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홀워드가 2015년 3월 15일부터 일본을 방문해서 두 번의 강연을 벌였다고 한다. 간단한 정보는 여기를 클릭. http://www2.gensha.hit-u.ac.jp/TransA/lecture20150315.html

* 이 두 번에 걸친 강연 내용이 최근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 『다양체』에 수록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목차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을 독서의 습관으로 틈틈이 옮겨적을 예정이다. 우선 두 번째 강연에 해당되는 <들뢰즈 이후의 정치>부터 옮긴다. 일본에서 이 강연의 제목은 「ジル・ドゥルーズと政治(”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였으나, 아래의 잡지에는 다음의 제목으로 수록됐다. ドゥルーズ流の政治/ドゥルーズ後の政治|ピーター・ホルワード|小泉義之訳. 일본과 한국에서는 번역어, 문장 구사 등이 다르기 때문에 홀워드의 원문을 구해서 대조해야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서 구태여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 아래의 본문을 보면 나오는 주라비슈빌리[주라비크빌리]의 글은 정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게재하다가 중단한 이치다 요시히코의 <혁명론>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홀워드와 교차하면서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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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이후의 정치 : 내재성과 초월 재고 (1/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최근 25년 동안, 아무래도 질 들뢰즈는 넓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대륙철학이나 프렌치 씨어리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들뢰즈 저작의 양상들을 둘러싸고, 이채로운 수의 책과 논문이 넘쳐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실제로 들뢰즈에 관한 전문연구서와 들뢰즈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책을 도서관의 빠른 검색으로 검색해보면, 이제 1200건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에딘버러대학에서 나오고 있는 시리즈 Deleuze Connections, 들뢰즈와 디자인, 들뢰즈와 건축, 들뢰즈와 교육, 들뢰즈와 인종, 들뢰즈와 공간, 들뢰즈와 그 밖에도 머리에 떠오르는 한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25권을 채웠고, 앞으로도 늘어날 예정입니다.[각주:1]

* 각주1에 달려 있는 주소는 다음으로 변경되었다. https://edinburghuniversitypress.com/series-deleuze-connections.html

이 일련의 제목이 반영하고 있듯이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곳은 차치하더라도, 유럽과 앵글로색슨의 근처에서도 많은 독자가 들뢰즈에게 매료되어 온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정치사상가로서의 그 중요성임을 보여주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파리나 런던의 대학에서 현대유럽철학이나 비평이론의 어떤 연구과정을 전공하려고 해도, 어김없이 들뢰즈와 공저자인 펠릭스 가타리에 관련된 정치적 모티프의 한 쌍과 다소간 직접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제가 만나온 이론 지향의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그 상당수에게는 미시정치, 탈영토화, 노마돌로지, 도주선, 전쟁-기계, 소수자로의 생성변화[소수자-되기], 자연스레 입에서 나오는 정치적 어휘의 대부분을 이제 뒤덮고 있는 몇 안 되는 용어의 고작 몇 개의 예입니다. 이런 학생들은 많은 것에 대해 논합니다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치하는 바로는, 들뢰즈는, 정치활동의 현대적 형태와 그들이 직면한 속박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참조처이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둘러싸고 금세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들뢰즈 자신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명시하지 않고, 굳이 말하자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 평등, 자유, 해방 등과 같은 주요한 정치적 개념은 그의 고려 바깥에 있으며, 자본주의와 분열증[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제출된 국가 비판을 별도로 하면, 별의별 정치제도, 통치의 기구, 입법대표정부의 기구에 대해 그는 그 이상의 논의를 거의 제시하지 않습니다. 거대 신문용으로 작성된 몇 개의 논설(유명한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관한 것입니다)을 빼면, 들뢰즈가 정치의 경위나 혁명에의 동원에 대해 일부러 자세하게 논의하는 것은 역시 드뭅니다. 들뢰즈나 들뢰지안이 정치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역시 전적으로 불분명하며, 현재 이용 가능한 들뢰즈 사전의 종류가 한결같이 소수자 정치”, “미시정치”, “혁명의 논의를 등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토픽에 대해 특별한 항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각주:2]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제 자신의 정의를 부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오랫동안 전통에 맞춰서, “정치란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의 다음과 같은 집단적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 1.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조직이나 상호행위(예를 들어 친족, 민족, 지리, 언어에 기초를 둔 형태들)로 환원할 수 없는 집단적 차원이며, 2. 다른 것과 구별하여 정치적집단성이나 공민적집단성을 구성하는 참가자들은, 평등과 포함을 기초로 상호관계를 맺으며, 다른 생활영역으로부터 따온 계층성을 기초로 하여 (예를 들어 군사명령을 기초로 하거나, 가정경제종교 권위를 기초로 하여) 상호 관계를 맺는 일은 없다는 것을 원리 원칙으로서 전제로 하는 집단적 차원입니다.[각주:3] 더 한정해서 강조해 둡니다만, 데모크라시의 정치는 보통의 인민의 힘에, 즉 그 어떤 형태의 특권단체나 지배계급과도 싸워 이기는 인민 일반의 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논했는데요, 민주주의와 여러 가지 형태의 과두제나 재산제(plutocracy)(그 대부분은 ‘(다른) 민주주의라고 자칭합니다)를 가장 간편하고 명백하게 구별하는 방식은, 루소(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등의 자코뱅파가 감복해서 계속 인용하는)가 주권의 기초를 인민의 의지에 둘 때의 논리, 일반의지 혹은 인민의지[의 논리]에 입각하면서, 인민주권의 우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집단의 실재의 기초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에게 짐을 지우는 그 역량, 그렇게 해서 적대적이고 타율적인 결정의 형태들에 (단지 저항한다기보다는) 승리하는 그 역량에 직접적으로 놓여져야 합니다. 거꾸로, 이 일반 역량의 기초는, 서로 강화하는 집단적인 능력들과 역량들, 특히 집회·교육·정보·토의(deliberation)·조직화·결의·실행의 역량들에 놓입니다.

* 각주 4에 붙은 주소는 여기를 클릭.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정치에 대한 위와 같은 노골적으로 주의주의적인 구상은 들뢰즈와의 정면충돌을 야기하는데요, 오늘 여기에서는, 바로 이 충돌을 저는 정밀조사하고 싶습니다. 들뢰즈의 저작에 인민이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출현하더라도, “도래할 인민[민중]”이라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형상으로서 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적인 자동기계를 집단적 형태로 개조했던 것은 아닐까요?[각주:5] 무의식, 욕망의 기계적이고 사실은 자동기계적인 성질, 경험의 분자적 혹은 하위-개체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철학은 정치적 의지와 의지적 활동으로부터 가장 먼 것은 아닐까요? 저는 들뢰즈의 최초의 가장 열심인 독자의 한 명이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게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그가 1996년의 중요한 논고에서 엄밀하게 강조했던 것처럼, 정치적 좌파는 일반적으로 주의주의를 참조축으로 하여 자기를 정의하지, “들뢰즈는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주의주의적이지 않은 철학을 전개했다. 항상 들뢰즈는 진정한 사고와 생성하는 모든 근본적으로 의지적인 성격을 주장했다. 그리고 어떤 계획에 입각해 세계를 바꾼다거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바꾼다는 등의 일처럼 그에게는 인연이 먼 것은 없었던[각주:6] 것입니다.

들뢰즈적인 정치가 있다면, 물론 그것은 비주의주의적이라고 기술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며, 널리 유럽철학에서 좌파현대정치분석으로서 통용되고 있는 것의 실로 상당수가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바로 들뢰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권과 그 동족어에 대한 유행의 산만한 비판을, 특히 그것이 무엇이든 지도 주체나 주권적 주체”(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괴물적인 혼란입니다!)에 대한 거절을 보세요. 자크 데리다에 의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책임을, 적극적 자유의 그 어떤 구상으로부터도, “, 지배, 폭력으로서 규정되는 자유, 나아가 기능으로서, ‘나는 할 수 있다의 가능성으로서 규정되는 자유로부터도 분리하려고 하는 미수에 그친 기획을 계승하는 유산을 생각해 보세요.[각주:7] 조르조 아감벤을, 그리고 또한, 대륙-철학계에서는 최근 들어 일정한 견인력을 갖춘, 티쿤(Tiqqun), 보이지 않는 위원회(the invisible committee), 공산주의이론(Théorie communiste) , 다양한 공산화가속주의의 주장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이것들에 공유되고 있는 것은, 활동가와 그 현실적 정치 역량을 합병하는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아감벤에 의한 비판, 숙려[토의](deliberate) 단계와 스텝step을 밟아나가도록 틀이 부여될 수도 있는 활동의 전략적차원 모두에 대한 아감벤의 거절입니다. 모든 구성적권력[]의 거절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라면, 중지[허공에 매달림]와 외톨이로 틀어박히기라는 위로, 그저 결핍시키는힘에 의해 약속되는 저 순수한 비-잠재성의 림보뿐입니다.[각주:8]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그것은 20년 이상 전에 처음으로 학위논문의 1개 장에서 소묘했던 것인데요, 들뢰즈에 대한 저의 비판적 결론의 입장에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푸코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축하의 말을 건넨 것은 유명하지만, 그 정치적 의의에 관한 한, 그것은 금세기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기간이 계속된 것은 (혹은 시각에 따라서는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 이름에 값하는 모든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인민의 의지, 그것에 대항하는 어떤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세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자코뱅적 주장으로부터, 정치적 사고가 철수하고 있는 동안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가 정치적 사고에 있어서 중심적인 참조점으로서 부상한 것은, 어떤 기간, 대략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승리의 기간, 1970년대 초기에 시작되고 일련의 현저한 인민의 패배를 특징으로 하며, 19세기와 비교하고 싶어지는 불평등·항복·복종의 형태의 부활을 결과로 하는 기간에, 들뢰즈가 퇴각의 입장을 위해 부족함이 없는 철학적 견해를 제출한 한에서인 것입니다.

주의주의적정치구상과 비주의주의적정치구상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부딪칩니다. 한편으로, 정치활동가에 대한 구상, /녀의 의지적 활동의 역량에 관해서, 다른 한편으로 활동가와 활동가가 살아가는 상황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해방식에 관해서입니다. 아래에서는 이런 두 가지 점을 순서대로 쫓습니다.

 

1. 루소와 로베스피에르에서부터 레닌과 그람시를 거쳐 프란츠 파농과 체 게바라에 이르는, 넓게 -자코뱅적인 전통은, 정치적 의지의 행사를 목표·의도·동기 등의 고전적인 심리적요인과 연합시키는 것을 늘상 해왔습니다만, 이와 동시에 의지의 실행과 행사를 단순한 소망과 변덕의 표현이 목적에 동의하는 자는 그 수단을 거부할 수 없다”(루소)라는 클리셰, 달리 말하면, “목적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 그 수단도 의지해야 한다”(그람시)라는 클리셰에 입각하고 있더라도, 단순한 소망이나 변덕의 표현과는 구별하고 있습니다.[각주:9] 루소 이후, 의지(vouloir)(pouvoir)은 서로 맞바꿀 수 있으며, 목적을 의지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활동가의 역량에 의해 매개되는 것입니다. 활동가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활동가가 교육되고 의식적이고 유덕해지고 단련될수록 그 활동의 영역이나 그 의지의 권역은 점점 더 일반적이게 되고 원대해지는 것입니다.

