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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사후 10



 

0. 들어가며 

...................................................................................................................................................................西山雄二


1. 민주주의의 항상성과 일관성 (Constance et consistance de la démocratie) 

....................................................................................................... Jérôme LÈBRE (일역 松田智裕横田祐美子)


2. 데리다와 랑시에르에게서의 민주주의와 타자의 물음 (La démocratie et la question de l’autre chez Derrida et Rancière)

.............................................................................................................................................................. 亀井大輔


3. 들뢰즈와 데리다두 사람의 운동은 같지 않다 (Deleuze et Derrida, ce n’est pas le même mouvement)

.................................................................................................... Jean-Clet MARTIN (일역 大江倫子西山雄二)


4. 최후의 유대인’ : 데리다유대교와 아브라함적인 것 (« Le dernier des juifs » : Derrida, le judaïsme et l’abrahamique)

........................................................................................................................ Gisèle BERKMAN (일역 佐藤香織)


5. 희생된 동물의 두 개의 신체 자크 데리다의 철학에 있어서 동물-정치 개념에 대한 고찰 (Les deux corps sacrifiés de l’animal. Réflexions sur le concept de zoopolitique dans la philosophie de Jacques Derrida)

............................................................................................................................. Patrick LLORED (일역 吉松覚)


6. 자크 데리다동물성의 시학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animalité. Sur l’anhumain)

..................................................................................................................... Gérard BENSUSSAN (일역 桐谷慧)


7. 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 (The Cat, the Look, and Death)

............................................................................................................................. Darin TENEV (일역 南谷奉良)


8. 대린 테네브고양이눈빛그리고 죽음에 대한 응답

..................................................................................................................................... 大杉重男南谷奉良山本潤


9. 데리다에게서의 증여와 교환 (Gift and Exchange in Derrida (Derridative)

....................................................................................... Darin TENEV (일역 横田祐美子松田智裕亀井大輔)

 

이하 몇 편의 글이 더 있으나 생략.

 

 

首都大学東京人文科学研究科

2015년 6






자크 데리다 사후 10

 

자크 데리다, 동물성의 시학

: 무인간적인 것에 관해[각주:1]

ジャック・デリダ, 動物性詩学 : 無人間的なものについて

Gérard Bensussan,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ʼanimalité : Sur l’anhumain». Reprinted by permission of Gérard Bensussan

 

제라르 벵수상(Gérard BENSUSSAN)

(일역자 : 桐谷慧)

코랄리 카밀리를 위해

コラーリ・カミリのために

 

20012-511-07 - 동물성의 시학 - 국역.pdf

20012-511-07 - 동물성의 시학 - 일본어.pdf

* 프랑스어 원문을 찾을 수 없어서 일역본을 중역했다.

 


 

 

동물이 우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벌거벗었다. 그리고 사유하다는 아마 거기서 시작된다L’animal nous regarde, et nous sommes nus devant lui. Et penser commence peur être la.”[각주:2] 나는 동물을 쫓는다, 고로 나는 있다(동물이다)(이하 동물을 쫓다)의 데리다의 처음과 더불어, ‘조야한(brut)’ 수수께끼 속에서 간직되고 있는 동물의 이 시선에서 비롯되어 사고를 하겠다는, 철학자에게 보내진 초대로부터 출발, 혹은 재출발하고 싶다. 이 동물의 시선은 <타자>보다 더 다른, 모든 형이상학보다 더 낡은, 모든 이원론보다 근원적인 타자의 시선이다. 

모든 인류학 이전의 어떤 시작에 있어서, 이 시선 아래서, 그리고 철학자가 어떤 동물의 시선, 예를 들어 고양이의 눈에 의해, 침묵 속에서 알몸으로 허를 찔릴surpris nu, en silence, par le regard d'un animal, par exemple les yeux d’un chat[각주:3] 때에 그 시선이 불러일으키는 탈보호화(déabritement)’에 있어서, 도대체 무엇이 생각되는 것일까? 곧바로 난폭한 방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고전적 형이상학과 전통적 존재론의 탈구축이다. 사실을 말하면, 이 탈구축은 하이데거의 해체(Destruktion[파괴])’ 자체보다 근본적이며, -세계적 존재자 전체를 열어젖히는 존재자로서의 현존재(Dasein)’의 발명보다도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적 탈구축(우리는 이 말이 무슨 약속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현대사상의 이러한 결정적인 여러 단편을(해체, 현존재 거기에 데리다는 데카르트, 칸트, 레비나스 그리고 라캉을 한데 모아 덧붙인다), 이런 단편 자체에 의해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것 속에 재기입하기 때문이다.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것은, 즉 철학의 불변적 요소인 휴머니즘[humanisme]’, 주체성의 해소 불가능한 패러다임으로서의 휴머니티[humanité]’,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e]’, ‘인간-목적론[anthropo-téléologie]’, 요컨대 인간[humain]’이다. 근본적인 동물, 실존론적 분석론보다도 기초적 존재론보다도 근본적인 동물은 탈구축을 하는 동물[animal déconstructeur]”이다. 파롤이 박탈된[privé]” 것이 아니라 파롤 없는 그 시선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말의 통상적 의미에서 동물들은 우리에게 결코 응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생각에 잠겼고[pensif]”[각주:4] 불투명하고, “장난기 어려 있다[malicieux].” 나는 여기에서 다른 것에 비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청년 헤겔파인 테오도르 피셔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헤겔이 칸트를 물구나무세운 듯한 이론적 몸짓에 있어서, “대상의 장난질[malice de l’objet]”에 대해 말했다.[각주:5] 무제한으로 내빼 달아나는 것의 장난질, 이 장난질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이해할 수 없는 것[l’incompréhensible]”에 관한 텍스트(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Über die Unverständlichkeit])와 상당히 가까운 입장을 나타내고 가리킨다.[각주:6] 그리고 탈구축과 예나의 낭만주의, 데리다의 에크리튀르와 슐레겔의 단편을 결합시킨 연결을, 우리는 쉽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의 생각에 잠긴 이 시선에 있어서, 어떤 뿌리가 묻혀 있다는 것, 근본적이자 잊혀져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의 망각에 있어서 잊혀지고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자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뿌리는 망각에서 벗어나고 폐색을 해방하는[풀어놓는] 대항-장치임이 직접 분명해지는 것이다. 나는 하이데거에 논의를 집중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이런 관점에 있어서, 그리고 아무튼 동물을 쫓는다의 역사적 철학적 도정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내가 곧바로 뒤에서 되돌아가는 몇 가지의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그는 이 역사적 철학적 도정의 정점, 범례성, 주목할 만한 응축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체성의 형이상학의 탈구축의 극점에 있어서, ‘동물은 우리를 본다, 그리고 알몸이라는 감각=벌거벗음성[nudité]”에서 출발해 사고하라고 우리에게 엄명하는 것이다. 이 알몸이라는 감각은 너무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철학의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연쇄적인 반응을, 데리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적어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강력하고 풍부한 연쇄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의 맹목적 범례성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데리다를 인용하자, “인간 현존재와 동물 사이의 대립으로서의 손의 해석은, 존재의 의미의 물음의 반복, 존재-신학의 파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존재와 눈앞의 존재手前存在(Vorhandensein)’손안의 존재手許存在(Zuhandensein)’ 사이의 한계들을 재분배하는 실존론적 분석 이후, 하이데거의 가장 연속적인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손과 동물을 문제 삼을 때마다[각주:7] 그가 당혹을 감추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 담론은 단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레토릭에 굴복하는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 그때 이 레토릭은 가장 심대한 형이상학적 인간주의의 공리들을, 어둠 속에서 아무런 흠집도 없이 보호된 채로 내버려둔다 . 이것은 특히 형이상학의 근본문제에 있어서 명백하다L'interprétation de la main, comme l'opposition entre le Dasein humain et l'animal, domine le discours le plus continu de Heidegger, depuis la répétition de la question du sens de l'être, la destruction de l'onto-théologie, et d'abord l'analytique existentiale qui redistribue les limites entre Dasein, Vorhandensein et Zuhandensein. Chaque fois qu'il est question de la main et de l'animal, le discours de Heidegger me semble céder à une rhétorique d'autant plus péremptoire et autoritaire qu'elle doit dissimuler un embarras. Elle laisse alors intacts, abrités dans l'obscurité, les axiomes de l'humanisme métaphysique le plus profond . Cela est particulièrement manifeste dans l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métaphysique .”[각주:8]

