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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30 『사상』, 2013년 2월 / (좌담회)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 제1부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해


사상, 2013년 2

 

 

목차

사상의 말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좌담회)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

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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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키 타츠야(槍垣立哉)                           스가 나오키(春日直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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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


들어가며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 오늘은 도래할 생명권력론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특집의 일환으로 기획된 좌담회를 위해 인류학의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씨와 사회학의 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씨를 초빙했습니다. 이치노카와 씨는 대학의 동급생으로 둘 다 아는 친구도 많이 있지만 장시간 얘기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카스가 씨는 오사카 대학에서 10년 정도 동료였습니다만, 강좌가 달라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이런 장에서 얘기를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은 인류학, 사회학, 그리고 제가 전공한 철학이라는 세 개의 상이한 영역에 속하는 세 명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학이라는 개념을 앞에 두었을 때, 상이한 분과학문discipline에서 견해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할 테지만, 한편으로 겹치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원래 복수의 분과학문에서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개념 등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 좌담회에서는 세 사람이 각각의 입장에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개념을 검토하고, 그 차이와 공통점[중복]을 부각시키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개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싶습니다.

 

I. ‘생명권력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생명권력개념의 연원

히가키 :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생명권력(bio-politique)’이나 생명정치(bio-politique)’는 미셸 푸코(1926~84)1970년대에 제시한 개념입니다. 다만, 푸코가 이 개념을 사용한 것은 아주 짧은 시기에 불과합니다. 저작을 살펴보면, ‘해부정치[](anatomo-politique)’라는 말이 적혀 있는 것은 감시와 처벌(1975)성의 역사 I(1976)의 일부이며, ‘생명정치에 관해서는 성의 역사의 마지막에서 인구의 생명정치학을 건드릴 뿐입니다. 콜레주드프랑스의 강의에는 생명정치의 탄생(1978~1979)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도 있고, 가장 관련이 깊은 것으로는 안전, 영토, 인구(1977~1978)가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특별하게 얘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문에 우생학이나 인종주의도 성의 역사에 나오지만, 이것도 그런 화제를 건드린다는 정도이며, 명확하게 논의되는 것은 아닙니다. , 푸코는 이 개념을 거의 전개하지 않았으며, 도대체 푸코가 이 개념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그 자체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때로는 철학적 개념으로 보입니다만, 그런 사실과는 무관하게, 푸코 사후에야 여러 분야에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 푸코가 1984년에 사망한 후, 뇌사나 게놈 문제, 분자생물학의 문제가 나타나고, ‘생명이 아주 거대한 지식의 대상이 되며, 정치적·윤리적 대상이 되었다는 현실이 있습니다. 푸코 자신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와 관련되고, 여러 가지 형태로 퍼졌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actual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권력론의 세 시기/위상

히가키 :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던 셈입니다만, 그 변천을 다시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세 가지 시기 또는 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첫 번째 시기 또는 첫 번째 위상으로, 사회학적 변용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성의 역사1권도 그랬습니다만, 여기서는 사회구축주의적인 독해방식이 이뤄지고, 앞에서 얘기했듯이 푸코가 아주 조금밖에 건들지 않았던 우생학이나 인종주의 같은 생명적인 것을 다루고 문제로 삼았습니다. 일본에서 말하자면, 이치노카와 씨나 바이오폴리틱스 : 인체를 관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中公新書, 2006)를 썼던 요네모토 쇼우헤이(米本昌平) 씨가 대표로, 생명윤리를 포함한 생명을 둘러싼 사회적 이론으로서 논의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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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두 번째 시기 혹은 두 번째 위상인데, 원리적으로 철학으로서 생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저명인사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화제로 삼는 조르조 아감벤(1942~)이나 안토니오 네그리(1933~), 주디스 버틀러(1956~)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둘러싼 논의로 지적인 관심을 자극했으며, 네그리가 마이클 하트(1960~)와 함께 제국(2000)을 썼던 때에는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 푸코가 있었습니다. 버틀러 역시 푸코를 상당히 의식합니다. 이들의 특징을 강하게 한 마디로 한다면, 푸코를 따르면서 푸코에 반한다는 것입니다. 아감벤이라면 법에 구애됩니다. 네그리라면 국가에 구애됩니다. 버틀러라면 정신분석에 구애됩니다. ‘이나 정신분석은 중기 이후의 푸코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개념에 다름 아닙니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1995)의 서두에서 한나 아렌트(1906~75)와 푸코가 유사한 것을 생각했으나 서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교차하고 있다는 식으로 썼습니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 프랑스나 독일의 철학자라는 일종의 영토주의가 있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죠. 아감벤과 네그리는 이탈리아인이며, 버틀러는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 프랑스 철학이나 독일 철학과는 무관한 곳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1990년대의 일본에서는 그런 사상이 생겨나지 않았느냐며 윗세대한테 불평을 터뜨리고 싶네요(웃음).

