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홀워드가 2015년 3월 15일부터 일본을 방문해서 두 번의 강연을 벌였다고 한다. 간단한 정보는 여기를 클릭. http://www2.gensha.hit-u.ac.jp/TransA/lecture20150315.html

* 이 두 번에 걸친 강연 내용이 최근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 『다양체』에 수록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목차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을 독서의 습관으로 틈틈이 옮겨적을 예정이다. 우선 두 번째 강연에 해당되는 <들뢰즈 이후의 정치>부터 옮긴다. 일본에서 이 강연의 제목은 「ジル・ドゥルーズと政治(”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였으나, 아래의 잡지에는 다음의 제목으로 수록됐다. ドゥルーズ流の政治/ドゥルーズ後の政治|ピーター・ホルワード|小泉義之訳. 일본과 한국에서는 번역어, 문장 구사 등이 다르기 때문에 홀워드의 원문을 구해서 대조해야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서 구태여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 아래의 본문을 보면 나오는 주라비슈빌리[주라비크빌리]의 글은 정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게재하다가 중단한 이치다 요시히코의 <혁명론>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홀워드와 교차하면서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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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이후의 정치 : 내재성과 초월 재고 (1/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최근 25년 동안, 아무래도 질 들뢰즈는 넓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대륙철학이나 프렌치 씨어리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들뢰즈 저작의 양상들을 둘러싸고, 이채로운 수의 책과 논문이 넘쳐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실제로 들뢰즈에 관한 전문연구서와 들뢰즈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책을 도서관의 빠른 검색으로 검색해보면, 이제 1200건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에딘버러대학에서 나오고 있는 시리즈 Deleuze Connections, 들뢰즈와 디자인, 들뢰즈와 건축, 들뢰즈와 교육, 들뢰즈와 인종, 들뢰즈와 공간, 들뢰즈와 그 밖에도 머리에 떠오르는 한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25권을 채웠고, 앞으로도 늘어날 예정입니다.[각주:1]

* 각주1에 달려 있는 주소는 다음으로 변경되었다. https://edinburghuniversitypress.com/series-deleuze-connections.html

이 일련의 제목이 반영하고 있듯이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곳은 차치하더라도, 유럽과 앵글로색슨의 근처에서도 많은 독자가 들뢰즈에게 매료되어 온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정치사상가로서의 그 중요성임을 보여주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파리나 런던의 대학에서 현대유럽철학이나 비평이론의 어떤 연구과정을 전공하려고 해도, 어김없이 들뢰즈와 공저자인 펠릭스 가타리에 관련된 정치적 모티프의 한 쌍과 다소간 직접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제가 만나온 이론 지향의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그 상당수에게는 미시정치, 탈영토화, 노마돌로지, 도주선, 전쟁-기계, 소수자로의 생성변화[소수자-되기], 자연스레 입에서 나오는 정치적 어휘의 대부분을 이제 뒤덮고 있는 몇 안 되는 용어의 고작 몇 개의 예입니다. 이런 학생들은 많은 것에 대해 논합니다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치하는 바로는, 들뢰즈는, 정치활동의 현대적 형태와 그들이 직면한 속박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참조처이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둘러싸고 금세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들뢰즈 자신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명시하지 않고, 굳이 말하자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 평등, 자유, 해방 등과 같은 주요한 정치적 개념은 그의 고려 바깥에 있으며, 자본주의와 분열증[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제출된 국가 비판을 별도로 하면, 별의별 정치제도, 통치의 기구, 입법대표정부의 기구에 대해 그는 그 이상의 논의를 거의 제시하지 않습니다. 거대 신문용으로 작성된 몇 개의 논설(유명한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관한 것입니다)을 빼면, 들뢰즈가 정치의 경위나 혁명에의 동원에 대해 일부러 자세하게 논의하는 것은 역시 드뭅니다. 들뢰즈나 들뢰지안이 정치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역시 전적으로 불분명하며, 현재 이용 가능한 들뢰즈 사전의 종류가 한결같이 소수자 정치”, “미시정치”, “혁명의 논의를 등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토픽에 대해 특별한 항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각주:2]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제 자신의 정의를 부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오랫동안 전통에 맞춰서, “정치란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의 다음과 같은 집단적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 1.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조직이나 상호행위(예를 들어 친족, 민족, 지리, 언어에 기초를 둔 형태들)로 환원할 수 없는 집단적 차원이며, 2. 다른 것과 구별하여 정치적집단성이나 공민적집단성을 구성하는 참가자들은, 평등과 포함을 기초로 상호관계를 맺으며, 다른 생활영역으로부터 따온 계층성을 기초로 하여 (예를 들어 군사명령을 기초로 하거나, 가정경제종교 권위를 기초로 하여) 상호 관계를 맺는 일은 없다는 것을 원리 원칙으로서 전제로 하는 집단적 차원입니다.[각주:3] 더 한정해서 강조해 둡니다만, 데모크라시의 정치는 보통의 인민의 힘에, 즉 그 어떤 형태의 특권단체나 지배계급과도 싸워 이기는 인민 일반의 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논했는데요, 민주주의와 여러 가지 형태의 과두제나 재산제(plutocracy)(그 대부분은 ‘(다른) 민주주의라고 자칭합니다)를 가장 간편하고 명백하게 구별하는 방식은, 루소(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등의 자코뱅파가 감복해서 계속 인용하는)가 주권의 기초를 인민의 의지에 둘 때의 논리, 일반의지 혹은 인민의지[의 논리]에 입각하면서, 인민주권의 우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집단의 실재의 기초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에게 짐을 지우는 그 역량, 그렇게 해서 적대적이고 타율적인 결정의 형태들에 (단지 저항한다기보다는) 승리하는 그 역량에 직접적으로 놓여져야 합니다. 거꾸로, 이 일반 역량의 기초는, 서로 강화하는 집단적인 능력들과 역량들, 특히 집회·교육·정보·토의(deliberation)·조직화·결의·실행의 역량들에 놓입니다.

* 각주 4에 붙은 주소는 여기를 클릭.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정치에 대한 위와 같은 노골적으로 주의주의적인 구상은 들뢰즈와의 정면충돌을 야기하는데요, 오늘 여기에서는, 바로 이 충돌을 저는 정밀조사하고 싶습니다. 들뢰즈의 저작에 인민이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출현하더라도, “도래할 인민[민중]”이라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형상으로서 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적인 자동기계를 집단적 형태로 개조했던 것은 아닐까요?[각주:5] 무의식, 욕망의 기계적이고 사실은 자동기계적인 성질, 경험의 분자적 혹은 하위-개체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철학은 정치적 의지와 의지적 활동으로부터 가장 먼 것은 아닐까요? 저는 들뢰즈의 최초의 가장 열심인 독자의 한 명이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게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그가 1996년의 중요한 논고에서 엄밀하게 강조했던 것처럼, 정치적 좌파는 일반적으로 주의주의를 참조축으로 하여 자기를 정의하지, “들뢰즈는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주의주의적이지 않은 철학을 전개했다. 항상 들뢰즈는 진정한 사고와 생성하는 모든 근본적으로 의지적인 성격을 주장했다. 그리고 어떤 계획에 입각해 세계를 바꾼다거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바꾼다는 등의 일처럼 그에게는 인연이 먼 것은 없었던[각주:6] 것입니다.

들뢰즈적인 정치가 있다면, 물론 그것은 비주의주의적이라고 기술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며, 널리 유럽철학에서 좌파현대정치분석으로서 통용되고 있는 것의 실로 상당수가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바로 들뢰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권과 그 동족어에 대한 유행의 산만한 비판을, 특히 그것이 무엇이든 지도 주체나 주권적 주체”(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괴물적인 혼란입니다!)에 대한 거절을 보세요. 자크 데리다에 의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책임을, 적극적 자유의 그 어떤 구상으로부터도, “, 지배, 폭력으로서 규정되는 자유, 나아가 기능으로서, ‘나는 할 수 있다의 가능성으로서 규정되는 자유로부터도 분리하려고 하는 미수에 그친 기획을 계승하는 유산을 생각해 보세요.[각주:7] 조르조 아감벤을, 그리고 또한, 대륙-철학계에서는 최근 들어 일정한 견인력을 갖춘, 티쿤(Tiqqun), 보이지 않는 위원회(the invisible committee), 공산주의이론(Théorie communiste) , 다양한 공산화가속주의의 주장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이것들에 공유되고 있는 것은, 활동가와 그 현실적 정치 역량을 합병하는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아감벤에 의한 비판, 숙려[토의](deliberate) 단계와 스텝step을 밟아나가도록 틀이 부여될 수도 있는 활동의 전략적차원 모두에 대한 아감벤의 거절입니다. 모든 구성적권력[]의 거절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라면, 중지[허공에 매달림]와 외톨이로 틀어박히기라는 위로, 그저 결핍시키는힘에 의해 약속되는 저 순수한 비-잠재성의 림보뿐입니다.[각주:8]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그것은 20년 이상 전에 처음으로 학위논문의 1개 장에서 소묘했던 것인데요, 들뢰즈에 대한 저의 비판적 결론의 입장에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푸코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축하의 말을 건넨 것은 유명하지만, 그 정치적 의의에 관한 한, 그것은 금세기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기간이 계속된 것은 (혹은 시각에 따라서는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 이름에 값하는 모든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인민의 의지, 그것에 대항하는 어떤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세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자코뱅적 주장으로부터, 정치적 사고가 철수하고 있는 동안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가 정치적 사고에 있어서 중심적인 참조점으로서 부상한 것은, 어떤 기간, 대략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승리의 기간, 1970년대 초기에 시작되고 일련의 현저한 인민의 패배를 특징으로 하며, 19세기와 비교하고 싶어지는 불평등·항복·복종의 형태의 부활을 결과로 하는 기간에, 들뢰즈가 퇴각의 입장을 위해 부족함이 없는 철학적 견해를 제출한 한에서인 것입니다.

주의주의적정치구상과 비주의주의적정치구상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부딪칩니다. 한편으로, 정치활동가에 대한 구상, /녀의 의지적 활동의 역량에 관해서, 다른 한편으로 활동가와 활동가가 살아가는 상황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해방식에 관해서입니다. 아래에서는 이런 두 가지 점을 순서대로 쫓습니다.

 

1. 루소와 로베스피에르에서부터 레닌과 그람시를 거쳐 프란츠 파농과 체 게바라에 이르는, 넓게 -자코뱅적인 전통은, 정치적 의지의 행사를 목표·의도·동기 등의 고전적인 심리적요인과 연합시키는 것을 늘상 해왔습니다만, 이와 동시에 의지의 실행과 행사를 단순한 소망과 변덕의 표현이 목적에 동의하는 자는 그 수단을 거부할 수 없다”(루소)라는 클리셰, 달리 말하면, “목적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 그 수단도 의지해야 한다”(그람시)라는 클리셰에 입각하고 있더라도, 단순한 소망이나 변덕의 표현과는 구별하고 있습니다.[각주:9] 루소 이후, 의지(vouloir)(pouvoir)은 서로 맞바꿀 수 있으며, 목적을 의지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활동가의 역량에 의해 매개되는 것입니다. 활동가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활동가가 교육되고 의식적이고 유덕해지고 단련될수록 그 활동의 영역이나 그 의지의 권역은 점점 더 일반적이게 되고 원대해지는 것입니다.

활동가[배우]에 대한 들뢰즈의 구상 일반에서 곧바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활동을 위한 본래적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 즉 자신의 기획과 사업을 숙고하고 의식적으로 정식화하고 개시하기 위한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들뢰즈가 전투의 사건을 고찰할 때, 그의 관심은,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느냐에도, 군사적인 전략의 방식이나 이유에도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관심은, 활동가로서의 병사, 상황에 응답하여 결정을 내리고 개별 목표를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잠재적 사건 그 자체로서의 전투의 무차별적이고 익명적인 성질에, 활동이나 퇴각의 역량의 모든 것을 상실하고 포기한 자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성질에, 들뢰즈의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활동가, “더 이상 용감도 비겁도 아니고, 더 이상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사건>이 현전하는 그 장소에서, 그렇기에 그 가공할 정도의 비정함에 참여하는 치명상을 입은 병사”(LS, 100~101)인 것입니다. 전투의 위쪽으로, 전투를 넘어서, 전투를 통과하여 존재하는 자만이, 전투를 사건 또는 본질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사무엘 베케트의 범례적인 등장인물이 사물의 잠재적 리얼리티에 대해 적격이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소진하고, 그저 가능적일 뿐인 것의 영역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소진한 인물만이 가능적인 것을 소진할 수 있다. 모든 욕구need, 선호, 도달목표, 의의를 체념해버렸기 때문이다. 소진한 인물만이 충분히 이해관심을 떠나고 있다.” 소진한 인물만이 재차 올라가 돌아가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CC, 154-155). 그 조건 하에서 그/녀는, /녀가 그 일부인 리얼리티를 진정으로 수 있다. 소진한 인물은, 그들을 흡수하는 환경에 일체의 주도권을 버리고 맡겨버린다. “거친 대해를 떠다니는 코르크처럼, “그는 이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경계 속에 존재한다”(CC, 26).

들뢰즈가 물색한 다수의 시나리오 중 어떤 것을 취하든, 숙고적이고 목적론적인 자유는 그저 반응적이고 제한적인 편견이라며 기각되고, “더 심층의 형태의 강제, 자동조작, 용해가 지지되고 있습니다. 주체 자신의 결정이 진정한 귀결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견지, 요컨대 전략의 견지는, 들뢰즈의 사고의 구상과는 철저하게 무관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관한 그의 두 권의 책의 궤적을 아주 간단하게 대층 그려보면, 등장인물이 지각과 활동을 조절하는 역량을 계속 갖고 있는 (전쟁-전의) 상황으로부터, 감각-운동역량을 탈취당해 무엇인가에 홀려 있는 모양의 사람이 반응하지 못하고, 반응을 의지하지도 않는상황으로의 이행에 있게 됩니다. “감각-운동의 결합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구상공간은, 긴장과 그 해소에 따라서, 목표, 장벽, 수단, 우회에 따라서 조직화되기를 멈춘다.” 활동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지각은, 압도적이고 환각적이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結晶)을 통하는 듯한 직관을 통해서, 인물은 수동적인 보는 자가 되며, 무엇이든 현재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할지도 모르는 것에는 무관심해지며, 반사적 반응에 대해서조차 무감응해진다. “그토록 그 인물에게 있어서는, 정확하게는 무엇이 상황 속에 있는 것인가를 보는욕구need가 크다는 것이다”(C2, 126-128). 이런 통찰의 비용은 전적으로 명명백백합니다. 그것이 요청하는 것은, 활동가의 카타스트로피적인 마비이며, 유기체의 문자 그대로의 분해, 혹은 이것에 준하는 분해입니다. 전투를 지각하면서 죽어가는 병사를 철저하게 넘어서 사납게 날뛰는 전투처럼, 이제 사건은, 사건을 선동하고 사건에 반응하는 인격에 관계없이, “부동성, 석화작용, 반복”(C1, 207; C2, 103)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구도가, 들뢰즈가 문학을 참조할 때 특권적으로 끄집어내는 많은 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베케트의 소진시키는 자동기계, 카프카의 절대적인 분자적 탈영토화”(K, 58), 나아가 멜빌의 바틀비이며, 그 비타협적인 나는 하지 않고 싶은데요, 변함없이, “말과 활동을 절단하고, 더욱이 사물, 이유, 목표에의 지시를 언어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입니다.[각주:10] 이 점을 조금 자세하게 예를 들어 풀이하기 위해(또 다시 들뢰즈의 저작=신체corpus에 이어서는 통상적인 정치적 맥락이 그 관계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들뢰즈의 프루스트 독해를 간단하게 고찰해봅시다.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1972년판의 짧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데요, “이 책은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가, 비의지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움직이는 기호의 경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PS, vii)는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화자가 학습하는 것은, “진리는 계시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누설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의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비의지적이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최대 테마는, 진리의 탐구는 비의지적인 것에 특징적인 모험이라는 것이다. 사유를 강제하고 사유에 폭력을 가하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사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라이프모티프는 단어 강제력이다. 우리에게 보도록 강제하는 인상, 우리에게 해석하도록 강제하는 조우등등(PS, 61).

