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의 정치경제학 2018.03.26 01:47




채무공화국의 종언

우리는 언제부터 노예가 됐나

 

 

債務共和国の終焉 

 

 

이치다 요시히코, 오우지 겐타,

고이즈미 요시유키, 나가하라 유타카


2013930일 초판발행



목차

1. 경제를 둘러싼 현재

1. 심리 전쟁이 된 경제

2. 경제적인 것의 <신체>

3. 금융-채무혁명

 

2. 세계공화국

1. 지속을 요구하는 공화국

2. 문화 좌파에서 공공성 좌파로

3. 유럽 공화국의 출현

4. 민주주의의 병과 공화주의

5.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유령

 

3. 렌트 자본주의

1. 렌트에 의한 생산의 침식

2. 렌트/스톡 원리론

(1) <()>, 렌트, 스톡

(2) 화폐순환

(3) 이윤의 재정의

3. 렌트에 의한 채무의 확대, 혹은 투자의 행방

4. 희소성을 둘러싼 역전과 파산관리의 소비에트

 

후기 : 이치다 요시히코

 

* 본문 속의 외국어 문헌 중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문헌에 관해서는 번역서의 쪽수를 주에 붙였으나 번역문은 적절하게 변경했다.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사건에서 사건의 생산으로

: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들뢰즈=가타리적 정치

出来事から出来事生産: アンチ・オイディプスにおけるドゥルーズ=ガタリ的政治

 

사토 요시유키(佐藤 嘉幸)

思想(1087), 7-32, 2014-11, 岩波書店

(http://ci.nii.ac.jp/naid/40020237216/)

 

* 프랑스어 원문 및 한국어 번역본 대조 작업을 거치지 않았다. [2017년 3월 24일]



1.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

들뢰즈=가타리의 정치성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또한 들뢰즈 철학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위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는 본고를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고 싶다. 그런 질문을 던질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오늘날 들뢰즈의 철학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모종의 경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알랭 바디우는 자신의 들뢰즈론인 들뢰즈 : 존재의 함성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심지어 들뢰즈의 존재론이 다양성의 존재론이 아니라 여럿을 하나에 구속시키는 존재론, 말하자면 존재론적 파시즘[각주:1]이라고 논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들뢰즈의 근본 문제란 분명히 여럿을 해방하는 게 아니라, 여럿의 사유를 <하나>의 쇄신된 개념에 접어넣는 것이다.”[각주:2]

 또 슬라보이 지젝은 바디우의 강한 영향 아래서 작성된 들뢰즈론인 신체 없는 기관에서 들뢰즈가 혼자서 쓴 의미의 논리에서의 정적 생성의 탐구, 즉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높이 평가하고, 반대로 들뢰즈=가타리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의 최악의 책이라고 단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들뢰즈 자신의 텍스트 속의 그 어떤 것도 결코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적시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들뢰즈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들뢰즈 홀로의 작업에서는] 매우 엘리트주의적인 필자이며, 정치에는 무관심하다.”[각주:3]

바디우와 지젝이 들뢰즈를 평가하는 전략은 매우 닮았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정치성을 부인하며 들뢰즈 홀로의 작업, 특히 그 잠재적인 것의 존재론을 평가하는(혹은 단죄하는) 것이다.[각주:4] 그런 전략은 바디우와 지젝이 둘 다 라캉과 매우 가까운 이론적 입장postion에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바디우와 지젝은 정치적 라캉주의라는 그들의 이론적 입장에서 라캉 이론 혹은 정신분석 자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을 들뢰즈 철학에서 전면적으로 삭제한다는 전략을 선택하고,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정치성을 완전히 부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는 반대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회체와 주체의 생성변화의 탐구를 높이 평가한다. 들뢰즈=가타리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야말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의 정치성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책이며, 그 가치는 이 책이 주체뿐 아니라 사회체 자체의 생성변화를 사고했다는 것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는 들뢰즈의,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최고의 도달점이라고 위치짓는다.

여기서 또 다른 한명, 다른 철학자에 의한 들뢰즈 비판을 다뤄보자. 그것은 들뢰즈파 철학자로 간주되고 실제로 바디우나 지젝보다 들뢰즈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 의한 비판이다. 주라비슈빌리는 들뢰즈와 가능적인 것 : 정치에 있어서 비주의주의에 관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주로 들뢰즈=가타리의 논고 68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각주:5]를 참조하면서, 들뢰즈에게서의 사건개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사건에 응답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회는 혁명적으로 되기에 있다. 이것만이 치욕을 불식하는 것, 혹은 참기 힘든 것에 응답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런 명법은 전혀 주의주의적인 게 아니다. 이제 의무 존재에서 존재로 복귀하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것을 어떤 외적이고 초월적인, 따라서 전제적이고 무능한 판단에 종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의지는 이제 사건에 선행하지 않으며, 대립은 세계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지, 어떤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에서 작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사건에 응답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세계 속에서, 더 이상 그 세계를 참을 수 없는 한에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책임=응답 가능성이, 통치나 주요한 주체들의 그것과는 이질적인, 고유하게 혁명적인 책임=응답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일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계획도, 어떤 집단의 이해도 대표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이 이해는 바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방향=의미에서 변화하고 있는지를 아직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을 앞에 두고 책임=응답 가능성을 지고 있는 것이다.[각주:6]

 

한편으로 사건은 견디기 힘든 것의 새로운 의미를 출현시킨다(잠재적 변동). 다른 한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의 이 새로운 의미는 어떤 창조행위를 호소한다. 그 창조행위란 변동에 응답하는 것이며, 새로운 이미지의 도면이며, 문가 그대로 가능한 것을 창조한다(현동적 변동). 가능한 것을 창조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집단적 공간-시간적인 배치arrangement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에 의해 창조된 삶 자체의 새로운 가능성에 응답하는 것이며, 혹은 그 가능성의 표현이다.[각주:7]

 

주라비슈빌리에 따르면, 들뢰즈적 정치(“혁명적으로 되기”)란 주의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우선, 세계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의미가 산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산출된 새로운 의미=사건에 응답하는 것이 들뢰즈적 정치이다. 그때 사건이란 새로운 의미(‘견디기 힘든 것’)가 산출되는 것이며, 물질적인 것의 효과로서 새로운 의미라는 초월론적인 것이 산출되는 것이다(잠재적 변동). 그리고 그렇게 해서 산출된 새로운 의미, 즉 사건에 응답함으로써 주체를 변용시키고 집단적인 공간-시간적 배치arrangement를 변용시키는 것(현동적 변용)이 들뢰즈적 정치라고 간주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역설이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적 정치란 사건을 기다리고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의미를 주체가 수용하고 새로운 의미에 의해 주체가 변용된다는 것 이외를 의미하지 않을까?

 주라비슈빌리의 도발적인 들뢰즈 비판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주라비슈빌리의 가설은 들뢰즈 홀로의 철학, 특히 의미의 논리에는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과는 달리,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다. “사건의 생산의 철학이란 사건에 의한 세계나 주체의 수동적 변용을 다루는 철학이 아니라, 어떻게 사건을 생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철학이다.

 『의미의 논리에서의 사건의 개념을 돌이켜보자. 이 책에서 사건이란 물체적인 것의 효과로서 바로 초월론적인 의미가 산출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는 다른 물체에 대한 원인이지만, 무엇의 원인인가? 물체는 일정한 사물의 원인, 전혀 다른 본성의 원인이다. 그 효과는 물체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한다면 비물체적인것이다. 효과는 물리적 형질, 특성이 아니라, 논리적 혹은 변증론적 속성이다. 효과는 사물이나 사물의 상태가 아니라 사건이다. 효과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효과가 존속한다거나 존립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효과는 사물이 아닌 것이나 실재하지 않는 존재자성에 걸맞은 최소의 존재를 갖고 있다. 효과는 실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효과는 능동자나 수동자가 아니라 능동과 수동의 결과이며, ‘비정한, 비정한 결과이다. 효과는 살아 있는 현재형이 아니라 부정형(不定形)이다. , 한계 없는 아이온, 과거와 미래로 무한하게 분할되고, 항상 현재를 벗어나는 생성이다.”[각주:8] 들뢰즈가 즐겨 인용하는 에밀 브루이에의 예를 빌린다면, “칼이 새로운 고기를 썰, 그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속성, 의미가, 즉 생성변화가 생산된다. , “칼이 새로운 살을 썬다는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 잘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의미, 생성변화가 산출되는 것이다.[각주:9] 들뢰즈가 사건이라고 부른 것은, 그런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새로운 의미의 생산이며, 그것은 초월론적인 것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그것을 정적 발생(genèse statiqu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의 후반인 제27계열에서 갑자기 동적 발생(genèse dynamique)”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물체적 변화의 효과로서의 초월론적인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제반 특이성들로부터 주체라는 존재자가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의미의 논리에서는 동적 발생은 이제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인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 동적 발생의 논리를 더욱 추구하고,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의 철학을, 사건의 생산의 철학을 수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 경우의 사건의 생산이란 주체라는 초월론적인 것의 생산 혹은 생성변화에 머물지 않고 사회라는 현실적인 것의 생성변화도 함의하고 있다.

 이 점을 둘러싸고 네그리=하트가 커먼웰스에서 행하는 푸코와 바디우의 사건 개념의 비교가 참고가 된다.

 

이 시점에서 푸코에 의한 사건 개념과 알랭 바디우가 제창한 그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바디우는 사건을 진리의 장이라고 하며, 그것을 현대철학의 중심적 문제로서 제기하고, 커다란 공헌을 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삭감할 수 없는 다양성, 달리 말하면 다의적인성질을 갖는 사건은, 단순한 판단의 형식으로부터 진리의 심문을 빼낸다. 이 점에서의 바디우와 푸코의 차이는 두 사람이 사건에 관해서 시간적으로 어디에 관심을 기울였는가라는 것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디우에게서는 사건(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프랑스 혁명,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을 빈번하게 예로 들고 있다)이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주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의 일이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그 사건에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개입과, 그 사건에 지속적으로 계속 언급하는 충실성과 유-생성적[類生成的] 과정에 집중한다.

이에 반해 푸코는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production and productivity of the event)을 강조하며, 거기에는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향한 주시가 필요해진다. 말하자면 사건은 내적인 존재이며, 그것을 가로지르는 전략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바디우의 접근법으로는 푸코가 사건의 내부로부터 강조하고 있는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파악할 수 없다. 실제로 사건에 대한 소급적 접근법으로는 봉기 활동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길은 열려 있지 않다. 봉기 활동은 역사적 과정의 안쪽에서 혁명적 사건을 창출하고 지배적인 정치적 주체성으로부터 이탈하려고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을 만들어내는 내재적 논리 없이는 그저 바깥쪽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그것을 믿어야 할지 아닐지의 문제로서 긍정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으며, 결국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일반적으로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라고 간주되는 역설을 반복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각주:10]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바디우의 사건 개념은 (프랑스 혁명, 5월 혁명 같은) 혁명적인 사건에 대해 소급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에 충실하기를 계속하는 것을 함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에게서의 사건이란 항상 과거의 것일 수밖에 없다.[각주:11] 반면 푸코에게서의 사건 개념은 사건의 생산과 그 생산성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건의 내부에서 자유와 역능의 결부를 보는 것이다. 푸코의 사건 개념은 자유와 역능에 의거해서 도래할 사건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라고 네그리=하트는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들뢰즈=가타리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건 개념을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바디우에게서 사건이란 역사상의 단순한 우연적 점으로서만 정위될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오히려 사건에 질을 부여하고 사건을 상황 속에 포함되도록 하는 부위의 위에 주사위를 던지도록 하는 개입, 즉 사건을 만들어내는역능(puissance de «faire» l’événement)”이야말로 중요하다.[각주:12]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했다고 한다면, 거기서의 사건 개념은 바로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푸코의 사건 개념과 그대로 겹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바로 강도적인 욕망을 매개로 한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에 대해, 사건의 생산과 생산성에 대해 사고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사건(événement)” 대신 절단(coupure)”이라는 말을 사용하고,[각주:13] 심지어 과정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다음의 짧은 한 구절에 주목하자.