   그런데 21세기가 되면 세 번째 시기 혹은 세 번째 위상을 인식할 수 있는데, 영역의 확산이 더욱 가속화됩니다. 이 조류에 관해서는 이 특집호에도 몇 개 소개될 예정입니다. 예를 들어 니콜라스 로즈(1947년 생)는 최근까지 런던정경대학(LSE)BIOS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런던대학 킹스칼리지에 신설된 의학·건강사회과학부의 학부장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그는 저작 생명 그 자체의 정치학(2007)에서 현상태의 의학에서는 신체가 파트(part)로 분리되는 게 아니라, 유전자나 분자수준에서 파악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뇌신경계적 자기분자적 신체같은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조금 뒤에 카스가 씨의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인류학에서도 아주 주목할 만한 흐름이 생기고 있습니다. 브뤼노 라투르(1947년 생)가 큰 중계점이 되어서, 브라질의 에두아르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1951년 생)나 프랑스의 젊은 세대에 속한 프레데릭 켁(1974년 생) 같은 사람들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정치라는 것에 상당히 마음을 쓰고 있고, 이로부터 새로운 인류학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다문화주의를 부르짖었던 인류학에 대해서 다자연주의를 부르짖습니다. 거기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독해되며, 인류학이라는 분과학문이 존속할 수 있는 걸까라는 위험한 생각이 들 정도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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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Viveiros de Castro)

카스가 : ‘인간의 용해라고 불리기 때문이죠.

히가키 : 인간이 없어진다는 얘기가 되는 셈인데, 이로부터 돌이켜보면, 네그리나 아감벤은 거대이론grand theorie이랄까, 빈틈없는 체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후 세대는 그렇지 않고 개별 분야에서 얘기가 점점 더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조류 중에서 푸코의 독해방식이나 사용방식도 확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수습하려고 해봤자 의미가 없, “이것은 잘못된 독해방식이고, 이것이 올바른 독해방식이다라거나, “이것은 옛날 독해방식이고 이것이 새로운 독해방식이다라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확산되는 궤적 속에서부터 무엇을 낚아채는 것이 유효한가를 논의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 개의 분과학문

히가키 : 이런 의미에서 여기에 사회학과 인류학과 철학에 속하는 세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치노카와(市野川) 씨는 최신작 사회학(社会学)(岩波書店, 2012)에서 오귀스트 콩트(1798-1857)에 관해 쓰셨는데요, 사회학의 선조는 일반적으로 에밀 뒤르켐(1858-1916)과 가브리엘 타르드(1843-1904)라고 일컬어집니다. 사회에 관해 논하는 일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줄곧 이루어져 왔습니다만, 분과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은 19세기의 프랑스에서 생겨난 비교적 새로운 학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노카와 씨도 포함해서, 사회학은 현대사회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제3부에서 다루는 근대의 문제만 해도, 근대가 있는가 없는가 따위는 철학의 얘기이며, 근대가 있든 없든 사회학은 눈앞의 문제로 향해야 한다고 당연한 듯 생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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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 인류학인데요, 카스가 씨는 인류학의 탄생을 19세기라고 부르고 있고, 푸코는 말과 사물(1966)에서 20세기적인, 더 새로운 것으로서 인류학(구조인류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학이 보고 있는 인간은 사회학이 보고 있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됐습니다. 신석기 시대에서 시작해, 근친상간금지나 식인풍습(카니발리즘)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죠. 다만 아까 거론한 에두아르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나 켁을 비롯하여,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2009)신화론(1964-71)을 높이 평가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집니다. , 구조주의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인간과 동물의 교착상태에 주목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삶과 관계하지 않았을 리가 없죠.

