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2부 1장. 

죽음정치에서 비정치

이탈리아에서의 생명정치의 전개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1. 들어가며 : 이탈리아적 차이를 둘러싸고

1970년대 중반 미셸 푸코가 기선을 잡은 생명정치의 사유가 1990년대에 들어 특히 이탈리아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를 선두에서 인솔한 것이 다름 아닌 조르조 아감벤(1942년 생)이라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할 것도 없다. 나아가 이제 여기에 나폴리의 정치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1950년 생)의 이름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도 여태껏 두 사람에 대한 번역 등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했다.[각주:1] 그렇지만 오히려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생명이라는 접두사가 약간 붐을 일으키는 식으로, ‘생명미학’(피에트로 몬타니)생명경제학’(라우라 바치칼루포) 같은 신조어가 출현할 지경이다.[각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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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물론 이 추세를 고스란히 수긍하는 일은 삼가야 하지만, 다름 아닌 이탈리아에서 생명정치를 둘러싼 사유가 새로운 전개를 이룬 데에는 단순한 우연으로 그치지 않는 연유가 있다. 왜냐하면 생명은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사유에서, 공공연하든 암묵적이든, 늘 중심적 테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조르다노 브루노, 지암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1688~1744)의 이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주 최근작인 살아 있는 사유 : 이탈리아 철학의 기원과 현실성(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2010)에서 에스포지토 본인이 논하듯이, 거기에는 이 나라의 역사적 특수 사정이 적잖이 관계하고 있다. , 즐비하게 늘어선 도시국가나 유럽열강, 나아가 로마 교회 등과의 갈등이나 밀당에 항상 노출된 이탈리아의 사유는, 필연적으로 국민국가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 바깥에서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철학은 국민국가의 형성과 병행하는 것도, 그 형성 이후에 계속된 것도 아니다. 그 때문에 이 나라의 사상은, 예를 들어 주체에 관한 반성이나 인식론이라는, 데카르트부터 칸트에 이르는 철학의 왕도로부터는 필연적으로 벗어나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런 반성은 철학의 내부에서 벼려지고 철학의 전문용어로 말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생명의 현실을 겨누게 됐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로부터는 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빠져나가 버린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는 서양철학의 이른바 방계가 되어 왔지만, 이것은 시각을 바꾼다면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바깥의 사유를 혹은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탈영토화를 선취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 이질적인 것에 열려 있고, 유동성이나 갈등이나 변화를 환영하는 태도이다.[각주:3]

나아가 여기서 벤야민적인 역사철학의 선취를 보탤 수 있을지 모른다. 가령 비코는 새로운 학문(1725)에서 지저분하고 더럽고, 절단되고, 본래의 장소로부터 벗어난 곳에 가로놓였기 때문에 그동안은 지식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고대의 이러저러한 위대한 단편갈고 닦아’ ‘합성하고 본래의 장소에 두는것을 새로운 학의 중요한 원리라고 꼽는데,[각주:4] 이는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비코에게 시나 신화도 역사로부터 배제된 것이 아니며, 역사 속으로 편입되고, 자주 역사를 술안주거리로삼는다. 이런 게 허용된다면, 이탈리아의 철학은 항상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현실성을 얻었다는 측면을 갖는 것처럼 생각된다.

The New Science of Giambattista Vico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러면 이탈리아의 특수 사정, 또는 이탈리아적 차이에 관한 서설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에 들어가자. 이 글에서 나는 감히 정면에서 생명정치 자체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이 반전된 것으로서 죽음정치에서 출발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죽음정치라는 특이한 신조어도 푸코를 기점으로, 이탈리아에서 매우 흥미로운 전개를 이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 저간의 사정을 밝힌 후, 이어서 이 죽음정치를 극복하는 것, 혹은 그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비정치에 주목해보자. 장치와 무위, 공동체와 면역, 탈주체화와 비인칭 같은 문제계가 여기에 깊이 관련될 것이다. 주역으로서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아감벤과 에스포지토이지만, 뜻밖의 조연들 예를 들어 시몬 베유 도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선 죽음정치부터 시작해보자.

 

I. 푸코에서 아감벤으로 : ‘죽음정치로의 전도

방금 전에 나는 죽음정치도 푸코에게서 기원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생명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저명한 그 텍스트, 1975-76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푸코 자신은 상당히 기묘하게 울려 퍼지는 이 용어 죽음정치를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것을 암시했다.

주권권력의 계보나 전쟁과 국가에 관해 논한 일련의 강의의 마지막 날, 프랑스의 철학자는 아주 당돌하게도, ‘생명정치라고 그 자신이 명명했던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9세기의 극히 중요한 현상 중 하나는 권력에 의한 생명의 부담이라고도 말해야 할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이 구절로 말문을 열었던, 기념해야 할 하루이다.[각주:5]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여기서 푸코는 특히 18세기 이후, 인민의 생명이나 건강이 국가의 최대 관심사가 되는 상황을, 생살여탈권으로서의 주권권력으로부터, “생명을 보증하는 권력으로서의 생명권력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했다. , “권력에 의한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파악이며, “생물적인 것의 국가화의 시작이다. 그때까지의 주권권력의 모토가 죽게 만들거나[죽게 하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두는거나였다고 한다면, 생명권력의 그것은 살게 만들고[살게 하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둔다는 것이 된다. 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테크놀로지가 생명정치라고 불리는 것이다. , 생명정치는 의학이나 법학, 위생학이나 통계학 등에서 다양한 지식이나 기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권력의 개입 영역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아포리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위대한 사상가는 날카롭게 꿰뚫어봤다. 생명권력에는 과잉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생명권력에 대한 주권권력의 과잉이 아니라 주권권력에 대한 생명권력의 과잉입니다.” 그 과잉이 생기는 것은, 예를 들어 생명을 조절할 뿐 아니라 생명을 무성하게 하고 생물을 제조하고 괴물을 제조하며 궁극적으로는 관리 불가능하고 보편적 파괴력을 지닌 바이러스를 제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인간에게 가능해질 때이다.[각주:6] 이 경고가 울렸던 1970년대 당시 이미 생물병기나 핵이 중대한 위협으로 존재했던 것은 물론이지만, 게다가 출생 전 진단이나 유전자 조작이나 복제기술까지도 포함한 분자생물학이 장족의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증거로, 푸코는 놓치지 않았다. 생명권력은, 그것이 바로 생물학적인 요청과 결부될 때, 가장 위험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것을. 나치즘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위험의 제거와 종 자체, 혹은 인종의 강화를 목표로 삼을 경우”, 죽음의 명령을 용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생명권력을 따라 기능하기 시작하자마자, 국가의 살인 기능이 보장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종주의에 의해서인 것이다.[각주:7] 이리하여 푸코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게 된다. “전반화된 생명권력은, 엄청나게 증대한 죽음의 권리와 죽음의 위험에 의해 사회 전체에 골고루 퍼진 절대적인 독재 정치와 일치하는 것이라고.[각주:8]

푸코는 여기서 죽음의 권리죽음의 명령혹은 죽음에 노출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고, 죽음과 생명권력 사이의 진퇴양난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죽음의 정치혹은 죽음정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또 그는 나치즘을 생명권력의 과잉이며, “생명권력을 틀림없이 전반화한 사회라고 해석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죽이다는 주권권력을 전반화한 사회이기도 하다고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각주:9] , 푸코에 따르면, 나치즘은 신구의 두 개의 권력의 메커니즘 생살여탈권의 고전적 메커니즘과 규율과 조절에 의한 생명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 이 합체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논의를 이어받아, 바로 죽음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아감벤이다. 세계적 논쟁을 야기한 책인 1998년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에서, 이 이탈리아 철학자는 프랑스 선배의 논의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의 막강한 전체주의 국가, 특히 나치 국가에서 살리는 생명권력의 전대미문의 절대화는 죽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똑같은 정도로 절대적인 전면화와 일치한다. 그 결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와 무매개적으로 일치한다.[각주:10] 이리하여 아감벤은 죽음정치라는 신조어를 확실하게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게다가 생명정치와 죽음정치 사이의 이 일치는 푸코에게 진정한 역설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권력이, 무제한의 죽음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왜인가? 이었지만, 아감벤에게서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나치 수용소는 궁극적으로, “죽음과 대량학살의 장소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무젤만을 생산하는 장소”, 즉 이제 인종적 차별을 초월해,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문턱에 인간을 몰아넣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생명정치와 죽음정치는 이른바 동일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이것을 아감벤은 똑같은 저서의 다른 대목에서, 심지어 다음처럼 바꿔 말한다. 신구의 두 개의 권력 모토, “죽게 만들거나 아니면 살게 내버려 두거나살게 만들고, 그리고 죽게 내버려두는것 사이에, 이제 세 번째 정식이 몰래 들어선다. , “이제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게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삶도 죽음도 아니고, 조절 가능하고 잠재적으로는 무한한 생존의 생산이 현대 생명권력의 주요 성능이다.”[각주:11]

그런데 푸코의 텍스트에 대한 아감벤의 이런 접근법을 오해나 곡해로 보느냐, 아니면 반대로 창조적인 확대 해석이라고 보느냐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릴지도 모른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철학자는 비판도 당하는가 하면 거꾸로 칭찬도 받았다. 그가 상대하는 사람은 푸코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하이데거까지, 혹은 탈무드나 카발라부터 바르부르크나 벤야민까지, 만국박람회 일지로 이미 알려진 이 이탈리아인은, 대략 모든 텍스트를 그런 방식으로 읽어왔다. 이 점에 관해 본인은 자신의 방법을 2008년의 저서 사물의 표시에서 포이어바흐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원용해 이렇게 말한다. “작품의 저자에 속하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자에게 귀속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본질적인 동시에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각주:12] 자기정당화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처럼 충실한 불성실한 자, 혹은 불성실한 충실자라는 문턱에서야말로, 아감벤의 언표는 발생한다.

한편, 원래의 기원은 고대 로마법에서 찾아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철학자와 더불어 2000년 이상의 시간을 가로질러 패러다임으로서 부상했던 호모 사케르에 관해서도, 혹은 아우슈비츠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무젤만에 관해서도, 이것들이 본래의 역사적 문맥을 무시하고, 통시태와 사료에 주의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역시 사물의 표시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전개한다.

 

만약 패러다임성은 사물 속에 있느냐 연구자의 정신 속에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그 물음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패러다임 속에서 문제가 되는 이해 가능성은 존재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존재에 준거하고 있는 것이다. , 패러다임적 존재론이 있는 것이다.[각주:13]

 

여기서 하이데거의 영향을 보는 것은 쉬우며, 실제로 본인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보편과 개별의 이원론이 문제인 것도, “하이데거에게서처럼 ’, 선취와 해석의 순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패러다임에는 기원도 아르케도 없다. 진정한 문제는 전체의 인식과 개별의 인식 중 어떤 것이 우선 혹은 선행하느냐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개별 사이의 범례적 배치 속에 있는 것이다.”[각주:14] 이런 의미에서 푸코로부터 발달시켰던 죽음정치도 또한 아감벤에게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금 죽음정치로 돌아간다면, 이 철학자의 이름을 일약 세계적인 것으로 한 1995년의 저서 호모 사케르도 또한, 어떤 의미에서 푸코에 대한 독자적인 응답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도 또한 죽음정치라는 단어는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거의 결말 부근에 죽음을 정치화하기라는 제목이 달린 절이 주도면밀하게 마련되어 있으며, 적절하게 소생기술이나 장기이식기술의 진보의 그늘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현대의 벌거벗은 생명”, 혹은 새로운 호모 사케르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파헤친 것이었다.[각주:15] 그리고 이 책은 3년 후에 출판된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을 바로 예고하는 것 마냥 근대적인 것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라는 제목이 달린 절로 막을 내린다.

호모 사케르』가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후,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대의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 근대정치의 노모스로서의 수용소, 항상화된 예외상태 등 같은 아감벤 식의 말투가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은 여전히 우리의 기억에 새로울 것이다. 마치 911 이후의 세계정세가 이 아감벤 효과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마냥.[각주:16] 예를 들어, 관타나모 수용소나 아부그라브 교도소에서의 고문이나,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을 생각하면, 아감벤은 마치 현대의 예언자인 셈이다. 사실,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예를 들어 슬라보예 지젝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기사(2007324일자)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아감벤의 이름을 일부러 들먹이면서 현대의 호모 사케르살아 있는 죽은 기사들― 을 언급했었다.[각주:17]

아무튼 생명정치는 죽음정치로 전도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호의적으로 듣는다면 격렬한 경고로도 받아들여지지만, 반대로 비관주의나 허무주의의 입장에서 장난치듯이 위기를 부추기고 있을 뿐이라고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에 대해 아마 본인은 반론을 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을 정치의 내부에서만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허무주의의 내부에 머무는것에 다름 아니라고 말이다.[각주:18] 여기서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가 부상하게 되지만, 이것에 관해 고찰하기 전에 소론의 또 다른 주역인 에스포지토에게 등장할 기회를 줘보자.

 

II. 아감벤에서 에스포지토로 : ‘면역의 공과

이 나폴리의 철학자도 푸코와 아감벤을 토대로, ‘죽음정치에 관해 파고들어 얘기하려고 한다. 2004년에 출판된 두께감이 있는 책 비오스에서, 꼬박 한 개의 장을 죽음정치”(인종의 사이클)에 할애하고, 푸코가 문제 제기에 머물렀던 나치즘에서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제를 철저하게 논하고 있다.[각주:19] 행위수행적이고 범례론적인 아감벤의 말투에 대해, 에스포지토의 그것은, 얼핏 보면, 굳이 말하면 사실확인적이고 학술논문적인 체재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호모 사케르로 상징되듯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문구에 호소하는 것도 굳이 피하려 하기 때문에, 아감벤 정도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본인도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 논의에는 항상 확실한 강도와 신뢰성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굳이 부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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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키아벨리나 비코의 연구에서 출발한 이 정치철학자는 생명정치를 사고하는 데 있어서, 선배인 아감벤과도, 심지어 또 다른 선배인 안토니오 네그리(1933)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다. 이 점에 관해 나는 전에 논한 적이 있기에 그것을 참조하기를 바라지만,[각주:20]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아감벤의 묵시록에도 네그리의 다행증(euphoria)에도 치우치지 않는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원래 푸코의 생명정치 자체가 이런 양자택일을 초래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푸코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두 개의 상이한 항으로서 우선 각각 전제되고, 그런 후에 양자가 외재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생명정치는 아감벤처럼 삶에 대한 권력의 과잉 행사로 보게 되거나, 네그리처럼 권력에 대한 삶의 과잉 잠재력으로 보게 되는 식으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하게 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달리 말하면, 생명정치는 삶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 속으로 해소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삶의 절대적인 힘 속에 흡수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겨둔 아포리아이다.

이에 대해 나폴리의 철학자가 제기하는 것은 삶 자체가 그 성립에서부터 이미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출생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보면 분명하듯이,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빼어나게 내재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이미 깨달았던 것 그대로이다.[각주:21] 그 때문에, 에스포지토가 그의 저서의 제목으로 골랐던 것이 벌거벗은 생명혹은 자연적 생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조에가 아니라, 이것과 대치되고, 사회적 삶을 의미하는 비오스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아감벤은 비오스를 조에로 접어넣으려 하는 과정 속에 생명정치의 문턱 죽음정치 을 봤지만,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조에는 비오스의 내적 차이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이미 어떤 형태로 비오스로 이행하지 않는 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생명정치의 어디에 죽음정치로 전락할 위험성이 숨어 있는 것인지, 에스포지토에게 진정한 문제는 그것을 규명하는 데 있다. 이리하여 나치즘의 생명정치의 철저한 규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기고, 아감벤이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정치를 그것으로 귀착시키려 했던 수용소의 정치학의 수수께끼란, 결국 무엇일까? 여기서 그 자세한 논의를 추적할 수는 없으나, 에스포지토는 그것을 면역혹은 면역화라는 범주 속에서 알아내려고 한다. 의학생리학에서 발전됐던 이 범주는, 나폴리의 철학자에게 새롭게 생명정치의 씨름판으로 불러들여지고, 철저하게 재검토된다. 2002년의 저서 이무니타스 : 생명의 보호와 부정이 그것으로, 사실은 비오스보다 먼저 출판됐다.[각주:22]면역이라는 범주가 유효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생명 자체의 내부에서 이른바 내재론적으로 생명정치를 고찰하는 것을 가능케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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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면역화를 생리학의 영역에서 끌어낸 것은 에스포지토가 처음은 아니다. 예를 들어 911 이후, 점점 더 자기면역화를 강화하는 사회가 자살행위로 향해가는 것에 대해 날카로운 경고를 울렸던 것은 주지하듯이 말년의 자크 데리다였다.[각주:23] [각주:24] 그렇지만 프랑스의 탈구축주의자가 지적하는 전지구적 자기면역화의 위기란 생명정치에 직접 관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와 정보에 관한 것이다. 물론,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이 꿈꾸었던 오토포이에시스적 면역화와, 에스포지토의 그것이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반해 나폴리의 정치철학자가 말하는 면역화는 바로 생명정치의 무대의 중심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나치즘의 인종주의나 우생학주의가 초래한 완전한 자기면역화에의 지향은, 자기와 타자의 완전한 파괴라는 사태를 초래한 생명정치 결국은 죽음정치 나 다름없다. 아감벤이 생명정치의 묵시록으로 간주하는 것은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사실상 이무니타스(면역)’라는 장치의 궁극적인 활동의 결과나 다름 아니다.

게다가 나치즘적인 면역화는 완전히 과거형으로 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면역형 민주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 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학이나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달에 의해 살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사이의 새로운 선별이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다(점점 더 고도화되는 출생 전 진단은 그 전형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 기술은 개인 개인의 신체를 넘어 종의 특징까지 꼼짝없이 개입한다. “도처에 맞서기 힘든 방식으로 잠재적인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면역 증후군이 재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을 정도로 나치즘의 이면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로부터 눈을 돌리는 한, 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각주: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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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페르소나의 정치학 : ‘인격가면

삶의 선별, 오늘날 이것은 노골적인 인종주의나 전체주의적 사상에서라기보다, 특히 자유주의자라고 지목된 논객들에 의해서 자유주의적 사상이나 제도의 내부에서 복권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 인격이라는 개념 에스포지토의 표현으로는 장치이다. 인격은 개인이나 시민 등 비교적 새로운 개념보다 훨씬 오래되고 보편적이라고 간주됐다. ‘인격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가 수반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호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라틴어 페루소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원래는 가면을 의미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로부터 역할이나 등장인물, 자격이나 처지, 심지어 위격이나 인격이나 인칭과 같은 의미가 파생된다. 게다가 이 단어는 특히 고대 로마법이나 기독교 둘 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어였다는 경위가 있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 정치와 사법의 근간과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페르소나라는 장치, 그 탄생부터 오늘날까지 어떻게 기능했는지, 에스포지토의 3인칭의 철학(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Einaudi, Torino, 2007)은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해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각주:26] [각주:27] 상세한 논의는 이 책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만, 굳이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이 장치는 고대 이후 줄곧 인간의 분할과 선별, 포함과 배제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기능해 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페르소나는 본래 단일한 것이었을 인간의 삶을 여러 겹으로 분열시키는 장치이며, 이 분열은 개인 수준에서도 집단 수준에서도 작동해 왔다. 이 사실은 노골적으로 인격을 짓밟는 차별적 제도나 담론에 있어서는 물론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격 존중을 정면에 내거는 인도적이고 인권주의적이라고 지목되는 사상과 제도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격과 인격 없는 자 사이의 차별화가 거기에서는 항상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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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뜻 보기에 정반대처럼 보이는 정치나 사상, 예를 들어 철저하게 인권을 파괴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와, 이와 반대로 인격을 금과옥조처럼 추켜세우는 자유주의의 인권 사상이 사실은 똑같은 전제 살 가치가 삶, 삶의 생산적 관리 등 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도, 에스포지토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생물학이나 인류학, 언어학이나 사회학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인간을 규명하고자 해온 근대의 여러 과학들을 근저에서 파헤치는 것, 그것이 이 페르소나의 장치이며, 나치즘과 자유주의는 똑같은 장치에 의해서 초래된 서로의 물구나무 선 상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페르소나가 분할과 선택의 장치이라고 한다면, 그 당연한 귀결로서 산출되는 것이 불분명한 경계 영역이며, 그곳에서는 또한 포함적 배제라는 역설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해온 것이다. 나폴리의 철학자는 물론 이 점에도 매우 민감하다(여기에도 역시 아감벤의 영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로마법에 내포된 이러한 불분명 지대를, 근대의 철학과 사법과 정치 안에서 추적하려 하는 2페르소나, 인간, 사물3인칭의 철학에서도 가장 농밀한 장이다. 최첨단 의료의 발달과 생명윤리의 수립은 이 불분명 지대를 해소시키기는커녕 더더욱 곤란한 아포리아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분할선을 아무리 세밀하고 정밀하게 하더라도, 원리적으로 잔여 ‘~가 아니지 않다는 항상 생기지 않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나 외교, 사법이나 의료 등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인격의 이념이 널리 침투하지 않은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에스포지토에 의하면 이야기는 거꾸로다. 침투하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출의 길은 있을까? 여기서 부상되는 것이 비인격혹은 비인칭이라는 문제계인데, 이것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감벤의 논의를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감벤도 페르소나의 주제에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다. 희극이라는 제목의 단테론(1976)에서 페르소나의 계보를 간결하게 소묘하면서, 고대나 중세에는 아직 이 단어에 본래의 연극적인 반향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추적한다.[각주:28] 아감벤이 공감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히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의식이나 도덕의 주체로서의인격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가면으로서의, 혹은 얼굴로서의 페르소나이다. 원래 인간에게서 페르소나와 본성이 일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는 어떤 가면을 떠맡아 연기하는 것인가, 어떤 얼굴을 드러내는가이다.

