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뱅주의와 시민사회

: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원제 : ジャコバン主義と市民社会──十九世紀フランス政治思想研究の現状と課題

저자 : 다나카 다쿠지(田中拓道)

출처 : 社会思想史学会, 『社会思想史研究』, 31권, 2007, 108-117.






1. 들어가며

19세기 프랑스 사회사상사의 고전을 쓴 막심 르루아(Maxime Leroy, 1873-1957)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1789년 이후의 모든 역사는 …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대립으로 귀결된다.”[각주:1] 르루아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1789년의 원리, 즉 개인적 자유와 소유에 입각한 새로운 권력 구성의 원리이며, “사회적인 것”이란 평등과 관련된 것이면서 개인의 불행을 집합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 노동이나 분배와 관련된 1793년의 원리이다.[각주:2]

르루아가 지적하듯이, 19세기의 프랑스 역사는 1789년에 선언된 원리가 그대로 실현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대혁명 시기에 제창됐던 ‘정치적’원리는 개개인의 구체적 생활조건에 입각한 ‘사회적’인 질서 원리에 의해 항상 비판되며 수정을 겪었다. 양자의 상극과 조정이 반복되는 과정이야말로 이 시기 이후의 사상사를 구성한다.

다만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의 개념은 사실상 논자마다 매우 다양하다. 크게 말해서, 1960년대까지 19세기 사상사를 해석하는 틀은 경제구조에 기인하는 계급대립에 의해 주어졌다. 생디칼리즘을 대표하는 이론가 르루아가 양자의 대립을 자유주의적 권력구성원리와 노동자의 사상·운동과의 대립으로 파악했던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런 해석 도식은 크게 변경된다. 역사학·정치사상사·철학 등의 분야들에서 지적인 쇄신이 일어나고, 오히려 일원적 통합원리(정치적인 것)와 다원성 원리(사회적인 것)의 긴장관계가 논자의 주된 관심 대상이 된다(다만, 나중에 다루는 르포르와 고셰는 양자를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한다).

본고는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에서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대항, 혹은 일원적 통합원리와 다원성 원리의 긴장관계를 축으로 최근까지의 연구사를 재정리하고, 그 현황과 과제에 관해 고찰하려는 것이다.


2. 일원적 통합원리에 대한 비판

1) 자코뱅주의의 유산

1960년대에 들어서자 그때까지 인문·사회과학에서 지배적이었던 맑스주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나타난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간주한 정통사학을 비판했던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 1927-1997) 등이 혁명기의 정치적 담론에 주목한 새로운 방법론을 수립했다.[각주:3] 퓌레에 따르면, 단일한 ‘인민’이라는 허구의 집합을 통치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로 간주하는 문학자, 철학가의 담론이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획득함으로써, 혁명의 급진화와 자코뱅 지배가 초래됐다. 19세기 이후의 사상적 과제는 ‘자코뱅주의’를 극복하고 ‘혁명을 끝내게 하는’것에 있었다고 간주된다.[각주:4]

퓌레의 연구는 정치사상사 분야에서 ‘정치문화’론이라 불려야 할 새로운 연구사조를 산출했다.[각주:5] 그것은 경제구조로부터의 정치적 담론의 자율성을 선언하는 것이 되며, 동시대의 정치적 담론의 배치, 그 내재적 논리를 탐구하는 역사연구로의 길을 개척했다.[각주:6] 여기서는 퓌레의 문제관심을 계승하는 한 명으로서 뤼시앙 좀(Lucian Jaume, 1946~)의 연구를 다뤄보고 싶다.

좀은 퓌레의 담론분석 방법에 의거하면서, 대혁명에서 비롯되는 프랑스의 ‘정치문화’의 특징을 탐구한다. 『자코뱅파의 담론과 민주주의』(1989)에서는 혁명기의 클럽과 의회에서의 자코뱅파의 담론을 검토하고, 당(parti)에 의한 도덕적 혁명운동이 대표하는 자·대표되는 자의 일체성을 산출하며, 주권을 구성한다는 독특한 정치관의 성립을 지적했다.[각주:7] 이런 정치관은 나폴레옹 제정기의 집권론, 7월 왕정기의 독트리네르의 이성주권론으로 계승된다. 그는 이어서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의 사조들을 검토하고, 거기서 일관된 특징을 ‘삭제된 개인’(individu effacé)라고 평했다.[각주:8] 대혁명 이후의 자유주의는 세 개의 사조로 구분된다. 첫째는 자코뱅주의적 정치인식에 대항하고 개인의 내면적 자유의 불가침성과 입헌주의에 의한 권력억제를 주창한 스탈 부인, 콩스탕, 프레보스트-파라돌(Prevost-Paradol) 등의 사조이다. 둘째는 개인보다 ‘사회’를 권력의 정당성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사회’의 의지[의사]를 대표하는 공적 기관으로의 집권화에 의해 더 고차적인 자유가 실현된다고 파악한 르와이에-코라르, 레뮈제, 기조 등 독트리네르의 사조이다. 셋째는 개인적 자유에 대해 종교적 ‘진리’를 우위에 두고 신적 권위에의 복종에 의해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라므네, 몽타랑베르, 세기말의 자유주의 가톨릭 등의 사조이다. 이 중 둘째와 셋째 사조가 프랑스 자유주의의 주류를 두고 다투며, 두 번째 사조가 1875년 이후에 체제원리가 되며, 자유주의와 양립하는 공화체제를 이끌게 됐다고 한다.[각주:9]

2) 자코뱅주의와 전체주의

퓌레나 좀의 연구는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 정치문화의 특징을 ‘자코뱅주의’적인 일원적 통합원리에서 찾아내는 것이었다. 1970년 이후의 정치철학에서는, 이런 사상적 전통을 근대민주주의에 내재하는 모순의 출현으로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사조가 있다. 이하에서는 클로드 르포르, 마르셀 고셰를 중심으로 그런 19세기론을 다뤄보고 싶다.[각주:10]

르포르(Claude Lefort, 1924~)는 20세기 후반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이다. 1949년부터 60년까지 카스토리아디스 등과 잡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를 간행한 그는, 60년대 이후 맑스주의와 결별하고, 토크빌과 아렌트의 사유에 의해 촉발되고, 근대민주주의와 전체주의에 공통적인 정치인식의 문제성을 탐구하게 된다. 여기서는 ‘인권’의 역설,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개념의 분석이라는 두 가지 점에 집중해서 그의 연구를 일별한다.

르포르에 따르면, 근대 이전의 사회가 ‘외부’에서 질서의 일체성을 보장하는 참조점(신, 자연, 왕의 신체)을 갖고 있었던 반면, 근대민주주의의 특징은 이런 참조점들을 거부하고(가령 프랑스혁명에 의한 왕의 신체의 폐절), ‘내부’에서만 질서의 입각점을 찾으려 한다는 데 있다.[각주:11] 그 입각점은 ‘인간’(homme)이라 칭해지며, ‘인간의 권리’의 실현이 근대 민주주의의 궁극 목적이 된다. ‘인간’이란 개개인의 공통성을 추상화한 집합을 가리키는데, 외부의 지표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기언급[참조, 지시]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불확정성을 갖는다. 르포르에 따르면, 근대 이후 ‘인권’은 사회적·경제적·문화적 권리로서 확대를 거듭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권력도 ‘복지국가’(État-providence)로서 비대화를 계속했다.[각주:12]

여기서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다루고 싶다. 르포르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 특히 자코뱅주의와 20세기의 전체주의에 공통적인 것은 모든 다원성이나 차이를 배제한 ‘일자-인민(Peuple-Un)’이라는 표상이 통치의 기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일자-인민’은 개개인의 동질성을 전제하며, 개인을 초월한 집합으로서 관념되며, ‘사회적 권력’이라고도 일컬어진다. 19세기의 사상가 중에서 콩스탕이나 기조가 아니라 토크빌이야말로 이런 단일한 ‘사회적 권력’에 대한 개인의 종속, 모든 차이를 제거하는 ‘새로운 전제(專制)’의 위험성을 인식했다.[각주:13] ‘인권’은 이 ‘사회적 권력’에 의한 ‘새로운 전제’를 억지할 수 없다. 오히려 개인의 동질성을 전제하는 ‘인간’관념은 개별 인간의 차이를 제거하고, 국가권력의 무제약적 확대를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마찬가지의 문제를 내재시킨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전체주의와 근대 민주주의는 구별될 수 없다.[각주:14]

르포르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정치’(국가권력의 행사)를 일상생활의 곳곳에 침투시키는 논리를 내재시킨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나누는 것은 권리·정치제도 등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차원’, 즉 자유로운 언론에 의해 통치권력을 비판적으로 음미하고, 제약하는 ‘공적 영역’의 존재뿐이다.[각주:15] 이 공적 영역을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은 기존의 권리·정치제도나 공/사의 구분을 다시 묻는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운동’뿐이라고 한다.

