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야마 겐, 『푸코 : 생명권력과 통치성』

中山元フーコー 生権力統治性

5. 국가에 의한 통치 : 독일의 내치[폴리차이] 모델

1. 국가이성 개념


* 국내에서 통용되는 번역어로 최대한 바꾸려고 노력했다. '폴리차이'는 '내치'라는 번역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conduite는 명료한 경우가 아니라면 '품행'으로 옮기지 않고, '인도, 인도하다' 등으로 적는다. 

* 그러나 국내의 적합한 번역어로 바꾸지 못한 부분도 있다. 눈이 밝지 않아 생긴 문제라고 널리 혜량을 구한다.  

 

국가의 이념

그런데 이렇게 해서 인간의 신체, 생명, 정신의 통치가 사목의 원리의 연장과 수정 아래서 진행된 결과, 근대의 다양한 국가의 이념들이 등장한다. 우선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대항품행 개념은 근대의 초기에 영방국가[領邦国家, 13세기에 독일 황제권이 약화되자 봉건 제후들이 세운 지방 국가]가 성립되기 위한 커다란 실마리가 됐다. 사목의 위기와 폭발과 사방으로 흩어짐四散 때문에 몇 개의 새로운 정치적 개념이 탄생했다. 예를 들어 국가이성, 폴리차이, 세력균형과 외교 등의 개념이다. 그 배경에는 16세기에, 스콜라철학에서 믿었던 정치적 이성 개념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초래한 것은 그 나라의 종교는 그 나라의 영주가 정한다는 영방국가領邦国家의 성립과 신성로마제국 권위의 붕괴였다. 황제 칼 5세가 제국에서 루터를 추방하라고 명했는데도, 나라들의 지배자가 이것에 응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점점 더 통치권력이 주도하는 유형의 양상을 띠게 됐다. 나라들의 지배자는 종교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제국으로부터 독립된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은 개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로 분열되면서, 각각이 자국 안에서 지배자의 종교를 강제할 수 있다고 확정된 것이다. 이 체제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최종적으로 확립되지만,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의 화의(和議)에서 이미 현실화됐다. 이리하여 새로운 정치 단위를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의 이념이 요구됐던 것이다.

국가이성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국가통치의 이념이며, 레종 데타라는 프랑스어에 남아 있으며, 국가의 생존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취해야 할 원칙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때로 국가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어떤 행위를 취하더라도, 초법규적으로 허용된다는 국가 이기주의적 맥락에서 말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조반니 보테로(1544-1617)는 훨씬 넓은 의미에서 국가가 일상적인 기능에 있어서 (매일의 관리에 있어서) 기초지어졌을 때부터 나라를 유지보수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종류의 합리성이라고 말했으며, 국가의 자존을 지향하는 기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치[폴리차이]는 독일에서 생겨난 내정적인 이념이며(푸코는 폴리스라고 프랑스어로 표기하지만, 경찰과 헷갈리기 쉽기에 독일어로 표기한다[이 번역본 등에서는 모두 이하 '내치'로 옮긴다]),국내 질서와 국력 증강 사이의 동적인 (그렇지만 안정적이고 통제 가능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계산기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국가이성도 내치도 국가가 자존하고 강화되기 위한 이념이지만, 세력균형이나 외교개념은 자존하고 있는 국가 사이에서 세력의 유지와 균형을 목표로 하는 이념이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머지않아 더 자세하게 검토하지만, 사목권력이 붕괴했을 때, “정확하게 말해서 1580년과 1650년 사이에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의 창설이 이뤄졌을 때”, 그 사목권력이 붕괴된 후의 장소에 새로운 국가의 이념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런 이념에 대해 고찰하는데, 그 전에 중세 이후 국가의 통치 역사를 돌이켜보자.

 

중세의 통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번역되지 않았던 중세에서 정치학의 이념은 키케로를 통해서 전해졌다. 특히 마크로비우스의 스키피오의 꿈의 주석을 통해서다. 마크로비우스는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의 전통을 비판하면서 키케로의 정치철학을 소개했다(‘스키피오의 꿈은 키케로의 국가의 말미를 장식한 부분이다). 그리스의 전통에서 정치학에 종사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명상과 철학이라는 행위보다 낮은 차원의 활동으로 여겨졌다. 마크비우스가 비판하는 플로티누스는 정치적인 덕이 인간을 신에 가까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신과 똑같이 되려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세속적인 삶의 방식과 사물로부터 도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키케로에게서 배운 마크로비우스는 국가를 위해 한 몸을 바치는 자는 철학에 전념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천국에서 환영 받고, 영원한 행복을 향유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정치가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에 근거하고 정의에 맞는 것만 이루는 사려(프루덴티아에), 정념을 이성에 따르게 하는 절제(템페라티아에),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함(포르티투데니스), 배분적 정의(유스티티아에)의 네 가지 덕이 필요하다.

