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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20152월 임시증간호

자크 데리다

 

<미번역 텍스트>

1. 하이데거에 관한 대담, 자크 데리다

 

<데리다의 삶과 사상>

2. 데리다의 최고 전성기, M. 나스

3. 탈구축<> , R. 가쉐

4. L’enfant que donc je suis 혹은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왜 자전적인가, 郷原佳以

5. 데리다 처음으로 :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자적 은유, 増田一夫

 

<인터뷰>

6. Deadletter로서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

 

<사형>

7. 엑스 렉스 : 자크 데리다의 사형론 세미나, J. 페닝턴

 

<하이데거>

8. 자기 전승과 자기 촉발 : 데리다의 하이데거 강연(1964-1965)에 관해,

 

<철학>

9. 평행적 차이 : 자크 데리다, 장 뤽 낭시

10. 주변에서 주변으로 : 데리다/들뢰즈의 곶으로부터,

11. 우뚝 솟은 상태의 철학, 말라부

12. 타자성의 분유 : 계획 불가능한 것의 계산, 藤本一勇

 

<정치>

12. ‘전쟁의 일상화무조건의 환대-평화사이에서, 松葉祥一

13. 호명으로서의 우애, 애도로서의 우애 : 자크 데리다의 우애론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宮崎裕助

14. 차연과 평등 : 타자의 윤리인가 아니면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인가, 梶田裕

 

<신학>

15. 데리다의 급진적 무신론,

16. 현상을 가르치기 : 레비나스, 데리다와 메시아주의의 물음, 마르셀

17. 데리다와 존재신학 : 칸트, 하이데거, 레비나스가 교착하는 장소로, 長坂真澄

 

<문학>

18. 팔루스, 유령, 천황제 : 자크 데리다와 中上健次

19. 데리다 미학의 연구 : 문학 혹은 픽션성의 제도, 立花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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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쟁의 상태화/일상화무조건의 환대-평화사이에서 (1/2)

마츠바 쇼이치(松葉祥一)

 

니시타니 오사무(西谷修)는 어떤 좌담에서 지금 요구되는 것은 확고한 전쟁 개념에 대응하는 확고한 평화개념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불리는 것의 전면화 속에서, 어떻게 생존공간을 다시 만드느냐, 거기에 필요한 최저한의 조건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라는 사고이지 않을까?”(西谷土佐2014:55)라고 말한다. 확실히 현재 전쟁 개념을 재정의하려 하거나, 평화 개념을 재구축하고자 할 때, 강한 무력감이 휩싸이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한편으로, ‘적극적 평화주의같은 의도적인 이중화법(double speech)’(西谷 2014:56)에 의해 평화개념이 파탄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M. 쉘러(Max Scheller, 1874-1928)1927년 독일국방부에서 행했던 강연 평화의 이념과 평화주의에서 말하듯이, 평화는 이미 무조건적으로 적극적인 가치”(Scheler 1937:16)가 되며, 아무리 호전적인 국가원수라도, 공공연하게 평화를 부정하고 전쟁을 긍정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 그 때문에 그들이 은밀하게 군사적 합의를 평화라는 말에 계속 투입한 결과, 이제 이 말은 그 의미가 부풀려져서 원형을 남기지 않게 된 것 같다.

다른 한편, ‘전쟁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의 전면화에 의해 전쟁 개념도 정의 불가능해졌다. 데리다는 9·11 직후의 몇몇 인터뷰에서 9·11 같은 사건을 앞에 뒀을 때의 철학의 역할은 개념적 전제들, 특히 전쟁 개념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것이라고 한다(Derrida 2001a ; 2001b). 그것은 그동안의 전쟁 개념, 즉 국민국가와 그 주권을 전제로 한 전쟁 개념이 9·11 같은 그 어떤 국민국가에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특정할 수 있는 상대가 없는 전쟁”(Derrida 2001b)을 앞에 뒀을 때, 다시 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 전쟁 개념을 다시 묻는 작업을 위해 칼 슈미트를 다시 읽어야만 한다고 한다. 그 결과, 슈미트에 반하여, “현재 폭발하고 있는 폭력이, 전쟁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Derrida 2001b)는 것을 밝히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이 수사학의 남용임을 분명히 드러내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데리다 자신은 우정의 정치(Derrida 1994)에서 슈미트에 기초하여 전쟁 개념을 재검토한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우선 우정의 정치에서의 전쟁 개념의 분석을 보고 싶다. 다음으로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극복(Heidegger 1954)에서 고발하는 존재 망각의 귀결로서의 전쟁의 일상화[常態化]를 검증하고, 그런 후에 불량배들(Derrida 2003b)에서 도래할 민주주의자기 면역성에 관한 분석을 확인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듀(Derrida 1997b)에서 레비나스의 평화론의 분석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의 목적은 전쟁이 일상화[常態化]하는 가운데, 그것에 저항하는 사유의 발판을 찾아내는 것이다.

