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뱅주의와 시민사회

: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원제 : ジャコバン主義と市民社会──十九世紀フランス政治思想研究の現状と課題

저자 : 다나카 다쿠지(田中拓道)

출처 : 社会思想史学会, 『社会思想史研究』, 31권, 2007, 108-117.

http://dspace.lib.niigata-u.ac.jp/dspace/bitstream/10191/6613/1/31_108-117.pdf






1. 들어가며

19세기 프랑스 사회사상사의 고전을 쓴 막심 르루아(Maxime Leroy, 1873-1957)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1789년 이후의 모든 역사는 …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대립으로 귀결된다.”[각주:1] 르루아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1789년의 원리, 즉 개인적 자유와 소유에 입각한 새로운 권력 구성의 원리이며, “사회적인 것”이란 평등과 관련된 것이면서 개인의 불행을 집합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 노동이나 분배와 관련된 1793년의 원리이다.[각주:2]

르루아가 지적하듯이, 19세기의 프랑스 역사는 1789년에 선언된 원리가 그대로 실현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대혁명 시기에 제창됐던 ‘정치적’원리는 개개인의 구체적 생활조건에 입각한 ‘사회적’인 질서 원리에 의해 항상 비판되며 수정을 겪었다. 양자의 상극과 조정이 반복되는 과정이야말로 이 시기 이후의 사상사를 구성한다.

다만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의 개념은 사실상 논자마다 매우 다양하다. 크게 말해서, 1960년대까지 19세기 사상사를 해석하는 틀은 경제구조에 기인하는 계급대립에 의해 주어졌다. 생디칼리즘을 대표하는 이론가 르루아가 양자의 대립을 자유주의적 권력구성원리와 노동자의 사상·운동과의 대립으로 파악했던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런 해석 도식은 크게 변경된다. 역사학·정치사상사·철학 등의 분야들에서 지적인 쇄신이 일어나고, 오히려 일원적 통합원리(정치적인 것)와 다원성 원리(사회적인 것)의 긴장관계가 논자의 주된 관심 대상이 된다(다만, 나중에 다루는 르포르와 고셰는 양자를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한다).

본고는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에서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대항, 혹은 일원적 통합원리와 다원성 원리의 긴장관계를 축으로 최근까지의 연구사를 재정리하고, 그 현황과 과제에 관해 고찰하려는 것이다.


2. 일원적 통합원리에 대한 비판

1) 자코뱅주의의 유산

1960년대에 들어서자 그때까지 인문·사회과학에서 지배적이었던 맑스주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나타난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간주한 정통사학을 비판했던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 1927-1997) 등이 혁명기의 정치적 담론에 주목한 새로운 방법론을 수립했다.[각주:3] 퓌레에 따르면, 단일한 ‘인민’이라는 허구의 집합을 통치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로 간주하는 문학자, 철학가의 담론이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획득함으로써, 혁명의 급진화와 자코뱅 지배가 초래됐다. 19세기 이후의 사상적 과제는 ‘자코뱅주의’를 극복하고 ‘혁명을 끝내게 하는’것에 있었다고 간주된다.[각주:4]

퓌레의 연구는 정치사상사 분야에서 ‘정치문화’론이라 불려야 할 새로운 연구사조를 산출했다.[각주:5] 그것은 경제구조로부터의 정치적 담론의 자율성을 선언하는 것이 되며, 동시대의 정치적 담론의 배치, 그 내재적 논리를 탐구하는 역사연구로의 길을 개척했다.[각주:6] 여기서는 퓌레의 문제관심을 계승하는 한 명으로서 뤼시앙 좀(Lucian Jaume, 1946~)의 연구를 다뤄보고 싶다.

좀은 퓌레의 담론분석 방법에 의거하면서, 대혁명에서 비롯되는 프랑스의 ‘정치문화’의 특징을 탐구한다. 『자코뱅파의 담론과 민주주의』(1989)에서는 혁명기의 클럽과 의회에서의 자코뱅파의 담론을 검토하고, 당(parti)에 의한 도덕적 혁명운동이 대표하는 자·대표되는 자의 일체성을 산출하며, 주권을 구성한다는 독특한 정치관의 성립을 지적했다.[각주:7] 이런 정치관은 나폴레옹 제정기의 집권론, 7월 왕정기의 독트리네르의 이성주권론으로 계승된다. 그는 이어서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의 사조들을 검토하고, 거기서 일관된 특징을 ‘삭제된 개인’(individu effacé)라고 평했다.[각주:8] 대혁명 이후의 자유주의는 세 개의 사조로 구분된다. 첫째는 자코뱅주의적 정치인식에 대항하고 개인의 내면적 자유의 불가침성과 입헌주의에 의한 권력억제를 주창한 스탈 부인, 콩스탕, 프레보스트-파라돌(Prevost-Paradol) 등의 사조이다. 둘째는 개인보다 ‘사회’를 권력의 정당성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사회’의 의지[의사]를 대표하는 공적 기관으로의 집권화에 의해 더 고차적인 자유가 실현된다고 파악한 르와이에-코라르, 레뮈제, 기조 등 독트리네르의 사조이다. 셋째는 개인적 자유에 대해 종교적 ‘진리’를 우위에 두고 신적 권위에의 복종에 의해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라므네, 몽타랑베르, 세기말의 자유주의 가톨릭 등의 사조이다. 이 중 둘째와 셋째 사조가 프랑스 자유주의의 주류를 두고 다투며, 두 번째 사조가 1875년 이후에 체제원리가 되며, 자유주의와 양립하는 공화체제를 이끌게 됐다고 한다.[각주:9]

2) 자코뱅주의와 전체주의

퓌레나 좀의 연구는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 정치문화의 특징을 ‘자코뱅주의’적인 일원적 통합원리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1970년 이후의 정치철학에서는, 이런 사상적 전통을 근대민주주의에 내재하는 모순의 출현으로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사조가 있다. 이하에서는 클로드 르포르, 마르셀 고셰를 중심으로 그런 19세기론을 다뤄보고 싶다.[각주:10]

르포르(Claude Lefort, 1924~)는 20세기 후반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이다. 1949년부터 60년까지 카스토리아디스 등과 잡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를 간행한 그는, 60년대 이후 맑스주의와 결별하고, 토크빌과 아렌트의 사유에 의해 촉발되고, 근대민주주의와 전체주의에 공통적인 정치인식의 문제성을 탐구하게 된다. 여기서는 ‘인권’의 역설,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개념의 분석이라는 두 가지 점에 집중해서 그의 연구를 일별한다.

르포르에 따르면, 근대 이전의 사회가 ‘외부’에서 질서의 일체성을 보장하는 참조점(신, 자연, 왕의 신체)을 갖고 있었던 반면, 근대민주주의의 특징은 이런 참조점들을 거부하고(가령 프랑스혁명에 의한 왕의 신체의 폐절), ‘내부’에서만 질서의 입각점을 찾으려 한다는 데 있다.[각주:11] 그 입각점은 ‘인간’(homme)이라 칭해지며, ‘인간의 권리’의 실현이 근대 민주주의의 궁극 목적이 된다. ‘인간’이란 개개인의 공통성을 추상화한 집합을 가리키는데, 외부의 지표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기언급[참조, 지시]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불확정성을 갖는다. 르포르에 따르면, 근대 이후 ‘인권’은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권리로서 확대를 거듭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권력도 ‘복지국가’(État-providence)로서 비대화를 계속했다.[각주:12]

여기서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다루고 싶다. 르포르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 특히 자코뱅주의와 20세기의 전체주의에 공통적인 것은 모든 다원성이나 차이를 배제한 ‘일자-인민(Peuple-Un)’이라는 표상이 통치의 기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일자-인민’은 개개인의 동질성을 전제하며, 개인을 초월한 집합으로서 관념되며, ‘사회적 권력’이라고도 일컬어진다. 19세기의 사상가 중에서 콩스탕이나 기조가 아니라 토크빌이야말로 이런 단일한 ‘사회적 권력’에 대한 개인의 종속, 모든 차이를 제거하는 ‘새로운 전제(專制)’의 위험성을 인식했다.[각주:13] ‘인권’은 이 ‘사회적 권력’에 의한 ‘새로운 전제’를 억지할 수 없다. 오히려 개인의 동질성을 전제하는 ‘인간’관념은 개별 인간의 차이를 제거하고, 국가권력의 무제약적 확대를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마찬가지의 문제를 내재시킨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전체주의와 근대 민주주의는 구별될 수 없다.[각주:14]

르포르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정치’(국가권력의 행사)를 일상생활의 곳곳에 침투시키는 논리를 내재시킨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나누는 것은 권리·정치제도 등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차원’, 즉 자유로운 언론에 의해 통치권력을 비판적으로 음미하고, 제약하는 ‘공적 영역’의 존재뿐이다.[각주:15] 이 공적 영역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은 기존의 권리·정치제도나 공/사의 구분을 다시 묻는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운동’뿐이라고 한다.

르포르가 탐구했던 근대 민주주의의 문제는, 고셰(Marcel Gauchet, 1946~)에 의해, 프랑스의 ‘역사적 조건’아래에서 더욱 탐구됐다.[각주:16] 고셰는 프랑스에서의 민주주의의 곤란의 출발점을 대혁명에 둔다. 기독교의 성립과 세속화는 개인이 세계의 의미를 자기 해석하는 존재로서 우뚝 서는 것을 가능케 했다. 프랑스 혁명은 탈종교화와 왕의 부정에 의해,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개인으로 구성된 연대를 창출할 가능성을 초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연대가 모든 외부성이나 내적 다원성을 갖지 않는 단일한 집합(‘사회’)으로 관념됨으로써, 개개인을 초월하는 ‘사회’에 의한 새로운 전제(專制)나 억압을 초래할 가능성도 일어났다.[각주:17] 고셰는 프랑스혁명에서의 입법부로의 중앙집권화, 자코뱅주의에서의 ‘단일한 집합체’관념의 성립에서 개인의 자율과 양립할 질서의 형성 실패의 요인을 찾아낸다. 혁명기의 시에예스에 의한 의회감시의 ‘제3의 권력’도입론, 콩스탕의 중립적 권력론, 대의제론 등은 ‘사회’의 관념에 기초한 일원적 통치상을 비판하고 다원성을 도입하려는 시도(와 그 좌절)로 독해된다.[각주:18]

고셰에 의한 19세기 이후의 역사상을 일별해두자.[각주:19] 19세기 전반기에는 좌우 당파의 대립, 국왕·정부·의회의 분리, 대표제 등, 일정한 ‘다원성’원리의 도입이 꾀해진다. 제3공화정 시기의 양원제의 도입은 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1880년대부터 1914년 사이에 분업의 진전이나 계급대립에 의해 간과된 ‘사회’의 일체성이나 전체성을 회복하려는 희구가 현재화하고, ‘단일한 인류(Une humanité)’라는 종교적 관념이 부상한다.[각주:20] 이것은 민족·국민 등으로 모습을 바꿔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정치를 석권한다. 고셰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는 어떤 의미에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 정당이나 결사의 다원성, 대의제는 행정기구에 의한 리스크의 예측이나 불확실성의 제거·통제와 양립할 수 있는 한에서의 ‘지배된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있다”고 말해지듯이, 현대 민주주의는 문화적 획일화,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의 매몰·함몰에 의해 단일한 ‘사회’의 논리에 기초한 일원적 지배로 전화될 가능성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고셰는 근대 민주주의에서의 ‘외부’의 삭제라는 문제로 되돌아가, 탈종교화의 역사를 정치사상의 문제로서 연구하게 됐다.[각주:21]

3) 생명정치의 확산

1970년대의 지적 쇄신 속에서 생겨난 두 번째 사조로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이후의 19세기 연구를 들 수 있다. 이 사조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논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하는 데 머물 것이다.[각주:22] 푸코는 1977-78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18세기 이후의 통치권력의 성질변화를 주제로 삼는다.[각주:23] 그에 따르면, 상업과 도시의 발전은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국가(내치)의 역할을 확대시키고, 통치의 효율화(économie)라는 문제를 부각시켰다. 정치경제학(économie politique)의 내실은 18세기 후반기에 치안유지에서 ‘인구’의 학(學)으로 변화한다. 푸코는 사람들의 생물학적 필요를 집합적으로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권력의 존재방식을 ‘생명정치’(biopolitique)라고 칭하고, 이런 권력실천이 공중위생·인구정책·의료·식량정책으로서 전개됐다는 것, 그 담지자가 국가관료뿐 아니라 ‘사회적’영역에서의 병원·공장·교육기관·경제학자·위생학자 등으로 학산됐다는 것을 지적했다. 푸코에게 ‘시민사회’란 이런 통치를 더 효율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정치적 영역에 다름 아니며, ‘자유주의’란 새로운 통치의 방식을 정당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이해된다.[각주:24] 푸코의 ‘생명정치’, ‘사회적인 것’, ‘자유주의’등의 개념은 이후 19세기 연구에서 비교·대조되는 틀이 되며, 빈곤문제나 감옥, 공중위생, 가족, 의료 등과 관련된 많은 역사연구를 산출했다.[각주:25]

위에서 다뤘던 두 개의 사조는 각각 상이한 관심에서,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에서의 일원적 통치원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었다. 퓌레와 좀은 자코뱅주의의 유산이 19세기 이후에도 잔존하며, 영국식 자유주의나 입헌주의가 정착되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르포르나 고셰는 ‘인간’이라는 자기언급적 개념을 기초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가 단일한 집합체(‘사회’)에 대한 개인의 종속, 그리고 국가권력의 무제약적 확대를 이끌 위험을 내재시키고 있다고 논했다. 푸코주의자는 18세기 이후의 개개인이 단일한 생물학적 집합(‘인구’)로 파악됨으로써 집합적 생명의 효율적 유지·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권력이 ‘사회적’영역으로 확산되고 개개인의 생명의 관리·규율화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각자는 이런 일원적 통치원리에 대항하는 다원적 질서구성원리의 추구 ― 퓌레와 좀에게서의 대의제와 경쟁적 정당제, 르포르와 고셰에게서의 운동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나 ‘외부’의 탐구, 말년의 푸코에게서의 ‘자기에의 배려’에 기초한 고대 그리스의 주체상과 자기-타자관계 ― 를 사상적 과제로 삼았다.