활동가[배우]에 대한 들뢰즈의 구상 일반에서 곧바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활동을 위한 본래적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 즉 자신의 기획과 사업을 숙고하고 의식적으로 정식화하고 개시하기 위한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들뢰즈가 전투의 사건을 고찰할 때, 그의 관심은,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느냐에도, 군사적인 전략의 방식이나 이유에도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관심은, 활동가로서의 병사, 상황에 응답하여 결정을 내리고 개별 목표를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잠재적 사건 그 자체로서의 전투의 무차별적이고 익명적인 성질에, 활동이나 퇴각의 역량의 모든 것을 상실하고 포기한 자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성질에, 들뢰즈의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활동가, “더 이상 용감도 비겁도 아니고, 더 이상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사건>이 현전하는 그 장소에서, 그렇기에 그 가공할 정도의 비정함에 참여하는 치명상을 입은 병사”(LS, 100~101)인 것입니다. 전투의 위쪽으로, 전투를 넘어서, 전투를 통과하여 존재하는 자만이, 전투를 사건 또는 본질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사무엘 베케트의 범례적인 등장인물이 사물의 잠재적 리얼리티에 대해 적격이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소진하고, 그저 가능적일 뿐인 것의 영역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소진한 인물만이 가능적인 것을 소진할 수 있다. 모든 욕구need, 선호, 도달목표, 의의를 체념해버렸기 때문이다. 소진한 인물만이 충분히 이해관심을 떠나고 있다.” 소진한 인물만이 재차 올라가 돌아가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CC, 154-155). 그 조건 하에서 그/녀는, /녀가 그 일부인 리얼리티를 진정으로 수 있다. 소진한 인물은, 그들을 흡수하는 환경에 일체의 주도권을 버리고 맡겨버린다. “거친 대해를 떠다니는 코르크처럼, “그는 이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경계 속에 존재한다”(CC, 26).

들뢰즈가 물색한 다수의 시나리오 중 어떤 것을 취하든, 숙고적이고 목적론적인 자유는 그저 반응적이고 제한적인 편견이라며 기각되고, “더 심층의 형태의 강제, 자동조작, 용해가 지지되고 있습니다. 주체 자신의 결정이 진정한 귀결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견지, 요컨대 전략의 견지는, 들뢰즈의 사고의 구상과는 철저하게 무관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관한 그의 두 권의 책의 궤적을 아주 간단하게 대층 그려보면, 등장인물이 지각과 활동을 조절하는 역량을 계속 갖고 있는 (전쟁-전의) 상황으로부터, 감각-운동역량을 탈취당해 무엇인가에 홀려 있는 모양의 사람이 반응하지 못하고, 반응을 의지하지도 않는상황으로의 이행에 있게 됩니다. “감각-운동의 결합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구상공간은, 긴장과 그 해소에 따라서, 목표, 장벽, 수단, 우회에 따라서 조직화되기를 멈춘다.” 활동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지각은, 압도적이고 환각적이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結晶)을 통하는 듯한 직관을 통해서, 인물은 수동적인 보는 자가 되며, 무엇이든 현재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할지도 모르는 것에는 무관심해지며, 반사적 반응에 대해서조차 무감응해진다. “그토록 그 인물에게 있어서는, 정확하게는 무엇이 상황 속에 있는 것인가를 보는욕구need가 크다는 것이다”(C2, 126-128). 이런 통찰의 비용은 전적으로 명명백백합니다. 그것이 요청하는 것은, 활동가의 카타스트로피적인 마비이며, 유기체의 문자 그대로의 분해, 혹은 이것에 준하는 분해입니다. 전투를 지각하면서 죽어가는 병사를 철저하게 넘어서 사납게 날뛰는 전투처럼, 이제 사건은, 사건을 선동하고 사건에 반응하는 인격에 관계없이, “부동성, 석화작용, 반복”(C1, 207; C2, 103)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구도가, 들뢰즈가 문학을 참조할 때 특권적으로 끄집어내는 많은 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베케트의 소진시키는 자동기계, 카프카의 절대적인 분자적 탈영토화”(K, 58), 나아가 멜빌의 바틀비이며, 그 비타협적인 나는 하지 않고 싶은데요, 변함없이, “말과 활동을 절단하고, 더욱이 사물, 이유, 목표에의 지시를 언어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입니다.[각주:10] 이 점을 조금 자세하게 예를 들어 풀이하기 위해(또 다시 들뢰즈의 저작=신체corpus에 이어서는 통상적인 정치적 맥락이 그 관계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들뢰즈의 프루스트 독해를 간단하게 고찰해봅시다.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1972년판의 짧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데요, “이 책은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가, 비의지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움직이는 기호의 경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PS, vii)는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화자가 학습하는 것은, “진리는 계시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누설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의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비의지적이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최대 테마는, 진리의 탐구는 비의지적인 것에 특징적인 모험이라는 것이다. 사유를 강제하고 사유에 폭력을 가하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사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라이프모티프는 단어 강제력이다. 우리에게 보도록 강제하는 인상, 우리에게 해석하도록 강제하는 조우등등(PS, 61).

일반적으로, 들뢰즈가 논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 기억, 상상, 지성, 사고 같은 능력들은, “의지적으로 행사되는 한에서는 우발적으로만 행사될 뿐이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그저 똑같이 우리는 기억하고 상상하고 인식하고, 그 반대도 그렇다.” 이것과 대비적으로,

 

어떤 능력이 그 비의지적인 형태를 걸칠 때마다, 그 능력은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곳에 도달하고, 초월적인 행사로까지 상승하고, 다른 것으로 치환 가능한 그 힘과 자신의 필연성을 이해한다. 능력은 교환 가능하기를 멈춘다. 비의지적인 행사는, 각 능력의 초월적인 한계이며 그 사명이다. 의지적인 사고를 대신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고하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사고하기를 강제당한다. (PS, 62-63).

 

그때, 비의지적인 사고란, 필연성의 완전한 강제력과의 조우입니다. 혹은 오히려, 조우의 우발성을 필연성의 무심한 운명과 제휴시키는 경험입니다. 여기에서, 비의지적인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유명한 몰두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활동가의 진행성 마비와 활동가의 세속적 기획과 낭만적인 기획 모두의 용해를 다시 요구하는 듯한 그런 내러티브의 도정, 그 최초의 열약(劣弱)한 단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자의 감각-운동 시스템은 소모시키고, 활동과 반응에 있어서의 그저 현실적인시간성에 대해 무관심한,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그가 학습하는 것은 말하자면, “순수상태의 시간에 입력하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기관없는 신체이며 미소한 기호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관찰되지 않으며”, 그가 조우하는 다양한 인물을, “그 자신의 망상의 똑같은 수의 마리오네트에, 그의 기관없는 신체의 똑같은 수의 강도적인 힘에, 그 자신의 광기의 똑같의 수의 프로파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각주:11]

프루스트의 화자가 따라가는 궤적과 영화론이 끄는 궤적은, 대체로 비슷한 호[孤]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또한, 들뢰즈의 작품 전체를 통해 상이한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 지도에 배치되는 것은, 활동가의 진행성의 무-능력화, -현실화, 대항-현실화, 활동가의 용해이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런 리얼리티의 절대적 필연성과 충족성 안에서의 직접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침례[전신을 물에 담그는 세례](immersion) 때문입니다.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일상경험이 활동에 대한 관심에 의해 뒷받침되고, 감각-운동 메커니즘을 통해 감각과 활동을 결부시키는 신체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면, 진정한 통찰을 위해서는 그런 관심의 정지와 그 메커니즘의 탈구가 요청될 겁니다. 현실적인 것은 유기체의 기능[함수]이라고 한다면, 잠재적인 것은 전반적인 탈-유기체화로 이끌 겁니다. , 글자 그대로 탈조직화된 신체, 그 생물로서의 통합성과 정합성을 박탈당한 신체, 들뢰즈와 가타리가 아르토를 좇아 부르는 바의 저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를 설정하도록 이끌 겁니다. 그런 신체는, 조우하는 사건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이해, 목표, 계획의 매개 없이 즉석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모든 기획은, 존재하는 것, 존재할 터인 것의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무너집니다. 이것이 운명애입니다.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는 이 비주의주의적궤적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그 궤적은,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이 동일한 지점에, 의지가 허위 문제이게 될 뿐인 지점, 허위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의지가 사건의 자기-긍정으로서 사건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지점에 도달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기묘하고도 철저하게 스피노자적인 세계의 지각에 도달하고, “산소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었음을 마지막에 이해하게 되며, 산소 없이 호흡하려고 하는 지점에 손을 대는[노력을 기울이는][각주:12] 것입니다. 이렇게 제언해도 크게 과장이 되지는 않을 테죠. , 들뢰즈에게서는, 활동을 가능케 하는 활동가의 기운을 돋우는 것은 모두, 그대로, 우리가 그로부터 도주하려고 해야 할 억압이며, 동시에, 동일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바로 그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가 필연성의 유일한 흐름의 지각할 수 없는양태가 되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는 도주선을 물색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들뢰즈가 고찰하는 다양한 생성변화 혹은 되기”(예를 들어 여자-되기, 동물-되기, 노마드-되기)의 상대적인 가치가 어찌 될 것이냐 한다면, 그 가치는, 되기가 탈영토화한 형태 없는 질료를 위해활동하는 정도에 따라서, 또한, “지각할 수 없는 것은, 되기의 내재적인 목적이며, 그 우주의 공식이다라는 무자비한 텔로스에 입각하면서 활동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입니다.[각주:13]

주라비슈빌리 같은 독자가 들뢰즈의 방향성에 있어서의 가차 없는 스피노자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들뢰즈의 이 방향성에 막연한 혁명적억양을 불어넣고자 하는 꽤 어설픈 시도는, 천박한 속임수가 되기 십상이고, 어떤 종류의 정치활동에도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실천적 곤란들에 대해 결단코 무관심해지기 십상입니다. 들뢰즈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스피노자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면서도, -마오이스트의 철학자 기 라르드로는, 들뢰즈의 다른 독자에게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력(impact)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소책자에서, 들뢰즈의 형이상학의 정치적 함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스토아학파로서, 그리하여 평화주의와 영적 달관[諦観]의 처방전으로 특징지어집니다.[각주:14]

