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재장전 또는 긍정과 도주

: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성 유물론 소묘

マルクス・リローデッドまたは肯定逃走

ドゥルーズ/ガタリの偶発性唯物論素描

마츠모토 준이치로(松本潤一郎)

情況第三期第四券第十一号, 150-179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서 사고되어야 한다.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10

 

 

모순에 의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서술

역사를 다시[고쳐] 쓰는 <역회전(revolution)> 

혁명적 잠재력이 어떻게 현행화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전의식적 상태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정확한 순간에 실제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절단>이다.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인과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다시 쓰기를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AO, pp.453-4).

* 한국어판 : 혁명적 잠재력의 현행화는 이 잠재력이 물론 포함되어 있는 전의식적 인과성의 상태보다는 어떤 정확한 순간에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에 의해, 즉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에 의해, 말하자면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을 생산하는 인과성의 단절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L'actualisation d'une potentialité révolutionnaire s'explique moins par l'état de causalité préconscient dans lequel elle est pourtant comprise, que par l'effectivité d'une coupure libidinale à un moment précis, schize dont la seule cause est le désir, c'est-à-dire la rupture de causalité qui force à réécrire l'histoire à même le réel et produit ce moment étrangement polyvoque où tout est possible.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인과관계로부터 단절순간이라는 혁명의 잠재력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이런 미증유의 <실험> 시도의 제1탄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근본적 주장 중 하나는 이것이리라. 그리고 이 기획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일관한다. 그렇다면, 그러나 이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다음의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혁명으로서의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모순을 체현하는 계급의 한 쪽이, 그 모순의 최고 단계에 도달했을 때 저절로 찾아오는 필연적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 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먼저 계급은 기성의 모든 신분제·계층으로부터 탈코드화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AO, p.303), 그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계급이 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AO, p.302), 그리고 그 이름은 부르주아”(AO, p.303)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계급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계급-바깥(hors-classe)”이어야 한다(AO, p.303)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혁명의 내실은 이렇게 될 것이다, “혁명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권탈취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로부터의 자본그리고 노동도주라고.

이리하여 혁명은 이 말이 기존에 품고 있던 필연사관에 의해 뒷받침되는 뜨거운(쓰라린) 코노테이션(connotation, 함의)나중의 천 개의 고원의 화법을 구사한다면 마이너스 1”(MP, p.31)하고 있다. 즉 여기서 채용되는 입론 구성은 기본적으로 모순혁명의 원동력을 맡기는 노동자 본체론적 구상, 더 나아가 묵시록적 내지 목적-종말론적인 혁명구상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이로부터 들뢰즈·가타리를 읽는 것에 있어서는 주지의 논의, 즉 기존의 균일화된 노동자상 또는 계급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오히려 이로부터의 일탈로 규정되는 마이너리티도주로서의 혁명의 잠재력 맡기는 논의 구성이 대척적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 앞에서 인용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라는 의미에서, 역사의 역회전(revolution)”의 뉘앙스를 전면화시키게 되며, 그렇기에, 거기에 있어서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고 얘기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위와 같은 논점을 감안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는 역사의 인과관계로부터 해방된 무수한 사건이 이것임 hecceite”에 기초하여 개체화”(MP, p.318)하는 양상이, 거꾸로 스스로를 확립한 상태가 고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MP. p.32). 그것은 역사를 구성하는 질료-소재로서 생성변화의 질료-소재를 사용하는 것(MP, p.428)에 의해 역사로부터 누출-일탈해가는 을 측량하기 위해, 질료에 형상을 덧씌우는 형상-질료도식으로부터 질료-소재의 연속적 변화에 순종하는 질료[소재]-도식으로의 논점의 이행이기도 하다(MP, pp.509-12).

이렇게 매우 중요한 물음, 모순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를 기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들뢰즈·가타리에게 혁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상의 벡터에 있어서 역사에로 사건적으로 출현하는 이상, 그런 사람들의 도래는 사회 내부의 모순에 의해 담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 [내부] 모순들에 의해 정의된다는 주장은 잘못됐다(특히 맑스주의의 경우). 그러나 거대한 척도로 볼 때에만  그것은 참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커다란 척도로 사물을 본 경우에 한정된다]. 미시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그 도주선에 의해 정의되는데 이 도주선은 분자적이다”(MP, pp.263-4) On dit à tort ( notamment dans le marxisme ) qu'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contradictions. Mais ce n'est vrai qu'à grande échelle. Du point de vue de la micro-politique, 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lignes de fuite, qui sont moléculaires.

그렇지만 이러한 맑스주의자에 대한 강한 비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맑스주의자가 동요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로부터 곧바로 도출되는 맑스주의자에 의한 반문은, “그러면 모순에서 유래하지 않는 자본주의(분석)란 무엇인가?”라는 대척적인 질문이어야 하며,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려고 하는 미증유의 <실험>을 시도하려 들기 때문이다. ,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는 모순이 아닌 우발성”이라는 어휘로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가 기술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재생-이전된[재장전된] 맑스(Ma[t]r[i]x reloaded)가 있다. 모순이 아니라 우연에 자리잡고 자본주의 분석을 <실천>하는 맑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흠뻑 빠진자라고 들뢰즈가 규정한 맑스가 있다. 또한 그렇다고 한다면, 앞의 가차 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나중에 또 다른 어떤 인터뷰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은 맑스와 맑스주의에 의해 완벽하게 가로질러진 작품입니다. 현재 저는 저를 완전히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혹은 또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고쳐 쓰기라는, 거기에 있어서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역사의 역회전-혁명(revolution)”을 향해서, 이런 우발성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 분석이, 맑스로부터 논리 필연적으로 계승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춰서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당하며맑스가 정식화한 규칙들을 정확하게 따른다는 조건에서,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 회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정당하다”(AO, p.163), 또한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체의 음화(陰畵)이다”(AO, p.180)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도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단절>”,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는 논점을 상기한다면, “인과관계의 단절<우연성>으로서의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자본주의 분석이 불가피해진다는 것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세계사는 우발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며, 절단들과 극한[경계선]들의 역사이지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기”(AO, p.163 et passim) 때문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자본주의 그 자체가 <우발성> 내지 <조우>라는 <사건>에 의해 생겼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AO, p.265 et passim). 혹은 초기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으며, 거기에 노동자가 선행하는 시스템으로부터의라는 형태에 있어서 합류한다.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이런 사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들뢰즈가 말할 때,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연-조우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양태의 기술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까의 역사 ()기술의 문제와 관련해,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고 서술됐다는 것도 상기한다면, “욕망은 마음속의 <우발>적인 것이라는 것도 거기에는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욕망의 교차점이며, 그 하부구조, 그 경제 자체가 얼마나 욕망이라는 현상과 밀접하고 불가분한가를 알려면, 자본주의의 기원에 있는 우연성의 총량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죠라고 들뢰즈가 말할 때,우연성욕망”,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점차 밝혀지게 된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에 의한 강제적인 역사의 다시 쓰기라는 역회전-혁명적인 사태가 발생하기 위한 평면이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에 맹아적으로나마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 또한 그 근저에 자본주의그 자체의 우발적인 탄생이 가로놓여 있으며, 이 우발성과 욕망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러한 우발적 조우가 발생하는 평면이 내재평면혹은 공립평면이라고 불리며, 더 나아가 이 조우가 이른바 사건론으로서, “이것임이나 개체화같은 개념을 열쇠로 하여 세련된다는 것이 대략의 그 흐름으로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전망 하에서 이 글에서는 모순의 어휘가 아니라 우발성그리고 조우에 의거한,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의 작동양태, 나아가 그것에 평행선을 그리는 우발적인 세계사의 기술을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전에,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실험>의 전단계로서, 실험에는 가설이 불가결한 이상, 그들이 세운 <가설> 혹은 <실험>에 대한 일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때, 미셸 푸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발과 허구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탈코드의 게임은 우연에 맡겨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을 겪기 이전에 있는, 정보 시스템의 변조[교란] 내지 오인이다.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돌연변이와 진화 과정은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생명은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결코 자기의 장소를 찾아낼 수 없는 생[명]체에 도달한다. 그것은 방황하고 잘못되도록 운명지어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특이하고 유전적인 이 잘못이다. 푸코, 생명 : 경험과 과학

Au centre de ces problèmes, il y a celui de l’erreur. Car, au niveau le plus fondamental de la vie, les jeux du code et du décodage laissent place à un aléa qui, avant d’être maladie, déficit ou monstruosité est quelque chose comme une perturbation dans le système informatif, quelque chose comme une < méprise >. À elle aussi qu’il faut demander compte des mutations et des processus évolutifs qu’elles induisent. Elle également qu’il faut interroger sur cette erreur singulière, mais héréditaire, qui fait que la vie a abouti avec l’homme à un vivant qui ne se trouve jamais tout à fait à sa place, à un vivant qui est voué à < errer > et à < se tromper >.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시도한 미증유의 <실험> 및 그 준비로서 세운 <가설> 내지 <허구>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선으로, 여기서 푸코가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인쇄 허가를 내주었다고 하는 생명 : 경험과 과학의 논의를 경유하자. , 이 시점에서의 푸코의 논의로부터 소급적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의 논의 쌍을 우발-조우및 그것에 밀접한 <실험-가설>허구라는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이라고 말해도 좋은 과학사가 조르주 캉길렘의 과학인식론의 동시대적 의의를 논한 이 논고의 끝 부근에서, 푸코는 이번 절의 서두에 인용한 대목에서, 삶이란 오인에 다름없다, 생명이란 잘못일 수도 있는 것, “오인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생체는 우발성에 의해 횡단되고, “오류의 역량을 부여받았다. 오류가 진리와 짝을 이룬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짝을 창조-발명하는 것을 우리 인간이라는 삶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우발성이라는 점의 이해가 긴요하다. 그래서 진리를 이 근원적 오류로부터의 파생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개념이란 생명 자신이 이 우발성에 대해 주는 해답이라고 인정한다면, 오류는 인간의 사고 및 역사를 형성하는 것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진위의 대립, 진위에 부여되는 가치, 사회들이나 제도들이 이 분할에 연결되어 고려하는 권력의 효과 같은 것은 모두, 생명에 고유한 잘못될 가능성에 대한 뒤쳐진 응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류는 약속된 완성의 망각이나 뒤늦음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나 종의 시간에 고유한 차원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오류로서의 우발성에서 진리의 원천을 발견하는 이러한 관점은, 물론 니체의 계보학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위치되어 있을 것이다. 푸코 자신이 이 텍스트에서 니체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니체에서 보이는 이러한 진리에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불식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란 더없이 깊은 거짓말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에 가까운 동시에 먼 캉길렘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란 생명의 긴 연대기에 있어서의 가장 새로운 오류라고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진위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하고 얻은 가장 특이한 삶의 양식을 형성하고 있다, 생명은 그 궁극적인 기원 이래, 오류의 가능성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캉길렘에게 오류는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오류-우발성을 겪고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생체가 지닌 역량이다. “인간은 오류-우발성에 의해 삶을 촉발되며, 이 삶의 특이성을 해방할 수 있도록, 오류-우발성으로부터 그 삶에 있어서의 진리혹은 개념을 생산하고 벼려나간다. “오류란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이 말을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에 대한 헌사로 고쳐 읽는다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감행한 <실험>을 준비하는 <가설> 혹은 <허구>의 필연성이 이해될 것이다. 삶은 마음속 오류-우발성에 흠뻑 젖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근저에서부터 진리-허구이다. 그리고 그 일을, 그것을 측량하는 개념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긍정해야 한다. 이 뜻을 잃어버리지 않고,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을 뒤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들뢰즈·가타리로 돌아가자.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조우의 문제계로서 초점화되는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에서의 조우, 사유재산상품생산”, 혹은 자본가가 소유하는 변환 가능한 재화의 몇 가지 흐름자신의 노동력밖에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하나의 흐름”(AO, p.164), “노동자자본”, “생산자들의 흐름화폐의 흐름”(AO, p.266) 등 다양하게 표현되는 두 가지의 조우에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 요소가 조우하는 역사적 조건으로 들뢰즈·가타리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열거하고 있다. , “생산내지 자유로운 노동의 흐름 쪽에서의, “전제군주(야만) 기계”(통사적으로는 이른바 봉건제 사회”)로부터 문명(자본주의) 기계”(이른바 자본주의 사회”)로의 누출의 과정에 있어서의, 사기업화에 의한 토지의 탈영토화, 사적 소유에 의한 생산수단들의 탈코드화, 가정과 조합의 분리에 의한 소비재의 사적 사용, 노동으로도 기계로도 사용 가능한 노동자의 탈코드화가 그것에 해당된다. 다른 한편 자본의 쪽에 있어서는, 추상적인 통화에 의한 재화의 탈영토화, 상인자본에 의한 생산의 다양한 흐름의 탈코드화, 금융자본과 공공부채에 의한 국가들의 탈코드화, 산업자본의 형성에 의한 생산수단의 탈코드화가 관찰될 것이다(AO, p.267).

최종적으로는 노동자본의 두 개의 계열로 정제할 수 있는, 이상의 다양한 흐름의 변화 탈코드화 및 그 조우에 의해 생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가, “전제군주와는 그 지위status를 달리 한다. 이 점을 들뢰즈·가타리는 전제군주 기계는 공시적이지만 자본주의 기계의 시간은 통시적이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역사를 창조적으로 구축해가는 일련의 과정에 속속 등장한다”(AO, p.264)고 표현하며, 이것은 이른바 시계열적인 역사, 즉 진보나 발전 같은 19세기적인 역사관이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났다고 하는, 그 자체로서는 항식에 속한다고 말해도 좋을 사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 있어서 제시한, 인간을 가로지르는 시간”, 유한성에 기초한 노동”, “생명”, “언어의 변용의 틀 안에, 즉 푸코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역사,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그 자체를 기입하려고 하는, 또는 고쳐 쓰려고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실험>의 사정거리가, 엿보이게 될 것이다.