르포르가 탐구했던 근대 민주주의의 문제는, 고셰(Marcel Gauchet, 1946~)에 의해, 프랑스의 ‘역사적 조건’아래에서 더욱 탐구됐다.[각주:16] 고셰는 프랑스에서의 민주주의의 곤란의 출발점을 대혁명에 둔다. 기독교의 성립과 세속화는 개인이 세계의 의미를 자기 해석하는 존재로서 우뚝 서는 것을 가능케 했다. 프랑스 혁명은 탈종교화와 왕의 부정에 의해,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개인으로 구성된 연대를 창출할 가능성을 초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연대가 모든 외부성이나 내적 다원성을 갖지 않는 단일한 집합(‘사회’)으로 관념됨으로써, 개개인을 초월하는 ‘사회’에 의한 새로운 전제(專制)나 억압을 초래할 가능성도 일어났다.[각주:17] 고셰는 프랑스혁명에서의 입법부로의 중앙집권화, 자코뱅주의에서의 ‘단일한 집합체’관념의 성립에서 개인의 자율과 양립할 질서의 형성 실패의 요인을 찾아낸다. 혁명기의 시에예스에 의한 의회감시의 ‘제3의 권력’도입론, 콩스탕의 중립적 권력론, 대의제론 등은 ‘사회’의 관념에 기초한 일원적 통치상을 비판하고 다원성을 도입하려는 시도(와 그 좌절)로 독해된다.[각주:18]

고셰에 의한 19세기 이후의 역사상을 일별해두자.[각주:19] 19세기 전반기에는 좌우 당파의 대립, 국왕·정부·의회의 분리, 대표제 등, 일정한 ‘다원성’원리의 도입이 꾀해진다. 제3공화정 시기의 양원제의 도입은 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1880년대부터 1914년 사이에 분업의 진전이나 계급대립에 의해 간과된 ‘사회’의 일체성이나 전체성을 회복하려는 희구가 현재화하고, ‘단일한 인류(Une humanité)’라는 종교적 관념이 부상한다.[각주:20] 이것은 민족·국민 등으로 모습을 바꿔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정치를 석권한다. 고셰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는 어떤 의미에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 정당이나 결사의 다원성, 대의제는 행정기구에 의한 리스크의 예측이나 불확실성의 제거·통제와 양립할 수 있는 한에서의 ‘지배된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있다”고 말해지듯이, 현대 민주주의는 문화적 획일화,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의 매몰·함몰에 의해 단일한 ‘사회’의 논리에 기초한 일원적 지배로 전화될 가능성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고셰는 근대 민주주의에서의 ‘외부’의 삭제라는 문제로 되돌아가, 탈종교화의 역사를 정치사상의 문제로서 연구하게 됐다.[각주:21]

3) 생명정치의 확산

1970년대의 지적 쇄신 속에서 생겨난 두 번째 사조로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이후의 19세기 연구를 들 수 있다. 이 사조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논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하는 데 머물 것이다.[각주:22] 푸코는 1977-78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18세기 이후의 통치권력의 성질변화를 주제로 삼는다.[각주:23] 그에 따르면, 상업과 도시의 발전은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국가(내치)의 역할을 확대시키고, 통치의 효율화(économie)라는 문제를 부각시켰다. 정치경제학(économie politique)의 내실은 18세기 후반기에 치안유지에서 ‘인구’의 학(學)으로 변화한다. 푸코는 사람들의 생물학적 필요를 집합적으로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권력의 존재방식을 ‘생명정치’(biopolitique)라고 칭하고, 이런 권력실천이 공중위생·인구정책·의료·식량정책으로서 전개됐다는 것, 그 담지자가 국가관료뿐 아니라 ‘사회적’영역에서의 병원·공장·교육기관·경제학자·위생학자 등으로 학산됐다는 것을 지적했다. 푸코에게 ‘시민사회’란 이런 통치를 더 효율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정치적 영역에 다름 아니며, ‘자유주의’란 새로운 통치의 방식을 정당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이해된다.[각주:24] 푸코의 ‘생명정치’, ‘사회적인 것’, ‘자유주의’등의 개념은 이후 19세기 연구에서 비교·대조되는 틀이 되며, 빈곤문제나 감옥, 공중위생, 가족, 의료 등과 관련된 많은 역사연구를 산출했다.[각주:25]

위에서 다뤘던 두 개의 사조는 각각 상이한 관심에서,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에서의 일원적 통치원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었다. 퓌레와 좀은 자코뱅주의의 유산이 19세기 이후에도 잔존하며, 영국식 자유주의나 입헌주의가 정착되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르포르나 고셰는 ‘인간’이라는 자기언급적 개념을 기초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가 단일한 집합체(‘사회’)에 대한 개인의 종속, 그리고 국가권력의 무제약적 확대를 이끌 위험을 내재시키고 있다고 논했다. 푸코주의자는 18세기 이후의 개개인이 단일한 생물학적 집합(‘인구’)로 파악됨으로써 집합적 생명의 효율적 유지·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권력이 ‘사회적’영역으로 확산되고 개개인의 생명의 관리·규율화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각자는 이런 일원적 통치원리에 대항하는 다원적 질서구성원리의 추구 ― 퓌레와 좀에게서의 대의제와 경쟁적 정당제, 르포르와 고셰에게서의 운동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나 ‘외부’의 탐구, 말년의 푸코에게서의 ‘자기에의 배려’에 기초한 고대 그리스의 주체상과 자기-타자관계 ― 를 사상적 과제로 삼았다.

이런 연구사조들과 교착되면서도, 근현대 프랑스의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전환하고, 거기서 긍정적인 발전사를 독해해내려는 것이 다음에서 다루는 피에르 로장발롱이다.

3. 일원적 통치원리로의 회귀 : 로장발롱의 19세기론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 1948~)은 중도노조인 CFDT의 고문이라는 사상사 연구자로서는 특이한 경력에서 출발했다. 1970년대 말에 푸코의 세미나에 출석했으며, 최초의 사상사 연구서인 『유토피아적 자본주의』를 출판했다. 80년대에는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 소속되어 퓌레, 르포르, 고셰, 마넹 등과 교류하면서 역사연구·현대정치연구를 행했다.[각주:26] 90년대에 들어서자 19세기 프랑스의 민주주의 역사를 다룬 방대한 3부작을 발표하고, 이 시대의 정치사상사 연구의 제일인자가 된다.[각주:27] 2002년부터는 콜레주드프랑스 교수도 겸임하고 있다.

로장발롱의 19세기 연구상의 특징은 프랑스 혁명기에 성립된 ‘자코뱅주의’적 정치인식이 거듭 비판에 처해지면서도 수정되어 회귀한다고 파악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세 단계를 거친 발전사로서 읽을 수 있다.