  1. Harvard University Library system, HOLLIS search, 9 March 2015. ‘Deleuze Connections’, ed. Ian Buchanan, University of Edinburgh Press, http://www.euppublishing.com/series/delco [본문으로]
  2. Cf. Adrian Parr, ed. The Deleuze Dictionary (2010); Eugene Young, ed., The Deleuze and Guattari Dictionary(2013) ; François Zourabichvili, Le Vocabulaire de Deleuze (2003). [본문으로]
  3. 표준이 되는 참고문헌은 Aristotle의 Politics이다. [본문으로]
  4. Cf. Hallward, The Will of the People: Notes Towards a Dialectical Voluntarism, Radical Philosophy 155(May 2009), 17-29. online at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본문으로]
  5. Cf. C2, 263 ; EP,131, 158, 160. [본문으로]
  6. Fran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risme en politique)”, in Eric Alliez et al, eds.,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1996), 335. [본문으로]
  7. Derrida, Rouges[2002],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40. [본문으로]
  8. cf Agamben, “From the State of Control to a Praxis of Destituent power”, Athens, 16 November 2013 ; cf. Agamben, “From Limbo”, The Coming Community(1993) [본문으로]
  9. Rousseau, Discours sur l’économie politique, Œuvres complètes, vol. 3(Pléiade), 263; Gramsci, Worker’s Democracy (1919), Pre-prison Writings, 99; cf. Trotsky, Terrorism and Communism(1921), Verso ed., 25. [본문으로]
  10. CC, 73-74. 주라비슈빌리의 비주의주의적 독해에 있어서, 바틀비가 “들뢰즈적 정치의 상징적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49). Cf. Agamben, Bartleby, or on Contingency, in Potentialities (1999). [본문으로]
  11. PS, 117-118; AO, 69; PS, 181-182; cf. RF, 30-31, 38-39; NP, 103-110; DR, 147. [본문으로]
  12. Zourav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56-357. [본문으로]
  13. K, 13; TP, 279; Cf. DC, 45; C2, 190. [본문으로]
  14. Guy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à l’occasion de Deleuze(Verdier, 1999), 51. 특히 어떻게 최선의 방식으로 필연성에 적응하는가, 어떻게 “흐름을 타는”가, 혹은 상황의 내재적 “생성”에 따라서 자기를 방향짓는가를 탐구하는 사상가(스토아학파, 스피노자, 흄, 베르크손 …)에 이끌려서, 라르드로는 이렇게 논한다. “푸코와는 달리 … 이성의 존엄[을 지킬] 만한 것에 대항하여 들뢰즈가 떨쳐 일어난 것은 한 번도 없었다”(ED, 45; cf. 72). 물론 라르드로 자신은 중립적인 독자가 아니라, 과거, 이른바 “신철학” 논쟁 무렵, 드물게도 들뢰즈 자신이 비난을 폭발시켰을 때의 표적 중 한 명이었다. 다음을 보라. Deleuze, “A propos des nouveaux philosophes et d’un problème plus général”(1977), in RF; Guy Lardreau and Christian Jambet, Une derniere fois, contre «la nouvelle philosohie», La Nef 66(January 1978), 35-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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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서 사건의 생산으로

: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들뢰즈=가타리적 정치

出来事から出来事生産: アンチ・オイディプスにおけるドゥルーズ=ガタリ的政治

 

사토 요시유키(佐藤 嘉幸)

思想(1087), 7-32, 2014-11, 岩波書店

(http://ci.nii.ac.jp/naid/40020237216/)

 

* 프랑스어 원문 및 한국어 번역본 대조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2017년 3월 24일]



1.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또한 들뢰즈 철학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위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본고를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고 싶다. 그런 질문을 던질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오늘날 들뢰즈의 철학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모종의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알랭 바디우는 자신의 들뢰즈론인 들뢰즈 : 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심지어 들뢰즈의 존재론이 다양성의 존재론이 아니라 여럿을 하나에 구속시키는 존재론, 말하자면 존재론적 파시즘[각주:1]이라고 논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들뢰즈의 근본 문제란 분명히 여럿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여럿의 사유를 <하나>의 쇄신된 개념에 접어넣는 것이다.”[각주:2]

 또 슬라보이 지젝은 바디우의 강한 영향 아래서 작성된 들뢰즈론인 신체 없는 기관에서 들뢰즈가 혼자서 쓴 의미의 논리에서의 정적 생성의 탐구, 즉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높이 평가하고, 반대로 들뢰즈=가타리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의 최악의 책이라고 단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들뢰즈 자신의 텍스트 속의 그 어떤 것도 결코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적시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들뢰즈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들뢰즈 홀로의 작업에서는] 매우 엘리트주의적인 필자이며, 정치에는 무관심하다.”[각주:3]

바디우와 지젝이 들뢰즈를 평가하는 전략은 매우 닮았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들뢰즈 홀로의 작업, 특히 그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평가하는(혹은 단죄하는) 것이다.[각주:4] 그런 전략은 바디우와 지젝이 둘 다 라캉과 매우 가까운 이론적 입장postion에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바디우와 지젝은 정치적 라캉주의라는 그들의 이론적 입장에서 라캉 이론 혹은 정신분석 자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들뢰즈 철학에서 전면적으로 삭제한다는 전략을 선택하고,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정치성을 완전히 부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는 반대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회체와 주체의 생성변화의 탐구를 높이 평가한다. 들뢰즈=가타리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야말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의 정치성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책이며, 그 가치는 이 책이 주체뿐 아니라 사회체 자체의 생성변화를 사고했다는 것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는 들뢰즈의,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최고의 도달점이라고 위치짓는다.

여기서 또 다른 한명, 다른 철학자에 의한 들뢰즈 비판을 다뤄보자. 그것은 들뢰즈파 철학자로 간주되고 실제로 바디우나 지젝보다 들뢰즈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 의한 비판이다.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와 가능적인 것 : 정치에 있어서 비주의주의에 관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주로 들뢰즈=가타리의 논고 68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각주:5]를 참조하면서, 들뢰즈에게서의 사건개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사건에 응답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회는 혁명적으로 되기에 있다. 이것만이 치욕을 불식하는 것, 혹은 참기 힘든 것에 응답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런 명법은 전혀 주의주의적인 게 아니다. 이제 의무 존재에서 존재로 복귀하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것을 어떤 외적이고 초월적인, 따라서 전제적이고 무능한 판단에 종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의지는 이제 사건에 선행하지 않으며, 대립은 세계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지, 어떤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에서 작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사건에 응답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세계 속에서, 더 이상 그 세계를 참을 수 없는 한에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책임=응답 가능성이, 통치나 주요한 주체들의 그것과는 이질적인, 고유하게 혁명적인 책임=응답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일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계획도, 어떤 집단의 이해도 대표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이 이해는 바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방향=의미에서 변화하고 있는지를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을 앞에 두고 책임=응답 가능성을 지고 있는 것이다.[각주:6]

 

한편으로 사건은 견디기 힘든 것의 새로운 의미를 출현시킨다(잠재적 변동). 다른 한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의 이 새로운 의미는 어떤 창조행위를 호소한다. 그 창조행위란 변동에 응답하는 것이며, 새로운 이미지의 도면이며, 문가 그대로 가능한 것을 창조한다(현동적 변동). 가능한 것을 창조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집단적 공간-시간적인 배치arrangement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에 의해 창조된 삶 자체의 새로운 가능성에 응답하는 것이며, 혹은 그 가능성의 표현이다.[각주:7]

 

주라비슈빌리에 따르면, 들뢰즈적 정치(“혁명적으로 되기”)란 주의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선, 세계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의미가 산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산출된 새로운 의미=사건에 응답하는 것이 들뢰즈적 정치이다. 그때 사건이란 새로운 의미(‘견디기 힘든 것’)가 산출되는 것이며, 물질적인 것의 효과로서 새로운 의미라는 초월론적인 것이 산출되는 것이다(잠재적 변동).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산출된 새로운 의미, 즉 사건에 응답함으로써 주체를 변용시키고 집단적인 공간-시간적 배치arrangement를 변용시키는 것(현동적 변용)이 들뢰즈적 정치라고 간주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역설이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적 정치란 사건을 기다리고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의미를 주체가 수용하고 새로운 의미에 의해 주체가 변용된다는 것 이외를 의미하지 않을까?

 주라비슈빌리의 도발적인 들뢰즈 비판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주라비슈빌리의 가설은 들뢰즈 홀로의 철학, 특히 의미의 논리에는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과는 달리,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다.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란 사건에 의한 세계나 주체의 수동적 변용을 다루는 철학이 아니라, 어떻게 사건을 생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철학이다.

 『의미의 논리에서의 사건의 개념을 돌이켜보자. 이 책에서 사건이란 물체적인 것의 효과로서 바로 초월론적인 의미가 산출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물체에 대한 원인이지만, 무엇의 원인인가? 물체는 일정한 사물의 원인, 전혀 다른 본성의 원인이다. 그 효과는 물체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한다면 비물체적인것이다. 효과는 물리적 형질, 특성이 아니라, 논리적 혹은 변증론적 속성이다. 효과는 사물이나 사물의 상태가 아니라 사건이다. 효과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효과가 존속한다거나 존립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효과는 사물이 아닌 것이나 실재하지 않는 존재자성에 걸맞은 최소의 존재를 갖고 있다. 효과는 실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효과는 능동자나 수동자가 아니라 능동과 수동의 결과이며, ‘비정한, 비정한 결과이다. 효과는 살아 있는 현재형이 아니라 부정형(不定形)이다. , 한계 없는 아이온, 과거와 미래로 무한하게 분할되고, 항상 현재를 벗어나는 생성이다.”[각주:8] 들뢰즈가 즐겨 인용하는 에밀 브루이에의 예를 빌린다면, “칼이 새로운 고기를 썰, 그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속성, 의미가, 즉 생성변화가 생산된다. , “칼이 새로운 살을 썬다는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의미, 생성변화가 산출되는 것이다.[각주:9] 들뢰즈가 사건이라고 부른 것은, 그런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새로운 의미의 생산이며, 그것은 초월론적인 것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그것을 정적 발생(genèse statiqu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의 후반인 제27계열에서 갑자기 동적 발생(genèse dynamique)”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초월론적인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제반 특이성들로부터 주체라는 존재자가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의미의 논리에서는 동적 발생은 이제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인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 동적 발생의 논리를 더욱 추구하고,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의 철학을, 사건의 생산의 철학을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 경우의 사건의 생산이란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 혹은 생성변화에 머물지 않고 사회라는 현실적인 것의 생성변화도 함의하고 있다.

 이 점을 둘러싸고 네그리=하트가 커먼웰스에서 행하는 푸코와 바디우의 사건 개념의 비교가 참고가 된다.

 

이 시점에서 푸코에 의한 사건 개념과 알랭 바디우가 제창한 그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을 진리의 장이라고 하며, 그것을 현대철학의 중심적 문제로서 제기하고, 커다란 공헌을 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삭감할 수 없는 다양성, 달리 말하면 다의적인성질을 갖는 사건은, 단순한 판단의 형식으로부터 진리의 심문을 빼낸다. 이 점에서의 바디우와 푸코의 차이는 두 사람이 사건에 관해서 시간적으로 어디에 관심을 기울였는가라는 것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디우에게서는 사건(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프랑스 혁명,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을 빈번하게 예로 들고 있다)이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주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의 일이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그 사건에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개입과, 그 사건에 지속적으로 계속 언급하는 충실성과 유-생성적[類生成的] 과정에 집중한다.