이렇게 덕을 갖춘 정치가는 자신을 배려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인 동시에, 키케로적인 의미에서의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선한 지배자이며, 국가의 창립자인 자는 거의 신과 동등한 지위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치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공적인 빛 속에서 덕의 높이를 나타내는 인간이며, 보통 사람보다도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지게 됐다.

다만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자, 정치적 활동의 제약의 크기가 주목받게 된다. 정치학은 인간의 실천적 행위에 관련된 학문이며, 신의 명상 같은 높은 지위를 인정받지 않는 것이다. 아퀴나스에서 단테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정치철학은 인간 삶의 영위에 있어서의 정치학의 탁월성과, 신의 명상으로 대표되는 철학의 탁월성 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어쨌든 정치가(폴리티코스)라는 개념은 타자와 함께 사는 지상의 공화국에서 공통선을 찾는/요구하는 중요한 행위를 나타내는 개념이었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통치이성은, 이 공통의 공공선을 중심적인 이념으로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왕을 사목자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목자는 양떼에 있어서의 선을 찾지만/요구하지만, 모든 지배자는 복종하는 집단의 선을 찾는다/요구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에게 왕은 하나의 도시 또는 영지領国의 사람들을 그 공통선을 위해 지배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왕은 어떻게 사람들을 통치해야 할까? 아퀴나스는 이를 위해 몇 가지 종류의 모델을 제기한다. 푸코는 이를 신과의 유비, 자연과의 유비, 사목자나 아버지와의 유비라는 세 개의 모델로 설명한다. 우선 신과의 유비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대비로 행해진다. 자연의 사물의 통치에는 보편적인 통치와 개별적인 통치가 있고, 보편적인 통치를 행하는 것은 창조주인 신이다. “신의 통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신의 섭리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개별적인 것의 지배는 미시적 인간의 자기 통치이다. 인간은 이성에 의해 스스로를 지배하는 것이며, 이것은 거시적 신의 지배를 모방한다. “인간과 이성의 관계는 세계와 신의 관계와 같다.”

또 신과의 유비는 이성에 의한 인간의 통치뿐 아니라, 도시와 영지의 통치자인 왕의 임무에도 해당된다. 신은 세계를 창조했으나 왕은 지배하는 인간과 국가를 창조할 수는 없다. 이미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기에 왕은 우선 국가에 적당한 장소를 선택할 필요가 있으며, 국가에 있어서의 교회나 법원이나 시장의 장소를 선택할 필요가 있으며, 사람들의 직업에 따라 장소를 지정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국가의 설립에서 보이는 세계 창조와의 유비이다. 다음으로 도시와 영지의 설립을 세계가 창조된 방법으로부터 배울 뿐만 아니라 이를 지배하는 방법도 세계에 대한 신의 성스러운 지배 방법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국가의 창조와 지배의 양쪽에서 왕은 신을 흉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유비는 생명체의 생명력과의 유비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신체나 다른 동물의 신체 속에, “모든 지체肢體(모든 구성원)의 공통선을 지켜보는[보살피는] 지배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으면 붕괴해버릴 것이다고 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선으로 향하며, 따라서 공통선을 간과하려고 한다.” 그래서 국가에도 이 지배적인 힘에 상당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국가에 있어서는 각각의 개인의 특별한 선을 넘어, 다수자의 공통의 선을 향해 사람들을 강제하는 것이 없으면 안 된다.” 이것이 지배하는 권력이다.