최근작 벌거벗음(2009)에 수록된 논문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에서는 생물학적·유전학적인 데이터 새로운 벌거벗은 생명의 양태 로 점점 환원되어가는, 우리 현대인의 정체성이 통렬하게 비판된다. 이제 그것은 페르소나적 정체성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사회집단에 속하는 구성원들에 의한 승인과 결합된 정체성이 아니며, 사회적 가면을 쓰고, 그래서 가면에 녹아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개인의 능력과 결합된 정체성도 아니다.”[각주:29] 이 인용문에서도 역투사되듯이, 아감벤에게 페르소나는 인격이라기보다는 항상 그 본뜻인 가면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가면과의 접촉 방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바로 얼굴이라는 제목의 논문(1990년 초출)이다. “나의 얼굴은 나의 바깥이다. 나의 모든 고유성이 차이를 잃고, 고유한 것과 공통된 것, 내부와 외부가 차이를 잃는 점이다.”[각주:30] 그 때문에 페르소나의 본래 의미인 가면이란 안에 갇힌 나(의 인격)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바깥으로 열려진 나의 얼굴=경계선을 가리킨다.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면, 소수자적 생명정치라는 제목의 인터뷰(2003)에서 아감벤은 푸코의 아포리아를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푸코의 말년의 작업에는 제게 아주 흥미롭게 보이는 한 가지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기에의 배려에 관한 작업의 전체가 있습니다. , 자기의 모든 형식과 실천에 있어서 자기에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동시에 반복해서 얘기되는 것은 언뜻 보기에 정반대의 주제입니다. , 자기로부터 분리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물으려 한다면, 결국 삶으로 나아간다. 산다는 것의 기법은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 심리학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자기에의 배려는 자기의 경시로, 자기의 분리나 일탈로 이끌어져야 할 것이라는 얘기니까요.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죠. , 주체화의 과정 같은 게 아니라면, 자신의 실천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 주체화의 과정은, 반대의 것으로, 즉 분리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발견되는 것은, 단지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것에서만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이중의 운동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각주:31]

* 이탈리아어 : https://www.facebook.com/notes/riccardo-tammaro/una-biopolitica-minore-intervista-di-stany-grelet-e-mathieu-potte-bonneville-a-g/10207385837176982/

* 프랑스어 : http://www.vacarme.org/article255.html

Dans les derniers travaux de Foucault, il y a une aporie qui me semble très intéressante. Il y a d’une part tout le travail sur le « souci de soi » : il faut se soucier de soi, dans toutes les formes de pratique de soi. Et en même temps, à plusieurs reprises, il énonce le thème apparemment opposé : il faut se déprendre de soi. Il dit plusieurs fois : « On est fini dans la vie si l’on s’interroge sur son identité ; l’art de vivre, c’est détruire l’identité, détruire la psychologie. » Donc il y a bien ici une aporie : un souci de soi qui doit aboutir à une déprise de soi. Une manière dont on pourrait poser la question, c’est : qu’est-ce que c’est qu’une pratique de soi, non pas comme processus de subjectivation, mais qui n’aboutirait au contraire qu’à une déprise, qui trouverait son identité uniquement dans une déprise de soi ? Il faudrait pour ainsi dire se tenir en même temps dans ce double mouvement, désubjectivation et subjectivation.

 

여기서도 또한, 아감벤 식의 푸코 해석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또한 페르소나와 주체를 엄밀한 의미에서 구별하지 않는 것 같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아감벤에게서 정체성은 탈정체성과, 인격(인칭)은 비인격(비인칭), 인격화는 탈인격화와, 주체화는 탈주체화와 언제나 떼어놓을 수 없는 형태로 연결된 것이며, 한쪽 없이는 다른 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아감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력을 -잠재력“~하지 않을 수 있다로서 독창적으로 바꿔 읽은 것과도 관련되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졸저에서 논의한 일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우리는 다시 비인칭의 문제계로 돌아오게 된다.

 

IV. ‘비인칭임의(쿼드리베트)’

사실 아감벤이 비인칭에 대해 정면에서 얘기한 것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를 대신하는 것이 라틴어로 말해서 쿼드리베트(quodlibet)’, 즉 불특정한 익명적 임의인 자이다. 그의 정치철학에서, 잠재력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뜻밖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 임의이다. 그렇지만 이 기묘한 대명사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1990년에 출판된 짧으나 농밀한 한 권인 도래하는 공동체는 바로 이 임의에서 논의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임의[누구든]’야말로, 혹은 이것이 어원이 된 뭐든이야말로 다가올 정치와 공동체의 주체이자 객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초월론자들의 스콜라학적 열거법에 따르면, 임의의[뭐든] 존재자는 하나이며 참이며 선 혹은 완전하다.” 그래서 뭐든이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쨌든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비인칭의 마음에 든다(libet)”에 대한 참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각주:32] 유사한 이탈리아어에는 또한 아무리 ~ 해도라는 의미의 콸시볼리아(qualsivoglia)”가 있는데, 여기서도 원하다라는 의미의 볼리아(voglia)”가 포함되어 있다.

, ‘임의의사람은 원해지는 것이며, ‘사랑받는 것이다. ‘뭐든’, ‘누구든무관심하고 무관한 무엇인가라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뭐든임의는 또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essere tale qual è)”라고도, 혹은 특이성=단일성(singolaratà)”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특이성이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뛰어난 개성이나 독창성 같은 것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는 각각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단일하고 특이한 것이다. 임의특이성은 또한 잠재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 같다. ‘임의의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맥에서 바꿔 말한다면, 아감벤이 말하는 임의란 바로 인격의 앞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며, 생명정치적인 선긋기나 선택의 바로 앞에 혹은 건너편에 있는 존재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홉스)친구/의 이항대립(슈미트)도 아니고 이 임의에 그의 정치철학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있는 것이다.

아감벤은 또 다른 논문에서, 굳이 시대착오적인 개념인 게니우스를 불러내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비인칭()(impersonale)’이라는 형용사이다. 게니우스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에 우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에 두는 신을 가리켜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단어로, ‘천재재능의 어원이 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렇지만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그 점이 아니며, “이 매우 친밀하게 인칭적인 신이, 우리 속에 있으며, 더 비인칭적인 것이며, 우리를 극복하고 능가하는 것의 화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 ‘게니우스에 있어서 암시되고 있는 의미란, “인간이 단순히 자아나 개인적 의식일 뿐 아니라 탄생부터 죽을 때까지, 굳이 말하면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요소와 더불어 살아 있다는 것이다.[각주:33]

여기서 아감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질베르 시몽동전개체적인 것인데, 새로운 보조선으로서,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키무라 빈(木村敏)이 비인칭의 삶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덧붙여도 될 것이다. “누군가의(저라도 좋고, 어떤 사람이라도 좋지만)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은, 거기에 누구든 좋다, 말하자면 비인칭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키무라는 또한, 인칭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때문에 특정한 신체에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닌 이 비인칭의 생명을, 조에로서 고쳐 읽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로서의 생명이며, ‘비인칭이고 자타미분화상태에 있다.[각주: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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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칭과 비인칭, 주체화와 탈주체화라는 삶의 이중의 운동은, 아감벤의 바틀비(1993)에서 더 나아가, 창조와 탈창조라는 표현으로 불러내지고 있다.[각주:35] 말할 것도 없이, 탈창조라는 단어는, 시몬 베유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본인은 왜 그런지 그 출전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창출된 것을, 창출되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속으로 옮겨보내게 하는 것이라는, 베유에 의한 탈창조’(혹은 창조’)의 정의는, 아감벤에게서의 -잠재력과 겹치는 바가 큰 것 같다.[각주:36]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빌의 소설 주인공 바틀비가 체현하는 -잠재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감벤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한 우연성의 존재론은 언급하면서도 베유의 이름은 왜 보이지 않게 깔아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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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최근 십수년 동안의 저작에서 아감벤은 신학적 전회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변화를 수행하는 것인데, 이 전개도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신빈화로의 경향을 강화한 베유의 변화에 의해 선취되고 있다는 견해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각주:37] 그녀가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묘사하려고 한 것, 신의 페르소나의 의지로서의 섭리라는 신화는, 아감벤이 왕국과 영광(2007)에서 전개하게 되는 것과 거의 대응한다. 심지어 극빈 : 수도원 규칙과 삶의 형식(2011)에서는 청빈의 성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그 수도회, 삶의 형식의 하나의 모델이 추적되고 있는 것이다.[각주:38] 아감벤이 여기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시시의 성자와 그 일파 성령파 소유사용을 명확히 구별하고, 전자에 대해 후자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또한 권리나 소유를 인격과 나란히 폭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던 베유의 그림자가 춤추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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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에스포지토는 그의 저작 상당수에서, 확실히 프랑스의 여성사상가에 대한 준거를 공언하고 있다. 그는 그녀 속에서, 비인칭의 철학의 최초의 표명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 나중에 블랑쇼나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처음의 기점이, 베유에서 찾아지고 있다.[각주:39] 실제로 인격과 성스러운 것에서 그녀는 강력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스러운 것이란 인격이기는커녕 한 명의 인간 존재에 있어서, 비인격적인 것이며, 그것만이 성스러운 것이다.” 더 말하면, “비인격적인 것의 영역에 들어선 사람은, 저마다 거기서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한 책임에 직면한다. , 그들 속의 인격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 아니라, 인격이 비인격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몇 가지 가능성으로 덮어져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하는 책임이다.”[각주:40]

에스포지토의 독해를 곱씹는다면, 이리하여 베이는, 인격과 권리 사이에 있는 배타주의적 관계를 고발하고, 정의를 권리로부터 확연하게 떼어낸다. 권리가 인격=인칭에 귀속된다면, 정의는 비인격=비인칭적인 것에 결부된다. 윤리적 차원은, 인칭이 아니라 비인칭에 갖춰져 있다. 결국 비인칭이란 단순히 인격의 소박한 부정이나 대립항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인격이 아닌 것, 더 이상 인격이 아닌 것, 결코 인격이라고는 공언되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 향해진, 분리와 차별의 메커니즘을, 인격의 내부에서 동결시키는 것이다.[각주:41] 그렇다고 한다면, 비인칭적인 것을 둘러싼 사고는, 생명정치의 내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질문이 된다.

 

V. ‘비정치무위

에스포지토가 베유의 이름을 처음으로 소환한 것은, 사실 지금부터 4반 세기 전, 1988년 초판된 저작 비정치의 범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에스포지토의 정치철학은 비정치라는 관점에서 정치를 역투영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른바 비정치가 정치에의 주의의 약체화나 저하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그 강화와 철저화라는 것은, 시몬 베유부터 한나 아렌트까지, 헤르만 블로흐부터 조르주 바타이유까지, 심지어 최근에는 르네 샬까지의 작업과 전기의 양쪽에 의해 분명하게 증명되고 있다고 말이다.[각주:42]비정치란 정치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래할 정치의 별명이 비정치이며, 그 모델 중 하나가 베유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녀에게 비인칭으로의 이행은 윤리적이고 신학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요청이기도 했다. 정의나 자유는 우리에 의해 쟁취된다기보다는 비인칭에 호소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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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는 반정치도 초정치도 탈정치도 아니다. 정치의 이면도 아니고 이를 넘어선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거꾸로 바로 정치적인 것의 한복판 속에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는 힘을 가진다. 이런 생각을 정면에서 수립한 것은 이탈리아에서는 마시모 카차리(1944~)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1978년의 논고 니체에게서의 비정치에서, 일찍이 네그리의 동지이자 절친이었던 이 베네치아의 철학자는, 토마스 만에 의한 니체의 비정치성의 해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각주:43]

독일의 소설가에 따르면, 니체는 비정치적이기 때문에 독일 문화의 중심적 존재로 간주되고, 그 비정치성이야말로 독일의 정신적 힘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카차리에 따르면, 비정치는 정치를 무가치한 것으로서 단죄하는 것에 있는 것도, 정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정치야말로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의 정치를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비정치는 허위를 고발하는 이데올로기 비판보다 훨씬 근원적인 것이다. 결국 카차리는 거절을 거절하는 것이며, 그 신념이 성공이냐 실패냐는 차치하고 베네치아 시장 재직 중에 미시정치로서 실천됐다는 것은 또한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에스포지토에게서의 비정치도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1960-70년대에 일본에서도 일세를 풍미한, 이른바 논폴리와는 구별된다. 비정치는 중립적인 게 아니라, 빼어나게 정치적인 몸짓이다. 권리에 근거한 정치라는 발상을 철저하게 비판한 베유를 받아들여, 에스포지토는 의무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구상한다. 이 발상은 또한 공동체의 어원이 된 라틴어 코무니타스와도 합치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의무책임을 의미하는 무누스, ‘~와 더불어,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사 타무가 붙어서 만들어진 명사이기 때문이다. , 공동체 함께 살아가는 것 란 본래 각자가 타자에 대한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면역의 어원인 라틴어의 이무니타스는 똑같은 무누스와 지우다를 가리키는 접두사 가 조합되어 만들어졌다. 이무니타스는 따라서 의무로부터 면제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일반의 인식과는 정반대로, 그 어원에 따르면, 공동체란 원래 동일성이나 고유성에 집착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며, 면역은 자기보존은커녕 자기와 타자 쌍방의 파멸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각주:44] 에스포지토는 근대의 정치사법적 범주의 거의 대부분이 자기 면역화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격은 그 으뜸가는 것 중 하나이다.

이처럼 공동체와 면역을 하나의 쌍을 파악하고, ‘의무를 끼워 넣어 흡사 정반대의 관계로 양자를 둔 점에 에스포지토의 새로움이 있다. 그래서 코무니타스이무니타스비정치의 범주의 뒤를 쫓듯이 출판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또 에스포지토가 말하는 공동체가 바타이유부터 블랑쇼를 거쳐 낭시로 이어지는, 이른바 비정치적인 공동체 사상 계보로 연결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인칭에 대한 주목에 의해 어떤 새로운 삶의 저치의 지평이 열리게 될지, 그 대답은 아직은 분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페르소나 사이의 형이상학적인 분리를 무효화하는 생명정치는 정말로 가능할까? ‘인격이라는 장치에 빨려 들어가버린 삶을 어떻게 하면 탈환할 수 있을까? 적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선별하거나 계층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감벤을 부연해서 말한다면, 그 누구도 삶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냥 사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럼 아감벤은 어떨까? 내가 아는 한, 그가 정색하고 비정치를 입에 담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대신에 되풀이하여 인용되는 것은 무위라는 단어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장치론과도 연동되어 있다. ‘장치라는 개념도 푸코에게서 연원되는 것이지만, 이 이탈리아 후배는 여기에서도 그것을 독자적으로 고쳐 읽고 있다. 결국 세계 통치의 다양한 장치 그 으뜸가는 것이 생명정치의 그것 는 세계를 구원하기는커녕 카타스토로피로 이끌어 간다고, 감히 단순화해서 한다면, 이것이 아감벤의 테제이다. 최첨단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도 궁극적으로는 죽음정치에 봉사하고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길이 남아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답은 단순하다. 이런 장치들을 작동시키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추앙되고 있는 그 신성함을 신성모독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무위와 신성모독이라는 두 개의 몸짓은, 이리하여 아감벤에게서 밀접하게 결합된다. 아니 양자는 확실하게 나눠져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것이 왕국과 영광의 결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삼위일체의 교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오이코노미아”, 즉 통치의 형태를 자세하게 추적한 끝에 아감벤이 당도하는 것은, 무위로서의 권력의 영광이다. 신이 엿새 동안의 창조 후에 쉬고, 최후의 심판 후에 영원한 안식일이 오듯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상 무위라는 빈 장소이다. 오늘날 가장 초미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 스스로의 장치 속에 이 무위를 탈환하는 것이다.[각주:45] 무위나 신성모독은 종종 자유로운 사용이나 공통의 사용이라고도 바꿔 말해진다.

이런 아감벤의 장치관, 혹은 더 넓게는 기술관은, 종종 너무도 소박할 뿐 아니라, 너무도 비관적이라고 비난받아 왔다.[각주:46] 그렇지만 무위나 신성모독은 쓸데없이 장치를 중지시키거나 파괴하거나 하는 것도, 게으르게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장치란 무엇인가(2006)에서도 말해지고 있듯이, 그것은 분리·분할된 것을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리는 대항장치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장치의 자유로운 사용이며, 장치 아래서 노는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장치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그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각주:47]

앞서 말했듯이, 아감벤은 최근 점점 더 소유에서 사용으로, 풍요에서 가난으로 라는 발상의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리하여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장대한 <호모 사케르> 계획은 정치로부터 출발해 비정치로 급속하게 방향타를 꺾었다(그렇지만 물론 그 경향은 처음부터 있었다). 아감벤의 무위나 에스포지토의 비정치는 오늘날 더욱, 예를 들어 알랭 바디우에게서의 전-정치에 대한 주목이나, 자크 랑시에르에게서의 치안과 정치의 구별을 둘러싼 사유와도 맞대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 그런 시도도 시작되고 있지만, 그것은 향후의 과제로 남겨둔다.[각주:48]