일반적으로, 들뢰즈가 논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 기억, 상상, 지성, 사고 같은 능력들은, “의지적으로 행사되는 한에서는 우발적으로만 행사될 뿐이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그저 똑같이 우리는 기억하고 상상하고 인식하고, 그 반대도 그렇다.” 이것과 대비적으로,

 

어떤 능력이 그 비의지적인 형태를 걸칠 때마다, 그 능력은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곳에 도달하고, 초월적인 행사로까지 상승하고, 다른 것으로 치환 가능한 그 힘과 자신의 필연성을 이해한다. 능력은 교환 가능하기를 멈춘다. 비의지적인 행사는, 각 능력의 초월적인 한계이며 그 사명이다. 의지적인 사고를 대신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고하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사고하기를 강제당한다. (PS, 62-63).

 

그때, 비의지적인 사고란, 필연성의 완전한 강제력과의 조우입니다. 혹은 오히려, 조우의 우발성을 필연성의 무심한 운명과 제휴시키는 경험입니다. 여기에서, 비의지적인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유명한 몰두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활동가의 진행성 마비와 활동가의 세속적 기획과 낭만적인 기획 모두의 용해를 다시 요구하는 듯한 그런 내러티브의 도정, 그 최초의 열약(劣弱)한 단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자의 감각-운동 시스템은 소모시키고, 활동과 반응에 있어서의 그저 현실적인시간성에 대해 무관심한,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그가 학습하는 것은 말하자면, “순수상태의 시간에 입력하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기관없는 신체이며 미소한 기호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관찰되지 않으며”, 그가 조우하는 다양한 인물을, “그 자신의 망상의 똑같은 수의 마리오네트에, 그의 기관없는 신체의 똑같은 수의 강도적인 힘에, 그 자신의 광기의 똑같의 수의 프로파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각주:11]

프루스트의 화자가 따라가는 궤적과 영화론이 끄는 궤적은, 대체로 비슷한 호[孤]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또한, 들뢰즈의 작품 전체를 통해 상이한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 지도에 배치되는 것은, 활동가의 진행성의 무-능력화, -현실화, 대항-현실화, 활동가의 용해이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런 리얼리티의 절대적 필연성과 충족성 안에서의 직접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침례[전신을 물에 담그는 세례](immersion) 때문입니다.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일상경험이 활동에 대한 관심에 의해 뒷받침되고, 감각-운동 메커니즘을 통해 감각과 활동을 결부시키는 신체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면, 진정한 통찰을 위해서는 그런 관심의 정지와 그 메커니즘의 탈구가 요청될 겁니다. 현실적인 것은 유기체의 기능[함수]이라고 한다면, 잠재적인 것은 전반적인 탈-유기체화로 이끌 겁니다. , 글자 그대로 탈조직화된 신체, 그 생물로서의 통합성과 정합성을 박탈당한 신체, 들뢰즈와 가타리가 아르토를 좇아 부르는 바의 저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를 설정하도록 이끌 겁니다. 그런 신체는, 조우하는 사건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이해, 목표, 계획의 매개 없이 즉석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모든 기획은, 존재하는 것, 존재할 터인 것의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무너집니다. 이것이 운명애입니다.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는 이 비주의주의적궤적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그 궤적은,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이 동일한 지점에, 의지가 허위 문제이게 될 뿐인 지점, 허위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의지가 사건의 자기-긍정으로서 사건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지점에 도달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기묘하고도 철저하게 스피노자적인 세계의 지각에 도달하고, “산소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었음을 마지막에 이해하게 되며, 산소 없이 호흡하려고 하는 지점에 손을 대는[노력을 기울이는][각주:12] 것입니다. 이렇게 제언해도 크게 과장이 되지는 않을 테죠. , 들뢰즈에게서는, 활동을 가능케 하는 활동가의 기운을 돋우는 것은 모두, 그대로, 우리가 그로부터 도주하려고 해야 할 억압이며, 동시에, 동일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바로 그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가 필연성의 유일한 흐름의 지각할 수 없는양태가 되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는 도주선을 물색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들뢰즈가 고찰하는 다양한 생성변화 혹은 되기”(예를 들어 여자-되기, 동물-되기, 노마드-되기)의 상대적인 가치가 어찌 될 것이냐 한다면, 그 가치는, 되기가 탈영토화한 형태 없는 질료를 위해활동하는 정도에 따라서, 또한, “지각할 수 없는 것은, 되기의 내재적인 목적이며, 그 우주의 공식이다라는 무자비한 텔로스에 입각하면서 활동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입니다.[각주:13]

주라비슈빌리 같은 독자가 들뢰즈의 방향성에 있어서의 가차 없는 스피노자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들뢰즈의 이 방향성에 막연한 혁명적억양을 불어넣고자 하는 꽤 어설픈 시도는, 천박한 속임수가 되기 십상이고, 어떤 종류의 정치활동에도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실천적 곤란들에 대해 결단코 무관심해지기 십상입니다. 들뢰즈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스피노자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면서도, -마오이스트의 철학자 기 라르드로는, 들뢰즈의 다른 독자에게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력(impact)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소책자에서, 들뢰즈의 형이상학의 정치적 함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스토아학파로서, 그리하여 평화주의와 영적 달관[諦観]의 처방전으로 특징지어집니다.[각주:14]

  1. Harvard University Library system, HOLLIS search, 9 March 2015. ‘Deleuze Connections’, ed. Ian Buchanan, University of Edinburgh Press, http://www.euppublishing.com/series/delco [본문으로]
  2. Cf. Adrian Parr, ed. The Deleuze Dictionary (2010); Eugene Young, ed., The Deleuze and Guattari Dictionary(2013) ; François Zourabichvili, Le Vocabulaire de Deleuze (2003). [본문으로]
  3. 표준이 되는 참고문헌은 Aristotle의 Politics이다. [본문으로]
  4. Cf. Hallward, The Will of the People: Notes Towards a Dialectical Voluntarism, Radical Philosophy 155(May 2009), 17-29. online at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본문으로]
  5. Cf. C2, 263 ; EP,131, 158, 160. [본문으로]
  6. Fran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risme en politique)”, in Eric Alliez et al, eds.,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1996), 335. [본문으로]
  7. Derrida, Rouges[2002],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40. [본문으로]
  8. cf Agamben, “From the State of Control to a Praxis of Destituent power”, Athens, 16 November 2013 ; cf. Agamben, “From Limbo”, The Coming Community(1993) [본문으로]
  9. Rousseau, Discours sur l’économie politique, Œuvres complètes, vol. 3(Pléiade), 263; Gramsci, Worker’s Democracy (1919), Pre-prison Writings, 99; cf. Trotsky, Terrorism and Communism(1921), Verso ed., 25. [본문으로]
  10. CC, 73-74. 주라비슈빌리의 비주의주의적 독해에 있어서, 바틀비가 “들뢰즈적 정치의 상징적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49). Cf. Agamben, Bartleby, or on Contingency, in Potentialities (1999). [본문으로]
  11. PS, 117-118; AO, 69; PS, 181-182; cf. RF, 30-31, 38-39; NP, 103-110; DR, 147. [본문으로]
  12. Zourav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56-357. [본문으로]
  13. K, 13; TP, 279; Cf. DC, 45; C2, 190. [본문으로]
  14. Guy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à l’occasion de Deleuze(Verdier, 1999), 51. 특히 어떻게 최선의 방식으로 필연성에 적응하는가, 어떻게 “흐름을 타는”가, 혹은 상황의 내재적 “생성”에 따라서 자기를 방향짓는가를 탐구하는 사상가(스토아학파, 스피노자, 흄, 베르크손 …)에 이끌려서, 라르드로는 이렇게 논한다. “푸코와는 달리 … 이성의 존엄[을 지킬] 만한 것에 대항하여 들뢰즈가 떨쳐 일어난 것은 한 번도 없었다”(ED, 45; cf. 72). 물론 라르드로 자신은 중립적인 독자가 아니라, 과거, 이른바 “신철학” 논쟁 무렵, 드물게도 들뢰즈 자신이 비난을 폭발시켰을 때의 표적 중 한 명이었다. 다음을 보라. Deleuze, “A propos des nouveaux philosophes et d’un problème plus général”(1977), in RF; Guy Lardreau and Christian Jambet, Une derniere fois, contre «la nouvelle philosohie», La Nef 66(January 1978), 35-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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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분열분석적 사고

: 그 세 가지 철학적 문제군

スピノザと分裂分析的思考

: そのつの哲学的問題群


** 이 글은 일본어판을 그대로 직역했다. 따라서 원문대조를 통한 용어의 변경은 이뤄지지 않았다. 가령 '비급'이라는 단어는 '투자, 투여'로 옮겨져야 하고, 감정과 정서를 구별해서 표기해야 하지만, 그런 것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기 바란다[2017년 3월 23일].


에가와 다카오(江川隆男)

情況3期第5巻第720047(情況出版)

 

우리는 이 삶에서, 특히 유아기의 신체를, 그 본성이 허용하는 한, 또한 그 본성에 도움이 되는 한, 다른 신체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스피노자, 윤리학5

 

스피노자는 모든 정상병자(正常病者)”를 적으로 돌린다.[각주:1]  따라서 이 정상병(正常病)에 대한 비판의 실재적 경험이 실제로 <분열분석적 사고>를 형성하는 유인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정상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목적론, 다의성, 유비(analogy), 가능성, 부정, 의식, 선악, 표상, , 슬픔, 가족적 관계, 커플관계 등등에 매달리는 것, 실재성의 모든 것을 이것들 속에 에워싸는 것, 말하자면 메이저리티에 고유한 불치의 병이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확실히 사람들 속에서 기능해 왔으며, 현재에도 충분히 그 유효성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은 모든 것을 환상에 의해, 표상상과 말의 언어에 의해 해결하고, 그런 가운데 우리의 정신을 고정하는 한에서, 혹은 정신이라는 비물체적인 우주를 다의성과 유비로 가득 채우는 한에서만 기능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일의성의 철학의 퍼스펙티브에서 말하자면, 정신분석은, 역시 어디까지나 <존재의 유비><이마주의 사고>에 대응하고, 또한 이것들을 분유하는 예를 들어 전이나 대상 a 등등의 정신분석의 개념들이 얼마나 엄밀한 비례성(상이한 항들 사이를 전이하기 위해 전제가 되는 관계=())의 사고 아래서 성립하는가 의식의 형이상학적 무의식에 관한 상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사실, 정신분석적 사고는 반드시 유비나 다의성, 이마주의 사고나 말의 사고와 대립하지 않으며, 더욱이 그런 사고들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이것들을 파괴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안에서 제기하는 분열-분석”(schizo-analyse), 정상병과 이것을 전제로 한 광의의 정신장애, 그리고 특히 이것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바로 <존재의 일의성>(혹은 <인식의 일의성>)을 형성하는 것, 달리 말하면, 현실에 이 일의성을 산출하고 배분하는 정신의 초월론적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에 있다. 특히 가타리가 도입한 이 분열분석에 의해 들뢰즈는, 정신분석과 일치하지 않으나, 그러나 그것과 화해 가능한 결과들을 산출한 그 이전의 철학적 사고를 철저히 하고, 바로 정신분석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의 사고를, <분열분석적 사고>를 획득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스피노자주의와 분열증의 위대한 종합 실재적인 것[현실계]의 일의성혹은 무의식에 대한 스피노자주의 [각주:2]이다. 이 경험, 즉 분열분석적 경험은, 실재적인 생산적 무의식의 발생의 요소이며, 각개의 양태, 그 생존의 양태 속의 혁명적 마이너리티의 부분들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이다.

 