   그러면 철학은 어떤가? 철학자는 필드연구가 책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공리공론이다라는 말을 들을 운명에 있습니다. 다만, 바로 그렇기에 철학은 시대에 침을 뱉고, 일부러 반시대적인 행동을 하고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코라는 인물은 어떤 분과학문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본인에게 물었다면, 초기라면 자신은 과학인식론학자라고 말했겠지만, 후기가 되면 그렇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역사학자는 저런 것은 역사학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사회학자는 저런 것은 사회학이 아니다라고 말하잖아요. 그렇다고 인류학자도 철학자도 아닙니다. , 푸코 자신은 설 자리가 없는 인물로, 그렇기에 세 개의 학문이 푸코의 어느 부분에서 교차하는가를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철학은 권력이나 정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히가키 : 지금까지 제가 도입부를 했으니까, 두 분께 자신과 생명권력론의 관계에 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이치노카와 씨부터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치노카와 : 우선 히가키 씨한테 트집을 잡자면(웃음), 시대구분이라는 말씀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1, 2, 3기로 나눈다면, 1기가 끝난 후 제2기가 오고 이어서 제3기가 온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히가키 : 그 말씀에는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시기라고 말한 것은 읽기 방식과 수용 방식의 시대별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일 뿐이며, 1기나 제2기는 이제 끝났고 지금은 제3기이다 같은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노카와 : 세 가지의 방향이나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푸코가 생명권력이라고 말했을 때, 잠재적으로는 이미 세 가지 방향이 열려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과 인류학과 철학이라는 세 개의 분과학문에 대해서입니다만, 사회학이 실제로 고찰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이나 사회는 고작 2백년 정도의 것입니다. 그런 근대사회나 현대사회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사회학은 다른 영역에 손을 대면서 비대해졌습니다. 그것은 콩트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실제의 고찰대상은 한정된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말하는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 상궤를 벗어나 있을 정도로 큽니다. 이렇게 도착적인 것이 사회학에는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를 들어 마르셀 모스(1872-1950) 등으로 이어지고 분야를 넓혀서 인류학에 접근하고, 이론의 부분에서도 웅장한 것을 만들어내고 철학에 접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회학이 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에 관심을 냐 하면, 푸코는 단순한 생명론이나 생명철학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생명권력이라고 말하고 생명정치라고 말했으니, “권력이나 정치라고 얘기하면 사회학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과 권력의 철학(権力哲学)(ちくま新書, 2006)을 쓰신 히가키 씨께 물어보고 싶은데요, 철학자가 권력이나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제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의외입니다. 예를 들어 아까 이름이 나온 아렌트인데요, 그녀는 1964년에 독일의 그 사람을 안다(Zur Persons)라는 인터뷰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그 내용은 활자화되어 있습니다(Hannah Arendt, Ich will verstehen. Selbstauskünfte zu Leben und Werk, Piper, 1996, S.46ff). 지금은 인터넷에서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첫머리에서 사회자가 그녀를 철학자라고 소개하는데요, 곧바로 아렌트는 철학을 공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제 작업은 정치이론(politische Theorie)입니다”, “나는 정치철학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습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나는 철학에 영원히 작별을 고했습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철학과 정치 사이에는 뿌리 깊은 긴장관계가 있습니다. 자연철학에 있어서, 철학자는 전체 인류의 이름으로 자연에 마주대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결코 중립적으로 될 수 없다. 그래서 대다수의 철학자에게서는 모든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보이지만, “나는 그런 혐오를 공유할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아렌트는 말하고, “그것은 곧 철학에 의해 흐릿해지지 않는 눈으로 정치를 본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보통은 거꾸로, “정치에 의해 흐릿해지지 않는 눈으로 사물을 보라(철학하라)”고 하지만, 아렌트는 철학에 의해 흐릿해지지 않은 눈으로 정치를 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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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soImQfVsO4