 

정신의학의 실효적인 정치화만이 우리를 이것들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반정신의학은 레인과 쿠퍼와 더불어, 이 방향으로 사실은 멀리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은 이 정치화를, 과정 자체의 어휘보다도 오히려 구조와 사건의 어휘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각주:14]

 

왜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정치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과정(porcess)’이라는 개념을 특권화하고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일까? 여기서 포인트가 되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사건개념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개념을 구조개념에서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건의 생산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라면, 구조 개념보다 오히려 기계욕망하는 생산 과정개념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과정이란 욕망의 흐름의 과정이며, 욕망의 흐름의 교통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분열증적 과정이란 우리를 욕망하는 생산으로부터 떼어놓는 벽이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욕망의 흐름을 교통시키는 것이다”(AO, p.434). 욕망하는 생산 과정은, 주체와 사회체의 생성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사건을 구조로부터 생각한다면, 정적인(statique) 구조의 재생산과 그 절단이라는 사고에 스스로를 한정하게 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성변화의 과정을 사고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부단한 생성변화의 과정이야말로 사건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생산은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과 함께 사고되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세계의 모든 것은 생산과 소비에 의해 시시각각 계속 변용하는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이며, 정치 또한 욕망하는 생산 과정으로부터 사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관점(perspective)에 의거함으로써 정치에 자유와 역능의 관계를 도입할 수 있고, 권력에 의한 주체와 세계의 재생산 과정에 대해 어떻게 사건을, 혹은 절단을 도입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정치를 정적 구조의 재생산과 그 재생산의 절단이라는 구조주의적 문제설정으로부터 생각하게 되며, 사건을 사후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 “구조와 사건으로부터 사고한다면, 사건의 생산 가능성에 관해 생각할 수 없다. 정치를 구조와 사건이 아니라 과정과 절단혹은 구조와 절단으로부터 사고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바로 사건의 생산에 관해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II. 욕망 기계들과 욕망하는 생산

여기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사건의 생산전략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본절에서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생산에 대해, ‘과정기계라는 개념에서부터 고찰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기본적인 테제는 세계의 모든 것은 욕망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 책의 서두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하고 있다. 중단하지 않고, 혹은 단속적으로. <그것>은 호흡하고 과열하여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애무한다. <그것>이라고 불러 버리는 것은 무슨 오류일 것이다. 도처에서 기계가 있다. 결코 은유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연결이나 접속을 수반하는 다양한 기계의 기계가 있다. 기관기계가 원천기계로 연결된다. 어떤 기계는 흐름을 발생시키고, 다른 기계는 흐름을 절단한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이며, 입은 이 기계에 연결되는 기계이다. 거식증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하는 기계(천식의 발작)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평범한 대용 작업을 하서는, 각각에 자신의 작은 기계를 조립하고 있다. 에너지 기계에 대해 기관 기계가 있고, 항상 흐름과 절단이 있다. 슈레버 공소원장은 엉덩이 속에 태양광선을 반짝이다. 이것은 태양항문이다. <그것>이 기능한다고는 확신하라. 슈레버 공소원장은 뭔가를 느끼고, 뭔가를 생산하며, 그리고 이것에 관해 이론을 만들 수 있다. 뭔가가 생산된다. 이 뭔가는 기계가 초래하는 결과이며,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AO, p.7/()15-16)

 

그것이란 에스’, 즉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무의식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심적, 물리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며, 욕망의 흐름이다. 세계는 제반 욕망의 흐름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며, 그런 무수한 흐름의 접속을 들뢰즈=가타리는 욕망 기계들이라고 부른다. 욕망 기계들은 연결과 분리를 반복하며,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생산과 소비를 반복한다.

 그러면 그때, 앞서 언급한 과정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과정이란 생산의 과정, 즉 욕망적 주체의 과정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분열증적 생산의 과정이라고 바꿔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욕망적, 분열증적 생산의 과정이란 소비, 등록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생산은 그 생산물의 등록(분배), 소비로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생산등록소비생산).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 , 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이다. “생산은 그대로 소비이며, 등록이다. 등록과 소비는 직접적으로 생산을 규정하고 있지만, 더욱이 생산 자체의 한복판에서 생산을 규정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생산의 생산, 즉 능동과 수동의 생산이며, 등록의 생산, 즉 분배와 지표의 생산이며, 소비의 생산, 향락과 불안과 고통의 생산인 것이다. 모든 것은 바로 생산이기 때문에, 등록은 곧바로 소비되고 소진되며, 이 소비는 곧바로 재생산된다”(AO, pp.9-11/()19-20). 이런 의미에서 자연과 인간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AO, p.10/()20). 자연은 인간을 생산하고 인간은 자연을 생산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에너지-생산의 기계의 연쇄이다.

 둘째,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을, 임상 실체로서의 분열증으로부터 구별해야 한다. “과정은 목표나 목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과정 자체를 무한하게 계속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과정의 목적화, 혹은 과정의 무한한 계속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과정의 너무 빠른 무모한 정지와 똑같은 것이며, 그것은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인공적 분열증자, 자평증화되어 폐인이 되고, 임상 실체로서 산출되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조작이나 다름없다. 분열증적 특성이나, 그 임상 실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열증이란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이며,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이루는 실재로서의 근원적인 보편적 생산이다”(AO, p.11/()21).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란 욕망하는 생산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욕망 기계들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생산성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과정으로서의 분열증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라캉의 정의에 따르면, 분열증이란 대문자의 타자가 배제되고 실효되어 있기 때문에, 상징계가 부서졌고 그 때문에 소문자 타자가 무한하게 증식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은 분열증이 대문자 타자를 결여하고, 그 때문에 소문자 타자를 무한하게 증식시켜가듯이, 초월적 심급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을 내재평면 위에 횡단적으로 증식시켜가는 것이다.[각주:15]

 그러나 다른 한편, 과정 자체를 목적화해서는 안 된다. 과정의 목적화, 혹은 그 정지는 욕망의 자연스런 흐름을 해치며, 임상 실체로서의 분열증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으로서의 분열증과, 그 목적화나 정지로서의 임상 실체의 분열증을 구별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흐름의 생산을 목적화하거나 정지하여 임상실체로서의 분열증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과정이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 혹은 분열증적 과정일 때,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라는 기묘한 개념은, 거기서 어떤 역할을 맡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기관 없는 신체란 욕망 기계들에 대립하는 강도 제로(0)로서의 죽음 본능이다.

 

이 기관 없는 충실 실체는 비생산적인 것, 불모인 것이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있었던 것, 소비할 수 없는 것이다. 앙토냉 아르토는 그 어떤 형식도, 그 어떤 형상도 없이 존재했을 때, 이것을 발견했다. 죽음의 본능[instinct de mort], 이것이 이 신체의 이름이다. 이 죽음에는 모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욕망은 그것도 또한, 죽음도 또한 욕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충실 신체는 욕망의 부동의 동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삶의 기관들이 작동하는 기계(working machine)이기 때문에 욕망이 삶을 욕망하게 되게 되듯이.(AO, p.14/()26)

 

기관 없는 신체는 강도 제로(0)죽음 본능이며, 스스로는 생동하지 않고, 욕망을 생동하게 하는 욕망의 부동의 동자이다. 들뢰즈가 자흐 마조흐 소개에서 죽음 본능(instinct de mort)’을 경험적인 파괴욕동으로서의 죽음 충동(pulsion de mort)’과는 다른, 순수한 초월론적 원리라고 정의했다는 것을 상기해두자.[각주:16] 그것은 욕망 기계들에 운동을 부여하고, 욕망에 흐름을 부여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죽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 본능으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란 순수한 초월론적 원리이며, 경험적 소여로서의 욕망 기계들에 대립한다. 강도 제로의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 기계들을 등록하는 등록 표면 혹은 내재 평면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욕망 기계들이 모든 은유와 무관하게 진정으로 기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점에서일까? 들뢰즈=가타리는 욕망 기계들의 특성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접속적 종합, 생산의 생산이라는 특성이다. 기계는 여러 가지 물질적 흐름에 접속하며, 그 흐름을 절단, 채취한다. “우선 첫째로, 무릇 기계는 모두 연속된 물질적 흐름(즉 질료)과 관련되어 있으며, 기계는 이 흐름을 잘라낸다. 절단은 연합하는 흐름으로부터 뭔가를 채취하는 작동을 한다. 예를 들어 항문과 이 항문이 절단하는 똥의 흐름과의 관계. 입과 젖의 흐름과의 관계. 심지어 입과 공기나 음의 흐름과의 관계. 페니스와 오줌의 흐름, 그리고 또한 정자의 흐름과의 관계(AO, pp.43-44/()72-73). 예를 들어 입 기계는 모유 기계에 접속되고, 이로부터 젖의 흐름을 잘라내고 채취한다(채취-절단). 기계가 접속하는 여러 가지의 물질적 흐름 그 자체도 또한 다른 기계에 의해 생산되는 이상, 기계와 흐름의 접속은 기계와 기계의 접속이기도 하다(기계의 기계). 또한 기계와 기계의 접속은 반드시 다른 흐름을 생산하지만, 그것은 세 번째의 기계에 접속하며 채취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와 기계의 접속은 무한하게 연속된 흐름이기도 하다(생산의 생산). 욕망 기계들 상호 접속의 접속은 욕망의 생산성 자체를 생산한다. 이 세계에는 부분 대상으로서의 욕망 기계들과 욕망의 흐름의 다양성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 기계들이 여러 가지 욕망의 흐름들에 접속하고, 그것을 채취하고 스스로도 욕망의 흐름을 생산하는 것, 즉 생산의 작동을 끊임없이 생산물에 접목해가는 것, 이것이 접속적 종합, 생산의 생산이라는 욕망 기계들의 근원적 특성이다.

 둘째, 이접적 종합, 등록의 생산이라는 특성이다. 모든 기계는 그 안에 일종의 코드를 짜넣고 있지만, 그 코드는 매우 다양한 단편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단편들은 코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고 각각 다른 기계에 접속되며, 그로부터 잉여가치(코드의 잉여가치)를 끌어낸다(이탈-절단). 그 예로서 거론되는 것이 말벌과 난초의 코드의 접속과, 그것에 의한 코드의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난초는 말벌이 꽃가루를 수술에서 암술로 운반하지 않고는, 자신의 재생산을 행할 수 없다. 그래서 난초와 말벌의 생식기를 본 따 말벌의 이마주가 되며, 말벌의 코드와 접속되며, 그로부터 수분과 재생산이라는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각각의 연쇄는 다른 여러 가지 연쇄의 단편을 포착하고 이로부터 잉여가치를 끌어내는데, 이것은 바로 난초의 코드가 말벌로부터 그 모양[]추출하는듯하다. 이것은 코드의 잉여가치의 현상이다”(AO, p.47/()77-78).[각주:17] 이런 의미에서 욕망 기계와 다른 욕망 기계의 횡단적 접속에 있어서, 기계 사이에서의 코드의 등록, 전달은 이접적(disjonctif)이며, 코드 사이의 차이는 항상 유지되고 있다. 코드의 단편은 코드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하며, 다른 코드와 접속되어 코드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코드란 하나의 시니피앙 연쇄’(라캉)로는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다양체이며, 결코 단일한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시니피앙의 연쇄 혹은 연쇄들을 말려들게 하는 무의식의 코드라고 하는, 저 풍부한 영역을 발견하고, 이것에 의해 분석 방식을 변용한 공적은, 라캉의 것이다(이것에 관핸 기본 텍스트는 도둑맞은 편지[「『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에크리수록]이다). 이 영역은 그 다양성을 위해서, 실로 기묘한 것이 되며, 하나의 연쇄로서, 혹은 하나의 욕망적 코드로서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된다. 이런 연쇄는 여러 가지 기호들에 의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시니피앙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기호들 자체는 시니피앙이 아니다. 코드는 일반의 언어활동보다도, 은어와 닮았고, 열린 다의적 형성체이다. 거기서 기호는 임의의 성질을 가지며, 그 지지체와는 무관한 것이다(혹은 오히려 이 지지체 쪽이 기호와 무관한 게 아닌가. 지지체란 기관 없는 신체이다). 기호는 정해진 평면을 갖지 않고, 모든 단계에서, 모든 접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각각의 기호는 자기 자신의 언어를 말하며, 다른 기호와 더불어 여러 가지 종합을 실현하지만, 이런 종합은 그 구성요소의 차원에 있어서는 간접적이기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만큼 갈수록 횡단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인 종합을 수립한다. 이런 연쇄들에 고유한 이접의 작동은 아직 배타적이 아니며, 배타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억지하는 것이나 억압하는 것의 작동에 의한다. 억지하고 억압하는 것은 지지체를 규정하고 특정한 인칭적 주체를 고정하려 한다. (AO, p.46/()76-77).

 

라캉 이론에서 시니피앙 연쇄는 특권적 시니피앙인 결여의 시니피앙(팔루스)에 의해 통제된다. 그런 결여의 시니피앙에 의한 다른 모든 시니피앙의 통제는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인칭적 주체를 조직한다. 라캉은 특권적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의 시니피앙의 정의(그것에 관해 이것 이상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음과 꼭 같다. «하나의 시니피앙, 그것은 다른 어떤 시니피앙에 대해 주체를 대리 표상하는 것이다따라서 이 시니피앙은 다른 모든 시니피앙이 그것을 향해 주체를 대리 표상하는 시니피앙이 될 것이다. 이것은 즉 이 시니피앙이 결여되어 있다면, 다른 모든 시니피앙은 아무것도 대리 표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도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대리 표상되기 때문이다.”[각주:18]하나의 시니피앙”, 즉 특권적 시니피앙으로서의 팔루스는 다른 모든 시니피앙을 대리 표상하고, 따라서 주체를 대리 표상한다. 라캉에게서는 이런 결여의 시니피앙을 부재의 중심으로서 고정적인 인칭적 주체가 조직화되고, 주체의 안정성이 확보된다.

 반면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코드란 시니피앙이 아니라 열린 다의적 형성체이다. 그것은 결코 특권적 결여의 시니피앙에 의해서는 통제되지 않는다. 코드란 순수한 다양체이다. 그리고 기관 없는 신체란 다양한 코드의 등록 표면에 불과하다. 그런 다양한 코드와 이것들의 접속에서 생겨나는 것은 다양체로서의 비인칭적 주체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이런 다양체로서의 비인칭적 주체라는 가정으로부터, 연접적 종합, 소비의 생산이라는 제3의 특성이 도출된다.

 

욕망 기계의 세 번째 절단은 잔여-절단 또는 잔재-절단이며, 기계의 곁에 하나의 주체를, 기계의 인접 부품으로서 산출하는 절단이다. 그런데 이 주체가 특정한 인칭적인 자기 동일성을 갖지 않으며, 또한 이 주체가, 기관 없는 신체의 미분화 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이 신체를 횡단하려고 하면, 이 주체가 단순히 기계의 곁의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 자체 분할된 하나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흐름으로부터의 채취와 연쇄로부터의 이탈에 대응하는 부분들이, 이 부분에 각각 귀속해간다. 이리하여 주체는 자신이 통과하는 상태들을 소비하고, 이런 상태들로부터 탄생한다. , 여러 가지 부분들로 이루어진 한 부분으로서, 이런 상태들의 하나하나로부터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런 부분들 각각은 한순간에 있어서의 기관 없는 신체의 내용을 이룬다. (AO, pp.48-49/()80-81).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주체는 욕망 기계들이 욕망의 흐름을 채취, 소비함으로써, 그 기계의 곁에, 잔여로서 생산된다(잔여-절단).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의식에 의해 중심화된 인칭적 주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비인칭적 특이성으로부터 구성된 탈중심화된(AO, p.27/()47) 주체, 즉 무의식의 주체이다. 또한 이 주체는 다양한 흐름을 채취, 소비함으로써 시시각각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비인칭적 주체이다. 따라서 그러한 주체는 팔루스라는 특권적 시니피앙에 의해 안정적으로 조직화된 라캉적인 인칭적 주체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한다. 욕망 기계들의 생산성은 곧 탈중심화되고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비인칭적 주체의 철저한 생산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코 결여’, ‘거세같은 부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성변화의 원리 자체이다.