아무튼 예전에 시몬 베유가 제창한 비정치, 전체주의의 폭력이라는 동시대의 카타스트로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면, 작금 새롭게 재부상하고 있는 비정치의 사유는, 관리화와 규율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삶의 보호와 부정이 바야흐로 불분명해지는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문턱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것은 확실한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1. 졸고, 「アイステーシスの潜勢力」, 『ラチオ』 第04号, 講談社, 2007년 11월 및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 講談社選書メチエ, 2008년을 참조. [본문으로]
  2. Pietro Montani, Bioestetica: Senso comune, tecnica et artenell’età della globalizzazione, Roma: Carocci, 2007 ; Laura Bazzicalupo, II governo delle vite : Biopolitica ed economia Roma-Bari: Laterza, 2006. [본문으로]
  3. Roberto Esposito, Pensiero vivente: Origine e attualità della filosofia italiana, Torino: Einaudi, 2010. [본문으로]
  4. ジャンバッティスタ•ヴィーコ, 『新しい学 1󰡕, 上村忠男訳、法政大学出版局、ニ〇〇七年、ニ〇五ぺージ。 [본문으로]
  5. 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5-1976), Paris: Gallimard-Seuil, 1997, p.213(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콜레주드프랑스강의 1975-1976』, 김상운 옮김, 난장) [본문으로]
  6. Ibid., p.226. [본문으로]
  7. Ibid., p.228. [본문으로]
  8. Ibid., p.232. [본문으로]
  9. Ibid. [본문으로]
  10. Giorgio Agamben, Quel che resta di Auschwitz : L’archivio e il testimone (Homo sacer III),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8. p.78. [본문으로]
  11. Ibid., p.145. [본문으로]
  12. 조르조 아감벤, 『사물의 표시』, 양창렬 옮김, 난장, ****. [본문으로]
  13. 상동, ***쪽. [본문으로]
  14. 상동, ***쪽. [본문으로]
  15. Giorgio Agamben, Homo Sacer: II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1995),Torino: Einaudi, 2005, pp.178-184(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 [본문으로]
  16. 이에 관해서는 졸저, 『アガンペン読解』, 平凡社, 2011을 참조. [본문으로]
  17. Slavoj Zizek, “Knights of the Living Dead”, New York Times, March 24, 2007. [본문으로]
  18. Agamben, Homo Sacer, cit. p.69. [본문으로]
  19. Roberto Esposito, Bios: Biopolitica e filosofia, Torino: Einaudi, 2004, chap. IV. [본문으로]
  20. 拙著 「イタリア現代思想への招待」、『ラチオ』 第01号, 講談社, 2006년 2월 및 「ナポリ発、全人類へ──ロべルト・エスポジトの思想圏」(訳者イントロダクション), ロべルト・エスポジト, 『近代政治の脱構築—共同体・免疫・生政治』, 岡田温司 訳, 講談社選書メチエ, 2009년 수록. [본문으로]
  21. Esposito, Bios, cit, pp.194-196. 비오스의 조에로의 환원 속에서 나치즘의 생명정치=죽음정치의 메커니즘을 봤던 아감벤에 대해서, 에스포지토도 “조에의 정신화와 정신의 생물학화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고 날카롭게 견제하고 있다(Ibid., p.153). [본문으로]
  22. Roberto Esposito, Immunitas : Protezione e negazione della vita, Torino: Einaudi, 282. [본문으로]
  23. 다음을 참조. 宮崎裕助 「自己免疫的民主主義とはなにか──ジャック•デリダにおける「来たるベさデモクラシー論」の帰趨」 『思想』 第1060号(2012年8月)岩波書店、45-68頁. [본문으로]
  24. * 데리다의 자기면역화에 대해 데리다의 ‘자기면역화’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은 『불량배들』이다. 이 책은 두 개의 강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리지의 연례적인 10일 동안의 강연과 세미나로, 장문의 기록 「강자의 이성 : 불량국가들은 있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도래할 계몽의 <세계> : 예외, 계산, 주권」이다. 첫 번째 강연에서 데리다는 미국이 일부 국가들을 고발하기 위해 사용한 ‘불량국가’라는 개념을 꺼내들고, 그 의문점을 들춰낸다. 여기까지는 촘스키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문제는 정치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권과 이성의 문제이며, 생명의 자기보존으로서의 면역과, 이것이 생명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자기면역, ‘죽음충동’(p.299)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까지 끌고 가는 수완은, 아감벤과 데리다 두 명의 사상가의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두 번째의 짧은 강연에서는 시간적인 제약도 있고 해서, 데리다는 “전보적이기도 하고 강령적이기도 한”(p.293) 형태로, 지금까지 얘기한 다양한 문제를 요약적으로, 솜씨 좋게 제시한다. 그 요약의 능수능란함 때문에, 독자는 눈이 어질어질한 부분도 있지만, 거꾸로 인용을 견뎌내는 짧은 문장도 많다. 첫 번째 논문에서는 시간의 여유가 너무 많아서(데리다는 그래도 모자라다고 계속 말하지만), 우회로를 거칠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인용할 수 있는 대목은 별로 없다. 이 우회로가 즐거운 것은 확실하며, 데리다의 세미나는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서평에서는 전보적인 것을 더욱 인상비평적으로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처음 논문에서는 민주주의가 자기면역을 일으키며, 자살하기 직전에 이른 사태를 고찰한다. 무엇보다 범례적인 것은 알제리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슬람 정당이 민주적인 선거에서 압승할 것이 확실한 시점에서,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선거를 무기한 연기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이름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침해의 전형적인 사건(p.74)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 정부는 “시작된 선거과정은 민주적으로 민주주의의 종언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주권적으로 결정했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에 있어서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치료를 하기 때문에, 최악의, 거리 전체의 가장 높은 침해에 대해서 그것을 면역화하기 위해서, 적어도 잠정적으로 중지하는 것”(Ibid.)을. 이것은 “자기면역적 자살”(p.75)이었다. 전보적인 두 번째 논문으로부터 자기면역의 간단한 정의를 복습해두자. “어떤 생체 속에, 타자의 공격적인 침입에 대한 면역을 해당 정체에 부여하는 것, 바로 해당 주체가 자살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p.234)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죽이는 알제리, 주권을 지키기 위해 주권의 근원인 것을 죽이는 쿠데타, 불량국가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불량국가가 되는 미국. 미국 행정부는 ‘악의 축’에 대항한다고 칭하며, 민주적 자유를 “불가피하게, 또한 부인 불가능한 방식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어떤 민주주의자도 진심으로 반대할 수 없는” 것이다(p.86). 그뿐만이 아니다. “가장 폭력적인 불량국가, 그것은 스스로 그 위임자라고 자칭하는 국제법을,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말하고, 스스로 그 이름 아래서, 이른바 불량국가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는 국제법을,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명하는 경우에는 매번 무시해온 국가, 계속 침범한 국가, 즉 미국이다.”(p.189). 그리고 미국과 동맹하는 국가도, 이것에 대항하는 국가도, 모든 국가도 국익의 이름으로, 주권의 지고성의 이름으로,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똑같이 행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불량국가밖에는 없으며, 그리고 이제 불량국가는 없다. 이 개념은 그 한계에”(p.205) 도달한 것이며, “이 종언은 항상, 처음부터, 가까웠던 것이다”(Ibid.). 또한 데리다는 이 주권성의 이론의 배후에 기독교의 신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민주적이라 불리는 체제에서조차 주권의 근저에는 존재-신론이 있다”(p.299).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거기까지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면역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바꿔 말하면, 아포리아이기도 하고 이중구속이기도 하다. “아포리아, 이중구속 및 자기면역적 과정은,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지만, 이것들은 바로 공동으로, 그리고 부담=책임으로서, 내적 모순 이상의 것, 결정 불가능성을 … 내적 이율배반을 갖고 있다”(p.78). 이 개념은 여기까지 부연하면, 뭐든지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처럼 되어 버린 것은 확실하다. 그는 전보적으로 몇 개인가? 데리다는 복제를 좋아하지만, 치료적인 복제는 부정할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원래 모든 개별성에는 반복이라는 요소가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무시하고 개성의 고귀함을, 하나의 생명의 특이성을 강조해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반복・복제는 생산・재생산과 완전히 똑같이, 문화・지식・언어・교육의 조건을 보증하는 것이다”(p.278). 인간의 특이성에 근거한 복제반대론은 “유전자주의 혹은 생물학주의를, 즉 뿌리 깊은 동물학주의, 근본적인 환원주의를, 스스로 반대하고 있는 공리계와 나눠 갖고 있는”(Ibid.) 것이다. 그러나 자기면역이 절대적인 악인 것은 아니다. 사건이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라면, “사건은 절대적인 면역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자신의 유한성 속에서 지평 없이, 벌거벗음의 취약함에 접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타자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치하고 서로 맞서는 것은 여전히 할 수 없다. 혹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자기면역성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 자기면역성은 대상에 노출되는 것, 즉 도래하는 것이 없는 자에게, 따라서 계산 불가능한 것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에 노출되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인 면역성이 있을 뿐이고 자기면역성이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p.290). 레비나스의 알레르기 이론과 통저하며, 데리다의 이론의 깊이가 엿보이는 경지이다. [본문으로]
  25. Roberto Esposito, Termini Della Politica, Comunita, Immunita, Biopolitica, Mimesis Edizioni, 2008. [본문으로]
  26. Roberto Esposito, Terza persona. Politica della vita e filosofia dell’impersonale, Einaudi, Torino, 2007. 이와 아울러 2011년 3월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강연에 기초한 다음의 논고도 참조. ロベルト•エスポジト「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多賀健太郎 訳, 『表象06』, 2012년. 나아가 이 잡지의 특집 「ベルソナの詩学」에 기고한 젊은 연구자들(岡本源太, 横山太郎, 千葉雅也, 信友建志)의 논고도 참조. [본문으로]
  27. 제목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강연회, 「장치로서의 페르소나(装置としてのペルソナ)」 http://utcp.c.u-tokyo.ac.jp/blog/2011/03/roberto-esposito-persona-as-de/ 2011년 3월 9일, 도쿄대학 코마바 캠퍼스에서 이탈리아 인문고학연구소 소장인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씨의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에스포지토 씨 외에도 사회자로 교토대학 교수인 오카다 아츠시(岡田温司) 씨, 토론자로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페델리코 루이제티 씨를 맞이한 본 강연회는 총 세 시간 동안 논의가 이뤄졌으며, 그의 사상의 현실성을 음미하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맨 처음으로 진행을 맡은 오카다 씨가 이탈리아 현대사상의 종합적 해설과 그 속에서 에스포지토 씨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정중한 설명이 주어졌다. 오카다 씨의 지적에 따르면, 에스포지토 씨뿐 아니라, 아감벤이나 카차리, 혹은 바티모 등 이른바 이탈리아 현대사상이 주목을 받은 원인으로서, 이탈리아가 ‘국민국가’로서 좋든 나쁘든 기능하지 못한 것과 뒤얽혀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들 수 있다. 중심적 권력 부재 속에서 태어난 이들 사상이, ‘포스트제국’적인 시대 정황과 부합하는 부분이 적잖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에스포지토 씨는 “비오스bios”, “면역immunitas”, 그리고 “공동체communitas”를 주제로 한 3부작을 중심으로, 푸코 이후의 생명정치의 문제를 공동체론으로 전개하면서, 생명의 탈구축을 기반으로 한 포스트휴먼적 정치철학을 구축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소개됐다. 기조강연에서 에스포지토 씨의 강연 내용은 “페르소나 persona” 개념의 심급과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격, 위계(位階), 혹은 가면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는, 그 다의성 속에서, 특히 법철학적 함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서양사상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맡아왔다고 분석된다. 에스포지토 씨에 따르면, 들뢰즈나 아감벤이 ‘장치’라는 이름으로 비판했던 오이코노미아를 정초지었던 것이 바로 이 ‘페르소나’에 다름 아니며, 거기서 ‘신/인간’, ‘혼/육체’의 이분법이 유비적으로 구조화됐다고 간주된다. 주체와 비주체의 존재론적 차이를 정초짓는 이 구조가, 후자를 ‘타락’이나 ‘병’, ‘동물’로 명명해 왔던 바로 그것이라는 얘기다. 또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법의 체계와도 접점을 갖고 있다. 무엇이 ‘페르소나(=개인)’인가라는 법적 지표에 의해, 노예와 자유인, 심지어 타고난 자유인과 해방 노예의 자유인의 구별이 차례차례 만들어진다. 즉, 법적 기능에 있어서의 페르소나는 규범과 예외를 무한히 창출함으로써 모든 것을 그 무한한 권리에 있어서의 이분법으로 끌어들이는 부단한 변증법적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법=권리적 통합이나 보편화는 예외자를 배제하고 이어서 이것들을 에워싸면서, 새로운 통합을 지향한다. 에스포지토 씨의 분석은 이 구조를 ‘인간화’의 메커니즘에 내재하는 ‘비-인간화(탈페르소나화)’로서 부각시켜 보여준다. 즉, 비-인간은 페르소나 개념이 촉진했던 주체화 과정의 등 뒤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억압되고, 적어도 개념 수준에서, ‘완벽한 인간’ 아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안락사나 장애와 뒤얽혀 있는 문제도 이런 조류 속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인간/비인간’의 부단한 변증법에 맞서서, 에스포지토 씨가 그 돌파구로서 이번 강연에서 끌어낸 것은 시몬 베이유의 사상이다. 고대 로마를 참조하면서 히틀러주의의 기원을 분석하는 베이유는, 거기에 로마법적인 페르소나의 움직임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낸다. 베이유는 비-인간적인 폭력이 인간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것을 냉혹하게 지적하면서도, 인간의 내부에 깃든 다른 비-인간, 즉 ‘신성한 것’을 동시에 희구한다. 상이한 ‘내부’, 상이한 ‘비-인간’을 어떻게 끌어당겨, 주체를 변환할 수 있는가, 에스포지토 씨가 베이유에게서 찾아낸 가능성은 여전히 자세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루이제티 씨의 의견 및 회장의 질의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다. 루이제티 씨는 에스포지토 씨의 ‘비인간’의 사상을 프랑스 현대사상의 계보 속에 위치시키고, 에스포지토 씨의 사상 속에 ‘대륙/영미’와는 상이한 별개의 유럽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첫머리에서 말한 오카다 씨의 지적과도 겹치는 것인데, ‘이탈리아’의 이름 아래서 상이한 근대, 상이한 철학, 상이한 사상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라는 지적은 데리다가 『불량배들』 안에서 행한 철학에서의 라틴 기원의 문제와도 관련된 것이며, 매우 흥미로운 것이리라. 이 점에 관해서는 강연장에서의 질의에서, “상이한 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타자”인 일본인의 사상에 대해서 ‘페르소나’의 탈구축은 의의를 가지느냐는 지적이 있었던 것도 덧붙이고 싶다. 이 밖에도 거점 리더인 코바야시로부터는 베이유의 사상에 있는 종교성이라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함으로써 중성화하는 것이 허용되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었다. 보고자인 나 大橋完太郎도, 페르소나의 탈구축이 철저하고 모두가 비인간이 된 세계는 과연 얼마나 살기 좋은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했다.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긍정적 가치로 옮겨 놓을 때, 새로운 개념적 배치의 변용을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뿐일까? 어쨌든, 평일에 일찍부터 시작되어 3시간 반이나 되는 대장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명을 넘는 분이 왕림하셔서 성황리에 이번 강연회를 마칠 수 있었다. 에스포지토 씨, 루이제티 씨, 당일 훌륭한 통역을 선 보여주신 무라 마리코(村松真理子) 씨,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그의 초청에 관해서 진력을 다하신 오카다 아츠시 씨와 그 지원 스탭들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본문으로]
  28. 조르조 아감벤, 『이탈리아적 범주』, ***. [본문으로]
  29. 조르조 아감벤, 『벌거벗음』, ***. [본문으로]
  30. Giorgio Agamben, Mezzi senza fine : Note sulla politica,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6, p.80(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 [본문으로]
  31. “Una biopolitica minore: Intervista di Stany Grelet e Mathieu Potte-Bonnnville a Giorgio Agamben”, Biopolitica minore, a cura di Paolo Perticari. Roma: Manifestolibri, 2003, pp.193-194. [본문으로]
  32. Giorgio Agamben, La comunità che viene, Torino: Einaudi, 1990: Nuova edizione accrsciuta. Torino: Bollati Boringhieri, 2001. pp.3-4(조르조 아감벤, 『도래하는 공동체』, ***). [본문으로]
  33. Giorgio Agamben, Profanazioni, Roma: Notte tempo, 2005, p.9(조르조 아감벤, 『세속화 예찬』, 난장, ***). [본문으로]
  34. 木村敏, 『臨床哲学講義』, 創元社, 2012년, 7-8, 12-14頁. 살바토레 나톨리도 최근 저서에서 비오스를 영원히 연속된 조에의 분할이자 개별화라고 해석한다(Salvatore Natoli, L’edificazione di sé : Istruzioni sulla vita interiore, Roma-Bari: Laterza, 2010, p.6). [본문으로]
  35. Giorgio Agamben, 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 1993(Agamben, Potentialities, trans. Daniel Heller-Roazen, 1999). [본문으로]
  36. Simone Weil, La Pesanteur et la grâce, 1947[Gravity and Grace, Routledge & Kegan Paul, 1952 ; Routledge Classics 2002]. 에스포지토는 『비정치의 범주』에서 베이유의 ‘탈창조’를 다음처럼 고쳐 읽는데, 거기서는 분명히, 아감벤의 ‘비잠재력’에서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테면 ‘탈창조’는 “자기 멸각自己滅却의 창조이며, 창조적인 자기 멸각이다.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활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현실태이다. 심지어 ‘현실태’로 해소되지 않는 활동, 또한 ― 이미 말했던 ‘수동적 잠재력’이라는 범주를 따른다면 ― ‘잠재력’인 채로 머무는 활동이라고 해도 좋다”(Roberto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Bologna: II Mulino. 1988; Nuova ed.. 1999. p.28). [본문으로]
  37. 아감벤과 베유의 숨겨진 관계에 대해서는 최근 몇 명의 젊은 연구자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가령 다음을 참조. Leland de la Durantaye, Giorgio Agamben: A critical Introduc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pp.22-23; Alessia Ricciardi, “From Decreation to Bare Life: Weil, Agamben, and the Impolitical”, Diacritics, 39 (2), 2009, pp.75- 93. [본문으로]
  38. Giorgio Agamben, Altissima povertà : Regole monastiche e forma di vita, Vicenza: Neri Pozza, 2011. [본문으로]
  39. 예를 들어 『근대정치의 탈구축』의 마지막 장 「비인칭의 철학을 향하여」나 『3인칭의 철학』의 2장 「페르소나, 인간, 사물」을 참조. [본문으로]
  40. シモーヌ•ヴューユ, 「人格と聖なるもの」, 中田光雄訳、『シモーヌ•ヴューユ著作集』 第2巻, 春秋社, 1968年, (新装版) 1998年, 443, 447頁. [본문으로]
  41. 에스포지토, 『근대정치의 탈구축』, 272頁. [본문으로]
  42. Esposito, Categorie dell’impolitico, cit, p.XII 이 책에서는 베이유나 바타이유와 더불어, 카프카, 엘리아스 카네티, 헤르만 블로흐, 모리스 블랑쇼 등에 많은 쪽수가 할애되어 있다. [본문으로]
  43. 논고는 니체의 『철학자의 책哲学者の書』의 이탈리아어판 해설로 작성됐다. Massimo Cacciari, “L’impolitico niezschiano”, in Friedrichi Wilhielm Nietzsche, II libro del filsofo, a cura di Marina Beer e Maurizio Ciampa, Roma: Savelli, 1978, pp.103-120. 또한 1970년대부터의 카차리의 주요 논문 9편을 모은 앤솔로지가 영어판으로 2009년에 출판됐는데, 그 제목도 『비정치 : 정치적 이성의 철저한 비판에 대해』이다. Massimo Cacciari, The Unpolitical: On the Radical Critique of Political Reason, translated by Massio Verdicchi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9. [본문으로]
  44. Roberto Esposito, Communitas: Origine e destino della comunità, Torino: Einaudi. 1998, pp.XII-XXVL. [본문으로]
  45. 이 탈환은 “메시아적인 것의 작동”이라고도 불려진다. Giorgio Agamben, Il Regno e la Gloria: Per una genealogia teologtca dell’economia e del governo (Homo Sacer II, 2), Vicenza: Neri Pozza. 2007, p.272(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 [본문으로]
  46.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Bernard Stiegler, Prendre soin : De la jeunesse et des générations, Paris: Flammarion, 2008. [본문으로]
  47. Giorgio Agamben, Che cos é un dispositivo?, Nottetempo, 2006(조르조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 아감벤에게서의 ‘무위’와 ‘신성함’에 관해서는 拙著, 『アガンべン読解』를 참조하기 바란다. [본문으로]
  48. 다음을 참조. Alain Badiou, Logiques des mondes, Paris: Seuil, 2006;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 Laurent Dubruil, “Preamble to Apolitics”, Diacritics, 39 (2), 2009, pp.5-20.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 읽고 나니 그다지 영양가는 없다고 생각. 그러나 관련 문헌들을 보자는 차원에서 업로드. 


질베르 시몽동과 질 들뢰즈의 특이성개념

정보를 형이상학적으로 다시 묻기 위해

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とジル・ドゥルーズの特異性概念

― 「情報形而上学的しのために

The notion of “singularity” in Simondon and Deleuze:

A way of rethinking “information” metaphysically

호리에 이쿠토모(堀江郁智)

 키워드 : 질베르 시몽동, 질 들뢰즈, 특이성, 전개체성, 정보

 

들어가며

질베르 시몽동(1924-1989)20세기 후반에 가장 중요한 프랑스 철학자의 한 명이며, 그 기술철학과 개체화론에 의해 이름을 알리고 있다. 한편으로 시몽동의 철학은 기술철학의 영역에서 일정하게 수용되고 있으며, 그 주요한 업적은 1958년에 국가박사논문의 부논문(이하 박사 부논문으로 약칭)으로 제출되고 나중에 기술적 대상의 존재양태에 대해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 다른 한편으로, 시몽동의 철학의 또 다른 축으로서 개체화론이 존재하며, 그 철학은 같은 해에 국가박사 논문의 주논문(이하 박사 주논문으로 약칭)으로서 제출되며, 사후에 간행된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춰본 개체화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에서 결정(結晶)한다. 본고에서 질 들뢰즈(1925-1995)의 철학과의 관계에서 거론되는 것은 후자의 박사 주논문이다.

