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 민주주의의 위기와 예외상태

: 데리다, 아감벤, 벤야민, 슈미트와 유령의 회귀

사토 요시유키(佐藤嘉幸)

 

* 원문 : http://www.jimbunshoin.co.jp/files/satoyoshiyuki_democracy.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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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우리는 바야흐로 벤야민이 말하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각주:1] 속에 있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전후 일본의 통치 시스템의 문제점(전원電源3법에 기초한 막대한 보조금과 맞바꿔서 원전을 지방에 떠넘기는 희생의 시스템’,[각주:2] 그리고 지진이 빈발하는 일본열도에 54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운영해온 핵에너지 정책의 취약성)을 노정시켰는데, 그 약점은 지진 후에 선전된 유대라는 이름의 내셔널리즘과, 중국한국러시아와의 영토문제라는 이름의 국경분쟁, 북한의 핵무장이 야기한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에 의해 덮어 감춰지고, 외부의 적과 전쟁을 할 실재적 가능성으로 변환됐다. 그런 변환을 배경으로 하여, 20147, 2차 아베정권은 헌법해석을 변경함으로써 집단적 자위권, 나아가 집단안전보장의 행사도 가능케 하는 해석개헌을 실현했다. 해석 개헌에 의해, 평화헌법을 기초로 하는 입헌민주주의의 체제는 파괴되고, 대외전쟁을 가능케 하는 2의 구조물을 헌법의 곁에 둔다고 하는 예외상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예외상태의 형성은 의회에서의 논의를 거친 입법 행위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는 게 아니라, 내각의 각의결정이라는 행정적 수단에 의해, 기존 헌법의 옆에 그것과는 다른 2의 구조물을 두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극히 위험한 행위이다. 그런 행위는 민주주의 자체를 붕괴시키는 위험을 품고 있다.

정치를 전쟁으로부터, 예외상태로부터 정의함으로써, 평화헌법을 기초로 삼은 입헌민주주의의 체제를 정지시키고, 거기에 완전히 다른 체제, 즉 대외전쟁을 가능케 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 이것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 입헌민주주의의 위기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은 관동대지진이나 세계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 후에 식민지주의와 전시체제의 구축으로 치닫고, 15년 전쟁의 수렁에 빠진 전전(戰前)의 일본의 상황을 상기시킨다. ,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의 상황은 마치 관동대지진 이후의 상황의 유령이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현황 인식에서 출발해 본고에서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의 슈미트 및 벤야민 해석을 독해하고, ‘예외상태에 관한 이들의 이론에 입각해 우리가 놓여 있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의 현황을 조사하려 시도한다.

 

1.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로서의 전쟁

데리다는 주권권력을 비판할 때 반드시 슈미트의 주권이론을 참조한다. 예를 들어 2004년 그가 사망한 탓에 마지막 강의가 되어 버린 짐승과 주권자2(2002-2003)에서 데리다는 주권자란 슈미트가 말하듯이 예외에 관해 결정하고 법권리를 중지하는, 예외적 권리를 지닌 예외적 존재이다[각주:3]라고 말한다. 그가 슈미트 이론을 가장 자세하게 분석한 저작은 우정의 정치(1994년 출판. 또 이 책은 1988-1989년 강의에 바탕을 뒀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우정의 정치를 자세하게 독해하고, 데리다의 슈미트 해석에 입각해 정치적인 것과 전쟁의 관계에 관해 고찰하자.

정치신학(1922)의 슈미트에게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관해 결정하는 자[각주:4]이다. 이런 예외상태는 이 책보다 10년 뒤에 쓰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각주:5]에서는 친구와 적의 구별”, 전쟁으로서 나타난다. 데리다는 슈미트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적 행위나 동기의 기본원인으로 생각되는 특종(特種) 정치적 구별(die spenzifisch politische Unterscheidung)이란 친구이라는 구별(die Unterscheidung von Freund und Feind)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26/15).

만일 차이적 구별 혹은 각인(刻印, Unterscheidung), 정치적인 것의 규정이, ‘정치적 차이자체(die politische Unterscheidung)가 친구와 적 사이의 차별(Unterscheidung)로 귀착된다면, 그런 분리는 하나의 단순한 차이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한정된 대립, 대립 자체이다. 이 규정이 전제하는 것, 그것은 바로 대립이다. 이 대립이, 그것과 더불어 전쟁이 말소되면, ‘정치적이라 불리는 경계는, 그 경계 혹은 종차성을 잃어버린다.[각주:6]

 

친구와 적이라는 구별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정의인데, 이는 달리 말하면, 친구와 적의 대립이다. 그리고 이 대립이 함의하는 것은 다음에서 인용된 슈미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잠재성혹은 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 자체이다.

 

그 기대나 교육적 노력에 공명하든 하지 않든, 국민들은 친구-적의 대립을 따라 결속하는 것이며, 이 대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며, 또한 정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실재적인 가능성으로서(als reale Möglichkeit) 주어져 있다는 것은 이치상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적이란 경쟁상대나 상대방 일반이 아니다. 또한 반감을 품고 증오하고 있는 사적인 상대방도 아니다. 적이란 다만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 다른 마찬가지의 총체와 대결하고 있다 이다(Feind ist nur eine wenigstens eventuell, d. h. der realen Möglichkeit nach kämpfende Gesamtheit von Menschen. die einer ebensolchen Gesamtheit gegenübersteht)[정치적인 것의 개념, 29/18-19][각주:7]

 

데리다는 슈미트의 이 말을 해석하면서 적이란 다만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이다라는 대목에 주목한다. “그것은 가능성에서 우발성(여기서는 최소한의 우발성으로서 종차화되어 있다)으로의, 그리고 우발성에서 현실성(여기서는 실재적 가능성, «reale Möglichkeit»이라고 불린다)으로의 이행이다[각주:8]고 데리다가 말하듯이, 여기서 슈미트는 적과의 항쟁, 즉 전쟁을, 적어도 잠재성, ‘실재적 가능성’, 나아가 현실성으로서 파악한다. , 정치적인 것은 슈미트에게서 잠재적 혹은 현실적 전쟁의 가능성에 있어서 파악되는 것이다.

이때 친구와 적의 대립이란 공적(公的)’이며, 국민을 단위로 하는 것이며, 적이란 사적인 적이 아니다. “적은 공적인 적일 수밖에 없다(nur der öffentliche Feind). 왜냐하면 이런 인간의 총체, 특히 전 국민에 관계하는 것은 모두 공적(公的)이게 되기 때문이다. 적이란 호스티스hostis[공적公敵]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이니미쿠스inimicus[사적私敵]가 아니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29/19).[각주:9] 그런 적과의 대립은 적이 내적(内敵)이라면 내란, 외적(外敵)이라면 전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뭐가 됐든, 이런 공적인 대립은, 잠재성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 무력에 의한 전투를 의미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슈미트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인 현실성의 영역에서의, 어떤 전투의 우발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im Bereich des Realen ligende Eventualität eines Kampfes). 역사적 변화에 의존하는 무기와 전쟁의 기술의 일정하지 않는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이 말을 검토해야 한다. 전쟁은 조직화된 정치적 통일체 사이에서의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 내전이란 하나의 (하지만 이것에 의해 위태롭게 되는) 정치적 통일체의 한복판에서의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3/25).

어떤 경우든 이 전투는 무력에 의한 것이다. 치사(致死)를 목표로 하는 것 말이다. ‘무기는 여기서 그 본질적인 개념에 있어서, 인간의 치사로서의, ‘신체적=물리적치사를 목표로 하는 수단(ein Mittel physischer Tötung von Menschen)이다. 인간의 죽음은 이 적의 개념에 의해 이렇게 함의[내포]되며, 즉 대외전쟁이든 내전이든 일체의 전쟁에 함의[내포]된다.[각주:10]

 

, 전쟁은 슈미트가 다음에서 말하듯이, 적의 신체적=물리적 치사를 목표로 한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 “친구, , 전투 같은 개념은, 그 실재적인 의미를(ihren realen Sinn) 신체적 치사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auf die reale Möglichkeit der physischen Tötung) 항상적인 관계로부터 끌어낸다. 전쟁은 적대로부터 생겨난다. 왜냐하면 적대는 다른 존재의 존재론적 부정(seinsmäßige Negierung eines anderen Seins)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적대의 극한적 실재화(die äußerste Realisierung der Feindschaft)일 뿐이다. 전쟁은 평범한 일상이나 정상적인 것일 필요는 없으며, 하나의 이상처럼, 혹은 원할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필요가 없으나, 적의 개념이 그 의미를 보존하는 한,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현전하기를 계속하지(als reale Möglichkeit vorhanden bleiben) 않으면 안 된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3/25).[각주:11] 따라서 친구와 적의 대립, 즉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전쟁이라는, 적의 신체적 치사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관계로부터, 그 실재적 의미를 끌어낸다. 그렇다면 슈미트는 단순한 사고 대상으로서의 전쟁으로부터가 아니라, 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전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게 된다. 슈미트에 따르면, 전쟁이 그런 구체성을 결여한 경우, 그 개념은 유령적인 추상이 된다.” “정치적 관계들의 본질이 주어지는 것은, 바로 이 구체적 대항(konkrete Gegensätzlichkeit)이 환기되는 경우이다. 모든 정치적 개념, 표상 및 말에는 어떤 항쟁적 의미가 있다. 이것들은 어떤 구체적인 항쟁(eine konkrete Gegensätzlichkeit)을 조준하고 있으며, 그 궁극적인 논리가 친구-적의 배치(그것은 전쟁 혹은 혁명이라는 형태 아래서 바깥에서 나타난다)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an eine konkrete Situation gebunden), 이런 상황이 부재하면, 그런 개념들, 표상 및 말들은 공허하고 유령적인 추상이 된다(werde zu leeren und gespenstischen Abstraktion)”(정치적인 것의 개념, 31/22).[각주:12] 그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전쟁상태를 예외상태라고 명명할 수 있다. 실제로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라는 사태는 긴급사태(Ernstfall)’이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도, 예외적 사태(Ausnahmefall)야말로 특별히 규정적인, 사물의 핵심을 분명히 하는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친구와 적의 정치적 배치의 극한적 귀결이 두드러지는 것은 현실적 전투에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극한적 가능성에서 출발해서 인간들의 삶은 특수 정치적인 긴장을 획득한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5/30).[각주:13] 데리다는 슈미트의 이 구절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리라.

 

예외가 규칙이다, 이것이 아마도, 실재적 가능성의 이런 사유가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예외가 일어나는 것의 규칙이다, 사건의 법이다, 그 실재적 가능성의 실재적 가능성이다. 사태 혹은 우발성에 관한 결단을 정초하는 것은 예외이다. 이 사태, 이 상황(diesser Fall)은 예외적인 방식으로만(nur aisnahmsweise) 도래한다. 그것은 그 결단적 성격을 중단시키지도 않고 지양시키지도 않고 무효화하지도 않는다(hebt nicht auf). 이 예외성이 반대로, 사건의 우발성을 정초짓는다(begründet). 어떤 사건이 사건이며,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예외적인 경우뿐이다. 그 자체로서의 사건은 예외적이다.[각주:14]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 그것은 곧 예외상태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치가 전쟁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규정할 때, 우리는 바야흐로 벤야민이 말한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속에 놓이게 된다. 이로부터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슈미트를 염두에 두면서, 전쟁이란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이다고 말할 것이다. “가장 극한적인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모든 정치적 개념의 기초에, 이 친구와 적의 구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이 구별이 윤리 사이에 실재적으로 현전하고 있는 한, 혹은 적어도 실재적으로 가능한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6/31).

 

세 가지 기준(실재성, 가능성, 현전)이 여기서는 같은 우발성의 핵심에서 얽히고설킨다. 사건의, 하나이자 동일한 사건성의 핵심에서. 친구/적의 배치는 어떻게 개시되는가? 어떻게 현전하는가? 이런 실재적 가능성은 현전하는가, 아니면 실현하는가, 가능적인 것으로서, 혹은 실재적인 것으로서. 이 실재성은 어떻게, 어떤 경우에는 현전을, 어떤 경우에는 가능성 자체를 강조하는가. 전쟁에 있어서이다. 극한으로서의, 전쟁상태의 극한적 경계로서의, ‘극한적 우발성’(als extreme Eventualität)으로서의 전쟁에 있어서다. 전쟁이 개시적인 것은 이 자격에 있어서다. 그것은 그 위에서 하나의 본질을 읽어낼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을 구성한다. 정말로 그러하지만, 그 본질은 우선 비통상적인, 비경험적인, 어떤 목적론적인(téléologique)(극한적 경계로서의 텔로스[목적=귀결]) 의미에서 범례적이고 모범적인, 하나의 사실에서 곧바로 읽어낼 수 있다. 이렇게 개시되는 실재적 가능성의 현전’(Vorhandenheit), 실재적 혹은 가능적인 이 현전은, 사실이나 사례의 현전이 아니다. 그것은 텔로스의 현전이다. 정치적 텔로스의, 이러저러한 정치적 목적의, 이러저러한 정책의 현전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 의 현전이다. ‘가장 극한적인(extremste)’ 정치적 수단으로서, 일체의 정치적 표상을 정초짓는전쟁은, 친구/적의 이 차별의 가능성을 현현한다(offenbart). 그리고 이 표상에 의미가 있는 것은, «sinnvoll»인 것은, 이 차별이 실재적으로 현전하고 있는’(real vorhanden) 한에서이며, 혹은 적어도 현실[실재]적으로 가능한(oder wenigstens real möglich) 한에서이다.[각주:15]

 

따라서 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이란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목적)이다.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란 친구/적의 구별, 친구-적의 항쟁이며, 그것은 전쟁이다. “전쟁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어떤 정치도, 정치적인 유대로서의 어떤 사회적 유대도, 전쟁 없이는, 그 실재적 가능성 없이는 의미가 없다.”[각주:16] 달리 말하면, ‘예외상태에서는 어떤 정치이든, 어떤 정치적 유대이든,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에 의해 정초지어진 것이다. 다음의 슈미트의 말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전쟁은 결코 정치의 목표, 목적, 내용이 아니며, 전쟁은 인간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사고하는 것을 특수한 방식으로 규정하며,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특수 정치적 행태를 산출하는,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상 현전하고 있는 저 전제(die als reale Möglichkeit immer vorhandene Voraissentzung)이다”(정치적인 것의 개념, 34-35/27).[각주:17] 여기서 슈미트는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전제라고 말하며, ‘목적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예외상태에서 전쟁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전제인 동시에 그 목적이며, 귀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 첫째, 친구/적 관계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는 것은 절대적 적대로서의 전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둘째, 적이란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인데, 그것은 정치 시스템으로 통합 불가능한 내부의 적이기도 할 것이며(즉 내전), 다른 국민국가라는 외부의 적이기도 할 것이다(즉 대외전쟁).

셋째, 친구/적 관계, 즉 전쟁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는 것이 정치의 전제’(슈미트), 정치의 텔로스’(목적)(데리다)가 되는 경우, 우리는 예외상태혹은 더 정확하게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상태화, 일상화]’ 속에 있게 된다. 우리는 제2차 아베정권의 해석개헌이 제시한 일련의 안전보장(‘실재적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에 관한 논의를 계기로 하여, 바로 이런 예외상태의 규칙화[상태화, 일상화]’ 속에 놓여 있다.

