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 2015년 2월 임시증간호

자크 데리다

 

<미번역 텍스트>

1. 하이데거에 관한 대담자크 데리다

 

<데리다의 삶과 사상>

2. 데리다의 최고 전성기, M. 나스

3. 탈구축<, R. 가쉐

4. L’enfant que donc je suis 혹은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왜 자전적인가郷原佳以

5. 데리다 처음으로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자적 은유増田一夫

 

<인터뷰>

6. Deadletter로서의 철학아즈마 히로키

 

<사형>

7. 엑스 렉스 자크 데리다의 사형론 세미나, J. 페닝턴

 

<하이데거>

8. 자기 전승과 자기 촉발 데리다의 하이데거 강연(1964-1965)에 관해,

 

<철학>

9. 평행적 차이 자크 데리다장 뤽 낭시

10. 주변에서 주변으로 데리다/들뢰즈의 곶으로부터,

11. 우뚝 솟은 상태의 철학말라부

12. 타자성의 분유 계획 불가능한 것의 계산藤本一勇

 

<정치>

12. ‘전쟁의 일상화와 무조건의 환대-평화’ 사이에서松葉祥一

13. 호명으로서의 우애애도로서의 우애 자크 데리다의 우애론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宮崎裕助

14. 차연과 평등 타자의 윤리인가 아니면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인가梶田裕

 

<신학>

15. 데리다의 급진적 무신론,

16. 현상을 가르치기 레비나스데리다와 메시아주의의 물음마르셀

17. 데리다와 존재신학 칸트하이데거레비나스가 교착하는 장소로長坂真澄

 

<문학>

18. 팔루스유령천황제 자크 데리다와 中上健次

19. 데리다 미학의 연구 문학 혹은 픽션성의 제도立花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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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쟁의 상태화/일상화와 무조건의 환대-평화’ 사이에서 (2/2)

마츠바 쇼이치(松葉祥一)

 

1/2에 이어서....


4. 칸트적 평화와 레비나스적 평화

데리다는 아듀에서 성서의 행방에 수록된 레비나스의 강연 정치는 나중에1(Lévinas 1982)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레비나스의 평화론과 칸트의 평화론을 대립시킨다(Derrida 1997b). 레비나스는 칸트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를 옹호하고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입장에 서 있으며, 그 차이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결론이다.

확실히 칸트는 전쟁과는 다른 차원의 영구평화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평화론은 슈미트-하이데거적인 일상화된[常態的] 전쟁론과는 다른 전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그 전제는 다음의 두 개의 명제이다. “1, 평화는 자연스러운, 대칭적인, 단순히 전쟁과 대립시킬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평화는 다른 차원의 현상이며, 자연스런 본성이 아니라 제도적인 본성(즉 정치적-사법적 본성)을 가진다. 2, 평화는 단순한 적대행위의 정지, 전쟁을 벌이는 것의 자제, 즉 휴전이 아니다. 평화는 영구평화로서, 영구평화의 약속으로서 제도화되어야 한다”(Derrida 1997b:132). , “만일 평화가 있다면, 그 평화는 영구적이지 않으면 안 되며, 제도화된 평화, 법적-정치적 평화로서, 비자연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Derrida 1979b:133)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평화는 가능할까? 적어도 정치적 방법에 의해서는 이런, 영구평화에는 도달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영구평화는 정치적이지 않게 된다. 데리다는 여기서의 칸트가 레비나스에 접근한다”(Derrida 1997b:133)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와 레비나스는 갈라진다. 칸트는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 할 환대를 제한해 버리는 것이다. 데리다는 만국의 세계시민들이여, 다시 한 번 노력하라!(Derrida 1996)에서, “세계시민의 법권리는 보편적인 환대의 조건들에 제한되어야 한다”(Kant 1795:49)라는 세 번째 확정조항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칸트가 환대의 법을 방문권에 한정하고, 체류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손님의 권리(이 권리를 요구하려면 그를 일정 기간 가족의 구성원으로 다룬다고 하는, 호의 있는 특별한 계약이 필요해질 것이다)가 아니라 방문의 권리인데, 이 권리는 지구의 표면을 공동으로 소유할 권리에 기초하여, 서로 교제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처럼, 모든 인간에게 속해 있는 권리이다”(Kant 1795:49). 데리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방인/방문자]는 체류권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방문권만 인정받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 점에서 수많은 확연한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조건부 환대라고 부르며, ‘무조건의환대 혹은 순수한환대라고 부르는 것에 대립시키고 싶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는 환대이며, 설령 신참자가 시민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요구하지 않습니다”(Derrida 1999).

여기서 칸트는 환대에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환대=평화를 진보의 최종 단계로 되돌려보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칸트의 평화 개념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칸트에게서 영구평화, 세계시민적인 법권리, 보편적인 환대 같은 것의 제도화는 자연적인 적대성 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Derrida 1997b:134).

그에 반해 레비나스의 경우, 환대=평화는 무조건이어야 한다. 레비나스는 평화를 지금(La paix maitenaint)”(Derrida 1997b:134)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코스모폴리터니즘보다도 보편성을 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레비나스에게서 모든 것은 평화에서 시작되는것이다. “이 평화는 자연이 아니다 . 또 이 평화는 단순히 제도적 내지 법적-정치적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환대 속에서 타자의 얼굴을 맞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Derrida 1997b:137, 강조는 데리다). 레비나스에게서는 칸트와는 반대로, 전쟁 자체도 맨 얼굴의 평화로운 맞아들임의 증언이 되는 흔적을 보존하고 있으며, “전쟁이 평화의 증언인 것, 전쟁은 평화의 한 현상에 머무는 것”(Derrida 1997b:144)이 된다.

레비나스는 전쟁-평화의 대칭성을 절단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같다. 그러나 방향은 정반대이다. 칸트의 경우, 전쟁이 기반이 됐던 반면, 레비나스의 경우 평화-환대가 기반이 된다. “전쟁 자체, 적대성, 나아가 살해마저도 얼굴로의 열림이라는 근원적 맞아들임아직도 전제하며, 변함없이 맞아들임의 표명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은 얼굴에 대해서만이며 타자의 얼굴의 의미이기도 한 살인하지 마라는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윤리의 근원이다”(Derrida 1997b:138, 강조는 데리다). 칸트에게서는 평화를 제도화해도 자연상태로서의 전쟁의 흔적은 남는다. 거꾸로 레비나스에게서 전쟁, 면역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환대를 스스로 신청하는 경우뿐이다. 레비나스는 칸트적인 무장된 평화’, ‘휴전으로서의 평화’, 법적-세계시민주의와 절연하고 있다. 따라서 레비나스에게서 전쟁은 수단에 의한 평화의 계속”(Derrida 1997b:144)이며, 전쟁은 환대의 파생물이게 된다. “이 위대한 담론은 종말론적 평화를, 또한 무엇에도 선행될 수 없는 환대적인 맞아들임을 말한다. 거기서 무엇을 듣더라도 상관없으나, 다만 정치적인 평화신학만은 들을 수 없다”(Derrida 1997b:144). 데리다는 이런 레비나스의 평화 개념을 ()-근원적인 환대혹은 과정 없는 평화”(Derrida 1997b:139)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이 평화-환대의 기반을 언어작용에서 간파한다. 왜냐하면 레비나스는 언어작용의 본질은 선량함이며, 나아가 언어작용의 본질은 우애이며 환대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Derrida 1997b:138). 가령 전체성과 무한의 끝부분에서, 언어 속에서 타자, 그 어떤 경계선도 부정도 없는, <타자와의> 평화적 관계의 적극적인 전개가 산출된다고 말했음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거기서는 급진적인 분리의 다원론”(Derrida 1997b:146)이 문제가 됐다. 그것은 전체적인 공동체의 다원성이 아닌 듯한, 다원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정합성이 아닌 듯한 다원론”(Derrida 1997b:146)이다. 거기서의 다원성의 통일이야말로 평화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평화를 전쟁의 종식과 동일시할 수 없다”(Lévinas 1999:471).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레비나스에게서의 평화론을 두 가지 점에서 비판한다. 한편으로, -근원적인 환대’, ‘아나키한 선량함부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Derrida 1997b:143-144). 그 결과, 평화에는 계층질서적인 비대칭성이 남게 된다. 다른 한편 이런 레비나스의 윤리적 평화론은 보편주의-배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죽이지 말라라는 윤리적 명제를 절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입장만이 보편적이며 다른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 배외주의에 빠지며, 폭력적 배제나 처벌에 길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비나스가 시오니즘이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윤리적 입장이라고 주장할 때, 이 위험에 길을 열고 있다(Derrida 1997b:165). 현실에서 시오니즘이 배타적 폭력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될 때, 이 입장의 위험성을 알 수 있다.

 

5. 윤리적 평화와 정치적 평화 사이에서

우리는 칸트와 레비나스의 평화론을 윤리적 평화냐 정치적 평화냐라는 문제로서 검토했던 적이 있다(松葉 2008). 한편으로 윤리적 평화론이 무력하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평화론에 늘 위험이 따라다닌다는 것도 사실이다. 1차 대전 후의 부전조약[不戰條約, Treaty for the Renunciation of War;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나, 유엔헌장에서 무력행사를 행할 수 있는 예외적 조건으로서 자위권이 인정된 이후, 팽창일로를 거듭해 왔다. 그것은 무력행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대외적, 대내적인 논거로서 계속 확대되며, 이제는 예방적·선제적 자위권이나, 확대된 집단적 자위권까지 주장하게 되며, 어떤 군사적 행동도 그 안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개념이 되고 있다. 이런 자위 개념의 팽창을 억누르는 것은 더 이상 정치적 수단만으로는 곤란하다. 칸트나 아베 드 생-피에르(Abbe de Saint-Pierre)가 주장한 이성=이익에 기초한 정치적 수단으로는 자위 개념의 비대화와 그것에 기반한 정전론(正戦論)의 부활을 막을 수 없으며, 정치적 차원에서 윤리적 차원으로의 전회가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없다(松葉 1995).

다른 한편으로 윤리적인 평화론이 불충분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전쟁의 일상화[常態化]가 기본인 한, 그것이 아무리 일시적이고 위험한 것이라 해도, 정치적인 수단에 의한 해결책의 추구는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칸트적인 세계시민공화국에서의 도래할 민주주의를 상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칸트는 정치적 평화를 위해 국가연맹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그저 현실주의적인 타협안으로서 제기했던 것에 불과합니다”(Derrida 1997a). 실제로 칸트는 두 번째 확정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로 관계가 있는 국가들에 있어서 그저 전쟁밖에 없는 무법적인 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거한 다음의 방책밖에는 없다. , 국가도 개개인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미개한(무법적인) 자유를 버리고 공적인 강제법에 순응하고, 그리고 하나의(가장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민족들의 합일국가(civitas gentium)을 형성하고, 이 국가가 항상 지상의 모든 민족을 포괄하도록 한다는 방책밖에는 없다”(Kant 1795:47). 그러나 이런 세계시민국가라 해도, 자기 면역으로서의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전쟁의 본질에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 평화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평화를 조금씩이라도, 일시적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수단에 의한 것밖에는 없다.

확실히 영구평화를 위해영구평화의 어정쩡한 약속, 유보 없는 환대에 관한 양의적인 혹은 위선적인 약속”(Derrida 1997b:151)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칸트는 무덤을 갈망하는 것도, 평화주의적 철학자의 달콤한 꿈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Derrida 1997b:151-152). 칸트는 이 양자택일에 대한 응답으로서, 환대의 법권리나 세계시민정치를 제안한다”(Derrida 1997b:152).

여기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적어도 칸트와 레비나스 사이에 있는, 어떤 차이를 여기서 첨예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르완다에서, 유럽에서, 미국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 속의 생베르나르(Saint Bernard) 교회에서, 무수한 상파피에홈리스들이, 다른 국제법, 국경선에 관한 별도의 정치, 인도(人道)에 관한 별도의 정치, 나아가 국민국가의 너머에서 실효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인도적 참여engagement, 그런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도처에서, 칸트와 레비나스의 이 치아는 전례 없이 중요한 것이다”(Derrida 1997b:152).

우리는 슈미트-하이데거적인 전쟁의 일상화[常態化]’를 인정하면서도, 그 저편에서 전쟁의 결여태로서의 평화와는 상이한 평화를 찾아내고, 정치적 평화윤리적 평화라는 두 개의 항 사이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방책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이의 경계선은 단순하지 않다. “윤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는 하나의 경계선이 지닌 분할 불가능한 단일성을 결정적으로 잃고 있기”(Derrida 1997b:149)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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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지금 요구되는 것은 확고한 전쟁 개념에 대응하는 확고한 평화개념을 대치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떻게 생존 공간을 다시 만들 것인가, 거기서 필요한 최저한의 질서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사고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리라. 집단적 자위권이 도입되고, 무기수출의 3원칙이 변경되고, 비밀보호법이 시행된다는 예외상태속에 있는 현재, 이제 상황은 실재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에서 현전한전쟁 속에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현재는 전시’(辺見 2013)이라는 인식이며, 필요한 것은 거기서 살아남기 위한 <전쟁 중>이라는 사고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이런 움직임에 이의를 제기하고, 할 수 있는 한 명문화된 개헌을 멈추는 최대한의 정치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의 텔로스가 전쟁인 한, 정치적 방법으로는 전쟁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본질이 타자의 존재를 신체적-물리적으로 말소하는 것에 있는 전쟁을, ‘죽이지 말라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평화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실행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데리다는 우정의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것은 가능성의 반대가 아니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불가능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Derrida 2001b:43)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불가능한 것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인용할 때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경우는 그 쪽수를 표기했다. 다만, 문맥에 비춰서 번역문을 일부 변경한 경우가 있다.