사실, 동물성이라고 불리는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적어도 오늘날에 이르는, 강력하고 풍부한 연쇄의 가장 불명료한 특징들을, 혹은 가장 장난스럽게, 가장 이해 불가능한, 가장 곤혹해 하고 있고, 가장 당혹하게 만드는 특징들을, 의미 깊게 끌어모으는 것이다. 이 연쇄는 끊임없이 같은 관심을 재생함으로써, “존재-신학을 휴머니즘에 결부시키고”, “인간과 동물 사이의 특히 동물성 사이의, 일의적이고, 동질적이고 반계몽주의적인 동물성이라는 개념 사이의 본질적인 대립을 산출한다. 예를 들어 동물은 <이성>, <사회>, <웃음>, <욕망>, <언어활동>, <법률>, <억압>을 갖지 않는다L'Animal n'aurait pas la Raison, la Société, le Rire, le Désir, le Langage, la Loi, le Refoulement[각주:9]고 간주되는 것이다. 목록동물을 쫓는다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고, 확대되고, 명시된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이런저런 능력을 동물에 대해 거절할 권리가 있느냐고 묻는 것뿐만 아니라(파롤, 이성, 죽음의 경험, 애도, 문화, 제도, 기술, 의복, 거짓말, 거짓을 속이기, 흔적의 소거, 증여, 웃음, 눈물, 존경 등등 목록은 필연적으로 제한이 없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철학적 전통은, 이 모든 것을 동물에 대해 거절한 것이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문제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 동물에 대해서는 거절하는 것을, 인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게 인정할 권리가 있느냐, 즉 자신에 대해서는 인정할 권리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며, 그리고 이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것이, 이런 것들에 대한 순수하고 엄밀하게 분할 불가능한 개념을, 그 자체로서 과연 갖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기도 하다It is not just a matter of asking whether one has the right to refuse the animal such and such a power (speech, reason, experience of death, mourning, culture, institutions, technics, clothing, lying, pretense of pretense, covering of tracks, gift, laughter, crying, respect, etc.the list is necessarily without limit, and the most powerful philosophical tradition in which we live has refused the ‘‘animal’’ all of that). It also means asking whether what calls itself human has the right rigorously to attribute to man, which means therefore to attribute to himself, what he refuses the animal, and whether he can ever possess the pure, rigorous, indivisible concept, as such, of that attribution.”[각주:10] 

강력하고 풍부한 연쇄오늘날”, 동물성에 관한 하이데거의 담론의 전체를 지휘하고 있는 공리계 속에서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이런 담론에 대한 때 이른 관심 때문에, 당연하게도, 조종보다 전부터 이미, 데리다가 동물의 물음에 대해 민감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어찌됐든, 전통 및 하이데거적인 반-전통에 대한 데리다의 독해는, 해체의 피안에 있어서 탈구축을 개시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해체는, 텔로스에 의해 이끌어진 뒤나미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낡은 도식에 결말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해체가 그 낡은 도식으로부터 형이상학적 불순물을 제거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만 그 때문에 이 제거를 그 파괴적인 말미에 이르기까지 성취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물학적 규정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는 인간적인 게슐레흐트(Geschlecht)유기체적-생물학적 프로그램에 갇혀 버리는 동물성, 이 두 가지 사이에 [하이데거]는 여러 가지 차이들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대립한 하나의 한계를 기입하는 것이며, 이 한계는 여러 가지 차이를 말소하고, 가장 저항력이 있는 형이상학-변증법적 전통을 따라, 그것을 균질적인 것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각주:11] 

하이데거의 공리계에서의, 이 끝없는 저항과 그에 의해서 사고되지 않은 것의 증후성의 극점, 그것은 우리가 그랬고, 우리가 그 뒤를 쫓는 동물이다.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멋지게 성취된 형이상학의 파괴, 그것은 20세기의 모든 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었지만, 그렇지만 이 파괴는 그것에 고유한 기준들에 의해, 동물이라는 이 중대한 쟁점을 제기할 수도 사고할 수도 없다는 것이 된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철학적 중성자폭탄이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성(세계형성적)과 동물의 그것(세계가 가난하다) 사이의 존재론적 비연속성의 토대인 범주적 인류학의 결정요인의 총체를 파괴한 것이지만, 그렇지만 줄곧 전부터 그런 결정요인들을 보호하는 네 가지 벽은 존속시킨 채였다. 비연속적이고, 건망증에다 무언인 동물과, 역사적이고 기억을 지니고말하는 인간이라는,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2편의 서두에서 설정한 차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비판을 내세웠지만,[각주:12] 이 비판은 손쉽게 하이데거 자신에게도 반송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이나 동물성, 혹은 이것들과 인간, 인간성 사이의 가짜의 절대적으로 대립적인 한계라고 해명적으로 대결하는 것은, 그 때문에 그 귀결에 있어서, 갈릴레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에 의해 인류적 나르시시즘에 주어진 세 가지 상처와, 저어도 같은 정도로 중대한 사정거리를 철학적으로는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각주:13]

철학자들과 철학에 의해 널리 알려진, 혹은 비난을 받은, 수세기 전부터 행해지는 동물의 괴로움의 지위에 대한 전쟁’, 그리고 그들은 괴로워할 수 있는가?”라는 벤담의 질문에 대한 응답의 반박하기 어려움에 대한 전쟁’, 전쟁을 둘러싼 하이데거에 대한 데리다의 대결로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각주:14] 만일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나는 단순히 하이데거의 확장élargissement을 제시하고 싶다(나는 이하를 덧붙여야만 한다. 동일한 확장의 조작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나 칸트, 레비나스나 라캉에 대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으나, 동물을 쫓다에서는, 논증적 전략을 위해 그것은 유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데리다가 한 번도 거론한 적이 없는 50년대의 텍스트에 의지함으로써, 나는 확장의 조작을 간략하게 행하기로 한다. 이 텍스트는 그 자신도 모르게, “동물성의 시학이 그러할 수 있는 것의 몇 가지의 잘 다듬어지지 않은 모티프, 몇 가지의 시사적인 특징을 제공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여기서 떠올리고 있는 것은, 근거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1955년부터 1956년의 겨울학기 강의이다.

하이데거가 잘 알려진 앙겔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의 두 개의 시에 대한 주해에 있어서 -없이sans-pourquoi에 대해 말한 것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거론할 수 없을 것이다(내가 여기서 하는 것보다 많은 지면을).[각주:15]

  

장미는 왜 없이 존재한다, 피는 것은 왜냐하면 그것은 핀다

스스로 자신에 신경쓰지 않고, 보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각주:16] 


 