첫째,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인식(‘일반성의 정치문화’라고 일컬어진다)에 관해서는 기존의 연구를 거의 답습하고 있다.[각주:28] 혁명기에는 전통집단에 매몰된 개인을 끄집어내어 동질적·추상적 개인으로 구성된 단일한 집합체(‘개인으로 구성된 사회sociétéd’individus’)를 형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프랑스의 특징은 헤겔의 사상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변증법이 상정되지 않고, 양자 사이의 단절이 강조된 것이다. 개별 이익을 추상화하는 ‘대표’라는 메커니즘이 중시되고, 대표자와 피대표자 사이에는 ‘특수이익’에서 ‘일반이익의 창출’이라는 비약이 상정된다. 양자를 매개하는 정치적 결사는 부정되고, 직업단체, 지역성, 남녀의 성차 등은 사적 영역에 갇힌다. 일반성을 체현하는 것은 ‘법’뿐이며, 대표자에 의한 입법행위가 신성시된다.

둘째로, 프랑스 혁명 직후부터, 이런 정치인식은 거듭 비판에 처해졌다.[각주:29] 르 샤플리에법에서 볼 수 있는 중간단체의 부정은 개인의 원자화, 국가의 비대화, 사회적 질서의 해체를 초래한다는 비판이 19세기 초반의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로장발롱에 따르면,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자코뱅주의는 7월 왕정기에 재생한다. 기조, 티에르 등의 자유주의자는 ‘정치적’영역과 ‘사회적’영역의 구별을 도입한다.[각주:30] 그들에 따르면, 정치적 집권화에 의해 전통적인 특권들(libertés)을 폐지함으로써 개인의 자유(liberté)가 실현된다. 자코뱅주의와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의 확대와 자유의 실현은 상보적이라고 파악된다. 다른 한편, 사회적으로는 언론·집회활동의 자유나 행정적 분권화가 허용된다. 오히려 사회적 다원성은 사회에 분산된 엘리트의 의견을 통치기구로 집약하고, 일원화하기 위한 매개적 수단으로 간주된다. 정치적/사회적 영역의 구분과 상호보완으로 구성된 그들의 질서관은 제2제정기의 정치적 결사 금지와 직업적 결사 승인(1864년법)으로 계승되며, 제3공화정기의 ‘수정 자코뱅주의’를 준비하게 된다.

셋째로, 제3공화정기에 자코뱅주의의 쇄신이 완수된다.[각주:31] 여기서 로장발롱이 중시하는 것은 유기체적 질서관을 따라 자코뱅주의적인 국가-개인의 이원적 질서관을 비판하고 중간단체 재건을 제창한 사회학자(Fouillée, Durkheim, Ferneuil, Duguit 등)의 사상이 아니라, ‘정치적’영역과 ‘사회적’영역의 ‘양극화(polarisation)’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공화파 정치가(Waldeck-Rousseau, Léon Bourgeois, Paul-Boncour 등)의 질서관이다. 후자는 1884년법(직업조합 자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경제적 결사가 질서 유지에 유용하다는 점을 승인한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의회를 통한 의사집약과 일반이익의 일원적 ‘대표’라는 시각을 유지한다. 정치적 결사는 1901년법까지 자유화되지 않으며, 이 법에서도 결사에 대한 다양한 재정적·제도적 제약이 남아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학자가 제창한 직능대표론이나 생디칼리스트가 주창한 생산자의 공화국론(M. Leroy), 코포라티즘론은 이른바 ‘사회적인 것’에 의해 ‘정치적인 것’을 재정의하는 시도였다. 다른 한편, 공화파 정치가의 질서관에 따르면, ‘사회적’다원성은 ‘정치적’집권성과 명료하게 구별되며, 그 통제 아래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야말로 20세기의 프랑스 정치 모델을 제공하게 됐다고 한다.

위와 같이 로장발롱에 따르면, 혁명기의 자코뱅주의는 몇 번이나 수정을 거치면서도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 오늘날의 정치사상적 과제는 이제 자코뱅주의의 극복이나 토크빌적인 ‘전제(專制)’로부터의 자유의 옹호가 아니다. ‘사회적’영역에서 중간단체가 다양한 발전을 거쳐왔다는 사실을 토대로, ‘정치적인 것’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즉 ‘일반이익’이나 통합의 공통가치를 어떻게 재발견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라고 한다.[각주:32]

4. 마치며

지금까지 달음박질치듯이 30년 동안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사 연구를 뒤쫓았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연구 과제를 세 가지 점으로 요약하고 싶다.

첫째는 연구 대상에 대해서이다. 퓌레 이후의 19세기 사상사 연구는 담론사, 사회사, 심성사 등의 연구 축적을 바탕으로 고전적 사상가의 텍스트를 넘어선 폭넓은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게 됐다. 기존의 일본의 연구에서는 특정한 사상가의 주요 텍스트를 ‘점’과 ‘점’으로 묶음으로써 사상사가 구성된 것이 적지 않았다. 향후에는 프랑스에서의 역사 연구의 진전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담론 상황을 ‘면’으로서 파악하려는 새로운 대상의 확장이 요구된다.

둘째는 분석 틀에 관해서이다. 본고에서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대항이라는 도식을 사용해서 본 것처럼, 19세기에 정치사상의 대상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됐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자코뱅 주의의 영향, 국가권력의 비대화, 사회로의 권력의 확산, 사회 문제의 출현 등에 의해 분석 틀도 국가와 시민사회, 계급대립이라는 단순한 것에서부터 일원성과 다원성, 정치적 질서의 내부와 외부, 규율과 자율, 중간집단의 정치적/사회적 역할 등, 논자에 따라서 다양해지고 있다. 거기에서는 바로 ‘정치적인 것’자체가 논쟁적 개념이 되며, 그 개념 규정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사상적 과제를 어디에서 찾아내느냐는 문제와 직접 관련된다. 이런 문맥 속에서 ‘정치적인 것’을 어떻게 재파악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깊어질 필요가 있다.

셋째, 1990년 이후의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사 연구를 주도하는 로장발롱의 틀에 내포된 일정한 편견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로장발롱의 연구는 기존의 연구에서 볼 수 있던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전환하고 ‘정치적인 것’의 사고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이런 관심의 전환의 배후에는 현대 프랑스를 둘러싼 다음과 같은 논의 상황이 있다. 즉, 한편으로는 전지구화, 유럽화에 의한 프랑스 국가의 자율성의 흔들림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사회적 분단(이민자·청년·배제문제 등)의 심각화와 대의제의 기능장애이며, 이런 것들로부터 귀결되는 ‘프랑스 모델’의 전환이라는 논의이다.[각주:33] 이런 문맥 속에서 로장발롱은 프랑스 민주주의의 전통과 대의제를 옹호하고 국민(naion)의 재구축을 호소하는 등, 현대정치에 대해 활발한 제언을 계속하고 있다.[각주:34]

그러나 위와 같은 실천적 관심을 배후에 지닌 19세기 연구는 대상에 본래 내포된 다양성이나 역동성을 훼손하고 이것들을 정태적인 역사관으로 회수하게 된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분리하고 ‘정치적인 것’(일원적 통합원리)의 일관된 우위를 상정한다는 틀로는 19세기 전반기의 자유주의자(Constant, Madame de Stäel, C. Dunoyer), 중반기의 사회주의자, 19세기 말의 사회학자 등 ‘사회적인 것’에 입각해 ‘정치적인 것’을 다시 묻고자 한 사상가들의 상당수가 곁가지에 자리매김 된다.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 사상이 ‘자코뱅주의’와 대립하면서 사회적 유대의 재구축을 모색하고, 사회주의에서 보수주의까지 폭넓은 사상 투쟁을 벌였다는 역사를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의 지속성을 축으로 삼은 그의 역사관에 대해 복수(複數)의 ‘사회적인 것’의 경합 속에 새로운 질서 구성 원리를 찾아내려는 사상사 관점을 대립시키는 것은 향후의 연구에 남겨진 과제이다.