이런 연구사조들과 교착되면서도, 근현대 프랑스의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전환하고, 거기서 긍정적인 발전사를 독해해내려는 것이 다음에서 다루는 피에르 로장발롱이다.

3. 일원적 통치원리로의 회귀 : 로장발롱의 19세기론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 1948~)은 중도노조인 CFDT의 고문이라는 사상사 연구자로서는 특이한 경력에서 출발했다. 1970년대 말에 푸코의 세미나에 출석했으며, 최초의 사상사 연구서인 『유토피아적 자본주의』를 출판했다. 80년대에는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 소속되어 퓌레, 르포르, 고셰, 마넹 등과 교류하면서 역사연구·현대정치연구를 행했다.[각주:26] 90년대에 들어서자 19세기 프랑스의 민주주의 역사를 다룬 방대한 3부작을 발표하고, 이 시대의 정치사상사 연구의 제일인자가 된다.[각주:27] 2002년부터는 콜레주드프랑스 교수도 겸임하고 있다.

로장발롱의 19세기 연구상의 특징은 프랑스 혁명기에 성립된 ‘자코뱅주의’적 정치인식이 거듭 비판에 처해지면서도 수정되어 회귀한다고 파악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세 단계를 거친 발전사로서 읽을 수 있다.

첫째,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인식(‘일반성의 정치문화’라고 일컬어진다)에 관해서는 기존의 연구를 거의 답습하고 있다.[각주:28] 혁명기에는 전통집단에 매몰된 개인을 끄집어내어 동질적·추상적 개인으로 구성된 단일한 집합체(‘개인으로 구성된 사회sociétéd’individus’)를 형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프랑스의 특징은 헤겔의 사상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변증법이 상정되지 않고, 양자 사이의 단절이 강조된 것이다. 개별 이익을 추상화하는 ‘대표’라는 메커니즘이 중시되고, 대표자와 피대표자 사이에는 ‘특수이익’에서 ‘일반이익의 창출’이라는 비약이 상정된다. 양자를 매개하는 정치적 결사는 부정되고, 직업단체, 지역성, 남녀의 성차 등은 사적 영역에 갇힌다. 일반성을 체현하는 것은 ‘법’뿐이며, 대표자에 의한 입법행위가 신성시된다.

둘째로, 프랑스 혁명 직후부터, 이런 정치인식은 거듭 비판에 처해졌다.[각주:29] 르 샤플리에법에서 볼 수 있는 중간단체의 부정은 개인의 원자화, 국가의 비대화, 사회적 질서의 해체를 초래한다는 비판이 19세기 초반의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로장발롱에 따르면,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자코뱅주의는 7월 왕정기에 재생한다. 기조, 티에르 등의 자유주의자는 ‘정치적’영역과 ‘사회적’영역의 구별을 도입한다.[각주:30] 그들에 따르면, 정치적 집권화에 의해 전통적인 특권들(libertés)을 폐지함으로써 개인의 자유(liberté)가 실현된다. 자코뱅주의와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의 확대와 자유의 실현은 상보적이라고 파악된다. 다른 한편, 사회적으로는 언론·집회활동의 자유나 행정적 분권화가 허용된다. 오히려 사회적 다원성은 사회에 분산된 엘리트의 의견을 통치기구로 집약하고, 일원화하기 위한 매개적 수단으로 간주된다. 정치적/사회적 영역의 구분과 상호보완으로 구성된 그들의 질서관은 제2제정기의 정치적 결사 금지와 직업적 결사 승인(1864년법)으로 계승되며, 제3공화정기의 ‘수정 자코뱅주의’를 준비하게 된다.

셋째로, 제3공화정기에 자코뱅주의의 쇄신이 완수된다.[각주:31] 여기서 로장발롱이 중시하는 것은 유기체적 질서관을 따라 자코뱅주의적인 국가-개인의 이원적 질서관을 비판하고 중간단체 재건을 제창한 사회학자(Fouillée, Durkheim, Ferneuil, Duguit 등)의 사상이 아니라, ‘정치적’영역과 ‘사회적’영역의 ‘양극화(polarisation)’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공화파 정치가(Waldeck-Rousseau, Léon Bourgeois, Paul-Boncour 등)의 질서관이다. 후자는 1884년법(직업조합 자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경제적 결사가 질서 유지에 유용하다는 점을 승인한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의회를 통한 의사집약과 일반이익의 일원적 ‘대표’라는 시각을 유지한다. 정치적 결사는 1901년법까지 자유화되지 않으며, 이 법에서도 결사에 대한 다양한 재정적·제도적 제약이 남아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학자가 제창한 직능대표론이나 생디칼리스트가 주창한 생산자의 공화국론(M. Leroy), 코포라티즘론은 이른바 ‘사회적인 것’에 의해 ‘정치적인 것’을 재정의하는 시도였다. 다른 한편, 공화파 정치가의 질서관에 따르면, ‘사회적’다원성은 ‘정치적’집권성과 명료하게 구별되며, 그 통제 아래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야말로 20세기의 프랑스 정치 모델을 제공하게 됐다고 한다.

위와 같이 로장발롱에 따르면, 혁명기의 자코뱅주의는 몇 번이나 수정을 거치면서도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 오늘날의 정치사상적 과제는 이제 자코뱅주의의 극복이나 토크빌적인 ‘전제(專制)’로부터의 자유의 옹호가 아니다. ‘사회적’영역에서 중간단체가 다양한 발전을 거쳐왔다는 사실을 토대로, ‘정치적인 것’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즉 ‘일반이익’이나 통합의 공통가치를 어떻게 재발견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라고 한다.[각주:32]

4. 마치며

지금까지 달음박질치듯이 30년 동안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사 연구를 뒤쫓았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연구 과제를 세 가지 점으로 요약하고 싶다.

첫째는 연구 대상에 대해서이다. 퓌레 이후의 19세기 사상사 연구는 담론사, 사회사, 심성사 등의 연구 축적을 바탕으로 고전적 사상가의 텍스트를 넘어선 폭넓은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게 됐다. 기존의 일본의 연구에서는 특정한 사상가의 주요 텍스트를 ‘점’과 ‘점’으로 묶음으로써 사상사가 구성된 것이 적지 않았다. 향후에는 프랑스에서의 역사 연구의 진전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담론 상황을 ‘면’으로서 파악하려는 새로운 대상의 확장이 요구된다.

둘째는 분석 틀에 관해서이다. 본고에서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대항이라는 도식을 사용해서 본 것처럼, 19세기에 정치사상의 대상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됐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자코뱅 주의의 영향, 국가권력의 비대화, 사회로의 권력의 확산, 사회 문제의 출현 등에 의해 분석 틀도 국가와 시민사회, 계급대립이라는 단순한 것에서부터 일원성과 다원성, 정치적 질서의 내부와 외부, 규율과 자율, 중간집단의 정치적/사회적 역할 등, 논자에 따라서 다양해지고 있다. 거기에서는 바로 ‘정치적인 것’자체가 논쟁적 개념이 되며, 그 개념 규정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사상적 과제를 어디에서 찾아내느냐는 문제와 직접 관련된다. 이런 문맥 속에서 ‘정치적인 것’을 어떻게 재파악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깊어질 필요가 있다.

셋째, 1990년 이후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사 연구를 주도하는 로장발롱의 틀에 내포된 일정한 편견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로장발롱의 연구는 기존의 연구에서 볼 수 있던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전환하고 ‘정치적인 것’의 사고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이런 관심의 전환의 배후에는 현대 프랑스를 둘러싼 다음과 같은 논의 상황이 있다. 즉, 한편으로는 전지구화, 유럽화에 의한 프랑스 국가의 자율성의 흔들림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사회적 분단(이민자·청년·배제문제 등)의 심각화와 대의제의 기능장애이며, 이런 것들로부터 귀결되는 ‘프랑스 모델’의 전환이라는 논의이다.[각주:33] 이런 문맥 속에서 로장발롱은 프랑스 민주주의의 전통과 대의제를 옹호하고 국민(naion)의 재구축을 호소하는 등, 현대정치에 대해 활발한 제언을 계속하고 있다.[각주:34]

그러나 위와 같은 실천적 관심을 배후에 지닌 19세기 연구는 대상에 본래 내포된 다양성이나 역동성을 훼손하고 이것들을 정태적인 역사관으로 회수하게 된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분리하고 ‘정치적인 것’(일원적 통합원리)의 일관된 우위를 상정한다는 틀로는 19세기 전반기의 자유주의자(Constant, Madame de Stäel, C. Dunoyer), 중반기의 사회주의자, 19세기 말의 사회학자 등 ‘사회적인 것’에 입각해 ‘정치적인 것’을 다시 묻고자 한 사상가들의 상당수가 곁가지에 자리매김 된다.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 사상이 ‘자코뱅주의’와 대립하면서 사회적 유대의 재구축을 모색하고, 사회주의에서 보수주의까지 폭넓은 사상 투쟁을 벌였다는 역사를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의 지속성을 축으로 삼은 그의 역사관에 대해 복수(複數)의 ‘사회적인 것’의 경합 속에 새로운 질서 구성 원리를 찾아내려는 사상사 관점을 대립시키는 것은 향후의 연구에 남겨진 과제이다.


* 본고는 제31회 사회사상사학회(2006년 10월 22일)의 섹션 「프랑스형 『시민사회』 모델의 가능성 : 피에르 로장발롱을 둘러싸고(フランス型『市民社会』モデルの可能性──P. ロザンヴアロンをめぐって」를 조직한 北垣徹(西南学院大学), 高村学人(立命館大学) 두 사람과의 공동토의를 바탕으로 집필됐다. 집필에 있어서는 아래의 연구조성의 일부를 활용했다. 平成十七─十八年度文部科学省科学研究費補助金(若手研究B), 平成十八年度新潟大学プロジェクト推進経費(若手研究者奨励研究費).


  1. Maxime Leroy, Histoire des idées sociales en France, t. 1, Paris, Gallimard, 1946, p.13. [본문으로]
  2. Maxime Leroy, Histoire des idées sociales en France, t. 2, Paris, Gallimard, 1950, pp.11-13 ; t. 3, 1954, pp.27-38. [본문으로]
  3. François Furet, La gauche et la révolution Française, Paris, Gallimard, 1978. [본문으로]
  4. François Furet, La gauche et la révolution au 19 siècle, Paris, Hachette, 1986. [본문으로]
  5.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creation of modern political culture, 4 vol., New York, Pergamon Press, 1987-1994. [본문으로]
  6. 주목할 가치가 있는 연구로서는 다음의 것이 있다. Claude Nicolet, L’idée républicaine en France, 1789-1924, Paris, Gallimard, 1995는 ‘과학’, ‘사회’ 등 19세기의 주요 사상 개념의 배치 속에서 프랑스 공화주의의 생성과정을 상술하고, 정치사적 서술에 머무는 다른 연구(가령 Pamela Pilbeam, Republicanism in Nineteenth-Century France, 1814-1871, Basingstoke, Macmillan, 1995)와 비교해서 출중하다. Sudhir Hazareesingh, From Subject to Citizen : the Second Empire and the emergence of modern French democrac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은 제2제정기의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가톨릭의 담론을 망라하여 검토하고, 그 연방·분권론에 자코뱅주의적 ‘정치문화’를 극복할 시민권(citizenship) 개념의 생성을 찾아낸다. Laurent Mucchielli, La découverte du social : naissance de la sociologie en France (1870-1914), Paris, Découverte, 1998은 제3공화정기의 사회학과 다양한 분과학문의 교착에서부터 당시의 담론상황을 재구성하고 있다. [본문으로]
  7. 그 특징은 다음으로 정리된다. 첫째, 제도로서의 대표가 부정되는 한편, 혁명운동에 의한 ‘인민’의 대표라는 관념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도덕적 일체성에 기반한다고 간주된다. 둘째, ‘인민’이 대표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에 의해 ‘인민’이 창출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셋째, 이 운동에서 당이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Lucien Jaume, Le discours jacobin et la démocratie, Paris, Fayard, 1989, pp.387-403). [본문으로]
  8. Lucien Jaume, L’individu effacé, ou le paradoxe du liberalisme français, Paris, Fayard, 1997. 또한 좀의 관심을 간결하게 요약한 저작으로 Lucien Jaume, Echec au liberalisme : les jacobins et l’État, Paris, Kimé, 1990이 있다. [본문으로]
  9. Jaume, L’individu effacé, op.cit., pp.19-21, pp.59-117, pp.124-148, p.340 et s. 독트리네르의 사상이 제3공화정의 체제원리가 됐다는 이해는 후술하는 로장발롱의 기조론에서도 볼 수 있다. Pierre Rosanvallon, Le moment Guizot, Paris, Gallimard, 1985, p.358 et s. [본문으로]
  10. 그들을 포함해 최근의 프랑스 논의 상황을 정리한 문헌으로 宇野重規, 『フランス政治哲学』, 東京大学出版会, 2004가 있다. [본문으로]
  11. Claude Lefort, L’invention démocratique, Paris, Fayard, 1994, pp.63-66. [본문으로]
  12. Claude Lefort, Essai sur le politique (19e-20e siècle), Paris, Seuil, 1986, p.32. [본문으로]
  13. Ibid., p.38. 르포르의 논의는 피에르 마넹(Pierre Manent, 1949~)의 다음의 논의에도 빚지고 있다. Pierre Manent, «Démocratie et totalitarisme : à propos de Claude Lefort», Commentaire, t. 16, 1981-1982, pp.574-583. [본문으로]
  14. Claude Lefort, L’invention démocratique, op.cit., pp.171 et s. [본문으로]
  15. Claude Lefort, Essai sur le politique, op.cit., p.55. [본문으로]
  16. 고셰의 지적 배경은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인류학, 정신분석 등 다양하다. 르포르와의 관계에 관해 고셰는 1966-67년에 그의 강의에 참여하여 ‘선열한 충격을 받고’ 르포르와의 대화로부터 연구 테마를 찾아냈다고 회고했다(Marcel Gauchet, La condition historique, Paris, Gallimard, 2003, p.29). 또한 난해한 고셰의 사상의 도입으로 다음이 편리하다. Marc-Olivier Padis, Marcel Gauchet : la genèse de la démocratie, Paris, Michalon, 1996. [본문으로]
  17. Marchel Gauchet, La démocratie contre elle-même, Paris, Gallimard, 2002, pp.1-26. [본문으로]
  18. M. Gauchet, La révolution des pouvoirs, Paris, Gallimard, 1995. ; «Benjamin Constant : l’illusion lucide du libéralisme», dans Benjamin Constant, Ecrits politiques, Paris, Gallimard, 1997, pp.1-110. [본문으로]
  19. Gauchet, La révolution des pouvoirs, op.cit., pp.27-35. [본문으로]
  20. M. Gauchet, La condition politique, Paris, Gallimard, 2005, p.371. [본문으로]
  21. M. Gauchet, La religion dans la démocratie, Paris, Gallimard, 1998. [본문으로]
  22. 田中拓道『貧困と共和国』人文書院、二〇〇六年、第四章 ; 同「フランス福祉国家論の思想的考察──『連帯』のアクチュアリテイ」『社会思想史研究』二人巻、二〇〇四年、53-68頁. [본문으로]
  23. Michel Foucault, Se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Paris, Gallimard/Seuil, 2004. [본문으로]
  24. Ibid., p.357. ; Foucault,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Paris, Seuil/Gallimard, 2004. [본문으로]
  25. 대표적인 예로 Jacques Donzelot, L’Invention du social, Paris, Fayard, 1984 ; François Ewald, L’État-providence, Paris, Grasset, 1986 ; Giovanna Procacci, Gouverner la misère, Paris, Gallimard, 1995 ; Andrew R. Aisenberg, Contagion : Disease, Government, and the ‘Social Question’ in Nineteenth-Century Franc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푸코의 도식과 거리를 두고 ‘사회적인 것’의 사상사를 독자적으로 전개한 중요한 연구로는 Robert Castel, Les métamorphoses de la question sociale, Paris, Fayard, 1995. [본문으로]
  26. Pierre Rosanvallon, Le libéralisme économique, Paris, Seuil, 1979. 그 내용은 푸코가 말하는 ‘자유주의’론과 근본적으로 겹친다. 18세기의 ‘시장의 발견’을 효율적인 통치를 가져다주는 정치적 원리로서 위치짓고자 하는 것이다. 푸코는 자신의 세미나의 요약에서 이 연구를 ‘중요한 저작’으로 소개한다(Foucault,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op.cit., p.326). [본문으로]
  27. P. Rosanvallon, Le sacre du citoyen : histoire du suffrage universel en France, Paris, Gallimard, 1992 ; Le peuple introuvable : histoire de la représentation démocratique en France, Paris, Gallimard, 1998 ; La démocratie inachevée : histoire de la souveraineté du peuple en France, Paris, Gallimard, 2000. [본문으로]
  28. P. Rosanvallon, Le modèle politique français : la société civile contre le jacobinisme de 1789 à nos jours, Paris, Seuil, 2004, pp.25-105. [본문으로]
  29. Ibid., pp.131-195. [본문으로]
  30. Ibid., pp.218-227. [본문으로]
  31. Ibid., pp.343-360. [본문으로]
  32. Ibid., p.434. [본문으로]
  33. 예를 들어 로장발롱이 편집한 La République des Idées 시리즈의 한 권인 La nouvelle critique sociale, Paris, Seuil, 2006. 혹은 P. Culpepper et al. dir., La France en mutation, 1980-2005, Paris, Presses de la Fondation Nationale des Sciences Politiques, 2006. [본문으로]
  34. 로장발롱은 최근 저작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모순을 강조함으로써 그 불신을 조장하고 키워왔던 기존의 정치사상 연구를 비판한다. P. Rosanvallon, La contre-démocratie : la politique à l’âge de la défiance, Paris, Seuil, 2006, pp.24 et s. 국민의 재구축에 관해 로장발롱의 「일본어판 서문」, 『연대의 새로운 철학』, 北垣徹訳)「日本ヒ語への序文」『連帯の新たなる哲学』勁草書房, 2006, v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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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클로드 르포르의 낡음과 새로움

