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9.04.28 14:45

 

 

 

고이즈 준이치로 인터뷰

총리대신이 ‘원자력발전 제로’를 호소하면

반대하는 세력은 없어진다1)

『원전 제로, 하려면 할 수 있다(原発ゼロ、やればできる)』(太田出版) 간행을 계기로

사토 요시유키(佐藤嘉幸, 츠쿠바대학 준교수, 철학·사상사 전공)

고이즈 준이치로 인터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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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지 곧 8년이 되어간다.

 후쿠시마 제1원전이 불러일으킨 원전 사고는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위기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원전 추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상황을 앞두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원전 제로, 하려면 할 수 있다』을 출판했다.

 ‘원전 추진’에서 ‘탈원전’으로, 왜 고이즈미 씨는 큰 전환을 했는가? 얘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사토 요시유키 씨에게 부탁했다.

(편집부) 

목차 

1회. 왜 탈원전으로 태도를 변경했는가 (2019년 2월 8일)

2회. 기가 막힌 ‘제5차 기본 에너지 계획’ (2019년 2월 9일)

3회. ‘원전 제로 기본 법안’과 자연 에너지로의 전환 (2019년 2월 9일)

4회. 핵폐기물 처리장을 놓고 (2019년 2월 10일)

5회. 탈원전과 자연 에너지로의 전환은 정치 주도로 (2019년 2월 11일)

 

1회. 왜 탈원전으로 태도를 변경했는가

사토 요시유키(이하 사토) : 『원전 제로, 하려면 할 수 있다』를 읽었습니다. 명쾌한 말투로 한번 읽으면 ‘원전 추진’ 등이라고는 아무에게도 절대로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책입니다. 게다가 매우 요점을 잘 정리한 글입니다. 첫째, “원전은 안전하고 비용이 싸고 깨끗한 에너지이다”라는 경제산업성의 설명이 완전히 잘못이라는 것을 하나씩 세밀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둘째, 원전 없이 전력이 감당할 수 있느냐라는 논점에 대해서도, 원전 대신 자연 에너지의 가능성을 당신이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원전 추진을 주장하는 자민당의 지지자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입니다. 보수를 자인하고, 전직 총리 경험자인 고이즈미 씨가 명확하게 탈원전을 주장한 이 책을 읽으면 원전 재가동이나 새로운 원전 건설 등은 더 이상 누구도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 감상을 갖게 됐습니다.

 우선 많은 분들이 고이즈미 씨에게 여쭙고 싶은 점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고이즈미 씨는 총리 재임 중에는 원전을 추진하는 입장이었다. “원전 추진은 옳다고 믿었습니다”라고 책에도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추진파가 말하는 것에 속고 있었다고 ‘강한 분노’를 느끼고 계십니다. 그리고 현재는 정치가에서 은퇴하고, 탈원전의 ‘시민활동’에 강하게 관여하고 계십니다. 전임 총리가 탈원전의 시민활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문 예입니다. 어째서 이토록 극적으로 태도를 바꾼 것입니까? 무엇이 첫 번째 계기가 된 것입니까? 역시 동일본 대지진 후의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의 충격이 컸다는 것인가요?

 

고이미즈 준이치로(이하 고이즈미) : 말씀하신 대로, 가장 컸던 것은 2011년 3월에 있었던 대지진입니다. 지진, 해일, 그리고 멜트다운. 그 사고의 상황을 연일 보다가, ‘원전=안전’이라는 신화가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원전 관련 책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읽어 봤다. 공부를 할수록, 이런 것은 일본에서 하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총리를 할 때, 왜 그렇게 단순한 것을 몰랐을까? 내 자신이 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물론 속는 쪽이 나쁘다. 다만 ‘잘못을 고치지 않고, 이것을 실수라고 한다. 잘못을 고치려면,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듯이, 잘못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반성하고 다시금 해나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것을 나도 믿고, ‘원전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전 따위는 절대로 계속 있어서는 안 된다. 속은 자신이 ‘틀렸다’고 목소리를 높여 말하니까, 그 쪽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 책을 썼다는 겁니다.

 

사토 :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는 더 큰 비극적 결과를 낳았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토호쿠[東北]부터 수도권까지, 인구로 따지면 5천만 명 정도가 피난해야 한다는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것을 인식한 후, 원전을 추진해서는 나라가 망해버리지 않느냐라는 위기감을 가졌다. 그렇게 생각해도 될까요?

 

고이즈미 : 그때 또 하나, 후쿠시마 제1원전의 원자로가 파괴되고 멜트 다운을 일으키고, 방사능이 확산되었다면, 반경 250킬로미터 권역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대피해야 했다. 거기에는 도쿄도 포함되며, 피난민의 수는 약 5천만 명이라고 예측된다. 그만큼 국민이 대피할 장소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무너진다. 그래서 원전이라는 것은 절대로 사고를 일으켜서는 안 되는 산업이다. 그런데 사고가 없는 과학기술은 없다. 언젠가는 사고가 일어난다. 원전의 경우, 일단 사고가 일어나면, 고향이, 나라가 없어진다. 그런 산업이니까, 절대로 해서는 안 뇐다. 그렇게 생각하고 떨쳐 일어섰다. 게다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지진, 해일, 화산 폭발, 일본은 여러 가지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매우 취약한 나라입니다. 인구도 밀집되어 있다. 그래서 일단 사고가 있으면, 매우 많은 피난민이 나온다.

 원전 사고가 있었을 때는 민주당 정권이었지만, 사고 이후, 정부에 원전 사고 조사·검증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위원장인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郎) 씨가 최종 보고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즉, 사고 없는 산업은 없다, 사고를 일으키지 않은 기술, 기계는 없다는 것이다.

 그때는 정부에 설치된 위원회와는 별도로 국회에서도 여야 만장일치로 사고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 위원장을 맡은 것이 도쿄대 명예교수인 쿠로카와 키요시(黒川清) 씨였다. 사고 이듬해에 나온 보고서를 읽고, 점점 더 원전은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쿠로카와 위원장과도 직접 만나서 들었다. “그건 천재(天災)였는가?” 쿠로카와 씨는 분명히 말했지. “천재가 아니다. 인재이다”고. 보고서에서도 그렇게 단언하고 있다. 원전 사고의 근원적인 원인은 감독, 규제하는 쪽인 경제산업성과 규제받는 쪽인 전력회사, 이 입장이 역전된 것에 있다. 경제산업성이 전력회사에 잡아먹힌 결과, 입장이 뒤바뀌어버렸다고 써져 있다. 그것은 신문에서도 별로 보도되지 않았다. 경제산업성은 완전히 전력회사의 포로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감독, 규제하는 입장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러고도 아직도 질리지도 않고 원전을 추진하려고 한다. 분하기 짝이 없다.

 

사토 : 바로 그 분노가 책에서도 전해집니다.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같은 가혹한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경제산업성과 아베 정권은 원전을 추진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사고가 주민과 환경에 준 커다란 영향을 전혀 돌보지 않고, 지금까지의 원전 추진 정책을 반성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회. 기가 막히는 ‘제5차 기본 에너지 계획’

고이즈미 : 사고로부터 벌써 8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작년 7월, 또 경제산업성이 기가 막히는 계획을 내놓았다. ‘제5차 기본 에너지 계획’은 2030년을 향해서, 전력원 구성비율의 목표 수치를 설정하고 있는데, 재생 가능한 에너지 22~24%, 원자력발전 20~22%, 화석연료 56%, 즉 향후에도 원전 에너지를 기간 전력원으로 유지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반성이 전혀 없다. 경제산업성은 전력회사의 안전성을 감독, 감시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잊고 있다. 이건 정말로 끔찍하다. 사고에 질리지도 않고, 반성도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원전에서 20~22%의 전력원을 유지해나간다는 태연하게 우기는 능청스러움, 뻔뻔함. 그 우수한 경제산업성 관료가 왜 이렇게 교만한가, 원전에 매달리는가? 도무지 모르겠네. 내게는 분노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사토 : 경제산업성은 2030년의 시점에서 20~22%의 전력원을 원전에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원전 재가동은 지지부진하고, 노후 원전의 폐로(廃炉)가 진행되어, 신규 원전의 건설도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이 계획은 ‘그림의 떡’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세계의 조류는 자연 에너지 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경제산업성의 계획에 의거하여 에너지 정책을 추진한다면, 세계에서 뒤쳐진다. 오히려 자연 에너지를 기간 전력원으로 삼고 분산형 에너지 생산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20세기적인, 이제는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전력원 생산의 사상, 즉 원전 같은 중앙집권적인 대규모 전원 생산 시스템에 의존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고이즈미 : 최근, 이것도 또한 심해서, 기가 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큐슈에서는 태양광 발전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원전은 필요 없게 되니까, 큐슈 전력은 태양광 발전을 ‘출력 억제’하기로(발전량이 과다해지는 날 중에 일시적으로 발전을 중단하기로) 했어. 게다가 그런 방침에 경제산업성도 편승해 버렸다. 보통 생각하면, 전기가 남아 돈다면, 원전을 멈춰야 하는데, 태양광 발전을 멈추다니 그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라고 말해야 할 것을, 반대로 한 거야.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경제산업성은 완전히 전력회사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사고조사위원회가 말하는 것 그 자체이다. 원전 사고에 대해 반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어이가 없을 수밖에.