 

2. ‘예외상태의 규칙화[상태화, 일상화]’법률의 힘

이제 다음으로 해석개헌의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점에 관해 데리다와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관한 분석에 입각해 생각해보자.[각주:18]해석개헌이란 피구성적 권력(헌법에 의해 구성된 권력[pouvoir constitué])인 내각이 구성적 권력=헌법제정권력(헌법을 구성하는 권력[pouvoir constituant])임을 선언하지 않고, 즉 입법적 수단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각의결정[국무회의결정]이라는 행정적 수단에 의해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구성적 권력이란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내는 권력이며, 기존의 헌법 혹은 법체계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 무한정한 권력이다. 반대로 피구성적 권력이란 기존의 헌법에 의해 구성된 권력이며, 이것에 의해 구속되는 한정된 권력이다. 이로부터 예외상태란 바로 헌법을 중지하고 그 곁에 헌법과는 다른 2의 구조물을 구축한다는 상태를 가리키게 된다.

달리 말하면, 예외상태란 피구성적 권력과 구성적 권력이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지시한다. 이런 예외상태에 관해 해석하기 위해 데리다의 =법률의 힘(1994)[각주:19]을 참조하자. 우정의 정치에 관한 강의(1988-1989)와 같은 시기인 198910월에 카도조 로스쿨(뉴욕)에서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되고 역시 우정의 정치와 같은 시기인 1994년에 출판된 =법률의 힘(따라서 우정의 정치=법률의 힘은 내용적으로도 극히 긴밀하게 연결되며,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있다)에서 데리다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1921)를 매우 밀도 높게 독해하고 있다. 벤야민이 이 논문에서 법정립적 폭력[Rechtsetzende Gewalt]”(새로운 법체계를 정립하는 폭력=권력[Gewalt])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구성적 권력에 상당하며, “법유지적/법보존적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기존의 법체계에 의해 구속되고 그것을 유지하는 폭력=권력[Gewalt])라 부르는 것은 피구성적 권력에 상당한다.[각주:20] 데리다는 =법률의 힘에서 구성적 권력은 피구성적 권력에 의해 반복되고, 때로는 (예외상태에서는) 그것에 의해 대리된다고 말한다.

 

두 개의 폭력, 즉 법정립적 폭력과 법유지적 폭력을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하면서 벤야민은 어떤 때 다음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한 쪽의 폭력은 다른 쪽의 폭력과 그다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른바 법정립적 폭력은 법유지적 폭력에 의해 때로 대리되고반드시 반복되는 이 말의 강한 의미에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21]

 

법정립적 폭력은 법유지적 폭력에 의해 반복되고 대리된다. 실제로 벤야민은 폭력 비판을 위하여의 결론 부분에서 법정립적 폭력은 법유지적 폭력에 있어서 대리된다(repräsentiert)’고 명확하게 말한다.[각주:22] 달리 말하면, 구성적 권력은 피구성적 권력에 의해 반복되고 대리된다. 이 단정은 무엇을 의미할까?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벤야민이 제시하듯이, 그 폭력[법정립적 폭력]은 확실히 독해 가능하며, 더욱이 이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폭력은 법권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폴레모스와 엘리스가 디케가 취하는 모든 형식이나 의미작용과 무관하지 않듯이. 그러나 이 폭력은 법권리 속에 있으며, 법권리를 중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법권리를 중단하고 다른 법권리를 창설한다. 법권리를 중지하는 이 순간, 이 에포케, 법권리를 창설하는 이 순간, 혹은 혁명적 순간은, 법권리 속에 있으며[있으면서도] 법권리가 아닌 심급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법권리의 전체 역사이기도 하다. 이 순간은 항상 생겨나고 있지만, 어떤 현전이라는 형태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법권리의 창설이, 공허 속에서, 혹은 심연 위에서 중지되어 있는 순간이며, 누구에게도, 그리고 누구 앞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순수한 수행적 행위(acte performatif)로 중지되어 있는 순간이다.[각주:23]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은 법권리 속에 있으며 법권리를 중단하고 중지하는 것, 달리 말하면 예외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법권리=입헌적 시스템을 정립한 후에도,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은 법유지적 폭력 혹은 피구성적 권력에 있어서 비현전적인 방식으로 (“이 순간은 항상 생겨나고 있으나 어떤 현전이라는 형태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반복되고 대리된다.’ 이로부터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벤야민의 명시적인 의도를 넘어서 내가 제출하려는 해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법권리를 창설하는, 혹은 정립하는 폭력(Rechtsetzende Gewalt[법정립적 폭력])은 그것 자체, 법권리를 유지하는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법유지적 폭력])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법정립적 폭력은 자기의 반복(répétition)을 요구하고 유지해야 할 것, 유지할 수 있는 것, 유산이나 전통이 될 것을 약속받고, 분유되는 것을 약속받는 것을 창설한다는 것, 이것은 법정립적 폭력의 구조에 속해 있는 것이다. 창설이란 약속이다. 모든 정립(Setzung)은 용인하고 앞에 둔다. 모든 정립은 놓고, 약속함으로써 정립한다. 그리고 설령 어떤 약속이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더라도, 반복 가능성(itérabilité), 창설의 가장 침입적인 순간에, 보호의 약속을 기입한다. 이처럼 반복 가능성은 원초적인 것의 중심에 반복의 가능성을 기입하는 것이다. 더 잘 말하면, 혹은 더 나쁘게 말하면, 반복 가능성은 이 반복 가능성의 법칙 속에 기입되며, 그 법칙 아래서, 혹은 그 법칙 앞에,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권리를 순수하게 창설하는, 혹은 정립할 정도의 작용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순수한 법정립적 폭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순수한 법유지적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립 작용이란 이미 반복 가능성이며, 자기를 유지하는 반복을 요구한다. 유지 작용도, 그것이 창설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또한 다시 창설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립 작용과 유지 작용 사이에는 엄밀한 대립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둘 사이의 차연적 오염이라고 내가 부르는 것(그리고 벤야민은 그렇게 명명하지 않는다)만이, 이것이 이끌 수 있는 모든 역설을 수반하여 존재한다.[각주:24]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은, 그것이 어떤 법체계를 정립하는 순간에, 따라서 어떤 입헌적 시스템을 창설하는 순간에, 스스로의 반복 가능성을 법권리의 구조 속에 기입한다. , 어떤 입헌적 시스템이 창설된 후에 그것을 유지하는, 법유지적 폭력 혹은 피구성적 권력에 있어서, 법정립적 폭력 혹은 구성적 권력이 비현전적인 방식으로 반복되고 대리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외상태에서 구성적 권력은, 피구성적 권력과 구별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행사한다. 그것은 법률이 아니지만 법률의 힘을 지닌 행정적 수단(예를 들어 정부명령, 행정명령 등)에 의해, 입헌적 수단을 매개하지 않고 법체계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법정립적 폭력과 법유지적 폭력 사이의, 구성적 권력과 피구성적 권력 사이의 이 양의성, 혹은 양자 사이의 차연적 오염, 데리다는 벤야민을 인용하면서 유령적(gespenstisch) 혼합체라고 부르고, “비열하고 천시해야 할 것이며,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한다.[각주:25] 데리다가 구성적 권력과 피구성적 권력의 양의성을 유령적이라고 부른 것은, 피구성적 권력에 있어서 구성적 권력이 반복되고 대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리성이 결코 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령성이란 어떤 신체가 그것 자체에 대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결코 현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그 신체는 사라짐으로써 나타나며, 혹은 그것이 대리하고 있음에도 사라짐으로써 나타난다. , 그 신체는 자신과는 다른 것을 위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이처럼 두 개의 폭력 사이에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창설 작용과 유지 작용이 서로 오염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비열한 것이다.”[각주:26] 따라서 피구성적 권력이 구성적 권력을 반복하고 대리하면서도 구성적 권력임을 분명히 선언하지 않고 있는 사태는, 구성적 권력의 비현전성에 있어서 유령적이며, 그 때문에 극히 비열한 사태이다. 이런 사태가 제2차 아베정권이 행한 해석 개헌헌법 개정을 행하는 구성적 권력임을 선언하지 않고 각의결정이라는 행정적 조치에 의해 헌법을 실질적으로 개정해버리는 것 에 고스란히 들어맞는다는 것은 더 이상 덧붙일 필요도 없다.

이런 예외상태에 관해 더 나아가 고찰하기 위해 아감벤의 예외상태를 참조하자. 아감벤은 이 책에서 데리다의 =법률의 힘을 언급하면서, 이 텍스트가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이 =법률의 힘이라는 제목의 의미에 관해 논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정적인 것은 기술적인 의미에서 법률의 힘(force-de-loi)’이라는 어구는 근대의 학설에서도 고대의 학설에서도 법률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집행권력이 몇 가지 경우에, 특히 예외상태에서 포고하는 것을 인정해주는 듯한, 바로, 이른바 법률의 힘을 지닌 정부명령(décrets)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 법의 전문 용어로서의 법률의 힘이라는 개념은, 규범의 구속력(vis obligandi) 혹은 적용 가능성을 그 형식적 본질로부터 분리하고, 형식적으로는 법률이 아닌 정부명령이나 조치나 방책이 그대로 여전히 법률의 을 획득한다는 것을 정의하고 있다.[각주:27]

 

아감벤에 따르면, 법학에서 법률의 힘(force de loi)’이라는 개념은 법률 자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예외상태에서 집행권력이 포고하는 정부명령, 행정명령 등의 행정적 수단을 의미한다. , ‘법률의 힘이란, 집행권력이 법률의 힘을 지닌 법률 이외의 수단(행정적 수단)에 의해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데리다가 =법률의 힘에서 말했던, 피구성적 권력이 구성적 권력을 대리한다는 것, 혹은 양자의 유령적 혼합체에 상당한다. 이로부터 아감벤은 예외상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외상태에 관해 논의하고 연구해 온 가운데, 우리는 집행 권력에 의한 법적 결정들과 입법권력에 의한 법적 결정들 사이의 이런 혼동의 수많은 예와 마주쳤다. 이런 혼동이야말로 이미 봤듯이, 예외상태의 본질적 성격의 하나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예외상태에 고유한 능력은, 지금까지 너무도 강조되었던 권력들의 혼동에 있다기보다는 법률의 힘을 법률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다. 그 고유한 능력은 한편으로 규범이 효력을 지니나 적용되지 못하고(‘을 지니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 법률의 가치를 갖지 않는 행위들이 법률의 을 획득하는, ‘법률의 상태를 정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상시의 경우에 법률의 힘은 무규정의 요소로서 부유하는 것이며, 그것은 (위임독재로서 처신하는) 국가 당국에 의해서도, (주권독재로서 처신하는) 혁명조직에 의해서도 요구될 수 있는 것이다. 예외상태란 법률 없는 법률의 힘(따라서 이것은 법률의 힘(force-de-loi)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이 관건이 되고 있는 아노미적 공간이다.[각주:28]

 

, ‘예외상태법률의 힘을 법률로부터 분리하고 법률의 가치를 갖지 않는 행위들(행정적 수단)법률의 힘을 획득하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통치권력이 기존의 법체계를 무화하고, 법률 없는 법률의 힘’(아감벤은 이것을 법률의 힘(force-de-loi)’이라고 고쳐 말한다)이 통치하는 무질서한 통치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아감벤은, 예외상태를 독재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되고, “법권리의 중지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외상태는 독재의 모델을 따라 권력의 완전함, 법이 충만한 상태[자주 예외상태를 특징짓는 말로서 사용되는 전권[pleins pouvoirs]’이라는 표현을 참조]로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법권리가 공허한 상태, 법권리의 공백과 중지로서 정의된다.”[각주:29] 예를 들어 슈미트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와 같은 1921년에 출판된 독재론에서 예외상태를 위임독재주권독재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려 했다. ‘위임독재란 헌법 혹은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 혹은 법질서를 중지하는 것, 즉 피구성적 권력이 법권리를 중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주권독재란 기존의 헌법에 구속되지 않고, 새로운 헌법을 구성하는 권력, 즉 구성적 권력을 가리킨다.[각주:30] 이런 개념들은 예외상태에서의 통치의 두 가지 양상을 거의 정확하게 기술한다. 그렇지만 예외상태를 독재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가령 독재자로 간주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법률적으로는 합법적으로 임명된 총리였음을 간과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예외상태를 슈미트처럼 독재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합법적 헌법의 중지라는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공법학에서는 제1차 대전 후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위기에서 생겨난 전체주의적 국가들을 독재라고 정의하는 것이 관습으로 정착됐다. 이리하여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프랑코도 스탈린도, 모두 한결같이 독재자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무솔리니든 히틀러든 법기술적으로는 그들을 독재자라고 정의할 수 없다. 무솔리니는 국왕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임명된 총리였으며, 마찬가지로 히틀러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당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된 라이히의 재상이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든, 독일의 나치즘 체제든, 이것들을 특징짓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이것들이 현행의 헌법(각각 알베르토 헌법과 바이마르 헌법)을 존속시킨 채로, 날카롭게도 이중국가라고 정의된 하나의 패러다임에 근거하며, 자주 법적으로는 정식화되지 않았으나 예외상태 덕분에 합법적 헌법과 나란히 존재할 수 있었던 두 번째의 구조물을 합법적인 헌법의 곁에 두었다는 것이다. 법학적 관점에서 이런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는 독재라는 용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게다가 오늘날 지배적이 되고 있는 통치 패러다임의 분석에 있어서도,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앙상한 대립도식은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각주:31]

 

현대적인 통치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에 관해 분석할 때, 예외상태를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버리면 오히려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의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예외상태를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도식으로부터 분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합법적 헌법의 중지, 그리고 이것과는 다른 두 번째 구조물을 합법적 헌법의 옆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

예외상태에 의해 합법적 헌법을 중지하고 집행권력이 행정적 수단에 의해 입법권력을 대리하는 것은, 삼권분립에 의한 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 상태를 파괴하고,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붕괴를 귀결시킬 것이다. 예를 들어 전간기[양차대전 사이의] 독일에서의 바이마르 체제를 생각해보자.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적인 헌법이라고 여겨진 바이마르 헌법은 그 48조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중지한다고도 형용해야 할 예외상태의 규정을 뒀다. 그 조문은 다음과 같다. “독일 제국 안에서 안전과 공공의 질서가 중대한 정도로 교란되거나 위협받은 경우에는, 라이히 대통령은 군대의 힘을 빌려서라도 안전과 공공의 질서의 재건에 필요한 수단을 취할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 라이히 대통령은 헌법 114, 115, 117, 123, 124, 153조에서 정해진 기본적 권리들을 전면적 혹은 부분적으로 중지할 수 있다.” 이 조항에 의거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대 내각은 250회 이상에 걸쳐 예외상태를 선언하고 긴급정부명령을 발포했다. 헌법 48는 수천 명의 공산당 활동가를 투옥하고 그들에게 극형을 내리기 위한 특별 법정을 설립하기 위해 이용된 동시에, 또한 많은 경우에는 독일 마르크의 하락에 대처하고 경제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도 이용됐다. 이런 예외상태의 사용은 정치적-군사적 긴급사태와 경제적 위기를 합치시키려 하는 현대의 경향에도 합치한다고 아감벤은 말한다(예를 들어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일본에서, 경제적-군사적 위기를 정치적 예외상태로 변환하는 통치수법 에너지=경제에서의 위기와 군사적 위기해석 개헌으로 변환하는 통치수법 을 참조하라).[각주:32] 더욱이 1930년대 이후, 독일은 항상적으로, 48조를 발동한 대통령 독재의 상태에 있으며, 최종적으로 1933, 나치 체제가 의회에서 전권 위임법을 통과시키자, 바이마르 헌법은 그것이 존재한 채로 완전히 중지된다.[각주:33] 이처럼 바이마르 헌법 48조의 예외상태의 규정은, 바이마르 헌법이라는 당시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붕괴시키고, 전간기 독일의 민주주의 자체를 붕괴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일본으로 시점(視點)을 옮기고, 자민당의 헌법개정초안에 있는 긴급사태조항이 바이마르 헌법 48조와 완전히 같은 성질의 규정이라는 것에 특별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조항을 아래에서 인용한다.