1. 무의식의 형성 : 욕망하는 평행론

<분석하라>, 그리고 <형식화/이론화하라>, 결정적으로 쇠약한 사고, 모든 면에서 스콜라화된 현대의 죽어가는 분석적 사고여, 죽어가는 정신분석이여. 그러나 분열분석의 작업은 이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분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전히 종합이다. 그것은 <파괴하라>, <생산하라>이며, 이 두 가지 활동=동사의 종합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파괴하라>라는 제1의 부정적인 작업이, <생산하라>(, 각개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존재의 양태를 찾아내는 것, 사회적 영역을 투자[투여][각주:3]하는 것, <강도=>을 투자[투여]하는 것)는 제2의 적극적 작업과 떼어낼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여기서 생산이 파괴의 충동을 의식한 욕망의 생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는, 사실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정신이나 그 심적 과정으로부터 분열분석적 사고로의 실재적 이행과정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 속에 프로이트적인 마음의 심층으로서의 무의식을 찾아내려고 하는 노력이 항상 헛수고로 끝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서의 무의식이 의식을 넘어선 정신의 무의식이며, 그러므로 동시에 신체라는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념 적용의 질서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주어진 것도 아니며, 형성되고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한 단순히 신체의 본성을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무엇이 도출될 수 있는지를 모른다.” [각주:4]이 유명한 문장이 나타나는 긴 비고(備考)에서 스피노자는, 바로 정신은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의식에 정위한 인식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바꿔 말하면 의식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 신체에 있어서의 결정‘(determinatio)이 정신에 있어서의 결의‘(decretum)와 본성상 동시라는 것, 달리 말하면 우리의 활동은 의식 속에서 자각된 자유로운 결의 스피노자는 이것을 눈을 뜨면서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말한다 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신경증적인 의식과 코기토의 철학을 넘어선, 정신의 결의=신체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다고 한다. 이것에 의해 바로 스피노자에게 고유한 무의식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 이 평행론 자체가 <윤리학>에서의 무의식의 형성이다[각주:5]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의 최대 특징은 스피노자에게서의 경험주의적 측면을 실천 철학으로서 개념들의 형성의 질서 아래서 밝힌 것에 있는 것이다[각주:6] 스피노자의 일의성의 철학은 단순히 철학사에 있어서의 존재의 일의성의 계보 속에 자리 잡은 정위치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일의적 존재> 개념의 경험론적 형성 아래서만 사고될 수 있을 뿐인 하나의 결정적 사건, 모든 사건에 대한 유일하게 동일한 사건으로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오늘,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으로부터, 특히 그 평행론으로부터 이런 과격한 비판성이 거의 간과되고 있는 듯하다. 평행론은,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더 잘 설명하는 개념 따위가 아니라, 모든 의미와 가치의 변혁의 개념, 이것들의 새로운 형성에 관한 개념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말하는 이른바 존재론적 평행론에서 인식론적 평행론으로,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 심신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인식론적 평행론의 개별적 사례인 심신평행론, 정신적-물리적”(psycho-physique) 평행론 [각주:7]으로 그 해상도를 올렸다고 해도 결코 감지할 수 없는, 형성의 차원 아래서 사고되는 평행론, 양태의 결정의 차원에서 생산되는 평행론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경험주의적 평행론, 욕망하는 평행론이며, 그 어떤 비례성도 전제하지 않고, 이것들 일체의 기존 관계성에 대한 절대적 원근법주의를 동반한, 파괴와 생산을 조건으로서 전이하는 평행론, <정신적-물리적>을 대신하는 <분열적-신체적>(schizo-corporel) 평행론이다(가타리 등은 더욱이 이 평행론 자체는 완전히 긍정적인 의미에서 비물체=비신체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각주:8] 내가 여기서 제기하는 이 욕망하는 평행론은 정신에 있어서의 <비판의 문제>와 신체에 있어서의 <임상의 문제> 사이의 평행론이며, 여기서는 표현보다도 오히려 생산이 문제가 된다. 클레르 파르네가 비판과 임상은 엄밀하게 동일시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옳다. 다만, 엄밀하게란 어디까지나 이것들이 평행론을 이룬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의 비판의 문제는, 표상상과 언어로부터, 혹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으로부터, 생성과 강도를 내용에 기반한 관념으로 정신의 사고 능력의 수준을 변형하는 것이며, 임상의 문제란 <거울> 자체 예를 들어, 라캉의 거울상 단계를 산출하는 거울, 타자로서의 거울, 라이프니츠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인 살아 있는 거울, 반사 혹은 표현하는 거울 등등 의 파괴 작업인 동시에, 어떤 유기적인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메이저리티의 언어인 분절 언어, 말의 언어로의 비판 없이 이 임상의 문제는 있을 수 없고, 이와 동시에 다른 어떤 비물체적인 것을 산출하는 신체를 문제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판의 문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각주:9] 이런 의미에서의 평행론은, 단순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형성하는 것이며, 욕망 속에서 원하는 내재적 실체를 구성하는 것, 즉 무의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스피노자에게서의 이 실천적인 <욕망하는 평행론>이라는 개념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는 분열분석적 사고의 철학적 문제들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불완전성이나 부정 등의 개념을 배제하고, 신체를 긍정하는 비판적 관계(혹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실재성의 <정도의 차이>의 관점)가 이 평행론 속에서 생각된다 , 우리는 언제 어떻게 실재의 영역을 정립하는가?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정신이 혼란된 관념에 의해 자기의 신체 혹은 그 부분에 대해, 전보다 큰 혹은 작은 존재력을 긍정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물체들에 대해 우리가 지닌 모든 관념은, 외부의 물체의 본성보다도 우리의 신체의 현동적인 상태를 더 많이 표시하지만,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 혹은 그 어떤 부분의 활동 역능 혹은 존재력이 증대하거나 감소하기도 하는, 즉 촉진되거나 저해되기도 하는 것에 의해, 신체 혹은 그 부분이 드러내는 상태를 지시 혹은 표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각주:10] 여기에는 부정이나 불완전성의 개념은 없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말해지는 완전성은 불완전성과 대쌍을 이루는 개념이 아니다. 더 적은 완전성은 더 큰 완전성의 결여나 부재를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슬픔이 있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기쁨의 결여가 아니라, 하나의 적극적인 이행상태(활동역능의 감소)를 나타내며, 사건으로서의 <슬퍼하는 것>에 고유한 강도를 지니는 것이다. 긍정하는것은 동일한 신체의 두 가지 상태 사이의 비교나, 이것들의 관념 사이의 비교를 통한 행위도 아니라면, 그런 비교의 결과를 기다려서 결정되는 활동=동사도 아니다. “긍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실재성을 포함한 어떤 것의 영역을 정립하는 것이다. 바깥에서부터, 스피노자에게서의 정신을 의식으로, 혹은 관념을 지향성으로 환원하거나, 특히 스피노자의 관념을 관념론에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하는 한에서, 형성의 질서에 있어서 평행론을 구성하는 두 개의 요소는 결정적으로 어긋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내적인 이유가 오로지 어느 한쪽의 요소라고 할 의식 쪽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에 결코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평행론에 있어서, 분명히 신체가 정신에 대한 지도적 모델이 되는 장면이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각주:11]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식에 의한 자각의 울타리 바깥에 있으며, 그것을 넘어서지만, 그러나 이것이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신체의 정신에 대한 우월성 따위가 아니며, 의식의 자각을 넘어서, 이 신체의 활동 역능에 대응한 정신의 <할 수 있는 것?, 그 사고 역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비록 표상상과 표면의 언어의 본질이 신체적 운동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본질들을 습관과 기억의 질서를 지탱하는 실질로서 사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신 혹은 의식 쪽이다. 왜냐하면 신체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아르토는 만년의 텍스트에서 표상의 언어를 찢어버리는 말의 블록을 발하고 있다 신체는 신체다 / 신체는 그것만으로 존재한다 / 기관은 필요 없다 / 신체는 반드시 유기체인 것이 아니다 / 유기체는 신체의 적이다. [각주:12] 기관들, 혹은 기관들로 이루어진 유기체는, 기억이나 습관이 부착된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신체이며, 그저 그뿐이다. , 신체는 <더 큰> 혹은 <더 작은> 실재성을 포함한 존재를 긍정하고 있을 뿐이며, 이런 한에서 신체는 끊임없이 <더 유능>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더 유능>하다는 것은 신체는 항상 <할 수 있는 것의 존재>에 다름 아니라고 하는 것이며, 더욱이 이런 신체의 본성을 바로 대상의 본성으로 하는 것이,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들이다. 이 신체의 가치에 의해서만 이런 관념들의 가치가 평정되고, 이것에 의해 그 긍정적인 표현형태의 수준이 결정된다[각주:13] 이 신체의 존재, <할 수 있는 것의 존재>에 대응하도록, 관념의 표현활동은, 그동안 쉽게, 무비판적으로 결부된 표상상이나 표면의 언어와 연을 끊고, 형성의 평행론 아래서 그 사고활동 전체의 준위(準位)를 바꾸도록 결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평행론 이전의 <간극> 이것은 심신 사이에 실재적인 인과관계를 상정하는 것도 포함해 모두 의식에 고유한 착각이다 을 수정하려고 하는 조화에 대한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으로서의 평행론 자체가 지닌 욕망에 있어서의 결의=결정이며, 그때 바로 실재의 영역은 정립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있어서의 무의식은, 들뢰즈가 특히 강조하는 공통 개념의 형성의 질서에 고유한 평행론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경험주의적 평행론에 있어서의 두 가지 요소, 두 가지 계열 사이에는, 단순한 <간극>이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신체와 정신의 <할 수 있는 것>을 동시에 정의하고, 이것들 사이에서 실천의 문제를 제기하는 미지의 한 가지 적극적인 부조화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무의식의 형성의 차원이 밝힌 것,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을 더 급진적으로 정의하는 것, 그것은 두 가지 계열의 <부조화적 일치>서의 욕망하는 평행론이다.

 모든 양태의 현동적 본질(코나투스)은 내재적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부정법의 동사(형상)의 일정한 정도 또는 강도를 가진다. 그러므로 실체는 양태와 절대적으로 존재의 방식을 달리 하는 이상, <강도=>이라는 존재의 방식으로 이 내재적 실체를 표현할 수 있다. 부정법의 동사가 가진 강도는 결코 그 동사의 부정형을 인칭 변화시킴으로써 생기는 사태, 그것은 더 이상 그 동사가 귀속될 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며, 그 사물의 단순한 속성=특성이 되며, 그 사물의 양이나 질을 오로지 표시할 뿐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사람들은 다시 목적론이나 부정성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표상의 언어에 빠지게 된다. 부정법의 동사(형상)의 다양한 강도 이것들은 <강도=>과의 사이의 어떤 일정한 내포적 거리에 있는 역능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다. 욕망 속에서 결정되는 비판의 문제는, 예를 들어, 생활의 형식과 합치한 간주관적인 언어사용(공통감각과 양식에 의해 정의되는)에 종속된 감성을 철저하게 능가하는 <감각 블록>과 이 언어사용에 대응하는 의미와 가치를 변형하고, 이 변형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산출하는 <사고의 파라-그래프>, 즉 모든 가치의 가치 전환을 향하는 분자적 실천을 산출하게 된다. 아무튼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 활동 속의 어떤 부분에 있어서 생성하는, 표상상과 말의 언어에 의한 판단의 적용 차원으로부터 관념의 언어활동이라는 표현의 형성으로의 이행이다. 경험주의적 평행론에 있어서 신체를 모델로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결의로 우리의 정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욕망, 그것은 바로 실재적인 것의 정립과 종합의 원천이다. 스피노자는 욕망은 의식을 동반한 충동이다고 말하고, 더욱이 이 의식의 원인을 동시에 드러내는 욕망의 실재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그 각각의 변양에 의해 어떤 것을 이루도록 결정된다고 생각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이다.” 의식은 이 결정의 단순한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며, 또한 이 결정은 무엇보다도 신체를 통해 경험되는 활동 역능의 증대감소라는 실재적 이행 속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욕망이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욕망은 자신의 외부를 따라야 하는 범형 따위를 갖지 않는 이상, 결코 이런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또한 욕망은, 이런 물음을 따르고 이것에 응답하려고 하는 <()의 양태> 따위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항상 <무엇이 실재인가>, <어떻게 실재를 생산하는가>라는 문제의 양태이길 계속한다. 달리 말하면, 욕망은 판단에 선행하며, 그 때문에 그 어떤 욕구도 없이 실재의 영역을 정립하는 생산의 질서에만 속할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양성과 유비가 소용돌이치는 영역 , 부정성을 매개로 한 <복수>의 생산이 있어도, 차이가 긍정되는 <다양>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 과는 완전히 외재적인 관계에 있는 듯한 실재의 영역을 정립했다. 이 영역 전체는 바로 <기쁨의 지식><욕망의 지혜>로 가득 찬 정동군들에 의해 성립하는 평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현상태와, 단순히 지나가는 현재로서만 도래할 뿐인 미래에 대해 몇 안 되는 비관적 시선을 기울이기 때문에, 지금에 영원으로서 도래하고 있는 미래를 조건으로 한 어떤 삶을, 혹은 그 퍼스펙티브를 어떻게든 긍정하려고 하는 활동의 평면이다. 일개의 양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욕망, 혹은 욕망하는 평행론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생산하는가를 찾아내는 것. , 분열분석의 제1의 적극적인 임무, 혹은 스피노자에게서의 개념들의 형성은, 감정 속의 어떤 적극적인 것을 이용해, 어떻게 일개의 양태 속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이 작동하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며, 이것이 동시에 혁명적 무의식의 형성과정이 되는 것이다.

 제2의 문제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실제 속에서 어떻게 부정적인 것이나 결여나 무능력이 생기는가이다. 왜 이 문제를 다시금 제기하느냐 하면, 스피노자가 파악했듯이, 모든 개념의 형성은, 인간 신체의 활동 역능의 두 가지 상태(그 증대인가 감소인가) 중 어느 한 쪽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전개하려면, 악의 개념에 의한 제2의 비판적인, 그러나 더 효과적인 방법론적 관점(혹은 활동 역능의 증대감소라는 실재적 이행과정의 <본성의 차이>의 관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방법론적 관점은 제1의 비판적 관계 이상으로 비판적, 즉 더 창조적이며, 생산적이다. “나는 이하에서 선이란 우리가 제기하는 인간 본성의 틀에 점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에 반해 악이란 우리가 이 똑같은 틀에 일치하는 것의 방해가 되는 것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더욱이 우리는 인간이 이 틀에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접근하느냐에 의해서, 그 인간을 더 완전 혹은 더 불완전이라고 부른다.” [각주:14] 중요한 논점은, 정립된 실재의 외부에 다의성 혹은 유비의 사고와 세계를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이 실재의 일의성과 이런 존재들의 다의성의 영역을 두 개의 다양체의 유형으로서, 혹은 체제의 차이로서 관계짓는 것이다. 헌데, “인간 본성의 틀에 점점 접근하는것이란 그 본질과 존재가 더 많이 일치하게 되는 것, 즉 개체로서의 인간의 존재가 더 많이 스스로의 본질과의 관계에서 규정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선은 더 많이 <좋은/나쁜> 실질을, 즉 더 많은 완전성을 갖게 될 것이다(인간 본성의 틀이란 그 본질과 존재 사이의 일치이며, 존재 속에서 그 본질의 변양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고 실현하려 하는 것 욕망의 윤리학 이다). 이에 반해, 그 본질과 존재가 더 적게 접근하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개물의 존재를 그 본질로부터 떼어내고 그 존재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계나 무능력 같은 부정적 사항을 좇아 그 사물을 평가하게 되는 것, 그 때문에 그만큼 자기의 정신이 부정이나 결여에 의해 더 많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경우의 악이란, 초월적 가치로서의 </>에 의해 규정되는 더 불완전한 것으로 채워진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악=결여체는 항상 비교를 자신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활동 역능의 증대와 감소로부터, 즉 동일한 역능의 상이한 두 가지 사용으로부터, 실재의 일의성과 존재의 다의성이라는 두 가지 본질적으로 상이한 체제, 다양체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완전성=실재성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한에서, 사물의 본질이라고 풀이된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사물의 본질과 존재는 불가분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양태로서의 사물의 본질에는 그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 이상, 그 본질과 존재가 무비판적으로 동일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갖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그 존재 속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코나투스를,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작용 원인으로서 갖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정도로 이 힘이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와 동일한 힘으로 발휘된다는 점에서, 모든 사물은 동등”(aequales)하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모든 코나투스에 대해 말해지는 신의 본성의 강도적인 <분유의 일의성>이다(거꾸로 말하면, 이것은 무한하게 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내재적 실체를 실재적으로 정의하고, 더 말한다면, 이 내재적 실체인 기관 없는 신체의 <강도=>을 비급하는 것이다). 본질에는 절대적인 정도로서의 완전성=실재성이 속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의 존재에 의해, 즉 지속에 의해 이 본질의 상태만으로는 결코 생길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활동 역능의 증대와 감소가 이행 방향 방향성으로서 우리에게 보이는, 실재성의 실질적 변이 의 본성의 차이로서 포함된다[각주:15] 기쁨의 수동적 종합(예를 들어 마주침의 조직화)은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산출한다. 자신의 신체와 적합하는 다른 물체=신체와 마주쳤을 때, 우리 속에 곧바로 수동적 감정으로서의 기쁨이 생기고, 이로부터 이 두 개의 신체=물체에 공통적인 일반성의 가장 철저한, 그러나 더 창조적이고 특이한 공통(일의적) 개념이 형성된다. 여기서는 내 신체의 활동 역능은 더 증대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내 신체라는 하나의 관계항 속에서 생기는 <사물의 상태>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하는 이런 두 개의 신체=물체들 사이에서 생기는 생성변화이다. 이에 대해 활동 역능의 감소를 보여주는 슬픔에 있어서, 나의 신체는, 거꾸로 기존의 불변적 관계 그 때문에 여기서는 더욱 더 가능성이나 우연성이 유효한 개념이 된다 를 대전제로 한 그것들의 단순한 관계항으로 한없이 빠지고, 마지막에는 거기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다(사실 동일성이 소리 높여 외쳐지는 것은, 이런 슬픔의 상태에서이다). 공통 개념은 <사이> 개념이다. 따라서 이 개념이 만들어지는 한, 그것은 관계라는 비물체적인 것의 변형을 필연적으로 표현하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공통 개념의 형성의 유인이 되는 기쁨에는, 다른 신체=물체와 더불어 기존의 관계의 변형 자체에 대한 마주침과 욕망이 있다. “마주침/만남이란 <관계=연관>(relation)이 외재화된 가운데서의 생성변화이며, 항을 정한 목적론적 배치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성 이것은 오히려 <관계=>(rapport)에 의해 표현된다 의 필연성에 의한 기존의 관계들=연관들의 파괴변형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이든 양태이든 존재가 말해지는 모든 것은 필연이라는 존재의 양상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존재의 외부에 있으며, 그 존재가 따라야 할 법칙이나 범형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외재성, 마주침의 조직화, 관계의 변형, 이런 세 가지 사건은, 생산적 욕망 아래서 공통 개념의 형성으로 향하기 위한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헌데, 이런 내 신체의 활동 역능의 증대, 즉 내 신체(corps)와 다른 물체=신체 사이에서의 나의 신체의 생성을, 예를 들어 퐁주의 사물 놀이[대상놀이]혹은 오히려 사물 기쁨[대상기쁨]이라는 말을 사용해 «objoie c»라고 부르기로 하자[각주:16] 들뢰즈가 말하는 마주침의 조직화는 관계의 외재성 속에서의 기쁜 물체=신체 사이의 결합인 이상, 단순히 우연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불확정적 관계들속에서의 요소들의 편성화이다. 그것은 기계적 욕망이며, 우연성이 아니며, 오히려 필연성을 존재하는 양태들 자신의 본성으로 삼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는가”, “거기에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산 사이의 언어 내적인 일반적 관계가 문제인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 어떤 관계도 없다. 비관계 속에서의 <결합-생성>이 문제인 것이다. <어떤 맬로리 [각주:17]에 있어서 거기서 에베레스트가 되는 것>이 발생할 뿐이다(부정법(不定法)의 동사, 고유명, 부정관사 혹은 대명사에 의해 구성된 욕망의 표현). 어떤 맬로리의 신체와 다른 물체, 에베레스트와의 사이에는 이 신체의 생성변화를 나타내는 «objoie c»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의 특이한 사건의 선을 긋는 형태로, 욕망을 내실로 한 어떤 <그것>(il)으로서의 무의식의 생산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답, 혹은 동성애자 맬로리의 이 말은, 결합의 부재 속에서 어떻게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요소들이 기계적인 결합을 이루어 작동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대상적으로 구성하는 주체도 아니라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속에서, 혹은 모든 기존의 불변적 관계의 가능성의 조건들 속에서 우연에 몸을 맡기는 정상병자도 아니고, 현실에서 구별되는 요소들이 불확정적인 관계 아래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욕망하는 기계의 한 부품이다. <-등산가>, <사자-조련사>, <인간--> ,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작동 편성된 생산적 욕망이며, 그런 한에서 욕망은 자기의 본성의 법칙들을 가장 잘 포함한 것이다.