Aristoteles (n. d.) / 山本光雄訳(1969), アリストテレス全集, 第一五巻, 岩波書店.

Derrida, J. (1994) / 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訳(2003), 友愛のポリテイツクス, 2권 중 제1, みすず書房.

Derrida, J. (1997a) / 港道隆訳(1996), 万国世界市民たちもう一努力!, 世界.

Derrida, J. (1997b) / 藤本一勇訳(2004), アデュー──エマニュエル・レヴィナスのために, 岩波書店.

Derrida, J. (1999) / 安川慶治訳(1999), ジヤツク・デリダとの対話──歓待正義責任, 批評空間, II, 23.

Derrida, J. (2001a) / 松葉祥一訳(2001), りないしみをじています, 現代思想, 二九巻一三号.

Derrida, J. (2001b) / 中山元訳(2002), だれも無実ではない, 中山元訳, 発言──米同時多発テロとお思想家たち, 朝日出版社.

Derrida, J. (2001c). «Une hospitalité à l’infini», in De l’hospotalité : Autour de Jacques Derrida, La passe du vent.

Derrida, J. (2003a) / 藤本一男澤里岳史訳(2004), テロルの時代哲学使命, 岩波書店.

Derrida, J. (2003b) / 鵜飼哲高橋哲哉(2009), ならずたち, みすず書房.

Derrida, J. (2010). Séminaire, La bête et le souverain : Volume II (2002-2003), Galilée.

Gaston, S. (2009). Derrida, Literautre and War : Absence and the Chance of Meeting, Continuum.

Heidegger, M. (1954) / 関口浩訳(2009), 技術への, 平凡社.

辺見庸 (2013), 作家辺見庸さん 現在戦時」」, 神奈川新聞, 201397.

Kant, I. (1795) / 宇都宮芳明訳(1985), 永遠平和のために──哲学的考察, 岩波文庫.

松葉祥一 (1995), 愛国者でも世界市民でもなく──サン・ピエールルソーカントにおける国家連合永遠平和, 現代思想, 二三巻七号, 195-205.

松葉祥一 (2008), 倫理的平和政治的平和, 同志社哲学年報, 三一号, 31-44.

松葉祥一 (2014), デリダ/ランシエール──デモクラシー・他者共同性, 岩波講座 政治哲学, 第五巻, 藤藤純一編, 岩波書店, 127-148.

西谷修土佐弘之岡真理 (2014), 「「非戦化する戦争, 現代思想, 201411월호.

Odello, L. (2014). «Que reste-t-il du cosmopolitisme?», Appels de Jacques Derrida, Cohen-Lévinas, D. & Michaud. G. (dir.). Editions Hermann.

Leroux, G. (2014). «Walten ou hyper-souveraineté», Appels de Jacques Derrida, Cohen-Lévinas, D. & Michaud. G. (dir.). Editions Hermann.

Lévinas, E. (1971) /合田正人(1999), 全体性無限──外部性についての試論, 国文社.

Lévinas, E. (1982) / 合田正人(1996), 聖句彼方──タルムード読解講演, 法政大学出版.

Schmitt, C. (1931) / 田中浩原因武雄訳(1970), 政治的なものの概念, 未来社.

Scheler, M. (1937) / 駒井義昭訳(1991), 平和理念平和主義, 富士書店

현대사상 20152월 임시증간호

자크 데리다

 

<미번역 텍스트>

1. 하이데거에 관한 대담, 자크 데리다

 

<데리다의 삶과 사상>

2. 데리다의 최고 전성기, M. 나스

3. 탈구축<> , R. 가쉐

4. L’enfant que donc je suis 혹은 고양이의 에피소드는 왜 자전적인가, 郷原佳以

5. 데리다 처음으로 :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자적 은유, 増田一夫

 

<인터뷰>

6. Deadletter로서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

 

<사형>

7. 엑스 렉스 : 자크 데리다의 사형론 세미나, J. 페닝턴

 

<하이데거>

8. 자기 전승과 자기 촉발 : 데리다의 하이데거 강연(1964-1965)에 관해,

 

<철학>

9. 평행적 차이 : 자크 데리다, 장 뤽 낭시

10. 주변에서 주변으로 : 데리다/들뢰즈의 곶으로부터,

11. 우뚝 솟은 상태의 철학, 말라부

12. 타자성의 분유 : 계획 불가능한 것의 계산, 藤本一勇

 

<정치>

12. ‘전쟁의 일상화무조건의 환대-평화사이에서, 松葉祥一

13. 호명으로서의 우애, 애도로서의 우애 : 자크 데리다의 우애론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宮崎裕助

14. 차연과 평등 : 타자의 윤리인가 아니면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인가, 梶田裕

 

<신학>

15. 데리다의 급진적 무신론,

16. 현상을 가르치기 : 레비나스, 데리다와 메시아주의의 물음, 마르셀

17. 데리다와 존재신학 : 칸트, 하이데거, 레비나스가 교착하는 장소로, 長坂真澄

 

<문학>

18. 팔루스, 유령, 천황제 : 자크 데리다와 中上健次

19. 데리다 미학의 연구 : 문학 혹은 픽션성의 제도, 立花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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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쟁의 상태화/일상화무조건의 환대-평화사이에서 (1/2)

마츠바 쇼이치(松葉祥一)

 

니시타니 오사무(西谷修)는 어떤 좌담에서 지금 요구되는 것은 확고한 전쟁 개념에 대응하는 확고한 평화개념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불리는 것의 전면화 속에서, 어떻게 생존공간을 다시 만드느냐, 거기에 필요한 최저한의 조건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라는 사고이지 않을까?”(西谷土佐2014:55)라고 말한다. 확실히 현재 전쟁 개념을 재정의하려 하거나, 평화 개념을 재구축하고자 할 때, 강한 무력감이 휩싸이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한편으로, ‘적극적 평화주의같은 의도적인 이중화법(double speech)’(西谷 2014:56)에 의해 평화개념이 파탄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M. 쉘러(Max Scheller, 1874-1928)1927년 독일국방부에서 행했던 강연 평화의 이념과 평화주의에서 말하듯이, 평화는 이미 무조건적으로 적극적인 가치”(Scheler 1937:16)가 되며, 아무리 호전적인 국가원수라도, 공공연하게 평화를 부정하고 전쟁을 긍정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 그 때문에 그들이 은밀하게 군사적 합의를 평화라는 말에 계속 투입한 결과, 이제 이 말은 그 의미가 부풀려져서 원형을 남기지 않게 된 것 같다.

다른 한편, ‘전쟁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의 전면화에 의해 전쟁 개념도 정의 불가능해졌다. 데리다는 9·11 직후의 몇몇 인터뷰에서 9·11 같은 사건을 앞에 뒀을 때의 철학의 역할은 개념적 전제들, 특히 전쟁 개념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것이라고 한다(Derrida 2001a ; 2001b). 그것은 그동안의 전쟁 개념, 즉 국민국가와 그 주권을 전제로 한 전쟁 개념이 9·11 같은 그 어떤 국민국가에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특정할 수 있는 상대가 없는 전쟁”(Derrida 2001b)을 앞에 뒀을 때, 다시 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 전쟁 개념을 다시 묻는 작업을 위해 칼 슈미트를 다시 읽어야만 한다고 한다. 그 결과, 슈미트에 반하여, “현재 폭발하고 있는 폭력이, 전쟁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Derrida 2001b)는 것을 밝히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이 수사학의 남용임을 분명히 드러내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데리다 자신은 우정의 정치(Derrida 1994)에서 슈미트에 기초하여 전쟁 개념을 재검토한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우선 우정의 정치에서의 전쟁 개념의 분석을 보고 싶다. 다음으로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극복(Heidegger 1954)에서 고발하는 존재 망각의 귀결로서의 전쟁의 일상화[常態化]를 검증하고, 그런 후에 불량배들(Derrida 2003b)에서 도래할 민주주의자기 면역성에 관한 분석을 확인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듀(Derrida 1997b)에서 레비나스의 평화론의 분석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의 목적은 전쟁이 일상화[常態化]하는 가운데, 그것에 저항하는 사유의 발판을 찾아내는 것이다.

 

1.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로서의 전쟁

데리다가 우정의 정치에서 밝히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궁극적 텔로스(목적)가 전쟁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정치에 의거하는 한,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우선 특정한 정치적 구별이란 친구와 적의 구별이다”(Schmitt 1931:15)라는 슈미트의 명제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해, 이 친구-적의 구별이 대립에 다름 아니라는 것, 더욱이 이 대립이 의미하는 것은 실재적(實在的) 가능성으로서의 전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Derrida 1994:144f).

슈미트는 친구-적의 대립이 실재 가능한항쟁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국민들은 친구-적의 대립에 따라 결속하는 것이며, 이 대립은 오늘날에도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정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국민에게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적이란 다만 적어도 잠재적으로, 즉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이다”(Schmitt 1931:18-19, 강조는 인용자). 이 항쟁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슈미트에게 전쟁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전쟁이란 조직된 정치적 통일체 사이에서의 무력에 의한 전투이다”(Schmitt 1931:26). 또한 내전은 이 정치적 통일체 내부의 전쟁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전쟁도 내전도, 그 본질은 인간의 죽음을 목표로 하는[지향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든 이 전쟁은 무력에 의한 것이다. 치사(致死)를 목표로 한. ‘무기는 여기서 그 본질적 개념에 있어서 인간의 치사로서의 신체적·물리적치사를 목표로 한 수단이다. 인간의 죽음은 이 적 개념에 의해 이렇게 함축되며, 즉 대외전쟁이든 내전이든, 모든 전쟁에 포함된다”(Derrida 1994:193-194). 여기서 대외전쟁과 내전은 인간의 죽음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전쟁이라는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에도 주의하자.

실제로 슈미트에게서 이렇게 적의 신체적·물리적 죽음을 목표로 하는 전쟁은 단순히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닌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 가능성으로서 현전하고 있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진다. “친구, , 전투 같은 개념은, 그 실재적 의미를, 신체적 치사의 실재적 가능성에 대한 항상적인 관계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전쟁은 적대에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적대는 다른 존재의 존재론적 부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적대의 극한적 실재화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은 범용한 일상이나 정상적인 것일 필요가 없으며, 하나의 이상처럼, 혹은 바랄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필요도 없지만, 적 개념이 그 의미를 유지하는 한,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계속 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Schmitt 1931:25, 강조는 인용자). , 이 전쟁은 단순한 추상적 사고 대상이 아니라, 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슈미트에 따르면, 전쟁이 그런 구체성을 결여했을 때, 그 개념은 유령적인 추상이 되기”(Schmitt 1931:22)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라 해도, 전쟁은 예외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것은 예외로부터 정의되게 된다. 실제로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라는 사태는 위급[긴급]사태이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도, 예외적 사태야말로 특별하게 규정적인, 사물의 핵심을 밝혀내는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친구와 적의 정치적 배치의 극한적 귀결이 노출되는 것은 현실적 전투에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극한적 가능성에서 출발해 인간들의 삶은 특수 정치적인 긴장을 획득한다”(Schmitt 1931:30). 흡사 데리다에게서 여백(파르레곤)이야말로 작품(에르곤)의 의미의 틀을 규정하고 있듯이.

이로부터 데리다는 슈미트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외가 규칙이다, 이것이 어쩌면 실재적 가능성의 이런 사고가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이 사태, 이 상황은 예외적인 방법으로만 도래할 뿐이다. 그것은 그 결정적 성격, 중단 없이, 양도 없이, 무효화하지도 않는다. 이 예외성이 반대로, 사건의 우발성을 정초한다. 어떤 사건이 사건이고,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예외적인 경우뿐이다”(Derrida 1994:203).

이로부터 데리다는 전쟁은 전제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슈미트(Schmitt 1937:35)에 반하여,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라고 말한다. “이렇게 개시되는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의 현전, 실재적 혹은 가능적인 이 현전은, 사실이나 사례의 현전이 아니다. 그것은 텔로스의 현전이다. 정치적인 텔로스의, 이러저러한 정치적 목적의, 이러저러한 정책의 현전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의 현전인 것이다. ‘가장 극한적인정치적 수단으로서 모든 정치적 표상을 정초하는전쟁은 친구/적의 이 차별의 가능성을 구현한다. 그리고 이 표상에 의미가 있는 것은, ‘유의미한 것은, 이 차별이 실재적으로 현전해 있는한에서, 혹은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에서이다”(Derrida 1994:208-209,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어떤 정치나 사회적 유대[연결], 실재 가능한 전쟁 없이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전쟁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어떤 정치도, 정치적 유대로서의 어떤 사회적 유대도 전쟁 없이는, 그 실재적 가능성 없이는 의미가 없다”(Derrida 1994:210). 바꿔 말하면, 그 어떤 정치도, 정치적인 연결[유대]도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에 의해 정초된다. 거꾸로 말하면,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이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는 이상, 정치적 동물로서의 우리는 늘 친구-적을 염두에 두고,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으로 향하게 된다. “가장 극한적인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모든 정치적 개념의 기초에 이 친구와 적의 구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개시하는 것이다”(Schmitt 1993:31).