 

III. 오이디푸스화와 욕망하는 생산의 억압

욕망 기계들은 항상 생산의 작동을 멈추지 않으며 상호 접속을 반복하며, 이로부터 여러 가지 비인칭적 특이성에 의해 구성된 생성변화의 주체를 생산한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 아래서의 오이디푸스화가 그런 철저한 생산성을 억압한다. 그렇다면 욕망 기계들의 생산성은 왜 어떤 목적으로 억압되는 것일까? 그것은 욕망의 생산의 작동을 억압하고 유순한 주체(복종화된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권력이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만일 그것이 해방되면 곧바로 권력이 전복되는 듯한, 강도적 역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억압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든, 모든 욕망의 입장은 사회의 기성 질서를 규탄하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은 거꾸로 비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욕망은 무엇인가를 뒤집어엎는 것이다. 사회의 여러 부문의 전체를 떨구어 내버리지 않고 정립되는 욕망 기계들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모종의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욕망은 그 본질에 있어서 혁명적이다”(AO, p.138/()223).

 이런 입론의 전제로서,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사회적 억제(repression)’와 심적 억압(refoulement)’을 구별한다. 사회적 억제는 권력장치들에 의한 작용이며, 권력에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며, 사회구성체의 억제적 구조를 재생산한다. 하지만 사회적 억제는 단순히 자신만으로 완결하는 게 아니다. 사회적 억제는 그 도구로서 심적 억제를, 즉 오이디푸스화를 필요로 한다.

 

라이히의 힘은 억압이 어떻게 억제에 의존하는가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이 두 가지 개념의 혼동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억제는 유순한 주체를 형성하며 사회구성체를 이 억제적 구조에 있어서 재생산하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바로 억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억제는 문명과 외연을 함께 하는 가족적 억압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할 게 아니라, 가족적 억압 쪽이 특정한 사회적 생산형태에 내속하는 억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억제는 단순히 욕구나 이익만으로 향하는 게 아니며, 성적 억압을 통해 욕망으로도 향한다. ‘한 사회의 경제체제의 집단심리에 의한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가족은 바로 이 성적 억압을 의탁받은 대행자인 것이다. (AO, pp.140-141/()227).

 

사회적 억제는 권력에 대해 유순한 주체를 생산, 재생산하고, 사회적 권력관계(계급관계나 착취의 구조)를 재생산하기 위해, 심적 억압(오이디푸스화)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오이디푸스화로부터 사회적 억제를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니다. 정반대로, 사회적 억제와 권력관계의 재생산의 필요로부터 심적 억압으로서의 오이디푸스화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렇게 가족에 있어서의 오이디푸스화야말로 권력의 대행자로서, 권력에 대해 유순한 주체를 형성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아질 것이다. 첫째, 억제적인 사회적 생산은 억압적인 오이디푸스적 가족에 의해 대행된다. 그리고 둘째, 욕망적 생산이 치환된 이미지가 억압적 가족이며, 이 이미지가 억압된 것을 가족적, 근친상간적 충동으로서 표상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조작은 사회적 억제=심적 억압이라는 방식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AO, p.142/()230). 욕망적 생산은 잠재적으로 사회를 파괴하는 강도적 역능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그것을 억제하고 사회를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것이, 복종이 욕망되는 심적 메커니즘, 즉 억압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은 일체를 이룬다. 사회적 생산은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욕망적 생산에 대해 억제를 행사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이 욕망적 생산과 일체를 이룬다고 한다면,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에 대해 단순히 억압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에 작동을 걸고, 욕망적 생산이 스스로 억제=억압을 욕망하는 체제를 만들어낸다.

 

사실 사회적 생산은 한정된 조건들에 있어서는 오로지 욕망적 생산 자체인 것이다. 사회적 영역은 직접적으로 욕망에 의해 횡단되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욕망의 산물이며, 리비도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투자하기 위해, 그 어떤 매개도, 그 어떤 승화도, 그 어떤 심리적 조작도, 그 어떤 변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저 욕망과 사회적인 것이 존재한다. 사회적 재생산의 가장 억압적, 굴욕적 형태도 욕망에 의해 생산되고, 욕망으로부터 출현하는 조직에 있어서 생산된다. 바로 우리는 이 조직이 어떤 조건에서 출현하는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는 스피노자가 일찍이 제기했던 것과 똑같다(라이히는 그것을 재발견했다). , ‘인간은 왜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 왜 우리는 더 많은 세금을! 더 적은 빵을!”이라고 외치게 될까? 라이히가 말하듯이,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파업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굶주린 사람들이 반드시 도둑질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파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몇 세기 전부터 착취, 굴욕, 노예상태를 견디며 타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조차 이것들을 원하게 될까? 라이히는 파시즘의 성공을 설명하려 하며, 대중의 오해나 착각을 그 원인으로 언급하기를 거부하고, 욕망의 관점에서, 욕망의 말로 설명하는 것을 요구하는데, 라이히가 이때만큼 위대한 사상가였던 적은 없다. 대중은 일정한 때, 일정한 상황에서 파시즘을 욕망했던 것이며, 바로 이것, 군중심리적 욕망의 이 도착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AO, pp.36-37/()62-63).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사회적 생산은 욕망적 생산과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권력에의 복종화마저도 복종화의 욕망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정치철학의 근본문제란 인간이 왜 예속을 위해 싸우는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스피노자, 신학정치론)라는 것이며, 라이히는 그것을 대중의 파시즘에 대한 욕망이라는 형태로 재발견했다(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런 의미에서 권력에의 복종화의 사회적 생산이란,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의 사회적 생산이다. 오이디푸스적 가족이란 그런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을 생산하는 권력의 대행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적 생산에 대해, 오이디푸스는 어떤 방식으로 심적 억압을 부과하며, 권력에의 복종화의 욕망을 생산하는가? 들뢰즈=가타리는 그것을 세 가지 과정으로부터 설명한다. 첫째, 접속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접속적 종합이란 욕망 기계들이 횡단적으로 서로 접속과 절단을 반복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들은 그 과정을 접속적 종합의 부분적, 비특수적 사용이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그 포괄적, 특수적 사용으로 포섭된다.

 

첫째, 접속적 종합의 부분적이고 비특수적 사용이 오이디푸스적, 포괄적, 특수적 사용에 대립했다. 이 포괄적-특수적 사용은 양친적과 혼인적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지니며, 이것들에는 오이디푸스 삼각형과, 이 삼각형의 재생산이 대응했다. 이 전체적-특수적 사용은 단락적인 일반화라는 착오에 기초하여, 이것이 결국 오이디푸스의 형상인을 이루고 있으며, 그 부당성은 다음과 같은 조작의 전체를 걸었다. , 시니피앙 연쇄로부터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으로서의 초월적 완전 대상을 추출한다는 조작이다. 이리하여 연쇄의 전체가 이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에 의존하며,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은 욕망의 각각의 위치에 결여를 할당하며, 욕망을 법에 용접하여, 연쇄로부터 이탈하는 것의 환영을 준 것이다(AO, p.131/() 211-212).

 

접속적 종합의 포괄적, 특수적 사용에 의해 아이들은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 동성의 부모로 동일화하며(오이디푸스적 삼각형화), 심지어 자신이 부모가 되는 이성애적인 혼인관계에 있어서 오이디푸스를 재생산한다. 오이디푸스화란 다양체로서의 시니피앙 연쇄 혹은 코드를, 특권적인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전제군주적 시니피앙이란 결여의 시니피앙(팔루스)이며, 그것은 욕망에 결여를 할당하고, 욕망을 법에 종속시킨다. 그것에 의해 욕망의 다양성이 억압된 자기 동일적 자아가 형성된다.

 둘째로, 이접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욕망 기계들은 각각이 스스로에게 독자적인 코드를 내포하지만, 그 코드는 다양하며, 항상 단편화되어 다른 코드와 접속되며, 이로부터 코드의 잉여가치를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는 그런 코드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둘째, 이접적 종합의 포괄적 또는 무제한적 사용은 오이디푸스적, 배타적, 제한적 사용에 대립한다. 이 제한적 사용은 심지어 상상적과 추상적이라는 두 가지 극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에 의해 상관적으로 규정된 두 항 사이, 즉 배타적 상징적인 구별과, 미분화 상태의 상상계라는 두 항 사이에서만, 선택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이 사용은 이 때, 오이디푸스의 작법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중구속의, 즉 이중의 막다른 골목의 오류 추리이다. (AO, p.131/()212).

 

이접적 종합의 배타적-제한적 사용, 즉 오이디푸스적 사용이란 상징계의 법을 수용하거나 혹은 미분화 상태의 상징계로 떨어지거나,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이중구속이다. 이 두 개의 선택지는 단순히 외관상의 것이며, 실제로는 상징계의 법, 즉 사회적인 법을 받아들이는 수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런 조작에 의해, 주체는 상징계의 법=사회적인 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한다.

 셋째, 연접적 종합의 오이디푸스화이다. 욕망 기계들은 이것들이 서로 접속되고, 여러 가지 흐름들을 소비함으로써, 그 곁에, 항상 생성변화를 계속 하는 비인칭적인 주체를 생산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성변화의 주체의 생산을,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 다의적 사용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그것은 격리적, 일대일 대응적 사용으로 변용된다.

 

셋째로,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이고 다의적 사용은 격리적이고 일대일 대응적 사용에 대립한다. 여기서도 또한 무의식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이 일대일 사용은, 말하자면 두 개의 계기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인종주의적, 국가주의적, 종교적 등등의 계기이며, 격리에 의해, 오이디푸스가 언제나 전제하는 출발점의 집합을 구성한다. 이것은 완전히 암암리의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가족적 계기이며, 사상(寫像, application)에 의해 도달점의 집합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상(寫像)이라는 세 번째 오류추리가 생긴다. 이 오류추리는 사회적 장의 규정과 가족적 규정 사이에 일군의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수립하며, 이런 방식으로 리비도 투자를 영원한 아빠-엄마로 환원하는 것을 가능케 하며 불가피하게 하며 오이디푸스의 조건을 고정한다. (AO, pp.131-132/()212-213).

 

연접적 종합의 격리적-일대일 대응적 사용은 사회적 장의 규정과 가족적 규정 사이에 일대일 대응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 일대일 대응에 기초하여 욕망적 생산에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사상(寫像)하며, 욕망적 생산의 다양성을 억압한다. 그것에 의해 여러 가지 특이성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생성변화하는 비인칭적 주체는, 오이디푸스화된 인칭적 주체로 개별화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일대일 대응화가 실현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개체화뿐만이 아니다. 오이디푸스화는 제반 주체들을, 인종, 국가, 가족 같은, 어떤 하나의 초월적 시니피앙 아래에 통합된 집단으로 동일화시킴으로써 예속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속집단(groupes assujettis)’이란 주체 집단(groupes sujets)’에 대립하는 개념이며, 둘 다 가타리가 정신분석과 횡단성의 논문들에서 도입한 개념이다.[각주:19] 들뢰즈는 가타리의 정신분석과 횡단성에 붙인 서문에서, 두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속집단은 총체로서 예속적일 뿐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여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예속적이라는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예속집단을 특징짓는 위계질서, 수직적 혹은 위계형 조직은 집단이 무의미, 죽음, 혹은 분해 등으로 내파하는 일체의 가능성을 뿌리치고, 창조적 절단의 발전을 가로막고, 다른 집단의 배제 위에서 수립되는 자기 보존의 메커니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예속집단의 중앙집권주의는 구조화, 전체화, 통합화라는 과정을 거쳐 작용하며, 진정한 집단적 언표행위의 조건들을 대신해, 현실과 동시에 주체성으로부터도 절단된, 틀에 박힌 언표의 배치를 초래한다(집단적 오이디푸스화 작용, 초자아화, 거세 효과 같은 상상 위의 현상이 생기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거꾸로 주체집단은 전체성이나 위계를 뿌리치는 횡단성의 계수에 의해 정의된다. 주체집단은 언표행위의 행위자(agent)이며, 욕망의 지지체이며, 제도적 창설의 구성요소이다. 주체집단은 그 실천을 통해, 스스로의 무의미, 죽음, 또는 절단의 극한에 도전하길 마지 않는다.”[각주:20]예속집단이란 특히 프로이트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각주:21]에 영향을 받은 개념이며, 어떤 초월적 중심으로의 동일화에 의해 위계질서적, 수직적, 중앙집권적으로 통합된 전체성을 가리킨다. 그에 반해 주체집단은 그런 주체성이나 위계적 통합을 해체하는 분자적 다양성과 횡단성에 의해 정의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주체집단예속집단을 집단 환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의하는 점이다.