세 번째의 유비는 사목자와의 유비이며, 이것은 처음에 제시했던 것 그대로이다. 왕은 사목자로서, 아버지로서 통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감으로써 혼자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은 선한 생활이다. “선한 생활이란 덕이 높은 삶이며, 덕이 높은 삶이야말로 함께 사는 사람들의 목적인 것이다.” 덕이 높은 삶을 보냄으로써, 혼이 구제되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며, 왕의 임무는 이를 실현하는 것이다. 왕은 개인의 영원한 구제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처할 뿐 아니라, 그 구제가 가능해지도록 조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푸코가 이런 세 가지 유비를 통해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 가정, 국가, 그리고 자연의 전체에 대한 우주론적인 일대 연속체의 이름으로, 왕이 통치하는 것을 인가받고, 이 연속체가 주권자가 따라야 할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다. “왕이 통치할 수 있고 또한 통치해야만 하는 것은 왕이 신으로부터 자연이나 사목자를 통해 한 집안의 아버지에 이르는 이 거대한 연속체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며, 그리고 16세기에 붕괴한 것은 이 연속체이다.

신이 자연을 사목적으로 통치했다고 한다면, 구원, 복종, 진리의 세 가지 축에 있어서 지배했을 것이다. 구원의 축에 있어서는, 세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되며, 인간이 만들어진 것은 이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행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인간중심주의이면서, 인간은 이 세계를 위해서 살아 있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것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대우주와 소우주의 대비의 사고방식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우주와 자연은, 거대한 우주로서,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며, 큰 인간이다. 동시에 소우주인 인간은 가장 높은 천구의 가시적인 질서를 반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대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세계이지만, 소우주의 극에는 하나의 특권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한정된 규모에서, 천공, 성신星辰, 산악, 하천, 폭풍우의 광대한 질서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복종의 축에서 생각한다면, 신은 인간들에 대해 구원의 표시를 주고, 신의 의지를 제시한 것이라고 푸코는 생각한다. “사목적으로 통치되는 자연은 곧 기적, 위협, 표시로 가득 찬 자연이 된다. 그때 세계의 양상은, 문장, 문자, 암호, 어두컴컴한 말, 터너에 따르면 상형문자에 의해 뒤덮이는 것이다. 이 표시는 각각에 벌의 위협과 구원의 약속과 선택의 표시로서 해독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는 해독되어야 할 기호로 뒤덮여 있기때문에, “인식하는 것은 해석하는 것이 된다.

세 번째인 진리의 축으로 생각하면, 기호로 가득 찬 세계는, 그 진리가 해독되기를 기다리는 세계라는 것이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며, 그 열려 있는 책 속에서 사람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은 유비와 유사의 관계 속으로부터, 세계의 진리를 해독해야만 한다. 그래서 자연과 말은 무한하게 서로 교차하며, 읽는 유령을 터득한 자에 대해서, 이른바 유일하고 방대한 텍스트를 형성하는 것이다


군주권력의 시대의 통치

이런 중세적 세계의 이미지는 이미 지적했듯이 “1580년부터 1650년 사이에,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의 창설 자체가 이뤄졌을 때에 소멸하게 된다. 그 절단을 중세의 사목적 우주론을 떠받치던 세 개의 축으로 고찰해보자. 첫 번째인 신과의 유비의 축을 절단한 것은 갈릴레오의 천문학이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발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성신신학星辰神学을 타파했다. 달 위의 세계와 달 아래의 세계의 구별이 소멸된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응은 무지개처럼 무산霧散됐다. 이제 진리는 자연의 신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학의 말에 의해 작성되게 됐다.

그리고 이제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계층구조가 아니다. 이 우주를 해독하려면 유비적인 계층구조가 아니라, 데카르트가 『정신지도의 규칙』에서 제시한 분석방법이 필요해진다. 분석에서도 비교는 행해진다. 그러나 이 비교라는 작업은 세계가 어떻게 질서 잡혀져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역할을 맡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질서를 따라서 행해지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향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자연과의 유비의 축을 절단한 것은 포르 루아얄의 『일반문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세계는 신의 표시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기호나 암호라는 것은 인간이 분석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다. 중세의 점술’(디비나티오)신에 의해 세계 속에 미리 배분된 언어를 주워 담는것이며, “신적인 사물을 꿰뚫어보는 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호가 기호로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인식의 내부에서이다.” 이리하여 미지의 기호나 무언의 표식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사목자와의 유비의 축을 절단한 것은 말브랑슈에서 콩디약에 이르기까지의 기호의 철학일 것이다. 분석의 방법에 의해 기호가 작성되지만, “정신이 분석을 향하기 때문에 기호가 나타나며, 정신이 기호를 손에 넣고 있기 때문에 분석은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 기호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표상작용의 내부, 관념의 간극, 관념이 스스로를 분해하고, 재합성하고 스스로와 시시덕거리며 노는 투명한 표상의 타블로의 두께가 없는 공간이며, 도덕성을 따질 수 없는 공간이다.