 

98(긴급사태의 선언) : 내각총리대신은 우리나라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 내란 등에 의한 사회질서의 혼란, 지진 등에 의한 대규모의 자연재해, 기타 법률에서 정하는 긴급사태에 있어서,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각의를 통해 긴급사태를 선언할 수 있다.

99(긴급사태의 선언의 효과) : 긴급사태가 선언됐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내각은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정부명령을 제정할 수 있는 것 외에, 내각총리대신은 재정상 필요한 지출, 기타 처분을 행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필요한 지시를 할 수 있다.

3 : 긴급사태가 선언됐을 경우에는, 누구라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선언과 관련된 사태에 있어서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을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조치에 관해서 발포되는 지역, 기타 공공기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이 경우에도 제14, 18, 19, 21, 기타 기본적 인권에 관한 규정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

 

이런 조항들이 긴급사태’(=예외상태)에 있어서 내각이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정부명령을 제정할 수 있다”(‘법률의 힘혹은 법률의 힘에 의한 통치를 가능케 할 수 있는)고 한 다음, “긴급사태가 선언됐을 경우에는, 누구라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해당 선언과 관련된 사태에 있어서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을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조치에 관해서 발포되는 지역, 기타 공공기관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점에, 우리는 기시감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조문에서는, 그 후에 기본적 인권에 관한 규정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는 문장이 이어지지만, 실제로는 자민당 헌법초안을 보충하는 Q&A에는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이라는 커다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이를 위해 필요한 범위에서 보다 작은 인권이 어쩔 수 없이 제한될 수 있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긴급사태에서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이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이라는 커다란 인권을 지키기 위해제한될 가능성이 높다.[각주:34]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예외상태규정을 헌법에 명문화함으로써 헌법을 무화하는 헌법개정(현행 헌법에 대한 긴급사태 조항의 부가도 포함한)을 절대로 거부해야 한다.

그렇지만 법률의 힘에 의한 기존 헌법의 중지라는 통치 수법은 이런 긴급사태조항에 의하지 않더라도, 이미 해석 개헌이라는 수법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외상태는 더는 예외적 조치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통치기술로서 항상 등장하게 됐을 뿐 아니라, 법질서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그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있다.”[각주:35] 아감벤이 벤야민을 참조하면서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라고 형언하는 것은 예외상태”(법체계를 중단, 정지시키고 그것과는 다른 구축물을 그 곁에 두는 것)시큐리티(security)’(넓은 의미에서의 안전뿐 아니라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안전보장도 의미하는)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고, 일반적인 통치에서의 통치기술로서 받아들여지고 행사되는 것이다. ‘예외상태의 유령은 전전(戰前)과 같은 형태로는 회귀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번째에는 모습을 바꾸며, 시큐리티 확보라는 미명 아래서의 법체계의 중지 혹은 법률의 힘으로서, 일반적인 통치기술로서 회귀한다. ‘해석 개헌[각주:36]이 출현시키는 예외상태의 규칙화[일상화, 상태화]는 기존 헌법의 곁에 그것과는 다른 구축물을 두고, 행정적 수단에 의해 헌법을 공백으로 만듦으로써[헌법에 공백을 창출함으로써] 입헌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붕괴를 귀결시킬 뿐인, 극히 위험한 통치기술인 것이다.

 

 

  1. Walter Benjamin,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in Gesammelte Schriften, Bd. I-2, Suhrkamp, 1999, S.697. “비억압자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상태’가 규칙[常態]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Die Tradition der Unterdrückten belehrt uns darüber, daß der »Ausnahmezustand«, im dem wir leben, die Regel ist].” [옮긴이] 일본어로는 예외상태의 ‘상태화’로 표기되었으나 사전적 의미에는 ‘규칙화’가 가장 충실하지만, 일상적인 의미를 담아내려면 이를 ‘일상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법과의 관계라는 측면이 지워져버릴 위험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규칙화[일상화, 상태화]’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2. 다음을 참조. 高橋哲哉, 『犠牲のシステム──福島・沖縄』, 集英社新書, 2012년.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Volume II (2003-2004), Galilée 2010, p.30. [본문으로]
  4.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Duncker & Humblot, 1922, 8. Auflage, 2004, S.13. [본문으로]
  5. Carl Schmitt, Der Begriff des Politischen, Duncker & Humblot, 1932, 3. Auflage, 1963. 본서에서 인용할 때에는, 데리다의 슈미트 해석을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독일어 원서를 참조하면서도 주로 『우정의 정치』에서 데리다가 한 프랑스어 번역본에서 인용했다. 출전은 본문 속에 독일어 원서를 표기한다. [본문으로]
  6. Jacques Derrida, Politiques de l’amitié, Galilée, 1994, p.104. [본문으로]
  7. 다음에서 인용. Ibid., p.105. [본문으로]
  8. Ibid., p.105. [본문으로]
  9. 다음에서 인용. Ibid., p.108. [옮긴이] 공적과 사적의 희랍어는 각각 ‘polemios’과 ‘echthros’이다. [본문으로]
  10. Ibid., pp.142-143. [본문으로]
  11. 다음에서 인용. Ibid., p.147. [본문으로]
  12. 다음에서 인용. Ibid., pp.138-139. [본문으로]
  13. 다음에서 부분적으로 인용. Ibid., p.152. [본문으로]
  14. Ibid., p.156. [본문으로]
  15. Ibid., p.155. [본문으로]
  16. Ibid., p.156. [본문으로]
  17. Ibid., p.149. [본문으로]
  18.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의 ‘예외상태’ 개념에 관해, 상이한 관점에서 논한 적이 있다. 『新自由主義と権力──ブーコーから現在性の哲学へ』人文書院, 2009년, 第三章 「主権権力の強化と例外状態の常態化」[사토 요시유키, 3장. 「주권권력의 강화와 예외상태의 일상화」, 『신자유주의와 권력』, 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2014]를 참조. [본문으로]
  19.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Galilée, 1994. 본서의 제목은 『법의 힘』으로 정착되어 있으나, 본고에서는 «force de loi»라는 법학적 개념을 “법률의 힘”으로 번역할 필요 때문에, 본서의 제목을 『법의 힘=법률의 힘』으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20. 우리는 다음의 데리다의 지적에 의거하면서, Gewalt라는 단어를 폭력=권력으로 번역하고, 법정립적 폭력을 구성적 권력과, 법유지적 폭력을 피구성적 권력과 거의 동등한 개념으로 생각한다. “Gewalt란 ‘폭력’이지만, 또한 ‘정당한 힘(force légitime)’, 즉 권위지어진=인가된 폭력(violence autorisée), 합법적 권력(pouvoir légal)이기도 하다. Staatsgewalt, 즉 국가권력이라는 표현할 때가 이것에 해당된다”(Ibid., p.74). [본문으로]
  21. Ibid., pp.69-70. [본문으로]
  22. 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Gesammelte Schriften, Bd. II-1, Suhrkamp, 1999, S.129. “법유지적[법보존적] 폭력은 반드시 그 지속의 과정에서, 제반 적대하는 대항폭력을 억압하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있어서 대리되는(repräsentiert) 법정립적 폭력도, 자신으로부터 간접적인 방식으로 약화시켜 버린다.” [본문으로]
  23.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89. [본문으로]
  24. Ibid., pp.93-94. [본문으로]
  25. 데리다가 들고 있는 것은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좇아 근대 경찰의 예이다. “한계의 부재라는 성격을 근대 경찰에 부여하는 것은, 감시와 단속의 테크놀로지 ― 그것은 이미 1921년에는, 섬뜩한 방식으로 공사(公私)의 생활 전체와 서로 포개지고, 그것에 신들리게 됐다(오늘날 이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관해 우리는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뿐이 아니다. 이 성격을 근대 경찰에 부여하는 것은 또한 경찰이란 국가라는 것, 경찰이란 국가의 유령이며, 경찰을 강력하게 비난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것(res publica)의 질서에 선전포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찰은 오늘날에는 법률을 힘에 의해 적용하는(enforce) 것만으로는, 따라서 법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법률을 발명하고, 행정 명령(ordonnance)을 공표하고 법적 상황이 명백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 개입하고 시큐리티를 보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법적 상황이 확실하지 않을 때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있는 것이다. 경찰은 법률의 힘(force de loi)이며, 법률의 힘을 지닌다. 경찰이 비열한 것은, 그 권위에 있어서, ‘법정립적 폭력과 법유지적 폭력 사이의 분리가 중지되기(혹은 지양되기[aufgehoben])’ 때문이다. 이 지양(Aufhebung)이라는, 경찰 자체가 의미하는 것에 있어서, 경찰은 법을 발명하고 스스로를 «rechtsetzende»인 것, 즉 입법하는 것으로 만든다. 경찰은 법권리에 미확정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법권리를 부당하게 찬탈한다. 설령 경찰이 법률을 발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현대에서의 입법자의 하나로서 ― 현대의 [유일한] 입법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 행동한다. 경찰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즉 어디서나, 그리고 바로 여기서도, 이제 두 개의 폭력, 즉 법유지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을 구별지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양의성이 비열하고 천시해야 할 것이며, 언어도단인 것이다”(Ibid., pp.102-103). 다음도 참조. 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in Gesammelte Schriften, Bd, II-1, S.189. [본문으로]
  26.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102. [본문으로]
  27.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Seuil, 2003, pp.66-67. [본문으로]
  28. Ibid., pp.67-68. [옮긴이] 원래 ‘법률’에 X표를 해야 하나, 프로그램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표기했다. [본문으로]
  29. Ibid., p.82. [본문으로]
  30. Carl Schmitt, Die Diktatur, Duncker & Humblot, 1921, 7, Auflage, 2006, S.133-134. [본문으로]
  31.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p.82. [본문으로]
  32. 이런 경제적-군사적 ‘위기’의 정치적 ‘예외상태’로의 변환을 배경으로 하여 제2차 아베정권은 경제계로부터의 요망에 부응해, 무기수출의 원칙적 금지를 정했던 “무기 수출의 3원칙”을 폐지하여 “방위 장비 이전 3원칙”(‘방위 장비’라는 익숙하게 들은 말은 ‘무기’를 바꿔 말한 것)을 각의에서 결정하고, 무기수출을 해금했다. 그것은 군사적 ‘위기’를, 군수산업의 수출 확대(그것은 원전의 수출 확대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같은 재벌계 기업이 그 주체이기 때문이다)에 의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극복으로 변환하는 시도이다. ‘해석 개헌’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시도에 이바지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수산업이 동원되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집단적 자위권 집단적 안전보장이 해금된다는 군사-자본주의적 논리에는 특단의 유의가 필요하다. 또한 이 점에 관해서 히로세 준 씨의 트위터에서의 발언(http://twitter.com/flux_de_merde/status/496847829445259264)에서 시사를 얻었다. [본문으로]
  33.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pp.30-32. [본문으로]
  34. 현행 헌법과 자민당 헌법초안을 비교하고, 후자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해설한 아래의 사이트의 서술은, 극히 유익하다. 「자민당 헌법초안의 조문 해설」 http://satlaws.web.fc2.com/92html. 또한 「일본국 헌법개정초안 Q&A」는 다음에서 관람 가능. http://www.jimin.jp/policy/pamphlet/pdf/kenpou_qa.pdf. [본문으로]
  35. Giorgio Agamben, État d’exeption, trad. fr., p.18. [본문으로]
  36. 마지막으로 ‘해석 개헌’의 헌법 해석(데리다적 의미에서의 ‘텍스트 해석’)의 문제에 관해 데리다의 사상에 의거하면서 부연하고 싶다. 진부해진 탈구축 개념의 설명으로서, 텍스트 해석은 원본의 문맥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따라서 반드시 역사적 문맥에 의해 규정될 필요는 없다고 하는 변종이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전혀 데리다적이지 않으며, 그런 극단적인 ‘텍스트주의’가 역사수정주의에 대해서도 부담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설명은 데리다의 사상을 완전히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선, 사실적인 헌법해석으로서, 1972년의 정부 견해(「집단적 자위권과 헌법 사이의 관계에 관한 정부 자료」)에 기반을 두고 “안전보장환경의 변화”를 따라 집단적 자위권과 집단적 안전보장의 행사를 인정한다는 제2차 아베정권이 행한 해석은, 1972년의 정부견해가 집단적 자위권의 보유를 인정하면서도, 그 행사는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결론짓고 있는 이상, 완전히 파탄 났다. 더욱이 철학적인 문맥에서는, 데리다 자신이 『법=법률의 힘』에서 “탈구축은 정의이다”라고 단언함으로써, 탈구축이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모종의 ‘정의’, 즉 급진민주주의(‘도래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다가서는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평화주의, 즉 전쟁의 기피는 바로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른 것이다. 또한 이 점에 관해, 히로세 준과의 개인적인 대화로부터 시사를 얻었음을 밝히고 감사드린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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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서 사건의 생산으로

: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들뢰즈=가타리적 정치

出来事から出来事生産: アンチ・オイディプスにおけるドゥルーズ=ガタリ的政治

 

사토 요시유키(佐藤 嘉幸)

思想(1087), 7-32, 2014-11, 岩波書店

(http://ci.nii.ac.jp/naid/40020237216/)

 

* 프랑스어 원문 및 한국어 번역본 대조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2017년 3월 24일]



1.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또한 들뢰즈 철학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위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본고를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고 싶다. 그런 질문을 던질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오늘날 들뢰즈의 철학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모종의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알랭 바디우는 자신의 들뢰즈론인 들뢰즈 : 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심지어 들뢰즈의 존재론이 다양성의 존재론이 아니라 여럿을 하나에 구속시키는 존재론, 말하자면 존재론적 파시즘[각주:1]이라고 논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들뢰즈의 근본 문제란 분명히 여럿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여럿의 사유를 <하나>의 쇄신된 개념에 접어넣는 것이다.”[각주:2]

 또 슬라보이 지젝은 바디우의 강한 영향 아래서 작성된 들뢰즈론인 신체 없는 기관에서 들뢰즈가 혼자서 쓴 의미의 논리에서의 정적 생성의 탐구, 즉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높이 평가하고, 반대로 들뢰즈=가타리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의 최악의 책이라고 단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들뢰즈 자신의 텍스트 속의 그 어떤 것도 결코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적시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들뢰즈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들뢰즈 홀로의 작업에서는] 매우 엘리트주의적인 필자이며, 정치에는 무관심하다.”[각주:3]

바디우와 지젝이 들뢰즈를 평가하는 전략은 매우 닮았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들뢰즈 홀로의 작업, 특히 그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평가하는(혹은 단죄하는) 것이다.[각주:4] 그런 전략은 바디우와 지젝이 둘 다 라캉과 매우 가까운 이론적 입장postion에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바디우와 지젝은 정치적 라캉주의라는 그들의 이론적 입장에서 라캉 이론 혹은 정신분석 자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들뢰즈 철학에서 전면적으로 삭제한다는 전략을 선택하고,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정치성을 완전히 부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는 반대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회체와 주체의 생성변화의 탐구를 높이 평가한다. 들뢰즈=가타리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야말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의 정치성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책이며, 그 가치는 이 책이 주체뿐 아니라 사회체 자체의 생성변화를 사고했다는 것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는 들뢰즈의,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최고의 도달점이라고 위치짓는다.