=이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주어져야 할 충족된 근거의 원리(principe de raison suffisante et de raisons à fournir)”에 대해서, 신비주의적인 이 두 개의 시구는, 미리 난폭한 방식으로, 마치 길을 되돌아가듯이, 만일 이렇게 말해야 한다면 어떤 다른 원리를 대립시키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에 대해, 이 두 개의 시구는 어떤 순수한 왜냐하면[parce que]’의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명증성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근거[raison)’를 탐구하는 보다 낡고, 그리고 그것 자체로서, 바닥에 가깝다.[각주:17] “장미는 핀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기 때문에”, 왜냐하면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그것에 선행하여, 그리고 근거[raison, Grund]’를 제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은 판단 혹은 표상에 의해 근거에 설명을 주는(rendre compte)’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미의 체류를, 그 오래 있음을 가리킨다. 장미는 존재자로서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식물학적 지식은 이 존재자로서의 장미를 완벽하게 설명할[rendre raison]’ 수 있으며, 계산적 사고는 개화(開花)를 설명할 수 있다).[각주:18] 그 존재 자체에 있어서, 장미는 왜 없는 것이다.[각주:19] “‘왜냐하면과 비교되는 [왜 없이의] ‘없이, 무엇을 부정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근거와의 관계를 부정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다음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 근거에 대해 묻고, 근거에 있어서 스스로를 명백하게 표상하는 근거와의 관계,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 없이 장미는 존속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 인간에 있어서는, 우리와 근거 사이의 관계가 스스로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이다. 스스로를 표상하는 존재인 우리에 대해, 근거가 관계지어지는 것은, 다양한 방식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동물들, 식물들도 또한, 스스로를 표상하는 존재가 아닐까. 확실히 그렇다.” 계속해서 하이데거는 몇 줄 뒤에서, 이성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정의를 다룬다. “인간이란 그 표상에 있어서 스스로의 앞에 근거를 근거로사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살아 있는 존재이다.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각주:20] “그저 동물(l’animal tout court)”과의 근본적인 경계선으로서의 전통적인 정의는 존재자와 그 이성(ratio)’에 관해 강조된 충족근거의 원리에, 전체로서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과는 또 다른 이해를 제안한다. 비록 데리다에 의한 전체적 진단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아니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나는 데리다가 이런 하이데거의 논의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냐는 것에는 확신이 없다. 모든 계산적 사고와는 이질적인 성찰적 사고[각주:21]에 기인하는 이 다른 이해는, 그때, 근거가 존재에 속한다는 이것을 퍼뜨리는 대로 내버려둔다. 존재는 근거를 갖는다는 것도 모든 존재자는 어떤 근거를 갖는 것이며, 왜냐하면 근거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표상이 이상과 같이 말하는 데 반해, 사고의 성찰적이고 시학적인 태도는 아래와 같이 말할 것이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기초짓는[정초하는] 근거이다.”[각주:22] 이런 근거에 의해 존재자는 필요 충분한 근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근거 없이 있다고 간주된다. 그렇지만 꼼꼼하게 벼려진[가다듬어진] 다른 여러 가지 규정들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이 성찰적 사고에 의해 비판되고 철회되고 탈구축됨에도 불구하고, 그저 동물은 그 철학자의 주인에게 어중간하기에 내버려진다. 이 그저 동물이 버려지는 장에서 출발해서, 그 뒤를 쫓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하이데거는 근거율의 여러 페이지의 유연한 논증에 있어서, 동물에서 떠나 그의 길을 탐구하고 있다. 이러한 하이데거에 전형적인 몸짓과 포기로부터, 데리다는 징후적인 의의를 검토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 이 왜-없이의 성찰로부터, 그저 동물인 근거 없는 가난한 동물을 위한 어떤 이익을 이끌어낼 수 없을까? 왜냐하면 존재의 사고로부터 벗어나, ‘동물은 여전히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뒤를 쫓지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추적의 권리가, 동물성이라는 사항 자체를 다시 다루는 것이 데리다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정확하게는, 전통이 동물을 버리고, 버릴 수밖에 없던 지점이기 때문이다. 동물 쪽의 문제가 아닌 자기 변론의 형편 때문에 동물이 쓸모없다고 여겨지고, 대부분 호출되지 않게 된 이후, 그 뒤를, 즉 단순한 동물의 뒤를 쫓아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뒤를 쫓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로부터 출발한 시선의 문제를 문자 그대로 개시하는 것이 아닐까? , 하이데거가 말하지 못하고, 바라지 않고, 혹은 그럴 능력을 갖지 않았던 것을, 그들로부터 되찾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동물에 의해 [스스로가] 보인다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mais ne se sont jamais vus vus par l'animal는 것에 의해 구성되는 담론의 유형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에 반해, 반대로 동물이 우리에게 보낸 청원을 떠맡을prendre sur eux l'adresse que l'animal leur adresse[각주:23]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시에 귀착되는s'il y en a, revient à la poésie[각주:24] “동물의 사고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존재의 사고의 냉수[각주:25]에 있어서의 동물의 즉시 추방, 그 순수하고 단순한 실종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사고, 그것이 열어젖히는 시학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짐승도, 적어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이유 없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표상할까? 하이데거가 말하기를, “확실히 그렇다”, 식물 자체가 스스로를 표상하는 존재들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 동물 혹은 식물의 표상에, 표상이 바로 그럴 수 있는 것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이 표상은, ‘살아 있는 것일반과 빛나는 현존재와의 차이를 생산 혹은 재생산하는 것, 그리고 근거를 근거로서 표상한다는 인간에 고유한 능력을 강조시키는 것에만 도움이 될 뿐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똑같은 것을 했으나, 반드시 전원(全員)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몇몇은 짐승들에 의해 스스로가 보이는 것을 봤다.” 특히 퓌론의 회의주의자들이 그렇다. 알다시피 크리시포스(Chrysippus of Soli), 예를 들어, 개가 후각을 써서 수많은 것들 속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산토끼를 추격할 때의, 그 준-가설-연역적인 행동을 관찰하는 것에 기초하여, 개에게 삼단논법을 인정하는 곳으로까지 나아갔다.[각주:26] ‘전통적인 정의의 용어를 유지하면서 말한다면, 만일 비-이성적인 동물이, 즉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짐승들(aloga)”[각주:27], 스스로를 표상할 수 있다고 한다면, 분명히, 충족한 근거를 부여한다는 양식, 응답에 있어서 근거를 도로준다[갚아준다][rendre raison]’라는 양식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인 동물들에 결여되어 있는 이 상환하기[reddere]”, “갚아야 할 설명(compte à rendre)”이야말로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전통이 끊임없이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결여는 어떤 결여일까? 탈구축은, 결여에 보답을 주려고 시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상당 부분은 어떤 결여로부터, ‘해체하다[défaire]’라는 모티프를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이른바 탈구축은 -상환(de-reddere)’에 의해 상환(reddere)’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환탈구축[déconstruction)’[dé)’-리다라는[de-rridien)’ 이 운동의 주모자의 성을 화합시킨다. (결여는 어떤 결여일까? 라는) 이 질문은, 하이데거의 성찰에 의해, 그리고 이 성찰이 뒤로 물러나”, “의 물음에서 해방됐을 때 이후, 그 성찰을 덮친’ ‘현기증에 의해서도, 완벽하게 가능해지고, 움직여지게 된다.[각주:28] 짐승은 왜[] 없는 것이다. , 그것은 질문에서 항상 이미 해방되어 있다. 헤겔식으로 얘기한다면, 짐승은, 현재의 십자가에 있어서 이성의 장미를 밝히는 데 있어서는, 자기를 의식하는 <정신>, 그것이 나타나는 내재적인 현전에 있어서 밝히는 데 있어서는 부적격하다(inapte).’[각주:29] 

그러므로 물어야 할 것은 이 부적격 혹은 이 결여에, 어떤 지위가 부여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 부적격이나 결여는, 죽어야 할 산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공-속의 모든 가까움을 동물에 대해 거부함으로써, 동물을 결정적으로 실추시키는 것일까[각주:30] 이것은 훨씬 전부터 철학의 원-지배적인 전통이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혹은 이 부적격이나 결여는 동물들의 수신처=청원(adresse)’, 그리고 우리에게 보내진 송부를 이롭게 하기 위해, 반전시킬까? 여기서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의해 스스로가 보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모종의 수동성을 걱정하고”, “수동 가능성[passibilité]”, “정념=수난[passion]”, “-능력증언하는질문이다.[각주:31] 이것이야말로 분명히, 하이데거에게서의 뒤로 물러나기위한 노력, ‘이하 마찬가지로의 계기(繼起)로 환원되는 근거의 원리로부터의 해방의 노력, 그리고 그것과는 반대로 체재/체류[weilen]’로서 재파악된 왜냐하면[weil]’의 세차운동[각주:32]을 사고하기 위한 노력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내게는 판단된다. “Weilen은 다음을 뜻한다. 지속하는 것, 침착하게 머무는 것, 거기에 멈춰 서서 그대로 있는 것, 즉 편안함 . 근거에 기초한 모든 정초에, 그리고 모든 원리에 반대하는 왜냐하면[weil]은 순수하고 단순한 현전을 가리킨다. 이 현전은 이유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이 그것에 의존하고, 모든 것이 그 위에서 쉬고 있다. 왜냐하면은 지속하는 것을, 바닥으로서의, 근거로서의 존재를 명명한다.”[각주:33] 짐승은 왜 없이 존재한다, 그 동물적 존재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짐승은 체재와 존재의 가까이에 있다. 정신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총괄과 결론은 하이데거의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예를 들어 동물의 몽롱(hébétude)’[각주:34]의 주제에 대해 총총걸음으로 그가 말한 내용의 반대이기도 하다. 몽롱은 존재로의, 존재자로의 모든 접근을 닫아버리며, 개시의 반대말인 폐쇄 그 자체로의 접근조차도 닫아버린다.[각주:35] 이 총괄과 결론의 높이에 머무는 것은 사실 동물의 세계의 물음에 맞서는[대면하는] 것을, 그리고 동물의 세계가 가난하다라는 주장을 철회하고, 반대로, 동물이 어떤 세계를 가진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 묻는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 동물이 어떤 세계를 가진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들뢰즈가 정당한 직관을 갖고 있었다. 동물의 로고스에 대한 부적격성을, 순수하고 단순한 박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데리다나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시학적-성찰적인 것 쪽으로 이 부적격성을 옮기는 것은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그것에 앞선 어떤 조건을 따라야만 한다. 그 조건이란, 동물의 눈빛이며, 이 눈빛을 향한 눈빛이며, 눈빛의 교환이며, 그 교환에 극복해야 할 어색함[뻘쭘함]”이 있다고 하는 노고/고생[mal]’이다.[각주:36]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하지만, 설령 그것이 초감각적 지각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미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은 의심할 수 있다.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조야한 경험에서 출발해 가정해 본다면, 장미의 이유 없음은, 수신처의 반사적 차원, 그리고 어떤 눈빛 속에 나타나는 듯한 그 존재의 절대적인 타자성[他性]에 관련된 문제제기, 거의 유지하지 않는다.[각주:37] 

