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im, essaim(무리),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앙코르』, 『외양이 아닐 수도 있는 담론에 대해(On a discourse that might not be a semblance)』,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精神分析への抵抗)』, 『존재와 일자(l’Étre et l’Un)』,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하나뿐인 일자(L’Un-tout-seul)』, 『하나뿐인 자들(Les-tout-seuls)』, インフラクリテイーク序説───ドゥルーズ 『意味の論理学』からポスト人文学へ, ジャック・ラカンと鑑別診断の思想, 人はみな妄想する, 가타리, 과타리, 구멍-외상(trou-matisme), 구상화 경향, 네그리-하트, 네그리=하트, 데리다, 데이비드 흄, 들뢰즈-가타리, 들뢰즈=가타리, 들뢰즈의 독신자론, 방황하는 자기 :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 백치[바보]의 향락(jouissance de l’idiot), 사회의 아스퍼거화, 성별화의 식, 아사다 아키라, 아스퍼거 증후군, 안드로귀노스(androgynos), 어드혹(ad hoc), 어딕션(addiction), 외상(traumatisme), 융합적 일자(Un fusionnel), 이인증(離人症), 인프라크리틱 서설 :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포스트인문학으로, 일자론(hénologie), 일자의 파시즘, 자크 라캉, 자크 알랭 밀러, 자크-알랭 밀러, 절단적 들뢰즈, 접속적 들뢰즈, 정형발달, 제임스 조이스, 존재론(ontologie), 존재론적 파시즘, 초월론적 타자, 토가와 유키(十川幸司), 특이성=단독성(singulalité), 파르메니데스, 페르소나, 플로티누스, 하이데거적인 라캉, 「증상으로서의 조이스(Joyce le symptôme)」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3/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를 살면서

우츠미 그런데 치바 씨는 들뢰즈의 흄론에 주목하셨네요그리고 흄철학에서 절단의 계기를 끄집어내고들뢰즈에게서 생기론이나 잠재성의 파시즘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측면을 찾아냈다.

 

치바 그렇습니다모종의 픽션론으로서의 흄론이었습니다.

 

우츠미 흄은 낱개의[개개별별의] 세계를 연합에 의해 묶으려고[통합·정리하려고] 했습니다만그 통합정리할 때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치바 씨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거론한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흄의 경우, 파트그래피컬[パトグラフィカル, 바이오그래피컬의 오식인 듯. 즉, 전기적인]한 얘기인데요, 18세부터 23세까지 꽤 힘겨운 우울 상태에 있었고어쩌면 이인증(離人症)을 경험했습니다이인증에서는 사물을 서로 이어주는 아교랄까치바 씨의 말로는 ’ 같은 것이 누락되어 있습니다그것이 흄의 어소시에이션론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일단 아이러니적인 파괴를 경험한 곳에서부터 턴(turn)해온다유머적인 턴(turn)이랄까대타자 또는 초월론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은 통합·결말[まとまり]마조히즘에 있어서의 억압을 변형하는 듯한 턴(turn)입니다그 언저리의 모습이살아가는 지혜랄까경험론의 진면목이 아닐까 합니다만.

 

치바 제 말투에서 유머를 흄의 맥락으로 연결한다면어떤 우연적으로 생겨난 연합을그렇게 해도 좋다고 한다는 것입니다그 정의나 시스템을 묻겠다고 생각한다면근거는 없습니다어떤 우연의 마주침즉 최초의 자체성애적인 것이 생길 때의 외부와의 마주침의 우연성 같은 것으로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것을 떠맡고우연히 뭔가와 뭔가가 서로 달라붙게 됐을 때그로부터 연쇄적으로 다른 것이 또한 달라붙게 되는 것을 좋다고 한다모든 것은 근가가 없다고 하는 곳으로 향해서 비판을 캐고 들어가는 아이러니만을 하다 보면 엉망진창이 되며모든 것이 붕괴되기 때문에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대조적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유머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츠미 초월론적인 타자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후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네요.

 

마츠모토 : ‘일단은’ 식으로.

 

치바 그렇죠저는 어드혹(ad hoc)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생각해보면제가 전에 기고한 트랜스어딕션 동물-성의 생성변화(トランスアディクション───動物-生成変化(現代思想特集=人間/動物分割線, 2009年 7月号)와도 공명하네요. S1을 되풀이하는 것은 중독적이라고 밀러는 말하고 있으니까요제가 생각한 어딕션(addiction)도 그런 의미에서의 어떤 특이적인 증상이며또한 크리에이션(creation)과 결부된다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의 얘기로 말하면, S1이 몸을 옥죄어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변형하여 다른 크리에이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될 가능성을 트랜스어딕션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우츠미 단독의 S1에는 그런 어딕션적·에크리튀르적인 측면과 더불어그런 단순한 외침으로서의 측면도 있습니다외침은 마츠모토 씨의 논의에서 원-상징계의 + - + - … 라는 곳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거기에서 상징적인 심급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 “이 칭얼거림[외침]은 이런 의미예요라고 어머니가 유닛(unit)화한다. “배가 고프구나라고어머니도 칭얼거림이 매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그런 감각적인 차이에 배가 고프다라는 상징적 유닛을 덧씌운다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함으로써칭얼거림이 배가 고프다가 된다그러나 자폐증의 경우는 그런 응답이 없기에칭얼거림인 채인 것입니다.

 

마츠모토 그래서 늑대!”, “늑대!”라고 외칠 뿐이다.

 

치바 그리고 똑같은 그 외침이 온갖 것에 적용 가능해진다면.

 

우츠미 자폐증의 언어적인 측면은 매우 다양하네요.

 

마츠모토 정형발달처럼 S1과 S2가 연쇄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자폐증자에게는 하나뿐인 S1과 알고리즘적인 S2가 존재하며그 양자 사이에서 이러저러한 언어의 병리가 생겨나는 거죠그것은 거꾸로 정형발달이 무엇인지를 겉으로 드러내는[해명하는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도 되죠.

     조금 전 치바 씨의 트랜스어딕션” 말씀을 듣고서 생각한 건데요인프라크리틱 서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포스트인문학으로(インフラクリテイーク序説───ドゥルーズ 意味論理学からポスト人文学)(思想地図β』, vol. 1, 2011)에서는 장애를 짊어지게 된 후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썼습니다그 논의는 S1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치바 역시그곳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통할지도 모르겠네요그곳은 말라부에게서 얻은 발상입니다만.

 

마츠모토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S1에서 다른 것이 발생한다는 느낌이겠죠아니면 S1 자체가 유물론적으로 고쳐 써진다는 것일까요?

 

치바 그런 식으로 연결한다면, S1의 변형을 생각했던 게 되겠죠말라부를 좇아 말한다면데리다적인 똑같은 흔적의 이전(移転)오배송[誤配] 모델이 아니고흔적 그 자체가 변형되어 버렸다는 그녀의 모델을 구별하지요그리고 원래 S1을 복수 갖고 있거나, S1을 새롭게 추가한다는 것도제 테마입니다마츠모도 씨의 논의에서도라캉과 가타리의 대비에서특이성을 단수적으로 생각하는가 복수적으로 생각하는가라는 갈림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네요제가 여기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라캉에게는 S1이라는 말을 ‘essaim(무리)’라는 단어로 바꿔 부르는 말놀이가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하나이면서도 거기에는 뭔가 무리성이 있다는 것일까요?

 

마츠모토 : ‘essaim’이 라캉파 에서 사용되는 경우기본적으로는 스키조프레니인 자의 언어사용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말 하나하나가 현실계의 수준에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서 서로 분절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언어의 병리의 행방言語病理行方『유이티카ユリイカ, 2012年 9月号)에 적은 사례인데요제가 전에 본 사춘기 유형의 환자로환청을 호소했습니다그 사람은 어느 날, “소리를 질러서[말을 걸어서] 잡아주세요[をかけられたのでってください]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걸다[かける]라는 말이, “물을 뒤집어썼으니까 닦아줘[をかけられたからいてくれ]라고 할 때의 걸다[かける]라는 뉘앙스가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비유적인 의미에서 걸리는[かけられる]’ 것이었을 터인 목소리라는 말이 현실계와 직접적으로 이어지고물질화되는 언어사용이 모든 곳에서 이뤄지고메타포로 말하지 못하게 된다시니피앙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バラバラになり]그것 자체로 자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정신분열증의 정신병리로 말하면아마 콘크리티즘concretism(구상화 경향具象化傾向)이 될 것입니다.

     다만처음에 언어가 들어올 때하나의 언어만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할 수 있으니까요밀러조차, ‘essaim’에 관해서클로스프스키=니체적인 주체의 동일성의 산란散乱을 말하고 있습니다.

 

치바 과연 그렇군요복수의 언어가 상처로서이른바 폴리트라우마틱’[polytraumatic]한 형태에서 들어온다인프라크리틱(infracritique) 서설」 무렵저는 폴리트라우마티즘과 모노트라우마티즘이라는 대비를 했고, 50년대의 라캉은 전형적으로는 모노트라우마틱한 이론으로서 수용됐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들뢰즈=가타리특히 가타리는폴리트라우마티즘을 도입했다는 것이 제 견해였습니다.

 

마츠모토 그것은 재미있네요라캉은 1974년에 외상(traumatisme)을 구멍-외상(trou-matisme)’이라고 말합니다불가능한 것즉 존재하지 않는 성관계로서의 외상은 구멍이라고 말이죠그러면 언어의 도입에 의해 구멍이 몇 개 비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어요들뢰즈=가타리의 라캉 비판에 연결하면외상은 사실 다공적[구멍이 여럿]이고 이러저러한 곳에서 누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됩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 씨는 존재론적우편적(存在論的郵便的)(新潮社, 1998)에서 불가능한 것은 부정신학에서처럼 하나인가아니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그 뒤에 나온 토가와 유키(十川幸司) 씨의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精神分抵抗)(青土社, 2000)각주에서 히로키 씨의 논의를 다루었습니다라캉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을 통해 불가능한 것과 하나[한 가지] 만날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것은 하나뿐이라고 해도동시에 불가능한 것은 복수적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왜냐하면 각 주체는 각각에 있어서 상이한특이적인 정신분석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이죠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신분석이라는 리미트(limit, 극한속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은 하나이게 되지만다른 한편 가타리는 집단성에 대해 생각하며시니피앙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그러면 불가능한 것이 단수인가 복수인가라는 대립은정신분석과 스키조분석의 양자에 있어서의 임상의 장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합니다개인의 정신분석이라면 역시 시니피앙의 주체를 원칙으로서 다루기 때문에구멍=불가능한 것은 하나가 되는 셈이지만라 보르도 병원처럼 집단적 실천에서 하면 복수가 된다.

 

치바 제 논의라면한 개인 속에 복수의 구멍이 있다는 사고방식에 집착하는데요그렇기에 해리(解離)나 다중인격을 문제 삼았던 것이죠.

      90년대 말 경은페르소나의 다중성이 인터넷이나 버추얼한 것의 등장으로 강하게 의식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 씨의 복수성에 대한 논의도멀티레이어(multi-layer)한 상황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죠저도 그 시기에 청춘기를 보냈기에그런 감각을 어떻게 이론과 결부시키면 좋을까줄곧 생각했습니다.

 

우츠미 우리는 본래 이디어트(idiot, 백치) 같은 것이며거기에 조금만 공약 가능한 곳이 있다는 거죠실제로 자신의 경험을 이른바 의식의 흐름처럼 관찰해 보면,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같은 매우 기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He war”가 아니라 “Ich denke” 같은 녀석이항상 가만히 들러붙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오히려 그것들이 불가사의랄까어째서 그럴게 될까그런 의미에서의 일자여라”, “개체여라는 명령법이 지금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지만향후 그것이 어떻게 될까?

 

다른 방식으로?

치바 여기서 저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오늘의 일련의 화제는 특이성단독성각각의 별개[それぞれパラバラ]라는 방향을 향합니다만굳이 나쁘게 말한다면결국 사람 각각이라는 얘기가 되며그것은 이론적 퇴행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만일 이론에 재미가 있다면다소 폭력적이라고 할지라도복수의 것에 걸친 어떤 일반화를 행하는 곳에 있으며결국 임상의 현장에서 개개의 것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례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면이론의 [종언]이 아닌가라고 말이죠마츠모토 씨는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마츠모토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모든 것은 싱귤라리티이다라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결론이 되면이론은 죽어버립니다라캉이 목표로 한 것은자기 자신의 분석에서 얻어진 싱귤라리티가 있다며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정신분석의 이론 자체를 갱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점입니다분석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싱귤라리티에 도달한 곳으로부터 새롭게 이론을 가다듬어 내어야 합니다그것이 분석가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가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분석가마다 주목의 중점이 다르다는 거네요그것은 분석가 자신의 생톰의 반영이며그것을 밑천으로 클라이언트와 관계함으로써변화를 야기한다.

 

마츠모토 그렇군요좀 더 근원적으로는학파 속에서 다른 분석가와 공유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다른 분석가와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분석가를 차례로 산출한다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분석가는 다시 새롭게 자신의 특이성과 만나서 정신분석 이론을 갱신한다이른바 영구혁명입니다.

 

치바 그래서 궁금한데요각각의 분석가가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고다른 분석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클라이언트와 마주대하려고 하며그 다른 방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요?

 

마츠모토 예를 들면라캉의 단시간 세션은그가 특이적으로 발견한 방식이죠.