지금까지 질 들뢰즈에 의한 찬양을 주된 예외로 하면, 시몽동의 개체화론은 오랫동안 과소평가됐다. 그러나 오늘날 시몽동의 개체화론은 다양한 인접 영역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인식론, 존재론, 정치철학, 자연철학, 그리고 기술철학 분야에서 시몽동의 재평가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이 재평가를 거쳐, 시몽동 사후, 시몽동의 저작과 강의록, 혹은 시몽동 연구의 저작이 잇달아 출판되기 시작한다.[주1] 이런 프랑스 철학계에서의 시몽동 복권의 조류는, “시몽동 르네상스라고 일괄로 불리기도 한다.[주2]

[주1] 시몽동의 사후에 출판된 주요 저서는 20149월 시점에서 다음과 같다. 우선 단행본으로 시몽동의 박사 주논문을 수록한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춰본 개체화가 제롬 미용(Jérôme Millon)사에서 2005년에 출판됐다. 이어서 강의록으로 엘리프스(Ellipses)사에서 2004년에 동물과 인간에 관한 두 개의 강의(Deux leçons sur l’animal et l’homme), 쇠이유(Seuil)사에서 2005년에 기술에 있어서의 발명 : 강의와 강연(L’invention dans les techniques : Cours et conférences), 트랑스파랑스(Les Éditions de La Transparence)사에서 2006년에 지각 강의(Cours sur la perception (1964-1965)), 2008년에 구상력과 발명(Imagination et Invention), 그리고 2010년에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 강의와 강연(Communication et information : Cours et conférences)이 출판됐다. 게다가 2014년에는 미간행 논고, 강의록, 강연원고, 대담록 등을 집성한 기술에 관하여(Sur la technique)가 프랑스대학출판국(PUF)에서 간행됐다

[주2]  Cogburn질베르 시몽동 : 존재와 테크놀로지의 서평에서, “시몽동 르네상스가 영어권에서도 시작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Cogburn, “Gilbert Simondon: Being and technology”, http://ndpr.nd.edu/news/41310-gilbertsimondon-being-and-technology/)(2014922일 확인). 

본고의 목적은 특이성 singularité” 개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몽동의 개체화론과 들뢰즈의 개체화론 사이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 들뢰즈의 논의를 경유해 시몽동의 논의를 검토하는 이유로서, 다음의 세 가지가 꼽힌다. 우선 앞서 말했듯이, 그는 당시부터 시몽동의 철학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몇 안 되는 철학자라는 점, 다음으로 둘 다 당시의 자연과학들의 첨단적 논의에 다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 더욱이 둘 다 형이상학적 색채가 강한 개체화를 둘러싼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점이다. 마지막 점에 대해서는, 사실, 들뢰즈의 차이 철학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 칸트, 니체, 베르그손 등 메이저 철학자뿐만 아니라, 시몽동, Raymond Ruyer(1902-1987), Albert Lautman (1908-1944) 등 비교적 마이너 철학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이 존재한다.[주3] 이런 가운데, 들뢰즈의 시몽동 독해에 주목하는 움직임은 최근에는 영어권에서도 확산되고 있다.[주4]

[주3] 米虫正巳 ドゥルーズ哲学のもうつの系譜について小泉義之鈴木泉檜垣立哉 (). ドゥルーズガタリの現在, 東京, 平凡社, 2008, 490-512.

[주4] 예를 들어 Williams은 들뢰즈의 개체화론에 대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중요성을 그동안 과소평가했던 것을 인정한 뒤, “이제 시몽동과 함께 들뢰즈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다(Williams, Gilles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A critical introduction and guid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pp. 231-232). 또한 이 점에 대해서는 시몽동의 독자로서의 들뢰즈상을 부각시킨 Bowden의 논고가 참고가 된다(Bowden, “Gilles Deleuze, a reader of Gilbert Simondon” Boever, Murray, Roffe and Woodward (dir.), Gilbert Simondon: Being and technolog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2, pp. 135-153). 

더욱이 본고가 특이성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이 개념이 양자의 개체화론을 연결시키는 관절의 위치에 있는 동시에, 양자의 논의의 차이를 판명하게 비추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주5] 실제로 들뢰즈는 질베르 시몽동 : 개체와 그 물리-생물학적 발생(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이라는 제목의 1966년 서평에서, 시몽동의 주장의 중요성은 특이성개체성individualité’을 엄밀하게 구별한 점에 있다고 말했다.[주6] 들뢰즈에 의한 이런 시몽동 독해는 오랫동안 박사 주논문의 전체가 간행되지 않았던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해석을 일정한 범위에서 방향지었다고 생각된다.

[주5] 예컨대 Bardin은 시몽동과 들뢰즈의 차이성개념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 뒤, 전자의 정보의 차원에 있어서의 특이성역사적측면을 갖는다고 주장한다(Bardin, «De l’homme à la matière : Pour une « ontologie difficile ». Marx avec Simondon» Barthélémy (dir.), Cahiers Simondon n°5, Paris: Harmattan, 2013, p. 39, note 1). 또한 특이성개념을 통한 시몽동과 들뢰즈의 개체화론의 비교에는 히로세 코지(廣瀬浩司)의 논고가 참고가 된다. 히로세는 들뢰즈가 시몽동보다 어긋남[齟齬]의 존재론적 근원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廣瀬浩司, 個体化作用からアナーキーな超越論的原理――シモンドンとドゥルーズ」 『情況3, 4巻第3, 2003, 209-224). 

[주6] Deleuze, «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 Lapoujade (dir.),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Paris: Éditions de minuit, 2002, p.121. (ドゥルーズ 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 個体とその物理-生物的発生三脇康生訳 無人島 1953-1968前田英樹監修, 東京, 河出書房新社, 2003, 181)

그 때문에 본고는 들뢰즈의 이 서평에 의거함으로써, 들뢰즈가 시몽동에 의한 특이성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고찰한다. 본고에서는 맨 먼저, 시몽동의 개체화론에 있어서 -개체적인 것특이성개념이 중심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서 들뢰즈의 서평의 기술(記述)에도 불구하고, 시몽동은 박사 주논문에서 특이성개체성을 명확하게는 구별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가 -개체성préindividualité으로서의 특이성에 논의의 중점을 놓음으로써 새로운 문제계를 열고 있는 반면, 시몽동의 논의에는 정보information로서의 특이성이라고 불릴 것이 존재하며, 정보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되묻기 위한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시사하는 것을 가지고 이 글의 결론으로 한다.

 

 

1. 시몽동의 개체화론에 있어서의 -개체적인 것특이성개념

1.1 ‘-개체적인 것을 출발점으로 한 개체화의 작용

시몽동은 그의 박사 주논문의 첫머리에서 개체로서의 존재의 실재réalité에 접근할 수 있는 두 개의 수단[]이 있다[Il existe deux voies selon lesquelles la réalité de l'être comme individu peut être abordée][주7]고 말한다. , 원자론적 실체론substantialisme atomiste과 질료형상론hylémorphisme이라는 두 개의 학설이다. 그런데 직후에 이어진 논술에 의해 분명해졌듯이, 시몽동에 따르면, 이 두 개의 학설은 개체로서의 존재의 실재를 파악한다는 당초의 목적에 있어서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전자에 있어서는 모든 사물이 원자atome”의 불가분하고 통일적인 미립자의 우연에 가득 찬 마주침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며, 후자에 있어서는 개체화의 작동[작용] opération d’individuation”형상forme”질료matière”라는 양극적인 두 개의 항의 결합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주8] 확실히 개체화의 원리principe d’individuation”, 전자에 있어서는 원자의 우연의 마주침의 결과로부터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발견되는 반면, 후자에 있어서는 질료혹은 형상에 미리 포함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다.[주9] 그래도 전자는 원자’, 후자는 질료 결합체라는 구성된 개체에 존재론적인 특권을 부여한다[accorde un privilège ontologique à l’individu constitué][주10]는 공통점이 있다(강조는 원저자). 따라서 이 두 개의 학설에서는 존재의 그것 자신에 대해 상()을 어긋나게 하고 또한 상을 어긋나게 하면서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それ自身してをずらし, またをずらしながら解決する能力; une capacité que l’être a de se déphaser par rapport à lui-même, de se résoudre en se déphasant]”,[주11] 개체발생ontogénèse”의 능력을 파악할 수 없다고 간주된다.

[주7]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Grenoble: Jérôme Millon, 2005, p.23.

[주8] Ibid., pp.23-24.

[주9] Ibid., p.24.

[주10] Ibid., p.23.

[주11] Ibid., p.25.

반면 시몽동은 개체에서 출발해 개체화를 인식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개체화를 통해 개체를 인식한다[connaître l’individu à travers l’individuation plutôt que l’individuation à partir de l’individu][주12]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강조는 원저자). , 시몽동은 앞서 말한 두 학설처럼 어떤 개체화의 원리에 기초하여 개체화의 작용[작동]”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개체화의 작용[작동]”의 중심에서 개체발생의 역능을 파악하는 것을 학적 자세로 한다. 또한 이때, 시몽동은 구성된 개체에 주어진 특권적인 지위를 상대화하기 위해 -개체적인 실재réalité préindividuelle”라고 불리는 것을 전제한다.

[주12]  Ibid., p.24.

 

우리는 개체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는, 그리고 개체가 그 성질들 중에서 전개, 체제(régime), 마지막으로 양태들을 반영하는 개체화의 작용을 제일의적인[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개체화의 원리의 탐구에 있어서 일을 일변시킬 필요가 있음을[급변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이때, 개체는 상대적인 실재réalité relative로서 파악될 것이다. , 개체는 그 이전에 전-개체적인 실재를 전제하며, 개체화의 이후에도 단독으로는 현존[혼자서는 실존]하지 않는 존재의 특정한 상(phase)으로서 파악될 것이다.[주13]

われわれは, 個体存在める出発点となる, そして個体がその諸性質のうちに展開, 体制, 最後諸様態反映する個体化作用第一義的なものとしてなすことで, 個体化原理探究において一変させる必要があることをしたいその, 個体相対的実在réalité relativeとしてえられるだろうつまり, 個体, それ以前-個体的実在前提とし, 個体化以後であっても単独では現存しないような存在特定としてえられるだろう

Nous voudrions montrer qu’il faut opérer un retournement dans la recherche du principe d’individuation, en considérant comme primordiale l’opération d’individuation à partir de laquelle l’individu vient à exister et dont il reflète le déroulement, le régime, et enfin les modalités, dans ses caractères. L’individu serait alors saisi comme une réalité relative, une certaine phase de l’être qui suppose avant elle une réalité préindividuelle, et qui, même après l’individuation, n'existe pas toute seule.

[주13] Ibid.

 

이리하여 시몽동은 개체화의 원리의 탐구를 처음부터 다시 하려고 한다. 그 탐구에 있어서는 개체화의 작용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개체 이전에 -개체적인 실재가 있고, -개체적인 것le pré-individuel’이 실재하며, ‘개체화의 작용이후에도 개체와 그 상관항으로서의 환경milieu’이 공존한다는 전제이다.[주14] 거기에서는, 개체는, “존재의 특정한 상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 단독으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파악된다.[주15] 확실히 시몽동은 준안정적 평형, 포텐샬 에너지, (), 좋은 형태, 송신기, 수신기 등의 용어를 비롯해서 열역학, 분자생물학, 게슈탈트 심리학, 사이버네틱스, 정보이론 등의 당시에 융성했던 과학들의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야심적으로 물리, 생명, 심리, 사회의 네 가지 영역에 걸친 장대한 개체화론의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주16] 그러나 얼핏 보기에 대규모적인 이론의 기반에 있는 것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긴 계보를 지닌, “개체화의 원리에 근거하여 개체를 파악하는 입장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다. 최종적으로, 시몽동은, 두 개의 전통적인 개체관이 빠져 있는 공통의 아포리아를 선명하게 지적하고, 그 아포이라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개체적인 것과 개체의 조()가 생성되는 개체화의 작용이라는 사고방식을 제시한다.

[주14] 앞의 인용 대목에 덧붙여, 시몽동은 개체가 상대적인 실재인 이유로서, 개체화는 한 번에 -개체적인 실재의 포텐샬을 다 써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개체-환경milieu’의 쌍(pair)이 출현한다는 것을 꼽고 있다(Ibid., pp.24-25.)

[주15] 게다가 시몽동은 통일성unité과 동일성identité은 존재의 수많은 상들 중에서 하나에만, 개체화의 작용의 이후의 상에만 적응될 뿐이다고 말한다(Ibid., pp.25-26). 또한 통일성 이상이고 동일성 이상인plus qu'unité et plus qu'identité -개체적인 체제(règime)”라는 표현도 존재한다(Ibid., p.26).

[주16] 시몽동의 이런 광범위한 개체화론의 구성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19602월 강연에 따르면, 인간과학들과 심리학에 있어서의 일반이론의 부재에 대한 위기감이다(Simondon, « Forme, information et potentiels »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séance du 27 février 1960, tom. 54, 1960, p.143;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p.531).

 

1.2. ‘내적 공명의 발단으로서의 특이성

또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특징짓는 또 다른 핵심 개념으로서, ‘특이성 singularité’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이 이뤄지는 것은, 박사 주논문의 제11장에서이다. 시몽동은 이 대목에서, 벽돌 주조의 사례에 주목함으로써, “날것의 질료(la matière brute)”기하학적 형상이라는 추상적인 것을 대신해, “준비된 소재 matière préparée”물질화된 형태forme matérialisée”라는 구체적인 것을 사고하는 데 이른 그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벽돌 주조의 사례는, 3극 진공관의 사례와 결정화(結晶化)의 사례와 더불어, 시몽동의 물리적 개체화individuation physique”에 관한 논의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사례 중 하나이다. 또한 이런 세 개의 사례 중에서도, 벽돌 주조의 사례는 기술적 조작에 의한 성형(成型) prise de forme[형태를 취함]’의 사례이기도 한 점에서, 박사 부논문에서 전개된 기술철학의 내용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시몽동은 구체적인 하나의 벽돌이 하나의 개체일 수 있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체적인 벽돌은 찰흙의 조형성(plasticité, 可塑性)과 평행육면체의 결합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평행육면체의 한 개의 벽돌이, 현실에[실제로]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가 있을 수 있으려면, 효력이 있는 기술적 조작opération이 찰흙의 명확한 덩어리masse와 평행육면체의 통념notion 사이에 어떤 매개médiation창설할 필요가 있다[설립해야 한다](강조는 원저).[주17]

具体的なレンガは, 粘土可塑性平行六面体結合からじるのではない平行六面体1つのレンガが, つまり現実存在する1つの個体がありうるためには, 効力のある技術的操作opéation, 粘土明確masse平行六面体観念notionにある媒介méiation創設する必要がある(強調, 原著者).

La brique concrète ne résulte pas de l’union de la plasticité de l’argile et du parallélépipède. Pour qu'il puisse y avoir une brique parallélépipédique, un individu existant réellement, il faut qu’une opération technique effective institue une médiation entre une masse déterminée d'argile et cette notion de parallélépipède.

[주17] Ibid., p.40.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찰흙의 덩어리와 평행육면체의 통념을 연결시킨 매개가 문제화된다. 달리 말하면, 구체적인 벽돌을 사고하려면, 기술적 조작에 의해 수립되는 매개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매개는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시몽동에 따르면, ‘찰흙의 준비주형의 구성처럼, “날것의 찰흙과 부과될 수 있는 기하학적인 형상 사이의 능동적 매개une médiation active entre l’argile brute et la forme géométrique imposable이다.[주18]

[주18] Ibid.

동시에 이 능동적 매개에 의해, ‘날것의 찰흙은 단순한 날것의 찰흙이 아니게 되며, ‘평행육면체의 통념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이 아니게 된다고 한다. , 시몽동은 전자를 준비된 소재(matière préparée)”, 후자를 물질화된 형태(forme matérialisée)”로 재파악하고 있다.[주19]

[주19] Ibid., p.45.

이런 이유를 이어받고, 성형成型(prise de forme)의 기술적 조작이 축적한[쌓아올린] 진정한 관계는 날것의 질료와 순수한 형상 사이가 아니라 준비된 소재와 물질화된 형태 사이에 확립된다ces relations ne sont pas établies entre la matière brute et la forme pure, mais entre la matière préparée et la forme matérialisée[주20]고 주장된다.

[주20] Ibid.

게다가 이 기술적 조작에 의해 구체화된 관계는, 실체적이고 불가분한 항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ordre de grandeur”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주21] 시몽동은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사이에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상태, 바꿔 말하면 준비된 소재물질화된 형태를 획득하는 상태를 내적 공명 résonance interne이라고 부른다(강조는 원저자).[주22]

[주21] Ibid., p.40. 또한 다른 대목에서 시몽동은 준비된 소재물질화된 형태를 두 개의 하프체인(half-chain)에 빗대고 있다. “기술적 조작은 두 개의 정교화된 대상이 양립 가능한 성질들을 갖고 있는 똑같은 단계에 있을 때, 특정한 점에서 마주치는 두 가지 변형의 하프체인을 준비한다[L’opération technique prépare deux demi-chaînes de transformations qui se rencontrent en un certain point, lorsque les deux objets élaborés ont des caractères compatibles, sont à la même échelle]”(Ibid., pp.41-42).

[주22]  Ibid., p.45.

또한 시몽동에 따르면, 내적 공명을 기동(起動)시키는 인자라고 알려진 것이 특이성singularité”이다.[주23] 다시 말하면, 시몽동은 성형(成型)의 기술적 조작의 발단이 되는 것은 두 개의 크기의 차원의 중간에 있는 특이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특이성은 중간의 차원에 있어서 두 개의 크기의 차원을 교류시킨다. 게다가 시몽동에 따르면, 이 중간의 차원에 있는 특이성구체적인 지금 여기hic et nunc의 특이성 또는 특이성들[주24]이다. 요컨대 시몽동의 개체화론에서 벽돌주조의 사례를 비롯한 개체화의 작용에는 두 개의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을 내적으로 교류시키는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이 동반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23] 공명은 일정한 울타리 안에서의 에너지와 운동의 교환이며, 위상학적으로 규정된 중간 차원의 특이성을 출발점으로 한 미시물리학적인 질료와 거시물리학적인 에너지 사이의 교류이다[la résonance est échange d’énergie et de mouvements dans une enceinte déterminée, communication entre une matière microphysique et une énergie macrophysique à partir d’une singularité de dimension moyenne, topologiquement définie]”(Ibid.).

[주24] Ibid., p.48.

 

2. 들뢰즈에 의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독해

2.1 질베르 시몽동 : 개체와 그 물리-생물학적 발생

그런데 들뢰즈는 시몽동의 박사 주논문의 전반부가 수록된 개체와 그 물리-생물학적 발생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에 대한 서평을 1966년에 발표했다. 질베르 시몽동 : 개체와 그 물리-생물학적 발생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서평에서 들뢰즈는 시몽동의 작업의 중요성이 개체화의 아주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한 것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주25]

[주25Deleuze, op. cit., p.120 (ドゥルーズ, 前掲論文, 179).

서평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시몽동의 비판은, 첫째 전통적으로 개체화의 원리가 개체화를 이미 구성된 개체에 관련시킨다는 것, 둘째 개체화가 개체화 이후, 개체화 이전, 개체화의 상위 등 모든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향한다.[주26]그리고 들뢰즈는 시몽동에 응하면서, 실제로는 개체는 그 개체화와 동시에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며, ‘개체화의 원리는 진정으로 발생론적인 것génétique’이어야만 한다고 한다.[주27]게다가 들뢰즈는 시몽동을 따르면, 개체화의 전제 조건은 적어도 두 개의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으로 구성된 준안정적인 시스템 système métastable’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밝힌다.[주28]

[주26Ibid. (同上).

[주27Ibid. (同上, 180).

[주28Ibid., p.121. (同上).

또한 들뢰즈는 개체화란 포텐셜 에너지를 현동화(現働化)하고, 여러 가지 특이성들을 통합함으로써, 객관적으로 문제성을 안고 있는 시스템의 해결을 조직화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한다.[주29]계속해서 말하길, 이 해결은 내적 공명으로서, 정보로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주30]더욱이 시몽동의 분석이 두 개의 중심의 언저리에서 전개된다고 한다.[주31]그것들은 첫째로 물리나 생명 등의 개체화의 다양한 영역의 연구가 있다는 것, 둘째로 전-개체적인 것이 미래의 준안정적인 상태의 원천인 개체와 계속 관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주32]들뢰즈는 시몽동에 의해 확립된 새로운 개념들이 매우 중요하며, 시몽동이 다듬어낸[가다듬고 벼려낸] 것은 바로 하나의 존재론ontologie에 다름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주33]

[주29Ibid., p.122. (同上, 182).

[주30Ibid. (同上, 182-183).

[주31Ibid., p.123. (同上, 183).

[주32Ibid., pp.123-124. (同上, 183-184).

[주33Ibid., p.124. (同上, 185).

이처럼 들뢰즈의 서평은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단순한 소개나 주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들뢰즈 독자적인 해석이 나타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거기에는 들뢰즈가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역점을 이동시키고, 자신의 철학 안에 짜 넣으려고 하는 자세가 이미 보인다.

