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샹탈 무페 인터뷰 ― 접합된 권력 관계

* 원 제 : Articulated Power Relations - Markus Miessen in conversation with Chantal Mouffe
* 출 처 : http://roundtable.kein.org/node/545 (무페의 공식 사이트에서 이 글을 찾아볼 수 있다.)

----------------------------------------------------------------------------------------
이 글은 아직 진행중인 번역이다. 용어선택도 그렇고, 문맥도 그렇다. 웹의 특성상 지속적인 수정이 가능할 것이다.
----------------------------------------------------------------------------------------

샹탈 무페(Chantal Mouffe, 1943~) : 벨기에 출신의 정치학자. 현재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교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공동 저술한 책에서 포스트맑스주의 정치이론을 제기. 이후 급진민주주의론의 중심적 인물이 됨. 근래에는 경합적/논쟁적/쟁의적 민주주의(Agonistic Democracy), 칼 슈미트, 우익 포퓰리즘 연구 등을 중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공식 사이트 : http://www.wmin.ac.uk/sshl/page-1527-smhp=1

마커스 미센(Markus Miessen, 1978~) : 독일 출신으로 현재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 기획가, 비평가. 편저로 “Did Someone Say Participate?”(Mit Pr) 등이 있다. 공식 사이트 : http://www.studiomiessen.com/

마커스 미센 : 샹탈씨, 당신은 정치 투쟁과 민주주의적 삶의 급진적 중심(heart)에 대해 폭넓게 글을 썼습니다. 최근 저서인 ≪정치적인 것에 관하여≫(On the Political)의 주요 테제들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샹탈 무페 : ≪정치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제 목표는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치이론의 관점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민주주의 정치이론에서 두 개의 지배적 모델들 ― 이것은 집합적 모델(the aggregative model)과 다른 한편으로는 예를 들어 위르겐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심의적 모델(the deliberative model) ― 로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데 적절하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것들과는 다른 모델, 즉 제가 민주주의의 쟁의적 모델(the agonistic model)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이론의 논의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두 번째 목적은 저의 중심적 연구 동기에 상응하는 것인데요, 그것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런 종류의 사회에서 ― 저는 이것을 포스트-정치적 사회라고 부릅니다만 ― 어째서 민주주의적인 제도에 관한 증가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저는 한 동안 우익 포퓰리즘 정당이 성공을 거듭해 왔다는 것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최근에는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리즘의 형태의 발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고 저는 느낍니다. 물론 저는 정치 이론이 모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작금의 현상(current predicament)을 이해하는 데 돕는다는 점에서 정치이론이 행하는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정치이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정치이론이 반-생산적(contra-productive)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의 목표는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믿게 만들어졌습니다. 분명히 이러한 합의가 마음속에서 그려지는 여러 가지 상이한 방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좌파와 우파의 구별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중요치 않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울리히 벡과 앤서니 기든스에게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사유해야만 한다고, 또 벡에 따르면 우리는 ‘하위-정치’에 입각해 정치를 재-발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것은 자유주의 사상의 전형으로, 칼 슈미트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정치적인 것의 특정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에 관해 말하고자 할 때, 이들은 경제에 입각해서 사고하거나 ― 이것은 확실히 집합적 모델일 것입니다 ― 아니면, 도덕에 입각해서 ― 그리고 이것은 심의적 모델을 대표합니다 ― 사고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사상은 정치적인 것에 특정한 것을 항상 인지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것이 심각한 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에서 행동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것의 동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미센 : 이것이 이 책의 주제를 이루는 것입니까?