解説 クロード・ルフォールのさとしさ

토나키 요테츠(渡名喜庸哲)

 

* 아래에 번역한 것은 클로드 르포르의 책 <민주주의의 발명>의 일역자 토나키 요테츠가 이 번역서에 붙인 해설이다. 평이한 내용도 있고 정보도 있기에 번역해둔다. 이 파일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L’invention démocratique. Les limites de la domination totalitair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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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번역한 것은 한 권의 낡은 책이다.

낡았다고 한 것은 단순히 이미 최초로 출판된 때로부터 3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다. 이 책 전체에서 금세 읽을 수 있듯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아직 소련이 세계에 대해 패권 중 하나를 쥐고, 동유럽의 민주화의 다양한 운동들을 억압했던 시대의 사건이다. 냉전 붕괴 이후, 이런 틀 자체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게 된 오늘날에서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이 있다.

이렇게 낡고, 게다가 읽기 쉽다고 얘기할 수 없는 문체로 써진 책을 굳이 번역한 까닭은, 르포르가 지닌 뻣뻣하고 느릿한 충격을 전하는 이론적 분석이, 오늘날이라는 시대에도 명확하게 손에 닿을 정도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술하듯이, 이 책은 이후 현대 프랑스의 정치철학의 한 가지 조류를 창시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런 영향관계만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한쪽의 전체주의라는 말이 마땅히 있어야 할 학문적 검토를 받지 못하고, 억압적으로 보이는 체제라면 어느 체제에나 적용할 수 있는 제멋대로 사용하기 좋은 형용사나 비판을 위한 욕설로 격하되고, 다른 한편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마치 다수결이나 숫자 세기의 표대결 게임과 동의어인 양 회자되고, 현실에서 작동하는 의사결정 과정(르포르라면 권력자본지식이 융합된 과정이라고 말할 것이다)을 은폐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는 시대에, ‘민주주의전체주의에 대해 지금도 색이 바래지지 않은 근원적인 고찰이 르포르에게는 있을 터이다.

얼핏 보면, 소련형 혹은 프랑스형 공산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옹호하려고 하는 르포르의 손놀림은 자유주의’, 더 나아가 보수주의에 의한 공산주의 비판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특히 이 책에서는 기존의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전체주의에 대한 맹목을 비판하는 형태로, 르포르 나름의 전체주의 비판을 제시하려고 했기 때문에, 르포르가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보이기 어렵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한 반공서’로 읽는 것은 완전한 오독이다. 맑스를 공부하면서도 이른바 맑스주의와는 선을 긋는 르포르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양식이나 지배양식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하여, 이로부터의 해방을 기치로 창설됐을 공산주의를 자칭하는 사회에서조차도 왜 똑같은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조직화된 지배양식이 발견되는가, 그리고 좌파를 자칭해온 지식인들은 왜 이것을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을 일관되게 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르포르가 문제 삼는 것은 공산주의자유주의라는 구도 자체가 더 이상 효력을 보유하지 않는 포스트공산주의’(iv)의 사회라는 것을 잊지 말자. 어쩌면 전체주의공산주의가 죽은 후에도 다른 형태로 살아남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전체주의민주주의의 둘 다가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는 불가분의 것이라고 한다면, ‘전체주의의 모습을 한계까지 추적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그 자체의 의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전체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당분간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사회는 정말로 그렇게 부르기에 알맞은가? 원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런 물음을 계속 제기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르포르의 딱딱하고 둔탁한 충격은 확실히 전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클로드 르포르의 저작과 경력

클로드 르포르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La Brèche, avec Edgar Morin et Jean-Marc Coudray, Paris, Fayard, 1968/2008〔『学生コミューン西川一郎訳合同出版一九六九年

Éléments d’une critique de la bureaucratique, Genève, Droz, 1971/Paris, Gallimard, 1979〔『官僚制批判諸要素未邦訳

Le Travail de l’oeuvre Machiavel, Paris, Gallimard, 1972〔『マキァヴェッリ作品研究未邦訳

Un homme en trop. Essai sur « L’Archipel du Goulag », Paris, Seuil, 1975〔『余分人間──『収容所群島をめぐる考察宇京頼三訳未来社一九九一年

Sur une colonne absente. Écrits autour de Merleau-Ponty, Paris, Gallimard, 1978.〔『不在──メルロ= ポンティをめぐって未邦訳

Les Formes de l’histoire, Paris, Gallimard, 1978〔『歴史諸形象未邦訳

L’invention démocratique. Les limites de la domination totalitaire, Paris, Fayard, 1981/1994.本書

Essais sur le politique (XIXe-XXe sièle), Paris, Seuil, 1986.〔『政治的なものについての試論一九世紀世紀)』未邦訳〕 ->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 19~20세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Écrire à l’épreuve du politique, Paris, Calmann-Lévy, 1992/Paris, Pocket, 1995〔『エクリール──政治的なるものにえて宇京頼三訳法政大学出版局一九九五年

La Complication ── retour sur le communisme, Paris, Fayard, 1999.〔『錯綜──共産主義への回帰未邦訳

Le Temps présent. Écrits 1945-2005, Paris, Belin, 2007.〔『現在── 一九四五年〇〇五年未邦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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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많은 논문을 집필했다.[각주:1] 또한 서문가序文家로서의 모습도 있으며, 그 중에서도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의 프랑스어 번역(Flammarion, 1985), 에드가르 키네의 『혁명(Belin, 1987), 단테의 『제정론(帝政論)의 프랑스어 번역(Belin, 1993)이나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필두로 하는 많은 저작에 서문을 붙였다.

 

클로드 르포드는 1924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1941년에 파리의 카르노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거기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철학자 메를로-퐁티와 만난다. 메를로-퐁티의 영향으로 맑스에 눈을 뜬 르포르이지만, 서서히 트로츠키주의에 접근한다. 그렇다고 해서 맑스주의의 정통적인 교설에 포함된 결정론적, 환원주의적 생각에 대해서는 이미 이 시기부터 거부감을 깨닫고, 소련과 공산당에 대해 위화감을 품는다. 전후 유네스코에서 근무한 후, 1949년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한다. 전후 곧바로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한 르포르는,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등과 함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라는 그룹을 설립하고,[각주:2] 동명의 잡지에서 이미 동구권의 관료주의적 지배양식에 대해 호된 비판을 던졌다. 50년대에 작성된 논문 중 주요한 것은, 이후 관료제 비판의 요소들역사의 형상들에 수록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던 공산주의에서도 훨씬 더 지배억압의 기구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카스토리아스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그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주류파가 자치또는 자율을 지향한 하나의 혁명정당으로서의 활동의 방향성을 탐색한 반면, 르포르는 그 어떤 조직화도 경직화하고 억압장치로 전환될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우려를 도저히 감추지 못했고, 1958년에 갈라선다. 맑스주의적인 문제계를 르포르 자신이 어떻게 빠져나갔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의 5장에서의 회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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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Merleau-Po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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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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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르포르는 두 개의 중요한 논쟁을 했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의 논집 인류학과 사회학(1950)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서문을 붙였는데, 이것에 대해 르포르는 51년에 『레 탕 모데른느(Les Temps Modernes)에 발표한 논문 교환과 인간 사이의 투쟁에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해석에 (특히 상징의 지위를 둘러싸고) 반론을 가했다.[각주:3] 다른 한편, 르포르는 실존주의에 가담하지도 않는다. 사르트르의 52년의 논고 공산주의자와 평화에 대해 『레 탕 모데른느195389호에 맑스와 사르트르를 발표하고, 사르트르가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을 동일시한다며 비판을 서슴지 않고, 이 때문에 『레 탕 모데른느』와도 멀어지게 된다.[각주:4]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와의 이별은 르포르에게 정치활동보다 대학에서 연구자·교육자로서 집필을 통한 정치철학의 이론화로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65년부터 71년에는 칸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했다. 거기서의 제자들로는 알랭 카이예, 마르셀 고셰, -피에르 르고프 등이 있다.

이른바 <685> 때에는, 옛 친구 에드가 모랭 및 카스토리아디스와 함께 곧바로 반응하고, 현재 진행형인 사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공저 685: 균열(일역본 제목은 학생코뮌)을 같은 해에 저술했다(이 책의 장-마르크 크드레이는 카스토리아디스의 가명이다). 혁명의 주체를 학생운동에도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노동계급에만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제쳐놓고, 르포르는 학생반란에, 단지 대학 내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 대학으로 구현된 근대 산업사회 전반에 대한 재물음을 보고 있다. 동유럽의 민주화에 대해 논한 이 책에도 밑바탕에 깔린 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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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박사논문을 레이몽 아롱에게 제출하고, 국가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을 거쳐,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교수로 재직한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는 애드가 모랭과 함께 사회학·인류학·정치학의 영역횡단적 연구소”(현재의 에드가 모랭 연구소)를 지휘하고, 나중에 피에르 로장발롱과 함께 레이몽 아롱 정치학 연구소를 세운다. 1989년에 이 연구원을 퇴직한 후에도 정력적으로 집필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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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이후의 르포르의 과제는, 1950년대부터의 관료제 비판의 작업에 의거하여, 후술하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출판을 필두로 하는 동시대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여분의 인간을 참조) 마키아벨리뿐 아니라 한나 아렌트 등의 정치철학의 성과를 끌어들여 전체주의개념을 정밀화하고, 거꾸로 그것과 대쌍이 되는 형태로 민주주의개념을 도출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 민주주의의 발명은 그런 일련의 작업의 성과에 다름없다.