 

2. 강도 : 죽음의 분열증화

그런데 관계의 외재성은 실체주의와 관계주의에 대한 제3의 입장인데,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이 외재성이, 실체 개념과 함수 개념을 파괴하는 동시에 모든 관계들의 현실적인 비물체적 변형을 수반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대부분 부정적으로만 작용할 뿐인 현행의 조건들의 한복판에서, 이야기화된 인물론적 무의식도, 구조화된 기호론적 무의식도 아닌, 반시대적인 초월론적 무의식을 형성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토는 이곳에 잠들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앙토냉 아르토는 나의 자식이며, 나의 아버지이며, 나의 어머니이며, 그리고 나이다.” [각주:18] 아르토는 자식,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 자신의 계열을 편력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내포의 가혹한 변형의 여행이지 결코 그 각각으로의 동일화의 여행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동일화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이 내포의 여행은 방랑의 여행이다. 실제로 고정된 관계들 속에서, 욕망이 혁명적이었다는 것은 결코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제반 불변적인 <관계>(친자관계, 부부관계 등등) 개념의 동일성 속에서의 미리 정해진 관계항(자식, 아버지, 어머니, )으로 단순히 이행하고 그것과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관계들 자체를 변형하는 것 없이는 생성변화할 수 없는 강도적 양태로서의 자식, 아버지, 어머니, 나이다. 그렇다면 이 내포의 여행, 이 강도의 흐름은, 어떤 이동경로를 취하는가? 달리 말해보자. 나는 나의 원인이며, 나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와 아주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원인으로서의 아버지로부터 결과로서의 자식으로 향해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이행과 동시에, 원인결과의 관계(혹은 친자관계) 자체가 잔혹할 정도로까지 일그러지고 변형되는 것이다. 이 혹한과 작열의 이동 경로야말로 비물체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길이며, 이 길을 걷는 것 자체가 하나의 초월론적 경험, 즉 분열분석적 경험이다.

 아르토라는 이름을 지닌 이 경련하는 존재는, 이런 불변적 관계들과 그 개념에 대한 투쟁, 비물체적 변형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비물체적인 것의 물체적 변형이다(비물체적 유물론의 첫 번째 입장) 없이는 신체로서 실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신체가 발하는 レクトン[각주:19]의 증기, 비역사적 구름이라는 것은 바로 이 변형이다. 이 신체의 존재에는 기존의 그 어떤 관계도 귀속하지 않으며, 또한 거꾸로 이 존재를 그 어떤 관계들로 환원할 수도 없다. 주의해야 할 논점은, 이 변형은, 이른바 정적 발생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물체=신체에 대한 비물체적 변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물체=신체처럼은 결코 변형도 파괴도 될 수 없는 것, 즉 의미나 가치나 관계 같은 비물체적인 것에 관한 물체적=신체적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만 비물체적 변형은 신체에 귀속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재적인 것의 현동화가 구체적인 것에 대해 그 힘들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현동화가 이 비물체적인 변형의 물상화와 하나가 될 때이다(들뢰즈에게서의 잠재성의 철학이 맑스의 문제들을 구성하는 장이 여기에 있다). 혹은 관계의 물상화로부터 그 비물체적 변형의 현동화로. 아버지를 살해하고(살인소망), 어머니와 하나가 된다(성적 소망)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식을 해석장치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이 욕망 속에서는 친자관계, 부부관계라는 관계 자체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으며, 여전히 보존된 채로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래서 상정된 소망, 욕망, 질투, 증오, 해석, 관계에 대한 의지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가 주장하는 빗물체적 변형에 대해 무차이이다. 그러나 기존의 관계를 보존한 채로는 욕망이 혁명적일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적인 욕망하는 무의식은, 이런 일반적인 특정한 관계들 자체를 변형하고, 이것들의 불변적인 개념의 동일성의 효력을 잃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을 뿐이리라. “잔혹이란 바로 이 변형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고뇌가 아니라 오히려 동물의 신체의 고통에 가까운 것이다. 아르토는 바로 이 빗물체적 변형의 고아이며, 사건 속에서 욕망하고 있는 독신자이다.

 셋째로, 스피노자에게서의 신체의 탈-유기체화라는 형성 차원 아래서만 사고되는 임상의 문제(환언하면, <강도의 차이>의 본성)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 삶에 있어서, 특히 유아기의 신체를, 그 본성이 허용하는 한, 또한 그 본성에 도움이 되는 한, 가장 많은 것에 유능한 다른 신체, 그리고 자기와 신과 사물에 대한 가장 많은 것을 의식하는 정신에 관계하는 다른 신체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강조는 인용자]. [각주:20] 여기에는 어떤 일정한 기관들로 구성된 유기체적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 기관 없는 신체 로의 변질변신의 문제, 혹은 현동적인 현재의 상으로부터 바라본 유기체적 신체의 존재로부터 영원의 상 아래서 바라본 비유기체적 신체의 본질로의, 즉 기관을 갖지 않은 신체로의 변화형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유아기의 신체로부터, 달리 말하면 거울에 비친 기관들의 총체로서의 유기체적 신체로부터, 타자가 개재하지 않고 그 결의=결단이 모두 강도로서 생겨나는 기관 없는 신체, 거울상 단계를 갖지 않은 실재적 신체, 거울에 비치지 않은 충실한 신체로. 다만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어떤 본질 혹은 형상(예컨대 말)을 다른 본질 혹은 형상(예컨대 인간 혹은 곤충)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체의 본질 혹은 형상의 강도의 문제이며, 역시 그 본성과 하나가 된 양상의 문제, 필연성의 문제이다. 이것은 형성의 질서에 있어서의 비판의 수준과 완전히 평행을 이루는, 스피노자에게 고유한, 그리고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생산적 무의식 자체로서의 욕망하는 평행론에 있어서의 임상의 문제이다.

 스피노자는 분명히 신체를 하나의 새로운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주장하듯이, 그것은 동시에, 혹은 필연적으로 신체를 <죽음의 모델>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를 <죽음의 모델>로 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그것은 초월성을 띤 부정이나 결여를 신체에 가져오는 것도, 혹은 양과 질에 관련된 죽음을 모델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체가 단순히 가멸적인 것이기 때문에도, 우리에게서 신체가 가장 절실한 가멸성을 갖는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가 모든 가멸성을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실재성을 드러내는, <강도=>으로의 점근적 하강소멸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을 양과 질로부터 해방하는 것, 혹은 죽음을 둘러싼 양과 질의 관점을 무효로 하는 것이다. 그런 신체는 무엇인가? 기관 없는 신체는 결코 우리의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이 아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아무것도 가능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가능케 할 수 없는 소진된 것의 절대적 조건이며, 더 충분하게 말한다면, 모든 강도가 발생하기 위한, 즉 절대적 낙하소멸하기 위한 강도가 내포량으로부터 구별되고, 바로 강도로서 파악되기 위한 하나의 무조건적 원리이다[각주:21]기관 없는 신체는 <죽음의 모델>이다. [각주:22] 칸트는 분명히 지각의 예측予料속에서 이 낙하, 소실을 파악했다. <부정성=>과의 관계 아래서만 규정되는 양, 즉 이 <부정성=>과의 내적인 긴장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양, 그것이 내포량이며, 점근적으로 이 <부정성=>으로 낙하해가는 한에서만 그 정도에 고유한 수준을 나타내는 양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이미 근대 시민사회의 인간상 속에서, 혹은 새로운 형이상학, 새로운 합리주의 속에서, 혹은 이성의 자기 비판 속에서 간신히 죽음의 욕동을 언뜻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죽음은 결코 부정적인 것으로도, <부정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죽음에 걸맞는 것은 강도이며, <강도=>이다. “죽음을 분열증화하려, 무엇보다도 양과 질로부터 죽음 자체를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평행론으로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죽음의 표현을 발산시키는 것, 모든 <강도-생성><강도=> 위에서 경험되는 죽음의 생성으로 하는 것이다.

 분명히 스피노자는 타자 없는 세계에서 살고, 그래서 타자의 욕망에도, 타자의 변증법적 스토리에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인간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다. 그리고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각주:23] 그러나 여기서 성찰되는 삶은, 실재 속에서 형성되는 삶이며, 그러므로 여기서 성찰되지 않은 죽음이란 상상과 상징 아래서 표상될 가멸적인 차이, 혹은 적용의 질서에 있어서의 잠재적 다양체의 현동화의 끝에서 취소되는 가멸적인 차이에 대응한 죽음, 부정이나 결여로 환원되는 죽음, 주체로서 고정된, 한 명의 타자로서의 <>의 죽음이다. 따라서 여기서 성찰되지 않은 삶도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성찰되지 않은 죽음에 의해 잃는 것이 최대가 된 듯한 삶이다. <>는 이런 삶의 별명이다. 그러나 <죽음의 경험> 기관 없는 신체라는 <죽음의 모델> 위에서 발생하는 (즉 낙하하는) 강도를 감각하는 것 에 대해서는 이런 <>에 대해 말해지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은 완전히 그 의미를 잃는다. 이것이야말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죽음이 그만큼 덜 해로워지며”, “죽음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각주:24] 왜냐하면 이 경험에 있어서 하나의 삶은, 죽음에 의해 잃는 것이 더 적을 뿐, 그만큼 더 많은 영원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의 탈근거화야말로 영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들 속에서는, 기관 없는 신체는 결코 차이화하지 않는 차이이며, 이에 반해 차이화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인 차이라는 필연성 속에서 이 신체의 비분할적인 내포 부분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강도=>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어떤 강도의 차이 <e é>이다. 자유로운 인간의 지혜의 모든 것은 욕망의 지혜이다.

 영원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 그것은 욕망하는 평행론에 있어서의 미래의 힘들, 분열분석적인 <-실현>의 경험이다. 이 경험이 빗물체적 변형의 물상화 = 현동화의 실재적인 발생의 요소가 될 때, 처음으로 이 <물상화=현동화>론은 혁명의 힘들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 미래의 원인을 결코 목적인의 일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적인은 그 과정을 이루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고, 나쁘다고, 즉 실현의 결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데, 그러나 이 새로운 작용원인=자기원인은 과정을 결코 부정하지는 못할망정, 그 자체로 오히려 질료적인 <과정인>으로서만 불릴 수밖에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문맥이 아니라, 또 문맥과는 전혀 관계없는 비통시적인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곳을 통과하는 자는 결코 통과한 공간을 산출하지 않는 걸음걸이를 하는 자들이며, 분열자의 산보(혹은 그 사고)란 그런 것이다. 사회적 영역은 오히려 이런 과정에 의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산출되는 실재의 영역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듯이, 바로 분열증적 과정은 혁명의 잠재력이다.” [각주:25] 욕망은 이 과정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분열분석적 경험은 하나의 실재적 경험이며, 항상 <죽음의 경험>을 동반한 경험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열분석은 오히려 하나의 종합이다. 모든 피분석체의 그 현동적 조건들을 파괴하는 것, 변형하는 것, 이와 동시에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강도=>을 비급하는 것, 이것이 그대로 분열분석적 경험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 경험은 파괴와 동시에생산적이다. [각주:26] 이렇게 해서 분열분석적 경험은 그 사고가 비물체적인 것의 물질성임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사고의 물질성 ― 비물체적인 것을 물체적으로 변형하는 강도 가 자기 속에서 사회적 영역을 실재적으로 정의하고, 또한 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실제로 사회를 생산하는 것이며, 이것이 <강도=>을 비급하는 것의 의미이다[각주:27] 분열분석은, 따라서 유물론적이고 초월론적이다. 그것은 욕망의 과정인을 찾아내어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빗물체적 유물론이며, <강도=>을 비급한다는 강도의 완전한 본성을 찾아내고 긍정하는 한에서 초월론적이다. 스피노자와 분열분석의 가장 적극적인 임무, 그것은 어떻게 이 <강도=>을 자기 속에 비급하느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무의식으로서의 욕망하는 평행론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따. 무의식의 형성, 즉 욕망하는 평행론에 의해 들뢰즈/가타리가 제기한 분열분석은 더 급진적으로, 더 많은 강도를 수반한 사고와 경험의 행사 속에서 그 임무가 전개되는 것이다.

 

에가와 타카오 : 도쿄도립대학(철학). 저서로 존재와 차이 :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存在差異ドゥルーズの超越論的経験論)(知泉書館), 번역서로 베르그손 강의록 3(ベルクソン講義録III)(공역, 法政大学出版局)