 

집단 환상과 개인 환상 사이의 수많은 구별을 전개하면, 결국 개인 환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오히려 주체 집단과 예속 집단이라는 두 종류의 집단이 존재할 뿐이다. 오이디푸스와 거세는 상상계의 구조를 형성하며, 이 구조를 따라 예속 집단의 구성원은 자신들이 집단에 소속되어 있음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혹은 환상화하도록 규정된다. 게다가 이런 두 종류의 집단은 끊임없이 서로로 이행하는 상태에 있다고 말해져야 한다. 주체 집단은 끊임없이 종속의 위험에 처해 있으며, 예속 집단이 있는 경우에는 혁명적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분석이 어떻게 환상으로부터 배타적인 이접의 방향만을 끄집어내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환상을 그 개인적, 혹은 의사-개인적인 차원 속으로 내리누르고 있는지를 볼수록, 우려해야 할 것은 없다. 이런 개인적, 의사-개인적 차원은 본성적으로 환상을 예속 집단에 관계시킬 뿐이며, 정반대의 조작을 행하여 환상을 집단의 차원에서 포착하며, 환상 속에서, 집단의 혁명적 잠재성의 숨겨진 요소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AO. pp.75- 76/() 124. 강조는 인용자)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정신분석이 개인 환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실제로는 집단 환상이다. 그들은 제도론적 정신 분석에 의거하면서,[각주:22] 개인 환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집단 환상만이 존재한다는 테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주체 집단과 예속 집단이라는 두 종류의 집단 형성은 바로 집단 환상의 메커니즘에 의거하고 있다. 주체 집단에 대해서는 나중에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석에 의해 개인 환상으로 파악된 것이야말로 예속 집단의 형성에 본질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 주목하자. 오이디푸스화란 바로 개인화이며, 가족 환상이라는 개인 환상의 형성 메커니즘인데, 그런 가족 환상의 형태를 통해서만 개인들은 개인화된 채의 상태에서 아버지의 이름 같은 초월론적 시니피앙에 예속화된다. 그리고 그 초월론적 시니피앙이 국가, 인종, 신 같은 사회적인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전위됨으로써 개인들은 예속 집단의 전체성(과 그 집단 환상)에 통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심적 억압의 형성이란 바로 오이디푸스적 가족에 있어서의 개인화를 통한 예속 집단에의 예속화이며, 개인화된 주체들을 하나의 초월적 시니피앙으로 통합하는 예속 집단의 형성과 동의어이다.[각주:23] 이런 의미에서 개인 환상으로서의 가족 환상은 틀림없이 집단 환상인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적 조작은 주체들을 예속 집단으로 통합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오이디푸스적 조작의 주체들로의 사상(寫像)은 이렇게 예속 집단을 형성하고, 예속 집단의 규정들을 이루는 리비도 투자를 형성하는 것이다.

 

IV. 자본주의와 사건의 생산

욕망 기계들의 철저한 생산성은 반생산을 초래하는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억제=억압되며, 개인들은 예속 집단으로 전체화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오이디푸스화를 자본주의 체제에 고유한 억압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자본주의와 오이디푸스화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기 위한 사건의 생산의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다.

우선,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자본주의의 정의를 보자. 그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화폐-자본의 형태를 취한 탈코드화된 생산의 흐름과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형태를 취한 탈코드화된 노동의 흐름 사이의 마주침에 의해 발생한다. 이 정의는 맑스의 자본에 의한 자본주의의 성립, 즉 자본주의와 토지로부터 떼어내진 자유로운 노동자와의 만남[마주침]이라는 설명을 근거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의 운동에 의해서 정의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가 전자본주의에서의 코드를 대신해, 화폐라는 추상량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화폐라는 추상량의 공리계는 탈영토화의 운동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며, 탈영토화된 영역에서 욕망의 흐름을 해방한다(AO. p.41/()68-69).

 이처럼 자본주의란 흐름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즉 절대적 한계로 향하는 분열증적 운동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가 해방된 흐름을 공리계에 의해 억제하고, 흐름을 내재적, 상대적 극으로 닫아버린다. 자본주의는 이 내재적 한계를 확대시키면서 재생산하며, 흐름이 절대적 극한에 도달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분열증은 자본주의 자체의 외적 극한, 즉 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경향의 종착점인데, 자본주의는 이 경향을 억제하고 이 극한을 거절하고 치환하며, 이것을 자기 자신의 내재적인 상대적 극한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확대하는 규모에 있어서, 이 상대적 극한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자본주의는 한 손으로 탈코드화하는 것을, 다른 손으로 공리계화한다”(AO, p.292/()62).[각주:24]

 이처럼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조절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공리계에 요청되며,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사회적 힘들의 장에 내재하는방식으로 조절하고, 자본주의의 상대적 극한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부단한 경제 발전과 자본의 탈영토화를 추진하는) 것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운동이 절대적 극한에 도달하지 않도록 그것을 상대적 극한 속에 억눌러둔다(사회 혁명을 억제한다)(AO, pp.299-300/()72-74).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국가도 복지국가도 둘 다, 심지어 신자유주의 국가조차도, 이런 자본의 공리계의 틀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 세 종류의 국가는 모두, 국가가 자본의 운동의 중요한 조절 역할을 맡으며, 경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국가가 자본의 운동에 어떤 개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와 복지국가는 국가가 경제 발전을 직접 주도하고, 노동자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자본이 운동을 조절한다. 또 신자유주의 국가는 자본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억제하고 자본의 운동의 게임의 규칙(시장에서의 경쟁 상태)을 만들어낸다는 방식으로 자본의 운동을 조절한다.[각주:25]

 그렇다면 이런 자본주의의 운동은 오이디푸스화에 의한 억압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까? 자본주의에 의해 사회체가 자본-화폐로서 순수하게 경제적인 것, 추상적인 것으로 됨으로써, 가족은 자신의 사회적 형태를 경제적 재생산에 부여하기를 그만두고, 사회적 장의 바깥에 놓이게 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가족의 사인화(privatis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족이 사회적 장 바깥에 놓인다는 것은 가족에게 최대의 사회적 호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적 장 전체가 가족으로 사상(寫像)되는 것이 가능해지는 조건이기 때문이다”(AO, p.314/() 96). 개별 인물은 자본주의의 공리계에 의해 산출된 사회적 인물(예를 들어 자본가, 노동자)이지만, 그들은 동시에 가족에 있어서는 아버지, 어머니, 자식 중 어느 하나라는 사적인 인물이다. 오이디푸스화의 조작이란, 개인의 첫 번째 차원의 사회적 이미지를 그 두 번째 차원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로 사상(寫像)하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개인들은 권력에 예속된 주체로 식민지화된다.

 

사회적 장에서 각자는 언표행위의 집단적 대행자로서, 혹은 생산, 반생산의 대행자로서 작용하는 작용받지만, 이 사회적 장은 오이디푸스의 위에 포개진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에서 이제 각자는 자신의 구석에 갇히고, 각자를 개체로서 분할하는 선에 의해서 절단된다. 각자는 언표의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로 분할되는 것이다. 언표의 주체는 사회적 인물이고, 언표행위의 주체는 사적 인물이다. ‘그 때문에이것은 너의 아버지이며, 그 때문에 이것은 너의 어머니이며, 그 때문에 이것은 너다. 자본주의의 여러 가지 연접이 사인(私人)이 된 인물로 사상(寫像)되는 한에서, 이 연접에서 가족의 연접이 귀결된다. 아빠-엄마-, 이것이 도처에서 확실히 발견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거기에 사상(寫像)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 의한 통치,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분열을 이용하고 흐름을 우회시키는 새로운 방식인 것이다. 혼성된 이미지, 이미지 위에 포개지는 이미지, 이런 조작의 결과, 각자의 작은 자아는 아버지-어머니에 관계되며, 진정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A, pp.316-317/()99)

 

오이디푸스화에 의해 사회적 인물, 즉 자아의 사회적 이미지는 사적 인물, 즉 개인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로 포개지며 사상(寫像)된다. 그것에 의해 주체는 언표의 주체(사회적 인물)와 언표행위의 주체(사적 인물)의 두 층으로 분할된다. 라캉에 따르면 언표행위의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이며, 그것은 의식의 주체에 대해 상위에 있으며, 의식의 주체를 초월론적인 방식으로 통제한다.[각주:26]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라캉적 주체 개념이 사실상 사회적인 예속화의 메커니즘을 기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 언표행위의 주체, 즉 자아의 사적 가족적 이미지란 오이디푸스화된 초월론적 자아이며, 그것은 상위로부터 언표의 주체, 즉 자아의 사회적 이미지를 통제한다. 그리고 초월론적 자아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바로 상징계의 법=사회적 법, 즉 예속화의 법을 체내화한 심급이다. 이러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푸코)은 바로 오이디푸스화된 주체의 형성에 의해 성립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야말로 권력에 순종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통치하는 예속화된 주체 자체이며, 그런 주체는 욕망의 생산성을 스스로 심적으로 억압함으로써 사회적 억제 메커니즘에 스스로 복종할 것을 욕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화란 사회적 통치의 메커니즘이며, 예속화의, 그리고 예속 집단의 형성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오이디푸스화되고 예속화된 주체와, 이들 예속화된 주체로 이루어진 위계적이고 몰적인 예속 집단을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으로 이루어지며, “집단적 언표행위의 대행자agent”의 횡단적이고 수평적 연결로 이루어진 주체 집단으로 변용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어떤 전략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한까지 가속화하고, 그것이 억제하고 있는 욕망의 역능을 해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자본의 운동의 내적 극한을 확대하고 그것을 절대적 극한으로 접근시키며, 욕망의 흐름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따라서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무의식적 욕망의 흐름을 전면적으로 해방하는 분열증적, 절대적 극한으로 이를 것이다. 그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욕망적 생산의 분자적, 수평적 다양체로서의 주체 집단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말단으로부터 계속 도주한다. 자본주의의 생산, 그 예술, 그 과학은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여러 가지 흐름을 형성한다. 이것들의 흐름은 단순히 대응하는 공리계에 종속할 뿐 아니라 공리계의 그물망을 관통하고, 재코드화나 재영토화의 밑을 뚫고, 몇 가지 흐름을 교통시킨다. 이번에는 주체 집단이, 단절을 통해서 예속 집단에서 파생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흐름을 틀어막고 흐름을 절단하고 절단을 멀리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의 흐름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자본주의에 반항하고 자본주의를 찢어버리는 여러 가지 분열에 따라 스스로를 계속 절단한다. 자본주의는 내적 극한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대비가 있으나, 변함없이 외적 극한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외적 극한은 내적 극한이 확대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본주의에 침입하고, 내부로부터 자본주의를 찢어버리는 위험을 증가시킨다. 그 때문에 도주선은 매우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게 된다. , 도주선은 사회적 장에 대한 한 가지 투자를 구성하는 것이며, 이 투자는 반대 방향의 투자에 못지않게 완전한 것, 전체적인 것이다. 파라노이아적 투자와 분열 기질적 투자는, 말하자면 무의식적 리비도의 투자가 대립하는 두 극을 이룬다. 한쪽 극은 주권 조직체나 이 주권 조직체에서 발생하는 군() 거세 집합에 욕망적 생산을 종속시키는 극이며, 다른 한쪽 극은 반대의 예속집단을 실현하고, 권력을 전복하고, 욕망적 생산의 분자적 다양체에 군거성 집합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AO, p.451/()297-298)

 

자본주의의 외적 극한이란 분열증적인 것이며, 자본주의의 가속에 수반되는 이 분여증적인 것의 침입이야말로 긍정적인 도주선의 형성을 가능케 한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가속은 욕망의 해방을 가속시키고, 자본주의를 불안정화시키며,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도주선을 긋는 것을 가능케 한다. ᄄᆞ라서 예속집단에서 주체집단으로의 변용은 자본주의의 가속화에 따른 욕망적 생산의 가속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충실 신체로서의 새로운 사회체를 건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사회적 충실 신체의 또 다른 국면으로 이행해야 한다. 거기에는 욕망의 분자적 조직체가 작동하고 등기되며 새로운 몰적 집합을 자신에게 예속시킬 것이다. 이곳에서만, 우리는 리비도의 무의식적 혁명적 절단과 투자(la coupure et l’investissement revolutionnaires inconscients de la libido)에 도달한다. 그런데 다만 인과관계의 단절(rupture de causalité)과 맞바꿔서, 이 단절에 올라타 이것은 실현된다(AO, pp.452/()299)

 

자본주의의 가속에 의한 욕망의 해방이야말로 최종적으로 인과관계의 단절”, 사회적 재생산의 인과관계의 단절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리비도의 무의식적 혁명적 절단”, 즉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변용이 무의식적 절단으로 불릴까? 그것은 이 절단전의식적 혁명”, 즉 계급과 이익 수준에서의 혁명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혁명”,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의 해방과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집단성의 형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각주:27] 예속 집단에서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은 단순히 계급의 이익에 의해서는 발생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 집단의 구조는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이라는 바로 무의식의 수준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리라.