 

치바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는 장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마츠모토 : 24시간 내구(耐久) 정신분석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분석가도 있을지 모르죠(웃음).

 

치바 그래서 효과를 올리도록 별난 분석가가 나와도 원리적으로는 더 좋다고.

 

우츠미 치바 씨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치바 씨가 부분대상과 팔루스적 대상 사이에 기관 없는 신체”, 또는 전체화하지 않는 정리[모둠]를 놓고 있는 곳에 주목하고 싶습니다한쪽에 부분대상으로서의 현실적인 것이 있고다른 한쪽에 팔루스적인 대상으로서의 상징적인 것이 있다고 하며그 중간에 기관 없는 신체가 있다저는 팔루스적 전체성과 전체 대상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클라인이 말하는 부분대상은 오히려 기관 없는 신체와 닮은 곳이 있습니다.

 

치바 지금의 3항도식에서는클라인의 부분대상은팔루스적 통일과 전체화하지 않은 정리[모둠] 둘 다를 거듭[중첩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저의 해석입니다.

 

우츠미 아까 말한 아이러니적 잠재성과 분화·현동성의 중간에 유모적 개체화가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치바 글쎄요그것을 저는 특히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현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상상적인 것혹은 요도[尿道]적인 것을 넣는 곳이 급소라고 하죠이 구도는 두 사람의 책에서 공통된 것으로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그리고 치료가 어디를 목표로 하는 것이냐 하면각각의 별개バラバラ의 단편으로부터 자그마한 [turn, 선회]을 만드는버추얼리티 쪽으로 확산하면서도, [갔던 길을] 약간 되짚어와서 기관 없는 신체 쪽으로 간다아마 여기에 싱귤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흄도 데카르트도 비슷한 것을 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흄의 경우이인증(離人症)적으로 각각의 별개가 된[산산조각 난] 단편을 어소시에이트[associate, 연합]합니다만그렇다고 강력한 자기는 만들지 않는다일단 다발 같은 자신으로 좋다고 한다데카르트가 과장적인 회의를 하는 곳은 급진적인 사디즘이죠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하고어느 정도의 네거티비티[부정성]을 견딜 수 있는가그 위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물음 아래에서마지막으로 잠깐 그래도 생각하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turn, 선회]한다. “코기토” 등이라고 잘난 체 하는 느낌이 아닌 것입니다그저 자그마한잠깐 동안 생각한다는 형식뿐으로아무런 내실도 갖지 못하는미결정의 중지[허공에 붕 떠있는 것]로서 코기토가 산출된다마지막은 신이라는 상징적인 것을 증명하고 보증인으로 합니다만그것은 그가 정말로 했는가 여부는 의문입니다.

 

치바 그렇게 하면-코기토-회의(악령)상징-상상-현실이라는 3항도식을 할 수 있다.

 

우츠미 그렇네요흄의 경우는 공간이 단편화하는 반면데카르트의 경우는악령이 시간적으로 절단하는 건데요이런 아이러니에서 유머로 [turn, 선회]한다는 도식이 임상적으로도 생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치바 단편화를 거쳐서가까스로 정리[모둠, 종합]로 돌아간다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고 저라면 말할 것제 논의의 경우그 차원은 특히 상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판타슴이죠라캉파에서는판타슴의 횡단이라는 논의가 될까요?

 

마츠모토 판타슴의 횡단의 경우는모든 상징체계의 폐절까지를 지향하는 아이러니이죠모조리 없애버리는 듯한.

 

치바 그래도 뭔가가 남죠?

 

마츠모토 외상적인 핵이 남는다그 잔여를 꺼내기 위해라캉은 생톰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죠우츠미 씨가 지금 말했듯이조금 돌아온다고 할까당분간의 정리[모둠, 통일]를 만든다고 할까.

 

우츠미 생톰 그 자체가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는 논의가 아닙니까?

 

마츠모토 콩시스탕스[consistance]의 이마지네르(imaginaire)라는 논의이죠(フィリップ・ジュリアンラカンフロイトへの回帰誠信書房). 밀러는 타투나 피어스로 무너지고 있는 신체의 고리를 지탱해도 되잖아라고도 말합니다.

 

우츠미 들뢰즈에게 공백의 [바둑판] 칸(case vide)”이라는 개념이 있죠단적으로 말하면상상력은 빈 그릇이 있어야 비로소 기능할 수 있습니다제가 자주 드는 사례로, “나는 퍼즐에 비유하면 빈 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혹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포화되어 버린다는 것 같습니다이것이 자폐증 스펙트럼에 있어서의 상상의 부자유의 원형입니다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그렇게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었고지금은 그 세계로부터 탈출하고 있습니다만이번에는 정형자의 얄팍한 세계いい加減世界에 들어가는 것의 고통이 있다후설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그는 이 방의 건너편この部屋こう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혹은 자신에게는 등이 없다がない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습니다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혹은 집들의 건너편에 사람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든가.

    이른바 장애의 세 쌍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운데상상력의 장애는 매우 조잡한 취급방식을 하고 있습니다수집벽이나 철도 마니아 등흥미 관심의 폭이 좁다든가곧바로 그런 얘기가 되어버립니다그런 게 아니라경험 속에 빈 눈금을 어떻게 만들까이렇게 그들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마츠모토 빈 칸이 있어서 처음으로 전개되는 유형의 공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죠.

 

우츠미 다른 식으로 공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츠모토 당사자인 후지이 히로코(藤家寛子) 씨는분명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보이는 수많은 집의 각각에 가정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고 썼네요집이 일 뿐이고그 속에는 가정이 있고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공상이 미치는 공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일까요?

 

우츠미 그것을 가진다고 포지티브하게 파악되지 않을까요정형으로 이끌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작업이 아니니까.

 

마츠모토 공상하는 공백의 칸이 없는 대신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우츠미 후설의 현상학도 하나의 예일 수 있죠가령 타인의 마음도 지금 보이고 있는 세계의 건너편이니까그에게 있어서는 자명한 것은 아닌 겁니다.

 

치바 얼마나 그것이 임시로 마련된 것인가에 대한 이론 구성이 되는 거네요.

 

우츠미 또 한 명을 거론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일까요그의 논리철학논고는 명제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도중에논리에서 윤리로 문제가 이행합니다이 전회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죽음이라는 것에 직면하여다시금 개체화가 촉진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관은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하듯이한계라는 막간隙間가까스로 자신의 장소가 확보되고 있습니다.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2/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S1또는 S1뿐인 세계

치바 그런데 초보적으로 투박하게 여쭈는데요자체성애가 처음 생길 때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언어 체험이 충격(shock)적으로 도입되고 그것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라는 것으로원래 갖고 있던 유전적기질적 경향성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의 특이성의 조합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는 건가요모든 것을 특이성에 기초해 말씀하신 거라면유소년기에 특수한 외적 사태가 있었다고 하신 것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요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질이 다르다는 얘기에도 가깝다고 느껴지네요.

 

마츠모토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꽤 가까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에서도라의 기침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에서의 향락의 체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시니피앙의 수준에서 증상을 해석하면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그러면 도라가 유년기부터 고무젖꼭지만 빨고 있었다는 등 신체의 소인(素因)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이런 소인(素因)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고 있으며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유전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소질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거꾸로 말하면거기까지 다다르지 않으면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치바 정신분석은 기질성이 아니라 심인성의 영역 안에서 어느 정도 할 수 있는가라는 이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그러나 그것으로는 너무 단순하죠라캉의 경우는 끝이 있는 분석을 믿었는데요왜 끝이 있냐 하면낫지 않고 제거할 수 없는 증상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입니다그것은 대충 말하면기질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계면界面으로서 있는움직이기 힘든 부분에 부딪칠 때까지 말을 사용하는 것이지만거기에 부딪침으로써정신분석의 한계이며또한 신체의 의학과 어울리는 듯한 장면이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는 것일 테죠.

 

마츠모토 그곳이 바로 라캉이 프로이트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입니다프로이트의 경우끝이 없는 분석에 왜 끝이 없냐 하면거세 콤플렉스와 페니스 선망이라는 벽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팔루스의 존재/부재에 대해 구축된 콤플렉스라는 곳에서 끝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다른 한편라캉의 경우는 그것을 뚫고 나온 분석을 목표로 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거기에서 프로이트로부터 라캉에게로라는 정신분석의 갱신 또는 재정의를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아까 치바 씨의 물음에 대해서인데요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애당초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폐증의 정신병리의 기본입니다반응은 일어나지만 응답은 없다타자로부터 이쪽으로 향해오는 지향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시선이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처음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해서 이비인후과로 데려가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마츠모토 씨라고 부르면 마츠모토 씨는 이쪽을 봅니다만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혹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는 거의 자발적 운동을 할 수 없지만그래도 부모가 품에 안으면 그것에 맞춰서 몸의 자세를 취합니다그런데 자폐증 아이를 품에 안으면곡물이 든 배낭을 안고 있는 것처럼 너무 무겁습니다그렇게 품에 안는 것에 포함되는 지향성에 대해서도 신체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반응성의 결여가 자폐성의 핵심 특징입니다정형발달의 경우품에 안는 것에 대한 응답은 꽤 이른 단계부터 느껴집니다만눈빛이나 호명에 대한 응답은대부분 9개월부터 시작됩니다시선이 맞으면 수줍은 듯이 낯가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이것이 자기라는 것의 밑바탕[元基] 같은 것입니다그 이전에는전반적인 짜임새가 없는 세계 속에 있습니다.

    마츠모토 씨의 얘기와 관련되는 것은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의 맨 처음에서 -상징계에 대해 논한 대목입니다그곳에서는 부분대상과 전체대상이 전적으로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데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라캉적으로는부분대상은 현실적[실재적]인 것인 반면전체대상은 팔루스적인 다발[묶음]에 의해 만들어져 있으며상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클라인파는 발달사적으로 보면우선 부분대상이 있고그것이 통합되어 전체대상이 된다고 해설합니다만그것은 전혀 얘기가 다릅니다부분대상은 전체대상이라는 관점이 있고서야 비로소 소급해서 나오는 것입니다전체대상은시선이 마주치거나 부름에 반응하는 등의 상징적인 개체화로의 힘이 걸리는 9개월만에 한꺼번에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차원의 것입니다부분대상은 이런 상징적인 것의 설정의 피안에 있습니다.

    자폐아의 행동에서부분대상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은예를 들어 이런 경우입니다그들이 뭔가를 갖고서 놀고 있는데그걸 집어들어 방해했다고 칩시다보통의 아이라면방해한 상대로 향합니다만자폐아는 방해를 하는 손으로만 향합니다혹은 카나의 논문의 있는 사례인데요바늘로 찌르면찌른 상대가 아니라 바늘 자체를 두려워한다이처럼 자폐아는 단편적 세계 속에 있으며그것을 자체성애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츠모토 부분대상만이 있고전체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일어서지 않는다는 거죠.

 

우츠미 그렇게 되면다음으로 S2 없는 S1의 신분이 문제가 됩니다. S1은 S2가 있어서 사후적으로 설정되는 것입니다만, S1밖에 없을 때그 양태는 어떻게 될까요?

 

마츠모토 얼마전 한밤중에 NHK 방송을 봤다면아르 브루트(Art Brut, 아웃사이더 아트)의 특집을 했습니다그 프로그램에서 장애인 시설에 있는 분으로해외에서도 개인전을 열게 된 시바타 에이이치(柴田鋭一) 씨라는 분의 작품을 소개했는데요그 분은 처음 무렵에는, ‘2’와 ‘3’만을 오로지 반복해서 캔버스에 그렸어요그것이 대단한 작품이 되었습니다오랫동안 ‘2’와 ‘3’을 반복했는데요그 후에 비누[石鹸세켄]의 []’”라는 문자만 줄곧 그리게 됩니다그것이 해외에서 받아들여져 개인전까지도 열게 됐다고 합니다이 경우, ‘2’와 ‘3’, ‘[]’ 같은 문자가 S1입니다이런 문자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본인도 자폐적이며 중독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극치인 것은반복하고 있는 []’라는 글자가 다름 아닌 비누[세켄]의 []’”라는 것입니다본인은 단순히 []’라고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이 []’는 예를 들어 세계[세카이]’나 석유[세키유]’ 등으로 분절화되는 세[]’가 아니라항상 비누[세켄]의 []’” 그 자체이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치바 문맥 형성을 하지 않는 문자로서의 문자.

 

마츠모토 바로 레트르(lettre)’네요그런 자체성애적인 것의 향락성의 제시와 에크리튀르 사이의 관계를라캉은 조이스론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마츠모토 씨는 에릭 로랑이 언급한 로신느 르포르Rosine Lefort의 분석에서, “늑대!”라고 고함을 지르는 사례를 참조했습니다저것은 [누군가의시선을 받거나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패닉 상태가 됐을 때 외치는 것이었죠.

 

마츠모토 (증례인 로베르Robert[Rosine et Robert LEFORT : Naissance de l'Autre, Seuil, 1980])는 자신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구멍의 출현에 대한 명명으로서 늑대!”라는 소리를 지르는데요그 시니피앙은 분절화되지 않고항상 늑대!”인 채입니다.

