사람들의 행동을 강제하고 사람들에게 법을 자명한 정의라고 신봉하게 만드는 것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이미 봤듯이, 법은 경계를 획정하는 것이며, 경계의 획정에 의해서 법의 바깥인 타자들을 배제하는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때 경계의 내부에 있는 우리의 구성원에게도 일정한 정체성/동일성을 할당하며, ‘우리한 사람 한 사람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서 가시화하는 힘도 동시에 행사한다. 그 힘은 사람들이 법이 정한 선을 이탈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권력의 모습이 대표하는 것이리라. 실제로 벤야민은 법이 그 자기 보존을 향해 정립되는 것 속에서 권력의 정립’(Machtsetzung) (Benjamin 1921: 198)을 간파했다. 그에 따르면, 법은 결국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특권(Vorrecht)’ (Benjamin 1921: 198)을 보증하는 것일 수밖에 없지만, 특권을 보증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표상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법의 유효성에 의해 권력자들의 특권을 보증하는 권력’, 그것은 자신의 지배력이 미치는 범위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것을 어떤 일정한 정체성/동일성에 있어서 표상하는 힘의 주체에 다름 아니다. 그 때문에 권력에 의한 법질서의 구축이란 동시에 그 내부에 있는 것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서 가시화하는 힘의 조성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권리(droit)’계산이 작동하는 장(l'élément du calcul, 계산의 기초)’(Derrida 1994: 38)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법이 사람들을 일정한 계산 가능한 정체성의 담지자로 표상하는 것을 벤야민은 더 나아가 정의와는 상당히 먼 폭력으로 그리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한 명 한 명에게 어떤 유일한 운명(ein einziges Schicksal)”(Benjamin 1921: 187)을 할당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운명을 지배하는 힘을 그는 신화적 폭력(mythische Gewalt)’(Benjamin 1921:197)이라 부른다. 법의 힘은 그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올바름을 다시 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마치 하나의 신화로서, 하나의 운명을 짐 지우는 것이다.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같은 시기에 쓴 에세이 운명과 성격에 따르면,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죄와 그 응보의 등가교환의 중단없는/부단한 연관이라고도 말해야 할 죄책연관(Schuldzusammenhang)’(Benjamin 1919: 175)에 한 명 한 명을 집어넣는 것이다. , 법질서 속에서 일정한 정체성 벤야민에게 이것은 강제적인 운명인데 을 보증받는다는 것은, 권력이 정한 선을 넘어서면 그것에 마땅한 벌을 지게 된다는 응보의 연쇄 자체의 올바름을 다시 물을 수 없는 위치에 빠뜨려진다는 것이다. 그에게 법의 힘이란 사람들을 그러한 위치에 가둬버리는 신화적 폭력인 것이다.

더욱이 벤야민에 따르면, 법의 신화적 폭력은 자신이 계속 신화일 수 있기 위해서, 신비적 기초신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는 자기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그것을 강화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오늘날 몇몇 지역에 남아 있는 사형인 것이다. 이 사형의 집행과 더불어 법의 힘은 벌거벗은 폭력으로서 모습을 드러내며, 동시에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 폭력이 법질서 속에 출현할 때에는 최고의 폭력, 생사를 지배하는 폭력이 되며, 법질서의 근원들이 현존하는 것 속에 대표하는 것이 되어 돌출하게 되며, 거기서 가공할만한 모습을 현현시키게 된다. 사형의 의미란 실제로 법률 위반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권리를 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생사를 지배하는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법은 다른 어떠한 법집행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자기 자신을 강화하기 때문이다”(Benjamin 1921: 188). 이처럼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벤야민의 논의를 따른다면, 사람들을 특정한 행동으로 나아가게끔 하고/정향하고, 계산 가능성의 틀로 지배하는 법 그 자체의 힘이란 한 명 한 명에게 어떤 운명을 짐 지우는 폭력일 뿐만 아니라, 법의 자기 보존을 위해 죽음을 초래하는 폭력일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어떠한 법질서든 그 자체로서는 그러한 힘에 의한 구축물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벤야민의 논의를 토대로 데리다는 /권리는 정의가 아니다”(Derrida1994: 38)고 단언하며, “/권리는 본질적으로 탈구축 가능하다”(Derrida 1994: 34)고 갈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봤듯이, “힘이나 권력이나 폭력 등과 같은 것과 보다 내적이고 복잡한 관계를 지니기위해서 법은 본질적으로정의일 수 없다고 이론적으로는 말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정의를 말하는 법이, 즉 각각의 법률이나 법규나 그것에 기초한 하나의 법질서가 정의가 아니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시점時点에서일까? 그것은 법의 힘이 바로 폭력이라는 것에 직면하는 순간일 수밖에 없다. 사형비판 속에서 법의 폭력에 대한 본질적 비판을 발견한 벤야민은 보다 섬세한 감정에는 바로 이 생사를 지배하는 폭력의 행사 속에서 어딘가, 뭔가 썩은 것(etwas Morsches)이 아주 확실하게 느껴진다”(Benjamin 1921: 188)고 말한다. 그 폭력이 타자에게 합법적인 죽음을 초래할 때, 법질서라는 구조물을 떠받치는 힘이 뭔가 썩은폭력에 다름 아니라는 점이 폭로된다. 여기서 그 힘이 부패한 폭력이라는 점을 감지한다는 것은 그 힘에 대한 고발을 경청한다는 것이다. 폭력이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으로서 고발되는 힘이며, 어떤 힘에 대한 타자의 고발을 경청하고, 그 고발을 분유할 때 비로소 타자에 대해 가해진 힘을, 바로 폭력으로서 간주하게 되기 때문이다.[주18]  그렇다면, 법은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힘의 부정의를 호소하는 타자의 말에 불러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소리없는 외침일 수도 있으며, 또는 다양한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고 뒤늦게 전해지는 소리일 수도 있다. 이런 타자의 말에 의해 예기치 않게 불러세워지는 사람은 어떤 정의가 법의 형태로 말해지는 테러를 목격하게 되는 동시에, 그 법의 썩어 문드러짐을, 즉 법질서의 빈틈/틈새을 간파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일개 법질서가 폐허가 되는 지점으로부터 법의 탈구축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법의 힘의 부정의를 호소하는 형태로 법질서의 예측 가능성의 한계에서 전달되는, 절박한 정의에의 부름에 응답하고, 법 및 법질서를, 도래할 정의를 체현하는 것으로 안쪽에서부터 바꿔가는 것, 그것이 타자의 긍정으로 일관하는 탈구축의 수행일 것이다.[주19]