이에 반해 푸코는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production and productivity of the event)을 강조하며, 거기에는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향한 주시가 필요해진다. 말하자면 사건은 내적인 존재이며, 그것을 가로지르는 전략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바디우의 접근법으로는 푸코가 사건의 내부로부터 강조하고 있는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파악할 수 없다. 실제로 사건에 대한 소급적 접근법으로는 봉기 활동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길은 열려 있지 않다. 봉기 활동은 역사적 과정의 안쪽에서 혁명적 사건을 창출하고 지배적인 정치적 주체성으로부터 이탈하려고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내재적 논리 없이는 그저 바깥쪽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그것을 믿어야 할지 아닐지의 문제로서 긍정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으며, 결국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일반적으로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라고 간주되는 역설을 반복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각주:10]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바디우의 사건 개념은 (프랑스 혁명, 5월 혁명 같은) 혁명적인 사건에 대해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에 충실하기를 계속하는 것을 함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에게서의 사건이란 항상 과거의 것일 수밖에 없다.[각주:11] 반면 푸코에게서의 사건 개념은 사건의 생산과 그 생산성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건의 내부에서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보는 것이다. 푸코의 사건 개념은 자유와 역능에 의거해서 도래할 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라고 네그리=하트는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들뢰즈=가타리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건 개념을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바디우에게서 사건이란 역사상의 단순한 우연적 점으로서만 정위될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오히려 사건에 질을 부여하고 사건을 상황 속에 포함되도록 하는 부위의 위에 주사위를 던지도록 하는 개입, 즉 사건을 만들어내는역능(puissance de «faire» l’événement)”이야말로 중요하다.[각주:12]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했다고 한다면, 거기서의 사건 개념은 바로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푸코의 사건 개념과 그대로 겹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바로 강도적인 욕망을 매개로 한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에 대해,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에 대해 사고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사건(événement)” 대신 절단(coupure)”이라는 말을 사용하고,[각주:13] 심지어 과정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다음의 짧은 한 구절에 주목하자.

 

정신의학의 실효적인 정치화만이 우리를 이것들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반정신의학은 레인과 쿠퍼와 더불어, 이 방향으로 사실은 멀리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은 이 정치화를, 과정 자체의 어휘보다도 오히려 구조와 사건의 어휘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각주:14]

 

왜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정치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과정(porcess)’이라는 개념을 특권화하고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일까? 여기서 포인트가 되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사건개념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개념을 구조개념에서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면, 구조 개념보다 오히려 기계욕망하는 생산 과정개념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과정이란 욕망의 흐름의 과정이며, 욕망의 흐름의 교통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분열증적 과정이란 우리를 욕망하는 생산으로부터 떼어놓는 벽이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욕망의 흐름을 교통시키는 것이다”(AO, p.434). 욕망하는 생산 과정은,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사건을 구조로부터 생각한다면, 정적인(statique) 구조의 재생산과 그 절단이라는 사고에 스스로를 한정하게 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성변화의 과정을 사고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부단한 생성변화의 과정이야말로 사건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생산은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과 함께 사고되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세계의 모든 것은 생산과 소비에 의해 시시각각 계속 변용하는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이며, 정치 또한 욕망하는 생산 과정으로부터 사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관점(perspective)에 의거함으로써 정치에 자유와 역능의 관계를 도입할 수 있고, 권력에 의한 주체와 세계의 재생산 과정에 대해 어떻게 사건을, 혹은 절단을 도입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정치를 정적 구조의 재생산과 그 재생산의 절단이라는 구조주의적 문제설정으로부터 생각하게 되며, 사건을 사후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관해 생각할 수 없다. 정치를 구조와 사건이 아니라 과정과 절단혹은 구조와 절단으로부터 사고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바로 사건의 생산에 관해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II. 욕망 기계들과 욕망하는 생산

여기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건의 생산전략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본절에서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생산에 대해, ‘과정기계라는 개념에서부터 고찰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본적인 테제는 세계의 모든 것은 욕망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 책의 서두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하고 있다. 중단하지 않고, 혹은 단속적으로. <그것>은 호흡하고 과열하여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애무한다. <그것>이라고 불러 버리는 것은 무슨 오류일 것이다. 도처에서 기계가 있다. 결코 은유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연결이나 접속을 수반하는 다양한 기계의 기계가 있다. 기관기계가 원천기계로 연결된다. 어떤 기계는 흐름을 발생시키고, 다른 기계는 흐름을 절단한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이며, 입은 이 기계에 연결되는 기계이다. 거식증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하는 기계(천식의 발작)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평범한 대용 작업을 하서는, 각각에 자신의 작은 기계를 조립하고 있다. 에너지 기계에 대해 기관 기계가 있고, 항상 흐름과 절단이 있다. 슈레버 공소원장은 엉덩이 속에 태양광선을 반짝이다. 이것은 태양항문이다. <그것>이 기능한다고는 확신하라. 슈레버 공소원장은 뭔가를 느끼고, 뭔가를 생산하며, 그리고 이것에 관해 이론을 만들 수 있다. 뭔가가 생산된다. 이 뭔가는 기계가 초래하는 결과이며,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AO, p.7/()15-16)

 

그것이란 에스’, 즉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무의식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심적, 물리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며, 욕망의 흐름이다. 세계는 제반 욕망의 흐름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며, 그런 무수한 흐름의 접속을 들뢰즈=가타리는 욕망 기계들이라고 부른다. 욕망 기계들은 연결과 분리를 반복하며,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생산과 소비를 반복한다.

 그러면 그때, 앞서 언급한 과정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과정이란 생산의 과정, 즉 욕망적 주체의 과정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분열증적 생산의 과정이라고 바꿔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욕망적, 분열증적 생산의 과정이란 소비, 등록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생산은 그 생산물의 등록(분배), 소비로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생산등록소비생산).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 , 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이다. “생산은 그대로 소비이며, 등록이다. 등록과 소비는 직접적으로 생산을 규정하고 있지만, 더욱이 생산 자체의 한복판에서 생산을 규정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생산의 생산, 즉 능동과 수동의 생산이며, 등록의 생산, 즉 분배와 지표의 생산이며, 소비의 생산, 향락과 불안과 고통의 생산인 것이다. 모든 것은 바로 생산이기 때문에, 등록은 곧바로 소비되고 소진되며, 이 소비는 곧바로 재생산된다”(AO, pp.9-11/()19-20). 이런 의미에서 자연과 인간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AO, p.10/()20). 자연은 인간을 생산하고 인간은 자연을 생산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에너지-생산의 기계의 연쇄이다.

 둘째,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임상 실체로서의 분열증으로부터 구별해야 한다. “과정은 목표나 목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과정 자체를 무한하게 계속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과정의 목적화, 혹은 과정의 무한한 계속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과정의 너무 빠른 무모한 정지와 똑같은 것이며, 그것은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인공적 분열증자, 자평증화되어 폐인이 되고, 임상 실체로서 산출되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조작이나 다름없다. 분열증적 특성이나, 그 임상 실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열증이란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이며,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이루는 실재로서의 근원적인 보편적 생산이다”(AO, p.11/()21).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란 욕망하는 생산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 기계들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생산성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라캉의 정의에 따르면, 분열증이란 대문자의 타자가 배제되고 실효되어 있기 때문에, 상징계가 부서졌고 그 때문에 소문자 타자가 무한하게 증식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은 분열증이 대문자 타자를 결여하고, 그 때문에 소문자 타자를 무한하게 증식시켜가듯이, 초월적 심급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을 내재평면 위에 횡단적으로 증식시켜가는 것이다.[각주:15]

 그러나 다른 한편, 과정 자체를 목적화해서는 안 된다. 과정의 목적화, 혹은 그 정지는 욕망의 자연스런 흐름을 해치며, 임상 실체로서의 분열증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으로서의 분열증과, 그 목적화나 정지로서의 임상 실체의 분열증을 구별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흐름의 생산을 목적화하거나 정지하여 임상실체로서의 분열증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과정이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 혹은 분열증적 과정일 때,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라는 기묘한 개념은, 거기서 어떤 역할을 맡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기관 없는 신체란 욕망 기계들에 대립하는 강도 제로(0)로서의 죽음 본능이다.

 

이 기관 없는 충실 실체는 비생산적인 것, 불모인 것이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있었던 것, 소비할 수 없는 것이다. 앙토냉 아르토는 그 어떤 형식도, 그 어떤 형상도 없이 존재했을 때, 이것을 발견했다. 죽음의 본능[instinct de mort], 이것이 이 신체의 이름이다. 이 죽음에는 모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욕망은 그것도 또한, 죽음도 또한 욕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충실 신체는 욕망의 부동의 동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삶의 기관들이 작동하는 기계(working machine)이기 때문에 욕망이 삶을 욕망하게 되게 되듯이.(AO, p.14/()26)

 

기관 없는 신체는 강도 제로(0)죽음 본능이며, 스스로는 생동하지 않고, 욕망을 생동하게 하는 욕망의 부동의 동자이다. 들뢰즈가 자흐 마조흐 소개에서 죽음 본능(instinct de mort)’을 경험적인 파괴욕동으로서의 죽음 충동(pulsion de mort)’과는 다른, 순수한 초월론적 원리라고 정의했다는 것을 상기해두자.[각주:16] 그것은 욕망 기계들에 운동을 부여하고, 욕망에 흐름을 부여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죽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 본능으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란 순수한 초월론적 원리이며, 경험적 소여로서의 욕망 기계들에 대립한다. 강도 제로의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 기계들을 등록하는 등록 표면 혹은 내재 평면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욕망 기계들이 모든 은유와 무관하게 진정으로 기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점에서일까? 들뢰즈=가타리는 욕망 기계들의 특성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접속적 종합, 생산의 생산이라는 특성이다. 기계는 여러 가지 물질적 흐름에 접속하며, 그 흐름을 절단, 채취한다. “우선 첫째로, 무릇 기계는 모두 연속된 물질적 흐름(즉 질료)과 관련되어 있으며, 기계는 이 흐름을 잘라낸다. 절단은 연합하는 흐름으로부터 뭔가를 채취하는 작동을 한다. 예를 들어 항문과 이 항문이 절단하는 똥의 흐름과의 관계. 입과 젖의 흐름과의 관계. 심지어 입과 공기나 음의 흐름과의 관계. 페니스와 오줌의 흐름, 그리고 또한 정자의 흐름과의 관계(AO, pp.43-44/()72-73). 예를 들어 입 기계는 모유 기계에 접속되고, 이로부터 젖의 흐름을 잘라내고 채취한다(채취-절단). 기계가 접속하는 여러 가지의 물질적 흐름 그 자체도 또한 다른 기계에 의해 생산되는 이상, 기계와 흐름의 접속은 기계와 기계의 접속이기도 하다(기계의 기계). 또한 기계와 기계의 접속은 반드시 다른 흐름을 생산하지만, 그것은 세 번째의 기계에 접속하며 채취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와 기계의 접속은 무한하게 연속된 흐름이기도 하다(생산의 생산). 욕망 기계들 상호 접속의 접속은 욕망의 생산성 자체를 생산한다. 이 세계에는 부분 대상으로서의 욕망 기계들과 욕망의 흐름의 다양성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 기계들이 여러 가지 욕망의 흐름들에 접속하고, 그것을 채취하고 스스로도 욕망의 흐름을 생산하는 것, 즉 생산의 작동을 끊임없이 생산물에 접목해가는 것, 이것이 접속적 종합, 생산의 생산이라는 욕망 기계들의 근원적 특성이다.