  1. ‘정상병자‘(normopathe)는 라 보르도 정신병원의 창설자이며, 거기서의 가타리의 좋은 파트너였던 장 우리가 만든 말이다(Cf. Felix Guattari, Chaosmose, Galilee, 1992, p.103). [본문으로]
  2. Gilles Deleuze, Pourparlers. Minuit, 1990, pp.197-198 / cf. Note pour l’edition italienne de Logique du sens, in Deux regimes de fous, Minuit, 2003, p.60. [본문으로]
  3. [옮긴이] 일본 문헌에서 읽을 수 있는 '비급'이라는 단어는 한국어로는 투자, 투여로 옮기는 편이 좋다. [본문으로]
  4. 스피노자, 『윤리학』, 3부, 정리 2 비고. [옮긴이] 원문 및 국역본을 참고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5. Cf. Gilles Deleuze, Quatre propositions sur la psvchanalyse, in DF, pp.73-74. “무의식, 당신은 이것을 생산해야만 한다. 무의식을 생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의 정신증후군, 당신들의 자아, 당신들의 정신분석가와 함께 있어라. … 무의식을 생산하기.” [본문으로]
  6. 개념의 적용의 차원에 있어서의 “사변적 관점”과 개념의 형성의 위상에 있어서의 “실천적 기능” 사이의 차이, 그리고 이 후자의 경험론적 의의 ― 이런 논점들이야말로 경탄해야 할 일의성의 사상을 제기한 혁명적 이분자異分子로서의 스피노자를 부각시키게 된다 ― 에 대해서는 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1968, pp.134-136, 259-262(이하, SP로 표기) / Spinoza-philosophie pratique, Minuit, 1981, pp.27-43, 127-129, 160-161(이하, S으로 표기)를 참조하라. 미뉘사에서 출판된 『스피노자 : 실천철학』은 그 11년 전에 PUF에서 나온 『스피노자』를 바탕으로 대폭 증보∙가필된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 구판에 있었던 「텍스트 발췌집」 부분(세 개의 구분, 전체 26쪽)은 신판에서는 완전히 생략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래에서 각각의 발췌에 붙여진 들뢰즈 자신에 의한 간단한 표제와 발췌 대목을 참고로 번역해둔다. 텍스트 발췌집 (A) 비판 1. 의식에 대한 비판 : 놀랍게도 신체는 … (『윤리학』 3부 정리2 비고). 2. 왜 우리의 관념은 본래적으로 비완전한가(『윤리학』 2부 정리28, 증명과 비고). 3. 법에 대한 비판 : 아담의 오해(『신학정치론』 4장). 4. 우리는 비완전한 관념에 따른 두 종류의 감정을 갖는다(『윤리학』 3부 정리 11 비고 / 정리 39 비고 / 감정의 일반적 정의). 5. 슬픔의 감정과 이 감정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윤리학』 4부 정리 45 비고 / 정리 63 비고 / 부록 13 / 5부 정리 10 비고). 6. 종교에 대한 비판과 종교의 의미 : 복종하는 것(『신학정치론』 13장) (B) 완전한 것의 획득 7. 방법 : 어떤 진정한 관념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과 신과 다른 물체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산출하는 것(『지성개선론』 37-40). 8. 왜 공통개념은 우리에게서 완전한 관념인가(『윤리학』 2부 정리 39 정리와 증명과 계). 9. 어떻게 우리는 공통개념에 도달하는가: 기쁨의 감정에서 출발해 외적 사물과 우리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는 것(『윤리학』 5부 정리 10 정리와 증명과 비고). 10. 공통 개념에서 신의 관념으로(『윤리학』 2부 정리 46 증명 / 정리 47 비고). 11. 신의 관념의 첫 번째 측면 : 속성에 의한 유일한 실체(『윤리학』 1부 정리 8 비고 2). 12. 신의 관념의 두 번째 측면 : 모든 속성에 대한 유일한 실체(『윤리학』 2부 정리 10 증명과 비고). 13. 원인의 일의성 : 자기원인과 똑같은 의미에서 말해지는 모든 사물의 원인인 신(『윤리학』 2부 정리 3 비고). 14. 속성들의 일의성 : 여러 가지 속성들이 신의 본질을 구성하고 여러 가지 산출물들의 본질 속에 포함된다(『윤리학』 2부 정리 7 비고) (C) 양태의 상태들 15. 존재하는 개체(『윤리학』 2부 정의 보조정리 4 5, 6, 7 비고). 16. 죽음이 의미하는 것(『윤리학』 4부 정리 39 증명과 비고) 17. 영원의 특이한 본질(『윤리학』 5부 정리 23 증명과 비고). 18. 악은 본질에 관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완복서한집』 편지 13[스피노자가 블뤼엔베르크에게 보낸 편지]. 19. 제3종의 인식과 본질들 : 나와 사물과 신(『윤리학』 5부 정리 25 증명 / 정리 31 증명). 20. 개체의 사멸 후에 본질적으로 남는 것(『윤리학』 5부 정리 38 증명과 비고)(Cf. Gilles Deleuze, Spinoza, PUF, 1970, pp.101-26). [본문으로]
  7. Cf. SP p.100. [본문으로]
  8. 가타리는 초기 스토아학파의 이 “비물체적”(incorporel)이라는 말을 들뢰즈 이상으로 많이 사용할 뿐 아니라, 그것 이상으로 새로운 의미를 그것에 부여한다. <비물체적인 것>의 개념을 쇄신하고, “비물체적 우주”를 입안한다는 의미에서, 가타리는 21세기의 사상가이기 전에 그 과격함에서 말하더라도 오히려 20세기의 크리시포스가 아닐까? 예를 들어 스피노자와 라캉을 관계시켜서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형태로 <비물체적인 것>의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스피노자를 달리 말해서 나는 비물체적 세계에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Felix Guattari, Cartographies schizoanalytiques, Galilée, 1989, p.196((『分裂分析的地図}作成法』、宇波彰・吉沢順 訳, 紀伊國屋書店, 1998년). “언어 표현의 실질과 비언어 표현의 실질은 미리 만들어진 유한한 세계(라캉적인 대문자 〈타자〉의 세계)에 속하는 담론의 연쇄와 무한한 창조적 잠재성을 지닌 비물체적 역치閾値(이는 라캉적과 ‘숫자집’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확립된다”(Chaosmose, p.43). “그러나 라캉은 … ‘욕망하는 기계들’ ― 그는 이 이론에 착수했는데 ―을 적절하게 비물체적인 잠재성의 권역에 위치시키지 않았다”[강조는 인용자](Chaosmose, p.132). 또 장 우리도 가타리의 영향을 받았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료적 기준의 틀은, 응축된 질의 차원에 있는 것을 측정할 수 없으며,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비물체적인 차원에 있는 것을 측정할 수 없다”(ジャン•ウリ序文, 『精神の管理社会をどう超えるかーー制度論的精神療法の現場から』, 松籟社, 2000년, 16頁). 다만 스피노자는 당연한 것인데, 이 “비물체적”(incorporeum)이라는 말 자체의 사용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지성개선론』 88-89頁 참조). [본문으로]
  9. 예를 들어 아르토의 「언어에 대한 편지」에는 문법적으로 분절된 “말의 언어”에 대한 비판과 고차적인 연극적 “관념”에 대한 철학적 주장이 있다(Cf. Antonin Artaud, Œuvres Completes IV, Gallimard, 1978, pp.101-117(『アントナン・アルトー著作集 I 演劇とその分身』, 安堂信也 訳, 白水社, 1996년). “한마디로 연극의 가장 높은 관념은 우리를 철학적으로 <생성>과 화해시키는 관념이며, 모든 종류의 객관적 상황을 통해서 단어 속에서의 감정들의 변화나 충돌에 대한 관념보다도 사물 속의 관념들의 통과와 변질에 관한 한순간의 관념을 훨씬 우리에게 암시하는 관념처럼 생각된다”(Ibid., p.105). [본문으로]
  10. 스피노자, 『윤리학』, 3부 「감정의 일반적 정리」 [옮긴이] 다시 말하지만, 일본어 문서를 그대로 직역했다. 따라서 '감정'을 '정서'로 바꾸지 않았다. [본문으로]
  11. 스피노자, 『윤리학』, 2부, 정리 12, 비고 참조. [본문으로]
  12. cf. Gilles Deleuze, Felix Guattari, Mille plateux. Minuit, 1980, pp.196-197(『千のブラトー』, 宇野邦一・他訳, 河出書房新社, 1994년), 또한 森島章仁, 『アントナン• アルトーと精神分裂病』, 関東学院大学出版会, 1999년, 「第五章 : 重さをひらく」のなかのとりわけ「三寸断化された身体/器官なき身体ーー性, 分身, 機械」를 참조. [본문으로]
  13. “그 대상의 본성을, 즉 인간 신체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 …”(스피노자, 『윤리학』, 2부 정리 13 비고) 및 “왜냐하면 관념의 탁월함[가치]과 그 현동적인 사고 역능은 대상의 탁월함[가치]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윤리학』 3부 「감정의 일반적 정의」). [본문으로]
  14.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서문 참조. [본문으로]
  15. Cf. S. pp.54-58. [본문으로]
  16. 프랑시스 퐁주의 ‘사물 놀이’(objeu) ― 더 나아가 이것은 ‘사물 기쁨’(objoie)으로 이어진다 ― 에 대해서는 安部良雄, 『ポンジュ人・語・物』(筑摩書房, 1974년)을, 또한 라캉의 ‘대상 a’를 대신해 가타리와 장 우리가 제기하는 제도론적인 ‘대상 b’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三脇康生, 「精神医療の再政治化のために」(『精神の管理社会をどぅ超えるか』 수록)을 참조. [본문으로]
  17. [옮긴이] 등반가, 산악가인 George Herbert Leigh Mallory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18. Cf. Antonin Artaud, Ci-git, in Œuvres Completes XII, 1974, pp.75-100. [본문으로]
  19. [옮긴이] 렉튼이라고 읽는데,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20. 스피노자, 『윤리학』, 5부, 정리39, 비고. [본문으로]
  21. Cf. Gilles Deleuze, L’Epuise, Postface a S. Beckett, Quod, Minuit, 1992, p.97/ “이마주는 사라지는 것, 소진되는 것, 하나의 낙하이다. 그것은 그 높이에 의해, 즉 0 이상의 그 수준에 의해 그 자체로 정의되는 순수 강도이며, 이 강도는 그저 하강하는 것에 의해서만 그 수준을 묘사하는 것이다.” Cf. Gilles Deleuze, Felix Guattari, L’Anto-Œdipe, Minuit, p.395[이하 AOE로 약칭]. “모든 강도는 그 고유한 삶 속에 <죽음의 경험>을 초래하며, 또한 <죽음의 경험>을 포함한다. 아마 모든 강도는 마지막에는 사라지고, 모든 생성은 그 자신 <죽음의-생성>이 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22. Cf. AOE, pp.393-398. [본문으로]
  23.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67. [본문으로]
  24. 스피노자, 『윤리학』, 5부, 정리38, 정리와 비고, 정리 39, 비고를 참조. [본문으로]
  25. AOE, p.408. [본문으로]
  26. Cf. AOE, pp.384-385. “[분열분석의] 두 가지 작업은 반드시 동시에 이뤄진다.” [본문으로]
  27. Cf. AOE, p.394. “각각의 강도가 무한하게 많은 정도 아래서 증감하는 것으로서 어떤 순간에 산출되는 것에서 출발해서, 자기 자신 속에 <강도=영>을 비급하는 것은 강도에 고유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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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자연

ドゥルーズと 自然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청자 / 해설]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정황343, 2003, 176-189

 


들뢰즈와 ‘자연’.pdf


── 일본의 들뢰즈론은 일반적으로 문학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고, 그의 난해한 문체를 문제 삼거나 예술비평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가운데 고이즈미 선생이 쓴 들뢰즈의 철학(ドゥルーズの哲学)(講談社現代新書)이과(理科)”적이랄까, 들뢰즈의 사고법과 근대자연과학의 방법론의 연관이 클로즈업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관을 축으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우선 첫 번째 점으로 들뢰즈와 라이프니츠의 관계를 꼽고 싶습니다. 책에서도 보편수학이 언급되는데요, 이것은 원래 라이프니츠의 개념이죠.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에 걸쳐 일본에서 라이프니츠 유행(boom)이 일어났을 때, “보편수학이나 보편기호학이 화제가 됐습니다만, 이것과 당시 역시 주목받은 들뢰즈가 주름에서 전개한 라이프니츠론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요? 원래 관계가 있다면 하는 얘기입니다만.

 

고이즈미 : 들뢰즈가 보편수학을 꺼낸 배경에는 현대의 수리과학의 기초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들뢰즈는 자연물도 생물도, 보편수학에 의해 일의적으로 파악된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생명이나 생물의 시스템론과 모델론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만, 거기서는 수학의 역할이 매우 컸고, 거기에 사고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편수학 mathesis uiversalis”은 데카르트가 복권시키고 라이프니츠가 계승한 구상입니다. 라이프니츠 자신은 보편수학에 대해 짤막하게 여러 가지를 쓰고 있습니다만, 자연물이나 생물을 포함한 존재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정리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보편수학 구상이 꿈에 그칠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만, 들뢰즈는 현대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짐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10년 전의 라이프니츠 유행은, 들뢰즈의 라이프니츠관과 그다지 접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EU통합 붐의 일환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때 얘기된 라이프니츠의 보편성은 법학자 라이프니츠의 보편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럽적 보편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습니다. 상당히 이전의 러셀이나 루이 쿠트라(Louis Couturat)의 고전적 라이프니츠 연구 쪽이 풍부합니다.

 

──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씨는 최근 나온 들뢰즈(ドゥルーズ)(NHK出版)에서 라이프니츠에 대한 긍정적인 면으로서 보편성을 추구했다는 것, 부정적인 면으로서 예정조화로 끝났다는 것을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성의 철학자인 들뢰즈는 예정조화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고이즈미 : 라이프니츠는 다면적이고 가능성으로 넘치는 철학자입니다. 들뢰즈는 그 가능성을 이용하면서 고쳐서 새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능세계론에 관해서도, 이것은 스즈키 이즈미(鈴木泉) 씨가 해명하고 있습니다만, 들뢰즈는 꽤 초기부터, “가능세계는 타자로서의 여성이 표출되는 장이다고 고쳐 읽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주름 pli”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이 속에 접혀져 있다 = 암시[함축]되어 있다 im-pli-qué”는 것이 펼쳐져 있다 = 해명된다 ex-pli-qué”는 것이 생명의 발생이나 세계의 진전이라고 읽혀집니다만, 이것뿐이라면 단순한 전성(前成)”설이며, 쓸모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많은 사람들은 들뢰즈의 주름전성설적으로만 읽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름은, 작게 접혀진 현실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주름을, 공간의 왜곡이나 다양체의 곡률로 재파악해서 현대화, 대수화할 필요가 있다. 주름 개념이라 해도, 그것을 현대수학적으로 깊어지고, 생명이나 자연의 잠재성과 생성을, “후성(後成)”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장치로 가다듬는 것이 들뢰즈의 보편수학의 목표였으며,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생성변화라고 기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러면 속류 무상(無常)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 라이프니츠의 수학주름은 반드시 정합성을 갖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들뢰즈가 그것을 해석에 의해 다소 무리하게 연결하고자 했다는 말인가요?

 

고이즈미 : 무한소라는 수학적 개념과 미소지각이나 미소표상과 주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을, 라이프니츠 자신에게 맞부딪쳐 보더라도, 명확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연구자도 그것들을 그저 나란히 늘어놓았을 뿐입니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를 바로크 철학자라고 보는 고색창연한 해석을 멋지게 복권시킨 셈입니다만, 실제로는, 라이프니츠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비판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라이프니츠의 무한소는 어디까지나 무한 표상에 불과하며, 헤겔보다는 덜하지만, 코시나 데데킨트가 달성하는 극한개념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의미의 논리시네마에서도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론이나 예정조화론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 들뢰즈는 미분개념에서 차이를 도출하려고 한 것입니다만, 우리가 고등학교 수학에서 배우는 라이프니츠 당대 수준의 미분이라면, 하나의 값으로 예정조화적, 연속적으로 수렴되는 이미지이기에, 철학적인 차이와는 거리가 머네요. 대학에서 배우는 코시 이후의 수학이라면, 미분 속에는 불연속적인 것도 있으며, 결코 하나의 값으로 깨끗하게 수렴되어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금은 이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의 차이개념은 라이프니츠 시대의 미분이라기보다는 더 현대적인 미분에 대응하는 셈입니까?

 

고이즈미 : 요는 대학 이후의 수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미분 방정식의 해()가 발산하고 분기하는 경우 등, 수학은 결코 얌전하게 길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규체역학으로 길들이려고 하고, 수치계산 시뮬레이션에 갖고 들어옵니다만, 이번에는, 기계에 설치된 수학이, 야만적이고 길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발판을 놓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라는 마이너과학입니다.

들뢰즈는 자연계에서도 생물계에서도, 차이가 제한없이 자라나서 현실화한다는 사실, 진화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변이가 점점 자라나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합니다. 그리고 차이를 산출하는 장을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 장치는 미분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를 생산하는 장이 현대의 수학에 의해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제 자신도, 차이를 발생시키는 장에 접근하려면 일상언어로는 안 되며, 해석학과 대수학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자주 사용되었던 강도라 해도, 들뢰즈 자신이 강도와 미분의 관계가 어렵다고 말했으며, 강도는 수학의 방정식에서 자유 변수(파라미터)입니다.

다만 동시에, 실제로 수학자자연과학자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철학자는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게다가 평가하는 쪽도 현대의 수리과학자연과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때, 말하고 싶은 것은, 최근의 철학윤리학은 수학자연과학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고,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회윤리도 경제학 비판도, 에코메트릭스의 횡포를 방치해두고 있습니다. 후생경제학 이후라고 말해도 좋습니다만, 환경경제학, 진화경제학, 블랙 숄즈 모델 같은 사이비 이론의 횡행에 대해 속수무책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분석철학이 철학 전체를 휩쓸었습니다만, 분석철학계의 과학론은 전혀 쓸모가 없다. 예를 들어, 현대자연과학에서는 자연법칙은 미분방정식으로 적히는 데도, 명제형식 밖에는 염두에 놓이지 않습니다. 전쟁부터 종전 직후까지, 수리철학도 생명철학도 꽤 높은 수준에 있었습니다만, 그 전통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미분이라는 것은 인간이 사물[]”에 대해 점차 접근해갈 때에 나타나는 다양한 차이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거군요. 그렇게 하면, “미분이란 주관적인 것이라는 게 되는 것 같습니다만, 선생은 그것을, 일상언어로 그대로 주관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그러면,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학의 언어로 엄밀하게 하나의 해답을 낼 수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주관적이라고도 객관적이라고도 단언할 수 없기에, 좀체 알기 어려워집니다만, “미분주체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다고 봐야 할까요?