 

우츠미 반면 청년기 혹은 성인기의 자폐증 스펙트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일정한혹은 그것 이상의 언어능력이 있습니다그 경우의 특징은말을 도구처럼혹은 모국어인데도 외국어처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말이 신체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고 할까말하자면 앱(App)처럼 사용됩니다바꿔 말한다면신체가 언어에 의해 포맷되지 않았다이 경우는 S2만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다른 한편에릭 로랑이 언급한 사례처럼 중증 자폐아가 내뱉는 것은 단독적인 S1이며주술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지시한다고 하는처음 부분만 있습니다언어는이 지시에 의해 대상을 절취하고공동 주의(注意등에 의해 공유되는 과정을 통해서 생성합니다그러나 그 앞에서는무엇이든 늑대!”라고 말하면 일단은 패닉 상태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식으로주술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치바 매직워드이며와일드카드인 거네요.

 

마츠모토 자폐증자에게는정형발달의 사람과 똑같은 의미에서 자신의 말이 되는 것은 그 말(S1)뿐이며그들은 그것에 이어진 S2를 거절하고 있습니다라캉은 그것을자폐증자는 말에 대해 자신을 지킨다고 표현합니다그런 사람들이 현행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S2를 S1과 떼어낸 상태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S1 없는 S2입니다그러면공공공간에서 그들이 이용하는 언어(S2)일종의 컴퓨터 언어처럼 되어 버린다현대 라캉파에서는 자폐증에 있어서의 언어의 병리는이처럼 S1과 S2의 분리로서 파악되는 것입니다한편에는 주술적반복적중독적인 매직워드로서의 언어(S1)의 사용이 있으며그것이 똑같은 말에 대한 상동적(常同的)인 집착이 된다다른 한편에서는그들이 S2를 인공언어로서 만들어냅니다땅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상징적인 논리만으로 쓴 루이스 캐롤이 그 일례입니다.

 

우츠미 자폐증 스펙트럼의 S2는 사적 언어처럼 기능할 뿐인 곳이 있습니다사용하는 말은 우리와 공통이며대화가 가능하지만Speech act[발화행위, 발화수행]로서는 기능하지 않는다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함께 [맞물려다른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기어” 같은 것입니다제가 경험한 어떤 청년 사례는자신의 괴로움을 현실감이 없다”, “이인감(離人感)이 있다[자신이 자신이라는 감각을 상실해버리는 것]”, “만족감이 없다라는 세 개의 말로 나눠서 호소한다그러나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매회 그렇듯이그것이 어떤 괴로움인지를 물어보는 처지가 된다그도 끊임없이 그때마다 알려줍니다만역시 금방 잊어버린다사적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통증의 경우처럼 아파!’라는 것에 의해 공통의 코드가 열리고타인에게 이해되는 동시에 자신밖에는 모르는 고유한 감각이 남는다는 것이 되지 않는다감각만이 있고그것에 태그를 열심히 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치바 극히 사적인 기준으로 연합을 하기 때문에듣는 쪽에도 전해지지 않는군요.

 

우츠미 그렇군요에르곤즉 잘 만들어진 언어에 가까운개념 규정이 먼저 있고그 태그로서 말이 있다아까의 늑대!”의 예에서는지시만 있고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만이번에는 정반대로개념이 있고거기에 말이 붙어 있을 뿐지시가 기능하지 않는다. “여기가 아파라든가 이것 때문에 괴로운 거야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치바 시스템이랄까언어 체계만이 있다논리의 공리계의 세계.

 

마츠모토 바로 수학기초론이라든가 분석철학 같은 세계네요.

     그런데 우츠미 씨가 방황하는 자기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さまよえる自己───ポストモダンの精神病理)(筑摩選書, 2012)의 마지막에서 논하신 것은근대의 노모스가 만들어져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던 시대 이후에 초월론적인 것이 절멸한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도래하면타자의 부름이나 시선에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비근한 예로 깊숙이 들어갑니다만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이떠들고 있는 학생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있으면그 시선을 눈치 챈 학생들이 차츰차츰 조용해진다선생님은 거기서 여러분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3분이 걸렸습니다” 등이라고 말하는 거네요(웃음). “조용히 해라고 말하지 않아도눈빛의 힘에 의해,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묻는 자로서 기능하는 타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그런 시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근대적 주체였던 것입니다.

 

치바 :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가 근대의 기조네요그러나 포스트모던에서는눈앞에 서 있어도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다를 떨 수 있다교실의 뒤로 돌아가면 판옵티콘의 기능이 작동한다는 예가 [아사다 아키라의구조와 힘』[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나오는 것입니다만현재에는 앞에 있든 뒤에 있든 관계가 없다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네요(웃음).

 

마츠모토 현대의 주체는 타자성과 시선이 기능하지 않게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우츠미 씨는 그런 주체의 모습은 단순한 데이터베이스를 따른 계산기적 합리성이며거기에는 결단의 계기도 없고근대적인 의미의 자기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시네요. 이 논의는 확실히 그렇다고 실감할 수 있는 것도 많네요더 흥미롭게도 근대적 주체가 전제로 삼았던 타자성의 일어섬がり이나 시선과 목소리에 의한 주체화가 기능하지 못한 후에 등장한이런 포스트 휴먼적 인간상에국내의 정신병리학자들이 거의 동시대적으로 주목하고여러 가지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예를 들어스즈키 쿠니후미(鈴木國文씨는 신자유주의란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자유는 가능한가?” 등의 물음을 빼고서, “자유니까 이렇다”, “자유니까 이래도 된다고 말하는 원리라고 지적하십니다바로 직전에서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은 채어떤 전제를 바탕으로 알고리듬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입니다현대에서는 그런 논리가 이러저러한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고그것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발달장애의 임상풍경과 꽤 가까운 것이 있다는 것을 스즈키 씨는 지적합니다카토 사토시(加藤敏) 씨는 똑같은 사태를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부릅니다.

 

우츠미 그것은 자유가 S1에서 S2가 되었다는 것인가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의 보증인으로서 있었던 S1지금은 하인처럼 혹사한다[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전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가요?

 

마츠모토 아마 자유를 S2만으로 생각하게 되며진리(S1)가 배제되어 버린즉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우리 세대가 보면그렇게 되는데요꽤 올드 패션한 시각이 아닐까요그래서 마츠모토 씨나 치바 씨의 세대에서는 어떻게 보는지흥미가 있습니다.

 

치바 저는 우츠미 씨의 그런 감각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제가 신세대에 속해 있고 알고리즘적인 사물의 처리에 친화성을 느낀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근본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 듯한 물음그 문제성이라는 부정성 ― 들뢰즈는 문제성을 부정성이라고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존재” 같은 식으로 불렀습니다만 ― 이 근본에 있은 다음에그 부정성을 달래면서가설(仮設)된 체계에서 어떻게 사물을 움직이는가그 위에서그래도 답할 수 없는 물음으로 다시 되돌아간다이런 답할 수 없는 문제와당장의 시스템 운용의 이중구조로 해온 것이 근대문화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그렇게 해서 가설되고 있는 것을 그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지금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분석철학 등의 논의에는 그런 경향이 강하네요대륙철학에서는 사물의 정의가 반드시 약정되지는 않은 상황에서 얘기를 하기 때문에분석철학자로부터는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게 된다이쪽에서 보면거꾸로 그런 절차적 논의를 하고 있는 쪽이 섬뜩하고[낯설면서 친숙하고]조금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분석철학은 언어의 사용방식 자체가 S2적이고, “그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항상 듣는다그런 게 아니라사용이야말로 본래의 언어이죠그러나 그 전에,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함으로써단단하게 다져버린다[확고하게 해버린다].

 

마츠모토 저는 알고리즘적인 사고방식은 싫어하지는 않지만그래도 지난날 눈에 띄게 됐던 S2만의 원리에는 자주 놀라며분석철학 책은 읽는 데 꽤 고생니다자폐증자였던 템플 그랜딘은, “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못해 괴로워하고모든 개를 관찰한 결과, “라고 불리는 것은 코의 모양이 모두 한결 같다는 것을 깨닫고그것에 의해 라는 개념의 내포를 처음으로 만들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치바 일부의 분석철학은 [단단하게 다져진 것이 아니라] 흔들림이 있는 프래그머틱스로 사용된 사물의 정의를형식적으로 원점으로 돌아가 재검토해 S2만의 구성으로 봤을 때이전의 애매함이 붕괴하고, “사실은 개의 본질은 그 코에만 있었던 것이다처럼 이상하게 한정적인 결론이 되는 것을특별히 지적인 놀라움이나 학문의 발전인 것처럼 말하고그것의 향락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마츠모토 그렇게 함으로써 향락하고 있다.

 

치바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프래그머틱스에 있어서의 말의 두께가 S2적인 단조로움 속에 해체되는 것을 기분 좋다고 생각하고 있죠그리고 그것을말의 두께의 세계에 대해모종의 위협적으로 대치시키는 것에 쾌를 느끼고 있다.

 

우츠미 아이가 말을 배울 때에도혹은 부모가 말을 가르칠 때에도개념은 가르칠 수 없죠차를 보고 붕붕이라고 가르쳐보죠그래서 차가 아닌 것을 아이가 붕붕이라고 부르고, “그것은 붕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개념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처음에 지시가 있는 것입니다개념 규정에 너무 얽매이면 잘 안 되는 거죠.

 

치바 최근에는 여러 가지 절차적인 것을 직장에서 요구합니다. “이러저러할 때에는 이러저러한 목소리를 내고 몇 초 기다렸다가 이렇게 해라” 같은 것을 하는 것이 분명한 가게도 있습니다그런 것은 바로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말하고 싶은 상황입니다대학 업무에서도 그것에 가까운 것을 하도록 하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우츠미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수십 시간의 연수가 있다고 합니다다만셀프엔조이먼트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커피가.

 

마츠모토 최근의 전지구적 기업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개개의 고객에 인간적인 대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매뉴얼로 인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치바 그런 건 왠지 섬뜩하죠[낯선 친숙함이죠].

 

마츠모토 섬뜩합니다[낯선 친숙함입니다].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사람에게 점장이 개인적으로 코칭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아요거기에는 꽤 심리학의 메소드가 들어 있어서그래서 나오는 것이 완전히 통제된 인간미가 있는 접객입니다.

 

치바 : S2밖에 없는 가설적 공리체계로서의 인간 같음.

 

마츠모토 인공지능은 그곳에서 이미 완성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바 불가능한 것이나 무한이라는 것이 지성에 있어서 문제였던 시대에는 인공지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만거꾸로 시대가 인간의 지성을 인공지능적으로 했다면그건 인공지능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최근에는 알고리듬으로 문제 해결하는 것이 인공 지능이라고 꽤 흔하게(casual) 불리게 됐네요. “우리 회사에서는 이런 인공지능 알고리듬으로 라든가저런 캐주얼화는 기묘하다고 생각합니다옛날 같으면 인공지능이 만들었다고까지 야단스럽게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요이렇게 인공지능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원래 모델이 되는 인간 문명이 인공 지능적으로 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 現代思想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 이 글은  現代思想』 2015년 3월호 '정신병리의 시대'에 수록된 첫 번째 대담을 옮긴 것이다. 이 대담을 옮기면서 다시금 실감한 것은, '영어'나 '불어'를 번역하지 않고 쓰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말을 할 때, 꼭 필요한 경우를 빼면 절대로 영어나 불어 등을 그대로 얘기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아무튼 위 사진의 가운데 인물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전달하기 위해 이 글을 옮긴다. 그리고 세 번째 인물인 마츠모토 타쿠야의 글은 이미 <현대 라캉파의 논점들>이라는 번역으로 소개했으므로 그것도 참고하기 바란다.

現代思想』 2015년 3월호를 전체적으로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에 기반한 논의가 중심이라는 점도 지적해둔다. 

* 일본에서는 라캉의 '실재계'를 대체로 '현실계'로 옮긴다. 이를 다시 '실재계'로 옮겨적었으나, '현실'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에도 이것이 '실재계'와 연결된 것임을 생각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바꾸긴 했으나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 또한 '스키조프레니'의 경우 예전에는 '정신분열증', '정신분열증자' 등으로 옮겨졌으나, 요즘에는 '조현병', '조현병 환자' 등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전처럼 이해하는 게 좋겠다. 아무튼 이것도 '스키조프레니'로 그대로 적어뒀다. 그들이 그렇게 발음했기 때문이다. 