* 본고는 제31회 사회사상사학회(2006년 10월 22일)의 섹션 「프랑스형 『시민사회』 모델의 가능성 : 피에르 로장발롱을 둘러싸고(フランス型『市民社会』モデルの可能性──P. ロザンヴアロンをめぐって」를 조직한 北垣徹(西南学院大学), 高村学人(立命館大学) 두 사람과의 공동토의를 바탕으로 집필됐다. 집필에 있어서는 아래의 연구조성의 일부를 활용했다. 平成十七─十八年度文部科学省科学研究費補助金(若手研究B), 平成十八年度新潟大学プロジェクト推進経費(若手研究者奨励研究費).


  1. Maxime Leroy, Histoire des idées sociales en France, t. 1, Paris, Gallimard, 1946, p.13. [본문으로]
  2. Maxime Leroy, Histoire des idées sociales en France, t. 2, Paris, Gallimard, 1950, pp.11-13 ; t. 3, 1954, pp.27-38. [본문으로]
  3. François Furet, La gauche et la révolution Française, Paris, Gallimard, 1978. [본문으로]
  4. François Furet, La gauche et la révolution au 19 siècle, Paris, Hachette, 1986. [본문으로]
  5.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creation of modern political culture, 4 vol., New York, Pergamon Press, 1987-1994. [본문으로]
  6. 주목할 가치가 있는 연구로서는 다음의 것이 있다. Claude Nicolet, L’idée républicaine en France, 1789-1924, Paris, Gallimard, 1995는 ‘과학’, ‘사회’ 등 19세기의 주요 사상 개념의 배치 속에서 프랑스 공화주의의 생성과정을 상술하고, 정치사적 서술에 머무는 다른 연구(가령 Pamela Pilbeam, Republicanism in Nineteenth-Century France, 1814-1871, Basingstoke, Macmillan, 1995)와 비교해서 출중하다. Sudhir Hazareesingh, From Subject to Citizen : the Second Empire and the emergence of modern French democrac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은 제2제정기의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가톨릭의 담론을 망라하여 검토하고, 그 연방·분권론에 자코뱅주의적 ‘정치문화’를 극복할 시민권(citizenship) 개념의 생성을 찾아낸다. Laurent Mucchielli, La découverte du social : naissance de la sociologie en France (1870-1914), Paris, Découverte, 1998은 제3공화정기의 사회학과 다양한 분과학문의 교착에서부터 당시의 담론상황을 재구성하고 있다. [본문으로]
  7. 그 특징은 다음으로 정리된다. 첫째, 제도로서의 대표가 부정되는 한편, 혁명운동에 의한 ‘인민’의 대표라는 관념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도덕적 일체성에 기반한다고 간주된다. 둘째, ‘인민’이 대표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에 의해 ‘인민’이 창출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셋째, 이 운동에서 당이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Lucien Jaume, Le discours jacobin et la démocratie, Paris, Fayard, 1989, pp.387-403). [본문으로]
  8. Lucien Jaume, L’individu effacé, ou le paradoxe du liberalisme français, Paris, Fayard, 1997. 또한 좀의 관심을 간결하게 요약한 저작으로 Lucien Jaume, Echec au liberalisme : les jacobins et l’État, Paris, Kimé, 1990이 있다. [본문으로]
  9. Jaume, L’individu effacé, op.cit., pp.19-21, pp.59-117, pp.124-148, p.340 et s. 독트리네르의 사상이 제3공화정의 체제원리가 됐다는 이해는 후술하는 로장발롱의 기조론에서도 볼 수 있다. Pierre Rosanvallon, Le moment Guizot, Paris, Gallimard, 1985, p.358 et s. [본문으로]
  10. 그들을 포함해 최근의 프랑스 논의 상황을 정리한 문헌으로 宇野重規, 『フランス政治哲学』, 東京大学出版会, 2004가 있다. [본문으로]
  11. Claude Lefort, L’invention démocratique, Paris, Fayard, 1994, pp.63-66. [본문으로]
  12. Claude Lefort, Essai sur le politique (19e-20e siècle), Paris, Seuil, 1986, p.32. [본문으로]
  13. Ibid., p.38. 르포르의 논의는 피에르 마넹(Pierre Manent, 1949~)의 다음의 논의에도 빚지고 있다. Pierre Manent, «Démocratie et totalitarisme : à propos de Claude Lefort», Commentaire, t. 16, 1981-1982, pp.574-583. [본문으로]
  14. Claude Lefort, L’invention démocratique, op.cit., pp.171 et s. [본문으로]
  15. Claude Lefort, Essai sur le politique, op.cit., p.55. [본문으로]
  16. 고셰의 지적 배경은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인류학, 정신분석 등 다양하다. 르포르와의 관계에 관해 고셰는 1966-67년에 그의 강의에 참여하여 ‘선열한 충격을 받고’ 르포르와의 대화로부터 연구 테마를 찾아냈다고 회고했다(Marcel Gauchet, La condition historique, Paris, Gallimard, 2003, p.29). 또한 난해한 고셰의 사상의 도입으로 다음이 편리하다. Marc-Olivier Padis, Marcel Gauchet : la genèse de la démocratie, Paris, Michalon, 1996. [본문으로]
  17. Marchel Gauchet, La démocratie contre elle-même, Paris, Gallimard, 2002, pp.1-26. [본문으로]
  18. M. Gauchet, La révolution des pouvoirs, Paris, Gallimard, 1995. ; «Benjamin Constant : l’illusion lucide du libéralisme», dans Benjamin Constant, Ecrits politiques, Paris, Gallimard, 1997, pp.1-110. [본문으로]
  19. Gauchet, La révolution des pouvoirs, op.cit., pp.27-35. [본문으로]
  20. M. Gauchet, La condition politique, Paris, Gallimard, 2005, p.371. [본문으로]
  21. M. Gauchet, La religion dans la démocratie, Paris, Gallimard, 1998. [본문으로]
  22. 田中拓道『貧困と共和国』人文書院、二〇〇六年、第四章 ; 同「フランス福祉国家論の思想的考察──『連帯』のアクチュアリテイ」『社会思想史研究』二人巻、二〇〇四年、53-68頁. [본문으로]
  23. Michel Foucault, Se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Paris, Gallimard/Seuil, 2004. [본문으로]
  24. Ibid., p.357. ; Foucault,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Paris, Seuil/Gallimard, 2004. [본문으로]
  25. 대표적인 예로 Jacques Donzelot, L’Invention du social, Paris, Fayard, 1984 ; François Ewald, L’État-providence, Paris, Grasset, 1986 ; Giovanna Procacci, Gouverner la misère, Paris, Gallimard, 1995 ; Andrew R. Aisenberg, Contagion : Disease, Government, and the ‘Social Question’ in Nineteenth-Century Franc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푸코의 도식과 거리를 두고 ‘사회적인 것’의 사상사를 독자적으로 전개한 중요한 연구로는 Robert Castel, Les métamorphoses de la question sociale, Paris, Fayard, 1995. [본문으로]
  26. Pierre Rosanvallon, Le libéralisme économique, Paris, Seuil, 1979. 그 내용은 푸코가 말하는 ‘자유주의’론과 근본적으로 겹친다. 18세기의 ‘시장의 발견’을 효율적인 통치를 가져다주는 정치적 원리로서 위치짓고자 하는 것이다. 푸코는 자신의 세미나의 요약에서 이 연구를 ‘중요한 저작’으로 소개한다(Foucault,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op.cit., p.326). [본문으로]
  27. P. Rosanvallon, Le sacre du citoyen : histoire du suffrage universel en France, Paris, Gallimard, 1992 ; Le peuple introuvable : histoire de la représentation démocratique en France, Paris, Gallimard, 1998 ; La démocratie inachevée : histoire de la souveraineté du peuple en France, Paris, Gallimard, 2000. [본문으로]
  28. P. Rosanvallon, Le modèle politique français : la société civile contre le jacobinisme de 1789 à nos jours, Paris, Seuil, 2004, pp.25-105. [본문으로]
  29. Ibid., pp.131-195. [본문으로]
  30. Ibid., pp.218-227. [본문으로]
  31. Ibid., pp.343-360. [본문으로]
  32. Ibid., p.434. [본문으로]
  33. 예를 들어 로장발롱이 편집한 La République des Idées 시리즈의 한 권인 La nouvelle critique sociale, Paris, Seuil, 2006. 혹은 P. Culpepper et al. dir., La France en mutation, 1980-2005, Paris, Presses de la Fondation Nationale des Sciences Politiques, 2006. [본문으로]
  34. 로장발롱은 최근 저작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모순을 강조함으로써 그 불신을 조장하고 키워왔던 기존의 정치사상 연구를 비판한다. P. Rosanvallon, La contre-démocratie : la politique à l’âge de la défiance, Paris, Seuil, 2006, pp.24 et s. 국민의 재구축에 관해 로장발롱의 「일본어판 서문」, 『연대의 새로운 철학』, 北垣徹訳)「日本ヒ語への序文」『連帯の新たなる哲学』勁草書房, 2006, v頁. [본문으로]