[주18사토 요시미치(斎藤慶典)힘이 폭력으로 전화하는 것은 어떤 것의 어떤 것에 대한 작용이 그 작용을 당하는 것의 이름으로 고발될 때이다고 논한다(1997:35). 그에 따르면 고발하는 것은 더 이상 작용을 당하는 것자신이 아닐 수도 있지만, 힘의 행사자 또는 제3자가 그 고발을 경청할 때, 어떤 힘은 배제되어야 할 폭력으로서 끝까지 지켜보게 되어야 할 것이 된다

[주19데리다의 탈구축의 철학이 결코 파괴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긍정에 철저하다는 점에 관해서는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의 데리다론(1998)을 참조

현재의 세계에는 아직 정의는 도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를 사칭하는 노골적인 테러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그 속에 있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또한 어쩌면 계산 가능성의 틀 안에서는 れない/나눠 떨어지지 않는 외침의 형태로, 어떤 정의를 사칭하는 힘의 부정의를 호소하는 타자의 말이, 도래할 정의에의 외침[호명]으로서 도래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 타자의 말에 대해 귀를 닫고 폭력으로부터 눈을 돌리면서 타자를 부정하고 간접적으로든 정의를 사칭하는 권력에 손을 빌려주고, 그리고 정의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데리다는 미래로서의 정의는 계산 불가능’(Derrida 1994: 38)한 동시에, ‘기다려주지 않는다’(Derrida 1994: 57)고 말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때 이 타자에 의해 절망되고 잇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향해서 계산 불가능한 것을 계산에 넣는”(Derrida 1994: 38) 실천이, 즉 타자의 긍정에 기초하여 법의 탈구축의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타자들의 호소에 의해 불러세워지고, 법의 힘을 폭력으로서 주시하는 그때, 도래할 정의에의 외침을 경청하는 것은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가? , 이 타자로부터의 부름을, 어떠한 입장에서 경철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로부터 타자로서의 타자의 부름에 어덯게 응답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어서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기 위한 실마리를 응답 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을 둘러싼 데리다의 사유 속에서 탐색하고 싶다. 그의 사유 속에서 그가 법의 힘에서 정의를 불가능한 것의 경험(expérience de l'impossible)’이라고 정의하고, “이 아포리아의 경험(expérience de l'aporie)이 아무리 불가능하다고 할 때에도, 그것 없이 정의는 없다”(Derrida 1994: 38)고 말할 때 상정되고 있는, 타자를 앞에 두고 우리들의 몸을 찢기는 듯한 경험이 전개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러한 경험을 헤쳐나가지 않고서 타자와의 사이에 있는 도래할 정의에 이르는 한 걸음을 내디딜 수는 없다.

 

IV. 정의에의 외침에 대한 응답과 책임의 아포리아

데리다가 응답 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을 둘러싼 사유를 전개하는 텍스트로서 여기서 다루고 싶은 것은 법의 힘의 출판보다 3년 후인 1992년에 발표된 죽음을 주다이다.[주20이 책에서는 구약성서의 창세기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삭 봉헌이 죽음의 증여로서 주제화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신의 부름에 , 저는 여기에라고 답하는 시점부터 시작되는데, 데리다에 다르면 타자의 부름에 나는 여기에(me voici)”라고 답하는 지금이란 책임의 근원적 순간(le moment originaire de la responsabilité)”(Derrida 1999a: 102)이다. “나는 여기에란 또한 타자의 부름에 대한 가능한, 또한 최초의 응답이며, 이 응답 속에서 나는 나를 부르는 특이한 타자(l'autre singulier)에게 몸을 드러낸다”(Derrida 1999a: 102)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그다지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보기 드문 이 말은 한 명의 특이한 타자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긍정하고, 그 타자에게 여기에 있는 자신을 내밀고[제출하고], 그리하여 타자에의 회로를 여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데리다에 따르면, 이 응답의 말과 더불어, 한 명의 타자에 대한 책임이 떠맡아지게 된다. 그때 타자에 응하여,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맡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의 아포리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입각해 서술한다.