 

고이즈미 : 수학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천사도 신도 풀지 못한다고 증명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생물과 자연물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면서 생성소멸한다. 그렇다면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문제에 대해, 주관적이라고 평가해도 객관적이라고 평가해도, 엉뚱해진다. 주관객관 도식은, 이런 곳에서 파산할 것예요. 들뢰즈는 자주, “식물은 빛을 지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식물은 빛에 자극되어 광합성을 하는 방식으로 빛을 지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물에는 지각하는 이 있고, 빛의 정동affection”이 있다. 그 식물의 지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초월론적 장을 표현하는 것은 보편수학뿐이며, 식물은 보편수학이 표현하는 빛의 문제를 풀면서, 초월론적인 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보편수학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주관의 범위 안에 잡힐 리가 없으며, 보편수학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주관일리도 없다.

기존의 철학자가 말하는 주관은 결국 인간의 주관입니다. 현상학은 지각의 수동적 종합 아래서는, 즉시 휠레(hyle)가 온다고 믿는다. 인간의 주관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은 형상 없는 제일 질료라고 믿고 있다. 구제할 길이 없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거기에서, 현상학 이후의 철학은, 인간주관의 한계를 이러저러하게 밀어 올리고, “역설을 만지작거렸다[당치도 않게 내세웠다].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빛을 지각하는 모습은, 인간에게는 알 수가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내질 뿐이다, 알았다고 한다면 물리학주의에 불과하다, 고 얘기를 끝내고 사고를 포기했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한계나 역설을 꿰뚫고 긍정적인 인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의를 몇 군데에서 하며, 칸트론에서의 부조화적 능력론 등, 그것은 그 나름으로 세련된 것입니다만, 그런 것을 좇기보다는, 우선은 소박한 유물론, 소박한 실재론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인간중심주의적 인식론을 일단 벗어난 곳에서부터, 철학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종언을 단순한 공상으로 끝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철학사적으로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자주 한 쌍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마이클 하트도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태도는 다른 철학자에 대한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죠. 경건하다고 해도 좋을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전기(傳記) 부분도 포함해서 그다지 만지작거려지지 않았기에, 상당히 정중하게 기술되어 있네요.

고이즈미 : 들리즈에게는 스피노자야말로 사랑하는 철학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부정적으로 읽히기 쉬운 윤리학』 「3의 정서론도, “외부와의 마주침으로서 긍정하며, 5에서 신에 대한 사랑으로 [높이 날아] 올라가는 곳에서도, 유보없이 긍정한다. 들뢰즈가 통째로 긍정하고 있는 철학자는 스피노자 정도입니다. 들뢰즈에게는 스피노자가 혁명가입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스피노자 붐이 있고, 스피노자의 정치사상가로서의 면이 강조됐습니다만,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은 그것과는 매우 이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스피노자를 형이상학자윤리학자로서 평가하고 있다.

 

── 보통의 철학 교과서라면, 스피노자의 실체개념이 범신론적인 것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신적인 실체의 일부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나온 정동이라 해도, 순수한 외부로부터 온다기보다는 대우주와 소우주가 공명하는, 예정조화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리네요. 그런 교과서적 이미지에서 보면, 들뢰즈는 꽤 이상하게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고이즈미 : “실체속성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은, 이른바 범신론적이고 내부예정조화적인 이미지를 타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강조해도, 아무리 차이를 무한하게 반복하는 것이 실체라고 다시 말하더라도, 기껏해야 차이의 정치의 담론이나 다문화주의의 담론으로만 청취될 뿐이죠. 예전부터 생각하는 것인데요, 이것으로는 17세기 철학의 영향력impact은 전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는 권리역능이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굉장히 대단한 견해인데도 그 영향력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또한 스피노자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신체의 정동이라고 잘라 말한다. 정치경제적인 이슈에 대해 분노하고 논하고 행동하는 것도 정동이라고 한다. 들뢰즈나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정치나 사회의 장면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통해 정동이 야기되고, 마주침을 하도록 꾀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감정에 의해 수동감정을 능동감정으로 전환하는 민중이 형성된다는 것만이 중요하며,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건을 그렇게 볼 수 없게 되고 있다. 그만큼 상징적인 것이나 르상티망에 얽매여 있다.

라이프니츠도 스피노자도, 생리적 수준에서 생기는 미세한 변용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수준에서의 변용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만, 두 가지 수준의 변용의 얽힘이라고 사건을 볼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근대철학과 들뢰즈의 사고방식은 체득할 수 없습니다. 철학 교과서는 그것을 왜소한 심신 문제로 파악할 뿐이며, 입구에서 글러먹었습니다. 사고의 동기부여를 모른다.

 

── , ‘정념이라는 형태로 신체적으로 생기는 것의 «원인»을 가능성으로서 탐색하는 가운데, 초월론적인 실체가 나오는 것이며, 그것을 현대인이 역전시키고, “실체를 출발점으로, ‘정념’, ‘정동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진부한 예정조화론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거죠.

 

고이즈미 : 실체의 보이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의 조건인 초월론적인 장(속성)과 식물의 경험의 조건인 초월론적인 장(속성)을 차이화하면서 생산하는 것이 실체라고 본다. , 인간의 생존양식과 식물의 생존양식이, 생태-윤리적으로 차이화되는 방식이 분명해진다.

인간의 편에서 말한다면, 인간은 모종의 생물로서, 정동의 경합을 경험합니다만, 그 경험을 통해 주관이 세워진다. 그때의 원리를, 초월론적이고 경험론적인 장의 원리로서 파악하는 것이, 들뢰즈의 흄론의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주관성이 세워지는 곳에, 신념이나 정념이 몰려들고, 사람들은 그것에 구속된다. 그 속박을 이용하면서도 그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윤리의 핵심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편하게 살자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일체의 현상을 보는 것은 꽤 어렵다. 그만큼 우리는 인격이나 주관성 같은 것에 쾌적하게 얽매여 있습니다.

 

── 최근, 화제가 된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서, 키워드로서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다중multitude”이 나오네요. 그들더러 말하라면, “다중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정동입니다. 그 스피노자 독해방식을 그들은 들뢰즈로부터 계승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런 형태에서의 정동론의 응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이즈미 : 나는 다중구성된 힘potestas”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potentia”이라고 해석하는, 네그리나 발리바르 등, 스피노자연구의 2세대의 논의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리가 있기에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저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multitude를 다양체로 끌어들여 사용하는 일은 있어도, 저런 포텐셜의 의미로 사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에 정치적으로 판돈을 거는 것은 모종의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 들뢰즈에게 스피노자가 혁명가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의 방식에 있어서의 혁명이라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어떤 삶의 방식일까요?

 

고이즈미 : 들뢰즈가 혁명을 말한다고 했다면, “노마드(유목민)”푀플(민중)”이라는 말을 쓰겠죠. 네그리와 하트는 지배자의 명령에 따를 수 없는 신체”, “자연에 무시하는 신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신체를 긍정하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위치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공화주의라든가 자유주의라든가 민주제라고는 지껄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배 속에서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따를 수 없는 신체가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노마드적 인간이 있다. 들뢰즈는 그런 인간에게 기대를 건다. 다만 그것이 구성하는 권력으로서 세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지배를 불러들인다고 말한 게 아닐까. “혁명이라는 말은 사용합니다만, 이미지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들뢰즈도 개별 이슈들에 대해 정치적 견해를 밝히긴 했지만, 그것과 철학적윤리학적 전망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들뢰즈는 보통의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관리사회론이 자주 거론됩니다만, 정치론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고, 뭔가에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관리사회 속에서 신체의 역능이 여는 새로운 지평을 생각하려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가타리와의 공저이기도 한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 자본해체론으로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고이즈미 : 그렇습니다. 자본이나 화폐에 관해, 두 개의 책에서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것보다, 자본제에 대항하는 것이 분열자분석을 간과해 왔다는 것이 중대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왜 이토록 매력적이냐 하면, 서두에 나오는, 잡동사니 기계의 소년이나 산책하는 광인, “도래하는 광인의 힘에 감동했습니다. 그 책이 나온 70년대 초반에는, 반정신의학반임상심리운동장애인자립운동의 물결이 있었고, 당시는 그런 맥락에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들뢰즈는 그 뒤 새로운 생명체새로운 그리스도를 만들어내자고 호소합니다. ,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근본적으로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안 된다고 인정한 다음, 인간을 소재로, 생명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새로운 생명체로 변용시킬 가능성에 건다. “도래할 광인에 기대를 건다. 그런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는 기존의 정치적 대결도식을 송두리째 뒤집겠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모두 생명론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란 진화하고 변신하고 새로운 생명체를 낳는 힘입니다. 들뢰즈주의자는 항상 생명을 생활로 잘못 읽어왔습니다. 만일 들뢰즈로부터 아무래도 정치적인 것을 읽어내고 싶다면, 생명론의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바이오인포매틱스(생명정보학)이라는 분야에서는, 수학을 응용한 해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가짜 보편수학이며, 그것을 구실로 어리석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저런 종류의 것에 대해서, 생명의 잠재적인 힘을 표현하는 보편수학을 내걸고, 어떻게 대항하느냐가, 들뢰즈적 정치라고 긴급하게 생각되어야 합니다.

 

── 책에서도 썼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의 생명윤리라고 할 경우, 뭐가 윤리의 주체이고 객체인가라는 전제 자체가 기존의 윤리학과는 다른 것 같아요. 개인의 생명의 존엄을 제일로 생각한다는 입장에서, “개인=주체를 절대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체=생명이라는 관점에서 개인을 말소해버리는 것도 아니다. “개체전체의 이항대립에 얽매이지 않는 생명의 존재방식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고이즈미 : 개인에 관해 생각하면, 아무래도 인격이나 주관성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의 한계입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인용하여,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라고 몇 번이나 말합니다. 들뢰즈주의자는 이것을 신체적 행위의 수준에서 이해할 뿐입니다. 정치적 행위나 사회적 행위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육체 수준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체와 전체의 이항대립에서는 파악되지 않는 생물로서의 인간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육체의 포텐셜을 끄집어내는 윤리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들뢰즈의 생명윤리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병을 놓고 생각할 때, 왜 인간에게는 병이 되는 힘이나 질병에서 낫는 힘이 있느냐고 질문을 제기한다. 그 힘을 긍정적으로 붙잡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 살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힘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인식되면, 생명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소동에 대해 다른 태도가 취해지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제3종의 인식입니다. 그 언저리는 누구나 어슴푸레하게 몸으로 알고 있겠습니다만, 좀체 손을 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뭔가 명확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서 점차 변용되어 가는 거네요. “미분대목에서도 화제가 됐는데요, 그것을 고정한 주관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려고 해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게 되네요. 하지만 현재의 생명윤리는 주체에 있어서 무엇이 올바른 해답인가를 일의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간다는 것입니까?

 

고이즈미 : 실천의 장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채로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위에서 우선은 들뢰즈처럼 스토아파의 윤리를 계승해보죠. 생로병사에 있어서, 자기의 몫과 운명의 몫을 정확하게 분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주체로서의 자기의 몫을 과대하게 추측하고, 그것을 둘러싸고 수다를 떨고 싶어집니다. 인간의 잘못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면할 수 없다. 해답을 원하고, 수다를 떨고 싶어진다. 안 그러면, 아마 할 수 없다. 그래서 동시에, 이론인식을 삶의 방식에 더하는 것입니다. 분자생물학의 진전에 의해 생로병사의 시각은 근본적인 변용을 강요당하고 있다. 줄기세포를 생각한다면, 기관이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쓸 수는 없다. 신경계나 면역계는 엄청난 전망을 열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메이저과학으로 회수되고 바이오산업에 의해 빼앗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이너과학의 이론적 탐구의 기쁨을 알았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 생명윤리라면 반드시 자기결정권인폼드 콘센트(informed consent: 의사가 환자에게 진료의 목적·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여 납득시킨 다음 치료하는 일)” 얘기가 나오죠. 할 수 있는 한, 생명을 주체로서의 개인의 통제화에 집어넣으려 하는 발상이 근저에 있는 것인데요, 지금 하셨던 말씀에서 보면, 들뢰즈적인 생명윤리에 있어서, 그런 문제의 제기방식에 과연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이즈미 : 저는, 바이오기술을 추진하는 쪽도, 그것에 우려를 표명하는 쪽도, 생명의 포텐셜을 조작 가능하고 지배 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 한통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포텐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단편적인 정보의 교환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으려 하는 모습을 보면, 슬퍼집니다.

자기 결정론 비판은 겁내면서 조금씩 나왔습니다만, 생식의 문제에서 자기결정론은 결정적으로 파탄 났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생명체를 낳을 때, 자기결정론은 잘 안 팔립니다. 현재의 생식기술의 동향에서 보더라도, 기존의 틀에서의 생명윤리는 꾸려나갈 수 없겠죠.

 

── 근대의 윤리학이라는 것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최후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데리다는 결정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마지막에는 구태여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면서 결단한다는 것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는 그런 누락은 없는 것 같아요.

 

고이즈미 : 결단했다는 것으로는 대단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인간 주관에 의한 결정 등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결정하지 않는 쪽이, 방목해 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봅니다. 스피노자론에서도 그것을 논하고 있고, 자기 결정은 자유로운 주체라는 환상을 퍼뜨리고, 모종의 지배와 복종의 방식을 살아남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 스피노자는 자유의 사상가라고 붐이 일었을 때 자주 얘기됐습니다만, 들뢰즈의 관점에서 봤을 경우의 자유란 기존에 생각됐던 것과는 꽤 다른 것이 되겠네요. «자유로운 상태»를 이상으로 내걸고, 이를 위해 자기를 해방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신체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에 중점이 놓여 있는 겁니까?

 

고이즈미 : 그것이 스토아학파의 윤리입니다. 그 위에서, 17세기의 자유론은, “마음대로 한다는 것뿐의 얘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릅니다. 의료의 현장에서 환자가 되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어렴풋이 알았다면, 그것을 좋아하도록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자유론을 얘기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마음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마음대로는 안 되기에, 법적공동체적 규제를 가해 계속 운운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결론내립니다. 이것에 철두철미하게 좋아하는 대로 하면 되잖아라고 하는 것이 17세기의 철학이며, 들뢰즈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이상으로, 자유에 관해 사고하는 의미가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기가 막히게 되지만, 기가 막히게 만드는 것은 이쪽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좋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짓을 해도 좋냐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들뢰즈더러 말하라면, “나쁜 짓을 해도 되거든요. 나쁜 짓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한다면 그것이 더 착실한 것입니다.

 

── , “/이라는 구별에서도 자유로워진다는 거군요.

 

고이즈미 : 실제로 정말로 자유롭게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의무나 규제와 한 세트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버리자는 것입니다. 위험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안전한 것입니다.

현재 자유주의자들은 야만적인 폭력에 떨고 있습니다. 새로운 단계의 문명화 작용에 대항하는 야만입니다. 그런 야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민족, 인종 환상에 얽매이는 것은 당연하다며 불가사의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환상에 홀려서 자유롭게 행동한다면, 그게 더 낫다는 것입니다. 전쟁기계라는 야만적인 폭력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도덕주의나 법적정치적인 것이, 야만적인 폭력을 조직화하고 있다. 국가와, 정치조직이나 종교조직이, 전쟁기계로서의 야만적인 폭력과, 문명화와 시민화에 대항하는 야만을, 폭력적으로 조직화하고 있다. 그런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야만의 제멋대로의 분출이야말로, 들뢰즈의 자유이죠.

 

 

 

[해설] 들뢰즈에게서의 자연인간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이번의 고이즈미 요시유키 씨와의 인터뷰의 중심적 주제가 된 것은 들뢰즈에 의한 근대적인 인간/자연관의 재독해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통상적인 철학사에서는, 데카르트 이후의 서양근대 지식의 기본적 틀은, “주관=정신 / 객관=자연의 이분법이라고 한다. (순수) 주관인 는 물리적인 자연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스스로가 회상하는 관념들을 매개로 해서만 «자연»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속에 대상으로서 재구성된 «자연»자연자체가 아니다. 나의 내부외부의 구별은, 내가 주관인 한에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 근대철학의 대전제가 되어 왔다. 헤겔이나 맑스는 이런 분열을 극복하려고 했으나, 결국 어떻게 외부=물질주관=정신의 지배권에 편입하는가(헤겔) 혹은 어떻게 외부내부에 객관적으로 반영시키는가(맑스)라는 이항대립적인 발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내부외부가 깨끗하게 분리되어 버린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한, 이항대립을 회피할 수는 없다.