 

혁명적 잠재성이 어떻게 현동화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잠재성을 품은 전의식적인 인과성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어느 특정한 순간에서의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이다. 이것은 곧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즉 인과관계의 단절이며, 이 단절은 현실적인 것에 밀착하여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 극도로 다의적인 순간을 낳는다.(AO. pp.453-454/()301)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최종적으로 욕망의 흐름을 절대적 극한으로까지 가속시키고, 자본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예속 집단을 물어 찢으며, 그것을 주체 집단으로 변용시키는 무의식적 절단,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 극도로 다의적인 순간을 초래하는 것이다. 욕망의 역능이, 그리고 욕망의 역능에 의거한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도주선이, 사회적 재생산의 인과관계의 단절을, 사건을 생산한다. 사건의 생산은 자본주의의 가속화에 따른 욕망의 절대적 해방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에게 사건의 생산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욕망이라는 원인(스피노자적으로 말하면 내재원인’)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각주:28] 그리고 그때 사건의 생산은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 욕망의 분자적 다양성의 해방과 비위계적인 횡단적 집단성의 실현이다.[각주:29]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적 정치를, 단순히 사건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런 사건의 생산의 논리, 달리 말하면 예속 집단의 주체 집단으로의 변용이라는 전략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치바 마사야(千葉雅也)의 표현. 다음을 참조. 『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 河出書房新社, 2013. [김상운 옮김, 󰡔너무 움직이지마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 바다출판사, 2017년 근간 예정.] [본문으로]
  2. Alain Badiou, Deleuze : la clameur de l’être, Hachette, 1997, p.20. [본문으로]
  3. Slavoj Zizek, Organs without Bodies: Deleuze and Consequences, Routledge, 2004, p.20. [본문으로]
  4. 바디우파 철학자인 피터 홀워드도 바디우-지젝과 거의 같은 전략에 의거하며(혹은 그들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라) 들뢰즈 철학은 잠재적 창조행위의 철학이며 “세계의 변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cf. Peter Hallward, Out of This World: Deleuze and the Philosophy of Creation, Verso, 2006, [본문으로]
  5.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ai 68 n’a pas eu lieu», in Deux régimes de fous :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Minuit, 2003. [본문으로]
  6. Fra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lisme en politique)», in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sous la direction d’Erlc Alliez, Institut Synthélabo, 1998, p.347. [본문으로]
  7. Ibid., p.346. [본문으로]
  8.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13-14. [본문으로]
  9. Ibid., pp.13-14. “미셸 부르이에가 스토아학파의 사고를 빼어나게 재구성하여 말했듯이, ‘칼이 새로운 살을 자를 때, 전자의 물체는 후자의 물체 위에서 새로운 특성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속성을, 잘려진다는 속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 속성(attribut)은 어떤 실제적인 형질(qualité)도 지시하지 않는다. … 반대로 속성은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말하자면, 속성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다. … 이 존재양식은 이른바 극한에 있어서, 존재자의 표면에 있어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존재양식은 존재자의 본성을 바꾼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이 존재양식은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수동성은 능동을 겪은 물체적 본성을 상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양식은 그저 단순히, 성과이며, 존재자로는 분류되지 않는 효과이다. … 그때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으나 (스토아학파의 구별에서는) 기본적으로, 존재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한편으로 깊은 실제적인 존재자, 힘이 있으며, 다른 쪽에는 존재자의 표면 위에서 상연되고 끝도 없이 많은 비물체적 존재를 구성하는 사실의 면이 있다.” [본문으로]
  10. Michael Hardt / Antonio Negrl, Commonwealth,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pp.60-61. [본문으로]
  11. 에티엔 발리바르도 다음의 논고에서 바디우의 사건의 철학이 사건(에 대한 충실함)을 특권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cf. Etienne Balibar, «La philosophie et l’actualité : Au-delà de l’événement?», in Le moment philosophique des années 1960 en France. sous la direction de Patrice Maniglier, PUF, 2011. [본문으로]
  12.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p144. 또 이 점에 관해 들뢰즈, 바디우와의 관계를 포함해 네그리를 논한 다음의 중요한 작업에서 시사를 얻었다. 廣瀬純, 『アントニオ•ネグリ-革命の哲学』, 青土社, 2013년. [본문으로]
  13. ‘절단’은 데리다에서 유래하는 개념이며, 이 개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분석한다. ‘절단’ 개념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을 참조. Félix Guattari, «Machine et structure»,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essais d’anaylyse institutionnelle, Maspero, 1972 (rééd. Découverte, 2003). ; Félix Guattari, Écrits pour l’Anti-Œdipe, Lignes manifeste, 2004. [본문으로]
  14.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L’Anti-Œ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t.1, Minuit, 1972/73, p.382. 강조는 인용자. 이하 ‘AO’로 약칭하고 본문 속에 원서, 번역서 쪽수를 표기한다. [본문으로]
  15. 라캉에 의한 분열증 정의에 대해서는 세미나 3권 『정신병』(Jacques Lacan, Le séminaire, livre III : Les psychoses, 1955-1956, texte établi par Jacques-Alain Miller, Seuil, 1981을 참조.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의 ‘분열증’, ‘분열분석’ 개념의 형성에는 가타리의 역할이 크다. 이 점에 관해서는 추후 논의한다. [본문으로]
  16. Gilles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Minuit, 1967, pp.27-28. 이 점에 관한 자세한 것은 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김상운 옮김, 난장, 2장 참조. [본문으로]
  17. 다음도 참조. Félix Guattari, Ecrits pour l’Anti-Œdipe, pp.257—58, 384. ;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t. 2, Minuit, 1980, p.17. [본문으로]
  18. Jacques Lacan, «Subversion du sujet et dialectique de de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 in Ecrits. Seuil, 1966, p.819. [본문으로]
  19. 특히 다음을 참조. Félix Guattari, «Le groupe et la personne (bilan décousu) «Introduction à la psychothérapie institutionnelle»,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본문으로]
  20. Gilles Deleuze, «Préface», in Félix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p.VI. [본문으로]
  21. Sigmund Freud, Massenpsychologie und Ich Analyse, in Gesammelte Werke, Bd. 13, Fischer, 1999. [본문으로]
  22. “환상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론적 정신분석이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어디까지나 집단 환상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두 종류의 집단 환상이 있다고 한다면, 이 동일성이 두 개의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욕망기계가, 이것을 형성하는 거대한 군중적 총체에 있어서 파악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기계들이 이것을 형성하는 욕망의 기본적 힘들에 관계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집단 환상에서는 리비도가 현존의 사회적 장을, 그 가장 억제적인 형태도 포함해 투자할 수 있으며, 혹은 완전히 거꾸로, 리비도가 역투자를 발생시키고, 이 현존의 사회적 장에 혁명적 욕망의 접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AO, p.38/(上)64頁). 이하도 참조. Félix Guattari, «Le groupe et la personne (bilan décousu)», in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é. [본문으로]
  23. “오이디푸스는 집단에의 통합의 한 수단이며, 이것은 오이디푸스 자체를 재생산하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행시키기 위한 적용의 형태를 취하는 것도 있다면, 정비된 막다른 골목 속에 욕망을 봉쇄하는 신경증적 축적에 빠져드는 것도 있다. 그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예속 집단 속에서 개화하며, 여기서 기성 질서는 이 집단의 억제적 형태 자체 속에 투자된다. 따라서 예속 집단의 형태들이, 오이디푸스적 투영과 동일화에 의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바로 오이디푸스의 수많은 적용이 출발점의 집합으로서의 예속 집단의 규정들에 의존하며, 이것들의 리비도의 투자에 의존하고 있다”(AO, p.123/(上)199頁). [본문으로]
  24. 자본주의에 관한 다음의 서술은 아래의 맑스의 서술을 토대로 한 것이다.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순환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한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이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동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운동은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Karl Marx, Das Kapital, in Marx-Engels Werke, Bd. 23, Dietz, 1962, S.167 ; AO, p.296에서 인용).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이러한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수단은 이 한계를 다시 새롭게, 게다가 더욱 막강한 규모로 자신에게 가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다”(Karl Marx, Das Kapital, in Marx-Engels Werke, Bd. 25, Dietz, 1964, S.260 ; AO, p.274, n.82에서 인용. [본문으로]
  25.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다음에서 상술했다. 『新自由主義と権力-フーコーから現在性の哲学へ』人文書院、2009년. [사토 요시유키, 󰡔신자유주의와 권력󰡕, 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본문으로]
  26. cf. Jacques Lacan, «Subversion du sujet et dialectique du dé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in Ecrits, p.800. [본문으로]
  27. “리비도가 새로운 신체에 결부될 때조차, 또한 전의식의 관점에서 보고, 실제로 혁명적인 목표나 종합에 대응하는 새로운 권력에 결부될 때조차도, 무의식적인 리비도 투자 자체가 혁명적인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똑같은 절단이, 무의식의 욕망의 차원과 전의식의 이익의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전의식적 혁명은 사회적 생산의 새로운 체제에 관련되는데, 이 체제는 새로운 목표와 이익을 창조하고 분배하고 만족시킨다. 그런데 무의식적 혁명은 단순히 그런 변화를 권력 형태로서 조건짓는 사회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체에서의 욕망적 생산의 체제에, 즉 기관 없는 신체 위에서 전복된 권력으로서의 욕망적 생산 체제에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흐름과 분열의 똑같은 상태가 아니다. 전의식적 혁명의 경우 절단은 두 개의 사회체 사이에 존재하며, 혁명적 사회체는 새로운 코드나 이익의 새로운 공리계의 안에 욕망의 흐름을 도입하는 능력에 의해 평가된다. 무의식적 혁명의 경우 절단은 사회체 자체 속에 있다. 이 사회체는 긍정적인 도주선을 따라 욕망의 흐름을 교통시키는 힘을 가지고, 또한 생산적 절단의 절단에 따라 욕망의 흐름을 다시 재단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AO, p.416/(下)244-245頁). [본문으로]
  28. 들뢰즈=가타리의 이러한 ‘내재 원인’에 기초한 ‘사건의 생산’의 전략을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경향성을 따른 형태로 현대적으로 부여해 보여준 것이 네그리=하트이다. 네그리=하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형상은 20세기 말의 수십년 동안이 공장노동에서 비물질노동으로 이행했다. 비물질적 노동이란 지식, 정보, 커뮤니케이션, 관계성, 정동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가리키며, 지식, 언어 코드, 정보를 산출하는 지적, 언어적 노동과 돌봄(care)에 의해 정동을 산출하는 정동노동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비물질적 노동에 있어서 다중은 갈수록 서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산출하면서 협동하며, 지금까지 생산되어 온 «공통적»인 지식, 정보, 관련성으로부터 새로운 지식, 정보, 관계성을 창출한다. 네그리=하트는 다중 사이의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협동을 산출하는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생산형태가, 다중이 수립해야 할 자기통치로서의 절대적 민주주의와 이것을 실현하는 혁명적 절단의 기초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른 비물질적 노동의 경향적 우위성이 다중 사이의 수평적이고 횡단적인 협동(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사건의 생산’의 원인)을 실현하며, 혁명적 절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중” 개념은 “주체집단” 개념을 스피노자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특히 다음을 참조. Micheal Hardt / Antonio Negri, Multitude :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Penguin Press, 2004. [본문으로]
  29. 이치다 요시히코(市田良彦)는 『혁명론 : 다중의 정치철학 서설(革命論──マルチチュードの政治哲学序説)』, 平凡社新書, 2012년에서 이런 “사건”을 푸코의 말을 사용해 “반사목혁명”이라고 불렀다. “반사목혁명”(révolution antipastorale)이란 사목권력에 의해 “전체적이면서도 개별적으로” ― 즉 개인화를 통해 전체화하는 혁명을 가리킨다. 푸코는 1977-78년 강의 『안전, 영토, 인구』에서 “반사목혁명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후의 “주체의 자기 통치”의 문제계에 있어서, 이런 혁명과 탈예속화의 가능성을 구상했다. cf. Michel Foucault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édition établie sous la direction de François Ewald et Alessandro Fontana, par Michel Senellart, Gallimard / Seuil, 284, p.153.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분류없음 2015.04.07 20:38


리스크인민전선 윤문.pdf

 

“Le front populaire du risque”, Multitudes, no8, mars-avril 2002

 

 

리스크 인민전선

http://www.multitudes.net/Le-front-populaire-du-risque/

 

 

이치다 요시히코, 김상운 옮김(2015년 4월 7일 공개)

 


[옮긴이] 여기 상자 안의 글은 이치다 요시히코가 『존재론적 정치 : 반란·주체화·계급투쟁』에 이 글을 스스로 번역하여 수록하면서 덧붙인 글이다.

*                           *                           *

『멀티튜드』 8호(2002년 3-4월호)에 게재된 논문이다. 오늘날의 일본 독자들에게는 배경 설명이 필요한 텍스트일 것이다. 2000년에 창간된 이 잡지는 “푸코 사후의 푸코”를 묻는 것을 하나의 기둥으로 삼고 있으며(창간호 첫 번째 특집이 “생명정치와 생명권력”이었다), 창간과 거의 비슷한 무렵에 프랑수아 에발드와 드니 케슬레가 『논쟁』에 발표한 공동 논문 「리스크와 정치의 결혼」은 『멀티튜드』의 편집위원회(나도 편집위원이었다)에 일종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에발드는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푸코의 조수였을 뿐 아니라, 푸코 사후에는 유언집행자의 한 명으로 유고의 관리를 담당하며, 단행본에 미수록된 텍스트나 대담의 수록과 출판에(일본어 번역, 『ミシェル・フーコー思考集成』, 총10권, 筑摩書房, 1998-2002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일본어 번역, 『ミシェル・フーコー講義集成』, 총13권, 기간행 8권, 筑摩書房, 2002년부터 간행 중)의 편찬에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케렌스, 다니엘 드페르(푸코의 사생활의 파트너로, 마찬가지로 유언집행인)와 마찬가지로, 그도 원래는 마오쩌뚱파의 활동가였다.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나 푸코가 주관한 세미나에는 피에르 로장발롱(노동운동사, 경제사상사)이나 로베르 바당테르(변호사)처럼 머잖아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에 깊이 관여하게 되고 ‘푸코 우파’로 불리게 되는 사람들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에발드는 그의 정치적 출신 때문에 이런 ‘우파’와의 거리를 뒀고, 그 때문에 자타가 공인하는 ‘푸코 좌파’에 위치했다. 특히 1986년에 출판된 그의 대작 『복지국가』는 만년의 푸코의 ‘생명정치’와 ‘통치성’의 문제설정을 계승하면서,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둘 다를 ‘좌파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반해 케슬레는 좌파운동에서부터 노동운동을 거쳐, 1998년에 창설된 프랑스 경단련(정식명칭은 ‘프랑스기업운동 MEDEF’ : ‘프랑스경제인연합회’의 후계 조직)의 이데올로그로 ‘전향’하고, 90년대 후반에 파탄의 기미를 강화했던 연금제도에 관한, 재계의 입장에서 제시된 개혁 플랜인 「사회재정초Refondation Sociale」의 실질적 작성자가 된다. 문제의 논문인 「리스크와 정치의 결혼」은 그 ‘전향 마오주의자’ 케슬레에게 ‘푸코 좌파’여야 할 에발드가 합류하고, 둘이서 ‘푸코 우파’보다 더 ‘오른쪽’으로 ‘푸코 사후의 푸코’의 방향타를 꺾었다고 『멀티튜드』의 편집위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 때문에 급하게 ‘에발드-케슬레 문제’를 다루는 특집이 기획됐는데, 이것은 4호(2001년 3월)에 「경영자들의 푸코」라는 두 번째 특집으로 실현됐다(마우리치오 라차라토 외 5명의 논문과 인터뷰를 수록). 그러나 당시 내 역량으로는 4호에 맞게 원고를 준비할 수 없었고, 만년의 푸코 ― 특히 거기에서의 자유주의의 애매함이라고도 볼 수 있는 취급방식 ― 에 관해서는 지면에서도 지속적으로 다뤄지게 됐기 때문에, 뒤늦게야 완성된 졸고는 독자적인 논고로, 이른바 4호의 연속으로서 8호에 게재됐다.