여기서 또 다른 한명, 다른 철학자에 의한 들뢰즈 비판을 다뤄보자. 그것은 들뢰즈파 철학자로 간주되고 실제로 바디우나 지젝보다 들뢰즈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 의한 비판이다.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와 가능적인 것 : 정치에 있어서 비주의주의에 관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주로 들뢰즈=가타리의 논고 68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각주:5]를 참조하면서, 들뢰즈에게서의 사건개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사건에 응답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회는 혁명적으로 되기에 있다. 이것만이 치욕을 불식하는 것, 혹은 참기 힘든 것에 응답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런 명법은 전혀 주의주의적인 게 아니다. 이제 의무 존재에서 존재로 복귀하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것을 어떤 외적이고 초월적인, 따라서 전제적이고 무능한 판단에 종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의지는 이제 사건에 선행하지 않으며, 대립은 세계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지, 어떤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에서 작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사건에 응답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세계 속에서, 더 이상 그 세계를 참을 수 없는 한에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책임=응답 가능성이, 통치나 주요한 주체들의 그것과는 이질적인, 고유하게 혁명적인 책임=응답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일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계획도, 어떤 집단의 이해도 대표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이 이해는 바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방향=의미에서 변화하고 있는지를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을 앞에 두고 책임=응답 가능성을 지고 있는 것이다.[각주:6]

 

한편으로 사건은 견디기 힘든 것의 새로운 의미를 출현시킨다(잠재적 변동). 다른 한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의 이 새로운 의미는 어떤 창조행위를 호소한다. 그 창조행위란 변동에 응답하는 것이며, 새로운 이미지의 도면이며, 문가 그대로 가능한 것을 창조한다(현동적 변동). 가능한 것을 창조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집단적 공간-시간적인 배치arrangement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에 의해 창조된 삶 자체의 새로운 가능성에 응답하는 것이며, 혹은 그 가능성의 표현이다.[각주:7]

 

주라비슈빌리에 따르면, 들뢰즈적 정치(“혁명적으로 되기”)란 주의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선, 세계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의미가 산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산출된 새로운 의미=사건에 응답하는 것이 들뢰즈적 정치이다. 그때 사건이란 새로운 의미(‘견디기 힘든 것’)가 산출되는 것이며, 물질적인 것의 효과로서 새로운 의미라는 초월론적인 것이 산출되는 것이다(잠재적 변동).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산출된 새로운 의미, 즉 사건에 응답함으로써 주체를 변용시키고 집단적인 공간-시간적 배치arrangement를 변용시키는 것(현동적 변용)이 들뢰즈적 정치라고 간주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역설이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적 정치란 사건을 기다리고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의미를 주체가 수용하고 새로운 의미에 의해 주체가 변용된다는 것 이외를 의미하지 않을까?

 주라비슈빌리의 도발적인 들뢰즈 비판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주라비슈빌리의 가설은 들뢰즈 홀로의 철학, 특히 의미의 논리에는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과는 달리,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다.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란 사건에 의한 세계나 주체의 수동적 변용을 다루는 철학이 아니라, 어떻게 사건을 생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철학이다.

 『의미의 논리에서의 사건의 개념을 돌이켜보자. 이 책에서 사건이란 물체적인 것의 효과로서 바로 초월론적인 의미가 산출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물체에 대한 원인이지만, 무엇의 원인인가? 물체는 일정한 사물의 원인, 전혀 다른 본성의 원인이다. 그 효과는 물체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한다면 비물체적인것이다. 효과는 물리적 형질, 특성이 아니라, 논리적 혹은 변증론적 속성이다. 효과는 사물이나 사물의 상태가 아니라 사건이다. 효과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효과가 존속한다거나 존립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효과는 사물이 아닌 것이나 실재하지 않는 존재자성에 걸맞은 최소의 존재를 갖고 있다. 효과는 실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효과는 능동자나 수동자가 아니라 능동과 수동의 결과이며, ‘비정한, 비정한 결과이다. 효과는 살아 있는 현재형이 아니라 부정형(不定形)이다. , 한계 없는 아이온, 과거와 미래로 무한하게 분할되고, 항상 현재를 벗어나는 생성이다.”[각주:8] 들뢰즈가 즐겨 인용하는 에밀 브루이에의 예를 빌린다면, “칼이 새로운 고기를 썰, 그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속성, 의미가, 즉 생성변화가 생산된다. , “칼이 새로운 살을 썬다는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의미, 생성변화가 산출되는 것이다.[각주:9] 들뢰즈가 사건이라고 부른 것은, 그런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새로운 의미의 생산이며, 그것은 초월론적인 것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그것을 정적 발생(genèse statiqu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의 후반인 제27계열에서 갑자기 동적 발생(genèse dynamique)”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초월론적인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제반 특이성들로부터 주체라는 존재자가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의미의 논리에서는 동적 발생은 이제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인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 동적 발생의 논리를 더욱 추구하고,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의 철학을, 사건의 생산의 철학을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 경우의 사건의 생산이란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 혹은 생성변화에 머물지 않고 사회라는 현실적인 것의 생성변화도 함의하고 있다.

 이 점을 둘러싸고 네그리=하트가 커먼웰스에서 행하는 푸코와 바디우의 사건 개념의 비교가 참고가 된다.

 

이 시점에서 푸코에 의한 사건 개념과 알랭 바디우가 제창한 그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을 진리의 장이라고 하며, 그것을 현대철학의 중심적 문제로서 제기하고, 커다란 공헌을 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삭감할 수 없는 다양성, 달리 말하면 다의적인성질을 갖는 사건은, 단순한 판단의 형식으로부터 진리의 심문을 빼낸다. 이 점에서의 바디우와 푸코의 차이는 두 사람이 사건에 관해서 시간적으로 어디에 관심을 기울였는가라는 것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디우에게서는 사건(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프랑스 혁명,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을 빈번하게 예로 들고 있다)이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주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의 일이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그 사건에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개입과, 그 사건에 지속적으로 계속 언급하는 충실성과 유-생성적[類生成的] 과정에 집중한다.

이에 반해 푸코는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production and productivity of the event)을 강조하며, 거기에는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향한 주시가 필요해진다. 말하자면 사건은 내적인 존재이며, 그것을 가로지르는 전략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바디우의 접근법으로는 푸코가 사건의 내부로부터 강조하고 있는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파악할 수 없다. 실제로 사건에 대한 소급적 접근법으로는 봉기 활동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길은 열려 있지 않다. 봉기 활동은 역사적 과정의 안쪽에서 혁명적 사건을 창출하고 지배적인 정치적 주체성으로부터 이탈하려고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내재적 논리 없이는 그저 바깥쪽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그것을 믿어야 할지 아닐지의 문제로서 긍정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으며, 결국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일반적으로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라고 간주되는 역설을 반복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각주:10]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바디우의 사건 개념은 (프랑스 혁명, 5월 혁명 같은) 혁명적인 사건에 대해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에 충실하기를 계속하는 것을 함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에게서의 사건이란 항상 과거의 것일 수밖에 없다.[각주:11] 반면 푸코에게서의 사건 개념은 사건의 생산과 그 생산성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건의 내부에서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보는 것이다. 푸코의 사건 개념은 자유와 역능에 의거해서 도래할 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라고 네그리=하트는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들뢰즈=가타리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건 개념을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바디우에게서 사건이란 역사상의 단순한 우연적 점으로서만 정위될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오히려 사건에 질을 부여하고 사건을 상황 속에 포함되도록 하는 부위의 위에 주사위를 던지도록 하는 개입, 즉 사건을 만들어내는역능(puissance de «faire» l’événement)”이야말로 중요하다.[각주:12]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했다고 한다면, 거기서의 사건 개념은 바로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푸코의 사건 개념과 그대로 겹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바로 강도적인 욕망을 매개로 한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에 대해,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에 대해 사고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사건(événement)” 대신 절단(coupure)”이라는 말을 사용하고,[각주:13] 심지어 과정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다음의 짧은 한 구절에 주목하자.

 

정신의학의 실효적인 정치화만이 우리를 이것들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반정신의학은 레인과 쿠퍼와 더불어, 이 방향으로 사실은 멀리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은 이 정치화를, 과정 자체의 어휘보다도 오히려 구조와 사건의 어휘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각주:14]

 

왜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정치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과정(porcess)’이라는 개념을 특권화하고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일까? 여기서 포인트가 되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사건개념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개념을 구조개념에서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면, 구조 개념보다 오히려 기계욕망하는 생산 과정개념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과정이란 욕망의 흐름의 과정이며, 욕망의 흐름의 교통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분열증적 과정이란 우리를 욕망하는 생산으로부터 떼어놓는 벽이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욕망의 흐름을 교통시키는 것이다”(AO, p.434). 욕망하는 생산 과정은,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사건을 구조로부터 생각한다면, 정적인(statique) 구조의 재생산과 그 절단이라는 사고에 스스로를 한정하게 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성변화의 과정을 사고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부단한 생성변화의 과정이야말로 사건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생산은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과 함께 사고되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세계의 모든 것은 생산과 소비에 의해 시시각각 계속 변용하는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이며, 정치 또한 욕망하는 생산 과정으로부터 사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관점(perspective)에 의거함으로써 정치에 자유와 역능의 관계를 도입할 수 있고, 권력에 의한 주체와 세계의 재생산 과정에 대해 어떻게 사건을, 혹은 절단을 도입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정치를 정적 구조의 재생산과 그 재생산의 절단이라는 구조주의적 문제설정으로부터 생각하게 되며, 사건을 사후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관해 생각할 수 없다. 정치를 구조와 사건이 아니라 과정과 절단혹은 구조와 절단으로부터 사고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바로 사건의 생산에 관해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II. 욕망 기계들과 욕망하는 생산

여기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건의 생산전략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본절에서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생산에 대해, ‘과정기계라는 개념에서부터 고찰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본적인 테제는 세계의 모든 것은 욕망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 책의 서두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하고 있다. 중단하지 않고, 혹은 단속적으로. <그것>은 호흡하고 과열하여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애무한다. <그것>이라고 불러 버리는 것은 무슨 오류일 것이다. 도처에서 기계가 있다. 결코 은유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연결이나 접속을 수반하는 다양한 기계의 기계가 있다. 기관기계가 원천기계로 연결된다. 어떤 기계는 흐름을 발생시키고, 다른 기계는 흐름을 절단한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이며, 입은 이 기계에 연결되는 기계이다. 거식증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하는 기계(천식의 발작)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평범한 대용 작업을 하서는, 각각에 자신의 작은 기계를 조립하고 있다. 에너지 기계에 대해 기관 기계가 있고, 항상 흐름과 절단이 있다. 슈레버 공소원장은 엉덩이 속에 태양광선을 반짝이다. 이것은 태양항문이다. <그것>이 기능한다고는 확신하라. 슈레버 공소원장은 뭔가를 느끼고, 뭔가를 생산하며, 그리고 이것에 관해 이론을 만들 수 있다. 뭔가가 생산된다. 이 뭔가는 기계가 초래하는 결과이며,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AO, p.7/()15-16)

 

그것이란 에스’, 즉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무의식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심적, 물리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며, 욕망의 흐름이다. 세계는 제반 욕망의 흐름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며, 그런 무수한 흐름의 접속을 들뢰즈=가타리는 욕망 기계들이라고 부른다. 욕망 기계들은 연결과 분리를 반복하며,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생산과 소비를 반복한다.

 그러면 그때, 앞서 언급한 과정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과정이란 생산의 과정, 즉 욕망적 주체의 과정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분열증적 생산의 과정이라고 바꿔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욕망적, 분열증적 생산의 과정이란 소비, 등록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생산은 그 생산물의 등록(분배), 소비로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생산등록소비생산).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 , 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이다. “생산은 그대로 소비이며, 등록이다. 등록과 소비는 직접적으로 생산을 규정하고 있지만, 더욱이 생산 자체의 한복판에서 생산을 규정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생산의 생산, 즉 능동과 수동의 생산이며, 등록의 생산, 즉 분배와 지표의 생산이며, 소비의 생산, 향락과 불안과 고통의 생산인 것이다. 모든 것은 바로 생산이기 때문에, 등록은 곧바로 소비되고 소진되며, 이 소비는 곧바로 재생산된다”(AO, pp.9-11/()19-20). 이런 의미에서 자연과 인간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AO, p.10/()20). 자연은 인간을 생산하고 인간은 자연을 생산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에너지-생산의 기계의 연쇄이다.

 둘째,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임상 실체로서의 분열증으로부터 구별해야 한다. “과정은 목표나 목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과정 자체를 무한하게 계속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과정의 목적화, 혹은 과정의 무한한 계속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과정의 너무 빠른 무모한 정지와 똑같은 것이며, 그것은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인공적 분열증자, 자평증화되어 폐인이 되고, 임상 실체로서 산출되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조작이나 다름없다. 분열증적 특성이나, 그 임상 실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열증이란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이며,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이루는 실재로서의 근원적인 보편적 생산이다”(AO, p.11/()21).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란 욕망하는 생산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 기계들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생산성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라캉의 정의에 따르면, 분열증이란 대문자의 타자가 배제되고 실효되어 있기 때문에, 상징계가 부서졌고 그 때문에 소문자 타자가 무한하게 증식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은 분열증이 대문자 타자를 결여하고, 그 때문에 소문자 타자를 무한하게 증식시켜가듯이, 초월적 심급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을 내재평면 위에 횡단적으로 증식시켜가는 것이다.[각주:15]

 그러나 다른 한편, 과정 자체를 목적화해서는 안 된다. 과정의 목적화, 혹은 그 정지는 욕망의 자연스런 흐름을 해치며, 임상 실체로서의 분열증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으로서의 분열증과, 그 목적화나 정지로서의 임상 실체의 분열증을 구별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흐름의 생산을 목적화하거나 정지하여 임상실체로서의 분열증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과정이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 혹은 분열증적 과정일 때,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라는 기묘한 개념은, 거기서 어떤 역할을 맡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기관 없는 신체란 욕망 기계들에 대립하는 강도 제로(0)로서의 죽음 본능이다.