이리하여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에 의한 17세기의 과학혁명에 의해 코스모스의 붕괴와 우주의 무한화가 일어났는데, 푸코는 이 시대에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조작 개념이 등장했음을 지적한다. 그것이 통치술이라는 개념이다. 주권자는 주권의 행사에 있어서, “신이 자연에 대해서, 사목자가 양에 대해서, 가장이 아이들에 대해서 행하는 것과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은 자연의 과학적인 원칙이 지배한다. 인간의 세계는 통치의 이성이 지배한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응이 붕괴하는 동시에, 우주와 국가를 각각 지배하는 이성(raison)이 탐구되는 것이다. “자연의 원칙(프린키피아 나투라)과 국가이성(레종 데타), 자연과 국가, 이것이야말로 근대서양의 인간에게 주어진 다양한 지식이나 기술의 양대 좌표로서 마침내 구성되며, 마침내 분리된 것이었다.”

 

국가이성

그 배경에 있는 것은 종교개혁으로 독일에 다수의 영방국가가 설립되고, 그것이 지역적인 국가의 성립 모델이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권력 행사에 대한 전통적인 속박을 풀고, 루터가 지배하는 자가 종교를 정한다는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 크게 기여했다. 그 후 수세기의 유럽에서의 군주국의 성립에 있어서, 이 두 사람의 힘은 크지만, 특히 루터의 의도치 않은 기여가 컸다. 피기스(J. N. Figgis)가 지적하듯이, 리슐리외는 개혁운동의 산물이며, “루터가 없었다면 루이 14세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교회의 종교에서 국가의 종교로 바뀐 것이다. 그 최초의 형태가 왕의 신성한 권리이다.”

제국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의 국가는 종교적 권위를 부정했기에 그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세속적인 국가는 그때까지 종교적 권위를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 어려운 것은 기독교의 권위와 함께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국가의 이론도 부정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개념을 일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정치가라는 개념으로는 실제의 정치활동을 잘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마키아벨리(1469-1527)이다.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정치학은 키케로의 공화주의적 정치학에 의거했다. 정치학(폴리틱스)은 폴리스의 학문이었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에 대해 쓴 많은 책이 군주를 위한 귀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키케로의 이념과 사목의 이념을 따라, 국가의 통치자는 양들의 행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정치란 정의와 이성을 따라 국가를 통치하는 술이며, 통치의 기술은 기술 중의 최고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보여준 것은 이런 폴리티코스의 개념과는 이질적인 국가(state) 개념이었다. 프랑스어의 국가(état)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상태나 상황을 의미하는 state라는 단어에는 국가외에 세력자의 세력”, ‘공권력’, ‘지배자등의 의미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폴리티코스라는 단어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가 전개하려고 한 주제는, “군주가 소유하는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고,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으며, 대등한 시민에 의한 통치라는 공화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폴리티코스의 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시민이 이성을 따라서, 정의와 공통의 선을 목표로 하여 공동으로 통치하는 장인데, 나라[국가]는 군주가 그 국가의 국민의 이익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익을 목적으로서 소유하고, 유지하는 장이다. 이 책은, 피렌체라는 과거의 공화국을 자신의 나라로서 소유하는 메디치가에 바친 것이었다. 게다가 시민들의 적대감 속에서, 정복자로서 추방의 신분에서 돌아온 젊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바쳐야 할 것이었다(다만 줄리아노는 요절했기 때문에, 조카이자 피렌체의 최고 지휘관에 막 임명된 로렌초에게 바쳐졌다).