내 눈에는 당시 프랑스, 특히 좌파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경제학’이 너무도 등한시되어 왔다고 비춰졌다. 4호 특집도 ‘(신)푸코 우파’에 대한 ‘철학’을 경유한 ‘정치적’ 비판에 머물렀다고 생각하고, 그 중에서는 유일하게 ‘경제학’적이었던 앙토넬라 코르사니의 논문도 푸코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임노동의 변용을 다뤘다. [프랑스처럼] ‘철학’에 경도된 ‘정치’와 실용주의적 정책논쟁으로 양극 분해되기 쉬운 지적 풍토 속에서 에발드 등은 ‘경제학’에 면역이 없기 때문에 ‘최신의 금융공학’에 감염된 것은 아닐까라고, 좌파사상이 ‘경제학’에서 시작된 나라에서 온 내게는 생각됐다. 나아가 ‘사회학’이라고 할 때, 부르디외라는 프랑스인의 ‘상식’에도 의문을 느꼈다. 이 상대적으로 새로운 학에 대해 일반적으로 어떤 ‘사상적’ 태도를 갖고 임할 것인가와는 다른 차원에서, 독일이나 영국에서 이 학문이 갖고 있는 현실적 영향력에 관해 프랑스인 좌파는 관심을 갖고 살피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경제학’과 ‘사회학’에 대해 내가 어설프게 안다는 점을 승인하면서도, 이것들과 푸코, 나아가 들뢰즈-가타리를 링크시키는 소재로서도 ‘에발드-케슬레 문제’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리스크’론이나 ‘금융공학’은 모두, 이 원고가 집필된 후의 세상에서는 거의 상식이 되어버렸다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요즘 독자들 중에는 ‘뭘 쫑알대며 새삼 해설을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조차도 이 글을 번역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읽어보자,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아직 ‘신경제(new economy)’의 가면이 벗겨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제’는 불황을 최종적으로 극복한 것이 아니냐고 그럴싸하게 속삭여지곤 했다. 일본에서 나카타니 이와오가 신자유주의 옹호자에서 비판자로 ‘전회’한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 2008년이다. 신자유주의의 영광을 체현하는 듯했던 ‘신경제’라는 말은 오늘날 경제논단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를 지탱했던 ‘금융공학’은 몇 가지 파탄극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원고를 집필하던 시점에서는 여전히 ‘혁신’의 빛깔을 내뿜고 있었다. 조지 소로스가 꾸몄다고 말해지기도 했던 1997년의 아시아외환위기 등은 오히려 이 신기술의 힘을 과시하는 결과가 됐을 정도다. 에발드와 케슬레의 리스크론을 통한 ‘사회재정초’의 시도는 틀림없이 ‘신경제’와 ‘금융공학’이 좌파에까지 침투했다는 것의 역사적 증언이다.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혹여 이것은 ‘좌파의 입장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그들은 (적어도 에발드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보면, 이 글은 2008년 말에 내가 『멀티튜드』 편집위원직을 사임하게끔 운명지었다. 위원회 자체가 분열했기 때문에 사임한 것이기도 했지만, 여기서 쓴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나는 편집위원회의 주류파 노선을 수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과 ‘그린 뉴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주류파는 “금융기술의 멀티튜드적 사용”이 가능하다고 봤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고까지 말하기 시작했는데(자세한 것은 이 책에 수록된 2013년의 논문 「우리는 모두 네그리주의자이다」를 참조 바란다), 내게 이들의 입장은 ‘에발드-케슬레’를 약간 수선한 것에 지나지 않는 듯 보였다.


*             *               *

프랑수아 에발드는 드니 케슬레와 함께, 복지국가의 ‘찌르는 듯한 위기lancinante crise’를 재차 확인한다.1) 에발드에게 이 위기의 시대를 특징짓는 근본적인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그가 보기에 복지국가는 왜, 그리고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통제하는(control) ― 그 ‘주체’를 생명정치적으로 생산하면서 ― 능력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을 잃은 것일까? ‘사회재정초’ 프로그램은 법과 국가적 보호를, 경영자와 조합의 계약으로, 그리고 이윤의 원리로 대체하려고 한다.2) 도대체 사회의 어떤 근본적 변화가 예전에는 ‘푸코 좌파로 여겨졌던’3) 프랑수아 에발드가 경영자들과 맺는 동맹을 정당화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리스크이다. 우리 시대의 역사적 새로움을 표지하는 것은 리스크의 질과 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리스크, 리스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리스크는 더 이상 18-19세기, 나아가 20세기의 것과도 같지 않다.”4) 이런 객관적 변화 이상으로 주체적 요인의 진화도 간파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모든 개인적·집단적 사건들을 실제로 리스크로 사고한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새로움을 구성한다.”5) 요컨대, “사람들은 리스크가 늘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것은 새로운 리스크가 (객관적으로) 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모든 사건을 리스크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데서도 유래한다.”6) 이리하여 오늘날에는 “정치는 리스크라는 기호 아래에 놓여 있다.”7)

그러나 『복지국가』에서 에발드가 한 분석은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줬기에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그는 이미 1986년이라는 시점에서 복지국가를 리스크라는 똑같은 개념에 의해 정의했다.8) 그 논의에 따르면, 19세기의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최종 심급에서는 리스크관리의 분과학문으로서 구상됐으며, 복지국가의 패러다임을 이루는 앎[지식]으로 간주됐다. 이것의 근거는, 『복지국가』의 2장 제목이 「리크스에 관해」였다는 점이다. 복지국가는 정치의 목표로서의 리스크로부터 생겨난 것이자, 이를 관리하는 고유한 방식과 더불어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까 리스크 자체는 복지국가에 완전히 미지의 것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복지국가에 외적인 것으로서의 리스크가 침투되는 사태로 파악할 수는 없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위기는 복지국가 내부에서, 복지국가 자체에 의해 산출된다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리스크를 문제화하는 것은 복지국가이며, 그렇기에 리스크를 증식시켰던 것도 복지국가이다.

따라서 「리스크와 정치의 결혼」에서 프랑수아 에발드와 드니 케슬레가 다음과 같이 적으면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사실일 것이다.

프랑수아 에발드와 드니 케슬레가 다음과 같이 적음으로써 말하고 있는 것도 이 사실일 것이다. “복지국가의 야심은 개인들의 모든 리스크를 기업활동(entreprises)으로서 책임을 지는 것에 있기 때문에, 동시에 리스크의 적절한 거버넌스를 스스로 포기하게 됐다. 이것이 복지국가의 모순이다.”9) 하지만 이 경우에 우리는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즉, 우리가 오늘날 목격하고 있는 것은 근본적인 새로움의 탄생이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종언이며, 그것도 처음부터 짜여지고 계획된 종언이다. 리스크라는 문제설정에 의존해서는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리스크와 정치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은 헛수고다.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은 둘의 결혼생활이다. 국가가 아니라 기업이 이 결혼을 축하하더라도, 이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프랑수아 에발드에게 온갖 애매함이 고유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스크를 문제화하는 동시대적이고 범유럽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에서 『복지국가』가 처음 출판됐던 1986년과 같은 해에 독일에서는 울리히 벡이 『리스크사회』를 발표했다.10) 오늘날 이 책은 독일과 영국 등에서 생태론자들의 기본서가 됐다. 이 두 권의 책은 서로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로부터 7년 후 벡은 『복지국가』의 독일어 번역본11)에 서문을 썼다. 1991년에는 니콜라스 루만이 『리스크사회학』12)을 냈고, 94년에는 토니 블레어의 브레인 중 한 명인 앤서니 기든스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 급진정치의 미래』13)를 출판한다. 에발드와 케슬레는 기든스의 책에 대해 이렇게 짚는다. 이 책에서 리스크 개념은 “포괄적인 정치철학을 구성하며, 오늘날의 후기근대 혹은 포스트근대 시대에서 …정치를 재고하는 방법을 구성한다.”14) 아무튼 또 같은 해에 울리히 벡과 앤서니 기든스는 스콧 래쉬와 함께 『성찰적 근대화』15)를 공저했다. 이런 이론-정치적 정세 안에서 약 15년에 걸쳐 일종의 리스크인민전선(front populaire du risque)이 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각자의 이론적-정치적 입장 차이를 넘어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벌이기 위해 리스크 개념으로 무장을 하는 인민전선 말이다. ‘포스트모더니티’를 제창하지 않은 채 현재의 상황을 ‘비판적인 방식으로’ 명명·소묘하는 인민전선. 에발드와 케슬레에 따르면,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새로운 중도’나 ‘제3의 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거나 이를 위한 길을 낼 수 있는 인민전선 말이다.16)

이 인민전선은 아직 공통의 정치프로그램을 명확하게 정하지 못했으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3명의 주역(벡, 루만, 에발드)은 공통 프로그램의 실제적 정식화를 저해할 수 있는 이론적 차이를 보여줬다. 울리히 벡에게 리스크는 거의 언제나 객관적인 것이다. 즉, 어떤 사건이 리스크가 되는 것은 리스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설령 손해가 실현되기 전이라 해도, 그 누구도 잠재적 손해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17) 따라서 손해의 실현을 막아야 할 시스템의 약점도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며, 체르노빌 이후에는 특히 그렇다.  

그런데 리스크의 객관성이라는 이 테제가 지닌 겉보기의 자명함은 리스크에 대한 루만식의 개념파악과 대결시키면 사라져버리고 의심스럽게 보인다. 물론 루만의 것도 벡의 눈에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비친다.18) 루만은 리스크를 자신이 말하는 ‘오토포이에시스적(autopoiétique)’, 즉 ‘자기조직화하는’ 과정 안에 삽입시킨다. 루만에게 리스크는 보편적 과정에 내재하는 것이다. 리스크는 일차적으로는 (정치적, 경제적, 심지어 물리적인) 결정들의 불가피한 우발성에 의해 근본적으로 생산되며, 이어서 이차적으로는 ‘불투명’한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생산된다.19)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이 작동하고 있는 한, 루만 식의 리스크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주체적 불확실성과 분리 불가능하다. 설령 이 불확실성 자체가 양자역학이 가정하듯이 ‘객관적’ 불확실성에 기초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루만은 언제나 자신의 구성주의적(constructiviste) 입장을 견지한다. 즉, 리스크는 사회나 집단적 주체에 의해 그리고 이것들 속에서 ‘객체’로서 구성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프랑스의 리스크 이론가인 에발드는 독일의 사회학자인 루만에게 가까워진다. 리스크를 현대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라고 부르는 에발드20)도 리스크를 객관성과 주관성(주체성)의 구별 바로 직전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실제로 에발드의 논증은 리스크의 두 측면(객체적이고 주체적)을 강조한다.21)

그러나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에발드와 루만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분기(bifurcation)도 시작된다. 루만이 리스크에 고유한 불확실성 안에서 계산 불가능성의 한 형태를 보고, 그 결과 현대적 리스크의 본질을 경제적 계산의 장소인 시장과 법적 계산의 장소인 규범이라는 이 두 가지의 바깥에 위치시키는 반면,22) 에발드는 똑같은 불확실성을 수학적 확률의 객관성에 관한 역사적 논쟁을 상기시키는 항들에 입각해 분석한다. 즉, 리스크/확률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가, 아니면 불완전한 정보 내지 인간적 인식의 본질적 결함(incompétence)을 가리키는가? 『복지국가』 이래, 에발드에게 리스크는 확률과 마찬가지로 리스크에 대한 계산과 한 쌍을 이룬다. 리스크에 대한 계산은 객체적인 것과 주체적인 것을 넘어선 곳에서 실행된다. 다양한 리스크는 계산 기법들에 의해 감지되고 발견되고 파악된다. 나아가 리스크를 에피스테메로 간주하거나 만드는 것은 확률의 계산을 전제하는 동시에 이를 촉진한다.23) 반면, 리스크에 대한 루만의 파악에서는 사고에 따른 지출(마이너스 이윤)은 미리 계산될 수 없는 것이며, 그 법적 책임도 때로는 명확하게 규명하기 힘들며, 그 때문에 NPO나 시민들의 사회운동을 활용할 수 있는 정치적 전략이 무엇보다 요청된다. 이것에 따르면, 리스크 부담은 ‘경제적’이지도 ‘법적’이지도 않은 ‘사회적’ 논리에 의해 분담되어야 한다. 리스크 개념은 이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고/창출하거나 확장하는 데 복무할 것이다.24) 이와 반대로 ‘사회재정초’ 프로그램은 리스크가 어디까지나 리스크 계산과 한 쌍을 이룬다고 가정한다. 이 프로그램은 사실상 리스크를 계산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누구든 이용할 수 있는 계산 기술이 있기만 하다면,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국가를 특권시하거나 특별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한다.