그런데 모든 조직에 안주하기를 거부한 르포르에게 그때마다의 친구들과 더불어 발간하고, 열띤 논고를 모은 몇 호의 잡지를 간행하고는 또 다른 형태의 잡지로 이행하고 또 다시 새로운 친구들 특히 젊은 연구자들 과 새로운 잡지를 세운다는 단속적인 학술잡지를 통한 논의의 장이야말로 그의 주된 활동 무대였다. 앞서 언급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레 탕 모데른느이후에도, 68년에는, 현재는 현상학자로서 알려진 마르크 리실(이 책의 7장 참조) 등 브뤼셀자유대학의 학생이 중심이 되어 창간된 잡지 텍스처에 마르셀 고셰와 함께 참여하여 이 잡지의 편집에도 종사한다. 게다가 77년부터는 고셰와 더불어, ‘유토피아개념에 대한 사회사상사로 나중에 유명해진 미구엘 아방수르(Miguel Abensour) 등과 리브르를 창간한다(이 책의 1, 9장의 초출은 이 잡지이다). 이 잡지는 80년대까지 계속되지만, 부언하면, 리브르의 면면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의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와 함께 시도한 것이 에티엔 드 라 보에티의 재독해이다. 현재도 프랑스에서 읽히는 자발적 복종론의 파이요 사의 문고판에는 당시에 쓴 고셰와 아방수르가 연명한 서문과 클라스트르의 라 보에티론에 덧붙여, 르포르의 <일자>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곳곳에서도 보이는 <하나인 인민>에 대항하는 사상의 실마리를 라 보에티한테서 찾고 있는 것이다.[각주:5] 그 후 80년대에는 아방수르, 피에르 파셰, 니콜 로로 등과 새로운 잡지 과거/현재(Passé/Présent)를 창간하고, ‘개인이나 테러등을 테마로 특집을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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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드 라 보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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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엘 아방수르(Miguel Abensour)

80년대에는 민주주의론, 혁명론에 덧붙여, 한나 아렌트에 대한 논고 등을 보탠 논집 정치적인 것에 관한 시론(19세기-20세기)을 저술했다. 이것은 본서와 나란히 르포르 정치철학의 이론적 고찰이 정리되어 있는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본서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면서 시사되고 있는 것에만 머물고 있는 중세적인 신학적 정치관의 현대적 잔존을 문제 삼는 중요 논문 신학-정치적인 것의 영속성?은 특필할 만하다.

이 시기의 르포르의 활동으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위와 같은 이론적 행위에 그치지 않고, 1988년의 이른바 라쉬디[루시디] 사건을 겪으면서 프랑스에서의 살만 라쉬디[루시디] 옹호위원회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이 라쉬디[루시디]론은 1992년 간행된 에크리르에 수록되어 일본어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에는 조지 오웰론이나 다른 한편으로 마키아벨리, 사드, 토크빌, 기조 등에 관한 논고도 수록되어 있고, 르포르의 사상적 영향관계나 동시대적 관심을 두루 살필 수 있다.

1999년 간행된 착종은 부제로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강조했지만, 물론 그때까지의 신랄한 공산주의 비판을 거친 말년의 변절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냉전 붕괴 이후 다시금 공산주의의 문제를 재검토한다는 계획 하에서 이와 관련된 논고가 정리되어 있다. 2007년의 현재 : 1945-2005은 그때까지 단행본에 수록되지 않은 논문을 중심으로 모은 선집(anthology)이다.

최후의 르포르는 췌장암을 앓았다. 파리 좌안 7구의 벡(Beck)가에 있는 5층짜리 자택에서, 엘리베이터가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오르내리기를 하고, 뤽상브르 공원에 나가 친구들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이 일과였던 것 같다. 전부터 친한 벗인 에드가 모랭이 뻔질나게 병문안을 한 보람도 없이, 2010103일에 생애를 마감했다.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의 장례식 때, 모랭은 르포르의 죽음을 앞에 둔 스토아학파 같은 고귀함을 증언하고, 그를 “그 어떤 진보주의적 환상에도 양보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사상가, 그리고 그래서 민주주의의 사상가를 그리워했다.[각주:6]

 

클로드 르포르를 어떻게 위치시킬까?

우노 시게키(宇野重規)는 현대 프랑스의 정치철학의 조류들을 개괄하는 저서 정치철학으로에서, 거기에는 세 가지 원류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레이몽 아롱으로 대표되는 우파 또는 반-맑스주의적 흐름이다. 둘째는 알튀세르 이후의 맑스주의적 사상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 장치비판이나 주체론이다. 그리고 셋째가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및 클로드 르포르 등처럼 맑스주의를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맑스주의 비판을 거쳐 전체주의 비판에 이르는 조류라고 한다. 우노의 정리에 따르면, 그 후의 프랑스 정치철학은 알튀세르의 흐름에 속하는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뤽 낭시나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네그리 등을 포함한 그룹, ‘68년 사상을 비판하는 소르본 계열의 알랭 르노나 뤽-페리 등의 그룹, 그리고 아롱 및 르포르의 영향을 받은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을 중심으로 한 그룹 등 세 가지로 대별된다고 한다.[각주:7]

이처럼 르포르는 80년대 이후 복권이 외쳐지는 프랑스 정치철학의 하나의 원류를 이루었는데,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르포르에 대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절친인 카스토리아디스에 대해서는 주요 저서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도한 에구치 칸(江口幹) 씨가 쓴 평전이 있으나,[각주:8] 르포르에 대한 연구 논문은 매우 적다.[각주:9] 르포르가 경원시됐던 것은 그의 난해한 문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른바 정통파 맑스주의 사상은 물론, 실존주의에도, 구조주의에도 과감하게 논쟁을 걸고, 유행하고 있는 학파로의 귀속을 항상 거부했다는 독자적인 입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방금 80년대 이후 프랑스 정치철학복권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이 책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의의를 갖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돌이켜보면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1981년, 프랑스의 사상계는 꽤 커다란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이미 50년대부터 스탈린비판과 폴란드의 폭동(이 책의 10) 및 헝가리 봉기(이 책의 8, 9) 등의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68),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79) 등의 사건, 게다가 소련의 강제수용소 실태를 그린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 50년대 말부터 집필된 이 책이 출판된 것은 73년의 프랑스어 번역이 처음이었다 에 의해 소련 및 공산당을 근거의 하나로 삼았던 정당 및 사상의 틀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뚜렷한 조짐은 이 책의 11장에서 논하는 폴란드의 민주화에서 나타날 것이다. 물론 프랑스 정치의 겉 무대에서는 70년대부터 이미 프랑스 공산당이 유로코뮤니즘의 구호와 더불어 소련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프랑스 사회당과 공동강령을 맺은 좌파연합을 실현시켰다(이 책의 4장 참조).

좌파연합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결국 81년의 미테랑 사회당 정권을 실현시켰지만, 아무튼 그것이 다양한 모순이나 균열을 숨기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미테랑 정권이 사회주의적 기업 국유화 노선으로부터 현대화를 기치로 내건 자유주의 노선으로 대전환을 보였던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상 면에서는 알튀세르의 맑스주의의 주축 중 하나였던 구조주의적 틀이 해체되고, 다양한 사상 조류가 생겨난다. 대체로 <685> 이후, <>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에 기초한 혁명이론에 무게를 둔 사상으로부터, <좌익 급진주의>라고 불리는 극좌파조직이나, 3세계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사상 등이 활짝 꽃피게 된다. 그 중에서,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얘기되는 앙드레 글뤽스만, 베르나르-앙리 레비 등 신철학(누벨 필로조피)”이라고 불리는 젊은 지식인들에 의한, 미디어용 전체주의 비판도 등장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더욱 광범위한 사상의 변동이 프랑스를 덮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정치의 이름으로 경시됐던 종교윤리가 복권되는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예를 들어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일반적으로 인지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며, 유대사상뿐 아니라 기독교 쪽에서도 프랑스 현상학의 신학적 전회가 회자됐다. 그리고 정치철학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논해진 것도 역설적으로 이 시기이다. 그때까지 정치철학이라고 하면, 생산관계를 도외시한 부르주아 이론이라고 보이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나 구조주의의 퇴조에 의해, 한나 아렌트, 레오 스트라우스를 중심으로 한 영어권의 정치철학에 본격적인 주목이 모이게 된 것이다.

그런 시기에, 공산주의는 물론 실존주의로도 구조주의로도, 더 나아가 자유주의로도 공화주의로도 스스로를 동일시하지 않고, 바로 난간[그 무엇에도 기댈 곳] 없는 사고를 실천한 르포르는, 1983년의 논문 민주주의라는 문제에서 정치철학의 부흥을 부르짖고,[각주:10] 프랑스에서 정치철학이 부흥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각주:11] 르포르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는 많다. 맑스를 근본으로, 박사논문의 주제인 마키아벨리, 그리고 보에티, 미슐레, 토크빌 등 과거의 사상가, 게다가 메를로-퐁티뿐 아니라 레오 스트라우스, 한나 아렌트, 레이몽 아롱, 에른스트 칸토로비치 같은 동시대의 사상가들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르포르의 정치철학은 흔한 정치철학사또는 정치사상사로는 귀착하지 않는다. 제도로서의 정치(la politique)’와 그 배후에서 그 구체적인 현상형태를 근원적으로 규정하는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을 구별하고, 후자의 모습을 철학적 관점에서 밝히려고 하는 스승 메를로-퐁티에게서 물려받은 정치적인 것의 현상학이라고도 말해야 할 자세를 바탕으로,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서쪽에도 동쪽에도 통저(通底)하는 현대의 정치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특히 관료제와 전체주의라는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도려내는 것, 그러나 동시에 민주주의를 자명시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비웃지도 않고, 그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하는 것, 이른바 이런 비판적 사회철학이야말로 르포르가 시도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 자세 때문에 르포르는 그 어떤 유파도 구성하지 않았지만, 그 영향은 폭넓다.

앞서 인용한 우노(宇野)가 서술하는 것처럼, 르포르 자신이 소속했던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레이몽 아롱 연구소의 정치철학자에 대한 영향은 물론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특히 칸대학 시절의 제자인 마르셀 고셰에 의한, “근대의 탄생을 정치적인 것종교적인 것의 관계로 파악하는 최초의 주저 세계의 탈마술화세[네] 권짜리 대작민주주의의 도래는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을 신학정치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르포르의 관점을 확대 심화시킨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각주:12] 또한 마찬가지로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피에르 마냉이나 필립 레노 등에 의한, 특히 토크빌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의 재평가나, 피에르 로장발롱의 대표제개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사의 시도도 크게 말하면 똑같은 조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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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르포르의 영향은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상사나 사상가 연구에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역사, 종교 등등 다양한 사회과학의 영역을 횡단하는 비판적 사회철학이라는 관점이야말로 르포르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고셰와 마찬가지로 칸대학에서 르포르에게 배운 알랭 카이예와 장-피에르 르고프의 사회학적 경향을 지닌 정치철학의 시도를 언급해야 한다. 특히 르포르로부터의 영향을 자인하는 카이예는 모스의 증여개념을 기축으로 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등등의 사회과학 전체를 내다보는 영역 횡단적인 관점 하에서 연구 그룹 “MAUSS(사회과학에서의 반공리주의 운동)”을 수립하고, 동명의 잡지를 무대로 다방면의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현대의 경제주의나 의회제 민주주의에 통저하는 것으로서 공리주의적 이성을 비판적으로 독파한 카이예의 자세는 바로 르포르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13] 또한 르고프는 <685>의 사상의 비판적 총괄에서 출발하고, 르포르가 논하는 시대보다도 나중인 미테랑의 현대화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프랑스의 정치적·사상적 변동을 분석 대상으로 한다. 르포르 및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을 이론적 전거로 삼고, 매니지먼트적 사상이 기업이나 교육에 침투하는 온화한 야만이나 포스트전체주의시대에서의 전체주의그 자체의 변용된 모습을 그러내는 르고프의 작업 또한 르포르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각주:14]

위와 같은 직접적인 영향관계와는 별개로, 80년대 이후 프랑스의 정치적인 것을 둘러싼 사상적 고찰과 르포르 사이의 공명도 주목할 만하다. 이미 동시대부터, 특히 권력론이나 근대의 파악방식을 놓고 푸코와의 관계가 논해졌으며, 혹은 르포르가 말하는 근원적인 분열내지 항쟁, 리오타르에 있어서의 쟁론(le différand)’ 개념과의 가까움에 대해 주목되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리오타르도 또한 과거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멤버였다. 혹은 정신분석과의 관계도 없지 않다. 이 책의 5장은 정신분석가 르네 마조르를 중심으로 한 잡지 Constellations의 연구회에 초청됐을 때 발표된 것이다. 혹은 르포르에 있어서의 상징적인 것이라는 생각의 원류로서, 메를로-퐁티뿐 아니라 라캉을 찾아내며, 르포르가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인 것실재적인 것을 정치사상에 응용했다고 파악하고, 게다가 이로부터 최근의 급진민주주의에 이르는 논리를 보는 해석도 제시되고 있다.[각주:15] 정신분석가이기도 했던 카스토리아디스의 상상적인 것과의 관계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참고로 세포국가를 주제로 하는 Constellations의 같은 호에는 장-뤽 낭시와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정치적 패닉도 게재되어 있다.[각주:16] 또한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에 대해서는 앞서 서술한 논문 민주주의라는 문제, 원래는 이 두 사람이 주최한 81년부터 82년에 걸친 정치적인 것의 후퇴를 주제로 한 연구회에서의 발표가 바탕이 됐다.[각주: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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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나중에 보듯이, 르포르의 정치철학의 근본에는 정치적인 것의 장소를 인민이나 군중같은 얼마간의 주체내지 실체에 의해 차지될 리가 없는 누구의 것도 아닌 장소”, “공허의 장소로서 파악하고, 거기에서의 사회/권력의 분할, 혹은 실재적인 것/상징적인 것의 근원적인 항쟁을 통해서 사회라는 것이 구현된다고 하는 생각이 있다. 이 점에서 현대의 프랑스 사상에 공통되는 포스트정초주의의 흐름에 르포르를 위치시키고, 낭시, 알랭 바디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등과 관련시킬 수도 있을지 모른다.[각주:18] 다만 민주주의의 주체장소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예를 들어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바디우 등의 프랑스의 포스트 맑스주의적 사상가들과는 가까울 뿐만 아니라 거리도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가령 랑시에르는 주저 불화에서 이런 르포르에 있어서의 이런 미규정적인 장소로서의 인민내지 데모스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점을 쟁점으로 했던 것이다.[각주:19]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실상형상화작품화’(, 제도화)로 회수되지 않는, ‘무한프락시스를 보고 있는 낭시의 생각은 오히려 르포르와의 가까움을 보여줄 것이다.[각주:20]

르포르에 관한 연구는, 프랑스어권은 물론이고,[각주:21] 영어권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번역 소개나 독해가 진행되고 있다. 1인자로는 르포르 저작의 영어번역에 붙인 해설 등으로 그 사상의 보급에 진력한 딕 하워드가 있다. 또한 버나드 플린의 클로드 르포르의 철학은 프랑스어로 번역될 정도로 빼어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각주:22] 뉴스쿨포소셜리서치는 르포르의 사후 곧바로 추모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그 공적을 칭송하고 있다.[각주:23] 프랑스에서는 20123월에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20166월에는 과거 르포르가 가르친 칸 근교의 현대출판자료연구소(IMEC)에서 르포르를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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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발명에 대해