 

사토 : 그런 의미에서 고이즈미 씨는 원전 사고 후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고, 원전에 대한 태도를 180도 전환했다. 하지만 현재의 자민당의 정치인들은 과연 어떨까요? 물론 탈원전의 생각을 갖고 있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실제로 표명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가령 고노 타로(河野太郎) 씨처럼 대신(大臣, 장관)에 임명되어 정부 안에 들어가면, 탈원전의 방침은 일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실제로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것만 아니라, 대부분의 자민당 정치인이 탈원전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요?

 

고이즈미 : 그건 내가 듣고 싶어. 왜 말하지 않을까? 전혀 모르겠다.

 

사토 : 정부는 원전 추진 노선을 여전히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베 정권은 원전 수출 계획을 추진하고 있지만, 원전이 매우 높은 비용이 들고 있는 현 상황도 있고, 모든 계획이 좌절되어버렸습니다. 올해 한 달 동안에는, 히타치에 의한 영국으로의 원전 수출 계획이 동결되었다고 발표되었습니다. 안전성의 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원전 추진 정책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 있다고 봐야 될까요?

 

고이즈미 : 사면초가라고 할 수 있지. 원전 수출은 했다 하면 모두 결딴난다.

 일본 이외의 많은 나라는 오히려 원전에서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자연 에너지를 확대한다는 방침이 있고, 원전을 그만두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전에는 원전이 비용이 싸다고 말들 했지만, 안전 대책을 생각하면, 다른 전력원보다 훨씬 비용이 든다. 세금도 쓴다. 전문가도, 사고 전에는 원전이 1기당 5천억 엔 정도면 될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그렇지 않다. 1조 엔을 넘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원전 업체도, 사실은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다.

 이에 덧붙여, CO2도 내지 않는 클린 에너지라고 말했던 것도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게 됐다. 따지고 보면, 우라늄 연료를 태울 때 나오는 폐기물을 버릴 곳이 없다. 처분장이 없는 것이다. CO2가 아니라, 더 위험한 폐기물을 내면서, 처분장이 없거든. 내가 잘 말하고 있어. 산업폐기물을 처분하는 산업폐기물 회사는 스스로 폐기물을 처분할 장소를 만들지 않는 한, 도도부현(都道府県, 지방자치단체)의 지사는 산업폐기물의 회사를 만들지 않고, 허가를 내리지 않는다. 산업폐기물에 비하면 원전의 쓰레기, 핵의 쓰레기는 훨씬 환경을 파괴할 위험성이 있다. 인류에 대한 영향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분장이 없다. 그것을 알면서 왜 원전은 추진하는가? 도무지 모르겠다.

 

사토 : 매우 무책임하네요.

 

고이즈미  : 무책임도 좋은 곳이 있다. 만일 내가 말하는 것이 틀렸다면, 질문하러 오면 좋다. 경세산업성의 설명은 전부 거짓말이다, 너희들 부끄럽지 않냐고 말하고 있는데, 항의하러 오면 좋겠다. 실제로 언제나 얘기하니까 질문하러 온다고 말한다. 적어도 한 명 정도는 그런 인간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정부도 경제산업성도 항의할 수 없다고 생각해.

 

사토 : 누구 하나 항의하러 오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말했던 것이 거짓말이라고 증명해버리고 있는 것 같네요. 그 위에서 원전 추진 정책을 진행하고 있다. 부조리의 극치입니다.

 

고이즈미 : 이런 짓을 하고서, 정말로 국민에게서 지지를 받는가.

 

 

3회. ‘원전 제로 기본 법안’과 자연 에너지로의 전환

사토 : 그런 가운데, 고이즈미 씨가 고문을 맡고 있는 원전 제로·자연 에너지 추진연맹(원자련, 原自連)에서는 작년 1월, 「원전 제로·자연 에너지 기본 법안」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내용입니다. 오히려 현 상황에 비추어보면, 이것밖에 없다는 최선의 방침을 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원전을 즉시 중지하고, 자연 에너지로 전환하는 다양한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정부가 지원하고 원전 입지 지자체의 산업 전환을 도모한다. 그런 방침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 기본법안에 야당이 편승하고, 미세하게 조정한 후 「원전 제로 기본 법안」으로서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이 법안은 곧 심의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법안을 심의하지 않는 현재의 정치 그 자체가 최대의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60~70%가 탈원전을 추진해나가야 한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실현하는 것은 바로 정치의 역할이 아닐까요?

 

고이즈미 : 자민당이 원전을 추진하고 있으니까, 국회에서는 심의되지 않겠지만, 심의할지 여부는 역시 정부가 원전을 제로로 하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데도 하지 않는다. 답답하다. 그리고 정치라는 것은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있다. 야당이 강해지면 정치도 탄탄해진다. 지금의 이런 상황을 보면, 야당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여당을 돕는 느낌이 들어요.

 

사토 : 중요한 야당이 분열되어 버리고, 결과적으로 여당에 있어서는 어부지리가 되고 있습니다.

 

고이즈미 : 여당을 제대로 하게 만드는 것은 야당의 역할이야. 물론 여당에서도 서로 비판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더 강하게 비판해야 하는 것은 야당일 것이다. 그곳이 잘 안 된다. 원래 심의한다, 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아니다. 뻔한 거잖아요. 원전 따위는 없어도, 자연 에너지로 전력은 충분하게 조달된다. ‘원전이 없었다면, 정전이 일어난다’, ‘하루 이틀이라면 모를까, 몇 개월이나 되는 정전에, 국민은 못 참는다’고 추진론자는 말했다. 그러나 원전이 없어도 정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이라는 나라는 증명했다. 사실이 증명했다.

 현재 원전 재가동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지만,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터지기 전에는 원전은 네다섯 기가 있었다. 그 후 가동하고 있는 것이 약 40기이다. 그래서 30%의 전원을 공급하고 있다. 그 사고 후, 2년 동안은 2기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 후 2년 동안은 완전히 제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전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원전 없이 잘 해나가는데, 왜 곧바로 하지 않는가? 독일은 일본의 사고를 보면서, 원전 제로 방침을 내놓았다. 이제 독일의 자연 에너지 비율은 일본이 당시 원전에서 공급했던 모든 전원에서 차지한 30%의 전력을 넘어섰다. 얼마동안은 원전이 남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연 에너지를 확대하고 있다. 모든 전원의 30%를 넘는 전원을 자연 에너지로 해낸다는 것을 증명했어. 그런 좋은 예가 있는데도, 왜 일본은 배우지 않는가.

 

사토 : 일본도 자연 에너지 30%라는 숫자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이즈미 : 가능합니다. 벌써 15%까지 되고 있으니까. 사고 전에는 2% 정도였다. 그것이 지금은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 등의 자연 에너지로 15% 정도의 전력이 만들어지고 있다. 원전이 공급하던 30%, 진짜로 하면 10년이 지나지 않고서도 달성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원전 없이 해낼 것이다.

 

사토 : 지금은 전력회사가 자연 에너지를 출력 억제까지 행해서, 무리하게 원전을 존속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출력 제한이 이루어질 정도로 많은 전기가 자연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향후에는 오히려 자연 에너지에야말로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고이즈미 : 원전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 에너지를 억제하고 있다. 단단히 미쳤다.

 

사토 : 얼마 전, 경단련(経団連)의 니카니시 히로아키(中西宏明) 회장(히타치제작소의 회장이기도 하다)이, 연두 정례 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8년이 지나고 있지만, 동일본의 원전은 재가동하고 있지 않다. 국민이 반대하는 것은 만들 수 없다. 모두가 반대하는 것을 에너지 업자나 히타치 같은 벤더(설비납품업자)가 무리하게 만드는 것은 민주국가가 아니다.” 나카니시 씨는 원전에 관해서, 국민적인 논의의 장을 만들어나가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나카니시 씨 자신은 원전 재가동 찬성이라는 입장입니다만, 국민적 논의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고이즈미 : 나카니시 씨의 발언은 좋지만, 그렇다면 우선은 히타치에서 원전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회사니까 당장 할 수 있다. “히타치는 원전을 그만두고 자연 에너지로 전환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쪽이 얘기가 빠르다. 경단연 회장의 발언이라면, 영향도 크다. 현재의 정부의 방침에 협력하는 것도 좋지만, 정부에 대해서 더 좋은 방향을 촉구하기 위해서, 경단련 회장과 원전 업체인 히타치가 ‘원전을 그만두었다’고 말하면, 더 큰 영향력이 있다.

 

사토 : 원전 업체가 ‘원전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자연 에너지로 전환한다’고 선언한다면, 경제계도 그 방향으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고이즈미 : 그것에 이어서 기업이 점점 나서게 된다.

 

사토 : 원전은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경제계로부터의 움직임이 나오는 것도 기대하고 싶습니다.

 

고이즈미 : 자연 에너지라는 것은 자기네 땅에서 생산한 것을 자기네 땅에서 소비하는 문제[자급자족의 문제, 地産地消の問題]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여야 공통된 향후의 과제이기도 하다. 큰 지역에 한 회사가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사고나 재해가 일어나도, 작은 지역 단위에서 전원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 자연 에너지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이야. 에너지 자급자족은 장래의 있어야 할 방향이며, 자연 에너지로의 전환은 그 방향을 향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일본은 자연 에너지가 풍부하다. 태양, 바람, 물, 지열도 이용할 수 있다. 세계에서도 드물게 보는 자연 에너지 대국이다. 자원 빈국이었던 일본이 앞으로 자원 대국이 된다.