[주20죽음을 주다(Donner la mort)를 인용할 때, 高橋(1998)에 수록된 원본으로부터의 인용도 참조했다. 그리고 이 텍스트의 독해에 관해서 高橋哲哉의 이 논고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독해를 따라 창세기의 서술을 따라가보자. 신의 부름에 나는 여기에라고 아브라함이 대꾸하자, 그가 10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얻었던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 정상에서 번제[불태워진 제물]” 이것이 홀로코스트라는 말의 원뜻이다 로 바치라고 신이 불쑥 요구한다.[주21]  어떠한 이유도 없이, 그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신에게 성심을 다했던 아브라함에게는 부조리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들이내밀어지는 희생의 요구. 그것에 응하여 사랑하는 자식에 손대는 것이 신이라는 특이한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이라는 타자의 말은 가혹하며 법의 바깥이다. 아니, 타자가 눈앞에 나타나고, 자신을 부르는 것 자체가 늘 그처럼 법의 바깥인 것일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에, 데리다는 아브라함의 이삭 봉헌을 다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삭을 신의 희생물로 바친다는 이 다른 누구도 대신하여 받아들일 수 없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기서 이삭뿐만 아니라 신 이외의 모든 타자와의 관계를 희생으로 삼는다는 것도 함축한다. 그 때문에 아브라함은 어떠한 일반성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양도할 수 없다고 결의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신의 명령에 관해서는, 자식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에 대해서도 완전히 비밀을 지키고, 그런 끝에 윤리적으로는 살인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행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윤리의 일반성에 안주하는 차원에서, ‘단독자로서 신 앞에 서는 신앙의 차원으로 비약을 인지했던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그의 공포/두려움와 전율을 인용하면서 데리다는 그처럼 단독자의 입장에 서는 것 자체가 유일한 특이한 타자에 대한 대체 불가능한 절대적 책임(responsabilité absolue)’(Derrida 1999a: 88)이라고, 모든 타자에 대해서 똑같이 받아들여야 할 일반윤리적 책임사이의 해결하기 힘든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아브라함의 침묵과 그의 모리아 산에서의 행위가 나타내는 바는, 절대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일반적 윤리에 비춰보면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가족을 시작으로 한 신 이외의 이웃들과의 윤리적 관계를 희생시킴으로써만 신이라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었다.

[주21오늘날, 2차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유대인을 시작으로 한 사람들의 대량학살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말은 본래 양 등의 동물을 불에 태워 신에게 바치는 고대 유대교의 불태워진 제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그 때문에 나치 독일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를 신성화해 버릴 위험도 이 말에는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대량학살의 명칭으로서 히브리어에서 절멸을 의미하는 쇼아(shoah)’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이 조우한 어떤 특이한 타자에 대한 책임은, 다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는 단독적인 입장에 있어서, ‘절대적 책임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타자에 대한 응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 단독적 입장에 선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직면한 이 타자 이외의 모든 타자에 대한 응답을 희생으로 하는 것으로밖에는 있을 수 없다. “나의 행위들의 절대적 책임은 그것이 나의 것이지 않으면 안 되며, 누구든 나를 대신하여 짊어질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서여야만 하는 그런 한에서, 단순히 비밀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고, 아무런 책임도 짊어지지 않고, 타자들에 대해서, 타자들을 앞에 두고, 내가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도 함축한다”(Derrida 1999a: 88). 말하자면 다른 이웃들과의 관계에서는 절대적 책임은 책임이 아니다”(Derrida 1999a: 89). , 유일하고 특이한 타자에 대한 책임을 대체 불가능한 입장에서라고 하는 것은, 다른 모든 타자로부터 분리된 특이한 입장에서, ‘절대적으로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이웃이 보면 무책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동시에 스캔들이자 역설’(Derrida 1999a: 88)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책임의 근원적 순간에 생겨난 타자에의 책임은 일반적인 책임의 개념과 배치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다른 이웃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책임이 있는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공동체의 일반적인 윤리의 차원에서 책임을 받아들이는, 즉 자신의 결단을 일반적인 언어의 내부에서 해명하고 자신의 행위의 책임을 져야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렇게 안심하세요라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일반성의 차원으로 다시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데리다에 따르면 타자에 대해서 유일하게 응답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의 특이성(ma singularité)’개념이라는 장으로 해소해버리는”(Derrida 1999a: 88) ,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응답 가능성으로서의 책임을 무로 되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조우한 타자에 응답하고, 바로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반적 책임(responsabilité en général)과 절대적 책임 사이의 풀기 어려운, 그 때문에 역설적인 모순”(Derrida 1999a: 89)으로 갈라놓이게 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데리다는 죽음을 주다에서 이 책임의 아포리아’(Derrida 1999a: 88)와 그 경험을 창세기의 이삭 봉헌의 이야기와 그것에 관한 키에르케고르의 해석으로부터 끌어내고자 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 아포리아에 진입하지 않고서는, 예를 들어 힘의 부정의를 호소하는 타자의 말에 응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 , 일반적 책임과 절대적 책임 사이에서 분열된 경험을 헤쳐나가지 않고서는 이 타자의 말로부터 도래할 정의에의 부름을 경청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아포리아에 발을 담구면서 그래도 책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임을 어떻게 부과할/떠맡을 수 있을까? 극히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죽음을 부여하고 그의 죽음을 신에게 증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성스러운 희생으로서 받쳐지는 것이 될 것이다. 데리다는 죽음을 주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자식에게 죽음을 주기 위해/때문에, 윤리가 증오와 살인이라 부르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식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Derrida 1999a: 93). 데리다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어디까지나 사랑하고 이 사랑하는 자식에게 칼을 휘두른 그 순간에 자식을 사랑한다는 일반적인 윤리에 등을 돌릴 때, 이삭에게 죽음을 부여하는 것은 신에의 봉헌이 될 수 있다. 절대적 책임은 바로 순간에 윤리적 책임을 긍정하고 일반적인 윤리에 배치되는 방식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전이나 현전화로 환원될 수 없는 증여 및 죽음을 주다처럼, 그것[이삭 봉헌]은 순간(l’instant)이라는 하나의 시간성을 요구한다”(Derrida 1999a: 94). 타자의 부름을 받고, 그것에 나는 여기에라고 응답하는 순간, 그것은 일반적으로 유의미한 것이 현전하는, 균질적인 지금의 연쇄로서의 직선적 시간으로는 결코 회수되지 않으며, 어떤 특이한 순간이어야만 한다. 그러한 근원적 순간에야 진정으로 타자라고 말할 수 있는 타자가 도래하며, 자신에게 대체불가능한 책임을 짐 지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에서 타자에 응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내 아이를 희생물로 삼는 것은, 절대적 책임과 일반적 책임의 모순을 받아들이고, ‘책임의 아포리아속에 진입하면서 일반적으로는 윤리적일 수 없는 하나의 결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모순과 패러독스가 순간 그 자체에 있어서 겪어져야만 한다. 두 개의 의무는 서로 배치할 수밖에 없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종속시킬 (병합하는, 억압하는) 수밖에 없다. 아브라함은 윤리를 희생으로 삼아, 자기 아이를 희생으로 삼는다는 절대적인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희생이라는 것이 있기 위해서는 윤리는 그 완전한 가치를 지켜야만 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훼손되지 않은 채로 있어야만 하며, 또한 인간으로서의 의무는 그 권리의 유효성을 간직해야만 한다”(Derrida 1999a: 95).