   프로그램은 그 후, 아렌트의 반편생을 반추하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사회자의 물음에 답하면서 아렌트는, 자신이 철학에 영원히 작별을 고하고 정치에 눈을 뜬 것은 1933년이라고 말한다. ‘철학이라든가 정치철학이라고 말할 때 그녀가 염두에 둔 것은 마르티 하이데거(1889-1976)라든가 칼 슈미트(1888-1985)일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철학()은 정치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렌트의 이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히가키 : 문제는 (pouvoir)’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철학의 맥락에서는, 스피노자와의 관계가 큰데요, 철학에서 사물을 생각할 때에는, 자연과학에서 얘기되는 물리적인 힘, 생명력, 그리고 말에 의해 명령하는 힘인 정치권력은 구별되지 않았다. 이것들이 구별되고 거꾸로 포개지면 위화감을 느끼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부터죠. 그래서 일본어로 번역하면 다른 말로 보이지만, 푸코나 특히 질 들뢰즈(1925-95) 등은 물리적인 힘도 정치적인 힘도 의도적으로 뒤섞어서 사용하고 있고, 이것들이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로 제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렌트에 대해 말하면, 그 시절의 독일의 특수성이 현현한 사례라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렌트가 그런 반응을 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나치 논쟁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고, 일본에서도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우익이었는가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철학은 그런 문제를 어떻게 파악하는가? 아감벤은 푸코가 파시즘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그런 문제에서 벗어난 곳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푸코에게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조금 정정하면, 아까 “‘권력정치라고 하면, 사회학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적지 않은 일본의 사회학자에게는 감시와 처벌이후의 푸코를 거론하는 것은 촌스럽다는 감각도 있고, 말과 사물이 최고봉에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권력이나 정치에 반응하는 나 같은 사회학자가 촌스러운 것이고, 일본에서는 오히려 어긋나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히가키 : ‘촌스럽다, 꼴불견이다라는 감각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치노카와 : 나도 모르겠지만, 아렌트가 철학에 대해 말한 것이, 사회학에도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정치와 마주대하는 것 자체가 가치자유를 좌우명으로 삼아온 사회학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으로, 그래서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사회학자의 대다수도, 모든 정치에 대한 혐오가 있다고 말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렌트에 무게를 두고 말하면, “사회학에 의해 흐릿해진 눈으로 정치를 보는것도 필요할까요?

 

사회학과 생명권력론

이치노카와 : 제 개인에 대해 말하면, 푸코의 이름을 처음 가르쳐주신 것은 우치다 류조(内田隆三) 선생입니다. 그러나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문제에 대해 말하면, 요네모토 쇼우헤이 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요네모토 씨는 2006년에 바이오폴리틱스(バイオポリティクス)라는 책을 냈는데요, 요네모토 씨 아래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 누데시마 지로(橳島次郎) (첨단 의료의 지배[규칙] : 인체이용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先端医療のルール ──人体利用はどこまでされるのか), 講談社現代新書, 2001)나 제가 씨름했던 것도, 푸코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바이오폴리틱스였습니다. 요네모토 씨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윤리논의가 아니라 무엇이 올바르다고 여겨지는가라는 정책결정의 과정이나 구조를 분석하는 것, “에틱스ethics”에 억지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폴리틱스를 보이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게다가 그런 폴리틱스를 그저 바라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정책 제언까지도 할 수 없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요네모토 씨의 그런 자세로부터 배운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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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치다 류조(内田隆三)

 누데시마 지로(橳島次郎)