이 책에는 원래 독립적 형태로 각종 매체에서 공표된 11장이 2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초출은 원주를 참조). 그래서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초판에 대한 서문말미에서 말하듯이, 전체는 하나의 논의로 관통되고 있다.” 그것은 곧, “전체주의 국가는 민주주의에 비춰서만, 그리고 민주주의의 양의성에 기초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논의이다. 거기에서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발명은 동쪽에서 온 온갖 이의제기, 온갖 반항이라고 간주되고,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다(369). 1부와 제2부의 표제를 각각 따오면, 전자가 전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전체주의 개념의 이론적인 검토가 이뤄지는 이론편이며, 후자는 헝가리나 폴란드에서 반소련적·반전체주의적 봉기를 이런 민주주의의 발명새로운 조짐으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각 장의 내용에 대해서는 각각 첫머리에서 옮긴이의 요약을 붙여두었기에 자세한 것은 그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아주 간단하게 전체의 흐름만 확인해두면, 1장과 2장이 가장 이론적인 장으로, 전자에서는 인권개념을 축으로 근대의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고찰이 이뤄지고, 후자에서는 바로 전체주의의 논리가 정면에서 논해지고 있다. 3장은 스탈린이라는 인물과 스탈린주의와의 관계, 4장은 70년대의 프랑스 공산당·사회당의 좌파연합, 5장에서는 르포르 자신이 과거 맑스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빼져나갔는가라는 구체적인 테마를 다루고 있는데, 각 장의 후반부에서 전체주의의 개념 그 자체의 이론화가 시도되고 있으며, 서로 공명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2부에서는 6장에서 (주로 소비에트에서의) 반체제파의 문제, 7장에서 혁명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가 간결하게 논의된 후, 7장부터 9장에 걸쳐서 1956년의 헝가리 봉기(동란), 10장에서는 같은 해의 폴란드의 이른바 포즈난 폭동이라는, 스탈린 비판 이후의 반소련의 민중봉기가 다뤄진다. 11장은 같은 폴란드에서 80년대부터 연대노조를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하에서는 전체주의 국가는 민주주의에 비춰서만, 그리고 민주주의의 양의성에 기초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르포르의 기본 테제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가, 그 개략을 확인해두자.

르포르는 다양한 표현으로 전체주의를 특징짓고자 하는데, 가장 열쇠가 되는 것은 <하나인 인민(Peuple-Un)>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첫째로, 르포르가 논적으로 삼은 기존의 공산주의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둘째로 르포르의 또 다른 열쇠 개념인 분할의 철폐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우선 곳곳에서 이뤄지는 르포르에 의한 기존 공산주의 비판의 요점은, 공산당부터 트로츠키주의자, 좌익급진주의자 등등에 이르기까지, 사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전체주의라는 현상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분명히 파시즘과 나치즘에는 비판을 향했지만, 싸워야 할 것은 자본주의 체제이라고 하며, 소련에 대해 전체주의를 보려고 하는 비판은 자본주의에 이로울 뿐이라고 기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르포르에 따르면, 그들의 전체주의에 대한 맹목은 사실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국가를 인민의 의지와 권력에 종속하는 하나의 국가로서 파악하고, 궁극적으로는 <> 아래에서 국가가 사회와 일체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바로 이 발상이야말로 문제인 것이며, 공산주의 사상은 국가와 사회라는 상이한 차원의 구별을 철폐했지만, ‘권력의 특이성을 깨닫지 못하고, 관료제에 대해서도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그 특질을 분명히 밝힐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르포르에 따르면, 바로 이 점이야말로 전체주의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국가, 시민사회의 분할이 철폐되고, 하나의 신체를 이루듯이, 인민=프롤레타리아트로 융합한다는 생각이다. 5장의 제목이 적절하게 말하듯이, “신체의 일체성이야말로 문제이다(143). 이를 가장 선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2장 및 3장에서 인용되는 스탈린에 대한 트로츠키의 말이다(52, 99). 거기에서는 짐은 국가이다라고 말하는 루이 14세에게 나는 사회이다라고 말한 스탈린이 대치되어 있는데, 루이 14세의 시대는 아무리 절대왕정이었다고 해도, ‘사회의 부분이 그 외부에 남겨져 있었던 반면에, 스탈린의 전체주의에서는 <>을 매개로 하여 국가도 사회도 인민도 모든 것이 하나의 신체혹은 조직을 이루게 해서, <일자>로 환원된다.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반체제파는 이런 사회의 외부에 추방해야 할 <타자>, 신체의 건전한 일체성을 위협하는 기생자라고 지목된다. <하나인 인민>인 전체주의에 있어서는 내부에 분할이나 항쟁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다양한 분할이 철폐된 <하나인 인민>이라는 생각은, 단순히 추상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체주의에서의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할의 철폐란, 구체적으로는, 정치권력이 생산, 교육, 과학연구, 사법, 문화 등 본래 독립적이어야 할 시민사회의 각 영역에 침입한다는 사태를 동반하고 있다. 이런 영역들은, 비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각각 독립된 가치를 지니며, 그 나름대로 자율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체주의에서는, 정치적 차원, 경제적 차원, 법적 차원, 문화적 차원, 미적 차원, 과학적 차원, 교육적 차원 등의 분할까지도 철폐되고(르포르가 곳곳에서 말하는 <권력>, <>, <지식>이라는 것은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개의 심급을 가리킨다), 법적으로 무엇이 금지되고 무엇이 허용되는가, 학문적으로 무엇이 참인가, 교육기관에서 무엇이 가르쳐져야 하는가, 문화적으로 무엇이 옳다고 판단되는가 등등이 <하나인 인민>의 논리에 기초하여 결정되어 버린다 각각의 영역에 더 이상 독립된 판단을 내리는 심급이 없어져버렸다는 것이다. 르포르는 이런 융합을 실질적으로 전담하는 관료조직의 작동뿐만 아니라, 거기에 사기업적 논리가 침투하고, 관료 조직이 금융계나 산업계로부터의 압력에 종속한다는 구조도 물론 시야에 넣고 있다는 것도 부언해두자. <권력>, <>, <지식>에는 물론 <자본>도 보태진다.

이처럼 르포르는 전체주의에서의 표상이나 상징의 작용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소비에트적인 지배양식의 현실을 간과하지 않고, 거기로부터 이론적인 개념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상징의 차원과 현실/실재의 차원을 구별한 뒤, 그 양자를 오가는 형태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논하려는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마지막 장에서 얘기되듯이,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현실/실재에 사회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그것을 악마화해 버리는 그 전능함을 천진난만하게 상정하는 것의 단적인 물구나무 세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르포르에게 전체주의에 의한 상징적인이해가 필요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실재에 있어서는 다양한 분열이나 항쟁이 존재하기 때문에, 균열’(221, 319)을 봐야 한다. 그리고 이 균열을 지켜보면서, 거기에서 민주주의의 발명조짐을 읽어내는 작업이, 헝가리나 폴란드의 대중봉기를 논하는 2부의 주제이다.

이런 현실[실재]적인 균열에 기초하여, 르포르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가? 르포르에 있어서, 민주주의 사회는 어느 정도까지는, 지금까지 봤던 전체주의 사회의 물구나무 세우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와 사회, 사회 내의 지배층과 피지배층뿐만 아니라, <권력>, <>, <지식> 등등의 각 차원도 분리해야 하는 사회이다. ,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인민에게 <권력>의 원천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외재적인 <>에 제약되어야 하며, <지식>도 독립된 장소를 갖고 이어야 한다고 간주된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는 인민(peuple)’ 그 자체가 <하나인 인민>에 대항하고 일체화를 거부하고, 내부에 균열이나 항쟁을 들여온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르포르가 이따금 이의제기권리요구를 언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각각의 인민은 스스로의 권리에 기초하여, 혹은 현실/실재로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을 향해, ‘인민그 자체가 쥐고 있다고 하는 <권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 보면, ‘인민은 항상 완전한 일체를 달성하는 것이 없으며, 말하자면, “인민의 동일성은 끊임없이 물음에 부쳐진다”(150). 민주주의 사회가 내부인 이타성의 시련을 겪는다고 얘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129).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사회와 사회 그 자체의 분리로부터 새로운 사회가 끊임없이 산출되는 것이다.

참고로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조짐이 헝가리나 폴란드의 민중봉기에서 찾아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그런 예외적인 사태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르포르가 보통선거의 상징적 의미를 바로 이 지점에서 찾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 보통선거는 인민의 의지의 발현이며 새로운 사회조직의 정초인 동시에, 일체적인 것이라고 상정된 인민이 개별적인 수로 세어질 수 있는 단위로 변환되고”, 사회의 해체가 모방되는 계기라는 것이다(122-123). “수가 일체성을 해체하고, 동일성을 무화한다고도 얘기된다(149). 여기에 있는 것은 보통선거를 통한 이의제기라는 현실주의적 지적이 아니다. 오히려 보통선거를 통해 바로 사회라는 장소가 결코 일체화할 수 없는 항쟁의 장소로서 드러난다는 그 상징적인 작용이 문제인 것이다. 르포르가 사용하지 않는 이미지를 굳이 원용한다면,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속표지에 그려진 괴수 리바이어던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군중이, 개개의 다수의 군중으로서 가시화되는 계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각주:24]

헌데, 그렇다고 한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인민에 존재한다고 간주되는 권력이란 어떤 장소를 갖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그것은 인민이 스스로를 물으면서 새로운 사회를 산출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누구의 것도 아니다”(57). 민주주의에서의 권력은 공허한 장소(lieu vide)”, “정의상 점유할 수 없는 상징적인 장소이다(91). 참고로 르포르는 권력, 인민이 자율 혹은 자주관리를 위해 기피해야 할 것으로도, 똑같은 목적을 위해 탈취해야 할 것으로도 파악하지 않는다. 르포르에게 있어서 권력이란, 곳곳에서 얘기되듯이, 사회 공간을 질서화하고, 그것에 형태를 주고, ‘형상화또는 제도화하는 차원이다. ‘권력이 어떤 방식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형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하나인 인민>에 있어서의 <권력>, <>, <지식>의 융합으로서의 전체주의에 대해, “공허한 장소에 있어서의 다수의 인민의 내적 항쟁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대치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단순한 이항대립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다. , 단순히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항쟁적 민주주의의 실천으로의 유혹이 르포르의 최종 목표인 것은 아니며, 20세기의 정치경험에 대한 사회학적 관찰에 기초한 서술을 시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권력의 장소를 둘러싼, 정치사상사적인 이해가 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지적해둔다.

문제는 1장이 다루고 있듯이, 근대 민주주의의 도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점에 있다. 르포르는 이것을 중세 봉건제로부터의 해방으로서 파악하는 것도, 혹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주체화의 전단계로서의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중세의 신학정치적인 정치체로부터의 모종의 연장선상에서 근대민주주의의 도래를 파악하고, 그 위에서 양자의 차이를 봄으로써, 더욱이 이로부터의 전체주의로의 변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5장에서 상술되듯이, 이 논의는, 에른스트 칸토로비치의 왕의 두 가지 신체론에 근거하고 있다.[각주:25] 근대 이전까지는, 주권자로서의 왕은,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구체저인 신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mysticum)로 이어지는 초월적 질서를 반영한 정치적인 신체를 갖고 있었다. 이런 이 구상화된 외재적·초월적 질서야말로, 하나의 국가의 일체성을 떠받쳤던 것이다. 이에 대해 르포르는 근대 민주주의 혁명의 의의가, 왕의 신체가 파괴된다, 혹은 지금까지 초월적인 질서와 세속적인 질서를 연결했던 머리가 잘려짐으로써, 그때까지 하나의 신체를 이루었던 국가가 탈신체화(désincorporation)’한 점에서 본다(24, 149). 이런 외재적·초월적 질서 간단하게 말하면 <>의 질서 야말로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원천이며, <권력>, <>, <지식> 등 다양한 심급을 묶었지만, 이 연결이 해소되고, 각각의 심급이 독립해가는 과정이 탈착종화(désintrication)”이다(25). 근대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이런 탈신체화·탈착종화야말로, 앞에서 본 권력공허한 장소를 낳게 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권력>의 원천 내지 근거를 지금까지처럼 외재적·초월적인 질서에서 찾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근대 민주주의 사회란 권력, , 지식이 근본적인 미규정성에 노출된 사회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자신 속에 양의성또는 모순을 본질적으로 품고 있다. 권력의 장소는 이제 외재적 원천을 갖지 않고, “누구의 것도 아닌”, “공허한 장소이기 때문에, 새로운 원천은 인민자신 속에서 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 공허한 장소에, 현실적인 실체라고 상정된 대문자 <인민>삽입되고, 바로 그것이 권력의 주체라고 간주되자마자, 그 사회는 <하나인 인민>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것이다(이를 위한 가장 간편한 방법은, 내부인 타자를 대문자의 <타자>화하고, 이것을 외부의 혹은 기생자로서 배제할 것이다). 이 점에서야말로 전체주의는 민주주의로부터 태어났다는 말의 이유를 이해하는 열쇠가 있는 동시에, 그 이행을 방해하기 위한 이의제기, 권리요구 등 내적 항쟁의 실천의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정당성을 계속 요구해야 하는 동시에, <하나인 신체>로서 응고되고, 전체주의로 전화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항상 내적 항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다수화시키고, 스스로를 재창출=재발명(réinventer)필요가 있는 것이다(369).

 

위와 같이, 약간은 고풍스러운 대상을 다루고, 복잡한 논리에 입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시도가 어떤 것인지, 그 현실[실재]적 및 상징적 작용을 철저하게 캐묻고, 그리고 그것에 의해 민주주의라는 것의 윤곽을 밝히려고 하는 기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초판 간행 당시부터 30년 이상이 지났기 때문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대상도, 전제하고 있는 지적 틀도, 현재에서 보면 오래됐음을 느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겨우 30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망각하기에는 충분히 길지만, 잊힌 것이 되살아나기에는 적당한 세월일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눈앞에 있던 것은 과연 민주주의였는가? 만일 민주주의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면, ‘전체주의는 형태를 바꿔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물음을 생각하기 위해 약간 관점을 과거로 물리는 것은,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서도 결코 무익하지 않을 것이다.