  

일자의 향락

마츠모토 : 이번에 저는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 : 자크 라캉과 감별진단의 사상(はみな妄想する : ジャック・ラカンと鑑別診断思想(青土社, 2015)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대적인 라캉 연구를 참조하면서, 라캉을 통사적으로 재독해함으로써 라캉을 이른바 프랑스 현대사상속에 다시금 자리매김하는 저작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서서히 실감하며 알게 된 것은, 라캉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자크 알랭 밀러의 라캉 독해, 표준판 라캉을 만드는 공식화 작업이 전기·중기 라캉뿐 아니라 후기 라캉에도 미치며, 하나의 도달점이랄까, 모종의 일단락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일단락은 밀러가 2011년에 한 존재와 일자(l’Étre et l’Un)(별명 : 하나뿐인 일자(L’Un-tout-seul), 하나뿐인 자들(Les-tout-seuls))라는 강의입니다. 이 강의는 70년대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는 후기 라캉의 행보를 지금까지 읽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사후적으로 보면, 이 독해는 밀러가 편집한 [라캉의] 세미나출판의 흐름과도 합치했습니다. 2005년에 13권인 생톰이 출판되고, 2007년에는 18권인 외양이 아닐 수도 있는 담론에 대해(On a discourse that might not be a semblance), 2011년에 19권인 우 피르(Ou Pire)가 출판됐습니다. 그리고 그 집대성인 밀러의 2011년의 강의는 우 피르의 해설이기도 합니다. 제 책이 노린 것은 우선 우 피르에 이르는 라캉 독해를 밀러에 의거하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 독해의 성과를 프랑스의 정신병리학의 논의에 떨궈놓고, 더 나아가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와의 대결 등 현대사상의 여러 가지 과제 속에서 전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의 밀러 주변 논자들의 논의에는 아무래도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와의 논의와 친근성을 가진 논의가 있는데도 그 누구도 그것을 정색하면서 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존재와 일자에서의 라캉 독해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라캉은 그동안 주로 하이데거 존재론의 영향이 강한 이론가로 불렸지만, 밀러에 따르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캉은 세미나18, 19권의 논의를 거쳐, 20권인 앙코르에서 성별화의 식(性別化)”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존재론(ontologie)”을 버리고, 파르메니데스=플로티누스적인 일자론(hénologie)”으로 전회했다고 밀러는 주장합니다. 물론 라캉은 71~72년의 우 피르세미나에서 일자론이라는 말을 이미 썼어요. 하지만 세미나 해적판을 편찬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일자론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거의 모든 해적판이 라캉이 일자론(hénologie)’이라고 말하는 대목을 정확하게 옮겨 적지(transcription) 못했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에서 일자론으로의 전회를 중시하는 밀러의 2011년 강의에 의해, 아마 처음으로 후기 라캉의 일자론의 이론적 의의가 끄집어내진 것입니다.

    헌데, 이 일자론은 치바 씨가 너무 움직이지 마라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哲学)(河出書房新社, 2013)에서 다룬 존재론적 파시즘얘기와 유비적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들뢰즈한테는 모든 것이 융합하고 점점 연결되어 하나(일자)가 된다는 논의의 흐름이 있으며, 그것은 특히 네그리=하트화된 들뢰즈에서 현저한데요, 그것은 일자의 파시즘이 되어버릴 위험성을 품고 있다. 그런 접속적 들뢰즈와는 정반대의 들뢰즈 상()을 치바 씨는 절단이라는 키워드로 끄집어낸 것입니다. 다른 한편, 밀러가 후기 라캉의 일자론에서 끄집어낸 일자도 존재론적 파시즘의 일자 밀러는 그것을 융합적 일자(Un fusionnel)’라고 말합니다 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존재와 일자의 다른 제목이기도 한 “L’Un-tout-seul”, 즉 단 하나뿐이며, 타자와 융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별개의 형태인 듯한 일자임을 하이데거적인 라캉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플로티누스적인 라캉 속에서 밀러는 끄집어낸 것입니다.

 

치바 : 일자에 대해 융합적 일자라는 이해가 있다는 것을 한 번 말한 뒤에, 그런 게 아니라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네요.

 

마츠모토 : 그렇죠. 앙코르의 세미나에서도, 맨 처음에 융합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래 일자였다고 간주되는 남자와 여자가 재융합하는 것을 지향하는 안드로귀노스(androgynos)의 신화처럼, 융합적인 것을 지향하는 에로스적 향락을 라캉은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보편적 융합의 일자와는 상이한 향락으로서, “여성의 향락(<다름>의 향락)”을 끄집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의 일자론은 여성의 향락의 발견을 경유하여, 보편적 융합의 원리로부터 벗어나는 각각의 개별적인 일자의 향락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앙코르6장과 7장에서, 라캉은 유명한 성별화의 공식을 완성시킵니다. 7, 8장에는 백치[바보]의 향락(jouissance de l’idiot)”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왜 백치인가? 라캉은 남성의 향락이 기본적으로 자위행위(masterbation) 같은 것이며, 자신의 팔루스를 사용해 자위하는 듯한 것이며, 그래서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남성의 향락은 타자와 관계를 갖지 않는 어리석고 못난 향락이라는 의미에서 라캉은 백치의 향락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앙코르 8장에서 백치의 향락이라고 말할 경우의 백치라는 말에는 사실 그리스어의 어원인 ίδιώτης가 지닌 기묘한개별적인이라는 두 개의 의미가 있다고 라캉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백치의 향락이 지닌 개별적이라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이적=단독적(singulier)”이라는 의미를 중시하기 시작합니다. 그 향락이, 융합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과는 완전히 상이한, 하나뿐인 각각의 개별적인 형태인 일자의 향락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앙코르성별화의 식이 완성된 후에 라캉이 발견한 것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앙코르8장 이후의 라캉은 전년도의 우 피르에서 도입된 일자론을 논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후 라캉은, 그 일자의 향락은 자체성애적인 것이며, 거기에 주체의 향락의 특이성=단독성(singulalité)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거기에서 분석의 종결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톰의 세미나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임스 조이스는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 예술을 만든 것이라는, 꽤 표층적인 이해가 생톰에 관해 이뤄져왔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정신병 같은 증상이 있은 후에 창작을 한 사람이라면 뭐든지 생톰입니다. 그러나 라캉의 주안점은, 사실은 거기에 없는 게 아닐까? 라캉은 생톰을 개강하기 직전에 증상으로서의 조이스(Joyce le symptôme)라는 강연을 했습니다만, 거기에서 라캉은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가 자신의 향락의 특이성을 전면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하다, 보통이라면 분석을 하지 않으면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지만, 조이스는 분석을 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도달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체성애적인 향락은 무엇이냐 하면, 라캉은 그것을 신체의 사건이라는 말로 얘기합니다. 신체의 사건이란, 어린이가 자체성애적으로 향락하는 곳에 처음으로 언어가 개입할 때에 주어진 충격 같은 것이며, 거기에서는 시니피앙이 물론 들어오지만, 그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과 분절화되지 않고 하나뿐이며, 게다가 그것은 향락과 일체가 된 일종의 에크리튀르 같은 것이다. 그 에크리튀르의 장소를 정신분석은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를 라캉은 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논의가 2011년까지 프랑스에서 라캉 독해의 모종의 일단락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화제에 올린 치바 씨의 책과 닮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 , 공통의 규범화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개개 별별의 특이성을 어떻게 격려하는가, 부활하는가라는 방향으로 후기 라캉의 임상은 향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들뢰즈-가타리와 거의 같죠. 다만, 거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그렇더라도 어떤 규범화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분석을 밀고나가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규범성에 의거하는 기술과 특이성을 장려하는 기술이 어떤 관계에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각날 수밖에 없죠. 이것은 나중에 재차 건들고 싶습니다.

    그 전에, 일자론 얘기는 재미있네요. 여기에서 얘기되는 일자성, 혼자서 있는 것의 일자성은 일종의 자위(onanism)를 긍정한다는 의미이죠. 그것도 바로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욕망의 특이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통하며, 제 책에서 독신자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전과도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 책에서는 일자-전체가 융합적 기능을 갖는 것을 경계한 것인데요, 일자에게 다른 의미를 나누고, 분리한 상태, ‘분리성을 가리키는 의미로서 사용하는 것은 있죠.

 

마츠모토 : 너무 움직이지 마라에서, 자기항략(self-enjoyment, 이하 '셀프엔조이먼트'로 옮김)론을 전개하는 곳에서 바로 플로티누스를 인용하고 있고, 전체화 불가능한 단편의 세계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도 논합니다만, 꽤 자폐증적인 세계에 가깝다고 느끼며, 후기 라캉이 봤던 특이성의 세계에 겹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밀러의 존재와 일자를 읽은 것은 2012년 혹은 13년인데요, 2013년에 치바 씨의 책이 나왔을 때, 양자의 가까움에 꽤 놀랐습니다.

 

치바 : 저는 밀러를 읽지 않았지만, 뭔가 세계동시적으로 움직이던 해석 경향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폐증 개념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어떤 밸런스로 생각하는가가 오늘날에도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무튼 양보할 수 없는 향락의 장소라는 의미를 자폐라는 말로 형언하고 싶다는 것은 제게도 전부터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의료 전문가가 아니라서, 괴로운 상태가 되는 것도 포함해 자폐증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할 수 없다며 제 자신에게 금지해왔습니다. 그래서 자폐증을 비유로서는 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사실 이 책을 한창 쓰고 있을 때부터 마츠모토 씨와는 몇 번이나 얘기는 나눴고, 그 속에서 자폐증 개념을 셀프엔조이먼트와 가깝게 하는 고찰은 이미 나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가 죽치고 앉아 있던 맥락이 마침내 마츠모토 씨의 책에서 전면 전개됐다는 형태가 됐으며, 이것이 이후 어떤 식으로 논의를 파급시키게 될지는 참으로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 셀프엔조이먼트와도 얽혀 있는 얘기인데요, 자체성애는 브로일러1911년에 스키조프레니를 개념화했을 때, 구스타프 융을 경유하여 프로이트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만일 자체성애를 싱귤라리티(singularité)로 바꿔 읽으면, 스키조프레니의 경우 싱귤라리티(singularité)의 도상에서 초월론적인 것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미지화해서 말하면, 카프카의 법의 문 앞에서같은 것이랄까요. 시골에서 온 남자는 문 앞에 가까스로 도착합니다만, 문지기한테 걸려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거기에 머뭅니다. 마지막에 문지기는 이 문은 너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집니다. 스키조프레니싱귤라리티에 대해 어피니티(affinity, 친화성)를 갖고 있습니다만, 동시에 그것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치료자는, 이런 싱귤라리티를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요구됩니다. 기묘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싱귤러(singular)양자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여부가 치료자로서의 자질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스키조프레니의 경우에는, 아직 초월론적 심급이 기능하고 있으며, 부정신학적 구도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은 그 빈 곳에 출현하는 자기장에 홀리고 이끌립니다. 라캉은 그것을 인격신(대타자)에게 말을 걸고 파라노이아에 준한 방향에서 얘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역시 카프카의 문이 이미지로는 가깝습니다. 실재계와 상징계가 떼어내진(decoupling) 양태랄까, 슈미트가 형식적인 법과 그것을 행사하는 힘을 나눠서 얘기하는 것을 흉내 낸다, 그 힘이 충만한 공백지대 같은 것이 개시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치료관계에 있어서의 싱귤라리티는 이런 강한 자기장으로부터, 얼마나 이심적(離心的)인 지점까지 데려오게 되느냐는 것에 관련된 프락시스입니다. 두 사람의 저작을 읽으면서, 자폐증 임상과 스키조프레니 임상을 대비해 보는 관점이 부상하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마츠모토 : 예전에 기무라 빈(木村敏) 씨는 정신분열증이 개별화의 위기에서 발병한다고 말했습니다만, 어쩌면 혹시 청년기에 다시금 싱귤라리티를 낼 때에 실패하여 발병한다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면, 자폐증에서 왜 싱귤라리티가 정신분열증만큼 위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안전하게 나오게 되는가 하면, 그들은 개별화의 위기가 위기로 되지 않도록, 초월론적인 것과의 마주침을 모종의 방식으로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싱귤라리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츠미 : 우리가 일반임상에서 관련된 자폐증 스펙트럼의 사례는, 주로 청년기 이후의 사람들에서, 자타미분화의 상태로부터 개체화가 시작될 무렵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아주 고통스러운 시기에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타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만, 반드시 그것이 초월론적 차원의 것이지는 않습니다.

    밀러는 라캉 독해에서 배제가 최종적으로는 일반화 배제이며, 신경증과 정신병 둘 다가 토템과 터부적인 구도 하에 있다고 했습니다. , “아버지의 이름이 배제되는 것은 정신병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양자에 공통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자폐증 스펙트럼이 문제가 되고 있는 현재에서 돌이켜보면, 이 일반화 배제에 의해 정신병도 신경증도 정형 발달定型発達한 것이라고 말한 게 됩니다.

 

치바 : 일반화 배제를 정형 발달의 표식으로 보는 읽기를 할 수 있다고.

 

우츠미 : 그렇군요. 정형자(定型者)라는 것은, 자신에게 눈뜨기 전에, 타자와 한번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키조프레니에게 찾아온 타자는, “어딘가에서 한번쯤 만난 듯한 타자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혀 만난 적이 없었을 텐데도, 왠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녀석인 것 같다는 느낌이니까, 전적으로 무관한 타자가 아닌 것입니다.

 

마츠모토 : 그래서 무서움이 있다는 것이죠.