반면 우리를 바라보는 동물은, 우리를 어떤 수수께끼 속에, 동물의 왜-없이의, 도달하지 않는 체재의 수수께끼 속에 만류한다. 그 때문에, 동물적 존재는 순수하고 단순한 현전으로서 스스로를 주는 것이며, 이 현전은, 스스로를 동물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우리에게까지 이르는 것이다. 동물의 수수께끼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는 의인주의적 편애에 빠지지 않고서는, 아마도,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수수께끼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엄청난 높이에 머무르도록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이성에, 개념에, 설명적 사고에, 로고스에 대해, 동물의 눈빛에서 출발하여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시학, -계산, 침묵한 성찰, 이해 불가능한 것의 장난질로 항상 이미, 그리고 미리 도망쳐버리는 바와 맞닥뜨리는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역설이며, 혹은 더 정확하게는 아포리아라고 바로 말해야만 한다. 동물성의 시학poétique, 동물성의 아포리아학=아포리아적인 것aporétique[각주:38]이다 데리다에게서 아포리아는 다음을 가리킨다는 자명한 의미에 있어서. 아포리아가 지시하는 것은, “(어떤) -통과, 오히려 비-통과의 경험, -통과에 있어서 일어나고 매혹하는 것의 시련의 경험이며, 그것은 꼭 부정적이지는 않는 형태로, 이 분리에 있어서,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일어나는 것은, 어떤 문의, 어떤 문지방의, 어떤 경계의, 어떤 선의, 혹은 단순히 타자 그 자체의 연안(沿岸) 혹은 접안(接岸)의 앞에 있어서 , 문제를, 혹은 기획이나 보호를 구성하는 것조차도 가능해지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이 장소에 있어서이며, 그리고 기획 그 자체 혹은 문제의 노력이 불가능해질 때, 그리고 우리가 보호 없이, 문제도 보철[補綴]도 없이, 가능한 대체물도 없이 절대적으로 노출되어 있을 때, 우리의 절대적으로 알몸인 절대적인 유일성에 있어서 특이한 형태로 노출되어 있을 때, , 무장해제되고 타자에게로 맡겨지고, 어떤 비밀의 내면성을 여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의 배후에 우리를 비호하는 것조차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에서이다. 거기에는, 요컨대 아포리아의 이 장소에는, 더 이상 문제가 없다. , 무슨 말인가, 혹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그것은 해결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서는 문제가, 우리가 자신 앞에 지키려는 것으로서는 스스로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현전화될 수 있는 기획 혹은 대상으로서, 보호하는 대리자 혹은 보철적인 대체물로서, 여전히 통과하거나 혹은 그 뒤에서 몸을 지키거나 할 수 있는 어떤 경계로서, 그것들 같은 것으로서는, 문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각주:39] 이 단어에 집착한다면, 아포리아학은, 동물과 그 눈빛을 문제로 삼음으로써,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는 분리의 이 마비에 있어서, -계산적인 것, 성찰적인 것, 생각에 잠긴 것의 시학이며, 데리다가 말하듯이,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poèsie일지도 모르는 이 사고의 시학이다.

그래서 이것들의 아포리아가, -동물이라는 인간의 규정의 목적론적 전통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동물의 물음의 주위에서 오늘날 공공연히 선언되고 있는 전쟁에 있어서, 인간을 돕는 일밖에 하지 않는 자선적 의인주의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은, 크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하의 것을 간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데리다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동물로부터 박탈한 모든 것, 즉 우리가 집필(!)[각주:40]한 회귀하고 증대하는 긴 목록, 이런 것을 동물이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야말로 스스로가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전부를, 훨씬 적게만, 특히 훨씬 순수하지 않은 방식으로만 갖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가 가난한동물은, 뭐든지 그 자체en tant que tel와의 관계를 갖는 것이 없으며, 특히 죽음 그 자체와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죽는 일이 없고, 그저 뒈진다périr”,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다cesser de vivre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하이데거의 주장을, 아포리아에서 데리다가 다시금 비판적으로 다룰 때, 데리다의 하이데거에 대한 물음은, 인간은, 현존재 자신은 죽음 그 자체와의 진정한 관계를 갖는다고 확증할 수 있느냐고 근본적으로 묻는 데 있다.

데리다의 뒤를 쫓아다니려고 한다면, 그러나 마찬가지로 다른 몇 사람의 뒤를, 체류와 수동성으로서의 왜냐하면에 관련된 하이데거의 성찰도 거기에 포함되는, 다른 사색가나 다른 사고의 뒤를 쫓아다니려고 한다면, 철학의 노력이란 아마, 아르토의 유명한 말을 모방한다면, “문맹의 짐승들analphabêtes을 위해 쓰는 것 속에 있을 것이다.[각주:41] , 그들을 위해, 이른바 그들이 명명할 수 없는 그들의 입장에서, 들뢰즈에게서의 동물-생성이 시사하듯이, 이형적(異型的)이고 이질적인 신체들 사이의 혼교(混交)를 따라쓰는 것 안에 있을 것이다. 동물을 쫓다는 이렇게, 문맹이며, 짐승이며 다양한, “무논리적alogiques으로 시달리고 있는 짐승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며, 그들의 무한한 반영reflet dʼinfini위해 쓰여진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무한의 반영을 갖지 못한 짐승은 없다.

천하고 더럽혀지고, 막대기로 혼난 이 당나귀는,

소크라테스 이상으로 신성하며, 소크라테스 이상으로 위대하다[각주:42]

 

그들이 거기에 머무는 듯한 미지의 것inconnu으로부터, 인간인 우리의 나체를 향한 그들의 눈빛 때문에[눈빛을 위해].