 

2.2 ‘특이성개체성의 엄밀한 구별에 대해

들뢰즈의 서평의 전체상을 파악한 뒤에, 본고에서는 그 서평의 전반부에 나타나는 다음의 기술(記述)에 초점을 맞춘다. 거기서 들뢰즈는 시몽동의 식견[知見]의 중요성을 요약한다.

 

시몽동은 개체화의 전제조건을 발견함으로써, 특이성과 개체성을 엄밀[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준안정적인 것은 -개체적인 것으로서 정의되며, 현실 존재와 포텐셜의 재분배[-개체적인 것으로서 정의되는 준안정적인 것은 포텐셜의 실존과 재분배]에 대응하는 특이성들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개체적이지 않고 특이한 것, 그것은 전-개체적 존재의 상태이다.[주34]

シモンドンは個体化前提条件発見することで, 特異性個体性厳密区別しているというのは, 準安定的なものは, -個体的なものとして定義され, 現実存在とポテンシャルの再配分対応する々の特異性完全えているからである。[...個体的であることなく特異であること, それは-個体的存在状態である

En découvrant la condition préalable de l'individuation, il distingue rigoureusement singularité et individualité. Car le métastable, défini comme être pré-individuel, est parfaitement pourvu de singularités qui correspondent à l’existence et à la répartition des potentiels. Singulier sans être individuel, tel est l'état de l'être pré-individuel.

[주34Ibid., p.121. (同上, 181).

 

, 들뢰즈는 시몽동의 식견의 중요성이 개체성특이성을 엄밀하게 구별한 것에 있으며, 개체적인 존재를 결여한 특이성-개체적인 존재의 상태라고 지적한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에게서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탁월성은, 그가 특이성개체성으로부터 날카롭게 분리한 것, 그가 특이성을 -개체적인 것이라고 본 것에 있다.

그렇지만 실제의 기술(記述)에서는, 시몽동 자신은 -개체적인 것특이성의 지위를 명확하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시몽동은 개체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개체화라는 매개적인 현실에 특이성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실제로, 앞 절에서 다룬 벽돌 주조의 사례에 대한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동화하는] 에너지는 상태의 에너지인데, 요소 사이의 시스템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특이성의 비호 아래서, 크기의 차원들 사이의 교류, 형상의 원리, 개체화의 실마리[시초]는 바로 개체의 수준에 있어서의 힘들의 마주침으로서의 두 개의 크기의 차원들의 상호작용에 있다. 매개하는 특이성은 여기서는 주형이다.[주35]

この現働化するエネルギーは状態のエネルギーではあるが, 要素間のシステムのエネルギーでもある特異性庇護のもとで, きさの諸次元交流, 形相原理, 個体化糸口, まさに個体水準における諸力出会いとしての2つのきさの諸次元相互作用している媒介する特異性, ここでは鋳型である

Bien que cette énergie soit une énergie d'état, une énergie du système interélémentaire; c'est en cette interaction des deux ordres de grandeur, au niveau de l'individu, comme rencontre de forces, que consiste la communication entre ordres de grandeur, sous l'égide d'une singularité, principe de forme, amorce d'individuation. La singularité médiatrice est ici Je moule.

[주35Simondon, op. cit., p. 44, note 5.

 

이 대목에서 시몽동은 특이성의 비호아래서, 개체화의 실마리가 개체의 수준에 있어서의 두 개의 크기의 차원사이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그런 특이성매개하는 특이성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벽돌 주조라는 구체적인 사례에 있어서는 주형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는 개체화는 발생하기 이전의 -개체적인 것특이성이 있다기보다는 바로 개체의 수준에 있어서, ‘특이성이 두 개의 크기의 차원의 중간에서 양자를 교류시키고, 내적으로 공명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개체의 수준이란 이미 구성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의 활동activité de la relation’으로서의 개체라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주36]

[주36]  무엇보다 관계의 항으로서가 아니라, 관계의 활동으로서 개체를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찾아내야 한다il faut trouver d’abord le point de vue à partir duquel on peut saisir l’individu comme activité de la relation, non comme terme de cette relation”(Ibid., pp.62-63).

이렇게 시몽동의 실제의 기술(記述), 시몽동의 논의가 들뢰즈의 서평에 있어서의 특이성의 정의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에 의한 시몽동은 개체화의 전제조건을 발견함으로써, 특이성과 개체성을 엄밀하게 구별하고 있다[주37]고 하는 명제가 반드시 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거짓 명제가 포함되어 있는 이상, 들뢰즈의 서평은 시몽동의 실제의 진술에 있어서 충실한 소개나 주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주37]  Deleuze, op. cit., p.121. (ドゥルーズ, 前掲論文, 181).

 

3. ‘정보로서의 특이성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

3.1 시몽동에게서의 정보로서의 특이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시몽동 독해를 오해에 기초한 것이라며 손쉽게 물리치는 것도 또한 피해야만 한다. 오해에 기초한 것임은, 그 독해에 결실이 풍부한 발전 가능성이 없음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존재의 일의성을 둘러싼 들뢰즈에 의한 둔스 스코투스 독해는, 오독이라고 말해지는 한편, 뛰어나고 창조적인 오독이라고도 말해진다.[주38]  만일 들뢰즈의 시몽동 독해가 오독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시몽동의 철학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인 한, 그것은 들뢰즈 연구뿐 아니라, 시몽동 연구에 대해서도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 같다.

[주38]  熊野純彦 西洋哲学史 古代から中世東京, 岩波書店, 2006, 246

문제의 소재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시몽동의 논술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하자. 앞서 말했듯이, 시몽동은 박사 주논문의 제11장에서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 혹은 특이성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 전후의 맥락은 다음과 같다.

 

개체화의 원리는 포텐셜 에너지의 현동화를 통한 소재와 형태에 공통된 알라그마틱한 작용opération allagmatique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용은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 혹은 특이성들에 의거했으며, 이것들을 감싸고[에워싸고] 증폭된다.[주39]

個体化原理, ポテンシャルエネルギーの現働化じての素材形態共通したアラグマティックな作用opération allagmatiqueであるとうことができるだろう。[...この作用, 具体的なココトイマの特異性あるいは々の特異性にしており, それらを, 増幅している

On pourrait dire que le principe d'individuation est l’opération allagmatique commune de la matière et de la forme à travers l’actualisation de l’énergie potentielle. Cette opération s’appuie sur la singularité ou les singularités du hic et nunc concret ; elle les enveloppe et les amplifie.

[주39]  Simondon, op. cit., p.48.

 

여기서 알라그마틱이라는 단어는 변환(変換)’이나 변천[추이]’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llagma’에서 유래하는 시몽동의 용어이다.[주40당장은 개체화의 작용의 구체적인 지금 여기에서의 변이(変移)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서 이해해두면 좋겠다. 특히 여기서 특필해야 할 것은 시몽동이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 시몽동에 따르면, “이 현실의[실제적] 특이성들, 즉 공통의 작용의 기회를, 정보 information라고 명명될 수 있다Ces singularités réelles, occasion de l'opération commune, peuvent être nommées information.”[주41]여기서는 앞서 말한 특이성의 매개적인 성질이 더 개념적인 수준에서 생각되고 있다. , 이들 대목에 따르면, ‘특이성들은 구체적인 지금 여기에서의 개체화의 작용에 있으며, 이런 특이성들정보라고 불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특이성들정보로서의 특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40]  遠藤繁行 シモンドンの個体化論する研究ノート――個体化操作および個体化探究方法としての転導」 『古典力対話力論集, 1, 2010, 43, 12

[주41] Simondon, op. cit., p.48, note 8.  

정보에 대해 본고의 맥락에서는 다음의 점도 중요하다. 시몽동이 정보개체화의 작용의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등장하고 있는 중인 개체의 차원에 있어서의 순수한 사건événement pur[événement pur à la dimension de l’individu en train d'apparaître]”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점이다.[주42]이 기술(記述)정보가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중 하나는 구체적인 지금 여기에 관련되는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순수하고 추상적인 사건에 관련되는 측면이다. , 한쪽은 현실적인 측면이고, 다른 쪽은 이념적인 측면이다.

[주42]  Ibid., p.51.

 

3.2 들뢰즈에게서의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

이때 시몽동에게서의 정보로서의 특이성은 들뢰즈에게서의 특이성이라는 단어의 용법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특이성에 대한 시몽동의 철학은 들뢰즈에 의해 오해된 것이 아니라 특이성에 대한 다른 문제계로 변환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연관 혹은 변환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건개념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의미의 논리의 제1계열의 첫머리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는 매우 특수한 사물의 범주가 문제이다. 즉 사건, 순수한 사건vénements purs이다.[주43]

 [주43]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Éditions de Minuit, 1969, p.9. (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 ().小泉義之訳, 東京, 河出書房新社, 2007, 13).


이 구절에서는, 시몽동의 논고에서도 보이는 순수한 사건이라는 단어가, 다른 맥락에서 거론되고 있다. , ‘순수한 사건앨리스가 더 커지며 그리고 더 작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생성변화의 동시성과 상관한다.

물론 이 대목만으로는 들뢰즈의 철학에 있어서의 사건또는 순수한 사건개념을 명확하게 할 수 없기에, 본고는 동서의 제9계열에도 초점을 맞춘다. 이 계열에서는, 들뢰즈는 노발리스를 언급하면서, 두 개의 사건을 이념적 사건현실적이고 불완전한 사건으로 분명하게 구별한다. 전자는 이념적인 프로테스탄티즘처럼 본성적으로 이념적인 사건événement, par nature idéal”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후자는 현실의 루터주의처럼 사물의 상태 속에서의 공간-시간적 실현effectuation spatio-temporelle”이다. 다만 들뢰즈는 곧바로 후자를 우발사고偶発的事故 accident”라는 단어로 바꿔 말한다(강조는 원저자). 요컨대 들뢰즈는 전자만을 진정한 사건으로 인정한다. 게다가 들뢰즈는 전자를 “<유일하고 동일한 사건Evénement>에 있어서 교류하는 이념적 특이성singularité idélles”이라고 바꿔 말한다.[주44]다른 대목에서 그는 이 특이성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singularité impersonnelles et préindividuelles”이라고도 부른다.[주45]

[주44]  본 단락의 지금까지는 다음의 대목을 참조하고 있다(Ibid., p.68. (同上, 106)). 

 [주45]  Ibid., p.178(同上, 265). 다만 차이와 반복에서는 비인칭적인 개체화-개체적인 특이성이 구별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8, p. 355(ドゥルーズ 差異反復 ().財津理訳, 東京, 河出書房新社, 2007, 283)).

결국, 들뢰즈의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에 대한 논의는, “사건개념을 통해, “정보로서의 특이성으로 두 가지 측면을 인정한 시몽동의 논의와 확실히 연관되어 있다. 들뢰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특이성에 대한 시몽동의 논의를 물리친 뒤,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특이성에 대한 시몽동의 논의를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으로서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는 정보로서의 특이성에 대한 시몽동의 논의의 두 가지 측면 중 하나를, 순수한 사건에 관한 측면을 자신의 철학 속에 받아들이고 듯이 보인다. 공교롭게도, 의미의 논리의 제15계열의 각주에서, 들뢰즈는 시몽동을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에 대해 합리화된 최초의 이론을 제출한다[주46]고 평가한다. 이렇게 해서 들뢰즈는 시몽동의 논의 속의 일부를 부연함으로써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문제계를 열었다고 생각된다.

[주46] Deleuze, Logique du sens, p.126, note 3. (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 ().196-197, 3).

 

마치며

본고에서의 논의의 요점은 특이성개념에 관한 시몽동의 개체화론과 들뢰즈의 개체화론의 차이였다. 우선 본고는 시몽동의 박사 주논문을 검토함으로써, 시몽동의 개체화론이 원자론적 실체론과 질료형상론이라는 두 개의 전통적인 개체관에 대한 비판 위에서 성립된 것임을 확인했다. 또한 시몽동의 저작에 대한 서평에서, 들뢰즈는 실제로 시몽동의 식견의 커다란 중요성을 인정했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 중요성은, ‘특이성개체성사이의 엄밀한 구별에 있었다. 그러나 시몽동의 실제의 논술을 검토함으로써, ‘특이성관계의 활동으로서의 개체의 수준에 있어서 두 개의 이질적인 크기의 차원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생각되고 있는 대목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 대목은, 시몽동의 주장이 반드시 들뢰즈의 서평에서의 정의에 들어맞는 것은 아님을 시사했다. 이 점을 검토함으로써, 한편으로 시몽동의 기술(記述)에는 현실적인 측면과 이념적인 측면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하는 정보로서의 특이성이 보인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들뢰즈는 후자의 측면을 부연함으로써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문제계를 연다는 것이 짐작됐다.

최종적으로 본고는 시몽동과 들뢰즈의 논의의 차이를 검토함으로써, 들뢰즈가 시몽동의 논의의 특정한 부분, 정보로서의 특이성의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을 일반화함으로써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문제계를 열었다고 결론 내린다.

이런 들뢰즈에 의한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독해의 방향성은, 들뢰즈가 펠릭스 가타리(1930-1992)와 함께 전개한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의 논의에서도 계승되고 있다고 생각된다.[주47]들뢰즈의 시몽동 독해의 독자성은, 들뢰즈/가타리의 추상기계에 대한 이론과 시몽동의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concrétisation’에 대한 이론과의 차이에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주48]

[주47]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Paris: Éditions de Minuit, 1972(ドゥルーズガタリ アンチ・オイディプス宇野邦一訳, 東京, 河出書房新社, 1986). 또한 들뢰즈/가타리도 천 개의 고원에서 시몽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Deleuze et Guattari, Mille plateaux, Paris: Éditions de Minuit, 1980, p.508(ドゥルーズガタリ のプラトー ().宇野邦一他訳, 東京, 河出書房新社, 2010, 123)). 

[주48]  시몽동에 따르면, ‘구체화된 기술적 대상은 자연적 대상과 과학적 표상 사이를 매개하는 위치에 있으며, 더욱이 구체화됨에 따라 기술적 대상은 자연적 대상과 유사해진다(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Aubier, 1958, pp.46-47). 

또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에 있어서 정보의 개념은, “개념들의 변혁속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 더불어, 독자적인 의미내용이 부여되고 있다.[주49]시몽동은 정보개념이 형태개념을 대체하는 것이며, 더욱이 공학적인 용법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주50], 시몽동에 따르면, ‘정보를 정의하려면 클로드 샤넌(1916-2001)의 정보이론에서의 신호와 같은 양으로서의 정보, 게슈탈트 심리학에서의 좋은 형태와 같은 질로서의 정보도 아니고, ‘강도intensité로서의 정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주51]이런 시몽동의 학적 자세는, ‘정보개념을 개체화론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재파악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주52]정보개념의 형이상학적 재질문을 위해서도, 시몽동의 개체화론의 추가적 연구의 진전이 기다려진다.

[주49] Simondon, L’individuation à la lumiè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p.31.

[주50]  Simondon, op. cit., p.35. 또한 타치바나 신이치(橘真一)는 시몽동의 information 개념의 유래를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에 있어서의 제작의 주제로, 그 속에서도 informer(형태를 부여하다)라는 동사의 사용 맥락에서 보고 있다(橘真一 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におけるinformation概念について――ベルクソン受容という背景かららした考察中心」 『年報人間科学, 33, 2012, 99-113)(Cf. Bergson, L’évolution créatric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07, p.184(ベルクソン 創造的進化合田正人松井久訳, 東京, 筑摩書房, 2010, 232-233)).

[주51] Simondon, op. cit., p.242. 부언하면 이렇게 이해된 정보는 소여의 항이 결코 아니고, 통일성과 동일성도 아니다. 반대로, “정보는 두 개의 부조화스런 현실 사이의 긴장이며, 두 개의 부조화스런 현실이 시스템으로 될 수 있는 차원을 개체화의 작용이 발견할 때에 나타나는 의미작용이다”(Ibid., p. 31). 또한 박사 주논문에서의 정보의 논의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시몽동 자신의 손에 의한 다음 논고가 특히 중요하다(Simondon, « L’amplification dans les processus d’information » Communication et information : Cours et conférences, édition établie par Nathalie Simondon ; et présentée par Jean-Yves Chateau, Chatou: Éditions de la Transparence, 2010, pp.157-176). 

[주52  이 점을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인간기계론에서의 정보의 전송논의 속에서 하나의 개체의 물리적 개체성”, “생물학적 개체성”, “정신의 개체성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Wiener,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Cybernetics and society, New York: Da Capo Press, 1988, pp.101-102(ウィーナー 人間機械論鎮目恭夫池原止戈夫訳, 東京, みすず書房, 2007, 105)). 

 

감사의 말

본고는 201467일에 오사카대학에서 열린 제2회 들뢰즈 스터디즈 아시아 국제회의(ドゥルーズ・スタディーズ・アジア国際会議)에서의 발표 “On the notion of "singularity" in Simondon and Deleuze: Pre-individual and information”에 대폭 가필수정을 가한 것이다. 적절한 조언을 해준 도쿄대학 石田英敬 교수, 影浦峡 교수, 青山学院大学 스테파니 쿱ステファニー・クープ 준교수, 동료 평가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Bardin, Andrea. « De l'homme à la matière : Pour une « ontologie difficile ». Marx avec Simondon » Jean-Hugues Barthélémy (dir.)., Cahiers Simondon n°5, Paris: Harmattan, 2013, pp. 25-43.

Bergson, Henri. L'évolution créatric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07.(アンリ・ベルクソン 創造的進化合田正人松井久訳, 東京, 筑摩書房, 2010). 국역본

Bowden, Sean. “Gilles Deleuze, a reader of Gilbert Simondon” De Boever, Arne; Murray, Alex; Roffe, Jon and Woodward, Ashley (dir.), Gilbert Simondon: Being and technolog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2, pp. 135-153.

Cogburn, Jon. “Gilbert Simondon: Being and technology”, http://ndpr.nd.edu/news/41310-gilbert-simondon-being-and-technology/.(参照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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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euze, Gilles et Guattari, Félix, L'anti-OEdipe, Paris: Éditions de Minuit, 1972. (ジル・ドゥルーズフェリックス・ガタリ アンチ・オイディプス宇野邦一訳, 東京, 河出書房新社, 1986). 국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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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ondon, Gilbert.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Aubier, 1958. 국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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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Grenoble: Jérôme Millo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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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 « L'amplification dans les processus d'information » Communication et information : Cours et conféences, éition établie par Nathalie Simondon ; et préenté par Jean-Yves Chateau, Chatou: Éditions de la Transparence, 2010, pp. 157-176.

Wiener, Norbert,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Cybernetics and society, New York: Da Capo Press, 1988. (ノーバート・ウィーナー 人間機械論鎮目恭夫池原止戈夫訳, 東京, みすず書房, 2007). 국역본

Williams, James. Gilles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A critical introduction and guid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국역본

遠藤繁行 シモンドンの個体化論する研究ノート――個体化操作および個体化探究方法としての転導」 『古典力対話力論集, 1, 2010, 39-52

廣瀬浩司 個体化作用からアナーキーな超越論的原理――シモンドンとドゥルーズ」 『情況3, 4巻第3, 2003, 209-224

米虫正巳 ドゥルーズ哲学のもうつの系譜について小泉義之鈴木泉檜垣立哉 (). ドゥルーズガタリの現在東京, 平凡}, 2008, 490-512

熊野純彦 西洋哲学史 古代から中世東京, 岩波書店, 2006

橘真一 ジルベール・シモンドンにおけるinformation概念について――ベルクソン受容という背景かららした考察中心」『年報人間科学, 33, 2012, 99-113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Simondon au pied du mur

Article paru dans Critique, n°706, mars 2006.

A propos de :
Gilbert Simondon, L’Invention dans les techniques. Cours et conférences, édition de Jean-Yves Chateau, Paris, Seuil, 2005, 348 p.

Deleuze l’avait bien vu : avec sa philosophie des techniques, « ce que Gilbert Simondon élabore, c’est toute une ontologie » (1). Mais pourquoi faut-il en passer par la machine de Gramme ? Pourquoi la turbine Guimbal, avec ses ailettes de refroidissement ? Pourquoi les techniques d’aérage et de transport dans les mines, la construction des voûtes, le transformateur électrique, la roue à eau ou le moteur à gaz ? La réponse est simple : qu’on prenne goût à ces « travaux pratiques », à ces descriptions d’ustensiles, d’appareils et de machines accompagnées de leurs planches de dessins, ou qu’on leur préfère les développements plus abstraits confiés aux parties récapitulatives, il n’y a pas d’autre moyen d’éprouver la consistance d’une intuition ou d’un concept que de travailler sur pièces, en suivant le fil des exemples. Il n’y a d’ailleurs pas de sens à parler des techniques en général, ou alors il s’agit d’autre chose - de l’homo faber, du « phénomène technique », ou encore de la fameuse « essence de la technique » à laquelle continuent de se référer bon nombre de discours de déploration. Pour que la pensée ne tourne pas à vide, il faut que quelque chose résiste. Il faut des objets qui vous arrêtent et vous forcent à les suivre. Et Simondon demande justement : qu’est-ce qu’un mur ?