무페 : 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에서 저는 정치적인 것의 차원이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의 차원과, 즉 적대(antagonism)의 항상-현전하는 가능성과 연결되어 있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때의 적대는 근절할 수 없는(ineradicable) 것입니다. 이것은 배제 없는 합의 ― 헤게모니를 넘어선, 주권을 넘어선 합의의 형태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센 : 당신의 이론과 칼 슈미트의 작업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무페 :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이 지닌 강점은 자유주의가 이러한 차원의 적대에 대해 맹목적이며 맹목적이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것의 특정성이 친구와 적의 구별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을 아주 정확히 보여주었다는 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슈미트가 바로 이 점을 주장할 때 그는 단호히 옳습니다. 제가 슈미트에 동의하지 않는 대목은 그가 이로부터 끌어내는 귀결들과 관련됩니다. 슈미트는 자유주의적 다원민주주의가 실행 불가능한 정체(unviable regime)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 인간 사회들에 존재하는 그러한 적대의 차원 때문에 ― 수립될 수 있는 유일한 질서의 종류는 권위주의적인 종류의 질서라고 믿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다원주의는 정치적인 결사체(association) 내부에서는 인정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친구와 적의 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결사체의 파괴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제게도 하나의 도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 한편으로 ― 저는 적대의 근절불가능성에 대해 슈미트에게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저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제가 민주주의의 쟁의적 모델(agonistic model)이라 부른 이 모델을 발전시켰습니다. 저는 이 모델에서 민주정치의 중심 과제는, 간단히 말해서 적대(antagonism)를 쟁의(agonism)로 변형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센 : 이 모델은 어떻게 표현되나요?

무페 : 이 모델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적대의 이러한 차원이 두 가지 방식으로 사회에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고유한 적대’(antagonism proper)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친구와 적의 관계입니다. 만일 이것이 어떤 정치 공동체 내부에서 펼쳐지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것은 정치적 결사체의 파괴로 나아갈 어떤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슈미트는 옳았습니다. 그러나 적대적 갈등(antagonistic conflict)이 펼쳐질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이 있는데, 제가 쟁의(agonism)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친구-적-관계에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대항자들(adversaries)이라 부르는 것의 관계에 직면합니다. 적들과 대항자들 사이의 주요한 차이는 대항자들이 공통적인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우호적인 적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상징적인 공간을 공유합니다. 그러므로 대항자들 사이에서는 제가 갈등적 합의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대항자들은 정치적 결사체에 활기를 불어넣는(inform) 윤리-정치적 원리에는 동의합니다만, 그러한 원리들의 해석에 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원리들을 “만인에 대한 자유와 평등”이라고 파악한다면, 이 원리들은 아주 상이한 갈등적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결코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는 갈등들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자유나 평등에 관한 올바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저는 쟁의적 분쟁(agonistic struggle)을, 즉 공유된 원리들에 관한 상이한 해석들 사이의 분쟁을, 갈등적 합의를, 다시 말해서 원리들에 대한 합의이나 그 해석에 관해서는 불일치를 마음속에 품고 있습니다.

미센 : 민주주의적 과정들(processes)은 차이들이 서로 대면할 수 있는 무대(쟁의의 장, arena)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당신은 주장했습니다. 정치적 갈등의 구축적 형태로서의 쟁의가 어떻게 불일치의 구축적 표현에 대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무페 : 갈등을 허용할 제도를 창출하는 것에 입각하여 민주주의의 과제를 예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쟁의적 형태, 즉 대항자들 사이의 갈등의 형태를 필연적으로 취하면서 출현할 것입니다. 적들 사이가 아닌 거죠. 만일 쟁의의 형태를 손에 넣을 수 없다면, 갈등이 출현할 때 그것은 적대적 형태를 취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센 : 이런 맥락에서 제도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무페 : 저는 ‘제도’를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관행, 언어-게임, 담론, 뿐만 아니라 정당과 다른 정치 제도들과 같은 전통적 제도들은 물론이고 지역적이거나 다른 수준에서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상이한 참여 형태들 등등의 총체(ensemble)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미센 : 저는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에 대한 당신의 비판에 관심이 있습니다. 당신이 "다원적 질서와 양립하는 우리/그들의 구축 형태"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해서, 그들은 '절대적 민주주의'라는 생각과 [당신의 생각] 사이의 구별에 관해 좀 더 자세히 부연해 주시겠습니까?