 

그 야생적이고 힘찬 눈동자는

인간, 알몸의 원자를 바라보고 있다

무서운 눈빛, 우리는 그것을 갖고 돌아간다

무지에 있어서의 이것들의 경마로부터[각주:43]

 

두꺼비를 위해, []을 위해, 모든 동물어들animots[각주:44]을 즉각 석방하기 위해 그들을 환대함으로써, 데리다는 이 정의의 노력을 행한다. 대략 데리다가 쓰는 바에 따르면, 모든 동물어들은 그[데리다] 같은 것이며, 그에 대해서 있으며, 그의 집에 있으며, 그의 안에 있다.[각주:45] 여기서는 데리다의 동물지(動物誌), 그러나 마찬가지로 니체와 카프카와 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한 동물지들이 있지만, 보통은 사고나 철학 혹은 문학의 것인 영토의 바로 내부에서 동물지를 작성한다는 것은, 해방이라는 정의에 맞는 행동거지, 자유화 혹은 구출 작업을 의미한다. 이 행동거지는, 대문자의 ‘<동물>Animal이라는 단어를 고발하는 것에 대한 매우 강고한 집요함, 반복, 혹은 그 연속적인 변조(転調)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동물>이라는 뭐든 있다à tout faire, 어떤 상황이나 일에도 쓸 수 있는의 개념은, 너무도 거대하고 광대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매우 맛없는 방식으로만 그 내용을 파악할 뿐이며, 그 때문에, <인간><동물>이라는, 심연에 의해 분리된 두 개의 기슭을 산출한다는 작업을 하기 이전에, 원래, 인간중심주의적 주관성 때문에, 그런 두 개의 기슭의 산출이 필요하다는 가짜의 필요성을 이미 초래해버린 것이다. “데카르트에서 하이데거, 칸트에서 레비나스 및 라캉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모두가 그렇게 하고[각주:46] 있듯이, 우리가 <동물>이라고 말할 때, 그런 훨씬 이전의 때부터 이미,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on가 단수정관사를 붙여 ‘<동물>’이라고 말할 때마다, 철학자가, 혹은 아무나가, 단수형으로 그냥 ‘<동물>’이라고만 말할 때마다, 인간이 아니라고 간주되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고 우기면서 그렇게 할 때마다, 좋다, 그럴 때마다, 이 글의 주어는, 우리, 어리석은 것bête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각주:47] 

이 점에 관한 데리다의 집요함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집요함이 이론적 차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한번만 봐도 알 수 있다. <동물><범주> 아래에 위치하는 짐승들bêtes이라는 말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음bêtise, 극히 철학적인 것이다. 이 어리석음이라는 단어가, ‘짐승성bestialité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의인주의라고 이해된다면, 철학적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다[각주:48] 짐승들은, ‘어리석은bête것일 수도, ‘짐승 같은bestial것일 수도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폴리티코스에서의 젊은 소크라테스와 이방인의 대화에서 그것을 내비쳤다. “자네는 잔여를 통합[정리]하기 위해, 전체성을 포함하고 있을 유일한 종족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네. 왜냐하면 자네는 그것을 짐승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모든 존재들을 명명하는 것에 똑같은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세. 아마 자네의 예에서는, 예를 들어 학() 같은 다른 동물들이 모든 나머지의 동물들과 대립하고, ‘이라는 종족의 단일성을 가리키며, 알아보기 위해,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머지의 동물들에 하나의 이름을 사용하게 될 것일세. 다음으로, 스스로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학은, 인간들도 포함한 다른 동물들을 일단 같은 그룹에 모았다면,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들을 짐승들이라는 이름과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을 걸세.”[각주:49]만일 학이 말하고 분류할 수 있다면, 그것은 <>, 인간들도 포함한 <짐승들> 사이에서의 분할을 행할 것이다. 이런 반-인간중심주의적 논의는, -스피노자적 공명 때문에, 소수파의 역사의 끝에서, 그래서 그대로의 형태로 데리다에 있어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은 데리다의 집요함의 가장 두드러진 측면은 아니다. 내게 이상적인 것은, 이 일련의 집요함 속에, <동물>이라는 대문자의 개념이 실행하고 허가하고 구성하고 있는 억압의 형상에 대한 집요함이다. <동물>, ‘거대한 진영’, ‘울타리’, 개념적인 (그리고 개념적일 뿐만 아니라) ‘도살장과 유사한 공간에 끊이지 않고 견주어지고, 거기서는 인간이 자신의 동포, 이웃 혹은 형제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살아 있는 온갖 것[각주:50]이 갇혀 있을 것이다.

되돌려줘야[되갚아야] 할 정의에 끈끈하게 염려하는 이 텍스트 내내, <동물>의 거부는 진동하고 있다. 이 염려는, 온갖(à tout faire)[각주:51]의 개념은 무효라고 명령하는 듯한 단순한 철학적 엄밀함보다도, 더 오래되고 더 근본적인 것이다. 개념들의 적절함이 반환되고[되갚아지고. 되돌려지고], 그것을 안쪽에서부터 활기차게 하기 위해, 이 정의는 무엇보다 우선, 우리가 오늘날 생물다양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근거한 존재이어야만 한다. , “개로부터 도마뱀을, 돌고래로부터 원생동물을, 새끼 양으로부터 상어를, 침팬지로부터 앵무새를, 독수리로부터 낙타를, 호랑이로부터 다람쥐를, 혹은 고양이로부터 코끼리를, 누에로부터 개미를 혹은 바늘두더지로부터 고슴도치를 떼어놓는separates the lizard from the dog, the protozoon from the dolphin, the shark from the lamb, the parrot from the chimpanzee, the camel from the eagle, the squirrel from the tiger, the elephant from the cat, the ant from the silkworm, or the hedgehog from the echidna[각주:52] 무한한 차이들에 기초한 존재이어야만 한다. 동물의 의태에 관한 분석들에 있어서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 여기서는 내가 참조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인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기술에 의해,[각주:53] 동물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순수한 욕동적[충동적] 유기체로의 환원, 혹은 엄밀한 기능적 목적원인론 혹은 유기체론적이고 목적론적 메커니즘으로의 환원, 달리 말하면, 모든 에 대해 인간적으로 응답하는 근거들의 총체로의 환원, 이러한 동물의 모든 환원에 대해, 안정된 결론이나 끝에 이르지 않고,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전개한 것이다. 그런데 카유아에 의해 준-현상학적 방법에 의해 기술된 의태적 행동들은, “그 어떤 근거도 없다고 그는 적고 있다. 그것들은, 목적인의 성찰에 의해 초래될 수 있는 근거들의 질서에 의해서는 설명 불가능한 것, 이해 불가능한 것의 증거이며, 그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의태적 행동들은,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에 있어서는, 진짜배기의 장난질, 사치, 과잉, 초과, 브리콜라주, 낭비, 그리고 과시 같은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성향들은, 이러저러한 동물들에게는, 그 맹목적인 보존 혹은 생존의 바로 저편에서, 카유아의 말을 반복한다면, “그 어떤 근거도 없이”, 정말로 무용한[각주:54] 방식으로, 스스로를 궁지에 빠뜨리고, 그 포식자에게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무용함, 하나의 세계의 경계를 정하고, 극히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행동의 현상학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편에서, ‘무용함, 후설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49절의 무화Vernichtung의 모델 위에 수립될 수 있다. 데리다에 의해서도 검토된 동물들 없는 세계의 가설에서 출발해, 동물과 공-존재하는 것에 관한 하나의 현상학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무용함은 그 자체에 의해서, 1929-1930년 강의에서의 세계의 가난함의 가난함을 파헤친다. 만약 동물들이 사건의 세계를 갖고 있다면, 그들도 또한 세계형성적weltbildend이라고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 세계를 형성하는 자 혹은 만드는 자, 그들의 무용한세계를 형성하고 만드는 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한다. 동물적 세계형성Weltbildung은 현존재에 의해 이뤄지는 형성과의 사이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최악의 것은, 동시에 심연적이며 결정 불가능한 이질성과 비연속성의 분명한 명증성에 반하여, 다소간 생물학주의적인 동질성이나 연속성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소묘하는 선은, 특히 하이데거의 독해에서 작동하고 있는 밀어 올림[앞에 내세움]이나 확대의 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짐승은 무논리적[alogon]’이다, 짐승은 왜-없이이다. 이 두 개의 언표 사이에, 얇은 막처럼 형이상학적인 것을 시학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은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에 반하여 읽혀진 하이데거는, “세계의 가난함에 반하여 왜 없이를 울려 퍼지게 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이 반전과 다른 이해를 가능케 한다. 동물을 로고스 없는 존재로 보는 몹시나 박탈적인 고전적 규정에 반하여, 동물의 왜-없이는, 스스로의 몽롱체재로 전도시키는 동물들에 의한, 그들의 세계의 시학-성찰적인 어떤 주거에 관한 가설을 열어젖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물들은 근거의 십자가이며, 어떤 근거-없는 근거의 수수께끼이며, 1955-56년의 강의가 그것을 말하는 것도 없는 채로, 그로부터 동물들을 배제했으나 부분적으로 접근한, ‘의 물음으로부터의 해방의 외침이다. 대답을 귀찮아하는 것과 <동물>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물들은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에 의해서, <동물>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첫머리에서 지나가는 길에 보여준 것인 양,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유혹되고 있다. , 동물들은, 그들이 동물어-되기에 있어서, 목적론을, 목적원인설을, 휴머니즘을, 유기체론을, 인간중심주의를, 기계론을, 인간에 의한 나르시시즘을, 형이상학의 전통을, 전통적 정의들을, 개념들과 범주들을, 한계들과 대립들을 탈구축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식 없이, 근거 없이, 왜 없이, 북도 나팔도 없이 몰래 탈구축을 하는 것이다. 어떤 순간, 어떤 눈빛에 있어서, 그것 자체는 응답을 요구하는 물음이라는 것이 아니고, 물음에 집어던져진 -Augenblick에 있어서 동물들은 탈구축하는 것이다. 동물적 탈구축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관계들의 조직의 다양성, 삶과/또는 죽음의,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의 형상들에 있어서의, 분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복수의 계règnes의 사이에서의 조직과 비조직의 관계들의 다양성a multiplicity of organizations of relations between living and dead, relations of organization or lack of organization among realms that are more and more difficult to dissociate by means of the figures of the organic and inorganic, of life and/or death[각주:55]조야한 나체화dénudation brute”, 알몸의 제시이다. 데리다의 탈구축은, 그 초기[처음]부터, 이 동물적 탈구축에 정의를 되돌려준다[되갚아준다]. 그것은 결정 불가능한 것의 에크리튀르에 의해, 관념의 커플들의 교란에 의해, 정의로부터 법권리로 향하려고 하는 운동처럼, 동물에서 인간으로, 혹은 <동물>에서 동물들로 향하는 운동의 전도에 의해, 그리고 탈구축의 아포리아학에 의해 정의를 되갚아주는[되돌려주는] 것이다. 법의 힘에 포함된,[각주:56] 특히 1법권리에서 정의로에서의 몇 가지 논의를 꺼내들어, 그것을 동물적 탈구축의 주제에 있어서도 그대로의 형태로 작동시키는 것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동물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각주:57] 하물며, 한쪽을 도려냄으로써 다른 쪽에 고유한 것을 부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온갖 없이에 의해, 일회성으로 결정될 수 있는 양자 사이의 가짜-한계에 머무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아포리아의 공간이, 이것들의 보증된 통과와 확고한 경계선을 폐지한다. 그것은 브라운 운동 혹은 시적이고 우연적인 행보를, 간신히 소묘하는 것이다.