이리하여 우리는 슈미트의 친구-적 논의에 대한 데리다의 분석에서, 정치적인 것이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에 의해 규정되는 한, 전쟁은 정치의 텔로스이며, 우리는 늘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면 전쟁이 정치적인 것의 텔로스인 한, 정치적 동물인 우리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2. ‘비세계에서의 전쟁의 일상화[常態化]

하이데거도 서양형이상학은 인간중심주의에 빠져 있기에 존재하는 것을 남용하기에 이르며,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상화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1936년부터 1946년까지 쓴 수기 형이상학의 초극에서, 인간이 기술에 의해 존재하는 것-(集立)[주1]하고, 대용품을 대량생산하여 소비를 위해 남용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전쟁이 일상화되며 전쟁과 평화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을 징발하고 남용하는 미오(迷誤[혼동])’의 세계를, 하이데거는 비세계(Unwelt)’(Heidegger 1954:137)라 부른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 비세계화의 귀결로서, 전쟁과 평화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주1] [옮긴이] 하이데거의 기술론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게슈텔(Ge-stell)인데, 이것의 일본어 번역어이다. 한국에서는 닦아세움이나 몰아세움이라고 흔히 번역된다

 

평화가 언제 오느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은, 언제까지 전쟁이 계속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물음이 물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전쟁은 마지막에는 평화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은 존재하는 것의 남용의 한 변종이 되고 있는데, 이 하나의 변종은 평화로울 때에도 계속된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깨닫는 것은 남용의 시대에서의 새로운 것이 승인되는, 이미 시대에 뒤진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장기간에 걸친 전쟁은 서서히 이행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평화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관련된 것이 더 이상 전혀 그 자체로서는 경험되지 않고 평화와 관련된 것이 의미 없는 것, 알맹이 없는 것이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미오(迷誤)는 존재의 그 어떤 진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대신, 미오(迷誤)는 모든 영역에서의 모든 계획의 완벽이자 철저하게 동원된 질서와 확실함을 키워낸다(Heidegger 1954:138).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 기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을 징발하는 현대세계는, 세계대전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세계대전과 그 무제한의 권력 행사는 이미 <존재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의 결과에 불과하다”(Heidegger 1954:137).

이 직후에 지도자(총통, Führer)’가 불러내진다. 존재하는 것이 미오(迷誤)라는 방식으로 이행한 결과, 지도자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지도자의 등장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의 등장에 대해 사람들의 도덕적 분노는 자주 지도자들의 자의와 지배권의 요구로 부단한 찬미라는 가장 불쾌한 습관으로 향하게 된다. 지도자는 유쾌하지 않은 것이며, 그런 것은 분노의 추궁을 피할 수 없다”(Heidegger 1954:139). 그러나 그것은 피하기 힘들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다. 미오(迷誤) 속에서 공허(Leere)가 확산되고 공허가 존재하는 자의 유일한 조건과 확보를 요구하고, 거기서 지도의 필요성이, 즉 존재하는 것의 전체를 확보하기 위한 계획적인 산정(算定, Berechnung)의 필요성이 요구되기때문이다. 이리하여 지도자는 존재하는 것이 미오(迷誤)라는 방식으로 이행했다는 사태의 필연적인 결과”(Heidegger 1954:139)이게 된다. 이 지도자는 초인이자 본능적인 직관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동물적이다. , ‘인간 이상이자 인간 이하의 존재이다. 바꿔 말하면, 이런 지도자의 존재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서 규정했던 형이상학의 산물에 불과하다. 또한 이렇게 전쟁이 전면화된 비세계에서는, 국가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의 구별도 없어진다. , 존재자의 동원과 남용의 업무는 글로벌화되고, 역사를 균일화하는 동시에 인간을 획일화한다.

 

흡사 전쟁과 평화 사이의 구별이 무효라고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적국제적을 구별하는 것도 무효가 된다. 오늘날 유럽적으로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국제주의자라는 비판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는 더 이상 국가주의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는 자국의 번영에 못지않게 그 다양한 국가들의 번영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Heidegger 1954:143).

 

이런 하이데거의 전쟁론은 지도자=총통에 대한 언급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자주 지적되었다.[주2] 여기서는 우리의 논점으로 이어지는 점만을 확인해두고 싶다. , 서양형이상학의 주체-인간중심주의가 지배하는 비세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의 남용의 한 변형으로서 전쟁이 일상화된다는 명제이다.

[주2] 예를 들어 국가적-국제적 무차별화라는 테마는 대안지구화-코스모폴리타니즘을 재고할 때, 검은 노트에서의 탈인종화(Entrassung)’의 개념과 맞춰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3. 도래할 민주주의와 자기면역

이렇게 친구-적 혹은 주-객의 존재론을 전제하는 이상, 근대세계는 필연적으로 전쟁의 일상화에 다다르게 된다는 슈미트-하이데거의 명제에 대해, 데리다는 불량배들에서 도래한 민주주의(démocratie à venir)라는, 타자를 셈에 넣는 시스템을 대립시킨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분석했듯이(松葉 2014), 민주주의란 민중이 지배하는 자인 동시에 지배되는 자인 정치”(Aristote n. d. : 1317b)였다. 데리다는 이런 민주주의를 도래할 민주주의라고 부르며, 그 미완결성을 보여줬다. , 민주주의는 회귀하는 수레바퀴처럼 지배하는 자와 지배되는 자가 교대함으로써 자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데리다는, 이런 민주주의 속에 항상 자기회귀, 자기순환하는 자기성 혹은 이것임(ipséité)’의 논리를 간파한다. “iposenopse는 방브니스트가 멋들어지게 보여줬듯이 복잡한 중계를 거쳐, 소유로, 재산으로, 기능으로, 군주, 주권자, 그리고 대개의 경우 주인(hospites), 이 집의 주인 내지 남편의 권위로 반송된다”(Derrida 2003b: 37). 이것은 데모스가 주권자[주3]일 뿐만 아니라, ‘수레바퀴의 회전운동으로서만 유지할 수 있을 뿐인 것, 따라서 거기서의 지배는 늘 불완전하고 미완결임을 드러낸다. 또한 토크빌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데모스가 자기원인으로서 주권자이어야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등은 이 자기원인 즉 자유야말로 방종(exousia)’[주4]으로 연결된다며 비판해왔다.

[주3] 예를 들어 국가적-국제적 무차별화라는 테마는 대안지구화-코스모폴리타니즘을 재고할 때, 검은 노트에서의 탈인종화(Entrassung)’의 개념과 맞춰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주4] [옮긴이] 원래 엑소우시아는 권능이라는 뜻. 방종은 아콜라시아(akolasia)’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도래할 민주주의개념에 의해 데리다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타자로의 전송으로서의 차연이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의 자기의 갱신이 동일적인 자기로 갇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의, 이질적인 것의, 특이한 것의, 비자기동일적인 것의, 비대칭의, 타율의, 부인 불가능한 경험으로서의 차연”(Derrida 2003b:83)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권의 동일성에 대한 이타적(異他的)인 것의 도입, 그것을 데리다는 타율의 법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Derrida 1994:63).

이렇게 민주주의에 타자를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이 타자의 선택이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한다. 선택이 주체가 부과하는 조건에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체-주권자의 반복에 불과하게 되어버린다. 무조건적인 타자의 선택이야말로 도래할 민주주의의 기반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환대, 증여, 용서[허가] 같은 행위의 무조건성 속에서 찾아내고자 한다. “주권 없는 무조건성 속에서도,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특히 중요시하게 됐던 것으로서, 예를 들어 무조건의 환대를 들 수 있다. 환대가 무조건이라는 것은 타자의 도래에 제한 없이 처해 있다[노출되어 있다]는 것, 법권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무조건의 환대만이 무릇 환대의 개념 일반에 의미와 실천적 합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Derrida 2003b:281-284).

그러나 바로 이 무조건성이 내전-전쟁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내가 받아들인 자는 폭행자, 살인자일지도 모른다. 이것과 마찬가지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보증 없는 순수한 환대에 있어서 타자가 혁명을, 나아가 예견 불가능한 최악의 모습을 초래한다. 그런 가능성도 받아들여야만 한다”(Derrida 2001c:117-118). 순수한 무조건의 환대는 그것이 바로 무조건인 까닭에 예견 불가능한 최악의 모습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시스템을 자기면역(auto-immunité)’이라고 부른다. 자기면역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어떤 생명체[生体] 속에서 타자에 대해 그 생명체를 보호하고 있는 것, 타자의 공격적인 침입에 대한 면역을 해당 생명체에 부여하는 것을, 바로 해당 생명체가 자율적인 방식으로 자발적으로 파괴한다는 논리”(Derrida 2003b: 234)이다. , 본래 타자로부터 자기를 구별할 터인 면역 기능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작동하는 작용이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타자를 무조건으로 편입시키기 때문에 이 자살적’(Derrida 2003b:75)인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가령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는 테러리스트들(불량배들)도 이런 타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게 하는 데 불가결한 타자이며, 자신의 주권을 정당화하는 적극적인 조건으로서 데모스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타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유지는 항상 민주주의의 파괴를 불가피하게 불러들이게 된다. 이런 자기 면역적인 민주주의는 제한 없는 과정이며, “자기 면역적인 것에 맞서는 확실한 예방법 따위란 없다”(Derrida 2003b:288).

그러나 자기 면역성은 양의적이다. 데리다는 자기 면역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기 면역은 타자에게 노출된다는 것, 즉 도래하는 것 없는 자 따라서 계산 불가능한 채로 머물 수밖에 없이 노출된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인 면역이 있을 뿐이기에 자기 면역이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기다리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을 것이며, 서로 기대하는 것도 사건을 기대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Derrida 2003b:290).

 

민주주의의 자기 면역 과정은 수레바퀴의 새로운 회전-혁명이 생기는 데 필요한 무조건성, 무방비를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유지하면서 자기동일적인 것에 머물지 않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민주적인 것의 본질적이고 독특하며 구성적이고 종별적인 가능성으로서, 그 역사성 자체로서 자기 면역의 또 다른 형식이며, 이 역사성은, 그것이 다른 어떤 정체와도 분유하지 않는 내재적인 역사성이다”(Derrida 2003b:146). 따라서 데리다는 자기 면역성을 지닌 민주주의, “도래할 민주주의야말로, 설령 전쟁이나 혁명을 불어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데리다는 슈미트-하이데거가 지적하는 전쟁의 일상화[常態化]에 맞서, 자기 면역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확실히 도래할 민주주의는 타자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타자와의 죽음을 건 싸움을 피하고, 타자를 끌어들이면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대하여 칸트적인 세계시민국가(코스모폴리스)에서의 도래할 민주주의가 전쟁을 근절할 수 없다고 해도, 전쟁을 가능한 한 파멸적이지 않는 것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외적(外敵)의 절대적 배제라는 면역이 아니라, 자기 면역의 고통을 동반하면서 시스템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외부의 타자를 내부의 타자로 치환한 것일 뿐 아닐까. 거기서는 외부가 없어지기 때문에 외적과의 전쟁은 없어질지도 모르지만, 내적과의 내전은 없어질 수 없다. 그때 외적에 대한 면역보다도 자기 면역이 파멸적이지 않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더 이상 평화의 가능성은 남겨져 있지 않을까


(계속)

2. <좌담회> 10년 후의 자크 데리다 (2)


우카이 사토시(鵜飼哲)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

 

이 글은 자크 데리다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좌담회의 기록으로일본의 사상』 2014년 12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원래 각주는 없었으나 가독성을 위해 문헌 등은 각주로 옮겼습니다

 


II. 동물론이 지닌 의미

무엇을 지향[목표]하는가

미야자키 : 지금의 번역론부터 동물론으로 화제를 연결시키고 싶습니다. 우카이 씨는 앞서 언급한 L’animal que donc je suis을 번역하셨는데, 이것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언어론도 번역론도 아닙니다. 데리다의 작업 속에는 다른 페이스의 것으로, 생명이라는 언어를 넘어선 리얼한 것에 대한 데리다의 직접적인 접근법이 보이는 것이라며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번역하신 우카이 씨께서 전체의 인상을 포함해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카이 : 이 책은 19977월에 스리지 라 살(Cerisy-la-salle)에서 열린 콜로퀴에서 한 강연인 자서전적 동물[自伝的動物]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하지만 텍스트 상의 문제가 있어서, 콜로퀴의 보고서로서 출판된 책[각주:1]에는 실제로 말한 것 외에 성서해석에 관한, 강연에서는 생략된 부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콜로퀴의 마지막 날, 요청(request)에 응해 즉흥적으로 한 하이데거론도 있습니다. 이번에 번역한 책은 이것들을 합쳐서 저자의 사후에 출판된 하이브드리한 책입니다.

  미야자키 씨는 언어론에서 동물론으로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특히 서양에서는 언어를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전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언어론은 1960년대부터 이 전통의 인간중심주의적인 구조를 문제 삼았습니다. 에크리튀르(기록, écriture)의 사유도 이로부터 성장해 온 셈이기에, 데리다 자신의 이 책 속에도 동물은 항상 계속해서 자신의 물음이었다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주로 5명의 철학자이 동물에 대해 한 언급이 분석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 칸트, 하이데거, 레비나스, 라캉입니다. 번역하면서 느꼈습니다만, 이런 라인업을 어떤 원근법으로 본다면, 데리다의 사유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선택됐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에 관해서는 다소 유보가 필요한데요, [데카르트가] 모든 점에서 자신의 대극에 있는 철학자라고 반드시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어떤 가까움조차 느끼고 있었던 거겠죠. 이들 사상가들은, 그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동물에 관해서는 심하게 멀다이 책 전체를 통해 그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이 미묘한 거리입니다.