무페 : 알겠습니다. 제도적 측면은 하트와 네그리가 먼저 번에는 ≪제국≫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다중≫에서 제시한 견해에 대해 제가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의 견해는 반(反)-제도적 견해로, 국지적이거나 지역적인, 또는 국민적인/전국적인 모든 형태의 제도들에 반대합니다. 이것들이 파시스트적이라고 선언하면서 말이죠. 그들은 특정 장소에 속함(belonging)이란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코스모폴리탄적 견해나 이해를 추진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중은 어떠한 형태의 속함도 지녀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것이 이론적으로 완전히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치적인 집단 정체성들에 대한 ‘열정’이라고 제가 부르는 바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들이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과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열정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 프로이트라면 열정을 리비도의 투여[어떤 현안, 사람, 개념에 대한 강하고 강렬한 감정적 에너지의 부착/집착]라고 부를 것이며, 이것은 국지적, 지역적, 또는 국민적/전국적 형태의 정체성의 창조에서 동원됩니다. 이들은 그러한 부착/집착이 극복될 수 있고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점에서 이들은 후-관습적post-conventional 정체성들에 관한 생각과 후-국민적post-national 유럽에 관한 통념과 관련지어 볼 때 하버마스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저는 이것이 완전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트와 네그리에 대한 저의 주된 불일치/비동의는 ‘절대적 민주주의’의 가능성, 즉 어떤 형태의 제도도 넘어선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제게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이들의 견해에는 메시아적 어조가 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어떠한 권력 관계도 없을, 어떠한 갈등도 더 이상 없을, 그리고 어떠한 적대로 더 이상 없을 완벽한 민주주의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방어하고 싶어 하는 요점, 제 작업의 기초에 있는 요점, 즉 적대는 근절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과 완전히 정반대됩니다. 적대는 길들여질 수 있으며, 이것이 쟁의가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는 지점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센 : 이런 맥락에서 당신은 하트와 네그리보다 더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나요?

무페 : 제가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저는 예를 들어 자크 데리다[주6 : ]에게, 그리고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그의 개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항상 ‘도래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지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센 : 하트와 네그리는 이것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

무페 :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양 합니다. 즉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완벽한 민주주의라고 말이죠. 그러한 민주주의는 다원적이기를 그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론이나 갈등의 어떠한 가능성도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이것은 쟁의적 민주주의라는 제 생각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생각입니다. 제가 보기에 갈등이 있는 한 민주주의가 있으며, 현존하는 배치들arrangements도 논박contest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이 종점이며, 논전contestation은 이제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지점에 우리가 도달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의 종언을 의미합니다. 저는 하트와 네그리에 대해 또 다른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의 이론 전체를 제2인터내셔널 유형의 맑스주의의 어떤 재-형성으로 봅니다. ― 비록 들뢰즈와 가타리의 영향을 받았기에 어휘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결정론의 동일한 유형입니다. 그저 우리는 제국의 모순이 다중의 군림reign을 산출할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정치에 관한 모든 중요하고 근본적인 물음은 이제 자동적으로 해소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죠. ― 이들은 또-다른-전-지구화(alter-globalisation) 운동을 다중의 역량의 현시manifestation의 하나로 간주합니다. 저도 이것이 흥미로운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운동이 지닌 문제는 이 운동이 너무도 이질적이라는 것입니다. 또-다른-전-지구화(alter-globalisation) 운동 내부에서 우리는 아주 상이하고 때로는 서로 갈등하는 목적을 지닌 아주 여러 집단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게 있어서 정치적 과제란 이처럼 상이한 투쟁들 속에서 어떻게 대등의 연쇄(a chain of equivalence)를 창출할 것인가입니다. 즉, 이러한 투쟁들을 어떻게 하나의 운동, 다시 말해 어떤 통일의 형태를 제안하는 것으로 수렴할 것인가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트와 네그리가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운동의 이질성 그 자체가 운동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이들은 운동 내부의 이러한 집단들이 수평적 수준에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제국의 권력을 향해 수직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 전복 능력capacity은 훨씬 크다고 주장합니다.

미센 :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나요?

무페 : 완전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대안-지구화(alter-globalisation) 운동이 바로 지금, 난점들과 마주치고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운동들이 상이한 투쟁 형태들 사이에서 충분한 협력 형태들을 수립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센 : 그것은 제도의 규모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나요?

무페 : 이 운동에서 하트와 네그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정당이나 노동조합 같은 현존하는 제도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시민사회 운동을 바랍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기성 제도들과 접촉하게 되면 이 제도들이 여러분을 중성화하거나 포획하려고recuperate 노력할 것이라고 이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저는 이것이 요점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은 존재합니다. 저는 이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는 대안-지구화 운동과 그러한 제도들 사이의 상승효과synergy 형태가 없다면, 중요한 진보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 가지 예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가령, 그들은 피케테로스(Piqueteros) 운동을 아주 찬양하지요.