, 푸코에게 <역사>는 결코 시계열적인 사태의 계기(繼起)-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표(tableau)[굳이 번역한다면 표-] 내지 공간에 있어서의 미세한 균열의 발생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서두에 인용한 들뢰즈·가타리의 역사의 고쳐 쓰기, 이른바 진화-발전의 시계열상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는, 목적론적 의미에서의 혁명을 가리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간 내지 평면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존립평면내지 내재평면 위에 있어서의 자본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적인 조우를 가리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는 푸코의 뜻을 계승하고 있을 것이다. 천 개의 고원에서 비판되는 이른바 역사와는 별도의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우발적인 <역사>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사건, 여기서 이미 문제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는 앞서 말한 자본주의 발생역사적 조건중 하나인 노동의 탈코드화를, 이른바 통역사적 구분에 있어서의 로마 시대에서 보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로마 시대에 있어서도, 재산의 사유화로 인한 부동산의 흐름의 탈코드화, 거대한 재산의 형성에 의한 통화의 흐름의 탈코드화, 상품생산의 발전에 의한 상업의 흐름의 탈코드화, 재산 상실이나 프롤레타리아화에 의한 생산자들의 탈코드화 등의 사태가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전제군주 기계의 체제화에 있기 때문에 노예제를 산출하는것에 불과했다(AO, p.264)는 논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논점에 대한 각주에는 명백히 맑스에 대한 참조가 제시되고 있다. 다른 한편 자본의 계열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조건은 통역사적 시대 구분에 있어서의 봉건제시기에 이미 갖춰져 있었다고 간주되고, 사유 재산, 상품 생산, 통화들의 합류, 시장의 확장, 도시의 진전, 금납 지대·계약 임금의 출현 등 사태가 열거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들도 또한, 오히려 봉건적 하중·연관의 강화, 더욱이 원시적인 봉건제 단계 내지 노예제의 재건조차 산출하고 있는 등 사정을 이유로서, 그 자체로서는 자본주의 기계의 등장과는 반대의 결과를 이끌고 있다고 여겨진다(AO, p.264). 이런 통역사적 원근법으로부터 이탈된 지점에 있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고원개념이 확립되는 것은 명백하며, 이런 의미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얘기되는 고쳐 써진 역사, 이른바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도 명백할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가타리가 계획하는 필연성의 역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절단과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비연속적인 여러 가지 우발적 사건의 역사로서의 세계사의 기술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을 준비하기 위한 <가설>적 틀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곧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편력하는 기관 없는 신체위에서의 야만기계”,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며, 천 개의 고원에서의 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의 한 쌍의 개념에 의해 기술되는, “추상기계의 기계적 및 집단적인 이중의 어레인지먼트에 의한, 정주/유목, 포획/도주, 국가장치/전쟁기계, 홈패임/매끈함 등등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다.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된 모델과 천 개의 고원의 그것 사이의 최대의 차이점을, 전자가 생산의 양태에 중점이 놓인 반면, 후자에서는 예술·인문과학적인 분야를 넘어선 사회·정치적인 분야, 더 나아가 광물이나 동식물, 생물의 분야도 관통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교통내지 번역의 양태로 역점이 이동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서 생산 측면에서부터 유통 측면으로 논점이 전면적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 하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이렇게 제시된 <가설>적 모델을, 그것이 이른바 역사<실험> 재료-소재(matériaux)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갖고서 다름 아닌 역사바깥혹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을 찾아내려고 하는 <실험>이다 라는 점에서, 오히려 <허구> 내지 우화 만들기(fabulation)”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역사는 허구따위라는 것이 아니라, <가설>로서의 <허구>를 세움으로써 이뤄지는 <실험>에 있어서, 역사 속에 무수한 조우-우발성, 혹은 고원이 발견된다는 것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 푸코에게 개념은 우발성에 의해 생기는 <허구>였지만, 들뢰즈·가타리에게 그것은 동시에, 우발성과 조우하기 위한 <허구>이기도 하다. 우발-오류에 의해 촉발되고 세워지는 가설-허구에 의해, 거꾸로 우발적인 세계사야말로 이른바 역사의 도처에서 스캔[주사]될 수 있다고 하는, 이 상호적 관계 속에서 허구와 우발은 포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자본주의가 그런 세계사를 가능케 하는, <조우>로서의 출신을 갖고 있게 될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조우 : 몇 가지 이론적 <가설>

방법론으로서의 질적 분할

그렇다면 이 노동과 자본의 <조우>에는, 어떤 우연성이 발견되는가? 그것에는 자본의 축적에 밀접하게 관련되며, 다음의 두 가지 시기의 존재, 즉 우선 재화가 가치를 갖지 않고 그것을 모으는 데 유리한 기회”, 구체적으로는 재산-토지의 권리증서의 축적이 이뤄지는 시기, 이어서 이러한 재화의 가격이 오르고,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재화를 매각하는시기의 존재가 언급되며,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으로서 “‘가격혁명’, 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 원료자원[]에 대한 접근성, 도구·기계적 생산에 대한 호조건등이 있었다고 여겨진다(AO. pp.267-268). 따라서 여기서는 명백하게 맑스의 자본에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에 관련하여 노동자의 상품화<역사>적 우연성의 양상에 밀접하게 논해지고 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의 말은 결정적이다. , “모든 우연적(contingentes) 요인이, 이러한 조우적 연결들(conjonctions)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런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조우(rencontres)가 있었는가, 이렇게 명명할 수 없는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게 미치는 통제이다”(AO, p.268).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근저에서부터 우발적이며, “그러나그 생산양식을 침투시켜간다. 이런 그러나라는 이상한 접속이야말로, 자본주의는 오작동에 의해만 만사가 순조롭게 작동한다(les choses ne marchent bien qu’condition de draquer)”(AO, p.274)라는 원리를 알고 있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의 저명한 정식의 ()작동 양태에 다름없다. 그러나 그런 지적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앞서 열거한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우발-조우>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런 논의는, 맑스가 자본에서 논한 산업자본주의에서의 노동력의 상품화를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의 정당성이라고 얘기될 때의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를 가리킨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혹은 그 절단의 정의, 즉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한 모든 흐름의 조우적 연결은, 상인 자본에 의해서도 금융 자본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고, 그것들은 탈코드화나 탈영토화와는 다른 흐름, 다른 요소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AO, p.268). 그러므로 앞의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이 미치는 통제이다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하는 역사적 <우연성-조우> “이른바 본원적 축적, “그러나필요-필연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세계규모에서 반복되는 자본축적의 양태가, 아시아 등의 논의를 감안하여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고 명쾌하게 말해지고 있으며(AO, p.275), 이 관점은 물론 천 개의 고원에도 일관하고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반복되는 본원적 축적이라는 논점은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이 두 가지 잉여가치가 코드가 아니라 흐름 flux’의 잉여가치를 구성한다 사이의 영원한 불일치 나중에 보는 끝없는 이윤율저하경향라는 관점에서 분석되며(AO, pp.270-6), 게다가 이러한 자본주의의 작동의 핵심에 이윤율 저하 경향을 영원화하는 반생산”(anti-production)이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반생산주의로서의 무위(des-paevrement)의 공동체”(Jean-Luc Nancy)의 비판적 재검토를 요청한다 라는 논의가 이뤄지며,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본원적 축적이라는 폭력이, “포획장치또는 국가에 의한 이중적 폭력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비가시의 전제-메타수준으로 밀어 올린다 의 기제와 밀접하게 논의되고 있다(MP, pp.558-9)이라는 점을 확인해두자.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대해서는 마지막 절에서 역사와의 관계에서 다시금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앞으로 더 나아가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여기서는 철학자질 들뢰즈의 18번이라고 해도 좋은, 본성상 상이한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질적으로 분할하는 기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서도 완전하게 발휘되고 있을 것이다. 마조흐와 사드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결합관계도 발견되지 않은 듯이, 혹은 스피노자 윤리학이 서술 체계에 있어서 개체 사이에 나쁜 조우가 발생하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 자명하다고 간주되는 노임(salaire)”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화폐-자본, “본성상의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발-조우하는 양태가 <실험>적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가진 우발성에 기생하는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자본을 떼어내고, 각각을 그것 자체로서 파악함으로써, 모순에 기대는 것 없는 질적 분할에 의해 자본의 맑스가 여기서 재장전되고 있다. 거기서의 맑스는 이른바 유물사관에서 해방되고, “우발성의 세계사에 있어서 자본주의를 기술하는, 나중의 천 개의 고원에서 얘기되는 의미에서의 <역사가>이다. 따라서 맑스가 어떻게 재장전되어 있는가를 보기 위해, 질적으로 분할되어 각각 독자적으로 논의되는, 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코드의 잉여가치가 아니라 흐름의 잉여가치에 정위하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한다고 여겨지는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화폐의 이원성의 논의를 경유한 자본-화폐”, ②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형상-질료도식이 아니라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재장전된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도식의 반복으로서의 노동력을 둘러싼 논의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점을 감안한 위에서, 우발성 유물론에 기초한 재장전된 유물사관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논의되는 비신체적 형상으로서의 어레인지먼트”, “명령어등의 논점을 경유하여, “내재평면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1. “자본주의의 공리계의 표현으로 해석된 이윤율저하경향과 화폐의 이원성

맑스가 빠져 있는 예언”?의 하나로서 저명한(악명높은)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제창한다 이 방침은 천 개의 고원에서도 일관하고 있다(MP, pp.578-9) . “공리계란 단적으로는 코드에 있어서의 잉여가치흐름에 있어서의 잉여가치로 변용사키는 장치, 다시 말하면 자본의 출신형태로서의 화폐의 이원성(dualité de l’argent)”이며(AO, p.273), “자본주의는 화폐가 화폐를 낳고,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출신-친자 자본이 된다”(AO, p.269). , 통념과는 반대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끝나지 않는[=일치-해소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AO, p.271). 왜냐하면 자본과 노동력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 척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런 척도는 만약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설>로서의 순수한 허구이다(AO, p.273). , 우선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허구> 혹은 오작동에 의한 만사형통의 기예를 속속들이 알고-이용했다는 점이, 나중에 말해지듯이 중요하다. 어쨌든 들뢰즈·가타리는 이 기괴한 사정 말하자면 영원한 이윤율 저하을 설명하기 위한 문자()”로서, 미분의 비(Dy/Dx)를 제시할 것이다. , ‘Dy’가 노동력 혹은 가변자본의 유동을, ‘Dx’가 자본 그 자체, 혹은 불변자본의 유동을 구성하고, 자본의 출신-친자 형식으로서의 <x+dx> 즉 잉여가치는, ‘Dy’‘Dx’조우적 연결(conjonction)”에 의해 생긴다고 간주된다(이상은 AO, p.270). 그래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우발성 및 그 생산양식을 침투시키는 공리계로서의 작동이, 미분의 비에 있어서 완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음의 인용이 결정적이다. “경향적 저하는 극한(terme)을 갖지 않는다. 문제가 생산고의 견지에서 하는 생산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limite)라면 미분의 몫은 계산 가능하지만, 문제가 잉여가치가 생기는 생산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잉여가치], difference de natur...”(AO. p.273 강조는 인용자). 이로부터 유명한 테제, 자본주의는 자신의 끝-극한을 갖지 않는다혹은 극한을 스스로 치환함으로써 이 극한을 재생산한다라는 주장이 맑스에 대한 참조를 촉구하면서 도출된다(AO, p.273)는 것은 주지의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그것의 확인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공리계의 작동으로까지 관철되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조우>, 맑스에 의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재장전시킨/에 있어서 읽어 들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의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한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바의 잘못된 만남을 하고 있다 . 문제는 지양이라는 공통척도, “‘모순이 아니라 우발성”, ‘본성의 차이에 준거한 위에서 이뤄지는 자본주의의 출신의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성의 차이에 근거함으로써, 생명으로부터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관철되는 소재-도식의 연속 변화로서의 노동자의 역사가 기술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논점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상에서 개괄한 공리계의 구체적 작동양태의 아주 짧게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포획장치로서의 화폐를 둘러싼 논의를 일별해야 한다.