 

미야자키 : 데카르트는 코기토의 철학자로, 신체와 정신의 분할이 기초(base)에 있다고 여겨지지만, 데카르트의 신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이죠.

 

우카이 : 정념론등이 바로 그렇죠.

 

미야자키 :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얼마나 비-이원론적인 것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가, 혹은 비-이원론적인 것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는가가 동물론을 통해 보이게 됩니다. 단순한 동물기계론이 아닌 동물론은 오히려 데카르트를 상대로 함으로써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카이 : 물론 데카르트 연구자로부터는 비판이 있었습니다만, 데카르트를 다룬 부분은 이 책에서도 가장 힘이 들어가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책에서 데리다는 어떤 작업을 했는가. 지금까지 그가 했던 것과 공통점도 많습니다만, 5명의 철학자들이 동물에 관해 여기서는 아무래도 정신분석적 용어가 필요합니다만 부인(否認)’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몸짓을 드러내고 있는 곳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5장과 성찰두 번째에서 보이는 동물기계론을 다른 테제로 대치하고 단순히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어떤 대목에서 데카르트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듯한 것과는 다른 것을 말해버리는가에 주의합니다. 그와 같은, 이른바 징후()적 독해의 실천입니다. 다만, 실제로 번역한다면, 예를 들어 라캉의 한 구절에 관해 데리다는 여기서는 불안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한 번 읽고서는 [그렇게] 느낄 수 없었습니다(웃음). 이런 상태이기에, 꽤 미묘한 독해방식을 하고 있습니다만, 번역자로서는, 그러면 인용되는 라캉의 텍스트를 불안이 느껴지도록 번역해야 할까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도중, 과연 이것은 확실히 부인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다른 저자의 텍스트를 번역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경험으로, 데리다를 번역하는 것, 혹은 데리다를 읽는 것은 모종의 전이(轉移)’의 경험이기도 하며, 요컨대 최면술과 같은 곳도 있습니다. 작업의 결과는 읽어주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 책의 베이스가 되고 있는 강연을 한 콜로퀴는 []전적 동물이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말했습니다만, ‘[]동물이라는 두 개의 주제는 데리다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이 점에 관해, 최근 일본어 번역본이 나온 엘렌 식수(1937년 생)와 데리다의 공저 베일(원저는 1998)[각주:2]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식수의 사부아르(Savoir)라는 작은 텍스트의 뒷부분에, 데리다가 1990년대 중반 브라질로 강연 차 여행을 했을 때 기록한 일기식의 텍스트가 붙어 있는 책으로, 맹인의 기억 : 자화상 및 그 밖의 폐허(원저 1990)[각주:3]의 속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제목이 된 베일’, 이것은 당시 프랑스에서는 주지하듯이 정치문제였던 것을 생각해야만 하겠죠. 베일이라고 하면 이슬람의 것만이 부각되기 쉽습니다만, 쿠란에는 머리에 쓴 베일에 관해 예언자의 친족 여성 이외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일신교의 성전 속에서 처음 나온 것은 사실 바울이며, 여성을 베일에 의해 격리하는 사상은 오히려 기독교에서 생겨났습니다. 본서에 수록된 누에라는 텍스트에서 데리다는 바울의 여러 가지 서한과 프로이트의 텍스트 독해에다가, 알제리에서 지낸 소년시절에 누에를 길렀던 자서전적 이야기를 포갭니다. 누에는 페니스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내뱉은 섬유로 감싼다는 의미에서 성적인 결정 불가능성을 체현합니다. 이 기묘한 관찰이 데리다 자신의 성적인 성숙 과정과 어떻게 겹치는지를 상당히 외설스런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지만, 다소 거칠게 말하면, 인간의 자서전동물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원래 있을 수 있느냐라는 것이 여기서의 데리다의 물음입니다. 동물에게 보여졌다는 것이 말해야 할 경험으로 생겨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부인의 시작이겠고, 데리다가 다룬 철학자들만 해도 동물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론가로서는 동물의 경험을 말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이라는 자[]전적 텍스트를 남겼다는 의미에서는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억압하지 않았던 철학자로서 데리다에게 가까운존재입니다만, 그것과 동시에 동물이 없는 세계를 가정하기도 합니다. 데리다는 방법서설에 관한 의문에 응답하는 데카르트의 1638년의 편지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데카르트는 코기토가 사유 실체인 이상, 이미 연장에 편입되어 있는 신체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가 살아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숨을 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때 앞에서 니시야마(西山) 씨가 말한 나는 있다, 고로 나는 죽는다라는, 목소리와 현상에서 후설에 입각해 제시된 테제의 함의가 동물론이라는 틀 속에서, 데카르트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철학사와의 관계

고쿠분 : 앞서 우카이 씨가 데리다의 주변성(marginality)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가 항상 거인을 다룬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후설, 데카르트, 칸트처럼 철학자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예를 들어 우시아와 그람메(Ousia et Gramme)(철학의 여백수록)라면, 통속적인 시간 개념과 그렇지 않은 시간 개념은 결국 구별할 수 없다는 형태로 철학사의 한복판에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탈구축하고, 철학사의 정경 자체를 바꾸게 된다는 방식입니다. 반면, 제가 열심히 씨름하고 있는 들뢰즈는 원래 데카르트는 거론하지 않고 스피노자를 논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루지 않고 루크레티우스에 대해 논하기도 합니다. 이로부터 들뢰즈의 방식은 주변적인가(marginal) 아닌가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단순히 선호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논의 대상의 선택에 관한 차이는 아주 흥미로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선호도 있을 것이고, 체질[기질] 같은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는 왕도(王道)의 철학사를 피하고 다른 철학사를 만들고자 합니다만, 데리다는 정반대로, 왕도의 철학사를 정면 돌파하려 합니다. 철학사적 텍스트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을 내면에서부터 뚫고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쿠분 : 이것에 관해 굳이 우직한 의문을 제시한다면, 형이상학을 탈구축한 뒤에 철학은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철학은 이제 타락했다, 그래서 예전에 있던 지식을 사랑하는 것(필레인 토 소폰[φιλείν τό σοφόν])”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데리다는 탈구축 이후의 철학의 광경을 어떻게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을까. 들뢰즈는 나는 형이상학자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철학이란 결국 형이상학이라고 들뢰즈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하이데거의 정통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형이상학과 대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 대결의 형태가 탈구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탈구축 후에 철학은 어떻게 되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계속 탈구축하는가, 아니면 다른 철학이 나타나는가? 이것은 데리다를 아는 사람이 품고 있는 소박한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야마 : 철학의 거인[거장]을 거론한 것은 교직(敎職)[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정도 있겠죠. 특히 1960년대는 아그레가시옹(교수자격시험) 대책의 복습교사였기에, 수험자용의 기본적인 철학사 수업을 했습니다. 게다가 데리다는 전통주의자라고 공언하고 있어서, 과도한 도그마와 보수(保守)에 이르지 않는 한, 구축된 것을 존중했습니다. 게다가 형이상학에 대해 말하면, 하이데거와 달리 데리다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형이상학은 목적() 없는 마감(clôture sans fin)”이며, 목적론으로 초극하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융통성 있고 거침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형이상학의 마감은 항상 어딘가에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기본적 이해입니다. 항상 탈구축의 도상에 있는 형이상학과 더불어, 철학은 어떻게 되느냐라는 견해입니다.

 

미야자키 : 결정적인 탈구축이라는 것은 없다. 이미지로서는,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물가와도 같은 .

 

우카이 : “To be continued”라는 느낌이군요.

 

미야자키 : 탈구축하면 도그마가 돌아오고, 그것을 다시 밀어낸다는 과정이 항상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느새 해안선은 침식되고, 지형이 바뀌어 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요.

 

고쿠분 : 그런 것이겠네요. 그런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와 부끄러움[수치]’

미야자키 : 동물론에 관해 우카이 씨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서전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책에서 데리다로서는 드물게 논한 대목에 관해서입니다. 패싱룸[passing room]에서 기르고 있는 고양이에게 알몸을 보이게 됐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에피소드가 얘기되고 있고, 더욱이 그것이 중심적인 문제 같은 형태로 파악되고[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텍스트를 기반(base)으로 접근하는 데리다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특이합니다. 우카이 씨에게는 <알몸>의 스승[각주:4]이라는 글이 있습니다만, 이 부끄러움에는 단순히 알몸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거나, 기르던 고양이에게 보여졌기 때문이라고는 끝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자체의 부끄러움을 노출시키는 경험이라고도 말해도 좋을까요. 그 체험이 동물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다른 저작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이루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겁니다.

 

우카이 : 이 책에는 고양이가 몇 차례 나옵니다. 처음은 아마 들뢰즈와의 관계를 암암리에 가정하고,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거울나라의 엘리스가 다뤄집니다. 집에서 고양에게 알몸을 보여줬을 때의 부끄러움에 관해서도 거듭 논합니다만, 그때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됩니다. 거기에 인간의 여성이 있었다면, 혹은 거기에 거울이 있었다면, 부끄러움은 더 커진다 등등, 마치 최악의 부끄러움을 상상하고 기뻐하는 듯합니다. 철학을 논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악화되어가는 부끄러움의 얘기로 돌아가고 또 다시 철학을 논한다고 하는 기묘한 순환이 보입니다. 확실히 자신을 알몸으로 할 각오가 없는 자서전등은 의미가 없기에, 이 주제들은 데리다의 루소에 대한 애착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예전의 할례고백[각주:5]에서는 자신의 할례에 관해 장황하게 말한 다음, “이렇게 자신의 페니스 얘기를 구체적으로 한 철학자가 있었을까등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퀴니코스파적 측면도 그에게는 있으며, 철학의 실천으로서 사람들 앞에서 알몸이 되어 보여주는 것도, 어쩌면 어떤 숨겨진 전통을 떠맡겠다고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데리다의 집에는 1980년대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마리에는 루크레티우스”(Lucirèce)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만, 다른 한 마리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아들인 피에르는 오이디푸스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집에서 왜 고양이는 그리스-로마계의 이름을 부여받았는지,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데리다 집의 정원에 있는 고양이의 무덤이 훗날 영화에 나옵니다만,[각주:6] 그 두 마리가 죽은 후, 아마 새로운 고양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텍스트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건이 강연 직전에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겠죠.

   “부끄러움의 문제를 생각할 경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1943)에 있는 부끄러움의 현상학적 서술을 고려해야 하며, 데리다도 유대인성에 관한 강연 아브라함, 또 다른 사람의[각주:7]에서 이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르트르뿐 아니라 라캉, 알튀세르, 푸코, 레비나스 등, 프랑스에는 시선[응시]”의 사유의 전통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 있고, [데리다] 자신도 그 전통 속에 있지만, 그 중 가장 이단적이지 않을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동물론에서 중요한 점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동물을 명명하기 직전이라는 시간이 설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 이전의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 이 무대를 설정한 신 자신은 그늘에 숨어서 그 과정을 예의주시 하고 있습니다. 이 신의 행동거지의 괴이함에 데리다는 관심을 기울입니다. 데리다 자신은 언급하지 않습니다만, 쿠란에서는 이 장면이 고쳐 써져 있습니다. 아담이 동물에 이름을 붙였다고는 하지 않고, 그 대신 아담의 귀에다[귀 밑에서] 신이 동물의 이름을 속삭이고 있습니다(쿠란2 암소). 창세기를 읽는 한에서는, 이름을 붙이는 능력을 인간이 신에게서 부여받고, 그 능력이 여기서 처음으로 발휘됐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 자체, 신의 전능성에 대한 침범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순수한 일신교이고자 했던 이슬람의 시원적인 종교적 직관 속에 있는 것입니다. 데리다는 똑같은 대목에 천착하면서, 인간이 이름을 붙일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그 순간 세계는 끝나버릴지도 모릅니다. 혹은 처음으로 의미가 개시되고 원래 역사가 시작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역사 이전의 묵시록적 사건의 가능성이, 고양이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장면과 겹쳐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리지 라 살의 강연에서는, 데리다가 제자들 앞에서 상상적인 스트립을 하고 있는 꼴이었기 때문에, 모두 올게 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일면 최후의 만찬과 비슷합니다만, 제자들은 형제가 아니라 동물의 위치에 놓여지고, 스승인 사람이 이것이 내 신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논문(어떤 정동의 미래 : <부끄러움>의 역사성에 관해)[각주:8]에서, 여기에는 죄의 문화부끄러움의 문화같은 기존의 이분법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된 제2차 대전 이후의 사상이 표현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가설을 세워 봤습니다. 들뢰즈도 말년에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이라는 모티프를 프리모 레비로부터 인용해서 중요한 고찰을 남겼습니다만,[각주:9] 하나의 시대의 사상으로서, 데리다도 같은 작업을 다른 스타일로 시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인종주의(racism)가 거세지고 있고 대항(counter) 행동의 참가자도 늘고 있습니다만,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 부끄럽다고 적힌 플랜카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입에 담기 쉬운 방식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것을 덮어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을 덮어둘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부끄러움, 책임=응답 가능성, 그리고 동물의 물음 사이에는 어떤 깊은 연결이 상정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 ‘시선[응시]’에 관해서는 미국의 사상가인 대너 해러웨이가 일본어로도 번역된 개와 사람이 만날 때 : 이종협동의 정치(원저 2008)[각주:10]라는 책에서, 고양이에게 보여진 데리다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상당히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데리다는 고양이에게 보여져도 자신의 느꼈던 부끄러움에 관해 물음을 제기했지만, 왜 고양이의 편에 서서 시선[응시]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동물학의 지식도 도입한 다음에 고양이의 시선에 관해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셈인데, 데리다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에 서서 탈구축하려고 했습니다.