동물적 탈구축은, 이처럼, 동시에 <동물>의 탈구축 가능성(그리고 물론 마찬가지로 <인간>의 탈구축 가능성)과 동물들의 탈구축 가능성에 의해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탈구축 가능한 법권리와 탈구축 불가능한 정의 사이의 관계와 동질적인 것이다. 동물적 탈구축은, 이처럼 동물-존재의 경험으로서의 불가능한 것의 경험, “모든 개념에 반역하는 실존une existence rebelle à tour concept[각주:58]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비록 동물의 고통의 반박하기 어려움, 그 탈구축 불가능성으로부터, 탈구축의 불가능한 운동을 가능케 하는 어떤 추진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다. 더구나 동물적 탈구축은, 나를 탈구축적인 아포리아의 등록부에 머물게 하기 위해, 동물들/인간들의 한계의 결정 불가능한 것의 시련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데리다에게 이 아포리아의 등록부의 변조(転調)는 대부분 제한 없이 확장 가능한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용서, 거짓말, 증언, 환대 혹은 또한 번역에 있어서, 어떤 불-가능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물의 <무용함>이 자기 자신을 그런 것으로 하는 것, 즉 결정 불가능한 것으로 하는 것은 단정적 결단에 의해, 그리고 그 결단에 있어서, 이번에는 꽤 극복하기가 불가능하다. 마치 거기에는 두 개의 기슭밖에는 없는 것처럼, 어떤 기슭 혹은 반대 기슭 중 어떤 하나를 위해 안쪽에서부터 결단하는 결단은, <동물성>을 그 <본질>에 있어서 주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모든 흔들림 없는 확신의 탈구축에 의해, 이른바 작동되고, 좀먹어지고, 빙의되어 있을 것이다. 탈구축 그 자체에 의해 초래되는 결정 불가능한 것 혹은 단정 불가능한 것은, ‘정의들에 있어서의 모든 안정성의 부재를 떠맡기, 동물들과 인간들을, 끝도 없이 반대하는 본성이나 특성으로 돌려보내기의 불가능성을 떠맡기를, 탈구축에 대해 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마랗면, “동물의 정념=수난, 근본적이고, 불확실하고, 끝없는 파악 불가능성을 스스로 떠맡는 것을 탈구축에 대해 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 데리다는, 그 자신이 그것에 등을 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데리다가 동물-존재를 그것에 연결하는 실존은 모든 개념에 반역한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너무 많이 말하며, 혹은 너무 서두르며, 결정 불가능한 것을 너무 빠른 미숙아 출산 쪽으로 재촉하고 있다. 체재의 한순간에 그치기weilen, 동물적 실존의 -냐하면, 모든 반란보다 이전의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체재는, 이것은 벤담의 그들은 시달릴 수 있을까?Can they sufer를 그 토대 자체에 있어서 흔드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없다는 것ne-pas-pouvoir밖에는 할 수 없는 동물들에 관해서는, 그런 것〔=동물의 고통만이 사고될 수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동물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모방하는 윤리학의 유명한 표현에 있듯이, “동물들에 관련된, 모든 지각 판단을, 모든 대상 판단을 더 이상 중단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데리다의 동물의 정념=수난. 이 대격적이고 주격적인 이중의 속격[각주:59]동물을 쫓다의 철학적 기획을, 하이데거의 단어를 고쳐 다룬다면, 현기증에 잘 결부시킬 수 있으며, ‘동물어(動物語)’를 관찰하는 것=데리다에 있어서는, 그럴 때마다 그의 것인 듯한 장난질의 심연에 잘 결부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마찬가지로, 이 열정=수난은 동물들 자신의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그 바닥이 바닥없는 어떤 눈빛, 죄가 없는 동시에 아마 잔혹하며, 아마 느끼기 쉽지만 무감동이기도 한, 선량한 동시에 악의가 있고, 해석 불가능, 독해 불가능, 결정 불가능, 심연적이고 비밀의 눈빛, 즉 완전히 다른 눈빛un regard dont le fond reste sans fond, à la fois innocent et cruel peut-être, peut-être sensible et impassible, bon et méchant, ininterprétable, illisible, indécidable, abyssal et secret : tout autre[각주:60]으로 향한 누군가의 눈빛 이후, 그렇다. 이때, 전에 없을 정도로, “탈구축은 정의이다.”[각주:61] “동물의 생명뿐만 아니라, 함께-고통compassion의 감정에 이르기까지 침해하는 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연민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언에 호소하는 자ceux qui violent non seulement la vie animale mais jusqu’à ce sentiment de compassion et, d’aurre part, ceux qui en appellent au témoignage irrécusable de cette pitié와의 사이에서 행해지는 연민을 주제로 하는 전쟁une guerre au sujet de la pitié[각주:62]에서, 탈구축은 철학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늦게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그 가장 작은 이점이 아니다. 동물은 무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무인간적인 것은, 자기보다 조금 먼 곳을 가리키며, 모종의 이타지시적異他指示的hétérodéictiqie이며,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모든 경계의, 시학적인 바로 앞[手前]en-deçà의 아포리아적 형상이다.[각주:63] 우리 서구의 선통에서, 경계 그 자체의바로 앞[手前]은 선(인간의 인간성)과 악(그 짐승성인 인간의 비인간성)의 저편의 성찰을 새롭게 개시하는 것을 촉구할 수 있을 뿐이다. 동물이 그러한 이 무인간적인 것에 대해, 데리다는, 어떤 똑같은 행태에 의해, 그 모든 형이상학적 자원과 연쇄를 분해하면서, ()에 고유한 자원의 탐구를, 항상 멀리 도망치는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극한적인 장난질의 탐구를 행하는 것이 된다.