1. 일본어 서평 

* 아래의 링크는 아래의 서평 원문이고, 밑의 글은 알라딘에 올라와 있다가 삭제된 것이다. 논의를 위한 자료 차원에서 블로그에 복제해둔다. 

* http://d.hatena.ne.jp/whomoro/touch/20130217/1361065937?hc_location=ufi

* http://d.hatena.ne.jp/whomoro/touch/20130222/1361537378?hc_location=u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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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uall ㅣ 2015-04-08 ㅣ 공감(5) ㅣ 댓글 (0)
1. 가라타니의 매너리즘 또는 아집
철학의 시작을 서술한 서적은 허다하지만 철학의 기원을 탐구한 서적은 적다. 그 탐구를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라타니는 행하겠다고 한다. 철학에 대한 희구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기원』은 사람들의 관심 저 밑에 있는 것을 다루려고 하는 저작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라타니의 탐구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무지배)’가 역사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논증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논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오니아사회와 이소노미아가 단순하게 등호(等號)로 연결되고, 그것을 전제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史實)의 오인이다. 이소노미아라는 말도 정확하게 분석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무지배’라는 번역어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비판 없이 자명한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이오니아=이소노미아=무지배’는 유토피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이 가라타니의 처음부터의 목적이었는지 궁금하다. 그것이 유토피아인 이상, 역사상의 아테네가 단죄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가라타니가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것은 통치 그 자체의 폐기이며, 이소노미아”라고 말하는 것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가라타니가 지향한 것은 ‘통치 그 자체의 폐기’라고 추측할 수 있으며, 그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 사술(詐術)적인 논리이며, 소크라테스를 강인하게 자신과 동일한 사상을 갖는 주체로 설정한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소노미아를 등장시켰다. 이 이소노미아가 허구인 것은 자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의해 언제나 ‘이소노미아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환기하는 효과를 갖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가라타니는 자신의 투쟁을 이소노미아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고 한다.

2. 통설과의 접목
서장에서는 기원전 6~기원전 5세기에 관한 통설적인 윤리사상사(가령 야스퍼스의 ‘세계사의 기축시대’가 떠오른다)가 소개되며 거기에 가라타니의 교환양식설이 접목되고 있다. 윤리사상사 자체는 다소 고풍스럽고 평범하여 새로운 시점이 보이지 않는다. 예전 풍부한 참고자료를 자랑하던 가라타니의 저작을 생각해 보면 일본 내의 동 시기에 대한 많은 저작들을 참고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은 점이 의문이다. 보다 근원적인 곳부터 서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대해서는 ‘유대교-기독교’라는 유럽 중심의 발상범위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선악이원론이나 최후의 심판으로 유대교에 큰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는 가라타니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가라타니가 조로아스터교의 강한 윤리성을 주목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기원전 6세기~기원전 5세기의 철학적 사고의 탄생은 중요하지만, 화폐의 등장(역사상 최초의 주조화폐는 기원전 7세기에 소아시아의 리디아에서 만들어졌다)과 화폐의 일정한 보급은 인간의 사고와 경제생활 진전에 깊이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화폐의 상징기능이 사회에 침투해 가는 가운데 처음으로 철학적 사고가 생긴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배경에는 엄청난 시간 속에서 배양된 신화적 사고가 있다. 철학의 기원이라는 문제는 신화적 사고(유토피아)와 철학적 사고(로고스)와의 관계/단절이라는 문제이다. 거기에는 문학의 발생이라는 문제도 포함될 것이다. 신화적 사고 속에서 철학적 사고는 어떻게 석출(析出)되었는가. 그러나 가라타니에게는 그러한 발상을 볼 수 없다. 덧붙이면 가라타니는 “주술은 정주 이후의 씨족사회에서 발달했다”고 논하고 있지만, 유목민에게도 수렵민에게도 주술전통은 존재하고 있었다.

3. 이오니아와 이소노미아
가라타니는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나타내는 사료는 거의 없다”고 서술하면서도, 이오니아와 이소노미아를 스스럼없이 등호로 연결해 버렸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역사를 상세하게 검토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설을 전개하고 있다.

가라타니는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 스파르타 등의 폴리스와 이오니아의 폴리스를 구별해 ‘씨족적인 여러 제도가 농후한 사회’ vs ‘씨족적 전통이 없는 식민사회’로 대치시키는 것에 치중한다. 그러나 보통 밀레토스 등은 식민도시로 분류하지 않으며, 모시(母市)와 식민도시(그 성격은 일률적이지 않다)를 전혀 별개로 논의할 수는 없다. 일본의 그리스 역사가 사쿠라이 마리코(?井万里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인의 식민활동의 전제로서 폴리스의 성립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식민활동을 포함한 거대한 시대의 너울 속의 여러 요인이 상호 작용해 결정화한 결과가 폴리스의 성립이었다고 간주된다.” 더욱이 “다양한 공동체로부터 나온 식민지인들로 이루어진 이오니아에서는 처음부터 ‘개인’이 존재했다. 이오니아의 폴리스는 그러한 개인의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근대의 개인이나 사회계약의 개념을 고대 이오니아에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도 종종 인용되고 있다. 가라타니는 아렌트의 『혁명론』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이오니아=이소노미아’설을 뒷받침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소노미아라고 하는 말을 어디까지나 도시국가의 평등을 논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이오니아라고 하는 말은 전혀 쓰지 않았다. ‘이오니아=이소노미아’를 아렌트로부터 끌어와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가라타니는 ‘이오니아=이소노미아’를 역사적으로 논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오니아=이소노미아’는 『철학의 기원』을 관통하는 개념이 되고 말았다. ‘이소노미아로서의 이오니아’는 말하자면 유토피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소노미아로서의 이오니아’ 인 것이다.

원래 이소노미아는 무엇인가. ‘무지배’라는 번역어는 적절한 것인가. 이소노미아라고 하는 말은 ‘이소(iso, 같다는 의미)’와 ‘노모스(nomos, 법, 넓게는 인위적인 것)’로 나뉜다(노모스는 physis(자연)과 대비되는 언어다). 따라서 아렌트의 이소노미아라는 말의 사용법은 옳다. 이소노미아의 원뜻은 도시국가의 ‘인위적 공공공간에서의 평등’=법적 평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무지배’라는 번역어는 이것을 등한시한 편협한 기능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라타니가 인용한 부분의 바로 뒤에서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소노미아는 평등을 보장했으나, 그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고 평등하게 자라나서가 아니라, 반대로 사람은 자연에서 평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인위적인 제도인 법 즉 법률에 따라 사람들을 평등하게 하는 도시국가를 필요로 한 것이다. 평등은 사람들이 서로 사인(私人)으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만나는 이 특수한 정치적인 영역에서만 존재했다.”

또한 아렌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로도토스가 자유를 무지배와 동일시했을 때, 그 논점은 지배자 자신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타인을 지배하는 것에 의해 지배자는 타인과의 사이에서 본래라면 자유로웠을 타인들을 스스로 떠났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정치적 공간 그 자체를 파괴한 것이며, 그 결과 그 자신에게도, 그가 지배한 사람들에게도 이미 자유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자유는 시민들의 법적 평등과 동의라고 이해된다.