노동가 자본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의 증거로서의 두 가지 요소의 우발적 조우가, 잉여가치의 [종말]없는 발생으로서의 저하경향에 있어서도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예상되고 있으며, 화폐도 또한 이러한 이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 탈코드화되고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자유로운노동자를 노임관계 즉, 앞에서 본 미분의 비의 하나의 항인 <Dy>에 체류시키겠다는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재영토화의 기능을 갖는 동시에 코드들의 잉여가치를 흐름(flux)”의 잉여가치로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탈영토화하는 기능을 가진다. , 잉여가치 내지 이윤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두 가지 흐름 사이의 통약 불가능성 그렇지만 서로에게 내재하는 이 두 가지 흐름을 표현하는 화폐(monnaie)의 두 측면 사이의 어긋남에 의해 정의된다(AO, p.283). 이러한 이원성을 들뢰즈·가타리는 한편으로는 교환가치의[/라는] 무기력한 화폐의 기호들, 소비재들이나 사용가치들에 관련된 지불수단의 흐름, 화폐와 공정구역의 생산물 사이의 11 대응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강력함의 기호들, 융자의 흐름, 지금 여기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장기적인 어림셈 내지 예측 능력을 나타내는, 추상량들의 공리계로서 기능하는 생산미분계수의 시스템과 구별하고 있다(AO, p.271). 물론 이 재영토화의 기능, 가 탈영토화의 기능에 대응한다. 어쨌든 여기에 주지의 안티 오이디푸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양의적 평가를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은 명료하다. , 자본주의는 탈영토화와 동시에 재영토화를 행하는 것이며, 에 그 공리계의 작동이 제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원성의 장치로서의 화폐를 통제하는 것이 국가― 『천 개의 고원에서는 더 추상적으로 포획장치라고도 불린다 이며,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서의 화폐의 기원을 국가에 있어서의 세금징수에서 찾는 논의까지 일관하고 있다(MP, pp.552-3). 이러한 화폐의 이원성에 의해, 유통 측면 또는 시장에서의 이른바 교환은 반드시 화폐가 아닌 통화로서, 즉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있어서 실현된다는 점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 사족인데, 이른바 전지구화현황 분석을 위해서도, 이 논점의 파악은 최소한의 전제로 여겨진다. 거기서의 문제는 맑스의 등가교환론 내지 가치형태론을 착취(exploitation)”수탈(expropriation)” 중 어느 쪽에 밀접하게 연결시켜 이해하는가라는 양자택일로 집약되지만, 지금은 이 점을 젖혀 둔다. 자본제 내부에서는 교환은 항상 합법혹은 등가라고 (표상)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들뢰즈·가타리가 화폐-교환을 수탈론으로서 전개하고 있는 것은 명료하다. 자본제 내부에서의 교환에 정위하는 착취론은 자본제 그 자체의 성립이라는 -바깥의 폭력의 수준에 정위되는 수탈의 측면을 간과하기 쉬운 반면, 들뢰즈·가타리의 화폐론에서는 화폐의 이원성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또한 구매력으로서의 소비재와의 11 대응의 기능만 담지할 뿐인 통화는 탈영토화된 흐름flux”회귀-환류(reflux)”로서도 파악되고 있다. , “돌연변이의 역능을 가진다(a pouvoir mutant)”라고도 형언되는 이 화폐의 이원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통화는 환류를, 즉 이 통화의 노동자나 생산요인들(이른바 반노동일半労働日에 상당하는 소비재 인용자)에 대한 배분에 의해 구매력을 이 통화가 획득하자마자 수많은 재화와 맺는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AO, p.282). 흐름과 환류의 서로에게 내재하면서도 통약 불가능한 관계에도 우발적인 조우가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논점은 천 개의 고원13고원 포획장치에서 일종의 집합론적 조작 마술 또는 신비라고도 불린다 으로서 다뤄지고 있는데, 거기서은 단적으로 분배나 보수로 여겨지는 한에서의 노임[급여(salaire)]은 구매라고도 말할 수 없다. 반대로 구매력은 노임으로부터 생긴다On ne peut donc même pas dire que le salaire, conçu comme répartition, rémunération, soit un achat ; c'est au contraire le pouvoir d'achat qui va en découler”(MP, p.556)고 서술될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이 마술무로부터(ex nihilo) 창조라고 불리며, 자본제 내부에서는 잉여가치는 완전히 합법적인등가교환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누구도 훔치지 않는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맑스주의자를 도발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AO, p.283). 즉 여기서도 앞에서 언급한 포획장치에 의한 이중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래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의 이상에서 살펴본 화폐론이 수탈에 정위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점이 다시금 확인될 것이다. 따라서 이윤들은 수입[구매력 인용자] 창조의 흐름의 재가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의 일탈(déviation)에 있어서, 그것과 나란히(côte à côte) 유출한다”(AO, p.283). 이와 같은 화폐의 이중성을 둘러싼 논점을 바탕으로, 이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노동력을 살펴본다.

 

2. ‘소재-도식으로 쇄신된 생산력과 생산관계

우선 들뢰즈·가타리가 완전히 맑스 다만 재장전된 주의자이며, 따라서 교환주의자가 아니라는 것(AO, pp.224-6 et passim)의 확인이 긴요하다. 거기에는 또한 악명 높은(?) 맑스의 노동가치설특히 자본13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어서의 절대적 잉여가치설에 충실한 들뢰즈·가타리가 있고, 이 맑스에 대한 충실성(fidelité)”(Alain Badiou)가 겉보기에는 맑스에 대한 준거가 상대적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보다 적다고 생각되는 천 개의 고원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점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중요한 규정을 부여받았던 코드화, 탈코드화의 양태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인간적 틀을 넘어선, 무기물도 포함한 생명에서조차 발견된다고 여겨지는 잉여가치개념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 생명의 돌연변이 현상을 논한 3고원 도덕의 지질학에서의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조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ségmentarité)[코드의 구성요소 인용자]은 두 번 복제되며,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거기서 행해지는 것은 어떤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의 번역이 아니라 오히려 코드의 잉여가치 혹은 파생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부를 특이한 현상이 생기고 있다non seulement tout code a des suppléments capables de varier librement, mais un même segment peut être copié deux fois, le second devenant libre pour la variation. sans qu'il y ait traduction d'un code à un autre (les virus ne sont pas des traducteurs), mais plutôt phénomène singulier que nous appelons plus-value de code, communication d'à-côté”(MP, pp.69-70), 혹은 또한 이른바 예술론으로서 이해되면서 11고원 리토르넬로에 있어서의, “코드 변환이 행해질 때, 거기에 있는 것은 단순히 부가가 아니라, 항상 새로운 [코드로서의] 평면 그리고 잉여가치가 성립하고 있다Chaque fois qu'il y a transcodage, nous pouvons être sûrs qu'il n'y a pas une simple addition, mais constitution d'un nouveau plan comme d'une plus-value”(MP, p.386), “생명의 장에는 아마 존립성의 이득 즉 잉여가치가 포함되고 있다Or, s i nous nous demandons quelle est l a « place de l a vie » dans cette distinction, nous voyons sans doute qu'elle implique un gain de consistance, c 'est-à-dire une plus-value (plus-value de déstratification)”(MP, p.414), “영토의 어레인지먼트는 탈코드화를 동반하며, 어레인지먼트를 촉발하는 탈영토화와 불가분하다(새로운 유형의 두 가지 잉여가치)L'agencement territorial implique un décodage, et n'est pas lui-même séparable d'une déterritorialisation qui l'affecte (deux nouveaux types de plus-value)”(MP, p.414) 등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러한 생명현상에 있어서의 코드화와 탈코드화의 착종이, “자신의 지층 위에 있어서조차 유기체는 탈영토화된다. 유기체는 유기체의 자립성을 보증하고 유기체를 이끌도록 제반 내부 환경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Sur sa propre strate, un organisme est d'autant plus déterritorialisé qu'il comporte de milieux intérieurs assurant son autonomie, et le mettant dans un ensemble de relations aléatoires avec l'extérieu”(MP, p.70)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에도, 앞에서 언급한 푸코의 오류-우연성으로서의 생명과도 밀접하고, 생체의 이른바 근원적인 우발성이 함의되어 있다는 점의 이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른바 생명의 영토에 있어서의 잉여가치에 밀접하는 “()코드화영토화의 양태의 규정은, 더 나아가 언어나 기호계 같은 이른바 인간적 영토에까지 연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거기에서는 이러한 생체의 우발성이, “비신체적 변형으로서의 언표행위의 집단적 어레인지먼트신체의 기계적 어레인지먼트”(MP, p.112)와의 조우라고 규정되는, “날짜-사건이라는 형태에 있어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인데(MP, pp.103-12), “우발적인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우발성 유물사관에 관련된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아무튼 맑스에 있어서 인간이 존재하고 노동한다는 것 자체에 있어서의 과잉을 의미했던 절대적 잉여가치, 이리하여 “()코드화영토화개념에 의해 재규정된다는 점을 확인한 뒤에, “생명으로부터 무기물까지를 관통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소재-도식에 충실하게 전개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재장전된 생산력과 생산관계론이 이해될 것이다.

우선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충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은 두 번 복제되고,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에서 분명한 것처럼, 코드의 구성요소로서의 분절적 단편은 그 자체로 변이하는 내용이며 또한 표현이다. 내용은 이미 형성된 소재 내지 질료, 표현이란 실질로서의 힘이며, 또한 각각이 그 하위 구분으로서 형식-실질의 이중분절을 겪고 있기 때문에, 내용의 형식이란 표현의 실질, 표현의 형식이란 내용의 실질이며, 따라서 소재와 힘은 서로 구성하는, 그러나 대응도 부호도 갖지 않은불가분한 것이다(MP, pp.58-9). 천 개의 고원에서의 유물론의 재장전은, 이런 이중으로 분절된 표현과 내용의 동형성에 기초하여 <실험>된다. 따라서 내용과 표현이 구별되는 경우, 그것은 형태적 내지 형상적이지 않고 ‘distinction reelle’(MP, p.59) 현실적인 구별은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 10 및 그것에 붙여진 비고로부터 채용되고 있다 . 생산력의 발전이 기존의 생산관계를 질곡에 빠뜨리고 생산력이 반전하여 새로운 생산관계를 내재적으로 생기게 하듯이, 표현과 내용은 존립성의 집합”, 존립평면에 있어서는 서로 반전-생성변화할 것이다. 존립평면의 집합이라는 표현은, 매우 비등질적 성분이 모여 강화되며, 형상-질료의 규칙적 연속으로 바뀌어 계층의 단락短絡, 혹은 역회전의[역전된] 인과관계가 일어나고, 이질적인 소재와 힘 사이에 포획관계가 성립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마치 기계적 계통류(un phylum machinique)[물질의 흐름에 내재하는 어레인지먼트의 연속변화 인용자], 그리고 탈지층화적 횡단성이 요소, 차원, 형상과 질료,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관통해 질료를 해방하고 힘을 포획하듯이On parlera au contraire d'ensembles de consistance quand on se trouvera devant des consolidés de composantes très hétérogènes, des courts-circuits d'ordre ou même des causalités à l 'envers, des captures entre matériaux et forces d'une autre nature, au lieu d'une succession réglée formes-substances : comme si un phylum machinique, une transversalité déstratifiante passait à travers les éléments, les ordres, les formes et les substances, le molaire et le moléculaire, pour libérer une matière et capter des forces”(MP, p.414). 거기에 있어서 소재 내지 질료는 형식 또는 형상이라는 주괴[주형]에 집어넣어지게 되는 부정형의 것이 아니라, 소재 각각이 지닌 이것임자신의 특이성에 기초한 개체화 를 따라서 형식-실질을 형성하고, 따라서 그 자신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상호 반전을 내재적으로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법칙에 복종하는 질료보다도 노모스[질서 인용자]를 가진 물질성을 뒤따르는 , 질료에 특성을 부과할 수 있는 형상보다도 다양한 정서를 구성하는 표현의 물질적 특징을 뒤따르는 것이다il s'agit de suivre le bois, et de suivre sur le bois, en connectant des opérations et une matérialité, au lieu d'imposer une forme à une matière : on s'adresse moins à une matière soumise à des lois, qu 'à une matérialité qui possède un nomos”(MP, p.508). 그리고 이른바 인간/물질의 구분, 혹은 이른바 인간의 역사를 훨씬 넘어선, 생산관계의 형상을 정초짓는 생산력의 사례로서, 매우 아름다운 금속의 역사를 말하는 대목을 반드시 인용해야 한다. 야금술은 물질을 재용해하고 재이용할 가능성을 갖고, 그래서 물질에 주괴[주형]라는 형식을 부여한다 금속의 역사는 스톡과도 상품과도 다른 이 특별한 형식과 불가분하며, 화폐가치는 이로부터 생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환원적이라는 야금술의 관념은, 준비된 물질로부터 물질성의 해방 및 구체화되어야 할 형상으로부터의 변형의 해방이라는, 이중의 해방을 표현한다 거기에는 다양한 형상의 계기로 바뀌어 연속 발전하는 형상이, 다양한 물질의 변화로 바뀌어 연속 변화하는 물질이 있다Et pour finir, la métallurgie a la possibilité de refondre, et de ré-employer une matière à laquelle elle donne une forme-lingot : l'histoire du métal est inséparable de cette forme très particulière, qui ne se confond ni avec un stock ni avec une marchandise ; la valeur monétaire en découle. Plus généralement, l'idée métallurgique du « réducteur » exprime la double libération d'une matérialité par rapport à la matière préparée, d'une transformation par rapport à la forme à incarner. Jamais la matière et la forme n'ont paru plus dures que dans la métallurgie ; et pourtant c'est la forme d'un développement continu qui tend à remplacer la succession des formes, c'est la matière d'une variation continue qui tend à remplacer la variabilité des matières”(MP, p.511, 강조는 인용자). 생산력, 혹은 잉여가치의 변주로서의 “()코드화영토화에 기초한 이런 금속-화폐형태론적 관점이, 물질/인간의 구분을 넘어서, 자본과의 우발적 조우를 준비하는 이중으로 해방된노동자에 관해서도, 연속 혹은 일관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임금노동자의 기원, ‘국내의 노동자에게 정위하는 정주혹은 트리[나무]적 관점과는 상이한, ‘이민혹은 유목의 리좀적 관점으로부터 논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 정의로 되돌아간다 기계적 계통류는 자연인공[의 구별 인용자]과는 무관한 인공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물질성이며, 특이성과 표현 특징을 담지하는 한에서, 운동하고 흐르며 변이하는 물질이다. 이 정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백한 귀결들이 생긴다. 즉, 이런 흐름으로서의 물질만을 뒤따를[추적할] 수 있을 뿐이다. 필시 따르다[좇다]라는 동작은 그 장소에서도 가능하며, 대패질을 하는 장인은 자리를 바꾸지 않고서도 나무와 나무의 섬유를 뒤따른다. 그러나 이런 뒤따르기 방식은 더 일반적인 과정의 특수한 시퀀스일 뿐이다. 왜냐하면 장인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 뒤따르도록, 즉 필요한 섬유를 가진 나무를 그것이 있는 장소에까지 찾으러 가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오게 하는 수밖에 없지만, 이 경우는 상인이 반대방향에서 궤적의 일부를 담당하기 때문에 장인은 스스로 그 궤적을 만드는[이동하는] 것을 절약했을 뿐이다. 그러나 장인은 동시에 재료를 채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장인으로서 불충분하다. 재료 채집자와 상인과 장인을 분리시키는 조직[분업체제의 확립 인용자]이란 이미 장인을 지체장애로 해서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장인은 물질의 흐름 즉 기계적 계통류를 뒤따르도록 정해졌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인이란 물질의 흐름이다. 물질의 흐름을 뒤따라가는 것은 이동하는 것, 방랑하는 것이다. (MP, pp.509-10).