그렇다면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 명의 특이한 타자에 의해 불려질 수 있는 근원적 순간에 이 타자를 긍정하고, ‘책임의 아포리아에 발을 내딛고, 그리고 그것 이외의 타자에 대한 책임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그때 바로 희생하는 것을, 즉 인간으로서의 윤리의 질서와 책임을 승인하고 확인하고 재긍정한다(Derrida 1999a: 96). 역설적이게도 모든 일반적 윤리로부터 떼내어진 단독자의 입장에서 유일한 타자에 대한 책임을 부과할 때, 윤리가, 즉 다른 모든 타자에 대한 책임이 다시 긍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그 책임은 어떤 차원에서 긍정될 수 있을까? 거듭 말하지만 실제로 있는 어떤 일반성의 차원에서, 예를 들어 어떤 신앙 공동체, 가족, 국가 등 기존의 어떤 특정한 공통성의 내부에서 타당한 것으로서 윤리를 긍정한다면, 그것은 개념이라는 장으로의 퇴행이며,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입장의 폐기[내던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차원에서 윤리가 다시 찾아질 수 있을까? 데리다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신에의 공물로서 죽음을 부여하고자 할 때인 바로 그 순간에, 유일신이라는 특이한 타자뿐만 아니라, 모든 특이한 타자가 긍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몸이 찢기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브라함의 행위는 신 이외의 타자를 완전히 무시한 광신적인 살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 절대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 사이에서 찢겨진다는 것은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들, 또는 현재를 함께 살고 있는 이웃들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들이나 이후 도래할 타자들을 포함한 모든 타자가 각각 특이한 타자라는 점을 긍정하고, 그러한 모든 타자에게 응하는 것으로서 윤리를 재긍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주22]  따라서 자신이 직면한 어떤 특이한 타자에게 응답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부과한다는 것은 동시에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다(Tout autre est tout autre)”(Derrida 1999a: 98)라는 것의 긍정이어야만 한다.