이상으로부터 고대 그리스에서의 이소노미아는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는 노력’ 자체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노력은 폴리스라는 인위적 공공공간(‘사람들이 서로 사인이 아니라 시민으로 만나는 특수한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민은 정치와 군사를 공동으로 담당하고 폴리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다.”

이소노미아는 도시국가의 통치방식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통치의 폐기’를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소노미아와 노예제는 병존하게 된다. 가라타니는 “이오니아에서는 노예제 생산에 의존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오니아를 이상화했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오니아의 반란에서 큰 역할을 한 폴리스인 키오스는 ‘섬의 강 건너 소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페라이아(Per?a, 해외 영토)에서 노예를 이용하여 곡물 재배를 행하여’ 번영했다. 원래 ‘식민 시절에 원주민을 종속민의 지위에 빠뜨리는 일도 있었고, 주변의 이민족으로부터 노예를 조달하는 것도 차츰 잦아진’다고 사쿠라이 마리코는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가라타니는 이소노미아가 실현된 예로서 아이슬란드와 18세기 미국의 타운쉽을 거론하지만, 이것은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 대한 놀라운 사실(史實) 오인이다. 가라타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식민지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하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왔다. 한편 영국 식민지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시민혁명(1648년 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정도의 사람이 이런 오류를 태연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놀랍고도 슬픈 일이다.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담배 플랜테이션 노동력으로서 흑인노예의 도입이 시작된 것은 1619년의 일이었다. 시민혁명과 노예제의 부정을 연결하는 논술은 논외라고 할 수밖에 없다.

4. 자연철학, 플라톤
이른바 자연철학에 대한 가라타니의 기술은 ‘이오니아=이소노미아’에 집착하고 있는 것 외에는 그다지 통설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파르메니데스에 대해서는 통설과 다른 위상(반 피타고라스=반 플라톤)을 부여하고 있지만 과연 타당성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비교적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고 있지만 독해 자체가 치밀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오니아의 유물론적 사상’이라는 표현이 보이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물질과 영혼은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리스의 철학의 기원을 논하면서 로고스에 별로 언급이 없는 것도 의문이다. ‘이소노미아’에 집착한 나머지 왜 이오니아에서 로고스가 생겼는지를 가라타니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뮈토스((muthos, 이야기 또는 신화)와 로고스의 관계야말로 철학탄생의 비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있다’의 사색을 시의 형태로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말을 상기해 보자. “영혼의 끝을 당신은 걸어가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길을 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깊은 로고스를 그것은 갖고 있다.”

가라타니의 단조로운 플라톤 비판(이데아론 비판, 철인정치 비판)은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 플라톤 철학이 비판을 받으면서도 강력하게 생존하고 있다는 것, 거기에 오히려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관념론으로 간단하게 치부하지 않는 것은 관념의 강렬한 자기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물론을 표방하는 가라타니의 표면적인 플라톤 비판은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온다. 가라타니의 ‘이소노미아’론은 대부분 플라톤적인 이데아론으로 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소노미아’라고 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애타게 연정을 보이는 가라타니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5. 소크라테스
가라타니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사회에 대하여 아테네를 ‘정치적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열’이라는 근대적인(헤겔-맑스적인) 개념으로 분석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소크라테스까지도 이소노미아와 연결하고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의 “사인(私人)으로 있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공인으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소크라테스가 가져온 것은 공인인 것과 사인인 것의 가치 전도다”라 하고, “소크라테스가 목표로 한 것은 통치 자체의 폐기이며, 이소노미아이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리고 비판을 예상했는지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모르고’ ‘그렇게 의식함이 없이’ 이오니아적 사상을 부활시켰다는 논리를 편다. 이 정도면 견강부회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통치 자체의 폐기’를 지향하고 ‘사인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 및 사상과 폴리스라는 공공공간은 분리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사회적인 규약(노모스)’에 따라 정의를 존중하는 신념이 각인의 삶의 방식에 관련된 신념군 중 최고 중핵을 구성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활동은 곤란에 처한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기는 펠로폰네소스전쟁과 그 패전 후의, 노모스의 혼란기였기 때문이다. 노모스의 동요 속에서 왜 소크라테스는 아고라라는 공공적인 장으로 나가 집요한 대화를 행했는가. 거기에는 폴리스라고 하는 인위적 공공공간의 소생을 ‘영혼에 대한 배려’로부터 행하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고투가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란 그 고투에 다름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그 싸움을 최후까지 이끈 것을 그의 죽음이 나타낸다.

30인 정권의 전제정치와 그것의 붕괴, 혼란기에 소크라테스의 ‘공인과 사인’의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시민은 법과 일체가 됨으로써 자유롭다고 하는 그리스적 법사상을 소크라테스도 신봉했다. 그것이 어떤 정의의 이름 아래에서 이루어지던, 국법에 대해 개개 시민의 저항이 허락된다면 그것은 국법 자체의 파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테나이의 국법이 시민에게 다른 폴리스로의 이주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 이상, 그러한 근원적인 구속이 거기에서 생겨 시민과 국법 사이에 실제 존재한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다만, 국법과 시민의 일체성을 강조하면서 소크라테스에게는 진정한 정치술(즉 영혼의 정화)은 폴리스의 공적인 일에 종사하기보다, 오히려 개개 시민과의 사적인 대화에 의해 달성된다고 하는 현실정치와 덕(탁월성)의 함양과의 사이의 긴장관계를 파악하려는 사고였지 않나 싶다.

더 중요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공과 사’를 근대사고의 틀에서 보면 안 된다는 점이다. 사쿠라이 마리코는 공적(데모시오스)인 영역과 사적(이디오스)인 영역 외에 ‘코이노스’의 영역이 있음을 지적하고, ‘공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데모시오스와 코이노스의 두 종류가 있었다는 것’에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한 ‘사적인 대화’의 장은 바로 ‘코이노스’의 영역이었다. “코이노스의 영역은 일상생활에서의 다양한 집합활동을 하는 그룹이 공유하는 영역이었습니다. 그것은 시민뿐만 아니라 재류 외국인과 노예, 여성 등 아테나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생활의 장, 즉 주민 사이의 다양한 교류, 커뮤니케이션이 실현되던 공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폴리스적) 공간도, 오이코스(집)에 해당하는 공간도 아니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한 것은 이러한 코이노스의 영역인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는 아고라에서 열렸지만, 아고라는 ‘코이노스’라는 ‘공’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라타니는 소크라테스를 ‘이소노미아’와 결부시켜 허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는 ‘철학의 기원’에 대해 무엇을 밝혔는가. 유감스럽게도 ‘이소노미아’라는 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역설적으로 『철학의 기원』은 ‘이소노미아’나 ‘통치 자체의 폐기’을 애타게 사모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새삼 가르쳐 주었다. 우리의 현실은 비참한 사건으로 넘쳐나지만, 요구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이소노미아’로 일탈하는 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어려움 그 속에서 민주주의의 희망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 아래의 링크에 <자신이 쓴 글인 양> 누군가가 올려 놨다가 최근 문제가 불거지면서 삭제됐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706916

출처를 밝히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왜 삭제했는지 모르겠다. 내 개인적으로는 출처를 안 밝히는 것이 삭제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 무페의 인터뷰를 읽고 있다. 인터뷰를 읽다가, 문득 생각나서 한 대목....