현대사상은 이런 이항대립적인 틀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이를 위한 유력한 열쇠로서 부상한 것이 메를로-퐁티의 지각현상학으로 대표되는 신체론의 계보이다. “신체는 외적으로 보면 물질이지만, 거기서 생기는 다양한 지각이나 정동은 )무의식전의식 수준에서) “정신내부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정신«자신의 신체»의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외부에 있는 신체의 존재방식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현대사상은 신체및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성적미적인 것을 실마리로, “주관/객관의 이항대립과는 상이한 사고형태를 모색했다.

이런 신체론은 현대사상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데리다와 함께 현대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들뢰즈는 인터뷰에서 고이즈미 씨가 지적하듯이, 신체와 정동을 둘러싼 논의는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활약한 17세기가 현대보다 현실적actual이었다고 보고 있다. 이항대립적인 사고법에 아직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의 신체주위에 생기는 다양한 정동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나와 자연의 관계에 관해 생각했다. 그것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사후적으로 돌이켜보면, “주관/객관의 구분을 넘어서 신의 관점에 서고자 하는 신비주의, 소우주(=)와 대우주(=자연)의 예정조화 같은 비합리주의적인 형이상학의 잔영밖에는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기존의 철학사에서도 신체 수준에서의 정동의 문제가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연결하는 송과선의 문제에 집착한 것이나, 정념론을 쓴 것은, 보통의 철학교과서의 데카르트의 항목의 말미에 일단 적혀 있다. 자세한 교과서라면, 라이프니츠가 우리의 지각에 생기는 미소표상”(=미세한 것의 운동)에 관해 생각했다는 것에 대한 기술이 있다. 스피노자가 실체에 생기는 정동에 대해 논한 것도, 대개의 교과서에 언급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헤겔에게도, 신체적인 수난Leiden”을 둘러싼 정동론적(스피노자적) 고찰이 있으며, 경제학-철학 초고의 맑스도 헤겔론이라는 형태로 수난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나름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철학사 전체의 흐름 속에서는 무시해도 상관없는 아무래도 좋은문제로서 취급되기 일쑤였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주권/객관의 분리가 완성됐다고 본다면, 정동론은 이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는 쓸데없는 문제일 뿐인 것이다.

들뢰즈는 그런 근대철학사의 통설적인 견해에 얽매이지 않고 신체에 있어서 부상되는 «»«자연» 사이의 긴장관계를,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텍스트로부터 소박하게 읽어내려고 한다. 흄을 논한 그의 교수자격논문 경험주의와 주체성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매우 쉽게 알게 된다. 인간의 «주관»이 외부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형태로 이미 성립하고 있다는 이항대립적 선입견을 갖고 인성론을 읽으면, 지각에 있어서의 인과관계관습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논의는 진부한 회의주의로만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내부/외부의 경계선은 흄에 의해 자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 수준에서 카오스적으로 생기는 정념의 관습적인 결합을 통해 내부가 역사적으로 구성된다는 들뢰즈적 관점에서 보면, 흄의 포스트근대성이 돋보인다. 스피노자--들뢰즈의 견지에서 보면, “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자립한 폐쇄영역이 아니라 무정형의 정념과 함께 항상 생성도상에 있는, “우연으로 가득 찬 경계선 미확정의 영역이다. 가타리와의 공저인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자아 성립 «이전»의 무의식=기계가 주제화되고 있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신체에 생겨나는 정념에 주목한다고 해도, “신체적인 것은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문학적«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고이즈미 씨는, 거기서 수학”, 특히 현대적 미분적분학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미적분이라면, 일정한 값으로 «깨끗하게» 수렴되는 연속적인 함수밖에 나오지 않기에, 예정조화적 인상을 갖게 되기 쉽지만, 대학에서 배우는 더 엄밀하게 정의된 수학에서는, 그래프와 식으로 단순하게 표기할 수 없는 불연속함수나 복수의 변수를 지닌 함수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통 평면으로 취급하는 책상과 책의 표면에는 잘 보면 다양한 주름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으며, 그런 주름적인 것을 일일이 고려한다면, 물건의 길이와 면적을 산출하는 것은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통은 그런 주름적인 울퉁불퉁함은 무시하고, 단순화해서 계산하고 있지만, 자연계는 오히려 다양한 주름으로 가득하다. “주름의 파악방식에 의해 (객관적인) “사물을 보는 방식은 꽤 달라진다. 현대에서는 고도로 정밀화된 미적분에 의해, 17-18세기에는 수학과는 무관하다고 생각됐던, 생물생명의 세계의 «신비»가 서서히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해명되고 있다. 들뢰즈는 그런 현대수리과학과 신체정념론이 교차하는 지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그가 끊임없이 미적분을 언급하는 것은, 단순한 비유나 바로크로의 복고 취향이 아니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가 현대사상에 도입하려고 한 프랙탈, 매우 대충 말하면, 자연계에서의 주름적인 불규칙성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학을 매개로 한 자연-신체-정념의 해명은,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가 보편수학이라는 표어 아래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17세기의 보편수학의 구상을, 현대에 있어서 더 구체적으로 계승하려는 것이다. 물론 현대수학에 대한 재접근에 의해 주관/객관의 이항대립 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면, 엥겔스-레닌적인 소박한 객관적 유물론의 우를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자연과학을 알아야 한다는 고이즈미 씨의 주장을, 아이러니라며 흘려듣고 넘겨버릴 수 없다. “주관/객관의 분석 구조를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만으로는 철학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자연주의자 질 들뢰즈

도래할 민중을 위한 에티카

自然主義者 ジル・ドゥルーズ

るべき民衆のためのエチカ

우노 쿠니이치(宇野邦一)

청자안도 레이지(安藤礼二)

정황(情況)200312월호(3기 제411), 72-89.

 


자연주의자 질 들뢰즈.pdf


── 이번에는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중심으로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전제로,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 들어가기 전의 들뢰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에서부터 생각하고 싶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천 개의 고원이라는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도착하기 전의 들뢰즈는 단적으로 말해서 자연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것은 자연이라는 것의 극한을 철저하게 추구한, 아직 아무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성공한 자연주의자입니다. 1953년의 처녀작인 흄론(경험주의와 주체성)은 바로 정통으로 인간적 자연의 탐구였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사색이 정점을 맞이한 68년의 차이와 반복과 스피노자론(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들뢰즈의 자연주의는 완성됩니다. 들뢰즈의 자연은 구체적이면서도 극도로 추상적인 형이상학, 굳이 말하자면 신학의 대상이기도 하며, 더욱이 이로부터 본능들과 제도들이 동시에 생겨나는 장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69년의 의미의 논리부터 전체적인 어조가 상당히 변화하며 방향이 전환된다. 그것이 72년의 안티 오이디푸스, 80년의 천 개의 고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68년으로부터 불과 몇 년 사이에, 들뢰즈 안에서 뭔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며,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 사태란 어떤 것이었나? 거기에는 처녀작 이후에도 여전히 생산성으로 가득 찬 자연이 추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탐구의 방법이 크게 변화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공동성의 탐구가 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 공동성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사고의 대상으로서 집단이라는 것이 전면에 나옵니다(685월 혁명은 이것의 둘도 없는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런 탐구가 문자 그대로 누군가와 함께행하는 작업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 의한 책의 집필입니다만, 또 한 사람인 푸코와의 관계가 매우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가타리와 푸코와 함께사고한다는 것이야말로 그 믿기 힘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천 개의 고원에 이르는 커다란 힘과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사고는 매우 체계적입니다. 그것은 천 개의 고원에서도 바뀌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결론에 놓인 구체적 규칙과 추상적 기계라는 장에서는 여섯 개의 개념이 제출되며, 그것이 사고의 토대로부터 초월까지 빼어나게 조합되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지층지층화”, “어레인지먼트”,리좀”, “존립평면기관없는 신체”, “탈영토화”, “추상기계입니다. 지층은 대지로부터 어레인지먼트들이 변형을 가함으로써 기관 없는 신체를 산출하고, 더욱이 그 기관 없는 신체는 내재성의 평면으로 초월한다. , 이 개념의 형성과정, 사고의 시스템은, 사실상 이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약술된 것입니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으로부터 무한한 속성이 산출되며, 그것이 더욱 무한한 변용을 지닌 양태로 표현된다. 그것을 거꾸로 말했던 거죠. 그러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천 개의 고원사이에는 커다란 차이도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천 개의 고원에서는 하나하나의 개념이 더 풍부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념을 풍부하게, 그리고 표현적이게 하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아마 푸코 및 가타리와의 공동성 속에서 생겨난 것일 테죠.

들뢰즈가 푸코에게서 얻은 것. 그것은 바로 어레인지먼트라는 개념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도 사회도, 그 형태도 의미도 모두 자연의 어레인지”(구성)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에 있어서 들뢰즈의 자연은 푸코의 바깥개념과 서로 포개진다. , 스피노자 속에서 발견된 =자연은 더 추상적이고 잔혹한 푸코적인 바깥으로 완전히 치환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가타리에게서 무엇을 얻었는가? 그것은 무의식의 적극적인 의미부여라고 생각합니다. 차이와 반복까지는 죽음본능이 매우 중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는 그것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 적극적인 무의식을 발동하는 조건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진 무리라는 개념. 아마 이것들이 가타리에게서 얻은 것이 아닐까? 장황하게 얘기했는데, 이런 한 가지 독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노 씨 당신은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과 그 이전의 들뢰즈의 사상 사이의 차이를 뭐라고 느꼈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거미와 거미줄 : 들뢰즈의 변화 과정

宇野 : 들뢰즈 사상의 변화 과정 자체에 독특한(unique), 생각해야 할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변화가 무엇이었는지가 물론 문제입니다만, 들뢰즈의 독자적인 변화 방식은 광인의 두 가지 체제라는, 무인도에 이어 사후 편집된 텍스트 모음집 2권에 실린, 프루스트에 관해 당시의 롤랑 바르트 등과 한 대화 속에 아주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보다 오히려 장 피에르 리샤르라든가 장 리카르도라든가 장 주네트 등, 당시의 문학이론의 새로운 흐름을 맡은 사람들이 프루스트에 대해 말한 자리에서 한 것입니다만, 들뢰즈는 자신의 문제를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말한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만, 거기서 프루스트의 문제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에서의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포개면서 논하고 있습니다. 이 프루스트론에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다양한 단편적 요소에 있어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느냐가 하나의 테마였다고 생각하는데요, 거기서 들뢰즈가 프루스트의 작품의 변주variation를 보고, 기본적으로 프루스트에게는 전체성의 비전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매우 특이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들뢰즈 자신의 변화 방식, 들뢰즈 자신의 일관성, 변화나 단편성이, 거기서 프루스트와 서로 비추고 있는 듯이 표현되고 있다. “거미줄이라는 비유에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의 모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거미줄은 일종의 리좀이기도 하죠. 거미줄과 거미 자신이 일종의 신체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곳에 지각이 퍼져 있으며, 거미줄 속에는 전혀 중심이 없다. 거미는 시각에 의해 자신이 사는 세계를 조망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부분의 연속 속에서부터 시각을 만들어낸다. 거미는 그런 신체로서의 거미줄과 함께 있다. 프루스트의 화자는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겁니다. 들뢰즈의 변화 과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으며, 방금 말씀하신 것은 거의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말씀하신 이야기를 듣고 그런 곳으로부터, 거미와 거미줄이 일체가 되어 있는 자연, 그런 퍼짐[넓어짐] 속에 있는 전체와 부분 같은 곳에서부터 들뢰즈의 변화를 사고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니냐 생각했습니다.

들뢰즈의 자연주의는 가타리와의 공저에서 매우 급진적인 변화를 이뤄갑니다만, 이 변화의 방식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 : ‘항쟁의 역사를 위해

宇野 : 들뢰즈에게서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형태로, 더욱이 거기에 니체도 보태지며, 자연과 인간을 어디까지나 연속된 것으로 파악하고, 자연의 능산성의 연장선상에서 세계를 파악하고 인간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근본적인 자연주의가 있다. 그런 한에서는 물질과 기억은 주관의 감축과 이완의 정도일 뿐이므로, 연속적인 지평에 있다. 그러나 자연주의의 관념뿐만 아니라, 여기서 네그리와 하트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본격적으로 계승하여, 70년대, 80년대의 사고의 책, 즉 지금에서는 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책을, 사실은 거기에 나오는 개념들은 현대에서도 살아 있으며, 더욱이 모든 곳으로 열려 있으며, 지금 여기서 현실화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읽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국에는 항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들뢰즈 안에도 있는 개념입니다만, 그러나 네그리는 들뢰즈로부터 전면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네그리에게는 맑스도 스피노자도 마키아벨리도 있기 때문에, 들뢰즈와 또 다른 형태에서의 어레인지먼트를 형성하고 있다. 네그리도 스피노자로부터 능산적 자연이라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자연주의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 자연주의가 있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 서양 근대는 그 자연주의를 어떻게 살았는가, 스피노자는 단순한 마이너리티에 불과했는가? 그런 개념이, 그런 자연이 명확해지려면 항쟁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는가? 들뢰즈로부터는 그런 역사적 비전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네그리의 근대 파악에서는, 근대는 단순히 이성이나 과학이나 자본주의의 세기가 아니라 하나의 항쟁의 세계였다. 아니 그 이전에도, 이성과 자연의 능산성 사이에는 끊임없이 항쟁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나타난 인간 존재의 자각은 자연의 능산성의 새로운 자각이기도 했다. 그것이 정치학적 비전으로서 마키아벨리에게서 나타난다. 그런 능산적 자연의 연장선상에 있는 창조력, 즉 삶이 넘치는 힘, 이것은 스피노자나 마키아벨리로부터 온 개념입니다만, 능산적 자연을 신의 초월성의 바깥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근대인의 자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에 대항하여, 그것을 통제하거나 질서화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며, 거기서 형이상학적 이성이나 조정적인 정치조직, 혹은 권력, 통치의 질서 등이 그것에 대항하는 질서로서 재구성된다. 그런 항쟁, 경합의 역사야말로 근대라는 것입니다.

항쟁이라는 개념을 들뢰즈는 그렇게 전면에 내세워 사고한 적이 없지만, 그러나 전쟁기계와 국가장치라는 이항대립에 그것을 포개어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항 사이에서 발생하는 리좀이라는 개념. 이것은 단순한 이항대립이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 두 항은 항상 침투하고 있는 관계라고 보고 있으며, 이 관계를 풀기 위해 일부러 두 항으로서 다루는 것입니다만, 각각이 독자성을 지닌 것은 아니라는 게 골치 아프다고 말합니다만, 각각이 그런 양의성을 지닌 장치로서 나타납니다. 리좀이라는 관념 자체가 양의성을 포함한 개념이며, 나무와 같은 작동을 하는 리좀이거나, 리좀과 같은 작동을 하는 나무이거나, 그런 리좀적인 텍스트가 이번에는 텍스트라는 차원을 둘러싸고 중심화, 수목화되며, 보르헤스라든가 조이스에 있어서 기묘한 양의성을 드러낸다는 거네요. 네그리만큼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항쟁의 관념이 들뢰즈 안에서도 뿌리 깊게 있습니다. 니체주의자로서 항쟁개념이 없을 수는 없으며, 그러니까 자연주의를 둘러싼 항쟁이 그대로 들뢰즈의 철학의 모티프였다. 다만 그것이 네그리와 같은 역사적 사고라는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네그리의 스피노자, 들뢰즈의 스피노자

宇野 : 앞에서 들뢰즈 안에는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이 전혀 모순 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예를 들어 베르그손의 그림자가 일단 사라졌나 싶으면, 나중에 영화론 속에서 부활합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개념의 변천이 들뢰즈의 사상의 다원성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들뢰즈에게서의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의 동시 존재라는 의문에 관해 네그리는 자서전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 스피노자주의자로서의 네그리는 절대로 베르그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에는 능산적 자연 개념, 즉 창조적 진화라는 아이디어가 있습니다만, 밋밋하게 일원적으로 퍼져나가는 자연 개념 속에서, 물질과 기억이 똑같은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말하자면 거기에는 항쟁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베르그손 자신은 도덕과 종교의 원천을 묻는다는 형태로 역사를 문제 삼자고 한 것입니다만, 네그리에게서는 역시 그리하면 아무래도 항쟁이라는 물음이 제기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다. 베르그손은 동시대의 현실 사회의 알력 속에서 살면서, 베르그손 나름의 항쟁의 비전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만. 하지만 베르그손의 개념 형성의 근본적 움직임 속에 그것이 없다는 게 네그리의 비위를 몹시 거스르게 되죠. 네그리의 발언을 읽으면, 들뢰즈의 베그르손주의의 굴절이 또한 흥미롭게 생각됩니다.