[주22이것을 데리다는 이렇게 언표한다. “나를 나의 특이성에 있어서 타자의 절대적 특이성으로 연결하는 것은 즉각 절대적 희생의 공간 또는 위험 속으로 나를 던진다. 그 밖에도 무수한 타자들이 있고, 타자들의 셀 수 없는 일반성이 있기에 똑같은 책임, 어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책임(키에르케고르가 윤리적 질서라고 부른 것)이 나를 구속하는 것임에 틀림없다”(Derrida1999a: 97-8).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 이렇게 말하는 차원에서 윤리를 긍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특이한 타자로부터의 부름에 보편적으로 응답하는 것에의 요구를, 즉 모든 전적인 타자로부터의 부름의 누군가에게도 똑같이 응해야만 한다는 요구를, 유일한 특이한 타자에게 응답하는 순간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 속에 보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오늘 여기서 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주23] 나는 다른 타자를, 타자들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어떤 한 사람의 타자의 부름, 요구, 그 타자에 대한 책무, 그것뿐만 아니라 이 타자의 사랑에 대해서도, 결코 응할 수 없다”(Derrida 1999a: 98). “근원적 순간에 생겨난 책임의 수용은 모든 타자 각각의 특이성에 대해 열려진 차원에서 윤리를 재긍정하면서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여기서 자신의 대체 불가능한 입장에 있어서 받아들이고자 하는 특이한 타자에 대한 책임 때문에. 타자에 응한다는 것은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에, 이러한 결코 신성화할 수 없는 희생의 구조가 늘 붙어다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모든 일반성으로부터 분리된 단독의 입장에서, 그 단독성에서 열려 있는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인 차원에서 윤리를 재긍정하면서 어떤 특이한 타자로부터의 부름에 응할 때, 동시에 모든 전적인 타자에 대한 응답 가능성’, 책임도 상기시키는 것이 된다.[주24]  이처럼 모든 전적인 타자에 대한 책임이 긍정되고 있는 가운데, 어떤 특이한 타자로부터의 말 때문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보다 보편적인 정의에의 부름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기초하여 이 타자에 응하는 오늘 여기에서 할 수 있는 행위에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기존의 공통성이나 이코노미의 틀을, 즉 기존 법질서를 넘어서는 것에 있는, ‘도래할정의로 향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 길은 결코 끊이지 않고 이어진 것이 아니다. 유일한 타자에게 응하는 행위는, 다른 모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식으로 희생하고 있는 이상, 그 자체로서는 결코 완전하게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행위에 내재하는 힘은, 언제든 희생된 타자로부터 폭력이라며 고발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행위는 눈앞에 있는 한 명의 타자에게조차 응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봤듯이, 타자로부터의 부름은 무한하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책임을 해소하는 것이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무한하게 증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23여기서도 요점은 분명히 특이성과 보편성의 이중적 요구 중 어느 하나도 내버리지 않는다는 것, 특이한 타자들의 부름에 보편적으로 응한다는 요구를 어디서든 유지한다는 것에 있다”(高橋1998: 238). 이 요구를 유지시키는가 여부가 여기에 있는 특이한 사람들의 관계를, 예를 들어 광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부터 나누는 것이다. 설령 곁에서 보면 광신처럼 보이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이 된 영화 희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인 알렉산더의 생일날, 우편배달부인 오토는 어쩌면 그에게는 극히 가치가 높은, 진짜 17세기의 유럽 지도를 알렉산더에게 내민다. 그리고 망설이면서 오토는 희생이 없다면 선물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또 하나의 희생의 복선이 된다. 이윽고 핵전쟁이 발발했다고 전해지자, 그는 다음날 아침, 이 핵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기 위해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에 집에 불을 지른다.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바치겠다고 한 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영화의 베스트씬에서는 병원차가 알렉산더를 끌고 간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때 그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부정하여, 또는 완전히 망각하여 자기 집에 불을 질렀던 것이 아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윤리적 책임과의 모순이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자신의 중요한 모든 것들을 전소된 제물(홀로코스트)’로서 내미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행위는 여기서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가치가 없을 것이다. 유일한 절대적 타자와의 닫힌 관계 속에서 모순 없이 자족하는 광신, 모순 속에서의 절대적 책임의 수용을 나누는 것은 윤리에 대한 태도이다

[주24가라타니 고진(柄谷, 2001)이 칸트를 따라서 제시한 미래의 타자에게 열려 있는, 그리고 참으로 보편적인 공적 영역에 열려 있는 세계시민적주체의 단독성역시 어떤 특이한 타자에게, 또 하나의 특이한 입장에서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라는 것을 긍정하면서 응답하는 데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 관해서 가라타니 고진 자신이 실마리를 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해서 여기서 상세히 논할 수는 없으나, 그에 따르면 칸트가 유령을 보는 사람의 꿈(視霊者)에서 말했던 시차(視差, parallax)’의 경험이 단독성에의 통로가 되고 있다. 타자의 시점(視点)을 건드리고 지금까지의 자신의 견해가 흔들리는 경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초월론적인입장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의 특이성에 있어서, 한 명의 특이한 타자로부터 솟아나오는 정의에의 부름을 경청해야만 한다.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는 것에 열려진 단독성에 있어서 눈앞의 타자와의 비대칭적인 관계에 발을 내딛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부름에 응하는 행위로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한다. 이러한 타자에의 응답이야말로 현존하는 법질서의 신비적 기초를 그 배타적인 전제로서 다시 묻고, 그 강제력에 의해 흔들리고, 법 외적인, 즉 법질서의 계산 가능성의 외부에 있는 듯이 타자에게도 응할 수 있는 것으로 그 법질서를 변경해가는 실천으로, 즉 데리다가 정치적 전환이라고도 불렀던, 정의를 새로운 법으로서 실현시킬 수 있는 법의 탈구축의 실천으로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리하여 법에 조금씩 정의를 체현해감으로써 비로소, 도래할 정의에의 통로가 이 세계 속에 열린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의는 법률에 귀착될 수 없으며, 법률과의 관계에서는 정의의 과잉이 있더라도, 그것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구체적이고 실효적이기 위해서 법률이나 입법에 의해 구현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법에 정의를 체현시켜갈 때에는 역시, “법적 제도 속에는 폭력이 잠재해 있다는 의식이 소멸한다면, 그 법적 제도는 타락한다고 하는 벤야민의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법의 형태로 이 세계에 정의를 실현하고자 할 때, ‘법 외적인타자들을 내던지고, 법 아래에 있는 타자들을 어떤 계산 가능성의 틀에 가둬버리는 힘의 행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깥의 타자들을 희생시키고 또한 법치하의 타자에게 일정한 정체성/동일성을 할당하는 것 위에서 성립하는 법적 제도에는, 이미 봤듯이 늘 폭력이 잠재해 있기때문에, 이리하여 열 정의에의 통로는 책임의 아포리아로 가득 차 있는, 바로 길 없는 길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그 폭력의 희생물이 된 타자에 의해 불려세워지며, 새로운 절대적 책임과 기존의 법 내부에서의 일반적 책임 사이에서 균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데리다는 도래로서 어떤 정의로 향하는 것을 아포리아의 경험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이 아포리아를 헤쳐나갈 때에만 정의는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법의 힘에서의 그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해 두자. “이 아포리아의 경험이 아무리 불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 없이는 정의는 없다.”