샹탈 무페의 주장은 아렌트의 주장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무페는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시민권이란 각자가 자신의 '선'에 대한 정의를 형성하고 수정하고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능력이며,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공동체 역시 '도구적인' 공동체, 즉 이익이든 정체성이든 이미 정의되어 있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해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반면, 공화주의가 주장하는 공동체는 개인적 욕구나 이해관계에 선행하여 존재하며, 더욱이 그러한 욕구나 이해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공적인 선 관념을 강조하는 공동체이다. 무페는 모든 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주장에 기초를 부여할 수 있었던 보편적 시민권 개념을 정식화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를 평가하는 한편, 개인이 국가에 대항하여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중시함으로써 시민권을 단순한 법적 권리에 불과한 것으로 삼아 버렸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오로지 생산력을 향상시켜 각자 개인적 성공을 돕는 것으로 사회적 협동을 파악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한다. 더욱이 무페는 참가를 중시하는 시민권 관념의 강조는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공화주의도 비판한다. '개인'은 시민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즉, 무페는 시민권의 내실을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훼손시켰다는 점을 비판하고, 고전적 공화주의의 전통 속에 지켜져 왔던 참가를 중시하는 시민권 관념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근대의 다원주의를 무화하는 형태로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무페가 주장하는 다원주의는, 분명 아렌트가 강조하는 '복수성'에 다름 아니다.

근 몇 년 동안 생/삶-정치bio-politique에 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잘 알겠지만 이것은 미셸 푸코가 제시한 개념이다. 그리고 근래에는 바이오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의해 생기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류의 해석은, 푸코를 활용하여 논하기에는 그다지 정합적이지 않다. 장-뤽 낭시를 따라 말하자면, “생에 의해 포괄적으로 결정되고 그 통제에 전념하는 정치질서”가 이 말의 본래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너무 막연하다. 따라서 푸코를 다양한 선분들과 연결할 필요가 있다. 푸코와 들뢰즈, 푸코와 네그리, 푸코와 아감벤, 푸코와 낭시, 푸코와 아렌트 등등. 앞의 세 쌍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통해 간략하게 서술할 것이기 때문에 푸코와 낭시, 특히 아렌트를 매개로 한 이 둘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아렌트는 근대란 인간적 생과 동물적 생명이 뒤섞여 버린 시대라고 말한다. 즉, 종교의 쇠퇴에 의해 피안/초월적 세계를 상실한 인간은 가능한 한 좋은 조건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이 세상에서의 생을 향유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게 되었다. 그러한 인간이 바로 “노동하는 동물”이다. 이때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는 동물종의 자기 관리/통제로서의 법이다.

이러한 아렌트의 논의에 관해 낭시는 “과연 생이라는 말을 과거와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이미 자연적인 생은 소멸했으며, 생명은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관리/통제되게 되었다. 낭시는 그것을 에코테크니ecotechnie라는 개념을 사용해 설명한다. 일체의 생명이 에코테크니 속에서 발생하며, 인간은 이제 자신의 생의 주권을 쥐지 못하게 되었다. 주권은 에코테크니 그 자체 속에 포함되며, 생과 권력은 목적성을 갖지 않은 채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 생-정치학이란 이러한, 인간이 노동하는 동물로 되고 나아가 그 생이 기술적으로 관리되는 체제 하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가> 인간은 교육되어야 할 유일한 피조물이다. 동물은 그들의 힘을 갖게 되자마자 규칙적으로, 즉 그들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 힘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새끼제비가 알에서 막 기어 나와 아직 눈조차 뜨지 못할 때 그들의 배설물을 둥지 밖으로 버릴 줄 아는 것을 보면 사실 경탄할 만하다. 그러므로 동물은 전혀 양육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양육이란 아이들이 그들의 힘을 해롭게 사용하지 않도록 양친이 배려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동물이 태어났을 때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운다면, 그 소리에 유인된 늑대나 다른 맹수의 먹이가 될 것이 틀림없다.
훈육 또는 계도(啓導)가 동물성을 인성(人性)으로 바꾸어 놓는다. 동물에게는 모든 것이 본능이다. 그 어떤 다른 이성이 그 모든 것을 배려해 놓았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이성이 필요하다. 인간은 본능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행동계획을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바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야생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대신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훈육은 인간이 그의 동물적 충동으로 인해 그가 지닌 인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예를 들어, 훈육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거칠게 분별없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어야 한다.
야만성은 법칙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훈육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법칙에 복종시키는 것이며, 법칙의 강제를 느끼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훈육은 일찍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이를 우선 학교에 보내는 것은 거기서 그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용히 앉아 있고 지시 받는 것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데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결코 어린이들이 장차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에 대한 강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얼마동안 자유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정도이다. 바로 그 때문에 매우 일찍이 훈육이 필요하다. 일찍이 훈육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인간을 변화시키기란 어렵다. 그런 사람은 제멋대로 된다. 우리는 그것을 미개한 나라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이 비록 유럽인들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봉사해 왔다 하더라도 결코 유럽인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루소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를 향한 고귀한 성향은 아니다. 그것은 동물성이 인간성을 아직 어느 정도 자체 내에 발달시키지 못한 그 어떤 야만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찍부터 이성의 규칙에 따르는 데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릴 때 맘대로 내버려두고 거절하지 않게 되면 인간은 어느 정도의 야만성을 평생 동안 지니게 된다. 
                                                                                                 ―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교육학 강의>

<나> 나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과거 교육의 전형적 문제점들, 즉 과거 교육은 아이들의 태도를 수동적이게 한다는 것, 아이들을 기계적으로 집단화한다는 것, 커리큘럼과 교육방법이 획일적이라는 것을 약간 과장(誇張)했는지도 모르겠으나, 분명히 밝혔다. 과거의 교육을 요약하면, 무게 중심이 아이들 이외의 것에 있었다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무게 중심이 교사, 교과서, 그밖의 무엇이든, 특히 아이들 자신의 직접적인 본능과 활동 이외의 것에 있었다. 그런 이상, 아이들의 생활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학습에 관해서는 많은 것이 말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교는 아이들이 생활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간주된다. 그런데 오늘날, 거대한 변혁이 우리 교육에 도래하고 있다.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천체의 중심이 지구에서 태양으로 이동했을 때와 비교할 수 있는 변혁이며, 혁명이다. 이럴 때마다 아이들이 태양이 되며, 그 주변을 교육의 제반 행위가 회전한다. 아이들이 중심이고, 그 중심의 주변에 제반 행위가 조직되는 것이다.
이상적인 가정, 즉 부모가 모두 총명하고, 아이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분간하고,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가정이, 여기에 있다고 하자. 그런 가정에서는 아이들은 가족 사이의 대화나 그 가족의 관습을 통해 사물을 배울 것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은 이러저러한 발언을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질문이 오가며, 자신이 잘못 생각한 점이 있다면 정정한다. 더욱이 아이들은 가정의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함으로써, 근면, 질서, 타인의 권리와 사상을 존중하는 관습을 익히고, 더욱이 자기의 활동을 가정 전체의 이해에 복종시킨다는 기본적 관습도 몸에 익힌다. 이상적인 가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작업실이 따로 있고, 아이들은 거기에서 구성적인 본능을 작동시킬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작은 실험실도 있고, 그 실험실에서 아이들의 여러 가지 의문이 해답으로 이끌릴 것이다. 아이들의 생활은 바깥을 향해 확대되며, 정원으로까지, 이웃집 정원이나 숲에까지 이른다. 아이들은 소풍을 나아기고 걷고 말한다. 그때 뜰 밖의 넓은 세계가 그의 앞에 펼쳐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말한 모든 사태를 조직화고, 일반화해 본다면, 거기에는 이상적 학교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이상적 학교의 창설에, 신비적인 것 등은 하나도 없으며, 교육학과 교육이론에 있어서 신기한 발견도 없다. 그것은 단순히 대부분의 가정에서 어떤 이유 때문에 비교적 빈약하게, 우연하게 행해지고 있는 것을 조직적으로, 나아가 대규모로, 잘 생각해서 확실한 방법으로 행하는 과제에 불과하다. 우선 첫째로, 이상적 가정이 확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의 생활을 최대한 자유롭고 최대한 풍요로운 사회생활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은 대세(大勢)의 어른과 그리고 더 대세(大勢)의 아이들과 접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가정이라는 환경 속의 작업이나 관계는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 특별히 선발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주된 목적은 다른 것에 있고, 아이들이 이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것은 부가적인 것이다. 이로부터 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교에서야 비로소 아이들의 생활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목적으로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을 촉진하는 모든 수단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다. 학습은 어떤 것인가라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확실히 학습은 행해진다. 하지만 생활하는 것이 첫 번째이다. 학습은 생활을 통해, 또한 생활과 관련하여 행해진다. 이처럼 아이들의 생활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고 조직화하게 되면, 아이들은 어떤 것은 접어두고, 많은 책상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진 교실에 착석하고, 침묵을 지키며 교사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니, 확실히 그 반대이다. …<중략>…
아이들은 곧 여기저기 뛰어 돌아다니며, 물건을 넘어뜨리고, 모든 종류의 활동을 시작한다. 아이들은 곧 격렬하게 활동적이기 때문에, 교육이란 아이들의 여러 활동을 파악하고, 그러한 활동에 방향을 부여한다. 지도에 의해, 즉 조직적으로 다루게 됨으로써, 아이들의 여러 활동은 산만하게 되기도 하고, 단순히 충동적 발견에 그대로 내맡겨두기도 하는 것을 그만두고, 여러 가치 있는 결과로 향하게 된다.
                                                                                                                   ― 존 듀이, <학교와 사회>