   게다가 요네모토 씨의 유전관리사회 : 나치와 근미래(遺伝管理社会──ナチスと近未来)(弘文堂, 1989)로부터는 역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요네모토 씨가 거기서 소묘한 역사를 더욱 자세하게 하려고 생각하고, 그것을 나는 의료의 역사사회학이라고 불렀는데요, 그 과정에서 푸코가 말하는 생명권력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가, 어떤 사건을 생명권력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우생학의 역사연구는 그 하나이며, 의료윤리라는 것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나치를 포함한 독일을 주된 대상으로 삼아 고찰했던 것도 그 일환입니다. 아울러 지금, 존엄사 법안을 국회에 상정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만, 그 이외에도 뇌사나 장기이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죽음의 의료화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내게 있어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교화되어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하나하나 검증되어야 할 개념으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나는 생명권력이라는 말을 실마리 삼아 주로 역사적으로 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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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키 : 이치노카와 씨는 신체/생명(身体/生命)(岩波書店, 2000)에서 크사비에 비샤(마리 프랑수아 사비에르 비샤, 1771-1802) 얘기를 하고 있네요. 제 쪽에서 보면, 그 편이 놀라운데, “왜 사회학자가 생명철학 얘기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콩트를 거론하는 것도 사회학에서는 예삿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철학에서 콩트는 어디까지나 실증주의 철학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생명론이나 생명철학과 정치철학은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다. 떨어져 있는 것은 20세기의 특수상황 속에서이고, 앞으로 그것을 다시 교차시키는 것도 가능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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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카와 : 죽음의 의료화와 관련해 여러 가지 것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코마츠 요시히코(小松美彦) 씨의 죽음은 공명한다 : 뇌사장기이식의 탐구로(共鳴する──脳死臓器移植みへ)(勤草書房, 1996) 코마츠 씨는 근작인 생명권력의 역사 : 뇌사존엄사인간의 존엄을 둘러싸고(生権力歴史──脳死尊厳死人間尊厳をめぐって)(靑土社, 2012)에서 아감벤도 감안하면서 푸코의 생명권력을 근원적으로 되묻고, 우리의 현재를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를 예외로 하고, 의학적으로 죽음이 그동안 어떻게 정의되었는가를 조금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연구가, 번역을 포함해 일본어로는 전무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뇌사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분수를 몰라도 유분수입니다만, “누구도 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하지라는 마음으로 했더니, 비샤의 텍스트가 부상했다. 내게는 생명론과 생명철학을 할 생각이 전혀 있으며, 내 나름대로 생명권력을 역사적으로 되묻는 가운데, 비샤의 텍스트에 맞닥뜨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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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키 : 하지만 프랑스의 맥락에서 말해도, 푸코가 임상의학의 탄생(1963)에서 다뤘기 때문에 비샤를 읽었다는 것은 있겠죠?

이치노카와 : 그것도 물론 염두에 있었지만, 푸코 때문에 비샤를 읽은 것은 아닙니다. 의학사 속에서 비샤는 큰 존재이기에, 의학사의 틀로 공부하면 반드시 맞닥뜨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학과 생명권력론

히가키 : 이어서 인류학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카스가 씨도 그런데요, 예를 들어 다나베 시게하루(田辺繁治) 씨는 타이의 HIV환자 커뮤니티를 연구하고 계시고, 인류학에서도 생명정치학적인 것이 부상하는 것처럼 느낍니다만, 어떻습니까?

카스가 : 폴 래비노우(1944~)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교에 있는 인류학자인데요, 그가 종종 푸코를 초대해 얘기를 나눴고, 1980년대의 미국에 푸코를 도입했습니다. 래비노우는 푸코의 초기와 후기를 나누지 않고 논의합니다. 그래서 80년대 후반에 다양한 성과가 나오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이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자크 동즐로(1943~)사회적인 것의 발명(Jacques Donzelot, L’invention du social : essai sur le declin des passions politiques, Fayard, 1984)이예요. “사회적인 것이라는 문제가 제시된 곳에 네오콜로니얼리즘이나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흐름이 보태져, 식민지주의 연구에서도 푸코가 다뤄지게 됐습니다. 피지에서의 위생관념이라든가 알제리에서의 도시의 구축을 다룰 때 푸코가 원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의 특히 후반이 되면, 세계 속에서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다양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당초는 산업화사회에서의 호스피스에서의 연명치료 같은 얘기였지만, 이로부터 버림받아 이름 없는 자가 있다든가, 인도의 농촌에서 장기매매가 이뤄진다든가, 콜롬비아에 유괴범 조직이 있다든가, 아르헨티나에서는 실험을 위해 항생제를 공짜로 배포한다든가, 이런 현상들이 점차 나타났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존의 인류학의 방법으로는 잘 다룰 수 없다. 국지적인 현상이지만, 거기에 국제투자기관이 들어가고, NGO가 들어가고, 다국적기업인 제약회사가 들어가기에, 문화시스템이나 정치시스템이나 경제시스템이라는 틀로는 파악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트워크적인 장치같은 개념이 도입됐다. 인류학자 중에는 큰 개념을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푸코는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푸코의 개념을 원용해 생명권력을 얘기하는 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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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래비노우(Paul Rabinow)