이처럼 자신 속에 모순을 받아들이고 책임의 아포리아를 견뎌내는 경험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 더 보편적인 정의를 조금씩 실현해 갈 길이 열릴 수 있다고 한다면, 오늘날 자주 보게 되듯이, 어떤 특정한 우리를 위한 정의를 유일한 정의로서 소리 높이 말하는 것도, 또한 그것을 법으로서 타자들에 대해 내세우는 것도, 데리다가 생각하는 도래할정의에의 통로를 닫으면서 타자들에게 이르는 그 정의, 어쩌면 부정의한 폭력으로만 있을 수 있는 힘을 절대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만일 정의에의 길이 있을 수 있다면, 어떤 법 바깥인 타자로부터의 정의에의 부름을,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라는 것을 승인하면서 자신의 절대적 책임에서 경청하면서 이 타자에 응답하는 정의를 기존의 법의 탈구축을 통해 새로운 법의 형태로, 타자와 자신이 공유하는 세계 속에 실현해가는 것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탈구축은 정의이다”(Derrida 1994: 35)고 말한 동시에, 정의는 타자라는 계산 불가능한 것에 관해, 그것을 계산하라고 요구한다”(Derrida 1994: 61)고 말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책임과 관련된 희생의 구조와 법의 존재 그 자체에 내재하는 힘에 흔들리면서 타자에의 응답을, 새로운 법을 형성하는 말로서 입을 열기에 이르는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도래할정의로 열린, ‘사건의 우연chance이자 역사의 조건’(Derrida 1994: 61)인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미 인용했듯이, “타자가 도래하지 않고서는 정의란 없는한편으로, 우리의 사유 역시 예기치 않은, ‘법 외적인방식으로 도래하는 타자에 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도래할정의에의 통로가 이 세계 속에 열릴 수도 없다. ‘책임의 아포리아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정의를 말한다는 방식으로 타자로부터의 부름을 경청할 수 있는 것은, 우리네 한 명 한 명의 사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결론을 대신하여, 지금까지의 논의를 돌이켜보면서 우리의 사유 그 자체를 타자에 대한 응답 가능성으로서 파악하고, 정의 그 자체를 눈앞에 이미 있는 법질서가 아니라 타자에의 응답에 기초하여 늘 새롭게 실현될 수 있는 미래로서 파악할 가능성의 한 단면을 제시해 두고 싶다.

 