La route et le mur : questions de méthode

Peut-on considérer un mur, un poteau, un chemin, comme des machines ? Seuls les paresseux verront là une question de mots. Il faut se mettre au travail pour voir ce qu’on y gagne, remarquer d’abord qu’« un poteau fléchit et revient élastiquement à sa position première » (p. 159), comme la plupart des constructions fonctionnant par flexions et tractions. Un poteau « travaille » donc, au sens mécanique, tout comme les murs, les immeubles ou les ponts. Un poteau est une « machine passive ». Simondon ajoute laconiquement : « un chemin aussi ». Libre à chacun d’imaginer le discours de la méthode qui choisirait de se régler sur une pareille idée. Un texte plus tardif fournit pourtant quelques éclaircissements au sujet de ce curieux chemin-machine. « Une voie de passage, pour exister selon la compatibilité interne, doit être douée de cohérence et de stabilité en tant qu’objet physique (imperméabilité, répartition égale des charges sur le terrain…) et la recherche de cette compatibilité interne est ce qui apparaît en premier lieu comme le but de l’invention consciente et volontaire… » (p. 298). Descartes savait bien qu’il n’est pas nécessaire de savoir où l’on va pour tracer un chemin (il voyait même là le principe d’une morale « par provision » : si vous êtes perdu en forêt, le mieux est encore d’avancer tout droit) ; mais encore faut-il s’assurer que le chemin soit viable en lui-même. L’invention concerne le tracé (en fonction des contraintes externes imposées par le mode de parcours, le relief et la composition des terrains), mais tout autant la consistance interne de la route. Et si la voie romaine est conçue comme un édifice réalisé bloc par bloc, misant sur la résistance des assises, nos routes modernes constituent des ensembles élastiques et continus, à la fois souples et imperméables. Chacune a sa manière de durer : « En vieillissant, la route romaine se dénivelle dalle par dalle tandis que la route contemporaine se déséquilibre en longues ondulations ou en plis. » La cohérence interne qui fait de la route une construction consistante et durable implique ensuite un « système de transfert » entre l’être vivant et son milieu : « la route, en tant que chaussée, développe autour d’elle, pour se raccorder au milieu sauvage, des médiations supplémentaires telles que ponts, viaducs, tunnels, haies d’arbres, dispositifs contre les avalanches, plantations préventives, parfois à de grandes distances, comme des postes avancés ». À mesure qu’il s’étend, le réseau des ouvrages d’art contribue ainsi à sa propre conservation et amélioration. Le développement de la cohérence interne de l’objet étend la portée du couplage entre le milieu et l’activité humaine, lequel soutient en retour, à travers différents relais, la consistance de l’objet. Les techniques de la route et du chemin tiennent lieu, plus généralement, de métaphore ou de paradigme pour les voies imprévisibles de l’invention et du progrès techniques. Inventer consiste à suivre le développement « naturel » d’une situation problématique où les éléments, en s’appuyant les uns sur les autres, entrent pour ainsi dire en résonance et se renforcent mutuellement (2). Première règle d’une méthode qui n’a déjà plus grand chose à voir avec celle des dénombrements et des chaînes de raisons : « Ce n’est pas chaque objet créé qu’il faut considérer à part des autres, mais l’univers de médiation qu’ils forment et en lequel chacun sert partiellement de moyen aux autres. » (p. 299-300). Quelques réflexions suscitées par un pan de mur valent mieux ici que les radotages scolaires sur la rationalité technicienne et le projet cartésien de se rendre « comme maître et possesseur de la nature » : « Descartes pense la construction d’un immeuble comme celle d’une machine simple, c’est-à-dire comme l’organisation d’un système linéaire de transfert par étapes ; le roc supportant les fondations, le certum quid et inconcussum, est transféré par assise jusqu’aux combles ; la construction vaut la plus faible de ses assises, comme une chaîne vaut ce que vaut le plus faible de ses maillons ; ce mode segmentaire et additif de construction s’oppose au système des parements enserrant un blocage, qui peut donner naissance à des composantes horizontales provoquant un détriplement de la muraille (mur "soufflé") ; autrement dit, un mur ne peut être défini comme un couple de forme et de matière mise en forme : il se produit un travail des éléments les uns par rapport aux autres. » (p. 160).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3) montrait déjà que les objets et les réseaux techniques sont le siège de processus d’individuation aussi réels, c’est-à-dire aussi concrets, que ceux qu’on observe dans les organismes vivants. Mais l’individuation, comme le rappelle Deleuze, n’est pas « coextensive à l’être » (4) : elle doit être « situable, déterminable par rapport à l’être ». Et si l’enquête ouverte par la thèse de doctorat prend toute son ampleur dans les livres suivants, jusqu’à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5) qui ambitionne d’embrasser les grandes formes du rapport de l’homme au monde et à la culture, envisagés du point de vue physique, vital, et psycho-social, il reste que toute reprise générale des thèmes simondoniens qui ne repart pas des configurations singulières où naissent les problèmes risque de donner lieu à une pataphysique indigeste où les mots magiques de « transduction », de « métastabilité » ou d’« allagmatique » viennent habiller de robustes évidences touchant aux rapports de l’individuel et du collectif dans la nature, l’art et la politique. Le meilleur remède à cette tentation est sans doute de lire Simondon. Durant les quelques années où il fut professeur de philosophie au lycée de Tours, il eut aussi pour charge d’enseigner la physique. On rapporte qu’il fit alors construire par une de ses classes un prototype de téléviseur. Plus tard, dans ses livres comme dans ses cours, il n’hésitait pas à entrer dans l’épaisseur des réseaux techniques, dans la durée propre des objets et de leurs lignées évolutives. Il faut le suivre dans les méandres de ses études de cas, il faut rejoindre la classe, ou rester à la porte. Le recueil édité part Jean-Yves Chateau complète utilement le corpus déjà publié en réunissant un cours d’agrégation donné en 1968-1969 sur « l’invention et le développement des techniques » (le thème du concours, cette année-là, était « la science et la technique », et Simondon revient à cette occasion, dans quelques pages denses et claires, sur la grande question de l’insertion des techniques dans la nature), une conférence donnée en 1971 sur « l’invention dans les techniques », mais aussi des extraits de textes plus spécialement consacrés aux aspects psychologiques de l’invention : « Imagination et invention » (1965-1966), « La résolution des problèmes » (1974), « Invention et créativité » (1976). On se doute qu’un des enjeux importants de ces textes est de voir comment s’y concilient, précisément, l’ontologie des objets techniques et cette psychologie de l’invention. On se souviendra, à cette occasion, qu’à l’Université de Paris V à laquelle il fut rattaché de 1963 à 1983, Simondon avait fondé et dirigé un centre de recherches au titre pour le moins intriguant : le « laboratoire de psychologie générale et technologie ». De quoi s’agissait-il ?

Qu’est-ce qu’un objet technique ?

Jean-Yves Chateau a raison de le rappeler dans la longue introduction qui ouvre ce recueil : le souci de l’invention, chez Simondon, n’est pas une manière de dramatiser l’histoire des techniques, c’est une véritable méthode de recherche et d’analyse - mieux, un critère de ce qui est proprement technique, de ce qui fait de la technique « un ordre original de réalité » (p. 14). Aussi l’invention dans le domaine des techniques ne relève-t-elle pas à proprement parler d’une investigation psychologique « au sens habituel du terme », comme le précise Simondon (p. 332). Elle ne se confond pas avec la « créativité » de l’inventeur au travail ; elle ne peut apparaître que rétrospectivement, dans les gestes matérialisés, stabilisés en procédés, dans les objets inventés et les indices matériels de leur élaboration (schémas, prototypes, etc.). On ne lit pas à livre ouvert dans l’esprit des inventeurs : l’esprit est une boîte noire. Qu’il s’agisse du fil à couper le beurre ou de la turbine Guimbal, l’invention doit se lire dans les « traces ». La psychologie de l’invention technique suppose donc une forme d’archéologie, et le sujet de l’invention, qu’il soit individuel ou collectif, laborieux ou génial, est toujours un sujet reconstruit à travers ses objets - un sujet technologique plutôt que psychologique. Ainsi la psychologie se confond finalement avec une phénoménologie des objets techniques dont les chemins ne cessent de recroiser ceux de la technologie et de l’histoire des techniques. Mais elle n’est pas séparable non plus d’une ontologie qui interroge le « mode d’existence » de l’objet technique à partir de ce qui fait proprement sa technicité (6). On objectera peut-être ici qu’à moins d’être technicien ou technologue, nous n’avons quasiment jamais affaire à des « objets techniques », mais d’emblée à des ustensiles ou à des machines dont le mode d’être n’est pas séparable de modes d’emploi ou d’usages particuliers. Il y a trois manières de répondre à cela. D’abord, l’objection concède à Simondon le point essentiel, à savoir que les objets techniques n’ont pas l’évidence qu’on leur prête habituellement. À strictement parler, nous ne savons pas ce qu’est un objet technique ; nous ignorons ce qu’il y a de spécifiquement technique dans les objets artificiels dont nous usons le plus souvent sans y penser. L’objet technique est-il d’ailleurs un objet ? Les catégories ordinaires qui nous servent à déployer les modes de l’objectivité ne nous masquent-elles pas l’essentiel ? Ensuite, au niveau fondamental où Simondon prend les choses, le point de vue de la fonctionnalité ou de l’utilité nous détourne de ce qui est proprement technique. L’objet technique n’est d’ailleurs pas nécessairement un outil ou un instrument : il peut être un ustensile, ou une machine présentant des degrés de complexité variables. Or un balai, un aspirateur, peuvent bien servir tous deux à ramasser de la poussière, cet usage commun ne les rapproche pas davantage que le fait de voisiner dans un placard. Enfin, si l’outil et l’instrument remplissent en effet une fonction médiatrice, une fonction de couplage entre un organisme et son milieu, l’essentiel pourtant n’est pas dans ce couplage et les diverses fonctions qu’il remplit : fonction de prolongement (cas de la pince à long bec), fonction de transformation (bras de levier de la pince), fonction d’isolement (pince gainée). Leroi-Gourhan, parmi d’autres, a produit des descriptions et des classifications précises des formes fondamentales de la médiation opérée par l’outil. Cependant, tout reste à faire pour ce qui est d’isoler les critères de la « technicité » et de cerner la nature de l’objet technique. Car « la fonction relationnelle n’est pas la seule : même au niveau le moins élevé, les objets techniques ont une logique interne, une auto-corrélation sans laquelle ils ne pourraient exister » (p. 91).

L’idée est simple. Une pièce du meilleur métal, capable de concentrer avec le minimum de perte l’action du bras et de la main sur la surface d’une tête de clou, jointe à un manche excellent, offrant une prise idéale, ne seraient d’aucune utilité et ne feraient qu’un médiocre outil s’ils ne s’emmanchaient pas bien. Ce qui compte dans le marteau, du point de vue de son être technique, n’est pas tant le service qu’il rend, la « prise » qu’il offre à un organisme sur son environnement, ni la série de couplages qu’il implique entre le bois, le clou et le corps du travailleur ou du bricoleur : « le problème crucial est celui de l’emmanchement » (p. 91). En effet : « la nature fournit une grande abondance de manches solides, en bois ou en os ; la métallurgie est capable de produire, depuis des millénaires, des fers robustes, des tranchants tenant l’affûtage. Pourtant, même de nos jours, le point faible de beaucoup d’outils (faux, marteaux, pioches) est le raccord entre le manche et le fer ; les trois modes principaux d’emmanchement, soie, collet, douille, avec leurs variantes et certaines adjonctions comme les ligatures, les frettes ou coins, montrent qu’il y a un problème général de l’auto-corrélation dans le fonctionnement interne des outils, qui existe même s’il est invisible et ne consiste qu’en contraintes, flexions, ou torsions invisibles ; l’outil "travaille" à l’intérieur de lui-même, entre ses différentes parties qui agissent les unes sur les autres… » (p. 91)

Qui pense « concret » ?

Si l’objet technique n’est pas un objet quelconque, s’il n’est pas nécessairement outil ou instrument, où faut-il donc le chercher ? On devine déjà la réponse de Simondon : elle consiste à remarquer, pour commencer, que l’« auto-corrélation » si clairement illustrée par l’emmanchement ne désigne pas seulement une propriété que présentent certains objets, mais plus profondément, un processus dans lequel ces objets se laissent discerner. L’objet technique, à son tour, ne se définit pas par une structure donnée, ni par les usages auxquels on le destine ; il est d’abord « ce dont il y a genèse » (7). « La genèse de l’objet technique fait partie de son être. » Il n’y a donc pas d’autre solution, pour celui qui veut suivre les chemins de l’invention technique, que de ressaisir un objet présent à chaque étape de son devenir, comme une « unité de devenir » manifestée le long des lignes de « concrétisation » qui l’adaptent de mieux en mieux à lui-même, selon un principe de « résonance interne ». Inventer, c’est résoudre des problèmes ; et ces problèmes se ramènent, de manière générale, à un seul : éliminer le « résidu d’abstraction » qui maintient l’objet en lutte avec lui-même, qui perpétue les artefacts et les bruits de fond locaux, qui l’empêche enfin d’être aussi cohérent et unifié - aussi nécessaire - qu’il pourrait. L’objet technique sera d’autant plus individualisé qu’il sera mieux unifié, c’est-à-dire rendu intrinsèquement homogène par la convergence de plus en plus grande des directions fonctionnelles hétérogènes qui le traversent. C’est pourquoi il n’y a en réalité rien de plus abstrait qu’un objet artisanal fait « sur mesure » : « l’objet technique sur mesures est en fait un objet sans mesure intrinsèque ; ses normes lui viennent de l’extérieur : il n’a pas encore réalisé sa cohérence interne » (8). L’objet artisanal est d’autant moins individué, et d’autant moins nécessaire comme objet technique, qu’il paraît plus spécialement ajusté aux contraintes circonstancielles imposées par tel ou tel usage. Certains verront dans cette critique du « sur mesure » une forme d’anti-bergsonisme. Bergson ne définissait-il pas justement l’intuition comme une pensée « sur mesure », qui épouserait les sinuosités de son objet en s’efforçant de ne pas « tailler trop large » et de l’habiller pour ainsi dire de l’intérieur ? Il faut pourtant reconnaître qu’on aurait alors affaire à un anti-bergsonisme plutôt paradoxal, puisqu’il partagerait avec le bergsonisme l’essentiel de ses motifs : notions de problème, d’invention et d’intuition, d’individuation par différenciation, concrétisation, importance d’une saisie immanente de la genèse, insuffisance des pures analyses de structures, etc. Sans doute Simondon reproche-t-il à Bergson de proposer avec l’« élan vital » un remède trop violent aux facilités du finalisme. Le mouvement de différenciation par dissociations de tendances antagonistes que désigne l’élan vital doit être subordonné à un processus plus englobant, celui de la structuration individuante. Simondon parle d’un « schème génétique plus primitif que les aspects opposés de l’adaptation et de l’élan vital, et les renfermant tous deux comme cas-limites abstraits » (9). Ainsi l’aspect intensif, explosif et « cascadant » (10) des processus d’individuation, qui avait si vivement retenu l’attention de Deleuze, tend à passer au second plan. Si l’objet technique émerge d’un champ pré-individuel fait de polarités et de tensions entre des ordres hétérogènes, il n’atteint son unité individuelle qu’en refoulant ce que les singularités de son devenir comportent encore de disparate. Il ne s’individualise qu’en s’homogénéisant (11). Cependant, ce genre de processus se distingue encore par une manière singulière de durer. C’est pourquoi l’invention dans le domaine des techniques oblige à un exercice d’intuition contrariée. Retracer les lignes de concrétisation de l’objet technique, c’est, pour retourner contre elle-même une formule bergsonienne, ressaisir du « tout fait » se faisant. Pour peu qu’on soit sensible à ce que la vie des techniques renferme d’invention et de créativité, ces objets ne se réduisent justement pas à des assemblages de matière inerte ; ils n’existent comme objets techniques qu’à travers leur propre genèse (12). Simondon nous invite donc à penser les techniques « en durée », sub specie durationis. Et l’on ne s’étonnera pas que la pensée de l’invention suppose, selon lui, quelque chose comme une « intuition réflexive » qui suit son objet et s’individualise avec lui : « seule l’individuation de la pensée peut, en s’accomplissant, accompagner l’individuation des êtres autres que la pensée ; […] nous ne pouvons, au sens habituel du terme, connaître l’individuation ; nous pouvons seulement individuer, nous individuer, et individuer en nous… » (13). Comment mieux définir une pensée « sur mesure » ? Et cependant, s’il s’agit bien d’une intuition réflexive, la pensée ne se contentera pas « des intuitions et des schémas opératoires purement concrets » (14) incorporés dès l’enfance par l’artisan ou le technicien. Un rapport enfin « majeur » aux techniques passe par une réflexion sur la culture matérielle et ses trames symboliques (signes, schémas, diagrammes, etc.). Les cours et les conférences témoignent de cette volonté de dégager sur pièces les principes d’un « schématisme de la connaissance technologique » (15). Ils permettent aussi de mieux saisir, dans une sorte de vue synoptique, certaines limites du projet.

L’usage : un angle mort

Voici le problème. La réflexion sur les objets et les réseaux techniques oscille sans cesse entre deux pôles : celui de l’« auto-corrélation », qui concrétise un objet et le rend viable (problème de l’emmanchement), et celui de la « médiation » (« adaptation » ou « couplage ») par lequel cet objet vient s’apparier à un « milieu associé » pour être dirigé par un opérateur ou un flux d’information (16). Y a-t-il encore une place pour penser l’invention des usages eux-mêmes - des usages inventifs qui échapperaient aux canons du « user profiling » ? On peut en douter. Simondon se méfie trop de la lecture anthropologique des techniques en termes de fonctionnalité globale et de moyens ajustés à des fins. Ni l’utilité, ni a fortiori l’usage en général, ne sont en mesure, selon lui, de fournir un critère de technicité. L’usage est une catégorie instable, et peut-être inconsistante (17) : tantôt il connote l’indétermination (en témoigne la diversité des formes qui peuvent convenir à un même usage), tantôt au contraire il est du côté de l’hyperspécialisation ou de la standardisation (limite de l’adaptation). Maintenues à égale distance des figures de l’inventeur, du fabricant et de l’usager, les techniques finissent par revêtir une apparence quelque peu spectrale où les processus d’individuation sans sujet sont bien souvent aussi des fonctionnements sans usage. Plus exactement, l’usage n’est jamais un problème : c’est au mieux une affaire d’adaptation. Simondon le dit très tôt, et sa position ne variera pas beaucoup par la suite. Par un renversement de perspective typique de la lecture « interne » qu’il privilégie, la nécessité conquise par l’objet technique au terme de son processus de concrétisation a pour corollaire une sorte de domestication de l’usage. Avec le développement du machinisme, tout se passe comme si l’usage était obligé de se faire aux objets, de se mouler sur eux : « les besoins se moulent sur l’objet technique industriel, qui acquiert ainsi le pouvoir de modeler une civilisation . C’est l’utilisation qui devient un ensemble taillé sur les mesures de l’objet technique ». En somme, toute l’invention est du côté de l’objet et de ses métamorphoses ; c’est aux usages de s’adapter.

Couplage ou agencement ?