 

사토 : 중요한 것은 자연 에너지가 지방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대기업인 전력회사가 이익을 중앙으로 빨아들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지방이 자신들의 경제활동으로서 자연 에너지를 추진한다면, 그 이익으로 지방이 활성화된다. 이런 방향성은 향후 일본에 매우 중요합니다. 지방이 경제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이 있는 가운데, 자연 에너지가 지방에 큰 경제적 활력이 된다.

 

고이즈미 : 자연 에너지를 확대하는 동시에 지역마다 자연 에너지를 활용한다. 새로운 산업을 일으킨다는 면에서도 이것이 바람직하다.

 

 

 

4회. 핵 폐기물의 처분장을 놓고

사토 : 방금 핵 폐기물의 처분장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도 여쭤도 될까요?

 

고이즈미 : 원전이라는 것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라고 일컬어지듯이, 쓰레기를 버릴 장소가 없다. 지금은 주로 각 원자력 발전소의 부지 안에 보관하거나, 아오모리 현 무츠 시의 중간 저장 시설에 핵 쓰레기를 일단 저장하고 있다. 그러나 원전을 계속한다면, 쓰레기는 점점 늘어간다. 장래에 처분장이 부족할 것은 뻔한 일이다. 안전 대책만 해도, 방사능이 유출되면 안 되니까, 큰일이다. 게다가 수천 년, 몇 만 년, 위험성이 줄지 않는 쓰레기이고, 일본에는 처분할 장소를 현실적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런 쓰레기 처리문제만 해도 전혀 전망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사토 : 핀란드에 건설 중인 사용 후 핵연료를 묻는 시설 ‘온카로’를 시찰한 얘기를 책 안에 쓰셨습니다.

 

고이즈미 : ‘온카로’는 핀란드어로 ‘공동(空洞)’이라든가 ‘은신처’라는 의미라고 하지만, 오늘날 ‘온카로’라는 말은 핵폐기물 처리장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현지에서 실제로 보면, 일본에서, 이런 시설이 가능한지, 큰 의문을 가졌다. 왜냐하면 핀란드는 국토 전체가 거의 딱딱한 암반으로 되어 있는, 지반이 매우 강한 나라다. 게다가 ‘온카로’가 있는 올킬루오토 섬에는 헬싱키 공항에서 제트기로 1시간, 거기서 또 차와 배를 타고, 도착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그 처리장 입구도 암반으로 되어 있고, 지하 400미터의 장소에 사방 2킬로미터의 쓰레기장을 만들고 있다. 그런 곳은 일본에는 없다. 게다가 핀란드에는 4기밖에 원전이 없거든요. ‘온카로’는 그 중 2기 분의 쓰레기를 저장할 수밖에 없다. 다른 2기에서 나오는 폐기물의 처리장은 아직 정해재지 않았다. 핀란드의 4기에 비해 일본에는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전에 54기의 원전이 있었다. 가령 지금 원전을 그만둔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쓰레기는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국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본 국내의 어딘가에 천년만년, 사람이 닿지 않도록, 쓰레기가 확산되지 않게 처리장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로, 재가동하면 또 쓰레기가 늘어난다. 어떻게 생각하든, 원전을 계속하는 것은 이상한 얘기지.

 

사토 : 그 점에서 생각해도 원전이 ‘깨끗한 에너지’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핵폐기물의 처리장을 지방으로 떠넘기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핵폐기물이 위험한 것임은 이를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알고 있는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에서는 처리장을 만들 가능성은 전혀 열려 있지 않습니다.

 

고이즈미 : 모두 반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방의 자치단체에 대해 ‘핵폐기물 처리장을 만들어주면 보조금을 줄 테니까 손들어주세요’라고 말해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손을 드는 곳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이라고 하면서, 경제산업성이 후보지를 선정한다. 그래도, 그런 것을 따르더라도 후보지로 정해진 곳은 전부 반대하기 마련이다. 원전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는 앞날이 깜깜하다.

 

사토 : 객관적으로 보면 사면초가 상황이 되고 있죠.

 

고이즈미 : 아까 말씀하셨듯이, 수출만 해도 전부 가능성이 끊겼다. 바로 나아갈 곳이 없다.

 

사토 : 원전은 안전 대책을 위한 비용이 점점 높아지고 있으니까, 외국에 팔려고 해도 너무 비싸고 채산이 맞지 않는다. 또 원전을 사는 쪽도, 그토록 비참한 사고를 일으킨 일본의 원전을 도입해도 괜찮을까 하는 의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고이즈미 : 쓰레기 처리, 안전면의 문제만이 아니다. 원전이라는 것은 환경에 대해서도, 아주 타격(damage)을 주는  기술이야. 원전은 전부 연안에 있다. 이것은 전문가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우라늄 연료를 태울 때, 열이 너무 많이 난다. 그것을 식히려면 물이 필요하다. 이때 사용하는 물이 대량이니까, 연안에 만들어 바닷물을 이용할 수박에 없다. 대량의 바닷물을 퍼 올리면 어떻게 될까? 거기에는 플랑크톤이나 미생물, 어패류, 여러 가지 생물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만다. 또 반대로, 원자로를 식힌 후의 온수는 바다로 방류된다. 이번에는 해수 온도가 올라간다. 한번 오르는 것만으로도 생태계는 민감하게 변한다고 그 전문가는 말했다. 끌어들이는 바닷물, 방출되는 온수, 원전은 이중으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 환경파괴산업이라는 것이다. 원전이 방류하는 온수는 지구의 온난화에도 관계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다를 데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육지에도 영향이 있다.

 

사토 : 과학자인 미토 이와오(水戸巌) 씨나 코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 씨도 “원전은 바다를 데우는 장치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고이즈미 : 그 말 그대로야.

 

 

5회. 탈원전과 자연 에너지로의 전환은 정치 주도로

사토 : 고이즈미 씨는 일본이나 독일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 에너지 시설을 견학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책에서도 일본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농업과 태양광 발전은 양립 가능하며, 그런 방식을 더 넓혀야 한다고 쓰셨습니다.

 

고이즈미 : 지바 현의 소사 시에서 지금, ‘솔라셰어링 발전’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거기로 견학을 갔다. 농가의 밭 위에 3미터 정도의 버팀목을 세우고, 그 위에 한 칸 정도 폭의 태양광 패널(전지판)을 늘어놓는다. 아래에서는 농작물을 키우고, 위에서는 태양광으로 전기를 만들어 공급한다. 두 쪽 모두의 매출 상승이 예상된다. 실제로 그것을 하는 것을 봤다. “밭 위에 패널을 나란히 늘어놓으면 빛이 닿지 않게 되고, 농작물 성장을 방해하잖아요”라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 거꾸로 태양광만 너무 받으면 생육에 좋지 않다. 적당하게 그늘이 지닌 편이 좋다”고 하더라고. 대기업이 보통 하고 있는 태양광 발전은, 땅 위에 패널을 늘어놓기 때문에, 아래는 잡초가 자라니까 그것을 깎는 일만 해도 큰일이지만, 소사 시의 농가의 경우, 농업과 태양광이 양립할 수 있다. 이것은 아직 논에서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만일 일본 전국의 논에서 솔라 셰어링을 한다면, 충분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 게다가 농업과 양립한다. 점점 진행되었으면 좋겠어요. 일본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 나라야.

 

사토 : 일본은 자연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으니까, 가능성은 충분히 있네요.

 

고이즈미 : 태양과 물과 바람과, 매우 풍족하다. 독일에 시찰을 가면, 이것에 덧붙여, 나무 찌꺼기나 말이나 소의 똥 같은 바이오매스를 이용해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자연 에너지에 의한 전원 공급 비율이 30%를 넘었다. 독일에 비하면, 일본은 자연 에너지가 정말로 풍족한 나라니까,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30%는 실현 가능하지.

 

사토 : 일본의 경우, 지금 말씀하셨듯이 농업과도 양립할 수 있다면, 솔라 셰어링은 폭발적으로 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경작을 포기한 땅도 있고, 그런 장소를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에, 해상 풍력 발전도 포함해 바람을 사용한 풍력 발전도 용이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자연 에너지가 풍족한 나라입니다. 일본에서도 동일본 대지진 이후는 FIT(고정가격매입제도)의 도입에 의해 자연 에너지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을 정치의 힘으로 더 크게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이즈미 :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원전을 제로로 하자, 자연 에너지를 지원하자’라고 정부가 선언하는 것이다. 태양광 발전도 풍력 발전도, 날씨가 흐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람이 그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멋대로 떠드는 것을 들어왔다. 그래도 지금은 축전기술이 발달하고 있다. 또한 기술혁신에 의해 풍차도 태양광 전지판도 점차 소형화되고 있고 개량되고 있기 때문에, 설치할 장소도 확대되고 있다. 그래서 정부가 제대로 방침을 세우면, 기업도 여러 가지 지혜를 낼 것이다. 물론 국민은 협력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꽤 꿈같은 산업 발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사토 : 원자련(原自連)의 ‘원전 제로 법안’에서도 나와 있었듯이, 나라가 에너지 협동조합의 설립을 지원하고, 그것이 중심이 되어 자연 에너지를 추진한다면, 더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런 것도 정치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고이즈미 : 거기에는 정치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커다란 가능성이 잠들어 있으니까, 계속 지원해야 한다. 사고 전에는 단 2%였던 자연 에너지가 작년의 시점에서 15%까지 늘었다. 대단한 추진도 하지 않았는데도. 정치가 더 지원한다면, 순식간에 목표 수치는 달성할 수 있다.