 

이 기관 없는 충실 실체는 비생산적인 것, 불모인 것이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있었던 것, 소비할 수 없는 것이다. 앙토냉 아르토는 그 어떤 형식도, 그 어떤 형상도 없이 존재했을 때, 이것을 발견했다. 죽음의 본능[instinct de mort], 이것이 이 신체의 이름이다. 이 죽음에는 모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욕망은 그것도 또한, 죽음도 또한 욕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충실 신체는 욕망의 부동의 동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삶의 기관들이 작동하는 기계(working machine)이기 때문에 욕망이 삶을 욕망하게 되게 되듯이.(AO, p.14/()26)

 

기관 없는 신체는 강도 제로(0)죽음 본능이며, 스스로는 생동하지 않고, 욕망을 생동하게 하는 욕망의 부동의 동자이다. 들뢰즈가 자흐 마조흐 소개에서 죽음 본능(instinct de mort)’을 경험적인 파괴욕동으로서의 죽음 충동(pulsion de mort)’과는 다른, 순수한 초월론적 원리라고 정의했다는 것을 상기해두자.[각주:16] 그것은 욕망 기계들에 운동을 부여하고, 욕망에 흐름을 부여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죽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 본능으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란 순수한 초월론적 원리이며, 경험적 소여로서의 욕망 기계들에 대립한다. 강도 제로의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 기계들을 등록하는 등록 표면 혹은 내재 평면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욕망 기계들이 모든 은유와 무관하게 진정으로 기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점에서일까? 들뢰즈=가타리는 욕망 기계들의 특성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접속적 종합, 생산의 생산이라는 특성이다. 기계는 여러 가지 물질적 흐름에 접속하며, 그 흐름을 절단, 채취한다. “우선 첫째로, 무릇 기계는 모두 연속된 물질적 흐름(즉 질료)과 관련되어 있으며, 기계는 이 흐름을 잘라낸다. 절단은 연합하는 흐름으로부터 뭔가를 채취하는 작동을 한다. 예를 들어 항문과 이 항문이 절단하는 똥의 흐름과의 관계. 입과 젖의 흐름과의 관계. 심지어 입과 공기나 음의 흐름과의 관계. 페니스와 오줌의 흐름, 그리고 또한 정자의 흐름과의 관계(AO, pp.43-44/()72-73). 예를 들어 입 기계는 모유 기계에 접속되고, 이로부터 젖의 흐름을 잘라내고 채취한다(채취-절단). 기계가 접속하는 여러 가지의 물질적 흐름 그 자체도 또한 다른 기계에 의해 생산되는 이상, 기계와 흐름의 접속은 기계와 기계의 접속이기도 하다(기계의 기계). 또한 기계와 기계의 접속은 반드시 다른 흐름을 생산하지만, 그것은 세 번째의 기계에 접속하며 채취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와 기계의 접속은 무한하게 연속된 흐름이기도 하다(생산의 생산). 욕망 기계들 상호 접속의 접속은 욕망의 생산성 자체를 생산한다. 이 세계에는 부분 대상으로서의 욕망 기계들과 욕망의 흐름의 다양성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 기계들이 여러 가지 욕망의 흐름들에 접속하고, 그것을 채취하고 스스로도 욕망의 흐름을 생산하는 것, 즉 생산의 작동을 끊임없이 생산물에 접목해가는 것, 이것이 접속적 종합, 생산의 생산이라는 욕망 기계들의 근원적 특성이다.

 둘째, 이접적 종합, 등록의 생산이라는 특성이다. 모든 기계는 그 안에 일종의 코드를 짜넣고 있지만, 그 코드는 매우 다양한 단편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단편들은 코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고 각각 다른 기계에 접속되며, 그로부터 잉여가치(코드의 잉여가치)를 끌어낸다(이탈-절단). 그 예로서 거론되는 것이 말벌과 난초의 코드의 접속과, 그것에 의한 코드의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난초는 말벌이 꽃가루를 수술에서 암술로 운반하지 않고는, 자신의 재생산을 행할 수 없다. 그래서 난초와 말벌의 생식기를 본 따 말벌의 이마주가 되며, 말벌의 코드와 접속되며, 그로부터 수분과 재생산이라는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각각의 연쇄는 다른 여러 가지 연쇄의 단편을 포착하고 이로부터 잉여가치를 끌어내는데, 이것은 바로 난초의 코드가 말벌로부터 그 모양[]추출하는듯하다. 이것은 코드의 잉여가치의 현상이다”(AO, p.47/()77-78).[각주:17] 이런 의미에서 욕망 기계와 다른 욕망 기계의 횡단적 접속에 있어서, 기계 사이에서의 코드의 등록, 전달은 이접적(disjonctif)이며, 코드 사이의 차이는 항상 유지되고 있다. 코드의 단편은 코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며, 다른 코드와 접속되어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코드란 하나의 시니피앙 연쇄’(라캉)로는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다양체이며, 결코 단일한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니피앙의 연쇄 혹은 연쇄들을 말려들게 하는 무의식의 코드라고 하는, 저 풍부한 영역을 발견하고, 이것에 의해 분석 방식을 변용한 공적은, 라캉의 것이다(이것에 관핸 기본 텍스트는 도둑맞은 편지[「『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에크리수록]이다). 이 영역은 그 다양성을 위해서, 실로 기묘한 것이 되며, 하나의 연쇄로서, 혹은 하나의 욕망적 코드로서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된다. 이런 연쇄는 여러 가지 기호들에 의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시니피앙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기호들 자체는 시니피앙이 아니다. 코드는 일반의 언어활동보다도, 은어와 닮았고, 열린 다의적 형성체이다. 거기서 기호는 임의의 성질을 가지며, 그 지지체와는 무관한 것이다(혹은 오히려 이 지지체 쪽이 기호와 무관한 게 아닌가. 지지체란 기관 없는 신체이다). 기호는 정해진 평면을 갖지 않고, 모든 단계에서, 모든 접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각각의 기호는 자기 자신의 언어를 말하며, 다른 기호와 더불어 여러 가지 종합을 실현하지만, 이런 종합은 그 구성요소의 차원에 있어서는 간접적이기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만큼 갈수록 횡단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인 종합을 수립한다. 이런 연쇄들에 고유한 이접의 작동은 아직 배타적이 아니며, 배타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억지하는 것이나 억압하는 것의 작동에 의한다. 억지하고 억압하는 것은 지지체를 규정하고 특정한 인칭적 주체를 고정하려 한다. (AO, p.46/()76-77).

 

라캉 이론에서 시니피앙 연쇄는 특권적 시니피앙인 결여의 시니피앙(팔루스)에 의해 통제된다. 그런 결여의 시니피앙에 의한 다른 모든 시니피앙의 통제는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인칭적 주체를 조직한다. 라캉은 특권적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의 시니피앙의 정의(그것에 관해 이것 이상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음과 꼭 같다. «하나의 시니피앙, 그것은 다른 어떤 시니피앙에 대해 주체를 대리 표상하는 것이다따라서 이 시니피앙은 다른 모든 시니피앙이 그것을 향해 주체를 대리 표상하는 시니피앙이 될 것이다. 이것은 즉 이 시니피앙이 결여되어 있다면, 다른 모든 시니피앙은 아무것도 대리 표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도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대리 표상되기 때문이다.”[각주:18]하나의 시니피앙”, 즉 특권적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는 다른 모든 시니피앙을 대리 표상하고, 따라서 주체를 대리 표상한다. 라캉에게서는 이런 결여의 시니피앙을 부재의 중심으로서 고정적인 인칭적 주체가 조직화되고, 주체의 안정성이 확보된다.

 반면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코드란 시니피앙이 아니라 열린 다의적 형성체이다. 그것은 결코 특권적 결여의 시니피앙에 의해서는 통제되지 않는다. 코드란 순수한 다양체이다.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란 다양한 코드의 등록 표면에 불과하다. 그런 다양한 코드와 이것들의 접속에서 생겨나는 것은 다양체로서의 비인칭적 주체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이런 다양체로서의 비인칭적 주체라는 가정으로부터, 연접적 종합, 소비의 생산이라는 제3의 특성이 도출된다.

 

욕망 기계의 세 번째 절단은 잔여-절단 또는 잔재-절단이며, 기계의 곁에 하나의 주체를, 기계의 인접 부품으로서 산출하는 절단이다. 그런데 이 주체가 특정한 인칭적인 자기 동일성을 갖지 않으며, 또한 이 주체가, 기관 없는 신체의 미분화 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이 신체를 횡단하려고 하면, 이 주체가 단순히 기계의 곁의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 자체 분할된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흐름으로부터의 채취와 연쇄로부터의 이탈에 대응하는 부분들이, 이 부분에 각각 귀속해간다. 이리하여 주체는 자신이 통과하는 상태들을 소비하고, 이런 상태들로부터 탄생한다. , 여러 가지 부분들로 이루어진 한 부분으로서, 이런 상태들의 하나하나로부터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런 부분들 각각은 한순간에 있어서의 기관 없는 신체의 내용을 이룬다. (AO, pp.48-49/()80-81).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주체는 욕망 기계들이 욕망의 흐름을 채취, 소비함으로써, 그 기계의 곁에, 잔여로서 생산된다(잔여-절단).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의식에 의해 중심화된 인칭적 주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비인칭적 특이성으로부터 구성된 탈중심화된(AO, p.27/()47) 주체, 즉 무의식의 주체이다. 또한 이 주체는 다양한 흐름을 채취, 소비함으로써 시시각각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비인칭적 주체이다. 따라서 그러한 주체는 팔루스라는 특권적 시니피앙에 의해 안정적으로 조직화된 라캉적인 인칭적 주체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한다. 욕망 기계들의 생산성은 곧 탈중심화되고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비인칭적 주체의 철저한 생산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코 결여’, ‘거세같은 부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성변화의 원리 자체이다.

 

III. 오이디푸스화와 욕망하는 생산의 억압

욕망 기계들은 항상 생산의 작동을 멈추지 않으며 상호 접속을 반복하며, 이로부터 여러 가지 비인칭적 특이성에 의해 구성된 생성변화의 주체를 생산한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 아래서의 오이디푸스화가 그런 철저한 생산성을 억압한다. 그렇다면 욕망 기계들의 생산성은 왜 어떤 목적으로 억압되는 것일까? 그것은 욕망의 생산의 작동을 억압하고 유순한 주체(복종화된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권력이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만일 그것이 해방되면 곧바로 권력이 전복되는 듯한, 강도적 역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억압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든, 모든 욕망의 입장은 사회의 기성 질서를 규탄하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은 거꾸로 비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욕망은 무엇인가를 뒤집어엎는 것이다. 사회의 여러 부문의 전체를 떨구어 내버리지 않고 정립되는 욕망 기계들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모종의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욕망은 그 본질에 있어서 혁명적이다”(AO, p.138/()223).

 이런 입론의 전제로서,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사회적 억제(repression)’와 심적 억압(refoulement)’을 구별한다. 사회적 억제는 권력장치들에 의한 작용이며, 권력에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며, 사회구성체의 억제적 구조를 재생산한다. 하지만 사회적 억제는 단순히 자신만으로 완결하는 게 아니다. 사회적 억제는 그 도구로서 심적 억제를, 즉 오이디푸스화를 필요로 한다.

 

라이히의 힘은 억압이 어떻게 억제에 의존하는가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이 두 가지 개념의 혼동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억제는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며 사회구성체를 이 억제적 구조에 있어서 재생산하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바로 억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억제는 문명과 외연을 함께 하는 가족적 억압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할 게 아니라, 가족적 억압 쪽이 특정한 사회적 생산형태에 내속하는 억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억제는 단순히 욕구나 이익만으로 향하는 게 아니며, 성적 억압을 통해 욕망으로도 향한다. ‘한 사회의 경제체제의 집단심리에 의한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가족은 바로 이 성적 억압을 의탁받은 대행자인 것이다. (AO, pp.140-141/()227).

 

사회적 억제는 권력에 대해 유순한 주체를 생산, 재생산하고, 사회적 권력관계(계급관계나 착취의 구조)를 재생산하기 위해, 심적 억압(오이디푸스화)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오이디푸스화로부터 사회적 억제를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니다. 정반대로, 사회적 억제와 권력관계의 재생산의 필요로부터 심적 억압으로서의 오이디푸스화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렇게 가족에 있어서의 오이디푸스화야말로 권력의 대행자로서, 권력에 대해 유순한 주체를 형성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아질 것이다. 첫째, 억제적인 사회적 생산은 억압적인 오이디푸스적 가족에 의해 대행된다. 그리고 둘째, 욕망적 생산이 치환된 이미지가 억압적 가족이며, 이 이미지가 억압된 것을 가족적, 근친상간적 충동으로서 표상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조작은 사회적 억제=심적 억압이라는 방식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AO, p.142/()230). 욕망적 생산은 잠재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강도적 역능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그것을 억제하고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것이, 복종이 욕망되는 심적 메커니즘, 즉 억압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은 일체를 이룬다. 사회적 생산은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욕망적 생산에 대해 억제를 행사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이 욕망적 생산과 일체를 이룬다고 한다면,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에 대해 단순히 억압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에 작동을 걸고, 욕망적 생산이 스스로 억제=억압을 욕망하는 체제를 만들어낸다.

 

사실 사회적 생산은 한정된 조건들에 있어서는 오로지 욕망적 생산 자체인 것이다. 사회적 영역은 직접적으로 욕망에 의해 횡단되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욕망의 산물이며, 리비도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투자하기 위해, 그 어떤 매개도, 그 어떤 승화도, 그 어떤 심리적 조작도, 그 어떤 변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저 욕망과 사회적인 것이 존재한다. 사회적 재생산의 가장 억압적, 굴욕적 형태도 욕망에 의해 생산되고, 욕망으로부터 출현하는 조직에 있어서 생산된다. 바로 우리는 이 조직이 어떤 조건에서 출현하는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는 스피노자가 일찍이 제기했던 것과 똑같다(라이히는 그것을 재발견했다). , ‘인간은 왜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 왜 우리는 더 많은 세금을! 더 적은 빵을!”이라고 외치게 될까? 라이히가 말하듯이,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파업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굶주린 사람들이 반드시 도둑질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파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몇 세기 전부터 착취, 굴욕, 노예상태를 견디며 타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조차 이것들을 원하게 될까? 라이히는 파시즘의 성공을 설명하려 하며, 대중의 오해나 착각을 그 원인으로 언급하기를 거부하고, 욕망의 관점에서, 욕망의 말로 설명하는 것을 요구하는데, 라이히가 이때만큼 위대한 사상가였던 적은 없다. 대중은 일정한 때, 일정한 상황에서 파시즘을 욕망했던 것이며, 바로 이것, 군중심리적 욕망의 이 도착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AO, pp.36-37/()62-63).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과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권력에의 복종화마저도 복종화의 욕망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정치철학의 근본문제란 인간이 왜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스피노자, 신학정치론)라는 것이며, 라이히는 그것을 대중의 파시즘에 대한 욕망이라는 형태로 재발견했다(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런 의미에서 권력에의 복종화의 사회적 생산이란,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의 사회적 생산이다. 오이디푸스적 가족이란 그런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을 생산하는 권력의 대행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적 생산에 대해, 오이디푸스는 어떤 방식으로 심적 억압을 부과하며,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을 생산하는가? 들뢰즈=가타리는 그것을 세 가지 과정으로부터 설명한다. 첫째, 접속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접속적 종합이란 욕망 기계들이 횡단적으로 서로 접속과 절단을 반복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들은 그 과정을 접속적 종합의 부분적, 비특수적 사용이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그 포괄적, 특수적 사용으로 포섭된다.