 둘째, 이접적 종합, 등록의 생산이라는 특성이다. 모든 기계는 그 안에 일종의 코드를 짜넣고 있지만, 그 코드는 매우 다양한 단편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단편들은 코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고 각각 다른 기계에 접속되며, 그로부터 잉여가치(코드의 잉여가치)를 끌어낸다(이탈-절단). 그 예로서 거론되는 것이 말벌과 난초의 코드의 접속과, 그것에 의한 코드의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난초는 말벌이 꽃가루를 수술에서 암술로 운반하지 않고는, 자신의 재생산을 행할 수 없다. 그래서 난초와 말벌의 생식기를 본 따 말벌의 이마주가 되며, 말벌의 코드와 접속되며, 그로부터 수분과 재생산이라는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각각의 연쇄는 다른 여러 가지 연쇄의 단편을 포착하고 이로부터 잉여가치를 끌어내는데, 이것은 바로 난초의 코드가 말벌로부터 그 모양[]추출하는듯하다. 이것은 코드의 잉여가치의 현상이다”(AO, p.47/()77-78).[각주:17] 이런 의미에서 욕망 기계와 다른 욕망 기계의 횡단적 접속에 있어서, 기계 사이에서의 코드의 등록, 전달은 이접적(disjonctif)이며, 코드 사이의 차이는 항상 유지되고 있다. 코드의 단편은 코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며, 다른 코드와 접속되어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코드란 하나의 시니피앙 연쇄’(라캉)로는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다양체이며, 결코 단일한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니피앙의 연쇄 혹은 연쇄들을 말려들게 하는 무의식의 코드라고 하는, 저 풍부한 영역을 발견하고, 이것에 의해 분석 방식을 변용한 공적은, 라캉의 것이다(이것에 관핸 기본 텍스트는 도둑맞은 편지[「『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에크리수록]이다). 이 영역은 그 다양성을 위해서, 실로 기묘한 것이 되며, 하나의 연쇄로서, 혹은 하나의 욕망적 코드로서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된다. 이런 연쇄는 여러 가지 기호들에 의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시니피앙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기호들 자체는 시니피앙이 아니다. 코드는 일반의 언어활동보다도, 은어와 닮았고, 열린 다의적 형성체이다. 거기서 기호는 임의의 성질을 가지며, 그 지지체와는 무관한 것이다(혹은 오히려 이 지지체 쪽이 기호와 무관한 게 아닌가. 지지체란 기관 없는 신체이다). 기호는 정해진 평면을 갖지 않고, 모든 단계에서, 모든 접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각각의 기호는 자기 자신의 언어를 말하며, 다른 기호와 더불어 여러 가지 종합을 실현하지만, 이런 종합은 그 구성요소의 차원에 있어서는 간접적이기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만큼 갈수록 횡단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인 종합을 수립한다. 이런 연쇄들에 고유한 이접의 작동은 아직 배타적이 아니며, 배타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억지하는 것이나 억압하는 것의 작동에 의한다. 억지하고 억압하는 것은 지지체를 규정하고 특정한 인칭적 주체를 고정하려 한다. (AO, p.46/()76-77).

 

라캉 이론에서 시니피앙 연쇄는 특권적 시니피앙인 결여의 시니피앙(팔루스)에 의해 통제된다. 그런 결여의 시니피앙에 의한 다른 모든 시니피앙의 통제는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인칭적 주체를 조직한다. 라캉은 특권적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의 시니피앙의 정의(그것에 관해 이것 이상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음과 꼭 같다. «하나의 시니피앙, 그것은 다른 어떤 시니피앙에 대해 주체를 대리 표상하는 것이다따라서 이 시니피앙은 다른 모든 시니피앙이 그것을 향해 주체를 대리 표상하는 시니피앙이 될 것이다. 이것은 즉 이 시니피앙이 결여되어 있다면, 다른 모든 시니피앙은 아무것도 대리 표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도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대리 표상되기 때문이다.”[각주:18]하나의 시니피앙”, 즉 특권적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는 다른 모든 시니피앙을 대리 표상하고, 따라서 주체를 대리 표상한다. 라캉에게서는 이런 결여의 시니피앙을 부재의 중심으로서 고정적인 인칭적 주체가 조직화되고, 주체의 안정성이 확보된다.

 반면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코드란 시니피앙이 아니라 열린 다의적 형성체이다. 그것은 결코 특권적 결여의 시니피앙에 의해서는 통제되지 않는다. 코드란 순수한 다양체이다.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란 다양한 코드의 등록 표면에 불과하다. 그런 다양한 코드와 이것들의 접속에서 생겨나는 것은 다양체로서의 비인칭적 주체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이런 다양체로서의 비인칭적 주체라는 가정으로부터, 연접적 종합, 소비의 생산이라는 제3의 특성이 도출된다.

 

욕망 기계의 세 번째 절단은 잔여-절단 또는 잔재-절단이며, 기계의 곁에 하나의 주체를, 기계의 인접 부품으로서 산출하는 절단이다. 그런데 이 주체가 특정한 인칭적인 자기 동일성을 갖지 않으며, 또한 이 주체가, 기관 없는 신체의 미분화 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이 신체를 횡단하려고 하면, 이 주체가 단순히 기계의 곁의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 자체 분할된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흐름으로부터의 채취와 연쇄로부터의 이탈에 대응하는 부분들이, 이 부분에 각각 귀속해간다. 이리하여 주체는 자신이 통과하는 상태들을 소비하고, 이런 상태들로부터 탄생한다. , 여러 가지 부분들로 이루어진 한 부분으로서, 이런 상태들의 하나하나로부터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런 부분들 각각은 한순간에 있어서의 기관 없는 신체의 내용을 이룬다. (AO, pp.48-49/()80-81).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주체는 욕망 기계들이 욕망의 흐름을 채취, 소비함으로써, 그 기계의 곁에, 잔여로서 생산된다(잔여-절단).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의식에 의해 중심화된 인칭적 주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비인칭적 특이성으로부터 구성된 탈중심화된(AO, p.27/()47) 주체, 즉 무의식의 주체이다. 또한 이 주체는 다양한 흐름을 채취, 소비함으로써 시시각각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비인칭적 주체이다. 따라서 그러한 주체는 팔루스라는 특권적 시니피앙에 의해 안정적으로 조직화된 라캉적인 인칭적 주체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한다. 욕망 기계들의 생산성은 곧 탈중심화되고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비인칭적 주체의 철저한 생산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코 결여’, ‘거세같은 부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성변화의 원리 자체이다.

 

III. 오이디푸스화와 욕망하는 생산의 억압

욕망 기계들은 항상 생산의 작동을 멈추지 않으며 상호 접속을 반복하며, 이로부터 여러 가지 비인칭적 특이성에 의해 구성된 생성변화의 주체를 생산한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 아래서의 오이디푸스화가 그런 철저한 생산성을 억압한다. 그렇다면 욕망 기계들의 생산성은 왜 어떤 목적으로 억압되는 것일까? 그것은 욕망의 생산의 작동을 억압하고 유순한 주체(복종화된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권력이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만일 그것이 해방되면 곧바로 권력이 전복되는 듯한, 강도적 역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억압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든, 모든 욕망의 입장은 사회의 기성 질서를 규탄하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은 거꾸로 비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욕망은 무엇인가를 뒤집어엎는 것이다. 사회의 여러 부문의 전체를 떨구어 내버리지 않고 정립되는 욕망 기계들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모종의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욕망은 그 본질에 있어서 혁명적이다”(AO, p.138/()223).

 이런 입론의 전제로서,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사회적 억제(repression)’와 심적 억압(refoulement)’을 구별한다. 사회적 억제는 권력장치들에 의한 작용이며, 권력에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며, 사회구성체의 억제적 구조를 재생산한다. 하지만 사회적 억제는 단순히 자신만으로 완결하는 게 아니다. 사회적 억제는 그 도구로서 심적 억제를, 즉 오이디푸스화를 필요로 한다.

 

라이히의 힘은 억압이 어떻게 억제에 의존하는가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이 두 가지 개념의 혼동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억제는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며 사회구성체를 이 억제적 구조에 있어서 재생산하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바로 억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억제는 문명과 외연을 함께 하는 가족적 억압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할 게 아니라, 가족적 억압 쪽이 특정한 사회적 생산형태에 내속하는 억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억제는 단순히 욕구나 이익만으로 향하는 게 아니며, 성적 억압을 통해 욕망으로도 향한다. ‘한 사회의 경제체제의 집단심리에 의한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가족은 바로 이 성적 억압을 의탁받은 대행자인 것이다. (AO, pp.140-141/()227).

 

사회적 억제는 권력에 대해 유순한 주체를 생산, 재생산하고, 사회적 권력관계(계급관계나 착취의 구조)를 재생산하기 위해, 심적 억압(오이디푸스화)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오이디푸스화로부터 사회적 억제를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니다. 정반대로, 사회적 억제와 권력관계의 재생산의 필요로부터 심적 억압으로서의 오이디푸스화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렇게 가족에 있어서의 오이디푸스화야말로 권력의 대행자로서, 권력에 대해 유순한 주체를 형성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아질 것이다. 첫째, 억제적인 사회적 생산은 억압적인 오이디푸스적 가족에 의해 대행된다. 그리고 둘째, 욕망적 생산이 치환된 이미지가 억압적 가족이며, 이 이미지가 억압된 것을 가족적, 근친상간적 충동으로서 표상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조작은 사회적 억제=심적 억압이라는 방식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AO, p.142/()230). 욕망적 생산은 잠재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강도적 역능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그것을 억제하고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것이, 복종이 욕망되는 심적 메커니즘, 즉 억압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은 일체를 이룬다. 사회적 생산은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욕망적 생산에 대해 억제를 행사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이 욕망적 생산과 일체를 이룬다고 한다면,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에 대해 단순히 억압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에 작동을 걸고, 욕망적 생산이 스스로 억제=억압을 욕망하는 체제를 만들어낸다.