   인류학이 생명권력에 관련될 경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료인류학의 대가인 아서 클라인만(Arthur Kleinman, 1941~)이 그러한데요, 위험에 노출된 신체나 인격이 왜 이렇게 태어나는가에 대해 생명불평등성(bioinequality)”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조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런 역경 속에서, 푸코가 말하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어떻게 재구축할 수 있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들은 인류학에서 다루는 문제 아닐까 생각합니다.

Arthur Kleinma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아서 클라인만(Arthur Kleinman)

   다만 이것은 사회학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요, 푸코의 시대와 비교하면, 지금은 사회적인 것이 후퇴하고 있어서, 보이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성의 구축에 초점을 맞춰서 생명권력에 대해 재논의하자는 흐름이 있는데요, 이것은 1990년대 후반 이후 게놈이나 생체조직공학에서의 분자기구 같은 것이 어떤 사회성을 만들어나가는가를 논하는 것이다. 래비노우나 앞에서 히가키 씨가 언급한 로즈 등에서 볼 수 있는 분자생명정치등의 논의이죠. 다만 많은 인류학자는 이런 대략적인 논의에는 비판적인 거리를 취하고 있습니다만.

히가키 : 피지에서 현지연구field work를 하신 카스가 씨 자신과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카스가 : 오랫동안 피지의 마을에서 현지연구field work를 하다 보니까, 서로 친해져서 동료의식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역시 다른 사람들이에요. 제가 신세를 졌던 마을에서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도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도 모두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상화normalisation’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것이, 오늘날의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들과 함께 말할 수 있다는 감각입니다.

이치노카와 : 그래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말이 부상한다는 이미지인가요?

카스가 :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이치노카와 : 과연. 이것은 자기비판입니다만, 제 자신은 국민국가선진국이라는 이중적 편견bias 속에서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푸코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헌팅턴 병이라는 유전병이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주위로부터 격리된 베네수엘라의 한 어촌에서 이 병에 걸린 환자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미국 등의 연구팀이 들어가서, 원인이 되는 유전자가 1990년대 초반에 특정되었습니다. 생명의 해명은 이처럼 실제로는 국경을 넘어서, 다양한 연구자나 기업이나 자본이 들어감으로써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또한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에 관련되는 것입니다만, 저는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은 이미 의료인류학의 연구테마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회학자에게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에게는 사상할 수 없는 것을 인류학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생명권력이나 생명정치라는 문제 하나만 해도, “사회학적 상상력의 한계를 새삼 자각하게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제 개인의라는 한정을 달아두겠습니다만.

 

비티 카바니를 둘러싸고

히가키 : 카스가 씨가 태평양의 라스푸틴 : 비티 카바니 운동의 역사인류학(太平洋のラスプーチンヴィチ・カンバニ運動歴史人類学)(世界思想社, 2001)에서 쓰셨던 아폴로시 나와이(Apolosi Nawai)라는 사람의 얘기가 있네요. 그것이 매우 재미있는데, 학생들한테 얘기해주면 모두 포복절도합니다. 아폴로시는 신흥종교인지 주식회사인지 잘 모르겠지만 비티 카바니(Viti Kabani)’라는 조직을 세웠죠?

太平洋のラスプーチン―ヴィチ・カンバニ運動の歴史人類学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카스가 : 영어로 하면 피지 카바니입니다.

히가키 : 1915년에 그 조직을 세웠을 때의 선언문이 있는데요, 요컨대 이렇게 말한다. 왜 우리는 미운 영국인보다 못하는가? 그들은 회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회사를 만들면 된다. 회사를 만들어 성공시키고, 이 전지구적 사회에서 비티 카바니가 성공하면, 100년 후에는 저 미운 영국인을 우리의 발밑에 두고 우리의 노예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회사를 세우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돈을 보내달라는 글을 작성해 피지의 구석구석에 뿌렸고, 엄청난 금액의 돈이 모였다(웃음). 그런데 아폴로시는 무엇을 했냐 하면, 바로 인류학적인 의례라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요컨대 주지육림처럼 흥청망청 해댔습니다.