 

첫째, 접속적 종합의 부분적이고 비특수적 사용이 오이디푸스적, 포괄적, 특수적 사용에 대립했다. 이 포괄적-특수적 사용은 양친적과 혼인적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지니며, 이것들에는 오이디푸스 삼각형과, 이 삼각형의 재생산이 대응했다. 이 전체적-특수적 사용은 단락적인 일반화라는 착오에 기초하여, 이것이 결국 오이디푸스의 형상인을 이루고 있으며, 그 부당성은 다음과 같은 조작의 전체를 걸었다. , 시니피앙 연쇄로부터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으로서의 초월적 완전 대상을 추출한다는 조작이다. 이리하여 연쇄의 전체가 이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에 의존하며,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은 욕망의 각각의 위치에 결여를 할당하며, 욕망을 법에 용접하여, 연쇄로부터 이탈하는 것의 환영을 준 것이다(AO, p.131/() 211-212).

 

접속적 종합의 포괄적, 특수적 사용에 의해 아이들은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 동성의 부모로 동일화하며(오이디푸스적 삼각형화), 심지어 자신이 부모가 되는 이성애적인 혼인관계에 있어서 오이디푸스를 재생산한다. 오이디푸스화란 다양체로서의 시니피앙 연쇄 혹은 코드를, 특권적인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이란 결여의 시니피앙(팔루스)이며, 그것은 욕망에 결여를 할당하고, 욕망을 법에 종속시킨다. 그것에 의해 욕망의 다양성이 억압된 자기 동일적 자아가 형성된다.

 둘째로, 이접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욕망 기계들은 각각이 스스로에게 독자적인 코드를 내포하지만, 그 코드는 다양하며, 항상 단편화되어 다른 코드와 접속되며, 이로부터 코드의 잉여가치를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는 그런 코드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둘째, 이접적 종합의 포괄적 또는 무제한적 사용은 오이디푸스적, 배타적, 제한적 사용에 대립한다. 이 제한적 사용은 심지어 상상적과 추상적이라는 두 가지 극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에 의해 상관적으로 규정된 두 항 사이, 즉 배타적 상징적인 구별과, 미분화 상태의 상상계라는 두 항 사이에서만, 선택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이 사용은 이 때, 오이디푸스의 작법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중구속의, 즉 이중의 막다른 골목의 오류 추리이다. (AO, p.131/()212).

 

이접적 종합의 배타적-제한적 사용, 즉 오이디푸스적 사용이란 상징계의 법을 수용하거나 혹은 미분화 상태의 상징계로 떨어지거나,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이중구속이다. 이 두 개의 선택지는 단순히 외관상의 것이며, 실제로는 상징계의 법, 즉 사회적인 법을 받아들이는 수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런 조작에 의해, 주체는 상징계의 법=사회적인 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한다.

 셋째, 연접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욕망 기계들은 이것들이 서로 접속되고, 여러 가지 흐름들을 소비함으로써, 그 곁에, 항상 생성변화를 계속 하는 비인칭적인 주체를 생산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성변화의 주체의 생산을,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 다의적 사용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그것은 격리적, 일대일 대응적 사용으로 변용된다.

 

셋째로,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이고 다의적 사용은 격리적이고 일대일 대응적 사용에 대립한다. 여기서도 또한 무의식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이 일대일 사용은, 말하자면 두 개의 계기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인종주의적, 국가주의적, 종교적 등등의 계기이며, 격리에 의해, 오이디푸스가 언제나 전제하는 출발점의 집합을 구성한다. 이것은 완전히 암암리의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가족적 계기이며, 사상(寫像, application)에 의해 도달점의 집합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상(寫像)이라는 세 번째 오류추리가 생긴다. 이 오류추리는 사회적 장의 규정과 가족적 규정 사이에 일군의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수립하며, 이런 방식으로 리비도 투자를 영원한 아빠-엄마로 환원하는 것을 가능케 하며 불가피하게 하며 오이디푸스의 조건을 고정한다. (AO, pp.131-132/()212-213).

 

연접적 종합의 격리적-일대일 대응적 사용은 사회적 장의 규정과 가족적 규정 사이에 일대일 대응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 일대일 대응에 기초하여 욕망적 생산에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사상(寫像)하며, 욕망적 생산의 다양성을 억압한다. 그것에 의해 여러 가지 특이성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생성변화하는 비인칭적 주체는, 오이디푸스화된 인칭적 주체로 개별화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일대일 대응화가 실현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개체화뿐만이 아니다. 오이디푸스화는 제반 주체들을, 인종, 국가, 가족 같은, 어떤 하나의 초월적 시니피앙 아래에 통합된 집단으로 동일화시킴으로써 예속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속집단(groupes assujettis)’이란 주체 집단(groupes sujets)’에 대립하는 개념이며, 둘 다 가타리가 정신분석과 횡단성의 논문들에서 도입한 개념이다.[각주:19] 들뢰즈는 가타리의 정신분석과 횡단성에 붙인 서문에서, 두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속집단은 총체로서 예속적일 뿐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여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예속적이라는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예속집단을 특징짓는 위계질서, 수직적 혹은 위계형 조직은 집단이 무의미, 죽음, 혹은 분해 등으로 내파하는 일체의 가능성을 뿌리치고, 창조적 절단의 발전을 가로막고, 다른 집단의 배제 위에서 수립되는 자기 보존의 메커니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예속집단의 중앙집권주의는 구조화, 전체화, 통합화라는 과정을 거쳐 작용하며, 진정한 집단적 언표행위의 조건들을 대신해, 현실과 동시에 주체성으로부터도 절단된, 틀에 박힌 언표의 배치를 초래한다(집단적 오이디푸스화 작용, 초자아화, 거세 효과 같은 상상 위의 현상이 생기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거꾸로 주체집단은 전체성이나 위계를 뿌리치는 횡단성의 계수에 의해 정의된다. 주체집단은 언표행위의 행위자(agent)이며, 욕망의 지지체이며, 제도적 창설의 구성요소이다. 주체집단은 그 실천을 통해, 스스로의 무의미, 죽음, 또는 절단의 극한에 도전하길 마지 않는다.”[각주:20]예속집단이란 특히 프로이트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각주:21]에 영향을 받은 개념이며, 어떤 초월적 중심으로의 동일화에 의해 위계질서적, 수직적, 중앙집권적으로 통합된 전체성을 가리킨다. 그에 반해 주체집단은 그런 주체성이나 위계적 통합을 해체하는 분자적 다양성과 횡단성에 의해 정의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주체집단예속집단을 집단 환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의하는 점이다.

 

집단 환상과 개인 환상 사이의 수많은 구별을 전개하면, 결국 개인 환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오히려 주체 집단과 예속 집단이라는 두 종류의 집단이 존재할 뿐이다. 오이디푸스와 거세는 상상계의 구조를 형성하며, 이 구조를 따라 예속 집단의 구성원은 자신들이 집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혹은 환상화하도록 규정된다. 게다가 이런 두 종류의 집단은 끊임없이 서로로 이행하는 상태에 있다고 말해져야 한다. 주체 집단은 끊임없이 종속의 위험에 처해 있으며, 예속 집단이 있는 경우에는 혁명적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분석이 어떻게 환상으로부터 배타적인 이접의 방향만을 끄집어내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환상을 그 개인적, 혹은 의사-개인적인 차원 속으로 내리누르고 있는지를 볼수록, 우려해야 할 것은 없다. 이런 개인적, 의사-개인적 차원은 본성적으로 환상을 예속 집단에 관계시킬 뿐이며, 정반대의 조작을 행하여 환상을 집단의 차원에서 포착하며, 환상 속에서, 집단의 혁명적 잠재성의 숨겨진 요소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AO. pp.75- 76/() 124. 강조는 인용자)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정신분석이 개인 환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실제로는 집단 환상이다. 그들은 제도론적 정신 분석에 의거하면서,[각주:22] 개인 환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집단 환상만이 존재한다는 테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주체 집단과 예속 집단이라는 두 종류의 집단 형성은 바로 집단 환상의 메커니즘에 의거하고 있다. 주체 집단에 대해서는 나중에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석에 의해 개인 환상으로 파악된 것이야말로 예속 집단의 형성에 본질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 주목하자. 오이디푸스화란 바로 개인화이며, 가족 환상이라는 개인 환상의 형성 메커니즘인데, 그런 가족 환상의 형태를 통해서만 개인들은 개인화된 채의 상태에서 아버지의 이름 같은 초월론적 시니피앙에 예속화된다. 그리고 그 초월론적 시니피앙이 국가, 인종, 신 같은 사회적인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전위됨으로써 개인들은 예속 집단의 전체성(과 그 집단 환상)에 통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심적 억압의 형성이란 바로 오이디푸스적 가족에 있어서의 개인화를 통한 예속 집단에의 예속화이며, 개인화된 주체들을 하나의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통합하는 예속 집단의 형성과 동의어이다.[각주:23] 이런 의미에서 개인 환상으로서의 가족 환상은 틀림없이 집단 환상인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적 조작은 주체들을 예속 집단으로 통합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오이디푸스적 조작의 주체들로의 사상(寫像)은 이렇게 예속 집단을 형성하고, 예속 집단의 규정들을 이루는 리비도 투자를 형성하는 것이다.

 

IV. 자본주의와 사건의 생산

욕망 기계들의 철저한 생산성은 반생산을 초래하는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억제=억압되며, 개인들은 예속 집단으로 전체화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화를 자본주의 체제에 고유한 억압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자본주의와 오이디푸스화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기 위한 사건의 생산의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다.

우선,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자본주의의 정의를 보자. 그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화폐-자본의 형태를 취한 탈코드화된 생산의 흐름과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형태를 취한 탈코드화된 노동의 흐름 사이의 마주침에 의해 발생한다. 이 정의는 맑스의 자본에 의한 자본주의의 성립, 즉 자본주의와 토지로부터 떼어내진 자유로운 노동자와의 만남[마주침]이라는 설명을 근거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의 운동에 의해서 정의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가 전자본주의에서의 코드를 대신해, 화폐라는 추상량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화폐라는 추상량의 공리계는 탈영토화의 운동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며, 탈영토화된 영역에서 욕망의 흐름을 해방한다(AO. p.41/()68-69).

 이처럼 자본주의란 흐름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즉 절대적 한계로 향하는 분열증적 운동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가 해방된 흐름을 공리계에 의해 억제하고, 흐름을 내재적, 상대적 극으로 닫아버린다. 자본주의는 이 내재적 한계를 확대시키면서 재생산하며, 흐름이 절대적 극한에 도달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분열증은 자본주의 자체의 외적 극한, 즉 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경향의 종착점인데, 자본주의는 이 경향을 억제하고 이 극한을 거절하고 치환하며, 이것을 자기 자신의 내재적인 상대적 극한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확대하는 규모에 있어서, 이 상대적 극한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자본주의는 한 손으로 탈코드화하는 것을, 다른 손으로 공리계화한다”(AO, p.292/()62).[각주:24]

 이처럼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조절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공리계에 요청되며,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사회적 힘들의 장에 내재하는방식으로 조절하고, 자본주의의 상대적 극한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부단한 경제 발전과 자본의 탈영토화를 추진하는) 것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운동이 절대적 극한에 도달하지 않도록 그것을 상대적 극한 속에 억눌러둔다(사회 혁명을 억제한다)(AO, pp.299-300/()72-74).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국가도 복지국가도 둘 다, 심지어 신자유주의 국가조차도, 이런 자본의 공리계의 틀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 세 종류의 국가는 모두, 국가가 자본의 운동의 중요한 조절 역할을 맡으며, 경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국가가 자본의 운동에 어떤 개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와 복지국가는 국가가 경제 발전을 직접 주도하고, 노동자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자본이 운동을 조절한다. 또 신자유주의 국가는 자본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억제하고 자본의 운동의 게임의 규칙(시장에서의 경쟁 상태)을 만들어낸다는 방식으로 자본의 운동을 조절한다.[각주:25]

 그렇다면 이런 자본주의의 운동은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억압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자본주의에 의해 사회체가 자본-화폐로서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 추상적인 것으로 됨으로써, 가족은 자신의 사회적 형태를 경제적 재생산에 부여하기를 그만두고, 사회적 장의 바깥에 놓이게 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가족의 사인화(privatis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족이 사회적 장 바깥에 놓인다는 것은 가족에게 최대의 사회적 호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적 장 전체가 가족으로 사상(寫像)되는 것이 가능해지는 조건이기 때문이다”(AO, p.314/() 96). 개별 인물은 자본주의의 공리계에 의해 산출된 사회적 인물(예를 들어 자본가, 노동자)이지만, 그들은 동시에 가족에 있어서는 아버지, 어머니, 자식 중 어느 하나라는 사적인 인물이다. 오이디푸스화의 조작이란, 개인의 첫 번째 차원의 사회적 이미지를 그 두 번째 차원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로 사상(寫像)하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개인들은 권력에 예속된 주체로 식민지화된다.