 

사실 사회적 생산은 한정된 조건들에 있어서는 오로지 욕망적 생산 자체인 것이다. 사회적 영역은 직접적으로 욕망에 의해 횡단되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욕망의 산물이며, 리비도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투자하기 위해, 그 어떤 매개도, 그 어떤 승화도, 그 어떤 심리적 조작도, 그 어떤 변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저 욕망과 사회적인 것이 존재한다. 사회적 재생산의 가장 억압적, 굴욕적 형태도 욕망에 의해 생산되고, 욕망으로부터 출현하는 조직에 있어서 생산된다. 바로 우리는 이 조직이 어떤 조건에서 출현하는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는 스피노자가 일찍이 제기했던 것과 똑같다(라이히는 그것을 재발견했다). , ‘인간은 왜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 왜 우리는 더 많은 세금을! 더 적은 빵을!”이라고 외치게 될까? 라이히가 말하듯이,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파업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굶주린 사람들이 반드시 도둑질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파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몇 세기 전부터 착취, 굴욕, 노예상태를 견디며 타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조차 이것들을 원하게 될까? 라이히는 파시즘의 성공을 설명하려 하며, 대중의 오해나 착각을 그 원인으로 언급하기를 거부하고, 욕망의 관점에서, 욕망의 말로 설명하는 것을 요구하는데, 라이히가 이때만큼 위대한 사상가였던 적은 없다. 대중은 일정한 때, 일정한 상황에서 파시즘을 욕망했던 것이며, 바로 이것, 군중심리적 욕망의 이 도착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AO, pp.36-37/()62-63).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과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권력에의 복종화마저도 복종화의 욕망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정치철학의 근본문제란 인간이 왜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스피노자, 신학정치론)라는 것이며, 라이히는 그것을 대중의 파시즘에 대한 욕망이라는 형태로 재발견했다(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런 의미에서 권력에의 복종화의 사회적 생산이란,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의 사회적 생산이다. 오이디푸스적 가족이란 그런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을 생산하는 권력의 대행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적 생산에 대해, 오이디푸스는 어떤 방식으로 심적 억압을 부과하며,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을 생산하는가? 들뢰즈=가타리는 그것을 세 가지 과정으로부터 설명한다. 첫째, 접속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접속적 종합이란 욕망 기계들이 횡단적으로 서로 접속과 절단을 반복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들은 그 과정을 접속적 종합의 부분적, 비특수적 사용이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그 포괄적, 특수적 사용으로 포섭된다.

 

첫째, 접속적 종합의 부분적이고 비특수적 사용이 오이디푸스적, 포괄적, 특수적 사용에 대립했다. 이 포괄적-특수적 사용은 양친적과 혼인적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지니며, 이것들에는 오이디푸스 삼각형과, 이 삼각형의 재생산이 대응했다. 이 전체적-특수적 사용은 단락적인 일반화라는 착오에 기초하여, 이것이 결국 오이디푸스의 형상인을 이루고 있으며, 그 부당성은 다음과 같은 조작의 전체를 걸었다. , 시니피앙 연쇄로부터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으로서의 초월적 완전 대상을 추출한다는 조작이다. 이리하여 연쇄의 전체가 이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에 의존하며,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은 욕망의 각각의 위치에 결여를 할당하며, 욕망을 법에 용접하여, 연쇄로부터 이탈하는 것의 환영을 준 것이다(AO, p.131/() 211-212).

 

접속적 종합의 포괄적, 특수적 사용에 의해 아이들은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 동성의 부모로 동일화하며(오이디푸스적 삼각형화), 심지어 자신이 부모가 되는 이성애적인 혼인관계에 있어서 오이디푸스를 재생산한다. 오이디푸스화란 다양체로서의 시니피앙 연쇄 혹은 코드를, 특권적인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이란 결여의 시니피앙(팔루스)이며, 그것은 욕망에 결여를 할당하고, 욕망을 법에 종속시킨다. 그것에 의해 욕망의 다양성이 억압된 자기 동일적 자아가 형성된다.

 둘째로, 이접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욕망 기계들은 각각이 스스로에게 독자적인 코드를 내포하지만, 그 코드는 다양하며, 항상 단편화되어 다른 코드와 접속되며, 이로부터 코드의 잉여가치를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는 그런 코드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둘째, 이접적 종합의 포괄적 또는 무제한적 사용은 오이디푸스적, 배타적, 제한적 사용에 대립한다. 이 제한적 사용은 심지어 상상적과 추상적이라는 두 가지 극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에 의해 상관적으로 규정된 두 항 사이, 즉 배타적 상징적인 구별과, 미분화 상태의 상상계라는 두 항 사이에서만, 선택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이 사용은 이 때, 오이디푸스의 작법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중구속의, 즉 이중의 막다른 골목의 오류 추리이다. (AO, p.131/()212).

 

이접적 종합의 배타적-제한적 사용, 즉 오이디푸스적 사용이란 상징계의 법을 수용하거나 혹은 미분화 상태의 상징계로 떨어지거나,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이중구속이다. 이 두 개의 선택지는 단순히 외관상의 것이며, 실제로는 상징계의 법, 즉 사회적인 법을 받아들이는 수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런 조작에 의해, 주체는 상징계의 법=사회적인 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한다.

 셋째, 연접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욕망 기계들은 이것들이 서로 접속되고, 여러 가지 흐름들을 소비함으로써, 그 곁에, 항상 생성변화를 계속 하는 비인칭적인 주체를 생산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성변화의 주체의 생산을,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 다의적 사용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그것은 격리적, 일대일 대응적 사용으로 변용된다.

 

셋째로,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이고 다의적 사용은 격리적이고 일대일 대응적 사용에 대립한다. 여기서도 또한 무의식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이 일대일 사용은, 말하자면 두 개의 계기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인종주의적, 국가주의적, 종교적 등등의 계기이며, 격리에 의해, 오이디푸스가 언제나 전제하는 출발점의 집합을 구성한다. 이것은 완전히 암암리의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가족적 계기이며, 사상(寫像, application)에 의해 도달점의 집합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상(寫像)이라는 세 번째 오류추리가 생긴다. 이 오류추리는 사회적 장의 규정과 가족적 규정 사이에 일군의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수립하며, 이런 방식으로 리비도 투자를 영원한 아빠-엄마로 환원하는 것을 가능케 하며 불가피하게 하며 오이디푸스의 조건을 고정한다. (AO, pp.131-132/()212-213).

 

연접적 종합의 격리적-일대일 대응적 사용은 사회적 장의 규정과 가족적 규정 사이에 일대일 대응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 일대일 대응에 기초하여 욕망적 생산에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사상(寫像)하며, 욕망적 생산의 다양성을 억압한다. 그것에 의해 여러 가지 특이성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생성변화하는 비인칭적 주체는, 오이디푸스화된 인칭적 주체로 개별화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일대일 대응화가 실현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개체화뿐만이 아니다. 오이디푸스화는 제반 주체들을, 인종, 국가, 가족 같은, 어떤 하나의 초월적 시니피앙 아래에 통합된 집단으로 동일화시킴으로써 예속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속집단(groupes assujettis)’이란 주체 집단(groupes sujets)’에 대립하는 개념이며, 둘 다 가타리가 정신분석과 횡단성의 논문들에서 도입한 개념이다.[각주:19] 들뢰즈는 가타리의 정신분석과 횡단성에 붙인 서문에서, 두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속집단은 총체로서 예속적일 뿐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여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예속적이라는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예속집단을 특징짓는 위계질서, 수직적 혹은 위계형 조직은 집단이 무의미, 죽음, 혹은 분해 등으로 내파하는 일체의 가능성을 뿌리치고, 창조적 절단의 발전을 가로막고, 다른 집단의 배제 위에서 수립되는 자기 보존의 메커니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예속집단의 중앙집권주의는 구조화, 전체화, 통합화라는 과정을 거쳐 작용하며, 진정한 집단적 언표행위의 조건들을 대신해, 현실과 동시에 주체성으로부터도 절단된, 틀에 박힌 언표의 배치를 초래한다(집단적 오이디푸스화 작용, 초자아화, 거세 효과 같은 상상 위의 현상이 생기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거꾸로 주체집단은 전체성이나 위계를 뿌리치는 횡단성의 계수에 의해 정의된다. 주체집단은 언표행위의 행위자(agent)이며, 욕망의 지지체이며, 제도적 창설의 구성요소이다. 주체집단은 그 실천을 통해, 스스로의 무의미, 죽음, 또는 절단의 극한에 도전하길 마지 않는다.”[각주:20]예속집단이란 특히 프로이트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각주:21]에 영향을 받은 개념이며, 어떤 초월적 중심으로의 동일화에 의해 위계질서적, 수직적, 중앙집권적으로 통합된 전체성을 가리킨다. 그에 반해 주체집단은 그런 주체성이나 위계적 통합을 해체하는 분자적 다양성과 횡단성에 의해 정의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주체집단예속집단을 집단 환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의하는 점이다.

 

집단 환상과 개인 환상 사이의 수많은 구별을 전개하면, 결국 개인 환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오히려 주체 집단과 예속 집단이라는 두 종류의 집단이 존재할 뿐이다. 오이디푸스와 거세는 상상계의 구조를 형성하며, 이 구조를 따라 예속 집단의 구성원은 자신들이 집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혹은 환상화하도록 규정된다. 게다가 이런 두 종류의 집단은 끊임없이 서로로 이행하는 상태에 있다고 말해져야 한다. 주체 집단은 끊임없이 종속의 위험에 처해 있으며, 예속 집단이 있는 경우에는 혁명적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분석이 어떻게 환상으로부터 배타적인 이접의 방향만을 끄집어내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환상을 그 개인적, 혹은 의사-개인적인 차원 속으로 내리누르고 있는지를 볼수록, 우려해야 할 것은 없다. 이런 개인적, 의사-개인적 차원은 본성적으로 환상을 예속 집단에 관계시킬 뿐이며, 정반대의 조작을 행하여 환상을 집단의 차원에서 포착하며, 환상 속에서, 집단의 혁명적 잠재성의 숨겨진 요소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AO. pp.75- 76/() 124. 강조는 인용자)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정신분석이 개인 환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실제로는 집단 환상이다. 그들은 제도론적 정신 분석에 의거하면서,[각주:22] 개인 환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집단 환상만이 존재한다는 테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주체 집단과 예속 집단이라는 두 종류의 집단 형성은 바로 집단 환상의 메커니즘에 의거하고 있다. 주체 집단에 대해서는 나중에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석에 의해 개인 환상으로 파악된 것이야말로 예속 집단의 형성에 본질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 주목하자. 오이디푸스화란 바로 개인화이며, 가족 환상이라는 개인 환상의 형성 메커니즘인데, 그런 가족 환상의 형태를 통해서만 개인들은 개인화된 채의 상태에서 아버지의 이름 같은 초월론적 시니피앙에 예속화된다. 그리고 그 초월론적 시니피앙이 국가, 인종, 신 같은 사회적인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전위됨으로써 개인들은 예속 집단의 전체성(과 그 집단 환상)에 통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심적 억압의 형성이란 바로 오이디푸스적 가족에 있어서의 개인화를 통한 예속 집단에의 예속화이며, 개인화된 주체들을 하나의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통합하는 예속 집단의 형성과 동의어이다.[각주:23] 이런 의미에서 개인 환상으로서의 가족 환상은 틀림없이 집단 환상인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적 조작은 주체들을 예속 집단으로 통합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오이디푸스적 조작의 주체들로의 사상(寫像)은 이렇게 예속 집단을 형성하고, 예속 집단의 규정들을 이루는 리비도 투자를 형성하는 것이다.