Nous retombons toujours sur cette définition : le phylum machinique, c'est la matérialité, naturelle ou artificielle, et les deux à la fois, la matière en mouvement, en flux, en variation, en tant que porteuse de singularités et de traits d'expression. Des conséquences évidentes en découlent : c'est que cette matière-flux ne peut être que suivie. Sans doute cette opération qui consiste à suivre peut-elle se faire sur place : un artisan qui rabote suit le bois, et les fibres du bois, sans changer de lieu . Mais cette manière de suivre n'est qu'une séquence particulière d'un processus plus général . Car l'artisan est bien forcé de suivre aussi d'une autre manière, c'est-à-dire d'aller chercher le bois où il est, et le bois qui a les fibres qu'il faut. Ou, sinon, de le faire venir : c'est seulement parce que le commerçant se charge d'une partie du trajet en sens inverse que l'artisan peut s'épargner de faire lui-même le trajet. Mais l'artisan n'est complet que s'il est aussi prospecteur ; et l'organisation qui sépare le prospecteur, le commerçant et l'artisan, mutile déjà l'artisan pour en faire un « travailleur ». On définira donc l'artisan comme celui qui est déterminé à suivre un flux de matière, un phylum machinique. C'est l'itinérant, l'ambulant. Suivre le flux de matière, c'est itinérer, c'est ambuler.

 

여기에서는 이른바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와 구별되는 장인, ‘이동체로서 물질에 순종한다고 정의된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이전以前의 상태는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소급적으로파악될 수 있는 우발적 세계사에서 발견된다. 그런 한에서 여기서의 장인은 소급적으로 그리고 소급적으로만 파악된 노동자의 전신前身이다. 이로부터 물질의 흐름에 순종하는 것으로서의 장인의 이동과는 상이한 두 번째 이동이 구별될 것이다. , “농민 또는 목축민이 계절이나 토지의 빈곤화에 부응해 토지를 바꾸는” “이동”,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숲이 재생하고 토지가 회복되면 출발점으로 회귀하도록 미리 정해진 회전을 행하는듯한 이동을 행하는 이동목축민이 그런 두 번째 이동을 담당한다고 간주되며, 그리고 상인도 또한 상품의 다양한 흐름들이 출발점과 도착점의 회전에 종속하고 있는 한에서 이동목축민les flux marchands sont subordonnés à la rotation d'un point de départ et d'un point d'arrivée ( aller chercher-faire venir, importerexporter, acheter-vendre)이라고 간주된다(MP, p.510).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의 기원상인자본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관점에 대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인용했듯이, 세계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정의된다라는 <가설>로부터 들뢰즈·가타리는 논의를 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틀림없이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자.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소재-의 상에 있어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의 파악에 기초하여, “이동목축민이 진정한 이동자가 되는 것은, 토지나 목초의 회로가 피폐하고, 회로가 너무도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갈 때뿐이다Le transhumant n'est donc itinérant que par voie de conséquence, ou ne le devient que quand tout son circuit de terres ou de pâturages est épuisé, et quand la rotation est tellement élargie que les flux échappent au circuit”(MP, p.510)가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 회로가 자본제에 있어서의 생산-소비-분배의 회로의 알레고리라는 것은 명료하다. 따라서 여기서 얘기되는 진정한 이동자상인이다, 자본주의라는 회로너무 확대된때에 이 회로로부터 일탈’, 심지어 도주해가는 생산력으로서의 흐름혹은 기계적 계통류-물질로서의, 자본주의 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일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노동자란 물질의 흐름의 한복판에 있는 이동체라고 하는 정의가, 앞의 인용으로부터 논리적 혹은 오히려 <비정확>하게(MP, p.31) 도출되어야 한다. “회로가 너무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간다는 것은 바로 흐름으로서의 물질에 대해이뤄지는 장인의 정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이동체라는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에 있어서의 자본제라는 결과로부터 볼 때 여전히 상실된 채인 다름 아닌 <가설> 혹은 <허구>로서의 기원, 들뢰즈·가타리는 이른바 전쟁기계와도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다. 유목론 혹은 전쟁기계라는 제목의 12고원에서의 국가의 전쟁을 총력전으로 하는 요인은 자본주의, 즉 전쟁에 관련된 자재·산업·경제에 투자되는 고정자본 및 육체적 정신적 인구로서 투자되는 가변자본과 밀접하게 결부시킨다”(MP, p.524)고 하는 구절 및 그것에 덧붙여진 폴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에의 참조를 촉구하는 각주(101)에서 그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에 덧붙여 14고원 매끈함과 홈패임에서의, 맑스 자본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른바 추상노동, ‘전쟁기계홈패임혹은 국가장치로의 회수로서 논의되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명백하게 맑스의 절대적 잉여가치가 숨쉬고 있다. ,

 

추상노동, 그 효과의 배가, 그 분업화 같은 문제가 최초로 출현하는 것은 핀공장에 있어서가 아니라 공공사업의 작업현장 혹은 또한 군대의 조직화(인간의 규율훈련뿐만 아니라 무기의 공업생산에 있어서도) 등에 있어서이다. 전쟁기계는 아마 최초로 홈패임화되고, 효과에 있어서는 배가하며, 분업화 가능한 추상적 노동시간을 산출하는 것이 됐다. <노동>의 물리적 사회적 모델이 국가장치의 발명으로서 국가장치에 속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며, 우선 첫째로 노동은 어떤 잉여의 성립에 의해서 처음으로 출현한다, 즉 스톡으로서의 노동만 존재할 뿐이며, 노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른바 잉여노동과 더불어 개시된다는 것, 둘째로 노동은 시공간의 홈패임화라는 보편적인 조작·자유활동의 예속화·매끈한 공간의 폐절 등을 행하는 것이며, 국가의 본질적 기획인 전쟁기계의 정복이 노동의 기원이며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MP, pp.611-2).

Ce n'est pas dans la fabrique d'épingles que se posent en premier lieu les problèmes du travail abstrait, de la multiplication de ses effets, de la division de ses opérations : c'est d'abord sur les chantiers publics, et aussi dans l'organisation des armées (non seulement discipline des hommes, mais production industrielle des armes). Si bien que la machine de guerre a peut être été la première à être striée, à dégager le temps de travail abstrait multipliable dans ses effets, divisible dans ses opérations. Le modèle physico-social du Travail appartient à l'appareil d'Etat, comme son invention, pour deux raisons. D'une part, parce que le travail n'apparaît qu'avec la constitution d'un surplus, il n'y a de travail que de stockage, si bien que le travail (à proprement parler) commence seulement avec ce qu'on appelle surtravail. D'autre part, parce que le travail effectue une opération généralisée de striage de l'espace-temps, un assujettissement de l'action libre, une annulation des espaces lisses, qui trouve son origine et son moyen dans l'entreprise essentielle de l'Etat, dans sa conquête de la machine de guerre .

 

이리하여 맑스의 자본에 의한 자본제에서의 추상노동으로서의 과잉노동론은, 이른바 매끈한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활동홈패임화하고, (과잉)노동을 전인격적으로 착취 즉 수탈하는, 혹은 오히려 포획하는 양태 앞서 본 이중으로 발휘되는 폭력, “전쟁기계의 홈패임화에 입각해 얘기된다. 이로부터 대차적対遮的으로 전쟁기계는 맑스/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교역·전쟁을 포함한 이른바 <교통(Verkehr)> 형태를 담하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단에 의해 정의되, ‘소재-도식에 구현되는 구체적인 어레인지먼트로서 작동하는 추상기계’(MP, p.636)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136불변자본과 가변자본에 있어서 맑스가 전개한 기계론이, 앞서 언급한 기계도 또한 잉여가치를 산출한다라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미 논의됐던 사태(AO, pp.275-8)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기계과거의 / 죽은 노동의 보존과 전송을 관장하는 장치라고 맑스는 말했다. 이것에 현재 시점에 있어서의 인간-노동자의 산 노동”(이라는 원래부터 잉여일 뿐인 노동)이 부가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산출된다. ‘산 노동에 의해 과거의 / 죽은 노동억지로 되살리거나, 혹은 산 노동죽은 노동의 접속에 의해 잉여가치가 생긴다. 과거의 죽은 시간 혹은 노동을 재생시키고 착취하기 위해서만 산 노동은 동원된다. ‘산 노동은 그래서 그 자체로는 무가치하다고 말해도 좋지만, 다른 한편 그것 없이 착취는 수행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생기는가라는 위치 결정이 불가능하다는 사태가 생긴다.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논의를 받아, 맑스의 근본적 성과는, 잉여가치는 위치 결정 불가능하다는 점의 해명 및 기계가 그 자체 잉여가치를 산출하고 자본의 유통이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구분을 무효화한다는 예지, 이렇게 두 가지 점에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MP, p.613). 또한 이런 맑스를 바탕으로 하여, 이제 산 노동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만으로 자본주의가 매끈한 공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즉 자본이 절대속도에 도달한 상태가 찾아왔다고 하는 것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현황 인식이다(MP, p.614). 거기에서는 이른바 냉전붕괴 이후에 전면화된 감시사회’, ‘전지구화’, ‘남북전쟁이나 걸프전’, 나아가 동시다발테러같은 사건에 대한 예언적 서술이 엄청나게 발견되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후적으로만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며, 여기서는 젖혀 두고 묻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시 되어야 하고 소급적으로 ()기술되는 우발적 세계사, 아래에서 개괄한 자본과 노동의 조우에 잇어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재장전된 유물론사관> 구상이 전망된다.

 

긍정과 도주 : 우발성의 유물사관을 위해 

각각의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가 되고 있는 속성 하에서 신이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만 신을 원인으로 하고, 신이 어떤 다른 속성 하에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 윤리학2부 정리6

 

노동력을 포함한 여러 상품들의 생산-유통-()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을 완결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이 원환을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조우를 기점으로서 기술하는 것. 이러한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의 기획에, 『『자본을 읽자에 수록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의 근본 개념에 대해논문이 크게 기여하는 점이 우선 확인되어야 한다. 이미 본 이윤율의 영원한저하 경향 법칙자본주의의 공리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 한에서의 으로서의 코드의 잉여가치흐름의 잉여가치로의 변용이라는 논의 그 논거는, ‘노동력자본사이에는 공통 척도가 없다는 점에서 찾아졌다 도 발리바르에 의거하여 이뤄진 것이었지만(AO, p.271), 이것에 덧붙여 “<잠재적으로는(virtuellement)> 별개로 존재하고 있자유로운 노동화폐-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조우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aurait pu ne pas se faire)”라는, 본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장에 이어서 곧바로 이뤄지는 두 요소에 대한 언급, 요소의 한쪽은 낡은 사회 신체를 구성하는 농지구조의 변용에, 다른 한쪽은 이 낡은 신체의 무수한 모공 속에 난외-여백적으로(marginalement) 존재하고 있는 상인과 고리대금을 경유하는, 완전히 다른 계열에 의존하고 있다”(이상은 AO, p.266)가해진 각주(76)에서 인용되는 발리바르가 결정적이다. 이하에서 보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인용되는 발리바르의 논문의 해당 대목은 물론 4. 이행의 이론을 위한 요소들“1. 본원적 축적, 한 가지 전사(前史)”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조우를 둘러싼 맑스의 고찰에 대한 주석의 일부분이다.

 

자본주의의 구조가 지닌 통일성은, 한번 구성되면 자신의 배후에서는 찾아낼 수 없다[배후로는 되돌아가지는 않는다](ne se retrouve pas en arriere d’elle) (필요한 것은) 이것들의 조우적 연락(leur conjonction)의 결과에서 출발해 [소급적으로] 규정 [한에서의] 요소들과, 이런 결과들과는 그 개념에 있어서 무관한 왜냐하면 결과는 다른 생산양식의 구조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되어야 하는 역사 분야와의 사이의 조우(la rencontre)가 이미 산출되고 있으며, 또한 엄밀하게 사고되고 있는 것이다. 선행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구성된 이런 역사 영역에 있어서는, 그 계보가 추적되는 이런 요소는, 정확하게는 난외-여백적 상황, 즉 비결정적인 상황만 갖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보충. ‘조우’, ‘조우적 연결의 강조도 들뢰즈·가타리의 것 인용자]

 

여기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구조는 자신의 통일성을 자본주의의 전사에서는 갖지 못하고, 통일성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조우적 연결이 요소들과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사고해야 할 역사 영역과의 사이의 조우에 있어서 획득됐지만, 다만 이런 요소들은 이 조우적 연결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결과와 이것들 각각의 역사를 지닌 요소들은 개념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본자본주의의 구조에 있어서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에 , 이런 요소들은 역사적으로 비결정적인 상황밖에는 갖지 못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전사로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자본주의의 구조의 통일성이 부여되고 있는가에서 보이는 현재에 있어서도 부단하게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전사는 자본주의의 통일성에 있어서 필요하고 불필요한, 배제되기 위해서만 소환되는 난외-여백이며, 난외-여백으로서의 전사혹은 비결정적 상황, 노동과 자본의 <조우>가 발생하는 역사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이 <조우>, ‘자본주의의 구조로부터 소급적으로 발견되는 세계사속의 도처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조우>가 발생하는 상황을 구조에 있어서 소급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관점의 제시에 있어서, 발리바르와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 공유되는 것은, 스피노자의 이른바 인과성여기서는 필연사관 내지 목적론적 사관을 가리킨다고 생각해도 좋다 비판이며, 주지하듯이 그것은 알튀세르파에 있어서는 칸트파 정신분석의 무의식과 관련해서 무의식은 그 효과-결과에 있어서 실재한다고 하는 테제로 변주되고 있으며 무의식의 징후가 구조에 있어서의 전사의 발견으로서, 계급투쟁-개입의 계기가 된다 또한 들뢰즈에 있어서는 표현표출도 유출도 아닌 표현에 기초한 종합적 방법의 문제계에 있어서 정제되는데, 여기서는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적 세계사와 관련되는 한에서의 스피노자를 언급하고자 한다.