미센 : 아르헨티나의 실업노동자 운동 말이군요….

무페 : 네. 이것이 바로 하트와 네그리가 옹호하는 어떤 형태의 제도에도 대립하는 시미사회 운동의 종류입니다. 확실히 그러한 운동은 데 라 후아de la Rúa 정부를 어떻게 해서든 넘어뜨렸습니다. [페르난도 데 라 후아는 1999년 12월 10일부터 2001년 12월 21일까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다.] 이들의 주된 슬로건은 “que se vayan todos”(“이 놈들은 모두 떠나가야 해. 우리는 정치인들과 어떤 관계도 맺고 싶이 않아.”)였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어떤 종류의 질서를 재건할 순간이 도래했을 때, 즉 선거 때에 피케테로스는 완전히 무능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제도나 정당과 어떠한 연계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이들은 제도나 정당의 대체물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거가 있었을 때, 선거는 전통적인 정당들 사이에서, 메넴[카를로스 메넴Carlos Menem, 1989년 7월 8일부터 1999년 12월 10일까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정의당Justicialist Party의 당수였다]과 키르치넬[네스토르 키르치넬Néstor Kirchner, 2003년 5월 23일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취임] 사이의 투쟁이었습니다. 하늘이시여, 고맙습니다, 메넴이 졌어요. 키르치넬이 이겼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음이 판명되었습니다. 키르치넬은 피케테로스를 자신의 정부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들과 접촉하고자/제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그 운동의 일부와 함께 일하고자 했습니다. 여전히 정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아주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른바 다중의 운동들이 좀 더 전통적인 정치 형태들과 접합되지 않으면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 예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미센 : 이 '하나의 목소리' - 혹은 당신의 말로 하자면 '좀 더 전통적인 정치 형태' - 는 어떤 형태의 합의를 요구지 않을까요? 제게는, 이처럼 상이한 목소리들을 하나로 합치거나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합의가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무페 : 그래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도 알다시피 그것이 갈등적 합의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상이한 운동들 사이의 몇몇 종류의 접합, 저는 이 말을 좋아하는데요, 그래서 그들은 몇몇 형태의 공통적 목표를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저는 합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갈등적 합의는 우리가 공통의 목표를 향해 함께 일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하죠.

미센 : 이러한 실천들과 제도가 어떻게 가능potentially해질 수 있는지, 또는 이것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지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특히 여기에서 대안적 제도들과 지식 공간의 형성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무페 : 본질적인 차이와 갈등은 여전히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접합은 있습니다. 하트와 네그리에 관해 보자면, 의문시되어야 할 것은 필연적 과정이라는 생각입니다. 자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인지 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들이 주장한 것이 바로 이것이며, 제2인터내셔널이 주장했던 것 역시 이것입니다. 이들은 제국이 자기 자신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생산력이 이전 체제를 무너뜨릴 힘들 ― 이것이 다중입니다 ― 의 출현을 필연적으로 창출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그런 단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통적 맑스주의의 주장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이러한 낙관주의를 공유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과정이 필연적인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성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가능성일 뿐이며, ― [그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 정치적 개입이 필수적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들이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독일에서 만들어진 ≪혁명?≫(Was Tun?)[주 10]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대항-지구화 운동에 관한 것이며, 영화 안에는 하트와 네그리의 영향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감독이 이 두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요?” 네그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기다리세요, 인내심을 가지고서.” 그리고 하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욕망을 따르세요.” 이것이 그들의 정치의 일종이며, 저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그냥 기다리세요. 자본주의의 발전이 다중의 군림reign을 초래할 때까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급진정치를 예견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하트와 네그리에게 훨씬 많은 논쟁점을 갖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거기까지는 나갈 수 없을 것 같군요.

미센 : 당신이 말했듯이, 우리는 오늘날 생산적 관여/결정engagement의 한 형태로서 갈등을 허용하는 공통성의 어떤 형태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외부자의 진입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보헤미안적 참여participation' 모델은 '외부자'가 장래의 역할 모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요?

