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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서평모음)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번역 출간

by 상겔스 2009.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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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번역 출간되었다. 10여 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도착했다. 하지만 뒤늦음은 무의미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이리라... 얼마전에 이 책의 영어판 PDF를 우연히 입수했지만, 돈이 모이는 대로 이 책을 사서 읽을 생각이다. 아래는 한겨레신문에서 퍼온 것이다.
장점과 단점이라.. 글쎄...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근래에 읽은 라클라우의 몇몇 글은 짜증과 실망투성이었다. 상대방의 주장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대화상대자의 논리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그것에 대해 상대자의 동의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하면, 나로서는 라클라우의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다. 어쨌든, 이 책의 라클라우는 그런 모습이 약간 약하게 드러난다... 그게 나름 강점일 수 있겠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63863.html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우연성을 고민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한
역사 발전의 필연성 없는
우연적 지위의 집단이라면
어떻게 헤게모니 얻나 논쟁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주디스 버틀러·에르네스토 라클라우·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대진·박미선 옮김/도서출판b·1만8000원

영국 진보 출판사 ‘버소’가 기획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은 주디스 버틀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사진), 슬라보예 지젝의 정치철학적 대화를 묶은 책이다. 우리 시대 가장 논쟁적인 급진 철학자들이 지상 토론을 벌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은 흥미롭다. 1999년에 기획돼 집필된 책이지만,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이라는 부제가 가리키는 대로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성을 잃지 않은 쟁점들을 품은 책이다.

논쟁이 많은 소출을 내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당사자들이 상대방의 생각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논쟁 당사자들이 인식의 지반을 어느 정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세 사람은 상대의 저서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이 지상 대화 이전에도 몇 차례 서로 의견을 교환한 바 있고, 또 ‘민주주의의 급진적 재구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통한다. 논쟁의 전제 조건이 일단은 충족된 셈이다.

»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이 책은 구성이 독특하다. 세 철학자가 먼저 각각 다른 두 사람에게 ‘질문들’을 던진다. 그런 다음 제1라운드에서 이 질문들을 근거로 삼아 각각 자기 주장을 편다. 이 제1라운드 글들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다시 제2라운드 글이 이어지고, 마지막 제3라운드에서 논점을 명확히하고 결론을 낸다. 시차를 두고 글로써 이루어지는 토론을 묶은 것이 이 책인 셈이다.

세 사람이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논쟁자 중의 한 사람인 라클라우가 그의 지적 동업자 샹탈 무페와 함께 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이다. 이 책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시한 ‘헤게모니’ 개념을 발전시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간과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변혁의 전략을 가다듬는다. 이른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전개에 전환점 구실을 한 것이 이 책인 셈이다. 논쟁자들은 이 책의 기본 발상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논쟁에 입회할 때 세 사람의 관심은 ‘헤게모니’ 개념이 내장한 정치철학적 쟁점을 좀더 깊이 따져들어가, 이 쟁점을 상호 토론을 통해 더 분명하게 이해해보려는 데 있다. 그 쟁점의 핵심이 되는 것이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보편성’과 ‘우연성’ 문제다.

헤게모니 개념은 어느 한 집단이나 계급이 혼자 힘으로 권력을 단숨에 장악할 수 없고, 다른 경합적 세력의 동의를 얻어내야만 지배적 지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한 계급이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대변하는 보편적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계급이 보편적 지위를 얻는다는 사실에서 ‘보편성’ 문제가 드러난다. 특수한 계급들이 보편적 지위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상황이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적 경쟁의 장소라는 것이 이 논의의 바탕에 깔린 생각이다. 또 보편성은 필연성과도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에서 그 관계는 뚜렷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보편 계급일 뿐만 아니라 역사 발전의 필연성을 구현할 계급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단지 진보를 놓고 경합하는 여러 계급·집단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면, 이들의 역사적 지위는 필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헤게모니 문제를 고민한다면, 필연성의 보장이 없는 특수한 계급이 어떻게 보편적 계급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정치철학적인 논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벌어지는 세 사람의 논쟁은 라운드를 거듭하면서 점차 격렬해지고 또 공격적인 모습을 띤다. 때로는 세 사람이 혼전을 벌이고 때로는 2 대 1의 패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뚜렷한 대립전선은 지젝과 라클라우 사이에서 형성되는데, 이 전선은 ‘급진 민주주의 기획’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젝은 라클라우를 향해 이렇게 쏘아붙인다. “(라클라우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의 근본 원리를 결코 문제 삼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라클라우는 “이런 순진한 자기만족적 주장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고 일축한다. 그는 “버틀러와는 대화가 되지만 지젝과는 정치토론을 시작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를 전복하라는, 또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하라는 명령”만 반복하기 때문이다. 근거를 충분히 대지도 않은 채 전복하고 폐기하라고만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라클라우의 비판에 대해 지젝은 “실상 이것(라클라우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가 세계 자본주의의 실행 가능한 대안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며, 라클라우의 고민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자본주의 체제의 협박에 굴복하지 말고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고 요구하자고 말한다. 한쪽은 근거 없이 과격하다고, 다른 한쪽은 현존 체제에 굴복했다고 비판을 받는 것이다. 논쟁은 명확한 결말 없이 끝나지만, 그 논쟁을 거치면서 세 철학자들의 강점과 약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성과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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