윤리학1부 정리 10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어야 한다비고에서는,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 것이 현실적인 구별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현실적 구별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구별로서 나타난다 라고 규정되고 있다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영역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내재평면이다 . 속성자본노동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구성하는 요소로 파악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런 요소각각의 현실적인 구별에 의해, (아직 그것이라고 동일시[규정]되지 않는 그런 요소들의) <조우>의 소급적으로 동일시[규정]되는 역사적 요소가, 그런 요소들에 있어서 파악됨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가 갖는 통일성,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해야 하는 역사 영역과의 사이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것이 제시될 것이다. “자본주의그것에 비추어 세계사가 소급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를 성립시키는 노동자본전사<조우>로부터 뒤집어서, 더 소급적으로 세계사의 전역에 이런 전사<조우>를 찾아낸다는 구상에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우발적인 세계사는 기초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이른바 역사, 이런 의미에서의 전사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그리고 이 전사, 단서로부터도 목적으로부터도 일탈한 강도의 상태를 가리키는 고원’, 혹은 사물 각각의 이것임에 기초한 개체화-사건이 발생하는 내재평면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풀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과성에 근거한 시계열적인 사태들의 연쇄가 아니라,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서술된, 자본주의에 의해 소급적으로 파악되는 우발적인 세계사이다. 거기에 있어서 특히 중시되는 것이 비신체적 변형행위로서 상황에 개입하는 명령어이며, 이런 명령어들은 날짜혹은 사건으로서, 역사상에 출현한다 19231120일 독일에서의 신화폐교부 포고, 혹은 레닌의 191774. 이 집단-언표적 어레인지먼트, 혹은 사건, 이른바 자본제사회에 내재, 혹은 평행적으로 일어나는 비결정적인 상황혹은 전사의 영역에 있어서, 따라서 자본제사회의 언제 어디서든 일어난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잉여가치가 어디서 생기는지가 결정 불가능하다라는 것과 평행하여, 사건혹은 앞서 인용한 혁명적 잠재력의 현실화는, 언제 어디서 생기는가를 모른다 = 언제 어디서든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AO, p.454).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 공리계로부터의 도주내지 누출의 선분의 하나일 것이다. 또한 이런 명령어를 구성하는 분절적 단편이, 광물로부터 생물을 거쳐 언어, 더 나아가 인간의 집단적 어레인지먼트에까지 이르는, 이중분절을 겪고 표현에서 내용으로 혹은 그 반대로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소재-도식에 관통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사적 유물론우발성 유물론으로 재장전된 것이 이해될 것이다 그때 <matérialism>물질주의라기보다는 소재-도식에 있어서 내용과 표현이 서로 연속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소재주의로 번역된느 것이 적절하다 . 여기서의 역사는 목적론으로부터도 필연성으로부터도 누출-도주한 고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원으로서의 역사로, 이제 자본주의 그 자체를 도주시켜야 한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성립을 위한 필요하고 불필요한 전사는 자본주의의/라는 결과의 안쪽에 있어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결과, ‘전사라는 자본주의의 원인혹은 오히려 조건이 내재 혹은 평행주행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말했듯이 요소 각각의 현실적인 구별, 자본노동<조우>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규정[식별]되는 역사적 요소 각각의 파악에 의해, 이것들 사이에는 그 어떤 필연적인 결합관계도 발견될 수 없다는 것 비결정적 상황, 따라서 또한 이런 결합에는 우발적으로 조우하지 않는 한 부단하게 알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 노동의 각각을 그 자체에 의해서긍정적으로 파악하는 것, 현실적인 구별에 있어서, <>에 의한 접속 그 자체가, 단서도 목적도 갖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 한에서의 역사의 영역에 있어서의 우발적인 연결(conjonction)이었음이 제시된다. 이런 ‘conjonction’<> 또는 본성의 차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런 <> 그 자체를 그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한다면, 거기에는 무수한 <조우>의 가능성,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이 무수하게 열릴 것이다. 그때 자본주의의 성립에 있어서 발생한 저 우발적 조우,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소급적으로 파악되는 세계사를 가득 채운다는 것을 소급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그 자체를 도주시킨다고 하는 명제의 내실이어야 한다.

이리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의 상호 구성하는 <소재-> 도식에 근거한 내용-표현의 <유물론>적 구별을, 내재평면에 있어서의 사물들의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파악된다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적 구별과 들뢰즈·가타리가 상정한 것의 의의가 이해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제시된, “혁명적 잠재력을 현실적인 것으로 하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절단실제로 발생하는”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의 출현의 순간을 가리킨 것이며, 따라서 구별은 오히려 ‘~한 절단이다. 그리고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 재장전된 우발성 유물론사관이다. 거기에서는 현실적 구별에 있어서, 우발적으로 혁명의 잠재력이 현행화actualize된다. 내재평면에 있어서 무수한 어레인지먼트를 담지하는 표현과 내용은, 상호 연속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똑같은 것이며, 따라서 형태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구별된다. 스피노자가 윤리학2부 정리 6에서 말한, “각각의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가 되고 있는 속성 아래에서 신이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만 신을 원인으로 하고, 신이 어떤 다른 속성 하에서 생각되는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때의 내재평면으로 풀이할 때, 현실적 구별의 함의는 훨씬 명료하다. , 내재평면에 있어서는, “만일 세계사를 소급적으로 파악시키는 자본주의 그 자체가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 조우에 있어서 성립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세계사의 도처에 이러한 조우가 똑같이 발생한다고 하는 만일 ~라면(si), 그것들은 ~이다(donc)”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내재평면에 있어서는 자본주의(라는 원인)가 세계사(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는 인과성은, 세계사 앞서 말한 전사의 의미에서의 라는 여기서의 결과에 있어서, 자본주의라는 여기서의 원인의 성립 조건, <조우>가 발견되고, 뒤집어 자본주의라는 결과에 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안티 오이디푸스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것은 원인(자본주의)에서 결과(세계사)”라는 인과관계로 고쳐 써질 수 있다. 이 관계가 결과(자본주의)에서 원인(세계사)”으로 ()전도시킨 다음에, 다시금 원인(세계사)에서 결과(자본주의)”로 나아간다. 이때 은 자본주의에 의한 스스로에 대한 오인-전도였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노동력을 포함한 상품들의 생산-유통-소비-()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을 완결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본과 노동의 각각이 그것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되는 것에 있어서, 이 원환을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조우를 기점으로서 기술하는 것,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조우를 필연으로서가 아니라 무수하게 가능한 다른 조우와 더불어 기술하는 것에 의해서, 자본주의를 역사 앞서 언급한 푸코가 말한 의미에서의 로 귀환시키는 것, 그것이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의 들뢰즈·가타리의 미증유의 <실험>이었다. 그리고 이런 “sidonc의 논리를, 들뢰즈·가타리는 다름 아닌 맑스에서 찾아내고 있다(AO, p.266). 즉 맑스의 이른바 1844년의 경제학과 철학세 번째 초고 욕구, 생산, 분업이라는 절에서 나타난, <만일 라면, 그것들은 네게 c‘est donc à toi si>(원문에서는 라틴어 ‘conditio sine qua non’)라고 말한 산업 환관産業宦官의 악마의 계약이 그것이다. 환관宦官즉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의 생산자, 이웃을 향해서 네가 바라는 것을 나는 네게 주겠다, 그러나 너는 sine qua non의 조건을 알고 있네, 즉 만일 네가 원한다면, 그렇다면 이라고 속삭인다, 이미 봤듯이 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불필요하고 불가결한 전제로 추켜세우는 국가장치, 혹은 미리 스톡되는 것으로서만 과잉이라고 지목한 뒤에 노동을 수탈하는 포획장치와 상동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의 이른바 개념인물이다. 따라서 이 일화를 언급하는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가 이런 ‘si donc 의 논리를 재빨리 활용하는 기예를 터득하고 또한 맑스도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주장한다고 풀이해야 하며, 더욱이, ‘si donc 의 논리는 바로 자본주의 자체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들뢰즈·가타리는 매우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본<> 노동은, 이것들이 본성의 차이에 있어서 질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우발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결말을 대신해 : 원환의 파쇄

이리하여 역사를 자본주의에 봉사-동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를 역사로 귀환시키는 시도의 준비가, 여기서 정비됐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영원히 불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노동<> 자본의 쌍방이 자본주의라는 결합-어레인지먼트로부터 도주하는 사태를 조직화해야 한다. 노동<> 자본이 서로 잡아당기는, 즉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됨으로써, ‘억지를 부린결합에서 도주-누출하는 계기가, ‘우발적인 세계사속에 깃들어 있다. , 자본주의의 원환은 파쇄되어야 한다, 혹은 이것들은 원래 파쇄되고 있는 두 개의 원환의 <이음매 joint>를 찾아내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원환을 형식적으로만 파악한다면, 원환은 닫힌 구조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자본 축적의 원환에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원환이 반드시 나란히 달리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자본주의의 원환은 초점을 두 가지 갖는 타원이라고 표현되어도 좋다. 원환의 중심은 하나가 아니며,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중심이 거기에 겹쳐져 있는 것이다. 이 타원을 찾아내어 두 개의 원환을 찾아내기 위한 <가설> 혹은 가정명제가, “만일 자본과 노동의 조우가 우발적이었다고 한다면이다. 이제 이 두 가지 원환의 결합을 푸는 기예가 탐구되어야 한다. 이 결합은 필연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음매 joint><벗어나는(out of)> 것은 <유물론>적으로 적어도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두 개의 원환을 지혜의 고리처럼 <벗어나고>, 그리고, 만일 있을 수 있다면, 결합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말하면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 대해서, “이 책은 각 고리가 다른 고리로 결합할 수 있는 파쇄된 고리의 집합이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이런 파쇄된 고리의 ‘떼어냄이음의 기예(operation), 자본주의의 원환에 대해서도 시행되어야 할 때이다. 그런 떼어내는 방식-이음매 없는 방식out of joint의 조사에 대해서는, 그러나 뒷날을 기약하고 싶다.

 

나가야마 겐, 『푸코 : 생명권력과 통치성』

中山元フーコー 生権力統治性

5국가에 의한 통치 독일의 내치[폴리차이] 모델

2. 독일의 모델 : 중상주의 유형


* 국내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로 최대한 바꾸려고 노력했다. '폴리차이'는 '내치'라는 번역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onduite는 명료한 경우가 아니라면 '품행'으로 옮기지 않고, '인도, 인도하다' 등으로 적는다. 

* 그러나 국내의 적합한 번역어로 바꾸지 못한 부분도 있다. 눈이 밝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널리 혜량을 구한다.  

 

외교와 내치[폴리차이]의 관계

국가이성의 시대는 유럽의 균형의 시대이며, 항상적인 외교와 상설 군대에 의해 다양한 국가들이 대립하고 경합하는 시대였다. 이는 대외적 경합을 목표로 하는 기술이다. 이에 대해서 국내에서의 국력을 증강하는 기술이 있으며, 이미 말했듯이 이것이 프랑스에서는 폴리스, 독일에서는 내치[폴리차이]로 불린 것이었다. 이 기술이 가장 커진 것은 독일에서였다. 5장부터 7장까지 군주권력의 국가이성의 시대부터, 규율권력의 시대, 그리고 생명권력의 시대로 이르는 유럽의 정치적 이성에 대해서, 독일, 영국, 프랑스의 세 가지 모델을 검토하면서 각각의 방식을 비교하고 싶다.

독일에서 내치의 학은 관방학으로서 치밀하게 구축됐다. 푸코는 독일에서 이 학이 발달한 이유로,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많은 작은 영방국가가 탄생하고 각국이 독립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봉건적 구조와도 거대 국가와도 다른 국가적 실험에 있어서 특권적인 공간이 됐기 때문이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다. 독일에는 프랑스와는 달리 국가행정의 스태프[인력]가 부재하며, 이 때문에 대학에서 인력[스태프]을 조달하게 되어, 대학에서 관방학이 구축됐다는 것이다. “경제면에서는 그다지 활동할 수 없던 부르주아지가 끊임없이 [이웃 국가와의] 항쟁에 직면했던 군주의 편에 서서, 국가의 조직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인재, 능력, 부 등을 제공했다.” 이 관방학은 독일의 특산품으로서 유럽의 각지에 전해졌다.

내치는 좋은 통치의 기술이며, 신민의 복지를 개선하는 기술로서, 사목의 기술과 공통된 곳이 있다. 작동되는 대상이 영토로서의 국토가 아니라 국민이라는 것, 그리고 목적으로 하는 바가 국민의 복지라는 것은, 사목의 기술과 내치의 기술에 공통된 바임은 이미 확인했던 대로이다. 독일의 관방학의 이론적 지도자의 한 명이었던 폰 유스티는 국가의 자산은 영방 내에 존재하고, 가신에 속하든, 국가가 직접 소유하든, 모든 종류의 동산과 부동산으로 이루어질 뿐만이 아니다. 공화국에 속하는 사람의 모든 능력과 숙달로부터도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 자체도 시각에 따라서는 국가의 자산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푸코는 “내치는 국내 질서와 국력 증강 사이에 동적인, 그렇지만 안정적이고 통제할 수 있는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계산과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내치가 신민의 복지의 개선을 목적으로 한다고 외치면서, 실은 국가의 장려함을 목적으로 하는 학이라는 것이다. 당시부터 내치에 대해 국가 전체의 장려함과 전체 시민의 행복을 위해 이용되는 수단의 총체라고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유럽의 세력균형에서의 외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국의 장려함을 과시하는 것은 해부학에 열중하는 관찰자들에게 자국의 힘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푸코는 내치와 세력균형의 관계를 국력, 타국을 주시하는 권리, 통계학, 통상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우선 세력균형은 발전하고 있는 국가의 힘의 균형을 취하는 것이었다는 의미에서 내치와 깊은 관계에 있다. 내치는 좋은 국가질서를 유지하면서 국력을 증강시키고 더욱이 유럽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세력균형의 상태 아래서, 영구평화의 실현을 목표로 한 칸트는 이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칸트는 유럽의 현상황이 사회계약을 체결하기 이전의 인간들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며, 전쟁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제법의 이념은 서로 독립된 국가가 인접하면서도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상태는 이미 전쟁상태이다.”