 

 

Gérard Bensussan, « Jacques Derrida. Une poétique de lʼanimalité : Sur lʼanhumain ». Reprinted by permission of Gérard Bensussan

 

翻訳桐谷慧東京大学ストラスブール大学博士課程





 

  1. * [일역자] 본고의 인용에 관해서는, 기존 번역을 참조하면서, 문맥을 따라 번역어를 바꾸었다. 또 원문은 하이데거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참조하고 있으나, 독자의 편의를 고려해 독일어 원문의 출전을 기재한다. 1) 〔일역자〕 ‘무인간적인 것’의 원어는 anhumain이며, 윤리적인 함의를 지닌 ‘비인간적인〔inhumain〕’이라는 단어에 대해,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동물〔animal〕’이라는 단어와 철자와도 유사성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2. [주2] Jacques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Galilée, 2006, p.50〔『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鵜飼哲訳, 筑摩書房, 2014년, 61頁〕. 나는 대부분의 대목에서 1997년에 세리지(Cerisy)에서 열린 강연의 제1부, 즉 『動物を追う』의 15부터 77쪽에서 채록된 부분에 집중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그 넓이를 조금도 잃지 않으며, 논의를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 이 책의 1장은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로 <<문화과학>>에 번역 수록되었다. [본문으로]
  3. [주3] Ibid., p. 18〔同前, 17頁〕. [본문으로]
  4. [주4] 〔일역자〕 ‘생각에 잠겨 있다’의 원어는 pensif. 이 단어는 ‘사고〔pensée〕’와의 연관을 상기시키는 것인데, 단순히 무엇인가를 사고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그 사고에 몰두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 몰두하고 있는 대상이, 바깥쪽으로부터의 관찰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도 함축한다. [본문으로]
  5. [주5] 〔일역자〕 테오도르 피셔〔Theodor Vischer 1807-1887〕는 독일의 청년헤겔파 철학자. ‘대상의 장난질’이란, 사물 등을 분실했을 때, 그 대상 자체가 ‘장난질’에 의해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개념. 본문에서는 인간의 파악[포착, 쥠]으로부터 동물이 도망치는 사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6. [주6] 〔일역자〕 슐레겔의 이 텍스트는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Friedrich Schlegel, Kritishce Schriften, Carl Hanser Verlag, 1958. [본문으로]
  7. [주7] [옮긴이] 본문에도 있듯이, Vorhandensein과 Zuhandensein를 국내에서는 각각 ‘눈앞의 존재’와 ‘손안의 존재’로 옮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옮길 경우 ‘손’(handen)이라는 용어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번역어를 바꾸어 각각 手前存在(손앞의 존재)와 手許存在(손에 잡히는 존재)로 옮기고 있다. [본문으로]
  8. [주8] J. Derrida, «De lʼesprit» [1987] in Heidegger et la question, Flammarion, 1990, p.23〔『精神について:ハイデッガーと問い』[1990] 港道隆訳, 平凡社, 2010年, 25頁〕. 데리다는 손의 문제에 관해 『사유란 무엇인가』와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세미나를, 그리고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의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에 관한 유명한 명제를 참조하고 있다. [본문으로]
  9. [주9] J. Derrida, Glas, Galilée, 1974, p.35. [본문으로]
  10. [주10]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p.185-186〔『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248頁〕. [영어판 p.135] [본문으로]
  11. [주11] J. Derrida, « La main de Heidegger » in Heidegger et la question, op. cit., p.193. [옮긴이] 이 텍스트는 Psyché : Inventions de l’autre(Paris: Galilée, 1987)에 수록되어 있다. 영어판은 PSYCHE : Inventions of the Other, Volume II,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8과 “Geschlecht II : Heidegger's Hand”, in Deconstruction and Philosophy: The Texts of Jacques Derrida, ed. John Sallis(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가 있다. [본문으로]
  12. [주12] Martin Heidegger, Zur Auslegung von Nietzsches II. Unzeitgemässer Betrachtung "Vom Nutzen und Nachteil der Historie für das Leben" [1938/1939], GA 46, Vittorio Klostermann, 2003, S. 8 sq. [본문으로]
  13. [주13] J. Derrida, Glas, op. cit., p. 35. [본문으로]
  14. [주14] Cf.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p.49-50〔『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59-61頁〕. [본문으로]
  15. [주15] 〔일역자〕 pourquoi라는 단어는 의문사로서는 ‘왜?’라는 의미를 가지며, 명사로서는 ‘이유’라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여기서는 이 두 개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본론에서는 ‘왜냐하면〔parce que〕’과의 대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감안해, 원칙적으로 pourquoi는 ‘왜’라고 번역하고, 문맥에 따라 ‘왜=이유’라고 했다. [본문으로]
  16. [주16] M. Heidegger, Der satz vom Grund [1957], GA10, Vittorio Klostermann, 1997, S. 54 sq〔『根拠律』辻村公一訳, 創文社, 1962 年, 74頁以下〕. [본문으로]
  17. [주17] 〔일역자〕 독일어의 Grund의 번역어라는 것을 고려해, raison은 원칙적으로 ‘근거’라고 번역한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 단어는 ‘이성’이나 ‘이유’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본문으로]
  18. [주18] 〔일역자〕 rendre raison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근거를 도로주다[갚아주다, 되돌려주다]’이다. 이 직전에 보이는 rendre compte〔‘보고하다’ 혹은 ‘설명하다’라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라는 표현에서와 마찬가지로, ‘갚다’, ‘답례로 주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rendre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에 주의가 필요하다. 조금 앞의 대목에서 저자는, 데리다의 논의에서는 동물이 갖고 있지 못하다고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을, 동물에 대해 ‘갚아주는[되돌려주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논하고 있다. [본문으로]
  19. [주19] Ibid., S. 57〔同前, 78頁〕. [본문으로]
  20. [주20] Ibid., S. 62-63〔同前, 86-87頁〕. [본문으로]
  21. [주21] Ibid., S. 178〔同前, 241-242頁〕. [본문으로]
  22. [주22] Ibid., S. 73〔同前, 101頁〕. [본문으로]
  23. [주23]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33〔『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37頁〕. 〔직전의 ‘결코 동물에 의해 스스로가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라는 문장의 출전은 ibid., p.31〔同前, 35頁〕.〕 [본문으로]
  24. [주24] Ibid., p.23〔同前, 24頁〕. [본문으로]
  25. [주25] 〔일역자〕 ‘냉수’는 맑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의 1장에서 읽을 수 있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26. [주26]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퓌론주의 철학 개요(ピュロン主義哲学の概要)』 1권 69. 이 개[犬]의 삼단논법은, 그것이 어떻게 생각될 수 있어도, 후각이 준-계산적 이성의 대신이 된다고 간주되는 그들의 추론 그 자체에 의해, 들뢰즈가 그의 소망으로부터, 동물의 모든 사고에 있어서의 동물에 대한 동물의 관계를 갖는다고 부른 것으로, 그리고 데리다가 그 나름의 책임과 방식으로 다른 식으로 다시 다루는 것으로, 참가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7. [주27] 〔일역자〕 aloga는 그리스어로 ‘짐승’을 의미하며, 문자 그대로는 ‘이성이 없는 것’이다. [본문으로]
  28. [주28] M. Heidegger, Der satz vom Grund, op. cit., S. 185〔『根拠律』, 前掲, 251頁〕. [본문으로]
  29. [주29] 〔일역자〕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이성을 장미에 빗대고 있다. [본문으로]
  30. [주30] 이 테마에 관한, 엄밀한 해명으로서는 다음을 참조. E. De Fontenay, «La raison du plus fort» in Plutarque, Trois traités pour les animaux, P. O. L, 1992, pp.56-57. [본문으로]
  31. [주31]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49〔『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59頁〕. [본문으로]
  32. [주32] [옮긴이] 歲差運動. <물리> 물체의 회전축이 회전을 하는 운동. 기울어진 팽이의 회전축이 만드는 원뿔형의 운동. <지리> 지구의 자전축이 궤도에 대하여 23도 30초의 기울기를 가지고 자전하는 운동. [본문으로]