 

1.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로서의 전쟁

데리다가 우정의 정치에서 밝히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궁극적 텔로스(목적)가 전쟁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정치에 의거하는 한,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우선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친구와 적의 구별이다”(Schmitt 1931:15)라는 슈미트의 명제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해, 이 친구-적의 구별이 대립에 다름 아니라는 것, 더욱이 이 대립이 의미하는 것은 실재적(實在的)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Derrida 1994:144f).

슈미트는 친구-적의 대립이 실재 가능한항쟁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국민들은 친구-적의 대립에 따라 결속하는 것이며, 이 대립은 오늘날에도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정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국민에게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적이란 다만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이다”(Schmitt 1931:18-19, 강조는 인용자). 이 항쟁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슈미트에게 전쟁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전쟁이란 조직된 정치적 통일체 사이에서의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Schmitt 1931:26). 또한 내전은 이 정치적 통일체 내부의 전쟁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전쟁도 내전도, 그 본질은 인간의 죽음을 목표로 하는[지향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든 이 전쟁은 무력에 의한 것이다. 치사(致死)를 목표로 한. ‘무기는 여기서 그 본질적 개념에 있어서 인간의 치사로서의 신체적·물리적치사를 목표로 한 수단이다. 인간의 죽음은 이 적 개념에 의해 이렇게 함축되며, 즉 대외전쟁이든 내전이든, 모든 전쟁에 포함된다”(Derrida 1994:193-194). 여기서 대외전쟁과 내전은 인간의 죽음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전쟁이라는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에도 주의하자.

실제로 슈미트에게서 이렇게 적의 신체적·물리적 죽음을 목표로 하는 전쟁은 단순히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닌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 가능성으로서 현전하고 있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진다. “친구, , 전투 같은 개념은, 그 실재적 의미를, 신체적 치사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항상적인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전쟁은 적대에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적대는 다른 존재의 존재론적 부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적대의 극한적 실재화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은 범용한 일상이나 정상적인 것일 필요가 없으며, 하나의 이상처럼, 혹은 바랄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필요도 없지만, 적 개념이 그 의미를 유지하는 한,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계속 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Schmitt 1931:25, 강조는 인용자). , 이 전쟁은 단순한 추상적 사고 대상이 아니라, 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슈미트에 따르면, 전쟁이 그런 구체성을 결여했을 때, 그 개념은 유령적인 추상이 되기”(Schmitt 1931:22)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라 해도, 전쟁은 예외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것은 예외로부터 정의되게 된다. 실제로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라는 사태는 위급[긴급]사태이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도, 예외적 사태야말로 특별하게 규정적인, 사물의 핵심을 밝혀내는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친구와 적의 정치적 배치의 극한적 귀결이 노출되는 것은 현실적 전투에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극한적 가능성에서 출발해 인간들의 삶은 특수 정치적인 긴장을 획득한다”(Schmitt 1931:30). 흡사 데리다에게서 여백(파르레곤)이야말로 작품(에르곤)의 의미의 틀을 규정하고 있듯이.

이로부터 데리다는 슈미트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외가 규칙이다, 이것이 어쩌면 실재적 가능성의 이런 사고가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이 사태, 이 상황은 예외적인 방법으로만 도래할 뿐이다. 그것은 그 결정적 성격, 중단 없이, 양도 없이, 무효화하지도 않는다. 이 예외성이 반대로, 사건의 우발성을 정초한다. 어떤 사건이 사건이고,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예외적인 경우뿐이다”(Derrida 1994:203).