 

사회적 장에서 각자는 언표행위의 집단적 대행자로서, 혹은 생산, 반생산의 대행자로서 작용하는 작용받지만, 이 사회적 장은 오이디푸스의 위에 포개진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에서 이제 각자는 자신의 구석에 갇히고, 각자를 개체로서 분할하는 선에 의해서 절단된다. 각자는 언표의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로 분할되는 것이다. 언표의 주체는 사회적 인물이고, 언표행위의 주체는 사적 인물이다. ‘그 때문에이것은 너의 아버지이며, 그 때문에 이것은 너의 어머니이며, 그 때문에 이것은 너다. 자본주의의 여러 가지 연접이 사인(私人)이 된 인물로 사상(寫像)되는 한에서, 이 연접에서 가족의 연접이 귀결된다. 아빠-엄마-, 이것이 도처에서 확실히 발견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거기에 사상(寫像)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의한 통치,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분열을 이용하고 흐름을 우회시키는 새로운 방식인 것이다. 혼성된 이미지, 이미지 위에 포개지는 이미지, 이런 조작의 결과, 각자의 작은 자아는 아버지-어머니에 관계되며, 진정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A, pp.316-317/()99)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사회적 인물, 즉 자아의 사회적 이미지는 사적 인물, 즉 개인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로 포개지며 사상(寫像)된다. 그것에 의해 주체는 언표의 주체(사회적 인물)와 언표행위의 주체(사적 인물)의 두 층으로 분할된다. 라캉에 따르면 언표행위의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이며, 그것은 의식의 주체에 대해 상위에 있으며, 의식의 주체를 초월론적인 방식으로 통제한다.[각주:26]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라캉적 주체 개념이 사실상 사회적인 예속화의 메커니즘을 기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 언표행위의 주체, 즉 자아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란 오이디푸스화된 초월론적 자아이며, 그것은 상위로부터 언표의 주체, 즉 자아의 사회적 이미지를 통제한다. 그리고 초월론적 자아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바로 상징계의 법=사회적 법, 즉 예속화의 법을 체내화한 심급이다. 이러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푸코)은 바로 오이디푸스화된 주체의 형성에 의해 성립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야말로 권력에 순종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통치하는 예속화된 주체 자체이며, 그런 주체는 욕망의 생산성을 스스로 심적으로 억압함으로써 사회적 억제 메커니즘에 스스로 복종할 것을 욕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화란 사회적 통치의 메커니즘이며, 예속화의, 그리고 예속 집단의 형성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오이디푸스화되고 예속화된 주체와, 이들 예속화된 주체로 이루어진 위계적이고 몰적인 예속 집단을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으로 이루어지며, “집단적 언표행위의 대행자agent”의 횡단적이고 수평적 연결로 이루어진 주체 집단으로 변용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어떤 전략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한까지 가속화하고, 그것이 억제하고 있는 욕망의 역능을 해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자본의 운동의 내적 극한을 확대하고 그것을 절대적 극한으로 접근시키며, 욕망의 흐름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따라서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무의식적 욕망의 흐름을 전면적으로 해방하는 분열증적, 절대적 극한으로 이를 것이다. 그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욕망적 생산의 분자적, 수평적 다양체로서의 주체 집단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말단으로부터 계속 도주한다. 자본주의의 생산, 그 예술, 그 과학은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여러 가지 흐름을 형성한다. 이것들의 흐름은 단순히 대응하는 공리계에 종속할 뿐 아니라 공리계의 그물망을 관통하고, 재코드화나 재영토화의 밑을 뚫고, 몇 가지 흐름을 교통시킨다. 이번에는 주체 집단이, 단절을 통해서 예속 집단에서 파생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흐름을 틀어막고 흐름을 절단하고 절단을 멀리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의 흐름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자본주의에 반항하고 자본주의를 찢어버리는 여러 가지 분열에 따라 스스로를 계속 절단한다. 자본주의는 내적 극한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대비가 있으나, 변함없이 외적 극한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외적 극한은 내적 극한이 확대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본주의에 침입하고, 내부로부터 자본주의를 찢어버리는 위험을 증가시킨다. 그 때문에 도주선은 매우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게 된다. , 도주선은 사회적 장에 대한 한 가지 투자를 구성하는 것이며, 이 투자는 반대 방향의 투자에 못지않게 완전한 것, 전체적인 것이다. 파라노이아적 투자와 분열 기질적 투자는, 말하자면 무의식적 리비도의 투자가 대립하는 두 극을 이룬다. 한쪽 극은 주권 조직체나 이 주권 조직체에서 발생하는 군() 거세 집합에 욕망적 생산을 종속시키는 극이며, 다른 한쪽 극은 반대의 예속집단을 실현하고, 권력을 전복하고, 욕망적 생산의 분자적 다양체에 군거성 집합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AO, p.451/()297-298)

 

자본주의의 외적 극한이란 분열증적인 것이며, 자본주의의 가속에 수반되는 이 분여증적인 것의 침입이야말로 긍정적인 도주선의 형성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가속은 욕망의 해방을 가속시키고, 자본주의를 불안정화시키며,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도주선을 긋는 것을 가능케 한다. ᄄᆞ라서 예속집단에서 주체집단으로의 변용은 자본주의의 가속화에 따른 욕망적 생산의 가속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충실 신체로서의 새로운 사회체를 건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사회적 충실 신체의 또 다른 국면으로 이행해야 한다. 거기에는 욕망의 분자적 조직체가 작동하고 등기되며 새로운 몰적 집합을 자신에게 예속시킬 것이다. 이곳에서만, 우리는 리비도의 무의식적 혁명적 절단과 투자(la coupure et l’investissement revolutionnaires inconscients de la libido)에 도달한다. 그런데 다만 인과관계의 단절(rupture de causalité)과 맞바꿔서, 이 단절에 올라타 이것은 실현된다(AO, pp.452/()299)

 

자본주의의 가속에 의한 욕망의 해방이야말로 최종적으로 인과관계의 단절”, 사회적 재생산의 인과관계의 단절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리비도의 무의식적 혁명적 절단”, 즉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변용이 무의식적 절단으로 불릴까? 그것은 이 절단전의식적 혁명”, 즉 계급과 이익 수준에서의 혁명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혁명”,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의 해방과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집단성의 형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각주:27] 예속 집단에서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은 단순히 계급의 이익에 의해서는 발생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 집단의 구조는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이라는 바로 무의식의 수준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리라.

 

혁명적 잠재성이 어떻게 현동화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잠재성을 품은 전의식적인 인과성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어느 특정한 순간에서의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이다. 이것은 곧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즉 인과관계의 단절이며, 이 단절은 현실적인 것에 밀착하여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 극도로 다의적인 순간을 낳는다.(AO. pp.453-454/()301)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최종적으로 욕망의 흐름을 절대적 극한으로까지 가속시키고, 자본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예속 집단을 물어 찢으며, 그것을 주체 집단으로 변용시키는 무의식적 절단,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 극도로 다의적인 순간을 초래하는 것이다. 욕망의 역능이, 그리고 욕망의 역능에 의거한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도주선이, 사회적 재생산의 인과관계의 단절을, 사건을 생산한다. 사건의 생산은 자본주의의 가속화에 따른 욕망의 절대적 해방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에게 사건의 생산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욕망이라는 원인(스피노자적으로 말하면 내재원인’)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각주:28] 그리고 그때 사건의 생산은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의 해방과 비위계적인 횡단적 집단성의 실현이다.[각주:29]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적 정치를, 단순히 사건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런 사건의 생산의 논리, 달리 말하면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이라는 전략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치바 마사야(千葉雅也)의 표현. 다음을 참조. 『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 河出書房新社, 2013. [김상운 옮김, 󰡔너무 움직이지마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 바다출판사, 2017년 근간 예정.] [본문으로]
  2. Alain Badiou, Deleuze : la clameur de l’être, Hachette, 1997, p.20. [본문으로]
  3. Slavoj Zizek, Organs without Bodies: Deleuze and Consequences, Routledge, 2004, p.20. [본문으로]
  4. 바디우파 철학자인 피터 홀워드도 바디우-지젝과 거의 같은 전략에 의거하며(혹은 그들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라) 들뢰즈 철학은 잠재적 창조행위의 철학이며 “세계의 변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cf. Peter Hallward, Out of This World: Deleuze and the Philosophy of Creation, Verso, 200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ai 68 n’a pas eu lieu»,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본문으로]
  6. Fra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lisme en politique)», in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sous la direction d’Erlc Alliez, Institut Synthélabo, 1998, p.347. [본문으로]
  7. Ibid., p.346. [본문으로]
  8.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13-14. [본문으로]
  9. Ibid., pp.13-14. “미셸 부르이에가 스토아학파의 사고를 빼어나게 재구성하여 말했듯이, ‘칼이 새로운 살을 자를 때, 전자의 물체는 후자의 물체 위에서 새로운 특성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속성을, 잘려진다는 속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 속성(attribut)은 어떤 실제적인 형질(qualité)도 지시하지 않는다. … 반대로 속성은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말하자면, 속성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다. … 이 존재양식은 이른바 극한에 있어서, 존재자의 표면에 있어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존재양식은 존재자의 본성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이 존재양식은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수동성은 능동을 겪은 물체적 본성을 상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양식은 그저 단순히, 성과이며, 존재자로는 분류되지 않는 효과이다. … 그때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으나 (스토아학파의 구별에서는) 기본적으로, 존재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한편으로 깊은 실제적인 존재자, 힘이 있으며, 다른 쪽에는 존재자의 표면 위에서 상연되고 끝도 없이 많은 비물체적 존재를 구성하는 사실의 면이 있다.” [본문으로]
  10. Michael Hardt / Antonio Negrl, Commonwealth,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pp.60-61. [본문으로]
  11. 에티엔 발리바르도 다음의 논고에서 바디우의 사건의 철학이 사건(에 대한 충실함)을 특권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cf. Etienne Balibar, «La philosophie et l’actualité : Au-delà de l’événement?», in Le moment philosophique des années 1960 en France. sous la direction de Patrice Maniglier, PUF, 2011. [본문으로]
  12.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144. 또 이 점에 관해 들뢰즈, 바디우와의 관계를 포함해 네그리를 논한 다음의 중요한 작업에서 시사를 얻었다. 廣瀬純, 『アントニオ•ネグリ-革命の哲学』, 青土社, 2013년. [본문으로]
  13. ‘절단’은 데리다에서 유래하는 개념이며, 이 개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분석한다. ‘절단’ 개념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을 참조. Félix Guattari, «Machine et structure»,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essais d’anaylyse institutionnelle, Maspero, 1972 (rééd. Découverte, 2003). ; Félix Guattari, Écrits pour l’Anti-Œdipe, Lignes manifeste, 2004. [본문으로]
  14.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L’Anti-Œ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t.1, Minuit, 1972/73, p.382. 강조는 인용자. 이하 ‘AO’로 약칭하고 본문 속에 원서, 번역서 쪽수를 표기한다. [본문으로]
  15. 라캉에 의한 분열증 정의에 대해서는 세미나 3권 『정신병』(Jacques Lacan, Le séminaire, livre III : Les psychoses, 1955-1956, texte établi par Jacques-Alain Miller, Seuil, 1981을 참조.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분열증’, ‘분열분석’ 개념의 형성에는 가타리의 역할이 크다. 이 점에 관해서는 추후 논의한다. [본문으로]
  16. Gilles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Minuit, 1967, pp.27-28. 이 점에 관한 자세한 것은 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김상운 옮김, 난장, 2장 참조. [본문으로]
  17. 다음도 참조. Félix Guattari, Ecrits pour l’Anti-Œdipe, pp.257—58, 384. ;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t. 2, Minuit, 1980, p.17. [본문으로]
  18. Jacques Lacan, «Subversion du sujet et dialectique de de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 in Ecrits. Seuil, 1966, p.819. [본문으로]
  19. 특히 다음을 참조. Félix Guattari, «Le groupe et la personne (bilan décousu) «Introduction à la psychothérapie institutionnelle»,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본문으로]
  20. Gilles Deleuze, «Préface», in Félix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p.VI. [본문으로]
  21. Sigmund Freud, Massenpsychologie und Ich Analyse, in Gesammelte Werke, Bd. 13, Fischer, 1999. [본문으로]
  22. “환상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론적 정신분석이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어디까지나 집단 환상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두 종류의 집단 환상이 있다고 한다면, 이 동일성이 두 개의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욕망기계가, 이것을 형성하는 거대한 군중적 총체에 있어서 파악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기계들이 이것을 형성하는 욕망의 기본적 힘들에 관계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집단 환상에서는 리비도가 현존의 사회적 장을, 그 가장 억제적인 형태도 포함해 투자할 수 있으며, 혹은 완전히 거꾸로, 리비도가 역투자를 발생시키고, 이 현존의 사회적 장에 혁명적 욕망의 접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AO, p.38/(上)64頁). 이하도 참조. Félix Guattari, «Le groupe et la personne (bilan décousu)»,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본문으로]
  23. “오이디푸스는 집단에의 통합의 한 수단이며, 이것은 오이디푸스 자체를 재생산하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행시키기 위한 적용의 형태를 취하는 것도 있다면, 정비된 막다른 골목 속에 욕망을 봉쇄하는 신경증적 축적에 빠져드는 것도 있다. 그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예속 집단 속에서 개화하며, 여기서 기성 질서는 이 집단의 억제적 형태 자체 속에 투자된다. 따라서 예속 집단의 형태들이, 오이디푸스적 투영과 동일화에 의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바로 오이디푸스의 수많은 적용이 출발점의 집합으로서의 예속 집단의 규정들에 의존하며, 이것들의 리비도의 투자에 의존하고 있다”(AO, p.123/(上)199頁). [본문으로]
  24. 자본주의에 관한 다음의 서술은 아래의 맑스의 서술을 토대로 한 것이다.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순환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한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이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동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운동은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Karl Marx, Das Kapital, in Marx-Engels Werke, Bd. 23, Dietz, 1962, S.167 ; AO, p.296에서 인용).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이러한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수단은 이 한계를 다시 새롭게, 게다가 더욱 막강한 규모로 자신에게 가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다”(Karl Marx, Das Kapital, in Marx-Engels Werke, Bd. 25, Dietz, 1964, S.260 ; AO, p.274, n.82에서 인용. [본문으로]
  25.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다음에서 상술했다. 『新自由主義と権力-フーコーから現在性の哲学へ』人文書院、2009년. [사토 요시유키, 󰡔신자유주의와 권력󰡕, 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본문으로]
  26. cf. Jacques Lacan, «Subversion du sujet et dialectique du dé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in Ecrits, p.800. [본문으로]
  27. “리비도가 새로운 신체에 결부될 때조차, 또한 전의식의 관점에서 보고, 실제로 혁명적인 목표나 종합에 대응하는 새로운 권력에 결부될 때조차도, 무의식적인 리비도 투자 자체가 혁명적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똑같은 절단이, 무의식의 욕망의 차원과 전의식의 이익의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전의식적 혁명은 사회적 생산의 새로운 체제에 관련되는데, 이 체제는 새로운 목표와 이익을 창조하고 분배하고 만족시킨다. 그런데 무의식적 혁명은 단순히 그런 변화를 권력 형태로서 조건짓는 사회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체에서의 욕망적 생산의 체제에, 즉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전복된 권력으로서의 욕망적 생산 체제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흐름과 분열의 똑같은 상태가 아니다. 전의식적 혁명의 경우 절단은 두 개의 사회체 사이에 존재하며, 혁명적 사회체는 새로운 코드나 이익의 새로운 공리계의 안에 욕망의 흐름을 도입하는 능력에 의해 평가된다. 무의식적 혁명의 경우 절단은 사회체 자체 속에 있다. 이 사회체는 긍정적인 도주선을 따라 욕망의 흐름을 교통시키는 힘을 가지고, 또한 생산적 절단의 절단에 따라 욕망의 흐름을 다시 재단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AO, p.416/(下)244-245頁). [본문으로]
  28. 들뢰즈=가타리의 이러한 ‘내재 원인’에 기초한 ‘사건의 생산’의 전략을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경향성을 따른 형태로 현대적으로 부여해 보여준 것이 네그리=하트이다.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형상은 20세기 말의 수십년 동안이 공장노동에서 비물질노동으로 이행했다. 비물질적 노동이란 지식, 정보, 커뮤니케이션, 관계성, 정동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가리키며, 지식, 언어 코드, 정보를 산출하는 지적, 언어적 노동과 돌봄(care)에 의해 정동을 산출하는 정동노동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비물질적 노동에 있어서 다중은 갈수록 서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산출하면서 협동하며, 지금까지 생산되어 온 «공통적»인 지식, 정보, 관련성으로부터 새로운 지식, 정보, 관계성을 창출한다. 네그리=하트는 다중 사이의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협동을 산출하는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생산형태가, 다중이 수립해야 할 자기통치로서의 절대적 민주주의와 이것을 실현하는 혁명적 절단의 기초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른 비물질적 노동의 경향적 우위성이 다중 사이의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협동(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사건의 생산’의 원인)을 실현하며, 혁명적 절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중” 개념은 “주체집단” 개념을 스피노자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특히 다음을 참조. Micheal Hardt / Antonio Negri, Multitude :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Penguin Press, 2004. [본문으로]
  29. 이치다 요시히코(市田良彦)는 『혁명론 : 다중의 정치철학 서설(革命論──マルチチュードの政治哲学序説)』, 平凡社新書, 2012년에서 이런 “사건”을 푸코의 말을 사용해 “반사목혁명”이라고 불렀다. “반사목혁명”(révolution antipastorale)이란 사목권력에 의해 “전체적이면서도 개별적으로” ― 즉 개인화를 통해 전체화하는 혁명을 가리킨다. 푸코는 1977-78년 강의 『안전, 영토, 인구』에서 “반사목혁명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후의 “주체의 자기 통치”의 문제계에 있어서, 이런 혁명과 탈예속화의 가능성을 구상했다. cf. Michel Foucault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édition établie sous la direction de François Ewald et Alessandro Fontana, par Michel Senellart, Gallimard / Seuil, 284, p.1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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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요시유키의 <신자유주의와 권력> 2쇄가 나왔습니다. 2쇄에서는 타인의 글에 대한 복사를 사과했고, 오타를 수정했으며, 번역어를 바꾸고(가령 '배제forelcosure' -> 폐제), 참고 문헌의 국역본을 업데이트했습니다. 이미 1쇄를 구입하신 분들을 위해 아래에 수정사항을 적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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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각주 4 : 芹沢一也・高桑和巳 編, 『フーコーの後で: 統治性・セキュリティ・戰爭』, 慶應義塾大學出版会, 2007[세리자와 가즈야・다카쿠와 가즈미 편, 『푸코 이후 : 통치성・안전・전쟁』, 김상운 옮김, 난장, 2015].