그러나 이 전쟁상태는 전쟁의 폐절로 향하는 싹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경향에 있어서이다. 하나는 어떤 국가도 타국을 정복하고 스스로 제국 아래로 통일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언어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타민족을 미워하는 경향을 낳는데, 한편으로는 자국의 문화를 향상시키고, 타국을 이해하고 평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이 평화는 자유의 무덤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힘을 서로 경합하게 하고, 그 균형을 취함으로써 생겨나고 확보되는 것이다.” 칸트는 좋은 국가체제야말로 민족의 좋은 도덕성을 기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다양한 문화와 언어의 차이 속에 서로 동떨어져 있는 국가가 국내에서 좋은 국가체제를 구축하고, 서로 힘을 균형시킴으로써, 평화가 실현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세력균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국가들에 패하지 않을 정도의 외교능력과 군사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국가가 국력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다. 하나의 국가가 타국보다 국력의 증강에서 뒤떨어지면,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국가는 다른 국가의 국력의 증강을 주시하는 권리를 소유하는 것처럼 된다. 그리고 타국의 국력을 주시[감시]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된 것은, 하나의 국가의 인구군대천연자연생산통상통화유통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통계학이 성립된 것이다.

칸트는 이 타국을 주시[감시]하는 권리에 대해 국력의 증강이라는 관점보다는 오히려 법적인 체제의 확립과 자국의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지적한다. 만약 국내에 법률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서로 이웃해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민족에 해를 끼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민족도,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이웃 국가가 국제적인 사회계약을 체결하는 것, “거기서 스스로의 권리가 지켜지도록 하는 것을 다른 민족에게 요구할 수 있으며, 요구해야 한다.”

또한 통상관계에 대해서는, 이 시대는 중상주의의 시대, 즉 통상의 시대였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푸코의 간략한 요약에 따르면, 중상주의는 각국에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첫째로 각국이 되도록 많은 인구를 가지려고 할 것, 둘째로 그 인구 전체가 노동에 대해 있을 것, 셋째로 그 인구에 주어지는 임금이 최대한 낮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상품의 원가가 최대한 낮아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상품을 해외에 수출할 수 있으며, 군주가 소유할 수 있는 돈이 많아지는 것이다. 중상주의는 이처럼 통화의 수입기술로서의 통상의 전략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며, 그만큼 국내의 국력의 충실이라는 내치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다.

칸트는 이 시대에 각국이 밀접한 통상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전쟁을 방지하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지적한다. 각국은 서로의 이기심을 통해서민족들과 결합한다. 이것이 상업의 정신이며, “세계의 어디에서도, 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다가오면, 국가들은 마치 영속적인 동맹을 맺고 있는 양 중재에 의해 전쟁을 방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치의 실무

그렇다면 이 내치라는 학과 기술은 어떻게 적용될까? 푸코는 들라마르의 『내치』으로부터, 내치가 국가의 내부에서 관리해야 할 것을 11개 항목을 꼽고 있다. 종교, 도덕성, 건강, 물품의 공급, 도로토목공공건축물, 공안(公安), 자유학예, 상업, 작업장, 하인과 육체노동자, 빈민이다.

이것으로는 국가의 내정의 거의 모든 분야를 꿰찬다. 내치가 종교에 신경을 쓰는 것은 진리로서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내치는 사목의 권력과 마찬가지로, 신민의 혼의 건강을 배려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건강과 식량의 공급에 신경을 씀으로써, 내치삶을 보호한다.” 내치는 생명을 배려하는 것이다. 도로토목공공건축물, 상업, 작업장, 육체노동자, 빈민, 공안[치안]을 배려함으로써내치생활의 쾌적함, 정신을 배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학예를 배려함으로써 인생의 기쁨 그 자체”에 신경을 쓴다. “인간이 생존하고, 생활하고, 더 한층 잘 사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내치의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다내치가 현재의 경찰처럼, 사회의 복지와 행복의 촉진의 배려가 아니라, 장래의 악의 방지의 배려를 목표로 하게 된 것은, 1770년대 이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푸코는 튀르케 드 마이엘느귀족민주주의적 군주제라는 내치론을 인용하면서, 내치의 활동 분야를 크게 넷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 분야는 아이와 젊은이의 교육을 대상으로 한다. 국민은 경건한 신앙을 갖고, 무기 취급에 익숙해지며, 직업을 습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남성은 25세가 되면 내치 사무국에 가서 앞으로 어떻게 생활하려고 하는지를 보고하도록 요구된다. 보고를 거부하는 자는 “건달로, 명예를 결여한 인민의 쓰레기로 간주된다.

두 번째 분야는 빈민을 대상으로 한다. 건강한 빈민에게는 일자리를 주고, 병자나 장애자에게는 수당을 준다. 더욱이 공중위생을 배려하고, 일을 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금을 대준다. 세 번째 분야는 상인을 대상으로 한다. 통상을 규제하고 조성한다. 네 번째 분야는 부동산을 대상으로 하고, 상속을 기록하고, 도로하천공공건축물삼림을 주시[감시]한다.

이 네 가지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은, “국력의 구성요소로서의 인간의 활동이다. 우선 인간의 수를 대상으로 한다. 17세기에 국력은 주민의 수와 비례한다고 여겨지게 됐지만내치학에서는 단순히 주민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이 높은 주민의 수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작은 영토에서도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이어서 생활필수품을 규제한다. 주민의 수가 많더라도, 먹일 수 없으면 의미가 없다. 이것은 식량을 증산하기 위한 농업정책이며, 생산된 곡물의 질을 유지하고 비축하고 공급하는 곡물 내정(內政)이다. 더욱이 건강을 배려한다. 역병의 방지는 물론이고, “만인의 일상적인 건강이 중시된다. 도시에서는 공기, 환기, 통풍이 중시된다. 도시공간에 대한 일대 정책이 전개되는 것이다. 더 건강한 인간들의 활동을 감시[주시]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활동에서 생겨나는 상품이나 생산물의 유통을 배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모든 것을 배려하는 내치의 학이 사목적 시선을 갖추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근대국가의 거의 가부장적인 배려를 행사하는 것이라는 점도 확실할 것이다. “내치의 목적은 시민이 전체적으로도 개별적으로도 행복해지는 것에 관련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저 살아 있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라, “더 잘 사는 것, 공존하는 것, 교류하는 것이 실제로 국력의 증대로서 실현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에서는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이 도입되기 때문에 이런 내치의 학은 이윽고 생명령을 잃어가지만, 제국이 존속한 오스트리아에서는 1840년대까지 이 학에 의한 국가과학의 강의가 이뤄졌다고 한다. 적어도 18세기 전체를 통해 내치의 학은 독일인의 <신성로마제국>에서의 유일한 지배적 재정론(財政論)이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국가의 의학

내치학은 유럽의 국가들에 전파됐으나, 독일에서 집대성되고, 실제로 활용됐다. 내치학이 실제로 어떤 형태로 전개되었는지를 18세기 독일의 의학의 방식과 프랑스나 영국의 의학의 방식을 비교함으로써 검토해보자. 독일에서는 국가가 주도하는 형태로 의료가 전개됐다. 1764년에는 프로이센에서 의료행정(메디치니셰 폴리차이)”이라고 불리는 것이 탄생했다. 이것은 대학에서 배운 의사에게만 의료면허증을 수여함으로써 국내의 의료 상담자의 실천과 지식을 규범화하고, 각지의 의사나 의료기관으로부터 상세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시스템이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출산율과 사망률의 단순한 통계표가 이미 작성되고 있었으나, 전염병이나 풍토병의 관찰 등에 의한 훨씬 완전힌 발병률의 관찰 시스템”은 독일에서 확립됐다.

또한 중앙에는 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관공서가 설립되고, 그 아래에 계층구조적으로 지역의 의사를 배속했다. 이리하여 모든 의사는 국가에 의해 면허를 수여받고, 행정적 지도 아래서 의료에 종사하고, 의학적 정보를 중앙에 집중시키는 시스템이 확립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극한까지 국가화된 의학의 시스템이 됐다.

이 의학이 중시한 것은 국력의 토대가 되는 국민의 신체와 생명이었다. “공적인 위생 행정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노동자의 신체가 아니라 개인 그 자체의 신체이며, 이런 개인들이 모여서 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이며, 프로이센은 중상주의적인 관점에서 인근 국가와 경합하기 위해서도, 국내의 주민의 건강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뒤에 평화가 회복되자, 이 국가의 의학의 이념은 공동화된다. 독일에서도 공업화가 진행되는 동시에, 이 가부장적인 시스템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절대주의와 중상주의를 엄호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전환되어 갔다. 공업화의 시대에는 새로운 의학이 요구됐던 것이며, 프랑스와 영국이 그 임무를 맡게 된다

나가야마 겐, 『푸코 : 생명권력과 통치성』

中山元フーコー 生権力統治性

5. 국가에 의한 통치 : 독일의 내치[폴리차이] 모델

1. 국가이성 개념


* 국내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로 최대한 바꾸려고 노력했다. '폴리차이'는 '내치'라는 번역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onduite는 명료한 경우가 아니라면 '품행'으로 옮기지 않고, '인도, 인도하다' 등으로 적는다. 

* 그러나 국내의 적합한 번역어로 바꾸지 못한 부분도 있다. 눈이 밝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널리 혜량을 구한다.  

 

국가의 이념

그런데 이렇게 해서 인간의 신체, 생명, 정신의 통치가 사목의 원리의 연장과 수정 아래서 진행된 결과, 근대의 다양한 국가의 이념들이 등장한다. 우선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대항품행 개념은 근대의 초기에 영방국가[領邦国家, 13세기에 독일 황제권이 약화되자 봉건 제후들이 세운 지방 국가]가 성립되기 위한 커다란 실마리가 됐다. 사목의 위기와 폭발과 사방으로 흩어짐四散 때문에 몇 개의 새로운 정치적 개념이 탄생했다. 예를 들어 국가이성, 폴리차이, 세력균형과 외교 등의 개념이다. 그 배경에는 16세기에, 스콜라철학에서 믿었던 정치적 이성 개념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초래한 것은 그 나라의 종교는 그 나라의 영주가 정한다는 영방국가領邦国家의 성립과 신성로마제국 권위의 붕괴였다. 황제 칼 5세가 제국에서 루터를 추방하라고 명했는데도, 나라들의 지배자가 이것에 응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점점 더 통치권력이 주도하는 유형의 양상을 띠게 됐다. 나라들의 지배자는 종교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은 개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로 분열되면서, 각각이 자국 안에서 지배자의 종교를 강제할 수 있다고 확정된 것이다. 이 체제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최종적으로 확립되지만,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의 화의(和議)에서 이미 현실화됐다. 이리하여 새로운 정치 단위를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의 이념이 요구됐던 것이다.

국가이성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국가통치의 이념이며, 레종 데타라는 프랑스어에 남아 있으며, 국가의 생존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취해야 할 원칙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때로 국가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어떤 행위를 취하더라도, 초법규적으로 허용된다는 국가 이기주의적 맥락에서 말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조반니 보테로(1544-1617)는 훨씬 넓은 의미에서 국가가 일상적인 기능에 있어서 (매일의 관리에 있어서) 기초지어졌을 때부터 나라를 유지보수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종류의 합리성이라고 말했으며, 국가의 자존을 지향하는 기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치[폴리차이]는 독일에서 생겨난 내정적인 이념이며(푸코는 폴리스라고 프랑스어로 표기하지만, 경찰과 헷갈리기 쉽기에 독일어로 표기한다[이 번역본 등에서는 모두 이하 '내치'로 옮긴다]),국내 질서와 국력 증강 사이의 동적인 (그렇지만 안정적이고 통제 가능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계산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국가이성도 내치도 국가가 자존하고 강화되기 위한 이념이지만, 세력균형이나 외교개념은 자존하고 있는 국가 사이에서 세력의 유지와 균형을 목표로 하는 이념이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머지않아 더 자세하게 검토하지만, 사목권력이 붕괴했을 때, “정확하게 말해서 1580년과 1650년 사이에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의 창설이 이뤄졌을 때”, 그 사목권력이 붕괴된 후의 장소에 새로운 국가의 이념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런 이념에 대해 고찰하는데, 그 전에 중세 이후 국가의 통치 역사를 돌이켜보자.

 

중세의 통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번역되지 않았던 중세에서 정치학의 이념은 키케로를 통해서 전해졌다. 특히 마크로비우스의 스키피오의 꿈의 주석을 통해서다. 마크로비우스는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의 전통을 비판하면서 키케로의 정치철학을 소개했다(‘스키피오의 꿈은 키케로의 국가의 말미를 장식한 부분이다). 그리스의 전통에서 정치학에 종사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명상과 철학이라는 행위보다 낮은 차원의 활동으로 여겨졌다. 마크비우스가 비판하는 플로티누스는 정치적인 덕이 인간을 신에 가까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신과 똑같이 되려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세속적인 삶의 방식과 사물로부터 도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키케로에게서 배운 마크로비우스는 국가를 위해 한 몸을 바치는 자는 철학에 전념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천국에서 환영 받고, 영원한 행복을 향유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정치가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에 근거하고 정의에 맞는 것만 이루는 사려(프루덴티아에), 정념을 이성에 따르게 하는 절제(템페라티아에),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함(포르티투데니스), 배분적 정의(유스티티아에)의 네 가지 덕이 필요하다.

이렇게 덕을 갖춘 정치가는 자신을 배려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인 동시에, 키케로적인 의미에서의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선한 지배자이며, 국가의 창립자인 자는 거의 신과 동등한 지위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치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공적인 빛 속에서 덕의 높이를 나타내는 인간이며, 보통 사람보다도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지게 됐다.