이로부터 데리다는 전쟁은 전제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슈미트(Schmitt 1937:35)에 반하여,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라고 말한다. “이렇게 개시되는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의 현전, 실재적 혹은 가능적인 이 현전은, 사실이나 사례의 현전이 아니다. 그것은 텔로스의 현전이다. 정치적인 텔로스의, 이러저러한 정치적 목적의, 이러저러한 정책의 현전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의 현전인 것이다. ‘가장 극한적인정치적 수단으로서 모든 정치적 표상을 정초하는전쟁은 친구/적의 이 차별의 가능성을 구현한다. 그리고 이 표상에 의미가 있는 것은, ‘유의미한 것은, 이 차별이 실재적으로 현전해 있는한에서, 혹은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에서이다”(Derrida 1994:208-209,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어떤 정치나 사회적 유대[연결], 실재 가능한 전쟁 없이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전쟁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어떤 정치도, 정치적 유대로서의 어떤 사회적 유대도 전쟁 없이는, 그 실재적 가능성 없이는 의미가 없다”(Derrida 1994:210). 바꿔 말하면, 그 어떤 정치도, 정치적인 연결[유대]도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에 의해 정초된다. 거꾸로 말하면,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이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는 이상, 정치적 동물로서의 우리는 늘 친구-적을 염두에 두고,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으로 향하게 된다. “가장 극한적인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모든 정치적 개념의 기초에 이 친구와 적의 구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개시하는 것이다”(Schmitt 1993:31).

이리하여 우리는 슈미트의 친구-적 논의에 대한 데리다의 분석에서, 정치적인 것이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에 의해 규정되는 한, 전쟁은 정치의 텔로스이며, 우리는 늘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면 전쟁이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인 한, 정치적 동물인 우리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2. ‘비세계에서의 전쟁의 일상화[常態化]

하이데거도 서양형이상학은 인간중심주의에 빠져 있기에 존재하는 것을 남용하기에 이르며,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상화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1936년부터 1946년까지 쓴 수기 형이상학의 초극에서, 인간이 기술에 의해 존재하는 것-(集立)[주1]하고, 대용품을 대량생산하여 소비를 위해 남용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전쟁이 일상화되며 전쟁과 평화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을 징발하고 남용하는 미오(迷誤[혼동])’의 세계를, 하이데거는 비세계(Unwelt)’(Heidegger 1954:137)라 부른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 비세계화의 귀결로서, 전쟁과 평화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주1] [옮긴이] 하이데거의 기술론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게슈텔(Ge-stell)인데, 이것의 일본어 번역어이다. 한국에서는 닦아세움이나 몰아세움이라고 흔히 번역된다

 

평화가 언제 오느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은, 언제까지 전쟁이 계속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물음이 물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전쟁은 마지막에는 평화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은 존재하는 것의 남용의 한 변종이 되고 있는데, 이 하나의 변종은 평화로울 때에도 계속된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깨닫는 것은 남용의 시대에서의 새로운 것이 승인되는, 이미 시대에 뒤진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장기간에 걸친 전쟁은 서서히 이행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평화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관련된 것이 더 이상 전혀 그 자체로서는 경험되지 않고 평화와 관련된 것이 의미 없는 것, 알맹이 없는 것이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미오(迷誤)는 존재의 그 어떤 진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대신, 미오(迷誤)는 모든 영역에서의 모든 계획의 완벽이자 철저하게 동원된 질서와 확실함을 키워낸다(Heidegger 1954:138).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 기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을 징발하는 현대세계는, 세계대전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세계대전과 그 무제한의 권력 행사는 이미 <존재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의 결과에 불과하다”(Heidegger 1954:137).