 

IV. 자본주의와 사건의 생산

욕망 기계들의 철저한 생산성은 반생산을 초래하는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억제=억압되며, 개인들은 예속 집단으로 전체화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화를 자본주의 체제에 고유한 억압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자본주의와 오이디푸스화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기 위한 사건의 생산의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다.

우선,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자본주의의 정의를 보자. 그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화폐-자본의 형태를 취한 탈코드화된 생산의 흐름과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형태를 취한 탈코드화된 노동의 흐름 사이의 마주침에 의해 발생한다. 이 정의는 맑스의 자본에 의한 자본주의의 성립, 즉 자본주의와 토지로부터 떼어내진 자유로운 노동자와의 만남[마주침]이라는 설명을 근거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의 운동에 의해서 정의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가 전자본주의에서의 코드를 대신해, 화폐라는 추상량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화폐라는 추상량의 공리계는 탈영토화의 운동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며, 탈영토화된 영역에서 욕망의 흐름을 해방한다(AO. p.41/()68-69).

 이처럼 자본주의란 흐름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즉 절대적 한계로 향하는 분열증적 운동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가 해방된 흐름을 공리계에 의해 억제하고, 흐름을 내재적, 상대적 극으로 닫아버린다. 자본주의는 이 내재적 한계를 확대시키면서 재생산하며, 흐름이 절대적 극한에 도달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분열증은 자본주의 자체의 외적 극한, 즉 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경향의 종착점인데, 자본주의는 이 경향을 억제하고 이 극한을 거절하고 치환하며, 이것을 자기 자신의 내재적인 상대적 극한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확대하는 규모에 있어서, 이 상대적 극한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자본주의는 한 손으로 탈코드화하는 것을, 다른 손으로 공리계화한다”(AO, p.292/()62).[각주:24]

 이처럼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조절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공리계에 요청되며,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사회적 힘들의 장에 내재하는방식으로 조절하고, 자본주의의 상대적 극한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부단한 경제 발전과 자본의 탈영토화를 추진하는) 것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운동이 절대적 극한에 도달하지 않도록 그것을 상대적 극한 속에 억눌러둔다(사회 혁명을 억제한다)(AO, pp.299-300/()72-74).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국가도 복지국가도 둘 다, 심지어 신자유주의 국가조차도, 이런 자본의 공리계의 틀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 세 종류의 국가는 모두, 국가가 자본의 운동의 중요한 조절 역할을 맡으며, 경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국가가 자본의 운동에 어떤 개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와 복지국가는 국가가 경제 발전을 직접 주도하고, 노동자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자본이 운동을 조절한다. 또 신자유주의 국가는 자본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억제하고 자본의 운동의 게임의 규칙(시장에서의 경쟁 상태)을 만들어낸다는 방식으로 자본의 운동을 조절한다.[각주:25]

 그렇다면 이런 자본주의의 운동은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억압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자본주의에 의해 사회체가 자본-화폐로서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 추상적인 것으로 됨으로써, 가족은 자신의 사회적 형태를 경제적 재생산에 부여하기를 그만두고, 사회적 장의 바깥에 놓이게 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가족의 사인화(privatis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족이 사회적 장 바깥에 놓인다는 것은 가족에게 최대의 사회적 호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적 장 전체가 가족으로 사상(寫像)되는 것이 가능해지는 조건이기 때문이다”(AO, p.314/() 96). 개별 인물은 자본주의의 공리계에 의해 산출된 사회적 인물(예를 들어 자본가, 노동자)이지만, 그들은 동시에 가족에 있어서는 아버지, 어머니, 자식 중 어느 하나라는 사적인 인물이다. 오이디푸스화의 조작이란, 개인의 첫 번째 차원의 사회적 이미지를 그 두 번째 차원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로 사상(寫像)하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개인들은 권력에 예속된 주체로 식민지화된다.

 

사회적 장에서 각자는 언표행위의 집단적 대행자로서, 혹은 생산, 반생산의 대행자로서 작용하는 작용받지만, 이 사회적 장은 오이디푸스의 위에 포개진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에서 이제 각자는 자신의 구석에 갇히고, 각자를 개체로서 분할하는 선에 의해서 절단된다. 각자는 언표의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로 분할되는 것이다. 언표의 주체는 사회적 인물이고, 언표행위의 주체는 사적 인물이다. ‘그 때문에이것은 너의 아버지이며, 그 때문에 이것은 너의 어머니이며, 그 때문에 이것은 너다. 자본주의의 여러 가지 연접이 사인(私人)이 된 인물로 사상(寫像)되는 한에서, 이 연접에서 가족의 연접이 귀결된다. 아빠-엄마-, 이것이 도처에서 확실히 발견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거기에 사상(寫像)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의한 통치,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분열을 이용하고 흐름을 우회시키는 새로운 방식인 것이다. 혼성된 이미지, 이미지 위에 포개지는 이미지, 이런 조작의 결과, 각자의 작은 자아는 아버지-어머니에 관계되며, 진정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A, pp.316-317/()99)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사회적 인물, 즉 자아의 사회적 이미지는 사적 인물, 즉 개인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로 포개지며 사상(寫像)된다. 그것에 의해 주체는 언표의 주체(사회적 인물)와 언표행위의 주체(사적 인물)의 두 층으로 분할된다. 라캉에 따르면 언표행위의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이며, 그것은 의식의 주체에 대해 상위에 있으며, 의식의 주체를 초월론적인 방식으로 통제한다.[각주:26]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라캉적 주체 개념이 사실상 사회적인 예속화의 메커니즘을 기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 언표행위의 주체, 즉 자아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란 오이디푸스화된 초월론적 자아이며, 그것은 상위로부터 언표의 주체, 즉 자아의 사회적 이미지를 통제한다. 그리고 초월론적 자아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바로 상징계의 법=사회적 법, 즉 예속화의 법을 체내화한 심급이다. 이러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푸코)은 바로 오이디푸스화된 주체의 형성에 의해 성립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야말로 권력에 순종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통치하는 예속화된 주체 자체이며, 그런 주체는 욕망의 생산성을 스스로 심적으로 억압함으로써 사회적 억제 메커니즘에 스스로 복종할 것을 욕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화란 사회적 통치의 메커니즘이며, 예속화의, 그리고 예속 집단의 형성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오이디푸스화되고 예속화된 주체와, 이들 예속화된 주체로 이루어진 위계적이고 몰적인 예속 집단을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으로 이루어지며, “집단적 언표행위의 대행자agent”의 횡단적이고 수평적 연결로 이루어진 주체 집단으로 변용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어떤 전략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한까지 가속화하고, 그것이 억제하고 있는 욕망의 역능을 해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자본의 운동의 내적 극한을 확대하고 그것을 절대적 극한으로 접근시키며, 욕망의 흐름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따라서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무의식적 욕망의 흐름을 전면적으로 해방하는 분열증적, 절대적 극한으로 이를 것이다. 그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욕망적 생산의 분자적, 수평적 다양체로서의 주체 집단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말단으로부터 계속 도주한다. 자본주의의 생산, 그 예술, 그 과학은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여러 가지 흐름을 형성한다. 이것들의 흐름은 단순히 대응하는 공리계에 종속할 뿐 아니라 공리계의 그물망을 관통하고, 재코드화나 재영토화의 밑을 뚫고, 몇 가지 흐름을 교통시킨다. 이번에는 주체 집단이, 단절을 통해서 예속 집단에서 파생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흐름을 틀어막고 흐름을 절단하고 절단을 멀리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의 흐름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자본주의에 반항하고 자본주의를 찢어버리는 여러 가지 분열에 따라 스스로를 계속 절단한다. 자본주의는 내적 극한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대비가 있으나, 변함없이 외적 극한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외적 극한은 내적 극한이 확대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본주의에 침입하고, 내부로부터 자본주의를 찢어버리는 위험을 증가시킨다. 그 때문에 도주선은 매우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게 된다. , 도주선은 사회적 장에 대한 한 가지 투자를 구성하는 것이며, 이 투자는 반대 방향의 투자에 못지않게 완전한 것, 전체적인 것이다. 파라노이아적 투자와 분열 기질적 투자는, 말하자면 무의식적 리비도의 투자가 대립하는 두 극을 이룬다. 한쪽 극은 주권 조직체나 이 주권 조직체에서 발생하는 군() 거세 집합에 욕망적 생산을 종속시키는 극이며, 다른 한쪽 극은 반대의 예속집단을 실현하고, 권력을 전복하고, 욕망적 생산의 분자적 다양체에 군거성 집합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AO, p.451/()297-298)

 

자본주의의 외적 극한이란 분열증적인 것이며, 자본주의의 가속에 수반되는 이 분여증적인 것의 침입이야말로 긍정적인 도주선의 형성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가속은 욕망의 해방을 가속시키고, 자본주의를 불안정화시키며,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도주선을 긋는 것을 가능케 한다. ᄄᆞ라서 예속집단에서 주체집단으로의 변용은 자본주의의 가속화에 따른 욕망적 생산의 가속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충실 신체로서의 새로운 사회체를 건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사회적 충실 신체의 또 다른 국면으로 이행해야 한다. 거기에는 욕망의 분자적 조직체가 작동하고 등기되며 새로운 몰적 집합을 자신에게 예속시킬 것이다. 이곳에서만, 우리는 리비도의 무의식적 혁명적 절단과 투자(la coupure et l’investissement revolutionnaires inconscients de la libido)에 도달한다. 그런데 다만 인과관계의 단절(rupture de causalité)과 맞바꿔서, 이 단절에 올라타 이것은 실현된다(AO, pp.452/()299)

 

자본주의의 가속에 의한 욕망의 해방이야말로 최종적으로 인과관계의 단절”, 사회적 재생산의 인과관계의 단절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리비도의 무의식적 혁명적 절단”, 즉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변용이 무의식적 절단으로 불릴까? 그것은 이 절단전의식적 혁명”, 즉 계급과 이익 수준에서의 혁명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혁명”,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의 해방과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집단성의 형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각주:27] 예속 집단에서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은 단순히 계급의 이익에 의해서는 발생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 집단의 구조는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이라는 바로 무의식의 수준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리라.