 

 

  1. 일본어로 번역된 주된 논문으로는 다음이 있다. 「民主主義という問題」(本郷均 訳, 『現代思想』, 23巻 12号, 1995年)(『政治的なものについての試論(一九世紀―二〇世紀)』 수록), 「人権と政治」(松浦寿夫 訳, 『現代思想』, 17巻 12号, 1989年 ; 18巻 4号, 1990年(이 책에 수록), 「デモクラシーの社会学のために」(竹本研史 訳, 『アナール 一九二九―二〇一〇』, 第3巻, 藤原書店, 2013年). [본문으로]
  2. 그 중 카스토리아디스의 논문을 모은 것은 이미 일본어 번역이 있다. 『社会主義か野蛮か』(江口幹 訳, 法政大学出版局, 1990年). [본문으로]
  3. C. Lefort, « L’échange et la lutte des hommes », Les Temps modernes, nº64, 1951.(『歴史の諸形象』 수록). [본문으로]
  4. 일련의 논쟁은 다음의 일본어 번역에서 읽을 수 있다. サルトル, ルフォール, 『マルクス主義論争』, 白井健三郎 訳, ダヴィッド社, 1955年. [본문으로]
  5. E. de la Boétie, Le 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 Paris, Payot, 1976. [본문으로]
  6. E. Morin, « Claude Lefort(1924 -2010). Avec Lefort », Hermès, La revue, no. 59, 2011. [본문으로]
  7. 宇野重規, 『政治哲学へ──現代フランスとの対話』, 東京大学出版会, 2004年, 48頁 이하. [본문으로]
  8. 江口幹, 『疎外から自治へ──評伝カストリアディス』, 筑摩書房, 1988年. [본문으로]
  9. 일본어로 읽을 수 있는 르포르에 대한 문헌은 많지 않으나, 특히 エンツォ・トラヴェルソ의 훌륭한 책인 『全体主義』(平凡社新書, 2010年)의 관련된 부분은 유익하다. 또한 佐々木允臣 씨가 법학(특히 인권론) 분야로부터 일관되게 르포르를 논하는 것은 특필할 만하다. 그 중에서도 佐々木允臣, 『自律的社会と人権』, 文理閣, 1998年을 참조. 이 밖에도 松葉祥一, 「民主主義の両義性──クロード・ルフォールと「政治哲学」の可能性」(『現代思想』, 23巻 12号, 1995年) 및 宇野重規, 「メルロ=ポンティ/ルフォール 身体論から政治哲学へ」(『現代思想』, 36巻 16号, 2008年)도 참조. [본문으로]
  10. 「民主主義という問題」, 일역본 앞의 논문, 40頁. [본문으로]
  11. 프랑스의 학술지 『정치와 사회』의 2003년의 “프랑스에서의 정치철학의 회귀”를 주제로 한 특집호에서 편집자들은 르포르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G. Labelle et D. Tanguay(eds), « Le retour de la philosophie politique en France », Politique et société vol. 22, no. 3, 2003. [본문으로]
  12. M. Gauchet, Le Désenchantement du monde. Une histoire politique de la religion, Gallimard, Paris, 1985 ; L’avènement de la démocratie, Gallimard, t. 1 , t. 2, 2007, t. 3, 2010. 이하도 참조. マルセル・ゴーシェ, 『民主主義と宗教』, 伊達聖伸・藤田尚志 訳, トランスビュー, 2010年. [본문으로]
  13. アラン・カイエ, 『功利的理性批判──民主主義・贈与・共同体』(藤岡俊博 訳, 以文社, 2011年)을 참조. [본문으로]
  14. ジャン=ピエール・ルゴフ, 『ポスト全体主義の民主主義』(渡名喜庸哲・中村督 訳, 青灯社, 2011年)을 참조. 또 최근에는 남프랑스의 한 마을로부터의 정점 관측에 의해, 20세기의 프랑스 사회 전체의 변형을 묘사하고 있다. 『プロヴァンスの村の終焉』(伊藤直 訳, 青灯社, 2015年)을 참조. [본문으로]
  15. W. Breckman, Adventures of the symbolic : post-Marxism and radical democracy,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 [본문으로]
  16. 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 フィリップ・ラクー=ラバルト, 「政治的パニック」, 柿並良佑 訳, 『思想』, 岩波書店, 1065号, 2013年. [본문으로]
  17. P. Lacoue-Labarthe, J.-L. Nancy(dir.), Le retrait du politique, Galilée, 1983. [본문으로]
  18. O. Marchart, Political Difference in Nancy, Lefort, Badiou and Laclau,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7. [본문으로]
  19. ジャック・ランシエール, 『不和あるいは了解なき了解──政治の哲学は可能か』, 松葉祥一 dhl 訳, インスクリプト, 2005年, 167頁. [본문으로]
  20. 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 「民主主義の実相」, 『フクシマの後で』, 渡名喜庸哲 訳, 以文社, 2012年. [본문으로]
  21. 특히 다음이 중요하다. C. Habib et C. Mouchard, La démocratie à l’œuvre. Autour de Claude Lefort, Éditions Esprit, 1993 ; H. Poltier, Passion du politique. La pensée de Claude Lefort, Genève, Labors et Fides, 1998 ; N. Poirier(éd.), Cornelius Castoriadis et Claude Lefort: l’éxpérience démocratique, Le Bord de l’eau, 2015. [본문으로]
  22. B. Flynn, The Philosophy of Claude Lefort,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05. [본문으로]
  23. 그 기록은 우선 정치철학계의 학술지에 게재되고(Constellations, vol. 19, no. 1, 2012), 더 나아가 다음의 증보판으로 출간됐다. M. Plot(ed.), Claude Lefort. Thinker of the Political, Palgrave Macmillan, 2013. [본문으로]
  24.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ジョルジョ・アガンベン, 『スタシス──政治的パラダイムとしての内戦』(高桑和巳 訳, 青土社, 2016年)을 참조. [본문으로]
  25. エルンスト・カントーロヴィチ, 『王の二つの身体』, 小林公 訳, ちくま学芸文庫, 2003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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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성의 근원 (9) : 대표와 민주주의

大竹弘二

atプラス 19호(2014년 2월)


공개성의 근원 (9) - 대표와 민주주의20151103.pdf



1. 대표의 양의성

일반적으로 말하면, 정치지배자가 궁정에서의 의례, 혹은 법을 뛰어넘는 ‘자비’에 의해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는 정치적 공론장1)은 시민혁명의 시대와 더불어 소멸한다. 하버마스의 유명한 정식에 따르면, 지배자가 자신의 위신을 화려하게 상연하는 ‘대표적 공공성’은, 이념[원론]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토의에 기초한 ‘시민적 공공성’으로 이행한 것이다. 이제 공공성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지배자의 ‘광채[빛]’가 현시되는 극장적인 정치공간의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다양한 법권리나 제도에 의해 뒷받침된 합리적 의사소통의 공간이 된다. 정치의 공개성은 이제 권력의 가시적인 현전의 그것이 아니라, 담론적 토의를 통한 권력의 끊임없는 검증 가능성이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시민적 공공성의 중심을 이루는 정치제도는 토의를 그 본질로 하는 의회제이다.2) 그렇지만 의회주의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폭넓은 이해관심이 정치에 반영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는 비판이 자주 이뤄졌다. 의회는 때때로 ‘국민의 의지’와 합치하지 않는, 혹은 그에 반한다고 생각되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의회를 특수한 부르주아적 제도라고 비판하는 과거의 사회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나타나게 됐다. 의회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로서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일까? 대의제[대표제]로는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대변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보다 직접민주주의적인 제도로 개량하는 것이 본래 바람직한 것인가? 의회주의에 대한 이런 불만은 ‘대의제(representative)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애매한 성격과 관련된다. 즉, ‘대표(representation)’라는 개념의 양의성이 의회의 역할에 관한 이해의 엇갈림·간극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의회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말해지고 있는가?

도대체 일본어로 ‘대표’라고 번역되는 ‘representation’이란 무엇인가?3) 그것은 원래, 국민의 의지든 특정한 사회계층이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이해를 대리하거나 대변하는 것을 반드시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의 ‘대표제=대의적’ 민주주의에 관해 말해지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대중민주주의의 진전 속에서이다. 하지만 절대왕정기의 ‘대표적 공공성’이라고 말해지는 경우의 ‘대의’란, 이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던 ‘대표(representative)’라는 말은 중세가 되어 그 전문 분야적인 용법이 확정되는데,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충실하게 ‘모사하다’는 것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현전화함’으로써 처음으로 그것에 실재성을 부여한다는 것도 뜻한다. 이 말은 중세의 신학적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필두로 하는 ‘신비체’로서의 교회라는 사상과 결합되어, 비가시적인 것의 인격적 가시화·구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런 대표 원리는 근세의 절대주의 국가에서도 전용되어 그 지배의 정당화4)의 기초가 된다. 이 ‘대표적인’ 정치적 공론장에서는 영광 있는[영광스런] 지배자가 사람들 앞에 현전하는 것이 불가결하다(그 때문에 이런 의미의 ‘대표적’이라는 말에는 자주 ‘구현적’, ‘시위적’, ‘과시적’ 등등의 번역어도 배정된다). 즉, 대표에 있어서는 정치체이든 종교적 신비체이든, 하나의 질서가 상징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며, 바로 이것에 의해 비로소 그 질서가 실재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신학에서 유래하는 이와 같은 대표 원리는 지배를 ‘위로부터’ 정당화한다는 성격을 강하게 띤다. 대표로서의 지배자는 결코 특정한 사람들의 의견이나 이해를, 하물며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질서는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대표자에 의해 ‘위로부터’ 구성된다. 따라서 이 정치신학적인 대표 개념은 권위주의적인 함의를 갖고 있으며,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대립 개념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혁명 이후의 대의제[대표] 민주주의 아래서, 대표 이념은 민주주의와 결합된다. 그리고 19세기가 되면, 대표는 정치 질서의 가시적인 현시라기보다는 차츰 국민의 의견이나 이해의 대리 또는 대변이라는 의미를 강화하게 된다. 의회는 국민 또는 유권자의 이해의 대변자가 된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질서를 상징적으로 ‘현전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민의 의지를 충실하게 ‘모사’하는 것이다. 즉, 국민이 발흥하고 있는 ‘사회적인 것’으로의 종속을 피할 수 없는 가운데, 여러 가지 경제적·사회적인 이해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것이 대표라는 의원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표’의 본뜻에서 보면 하나의 추락으로도 보인다. 가령 칼 슈미트는 이 과정에 관해 “의회는 점점 더 정치 통일의 대표가 아니게 된다”5)고 표현한다. 의회에서의 토론 혹은 이해의 절충에는 어떤 영광도 기대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특히 19세기 이후의 독일에서는 ‘대표’와 ‘대리’를 구별하려고 하는 국법학[헌법학]적 담론이 누적되고, 단순한 (이익의) 대리에는 그치지 않는 대표의 의의가 강조된다.6)

이처럼 대표 이념과 민주주의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은 없으며, 오히려 근대민주주의의 발생기에서 이 둘은 대립하는 원리로서 나타났다. 이런 대립이 가장 명확하게 발견되는 것은 루소이다. 그의 민주주의론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정치의 극장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에 다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과전서』에서 제네바에 극장건설을 제언한 달랑베르에 대해 루소는 유명한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1758)에서 반박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모든 시각적인 표상으로부터 순화된 순수민주주의이다. 루소에 따르면, 극장은 공화국에 해롭다. 고대 아테네의 예가 보여주듯이, 정치가 극장과 비슷하게 될 때 민주주의는 몰락한다. 왜냐하면 극장은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와 관객의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시민들은 단순한 관중으로서, 정치가라는 배우를 보는 존재일 뿐이다. 그것에 의해 정치라는 무대는 공중으로부터 분리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슨 일이든, 그것을 연극에서 연기하면([mettre] en représentation au théatre), 그것을 우리에게 접근시키지 않고,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7) 루소가 보기에, 스토아적인 주인공의 항심(恒心)에 대한 ‘놀라움’에 의해서든, 비극의 주인공의 고난에 대한 ‘동정’에 의해서든, 연극이 관객에게 능동적인 작용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념을 환기시키는 것이든, 정치가 극장을 모델로 하여 이해되는 한, 시민이 단순한 수동적인 관중이 되어버린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주의란 상연되고 있는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기하는 배우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 사이에서는 어떤 공동성도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모였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서는 모두 혼자이고 외톨이가 됩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가 공화국에서 뭔가 ‘구경거리(spectacle)’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면, 그것은 민중 자신이 참여자로서 함께 행위하는 다양한 집회로서이다.9) 거기서는 이른바 관객 자신이 무대에 오르고 그 등장인물이 된다. 따라서 공화국의 축제는 반극장적인 극장이다. 그것은 대표(=표상)를 결여한 의사소통의 장에 다름없다.

정치에 관한 ‘안티 스펙터클’적인 이해는 아테네의 “극장지배(테아트로크라티아)”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이후 자주 보이게 된다(『법률』 3권 15). 그것은 종종 이성이 아니라 눈으로 판단하는 대중을 멸시하는 반민주주의적인 사상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렇지만 루소에게 민주주의는 오히려 극장 지배와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그에게 극장에 맞선 투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같은 말이다. 인민주권이 완전히 달성되는 것은 극장적인 공간에서가 아니라 공중 앞에서 스스로를 극장적으로 제시하는 모든 대표자가 소멸함으로써이다. 주권자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10)고 하는 『사회계약론』(1782)의 유명한 구절은 이런 스펙터클 비판의 관점에서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 이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 주권은 본질상 일반의지 속에 존재한다. 더욱이 일반의지는 결코 대표되는 것이 아니다.11)


대표가 있는 곳에서는 주권의 절대성이 훼손되며 주권자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게 된다. 루소는 인민주권을 그 순수성에 있어서 실현하기 위해 연기자와 관중 사이의 그 어떤 거리도 말소하려고 한다.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이 주권의 최고의 발현인 것이다. 정치는 인민‘의 앞에서의’ 실천이 아니라 인민‘에 의한’ 실천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크 주권의 기초인 대표 원리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은 바로 루소 안에서 가장 현저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어떤 국가형태든, 대표와 민주주의(‘동일성’)라는 양극을 이루는 두 개의 원리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대의제(대표) 민주주의란 본래의 ‘대표’ 개념에 관한 오해 위에서 성립되며, 이것들의 타협형태이다. 그의 이런 반의회주의적 해석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와는 별개로, 단순한 대리가 아닌 ‘대표’라는 뜻에 비추어 볼 때, 현대의 민주주의론의 상당수가 이것과는 대립하는 반-이미지적인 성격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 하버마스처럼 담론적 토의에 의해 민주주의를 정초하려고 하는 심의민주주의적인 시도는 말할 것도 없는데, 이렇게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믿지 않더라도, 적어도 정치적인 것의 극장화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보는 시각은 많은 논자들에게 공통적이다. 주지하듯이 기 드보르는 루소를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스펙터클 사회를 비판한다. “과거 직접 생겨났던 것은 모두, 표상(représentation) 속에서 멀어졌다.”12) 대표(표상)가 자립화되는 곳에서 인민은 그 스펙터클의 단순한 수신자, 혹은 소비자가 되어 정치로부터 소외된다. 권력으로부터 극장적인 성격을 빼앗고, 그 이미지성을 극복하는 것은 민주주의 이론의 계속적인 이상인 것 같다.