이 직후에 지도자(총통, Führer)’가 불러내진다. 존재하는 것이 미오(迷誤)라는 방식으로 이행한 결과, 지도자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지도자의 등장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의 등장에 대해 사람들의 도덕적 분노는 자주 지도자들의 자의와 지배권의 요구로 부단한 찬미라는 가장 불쾌한 습관으로 향하게 된다. 지도자는 유쾌하지 않은 것이며, 그런 것은 분노의 추궁을 피할 수 없다”(Heidegger 1954:139). 그러나 그것은 피하기 힘들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다. 미오(迷誤) 속에서 공허(Leere)가 확산되고 공허가 존재하는 자의 유일한 조건과 확보를 요구하고, 거기서 지도의 필요성이, 즉 존재하는 것의 전체를 확보하기 위한 계획적인 산정(算定, Berechnung)의 필요성이 요구되기때문이다. 이리하여 지도자는 존재하는 것이 미오(迷誤)라는 방식으로 이행했다는 사태의 필연적인 결과”(Heidegger 1954:139)이게 된다. 이 지도자는 초인이자 본능적인 직관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동물적이다. , ‘인간 이상이자 인간 이하의 존재이다. 바꿔 말하면, 이런 지도자의 존재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서 규정했던 형이상학의 산물에 불과하다. 또한 이렇게 전쟁이 전면화된 비세계에서는, 국가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의 구별도 없어진다. , 존재자의 동원과 남용의 업무는 글로벌화되고, 역사를 균일화하는 동시에 인간을 획일화한다.

 

흡사 전쟁과 평화 사이의 구별이 무효라고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적국제적을 구별하는 것도 무효가 된다. 오늘날 유럽적으로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국제주의자라는 비판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는 더 이상 국가주의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는 자국의 번영에 못지않게 그 다양한 국가들의 번영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Heidegger 1954:143).

 

이런 하이데거의 전쟁론은 지도자=총통에 대한 언급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자주 지적되었다.[주2] 여기서는 우리의 논점으로 이어지는 점만을 확인해두고 싶다. , 서양형이상학의 주체-인간중심주의가 지배하는 비세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의 남용의 한 변형으로서 전쟁이 일상화된다는 명제이다.

[주2] 예를 들어 국가적-국제적 무차별화라는 테마는 대안지구화-코스모폴리타니즘을 재고할 때, 검은 노트에서의 탈인종화(Entrassung)’의 개념과 맞춰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3. 도래할 민주주의와 자기면역

이렇게 친구-적 혹은 주-객의 존재론을 전제하는 이상, 근대세계는 필연적으로 전쟁의 일상화에 다다르게 된다는 슈미트-하이데거의 명제에 대해, 데리다는 불량배들에서 도래한 민주주의(démocratie à venir)라는, 타자를 셈에 넣는 시스템을 대립시킨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분석했듯이(松葉 2014), 민주주의란 민중이 지배하는 자인 동시에 지배되는 자인 정치”(Aristote n. d. : 1317b)였다. 데리다는 이런 민주주의를 도래할 민주주의라고 부르며, 그 미완결성을 보여줬다. , 민주주의는 회귀하는 수레바퀴처럼 지배하는 자와 지배되는 자가 교대함으로써 자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데리다는, 이런 민주주의 속에 항상 자기회귀, 자기순환하는 자기성 혹은 이것임(ipséité)’의 논리를 간파한다. “iposenopse는 방브니스트가 멋들어지게 보여줬듯이 복잡한 중계를 거쳐, 소유로, 재산으로, 기능으로, 군주, 주권자, 그리고 대개의 경우 주인(hospites), 이 집의 주인 내지 남편의 권위로 반송된다”(Derrida 2003b: 37). 이것은 데모스가 주권자[주3]일 뿐만 아니라, ‘수레바퀴의 회전운동으로서만 유지할 수 있을 뿐인 것, 따라서 거기서의 지배는 늘 불완전하고 미완결임을 드러낸다. 또한 토크빌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데모스가 자기원인으로서 주권자이어야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등은 이 자기원인 즉 자유야말로 방종(exousia)’[주4]으로 연결된다며 비판해왔다.

[주3] 예를 들어 국가적-국제적 무차별화라는 테마는 대안지구화-코스모폴리타니즘을 재고할 때, 검은 노트에서의 탈인종화(Entrassung)’의 개념과 맞춰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주4] [옮긴이] 원래 엑소우시아는 권능이라는 뜻. 방종은 아콜라시아(akolasia)’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도래할 민주주의개념에 의해 데리다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타자로의 전송으로서의 차연이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의 자기의 갱신이 동일적인 자기로 갇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의, 이질적인 것의, 특이한 것의, 비자기동일적인 것의, 비대칭의, 타율의, 부인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차연”(Derrida 2003b:83)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권의 동일성에 대한 이타적(異他的)인 것의 도입, 그것을 데리다는 타율의 법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Derrida 1994:63).