 

우츠미 : 그렇군요. 반면, 자폐증 사람들은 바로 처음에 타자와 만나는 것입니다.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타자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다니!”라는 식으로 놀라게 됩니다. 레오 카나1943년의 논고에서 자폐증개념을 제시했습니다만, 그때, 똑같은 자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스키조프레니withdrawal인 반면, 자폐증은 aloneness이며, 양자는 철저하게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브로이어 식으로 말하면, 스키조프레니는 한 번 구성된 현실로부터 철퇴[뒤로 물러섬]하여 공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반면 아까 말한 셀프엔조이먼트나 자체성애는 카나가 자폐증 속에서 찾아낸 aloneness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츠모토 : 자체성애라는 곳으로 얘기를 되돌리면, 우츠미 씨가 아까 설명하셨듯이, 자체성애는 원래 정신분열증 개념이 생길 때 문제가 된 개념입니다. 프로이트는 1911년의 슈레버 증례론에서 슈레버의 파라노이아를 논합니다만, 그는 거기서 동시에 스키조프레니를 논합니다. 그는 거기서, 스키조프레니파라노이아보다 더 옛날까지, 즉 자체성애에 가까운 곳까지 퇴행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자폐증과 스키조프레니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자, 프로이트-라캉파에서는 자폐증을 정신병과 똑같은 것으로 보는 것 아니냐라는 비판이 라캉파 속에서도 생깁니다. 그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퇴행의 지점에 의해, 라캉파의 말투로 얘기하면 향락의 회귀모드(mode)의 차이에 의해,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을 차이화하려고 했다는 것이 에릭 로랑(Éric Laurent) 등의 논의입니다. 어떻게 차이화하는가 하면, 파라노이아는 향락을 대타자 쪽에서 찾아내기에, 슈레버처럼 대타자(신이나 파울 에밀 플렉지히Paul Emil Flechsig(1847~1929) 교수)가 나를 향락하려고 한다는 망상을 구축한다. 스키조프레니에서는 향락이 자신의 신체에 회귀하기에, 몸 위에 향락이 다양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다른 한편, 자폐증자는 원래 대타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폐증자에게는 일자의 시니피앙”(S1)만이 도입되고 있지만, 그들은 S1에 연쇄하게 되는 시니피앙(S2)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S2를 거절하는 대신, 자체성애가 새겨진 일자의 시니피앙”(S1)을 줄곧 반복해서 사용하고, 특히 신체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향락한다. 그것은, 신체의 이른바 전체의 향락이 회귀해오는 스키조프레니와는 다른 향락의 방식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스키조프레니 환자에게는 향락의 신체로의 회귀가 실제로 증상으로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음부를 이리저리 쓰다듬다”, “의미가 불분명한 힘이 몸을 조작하고 있다등의 증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증상들은 어느 정도 섹슈얼한[성적인] 것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무서운 타자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성화(性化)된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자폐증자에게 보이는 향락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허그 머신(Hug machine)에는 자폐증자의 향락의 모습이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를 억누르는 기기에 자신이 들어감으로써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화(性化)된 방식에서 벗어난 곳에서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통제하는가가 자폐증에서의 일자의 향락에서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은 둘 다 신체에 있어서 향락하는 체제가 전면에 나오는 병의 용태는 아니지만, 양자의 향락의 체제는 상이하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자체성애의 혁신성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셀프엔조이먼트와도 연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정치신학과 예외상태

일시 : 2013년 11월 2() 15:00 ~ 17:00

장소 児島惟謙館第1会議室

 

http://www.kansai-u.ac.jp/ILS/publication/asset/nomos/34/nomos34-04.pdf




다케시타 겐(竹下賢)

주최는 예외상태와 법연구회, 법학연구소의 연구반에서 했습니다만, 그 연구원인 다케시타입니다. 법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먼저 개회사를 예외상태와 법연구반의 주간이신 이지마(飯島)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이지마 미츠루(飯島暢)

예외상태와 법 연구반의 주간을 맡고 있는 법학부의 이지마(飯島)입니다.

오늘은 매우 바쁜 와중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외상태와 법 연구반은 멤버이자 지금 사회를 보고 계신 다케시타 겐(竹下賢) 선생, 그리고 여기 앉아 계신 가와구치(川口) 선생, 마츠오 미츠마사(松生光正) 선생, 그리고 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한 명인 고난대학(甲南大学)의 모리나가 마사츠나(森永真綱) 선생이라는 분이 정식 멤버입니다. 멤버 중에 다케시타(竹下) 선생 이외에는 모두 형법이 전공이며, 예외상태와 법이라고 말해도, 아무래도 형법적인 문맥에서의 관심이라는 것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 예외상태라고 말하면, 칼 슈미트의 사상이라는 것을 떼어낼 수 없습니다. 최근 줄곧 이 연구반에서는 칼 슈미트에 흥미를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은 매우 고명한, 가나자와대학(金沢大学)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선생을 모시고 칼 슈미트에 관해 정치신학과 예외상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됐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카마사 마사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다케시타 겐

그러면, 맨 처음으로, 사회자로서 강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지마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는데요, 이 연구반에서, 슈미트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나카마사 선생님이 최근 칼 슈미트의 입문 강의라는 두툼한 책을 작품사(作品社)라는 출판사에서 내셨습니다만, 나카마사 선생님은 상당히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하고 계시며, 다만 그 중에는 슈미트 연구라는 것에 상당히 공을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카마사 선생님은 1963년 히로시마 태생이며, 이후 도쿄대학을 수료하고, 현재 가나자와 대학(金沢大学) 법학류(法学類)의 교수입니다. 우리의 교토의 법리학 연구회라는 법철학 전문 연구회가 있습니다만, 거기에 항상 출석하고 있거나, 기타 정치사상, 현대독일사상, 그리고 사회철학 같은 학문분야에서, 매우 학제적인 형태로, 폭넓게 연구하고 계시는 선생이십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오늘은 정치신학과 예외상태라는 것을 말씀해 주실 겁니다. 나카마사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나카마사입니다. 90분의 시간이 주어졌기에, 칼 슈미트는 대체 어떤 인물인지, 왜 주목해야 하는지 등 기본적인 것부터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최근 일본에서 칼 슈미트에 관한 연구서가 몇 권 출판됐습니다. 법학 분야에서도 예를 들어 도교대학의 헌법 연구자인 이시카와(石川) 선생이 슈미트의 제도체 보장론”(制度体保障論)에 관해 쓴 저작이 있습니다만, 굳이 말하면 법학보다는 정치사상의 사람들이 슈미트 재평가의 역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칼 슈미트 자신은 헌법학, 혹은 법철학이 전문입니다만, 정치철학이나 국제법에 관한 저작이 많고, 정치사상가로 간주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반드시 칼 슈미트에 관한 전문적 연구인 것은 아니지만, 현대사상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슈미트에 대해 점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현대사상이 뭔지를 말하기 시작하면 복잡해지니까, 그런 지식의 영역이 성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얘기합니다만, 현대사상 혹은 포스트모던 사상이라 불리는 영역에서 칼 슈미트, 특히 예외상태에 주목하는 논고가 1990년 이후 늘고 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슈미트를 연구하는 것의 현대적 의의를 제 나름대로 한 마디로 정리해 표현하면, 그를 통해 법의 다크 사이드, 어두운 측면이 드러난다는 것이 됩니다.

이라는 것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이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으며, ‘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 의의를 의심하거나 하는 사상은 옛날부터 많이 있습니다. 아나키즘 계열의 사상에서는, 법이라는 것이 원래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긍정적인 면을 보이지 않고 처음부터 부정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슈미트는 법학자이기에, ‘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권리나 자유, 민주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근대법의 보통이 사고방식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슈미트의 의 본질론을 뒤쫓아가면, ‘이 인간의 어두운 면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슈미트 자신에게는 부정적인 것을 하고 있지는 아마도 않을 것이며, ‘에 의해 질서가 형성되는 것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만, 근대법에서의 자유나 권리나 평등 등의 상식적으로 익숙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는 듯합니다.

현대사상에서 적극적으로 슈미트를 참조하고 있는 사람은 다분히 좌파적, 아나키스트적 입장의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이 왜 굳이 슈미트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요? 아마 그들은 어떤 사회에서도, 어떤 형태로 은 필요하며, ‘을 없애려 해도 불가능하다, 사회가 있는 한 반드시 이 생긴다는 것을 현실로서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게다가 왜 이 인간에게 엉켜 붙어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탐구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근대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그들은, 자유와 평등을 핵으로 하는 서양근대의 법과 정치의 이념을 보편주의적으로 철저하게 하려고 하면, 서구적인 인간모델에 맞지 않은 사람들이나 문화를 억압해 버린다는 역설에 관심을 돌립니다. 거기서 근대법 및 그것과 불가분하게 결부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에 내재하는 모순을 현대의 반-전지구화에도 통하는 듯한 방식으로 날카롭게 지적하고, ‘인간을 결부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것, 이성에 의해서는 석연치 않게 남아 있는 것을 묘사하려고 한 슈미트의 사유가 참조되는 것입니다. 슈미트는 기본적으로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적인 사상가입니다만, 바로 그렇기에 포스트모던 좌파적인 인물들에게 반면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추상적방법론적 수준의 문제로서, 현대사상에서 문제가 되는,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 법학의 연구 대상이 되는 구체적인 법, 실증법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한 다음, 슈미트의 담론이 딱 알맞은 힌트를 제공한다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상에서 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이 의식하느냐 아니냐와 무관하게, 따르고 있는 ’, 인간의 사유를 한계짓고, 규범적으로 방향짓고 있는 것으로서의 이라는 것입니다. 까다로워지기에 자세하게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정신분석에서 초자아아버지의 이름=아니오nom(non) du père’이라 불리는 것에 상당하는 입니다.

그런 에 관한 논의에 대해 1980년대 말 무렵부터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이것과 법학자나 법률가가 다루는 현실의 법의 해석이 어떤 접점이 있을까요?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들면 꽤 어렵습니다. 그런 탓에 양자 사이에 좀처럼 제대로 된 대화가 성립하기 어렵지만, 철학적인 존재론과 인식론의 수준까지 파고들어, ‘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전문인 헌법학과 국제법에 연결시킨 슈미트의 논의를 경유하면, 구체적인 접점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런 기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떤 접점인지 조금만 말씀드리면, ‘을 가능케 하고 있는 법외적인 것[법 바깥의 것]”에 관한 메타 법이론적 고찰이라는 것입니다. 슈미트의 경우 이 법외적인 것결단질서라는 형태로 논해집니다. ‘으로서 타당하려면 이것이 법이다라는 결단과 그 결단에 의해 규정된 의 내실에 대응하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근대의 법사상에서는 그런 법외적인 것의 작동에 대해서는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근본적인 규범이 정의와 권리로서 정식화되고, 이를 기점으로 법이 체계적으로 구축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합리주의적인 이미지를 품기 쉽지만, 슈미트나 포스트모던 좌파처럼 법외적인 힘에 주목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법이다라는 공통 인식합의가 형성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그런 인식에 이르도록 강제하는 힘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정말 그 합의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인지 의심할 여지가 없느냐는 것이겠죠.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우리는 사회 속에서 자라나고 생활하는 가운데 이러저러한 규범을 새겨 넣습니다. 처음에는 주위에 맞추어 살아남고자 할 수 없이 받아들인 규범인데도, 어느새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공통의 이 없으면 사회가 붕괴할 것이라는 위기감에서 어쩐지 모두가 품고 있을 만한 이해에 동조한다는 것도 있겠죠. 그런 법외적인 힘에 대한 관심이 현대사상 분야에서 매우 높아지고 있습니다. 슈미트는 법학자이면서도 법외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기에 주목받는 것입니다.

현대사상에서의 슈미트 수용의 중심인물로 프랑스의 데리다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2004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데리다는 현재에도 아마 프랑스계의 현대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의 논의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을 한마디로 나타내면, ‘이항대립사고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물을 이해할 때,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질서와 비질서라는 식으로 사물을 두 개의 극에 나누고, 그 양극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되는 것으로 대상을 이해합니다. 그 자체는 불가피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인식을 위한 대립 구도가 고정화되고, 특정한 가치관과 결부된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이 경우, 한쪽 극에 긍정적인 가치가 부여되고 다른 한쪽은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정신/물체, 남성/여성, 이성과 야만 등은 분명히 가치의 위계구조와 관계하고 있네요. 그렇게 이항대립적 질서 속에 우리는 주위의 사물을 위치짓고,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판단은 상당히 무자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에 의해 상이한 시각이나 삶의 방식이 억압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데리다는 그러한 이항대립에 의한 억압의 구도를 폭로하는 것에 집착했죠. 특히 천착한 것이 이성=내부 / 비이성=외부의 이항대립입니다.

이성적인 것과 그 밖의 것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음으로써 우리는 제대로 된 인간, 법학 용어에서 말하는 정상인=이성적인 사람 reasonable man”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구별하고, 사회의 바람직한 질서를 이미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그 경우의 이성적이란 무엇일까를 다시 물으면,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비이성적행위나 인간이라면,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비이성적인 것을 정립함으로써, 그 대극으로서의 이성적인 것을 이미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리하죠. 우선 부정적인 가치를 지닌 것을 묘사하고, 그것과의 대비에서 포지티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묘사하내려 하는 것은 이항대립 사고의 특징입니다.

비이성적인 것의 단적인 현상은 광기입니다. ‘광기가 있다는 것에 의해, ‘이성이 두드러집니다. 데리다보다 조금 나이가 든 푸코라는 역시 프랑스 철학자는 근대에서의 이성/광기의 선긋기가 어떻게 이뤄지는가라는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은 근대법, 특히 형법의 성립에 있어서 극히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형법에서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책임 능력이 있는 인간, 즉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의 잘잘못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를 직접적으로 규정하려고 하면 어렵지만, 책임 능력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은 이런 녀석이라고 하는 것은 지정하기가 쉽네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형법 39조의 규정이 있는 것에 의해, 그것에 맞지 않은, 책임 능력이 있는 이성적 인간의 이미지가 윤곽이 잡히는 것입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광기란 이런 것이다, 라고 하는 게 의학의 담론에 의해 설정되는 것입니다만, 그러면, 초기의 형법이론이 제휴(tie up)하고, 정상적인 인간인 우리의 사회를 비정상적인 자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틀을 형성했습니다. 그 모습을 푸코는 다양한 사료를 구사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부/외부의 경계선이 그어지고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성과 광기뿐 아니라, 우리의 세계는 정상=규범적(normal) 것과 그것에서 제외된 것을, 다양한 이항 대립의 경계선에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런 선긋기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선천적으로, 어떤 보편적인 법칙에 의거하여 정해진다기보다는 어떤 우연에 의해 정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그때그때의 권력이나 경제 상황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한 이항대립의 문제를 가장 근원적으로 파고들어 논한다고 간주되는 것이 데리다입니다.