이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던 줄리아노에게는 당시의 역사가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1483-1540)를 비롯하여 다양한 의견서가 제출됐다. 피렌체의 국민[인민]에게는 아직 자유를 원하는 공화주의적인 정신이 강했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을 바라는 사람들도, 군주의 지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의견서에는 주로, 신분이 높은 유력자에게는 지위와 권력을 부여할 것, 신분이 높으나 권력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위와 명예를 부여할 것, 평민들에게는 안심하고 일에 종사하도록 국내의 평화를 확보할 것을 권고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공화국의 전통과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에게 권력, 명예, 치안이라는 세 개의 축으로부터, 공화국보다 군주국이 바람직하다는 것, 자신들이 통치하기보다는 메디치가의 통치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강조되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헌정했을 때에는, 이런 권고서보다 뛰어난 정치술과 정치관을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그 적임자라고 확신했다. “[]이 정한 바에 의해 견직물업도 모직물업도 이해타산도 전혀 모르는 제게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 [본]성에 해당됩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직면한 것은 전통적인 공공선 이론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에서, “이탈리아의 모든 인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형태를 산출하는 재료가, 과연 이 나라에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키아벨리가 중시한 것이 국가(stato)의 생명력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군주 또는 공화국이, 스스로의 stato를 어떻게 확립하고 국가(stato)를 보전할 수 있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었다군주론』은 군주제의 stato를 분석하고『전술론』이나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제의 stato의 가능성을 고찰한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의 이탈리아라는 상황(stato)에서 권력자가 자신의 세력(stato)을 확립하고, 국민 전체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국가(stato)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국가이성(라티오네 데 stato) 개념의 싹이 탄생한 것이다.

푸코는 이 국가이성 개념은 마키아벨리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를 반박하는 진영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마이네케가 지적하듯이, 마키아벨리 이전부터, 이미 국가의 힘 그 자체에 주목하는 이론이 발생했다. 프랑스의 신학자 장 젤송1404년에, 다양한 법률이 국가의 목적인 평화의 유지에 도움이 안 될 때, 법은 이 목적을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필요는 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국가이성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11세기부터 12세기 무렵까지, “결실이 풍부한 배후지로 혜택을 입은 롬바르디와 토스카나 지방 등,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는 다수의 도시국가가 성립되고, 독일 황제의 지배를 거부하며, 자치를 확립했다. 피사에서는 1085년에 콘술에 통치를 맡기는 도시국가(코무네)가 성립했으며, 1097년에는 밀라노에서, 1125년에는 볼로냐와 시에나에서 이런 코무네가 성립했다.

그 후, 이런 도시는 급속히 발전한다. 피렌체는 14세기에는 인구가 10만 명으로 확대되고,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와 파리가 유럽의 5대 도시가 될 정도로까지 성장한다. 주변의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농민이 도시의 공예산업, 무역, 환전업의 성장을 촉진했다.

이윽고 이런 도시는 통치를 외부로부터 온 통치자(포데스타)에게 맡기게 된다. 권한이 지정되고, 정해진 임기 후에는 그 작업의 내용이 점검된다. 12세기 말에는 이탈리아 북부의 전체가 이런 코무네에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제는 로마법 아래서는, 도시의 자치와 독립의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235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가 피아첸차 회의에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 제국의 통일로 복귀하라고 요구한다. 결국 로마 황제도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고, 치열한 전투로 도시는 황폐해진다. 결국 이 긴 전쟁 속에서, 도시의 법률가들은 황제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찾게 된다. 로마법학자들이 모두 황제의 주장을 지지하는 가운데, 삭소페라토의 바르톨루스Bartolus de Saxoferrato(1314-57)가 새로운 논리를 구축했다. 이것은 로마법의 혁명을 초래한 것이며, 법과 사실이 대립하는 경우에는 법에 맞게 사실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맞게 법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피렌체 같은 도시가 실제로 제국에서 독립해 자치를 할 경우, 그것을 사실로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라를 바치는める 자는, 통치자로서, 자국에서는 황제와 똑같은 권한을 소유한다는 원칙(lex in regno suo est imperator)을 제시한 것이다.

이 전통적인 국가 개념의 혁신은, 국가의 통치라는 사실을 통해 그때까지의 황제의 전통적인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이탈리아에서의 상태(stato)에서 모든 권리의 원천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 또한 유럽에서의 현황을 전제 삼아 고찰한다. “나폴리, 교회국가,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의 다섯 개 국가의 체계에 의해 어떤 의미에서 균형을 유지한 상태에 의거하여, stato에 대한 고찰을 시작한 것이다.