다만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자, 정치적 활동의 제약의 크기가 주목받게 된다. 정치학은 인간의 실천적 행위에 관련된 학문이며, 신의 명상 같은 높은 지위를 인정받지 않는 것이다. 아퀴나스에서 단테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정치철학은 인간 삶의 영위에 있어서의 정치학의 탁월성과, 신의 명상으로 대표되는 철학의 탁월성 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어쨌든 정치가(폴리티코스)라는 개념은 타자와 함께 사는 지상의 공화국에서 공통선을 찾는/요구하는 중요한 행위를 나타내는 개념이었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통치이성은, 이 공통의 공공선을 중심적인 이념으로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왕을 사목자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목자는 양떼에 있어서의 선을 찾지만/요구하지만, 모든 지배자는 복종하는 집단의 선을 찾는다/요구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에게 왕은 하나의 도시 또는 영지領国의 사람들을 그 공통선을 위해 지배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왕은 어떻게 사람들을 통치해야 할까? 아퀴나스는 이를 위해 몇 가지 종류의 모델을 제기한다. 푸코는 이를 신과의 유비, 자연과의 유비, 사목자나 아버지와의 유비라는 세 개의 모델로 설명한다. 우선 신과의 유비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대비로 행해진다. 자연의 사물의 통치에는 보편적인 통치와 개별적인 통치가 있고, 보편적인 통치를 행하는 것은 창조주인 신이다. “신의 통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신의 섭리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개별적인 것의 지배는 미시적 인간의 자기 통치이다. 인간은 이성에 의해 스스로를 지배하는 것이며, 이것은 거시적 신의 지배를 모방한다. “인간과 이성의 관계는 세계와 신의 관계와 같다.”

또 신과의 유비는 이성에 의한 인간의 통치뿐 아니라, 도시와 영지의 통치자인 왕의 임무에도 해당된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으나 왕은 지배하는 인간과 국가를 창조할 수는 없다. 이미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기에 왕은 우선 국가에 적당한 장소를 선택할 필요가 있으며, 국가에 있어서의 교회나 법원이나 시장의 장소를 선택할 필요가 있으며, 사람들의 직업에 따라 장소를 지정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국가의 설립에서 보이는 세계 창조와의 유비이다. 다음으로 도시와 영지의 설립을 세계가 창조된 방법으로부터 배울 뿐만 아니라 이를 지배하는 방법도 세계에 대한 신의 성스러운 지배 방법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국가의 창조와 지배의 양쪽에서 왕은 신을 흉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유비는 생명체의 생명력과의 유비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신체나 다른 동물의 신체 속에, “모든 지체肢體(모든 구성원)의 공통선을 지켜보는[보살피는] 지배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으면 붕괴해버릴 것이다고 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선으로 향하며, 따라서 공통선을 간과하려고 한다.” 그래서 국가에도 이 지배적인 힘에 상당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국가에 있어서는 각각의 개인의 특별한 선을 넘어, 다수자의 공통의 선을 향해 사람들을 강제하는 것이 없으면 안 된다.” 이것이 지배하는 권력이다.

세 번째의 유비는 사목자와의 유비이며, 이것은 처음에 제시했던 것 그대로이다. 왕은 사목자로서, 아버지로서 통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감으로써 혼자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은 선한 생활이다. “선한 생활이란 덕이 높은 삶이며, 덕이 높은 삶이야말로 함께 사는 사람들의 목적인 것이다.” 덕이 높은 삶을 보냄으로써, 혼이 구제되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며, 왕의 임무는 이를 실현하는 것이다. 왕은 개인의 영원한 구제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처할 뿐 아니라, 그 구제가 가능해지도록 조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푸코가 이런 세 가지 유비를 통해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 가정, 국가, 그리고 자연의 전체에 대한 우주론적인 일대 연속체의 이름으로, 왕이 통치하는 것을 인가받고, 이 연속체가 주권자가 따라야 할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다. “왕이 통치할 수 있고 또한 통치해야만 하는 것은 왕이 신으로부터 자연이나 사목자를 통해 한 집안의 아버지에 이르는 이 거대한 연속체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며, 그리고 16세기에 붕괴한 것은 이 연속체이다.

신이 자연을 사목적으로 통치했다고 한다면, 구원, 복종, 진리의 세 가지 축에 있어서 지배했을 것이다. 구원의 축에 있어서는, 세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되며, 인간이 만들어진 것은 이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행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인간중심주의이면서, 인간은 이 세계를 위해서 살아 있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것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대우주와 소우주의 대비의 사고방식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우주와 자연은, 거대한 우주로서,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며, 큰 인간이다. 동시에 소우주인 인간은 가장 높은 천구의 가시적인 질서를 반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대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세계이지만, 소우주의 극에는 하나의 특권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한정된 규모에서, 천공, 성신星辰, 산악, 하천, 폭풍우의 광대한 질서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복종의 축에서 생각한다면, 신은 인간들에 대해 구원의 표시를 주고, 신의 의지를 제시한 것이라고 푸코는 생각한다. “사목적으로 통치되는 자연은 곧 기적, 위협, 표시로 가득 찬 자연이 된다. 그때 세계의 양상은, 문장, 문자, 암호, 어두컴컴한 말, 터너에 따르면 상형문자에 의해 뒤덮이는 것이다. 이 표시는 각각에 벌의 위협과 구원의 약속과 선택의 표시로서 해독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는 해독되어야 할 기호로 뒤덮여 있기때문에, “인식하는 것은 해석하는 것이 된다.

세 번째인 진리의 축으로 생각하면, 기호로 가득 찬 세계는, 그 진리가 해독되기를 기다리는 세계라는 것이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며, 그 열려 있는 책 속에서 사람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은 유비와 유사의 관계 속으로부터, 세계의 진리를 해독해야만 한다. 그래서 자연과 말은 무한하게 서로 교차하며, 읽는 유령을 터득한 자에 대해서, 이른바 유일하고 방대한 텍스트를 형성하는 것이다


군주권력의 시대의 통치

이런 중세적 세계의 이미지는 이미 지적했듯이 “1580년부터 1650년 사이에,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의 창설 자체가 이뤄졌을 때에 소멸하게 된다. 그 절단을 중세의 사목적 우주론을 떠받치던 세 개의 축으로 고찰해보자. 첫 번째인 신과의 유비의 축을 절단한 것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이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발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성신신학星辰神学을 타파했다. 달 위의 세계와 달 아래의 세계의 구별이 소멸된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응은 무지개처럼 무산霧散됐다. 이제 진리는 자연의 신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학의 말에 의해 작성되게 됐다.

그리고 이제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계층구조가 아니다. 이 우주를 해독하려면 유비적인 계층구조가 아니라, 데카르트가 『정신지도의 규칙』에서 제시한 분석방법이 필요해진다. 분석에서도 비교는 행해진다. 그러나 이 비교라는 작업은 세계가 어떻게 질서 잡혀져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역할을 맡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질서를 따라서 행해지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향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자연과의 유비의 축을 절단한 것은 포르 루아얄의 『일반문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세계는 신의 표시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기호나 암호라는 것은 인간이 분석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다. 중세의 점술’(디비나티오)신에 의해 세계 속에 미리 배분된 언어를 주워 담는것이며, “신적인 사물을 꿰뚫어보는 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호가 기호로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인식의 내부에서이다.” 이리하여 미지의 기호나 무언의 표식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사목자와의 유비의 축을 절단한 것은 말브랑슈에서 콩디약에 이르기까지의 기호의 철학일 것이다. 분석의 방법에 의해 기호가 작성되지만, “정신이 분석을 향하기 때문에 기호가 나타나며, 정신이 기호를 손에 넣고 있기 때문에 분석은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 기호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표상작용의 내부, 관념의 간극, 관념이 스스로를 분해하고, 재합성하고 스스로와 시시덕거리며 노는 투명한 표상의 타블로의 두께가 없는 공간이며, 도덕성을 따질 수 없는 공간이다.

이리하여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에 의한 17세기의 과학혁명에 의해 코스모스의 붕괴와 우주의 무한화가 일어났는데, 푸코는 이 시대에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조작 개념이 등장했음을 지적한다. 그것이 통치술이라는 개념이다. 주권자는 주권의 행사에 있어서, “신이 자연에 대해서, 사목자가 양에 대해서, 가장이 아이들에 대해서 행하는 것과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은 자연의 과학적인 원칙이 지배한다. 인간의 세계는 통치의 이성이 지배한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응이 붕괴하는 동시에, 우주와 국가를 각각 지배하는 이성(raison)이 탐구되는 것이다. “자연의 원칙(프린키피아 나투라)과 국가이성(레종 데타), 자연과 국가, 이것이야말로 근대서양의 인간에게 주어진 다양한 지식이나 기술의 양대 좌표로서 마침내 구성되며, 마침내 분리된 것이었다.”

 

국가이성

그 배경에 있는 것은 종교개혁으로 독일에 다수의 영방국가가 설립되고, 그것이 지역적인 국가의 성립 모델이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권력 행사에 대한 전통적인 속박을 풀고, 루터가 지배하는 자가 종교를 정한다는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 크게 기여했다. 그 후 수세기의 유럽에서의 군주국의 성립에 있어서, 이 두 사람의 힘은 크지만, 특히 루터의 의도치 않은 기여가 컸다. 피기스(J. N. Figgis)가 지적하듯이, 리슐리외는 개혁운동의 산물이며, “루터가 없었다면 루이 14세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교회의 종교에서 국가의 종교로 바뀐 것이다. 그 최초의 형태가 왕의 신성한 권리이다.”

제국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의 국가는 종교적 권위를 부정했기에 그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세속적인 국가는 그때까지 종교적 권위를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 어려운 것은 기독교의 권위와 함께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국가의 이론도 부정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개념을 일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정치가라는 개념으로는 실제의 정치활동을 잘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마키아벨리(1469-1527)이다.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정치학은 키케로의 공화주의적 정치학에 의거했다. 정치학(폴리틱스)은 폴리스의 학문이었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에 대해 쓴 많은 책이 군주를 위한 귀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키케로의 이념과 사목의 이념을 따라, 국가의 통치자는 양들의 행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정치란 정의와 이성을 따라 국가를 통치하는 술이며, 통치의 기술은 기술 중의 최고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보여준 것은 이런 폴리티코스의 개념과는 이질적인 국가(state) 개념이었다. 프랑스어의 국가(état)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상태나 상황을 의미하는 state라는 단어에는 국가외에 세력자의 세력”, ‘공권력’, ‘지배자등의 의미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폴리티코스라는 단어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가 전개하려고 한 주제는, “군주가 소유하는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고,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으며, 대등한 시민에 의한 통치라는 공화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폴리티코스의 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시민이 이성을 따라서, 정의와 공통의 선을 목표로 하여 공동으로 통치하는 장인데, 나라[국가]는 군주가 그 국가의 국민의 이익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익을 목적으로서 소유하고, 유지하는 장이다. 이 책은, 피렌체라는 과거의 공화국을 자신의 나라로서 소유하는 메디치가에 바친 것이었다. 게다가 시민들의 적대감 속에서, 정복자로서 추방의 신분에서 돌아온 젊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바쳐야 할 것이었다(다만 줄리아노는 요절했기 때문에, 조카이자 피렌체의 최고 지휘관에 막 임명된 로렌초에게 바쳐졌다).

이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던 줄리아노에게는 당시의 역사가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1483-1540)를 비롯하여 다양한 의견서가 제출됐다. 피렌체의 국민[인민]에게는 아직 자유를 원하는 공화주의적인 정신이 강했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을 바라는 사람들도, 군주의 지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의견서에는 주로, 신분이 높은 유력자에게는 지위와 권력을 부여할 것, 신분이 높으나 권력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위와 명예를 부여할 것, 평민들에게는 안심하고 일에 종사하도록 국내의 평화를 확보할 것을 권고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공화국의 전통과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에게 권력, 명예, 치안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부터, 공화국보다 군주국이 바람직하다는 것, 자신들이 통치하기보다는 메디치가의 통치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강조되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헌정했을 때에는, 이런 권고서보다 뛰어난 정치술과 정치관을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그 적임자라고 확신했다. “[]이 정한 바에 의해 견직물업도 모직물업도 이해타산도 전혀 모르는 제게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 [본]성에 해당됩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직면한 것은 전통적인 공공선 이론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에서, “이탈리아의 모든 인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형태를 산출하는 재료가, 과연 이 나라에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키아벨리가 중시한 것이 국가(stato)의 생명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군주 또는 공화국이, 스스로의 stato를 어떻게 확립하고 국가(stato)를 보전할 수 있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었다군주론』은 군주제의 stato를 분석하고『전술론』이나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제의 stato의 가능성을 고찰한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의 이탈리아라는 상황(stato)에서 권력자가 자신의 세력(stato)을 확립하고, 국민 전체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국가(stato)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국가이성(라티오네 데 stato) 개념의 싹이 탄생한 것이다.

푸코는 이 국가이성 개념은 마키아벨리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를 반박하는 진영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마이네케가 지적하듯이, 마키아벨리 이전부터, 이미 국가의 힘 그 자체에 주목하는 이론이 발생했다. 프랑스의 신학자 장 젤송1404년에, 다양한 법률이 국가의 목적인 평화의 유지에 도움이 안 될 때, 법은 이 목적을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필요는 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국가이성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11세기부터 12세기 무렵까지, “결실이 풍부한 배후지로 혜택을 입은 롬바르디와 토스카나 지방 등,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는 다수의 도시국가가 성립되고, 독일 황제의 지배를 거부하며, 자치를 확립했다. 피사에서는 1085년에 콘술에 통치를 맡기는 도시국가(코무네)가 성립했으며, 1097년에는 밀라노에서, 1125년에는 볼로냐와 시에나에서 이런 코무네가 성립했다.

그 후, 이런 도시는 급속히 발전한다. 피렌체는 14세기에는 인구가 10만 명으로 확대되고,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와 파리가 유럽의 5대 도시가 될 정도로까지 성장한다. 주변의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농민이 도시의 공예산업, 무역, 환전업의 성장을 촉진했다.