V. 응답으로서의 사유로부터 새로운 정의로 : 결론을 대신하여

데리다에게서 정의는 단순한 법적, 정치적 개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결코 기존의 정의의 개념의 틀에는 가둬질 수 없는 미래(avenir)’(Derrida 1994: 60)로서다. 그에 따르면 예측 불가능한 미래인 타자의 도래와 더불어 비로소 그 타자와의 사이에 정의의 가능성이 열린다. ‘도래할정의, 그것은 어떤 정의를 내세우는 폭력의 부정의를 호소하는 타자의 부름을 경청하는 한 명 한 명의 응답 가능성, 타자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법의 탈구축의 실천을 요청한다. 법의 힘에 따르면, 이 정의는 도래에 있어서, /권리나 정치를 전환시키기도 하고 바꿔버리기도 하며, 재창설하기 위한 길을 열어젖힌다”(Derrida 1994: 61). 데리다가 여기서 전개한 법의 탈구축의 사유란, 이렇게 타자의 부름에 응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법에 정의를 체현시키는 경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로는 그가 팔레스타인 땅을 향해 요청했던 정치의 변화로도 통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봤듯이, 그것은 또렷하고 똑바로 열려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길 없는 길, 책임의 아포리아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한 것이 죽음을 주다에서의 이삭 봉헌에 관한 논의이다. 이 아포리아를 헤쳐나가는 경험 없이, 법에 정의를 체현시키고 부정의한 힘으로 가득 찬 이 세계 속에 조금씩 정의를 실현시켜 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도래할 정의를 향해 타자에게 응답하고자 할 때 걸어야만 하는 아포리아는 정의에의 통로를 닫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주다에서 그려진 아포리아의 경험이란 이 세계 속에서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라는 차원에 열려 있으면서 미래로서 어떤 정의를 향한, 한 명 한 명의 사유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 같다. 데리다의 책임정의를 둘러싼 사유는 한 명 한 명이 어떤 특이한 타자에게, 누구에 의해서든 대표될 수 없는 방식으로 응할 수 있는 사유의 길을 우리 속에 열어젖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보편적인 정의의 실현을 향한, 오늘날 이성이라 부를 수 있는 사유 역시 타자의 도래라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로 열리면서 이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중에서도 이 타자에의 응답으로서의 사유가 걷는 길에 숨은 어려움을 대표하는 것이 어떤 특이한 타자로부터의 부름을 경청하고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자 할 때, 동시에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는 것을 긍정하고 특이한 타자에게 보편적으로 응하라는 것에 대한 요구를 자신 속에서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함으로써야 비로소 자신이 예기치 않게 조우한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에 기초를 두고, 그 타자와의 사이에 보다 보편적인 정의를, 기존의 법의 탈구축을 통해 실현해갈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만일 이성이 보편적인 공정성을 요구된다고 한다면, 오늘날 여기서 불러지는 바로 그 타자에 응답하면서 나의 특이성에 있어서, 또한 동시에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인 차원에서, 즉 모든 전적인 타자에게 응할 수 있는 것으로서 윤리를 재긍정하는 것에만, 오늘날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사유의 장소 없는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법 바깥이자 특이한 타자에게 나의 특이성에서 응답하는 사람의 장소는 기존의 법질서의 내부에서는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장소가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주25]  그렇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대체 불가능한 책임을 떠맡으면서/받아들이면서 오늘날 타자와 자신을 분리시켰던 경계를 무너뜨리고, 타자와의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세우면서, 거기서 지금까지 말해졌던 정의보다도 보편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향해서,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주26]  그렇다면 오늘날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유에 있어서는 타자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이쪽에서 무엇인가를 말하는가에 늘 선행하는 것이며, 또한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법질서가 할당하는 일반적인 정체성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구로든 대체될 수 없는 방식으로 타자에게 응할 수 있는 자신의 특이한 입장에 머무르는 단독성 속에서야말로 보편적인 정의를 향한, 오늘날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잇는 사고방식이 찾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유란 늘 미래로서, ‘법 외적인방식으로 도래하고, 불러지게 되는 타자에 대한, 우리네 한 명 한 명의 대체 불가능한 응답 가능성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주25여기서 그의 논의를 상세하게 파고들 수는 없지만, 그칠 줄 모르는 평범함에 맞서 세계의 어디에도 없는사유의 가능성을 고대 그리스 이후의 서구철학 속에서 추구했던 것이 아렌트의 정신의 삶(Arendt 1981)이다

[주26이러한 법의 탈구축에도 통하는, 타자와의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는 활동(action)’정치로서, 또한 시작beginning)’으로서 논했던 것이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Arendt 1998)이다

그런데 타자로부터의 부름을 알아듣고 그것에 응답한다는 것은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언어를 해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번역의 수행이다.[주27]  그 길 이것은 벤야민에게는 우회로이며 데리다에게는 아포리아이다 은 타자로부터의 물음에 의해 뒤흔들린 정의의 개념을 다시 묻고, 새로운 정의를, 그것을 새로운 법으로 체현시키는 형태로 이야기를 꺼내는 법의 탈구축의 행로와도 겹쳐지는 것이다.[주28]  타자에의 응답으로서의 번역을 통해서 끄집어내진, 거기에 있는 특이한 타자에게, 그리고 미래의 모든 타자에게 자기를 내미는 하나의 말, 그것은 도래할 정의로의 한 걸음을 이 세계 속에 기록하는 것이리라.[주29]  데리다가 벤야민과 더불어 지시하는 것은 이 말에서 결정(結晶)적으로 드러나듯이, 응답으로서의 사유의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사유가 타자에 대한 응답 가능성그 자체이며, 무엇을 스스로, 예를 들어 정의로서 말하는 것에 앞서서 타자로부터의 부름을 경청해야만 한다면, 정의 그 자체도 단순히 법으로서 말해지고 법질서의 형태로 실현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법 외적인타자에게 응답하는 것에 기초하여, 또한 기존의 법의 탈구축을 통해서 늘 새롭게 실현될 수 있는 도래할것으로서 파악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는 정의를 미래로 간주하고 타자가 도래하지 않고선 정의는 없다고 말하며, 그리고 탈구축은 정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스스로 법을 세우고 하나의 법질서를 구성하는 사유의 힘만이 이성으로서 찬양되고, 현전화 가능한 법질서 속에서만 정의가 추구됨으로써, 법 외적인것에 다름 아닌 타자가 정의로부터 배제되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이성일 수 있는 사유를, 무엇보다 우선 타자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파악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정의 그 자체도 법 외적인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늘 새롭게 이 세계 속에 실현시킬 수 있는 것으로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주30]그 뿐만 아니라, 이렇게 정의의 개념을 재고할 가능성은 처음에 말했듯이, ‘세계화국경이 없어짐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우리그들사이에 엄연하게 있는 경계선을 긋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그를 위해 하나의 정의가 내세워지는 것에 대한 공포로 둘러싸여 잇는 오늘날의 세계를 향해서 말을 건네야 할, 우리 한 명 한 명의 가능성은 없을까? 어떤 하나의 정의를 유일한 것으로서 목소리 높여 말하고 그것을 권력으로서 내세우는 것에는 결코 정의가 없다. 오히려 법 외적인타자의 말을 경청하고, 그것과 더불어 자신이 품고 있던 정의의 관념을 다시 묻는 것에 도래할정의에의 길이 열린다. 더욱이 그 길은 아포리아. 이것을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이성비판으로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에 편재해 있는 보복의 연쇄를 멈출 수 있는 정치적 전환의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27이러한 번역의 수행에 관해서는 벤야민이 자신이 번역한 보들레르의 파리 풍경에 서문으로 덧붙인 번역론 번역자의 과제(Benjamin 1923: 19)를 참조. ‘모국어와 같은 것의 해체를 이끄는 번역의 실천을 탈구축적 의사소통으로 전개하는 논고로는 守中(1999)를 거론할 수 있다