  33. [주33] M. Heidegger, Der satz vom Grund, op. cit., S. 186〔『根拠律』, 前掲, 253頁〕. [본문으로]
  34. [주34] 〔일역자〕 hébétude는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독일어 Benommenheit의 번역어이다. Benommenheit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의 일역본에서는 ‘사로잡힘’으로 번역되어 있다. [옮긴이] 일본에서 hébétude는 ‘망연자실’로 옮겨지기도 하고, 하이데거의 용어를 좇아 ‘방심’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몽롱’은 좀 애매한 번역어 같다. [본문으로]
  35. [주35] M. Heidegger, Die Grundbegriffe der Metaphysik : Welt –Endlichkeit –Einsamkeit [1929-1930], Vittorio Klostermann, 1983, S. 358, 369〔『形而上学の根本諸概念:世界―有限性―孤独』川原栄峰, セヴェリン・ミュラー訳, 創文社, 1998年, 390, 401頁〕. 하이데거를 하이데거에 맞서 사용한다고 하는 내가 여기서 소묘하고 있는 조작은, 레비나스를 레비나스에 맞서서 마구 몰아댐으로써 동물의 ‘얼굴’의 주제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실행 가능한 것처럼 판단된다. 마치 결정 불가능한 것을 재빠르게 단정하려고 하는 것처럼 해서, 『동물을 쫓다』에서 데리다가 위와 같은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36. [주36]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18〔『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17頁〕. [본문으로]
  37. [주37] “알몸의 나를 바라보는 이 고양이 앞에서, 나는 알몸이라는 감각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는 한 마리의 짐승으로서 부끄러울까? 혹은 반대로, 알몸이라는 감각을 간직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부끄러울까? 그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의 뒤를 쫓는 것일까? 타자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그것을 묻는 것일까? 그리고 아마도 고양이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면?Devant le chat qui me regarde nu, aurais-je honte comme une bête qui n'a plus le sens de sa nudité? Ou au contraire honte comme un homme qui garde le sens de Ia nudité? Qui suis-je alors? Qui est-ce que je suis? À qui le demander sinon à l'autre? Et peut-être au chat lui-même?” Ibid., p.20〔同前, 21頁〕. [본문으로]
  38. [주38] 〔일역자〕 여기서는 poétique와 aporétique라는 유사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39. [주39] J. Derrida, Apories, Galilée, 1996, p.31〔『アポリア』港道隆訳, 人文書院, 2000년, 32-33頁〕.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40. [주40] 〔일역자〕 plume은 ‘날개’를 뜻하며, 이로부터 바뀌어서 ‘붓’을 가리킨다. 아마 여기서는, 이간이 동물의 ‘날개’를 이용해 쓰고 있다고 하는 함축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41. [주41] 이 점에 관해서는 cf. Aicha Liviana Messina, «Publiez-moi, publiez-moi, car je ne suis pas une bête» in Lignes, no 28, 2009. 〔analphabète는 문맹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짐승을 의미하는 bête라는 단어를 거기에 섞어 넣고, analphabête라고 쓴다.〕 [본문으로]
  42. [주42] Victor Hugo, « Le crapaud » in La légende des siècles. [본문으로]
  43. [주43] Victor Hugo, « Le cheval » in Les chansons des rues et des bois. [본문으로]
  44. [주44] 〔일역자〕 ‘동물어動物語〔animot〕’는 데리다가 『동물을 쫓다』에서 창안한 말. 이 조어에는 몇 가지 노림수가 있는데, 주된 것으로는 ‘동물〔animal〕’이라는 단수형의 개념의 비판을 들 수 있다. animal의 복수형은 animaux이며, animot와 소리에 있어서는 구별할 수 없다. 데리다는 animal이라는 단수형 개념을 비판하면서 animaux의 복수형을 메아리치게 하기 위해 animot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45. [주45]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 60〔『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75頁〕: “이제 제 텍스트에 차고 넘치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짐승들의 방문 앞에서 …, 내 기억의 회고록이나 나 개인의 기호의 숲에서 …, 나는 동물들의 무리를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다.” ‘동물어〔animot〕’는 단수형의 ‘말〔mot〕’에 있어서는, 복수(複数)라는 것을 듣고 알아채도록 명령한다. [본문으로]
  46. [주46] Ibid., p. 62〔同前, 99頁〕. 강조는 인용자. 마찬가지로 p. 65〔同前, 80-81頁〕도 참조. [본문으로]
  47. [주47] Ibid., p. 53-54〔同前, 65頁〕. [본문으로]
  48. [주48] Ibid., p. 93〔同前, 122頁〕. [본문으로]
  49. [주49] 플라톤, 『정치가』, 263 c-d〔『プラトン全集第三巻:ソピステス, ポリティコス(政治家)』藤沢令夫・水野有庸訳, 岩波書店, 1976年, 211頁〕。 [본문으로]
  50. [주50]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56〔『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70頁〕. 아마 여기에서, 동물들의 도살 및 축산의 철저한 산업화와, 유대인들에 대한 산업적인 몰살 사이의 관계/비-관계의 물음을 개시해야 할 것이다. 다른 많은 사상가의 저작에 빙의한 후에, 이 물음은 데리다의 텍스트도 가로지른다. 이 매우 어려운 테마에 대해서는, 나는 엘리자베트 드 퐁트네의 고찰로 돌려보낸다. 아마 위고의 시에서 아이들에 의해 잔혹하게 학대당한 두꺼비를 떠올리면서, 막스 자코브는 드랑시(Drancy)에서 쓴 그의 말년의 시의 하나, 「이웃 사랑」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행운의 두꺼비, 너는 노란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본문으로]
  51. [주51] [옮긴이] 일본어로는 ‘なんでもあり’(직역하면 ‘뭐든 있다’)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표현은 프랑스어의 관용구로 ‘어떤 상황[일]에도 쓸 수 있는’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52. [주52] Ibid., pp.56-57〔同前, 70頁; 영역판, p.34〕. 이 구절에서는 다양한 철학적 동물지를 볼 수 있는데, 특히 이 열거의 마지막에는, 데리다 자신의 동물지를 볼 수 있다. 그것은 고양이, 개미, 누에, 고슴도치이다. [본문으로]
  53. [주53] R. Caillois, Le Mythe et l’homme, Gallimard, 1938, p. 112 sq〔『神話と人間』, 久米博訳, せりか書房, 1983年, 117-118頁 이하〕. [본문으로]
  54. [주54] 이 ‘무용함’이라는 풍부한 관념을, 나는 안드레아 포테스타에게서 차용했다. 포테스타는 그 의의에 대해 «De lʼinutile. Formes animales» in Le Portique, no 23-24, 2009, pp.21-33라는 제목의 매우 아름다운 텍스트에서 논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동물적 형식들은, 목적론적인 모든 규정을 피하며, 마치 가능한 모든 이성적 포섭과는 상이한 형식들을 현재화하는 사건의 어떤 장을 참조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처럼, 동물적 세계를 참조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55. [주55]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53〔『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65頁〕. [영어판, p.31.] [본문으로]
  56. [주56] J. Derrida, La force de loi, Galilée, 1994〔『法の力』堅田研一訳, 法政大学出版局, 1999年〕. [본문으로]
  57. [주57] 데리다는 이런 혐의에 반발했으며, 그 혐의가 그에게 걸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당연히 분개하고 있다. Cf.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p.51-52〔『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62-63頁〕. [본문으로]
  58. [주58] Ibid., p.26〔同前, 28頁〕. [본문으로]
  59. [주59] 〔일역자〕 주격적 및 대격적 속격이란 라틴어의 문법용어로, 원문에서의 «La passion de lʼanimal de Derrida»라는 문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단순화한다면, 데리다가 동물에 대해 passion을 갖고 있는 동시에, 동물 자신도 또한 passion을 갖고 있다는 사태를 가리키고 있다. [본문으로]
  60. [주60]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29〔『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32頁〕. 없이, 동시에, 아마, 〔인용문에서 인정되는 이런 단어들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짐승의 수수께끼를 말한다. [본문으로]
  61. [주61] J. Derrida, Force de loi, op. cit., p.35〔『法の力』, 前掲, 34頁〕. [본문으로]
  62. [주62] J. Derrida, L’animal que donc je suis, op. cit., p.50〔『動物を追う, ゆえに私は(動物で)ある』, 前掲, 60-61頁〕. [본문으로]
  63. [주63] 〔일역자〕 저자에 따르면, 여기서의 ‘手前〔en-deçà〕’이란 경계선의 ‘맞은쪽’과 대비되는 ‘手前’이 아니라, 그런 경계선 그 자체의 ‘手前’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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