 

사토 : 내가 이 책에서 또 하나 감명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원전이 ‘잠재적 핵 억제력’이 된다는 논의를, 고이즈미 씨는 명확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써져 있습니다. “내게는 이 논리가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잠재적인 능력이 있어도, 장래, 일본이 핵무장 등을 할 수가 없거든요. 오히려 일본에는 그 잠재적 능력이 있어서 주변 국가들이 군사적인 위협을 느끼는, 긴장완화나 핵 군축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 면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이즈미 : 당연한 것을 말했을 뿐이야. 첫째, 만일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무슨 플러스가 되는가? “핵 억지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핵실험은 할 수 없으며, 국민도 핵무기를 인정할리 없다. 물론 일부에는 “일본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핵무기를 갖기 위한 비용을 생각해도 소용없고, 가져도 아무런 플러스도 안 된다. 오히려 핵무기를 갖지 않아도 되는 국가 만들기를 지향하는 쪽이 세계의 표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 에너지로 30% 정도의 전력을 충당하는 것은 쉽다. 이를 추진해 100% 자연 에너지로 해낼 나라를 목표로 하면 된다. 30년이 걸리든, 50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우선은 그것을 목표로 한다. 일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가진 나라라고 생각하네.

 

사토 : 원전을 제로로 하는 것은 안전 보장 면에서도 플러스로 작동한다고 책에도 써져 있습니다. 원전은 테러의 대상이 될 위험도 있다. 게다가 에너지 안전 보장의 관점에서 생각해도, 에너지의 자급자족을 가능케 하는 자연 에너지로 이행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고이즈미 : 테러의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 이상으로 지진, 화산 폭발, 해일,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다. 그래서 후쿠시마는 혼쭐이 났다. 자연재해는 억지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위험성을 가진 산업은 없어지는 쪽이 안전 보장도 된다.

 

사토 : 게다가 자연 에너지 입국이 되면, 세계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니까,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런 쪽에 더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이즈미 : 그런 전망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일본은 뒤처지고 있다. 태양광 발전이나 풍력 발전에 관해서도 세계 속에서 후진국이 되어 버린다.

 

사토 : 더욱이 자연 에너지의 발전을 의도적으로 늦추는 면도 있습니다.

 

고이즈미 : 원전 산업이 원전을 없애고 싶지 않는 거야.

 

사토 : 이익 유도를 예전처럼 계속하고 싶다는 세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점, 또 다른 화제가 되지만, 탈원전이라는 테마는 선거의 쟁점이 되기 어렵다고 책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이즈미 : 그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비관적으로는 보지 않는다. 아무튼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지 않은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원전 제로로 해낼 것이라고 알고 있는 국민은 많으니까. 원전이 아무래도 필요하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원전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별개로 쳐도, 전체를 생각하면, 자연 에너지로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본다.

 그런데도 경제산업성은 아직도 원전을 짓고 있으며, 원전 에너지의 비율을 올리려 하고 있다. 그만큼 후쿠시마로 질렸는데도, 이번에는 지진이나 해일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될까? 또 멜트다운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만일 테러가 일어났다면, 대처할 수 있을까? 미국 뉴욕의 쌍둥이 빌딩도, 민항기를 납치해 들이박았다. 똑같은 일이 원전에 대해 행해진다면, 거리마저, 아니 지방마저 없어질 것이다. 원전이라는 것은 자국을 향한 원자폭탄 같은 것이지. 그런 일을 생각만 해도,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

 

사토 :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총리대신이 ‘원전 제로’를 앞장서서 천명해야 한다고 책의 결론에 써져 있습니다. 탈원전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후 최우선의 정치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같은 대참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지금 정치에 요구되는 것 아닐까요? 국민은 이 사고를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봅니다. 요점은, 정치가 탈원전을 어떻게 실현해나갈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전망을 한 말씀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고이즈미 :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지극히 간단한 것이야.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총리가 ‘원전 제로로 합시다’라고 말하면, 국민에게 대환영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시에 할 수 있다. 전력회사도, 원전에 구애되어 끝까지 저항한다든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적다고 생각한다. 원자력에 관여했던 사람이 기득권으로서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기분은 알겠지만, 그것은 극히 소수파다. 그런 저항을 정치가 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오히려 제대로 된 방향성을 내면, 원전 유지를 그대로 하겠다는 사람들도 이해해줄 것 같다.

 나는 아베 씨한테도 말했다. 총리대신으로서 이렇게 좋은 기회가 없다. ‘원전 제로로 하자’라고 말해 달라, 그렇게 하면 반대하는 세력은 없어진다. 지금은 총리가 원전 유지를 공언하고 있으니까, 자민당 의원은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총리가 ‘원전 제로’를 호소하면 반대하는 자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의원이 이쪽에 붙는다. 야당도 반대하지 않는다. 국민은 지지한다. 여야 협력을 할 수 있다. 이런 시기가 오고 있다.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은 정말로 아깝다. 총리의 일로서 ‘원전 제로’에 국민이 협력할 수 있고, 여야가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눈을 감는다. 그래서 ‘판단력이 없구나’라고, 언제나 말하고 있다.

(2019년 1월 16일 조난신용금고城南信用金庫 본점에서)

 


1) https://dokushojin.com/article.html?i=4975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분류없음 2019.04.13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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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케 코지 + 고쿠분 코이치로, <통치신론 : 민주주의의 매니지먼트>(2015년 1월 출판된 것을 2018년 5월에 번역하고 8월에 올림)

통치신론 - 민주주의의 매니지먼트 - 오오다케 및 고쿠분 201805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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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이후의 정치 내재성과 초월 재고 (2/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2.

제가 고찰하고 싶은 마지막 두 번째 점은 첫 번째 점에서 곧바로 나옵니다. 들뢰즈의 비주의주의에 정치적인 억양을 붙이기 위한 길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비주의주의에 의해 촉진되는 리얼리티와 직접 융합되거나 리얼리티로의 침례가 그 자체로 뭔가 전복적이고 해방적이며 혁명적이기도 하다고 논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침례는 정의상 매개의 형태들을 전복하기는 합니다. 그런 심리적·사회적·제도적·기술적인 매개는 활동가가 리얼리티로부터 일정한 전략적 거리를 두도록 허락하며, 수단과 목적을 (융합시키지 않고) 숙고하여 통합하려고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상황의 양상들에 관여하는 것을 허용합니다만, [아무튼] 그러한 매개를 전복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해방적이기도 한 이 전복의 자격은 말하자면, 그것이 설득적인 것은, 들뢰즈가 활동가를 기각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때뿐이며, 또 의지적 행위를 촉진하는 조건들 그 자체가 억압적이라고 인정하고, 리얼리티가 어떤 의미에서 본래적으로 창조적이고 생기 있다고 하는 들뢰즈의 기본 주장을 인정할 때뿐입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자세하게 다룬 논점이므로, 나머지 시간에는 들뢰즈가 형이상학을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에 투입함으로써 무엇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지를 간단하게 소묘할 작정입니다.

내재성은 내부에 머물다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창조자-신에 대한 일체의 초월적인 구상을 배제하고 존재의 내재적인 구상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와 스피노자를 그대로 좇고 있습니다. 그때 신은 존재를 넘어 서서 외부로부터 존재에 개입하는 활동이 아니라, 고스란히 존재에 내재적이며, 자연 전체와는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리하여 내재적 존재론은, 신 없는 자연의 무신론적 주장이라고 독해되거나, 반대로 (그리고 이쪽이 스피노자 자신의 지복으로의 경도에 적합합니다만) 범신론의 한 형태라고, 전체적으로 신격화되고 영화霊化[정신화]”된 자연의 긍정이라고 독해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를 철학이 화신(化身)한 인간으로서 포용하는 들뢰즈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피노자주의란 유보없이 내재성과 범신론의 위험’”을 포용하는 것입니다(EP, 333; cf. 67). 여기서의 출발점은 자기-원인과 자기-필연화로서의 신의 절대적인 자기-충족입니다. 스피노자는 씁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신 안에 존재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는 신의 지고한 힘, 혹은 무한한 자연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사물이 무한하게 많은 양태로, 모든 사물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며, 게다가 삼각형의 자연 본성으로부터,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개의 직각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과 동일한 필연성으로, 모든 사물이 항상 나오는 것이다.[각주:1]

 

들뢰즈가 주석하듯이,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이런 자기-원인의 위력(force)을 결여하고 있으며, “자기의 힘에 의해 실재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힘에 의해 유지[보존]되지 못하고, 그 실재와 유지를, 자기를 유지하고 자기에 의해 실재할 수 있는 존재자에 의존하고 있다. 이리하여 유한한 존재자가 그것에 의해 실재하고 유지되고 활동하는 바의 힘은, 신 그 자체의 힘이다”(EP, 89-90). 이리하여 실재하는 모든 것은, 실재하고 활동하는 유일한 무제한적 힘을 표출하는 다각형의 면切子面, 크건 작건 활동적이고 크건 작건 힘을 가진 다각형의 면切子面이다. 우리 같은 유한한 존재자를 결정하는 원인으로서의 힘은 그 결과가 그 힘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이다. 이때, 물론 그 힘의 안이란, 다른 별개의 것의 안이기도 하지만, 역시 [후자도] 그 힘 안에 존재하고 머문다.” 그것은 신의 양태 또는 피조물이 신의 내부에 머무는 방법에 의해서이다(EP, 172). 그런 내재성은, 자기에만 내재적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전부이자 하나인 것을 흡수하고, 그것이 내재할 수 있는 그 무엇도 남겨두지 않는다”(WP, 45). 그때, 임의의 주어진 양태를 이해하는 것은, 그 양태가, 존재자 전반의 무한한 전체성또는 무제한의 하나-전부를 만들어내는 원인의 위력의 기구의 일부인 그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WP, 35, 38; cf. DR, 37). 위와 같은 내재적인 방향성으로부터, 들뢰즈 자신의 존재론의 시차적(示差的)인 특징의 대부분이 일의성, 직접성, 표상[재현]의 거부, 주관-대상 관계의 거부 등이 곧바로 나옵니다.