무페 : 제가 보기에, 오늘날 실제로 필요한 것은 쟁의적인 공적 공간을 창출하는 것, 쟁의적 유형의 정치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실제로 없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제가 ‘후-정치적’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정치의 파르티잔적 모델이 극복되었다고, 좌파와 우파는 더 이상 없다고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중심/중도에는 이러한 종류의 합의가 있고, 이 속에는 실제로 어떠한 대안 가능성도 없습니다. 전 지구화의 상태를 놓고 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우리는 듣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자 정당들은 훨씬 더 중앙/중도를 향해 움직였습니다. 그들이 제공한 것은 실제로는 중도-우파 정당이 제공한 것과 근본적/원리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어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반적인 합의가 있는데, 저는 이것이 극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러한 상황은 유럽에서 우파-포퓰리즘의 대두를 위한 영토를 창출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유일한 정당들입니다. “중심에는 이러한 합의에 대한 대안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 인민들로부터 기성사회establishment가 빼앗아 갔던 목소리를 여러분들에게 다시 돌려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인민 주권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제시하는 대안들은 부적절하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 대안들이 보통은 외국인 혐오증의 언어로 분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익-포퓰리즘 정당들이 종종 대안을 대표하는 양 하는 유일한 정당들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이들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열정/정념을 동원하고자 노력하고 강한 정서적 구성요소로 정체성 확립identification의 형태들을 제공하고자 노력하는 유일한 정당이기도 하다. 좌파가 도덕적 비난으로 응수하는 대신에, 적절한 대답을 제공할 수 있도록 이 정당들의 성공 이유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미센 : 이런 맥락에서 불화dissensus에 대한 당신의 구체적 이해는 어떤 것인가요?

무페 : 중요한 것은 실로 많은 영역에 현존하는 합의를 전복시키는 것이고, 갈등성의 동학을 재건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런 관점에서, 저는 당신이 ‘외부자’라 부르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이긴 합니다만, 저는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것은 동의하지 않는 사람 이상이며, 또 다른 관점을 가질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꼭 외부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내부에서 나온 누군가일 수도 있죠. 상이한 관점을 가진 누군가, 지배적인 합의에 가담하지 않은 누군가 말이죠. 그 또는 그녀는 사람들이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게끔 해 줄 것입니다.

미센 : 그렇군요. 하지만 확실히, 무대에 진입하는 것은 외부의 목소리가 아닐까요? 그것은 그들의 반대disapproval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현존하는 논쟁과 담론들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에 달려 있습니다. Yes, but is this not precisely the outside voice that is entering the arena? It depends on those who will be able to access existing debates and discourses untroubled by their disapproval.

무페 : 물론이죠. 어떤 경우에 그것은 갑작스레 의견을 개진하여 “보라구, 당신이 설명하지 않았던 다른 것들도 있다구”라고 말하는 외부자의 그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요, 그것은 외부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외부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침묵당해 왔던 공동체 내부의 어떤 목소리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합의에 대한 외부자이다고 당신이 말한 것에 저는 동의합니다. 침묵당해 왔거나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던 대다수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얻지 못했다고 제가 꼭 말하는 것은 아니며, 아직 출현하지 못했던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합의의 문화 전체는 사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예견하게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대항-지구화 운동의 슬로건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이 이것,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용어들로 사고하기 시작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는 사물들이 현재 있는 것처럼 있을 수밖에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합의를 방해하려는 생산적인 교전/연루engagement라고 부르는 바의 이러한 형태들은 합의가 옆으로 밀어내고자 노력했던 사물들을 전면에 내세우는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제가 쟁의적 공적 공간이라고 부른 바의 창조에는 모두가 어떤 역할을 하는 아주 상이한 목소리들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것이 예술가, 건축가, 또 크게는 문화의 전 영역에 연루된engaged 사람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여러 가지 상이한 주체성의 형태들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미센 : 참가자들의 순진함을 푸는undo 것이 아주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이러한 종류의 실천이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많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relevant’ 실천을 발견할 수 있는 작동방식modus operandi이 아닐까요? 어떻게 특수한 실천들이 의심할 여지없이 적극적이고, 이용자 주도의 교전engagement 수단으로서 참여 개념을 탈취했는가는 흥미롭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개입적 실천의 생산적 형태로서 ‘갈등적 참여’ 개념을 통해 사고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겠군요.