Ce n’est pas sans lui faire un peu violence que Deleuze a pu mobiliser les analyses de Simondon pour mettre au point, avec Guattari, un concept d’agencement machinique, qui a justement pour effet de déplacer la question de l’invention (19) des techniques elles-mêmes aux ensembles à la fois matériels et idéels, psychiques et sociaux, dans lesquels elles sont prises avec leurs usages. Ce concept d’agencement répond à un problème précis : comment rendre compte des différences qui marquent la spécificité de l’arme par rapport à l’outil, sans faire dépendre ces différences de facteurs externes, d’ordre sociologique ou idéologique ? Si l’arme et l’outil n’ont pas de caractères distinctifs intrinsèques, il n’y a pas d’autre manière de les différencier que de rapporter l’objet générique (bâton, hache, ou autre) à un « modèle » - une « forme de vie », aurait dit Spengler avant Wittgenstein -, qui vient le qualifier en l’associant à des gestes, mais aussi à des valeurs intensives, un régime particulier d’affects, des vecteurs de vitesse, etc. Ce que Deleuze et Guattari appellent « machine de guerre » n’a pas d’autre fonction. L’outil suppose le travail ; les armes supposent la chasse, ou la guerre. Et les traits formels de l’agencement machinique agissent comme des contraintes internes sans être pour autant intrinsèques (20). En résumé : « le principe de toute technologie est de montrer qu’un élément technique reste abstrait, tout à fait indéterminé, tant qu’on ne le rapporte pas à un agencement qu’il suppose. Ce qui est premier par rapport à l’élément technique, c’est la machine : non pas la machine technique, qui est elle-même un ensemble d’éléments, mais la machine sociale ou collective, l’agencement machinique qui va déterminer ce qui est élément technique à tel moment, quels en sont l’usage, l’extension, la compréhension…, etc. » (21) Or Simondon pourrait à la rigueur s’accommoder de l’idée que l’élément technique n’est reconnu comme tel qu’à travers un usage, qui renvoie lui-même à une machine sociale plus vaste. Mais il n’irait certainement pas jusqu’à dire que l’objet technique reste « abstrait » et même « tout à fait indéterminé » en dehors de son insertion dans de tels usages. Les objets selon lui n’attendent pas d’être utilisés pour fonctionner ; ils se différencient eux-mêmes, en fonction de normes intrinsèques. Sans doute la hache n’existerait pas si nul n’en avait usage, mais avant d’être un outil ou une arme, il faut bien que la hache puisse hacher. Cependant, Deleuze et Guattari formulent un nouveau problème ; il est naturel qu’ils découpent les choses autrement. Pour embrasser pleinement la logique de l’agencement, pour passer du couplage aux branchements hétérogènes, du milieu associé au jeu des alliances, de la mécanologie à la stratégie, il faut commencer par faire passer au premier plan, non pas l’intégration fonctionnelle qui concrétise un objet ou stabilise un procédé, mais les équilibres « métastables » et les ruptures de symétrie impliquées dans les processus de transformation par « transduction » ou modulation de proche en proche. C’est ainsi que Deleuze retient surtout de Simondon une logique du « problématique » qu’il interprète comme une logique du disparate, du déphasage ou du « polyphasage ». Aux analyses des processus de convergence et d’unification, il joint cet avertissement : la « matière-flux » expressive, le « phylum machinique » qui traverse les mondes techniques, ne se réalise pas sans se diviser et se différencier, il n’y a pas d’individuation sans hétérogénèse. En somme, la différence entre l’objet et ses usages multiples ne lui est pas extérieure ; elle passe déjà au sein même de l’objet pour l’emporter ailleurs.

L’invention des usages

Simondon n’aurait probablement pas souscrit à cette métaphysique de la matière-flux : non pas qu’il se défiât de toute métaphysique, mais parce que son propre projet le conduisait du côté d’une ontologie différente, une ontologie des processus d’individuation dont Deleuze avait perçu très tôt la force et les limites. Du pré-individuel au trans-individuel, c’est l’individuation qui demeure en effet l’enjeu central de cette ontologie. Et cela ne va pas sans une « vision morale du monde » (22) : dans tous les cas, « le pré-individuel reste et doit rester associé à l’individu ». Tout se passe alors comme si cette exigence conduisait Simondon à n’accorder aux usages qu’une fonction résiduelle et marginale dans la transformation des objets ou des dispositifs techniques sur lesquels ils se greffent. S’agit-il de préserver l’individu technique d’une impureté essentielle de l’usage, d’un principe d’illimitation qui intensifierait les zones d’instabilité au point de menacer le processus d’individuation ? S’agit-il en somme de défendre l’intégrité de l’objet technique contre des usages polymorphes et potentiellement pervers ? Cette interprétation n’est pas tenable : les analyses de Simondon suggèrent au contraire une subordination structurelle des usages aux normes techniques immanentes aux objets et à leurs médiations. Si ce constat recouvre une injonction morale, ce ne peut être qu’à travers l’idée même d’individuation qui oriente toute la description. Rien d’étonnant à ce que Deleuze, de son côté, cherche à revaloriser l’usage : il y voit la possibilité de reconduire les formes individuées au champ de singularités pré-individuelles qui les borde, comme la guerre « hoplitique » décrite par Marcel Détienne associe le bouclier à deux poignées aux intensités affectives et aux lignes de vitesse qui parcourent ce nouvel agencement d’infanterie qu’est la phalange. Derrière la claire découpe des fonctions se trament des devenirs plus ou moins louches ; ainsi « l’Éros homosexuel de groupe » tend à remplacer « l’Éros zoosexué du cavalier » (23). Les techniques et les usages qu’elles libèrent en sont parties prenantes. Le déni de l’usage dans les analyses de Simondon doit se comprendre autrement, à partir du caractère d’indétermination foncière associé à l’usage, indétermination dont on a vu qu’elle était parfaitement compatible avec le phénomène d’hyper-adaptation ou de standardisation. Comment concevoir en effet, sur de telles bases, que l’usage puisse enclencher un processus de différenciation autrement que de manière accidentelle et marginale ? Mais alors la question se déplace : il ne s’agit plus de se prononcer sur une « vision morale du monde » qui valoriserait l’individuation aux dépens des pointes intensives de l’agencement (« lignes de fuite », « déterritorialisation ») ; il s’agit tout simplement de savoir si la théorie est en mesure de rendre compte de certains aspects saillants de l’évolution des techniques, et de la place qu’y tiennent encore l’artisan et le bricoleur, figures techniciennes que Simondon a tendance à délaisser pour celle de l’ingénieur (24).Or au-delà de la prise - cette prise qu’offre l’outil à l’organisme qui s’oriente dans son milieu -, il y a bien quelque chose comme la reprise. L’art du siècle passé n’a cessé d’en jouer en même temps qu’il s’intéressait aux machines. Le détournement a encore ses adeptes. Mais la reprise doit d’abord s’entendre au sens où l’on reprise des chaussettes, et par extension au sens où l’on « customise » un vélo, une automobile ou une configuration audio-visuelle : elle suppose une intervention directe sur un dispositif matériel, des gestes susceptibles de libérer des effets et de précipiter des devenirs d’un genre nouveau. Le marteau peut enfoncer des clous ; il peut aussi frapper des cloches et fracasser des crânes. C’est une banalité de le rappeler. D’autres faits, en revanche, semblent opposer plus de résistance. Ainsi la voiture peut servir à se déplacer rapidement, mais elle peut tout aussi bien se transformer en discothèque ambulante en se trouvant équipée d’un « sound system » suffisamment puissant (pratiques du « tuning » (25)). S’agit-il de la même voiture ? Le plateau d’une platine de disques peut tourner à vitesse uniforme ; il peut aussi être retenu par la main du DJ qui en inverse le mouvement pour replier la musique sur elle-même et la mettre en boucle. Que se passe-t-il au juste lorsque la machine individuée (qui peut être aussi un synthétiseur, une table de mixage ou une boîte à rythme) s’anime au point de devenir le sujet de la musique, et de modifier en retour ses propres normes techniques (26) ? Lorsque les ressources inventives du bricolage finissent par infléchir la logique de la production industrielle ? Quelles sont, plus généralement, les conditions qui définissent une pratique d’expérimentation créative sur des objets ou des dispositifs techniques ? La métaphysique de la matière-flux qui redouble chez Deleuze la phénoménologie des agencements machiniques est-elle le prix à payer pour rendre visible et pensable la part d’invention qui entrent aussi dans l’appropriation ou le détournement des techniques ? On peut en discuter. Mais c’est justement là que Simondon nous laisse seuls face au mur.

Elie DURING


Notes

(1) Gilles Deleuze, «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 in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Éditions de Minuit, 2002, p.124.

(2) Deleuze note que « dans la dialectique de Simondon, le problématique remplace le négatif » (art. cit., p. 122). Voir également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aris, P.U.F., 1968, p. 316 s.

(3)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Aubier, 1958 (rééd. 1989), désormais abrégé par MEOT.

(4) Gilles Deleuze, art.cit., p.121.

(5) Paris, Aubier, 1989.

(6) Sur la manière dont s’articulent ces différents registres (technologie, histoire des technique, ontologie de l’objet technique), on se reportera à l’étude de Xavier Guchet, Les Sens de l’évolution technique, Paris, Éditions Léo Scheer, 2005 (voir la recension qu’en donne B. Bensaude-Vincent dans ce même numéro).

(7) MEOT, p. 20.

(8) MEOT, p.24.

(9) MEOT, p.156.

(10) 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op. cit., p. 317.

(11) Au lieu de dissociations de tendances, l’évolution des techniques offre l’exemple de toutes sortes de dédoublements assurant une meilleure adaptation à la chose ou à l’opérateur (le manche et le fer, en général, mais aussi le maillet et le ciseau à bois, le marteau et le tranchet, etc.). Ces dédoublements appellent un progrès dans le sens de l’auto-corrélation ou de la convergence des fonctions. La différenciation interne a donc toujours pour contrepartie une réduction de l’hétérogénéité à un niveau supérieur. Cela est fort clairement expliqué dans le texte sur « l’invention et les techniques », p. 233 s.

(12) À un autre niveau, celui de l’histoire des techniques, se conjuguent deux régimes de durée. Le temps de l’adaptation est organique, il conserve « l’allure temporelle de la relation entre organisme et milieu » (p. 102) ; mais le temps de l’invention est problématique : « le progrès technique interne ne peut guère être continu ; il se fait par sauts, par étapes discontinues » (p. 103).

(13)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Grenoble, Jérôme Millon, 1995, p. 34.

(14) MEOT, p. 90.

(15) Sur le sens de cette « intuition réflexive », son rapport au schématisme kantien et à l’intuition bergsonienne, voir la section intitulée « Invention technique et pensée réflexive » au chapitre V du livre de Xavier Guchet, op. cit., p. 242 s. Ces questions sont aussi au cœur du livre de Jean-Hugues Barthélémy, Penser l’individuation : Simondon et la philosophie de la nature, Paris, L’Harmattan, 2005.

(16) L’homo faber doué d’« intention fabricatrice » était encore un acteur. Simondon, qui abandonne le modèle intentionnel au profit d’une logique matérielle de l’invention, ne voit plus que des opérateurs. Sur ce point, voir Bernard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I. La faute d’Épiméthée, Paris, Galilée, 1994, p. 82 s.

(17) MEOT, p.19.

(18) MEOT, p. 24.

(19) Car « un agencement est une véritable invention »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Paris, Éditions de Minuit, 1980, p. 506).

(20) Ibid., p. 495.

(21) Ibid.

(22) Gilles Deleuze, art. cit., p. 124.

(23) Mille plateaux, op. cit., p. 496-497.

(24) Au contraire, Deleuze et Guattari se réfèrent constamment à la figure de l’artisan pour annoncer le règne d’une pensée itinérante et ambulante, capable de suivre les matières et les flux (ibid., p.509).

(25) Sur ce point et plus généralement sur les dispositifs d’amplification, voir Christophe Kihm, « La musique et l’espace », Art Press, n°308, janvier 2005, p. 46-52.

(26) Voir Bastien Gallet, « Le jour d’aujourd’hui… », in Fresh Théorie, Paris, Éditions Léo Scheer, 2005, p. 216 s., sur l’insertion des gestes créatifs dans les dispositifs « insaturés ».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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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 Novembre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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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copie

Notes de lecture
par Philippe Sarro sarro.philippe@voila.fr

Retours en arrière.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Méot 1958

Comme promis voici un texte sur Gilbert Simondon et son livre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 Il va peut être vous paraître provocateur vis à vis des thèses sur le néo-darwinisme que vous développer sur les automates intelligents. Ce sera à vous de juger.

Merci au contraire de nous faire connaître des auteurs peut-être un peu oubliés aujourd'hui, dont la contribution à l'évolution de la pensée contemporaine sur les systèmes a été et demeure importante. JPB-CJ

Gilbert SIMONDON
(1924-1989)

Eléments de biographie

Né à Saint-Etienne le 2 octobre 1924, Gilbert Simondon fit ses études secondaires au lycée de sa ville natale, et eut tôt l’occasion de fréquenter le milieu industriel, de discuter avec des ingénieurs, de s’intéresser à l’invention scientifique et technologique et à la manière dont les innovations sont reçues au sein de la société.

Elève de khâgne au lycée du Parc à Lyon, élève de l’ENS de 1944 à 1948, agrégé de philosophie, il fut professeur de classe terminale au lycée Descartes de Tours (1948-1955), où il lui arrivait de faire le cours de physique aussi bien que celui de philosophie, et où il avait installé dans les sous-sols une présentation de machines au fonctionnement desquelles il initiait ses élèves. En 1955 il devint assistant à l’Université de Poitiers. Sa double thèse de doctorat d’Etat (sur l’individuation, sur les objets techniques), soutenue en 1958, lui permit de devenir professeur des universités: à la Faculté des lettres de Poitiers (1960-1963), à la Faculté des lettres et sciences humaines de Paris (1963-1969), à l’UER de psychologie de l’Université de Paris-V (1969-1984). A Paris, il avait son "laboratoire de psychologie générale" (en fait, un laboratoire de technologie) à l’Institut de psychologie Henri Piéron, 28 rue Serpente. La dernière partie de sa vie fut assombrie par une souffrance psychique, qui le contraignit à prendre une retraite anticipée. Il mourut à Palaiseau le 7 février 1989.

Ces principaux ouvrages ont pour nom «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 (1964), «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 (1989) constituant les 2 parties de sa thèse principale de doctorat (1958) et surtout «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 (1958) la thèse secondaire.

Dans le postmodernisme le philosophe Simondon apparaît plus optimiste qu’un Martin Heidegger (La question de la technique) avec son concept d’Arraisonnement (le Gestell) et pour qui la technique ne sert que la volonté de puissance et n’est qu’un moyen d’augmenter le faire en faisant oublier l’Être. Il est aussi opposé à la technophobie d’un Jacques Ellul (La technique où l’enjeu du siècle) pour qui la culture technique n’existe pas, mais constitue un abus de sens et un non-sens. Pour Ellul la techno-science et le système technique est autonome et anti-humaniste (Gilbert Hottois dans sa conférence de L’Université de tous les savoirs.)

L’œuvre de Simondon aura influencée et inspiré des auteurs tels que Jean Baudrillard (Le Système des objets, 1968), Georges Friedmann (La Puissance et la sagesse, 1970), Abraham Moles (Théories des objets, 1972) ainsi que Gilles Deleuze (L’image et le mouvement) et Bernard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Son œuvre n’est pas sans résonance avec celle de Leroi-Gourhan (Milieu et technique). Elle n’est pas non plus sans parenté avec le mouvement auquel appartient « le groupe Ethnotechnologie » qui donnera naissance à la revue « Culture techniques » et plus tard les revues « Terminal » et « Les cahiers de Médiologie » de l’emblématique Régis Debray. Ceci peut être vu comme une évolution transductive qui est un concept simondonien qui sera développé plus loin.

Pourtant son oeuvre reste méconnue et sous estimée selon Hubert Curien lors d’un colloque qui lui a été consacré en 1992.

Ses idées et concepts se retrouvent aussi implicitement en sociologie de l’innovation au travers de la théorie de l’acteur réseau connue sous l’approche de la traduction. (Madeleine Akrich, Michel Callon, Bruno Latour) Cette dernière essaie de montrer les conflits sociaux, les interactions, les rapports de forces, les conflits qui se manifestent lors des processus d’innovations. Pour Simondon la technique doit être plus vue comme une médiatrice d’homme à homme ou d’homme à nature plutôt qu’un outil ou qu’un instrument qui plus est, au service d’une idéologie politique, sociale ou économique.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MEOT, 1958)

Simondon a divisé «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 (MEOT) en trois parties: (1) Genèse et évolution des objets techniques; (2) L'homme et l'objet technique; et (3) Essence de la technicité. Cette dernière partie se subdivise en trois chapitres: (I) Genèse de la technicité; (II) Rapport entre la pensée technique et les autres espèces de pensée; (III) Pensée technique et pensée philosophique.

La première partie est consacrée au problème de civilisation qui découle du malaise de ses contemporains envers la technique, allant jusqu’à la technophobie ou la technofolie. Il l’explique par la méconnaissance de l’objet technique. Il écrit « Cette étude est animée par l'intention de susciter une prise de conscience du sens des objets techniques. La culture s'est constituée en système de défense contre les techniques; or, cette défense se présente comme une défense del'homme, supposant que les objets techniques ne contiennent pas de réalité humaine. » Et ceci amène à « l’idolâtrie de la machine », qui fait un mythe du robot et de l’automatisme. Il rajoute « En fait, l’automatisme est un assez bas degré de perfection […] Le véritable perfectionnement des machines, celui dont on peut dire qu’il élève le degré de technicité, correspond non pas à un accroissement de l’automatisme, mais au contraire, au fait que le fonctionnement d’une machine recèle une certaine marge d’indétermination. C’est celle-ci qui permet à la machine d’être sensible à une information extérieure. » Ce sont les " vraies machines ", saisies dans leur statut ontologique même. On dirait aujourd’hui automate intelligent. La machine est alors vu comme ce qui augmente la néguentropie et ce qui, comme la vie et avec la vie, s’oppose au désordre et à la dégradation de l’énergie. Elle devient stabilisatrice du monde.

Simondon va alors analyser la genèse ( l'ontogenèse ) de l’objet technique en définissant le processus de concrétisation par lequel il acquiert une sorte d’autonomie et une forme d’individualité. Il s’invente indépendamment des déterminations économiques historiques, sociales de tout genre. L’objet technique a quand même une présence et une réalité humaine qui survit en lui « C’est de l’humain cristallisé ». Ce qui permet une coprésence et une coévolution, sans relation de domination de l’un sur l’autre, de l’homme et de la machine dans une sorte de société, de milieu associé qui évolue aussi corrélativement. Simondon est confiant dans le progrès technique qu’il voit comme libérateur et émancipateur par rapport à la nature, à la matière mais aussi par rapport aux asservissements politiques et idéologiques.

Puis pour aplanir le problème du malaise dans la civilisation provoquant la technophobie, il envisage dans les parties suivantes, avec une vision anthropologique  génétique, une culture technique qui exige le développement d’une Technologie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c’est à dire une science inductive des schèmes techniques, de leurs genèse, de leurs relations, de leurs rapports aux hommes. Mais pour Simondon cette Technologie ne prend pas assez en compte les modes de pensées et d’êtres-au-monde non techniques (la magie, la religion, l’esthétique). D’où les résistances, les blocages. Ici par parenthèse, je rappellerais la tentative d’un Bruno Latour ( 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 1991) de créer ces dernières années une Anthropologie symétrique. Mais pour Simondon, la seule analyse de la genèse des objets techniques et de la connaissance de leurs modes d’existence ne suffisent pas à solutionner le malaise culturel qu’ils suscitent.

Ce qui l’amène dans la dernière partie, à considérer une philosophie du devenir et de l’individuation comme seule capable de réconcilier et d’intégrer la réalité technique à la culture universelle, afin de vivre en amitié avec les machines et les techniques, d’autant si elles doivent être appliquées à l’humain.

Individuation

Le concept d’individuation; technique mais aussi en parallèle, physique, biologique humaine et psychique, est développé plus amplement dans le livre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 Le trait commun entre ces individuations est qu’une forme émerge d’un fond. La forme prend en un point puis elle se propage, c’est l’opération de transduction qui est « individuation en progrès ». Ou selon la définition de G Simondon, « une opération physique biologique, mentale, sociale, par laquelle une activité se propage de proche en proche (à partir d’une préindividualisation) à l’intérieur d’un domaine, en fondant cette propagation sur une structuration du domaine opérée de place en place: chaque région de structure constituée sert à la région suivante de principe de constitution, si bien qu’une modification s’étend ainsi progressivement en même temps que cette opération structurante. » Chaque place ou phase ou palier est alors en équilibre métastable et possède un potentiel d’énergie de création de nouvelles formes ou un potentiel d’invention de nouvelles solutions, sans pour autant éliminer les anciennes. « L’individu est ce qui a été individué et continue à s’individuer. » Pour un René Thom (colloque, 1994) la transduction sera la transformation génératrice de cet « étalement de l’être. »

Mais d’après Anne Fagot-Largeault (Colloque, 1994) le schéma évolutif de Simondon ne comporte ni pression de mutation, ni pression de sélection, les solutions inadéquates ne sont pas éliminées. Le néo-darwinisme lui reste étranger, mais il voulait donner du sens au devenir sans retomber dans l’hypothèse créationniste. Il serait plutôt néo-Lamarckien considérant que l’individu ou l’organisme en formation participe activement à son remaniement, à sa réorganisation. Toujours selon Fagot-Largeault, ce paradigme l’emporterait en matière d’évolution technique (génomique ou autre) sur le néodarwinisme qui reste bien entendu valable pour  l’évolution naturelle. Car en matière de technique c’est une évolution dirigée par l’homme, même si cette individuation dirigée l’est de façon spontanée et non volontairement. Je suppose que ces remarques ne resteront pas sans discutions sur ce site consacré aux automates intelligents.