잠시 들뢰즈는 옆에다 두고, 위와 같은 입장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 일정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전적으로 별개의 이론적 맥락에서의 전개를 상기해봅시다. , 아도르노에게서 비롯됐다고 간주되고, 맑스 경제학의 독해를 통해 모이셰 포스턴에 의해 더욱 전개된 비판이론입니다. 아도르노가 내재적 비판의 방법을 옹호했을 때, 그의 염두에 있던 것은, 그 대상의 내부에 머무는비판이었습니다. 동일화 사고의 억압적 귀결에 대한 비판은, 동일성과 그 개념화의 자원을 그 자체에 반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정적으로라고 해도 다른 삶의 방식을 암시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손상된 삶이 견뎌내고 있는 고뇌에 대해 반성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아도르노의 논의에 의한다면, “만일 우리가 하이데거의 존재의 철학 자체의 구조를 떠맡지 않고, 그 위력을 그 자체로 향하게 하지 않고, 그 바깥쪽으로부터 전반적으로 거부해버린다면”, 하이데거의 존재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그 대상에 대해 아무런 힘도 갖지 않습니다.[각주:2]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내재적 비판은, 맨 처음에 그 대상의 자기-충족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모든 것과 인간 경험의 모든 것의 양상을 상품화의 그립으로 에워쌉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후에,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흔들림(play)을 추적하는 것을 시도해 보고, 내적 모순이 언젠가 뭔가 다른 것으로 통하는 문을 열지도 모른다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문을 열 것인가라는 물음, 어떻게 문을 열 것인가라는 물음은, 아도르노의 관심사의 목록의 상위에는 놓이지 않습니다. 그런 물음들은,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포스턴의 획기적인 연구에도 표면화되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포스턴의 연구는, 내재적 비판의 범례로서 크게 칭찬 받았습니다만, 포스트-자본주의 사회의 추상적 가능성을 다소간 고집하는 방향에서, 아도르노의 비관적인 사회 분석을 수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포스턴에 따른다면, 맑스의 자본 분석에 힘이 부여되는 것은, “그 관점이 고찰되는 구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발생시키는 내재적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각주:3] 포스턴은 가치형태가 발생시키는 강제와 가치형태가 명령하는 추상적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회의 가능성을 되풀이하여 언급합니다만, 그의 책은, 이 가능성을 리얼리티로 바꾸는 활동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이 활동가는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의 대상이자 부속물이며”, 그런 한에서, “이 계급역사의 <주체>”나 자본에 대한 자기-해방적인 적대자가 아니며,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역사적 과제는, 그 강화나 자기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폐기입니다.[각주:4] 아무런 변명도 이뤄지지 않은 채, 그 성과는 이렇습니다.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역사적 역동으로서, “사회적 활동가의 배후에서, 그들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작동하는 위력이 구동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분석이라는 것입니다.[각주:5]

어느 정도 맑스 자신은 비주의주의적인 선을 따라 읽을 만한가라는 복잡한 문제는 옆에 두었는데요,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한 자본주의의 반성적 고찰은, “비판적이라는 것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비주의주의적으로 읽어도 마땅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만, 안티 오이디푸스의 진단으로는, 자본주의 과정이란 상품화의 항상적-가속적인 기구에 의해, 사회적 실재의 모든 다각형의 면탈코드화되고, 전의 복잡한 사회관계가, “탈코드화된 흐름의 결합을 통해 구성된 단일한 내재성의 장으로, “모든 초월성의 부정으로 평탄화되는 과정입니다. 점차 그 탈코드화가 다른 노예에게 명령하는 노예만”(AO, 254)을 남기는 비할 데 없는 노예제를 제도화한다고 하더라도, 이 지옥의 복종의 논리를 유지하는 경계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가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키조프레닉[분열증자]”이라고 부르는 바의 범례적인 비-활동가입니다. 드뢰즈와 가타리의 스키조자본주의의 극한을 탐구하거나 구현합니다. “스키조는 자본주의의 내적인 경향성의 실현이며, 자본주의의 과잉 생산물, 자본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자본주의의 살육의 천사이다”(AO, 35; cf. 255). 자본주의와 분열증2권에서 마찬가지의 기능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귀속됩니다만, 그것은 소수자-되기로의 도관(導管)으로서, 혹은 서양사회에서의 노마드의 후계자”(TP, 558 n.61), 철저하게 탈영토화된 후계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도움이 되는 한에서일 뿐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채워지는 제도에서도, 탈영토화와 분자화의 선이 새로운 성격과 새로운 종류의 혁명적 잠재력을 얻을여지가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언하는 것은 다분히 정당합니다.[각주:6] 그렇지만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해방적이고 혁명적인 것으로서 등장하는 것은, 그런 탈영토화의 운동뿐이며, 특히 자본주의 자체가 구동하는 형태의 절대적인 탈영토화입니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숙고를 갖고서 단절하고 자본주의의 부불 노동의 명령에 승리하는 과제를 스스로 설정하는 활동가에게 요구되는 형태의 힘이나 역량을 고찰하기보다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도주라는 의심스러운 대가를 우리에게 남기는 것입니다. 이 도주선은,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임의의 역사적·정치적 과정과 더불어 작용한다기보다는, 절대적이고 매개 없는 자기-원인적인 필연성(causa-sui)과 공통되는 시공간을 따라 작용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특정한 정치적 역량을 대신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노마드적인 전쟁기계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유혹합니다. 전쟁기계는 절대적인 속도로 작용할 것이며, 그것은 속도와 동의어로 간주됨으로써, “순수하고 계량 불가능한 다양성 , 찰나의 침입, 변신의 힘의 침입”(TP, 386, 352)으로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본주의의 역동의 극한[한계]”에 관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조립하는 것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 모든 현실적인 역량의 탈조직화나 용해를 넘어서 살아남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활동가는, 오로지 잠재적이고 초-역사적인 활동가이며, 노마드적 또는 분열증적 주체, 현실성 자체의 종언에 상응하는 주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 분열증은 역사의 종언입니다(AO, 130). “탈영토화의 가장 먼 한계에 손을 대려고 노력함으로써, 들뢰즈와 가타리의 아직 보지 못한 분열증자는 자본주의의 바로 한계를 찾아낸다. 분열증자는 자본주의의 내적 경향성의 실현이다.” 그리고 그 조건에서, 분열증자는 리얼리티의 생성변화그 자체를 구현[受肉]한다(AO, 35)는 셈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우리는 멀리 있습니다. 자유와 정치에 대해서 더욱 명백한 관심을 품은 철학자들, 예를 들어 사르트르, 파농, 시몬느 드 보봐르가 제안한 내재성과 초월성을 정면에서 대조시키는 설정으로부터는 멀리 있습니다. 이들 사상가들에게 인간의 자유의 실천적인 기초는, 주어진 상황을 초월하는 상대적인 역량과, 자기의 선택에서 유래하는 적극적인 목적으로 자기를 기투하는 상대적인 역량에 존재합니다.[각주:7] 그런 초월성을 빼앗기는 것, 보봐르의 표현으로는 자기의 내재성 안에 응고되는 것, 자기 자신의 미래를 만들기 위한 자기의 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때, 전제(專制)사람을 그 사실성의 내재성으로 가둬버리는힘으로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사람은 이제 사물들의 한복판의 하나의 사물 이상의 것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다른 사물의 집합으로부터 공제[뺄셈]된다고 하더라도, 그 부재의 어떤 흔적도 지상에 남기지 않고 공제[뺄셈]될 수 있다.”[각주:8]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성 일반의 우주적인 공식이라고 한 지각할 수 없는 것으로-되기에 대해 좋은 근사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사르트르와 파농과 똑같이, 또한 이 점에서는 라르드로(Lardreau)와 똑같이, 어떤 자유의 옹호이든, 복종으로부터 해방으로 이끌어갈 어떤 집단적 동원이든, 적어도 최소한의 초월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옳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초월성은 사르트르의 표현으로는, “우리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활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하는 것입니다.[각주:9] 보봐르가 논하듯이, 여러분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로부터 자기를 찢어내고”, “구체적인 목적과 특정한 기획의 실현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기는 자유라고 주장할수 없습니다. 물질적 원인과 내재적 필연성의 흐름을 중단하는 역량이 없으면, 지각과 재-활동[-] 사이에 아무런 거리감이 없다면, 생리의 수준에서도 사회의 수준에서도 활동을 자극으로부터 분리하고 그리하여 숙고적인 의지 작용이 자동적 또는 기계적인 반사보다 우세하도록 촉구하는 거리가 없다면,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그런 간극을 기초로서 자기를 구성할 수 있는 활동가만이, 자유로운 자기-결정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들뢰즈 철학에는 그런 활동가의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1. Spinoza, Ethics IP 15, IP 17 S1. [본문으로]
  2. Adorno, Negative Dialectics(Routledge), 97. [본문으로]
  3. Moishe Postone,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255. [본문으로]
  4. Postone, Time, 276n 41. “요컨대 맑스에 의한 자본의 궤도 분석은,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의 <주체>로서 자기 실현할 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도 가리키지 않는다”(357). [본문으로]
  5. Postone, Time, 215n 109, 295, 390. 그리고 들뢰즈 : “운동은 항상 사고하는 자의 배후에서 일어나거나, 사고하는 자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에 일어난다.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이미 달성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Dialogues II, 1). [본문으로]
  6. WP, 93; cf. TP, 345; DI, 270. [본문으로]
  7.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Simone de Beauvoir, Ethics of Ambiguity (Citadel Press, 1948), 25-27; cf. Hallward, “Fanon and Political Will”, Cosmos and History 7:1 (2011), 104-127. [본문으로]
  8. Beauvoir, Ethics of Ambiguity, 102, 100. [본문으로]
  9. Sartre, Situations vol. 9, 101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 cf. ;cf.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52. 반대방향으로 지나가는 리스크도 있으며, 로트레아몽과 플라톤을 따르는 바디우처럼, 사고할 수 있는 활동가에 관해 사고의 절대적 초월성을 고집하는 리스크도 있다. 바디우에게서 수학이 “참인” 사고의 범례적 사례인 것은, 수학이 가장 명백하게 주체로부터의 “권외(圈外)”의 거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어떤 “진리의 초-인간적인 도래”도 그것을 떠받치는 주체를 “유도”하고 “구성”해야 한다. “수학적 영원성”의 “얼음같이 차가운 반인간주의”는 수학에 의해 부과되는 “개조”의 연성과 “지성의 소원화”에 복종하는 규율훈련된 사유자에게만 이해 가능하다(Badiou, “Mathematics and philosophy”, Theoretical Writings, 10-14; cf. Badiou, Logics of Worlds, 173-174). 이렇게 전담함으로써 바디우는, 들뢰즈나 알튀세르나 푸코의 손에서 배제된 주체의 범주를 회복할 수 있지만, 한쪽에서의, 바디우에 있어서의 진리의 유발 효과로서의 주체의 이론과, 다른 쪽에서의, 활동가와 그 역량에 대한 주의주의적 구상 사이에는, 여전히 큰 거리가 있다(cf. Hallward, “Sujet, décision et volonté dans la philosophie d’Alain Badiou”, in Autour d’Alain Badiou [Paris: Germina, 2011], 303-331).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 피터 홀워드가 2015년 3월 15일부터 일본을 방문해서 두 번의 강연을 벌였다고 한다. 간단한 정보는 여기를 클릭. http://www2.gensha.hit-u.ac.jp/TransA/lecture20150315.html