데리다는 서구에서의 이항대립적 발상의 원점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의 담론을 자주 인용합니다. 데리다의 논문집 산종에 포함된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논문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에크리튀르라는 관점에서 독파해낸 저작입니다. ‘에크리튀르, ‘써진 것혹은 쓰는 행위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입니다. 데리다는 얼핏 보기에, 우리의 사고에 더 밀착해 있는 듯한 파롤(parole)’이 아니라, 에크리튀르에 의해, 우리의 사고와 세계관이 규정되고, 다양한 이항대립 도식이 산출됐다고 지적합니다. 에크리튀르에는 모두가 따라야 할 로고스(논리)를 정형화하여 전파해가는 작용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에서는 에크리튀르에 의해 폴리스의 핵이 되는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 폴리스의 바깥으로 배제해야 할 것의 경계선이 그어진다는 것을 플라톤의 이성중심주의적 담론에 입각해 밝히고 있습니다. 덧붙이면, ‘파르마케이아란 약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입니다만, 약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독이 됩니다.

에크리튀르에 의해 그어진 폴리스의 안(이성)/바깥(비이성)의 경계선이야말로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에는 자연법이라는 관념도 있었지만, 처음에 누군가가 이것이 자연법이다!”라고 선언한 뒤에 에크리튀르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체에는 형태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을 에크리튀르로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입함으로써, 폴리스의 안/바깥의 경계선이 강화되고, 정치적 공동체적 질서가 안정됩니다. ‘의 에크리튀르에 의해, 폴리스에 속해서는 안 되는 자=야만인을 일단 배제하면,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데리다가 이런 의미에서의 이항대립의 문제와 씨름했다고 한다면, 그의 사고방식은 근대법의 대전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슈미트를 어느 정도 아시는 분이라면, 그의 친구/과도 강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실 겁니다. 데리다의 후기 저작 우정의 정치에서, 슈미트에 대한 상당한 쪽수를 할애해 논하고 있습니다. 우정이라고 한 것은 프랑스어로 <amitié>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프렌드십, 친구성입니다. 슈미트의 친구/구별에서 말하는 친구라는 것의 본질입니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저작 속에서 슈미트는 정치적 행동이나 동기의 기본원인으로 생각되는, 특수 정치적인 구별은 친구와 적이라는 구분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와 적을 구별한다는 것은 바로 안과 밖을 분명히 하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들에게 인지 확실히 함으로써, 내부=친구를 결집시키고 외부와 대립에 대비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폴리스, 정치적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라는 것이 정해집니다. 그 경계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슈미트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근대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관과 정반대 극에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은 마찬가지로 인간성을 갖추고 있으며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공통의 가치를 요구하며, 최종적으로 합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대가 아니라 합의에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근대법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동의의 성립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 성립됩니다. 법은 사람들의 합의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있으며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법은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는 것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그 내용에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자신이 처벌받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 사람 자신이 이전에 ○○의 행위를 한 사람은 ▽▽의 벌을 받는다라는 규범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면, 일방적으로 처벌받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의사를 표명하고 있지 않더라도, 인간인 이상,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합의했던 것이라고 사회계약론적인 법이론은 주장합니다. 칸트는 그런 입장을 취합니다.

슈미트는 그런 보편적 합의는 픽션이라고 공격합니다. 그에게 말하라 하면, ‘합의가 성립하는 것은 과의 대립관계에서 친구가 결속하기 때문입니다. 인민의 동일성은 선긋기에 의해 창출되는 것입니다. 선의 맞은 편 사람과의 동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의회제 민주주의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는 슈미트는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계속 얘기를 할 뿐,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합의가 성립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사이에서 친구의 동일성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슈미트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슈미트적 모티프를 앞세운 데리다의 우정의 정치가 출판된 것은 1994년입니다. 냉전이 끝난 지 4년 후입니다. 동서 냉전 구조가 종결되고, 근원적 대립을 없어지고, 보편적인 세계질서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한편, 걸프전쟁이나 유고슬라비아 분쟁 등 지역 분쟁이 발발하기 시작하고, 미국의 일극지배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던 시기입니다.

외견상, 적이 없어진 세계에서 미국은 인류의 이름으로 보편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질서 유지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활동의 단속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미국의 참견은 기만으로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원래 인류보편적 인간성같은 것이 실재하는가? 그런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새로운 국제 정치의 논리야말로 폭력적이지 않은가? 이 세계에서 적대성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바로 슈미트의 주제입니다. 아까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년에 출판됐습니다만, 당시의 독일을 억압하던 베르사유 체제와 국제연맹에 대한 분노가 표명되고 있습니다. 1차 대전 후에 만들어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국가들은 인류의 이름 아래 국제적 정의를 휘두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따르지 않는 것에는 제재를 가하려고 합니다. 제재가 가해지는 상대는 인류이 됩니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이것은 매우 모순된 이야기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의 인류에는 모든 인간이 포함되는 것이니까, 그것이 전쟁을 일으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없기 때문이죠. 1차 대전 후의 세계에서 정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친구/의 구별이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근원적으로 대립하는 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정치가 행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정치가 있는 한 이 없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데리다는 어느 쪽인가 하면 좌파의 인물이지만, 슈미트가 양차 대전 사이인 전간기, 국제주의가 찬양되던 시기에, ‘적대성과 불가분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음에 주목하고, 상이한 삶의 방식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생길 적대성과 어떻게 사귀어 가야 하는지 생각하는 데, 반면교사처럼 참조하는 것입니다.

데리다나 다른 포스트모던 좌파 사람들은 친구/의 경계선 긋기와 불가분하게 결부되고 있는 결단에도 주목합니다. ‘결단혹은 결정을 뜻하는 독일어 <Entscheidung>분리를 뜻하는 <Scheidung>따돌리다란 뜻의 접두사 <ent->를 합친 말입니다. 그런 결단에 의해 친구/이 나뉘고, ‘이 타당하는 범위가 확정되는 것인데, 그것이 노출되는 것이 예외상태입니다. 슈미트의 법이론에서는 예외상태주권이 밀접하게 결부되고 있습니다. ‘친구/’, ‘결단’, ‘예외상태’, ‘주권’, ‘정치적인 것등이, 슈미트의 사상을 특징짓는 키워드입니다.

데리다에게 영향을 준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 사상가로 발터 벤야민이 있습니다. 그는 슈미트와 동시대인으로, 혁명의 폭력에 관해 폭력 비판을 위하여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의 그의 논의는 슈미트의 예외상태=주권론과 깊은 곳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간주되죠. 그리고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슈미트와 벤야민 두 사람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현대 이탈리아의 사상가로 아감벤이 있습니다. 아감벤은 제가 아는 한, 현재 포스트모던계의 현대사상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감벤은 주요 저작인 호모 사케르에서 슈미트의 예외상태를 독자적으로 궁리하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호모 사케르 homo sacer’성스러운[신성한] 인간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그 공동체 안에서 생기는 더러움을 정화하기 위해 희생에 바쳐지는 사람입니다. ‘호모 사케르자신은 공동체의 의 바깥쪽에 있는 존재이지만, 그 법 밖의 존재인 덕분에 공동체가, 그리고 공동체의 이 유지됩니다. ‘의 바깥에 있으면서 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기능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외상태에서의 주권적 결단과 비슷하네요. ‘이 효력을 정지하는 상황에서 행해지는 결단이 을 지탱하는 것이니까요.

아감벤은 현대의 호모 사케르적인 존재로서 무국적이기 때문에 어떤 나라의 법에 의해서도 보호되지 않는 사람들에 관심을 돌립니다. 서구의 근대화 과정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이기도 한데요, 그때 사람들은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서 등록되고 법의 보호 아래에 놓이고 권리와 의무를 부여되었습니다. /밖의 경계선이 그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권리 주체로서 계약을 맺거나, 법을 위반하면 벌을 받는 것은 어떤 국가에 속하는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실상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요건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나치 정권 시대의 유대인처럼, 시민으로서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경계선 밖에 놓이게 된 사람은 법과는 관계없는 상태, ‘인간으로서 취급될 자격을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 놓입니다. 그렇게 법의 바깥에 놓이게 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의해, 그 국가를 외부와 간극을 두고 있는 경계선이 분명해지고, 공동체적 질서가 강화됩니다. 사실 나치는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비아리아계의 사람들을 표시하고 배제함으로써 독일인다움이 다시 정의되며, 독일적인 법과 정치가 탐구되었습니다. 그런 법 밖의 존재가 있음으로써, 법의 형태가 밝혀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호모 사케르적인 존재인 셈이죠.

예외상태에서의 주권자의 결단에 의해, /밖의 경계선이 그어지는 것인데요, 이런 (통상적인) 법을 넘어서는 주권적 권력과, ‘의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안/밖의 경계선을 노출시키는 호모 사케르의 존재는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감벤적으로 이해하면, 슈미트가 말한 주권자는 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주권자는 예외상태에서 무엇이 으로 타당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을 넘는 곳에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권자로서의 지위는 에 의해 미리 주어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법과 관계없는 사람이 마음대로 선언하고 폭력을 발휘해도, ‘이 되지는 않습니다. ‘예외상태에 대해서도 에 의해 미리 규정되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감벤은 예외상태에 대해 어원학적 해석을 가하고 있어요. 영어로 예외<excep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어원인 라틴어의 동사 <excapere>밖으로라는 뜻의 접두사 <ex->포착하다/붙잡다라는 뜻의 동사 <capere>로 만들어졌습니다. , ‘예외밖에서 포착된=붙잡힌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 있으면서, ‘과 관계없는 것이 아닌 상태, ‘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감벤은 이어서 2003년에 나온 예외상태라는 저작에서 슈미트의 주권론과 벤야민의 신적 폭력론을 함께 고찰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좌파의 슈미트 수용의 예로서, 벨기에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샹탈 무페라는 정치철학자를 얘기합시다. 무페는 급진민주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급진민주주의론이라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민중의 의지가 정치에 직접 반영되는 방식을 실현해야 한다는 논의입니다만, 무페는 그 중에서도 경합적 민주주의라는 매우 급진적인 논의를 전개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논의를 하기만 하면 보편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정은 기만이라고 하며, 상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불가피하게 생기며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적대성을 겉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논의입니다.

다민족 국가나 다종교 국가를 염두에 두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대화에 의해 타협에 이르더라도, 그것은 결국 다수파에 유리하므로, 다수파와 소수 사이의 적대성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강해집니다. 현대의 숙의적 민주주의론의 대표적 논객인 하바마스와 롤스는 보편적인 이성에 근거한 숙의를 계속 쌓아나감으로써 정의에 관한 합의를 형성할 수 있음을 논증하려고 하지만, 무페는 그들을 비판하고 정치에는 대화로 해소할 수 없는 적대성이 뒤따른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문맥에서 무페는 슈미트의 저작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을 참조합니다. 이 저작에서 슈미트는 민주주의의 본질이 다스리는 자다스려지는 자동일성또는 동질성이라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스리는 자다스려지는 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누가 다스리는 자가 되더라도 차이가 없습니다. 대화나 타협의 필요는 기본적으로 없습니다. 민족적 동질성을 보증하고 있는 경우가 그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슈미트는 통치자()치자의 동일성에 근거한 민주주의는 각자가 다른 사고방식, 다른 삶의 방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대의제를 권장하는 자유주의와는 원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양립할 수 없는 것이 하나가 되는 듯한, ‘자유민주주의라는 환상을 언제까지나 붙드는 것이 아니라, 친구/적의 대립을 정치의 기점으로 삼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슈미트의 입장입니다.

무페도 데리다나 아감벤과 마찬가지로 좌파적인 사람이어서 적대성을 절멸전쟁이나 민족청소로까지 상승시켜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지만, ‘적대성이 대화로 해소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사물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기만이 되어버리기에, ‘적대성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합의가 가능하다는 형식적인 논의를 하는 롤스 등의 진보좌파보다는 근원적인 친구와 적의 대립에야말로 정치의 본질이 있다고 하는 슈미트가 참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페더러 말하게 하면, 아무리 교묘하고 세련된 토의 포럼을 설정하더라도, 거기에서 반드시 배제되는 사람이 나옵니다. 보편주의적 합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면, 그런 배제가 보이기 어렵게 됩니다. 오히려 적대성을 해소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대립이 표면화될 때마다 논의를 위한 포럼을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이 영원히 계속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근원적 적대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고방식이, 미국이 하고 있는 보편적 정의의 강요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슈미트가 현대의 포스트모던 좌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그러한 반-보편주의의 사고방식이 현대에 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슈미트의 초기 저작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고 싶습니다. 슈미트의 초기 법학적 저작으로, 1912년에 출판된 법률과 판결이 있습니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듯이, 이미 결단론의 싹이 보입니다. ‘판결을 뜻하는 독일어 <Urteil>은 단어가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근원적 분할(Ur-Teilung)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결을 할 때, 법관은 실정법의 규범을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인 적용이 아니라 이 사례에는 이 규범이 들어맞는다라는 결단을 불가피하게 수반하고 있습니다. 결단에 의해 비로소 법에 구체적인 모양이 주어집니다. ‘결단을 구성하는 필수요소입니다. 이런 생각이 그 후의 저작 속에서 점차 구체화되어 결단주의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슈미트의 정치철학적 독자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첫 번째 저작은 정치적 낭만주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출판된 1919년은 제1차 대전이 끝난 해입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제목을 보면, 슈미트가 낭만주의에 동질감(sympathy)을 느끼고 있고 그 정치적 응용을 제창하는 듯한 인상을 받지만, 사실 그렇진 않고,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것을 철저히 비판하고, 슈미트 자신이 의거하는 가톨릭 보수주의와 낭만주의의 차이를 밝히는 것을 시도한 저작입니다.