불확실성을 앞에 두고 결정을 내리고 선택해야만 할 때, 나아가 각자가 증권들의 가치에 대해 각각의 사례별로 태도를 표시해야 할 때, 하나의 분과학문이 특별한 지위를 뽐낸다. 경제학이다. … 경제학의 야망은 리스크 세계의 한복판에서, 가치의 일반이론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정의 이론에서 출발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 불확실성이 있는 곳에, 증권 가격[증권들의 가치]은 리스크에 의존한다. 근대의 에피스테메가 리스크의 에피스테메이라고 하는 사실은 경제학을 인문과학들 중 지배적인 분과학문이 되도록 이끈다.25)


에발드와 케슬레가 여기서 말하는 경제학은 무엇을 가리킬까? 리스크의 시대에 ‘지배적’인 앎인 이 경제학은 무엇을 하는 앎일까? 여하튼 독자는 한 가지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대해 얘기하지만, 현대에 대해 얘기하지만, 나아가 복지국가가 쇠퇴로 향하고 있는 20세기 중반에 대해 얘기하지만, 에발드에게 경제학은 에피스테메 전체에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앎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결코 잃지 않는다. 『복지국가』에서 그는 자유주의자의 경제학, 특히 보험(리스크 계산)에 관한 이들의 논의가 복지국가 에피스테메의 형성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는 J. 핼퍼린(J. Halpérin)을 인용하면서, 보험의 탄생을 자본주의 자체의 탄생과 연결시켰다.


“보험의 첫 번째 형태가 해상보험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봉건제의 엄격한 뼈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유일한 영역이 바다였던 것이다. 봉건적 세계의 기초는 본질적으로 토지였다. [그러나] 바다는 사회적·정치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났다. 바다는 그 어떤 국가나 정부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바다보다 봉건적이지 않은 것은 없었다.”26)


그러니까 에발드는 “보험은 자본의 딸이다”27)라고 여긴다. “정치가 리스크라는 기호 아래에 놓여 있는” 한, 다시 말해 ‘리스크의 테크놀로지’가 요청되고 개발되는 한, 에발드에게 경제학은 항상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특권화된 앎인 채로 머문다. 설령 복지국가가 후퇴하고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형성하는 힘을 리스크 자체에 넘겨줬다고 해도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어떤 경제학인가?’라는 물음을 더욱 더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복지국가』에서는 19세기의 경제학이 면밀하고 상세하게 분석되고 있는 반면, 케슬레와 공저한 논문에서는 경제학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복지국가의 한복판에 도입된 경제학은, 복지국가의 위기를 넘어서 살아남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경단련의 2인자인 케슬레와의 공저 논문에서가 아니라, 미셸 비슈의 『생명의 옵션 : 보험의 기초이론』28)에 에발드가 붙인 서문에서 이미 주어져 있다. 에발드에게 비슈는 “파스칼, 프라이스, 모건 이후, 커다란 혁신이 뒤따른 영역인 생명보험의 혁신자이다.”29) 그 이유는 결국, 비슈가 “금융리스크 커버에 관한 가장 최근의 기법들로부터 ‘옵션’ 개념을 빌려온 것”에 있다. “이런 기법들을 보험계약에 도입함으로써 그는 보험계약을 매우 유연하게 만든 동시에 멋지게 세련된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맞춤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30) “금융리스크의 커버에 관한 가장 최근의 기법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잘 알 것이다. 그것은 1997년에 두 명의 미국인인 M. 숄즈와 R. 머튼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안겨줬던 ‘기법들(les techniques)’이다. 에발드에게 현대의 ‘지배적 학문’의 자격, 리스크의 에피스테메에 있어서 패러다임적 앎의 자격을 지닌 경제학이란 바로 금융 ‘파생’ 상품의 적정 가격 이론에 다름 아니었다. 미셸 비슈가 ‘혁신자(inventeur)’인 까닭은 금융 ‘옵션’(특히 파생상품)을 보험수리적(actuariel) 개념 ― ‘삶의 옵션’ ― 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옵션거래의 경제학이 있게 되면, 복지국가는 머지않아 실효성을 잃을 것이다! 복지국가의 궁극적 목표는 주체들을 생명정치적으로 생산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보험이 맞춤형이게 된다면 주체들을 생산하는 심급은 불필요해지며, 현대의 주체는 스스로 구성적이게 될 수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옵션거래(즉 보험수리적 기법들)의 규칙들이 “항상 특이한 삶의 기획에 도움을 주는 정교한 도구”31)가 되기 때문이다. 옵션거래의 경제학이라는 무기로 치장한 생명보험은 과연 푸코 말년의 꿈, 푸코의 그리스적 혹은 로마적 유토피아를 실현시켜 줄까?

그렇지 않다. 1998년에 일어난 LTCM(Long Term Capital Management)의 파탄이라는 사건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LTCM은 이 두 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자기네 이론을 실천에 옮겨서 투자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제공한 헤지펀드이다.32) LTCM의 운명은 옵션거래의 경제학이 지닌 극단적인 양의성이나 역설을 보여줬다. 그것은 “금융리스크를 커버하는 기술”이 리스크를 줄이기는커녕 늘인다는 것, 가장 세련된 보험기계가 자신의 작동조차 통제할 수 없다는 것, 울트라모던한(ultra-modernes) 리스크와 보험이 ‘신경제(New Economy)’의 여전히 불안정한(précaire) 성격을 그대로 구현한다는 것을 실증한 것이다. 신경제를 둘러싼 담론들의 유토피아적 낙관주의를 단숨에 날려버린 이 파탄극을 보면, 에발드가 한 가지 점에서만은 단연코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험은 자본의 딸이다. 현대에서도 변함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에서.

실제로 숄즈, 머튼, 블랙이 증명했던 것은 파생상품(‘풋put’옵션과 ‘콜call’옵션)이 증권시장의 가격변동에 대한(contre) 보험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증권시장에서의 상품이면서 말이다. 완전시장에서는 모든 증권리스크와 금융리스크를 상쇄해주는 ‘파생상품’과 ‘오리지널 상품’의 조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수학 공식은 시장의 상태가 어떻게 바뀌든 (파생상품과 오리지널 상품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의 가격valeur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파생상품의 적정가격prix을 가르쳐준다.33) 바꿔 말하면, 시장이 완전하다면, 거기서는 그 어떤 리스크도 없으며(곧, 모든 리스크에 대해 모종의 보험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리스크 없이는 그 누구도 이자율을 초과하는 이득profit을 얻을 수 없다. ‘가장 최근의 기법들’이 매우 고전적인 경제원칙을 재확인한 셈이다. 즉, 완전시장에는 재정(裁定, arbitrage)의 기회 ― 공짜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 ― 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투기게임은 결국 앞의 판에서 잃은 판돈의 갑절을 걸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딸 경우 손해는 보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때 딴 돈의 총액은 처음부터 내기에 걸었던 것과 같은 액수일 뿐이다. “뿌린 만큼 거두는 법이다(on ne récolte que ce qu’on a semé).”34)

그렇지만 주지하듯이, 이로부터 이 ‘기법들’에 특유한 역설이 생겨난다. 숄즈, 블랙, 머튼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 기법을, 이들의 공식이 문자 그대로 말하고 있는 바를 시장에서 관찰하거나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현실의 시장이 완전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정보가 부분적이고 비대칭적인 한, ‘적정’ 가격과 현실의 가격 사이에는 괴리(décalage)가 있으며, 이 괴리가 재정(arbitrage)의 기회를 낳을 수 있다. 모든 투자가들은 공식에서 이런 메시지를 읽어냈다. 그리고 실제로 괴리(déviation, 편차)를 발견하기 위해 공식을 사용하고, 괴리(편차)를 돈 낳는 기계로 바꾸려고 했다. ‘가장 최근의 기법들’은 리스크 없는 이득(편익), 실물 ‘자산’이 없는 가운데에도 이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이라고 간주됐다. 엄밀하게 생각하면, 괴리(편차)는 리스크를 구성한다. 리스크 없는 상태는 괴리(편차)가 없다는 것에서만 비로소 보증된다. 그러나 이 기법들은 이와 동시에 이 리스크를 커버할 수단도 제공한다. ‘지렛대 원리(effet de levier)’를 실현하는 응용법을 통해서 말이다.35) 이런 응용 덕분에, 자기 지갑에 갖고 있는 것보다 몇 배나 되는 돈을 내기에 걸 수 있게 됐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가르친 것은 ‘빌린다’는 것이 반드시 위험(danger)의 증대와 합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리하여 ‘적정’ 가격(valeur)의 이론은 ‘상대’ 가격(valeur)의 이론으로서 기능하게 됐다. LTCM은 리스크도 없고 재정(裁定) 기회도 없는 상태로부터 괴리된 가격을 그렇게 불렀다.

“새로운 정보 커뮤니케이션 기술(NTIC)”에 힘입어, 이 이론은 ‘리얼’하게 전지구적 금융시장을 만들어냈다. 시장의 실체는 거의 실시간으로 그 어떤 국경도 넘어서는 거대 자본의 이동이지만, 자본의 상당한 비율은 ‘가상적인(virtual)’ 가치 밖에는 갖고 있지 않다. 이 이론은 보험이나 리스크 관리의 기법의 이론이면서도, 현실에서는 보험의 ‘지양(Aufhebung)’ ― 자기부정이자 모순들의 공존이라는 의미에서 ― 초래했다. 1998년의 러시아 국채폭락과 LTCM 왕국의 붕괴는 바로 이것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 당시 미국 FRB 의장이었던 앨런 그리스펀과 뉴욕에 소재한 미국연방은행에 의한 국가적 개입이라는 ‘지양’ 말이다. 지나치게 세련된 보험기법들은 마침내 현실의 가치를 파괴하는 기술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프랑수아 에발드는 잘못한 것이 아니다. “리스크는 가치들의 가치[증권가격]를 측정하는 방식이다.”36) 즉, 리스크는 그 자체로서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개물들(entités) 사이에 화폐적 척도를 들여오는 것으로서 등장한다. “그것[리스크]은 오늘날의 문화에서 도덕과 인식과 정치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경위를 이룬다. 리스크는 이런 상이한 영역에서 생기면서, 그것들을 끊임없이 서로 결부짓는다.”37) “실존의 리스크(risque de l’existence)”라는 에발드의 개념은 상이한 유형의 리스크 ― 생태적 리스크, 기술적 리스크, 윤리적 리스크 등등 ― 을 ‘측정’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캘리포니아 주에는 ‘리스크 비교 프로젝트’라는 주정부의 사업이 있는데, 여기서는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들이 건강, 생태, 안전과 관련된 상이한 유형의 리스크를 평가하고, ‘시민’의 관점에서 등급을 매긴다.38) 그러나 에발드는 상이한 장들을 ‘측정하고’ ‘분절하는’ 것이 문제가 되자, 경제학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리스크에 기초를 둔 새로운 통치성이 현시되는 최초의 영역, 주요한 영역은 물론 경제학이다.”39) 금융 테크놀로지를 리스크를 다루는 테크놀로지로 여길 때, 사실 에발드에게는 잘못이 없다. 투자를 욕망하는 우리가 증권시장이나 금융시장에서 사야 할 종목valeurs을 찾고 있을 때, 각 증권의 ‘절대가치’(가격을 가리키는 LTCM 용어법)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IBM의 주식이 10프랑이고 ELF의 주식이 50프랑이라고 해도, 이런 ‘가치들’은 어떤 종목을 사야 할지에 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가치들’은 가치로서 비교 불가능하다. 색채의 파장(valeur)과 온도의 값(valeur)을 비교하는 것과도 같다. 두 개의 값이 장차 어떻게 변화할지는 불확실한 것이다. 모든 예측은 다소간 기대를 저버릴 수 있고, 그리하여 리스크는 항상 같다. 각각의 ‘가치’는 어떤 일정 시점에서 기업의 상태, 산업의 상태, 시장 전체의 상태를 그 나름대로 표현하며, 모든 가격 변동은 이런 상태들의 질적인 변화를 포함한다. 이런 변화의 총체가 시장의 미래를 구성한다. 각각의 변화는 환원 불가능하고 비교 불가능하며, 각 증권의 미래 가치로 표현되는 변화의 전체는 현 시점에서는 훨씬 더 불확실하다. 증권을 사려고 할 때에는 각자가 이런 상황에 있다. 엄청난 불확실성, 척도가 부재한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1997년의 노벨 경제학상이 두 사람에게 수여됐던 것은, 이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절대가치’의 ‘상대가치’를 결정하는 방식 말이다. 그렇게 이들의 정리(théorème)는 이용됐다. 이들의 정리 자체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유토피아 ― 누구에게도 재정(arbitrage)의 기회가 없으며, 공짜 이득은 존재하지 않는다 ― 를 재현할 뿐이다. 이들의 이론은 각각의 증권 가격을 마치 사용가치처럼 다루는, 가격의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천재성은 예측 자체를 포기한 결과 시장의 불확실성이나 질적 변화를 수학적 의미에서의 우발성으로 받아들인 것에 있다.40) 이 이론에 의해 양자역학적 기법을, 따라서 확률론을 투자에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절대)가치들의 (상대)가치는 시장이 분자의 우발적 운동을 위한 공간으로 간주된다는 조건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조건은 질적 변화와 그 불확실성을 양자역학적 운동으로 전환(convert)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현재와 미래의 질적 차이가 ‘평균값(chiffre moyen)’과 ‘편차값(valeur de déviation)’(변화의 격렬함을 표시하는 ‘급변동성volatilité’)에 의해 근사치로 측정할 수 있는 차이로 환원된다. 그러니까 상대가치란 시장에서 스톡되는(stocké) 시간을 재현할 뿐이다. 상대가치는 가격 변동의 스톡화(stockage)이며, 불확실성 자체를 스톡하는 테크놀로지이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그것은 리스크의 가치화이다. 상대가치는 현실의 가격이 얼마나 잠재적으로 ‘적정’ 수준을 빗나가 있는지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증권이 상대적으로 가치를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은 더 많은 리스크를 포함한다. 여기서 또 다시 매우 고전적인 원리를 재확인하게 된다. 즉, 하이리스크-하이리턴.