* 이 두 번에 걸친 강연 내용이 최근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 『다양체』에 수록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목차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을 독서의 습관으로 틈틈이 옮겨적을 예정이다. 우선 두 번째 강연에 해당되는 <들뢰즈 이후의 정치>부터 옮긴다. 일본에서 이 강연의 제목은 「ジル・ドゥルーズと政治(”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였으나, 아래의 잡지에는 다음의 제목으로 수록됐다. ドゥルーズ流の政治/ドゥルーズ後の政治|ピーター・ホルワード|小泉義之訳. 일본과 한국에서는 번역어, 문장 구사 등이 다르기 때문에 홀워드의 원문을 구해서 대조해야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서 구태여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 아래의 본문을 보면 나오는 주라비슈빌리[주라비크빌리]의 글은 정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게재하다가 중단한 이치다 요시히코의 <혁명론>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를 홀워드와 교차하면서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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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이후의 정치 : 내재성과 초월 재고 (1/2)

Peter Hallward, “Politics after Deleuze: Immanence and Transcendence Revisited”

 

최근 25년 동안, 아무래도 질 들뢰즈는 넓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대륙철학이나 프렌치 씨어리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10년 동안, 들뢰즈 저작의 양상들을 둘러싸고, 이채로운 수의 책과 논문이 넘쳐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실제로 들뢰즈에 관한 전문연구서와 들뢰즈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책을 도서관의 빠른 검색으로 검색해보면, 이제 1200건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에딘버러대학에서 나오고 있는 시리즈 Deleuze Connections, 들뢰즈와 디자인, 들뢰즈와 건축, 들뢰즈와 교육, 들뢰즈와 인종, 들뢰즈와 공간, 들뢰즈와 그 밖에도 머리에 떠오르는 한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25권을 채웠고, 앞으로도 늘어날 예정입니다.[각주:1]

* 각주1에 달려 있는 주소는 다음으로 변경되었다. https://edinburghuniversitypress.com/series-deleuze-connections.html

이 일련의 제목이 반영하고 있듯이 들뢰즈에 대한 관심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하지만, 그곳은 차치하더라도, 유럽과 앵글로색슨의 근처에서도 많은 독자가 들뢰즈에게 매료되어 온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정치사상가로서의 그 중요성임을 보여주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파리나 런던의 대학에서 현대유럽철학이나 비평이론의 어떤 연구과정을 전공하려고 해도, 어김없이 들뢰즈와 공저자인 펠릭스 가타리에 관련된 정치적 모티프의 한 쌍과 다소간 직접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제가 만나온 이론 지향의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그 상당수에게는 미시정치, 탈영토화, 노마돌로지, 도주선, 전쟁-기계, 소수자로의 생성변화[소수자-되기], 자연스레 입에서 나오는 정치적 어휘의 대부분을 이제 뒤덮고 있는 몇 안 되는 용어의 고작 몇 개의 예입니다. 이런 학생들은 많은 것에 대해 논합니다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치하는 바로는, 들뢰즈는, 정치활동의 현대적 형태와 그들이 직면한 속박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참조처이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둘러싸고 금세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들뢰즈 자신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명시하지 않고, 굳이 말하자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 평등, 자유, 해방 등과 같은 주요한 정치적 개념은 그의 고려 바깥에 있으며, 자본주의와 분열증[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에서 제출된 국가 비판을 별도로 하면, 별의별 정치제도, 통치의 기구, 입법대표정부의 기구에 대해 그는 그 이상의 논의를 거의 제시하지 않습니다. 거대 신문용으로 작성된 몇 개의 논설(유명한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관한 것입니다)을 빼면, 들뢰즈가 정치의 경위나 혁명에의 동원에 대해 일부러 자세하게 논의하는 것은 역시 드뭅니다. 들뢰즈나 들뢰지안이 정치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역시 전적으로 불분명하며, 현재 이용 가능한 들뢰즈 사전의 종류가 한결같이 소수자 정치”, “미시정치”, “혁명의 논의를 등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토픽에 대해 특별한 항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각주:2]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제 자신의 정의를 부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오랫동안 전통에 맞춰서, “정치란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의 다음과 같은 집단적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제안하겠습니다. , 1.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조직이나 상호행위(예를 들어 친족, 민족, 지리, 언어에 기초를 둔 형태들)로 환원할 수 없는 집단적 차원이며, 2. 다른 것과 구별하여 정치적집단성이나 공민적집단성을 구성하는 참가자들은, 평등과 포함을 기초로 상호관계를 맺으며, 다른 생활영역으로부터 따온 계층성을 기초로 하여 (예를 들어 군사명령을 기초로 하거나, 가정경제종교 권위를 기초로 하여) 상호 관계를 맺는 일은 없다는 것을 원리 원칙으로서 전제로 하는 집단적 차원입니다.[각주:3] 더 한정해서 강조해 둡니다만, 데모크라시의 정치는 보통의 인민의 힘에, 즉 그 어떤 형태의 특권단체나 지배계급과도 싸워 이기는 인민 일반의 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논했는데요, 민주주의와 여러 가지 형태의 과두제나 재산제(plutocracy)(그 대부분은 ‘(다른) 민주주의라고 자칭합니다)를 가장 간편하고 명백하게 구별하는 방식은, 루소(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등의 자코뱅파가 감복해서 계속 인용하는)가 주권의 기초를 인민의 의지에 둘 때의 논리, 일반의지 혹은 인민의지[의 논리]에 입각하면서, 인민주권의 우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집단의 실재의 기초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에게 짐을 지우는 그 역량, 그렇게 해서 적대적이고 타율적인 결정의 형태들에 (단지 저항한다기보다는) 승리하는 그 역량에 직접적으로 놓여져야 합니다. 거꾸로, 이 일반 역량의 기초는, 서로 강화하는 집단적인 능력들과 역량들, 특히 집회·교육·정보·토의(deliberation)·조직화·결의·실행의 역량들에 놓입니다.