 

혁명적 잠재성이 어떻게 현동화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잠재성을 품은 전의식적인 인과성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어느 특정한 순간에서의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이다. 이것은 곧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즉 인과관계의 단절이며, 이 단절은 현실적인 것에 밀착하여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 극도로 다의적인 순간을 낳는다.(AO. pp.453-454/()301)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최종적으로 욕망의 흐름을 절대적 극한으로까지 가속시키고, 자본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예속 집단을 물어 찢으며, 그것을 주체 집단으로 변용시키는 무의식적 절단,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 극도로 다의적인 순간을 초래하는 것이다. 욕망의 역능이, 그리고 욕망의 역능에 의거한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도주선이, 사회적 재생산의 인과관계의 단절을, 사건을 생산한다. 사건의 생산은 자본주의의 가속화에 따른 욕망의 절대적 해방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에게 사건의 생산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욕망이라는 원인(스피노자적으로 말하면 내재원인’)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각주:28] 그리고 그때 사건의 생산은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의 해방과 비위계적인 횡단적 집단성의 실현이다.[각주:29]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적 정치를, 단순히 사건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런 사건의 생산의 논리, 달리 말하면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이라는 전략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치바 마사야(千葉雅也)의 표현. 다음을 참조. 『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 河出書房新社, 2013. [김상운 옮김, 󰡔너무 움직이지마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 바다출판사, 2017년 근간 예정.] [본문으로]
  2. Alain Badiou, Deleuze : la clameur de l’être, Hachette, 1997, p.20. [본문으로]
  3. Slavoj Zizek, Organs without Bodies: Deleuze and Consequences, Routledge, 2004, p.20. [본문으로]
  4. 바디우파 철학자인 피터 홀워드도 바디우-지젝과 거의 같은 전략에 의거하며(혹은 그들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라) 들뢰즈 철학은 잠재적 창조행위의 철학이며 “세계의 변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cf. Peter Hallward, Out of This World: Deleuze and the Philosophy of Creation, Verso, 200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ai 68 n’a pas eu lieu»,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본문으로]
  6. Fra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lisme en politique)», in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sous la direction d’Erlc Alliez, Institut Synthélabo, 1998, p.347. [본문으로]
  7. Ibid., p.346. [본문으로]
  8.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13-14. [본문으로]
  9. Ibid., pp.13-14. “미셸 부르이에가 스토아학파의 사고를 빼어나게 재구성하여 말했듯이, ‘칼이 새로운 살을 자를 때, 전자의 물체는 후자의 물체 위에서 새로운 특성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속성을, 잘려진다는 속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 속성(attribut)은 어떤 실제적인 형질(qualité)도 지시하지 않는다. … 반대로 속성은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말하자면, 속성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다. … 이 존재양식은 이른바 극한에 있어서, 존재자의 표면에 있어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존재양식은 존재자의 본성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이 존재양식은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수동성은 능동을 겪은 물체적 본성을 상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양식은 그저 단순히, 성과이며, 존재자로는 분류되지 않는 효과이다. … 그때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으나 (스토아학파의 구별에서는) 기본적으로, 존재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한편으로 깊은 실제적인 존재자, 힘이 있으며, 다른 쪽에는 존재자의 표면 위에서 상연되고 끝도 없이 많은 비물체적 존재를 구성하는 사실의 면이 있다.” [본문으로]
  10. Michael Hardt / Antonio Negrl, Commonwealth,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pp.60-61. [본문으로]
  11. 에티엔 발리바르도 다음의 논고에서 바디우의 사건의 철학이 사건(에 대한 충실함)을 특권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cf. Etienne Balibar, «La philosophie et l’actualité : Au-delà de l’événement?», in Le moment philosophique des années 1960 en France. sous la direction de Patrice Maniglier, PUF, 2011. [본문으로]
  12.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144. 또 이 점에 관해 들뢰즈, 바디우와의 관계를 포함해 네그리를 논한 다음의 중요한 작업에서 시사를 얻었다. 廣瀬純, 『アントニオ•ネグリ-革命の哲学』, 青土社, 2013년. [본문으로]
  13. ‘절단’은 데리다에서 유래하는 개념이며, 이 개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분석한다. ‘절단’ 개념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을 참조. Félix Guattari, «Machine et structure»,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essais d’anaylyse institutionnelle, Maspero, 1972 (rééd. Découverte, 2003). ; Félix Guattari, Écrits pour l’Anti-Œdipe, Lignes manifeste, 2004. [본문으로]
  14.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L’Anti-Œ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t.1, Minuit, 1972/73, p.382. 강조는 인용자. 이하 ‘AO’로 약칭하고 본문 속에 원서, 번역서 쪽수를 표기한다. [본문으로]
  15. 라캉에 의한 분열증 정의에 대해서는 세미나 3권 『정신병』(Jacques Lacan, Le séminaire, livre III : Les psychoses, 1955-1956, texte établi par Jacques-Alain Miller, Seuil, 1981을 참조.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분열증’, ‘분열분석’ 개념의 형성에는 가타리의 역할이 크다. 이 점에 관해서는 추후 논의한다. [본문으로]
  16. Gilles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Minuit, 1967, pp.27-28. 이 점에 관한 자세한 것은 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김상운 옮김, 난장, 2장 참조. [본문으로]
  17. 다음도 참조. Félix Guattari, Ecrits pour l’Anti-Œdipe, pp.257—58, 384. ;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t. 2, Minuit, 1980, p.17. [본문으로]
  18. Jacques Lacan, «Subversion du sujet et dialectique de de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 in Ecrits. Seuil, 1966, p.819. [본문으로]
  19. 특히 다음을 참조. Félix Guattari, «Le groupe et la personne (bilan décousu) «Introduction à la psychothérapie institutionnelle»,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본문으로]
  20. Gilles Deleuze, «Préface», in Félix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p.VI. [본문으로]
  21. Sigmund Freud, Massenpsychologie und Ich Analyse, in Gesammelte Werke, Bd. 13, Fischer, 1999. [본문으로]
  22. “환상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론적 정신분석이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어디까지나 집단 환상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두 종류의 집단 환상이 있다고 한다면, 이 동일성이 두 개의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욕망기계가, 이것을 형성하는 거대한 군중적 총체에 있어서 파악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기계들이 이것을 형성하는 욕망의 기본적 힘들에 관계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집단 환상에서는 리비도가 현존의 사회적 장을, 그 가장 억제적인 형태도 포함해 투자할 수 있으며, 혹은 완전히 거꾸로, 리비도가 역투자를 발생시키고, 이 현존의 사회적 장에 혁명적 욕망의 접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AO, p.38/(上)64頁). 이하도 참조. Félix Guattari, «Le groupe et la personne (bilan décousu)»,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본문으로]
  23. “오이디푸스는 집단에의 통합의 한 수단이며, 이것은 오이디푸스 자체를 재생산하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행시키기 위한 적용의 형태를 취하는 것도 있다면, 정비된 막다른 골목 속에 욕망을 봉쇄하는 신경증적 축적에 빠져드는 것도 있다. 그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예속 집단 속에서 개화하며, 여기서 기성 질서는 이 집단의 억제적 형태 자체 속에 투자된다. 따라서 예속 집단의 형태들이, 오이디푸스적 투영과 동일화에 의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바로 오이디푸스의 수많은 적용이 출발점의 집합으로서의 예속 집단의 규정들에 의존하며, 이것들의 리비도의 투자에 의존하고 있다”(AO, p.123/(上)199頁). [본문으로]
  24. 자본주의에 관한 다음의 서술은 아래의 맑스의 서술을 토대로 한 것이다.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순환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한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이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동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운동은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Karl Marx, Das Kapital, in Marx-Engels Werke, Bd. 23, Dietz, 1962, S.167 ; AO, p.296에서 인용).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이러한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수단은 이 한계를 다시 새롭게, 게다가 더욱 막강한 규모로 자신에게 가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다”(Karl Marx, Das Kapital, in Marx-Engels Werke, Bd. 25, Dietz, 1964, S.260 ; AO, p.274, n.82에서 인용. [본문으로]
  25.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다음에서 상술했다. 『新自由主義と権力-フーコーから現在性の哲学へ』人文書院、2009년. [사토 요시유키, 󰡔신자유주의와 권력󰡕, 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본문으로]
  26. cf. Jacques Lacan, «Subversion du sujet et dialectique du dé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in Ecrits, p.800. [본문으로]
  27. “리비도가 새로운 신체에 결부될 때조차, 또한 전의식의 관점에서 보고, 실제로 혁명적인 목표나 종합에 대응하는 새로운 권력에 결부될 때조차도, 무의식적인 리비도 투자 자체가 혁명적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똑같은 절단이, 무의식의 욕망의 차원과 전의식의 이익의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전의식적 혁명은 사회적 생산의 새로운 체제에 관련되는데, 이 체제는 새로운 목표와 이익을 창조하고 분배하고 만족시킨다. 그런데 무의식적 혁명은 단순히 그런 변화를 권력 형태로서 조건짓는 사회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체에서의 욕망적 생산의 체제에, 즉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전복된 권력으로서의 욕망적 생산 체제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흐름과 분열의 똑같은 상태가 아니다. 전의식적 혁명의 경우 절단은 두 개의 사회체 사이에 존재하며, 혁명적 사회체는 새로운 코드나 이익의 새로운 공리계의 안에 욕망의 흐름을 도입하는 능력에 의해 평가된다. 무의식적 혁명의 경우 절단은 사회체 자체 속에 있다. 이 사회체는 긍정적인 도주선을 따라 욕망의 흐름을 교통시키는 힘을 가지고, 또한 생산적 절단의 절단에 따라 욕망의 흐름을 다시 재단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AO, p.416/(下)244-245頁). [본문으로]
  28. 들뢰즈=가타리의 이러한 ‘내재 원인’에 기초한 ‘사건의 생산’의 전략을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경향성을 따른 형태로 현대적으로 부여해 보여준 것이 네그리=하트이다.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형상은 20세기 말의 수십년 동안이 공장노동에서 비물질노동으로 이행했다. 비물질적 노동이란 지식, 정보, 커뮤니케이션, 관계성, 정동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가리키며, 지식, 언어 코드, 정보를 산출하는 지적, 언어적 노동과 돌봄(care)에 의해 정동을 산출하는 정동노동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비물질적 노동에 있어서 다중은 갈수록 서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산출하면서 협동하며, 지금까지 생산되어 온 «공통적»인 지식, 정보, 관련성으로부터 새로운 지식, 정보, 관계성을 창출한다. 네그리=하트는 다중 사이의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협동을 산출하는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생산형태가, 다중이 수립해야 할 자기통치로서의 절대적 민주주의와 이것을 실현하는 혁명적 절단의 기초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른 비물질적 노동의 경향적 우위성이 다중 사이의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협동(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사건의 생산’의 원인)을 실현하며, 혁명적 절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중” 개념은 “주체집단” 개념을 스피노자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특히 다음을 참조. Micheal Hardt / Antonio Negri, Multitude :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Penguin Press, 2004. [본문으로]
  29. 이치다 요시히코(市田良彦)는 『혁명론 : 다중의 정치철학 서설(革命論──マルチチュードの政治哲学序説)』, 平凡社新書, 2012년에서 이런 “사건”을 푸코의 말을 사용해 “반사목혁명”이라고 불렀다. “반사목혁명”(révolution antipastorale)이란 사목권력에 의해 “전체적이면서도 개별적으로” ― 즉 개인화를 통해 전체화하는 혁명을 가리킨다. 푸코는 1977-78년 강의 『안전, 영토, 인구』에서 “반사목혁명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후의 “주체의 자기 통치”의 문제계에 있어서, 이런 혁명과 탈예속화의 가능성을 구상했다. cf. Michel Foucault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édition établie sous la direction de François Ewald et Alessandro Fontana, par Michel Senellart, Gallimard / Seuil, 284, p.153.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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