<다> [새로운 학습이론은] 놀이와 공부 사이의 구분을 가능한 한 없애는 일 ― 전자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 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이것에 의해 교육의 위기를 초래했다.] 놀이는 아이들이 세계 속에서 제몫을 감당하는 가장 활기 넘치고 적절한 방식으로, 또한 아이라는 실존체로부터 자발적으로 진화하는 활동의 유일한 형태로 간주되어 왔다. 오로지 놀이를 통해 학습될 수 있는 것만이 [아이들의] 활기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아이의 특징적인 활동은 놀이 속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아이를 수동적인 태도로 몰아가는 옛날식의 학습법은 아이가 자신의 유희적 독창성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략>…
함(doing)과 앎(knowing) 사이의 연관성이 무엇이든 혹은 실용주의 공식의 타당성이 무엇이든 교육, 즉 아이의 학습방식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중략>… 어린이의 세계를 절대적으로 만들기 쉽다. 여기서도 아이들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구실로 아이들은 성인들의 세계에서 내쫓기고, 그들의 세계라고 불리는 곳에 부자연스럽게 남겨진다. 그것이 하나의 세계로 불릴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아이를 뒤에 남겨두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렇게 할 경우 가르침과 배움으로 이루어지는 성인과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관계가 끊어지고, 동시에 아이는 발달 중인 인간이고 유년기는 성인기를 준비하는 일시적인 단계라는 사실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략>…
아이가 아직 세계와 친분을 쌓지 못했다면 아이는 점차적으로 세계에 소개되어야 한다. 그가 새로운 성원인 한, [세계는] 이 새로운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성숙하도록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교육자들은 한 세계의 대표자로서 젊은이와의 관계 위에 서 있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세계를 만들지 않았더라도, 심지어 은밀히 혹은 공개적으로 기존의 세계가 아닌 다른 모습의 세계를 원할지라도, 교육자들은 세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책임은 교육자들에게 자의적으로 지워진 것이 아니다. 그러한 책임은 어른들이 계속해서 변하는 세계 속으로 젊은이들을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속에 함축되어 있다. 세계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아이를 갖지 말아야 하며 그들에게 교육의 역할을 맡겨서도 안 된다.
교육의 장에서 세계에 대한 책임은 권위의 형태를 취한다. 교육자의 권위와 교사의 자격요건은 같은 것이 아니다. 비록 자격의 척도가 권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지라도 최고의 자격요건은 결코 스스로 권위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교사의 자격요건은 세계에 대해 알고 그것을 타인에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지만, 그의 권위는 세계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일에 달려 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교사의 책임은 [세계 내] 모든 성인 거주자의 대표로서 아이들에게 세계에 관한 세부사항을 알려주면서 ‘이것이 우리의 세계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략>…
근대 세계의 교육문제는 교육이 본질적으로 권위나 전통을 무시할 수 없는 반면에 권위에 의해 구조화되지도 않고, 전통으로 함께 묶이지도 않은 세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사와 교육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하나의 세계에서 아이들, 그리고 젊은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 그들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취하는 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교육의 영역을 다른 영역, 무엇보다도 공적․정치적 삶의 영역에서 확실하게 떼어내야 한다. 그것은 교육의 영역에는 적합하지만 일반적 타당성은 없고 성인의 세계에 대해 일반적 타당성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권위의 개념과 과거에 대한 태도만을 교육의 영역에 적용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이것의 첫 번째 결과는 학교의 기능이 아이들에게 살아가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일 것이다. 세계는 오래되었고 언제나 아이들보다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존이 현재 속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머물게 될 것인가와 무관하게 배움은 과거로 향할 수밖에 없다. 둘째, 아이와 성인 사이에 그어진 선이 시사하는 바는 성인을 교육할 수도 없고 아이들을 성인처럼 다룰 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선이 마치 아이들이 성인들과 같은 세계에서 살지 않는 것처럼, 마치 유년기가 자체의 법칙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자율적인 인간 상태인 것처럼 아이들을 성인의 공동체에서 분리하는 벽으로 자라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중략>…
교육은 우리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질만큼 세계를 사랑할지, 같은 이유로 [세계의] 경신(更新) 없이, 즉 새롭고 젊은 사람들의 도래 없이는 파멸이 불가피한 세계를 구할지를 결정하는 지점이다. 또한 교육은 우리가 아이들을 우리의 세계로부터 내쫓아 그들이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이 뭔가 새로운 일, 뭔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공통의 세계를 새롭게 하는 임무를 담당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킬 정도로 그들을 사랑할지를 결정하는 지점인 것이다.
                                                                                                       ―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사이>

논제 : 교육하는 자(부모, 교사)와 학습하는 자(아이, 학생)의 관계에 관하여, 제시문 <가> ~ <다>의 사고방식의 공통점과 차이점 또는 대립점에 관해 900자 내외로 서술하시오.


<예시답안>
듀이는 교육이 아이들의 생활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는 반면, 칸트와 아렌트는 어른이 아이들을 교화하여 어른의 세계로 이끌 필요가 있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다만, 아렌트의 논의는 듀이식 교육이론에 대한 반박으로, 교육을 하는 쪽인 어른의 책임과 태도를 강조하는 내용인 반면, 칸트는 교육의 주된 목적을 아이들의 사유의 자유에서 찾고 있기에 둘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교육이란 소여로서의 인간을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아이가 스스로 사유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때문에 교육하는 자는 학습하는 자에게 복종을 하게끔 강제해야만 하는데, 이는 아이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반면 듀이는 교육이란 아이들의 생활이나 활동에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교육에서는 학습하는 자가 중심이며, 교육하는 자는 아이들의 생활을 최대한 자유롭고, 풍요로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그것을 조직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듀이의 교육관에서 교육하는 자는 소극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아렌트는 이러한 듀이식 교육이론에 관해, 거기에서는 아이들의 세계가 절대화되고, 아이들은 인공적으로 그들만의 세계에 갖혀버리게 된다고 비판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동 시절은 성인에 이르는 준비단계이며, 아이는 세계로 인도되어야만 한다. 교육하는 자는 학습하는 자에게 기존의 세계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으며, 교육하는 자가 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책임은 권위라는 형태를 취한다. 교육의 영역에서 어른은 권위를 체현하고, 과거를 지키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제시문 <다>는 교육에서 어른과 아이의 관계 중에서 교육하는 자인 어른에 역점을 두고 있을 뿐, 학습하는 자인 아이가 교육을 통해 세계에 어떻게 적응해 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아렌트의 논의는 칸트와 다르다. 칸트의 교육론에서는 교육하는 자가 부과하는 강제는 학습하는 자의 자유를 목적으로 한다고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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