이 상태에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군주들에게, 피렌체를 새롭게 통치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보여준 것이다. 우선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들이댄다. “인간은 사악하며, 당신에게 신의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군주는 신의를 지켜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람의 원한은 선행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선한 행위에 매달리면, “선행이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사리사욕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깊은 신념이었다. 군주는 조언자들이 사리사욕을 생각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조언자가 사리사욕으로 내달리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선한 자가 되는 셈이어서, 그렇지 않으면 모두 당신에게 사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민들이 공통의 선을 위해 국가를 형성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이후의 전통적인 국가 개념을 파괴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종교도 도덕도, 국가를 떠받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군주는 이것을 도구로서 파괴하는 사용해야 한다. 국가를 떠받칠 수 있는 것은 군주의 덕(비르투)뿐이며, 이를 위해서는 온갖 수단을 행사해야 한다. 이것은 마이네케가 지적하듯이, 국가이성의 원리로 이어지는 사고방식이며, “그것을 표시하는 말은 마키아벨리에게는 결여되어 있으나, 사실과 stato를 중시하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국가이성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테로와 국가이성

이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 것은 1589년에 󰡔국가이성에 대해󰡕라는 책을 쓴 조반니 보테로였다. 이 시대에는 국가이성은 마키아벨리의 이름으로 말해졌으나, 보테로는 마키아벨리 같은 경건하지 못한 인물과 이 개념을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국가(stato)는 인민의 확고한 통치이며, 국가이성은 이런 통치를 확립하고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걸맞은 지식이다.

보테로는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주의 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생각한 <기세>, 간사함도 아니다. 보테로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정의와 관대함이다. 정의는 평화와 화합의 토대이다. 신하를 공평하게 대우하고, 아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관대한 마음을 갖고, 빈자를 돕고, 덕이 높은 행위를 칭찬해야 한다. 이는 대부분 전통적인 군주의 귀감이라는 말에 가깝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정의와 관대함을 갖추고 있는 듯 보이게 하는것의 가치를 인정한 반면, 보테로는 군주가 실제로 정의를 중시하고 관대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군주에게 공통선의 실현이라는 과제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테로의 이 책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때까지 없었던 시민들의 공동의 과제였던 공통선의 실현을 명확하게 군주의 과제로 삼음으로써, stato의 기술을 공통선 실현의 목적과 결부시키고, 전통적인 정치학의 언어와 국가의 통치의 언어를 통합한 것에 있다. “그때까지 정치학은 시민의 철학(정의, 우정, 화합)과 결부되었으나, 이를 분리하고, (군주의) 평판을 유지하고 높이는 방법으로 제시함으로써, 보테로는 실제로는 정치학을 국가의 기술의 지침에 따라 해석할 것을 주창했던 것이다.

보테로는 예수회의 콜레주 출신이며, 이 시대의 예수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계승하면서, 국가의 통치의 이론을 전개했다. 보테로는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통찰을, 토마스가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공화주의적인 공통선의 가르침과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며, 이것에 의해 국가이성의 이론은 유럽의 다양한 궁중들에 퍼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스페인의 궁정에서 읽혀지고 통치의 참고가 됐으며, 파이엘른의 막시밀안 2세도 보테로의 국가통치술의 원칙을 채용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프레데릭 2세도 이 책을 읽었다.

이런 국가이성의 이론은 국가의 통치 기술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면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의 힘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국가를 유럽의 공간 안에서 병존시키면서 모든 것이 자국의 힘과 세력을 강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stato로 간주하고, 그 목적을 통치자의 덕과 합리적인 배려에 의해 수행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과 자연에 입각해서 인간의 내세에서의 구원을 목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요구됐다. 그것이 이제는 국력을 따라서 통치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국력을 확장적이고 경쟁적인 틀 속에서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통치 형태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의 세력균형의 상태에 걸맞은 학문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 당시는 매일 무수한 사람들이 국가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이며, 이는 곧바로 하나의 발명으로 인식된 것이었다.

이런 국가이성이란 결국 선한 통치의 기술이다. 이 기술의 특징은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군주의 덕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보존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과 같은 국가 이외의 목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행복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국가이성에 의한 통치에는 몇 개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우선 이 통치가 필요해지는 것은 인간 본성의 약함이나 인간들의 악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이성 없이는 국가는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기술은 항상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무제한한 시간, 항상적이고 보수적인 통치의 시간이다.

두 번째 특징은 지금 존속하고 있는 국가의 힘 자체가 중요하며, 국가가 어떻게 설립됐느냐는 기원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가를 계승했더라도, 찬탈한 것으로 통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국가이성의 통치에 있어서는 기원이나 정초나 정통성이나 왕조에 관한 문제조차 제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국가의 보존만이 목적이며, 국가가 맡아야 할 종국적 목적 등이 모습을 지우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혼의 구원 등은 배려할 필요도 없고, 종말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다. 통치의 시간은 현재만을 지향하지만, 이 현재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으로 상정되는 것이며, 종말은 없다. “열린 역사성 속에 있는 것이다.