2. 죽음의 극장 : 영광의 신체와 그 종언?

역사적으로 보면, 프랑스혁명은 당장은 루소가 원했던 “대표적 공공성”의 극장장치의 해체를 수행한 듯이 보인다. 그것은 ‘죽음’의 상연이라는 바로크적 실천이 혁명과 더불어 의미를 상실했다는 사정 속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절대왕정 시기에는 죽음의 연극적 제시는 ‘대표적 공공성’의 한 가지 범형을 이루었다. 그것은 왕의 주권을 과시하기 위한 특히 주목해야 할 수단이 된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미 거듭거듭 다뤄졌듯이, 왕을 순교자로 묘사하는 바로크 시기의 문헌들 속에서 간파할 수 있다. 『에이콘 바실리케(왕의 상)』(1649)의 찰스1세, 또는 그리피우스의 바로크 극장의 주인공들이 그랬듯이, 왕은 죽는 것을 통해서야 스스로가 주권자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들에게 닥쳐온 비참은, 그들을 영광으로 높이기 위한 기회이기도 했다. 군주에게 필요하다고 간주된 스토아적인 항심의 덕은, 바로 죽음의 경험을 참아내는 가운데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증명되고, 그것이 순교자인 왕에게 주권자로서의 존엄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미 푸코의 『감시와 처벌』(1975)의 너무도 유명한 분석이 보여주듯이, ‘죽음’을 통해 주권권력을 현현시키는 절대왕정기의 실천은, 범인에게 가해진 신체형의 ‘화려함=빛남(éclat)’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처형에서 수형자는 고문이 뒤섞인 여러 가지 잔인한 수단에 의해 사지가 불에 태워지거나 잘리곤 했다. 군중은 공개적인 장에서 행해지는 이런 스펙터클을 구경하러 모이고, 시간을 들여 잔혹하고 심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신체를 일종의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고통을 주면서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런 처형법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죄인에게 가한다는 단순한 동해보복(탈리오)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같은 죄를 저지를 자를 위협하기 위한 본보기로서 가혹한 형벌이 가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체를 훼손하는 일련의 과정을 일종의 스펙터클로서 연출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권력에 영광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용되는 폭력의 극단적임 자체가 사법의 영광의 일부분을 만드는 것이다. 즉, 죄인이 고문을 당하고 비명을 지르는 큰소리를 낸다는 것은, 사법이 부끄러워 해야 할 측면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사법의 의례 자체인 것이다.13)


범죄에 의해 훼손된 것은 단순한 법 형식이 아니라 군주의 인격 자체이다. 그러므로 형벌은 단순히 죄에 걸맞은 벌을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위신을 ‘광채[빛남]’ 속에서 회복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형이 공개적인 장에서 민중에게 목격될 필요가 있는 것은 그것이 군주의 영광을 현현시키는 대표적인 공공성의 의례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라신느의 비극이 인간 정념의 혼돈 속에서 출현[등장]하는 주권자를 묘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체형은 바로 수감자의 신체가 찢겨지는 광경을 통해 주권을 현전시킨다.


일단 상처 입은 주권을 부흥시키기 위해, 그것을 하나의 의식이라고 말하자. 신체형은 주권을 그 완전한 빛남[광채] 속에서 현시하면서 그것을 부활시킨다.14)


이런 영광의 의례인 한에서, 신체형은 그 자체로, 군주에 의해 내려진 ‘자비’와 같은 기능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체형의 집행은 장시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군주는 집행의 한복판에 자비에 의해 개입하고, 이를 중단시킴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그 으뜸가는 ‘광채[빛남]’ 속에 노출시킬 수도 있다.15)

신체형은 군주에게 영광을 부여하는 한편, 수형자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보여줄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의례의 두려움 때문에 “수형자에게 부과됐던 치욕은 동정 내지 영광으로 역전될 여지가 항상 있었다.”16) 즉, 수형자는 그 비참한 죽음에 따라서, 일종의 성인 혹은 순교자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이다. 형의 공포를 앞두고, 혹은 가혹한 형의 한복판에서 만인의 눈앞에 나타난다. 스토아적 항심의 덕은 군주에서 죄인으로 그 장을 역전시키고, 바로 수형자가 비극의 순교자 왕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때, 그 자가 저지른 범죄도 (군주에게 허용되는 것과 동일한) 영광을 수반하는 범죄자로서 사람들에게 찬양받게 되며, 민중 사이에서 범죄자의 영웅화가 행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군주의 비극적인 희생이든, 죄인에 대한 신체형이든, 죽음을 상연함으로써 주권을 찬양하는 앙시앙 레짐의 비극적 실천은 혁명과 더불어 소멸한다. 혁명은 대표적 공공성으로부터 궁정이라는 의례와 축제의 장을 빼앗을 뿐 아니라, 영광스런 처형을 제시하기 위한 무대 장치도 빼앗는다. 이때 결정적인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길로틴 처형의 보급에 다름 아니다.17)

혁명의 한복판인 1792년, 길로틴을 통한 참수는 정식 처형법으로 채택된다. 그것에 의해 집행에 시간을 필요로 하고 수형자에게 많은 고통을 줬던 절대왕정기의 다양한 처형법은 이 신속하고 고통 없는 ‘인도적인’ 처형법으로 통일된다. 동시에 이제 처형의 기계화가 이루어진다. 이 기술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유례없는 대량처형이다. 길로틴이라는 처형기계 없이는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은 이른바 자코뱅 독재의 물질적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길로틴 형벌에 의해 초래됐던 것은 ‘처형의 민주화’18)이다. 이 형이 도입됨으로써 전에는 일반적이었던 것인 신분의 차이에 따른 처형법의 차별화도 이뤄지지 않게 된다. 또한 길로틴에 의한 참수라는 단순명쾌한 방법은 신체와 형벌 사이의 접촉을 한없이 순간적인 것으로 한다. 과거의 신체형과는 달리, 길로틴 형은 인간의 신체성과는 무관한 사건이다. 그것은 형의 집행인이 어느 정도 숙달된 기량을 갖추었는가, 혹은 수형자가 어느 정도 강인한 신체 혹은 정신력을 갖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죽음을 보장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수형자는 신체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귀책 능력이 있는 법적 주체로서 처벌받게 된다. 개별 인간의 물질적 신체성을 사상(捨象)하고, 그것을 보편 평등한 추상적 주체로 하는 근대 계몽의 이상은 길로틴과 더불어 그 실현으로 향하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길로틴 처형은 형벌을 신체적 스펙터클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같은 것에는 같은 것을>의 원칙에 따라 죄인에게 귀책을 행하는 근대적 처벌로 나아가는 첫발을 나타낸다. 이것에 의해 생기는 것이 처벌의 탈극장화에 다름 아니다. 처형은 민중에게 더 이상 각별한 흥미를 끄는 사건이 아니게 된다. 잘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기에 민중은 공개적으로 행해진 길로틴 처형에 몰려들고, 자주 그것에 환희를 느끼고 갈채를 퍼부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길로틴 처형은 과거의 신체형에 비해 볼거리로서의 성격이 현저하게 옅어지고, 민중은 그것에 열광한다기보다는 공개 처형 자체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주게 됐다는 것이 실상인 듯하다.19) 순식간이자 대량으로 행해진 혁명기의 길로틴 처형은, 이전의 처형에 있었던 연극적·종교적 분위기를 잃게 됐다. 거기서는 이제 어떤 비극성도 느껴지지 않게 되며, 수형자에게서는 그 성스러움을 빼앗게 되는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이제 처형을 통해 영웅적으로 죽을 수는 없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기에는 처형을 대신해 종종 자살이 자신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죽음의 수단으로서 선택된 것이리라.20) 실제로 이 시기에는 정쟁에서 패배하거나 수감되기도 한 정치가의 상당수가 처형되기 전에 스스로 죽는 것을 택했다. 이 ‘영웅적 자살’의 유형에도 고대 스토아파의 윤리가 강하게 영향을 줬음을 간파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프랑스 혁명의 정치가들은 스스로를 고대 로마의 영웅에 빗대고 이들의 행동거지를 모방했는데, 그들은 그 비참한 죽음에서조차 인간적 자유의 궁극적 징표로서의 자살이라는 로마 시대의 스토아적인 이상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혁명기에는 구체제 하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것, 즉 자살을 연극적으로 제시하는 시도가 행해지게 된다(자크 루이 다비드의 회화 『소크라테스의 죽음』 등). 혁명기의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죽음의 상연이라는 대표적 공공성의 무대 장치를 자기 것으로 하려 했다.

마찬가지로, 혁명기에서 절대왕정의 판타시즘의 흔적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공포정치 종료 후인 1795년 무렵에 일어났던 길로틴의 비인간성을 둘러싼 논쟁을 들 수 있다.21) 즉, 길로틴 형에 처해진 목이 처형 후에도 의식이 남아 있는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의학논쟁이다. 독일의 과학·해부학자 사무엘 토마스 폰 젠메링(Samuel Thomas von Soemmerring)의 연구에 의해 지지된 견해[所説]에 따르면, 몸통에서 분리된 목은 한동안 의식을 유지하며 고통을 계속 느낀다고 한다. 그렇다면, 길로틴 형은 결코 인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신체형에 못지않게 잔혹한 형벌임을 뜻한다. 의식의 중추를 머리에서 찾는 이 생리학적 관점에서의 길로틴 반대론은 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체(정치적 신체)라는 ‘왕당파적인’ 국가표상에서 그 대응물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려나간 후에도 계속 살아 있는 머리라는 이런 악몽은, 의학·생리학자인 피에르 카바니스에 의해 반박된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신체 전체의 유기적 기능이 공동 작용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체의 통일적 순환이 끊어진 시점에서 의식은 소멸된다. 머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신체라는 이 ‘공화파적인’ 생리학적 견해와 더불어, 국가를 인간 신체에 의해 구현화하는 절대왕정기의 상징적 이미지는 종언을 맞게 될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유명한 반박서에서 계몽과 이성의 ‘기계론적 철학’을 따르면 “우리의 제도가 어떤 인격 속에서 체현”되지 않게 된다고 한탄한다.22) 이른바 공화국이란 신체를 잃은 정치체(정치적 신체)라는 셈인 것이다.

길로틴 형은 “대표적 공공성”에서 보여진 가시성의 정치의 종언을 범례적으로 나타낸다. 그것은 구체제 하의 처형에 있어서 죽음이 띠던 아우라를 상실케 했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게 되며, 그 죽음은 그저 무명의 죽음이 된다. 이제 수형자가 처벌 속에서 자신의 오욕을 영광으로 전화시킬 수 없다. 이리하여 19세기 이후, 개별 범죄는 단순한 익명의 사건, 무수한 데이터의 한 사례가 되며, 범죄자는 갱생 또는 관리를 행하는 통치 실천의 대상으로 변용된다. 군주에 의한 것이든, 범죄자에 의한 것이든, 더 이상 법 침해 행위가 ‘광채[빛남]’ 아래에서 찬양될 수 없게 된 것이다.


3. 의회주의의 미학 : 공화국의 정치적 신체

그러나 근대의 정치적 공론장은 정말로 극장모델로부터 손을 떼려고 했을까? 근대 민주주의는 미적 표상에 의한 정당화를 거부하고 정치적 스펙터클에서 부정적인 가치만 찾아냈을까? 사실상 정치 질서를 가시적으로 현현시킨다는 의미에서의 ‘대표’ 관념은 시민 혁명 이후의 민주주의 안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시각적인 ‘대표적 공공성’에서 담론적인 ‘시민적 공공성’으로의 역사적 이행이라는 이해는 너무도 도식적이다. 상징적 대표에 기초한 전근대의 정치공간에도 이미 담론적 의사소통이 존재했듯이, 시민적 토의를 이상으로 삼은 근대의 정치공간에서도 대표적 현전의 계기는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토론을 그 주요 기능으로 삼는다고 간주되는 의회에 관해서도 들어맞는다. 즉, 근대의 의회제를 구성하는 요소들 안에서는 주권자의 영광의 현시라는 낡은 정치적 기능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단순히 유권자의 이해나 국민의 의견의 ‘대리’에 머물지 않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측면이 겉으로 드러날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가 “왕의 그림자 속에서”(필립 마노우) 검토해야 할 것은 대표로서의 의회가 지닌 미학적 성격이나 다름없다.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91년 9월 3일 국민의회에서 제정된 이른바 <1791년 헌법>은 루이16세기의 처형과 자코뱅독재에 앞서 프랑스사상 최초의 헌법이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데, 그 3편 2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모든 권력이 그것에서 유래하는 국민은, 파견대표(위임, délégation)에 의해서만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프랑스 헌법은 대표제적(représentative)이다. 대표자는 입법부와 국왕이다.23)


이 헌법은 행정부의 대표적 성격을 부정하는 한편, 입법부와 국왕이라는 이원대표제를 채택했다. 이들은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표’의 역할을 국민의 의견과 이해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의미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이전의 바로크적인 대표 관념을 계승한 것이며, 그 기능은 국왕과 의회 사이에서 분유되고 있다. 즉, 정치 질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국민’은 이들 대표자를 통해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다.