Gilbert Hottois quant à lui (conférences UTLS), voit Simondon comme un homme de son temps qui s’arrête devant la possibilité d’une postmodernité techno-symbolique dont un représentant est le philosophe H T Engelhardt qui illustre une position qualifié de technophile évolutioniste. L’on pourrait toutefois appliquer ses concepts d’individuation et de transduction au processus d’hominisation qui se déroule depuis des lustres, en interprétant le moment présent, qui voit s’inventer une vie artificielle prenant toute sa place dans une lignée technique, comme une phase métastable pleine d’aventures pour un futur ouvert. Quel bifurcation s’annonce ? dirait René Thom. Que va inventer l’homme, grâce à la libération due aux nouvelles technologies de l’intelligence et de la mémoire, comme en son temps la station debout avait libéré la main en même temps que le langage, qui allait amener à l'invention de l'écriture ? S’interroge Michel Serres.

Finalement ce qui apparaît dans la pensée de cet auteur, c’est moins une résolution des tensions entre les pessimismes et les optimismes envers la technique, qu’une problématisation de celle-ci. Pour finir je citerais 2 phrases, la première est tiré de la dernière page du livre d’André Leroi-Gourhan « Le geste et la parole tome I :Technique et langage », et la deuxième d’une page de MEOT. Les voici :

« L’outil quitte précocement la main humaine pour donner naissance à la machine » et

« L’opération technique est une opération pure qui met en jeu les lois véritables de la réalité naturelle, l’artificiel est du naturel suscité. »

Bibliographie

LATOUR, Bruno. 1991. 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 Essais d’anthropologie symétrique, Paris, Editions La découverte.
LEROI-GOURHAN, André. 1964. Le geste et la parole, tome I Technique et langage, Paris, Editions Albin Michel.
SIMONDON, Gilbert. 1964.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l'individuation à la lumière des notions de forme et d'information), Paris : PUF, Rééd. J.Millon, coll. Krisis, 1995
SIMONDON, Gilbert. 1989.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Paris, Aubier.
SIMONDON, Gilbert. 1989.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Paris, Aubier

ouvrages sur Simondon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de l'individuation et de la technique, Actes du Colloque organisé par le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31 mars - 2 avril 1992, Paris: Editions Albin Michel, Bibliothèque du CIP, 1994
HOTTOIS, Gilbert. Simondon et la philosophie de la culture technique, Bruxelles: De Boeck, 1992, diffusion Belin
Université de tous les savoirs (UTLS). 2000. Qu’est-ce que la vie ? - volume I – Conférence du 19 janvier 2000 de Gilbert Hottois (La technosciences : entre technophobie et technophilie). Sous la direction d’Yves Michaud. Editions Odile Jac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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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1
Winter 2008
Volume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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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bert Simondon and the Dual Nature of Technical Artifacts


Marc J. de Vries
Delft University of Technology/Eindhoven University of Technology



1. Philosophical reflection on technical artifacts: why read Simondon?

Philosophical interest in technical artifacts is a fairly recent matter. For a long time, philosophy of technology was more concerned with broad issues such as the influence of technology on society and culture. At such a high level of analysis, the influence of individual artifacts was out of sight, or at best an example for illustration. In the past decade or so, a more analytical approach emerged in the philosophy of technology, accompanied by an ‘empirical turn’ that stimulated an interest in reflection on more specific and concrete technological developments. In that context the analytical reflection on technical artifacts emerged. Well-known is Randall Diperts’ book ‘Artifacts, Art Works and Agency’ for the way he distinguished natural objects, tools, instruments and artifacts1. Other contributions were made by Van Inwagen, Wiggins, and Lynne Rudder Baker2. Probably the most extensive effort in this realm was the “Dual Nature of Technical Artifacts” research program that was carried out at the Delft University of Technology in the Netherlands. This program aimed at developing an account for technical artifacts by describing them in two interconnected ways: on the one hand the artifact can be described in terms of its physical properties (its size, shape, weight, color, etc.) and on the other hand it can be described in terms of what it is meant for (its functional properties). The functional properties are relational (intentional) in nature, while the physical are not3. Both designers and users reason about artifacts by making connections between these two descriptions. One of the insights that this program produced was that designers not only create a new artifact, but also a use plan for it4. Elements of the concept of a use plan were present in earlier literature (such as the idea of a script in artifacts, as developed by Akrich and also Latour), but the use plan in the Dual Nature account is elaborated in terms of action theory. Users may follow the designer’s use plan, or come up with their own use plan.

It may seem that the recent interest in analyzing the nature of technical artifacts was not preceded by any earlier efforts, but this is not the case. At least two philosophers can be mentioned as early philosophers of technology who wrote on technical artifacts: Gilbert Simondon (1924-1989) and Hendrik van Riessen (1911-2000)5. Simondon was a French philosopher, whose philosophy of technology is sometimes indicated as neo-aristotelian6. He studied at the Ecole Normale Supérieur and the Sorbonne University in Paris. As his main publication on technical artifacts, the book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from now on to be abbreviated as Du Mode7) was never translated into English, it remained fairly unknown and is quoted only rarely. If ever it is quoted or discussed it is in the context of Continentally-oriented philosophy of technology. For instance, Andrew Feenberg referred to Simondon’s work while discussing possible confusions between what he called primary and secondary instrumentalization8. There are a few publications that have Simondon’s work as their primary focus. Paul Dumouchel presented a summary of Simondon’s main ideas, as explicated in Du Mode9. Dumouchel, as Feenberg, seems to be more interested in the implication of Simondon’s writings for our view on the impact of technology on society and culture than on his ideas about the development of technical artifacts. Simondon’s work was also discussed in a paper by Henning Schmidgen10. Schmidgen’s motive for reading Simondon was primarily an interest in the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more than an analytical-philosophical interest in technical artifacts. Finally I want to mention a paper by Adrian Mackenzie in which he discusses Du Mode in the context of a review of the social-constructivist approach to technology11.

Simondon also features in the survey of important philosophers of technology that was published by the German Verein Deutsche Ingenieure (VDI) in 200012. As could be expected, in French literature he is mentioned more frequently than in English literature, but here, too, there seems to be no publication that discussed his work in the context of a reflection on technical artifacts in the analytical manner, as we find it in the Dual Nature program that was mentioned earlier. If at all Simondon as an early philosopher of technology is revived in more recent publications in the philosophy of technology it is always in a Continentally-oriented article on the role of technology in society and culture. That is understandable, because Simondon himself wrote that his main purpose for writing Du Mode was to show that there is no conflict between technical artifacts and human culture13. Humans and technical artifacts belonged together and, as he phrased it, humans are the conductors in the world-orchestra of technical artifacts14. According to him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technical artifacts could prevent people from being torn apart by fear and love for technology. In this respect he disagreed with other voices in that time, such as those of Jacques Ellul, who wrote his La Technique ou l’enjou du siècle in 1954, and Martin Heidegger, who published his Frage nach der Technik in the same year. Both philosophers emphasized the negative impacts of technology on society and culture, and although Simondon did not mention them, the Introduction of Du Mode can be seen as a response to their ideas, and thus it is understandable that we find references to Du Mode primarily in Continentally-oriented literature. In a way, the recent efforts to get a better understanding of technical artifacts thereby reflecting on concrete examples of technical artifacts (as promoted in the empirical turn in the philosophy of technology) can be seen as a similar attempt to move away from too general statements about technology that are not tested against real practice, and create a more balanced picture by carefully examining technology ‘from inside’15. A confrontation of Simondon’s ideas with the more recent insights as gained in analytically-oriented philosophical studies on technical artifacts, such as in the Dual Nature program, has not been published yet. That is the aim of this article. What I will do here is first present a summary of Simondon’s main ideas about the nature of technical artifacts, thereby using the French text of Du Mode, and also the publications on Simondon I quoted earlier, but primarily by going back to the text of Du Mode itself, and then compare these ideas with the more recent insights as they have been developed in research like the Dual Nature program.

2. Concepts in Simondon’s philosophy of technical artifacts

In the first place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Simondon used the word ‘objet’ for indicating a process rather than a device or machine. He wrote: “the technical object is not this or that thing, given here and now, but that of which there is a genesis”16. So for him, the steam engine as a technical object is not what we usually call a technical artifact but a sequence of engine designs that displays a certain development17. Ontologically speaking, for him a technical object is not a material entity, but an event, or rather a sequence of events. At first sight this would mean that we have to be very careful in comparing his ideas with the Dual Nature approach, because in that approach the technical artifact is not a process, but a material entity. Simondon did discuss numerous examples of technical artifacts. As long as we are aware of the fact that he sees those artifacts primary as the outcomes of a process we can draw the comparison between his view on these artifacts and the Dual Nature view. In Du Mode the term concretization features quite prominently. Here too, we have to be aware of the specific way in which Simondon used the term. Concretization is taking a step from abstract to concrete. That holds both for Simondon’s way of using the term and for the common use. In common use this refers to the process of developing an artifact as one that starts with only abstract entities (theoretical concepts, a list of requirements and perhaps sketches) and ends with a concrete object (a prototype or a finished product). But for Simondon abstract and concrete have a different meaning. As his term ‘objet’ refers to a sequence of artifacts, also his term ‘concretization’ refers to this sequence, and not to the genesis of one artifact in this sequence, as in common use. He distinguished between craftsmanship (l’artisanat’) as a primitive ‘abstract’ stage, and industry (l’industrie’) as a ‘concrete’ stage18. In the stage of craftsmanship technical artifacts are still in an early process of their genesis (that is, earlier in the existence of the technical object-as-process), which can be seen from the fact that there is not yet a convergence or ‘condensation’19 of functions in the parts of the artifact. Each function is realized in a separate part. It is only later in the genesis that parts become multifunctional. Convergence is another important term in Du Mode and Simondon wrote that the real challenge in technology is to bring together functions in a structural unit (that is what he called ‘convergence’) rather than to find a compromise between conflicting requirements20 We have to note that Simondon used the term ‘structural unit’ rather than ‘part of a device’. This raises the question if his concept of convergence also applied to a bringing together of functions in the whole artifact (as we see it happen frequently today in our alarm clocks that are at the same time radio’s; for this there is even a special term: hybrid products). That would explain why it is particularly in industry that we find more concretization, because then less products would be needed for more functions, and thus mass production becomes more worthwhile. In principle it is well possible that Simondon had this in mind, because already in the Introduction of Du Mode, he described three levels of entities: elements (parts of artifacts), individuals (artifacts) and ensembles (combinations of artifacts working together)21. The examples he used to illustrate the concept of concretization, though, all are at the level of elements (i.e., parts of artifacts).

Simondon’s use of the terms ‘abstract’ and concrete’ is by no means obvious and at certain points even clashes with the normal use of terms. Intuitively we would associate the term ‘concrete’ with the stage of craftsmanship because the use of abstract concepts seems to be more characteristic for the stage of industrialization. Here, again, we have to keep in mind that Simondon’s focus is not on the artifact, but on the sequence of artifacts that constitute what he calls an ‘objet’. The difference between concrete and abstract does not refer to a concrete artifact versus an abstract concept of the artifact-in-design, but to two stages in the sequence of artifacts. The stage of craftsmanship is a way of developing artifacts that is ‘primitive’22 in that there is a low level of sophistication in the way the functions of the artifact are realized in its parts. In the stage of industry functions are combined in parts in a more sophisticated way, and probably Simondon saw this as a crucial prerequisite for mass production as practiced in the industrial stage. Simondon does not elaborate on this assumption. This makes his terminology confusing, as now we tend to associate ‘abstract’ and ‘concrete’ with artifacts and not with the sequence of artifacts. This also obscures the meaning of the terms craftsmanship and industry, because for Simondon they do not sites or phases in the overall history of technology, but to approaches to artifact development. This confusion is enhanced by the fact that Simondon does not explicitly claim that concretization did not take place yet in the historical era of craftsmanship, but only emerged after the Industrial Revolution. Perhaps he would not even want to make that claim, because in principle the approach that he labels as ‘industrial’ could also have been practiced in the historical period before the Industrial Revolution. This would also explain why he does not need the ‘individual’ and ‘ensemble’ levels to illustrate his concept of ‘concretization’.

In Du Mode, Simondon elaborates in detail a couple of examples in order to illustrate his claim that convergence was the key issue in the genesis of these artifacts. I will describe one of them here: the penthode. This amplifying electronic tube was invented in 1926 by Bernard D.H. Tellegen. Tellegen at that time was a scientist in the Philips Natuurkundig Laboratorium (Philips Physics Laboratory23). Simondon described this invention as a step in the genesis of amplifier tubes that started with the triode24. In the triode there are still separate parts for different functions: the cathode is for producing electrons, the anode is for capturing them, and there is a grid for regulating the electron flow from cathode to anode. The triode’s functioning was hampered by the capacity between anode and grid, which could easily result in an undesired auto oscillation of the current in the tube. To fix this problem, another grid was added to the design, between anode and grid, and this functioned as an electrostatic insulation. But because of the potential between the anode and this extra grid, and between the extra grid and the original control grid, the extra grid also functioned both as an extra control grid for the anode and as an anode for the original control grid, thus strongly enhancing the amplifying function of the tube (up to 200 times amplification in stead of 30-50 times). So the extra grid functioned both as a solution for the original problem and as an enhancement of the overall function of the tube. This is typical for what Simondon called concretization. This new tube, called the tetrode, had a new problem: now electrons hitting the anode caused secondary emission of new electrons at the anode, which electrons caused other electrons coming from the control grid to be turned back. Tellegen solved this new problem by putting an additional grid between the insulating grid and the anode. By giving it a negative potential (approximately the same as the cathode) the electrons approaching the anode were no longer hampered by secondary emission at the anode. But this additional grid also could be used as an additional control grid. So again functions were combined in an element of the device. By positioning the bars in the additional grid in the electrical ‘shadow’ of the bars in the original control grid, the secondary emission is reduced (so not only the effect of secondary emission is dealt with, but also the emission itself). Furthermore, the variation in capacity between the cathode and the control grid becomes very small, which suppresses practically every frequency shift when the tube is used in a wave generator circuit. The additional grid is what Simondon called ‘over-determined’. Over-determination is the natural effect of concretization. When an element serves more than one function, both functions determine that element. Simondon used the example of the penthode to illustrate how in each step of concretization new conflicts may emerge, but in a next step those will be solved and further convergence of functions in elements will take place. The penthode is a product that was developed in what we normally call an industrial context (the Philips company). The fact that Simondon uses this example to illustrate his concept of concretization clearly indicates that in his terminology the early stage of concretization (craftsmanship) can take place in the context of what in normal use of the term is called ‘industry’, while in Simondon’s use of the term ‘industry’ it means the later stage of concretization.

In a previous publication, I derived a simple taxonomy of technological knowledge, based on the Dual Nature approach. I distinguished three different types of technological (artifact-related) knowledge, namely knowledge of the physical nature, knowledge of the functional nature, and knowledge of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 physical and the functional nature25. Simondon in Du Mode also pays substantial attention to technological knowledge in relationship to technical artifacts. It is the main focus of one of the three parts of this book (Part II on ‘Humans and the Technical Object’). In that Part he discusses the genesis of technical artifacts as the object of human knowledge. As for the stages in the genesis of technical artifacts, here too, he differentiates between two types: the knowledge stage of childhood and the stage of adulthood26. Knowledge of artifacts in the stage of childhood is intuitive, without an insight into the explanation of the functioning, and focused on working with the artifacts in practice. In the stage of adulthood such knowledge is rational, based on theoretical insight into the functioning of the artifact, and focused on reflections that are more universal than just related to this single artifact. A person with childhood knowledge of artifacts – an artisan – does not really master the artifact but is bound to the rules for usage as learnt in his/her education. A person with adulthood knowledge, though, - an engineer - has freedom to adapt the artifact or its use according to his/her own needs27. According to Simondon, there is place for both.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types of people has consequences for their education. Childhood knowledge will be transferred in different ways than adulthood knowledge28.

In the third Part of Du Mode, Simondon used the term ‘magic’ for the phase in which humans only had childhood knowledge of artifacts. In that phase they saw the artifact as a whole and they did not yet differentiate between the purpose of the artifact and the way this purpose is realized in matter. This is what the coming of ‘technicity’ caused to start. Technicity means that humans realized that there are different ways of reaching purposes through artifacts. From then on reflections on purposes and reflections on the way these can be reached through artifacts also became the domain for different human endeavors. In religion, humans reflect particularly on purposes, while in technology the material realization forms the focus of reflection29. Simondon claimed that this also has consequences for the nature of reasoning in religion and in technology. Religious thinking according to him is more deductive. It starts with certain convictions about purposes in life and from those deduces what is needed to realize those. In technology thinking is more inductive, Simondon claimed. It starts with reflecting on concrete artifact and by induction tries to gain more general insights about how purposes can be reached through artifacts30.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Simondon considered natural objects to be the best examples of concretization. According to him the convergence of functions as a fit between physical realization and functional requirements in structural units is optimal in natural objects. Although Simondon nowhere specifies this, we must assume that ‘natural object’ in his terminology is restricted to those objects in nature to which we apply the concept of ‘function’. In the more contemporary debate on the concept of function this happens only in living objects31. We speak, for instance, of the ‘function’ of the heart. Also the implicit evolutionary notion behind Simondon’s claim that natural objects are a sort of final outcome of a concretization process suggests that ‘natural object’ for him means ‘biological object’, and not minerals or atoms. On the other opposite of the spectrum, where there is not yet any fit between physical aspects and functions in structural units, is the scientific representation of the artifact-in-design32. According to Simondon the result of this is that the behavior of natural objects can be predicted more reliably than the behavior of technical objects33. The more concretization progresses, the more the technical object becomes like a natural object. To illustrate this Simondon discussed artificially grown plants. Compared to natural plants they have a less effective integration of functions in structures. Artificially cultivated plants have lost the natural ability to survive in cold circumstances (they have become dependent on the greenhouse), and in some cases they have also lost the ability to bear fruit and create a next generation. Concretization would then be the manipulation of such plants in order to make them resemble more and more the natural plant with its abilities to survive and multiply on its own34. This is a fairly speculative example, in particular when we realize that nowadays there is much effort to manipulate flowers in such a way that they seem to have an even better integration of functions than natural plants. This is one of the places in Du Mode where one gets the impression that Simondon’s ideas have been derived from a priori views on reality rather than from reflections on empirical data.

This aspect of context dependence brings us to another concept in Simondon’s philosophy of artifacts, namely that of hypertely35. In a situation of hypertely the artifact is fully dependent on its environment. It can only function at the interface of two worlds: the world of its own internal (technical) requirements and the external, social (or ‘geographic’, in Simondon’s terms) world in which it is used. To illustrate this, Simondon used the example of the engine in an electric locomotive. On the one hand, it needs to be adapted to the external world in order to obtain its energy, and on the other hand it needs to be adapted to the train that needs its output energy. This is typically the case for what Simondon called ‘elements’. These can only function in a larger whole (an artifact, or an ‘individual’ in Simondon’s terminology). This notion strongly reminds of what H.A. Simon wrote in 1969: according to him an artifact functions as a kind of ‘interface’ between an ‘inner’ environment, the substance and internal organization of the artifact, and an ‘outer’ environment, the surrounding in which it operates36. The study of this is what Simon calls the ‘sciences of the artificial’ and here, too, we see an analogy with Simondon’s writings, in which we also find the claim that there is such a science37. Simondon claims also that in the case of an individual the artifact can function by itself, but there is still a certain dependency from its environment. A windmill is a fully functional device, but it needs the wind to function. The highest degree of context-independence is found in ‘ensembles’, which are able to create their own necessary circumstances38. In any case, the artifact functions on the interface of its internal milieu (with its own conditions) and the external milieu (with its conditions). Simondon uses the term ‘evolution’ in his discussion of the concept of hypertely. Thereby he does not refer to the Darwinian concept of evolution, but there seem to be implicit references to the Darwinian idea of adaptation to the environment in the way he explains hypertely in technical objects.

Simondon saw a certain pattern in the way elements, individuals and ensembles develop. According to him, first an element develops into an individual and then the individual develops into an ensemble. At a certain moment, in the ensemble a new element may emerge. This element then also can be the beginning of a whole new ensembl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