독일의 기독교에는 루터교와 칼뱅파인 개신교와 가톨릭이 있는데요, 개신교가 소수입니다. 독일제국의 중심이 된 프로이센은 개신교국가로, 비스마르크가 가톨릭의 영향을 봉쇄하기 위한 문화투쟁을 벌인 것은 유명하죠. 슈미트는 가톨릭계의 사람으로, 가톨릭적인 보수주의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치가 정권 장악하기 전후부터 나치에 바싹 다가선 느낌이 되며, 전후에는 국제법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만, 항상 가톨릭 보수주의가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슈미트는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인데요, 그의 질서관의 모델은 가톨릭교회에서의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 안의 위계 질서였다고 간주됩니다. 그것은 그에게 법학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기독교권에서의 법학, 특히 법교리학은 기독교의 신학을 모델로 만들어졌고, 신학적 개념을 많이 도입하고 있습니다. 슈미트는 법학의 사고방법에 잘 적합한, 가톨릭적인 질서관의 의미를 재고해야 한다는 태도를 계속 갖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기에, 법학적 질서론의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를 왜 비판하는가? 낭만주의의 문학예술사에 관한 기본적 지식이 없으면,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필요 최소한의 설명만 하고 싶습니다. 독일에서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고전주의의 이성중심주의·규범적인 예술에 저항하고,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 무한한 것을 예술적 창조의 원천으로 삼으려 하는 낭만주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정치에도 응용하려던 인물들이 정치적 낭만주의자라고 불립니다. 그 대표적 논객들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자입니다. 가톨릭에서 새로운 이상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 낭만주의가톨릭 보수주의가 동일시되기 십상입니다만,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양자는 완전히 별개입니다.

그렇다면 정치적 낭만주의자란 누구인가? 이성에 의해 파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한한 반성을 계속하는 것을 찬양하는 낭만주의의 예술 이론을 이해한 다음에, 정치이론에 응용한 사람을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낭만주의자로 간주한다고 한다면, 그만큼 많은 논객은 없습니다. 빈 회의를 주재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를 섬기면서, 낭만주의적 정치이론을 전개한 아담 뮐러가 전형이라고 합니다. 뮐러는 독일어권의 유기체적 국가론의 창시자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독일 관념론의 자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해, 초기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고 뮐러에게 예술이론의 측면에서 영향을 미친 프리드리히 슐레겔도 정치적 낭만주의의 대표 논객으로 간주됩니다. 둘 다 메테르니히를 섬긴 인연으로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로 활동 거점을 옮깁니다.

슈미트가 그들의 정치적 낭만주의에 관해 문제시한 것은 이들의 <Volk>‘입니다. 원래는 민중이라는 뜻의 말입니다만, 19세기의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민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의 맥락에서는 인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Volk>를 정치적 낭만주의자들은 무한한 반성의 대상으로 농락할 뿐이고, 실재하는 것으로서 파악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 슈미트의 비판의 포인트입니다. 무한한 반성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Volk>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다양한 이미지를 문학적 취향을 보태서 계승해가는, 그런 다면성을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Volk>에 대해서 생각하는 의 관점을 차례차례 바꾸어가기에 하나의 실체적 이미지로 귀착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일부러 그러고 있습니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그것은 실없는 태도입니다.

반면 가톨릭계 보수주의자로서 그가 주목하는 것이 드 메스트르, 보날, 그리고 본인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만 영국 성공회와 영국의 국가체제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가톨릭적인 생각을 한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입니다. 드 메스트르와 보날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고 가톨릭적 질서 하에서의 안정된 국가와 인민의 존재방식을 설파한 정치사상가입니다. 그들은 가톨릭적 세계관 아래에서, 국가와 교회, 정치와 종교적 세계관이 융합하고 인민이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야말로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보날은 신에 관한 신학적철학적 견해와 정치적사회적 질서 사이의 유비관계를 논구하고 있습니다. 우선 인격신에 관한 일신론적 관점에는 군주제의 원리가 대응합니다. 일신론은 신의 섭리에 대응하는, 인격적 군주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계 외적인 신에 관한 이신론(理神論)적인 가정에는 군주제 민주주의의 헌제(憲制)가 적합합니다. 세계에서의 이신론의 신과 마찬가지로, 1791년의 프랑스 공화국의 입헌군주제의 헌법에서는 국왕은 무기력하다고 간주됐습니다. 이 헌법은 보날의 말을 빌리면, 이신론이 숨겨진 무신론인 것과 마찬가지로, 숨겨진 반-군주제주의였습니다. 그리고 1893년의 자코뱅파의 헌법은 데마고기적이고 아나키하며 공공연한 무신론이며, 신도 없고 국왕도 없는 체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보날에 따르면, ‘지속을 근거로 삼는 것이 보수적이고 전통주의적인 논의입니다. 전통적인 존립만이 모든 사태를 정당화합니다. 장기성(longum tempus)이 그대로 궁극적인 정당성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종교의 국가에 있어서의 의미는 그것이 국가에 지속성을, 그것에 의해 실재성을 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버크도 세대를 넘어서 지속되는 연속적 공동체로서의 국민의 성격을 재차 논의하고, 분할 불가능한 세습 농지의 정당화의 근거를 그것이 존속의 기초라는 것 속에서 보고, 수도원의 토지소유의 그것을 장기간의 전망을 요구하는 원대한 계획을 가능하게 하는 것 속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장기적인 관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역시 종교, 더구나 국가체제와 결부되고 안정된 종교에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 세계관과 국가가 대응하고 있고, 그 중심에 인격적 신=군주가 있다는 것에 의해, 장기적인 안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슈미트가 법학자로서 활약한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에는 군주가 없으며, 가톨릭교회의 영향도 한정적이었습니다. 가톨릭의 군주가 등장하여 독일을 다시 안정시킨다는 것은 아무래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정치적 낭만주의2년 후에, 슈미트는 독재라는 책을 출판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또 다시 3년 후인 1924년에 독일 법학자 대회에서 대통령의 독재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독재라는 책은 독재란 원래 어떤 것인가를 논한 저작입니다. ‘독재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그 쓰임새가 어정쩡한 것은 당연하지만, 독일어에서도 전제적 지배와 권위주의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거나, 단순히 지도자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형용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만, 슈미트는 독재의 본래 의미를 고대 로마의 독재라는 제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확인하고 있습니다.

공화제인 로마의 행정의 수장은 집정관(콘술)입니다. 보통은 콘술이 입법기관의 역할을 맡는 원로원과 민회의 승인에 의해 만들어진 법에 근거하여 통치했습니다. ‘법의 지배가 행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공화국의 존속이 의심되는 비상사태에서는 일일이 법적 절차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공화국 자체가 망하면 말짱 황이니까요.

그래서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했는가 하면, 콘술이 독재관 dictator’으로 불리는 직책의 사람을 임명하고, 반년 동안, 원로원의 승인 없이 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명령을 내릴 권한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이 효력을 갖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명된 기간뿐입니다. 게다가 로마의 시민권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해서는 역시 건드려서는 안 된다든가, 여러 가지 제약이 붙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법적 제약을 붙인 다음에, 통상적인 법적 절차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독재관입니다.

독재제도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일본어로 정략론이나 로마사론으로 번역되어 있는 디스코르시라는 저작에서 긍정적으로 참조하고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도 독재라는 구조가 공화제를 지키는 데 효과적이며, 법을 지키기 위해서 법을 넘어설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의외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만, 루소도 사회계약론에서 독재의 의의에 관해 논하고 있습니다.

슈미트는 사상가가 언급했을 뿐 아니라 근대의 현실의 정치법제도에서도 독재가 도입되어 있음을 논증합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기에 주권의 의미를 정식화한 것으로 알려진 보댕이라는 사상가가 국왕에 의해 특별한 임무를 위탁받은 특명위원 Kommissar’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슈미트는 그 특명위원이 독재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국왕은 보통은 법의 지배를 실행합니다. ‘과는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신민을 다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특정한 사항에 관해서는 특명위원을 임명하고, 국왕과 신민 사이의 통상적인 법적 관계를 넘어 행위할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보댕은 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국왕의 주권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Kommissar>를 소박하게 위원이라고 번역하면, 위원회적인 것으로 되어 버려 마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처럼 들리지만, <Kommissar>는 특별한 위임(commisssion)을 부여받은 임원이었던 것입니다. 또 교황과 황제가, 어려운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어떤 방면에서 일정 기간, 통상적인 법적 행동 규범을 넘어 행동하는 권한을 가지는 특명위원=독재관을 임명했다는 예도 있습니다. 슈미트는 그런 것을 여러 사료에 기초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근대국가의 틀 안에서 점차 정비되고, ‘위임독재 die kommissarische Diktatur’로 발전했습니다. 슈미트는 독재를 위임독재주권독재의 두 형태로 구분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위임독재란 쉽게 말하자면, 주권자에 의해 임명된 <Kommissar>에 의한 한정적인 독재입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때, ‘인민<pouvoir constituant>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프랑스어 <pouvoir constituant>은 헌법학에서는 헌법제정권력이라고 번역되지만, 현대사상에서는 구성적 권력이라고 번역합니다. 주권자로서의 인민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헌법=국가체제(constitution)에 의해 제약을 받지만, ‘인민은 기존 헌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수도 있습니다. 헌법의 안과 동시에 밖에 있는 것입니다. 인민이 헌법을 넘어서는 힘을 행사할 때, 그 힘은 헌법제정권력이라고 불립니다. 주권독재는 헌법제정권력 행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민은 보통은 기존의 헌법 규범에 따릅니다. 그러나 혁명적인 국면, 즉 인민이 헌법제정권력을 행사하고 낡은 헌법을 폐지하고 새롭게 헌법을 창출하려고 할 때, 인민이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상태가 순간적으로 생깁니다. 그런 비상상태에서 인민 자신이 하는 독재가 주권독재입니다. 인민이 직접 권력을 행사한다고 말해도, 현실의 인민은 하나로 뭉치는 실체가 아니며, 인민의 의사로서의 일반의지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프랑스혁명 당시에는 공안위원회가 인민의 의사를 대리하는 형태로 독재를 실시했습니다. ‘위임독재라면 헌법의 규정에 의해 독재의 임기, 권한이 결정되겠지만, ‘주권독재의 경우에는 그런 헌법 자체가 없는 상태이기에, 주권자인 인민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독재권한을 주어도 좋은 것입니다. 공안위원회는 그런 식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에서 독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바이마르 헌법 48조에 독재라는 말은 없습니다만, 대통령이 비상사태에 특수한 권한을 통상적인 법을 넘어서 행사할 수 있음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이 헌법의 114, 115, 117, 118, 123, 124, 153조 등에서 규정된 기본권을 전면적 혹은 부분적으로 무효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헌법에서 독재권한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는 본래 위임독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48조의 5항에는 <Das Nähere bestimmt ein Reichsgesetz>라고 적혀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법률로 정한다는 것입니다. <Reich>란 원래 제국을 뜻하지만, 바이마르 시대에는 연방국가인 독일 전역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이 세부내용이 실제로 법률에 의해 정해져야 비로소 위임독재가 제도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부사항에 관한 법률은 계속 제정되지 않고 넘어갔어요. 세부사항에 관한 법률이 없는 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은 실제로 몇 차례나 비상시의 대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완전히 헌법에 의해 제약당하지 않은 독재권의 행사라는 것이 됩니다.

슈미트는 그것을 주권독재적인 상태의 흔적으로 간주합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바이마르 헌법은, 2제정이 갑자기 붕괴된 후의 혼란 속에서 인민의 헌법제정권력을 대표한다고 칭하는 인물들에 의해 초안이 마련되고, 제헌의회에 의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국이 붕괴된 후부터 제헌의회가 신헌법을 제정한 그 사이 동안에는 주권독재가 행해지는 게 됩니다. 헌법은 그 주권독재로 시종일관되고 있으며, 향후의 독재는 헌법에 의해 제약되는 위임독재로 한정할 것이었습니다. 그 이행을 완결하려면 세부사항은 불가결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부사항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위임독재는 본래 행해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48조에 기초하여 다양한 개입을 행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권독재적인 상태가 일부 남아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논의를 하는 것입니다.

이 논의가 정치신학에서의 주권자, 예외상태, 결단 등에 관한 철학적 논의의 기반이 됩니다. 정치신학독재의 이듬해인 1922년에 출판됩니다. 서두에 나오는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대해서 결정하는 자이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합니다. “예외상태 속에서 im Ausnahmezustand”가 아니라 예외상태에 대해서 über den Ausnahmezustand”라고 말하는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속에서라고 했다면, 헌법이나 법의 절차를 따라 정의되는 예외상태이 틀 안에서 독재권적인 권력을 발휘한다는 뉘앙스가 되지만, “에 대해서라고 하면, 원래 예외상태란 무엇인가?”를 결정한다는 뉘앙스도 생겨납니다. “에 대해서라는 의미의 독일어 전치사 <über>에는 “~을 넘어서라는 뜻도 있으므로 더욱 그러합니다.