20쪽 각주 3 : 酒井隆史, 『自由論: 現在性の系譜学』, 靑土社, 2001[사카이 다카시, 『통치성과 ‘자유’ :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 오하나 옮김, 그린비, 2011]

24쪽 각주 4 : Colin Gordon, “Governmental Rationality: An Introduction”, Graham Burchell et al., ed., The Foucault Effect: Studies in Governmentality, Harvester Wheatsheaf, 1991, p. 6[콜린 고든, “통치합리성에 관한 소개”, 콜린 고든·그래엄 버첼 외, 『푸코 효과 : 통치성에 관한 연구』, 이승철 외 옮김, 난장, 2014, 13쪽]

40쪽 각주 22 :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pp. 143-144.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207쪽]. ->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pp. 143-144[『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207쪽].

55쪽부터 : 호모 이코노미쿠스 ⇒ 호모 에코노미쿠스

56쪽 각주 43 : 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6, Gallimard/Seuil, 1997, p. 227[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김상운 옮김, 난장, 2015, 305쪽]

89쪽 : 이 장은 이런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와 짝짓기를 이루는 ⇒ 이 장은 이런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와 짝을 이루는

96쪽 : 벤야민이 말하듯이, 법 정립적 폭력은 법 보존적 폭력에서 ‘대표된다’ ⇒ 벤야민이 말하듯이, 법 정립적 폭력은 법 보존적 폭력에 의해 ‘대표된다’

97쪽 : (또는 지양되기aufgehoben’ ⇒ (또는 지양되기aufgehoben)’

109쪽 각주 27 : État d’exception, p. 64[『예외 상태』, 75쪽].

110쪽 각주 28 : Die Dikatur, S. 134[『독재론』, 172쪽].

126쪽 : 집단적 배치(‘내재적 권력’pouvoir immanent9)을 형성하고 ⇒ 집단적 배치(‘내재적 권력’pouvoir immanent9)를 형성하고

131쪽 : 욕망의 배치(예를 들어 규율화로의 욕망, 자기-경영으로의 욕망의 형성)이다. ⇒ 욕망의 배치(예를 들어 규율화에 대한 욕망, 자기-경영에 대한 욕망의 형성)이다.

139쪽 2줄 : ‘죽음 본능’으로 정의한다 ⇒ ‘죽음 본능’이라고 정의한다

148쪽 2줄 : 정적 발생이란 이른바, 의미라는 ⇒ 정적 발생이란 이른바 의미라는

155쪽 인용2줄 : 형성되는 막 위에 국지화된다localisé고 말할 때 ⇒ 형성되는 막 위에 국지화된다고 말할 때

156쪽 인용1줄 : 구멍orifice의 주위에서 ⇒ 구멍의 주위에서

157-163쪽 인용부분의 프랑스어 대체로 삭제.

177쪽 : 랑시에르에게서 ‘정치’란 ‘폴리스’(신체나 감성적인 것에 대한 권력의 행사)에 의한 복종화의 결과로서 ⇒ 여기서 폴리스를 치안으로 바꿈.

184쪽 각주4 : Louis Althusser,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1970), in Sur la reproduction, p. 305[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2007, 397-398쪽].

197쪽부터 : ‘배제’(따옴표가 반드시 있는 것만) ⇒ ‘폐제’ (* 따옴표 없이 배제라고 되어 있는 것은 그대로 둠.)

202쪽 : 타카쿠와 카즈미 ⇒ 다카쿠와 가즈미

203쪽 : 생명 정치와 저항: 푸코 이론의 현자와 가능성을 전망한다 ⇒ 생명 정치와 저항: 푸
코 이론의 현재와 가능성을 전망한다」
『들뢰즈・가타리의 현재』, 코이즈미 요시유키 ⇒ 고이즈미 요시유키

208쪽 각주 3 : 김상운 옮김, 난장, 근간 ⇒ 김상운 옮김, 난장, 2015.

215쪽 : 파스콸리 파스퀴노 ⇒ 파스콸레 파스퀴노
각주 7 : Jacques Donzelot, L’invention du social: Essai sur le declin des passions politiques, Fayard, 1984[『사회보장의 발명』, 주형일 옮김, 동문선, 2005]; Daniel Defert, “’Popular Life’ and Insurance Technology,” in Graham Burchell, Colin Gordin, and Peter Miller(eds.), The Foucault Effect: Studies in Governmentality, Harvester Wheatsheaf, 1991[『푸코 효과: 통치성 연구』, 이승철 외 옮김, 난장, 근간⇒2014]

216쪽 이하 : 미셸 스넬라르 ⇒ 미셸 세넬라르

216쪽 각주 8 : 악상 빠진 것 체크. Christian Lazzeri and Dominique Reynie(eds.), La raison d’état: Politique et rationalité, PUF, 1992; Dominique Seglard, “Foucault et le problème du gouvernement,” in ibid; Michel Senellart, “Michel Foucault: ‘Gouvernementalité’ et raison d’État,” Pensée Politique 1, 1993, pp. 276-303; Yves-Charles Zarka(ed.), Raison et deraison d’État, PUF, 1994.

217쪽 : 악상 빠진 것. 
Effect in the English- Speaking World,” Foucault Studies 5, 2008, p. 50에서 인용.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편집자나 푸코를 제외하면 여기에 글을 실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통치성’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Sylvain Meyet, “Les trajectoires d’un texte: ‘La gouvernementalité’ de Michel Foucault,” in Sylvain Meyet, Marie-Cecile Naves, and Thomas Ribemont(eds.), Travailler avec Foucault: Retours sur le politique, Paris: L’Harmattan, 2005.

217-218쪽 각주 10 : 악상 빠진 것.
Jonathan Xavier Inda, Targeting immigrants: government, technology, and ethics, Blackwell, 2006를 참조. 또한 다음을 참조. Andrew Barry, Thomas Osborne, and Nikolas Rose(eds.), Foucault and Political Reason: Liberalism, Neo-liberalism and Rationalities of Government, UCL Press, 1996; Mitchell Dean and Barry Hindess (eds.), Governing Australia: Studies in Contemporary Rationalities of Governm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Mitchell Dean and Paul Henman, “Governing Society Today: Editors’ Introduction,” Alternatives 29, 2004, pp. 483-494; Ulrich Brockling, Susanne Krasmann, and Thomas Lemke(eds.), Gouvernementalität der Gegenwart: Studien zur Okonomisierung des Sozialen, Suhrkamp, 2000 and Glossar der Gegenwart, Suhrkamp, 2004; Lene Koch, “The Government of Genetic Knowledge,” in Susanne Lundin and Lynn Akesson(eds.), Gene Technology and Economy, Nordic Academic Publishers, 2002; Sylvain Meyet et al., Travailler avec Foucault, Paris: L’Harmattan, 2005.
한편, 통치성 학파에 관한 개괄과 평가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Mitchell Dean, Governmentality: Power and Rule in Modern Society, Sage, 1999; Thomas Lemke, “Neoliberalismus, Staat und Selbsttechnologien: Ein kritischer Überblick über die governmentality studies,” Politische Vierteljahresschrift 41(1), 2000, pp. 31-37; Jack Z. Bratich, Jeremy Packer, and Cameron McCarthy(eds.), Foucault, Cultural Studies, and Governmentality, SUNY Press, 2003; Sylvain Meyet, “Les trajectoires d’un texte,” op. cit. ; Nikolas Rose, Pat O’Malley, and Mariana Valverde, “Governmentality,” in Annual Review of Law and Social Science 2, 2006, pp. 83-104.
각주 11에서도 악상 빠진 것 있음. Artières, Philippe, Laurent Quéro et Michelle Zancarini-Founel (éds.), Le Groupe d’information sur les prisons: archives d’une lutte, 1970-1972, Editions de l’IMEC, 2003.

221쪽 : ‘품행의 통솔’conduire de conduires ⇒ ‘품행의 통솔’conduire de conduites (*참고로 『신자유주의와 권력』 이후에 나온 책들에서는 ‘행위의 인도’로 옮기고 있음)

229쪽 마지막 줄 : 이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아쉬움과 ⇒ 이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아쉬움과 ~ (*사실 세 가지 아쉬움이 맞는데, 세 번째는 매우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표현을 수정함.)

231쪽 각주30 :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tome IV: 1980-1988, Editions Gallimard, 1994, p. 89). ⇒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tome IV: 1980-1988, Editions Gallimard, 1994, p. 89. 이하 Dits et écrits는 DE로 약칭한다).

234쪽 
1) 본문 : 아감벤은 최근 이 순수 폭력에 대해 ‘탈정립적 권력’potenza destituente이라고 명명했지
만 ⇒ 탈정립적 권력 ⇒ 비정립적 역량
2) 각주31 : Giorgio Agamben, “What is a destituent power?”, Environment and Planning D: Society and Space, no.32, 2014를 참조. ⇒ Giorgio Agamben, “Elementi per una teoria della potenza destituente”, Neri Pozza, 2014[「비정립적 역량 이론을 위한 개요」, 『문화/과학』, 80호, 2014년 겨울호, 274-296쪽].

248쪽 : 각주 40의 “이하 Dits et écrits는 DE 로 약칭한다.” 삭제.

250쪽 : 프레데리크 켁 ⇒ 프레데릭 켁

251쪽 각주 44에서 Alessandro Fontana, Frédéric Gros를 삭제.

252쪽의 “주지하듯이, 푸코가 1970년대 중반에 정식화했던 권력 분석은”에서 “주지하듯이, ~”부터 이 단락에 대해 : 각주 추가 “이 문단은 하코다 테츠의 “エロスの技法を再読する : フーコー統治論の形成過程”『社会思想史研究』, No.31, 2007, 91-92쪽에서 가져왔다.“

256쪽 :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권력과 저항이라는 이원론적 시각에서 통치라는 일원론적 시각으로의 이행이다.”부터 258쪽의 “이렇게 보면, 푸코의 칸트에 관해서도, 통치에 입각해 ‘계몽’의 모티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할 수 있다.” 각주 추가 : 옮긴이 후기 256쪽부터 여기까지의 내용은 하코다 테츠의 “エロスの技法を再読する :フーコー統治論の形成過程” 『社会思想史研究』, No.31, 2007, 91-92쪽에서 가져왔다.

256쪽 : 푸코에게 통치는 “자기와 타자의 통치(통솔)” ⇒ 통솔을 ‘인도’로 바꿈. 
각주 49 역시 <오히려 ‘지도’나 ‘통솔’ 중 하나를 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인도’ 중 하나를 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로 수정.

260쪽 각주 54 : 서지사항 변경
일본의 논의를 잠깐 소개하면 생명 권력과 생명 정치를 구분하면서 생명 권력을 안전장치와 연계해 푸코의 작업 전반을 재독해하는 작업이 있다. 檜垣立哉, 『ヴィ-タ・テクニカ: 生命と技術の哲學』, 靑土社, 2012; 檜垣立哉, 『生権力論の現在: フ-コ-から現代を読む』, 勁草書房, 2011; 檜垣立哉, 『生と権力の哲学』, 筑摩書房, 2006; 金森修, 『<生政治>の哲学』, ミネルヴァ書房, 2010 등을 참조. 이중 『비타 테크니카(ヴィ-タ・テクニカ)』는 생명 권력을 고백, 사목 권력, 파레시아 등과 관련지으면서도 현대 생물학이나 인지과학 등의 논의와 접목시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생정치’의 철학(<生政治>の哲学)』은 아감벤이나 네그리보다는 아렌트나 현대의 생명 윤리와 관련해 깊은 고찰을 하고 있는데, 특히 사목 권력의 역할에 관해 회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인상 때문에 일종의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한편, 통치성과 관련한 연구도 흥미로운데, 사토 요시유키와 이론적으로 연결된 작업으로는 다음이 있다. 箱田徹, 「市民社会は抵抗しない: フーコー自由主義論に浮上する政治」, 『情況』, 2011; 芹沢一也・高桑和巳 編, 『フーコーの後で─統治性・セキュリティ・闘争』, 慶應義塾大学出版会, 2007[세리자와 가즈야・다카쿠와 가즈미 편, 『푸코 이후 : 통치성・안전・투쟁』, 김상운 옮김, 난장, 2015]; 中山元, 『フーコー 生権力と統治性』, 河出書房新社, 2010; 廣瀬浩司, 『後期フーコー 権力から主体へ』, 青土社, 2011.

263쪽 : 맨 마지막에 다음 구절 추가
<● 이 책의 2쇄에서는 하코다 테츠 글의 일부를 무단 복제한 점을 밝혔고, 일부 외래어의 악센트 표기 누락, 잘못된 번역어를 수정했다. 내용상 미진한 부분은 후일 출판될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2015년 5월 5일>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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