 

우카이 : 데리다는 타자론의 하나의 전개로서 했기 때문이죠.

 

미야자키 :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데리다의 입장에서 보면, 해러웨이의 접근법은 너무 섣부르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대칭(symmetry)을 너무 간단하게 뛰어넘어버리는 것이니까요. 데리다는 철학의 역사 속에서, 혹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이 어떻게 흔들려 왔는가를 항상 묻습니다.

 

우카이 : 그런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알몸[벌거벗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 책에는 관철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 알몸(벌거벗음)은 바로 신체적 경계선이죠. 다양한 인간학적 가치가 기입되고 변용되는 경계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동물학적인 것을 들여오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해러웨이는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동물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하며, 철학적 담론을 중지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대신 데리다의 작업을 동물해방론이나 동물권리론 등의 접근법과 접속시키기 힘든 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카이 : 이것과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영어권에서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홀로코스트와 포스트모던 : 역사, 문학, 철학은 어떻게 응답했는가[각주:11]의 저자 로버트 이글스턴 씨가 이 책이 영국에서 ‘huge impact’였다고 듣고서는 놀란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어권에서는 그런 느낌은 받지 않습니다. 같은 시기에 철학적 동물론을 했던 사람으로서는 예를 들어 티에리 곤티에 등이 있고, 동물론을 축으로 몽테뉴와 데카르트 사이에서 사상사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자세하게 검토한 박사논문[각주:12]을 출판합니다. 하지만 그런 곤티에도 최근의 저작 동물의 질문 : 현대의 논쟁의 기원[각주:13]에서는 인간의 고유성이나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동물을 []하는 것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새로운 인간주의의 정초로 향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동물에 대한 공리주의적 관심이 분석철학적인 것과 대항하면서 존재해왔고, 거기에서 데리다의 작업을 수용하는 지평이 준비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프랑스어권에서 방어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많은 것은 역력합니다.

   데리다도 동물학적 식견은 참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동물 일반을 기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별 동물, 개체로서의 동물과의 관련을 탐색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은 그를 위한 작업의 공간을 여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때 그는, 예를 들어 언어처럼 인간에게 고유하고 알려진 것에 관해, 그것은 동물에게도 있다는 형태로 동물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라는 것을 인간이 정말로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척시킵니다. 그것은 이 책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철학적 동물론의 영역에서 매우 좋은 작업을 해 왔던 플로랑스 뷔르가의 현상학적 동물론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녀는 최근 또 하나의 실존[각주:14]이라는 책을 썼습니다만, 그 속에서 메를로 퐁티의 행동의 구조(1942)[각주:15]에서 동물의 실존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데리다의 작업을 토대로 재독해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설정은 자칫하면 동물들 중에서 어디까지 실존이 인정되느냐라는 얘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에서 문헌학자인 하인츠 비스만(Heinz Wismann, 1935-)이 시사하듯이, 예를 들어 온혈동물냉혈동물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집니다. 이런 작업으로부터도 얻는 바는 적지 않겠지만, 데리다 자신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방향으로 논의를 열고 있습니다.

 

자연과학과의 관계

고쿠분 : 데리다의 동물론이 경계선을 묻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그대로 좋으며, 저도 별다른 반론도 없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 논의에 그다지 큰 자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해두는 것이 정직한 감상입니다. 뭐든지 들뢰즈와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교사였던 들뢰즈가 쓴 교과서 본능과 제도(원서 1953)를 보면, 연어 연구나 거미 연구, 심지어 호르몬에 관한 연구 등, 이런 논의가 많이 나오며, 아주 구체적으로 동물과 본능의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교과서이기 때문에, 질문을 제기하고 학생들더러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그런 구체적 연구를 통해, 예를 들어 본능은 개체의 이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종의 이익이 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고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과 동물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저는 들뢰즈다운 방식이 재미있다고 느껴집니다. 데리다가 어디까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생각하는 것은, 탈구축이기 때문에 탈구축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만.

 

미야자키 : 일단 거기[이 논의]로 들어가보죠.

 

고쿠분 : 반면, 들뢰즈는 동물의 곁으로 바싹 다가섭니다. 물론 그런 것을 정말로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할지도 모르며, 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의문에 부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인간에게 고유한 것을 의문에 부친다는 논의 방식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면, 예를 들어 본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언제 이르게 되는가라는 소박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래도 동물과 인간에 관한 탈구축적인 방식에는 한계를 느낍니다. 탈구축적인 방식이 향하고 있는 소재와 그렇지 않은 소재가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정치에 관해서는 그 유효성을 강하게 느낍니다. 저는 정치상황에 대해 발언을 요구받았을 때, 기본적으로 탈구축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이 대상이 될 경우,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가 하면, 아무래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철학의 연구자는 동물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원래 연결이 거의 없잖아요. 연어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과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한테 가서 얘기를 들으면, 알 수 있는 게 많습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자신의 경험에 천착하고,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에게 보여지는 경험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도 상관없으나, 들뢰즈였다면 연어 연구자에게서 얘기를 듣기도 하고, 거미 연구서를 읽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 들뢰즈와의 대비에 관해서는 데리다의 강의록 짐승과 주권자에서는 들뢰즈가 정말로 동물을 묻고 있는지, 그 어조는 인간주의의 틀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뤄지고 있네요.

 

니시야마 : 들뢰즈는 어리석음(bêtise)은 동물성이 아니다. 동물을 어리석은존재로 만들지 않는 특유한 형식들에 의해, 동물은 지켜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어리석음을 진리나 오류의 판단과는 다른 초월론적 물음으로 간주합니다. 데리다는 이런 어리석음의 규정에서 들뢰즈의 인간주의를 지적하고, 오히려 어리석음의 주제에 인간과 동물의 식별 불가능한 경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쿠분 : 확실히 그런 의문은 있지요. 그것은 그래도 물어보면 좋겠지만, 앞의 탈구축적인 방식으로 향하는 소재와 향하지 않는 소재가 있는 게 아니냐는 논점에 관해 한 가지 말하면, 푸코가 구조주의에 관해 재미있는 것을 말하고 있고, 구조주의라는 것은 수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조주의는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 대상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하는 것예요. , 구조주의적으로 파악하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탈구축적으로 다룬 것이 유효한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니시야마 : 데리다의 항상 변함없는 질문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라마톨로지에 관해는 바로 자연과 문화의 경첩[이음매]을 묻고 있으며, 인간의 종언(철학의 여백수록)에서는 인간의 극한(limit)을 복수형으로 열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의 한계를 다양한 단절이나 이질적인 선에 의해 열고, ‘이성이나 로고스’, ‘기술’, ‘상실[]등과 같은 하나의 대립점을 자르고, 형이상학적이고 고전적인 인간주의(humanism)로 회귀하지 않는다는 것은 초기부터의 설정이죠.

   다른 한편, 동물의 물음에 관해서는, 자연과학과의 관계는 항상 궁금하네요. 아무리 철학자의 텍스트를 읽더라도, 생명과학의 전문가에게 물으면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남습니다. 실제로, 같은 대학의 생물학 동료에게 인간과 동물은 뭐가 다른가?”라고 물어보면, “차이는 없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동물도 웃으며, 언어도 기술도 갖고 있으며, 상실[, 애도]의 작업도 한다고 말이죠. 물론 실증과학으로서의 생물학과는 상이한 수준에서 텍스트의 탈구축이 있고, 그것은 그것으로 유효합니다만.

 

우카이 : 실제로 철학과 동물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동물 자체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이죠.

 

고쿠분 : 그렇습니다.

 

우카이 :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動物誌)가 철학적 전통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특이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물론 모두 자신이 조사한 것이 아니며, 어부와 사냥꾼, 목축인, 양봉가 등의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겁니다. 오늘날, 다른 한편에서는 동물에 관한 인간의 지식은 어디서 종합되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화의 동물적 기원[각주:16]의 저자인 도미니크 레스텔은 마사이족 사람들과 함께 사자 사냥을 하러 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마사이족 사람들이 사자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알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동물행동학자는 자기네의 지식이 동물에 관한 모든 지식 중에서 특권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아주 방어적으로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물과의 관계도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철학적 개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레스텔은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났을 때, 그는 데리다의 동물론을 몰랐기에 소개를 해줬습니다만, 고양이의 에피소드를 알고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설문조사였습니다. “동물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실증연구와 함께 레스텔은 동물을 다룬 소수자적인 철학자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채식주의의 문제도, 서양철학 속에는 확실히 있습니다. 근대의 철학에서는 주변화되어 버린 주제입니다만.

 

고쿠분 : 앙케트 따위를 바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거네요.

 

우카이 : 정말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데리다의 논의가 역시 탄탄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른 분야에 갖고 가도 제대로 통용된다는 것이죠. 제 자신의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도래할 민주주의 : 코다이라시 도로(都道) 328호선과 근대정치철학의 문제들[각주:17]에서는 도로문제라는 아주 구체적인 토픽을 다뤘습니다만, 그 속에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을 넣어도 잘 될 것입니다. 데리다는 인문과학의 서클 속에서 밖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강조하고 싶은 점이죠.

 

미야자키 : 독자의 문제도 있죠.

 

고쿠분 : 그렇습니다. 독자가 가두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는 데리다에 대해 사람들이 품고 있는 소박한 의문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습니다. 그것에 노출되지 않으면, 연구자 서클에서 밖에는 통용되지 않는 얘기로 끝나버립니다.

 

니시야마 : 응용 가능성과 관련해 말하면, 아까부터 지적되고 있듯이, 미국을 시작으로 하는 앵글로색슨계와 데리다 사상의 접속이라는 의미에서는 동물의 테마는 침투하기 쉽습니다. 이유는 4가지로, 벤담부터 피터 싱거에 이르는 동물론의 공리주의적 해석의 전통이 있다는 것,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이 반-휴머니즘과 친화력이 좋다는 것, 인간을 남자로서 표현하는 것의 탈구축이 페미니즘과 친근성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동물의 권리 문제와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데리다는 도래할 세계를 위하여에서도 말하듯이,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권리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등의 가치 전환을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탈구축의 전략은 항상 이중으로, 더욱이 대립하는 이항의 결정 불가능한 문턱까지 따지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권리 확장과는 다른 방식과 발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미야자키 : 대형 유인원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피터 싱거와 같은 논의[각주:18]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종차별을 들여올 위험이 있습니다. 원래 권리는 인간의 편의 사정에 의해 산출된 개념이며, 오히려 그런 한계로부터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1. L’animal autobiographique : autour de Jacques Derrida, sous la direction de Mariel-Louise Mallet, Galilée, 1999. [본문으로]
  2. Hélène Cixous et Jacques Derrida, Voiles, Galilée, 1998.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Mémoires d’aveugle : L’autoportrait et autres ruines,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1990. [본문으로]
  4. 鵜飼哲, 「<裸>の師」, 『思想』 2005년 1월호 ; 『자키 데리다의 무덤(ジャッキー ・デリダの墓)』, みすず書房, 2014년 수록. [본문으로]
  5. «Circonfession», in Geoffrey Bennington et Jacques Derrida, Jacques Derrida, Seuil, 1991. [본문으로]
  6. 사파 파티(Safaa Fathy) 감독의 『데리다, 다른 곳에서(D’ailleurs, Derrida)』, 2000년. ‘객지에서’로 옮겨질 수도 있다. [본문으로]
  7. «Abraham, l’autre», in Judéités : question pour Jacques Derrida, sous la direction de Joseph Cohen et Raphael Zagury-Orly, Galilée, 2003. [본문으로]
  8. 「ある情動の未来──〈恥〉の歴史性をめぐって」, 『思想別冊トレイシーズ』 제1호, 2000년 1월 ; 『主権のかなたで』, 岩波書版, 2008년 수록. [본문으로]
  9. [옮긴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참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책에서 프리모 레비를 인용하면서 “인간이라는 것의 부끄러움”은 레비가 체험했던 아우슈비츠의 극한상황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장면에서도 느껴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자신의 시대의 외부에 있다고는 느끼지 않으며, 외부에 있기는커녕 반대로, 우리는 자신의 시대와 부끄러운 타협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부끄러움의 감정이,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이다. 우리는 희생자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희생자 앞에서(devant)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카이 사토시는 『주권의 저편에서(主権のかなたで)』에서, “희생자 앞에서 책임이 있다”에서 “앞에서”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우카이는 ‘앞에서’에서다가 ‘전방에서’를 덧붙이고, “희생자 앞에서, 전방에서 책임이 있다”고 번역한다. 그는 “전방에서”를 덧붙임으로써, 여기에 “아직 없다/아니다”가 울려 퍼지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 같다. 한편,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감정(sentiment)이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라는 말에서, 우리는 카프카의 소설, 특히 『소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부끄러워야 할 비열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동물들을 행하는(으르렁거리다, [구멍을] 파다, 방긋거리다, 경련을 일으키다)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 카프카의 단편소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동물들에 눈을 돌리라고 역설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들의 공저인 『카프카 : 소수자 문학을 위하여』가 아니었던가. 부끄러움이 나 자신의 존재방식을 넘어서고, 인간이라는 것 자체로까지 향하게 될 때, 우리는 “동물을 행하다(faire l’animal)”일 뿐이라는 말은 강렬하다. [본문으로]
  10. Donna J. Haraway, When Species Mee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8. [『犬と人が出会うとき──異種協働のポリティクス』] [본문으로]
  11. Robert Eaglestone, The Holocaust and the Postmodern, OUP Oxford, 2003. [『ホロコーストとポストモダン──歴史・文学・哲学はどう応答したか』, 田尻芳樹・太田晋 訳, みすず書房, 2013년]. [본문으로]
  12. Thierry Gontier, De l’homme à l’animal : Montaigne et Descartes, ou, les paradoxes de la philosophie moderne sur la nature des animaux, Vrin, 1998. [본문으로]
  13. Thierry Gontier, La question des l’animal : les origines du débat moderne, Hermann, 2011. [본문으로]
  14. Florence Burgat, Une autre existence : la condition animale, Albin Michel, 2012. [본문으로]
  15. Maurice Merleau-Ponty, La structure du comportment, PUF, 1942 7e éd. en 1972. [본문으로]
  16. Dominique Lestel, Les origines animales de la culture, Flammarion, 2001. [본문으로]
  17. 『来るべき民主主義──小平市都道328号線と近代政治哲学の諸問題』, 幻冬舎新書, 2013년. [옮긴이] 한자가 道路가 아니라 都道이다. 우리 식으로는 ‘국도’나 ‘지방도로’에 해당되는 듯하다. [본문으로]
  18. Paola Cavalieri & Peter Singer, eds., The Great Ape Project: Equality Beyond Humanity, St. Martin's Griffin; St Martin’s Gri edition, 1994 [パオラ カヴァリエリ & ピーター・シンガー) 편, 『大型類人猿の権利宣言』, 원저 1993년/山内友三郎・間関利貞敗 訳, 昭和堂, 2001년]. [본문으로]