[주28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기원인식비판적 서설에서 독일 바로크 비애극이라는 지금까지 간과되었던 예술 장르를 구출하기 위해 하나하나의 대상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멈춰서는 서술이라는 방법에 관해, 그것은 우회로(Umweg)이다’(Benjamin 1928: 208)고 말했다

[주29White(1994)는 정의란 타자의 말의 번역속에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며, ‘번역으로서의 정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의 정의를 내세우는 것이 어떤 타자에 대한 부정의,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곳에서 성립하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번역한다는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 잘못이라는 점에 열려 있는, 아니 번역하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잘못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향하는 기법, 즉 텍스트, 언어 및 사람들 사이의 가교하기 힘든 비연속성과 대치하는 기법”(257)이라고 번역을 정의한 다음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번역하려고시도하는 것은 근저에서부터, 또한 동시에 다행스럽게도 잘못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근저로부터라고 말한 것은 그 경험이 우리들의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언어에 관한 의식을, 나아가 타자에 관한 의식을 물음에 부치기 때문이며, 다행스럽게도라고 말한 것은 그 경험이 우리를 한 순간, 우리의 고유한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해주기 때문이다”(257). 그리고 타자의 부름에, 예를 들어 부정의한 폭력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하여 타자의 말을 존중하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을 다시 묻고, 자신이 타자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 타자에 응답하는 또 다른 말로, 타자의 말을 번역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에 응답하는 가운데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또 다른 텍스트를 내미는 번역 행위 속에 정의의 기준도 찾아질 수 있다. “완전히 이해되고 재현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타자에게 응답하는 가운데 텍스트를 만드는 것 그것은 법을 위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모델로서, 그것을 넘어서고 나아가 정의의 기준으로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련의 실천이 된다”(258). 이러한 타자의 여기에 설 수 없는 자신을 다시 응시하고, 타자와의 비대칭성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그 이해를 하나의 응답의 말로 결정화시키는 번역의 실천에 기초하여 법은 세워져야만 하며, 또한 그 실천 속에서야말로 정의의 기준이 있다고 하는 번역으로서의 정의의 개념을 축으로 정의론을 전개한 것으로서 大川(1999)를 참조. 이 논고를 쓸 무렵, 그 논의로부터 촉발된 점이 많았다는 것도 여기에 덧붙여둔다

[주30데리다가 정의를 법의 탈구축을 통해 법 외적인것에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파악했다는 점에 관해서는 仲正(2002)를 참조

그런데 데리다는 2001년의 아도르노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911일의 희생자 전체에 대해 저는 무조건의 동정을 보냅니다만, 그래도 이 범죄를 앞에 두고서는 그 누구도 억울했다고는 믿지 않는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동정의 대상이 911일에 미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백악관이 내건 슬로건으로서 요 며칠 째 무한한 정의라고 불리는 것에 관한 제 해석입니다. , 자기의 과실, 자기의 부정의, 자신의 정치의 과오를 모면하려고 하지 않는 것. 설령 그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게 될 때라도”(Derrida 2002: 37).

 어떤 법질서의 내부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든 한 명으로서 타자에 대해 아무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데리다가, 그것에 앞서서 벤야민이 간파했듯이, 법의 존재 그 자체가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힘을 타자에게 행사하는 것인 이상, 법질서 속에서 일정한 권리를 보존하는 우리는 늘 법 외적인타자에 대해서 부지불식간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정의는 타자에 의해서 예상될 수 없는 방식으로 호소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해 자신의 부정의를 은폐하면서 힘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선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품었던 정의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다시 묻는 것, 그리하여 타자에 응하는 자신의 방침을 탐색하는 것이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타자는 전적인 타자이다는 것을 긍정하면서. 정의가 이 세계에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어려운 타자에의 응답을 통해서만, ‘법 외적인타자와의 사이에서 조금씩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정의를 법의 형태로 실현시키는 것 자체는 결코 억울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데리다는 위에서 인용한 무한한 정의를 탈구축하는 말로, 이러한 도래할정의에의 길을, 그 길 없는 길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길로의 출발점/입구는 억울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 우리 한 명 한명 속에 열려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억울하지 않다는 것을 돌이켜보게 될 때, 타자로부터의 정의에의 부름을 알아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文献目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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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rida, Jacques 1994: Force de loi: Le «Fondament mystique de l'autorité», Paris: Galilée. 邦訳堅田研一訳』,法政大学出版局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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