무페 : 저는 그것이 중요한 요점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우리는 제가 후-워싱턴-컨센서스 국면이라고 부르는 그런 국면에 있습니다. 물론, 워싱턴-컨센서스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점점 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남미에서 그렇죠. 남미에서 일어나는 일은 상당히 재밌습니다.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우리는 IMF나 세계은행에 복종하고 싶지 않다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사물들을 조직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전 지구화의 권력은 다른 전략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참여의 전략이 그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참여는 동업자들끼리 사용하는 용어buzzword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참여는 그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기-착취auto-exploit하게끔 구성합니다. 사람들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의 방식으로 그저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며, 이러한 합의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저는 당신의 ‘참여의 폭력’[http://www.eurozine.com/articles/2007-08-01-miessen-en.html]이라는 개념이 아주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참여는 또한 아주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미센 : 무엇이 위험을 구성하죠?

무페 : 저는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열린 어떤 토론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는 다보스 포럼뿐만 아니라 포르토 알레그레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상이한 경험들을 공개적으로 끄집어냈습니다. 포르토 알레그레에 있었던 사람은 이벤트 이야기를 했고, 그 다음에 다보스 포럼에 참가했던 사람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보스에서 논의되었던 것과 그것이 완전히 똑같다니 믿을 수 없군요. 완전히 똑같아요.” 그리고 그 사람은 이것을 낙관주의적인 것인 양 이해하고 있었고, 저는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그들이 똑같은 것에 관해 말하는 건 있을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어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보스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어휘를 변형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운동의 일부라고 사람들이 느끼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참여 개념에 관해서는 아주 회의적입니다. 마치 참여 그 자체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요. 물론 참여에도 여러 상이한 형태가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어떤 종류의 쟁의적이거나 혹은 당신이 그렇게 부르듯이 갈등적 참여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상이한 견해들 사이의 진정한 대결이 있다고 한다면, 네, 그래요, 저는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여는 실제로는 그 누구도 합의를 방해할 수 없는, 그리고 어떤 형태의 동의가 미리 전제되어 있는 어떤 형태의 합의적 견해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적극적인 것으로 전혀 간주하지 않습니다. 참여는 실제로는 여러분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순진무구한 개념이 아닙니다.

미센 : 참여의 여하한 형태도 이미 갈등의 형태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주어진 상황에서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환경에 작용을 가하는 갈등의 힘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낭만화된 참여 개념에서 교전engagement이라는 좀 더 선취적pro-active이고 갈등적인 모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미시정치적 환경으로 당신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이고, 미시정치적 운동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존재하는 건가요?

무페 : 공간이라는 쟁점에 관해서 저는 당신이 미시정치적, 거시정치적, 지구정치적이라고 부른 것들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치적인 것의 이러한 차원이 모든 수준에서 자기 자신을 현시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보다 좀 더 중요한 어떤 수준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는, 이것은 제가 하트와 네그리에 관해 앞에서 말했던 것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럽사회포럼을 조직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이런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투쟁이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사회포럼을 마련하는 것에는 어떠한 요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유럽을 특권화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모든 수준에서 사회포럼들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시, 지역, 국가들 ― 이 모든 수준과 규모가 매우 중요합니다. 쟁의적 투쟁은 다양한 수준들에서 일어나야 하며, 지구-정치적 수준이나 미시정치적 수준을 특권화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정치적 차원이 어떤 특권화된 공간으로 국지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특정한 공간이라 하더라도, 모든 종류의 사회적 관계들에서 스스로를 현시할 수 있는 차원입니다. 최근에 많은 지리학자들이 주장했듯이, 공간은 항상 어떤 것, 즉 성층화된 어떤 것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비판하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말이죠. [이들이 이것을 비판한 것은] 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매끈하고 동종적인 공간이기 때문인 반면, 도린 매시(Doreen Massey)는 모든 형태의 공간이 항상 권력관계의 어떤 배치configuration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헤게모니 투쟁이나 정치 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모든 수준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쟁의적 투쟁을 개시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수준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다양한 수준에서 정치화politisation의 잠재력이 있으며, 이 모든 수준에 관여engage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단순히 전 지구적 투쟁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는 권력관계들이 존재하는 모든 수준에서 이 권력관계들을 변형하고 접합하기 위해 정말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센 : 샹탈씨, 시간 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Markus Miessen, London, Dec 2006

저작자 표시
신고

설정

트랙백

댓글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