이렇게 민주주의에 타자를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이 타자의 선택이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한다. 선택이 주체가 부과하는 조건에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체-주권자의 반복에 불과하게 되어버린다. 무조건적인 타자의 선택이야말로 도래할 민주주의의 기반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환대, 증여, 용서[허가] 같은 행위의 무조건성 속에서 찾아내고자 한다. “주권 없는 무조건성 속에서도,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특히 중요시하게 됐던 것으로서, 예를 들어 무조건의 환대를 들 수 있다. 환대가 무조건이라는 것은 타자의 도래에 제한 없이 처해 있다[노출되어 있다]는 것, 법권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무조건의 환대만이 무릇 환대의 개념 일반에 의미와 실천적 합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Derrida 2003b:281-284).

그러나 바로 이 무조건성이 내전-전쟁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내가 받아들인 자는 폭행자, 살인자일지도 모른다. 이것과 마찬가지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보증 없는 순수한 환대에 있어서 타자가 혁명을, 나아가 예견 불가능한 최악의 모습을 초래한다. 그런 가능성도 받아들여야만 한다”(Derrida 2001c:117-118). 순수한 무조건의 환대는 그것이 바로 무조건인 까닭에 예견 불가능한 최악의 모습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시스템을 자기면역(auto-immunité)’이라고 부른다. 자기면역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어떤 생명체[生体] 속에서 타자에 대해 그 생명체를 보호하고 있는 것, 타자의 공격적인 침입에 대한 면역을 해당 생명체에 부여하는 것을, 바로 해당 생명체가 자율적인 방식으로 자발적으로 파괴한다는 논리”(Derrida 2003b: 234)이다. , 본래 타자로부터 자기를 구별할 터인 면역 기능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작동하는 작용이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타자를 무조건으로 편입시키기 때문에 이 자살적’(Derrida 2003b:75)인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가령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는 테러리스트들(불량배들)도 이런 타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게 하는 데 불가결한 타자이며, 자신의 주권을 정당화하는 적극적인 조건으로서 데모스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타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유지는 항상 민주주의의 파괴를 불가피하게 불러들이게 된다. 이런 자기 면역적인 민주주의는 제한 없는 과정이며, “자기 면역적인 것에 맞서는 확실한 예방법 따위란 없다”(Derrida 2003b:288).

그러나 자기 면역성은 양의적이다. 데리다는 자기 면역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기 면역은 타자에게 노출된다는 것, 즉 도래하는 것 없는 자 따라서 계산 불가능한 채로 머물 수밖에 없이 노출된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인 면역이 있을 뿐이기에 자기 면역이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기다리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을 것이며, 서로 기대하는 것도 사건을 기대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Derrida 2003b:290).

 

민주주의의 자기 면역 과정은 수레바퀴의 새로운 회전-혁명이 생기는 데 필요한 무조건성, 무방비를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유지하면서 자기동일적인 것에 머물지 않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민주적인 것의 본질적이고 독특하며 구성적이고 종별적인 가능성으로서, 그 역사성 자체로서 자기 면역의 또 다른 형식이며, 이 역사성은, 그것이 다른 어떤 정체와도 분유하지 않는 내재적인 역사성이다”(Derrida 2003b:146). 따라서 데리다는 자기 면역성을 지닌 민주주의, “도래할 민주주의야말로, 설령 전쟁이나 혁명을 불어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데리다는 슈미트-하이데거가 지적하는 전쟁의 일상화[常態化]에 맞서, 자기 면역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확실히 도래할 민주주의는 타자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타자와의 죽음을 건 싸움을 피하고, 타자를 끌어들이면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대하여 칸트적인 세계시민국가(코스모폴리스)에서의 도래할 민주주의가 전쟁을 근절할 수 없다고 해도, 전쟁을 가능한 한 파멸적이지 않는 것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외적(外敵)의 절대적 배제라는 면역이 아니라, 자기 면역의 고통을 동반하면서 시스템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외부의 타자를 내부의 타자로 치환한 것일 뿐 아닐까. 거기서는 외부가 없어지기 때문에 외적과의 전쟁은 없어질지도 모르지만, 내적과의 내전은 없어질 수 없다. 그때 외적에 대한 면역보다도 자기 면역이 파멸적이지 않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더 이상 평화의 가능성은 남겨져 있지 않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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