말장난이나 속임수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본질적인 문제와 관련된 트릭입니다. 어떻게 되면 예외상태인가를 법률에 의해 미리 정할 수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면,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외상태는 없습니다. 예상할 수 있다면, 통상적인 국방안보 조치로 대처할 겁니다. 무엇인가 통상적인 법적 질서 하에서의 예상을 벗어나고[초과하고] 있기 때문에, ‘예외인 것인데요, 어떤 식으로 벗어날[초과할] 것인지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무엇이 예외인가의 의견은 다를 겁니다. 그래서 주권자의 결단이 중요해집니다.

슈미트는 정치신학에서도 보댕의 논의 등에 의거하면서 주권을 행사하는 자로서의 왕은 보통은 법에 적합한 형태로 통치하지만, 비상사태에서는 법을 넘어 결정할 수 있는 자로 여겨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국가의 본질은 주권이며, 주권자에 의한 결정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을 넘어서는, 그것은 예외상태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이 저작에서 슈미트의 논의의 골자입니다.

그는 예외상태에서는 질서의 이질성이 돋보인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법질서라고 표현을 하면 어쩐지 알 것 같은 듯한 생각이 들겠지만, ‘질서중 어느 하나가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걸까요? ‘이 먼저 있고 그 토대 위에서 질서가 만들어진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질서가 있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이 있다는 것일까요? 둘 다 가능한 말입니다만, 대부분의 법학자는 먼저 ’, 즉 사람들이 따라야 할 법규범의 체계가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가 만들어지며, 그것에 의해 질서가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법규범의 체계만을 법질서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반면 슈미트는 사람이나 사물의 관계를 통제하는 질서가 먼저 있고, 거기에 맞춰서 이 창출된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의 전통 같은 것에 의해 질서가 형성되는 것인데, 전통이나 권위가 해체되고, 바람직하거나 있어야 할 질서를 모르게 될 때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주권자의 결정이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주권자는 질서의 바람직한 형태를 상정하고 이것에 맞게 법을 재편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 장면에서 추상적인 법이론을 끄집어내서 ○○법에는 △△의 원칙이 있고라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입니다.

슈미트는 예외상태에서의 주권자의 결정에 의해 법규범이 규정된다고 주장합니다. 슈미트 자신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예외에는 법률학적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것은 사회학에 속한다는 그런 주장은 사회학과 법률학 사이의 기계적 분리의 조잡한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예외는 추정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 파악의 틀 바깥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결정이라는 순수 법률학적 형태 요소를 절대의 순수성에서 명시하는 것이다. 예외의 사례가 그 절대적인 모습으로 출현하는 것은 법규가 유효할(gelten) 수 있는 상황이 창출된 뒤이다. 그 어떤 일반적 규범(jede generelle Norm)도 생활관계의 정상적인 형성(eine normale Gestaltung)을 요구하는 것이며, 일반적 규범은 사실상 그것에 적용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규범적 규제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규범은 동질적 매체(homogenes Medium)를 필요로 한다. 이 사실상의 정상성은 다만 외적 전제로서, 법률학자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규범의 내재적 유효성(immanente Geltung)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다.”(Politische Theologie, 9. Aufl. S.19/田中浩原田武雄 訳, 政治神学, 20).

* 원문대조를 하지 않았음에 유의해 주십시오.

이 글의 전반부는 예외결정과 결부되어 있으며, 법학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얘기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만, 후반부가 추상적이어서 알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법규범을 포함해 규범Norm’, 순수하게 이념적허구적인 존재로, 허공에 붕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관계의 정상적normal’인 상태에 대응하는 형태로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이 정상=보통이라고 느끼고 생활할 수 있는 상태를 초래하는 것이 규범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의 사회와 유리된 이념을 갖고 있어도 안 되며,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는 것에 잘 적합하는 규범일 필요가 있습니다. “타당하다라는 법학·윤리학 용어는 독일어로 <gelten>이라고 합니다만, 이 말에는 통용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실제로 통용되고 있는 것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타당하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닌 것입니다. 덧붙여서, ‘규범정상성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푸코가 꽤 파고들어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권자는 규범=정상성에 관해서 무엇을 하는가 하면, 해당되는 법적 공동체에 어울리는 법규범, 혹은 그 체계로서의 법질서는 무엇인가를 결정합니다. 그것에 의해 무엇이 정상인지가 분명해지며, 모두가 공유할 수 있게 됩니다. 기존의 법규범이 기능하지 않는 예외상태에서 주권자는 그런 결정을 하는 셈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무엇이 규범인지를 어쩐지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면 범죄가 되거나 불법행위가 되는지는 법률 지식이 없어도 대강 짐작합니다. 안 그러면 정상적인 생활을 보내지 못하죠.

예외상태란 그때까지 정상적이라고 간주된 것이 통용되지 않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것이 규범이라고 정하고, 모두 그것을 따르게 하고, ‘질서를 재건하는 것이 주권자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해서 질서결정(결단)’을 결부시키는 사고방식이 슈미트의 법철학의 핵입니다.

슈미트는 이렇게 통상적인 법규범을 넘어서는 주권적 권력과 질서를 상정함으로써 의 본질을 밝히려고 한 것인데, 그것과 대조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슈미트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순수법학의 켈젠입니다. 순수법학이란 법실증주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법은 법 그 자체만 도출될 뿐이며, 도덕, 정치, 종교 등 다른 요소는 관계없다는 입장입니다. 법은 수학의 공리계처럼 최초의 근본적인 규범으로부터 모두 도출되는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켈젠의 초기 저작에 사회학적 국가 개념과 법학적 국가 개념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사회학적 국가개념과 법학적 국가개념의 구별을 논한 것입니다. 켈젠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국가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기 자신은 그것과는 분리된, 순수 법학적 존재로서의 국가를 분석한다는 입장을 표명합니다. 반면 슈미트는 국가가 법규범의 체계로 환원할 수 없음을 간파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추상적인 법규범의 체계로서 국가를 기술하는 것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그런 켈젠의 이론에 덧붙여, 국가를 조합이나 교회 등과 나란히 단체의 일종으로 보는 단체국가론이나, 법이 국가주권자라고 하는 법주권설, 국가와 법질서를 동일시하는 설 등을, 모두 과녁을 벗어나고 있다며 물리칩니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국가는 법과 불가분하게 결부된 통일체입니다만, 이 경우의 은 추상적 관념의 체계가 아니라 주권자의 결정(결단)을 기점으로 하여 통일되고, 사람들의 생활형태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법률학적 결정에는 모두, 내용과 관련되지 않은 하나의 요소가 포함된다. 왜냐하면 법률학적 결론은 그 전제로부터 완전히 남김없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결정이 불가피하다는 상황이 어디까지나 독립의 결정 요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결정의 인과적이고 심리학적 성립이 아니라 추상적 결정 자체는 이 경우에도 중요하지만 법적 가치의 결정인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의 사례별로 변형(Umformung)이 생기는 것이다. 법이념 자체로서는 변형할 수 없는 것은, 누가 그것을 적용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법이념이 무엇 하나 말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모든 변형에는 권위의 개입이 있다.”(Ebd., S.36-37/前掲邦訳, 四二四三頁).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입니다. 법학자는 추상적인 형식의 이라는 관념이 어딘가에 실재하는 것처럼 이미지하기 쉽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례에 그 추상적인 적용하는 데 있어서 누군가가 그것을 현실에 적합하는 구체적인 형태로 변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기에, 자동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슈미트의 편에서 보면, 켈젠과 법주권론자들은 마치 이 자동적으로 수립되어 적용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미치고 팔짝 뛰게 되는 것입니다. 결정(결단)하는 주체가 필요해집니다. 물론 누가 결정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권위를 가진 주체가 아니면 안 됩니다. 국가 전체에 관해서, 변형 때문에 개입하는 주체가 주권자입니다.

슈미트는 켈젠이 을 추상적 개념의 체계로서 파악하려 하는 것이 자연과학에서 받은 이상한 영향 탓이 아니냐고 지적합니다. 자연과학이라면, 물리나 화학의 법칙은 인간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작용합니다. 법실증주의에는, 이것과 마찬가지로 법학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닌가라고 슈미트는 생각합니다. 수학이나 물리와 똑같이 사회과학을 체계화정밀화하려는 사고방식을 일반적으로 실증주의라고 합니다. 보통은 사회과학 일반의 실증주의와 법실증주의는 다른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슈미트의 말에 의하면, 법학의 법실증주의도 법의 작용을 물리나 수학의 법칙처럼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양 파악하려 하며, 그것이 현실적과학적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실증주의와 같습니다. 그는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는 홉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권위를 가진 인격적 주체의 질서 형성을 향한 결정이 법의 근원임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법의 원점이 되는 권위 있는 주체는 기독교의 유일신을 연상시키네요. 정치신학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슈미트는 자신의 사고방식이 신학에 의거하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는 현대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개념이라고 단언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논의하지 않으면, 현실에는 의미 없는 추상적인 법이론으로 추락해버린다는 입장을 선명하게 합니다.

이런 전제에서, ‘예외상황은 법학에 있어서 신학의 기적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합니다. 신은 우주의 운동법칙을 정하지만, 보통은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면에 직접 개입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자연의 법칙으로부터의 일탈이 생깁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주권자란 그런 의미에서 신 같은 존재입니다. 법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보통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그 힘을 봉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성의 질서가 파탄나고, ‘예외상태가 생기면 자신의 주권적 힘을 보여줍니다. 마치 법칙이 한 순간 정지하고, 신이 기적을 행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유사 관계를 의식하고야 비로소 처음으로, 지난 수백년 동안의 국가이론에서의 여러 이념의 발전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법치국가 이념은 이신론, 즉 기적을 세계로부터 추방하고 기적 개념에 포함된 자연법칙의 중단을 부정하는 이것은 현대의 법학이 현행의 법질서에 대한 주권의 직접 개입을 거부하는 것과 평행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신학 및 형이상학에 대응하는 형태로 확립되었습니다. 계몽사상의 합리주의는 그 어떤 형태의 예외상태도 부인했습니다. 반면 드 메스트르, 보날처럼 반혁명의 보수적 저술가들은 유신론적 신학의 유추에 의해 군주의 인격적 주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하려 시도한 것입니다.

법실증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의 법학은 주권이 직접 행사되는 상태를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법을 따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그런 것이 생길 리 없다는 전제에서 논리가 조립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학자들은 신에 상응하는, 인격을 갖추고 결단하는 주권자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켈젠 얘기로 조금 돌아갑니다만, 슈미트의 편에서 보면 켈젠은 신학과 법학이라는 게 원래 방법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 사고를 끊어버리려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게 이루어진 탓에, 예외의 결단이라는 중요한 것을 국가론에서 배제하고, 법이 결단에 의한 변형 없이 작용한다는 식으로 묘한 논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슈미트는 법실증주의적인 법이해와 대결합니다.

그러한 법실증주의자들과의 대비에서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을 재평가하는데요, 정치신학에서는 드 메스트르, 보날에 덧붙여, 도노소 코르테스라는, 2월혁명 때의 스페인의 정치 사상가를 높이 평가합니다. 코르테스는 인간은 그 본성부터 원죄를 띠고 있으며, 본성이 악하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신을 대리하고, ‘독재에 의해 통치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합니다. ‘독재에는 민중을 납득시키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그는 시민혁명의 시대 이후의 정치의 주인공이 된 부르주아지라는 것은 토론하는 계급이며, 오로지 토론만 하고 있어서 좀처럼 결단할 수 없다고 비난합니다. 인간은 모두 마찬가지이며[평등하며], 이성적이기 때문에, 논의를 계속하면 뭔가 타당한 결론으로 귀착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결단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죠.

이런 코르데스와 대비하여, 슈미트는 코르테스와 동시대인의 프루동이라는 프랑스의 아나키스트를 언급하고, 프루동도 높이 평가합니다. 왜 가톨릭 보수주의자인 슈미트가 아나키스트를 높이 평가하는가 하면, 그것은 프루동처럼 급진적인 좌파가 자유민주주의자나 낭만주의자보다는 정치와 법이 신학적 구조를 갖고 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그 신학적 구조를 최종적으로 해체하려고, 아마겟돈의 싸움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겟돈의 싸움을 벌이는, 뚜렷한 이 있기에, 정치신학의 구도가 두드러집니다.

정치신학10년 후인 1932년에, 서두에서 얘기한 친구/이론을 전개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출판됩니다. ‘정치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는 표현을 하는 게 좀 이상하다고 느끼겠지만, 이것이 정치적을 뜻하는 독일어의 형용사 <politisch>의 의미를 분석하는 저작이기 때문입니다. 법학적인 텍스트에서 어떤 장면에서 정치적이 사용되었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그 본질을 파고들어간 결과, 특수 정치적인 구별은 친구의 구분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경우의 친구/이란 종교윤리적 선악이나 미적인 미추와 상관없고, 경제적 이해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서로의 존재가 이질적이고 단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자, 슈미트는 공적(公敵)’사적(私敵)’의 차이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는 너의 적을 사랑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정치철학에서 친구의 대립을 절대시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