 

 

죽음, 동물, 그리고 촉각

: 데리다에 의한 하이데거의 동물의 탈구축

20012-512(15)-008 - 파트릭 롤레드 - 죽음 동물 그리고 촉각 - 번역.pdf

20012-512(15)-008 - 파트릭 롤레드 - 죽음 동물 그리고 촉각 - 일본어.pdf

 

動物そして触覚

デリダによるハイデガーの動物脱構築

Patrick Llored, La mort, l’animal et le toucher

Une déconstruction de l’animal heideggerien par Derrida.

파트릭 롤레드 (프랑스 리옹3대학)

(일역 : 桐谷慧)

 

* 프랑스어 원본을 구할 수 없어서 일본어판을 옮겼으나, 맥락에 따라 한국에서 통용되는 단어들로 바꾸었다. 다만, 데리다의 원문 등은 수정했다. [2017321.]

 

데리다의 철학이 동물 윤리라는 분야에 속한다며 논해지는 일은 드물다. 그 동물윤리가 촉각의 윤리[éthique du toucher]로 논해지는 일은 더욱 드물다[주1]. 그렇지만 본고에서 변호되는 것은 이런 명제이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의 사상에서 촉각의 철학이라는 말로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기 전에, 데리다의 사상은 그 핵심에 있어서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vivant non humain에 대한 최신의 위대한 철학 중 하나라는 것을 말해두어야만 한다. 우리는 데리다의 탈구축이 물론 동물을 위해 작업[작동]하는 철학이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그것은 동물에 의해 반영되는 철학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동물의 물음이라고 몇 번이나 지목한 것은, 데리다의 철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데리다의 윤리라고 불려야만 할 것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다음처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동물들의 형상이 거기서는 큰 존재감을 갖고 있기에, 동물의 물음은 데리다의 철학의 핵을 이루고 있으며, 그 동물들의 형상이 차연, 흔적, 대리보충, 그리고 촉각이라는 그의 주요 개념에 본래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즉 이런 개념들은 동물성의 물음의 빛 아래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용서, 환대, 약속 그리고 정의 등의 개념 이것들은 무조건성이라는 관념에 신호를 보내고 있다 에 의해 묘사되는 데리다의 윤리의 전체야말로, 이렇게 새로운 종류의 동물윤리가 되기에 이른다. 데리다의 동물윤리는, 거기서 쟁점이 되는 사항 때문에, 앵글로색슨국가들에서 발전된 동물윤리와는 매우 다르다. 촉각의 물음은, 의심할 바 없이, 윤리의 물음과 관련된 데리다의 작업의 잘 알려진 말년의 방향성의 하나이며, 그리고 촉각의 물음 덕분에 탈구축은, 동물에 대한 배려에 큰 관심을 품는 다수의 연구영역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철학이 된 것이다.


[주1] 일역자toucher라는 단어는 닿다, 건드리다’, ‘접촉하다’, ‘관계하다등을 가리키는 동사이며, 또한 촉각혹은 접촉/닿기라는 의미의 명사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촉각이라는 의미를 가진 tact, ‘촉각을 가리키는 contact, ‘촉각의라는 형용사인 haptique라는 단어도 본론에서 사용되고 있다


 왜 촉각이 인간과 동물의 만남에 있어서 이렇게나 중요성을 띠는 것일까? 촉각은 다른 감각과 똑같은 하나의 감각인 것일까? 오히려 촉각은 다른 모든 감각의 존재 조건이 아닐까? 사실상 촉각은 삶[생명]의 유지에 필요 불가결한 감각, 즉 살아 있는 것의 삶[생명],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삶[생명]의 의미=감각sens이 아닐까? 촉각이 엄밀하게는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는 것,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촉각이 다른 모든 감각의 의미=감각le sens de tous les autre sens이라는 것, 사실은 이러한 것은 많이 있을 수 있다. 촉각이라는 단어에 의해 표면과 외부 사이의 접촉contact, 즉 외재성과의 접촉을 상정한 감각이 바로 문제가 되고 있는 한, 모든 감각의 의미=감각le sens de tout sens이라는 표현은 역설을 담고 있는데, 이 표현에 깊이를 주려고 한다[주2]. 그런데 우리는 안과 밖이라는 고전적 대립의 적절함이 상실된는 것을 데리다와 함께 보게 될 것이다. 데리다에 의해 이뤄진 동물의 촉각에 대한 질문의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을 덧붙여두자. 촉각의 철학은 서구철학 전체를 통해 전개된 아주 길고 풍부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데리다에 따르면, 이 전통은 어떤 중대한 문제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촉각중심주의haptocentrisme이다. 촉각중심주의란 촉각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 주어진 특권이며, 이 특권의 가장 폭력적인 귀결은, 살아 있는 것들의 공동체에 대한 바람직한 공-속으로부터 동물을 몰아내는 것이다. 데리다의 작업 전체는, 동물을 이 공동체의 대등한 구성원으로 하기 위해, 그리고 촉각을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인간도, 인간이 아닌 것도 을 삶[생명]으로 연결시키는 감각이라고 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촉각중심주의를 탈구축하는 데 있다. 촉각중심주의의 질문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전체의 탈구축이라는, 탈구축의 가능한 한 가지 해석의 안내선이 될 수 있다. 이 촉각의 물음에서 출발함으로써만, 그리고 또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포함된 촉각중심주의로 향하는 촉각의 질문의 지배적인 동향에서 출발함으로써만, 심지어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탈구축은 완전한 의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2] 일역자sens라는 단어는 감각’, ‘감관외에, ‘의미의의’, ‘존재이유등의 의미도 갖고 있다. «le sens de tous les autres sens»란 이런 다의성을 이용한 표현이며, 촉각이 하나의 감각sens이면서 동시에 다른 감각들의 의미 혹은 존재이유sens이기도 하다는 사태를 나타내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한 동물의 존재론은, 무엇에 의해 구성되어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촉각을 세계에 있어서 가난한 촉각toucher pauvre en monde이라고 하는, 어떤 촉각의 존재론으로부터 구성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동물은 접촉하지만, 동물의 세계의 가난함 때문에, 실은 동물은 스스로가 접촉하고 있다れる는 것을 모른다. 촉각이 세계에 있어서 가난하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상의 주장이야말로 데리다가 몇 개의 저작에서, 그리고 실제로는 그의 전체 저작을 통해 탈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데리다가 하이데거에 맞서 쓰고 있는 텍스트인데, 그것은 어떤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지각하는 것percevoir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냐는 것, 그리고 그 살아 있는 것과 그것에 고유한 죽음 사이의 관계, 이런 것들이야말로 문제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이데거가 동물의 Benommenheit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서(우리는 이 단어를 망연자실hébétude〕 혹은 방심accaparement이라고 번역하지만이 번역이 어렵고 독해의 모든 무게를 다 떠맡고 있다는 것을 안다), 동물의 Benommenheit에 있어서이 Benommenheit에 의해 정의되는 동물들은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제거되고 빼앗기고 뺄셈되어 있다[열림]과 현시된 존재에 있어서현시 혹은 현시성에 있어서동물에 대해 현시된 것의 엶[열림]에 있어서존재자 그 자체étant comme tel와 관련될 가능성스스로가 지각한 것을 그 자체로서 지각할 가능성혹은 존재자나 세계 그 자체en tant que tel와 관련될 가능성이다[주3].

Dans ce que Heidegger appelle la Benommenheit de l’animal (qu’on traduit, mais nous verrons que la traduction est difficile et porte toute la charge de la lecture, par hébétude ou accaparement), dans sa Benommenheit, eh bien, a l’animal defini par cette Benommenheit est alors retirée, prise, soustraite la possibilite de se rapporter a l’etant comme tel, la possibilite de percevoir comme tel ce qu il percoit ou de se rapporter a l’etant et au monde, en tant que tels, dans l’ouverture et l’etre manifeste, dans la manifestation ou la manifesteté, dans l’ouverture de ce qui se manifeste a lui.


[주3] 일역자Jacques Derrida, La bête et le souverain : Volume II (2002-2003), Galilée, 2010, p.104.

             [옮긴이] accaparement를 일역자는 전유(專有)’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것은 appropriation(자기 것으로 삼기)와는 달리 매점매석이나, ‘독점을 비롯해 독차지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 말로 Benommenheit얼빠져 있음’, ‘방심’, ‘사로잡혀 있음’, (세계에 대한 몰입이 심화된 양상인) ‘함몰등으로 옮겨진다. 아무튼 여기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독차지로 바꿔 옮긴다. manifestation manifeste, manifesteté 등을 일역자는 개명(開明)’이라고 옮기는데, 이것은 풀어보면 밝게 엶’, ‘밝게 열다이다. 한국어로는 표명’, ‘계시’[드러내 보임], 현시(Erscheinung), ‘현현(顯現, manifestation·epiphany)’ 등으로 옮겨진다. 여기서는 현시를 활용한다

 

하이데거에게 동물의 세계에 대한 관계, 그리고 즉 동물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맺는 관계는 망연자실이라는 관계이다. 망연자실은 스스로가 지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을 동물에게 금지하고, 동물의 그것에 고유한 죽음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러한 능력 없음[不能力],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동물의 정의 그 자체로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스스로가 지각한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에 관련된 동물의 능력 없음[不能力], 더 나아가 폭력적인 것에도, 동물에 대해 세계로서의 세계라는 존재자와 관련되는 것을 금지한다. 이것은 동물이 그 자체로서의 자기 자신과는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일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동물 자신에 의한 이 세계의 지각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동물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것은 죽음의 문제에 중대한 귀결을 가져다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동물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가난함, 그리고 동물의 스스로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의 가난함 때문에, 동물은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 자체로서는 지각할 수 없다. , 살아 있는 것들이 이 똑같은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적인 관계의 하나, 그 관계는 존재할 수 있으며, 지나갈 수 있으며, 현실에서는 끝에 의해서, 즉 내게 고유한 소멸에 의해서, 내게 고유한 죽음에 의해서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논의는마치 죽음이 투명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나와 죽음 사이에 있는 지식이라는 관계, 마치 죽음이 그런 관계를 경유할 수 있다는, 마치 삶[생명]과 죽음이라는 대립하는 상이한 두 개의 실체가 있다는 것 같다. 이 이중적 실체에 대해, 동물은 스스로가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중의 하나 그 자체에, 즉 삶[생명] 그 자체에 접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동물은 더군다나 실제로는, 정말로 이런 이중적 실체의 또 다른 측면, 즉 죽음에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동물은, 설령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으로서의 삶[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이와 똑같이, 내가 내게 고유한 죽음이라는 관념에 적어도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생명]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뿐이기 때문에, 동물은 스스로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자신과의, 그리고 세계 그 자체와의 모든 관계를 동물에 대해 금지하는 망연자실 혹은 독차지라는 상황, 동물이 정말로 그런 상태 속에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동물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세계에 대한, 즉 그것에 고유한 죽음에 대한 비관계를 명시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세 개의 열쇠가 되는 생각이 도출된다.

 

생각 1 : (동물의) [생명]의 근본적 구조로서의 독차지(Benommenheit), 죽음의, 죽음에 도달하는 것의 극히 정확한 가능성들을 묘사한다.

생각 2 : 동물의 죽음, 그것은 죽는다mourir일까, 혹은 끝난다finir일까?