카스가 : 모두한테 대접했어요.

히가키 : 그렇게 해서 돈이 없어지면, 다시 글을 짓는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때이다. 회사를 지탱하기 위해 돈을 더 보내주세요라고 말이죠. 그렇게 하자 또 돈이 모여든다(웃음). 결국 아폴로시는 체포되어버린 건가요?

카스가 : 몇 번이나 붙잡혔습니다.

히가키 :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카스가 선생이 현지연구field work에 나갔을 무렵에는 이제 비티 카바니는 없습니다라는 공식 문서가 나왔는데도, 아직도 돈을 보내는 사람이 피지 안에 있다(웃음).

카스가 : 어떤 장소에서는 저를 아폴로지의 재래(再来)라고 여겼습니다(웃음). 외부에서 온 왕[外来王]이죠.

히가키 : 바다 건너에서 온 일본인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돈을 건네면 회사를 만들어서 영국을 박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군요.

카스가 : 바로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옛 권력이 갖고 있는 힘입니다. 이 감각은 피지에 가면 잘 아실 겁니다. 거기서는 참이냐 거짓이냐보다 진짜[진품]냐 가짜냐가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진짜 신의 사람인가, 라는 거죠.

히가키 : : 카스가 씨는 진짜[진품]였던 셈이군요.

카스가 : 그렇습니다(웃음). 이런 감각을 푸코는 잘 적고 있습니다.

히가키 : 이것은 신흥종교집단에 의한 사기사건이라고도 파악됩니다만, 반식민지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영국에 대해 당신과 동등한 권리를 주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신들이 회사를 일으켜 전지구적 사회를 탈취하면, 영국인은 자신들의 발밑에 엎드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발상이죠.

카스가 : 카고 컬트(cargo cult, 멜라네시아 특유의 적화(積貨) 신앙[숭배]. 조상의 영혼이 배·비행기로 돌아와 백인에게서 해방시켜 준다는 신앙)적인 발상입니다. 결정적인 것, 세상의 비밀은 감춰져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면 모든 것이 진품이 된다. 지금 있는 것은 진품이 아니지만, “진품은 누군가가 반드시 갖고 온다는 사고방식입니다.

히가키 : 저는 이른바 포스트콜로니얼에는 꽤 불만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식민지주의에 대해 선이냐 악이냐라는 발상이 강하고, 그것을 전제로 식민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가 논의되곤 합니다. 하지만 비티 카바니에게서는 포스트콜로니얼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지배자가 되면 저 놈들은 우리의 노예가 될 테니까, 빨리 회사를 만들면 좋다고 피지인 자신이 말하고 있으니까요. 비슷한 얘기는, 전 세계를 찾아보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싸늘한 시선을 하면 그런 운동은 결국 미국 자본주의 속에서 으깨지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가 되며, 정말 이 말 그대로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피지에는 비티 카바니가 없어져도 돈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있고, 카고 컬트라는 예가 있었던 것처럼, 절반은 종교적인 시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나머지 절반은 돈을 내면 언젠가 영국인은 우리의 노예가 된다는 사고 속에서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생명권력의 문제와 얽히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치노카와 : 푸코가 고찰 대상으로 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럽 근대이며, 이런 의미에서는 엄청난 유럽중심주의입니다. 그런데 그 고찰 속에서 생겨나는 개념은 유럽 근대가 아닌 장소, 혹은 유럽 근대라는 틀로는 파악되지 못하는 장소에까지 다다른다.

카스가 : 그것은 벤야민한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네요. 아감벤에게는 없고 벤야민에게는 있는 것.

이치노카와 : 벤야민에게도요? 새삼 사회학적 상상력의 좁음을 느낍니다. 다시 제 개인의라는 한정을 붙이지 않으면, 다른 사회학자의 분노를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1부 끝)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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