* 각주 4에 붙은 주소는 여기를 클릭.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정치에 대한 위와 같은 노골적으로 주의주의적인 구상은 들뢰즈와의 정면충돌을 야기하는데요, 오늘 여기에서는, 바로 이 충돌을 저는 정밀조사하고 싶습니다. 들뢰즈의 저작에 인민이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출현하더라도, “도래할 인민[민중]”이라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형상으로서 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적인 자동기계를 집단적 형태로 개조했던 것은 아닐까요?[각주:5] 무의식, 욕망의 기계적이고 사실은 자동기계적인 성질, 경험의 분자적 혹은 하위-개체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철학은 정치적 의지와 의지적 활동으로부터 가장 먼 것은 아닐까요? 저는 들뢰즈의 최초의 가장 열심인 독자의 한 명이었던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에게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그가 1996년의 중요한 논고에서 엄밀하게 강조했던 것처럼, 정치적 좌파는 일반적으로 주의주의를 참조축으로 하여 자기를 정의하지, “들뢰즈는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주의주의적이지 않은 철학을 전개했다. 항상 들뢰즈는 진정한 사고와 생성하는 모든 근본적으로 의지적인 성격을 주장했다. 그리고 어떤 계획에 입각해 세계를 바꾼다거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바꾼다는 등의 일처럼 그에게는 인연이 먼 것은 없었던[각주:6] 것입니다.

들뢰즈적인 정치가 있다면, 물론 그것은 비주의주의적이라고 기술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며, 널리 유럽철학에서 좌파현대정치분석으로서 통용되고 있는 것의 실로 상당수가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바로 들뢰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권과 그 동족어에 대한 유행의 산만한 비판을, 특히 그것이 무엇이든 지도 주체나 주권적 주체”(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괴물적인 혼란입니다!)에 대한 거절을 보세요. 자크 데리다에 의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책임을, 적극적 자유의 그 어떤 구상으로부터도, “, 지배, 폭력으로서 규정되는 자유, 나아가 기능으로서, ‘나는 할 수 있다의 가능성으로서 규정되는 자유로부터도 분리하려고 하는 미수에 그친 기획을 계승하는 유산을 생각해 보세요.[각주:7] 조르조 아감벤을, 그리고 또한, 대륙-철학계에서는 최근 들어 일정한 견인력을 갖춘, 티쿤(Tiqqun), 보이지 않는 위원회(the invisible committee), 공산주의이론(Théorie communiste) , 다양한 공산화가속주의의 주장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이것들에 공유되고 있는 것은, 활동가와 그 현실적 정치 역량을 합병하는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아감벤에 의한 비판, 숙려[토의](deliberate) 단계와 스텝step을 밟아나가도록 틀이 부여될 수도 있는 활동의 전략적차원 모두에 대한 아감벤의 거절입니다. 모든 구성적권력[]의 거절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라면, 중지[허공에 매달림]와 외톨이로 틀어박히기라는 위로, 그저 결핍시키는힘에 의해 약속되는 저 순수한 비-잠재성의 림보뿐입니다.[각주:8]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그것은 20년 이상 전에 처음으로 학위논문의 1개 장에서 소묘했던 것인데요, 들뢰즈에 대한 저의 비판적 결론의 입장에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푸코가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축하의 말을 건넨 것은 유명하지만, 그 정치적 의의에 관한 한, 그것은 금세기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기간이 계속된 것은 (혹은 시각에 따라서는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 이름에 값하는 모든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인민의 의지, 그것에 대항하는 어떤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세한 것이어야 한다는 신-자코뱅적 주장으로부터, 정치적 사고가 철수하고 있는 동안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들뢰즈가 정치적 사고에 있어서 중심적인 참조점으로서 부상한 것은, 어떤 기간, 대략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승리의 기간, 1970년대 초기에 시작되고 일련의 현저한 인민의 패배를 특징으로 하며, 19세기와 비교하고 싶어지는 불평등·항복·복종의 형태의 부활을 결과로 하는 기간에, 들뢰즈가 퇴각의 입장을 위해 부족함이 없는 철학적 견해를 제출한 한에서인 것입니다.

주의주의적정치구상과 비주의주의적정치구상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부딪칩니다. 한편으로, 정치활동가에 대한 구상, /녀의 의지적 활동의 역량에 관해서, 다른 한편으로 활동가와 활동가가 살아가는 상황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해방식에 관해서입니다. 아래에서는 이런 두 가지 점을 순서대로 쫓습니다.

 

1. 루소와 로베스피에르에서부터 레닌과 그람시를 거쳐 프란츠 파농과 체 게바라에 이르는, 넓게 -자코뱅적인 전통은, 정치적 의지의 행사를 목표·의도·동기 등의 고전적인 심리적요인과 연합시키는 것을 늘상 해왔습니다만, 이와 동시에 의지의 실행과 행사를 단순한 소망과 변덕의 표현이 목적에 동의하는 자는 그 수단을 거부할 수 없다”(루소)라는 클리셰, 달리 말하면, “목적을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 그 수단도 의지해야 한다”(그람시)라는 클리셰에 입각하고 있더라도, 단순한 소망이나 변덕의 표현과는 구별하고 있습니다.[각주:9] 루소 이후, 의지(vouloir)(pouvoir)은 서로 맞바꿀 수 있으며, 목적을 의지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활동가의 역량에 의해 매개되는 것입니다. 활동가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활동가가 교육되고 의식적이고 유덕해지고 단련될수록 그 활동의 영역이나 그 의지의 권역은 점점 더 일반적이게 되고 원대해지는 것입니다.

활동가[배우]에 대한 들뢰즈의 구상 일반에서 곧바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활동을 위한 본래적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 즉 자신의 기획과 사업을 숙고하고 의식적으로 정식화하고 개시하기 위한 역량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들뢰즈가 전투의 사건을 고찰할 때, 그의 관심은,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느냐에도, 군사적인 전략의 방식이나 이유에도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관심은, 활동가로서의 병사, 상황에 응답하여 결정을 내리고 개별 목표를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잠재적 사건 그 자체로서의 전투의 무차별적이고 익명적인 성질에, 활동이나 퇴각의 역량의 모든 것을 상실하고 포기한 자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성질에, 들뢰즈의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진정한 활동가, “더 이상 용감도 비겁도 아니고, 더 이상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사건>이 현전하는 그 장소에서, 그렇기에 그 가공할 정도의 비정함에 참여하는 치명상을 입은 병사”(LS, 100~101)인 것입니다. 전투의 위쪽으로, 전투를 넘어서, 전투를 통과하여 존재하는 자만이, 전투를 사건 또는 본질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사무엘 베케트의 범례적인 등장인물이 사물의 잠재적 리얼리티에 대해 적격이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소진하고, 그저 가능적일 뿐인 것의 영역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소진한 인물만이 가능적인 것을 소진할 수 있다. 모든 욕구need, 선호, 도달목표, 의의를 체념해버렸기 때문이다. 소진한 인물만이 충분히 이해관심을 떠나고 있다.” 소진한 인물만이 재차 올라가 돌아가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CC, 154-155). 그 조건 하에서 그/녀는, /녀가 그 일부인 리얼리티를 진정으로 수 있다. 소진한 인물은, 그들을 흡수하는 환경에 일체의 주도권을 버리고 맡겨버린다. “거친 대해를 떠다니는 코르크처럼, “그는 이제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경계 속에 존재한다”(CC, 26).

들뢰즈가 물색한 다수의 시나리오 중 어떤 것을 취하든, 숙고적이고 목적론적인 자유는 그저 반응적이고 제한적인 편견이라며 기각되고, “더 심층의 형태의 강제, 자동조작, 용해가 지지되고 있습니다. 주체 자신의 결정이 진정한 귀결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견지, 요컨대 전략의 견지는, 들뢰즈의 사고의 구상과는 철저하게 무관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관한 그의 두 권의 책의 궤적을 아주 간단하게 대층 그려보면, 등장인물이 지각과 활동을 조절하는 역량을 계속 갖고 있는 (전쟁-전의) 상황으로부터, 감각-운동역량을 탈취당해 무엇인가에 홀려 있는 모양의 사람이 반응하지 못하고, 반응을 의지하지도 않는상황으로의 이행에 있게 됩니다. “감각-운동의 결합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구상공간은, 긴장과 그 해소에 따라서, 목표, 장벽, 수단, 우회에 따라서 조직화되기를 멈춘다.” 활동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지각은, 압도적이고 환각적이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結晶)을 통하는 듯한 직관을 통해서, 인물은 수동적인 보는 자가 되며, 무엇이든 현재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할지도 모르는 것에는 무관심해지며, 반사적 반응에 대해서조차 무감응해진다. “그토록 그 인물에게 있어서는, 정확하게는 무엇이 상황 속에 있는 것인가를 보는욕구need가 크다는 것이다”(C2, 126-128). 이런 통찰의 비용은 전적으로 명명백백합니다. 그것이 요청하는 것은, 활동가의 카타스트로피적인 마비이며, 유기체의 문자 그대로의 분해, 혹은 이것에 준하는 분해입니다. 전투를 지각하면서 죽어가는 병사를 철저하게 넘어서 사납게 날뛰는 전투처럼, 이제 사건은, 사건을 선동하고 사건에 반응하는 인격에 관계없이, “부동성, 석화작용, 반복”(C1, 207; C2, 103)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구도가, 들뢰즈가 문학을 참조할 때 특권적으로 끄집어내는 많은 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베케트의 소진시키는 자동기계, 카프카의 절대적인 분자적 탈영토화”(K, 58), 나아가 멜빌의 바틀비이며, 그 비타협적인 나는 하지 않고 싶은데요, 변함없이, “말과 활동을 절단하고, 더욱이 사물, 이유, 목표에의 지시를 언어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입니다.[각주:10] 이 점을 조금 자세하게 예를 들어 풀이하기 위해(또 다시 들뢰즈의 저작=신체corpus에 이어서는 통상적인 정치적 맥락이 그 관계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들뢰즈의 프루스트 독해를 간단하게 고찰해봅시다.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1972년판의 짧은 서문에서 요약하고 있는데요, “이 책은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가, 비의지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움직이는 기호의 경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PS, vii)는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화자가 학습하는 것은, “진리는 계시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누설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의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비의지적이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최대 테마는, 진리의 탐구는 비의지적인 것에 특징적인 모험이라는 것이다. 사유를 강제하고 사유에 폭력을 가하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사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얻어진 <시간>의 라이프모티프는 단어 강제력이다. 우리에게 보도록 강제하는 인상, 우리에게 해석하도록 강제하는 조우등등(PS, 61).