생각 3 : 그래서 우리가 인간은 죽는다고 보는 한에서, 동물은 죽을 수 없으며, 그저 끝에 도달할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생명]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그 어떤 자체로서의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서의 동물, 그런 동물의 비-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거대한 주장이다. 동물은 삶[생명]에 대한 그 자체로서의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물은 죽음에 대한 그 자체로서의 관계없이 죽는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자기 자신으로, 세계로, 즉 그것에 고유한 죽음으로 접근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 주장의 폭력에 반대하기보다도, 오히려 다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하고 있다. , 모든 살아 있는 것을 그 자신에 있어서, 세계에 있어서, 그것에 고유한 죽음에 있어서 정의하는 것은 이성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적인 관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감성적인 관계란 촉각의 질문을 경유하는 것이며, 이 촉각의 질문은 인간들과 인간이지 않은 것들, 사유와 감성의 잘못된 대립을 넘어설 윤리적 가능성으로서이다. 촉각의 질문은, 하이데거에게서의 동물의 존재론의 탈구축이라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촉각에의 권리를 동물에게 인정한 철학자는 드물다. 그 적은 수의 철학자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성은 자세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이 논의에 있어서 데리다의 공헌을 완전히 이해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살아 있는 것의 철학은, 촉각을 생리학적이고 원초적인 한 기능으로 환원하는 생물학적 자연주의와 불가분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각은 살아 있는 것 그 자체의 존재에 필요 불가결한 유일한 감각이라는 이유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동물철학에 있어서 촉각에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촉각이라는 감각은, 그 박탈이 동물들의 죽음을 초래하는 필연적이고 유일한 감각이다. 왜냐하면 동물이 아닌 존재가 이 감각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동물이기 위해서는 촉각과는 다른 감각을 갖는 것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촉각이 없이는 다른 {감각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촉각기관은 흙으로도, 그리고 원소들 가운데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감각만을 결여해도 동물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동물이 아니고는 그 감각을 갖지 않으며, 또한 동물은 이것 없이는 다른 {감각}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관하여(435b 4-7)[주4]에서 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촉각을 살아 있는 것의 존재에 불가결한 유일한 감각이라고 하기 때문에,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 촉각이라는 감각의 존재를 동물의 존재조건으로서 고려하지 않는다면, 촉각이 거기에 속해 있는 동물 존재는 사고될 수 없다. 그래서 동물에게 촉각은, 그것 없이는 동물의 삶[생명] 그 자체가 질문에 부쳐지게 되는, [생명]의 유지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촉각과 동물의 삶[생명]과의 사이뿐만 아니라, 촉각과 동물의 죽음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도출된다. 만일 촉각이 살아 있는 것의 삶[생명]을 낳는 것이고, 데리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열쇠인 표현을 거론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생명]과 촉각 사이의 공외연성coextensivité이 있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한 발견이란, 촉각을 죽음의 시련épreuve de la mort에 걸었다는 것, 촉각을 바로 삶[생명]과 죽음의 물음으로 삼았다는 것이리라. 데리다는 촉각, -뤽 낭시를 건드리다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동물적 생명과 촉각 사이의 이 본질적인 공외연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측정mesurer한 것이다. 그는 또한 이 공외연성을 죽음의 시련에 의해 설명한다. 시각, 청각 혹은 미각을 박탈당하더라도, 동물이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촉각이 결여되기에 이른다면 동물은 지체 없이 죽는다. 반대로 (그렇지만 이것은 같은 현상의 다른 측면인데), 촉각의 과잉[초과]적 강도intensité excessive가 건드릴[촉각할] 때에도 동물은 죽는다. 감각적인 것의 과장법hyperbole[주5]은 그때, ‘우리가 그것에 의해 삶[생명]을 정의했던이 촉각의 기관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촉각의 이 중용=측정mesure, 이 절제modération, 바로, 어떤 유보réserve가 그것을 과잉(exagération)의 일보직전에서 붙들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 [생명]에 도움이 되기를 계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Cette coextensivité essentielle de la vie animale et du toucher, Aristote la mesure. il l’explique aussi à l’épreuve de la mort. Privéde la vue, de l’ouïe ou du goût, l’animal ne meurt pas nécessairement. Or il meurt sans retard si le toucher vient à lui manquer. Inversement (mais c’est l’autre face du même phénomène), l’animal meurt aussi lorsque l’intensité excessive du toucher le touche. L’« hyperbole » du tangible en vient alors à détruire l’organe de ce toucher « par lequel nous avons défini la vie » (435 b 10-16). Cette mesure, cette modération du toucher, ne peut-on dire quelle reste au service de la vie dans la seule mesure, justement, où quelque réserve la retient au bord de l’exagération?”[주6]


[주4] 일역자〕 『について, 中畑正志訳, 京都大学学術出版会, 2001, 184.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 유원기 역주, 궁리, 2001, 252.]

[주5] 일역자저자는 감각적인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sensible이라고 쓰고 있으나, 인용된 촉각의 데리다의 원문에서는 촉지 가능한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tangible이라고 되어 있다

[주6] J. Derrida, Le toucher, Jean-Luc Nancy, Galilée, 2000, p.61.〔『触覚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にれる松葉祥一榊原達哉加國尚志訳青土社200695-96


데리다에게 촉각의 중요성은 촉각이 끊임없이 따르고 있는 아포리아와 관계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동물의 삶[생명]이 필연적으로 촉각에 의존하고 있다면, 같은 때에 같은 장소에서, 촉각이 과잉[초과]적 강도라는 형태를 취해 나타날 경우에는, 죽음 그 자체가 촉각으로부터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것의 과장법[주7]은 이 과잉[초과]적 강도에 의해, 동물 자신에 대해 휙 돌아서서 덤벼드는 자기-면역의 과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삶[생명]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자살을 언급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촉각은 다른 감각들과는 달리, 데리다의 윤리의 중심적 개념인 파르마콘의 논리logique du pharmakon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르마콘의 논리에 의해, 촉각이라는 이 특이한 감각은, 살아 있는 것의 핵심에 동물의 -la-vie-la-mort[주8]를 세우는 것이 되며, 또한 유보개념에 입각한 윤리와 분리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윤리는, 유보 개념에 의해, 그것에 외재적인 형식적이고 규범적인 규칙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파르마콘적 해석에 의해 이해된 동물의 신체 그 자체에 기초한 것이 된다.


[주7] 〔일역자감각적인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sensible촉각으로부터의 직전의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앞의 옮긴이 주에서도 지적했듯이, 데리다의 원문에서는 촉지 가능한 것의 과장법hyperbole du tangible이다

[주8]  일역자-la-vie-la-mort는 데리다가 자주 사용한 표기. “생사la vie la mort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생명]과 죽음을 이어 적음으로써, 양자의 분리 불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데리다는 1974년부터 75년까지 생사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데리다에 의한 동물의 촉각

촉각자기비자기사이의 다양한 경계가 창출되는 공간에 살아 있는 것들의 각각이 예외없이 기입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래서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의 만남[마주침]의 감각이다. ‘자기비자기사이의 다양한 경계에 기초함으로써, 접촉과 사건으로서의 만남이 가능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그리고 그를 넘어서, 촉각은 다른 감각들과는 달리, 살아 있는 신체에 공외연적이라고 가정하자. 또한 마찬가지로, 또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먹는 것은 촉각에 속한다고 가정하자. 그런 경우, 애도에 따른 체내화(incorporation)는 어떻게 되고,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여전히 삶[생명]의 살아 있는 한 계기일까? 물론이다, 그것은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그것은 여전히 죽음을 삶[생명]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생명]의 살아 있는 이 계기, 이것은 내화intériorisation일까 아니면 배출expulsion일까? 그것은 건드릴 수 없는 것의 촉지-가능하게-되기devenir-tangible일까, 혹은 반대로, 촉각적tactile육체, 촉각하는 것과 촉각되는 것의 촉지-불가능하게-되기devenir intangible를 산출하는 이념화idéalisation, 정신화, 혼화魂化, animation인 것일까? // 질문들의 이 모체는 어떻게 세계의 질문을 탄생시키는 것일까? 그리고 유한성의 질문을. 왜냐하면 촉각이 다른 감각들 중의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면, 이 점으로 나중에 돌아가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촉각이 모든 유한한 실존에 도래하는 것을, 이 실존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것이든, 그 어떤 존재자이든, 유한한 실존에 도래하는 것을그 실존에 대해 현전화시키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그때, 촉각은이 현전화의 증여에 의해, 그것에 있어서, 혹은 그것으로부터 현전화가 고지되는 바의 한계를 표식한다Supposons, selon Aristote et au-delà, que l’haptique, à la différence des autres sens, soit coextensif au corps vivant. Supposons aussi que manger, comme le dit encore Aristote, relève du toucher. Que devient alors et que signifie l’incorporation selon le deuil ? Encore un moment vivant de la vie ? Bien sûr, comment pourrait-il en être autrement ? Encore faut-il inclure la mort dans la vie. Ce moment vivant de la vie, serait-ce une intériorisation ou une expulsion ? Un devenir-tangible de l’intouchable ou au contraire une idéalisation, une spiritualisation, une animation produisant alors un devenir intangible du corps tactile, du touchant et touché ? // En quoi cette matrice de questions donnerait-elle naissance à la question du monde ? Et à la question de la finitude ? Car si l’haptique n’est pas un sens parmi d’autres, si d’une certaine façon, nous y reviendrons, il n’est même pas un sens, stricto sensu, c’est qu’il rappelle à toute existence finie ce qui vient à elle : pour lui présenter quoi que ce soit, quelque étant que ce soit, mais en marquant, par le don de cette présentation, la limite à laquelle ou depuis laquelle une présentation s’annonce.”[주9]


[주9]  J. Derrida, Le toucher, op. cit., p.67.〔『触覚前掲104-105


따라서 만약 동물의 살아 있는 신체와 촉각 사이의 공외연성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양자의 촉각적 공동체의 승인이라는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면, 역시, 이 공외연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지닌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진적인 논의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된다. 공외연성은, 우리의 동물들에 대한 관계를 철저하게 재고시키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윤리적 관심이야말로 공외연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가장 급진적인 의의를 주도록 데리다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음으로부터 삶[생명]을 분리하는 반면, 데리다는 공외연성이라는 이 개념을 통해, 동물이라는 살아 있는 것을, 촉각에 의해 죽음과 삶[생명]에 동시에 연결된 존재로 본다. 동물은 그래서, 촉각에 의해 자신의 삶[생명]-죽음에 대한 관계의 한계들을 끊임없이 세우는 존재인 것이다. 동물의 삶[생명]-죽음에 대한 관계는, []화와 배출로 이루어진 이중적 운동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 촉각을 통한 과정으로서의 내[]화는, 여기서는,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촉각은 자기 접촉un se toucher이 된다는 사태를 의미한다. 촉각이란, 우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접촉하는[자기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다. 데리다가 모든 동물에서 발견된 내[]화의 현상에 의해, 동물이라는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생명]은 스스로를 접촉하는 것이다. 어떤 살아 있는 것에 있어서, 살아 있는 것이란 스스로를 접촉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접촉하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타동성他動性transitivité이라는 이 작동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접촉하는 것의 사활을 건 필연성 없이는 모든 존재는 불가능하며, 무와 관련될 것이다. 동시에 이 스스로 자신을 접촉하는 것은 아포리아라는 형태를 취해 나타난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신을 접촉하는 것이란 타자를 접촉하는[타자를 건드리는] 과 동시적인 것으로서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데리다가 배출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촉각이 열리게 된다.

촉각이 그러한 배출이라는 이 삶[생명]의 계기에 의해, 무엇이 의미되고 있을까? 살아 있는 것의 핵심에 있는 배출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동물이 존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촉각을 외재화[외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동시에,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이 작동에 연결된 위험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이 작동은 촉지 가능하게 되기를 불러일으키고, “촉지 가능하게 되기는 데리다의 동물 윤리가 직면하는 문제에 신호를 보낸다. 그 문제란 접촉할 수 없는 것l’intouchable의 질문이다. 촉각의 질문이 따르고 있는 아포리아를 가리키는 것은, 접촉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단어이다. 이하가 아포리아의 매우 복잡한 전모이다. 만약 촉각에 의해서만, 그리고 촉각에 있어서만 동물의 삶[생명]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자신을 접촉하는 것이더라도, 타자를 접촉하는 것이더라도 타자로의 이 엶은, 즉 타인이 항상 그렇게 접촉하는 것touchant으로의 이 엶은, 감각으로서의 촉각의 핵심 그 자체에 숨어 있는 항구적인 위협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위험이야말로 데리다가 동물의 삶[생명]정신화spiritualisation라는 강한 용어로 부르는 바의 조건이다. 정신화는 접촉하기와 접촉되기touché사이에서, “촉각적 신체의 촉지-불가능해지기를 가능케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동물이 스스로에게 고유한 신체를 창출하는 것은 촉각에 의해서이며, 그 고유한 신체는, 타자의 촉각에 의해, 즉 촉각의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것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먼저 생각해두어야 하는 것은, 촉각을 구성하는 이 아포리아이다. 이 아포리아 때문에, 동물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접촉할 수밖에 없는 살아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안과 밖의 경계를 스스로 창출하는 살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한계를 정신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한계에 의해 동물은 스스로의 유한한 실존 앞에 놓이는 것이며, 타자의 유한성 앞에 놓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고유한 유한성 앞에 놓이는 것이다. 타자의 실존이 그러한 것과 똑같이, 동물의 유한한 실존은, 촉각에 의해 그 동물 자신에 도래한다. 그래서 촉각의 유한성에 의해, 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촉각이란 동물이라는 살아 있는 것의 내부에, 그리고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것과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의 관계의 내부에 한계들을 창출하는 감각인데, 그런 촉각에 의해 만남은 실현된다. 달리 말한다면, 촉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한계를 그려내는 것이며, 이 자아가 동물이라고 불리든 인간이라고 불리든, 이 동물 윤리에 있어서는, 그런 동물과 인간 사이의구별의 모든 존재론적 가치는 상실된다. 동물의 삶[생명]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촉발auto-affection에 대해 논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촉발이야말로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자신의 안에 타자를 맞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촉각의, 촉각에 의한 한계