물론 그것은 흄론 안에도 있었다. 들뢰즈의 흄론의 비전은 스피노자에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 기본적으로는, 스피노자 안에 매우 확실한 형태를 취하는 자연의 능산성이라는 움직임, 흄이라면 정서의 움직임에 따라 이성을 재구축하려고 하는 모종의 이성 비판이 있으며, 경험론은 그런 모티프와 더불어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 들뢰즈의 자연주의 속에는 구축과 항쟁의 개념이 처음부터 있었으며, 가타리나 푸코와 마주치는 것, 역사적인 변화사건과 마주침으로써 그 흔들림이 확대됐다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네그리의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스피노자에 대한 차이입니다만, 거기에 있는 가장 큰 차이는 들뢰즈의 스피노자에 관한 글들에서 각각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자연 속에 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피노자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고, 있는 것은 그저 자연의 조합(어렌지)에 의해 뭔가가 산출되는 과정과, 그것이 해체되는 과정뿐. 어떤 것인가가 무한한 조합에 의해 무한하게 생성되는, 그것이야말로 기쁨의 감정이며, 또한 동시에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건강을 형성한다. 들뢰즈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구성되는 힘에 의해 생성하는 자연이라는 비전을 결코 놓지 않았다. 천 개의 고원이 간행된 직후에 증보된 스피노자론(스피노자 : 실천의 철학에서는 윤리학)은 생태학과 결부되어 진정한 생태의 윤리가 된다고 말합니다만, 이런 자연관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자연주의가, 맨 처음에 정리된 형태로 겉으로 나온 것은, 물론 흄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만, 니체와 철학이 출판되기 직전의 1961년입니다. 이때 마조히즘론(나중에 마조히즘에 수록)루크레티우스와 자연주의(나중에 개정되어 의미의 논리에 수록)가 거의 동시에 발표됐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모두 자연주의를 주제로 삼고 있는 것과 더불어, 자연주의를 구성하는 주체와 객체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도착자원자입니다. “도착자는 자연을 찾아내는 시선을 무한한 다양성에 열리고, “원자는 그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 다양체라는 것을 밝힙니다. 도착자는 철저하게 자연을 변혁하고, 그 자연의 근저에는 보통의 지각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최소의 시간단위, 무한소의 편위(클리나멘)를 지닌 아톰atom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독특한 자연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들뢰즈에게서 항쟁은 그 의미를 바꾸고. 목적을 갖지 않는,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싸움이 되겠죠. 들뢰즈 안에도서 항쟁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출의 기초가 되는 조합으로서의 싸움이며, 그런 싸움이 전개되는 지평인 자연이야말로 항상 들뢰즈가 계속해서 보고 있던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독자적인 항쟁이야말로, 타자에 열려 있는 것이 된다. 싸우면서 우애롭게 되는 것. 그것이 어렌지먼트라는 개념으로도 이어지는 게 아닐까요.

 

선악의 피안, 반역사로서의 천 개의 고원

宇野 : 네그리는 자연주의라는 문제를 근대의 항쟁의 최초 속에 위치시키려고 했다. , 역사적 독해를 하고 있는 것인데, 들뢰즈는 그런 독해를 거부하고 오히려 반역사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천 개의 고원의 주제군은 연속된 역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리좀에서 시작되며, 지질학적인 이미지에 포개진 진화론의 문제에 연쇄되어 있으며, 이윽고 그리스도의 얼굴과 주체화라는 문제, 칭기스칸과 유목민의 문제, 그리고 일체의 전쟁기계의 문제라는 식으로, 역사의 스케일을 당돌하게 뛰어넘어 버린다. 이렇게 움직이는 방식을 하고 있는 것 자체, 들뢰즈가타리가 만들어낸 반역사적 시간성이 있으며, 그것이 들뢰즈의 자연주의의 문제와 연결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확실히 들뢰즈가타리는 자연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에티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만, 그 기초가 되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윤리학의 독해 속에서,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지금 나온 선악의 문제이며, 선악의 피안이라는 문제가 이미 거기서 읽어내어지고 있습니다. “이 있는 게 아니라, 이라는 도덕적 표상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다”, “나쁘다밖에 없다. “좋다”, “나쁘다의 기준은, 이것은 신체의 문제가 됩니다만, 신체를 형성하는 다양한 힘을 맞이하는, 결합하는, 더욱이 새로운 차이를 맞이하고 새로운 삶의 미립자를 산출하는 데 있다. “정서를 결합한다라는 표현이 될 텐데요, 즉 그것은 삶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며, 완전히 자연의 연장선상에 있는 윤리이다.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 속에, 혹은 자연 속에도 죽음이나 부패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정서의 결합을 저해하는 결합의 움직임이 있고, 이는 인간의 사회의 기본적인 움직임의 하나이며, 권력의 작용이기도 하다. 만일 악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정서나 미립자의 결합이나 활동을 방해하거나 해체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런 결합을 방해하는 체제와, 그것에 저항하는 힘의 형성, 스피노자는 그것을 반드시 이라는 식으로 정식화한 것이 아니라, “을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은 오히려 니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사회의 새로운 질서, 생산형태, 자본주의의 진전, 혹은 자연과학적인 비전 속에서의 개념의 변천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매우 가까운 곳에서, 힘의 뉘앙스를 식별하는 니체의 분류학적 사고를, 그런 니체의 새로운 탐구를 이어나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와 철학속에서, 권력이나 폭력은 나쁜 힘일 수 있으나, 힘 그 자체에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만일 나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동적인 힘입니다. 스피노자론에서는 힘의 결합을 저해하는 것이 이라고 말합니다만, 니체에게서 나쁜 것반동성이며, 힘에 대해 반동하는 힘이며, 그것이 르상티망(re-ssemtiment)입니다. “다시 한 번에 있어서, 감정은 감정의 감정이 되며, 거기에 반동으로서의 힘이 형성되고, 그 형성이 새로운 힘의 형성을 방해한다. 윤리가 아니라 도덕이 거기서 나타난다.

 

── , 윤리는 선악의 피안에 생성된다.

宇野 : 들뢰즈와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에티카는 반도덕적인 관념이라고.

자연주의를 둘러싸고, 자연의 능산성이라고 해도, 물론 자연과학적인 성과도 있으며, 19세기의 역사적사회적자본주의적 전개의 문제도 있습니다만, 졸라의 자연주의는 스피노자의 능산성과 관계가 있을까 없을까. 예를 들어 졸라의 수인(獸人)”을 생각하는 경우에는 동물의 문제가 관련됩니다. 들뢰즈에게서 동물이라는 범주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있었습니다.

들뢰즈는 자연주의라는 문제를, 베르그손, 스피노자, 니체의 각각에서 발견하고 계승하지만, 그 의미는 각각에 의해 다르다. “자연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에티카는 자연의 연장선상에서, 능산적 힘에 대한 반동적 힘을 분간하기 위해서 있다. 이것이 권력 비판이라는 문제계로 이어지며, 그것이 니체를 경유하여 푸코로 흘러든다. 들뢰즈는 그것에 평행하면서도, 거기에 예를 들어 성도착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연에 인공이 가미되며, 인공적이 된 성이 도착인가 하면, 반드시 그런 비전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묘사된 동물과 식물 사이에 맺어지는 성관계. 말벌이 잘못해서 난과 섹스를 하는 것은, 단순한 자연 속에서 행해지는 이종교배입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도착적, 반자연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프루스트 자신의 비전이기도 하며, 거기서 동성애자나 성도착자를, 특히 식물의 차원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들뢰즈는 도착도 자연주의 속에 넣고, 그렇게 자연을 여러 가지 선으로 식별해 보인다는 문제계를 안고 있었다. 들뢰즈 자신 속의 자연주의의, 여러 가지 선분을 식별해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이념으로서의 추상기계, ‘언어존재로서의 인간

── 들뢰즈는 자신의 자연주의를 철저하게 규명한 다음,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으로 향합니다만, 거기서 이번에는 자연이 묘사하는 구체적구상적인 선분을 철저하게 어레인지하면서, 더욱이 그 저편에 있는 아주 추상적인 지평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니체의 힘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종합하여, 양자를 함께 탈영토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새로운 지평에서의 항쟁개념, 싸움의 개념이 나온다. 그것이 아마 전쟁기계라는 개념에 집약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기서는 선악을 넘는싸움이 발생한다. 그것은 최악의 반동, 즉 파멸적이고 전면적인 붕괴로도 되며, 또한 동시에 뭔가 새로운 존재(바로 초인’)를 산출하는 계기도 된다. 천 개의 고원에서는, 미래는 항상 장밋빛으로는 그려지지 않으며, 최선의 것으로도 최악의 것으로도 어느 쪽으로도 될 가능성이 있다. 자연의 선분을 어떻게 어레인지하고 어떻게 싸울까라는 것이 80년대의 이 단계에서 말해진 것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앞으로의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도래할 투쟁이 개념의 모형雛形이 될 것입니다.

 

宇野 : 방금 말씀하신 것에는 두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들뢰즈가타리는 추상기계라는 말에 집착하여 이를 사용한다는 것. 더욱이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그때까지는 없었던 것으로서 나중에 나오는 프래그머티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게 생각하면, 그때 시작된 것이 아니며, 이미 멀리 흄론 속에서 말해진 경험론으로서 있었던 것입니다만, 그러나 들뢰즈의 경험론은 단순한 경험론, 단순한 프래그머티즘이 아니다(물론 단순한 경험론이나 단순한 프래그머티즘이 있느냐라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들뢰즈는 퍼스와 같은 사상가를 평가하고 있으며, 화이트헤드 안에도 있는 프래그머티즘을 매우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프래그머티즘의 선분이 있으면서도, 차이와 반복안에는 이념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이것은 플라톤과 관련된 것입니다만, 그러나 플라톤의 발상에서 이데아를 떼어내고 아주 기묘한 개념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이, 틀림없이 차이와 반복의 한 가지 주제였다. 그리고 의미의 논리안에서는 표층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표층의 차원, 의미의 차원, 사건의 차원이 거의 엇비슷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은 신체 차원의 작용/반작용과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의 죽음의 본능이라는 것조차도, 들뢰즈는 거기에 이념적인 차원, 사건적 차원을 보고 있다. 문제는 자연 속에 이념이 있느냐 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차이와 반복에서 그것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념은 예를 들어 개체가 발생할 때에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강도를 배분하는 것이라는 범주로서 나타난다. 또한 말년에 들뢰즈는 푸코를 읽으면서 언어존재라는 새로운 존재가, 지금 이 현대에 미래를 향해서 출현하고, 그 언어 존재로서의 인간이야말로 새로운 인간의 이미지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념, 추상 언어라는 주제는 상당히 어려운 독해를 강요하는 것이며, 자연 속에도 있는 차이의 작동이며, 그런 이념은 신체와는 다른 차원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자연의 능산성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새로운 상이한 채원의 창조에 속한다, 혹은 새로운 존재론의 하나의 골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줄곧 말해졌으며, 천 개의 고원속에서도 말해집니다.

예를 들어 네그리하트는 제국에서 정보사회에 대해 말합니다만, 그것은 언어-기호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기호를 둘러싸고 노동하며 협업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태가 <제국>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작동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런 것은 들뢰즈의 인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신체, 비프래그머티즘, 비생명,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의 본능이라는 차원을 가지는 언어나 이념의 차원이, 그러나 자연의 능산성과 결코 분리하기 어려운 형태로, 현대사회에서의 능산성의 하나의 잠재적인 중심을 만든다는 비전이 들뢰즈에게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를 매우 현혹시킵니다. 들뢰즈는 신체의 철학자라고 말해집니다만, 그러나 신체라고 해도, “기관 없는 신체의 철학자이며, 여기서 우선 까다로워진다. 그리고 의미의 논리를 읽으면, 의미는 신체와 전혀 관계가 없는 차원이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사고마저 나온다. 물론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신체와 비신체가 다양한 형태로 교차하는 세계의 비전이 천 개의 고원에 나오고 있으며, 다양한 변주를 통해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거기서는 기계-신체-물질이라는 계열이 하나에 있고, 기호-비신체-추상의 계열이 또 하나 있으며, 거대한 스케일을 갖고 다양하게 교차한다는 비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더 신체적 차원에 기울고 있으며, 흐름의 교차를 제어하고 증강하며 혹은 가둔다는 자본주의의 운동을 나타내고 있다. 거기서도 기호의 갤럭시라는 맥루언적인 비전이 분명히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에 반해 천 개의 고원은 훨씬 복잡한 형태로 두 개의 차원을 교차시키고 있습니다.

도래할 민중은 무리속에서 태어난다.

── 그 두 가지 차원의 교착을, 구체적인 기계와 추상적인 기계의 끊임없는 상호 전환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천 개의 고원의 아주 독창적인 대목이 아닙니까? 그리고 거기서는 자연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전개하는 거대하고 정교치밀한 <기계권>이 됩니다. 게다가 푸코론에서는, 그 추상적인 <기계권>의 끝에, 현대적인 사회와 생명의 어레인지먼트를 관통해서 나오는 존재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초원자체라고 합니다. 인간을, 다양하게 조합된 기계로서 사고했을 때, 거기서 출현하는 강도의 추상을 자신 안에 분유한 새로운 존재야말로 언어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닐까요. 아마 들뢰즈는 그런 존재에 도래할 민중이라는 개념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추상과 구상, 그리고 선악에 고정되지 않은 윤리와 권력()을 가진 도래할 인간을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그런 것을 반복하고 반복해서 천 개의 고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분히 네그리하트의 다중이라는 개념은 들뢰즈의 그런 민중개념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무너져야 할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추상에 있어서도 구체에 있어서도 초월하는 것이 아니며, 기쁨과 함께, 내재적인 구성의 힘에 있어서, 조합(어레인지)에 의해 새로운 것을 낳는다고 하는 것. 거기서 생성되는 민중은, 끊임없이 모든 곳에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쟁상태에 있는 민중, 선악의 피안을 견디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민중. 그것은 항상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서의 이념이기도 하죠. 여기서 발견된 도래할 민중은 또한 천 개의 고원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된 무리라는 개념에 서로 포개지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宇野 :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무리”meute늑대의 무리라든가 패거리에 가까운 말이며, 또 하나는 ‘masse’이며, 이것은 군집으로 번역됩니다만, 일종의 코드성, 계급성을 가지고,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꼭 동반한 것입니다. “무리는 네그리가 다중에 관해 말하듯이 유연성과 이동성을 특징으로 갖고, 바로 노마드이기도 하며, 우두머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국가적인 고정된 질서를 만들어내려고 하면 반드시 저항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아이의 갱들이 낮에 함께 움직이더라도, 잠잘 때 같이 자는지 자지 않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남아 있는가 아니면 떠나는가. 이런 사소한 것이 집단의 성격을 결정한다. 이런 예를 제시함으로써 들뢰즈·네그리는 무리에 구치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네그리·하트는 일관되게 도식적이고 친근한 이미지가 솟아나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역할과 위치관계, 거리가 그 장마다 바뀌어가는 무리의 집단은, 기본적으로는 코드에 의해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며, 그것은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쟁기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무리라는 개념을 바로 들뢰즈는 무수한 고원으로부터 추출했습니다.

예전에 예정부조화라는 책에서도 썼습니다만, 그런 무리는 또한 셀린느(LouisFerdinand Céline)의 파시즘의 문제와도 관련됩니다. 예를 들어 Mort à crédit에 나오는 무리의 이미지. 모종의 갱, 사기꾼 등, “무리라는 것에서 보자면 셀린느는 읽어낸 것 아니냐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