국민의 대표에 대한 이런 규정은 시에예스에서 그 이론적 기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개개인의 이해의 단순한 집합 이상의 것인 ‘인민의 의지’는 대표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대표만이 통일된 인민이다. 국민의 통합은 바로 대표일 뿐인 통일된 인민의 의지에 앞서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대표를 넘어서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고, 대표가 유일한 조직체이다. 분산된 인민은 조직체가 아니며, 그것은 하나의 의지를 갖지도 않으며, 하나의 생각을 갖는 것도 아니며, 뭔가 하나의 것이 결코 아니다.24)


 여기서 보이는 시에예스와 루소의 단절은 분명하다. 인민의 의지는 대표로서만 존재하는 한, 대표 없는 직접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 시에예스에게 의회제는 ‘간접’ 민주주의 따위가 아니라 이상적인 민주주의 형태나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인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 보면 의회제는 직접민주주의의 단순한 대체물로 볼 수 없다. 즉, 그것은 근대 국가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된 제도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의회주의의 질적 우위를 강조하는 담론은 역사적으로 거듭 나타났다. 예를 들어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은 『영국 헌정론』(1876)에서 의회의 ‘교육적 기능’을 주장하고, 선량(選良)으로서의 의원은 국민 여론을 이끄는 역할을 갖는다고 말했다.25) 만약 대표에 의해 비로소 국민의 의지가 구성된다면, 국민과 대표자를 연결하고 대표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선거’는, 그것이 어떤 제도를 취하든, 대표를 대표답게 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본질적인 것은 아니고, 우연적으로 채택된 절차라고 간주되기까지도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의원이 (국민 전체의 대표자로서 자신의 판단에만 따르는) ‘자유위임’에 근거하여 행동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선거구민의 의지와 이해에 종속되는) ‘명령위임’에 근거하는가 같은 친숙한 헌법학적 문제에는 파고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것은 근대 의회주의가 여전히 ‘대표적 공공성’과 마찬가지로, 모종의 의례적·미학적인 계기를 통해 정당성을 산출해 왔다는 점이다.

근대의 의회는 담론적이라기보다는 종종 상징적인 의사소통의 장이 됐다.26) 즉, 그것은 의례적인 수사나 이미지를 매체로 하여 대표(=표상)을 제시한다는 성격도 갖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궁정의 전례가 주권의 절대성을 대표했다고 한다면, 의회에서 대표되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인민이다. 그것은 단순한 국가의 통일이 아니라 국민의 통일을 대표한다. 즉, 거기서는 평등한 국민으로 이루어진 정치질서라는 것이 사람들의 눈앞에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국민 전체가 법권리상 혹은 경제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국민이 실제로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국민은 평등하다는 의제를 가시화시키는 것이 문제이며, 사실로서 국민이 대등하게 민주적 토의에 참가한다기보다는 그렇다고 하는 시각적인 효과를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한 가지 예로, 근대의 의회건축에서 채택된 회의장의 공간배치를 들 수 있다.27) 그것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응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지했음을 알 수 있다. 왜 (영국이라는 예외를 빼고) 많은 나라의 의회 본회의장은 반원형의 의식과 그것에 대면하는 연단 사이의 조합이라는 배치를 취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민혁명기에 유행한 신고전주의적 건축의 고대로의 회귀를 나타낼 뿐이 아니다. 즉, 그것은 단순히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반원형의 극장을 모방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 때 나온 의회건축 계획에서는, 국민 전체의 통일성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한 양식으로서, 의석을 완전히 원형으로 배치하는 것이 상당수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장된 이후 1798년부터 의사당이 된 파리의 부르봉궁전에서 볼 수 있듯이, 최종적으로는 그런 원형 플랜을 억누르고, 연단을 정면에서 보는 반원형의 의식이라는 배치가 보급된다. 이것은 단순한 기능적인 편리성 때문에 채택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원형의 의석에 앉는 것은 국민 각층으로 구성된 의원들이다. 거기서는 사회의 다양성이 가능한 한 충실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하지만 근대국가란 차이화를 수반하는 통일이다. 따라서 차이성과 동시에 인민의 통일성도 표현되어야 한다. 연설자가 선 연단이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즉, 연단은 왕의 죽음에 의해 공백이 된 국가의 중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제 각각의 연설자들은 (자신의 의석이 아니라) 그 연단에서 국민의 이름으로 연설한다. 그리고 의석의 의원들은 관중으로서, 무대 위의 연설자를 목격한다. 따라서 반원형의 의석과 연단의 조합은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을 지닌 국민국가를 상징하는 것에 다름없다. 그때마다 연설자에 의해 채워진 공허한 연단은 국가의 (부재의) 머리이며, 사회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의원들이 앉는 좌석은 그 몸통이다. 그런 한에서 의회는 이른바 공화국의 새로운 상징적 신체이다.

이런 왕의 정치적 신체의 유산은 근대 의회주의의 또 다른 요소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국민의회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주도 하에서 선언된 의원의 인신의 불가침 원칙이 그렇다.28) 이른바 불체포특권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듯이, 과거의 절대 군주가 행하는 의원의 자의적인 체포를 방지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국민의 대표체(coprs représentatif)”에 대해서는 어떤 권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의 표현이며, 이런 한에서 대표로서의 국왕의 신체가 갖고 있던 불가침성의 흔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슈미트는 이 특권을 “의회가 가진 대표로서의 성격의 한 가지 귀결”29)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대외적인 대표로서의 외교관의 신체의 불가침성과도 닮은 것이며, 과거 왕의 신성성을 이어받은 것에 다름없다.

그렇다면 푸코처럼 왕정 하의 국왕의 신체와 똑같은 기능을 맡는 “공화국의 신체라는 것은 없다”,30) 혹은 르포르처럼 “민주주의 사회는 유기체적 전체성의 표상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로서, 신체 없는 사회로서 창설된다”31)고 진단하는 것은 조금 성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의회제는 종종 절대왕권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 대표로서의 역할도 담지했다. 즉, 열린 장에서 투명한 논의를 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는 어떤 정치질서도 이룩할 수 없는 무정형의 인민을 주권자로서 현전시킨다는 기능이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사회적 이해의) 대리자로는 맡을 수 없는, 영광으로서의 대표 기능에 다름없다. 여기서 의회는 직접민주주의의 부득이 한 대용물에 머물지 않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은 결코 루소가 몽상했던 대표 없는 순수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여전히 자신에 관한 상징적 이미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의회주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토의의 공개성이라는 전제를 무조건 수긍할 수는 없다. 근대의 의회는 종종, 토의를 통한 합리적 결정에 의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가 국민의 대표라는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집행권에 대립해왔다. 독일 통일 후의 제정기에서 독일 제국의회는 그 한 가지 예를 이루고 있다.32) 프랑스의 1791년 헌법에서 볼 수 있는 이원대표의 문제가 계속 남아 있던 19세기 독일에서 제국의회는 집행권을 가진 또 다른 대표인 황제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신문·미디어와의 협력 아래서 스스로를 국민 대표로서 상징화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을 시도하게 됐다. 즉, 여기서 공개성이란 이미지 전략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표로서의 정당성은 ‘담론적’이 아니라 ‘미적’ 공개성을 통해 조달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국가에 대한 경제·사회적 세력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의원이 단순한 이익대리가 됨에 따라, 대표로서의 의회의 역할은 변질된다. 그리고 의회의 결정이 점점 더 비밀스런 이해 절충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 가운데, ‘미적’이든 ‘담론적’이든, 대표로서의 의회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될 터이다. 슈미트가 개탄하는 바에 따르면, 당대의 의회는 “보이지 않는 권력 보유자의 사무소 내지 위원회로 들어가는 하나의 커다란 옆문(Antichambre)”33)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적 이익집단에 의한 토론의 이념의 이런 타락은 원래 근대 의회주의가 토론 절차 자체의 공개성을 반드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는 간주하지 않았던 것의 내재적 귀결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모든 결정과정을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인민에게 열린 형태로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가라는 문제보다도, 얼마나 결정을 상징적·의례적으로 정당화하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 종종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의 공개성은 결코 계몽의 이념이 상정하듯이, 이성적인 비판의 심급이 될 수 있는 정치의 근본원칙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원칙이 아니라 단순한 수단, 즉 대중조작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정당화의 도구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과정을 정치원릭 비밀에서 공개로 이행하는 것이락 파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비밀의 실천뿐 아니라 공개성조차도 통치의 에코노미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과정으로 간주할 수 없을까?34) 즉, 통치는 더 이상 기밀과 음모를 조종함으로써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보를 공개하다는 것이 종종 효율적인 정치 운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근대의 통치는 그것을 수단으로 이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즉, 중요한 것은 공개성의 유용성인 것이다. 여기서 공개성은 비밀과 마찬가지로, 통치를 위한 전술적 장치나 다름없다. 근대정치에서 공개성의 원칙이 점점 중요하다고 간주되기에 이른 것은, 사실상 이런 통치 메커니즘의 재편성의 징후로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끝)



1) [옮긴이] 공공권(公共圈)은 공론장으로 옮긴다.


2) [옮긴이] 일본의 경우 의회제와 의회주의, 민주제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같이 쓴다. 이때 둘의 차이는 제도적 측면을 더 강조하느냐 이념이나 원리를 더 강조하느냐에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둘 다를 의미하기 위해 데모크라시라고 음차하기도 한다.


3) 대표 개념에 관해서 참조한 것은 Hasso Hofmann, Repräsentation, Berlin 1974: Adalberr Podlech, «Repräsentation», in : Otto Brunner et al. (Hg.) Geschichtliche Grndbegriffe, Bd5, Stutgart 1984, S.509-547. ; 칼 슈미트, 『憲法論』, 阿部間総裁/村上義弘 訳, みすず書房, 1974년, 제16장 및 24장, 나아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真理と方法I』, 轡田収ほか 訳, 法政大学出版局, 1986년, 205, 282頁.


4) [옮긴이] 정통화, 정통성은 각각 정당화, 정당성으로 옮긴다.


5) 슈미트, 『憲法論』, 앞의 책, 364頁.


6) Vgl. Hofmann, Repräsentation, a.a.O., S.15-37.


7) 루소, 『연극에 관해 :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演劇について ダランベールへの手紙)』, 今野一雄 訳, 岩波文庫, 1979, 56頁.


8) Ibid., 42頁.


9) Ibid., 224頁.


10) 루소, 『사회계약론(社会契約論)』, 桑原武夫/前川貞次郎 訳, 岩波文庫, 1954, 42頁(인용은 원문을 참조하여 수정).


11) Ibid., 133頁.


12)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スペクタクルの社会)』, 木下誠 訳, ちくま学芸文庫, 2003, 14頁.


13) 미셸 풐코, 『감시와 처벌[監獄の誕生]』, 田村倣 訳, 新潮社, 1977, 39頁.


14) Ibid., 52頁. (번역 수정).


15) Ibid., 56頁.


16) Ibid., 14頁.


17) 길로틴의 도입이 공개처형에 초래한 변화에 관해서는 ドリンダ・ウートラム, 『フランス革命と身体』, 高木勇夫 訳, 平凡社, 1993, 7장 참조. Dorinda Outram, The Body and the French Revolution. Sex, Class and Political Culture, Yale University Press, 1989.


18) Ibid., 184頁.


19) Ibid., 193頁.


20) Ibid., 6장 참조.


21) 이 논쟁에 관해서는 Philip Manow, Im Schatn des Königs, Frankfurt a.M. 2008, S.97ff ; ウートラム, 『フランス革命と身体』, 앞의 책, 187-190頁[Dorinda Outram, The Body and the French Revolution. Sex, Class and Political Culture, Yale University Press, 1989] 및 ダニエル・アラス, 『ギロチンと恐怖の幻想』, 野口雄司 訳, 福武書店, 1989, 66-89頁[Daniel Arasse, La Guillotine et l’Imaginaire de la terreur, Paris : Flammarion, 1987.] 참조.


22) 에드먼드 버크, 『프랑스혁명의 성찰(フランス革命の省察)』, 半漆孝麿 訳, みすず書房, 1978, 99頁.


23) Zit, nach : Podlech, »Repräsentation«, a.a.O., S.526. 이 프랑스 혁명기의 대표 개념의 의미에 관해 논하는 것은 슈미트, 『憲法論』, 앞의 책, 246-247頁. ; 이 밖에도 Hofmann, Repräsentation, Gallimard 1998, p.27-63.


24) Cité par Rossanvallon, Le people introuvable, ibid. p.38.


25) 월터 배젓, 「영국헌정론(イギリス憲政論)」, 『世界の名著60 バジョット, ラスキ, マッキーヴァー』, 辻淸明責任編集, 中央公論新社, 1970, 172, 201-204頁.


26) 근대의 의회주의에서 볼 수 있는 미학적 표상 전략에 관해서는 최근 급속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Vgl. Manow, Im Schatten des Königs, a.a.O., Andreas Schulz / Andreas Wirsching (Hg.), Parlamentarische Kulturen in Europa. Das Parlament als Kommunikationsraum, Berlin 2012; Jörg Feuchter / Johannes Helmarth (Hg.), Parlamentarische Kulturen vom Mittelater bis in die Moderne, Reden-Räume-Bilder, Berlin 2013.


27) Manow, Im Schatten des Königs, a.a.O., S.16-56. ; Philip Manow, »Kuppel, Rostra, Sitzordnung-das architektorische Bilderprogramm moderner Parlamente«, in : Feuchter / Helmrath, Parlamentarische Kulturen vom Mittelalter bis in die Moderne, a.a.O., S.115-129.


28) Manow, Im Schatten des Königs, a.a.O., S.64-75.


29) 슈미트, 『憲法論』, 앞의 책, 336頁.


30) 미셸 푸코, 「권력과 신체(権力と身体)」, 中澤信一 訳, 『미셸 푸코 사고집성5(ミシェル・フーコー思考集成V)』, 筑摩書房, 2000, 373頁.


31) 클로드 르포르, 「민주주의라는 문제(民主主義という問題)」, 本郷均 訳, 『現代思想』 23권 12호, 1995, 49頁.


32) 제정기의 독일 제국의회에 의한 자기 상징화의 실천들에 관해서는 Andreas Biefang, Die andere Seite der Macht : Reichstag und Offentlichkeit im »System Bismark«, 1971-1890, Düsseldorf 2009.


33) 칼 슈미트, 『현대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지위(現代議会主義の精神史的地位)』, 稲葉素之 訳, みすず書房, 2000, 11頁(번역 수정).


34) Cf. Michel Senellart, Les arts de gouvener, Seuil, 1995, pp.279-284.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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