이윽고 이런 도시는 통치를 외부로부터 온 통치자(포데스타)에게 맡기게 된다. 권한이 지정되고, 정해진 임기 후에는 그 작업의 내용이 점검된다. 12세기 말에는 이탈리아 북부의 전체가 이런 코무네에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제는 로마법 아래서는, 도시의 자치와 독립의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235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가 피아첸차 회의에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 제국의 통일로 복귀하라고 요구한다. 결국 로마 황제도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고, 치열한 전투로 도시는 황폐해진다. 결국 이 긴 전쟁 속에서, 도시의 법률가들은 황제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찾게 된다. 로마법학자들이 모두 황제의 주장을 지지하는 가운데, 삭소페라토의 바르톨루스Bartolus de Saxoferrato(1314-57)가 새로운 논리를 구축했다. 이것은 로마법의 혁명을 초래한 것이며, 법과 사실이 대립하는 경우에는 법에 맞게 사실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맞게 법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피렌체 같은 도시가 실제로 제국에서 독립해 자치를 할 경우, 그것을 사실로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라를 바치는める 자는, 통치자로서, 자국에서는 황제와 똑같은 권한을 소유한다는 원칙(lex in regno suo est imperator)을 제시한 것이다.

이 전통적인 국가 개념의 혁신은, 국가의 통치라는 사실을 통해 그때까지의 황제의 전통적인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이탈리아에서의 상태(stato)에서 모든 권리의 원천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 또한 유럽에서의 현황을 전제 삼아 고찰한다. “나폴리, 교회국가,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의 다섯 개 국가의 체계에 의해 어떤 의미에서 균형을 유지한 상태에 의거하여, stato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군주들에게, 피렌체를 새롭게 통치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보여준 것이다. 우선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들이댄다. “인간은 사악하며, 당신에게 신의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군주는 신의를 지켜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람의 원한은 선행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선한 행위에 매달리면, “선행이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사리사욕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깊은 신념이었다. 군주는 조언자들이 사리사욕을 생각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조언자가 사리사욕으로 내달리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선한 자가 되는 셈이어서, 그렇지 않으면 모두 당신에게 사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민들이 공통의 선을 위해 국가를 형성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이후의 전통적인 국가 개념을 파괴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종교도 도덕도, 국가를 떠받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군주는 이것을 도구로서 파괴하는 사용해야 한다. 국가를 떠받칠 수 있는 것은 군주의 덕(비르투)뿐이며, 이를 위해서는 온갖 수단을 행사해야 한다. 이것은 마이네케가 지적하듯이, 국가이성의 원리로 이어지는 사고방식이며, “그것을 표시하는 말은 마키아벨리에게는 결여되어 있으나, 사실과 stato를 중시하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국가이성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테로와 국가이성

이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 것은 1589년에 󰡔국가이성에 대해󰡕라는 책을 쓴 조반니 보테로였다. 이 시대에는 국가이성은 마키아벨리의 이름으로 말해졌으나, 보테로는 마키아벨리 같은 경건하지 못한 인물과 이 개념을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국가(stato)는 인민의 확고한 통치이며, 국가이성은 이런 통치를 확립하고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걸맞은 지식이다.

보테로는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주의 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생각한 <기세>, 간사함도 아니다. 보테로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정의와 관대함이다. 정의는 평화와 화합의 토대이다. 신하를 공평하게 대우하고, 아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관대한 마음을 갖고, 빈자를 돕고, 덕이 높은 행위를 칭찬해야 한다. 이는 대부분 전통적인 군주의 귀감이라는 말에 가깝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정의와 관대함을 갖추고 있는 듯 보이게 하는것의 가치를 인정한 반면, 보테로는 군주가 실제로 정의를 중시하고 관대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군주에게 공통선의 실현이라는 과제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테로의 이 책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때까지 없었던 시민들의 공동의 과제였던 공통선의 실현을 명확하게 군주의 과제로 삼음으로써, stato의 기술을 공통선 실현의 목적과 결부시키고, 전통적인 정치학의 언어와 국가의 통치의 언어를 통합한 것에 있다. “그때까지 정치학은 시민의 철학(정의, 우정, 화합)과 결부되었으나, 이를 분리하고, (군주의) 평판을 유지하고 높이는 방법으로 제시함으로써, 보테로는 실제로는 정치학을 국가의 기술의 지침에 따라 해석할 것을 주창했던 것이다.

보테로는 예수회의 콜레주 출신이며, 이 시대의 예수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계승하면서, 국가의 통치의 이론을 전개했다. 보테로는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통찰을, 토마스가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공화주의적인 공통선의 가르침과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며, 이것에 의해 국가이성의 이론은 유럽의 다양한 궁중들에 퍼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스페인의 궁정에서 읽혀지고 통치의 참고가 됐으며, 파이엘른의 막시밀안 2세도 보테로의 국가통치술의 원칙을 채용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프레데릭 2세도 이 책을 읽었다.

이런 국가이성의 이론은 국가의 통치 기술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면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의 힘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국가를 유럽의 공간 안에서 병존시키면서 모든 것이 자국의 힘과 세력을 강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stato로 간주하고, 그 목적을 통치자의 덕과 합리적인 배려에 의해 수행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과 자연에 입각해서 인간의 내세에서의 구원을 목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요구됐다. 그것이 이제는 국력을 따라서 통치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국력을 확장적이고 경쟁적인 틀 속에서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통치 형태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의 세력균형의 상태에 걸맞은 학문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 당시는 매일 무수한 사람들이 국가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이며, 이는 곧바로 하나의 발명으로 인식된 것이었다.

이런 국가이성이란 결국 선한 통치의 기술이다. 이 기술의 특징은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군주의 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보존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과 같은 국가 이외의 목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국가이성에 의한 통치에는 몇 개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우선 이 통치가 필요해지는 것은 인간 본성의 약함이나 인간들의 악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이성 없이는 국가는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기술은 항상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무제한한 시간, 항상적이고 보수적인 통치의 시간이다.

두 번째 특징은 지금 존속하고 있는 국가의 힘 자체가 중요하며, 국가가 어떻게 설립됐느냐는 기원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가를 계승했더라도, 찬탈한 것으로 통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국가이성의 통치에 있어서는 기원이나 정초나 정통성이나 왕조에 관한 문제조차 제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국가의 보존만이 목적이며, 국가가 맡아야 할 종국적 목적 등이 모습을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혼의 구원 등은 배려할 필요도 없고, 종말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다. 통치의 시간은 현재만을 지향하지만, 이 현재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으로 상정되는 것이며, 종말은 없다. “열린 역사성 속에 있는 것이다.

 

국가이성과 사목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국가이성의 기술이, 사목의 기술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사목의 기술이 어떻게 국가이성의 기술로 전개되고 있느냐에 있다. 국가이성은 사목과는 명확하게 다른 특징을 갖추면서, 어떤 의미에서 사목의 기술을 채용하고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 두 이론의 관계를 사목의 기술에서 고찰의 축으로 삼은 구원, 복종, 진리의 세 가지 축으로 검토한다.

 

── 구원의 축

먼저 구원에 대해 푸코가 의거하는 것은 국가이성의 가장 현저한 표현인 쿠데타 개념이다. 오늘날 쿠데타는 정통성 있는 권력자가 아닌 자가 폭력적 수단으로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국가(état)에 의한 일격(coup)이며, 국가가 예외적인 조치로서, 비상수단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쿠데타란 법과 합법성을 중지시키고, 정지시키는 것이다.

국가이성은 통상적이라면 법을 지키지만, 그것은 스스로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이며, “법을 따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국가가 법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국가의 현황에 대해 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6세기의 이탈리아의 법률가가 코무네에는 황제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이성은 국가의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초법규적인 수단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구원의 필요성이라는 명분 아래서, “그때까지 인정되고 작동되었던 시민적, 도덕적, 자연적인 법을 일소하도록 국가이성을 들볶는 것이 요구된다. 그것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양(羊)의 혼의 구원을 첫 번째의 목적으로 한 사목자의 역설이 뒤집혀진 채 남아 있다.

이런 쿠데타는 필요성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폭력적이며, 이것이 쿠데타의 두 번째의 중요한 특징이다. 보통 국가이성은 법을 틀로서, 형식으로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사하지, 쿠데타의 순간에는, 폭력적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 국가 이외의 모든 것은 희생된다. 구원되는 것은 국가뿐이다. 그래서 국가이성의 구원은 사목의 구원을 물구나무 세운 것이다. 사목의 구원은 겉으로는 만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국가이성은 선택적인 사목제, 배제하는 사목제, 전체를 위해 몇몇을 희생시키고 국가를 위해 몇몇을 희생시키는 사목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공선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위이다. 전체의 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오염된 양을 배제하는 사목자의 역설이다.

쿠데타의 세 번째 특징은 연극적이라는 데 있다. 국가이성은 쿠데타에 있어서 연극적으로 실천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극적인 형식에 있어서 국민의 눈앞에 제시함으로써, 그 정통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목은 모든 비참을 참아내는 인내의 술을 가르쳤는데, 국가이성은 필요하다면 국민을 희생시키는 연극적이고 비극적인 가혹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목에서 신도들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지만, 국가이성에서는 국가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국민이 스스로를 희생할 것이 강요되는 것이다.

 

복종의 축

두 번째 축은 복종이다. 푸코가 고찰하고 있는 텍스트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모반과 동란에 대한 시론이라는 글인데, 여기서는 국가이성의 최초의 이론가인 보테로의 『국가이성에 대해』를 실마리 삼아 생각해보자.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내의 통치에서 가장 중시해야 하는 것은 대귀족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귀족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고등법원 제도를 참고해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생각했다. 프랑스에서는 민중이 대귀족의 횡포를 미워하며, 왕은 민중을 보호하기 위해 대귀족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왕이 직접 귀족들을 억누르면 민중을 편들게 되며, 귀족의 원성을 살 위험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고등법원을 설치하여 3자의 중재자로 삼아 큰 세력을 억누르고자 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민중에게서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성벽(城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국내의 유력자로부터도, 외국의 적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 민중은 방패와 같은 것이며, 능동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푸코가 지적하듯이, 그에게 인민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순박한 것이며, 군주에게 도구로서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다만 그럴 뿐이다.

반면, 보테로는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보테로에게 민중은 능동적 주체이며, 국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다. 군주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자금과 주민이다.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한 두 개의 힘이 남는다. 그것은 인민과 자금이다.” 보테로는 군주가 국내의 상거래와 수출입에 어느 정도의 세금을 거둬들여서 국고를 살찌울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검토한다.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둬들이면, 인민은 가난해지고, 반란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리고 결국 국가는 파멸에 이른다. 세금이 너무 적으면 군주는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고,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외국의 공격을 받았을 때,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적절한 세금을 걷는 것, 그것이 군주의 중요한 과제이다. 보테로가 보여준 것은, 국가의 수입과 지출의 통계를 작성하는 것이다. 보테로는 통계학의 이른바 선구자이다.

 

인민을 해치지 않고, 지배자가 수중에 남겨둔 금액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국내에 반입되는 상품의 지불을 위해 어느 정도의 금액이 나라에서 나올 것인지, 국외로 수출되는 상품의 지불로 어느 정도의 금액이 나라에 들어오는가를 확인하고, 수중에 남겨둘 금액이 국가의 수입으로부터 지출을 뺀 금액보다 많아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중상주의의 견해를 선구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인민은 스스로의 부를 향유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되며, 세금을 내게 된다고 간주된다. 반란을 방지한다는 이런 관점은 국가의 두 번째 중요한 요소인 주민의 생산성에 대한 시선과 교차한다. 군주는 스스로 국가의 수입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주민이다. 이를 위해서 군주는 신하가 농업, 산업, 상업에서 열심히 일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보테로는 인민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사적 이익[私利]뿐이라고 생각한다. 인민이 풍족해지지 않으면, 국가는 부유할 수 없다. 사적 이익의 추구는 국가의 이익을 높이는 것이다.

이처럼 군주는 두 개의 기술, 즉 통계학과 중상주의에 의한 경제적 계산에 의해 국가를 부유하게 할 수 있는 동시에 인민을 복종시킬 수 있다. 인민을 복종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민이 풍요로워져 반란을 일으킬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귀족은 반란을 일으키면 처벌하면 된다. 반면 인민은 현실적으로 곤란하며, 현실적으로 위험하다. 통치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민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의 계산의 대상이 되는 것은 , 부의 유통, 세금 , 인민의 활동 그 자체이다.

사목의 기술에서는 복종 그 자체가 선이었다. 신도는 복종함으로써, 스스로의 구원을 확보할 수 있다. 국가이성에서는 복종 그 자체는 선이 아니다. 인민은 풍요로워짐으로써 자연에 복종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피안에서의 인민의 혼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 차안(此岸)에서의 인민의 경제적 행복에 의해 뒷받침된 국가의 구원이 목적이다. 그러나 인민을 복종시킨다는 목적을, 사목의 기술과 국가이성은 공유하는 것이다.

 

── 진리의 축

푸코가 사목과 국가이성을 비교하는 세 번째 축은 진리에 관한 관점이며, 이는 통계학이라는 학문에 관련된 것이다. 사목에서는, 사목의 기술의 전제가 되는 기독교의 교의가 우선 진리로서 가르쳐질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 사목자는 담당하는 양떼들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양들은, 스스로의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고백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신-사목자-양이라는 사이클이 사목의 진리의 사이클이라고 한다면, 국가이성에서는 진리의 대상이 되는 영역 그 자체가 바뀌게 된다.

국가이성이 등장하기 전에 지배자에게 요구된 진리와 지식은 교회법이며 자연법이었다. 더욱이 역사상의 다양한 예나 미덕의 모델에 대한 지식이었다. 그리고 지배자에게는 법을 신중하고 공평하게 적용할 것이 요구됐다. 그러나 17세기가 되자 지식의 내용 자체가 바뀌게 된다. 법이 아니라 국가의 현실 자체인 사물이 지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지배자에게는 국가의 세력에 관련된 모든 요소를 정확하게 인식할 것이 요구됐다. “인구의 계량, 사망률과 출생률의 계량, 국내의 다양한 범주의 개인들의 산정(算定), 그들의 부의 산정 , 조사해야 할 요소는 무수히 많다. 이것이 통계학(statistique)이다. 통계학이란 국가(state)의 학인 것이다. 그것만으로 통계 데이터가 국가의 비밀이며 제권帝権의 비밀(아르카나 임페리이[지고의 비밀])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이성에 있어서 중요한 지식은 단순한 영토가 아니며, 개별 국민도 아니고, 주민이며, 인구이며, 국가의 부의 총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무리에 대한 지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