이 한계는 촉각의 내부 그 자체에 있어서의 간격화espacement의 가능성이다. 촉각은 다른 감각들에 대해, 그리고 한계를 간격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산종된다. 사실, 촉각에 의해 수립된 한계는, 간격화에 의해, 그리고 간격화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며, 그 한계를 확대하여 도래하는 모든 것을 열고, 그것에 대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항상 공외연적인 법 아래에서이다. “그러나 이 한계는, 접촉tact, 사실을 말하면, 간격화의 준-초월론적 특권을 이렇게 확인하면서, 촉각과 다른 감각을 서로 접촉하게 한다. 그리고 간격화란, 테크네와 보철적 대체물에 자리를 주는 것이다Mais cette limite-ci fait se toucher le toucher et les autres sens, confirmant ainsi le privilege quasi transcendantal du tact, en vérité de l’espacement. Et de l’espacement comme ce qui donne lieu à la tekhnè et au substitut prothétique.”[주10]


[주10] Ibid., p. 137.同前230


간격화란 한계를 창출하는 것으로서의 촉각이라는 이 특수한 감각의 다른 이름이며, 그 한계에 기초함으로써 만남은 생길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이 서로 접촉한다는 것은 융합이나 동일화가 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만남, 양자 사이에서의 그런 만남의 조건이다. 융합이나 동일화는 데리다가 무매개적인 인접contiguïté immédiate이라고 명명한 무매개성의 환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무매개성으로부터 촉각을 떼어놓는 것[주11]이 문제이다. 바로 이 말은, 우리가 촉각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데리다의 동물철학을 선도하고, 우리에게 상식과도 철학적 양식과도 관계를 끊으라고 명하는 것, 탈구축의 표어이다. 촉각중심주의란 촉각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 특권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 촉각중심주의의 두 가지 주요한 형식융합과 동일화, 촉각이 무매개적인 감각 능력의 경험적 표현[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에 의해 도출되고 있다. 그런데 촉각이라는 감각 능력sensibilité haptique에는 그 어떤 무매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매개적인 것으로서의촉각sensibilité tactile이라는 개념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주12] 현상으로서의 촉각은, 경험적 촉각에 의해서는 접촉되지 않는다. 이렇게 데리다는 촉각에무매개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촉각을 단순한 하나의 감각으로 만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동물의 촉각의 철학을 창설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해온 다양한 구별을 뛰어넘기 위해, 촉각의 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런 구별들은, 현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세계를 분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에 의해 설명된다. 이 두 개의 세계 중 한 쪽은 동물성을 자연에 가둬둠으로써 자연결정론을 따르며, 다른 한쪽은 인간의 특성으로 간주되는 문화적 문맥주의를 따르고 있다.


[주11] 일역자〕 Cf. Ibid.同前230-231

[주12]  일역자이 대목에서는 둘 다 촉각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sensibilité haptiquesensibilité tactile라는 두 개의 표현이 나눠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고, 주로 학술용어로 사용되는 haptique라는 단어가, キネステーゼ 등도 포함한 촉각에 관련된 것 전반을 가리키는 반면,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tactile라는 단어는, 더 직접적인 접촉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고 간주된다

 

동물의 촉각의 법

동물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반성은 여전히 인간성과 동물성 사이의 구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데, 데리다의 탈구축은 이 구별을 뛰어넘겠다는 욕망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고 하겠다. 탈구축에 있어서의 이런 극복은, 촉각의 법의 존재에 의해 이뤄진다. 사실,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 있어서의 접촉을 완전히 단념해버리지 않고, 그것을 바로 중단하는 촉각의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른바 서양에 고유한 것인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형이상학적 분리 이전에 그 법은 항상 생기고 있다. 사실, 너무도 자주 동물의 촉각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무매개성은 촉각을, 생리학적이고 동물학적 기능에 대한 법칙을 따르는 자연적신체를 전제로 한 행위로 삼아버린다. 그런 경우, 촉각이란 동물의 물리적 신체에 관련될 것이다. 그러나 촉각은, 몇 가지 과학법칙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물질의 질문이 아니다. 만일 촉각이 자연현상으로 환원되어버린다면 자연 현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을 주는 것은 촉각인데 과학적 유형의 객관적 지식이 신속하게 촉각의 질문으로 처리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식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촉각에 있어서 촉각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 촉각에 있어서 그 단순한 물리적 출현[표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즉 모든 촉각의 중심 그 자체에 비-촉각이, 접촉될[건드려질] 수 없는 것에 속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촉각은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을 과학적 유형의 객관적 지식은 고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촉각은 끊임없이 타자에 대해 스스로를 열고 또한 스스로를 닫는다는 역설적 감각이며, 타자를 접촉하지 않는다는 가능성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감각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촉각의 근본적 법으로서의 자기-촉발이야말로 촉각에 고유한 삶[생명]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자기-촉발 덕분에, 촉각의 법이란, 객관적으로 생각되는 자연에는 결코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만약 자연이라는 단어가 알몸의 삶[생명]의 영역을 의미한다면, 동물의 촉각을 이끄는 법이란, 자연에는 결코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우리에게 인간성과 동물성 사이의 형이상학적 구별을 재고하도록 명하는 것은, 바야흐로,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이 촉각의 법이다. 촉각이란 인간들과 동물들에 공통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법은 촉각을 더 이상 자연에는 속하지 않는 하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에, 인간성과 동물성이라는이 범주들을 질문에 부친다. 이것은 데리다의 논의의 급진적인 결론이다. 만나게 되는 것은 두 개의 알몸의 신체가 아니라, 오히려 촉각을 매개로 한 관계를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그려내는 두 개의 방법이다. 다양한 이원론이 인간들과 동물들의 평화로운 관계를 방해하고, 폭력을 가져오는 것인데, 만남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이것이 이원론을 산출하는 대립들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탈구축이 발명하려고 추구해 왔던 것은, 인간들과 동물들의 평화로운 관계이다. 여기서는 자연이라는 단어를 결정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동물이 그런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촉각에 있어서, 촉각에 의해서라고 하는 한에서, 그 어떤 자연도 그 법을 동물의 촉각에 떠넘기는 일은 없다. 촉각의 선행성은, ‘주체객체의 범주도, 누가qui무엇을quoi이라는 범주도 물음에 부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동시에 촉지 가능한 것이기도 촉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동시에 주체이기도 객체이기도 하며, 누구이기도 하고 무엇을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촉각의 목적이란 탈구축이라는 것이, 즉 현전하는 개체성의 탈동일화라는 것이 드러난다. 달리 말하면, 촉각의 경험에 있어서는, 접촉하기와 접촉되기는 더 이상 분리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누구와 무엇을은 거기에 있어서는 더 이상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접촉하는 것celui qui touche, 마찬가지로 접촉하기도 접촉되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유의 범주로서의 촉각이 동물성 그 자체에 의해 탈구축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 보면, ‘누가혹은 무엇을, 접촉하는 것le touchant이나 접촉되는 것le touché을 결정하기 전에는 여기서 우리는 성급하게도 이것들을 행위의 주체 혹은 객체라고 부르지 않겠지만 촉각 일반에 관한 질문을, 촉각의 몇몇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더 이상 제기할 수 없다. 우선 접촉le toucher이 있고, 그 다음에 주어 혹은 보어에 의해 동사를 보충할 수 있게 해주는 이차적인 변양이 있는 게 아니다(무엇이 누구를 혹은 무엇을 접촉하다[건드리다], 누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접촉하다[건드리다])Or, a cet égard, il n’est plus possible de poser la question du toucher en general, de quelque essence du toucher en general avant de determiner le «qui» ou le «quoi», le touchant ou le touché que nous ne nous hâterons pas d’appeler sujet ou objet d’un acte. Il n’y a pas d’abord le toucher, et ensuite des modifications secondaires permettant de compléter le verbe d’un sujet ou d’un complément (quoi touche qui ou quoi, qui touche qui ou quoi).”[주13] 접촉le toucher은 없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사실상 이 사건에는 얼마간의 특이성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마주대한 접촉이라는 행위의행위자들의 예견을 동요시키는 것이며, 그 행위자들은 더 이상 주체와 객체라는 고전적 범주에 의해서는 사고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의 범주라는 주권적 지위에 있다고 생각되고 있는데, 이렇게 탈구축된 촉각은 인간의 모든 주권적 지위를 잃게 한다. 촉각의 물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객체 혹은 무엇을의 위치에 놓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이 접촉하기가 될 때, 마침내 동물에 대한 모든 주권성을 우리로부터 잃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동물과 인간의 만남이 생기기를 바란다면, 사건이라는 그 특이성에 있어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데리다의 동물윤리를 정초하는 것은 이 불가능성이다. 동물의 삶[생명]에도, 혹은 신의[생명]에도 똑같이 관련되는 것인 촉각에 의한 주권성의 탈구축을, 그 어떤 인간학적 한계도 중단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동물윤리에 있어서는 접촉contact으로서의 촉각, 즉 촉, tact으로서의 촉각이라는 이 사건만이, 현전하는 동일성의 탈구축을, 그리고 모든 공동체적 동일성의 해체를 행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확립되는 촉각에는 다음과 같은 전복의 힘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촉각은 근원으로서의 살아 있는 자기와, [] 박힌 혹은 접촉된 자기와의 사이에서의 항상적인 차연을 표식하는 대목이며, 접촉된 자기는 이 기원이라고 생각된 것을 끊임없이 차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현재가 열어젖혀지게 것은 촉각 덕분에 의해서이며, 이 열어젖힘은 접촉하는 것이기도 하고 접촉되는 것이기도 하며,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것이라는 것을 발견시킨다. 자기에의 현전은 그것은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에도, 인간이라는 살아 있는 것에도 관련되는 것인데 ― 〔촉각이라는사건에서 무탈하게 떠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분할 불가능한 주권성에 있어서 살려지게 된다고 생각되는 근원적인 절대자의 무구한 비분할[주14]이라고 데리다가 부르는 것, 이것을 물음에 부침으로써 성립한다. 촉각이 물음에 부치는 것, 그것은 이 현전의 형이상학인 것이다.


[주13] J. Derrida, Le toucher, op. cit., p.84.〔『触覚前掲138〕 〔인용할 때 저자는 촉각의 원문에 있는 따옴표를 생각했으나, 일본어로서의 읽기 쉬움을 고려하고 옮긴이의 판단에 따라 이런 따옴표를 번역했다.

[주14] 일역자이 표현은 기하학의 기원의 서문에서 볼 수 있다. Edmund Husserl, L’Origine de la géométrie, introduit et traduit par Jacques Derrida, PUF, 1962, p. 171.〔『幾何学起源田島節夫矢島忠夫鈴木修一訳青土社2003250



그래서 촉각은 살아 있는 것들의 확대된 공동체로의 타자의 무조건적인 맞아들임에 대한 질문을 개시한다. 그때 이후 이 공동체는, 환대라는 개념의 윤리적 힘에 의해 완전히 탈중심화된다. 어떤 공동체를 창설하는 분리의 법, 항상 이 분리의 법 아래에서이긴 하지만, 촉각에 의해 동물이 나를 맞아들인다. 왜냐하면 동물들에 권리를 준다는 이견이 많은 문제 이전에, 촉각의 물음은 동물들과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가능성 때문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동물들의 권리라는 관념은, 인간인 살아 있는 것과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것을 연결시키는 촉각적 공동체의 바깥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 촉각적 공동체는 접촉contact의 공동체이며, 즉 자기와의, 그리고 타자와의 -촉각co-tact의 공동체이다. -촉각은동물이 그러한 전적인 타자(tout autre)와의 함께avec이기 때문에, 자기와의 함께이기도 하다. 그래서 데리다의 동물 윤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촉각에 의해 동물과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분리의 법을 전제로 하는 특이한 동물 윤리를 잘 가다듬기 위해 필요한 것이리라. 이 분리의 법은, -속에 반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기는 것은 정반대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발명해야 할, 도래할 공동체는, 그것이 전적인 타자인 동물에 대해 열릴 수 있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이 집단을 포함하고 모조리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을 어떤 자연적, 유기적, 혹은 법-제도적인 전체성으로 제한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촉각은, 존재에 있어서, 존재처럼, 존재자의 존재처럼, 함께l’avec(cum 혹은 co-)[주15]의 접촉이며 그것은 타자와의 함께처럼 자기와의 함께이기도 한 함께이다 접촉으로서의 함께이며, -촉각으로서의 공동체일 것이다Le toucher serait ainsi, dans l’être, comme être, comme l’être de l’étant, le contact de l’avec (du cum ou du co-) avec soi comme avec l’autre, l’avec comme contact, la communauté comme co-tact.”[주16] 동물의 촉각의 물음에 의해 모든 정치제도를 쇄신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형식, 그런 정치의 형식에 있어서 우리가 발명해야만 하는 것은, -촉각의 공동체이다. 더 이상 상상적인 것도 인간중심주의적인 것도 아닌, 종차별적인 경계를 극복하려는 공동체를 발명함으로써, 민주주의 그 자체야말로 동물적이 되어야만 한다.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는 지금, 거기에-있는-동물의 민주주의(démocratie animale-là)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이다!


[주15] 일역자cum함께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전치사이며, co-는 프랑스어에서 함께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이다.

[주16]  J. Derrida, Le toucher, op. cit., p.133.〔『触覚前掲225

 

Patrick Llored, «La mort, l’animal et le toucher : Une déconstruction de l’animal heideggerien par Derrida». Reprinted by permission of Patrick Llored

桐谷慧東京大学ストラスブール大学博士課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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