그러나 이미 봤듯이, 가치들의 가치에 관한 새로운 이론은 리스크를 커버하는 방식을 알려준다. 다양한 옵션, “옵션과 그 복제(파생상품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오리지널 증권)”로 이루어진 포트폴리오를 합성하는 방식이다. 이 이론은 바로 리스크와 보험의 이론이다. 그러나 리스크와 보험이라는 이 쌍은 현실에서는 안전장치라기보다는 포획장치, 즉 시간의 스톡화를 통해 자본에 초과이윤을 가져다주는 포획장치로서 작동한다.41) 질적이고 불확실한 차이를 스톡으로 변형하여 포획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이론을 이용하는 실천적 동기이다. 그리고 투자의 안전성이 아니라 초과이윤의 기회가 자본의 전지구화를 가속화했다. 세계금융시장은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동질적인 매끈한 공간 ― 좁은 지식에 의한 성장의 여지가 없는 공간 ― 이 아니라 시간적 차이나 불확실성이 여기저기에 스톡되는 홈 패인 공간(espace troué)이다. 가치들의 가치는 시장이라는 공간에 홈을 파는 데 불가결한 장치이다. 시장에 홈을 파는 한에서, 가치들의 가치는 ‘신경제’에 기여한다.42) 비교 불가능한 가치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교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가치들의 가치는 자본에 의한 시간 ― 질적 변화나 불확실성으로서의 시간 ― 의 독점을 실현한다. 자본은 새로운 착취 장치를 획득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새롭다. 보험의 역사에서도 새롭다. 항해의 리스크와 최종적으로는 토지에 기초한 보험의 관계를 보면 분명하듯이, 고전적 혹은 ‘규범적(normal)’ 보험은 리스크와 보험 사이에 외부적 관계를 가정한다. 그런데 금융 리스크를 금융적 수단에 의해 커버하려는 금융적 보험은 리스크와 보험을 같은 평면 위에 둔다. 일반적으로 리스크와 보험은 서로의 크기를 증대시키는 순환적 관계를 맺는다. 리스크가 늘면 보험금이 오르고, 보험은 ‘리스크를 떠맡을’ 능력을 키우며, 때로는 ‘모험’을 시도할 수 있게 해준다. 기업정신으로서의 자본주의의 정신은 보험을 이용하여 발달했으며 보험은 자본주의적 축적에 불가결했다. 에발드가 『복지 국가』에서 멋들어지게 서술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43) 리스크와 보험 사이의 외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한, 즉 보상금이 리스크가 생겨나는 장의 외부에서 들여오는 한, 손해는 최종적으로 보험업자의 회계에 기재된다. 보상금이 늘 손해를 만회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보험업자의 파산이 연쇄적 파산을 일으키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보험 덕택에 손실(damage)의 전파가 차단된다면, 그리고 손해가 보험업자와 보험가입자의 관계 속에 봉쇄된다면, 손해는 사회에서 잘게 쪼개져 부담될 수밖에 없다. 그때도 외부적 관계에 의해 보호된 보험은 붕괴 현상의 확대에 제한을 가할 것이다. 거기서 외부성은 이 제한의 장치로서 존재한다. 이와 반대로 금융적 보험에서는 보험이 보험에 의해 커버되는 리스크에 내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양자는 똑같은 장 안에서 똑같은 재료로 이루어진 똑같은 수단을 통해 작용한다. 리스크와 보험 사이에는 그 어떤 물질적 구별도 없다. 모든 ‘가치=증권’은 정도가 높고 낮을 뿐인 리스크를 안고 있다. 보험 때문에 선택되는 ‘가치=증권’은 그 자체로, 자신이 커버할 리스크와 똑같은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다. 보험이란 그저 다른 리스크보다 작은 리스크를 뜻할 뿐이다. 현대의 은행가들은 사실상 자기네가 파는 것은 ‘돈’이 아니라 리스크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렛대의 원리’는 모든 리스크를 증대시킬 수 있으며, 이때에도 리스크와 보험은 ‘제로섬’ 게임을 구성한다. 또 금융 이론이 증명하는 바에 따르면, 증권투자의 수법이란 요컨대 앞 판에서 잃은 판돈의 갑절을 거는 것이며, 최종적으로 ‘뿌린 만큼 거두기’ 위해서도, 이를 확실하게 하려면 주머니에 무한한 ‘종자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네치아의 카지노에서 룰렛 게임을 즐기던 카사노바는 파산했다. 요컨대, 모든 것이 정도차가 있는 리스크라고 정의되는 금융시장에서 리스크의 전체(totalité)는 금융기법에 의해 결코 커버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손해가 발생했을 때는 이를 만회해야 한다. 무엇에 의해? 금융 리스크에 대한 최종적 보험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우리를 즉각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나아가게 한다. 단기자본 시장에서는 모든 종류의 부채에 대해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가장 유효한 담보는 결국 미국 국채이다. 미국 국채는 달러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 화폐인 달러는 이자를 전혀 낳지 않지만(따라서 좁은 의미의 투자 리스크는 없다), 그래도 환리스크는 피할 수 없다. 반면, 국채는 일정한 이자를 보증하며, 이 보증의 확실함은 모든 동산이나 부동산보다 높다. LTCM의 파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오로지 국가만이 어떤 임계점(seuil critique)을 넘어서는 금융 리스크를 떠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투자 거품이 붕괴하자마자, 회수 불가능한 막대한 채권이 국가에 의해 청산됐다. 시장은 리스크 평가만 할 뿐이며, 바로 이 평가가 시장에 내적인 보험을 부분적으로 가능하게 하지만, 시장 전체는 국가를 욕망하고 있다. 국가에 의한 신용, 담보, 개입을 말이다. 맹렬한 속도로 이동하는 자본에게 최고의 유동성은 국가의 힘에 있다. 이 힘은 화폐보다 유동성이 높다. 자본의 현재적 탈영토화는 다양한 ‘가치들’이 그 닻을 내리는 장소로서의 국가를 재영토화하고 있다. 한 국가가 리스크를 커버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면, 그 규모를 바꿔야 하는데, 이것이 유로의 시도였던 게 아닐까?

국가에 대항하는 경영자와 노동자의 인민전선으로서의 ‘리스크 인민전선’은 마침내 국가에 의존하고 있는 자기를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때 의존하게 될 국가는 더 이상 복지국가가 아니다.



1) François Ewald et Denis Kessler, «Les noces du risque et de la politique», Le Débat, mars-avril, 2000, p.55.

2) François Ewald, «Le contrat contre la loi : entretien avec Tiennot Grumbach», Multitudes, no4, mars 2001.

3) Ibid., p.183.

4) Ewald et Kessler, op. cit., p.61.

5) Ibid.

6) Ibid.

7) Ibid., p.57.

8) François Ewald, L’État providence, Grasser, 1986.

9) Ewald et Kessler, op. cit., p.69.

10) Ulrich Beck, Die Risikogesellschaft, [울리히 벡, 『위험사회론』, 새물결, ] 한편, 프랑스어판은 La Société du risque : Sur la voie d’une autre modernité, Aubier, 2001.

11) François Ewald, Vorsorgestaat, traduit par Wolfram Bayer et Hermann Kocyba, Suhrkamp, 1993.

12) Nikolas Luhman, Soziologie des Risikos, Walter de Gruyter, 1991.

13) Anthony Giddens, Beyond Left and Right, The Future of Radical Politics, Polity Press, 1994.

14) Ewald et Kessler, op. cit., p.56.

15) Ulrich Beck, Anthony Giddens et Scott Lash, Reflexive Modernization, Polity Press, 1994. 여기서 ‘Reflexive’는 ‘재귀적’이라는 의미가 훨씬 강하고, 이 편이 이해를 더 쉽게 해줄 것이다.

16) Ewald et Kessler, op. cit., p.69.

17) 특히 벡의 다음 책을 참조. Ulrich Beck, Gegengift : Die organisierte Unverantivotlichkeit, Surhkamp, 1988.

18) Ibid., p.171sq.

19) Luhman, op. cit., pp.77, 153.

20) Ewald et Kessler, op. cit., p.68.

21) Ibid., p.61.

22) Niklas Luhman, «Risiko und Gefahr», Soziologische Aufklärung, Bd 5, Westdeutscher Verlag, 1990.

23) 에발드와 케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리스크의 값이 계산의 영역에 속할 때, 뛰어난 확률계산에 속할 때, 우리는 리스크의 세계에 진입한다”(Ewald et Kessler, op. cit., p.64.)

24) 리스크에 대한 루만의 이런 파악은 마찬가지로 신보수주의로 통하기도 한다. 시장과 법을 넘어선 곳에서, ‘전통’이나 중립적 조정자로서의 ‘전문가’의 능력에 희망을 거는 사고방식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루만과 롤즈에 대한 샹탈 무프의 비교도 참조. Chantal Mouffe, The Return of the Political, Ch.3, Verso 1993.

25) Ewald et Kessler, op. cit., p.68. [옮긴이] 프랑스어에서 ‘valeur des valeurs’는 ‘증권들의 가격’이라는 뜻도 있고, ‘가치들의 가치’라는 뜻도 있다.

26) Ewald, op. cit., p.182.

27) Ibid.

28) Michel Bisch, Les options de vie : les fondamentaux de l’assurance, Economica, 1999.

29) Ibid., p.VII.

30) Ibid., p.VIII.

31) Ibid.

32) LTCM의 역사에 관해서는 Nicholas Dunbar, Inventing Money, Wiley, 2000를 보라.

33) 숄즈와 머튼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안겨준 두 개의 논문을 보라. Fischer Black et Myron Sholes, “The pricing of Options and Corporate Liabilities,”, Journal of Portfolio Economy, May-June 1973, pp. 637-654 ; Robert C. Merton, “The Rational Theory of Option Pricing,” The Belle Journal, Spring 1973, pp. 141-183.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숄즈와 머틴이었지만, 대상이 됐던 업적은 오늘날 ‘블랙-숄즈(Black-Scholes)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식에 이름이 남아 있는 피셔 블랙(Fischer Black)이 상을 못 받았던 까닭은 수상년도인 1997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론에 관해서는 또한 다음을 보라. Peter Bernstein, Capital Ideas, The Free Press, 1992 ; Fischer Black, “How we came up with the option formula?,” Journal of Portfolio Management, Winter 1989.

34) Ewald et Kessler, op. cit., p.69. 물론, 에발드와 케슬레는 이 문구를 상이한 맥락 속에 기입한다. 거기서는 에피스테메로서의 리스크 전반이 문제가 된다. “뿌린 만큼 거두는 법이다. 리스크는 우리가 사건을 객체화하는 방식 안에도, 사건 자체 안에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적 모험을 리스크라는 이름으로 파악해 왔다. 우리는 에피스테메를 결정할 수는 없고, 에피스테메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35) ‘레버리지 효과’라고도 한다. 경제학에서 지렛대(레버리지) 원리 혹은 효과란 빚을 ‘지렛대’ 삼아 투자수익율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을 가리킨다. 낮은 금리로 돈을 끌어와 높은 수익률을 거둬 이익을 남기는 방법이다. ‘빚도 자산이다’라는 관념은 이와 연결되어 있다. 이런 ‘빚’ 혹은 ‘부채’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튼 이 기법은 VAR(Value at risk)로 불린다. LTCM은 VAR에 의거한 포괄적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갖고 있는데, 이를 리스크 집약자(Risk Aggregator)라고 부른다. Dunbar, op. cit., ch.8 참조.

36) Ewald et Kessler, op. cit., p.67.

37) Ibid.

38) 앤서니 기든스는 『제3의 길(The Third Way)』(Polity Press, 1998)에서 이 프로젝트를 자신의 ‘제3의 길’의 모델로 다루고 있다.

39) Ewald et Kessler, op. cit., p.70.

40) 정확하게는 ‘브라운 운동’ 혹은 ‘랜덤 워크(random walk)’로서.

41) ‘포획장치’라는 말은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ch.13, «Proposition XII : Capture»에 나온다. 뒤에 나오는 ‘매끈한 공간’, ‘다공공간’은 이 책의 14장에 나온다. 

42) 여기서 말하는 ‘신경제’는 들뢰즈-가타리가 특징짓는 자본주의 일반과의 관계에서 ‘새롭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주의 일반에는 ‘토지’, ‘노동’, ‘화폐’라는 세 개의 ‘포획장치’만 존재한다. Cf. op. cit., pp.549-555.


43) 나아가 에발드에 따르면, 보험은 인간을 자본으로 간주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점에 관해 에발드는 1986년에 출판된 『인간은 자본이다』라는 책을 인용한다. “아주 단순하다. 한 가족의 아버지가 행정이나 상업이나 산업에서 고용되어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직업이 그에게 연간 1만 프랑을 가져다준다고 하자. 연 5%로 계산하면, 1만 프랑이란 20만 프랑도 가져올 수입이다. 때문에 이 아버지는 20만 프랑의 자본을 대표하는 것이다.”(L’Etat providence, p.183).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