일반적으로, 들뢰즈가 논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 기억, 상상, 지성, 사고 같은 능력들은, “의지적으로 행사되는 한에서는 우발적으로만 행사될 뿐이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그저 똑같이 우리는 기억하고 상상하고 인식하고, 그 반대도 그렇다.” 이것과 대비적으로,

 

어떤 능력이 그 비의지적인 형태를 걸칠 때마다, 그 능력은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곳에 도달하고, 초월적인 행사로까지 상승하고, 다른 것으로 치환 가능한 그 힘과 자신의 필연성을 이해한다. 능력은 교환 가능하기를 멈춘다. 비의지적인 행사는, 각 능력의 초월적인 한계이며 그 사명이다. 의지적인 사고를 대신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고하도록 강제하며, 모든 것이 사고하기를 강제당한다. (PS, 62-63).

 

그때, 비의지적인 사고란, 필연성의 완전한 강제력과의 조우입니다. 혹은 오히려, 조우의 우발성을 필연성의 무심한 운명과 제휴시키는 경험입니다. 여기에서, 비의지적인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유명한 몰두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활동가의 진행성 마비와 활동가의 세속적 기획과 낭만적인 기획 모두의 용해를 다시 요구하는 듯한 그런 내러티브의 도정, 그 최초의 열약(劣弱)한 단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자의 감각-운동 시스템은 소모시키고, 활동과 반응에 있어서의 그저 현실적인시간성에 대해 무관심한,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그가 학습하는 것은 말하자면, “순수상태의 시간에 입력하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증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기관없는 신체이며 미소한 기호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관찰되지 않으며”, 그가 조우하는 다양한 인물을, “그 자신의 망상의 똑같은 수의 마리오네트에, 그의 기관없는 신체의 똑같은 수의 강도적인 힘에, 그 자신의 광기의 똑같의 수의 프로파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각주:11]

프루스트의 화자가 따라가는 궤적과 영화론이 끄는 궤적은, 대체로 비슷한 호[孤]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또한, 들뢰즈의 작품 전체를 통해 상이한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 지도에 배치되는 것은, 활동가의 진행성의 무-능력화, -현실화, 대항-현실화, 활동가의 용해이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런 리얼리티의 절대적 필연성과 충족성 안에서의 직접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침례[전신을 물에 담그는 세례](immersion) 때문입니다.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일상경험이 활동에 대한 관심에 의해 뒷받침되고, 감각-운동 메커니즘을 통해 감각과 활동을 결부시키는 신체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면, 진정한 통찰을 위해서는 그런 관심의 정지와 그 메커니즘의 탈구가 요청될 겁니다. 현실적인 것은 유기체의 기능[함수]이라고 한다면, 잠재적인 것은 전반적인 탈-유기체화로 이끌 겁니다. , 글자 그대로 탈조직화된 신체, 그 생물로서의 통합성과 정합성을 박탈당한 신체, 들뢰즈와 가타리가 아르토를 좇아 부르는 바의 저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를 설정하도록 이끌 겁니다. 그런 신체는, 조우하는 사건에 의해 강제되는 것을, 이해, 목표, 계획의 매개 없이 즉석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가능한 미래로 향하는 모든 기획은, 존재하는 것, 존재할 터인 것의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무너집니다. 이것이 운명애입니다.

프랑수아 주라비슈빌리는 이 비주의주의적궤적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그 궤적은,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이 동일한 지점에, 의지가 허위 문제이게 될 뿐인 지점, 허위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의지가 사건의 자기-긍정으로서 사건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지점에 도달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기묘하고도 철저하게 스피노자적인 세계의 지각에 도달하고, “산소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었음을 마지막에 이해하게 되며, 산소 없이 호흡하려고 하는 지점에 손을 대는[노력을 기울이는][각주:12] 것입니다. 이렇게 제언해도 크게 과장이 되지는 않을 테죠. , 들뢰즈에게서는, 활동을 가능케 하는 활동가의 기운을 돋우는 것은 모두, 그대로, 우리가 그로부터 도주하려고 해야 할 억압이며, 동시에, 동일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바로 그 자유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우리가 필연성의 유일한 흐름의 지각할 수 없는양태가 되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는 도주선을 물색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들뢰즈가 고찰하는 다양한 생성변화 혹은 되기”(예를 들어 여자-되기, 동물-되기, 노마드-되기)의 상대적인 가치가 어찌 될 것이냐 한다면, 그 가치는, 되기가 탈영토화한 형태 없는 질료를 위해활동하는 정도에 따라서, 또한, “지각할 수 없는 것은, 되기의 내재적인 목적이며, 그 우주의 공식이다라는 무자비한 텔로스에 입각하면서 활동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입니다.[각주:13]

주라비슈빌리 같은 독자가 들뢰즈의 방향성에 있어서의 가차 없는 스피노자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들뢰즈의 이 방향성에 막연한 혁명적억양을 불어넣고자 하는 꽤 어설픈 시도는, 천박한 속임수가 되기 십상이고, 어떤 종류의 정치활동에도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실천적 곤란들에 대해 결단코 무관심해지기 십상입니다. 들뢰즈의 형이상학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스피노자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면서도, -마오이스트의 철학자 기 라르드로는, 들뢰즈의 다른 독자에게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력(impact)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소책자에서, 들뢰즈의 형이상학의 정치적 함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스토아학파로서, 그리하여 평화주의와 영적 달관[諦観]의 처방전으로 특징지어집니다.[각주:14]

  1. Harvard University Library system, HOLLIS search, 9 March 2015. ‘Deleuze Connections’, ed. Ian Buchanan, University of Edinburgh Press, http://www.euppublishing.com/series/delco [본문으로]
  2. Cf. Adrian Parr, ed. The Deleuze Dictionary (2010); Eugene Young, ed., The Deleuze and Guattari Dictionary(2013) ; François Zourabichvili, Le Vocabulaire de Deleuze (2003). [본문으로]
  3. 표준이 되는 참고문헌은 Aristotle의 Politics이다. [본문으로]
  4. Cf. Hallward, The Will of the People: Notes Towards a Dialectical Voluntarism, Radical Philosophy 155(May 2009), 17-29. online at https://www.radicalphilosophyarchive.com/wp-content/files_mf/rp155_article1_willofthepeople_hallward.pdf [본문으로]
  5. Cf. C2, 263 ; EP,131, 158, 160. [본문으로]
  6. François 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de l’involontarisme en politique)”, in Eric Alliez et al, eds., Gilles Deleuze : Une vie philosophique (1996), 335. [본문으로]
  7. Derrida, Rouges[2002],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40. [본문으로]
  8. cf Agamben, “From the State of Control to a Praxis of Destituent power”, Athens, 16 November 2013 ; cf. Agamben, “From Limbo”, The Coming Community(1993) [본문으로]
  9. Rousseau, Discours sur l’économie politique, Œuvres complètes, vol. 3(Pléiade), 263; Gramsci, Worker’s Democracy (1919), Pre-prison Writings, 99; cf. Trotsky, Terrorism and Communism(1921), Verso ed., 25. [본문으로]
  10. CC, 73-74. 주라비슈빌리의 비주의주의적 독해에 있어서, 바틀비가 “들뢰즈적 정치의 상징적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Zourab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49). Cf. Agamben, Bartleby, or on Contingency, in Potentialities (1999). [본문으로]
  11. PS, 117-118; AO, 69; PS, 181-182; cf. RF, 30-31, 38-39; NP, 103-110; DR, 147. [본문으로]
  12. Zouravichvili, “Deleuze et le possible”, 356-357. [본문으로]
  13. K, 13; TP, 279; Cf. DC, 45; C2, 190. [본문으로]
  14. Guy Lardreau, L’Exercice différé de la philosophie: à l’occasion de Deleuze(Verdier, 1999), 51. 특히 어떻게 최선의 방식으로 필연성에 적응하는가, 어떻게 “흐름을 타는”가, 혹은 상황의 내재적 “생성”에 따라서 자기를 방향짓는가를 탐구하는 사상가(스토아학파, 스피노자, 흄, 베르크손 …)에 이끌려서, 라르드로는 이렇게 논한다. “푸코와는 달리 … 이성의 존엄[을 지킬] 만한 것에 대항하여 들뢰즈가 떨쳐 일어난 것은 한 번도 없었다”(ED, 45; cf. 72). 물론 라르드로 자신은 중립적인 독자가 아니라, 과거, 이른바 “신철학” 논쟁 무렵, 드물게도 들뢰즈 자신이 비난을 폭발시켰을 때의 표적 중 한 명이었다. 다음을 보라. Deleuze, “A propos des nouveaux philosophes et d’un problème plus général”(1977), in RF; Guy Lardreau and Christian Jambet, Une derniere fois, contre «la nouvelle philosohie», La Nef 66(January 1978), 35-40. [본문으로]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