 

국가이성과 사목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국가이성의 기술이, 사목의 기술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사목의 기술이 어떻게 국가이성의 기술로 전개되고 있느냐에 있다. 국가이성은 사목과는 명확하게 다른 특징을 갖추면서, 어떤 의미에서 사목의 기술을 채용하고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 두 이론의 관계를 사목의 기술에서 고찰의 축으로 삼은 구원, 복종, 진리의 세 가지 축으로 검토한다.

 

── 구원의 축

먼저 구원에 대해 푸코가 의거하는 것은 국가이성의 가장 현저한 표현인 쿠데타 개념이다. 오늘날 쿠데타는 정통성 있는 권력자가 아닌 자가 폭력적 수단으로 국가의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국가(état)에 의한 일격(coup)이며, 국가가 예외적인 조치로서, 비상수단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쿠데타란 법과 합법성을 중지시키고, 정지시키는 것이다.

국가이성은 통상적이라면 법을 지키지만, 그것은 스스로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이며, “법을 따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국가가 법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국가의 현황에 대해 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6세기의 이탈리아의 법률가가 코무네에는 황제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이성은 국가의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초법규적인 수단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구원의 필요성이라는 명분 아래서, “그때까지 인정되고 작동되었던 시민적, 도덕적, 자연적인 법을 일소하도록 국가이성을 들볶는 것이 요구된다. 그것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양(羊)의 혼의 구원을 첫 번째의 목적으로 한 사목자의 역설이 뒤집혀진 채 남아 있다.

이런 쿠데타는 필요성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폭력적이며, 이것이 쿠데타의 두 번째의 중요한 특징이다. 보통 국가이성은 법을 틀로서, 형식으로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사하지, 쿠데타의 순간에는, 폭력적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 국가 이외의 모든 것은 희생된다. 구원되는 것은 국가뿐이다. 그래서 국가이성의 구원은 사목의 구원을 물구나무 세운 것이다. 사목의 구원은 겉으로는 만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국가이성은 선택적인 사목제, 배제하는 사목제, 전체를 위해 몇몇을 희생시키고 국가를 위해 몇몇을 희생시키는 사목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공선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위이다. 전체의 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오염된 양을 배제하는 사목자의 역설이다.

쿠데타의 세 번째 특징은 연극적이라는 데 있다. 국가이성은 쿠데타에 있어서 연극적으로 실천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극적인 형식에 있어서 국민의 눈앞에 제시함으로써, 그 정통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목은 모든 비참을 참아내는 인내의 술을 가르쳤는데, 국가이성은 필요하다면 국민을 희생시키는 연극적이고 비극적인 가혹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목에서 신도들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지만, 국가이성에서는 국가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국민이 스스로를 희생할 것이 강요되는 것이다.

 

복종의 축

두 번째 축은 복종이다. 푸코가 고찰하고 있는 텍스트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모반과 동란에 대한 시론이라는 글인데, 여기서는 국가이성의 최초의 이론가인 보테로의 『국가이성에 대해』를 실마리 삼아 생각해보자.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국내의 통치에서 가장 중시해야 하는 것은 대귀족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귀족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고등법원 제도를 참고해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생각했다. 프랑스에서는 민중이 대귀족의 횡포를 미워하며, 왕은 민중을 보호하기 위해 대귀족을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왕이 직접 귀족들을 억누르면 민중을 편들게 되며, 귀족의 원성을 살 위험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고등법원을 설치하여 3자의 중재자로 삼아 큰 세력을 억누르고자 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민중에게서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성벽(城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국내의 유력자로부터도, 외국의 적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 민중은 방패와 같은 것이며, 능동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푸코가 지적하듯이, 그에게 인민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순박한 것이며, 군주에게 도구로서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다만 그럴 뿐이다.

반면, 보테로는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보테로에게 민중은 능동적 주체이며, 국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다. 군주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자금과 주민이다.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한 두 개의 힘이 남는다. 그것은 인민과 자금이다.” 보테로는 군주가 국내의 상거래와 수출입에 어느 정도의 세금을 거둬들여서 국고를 살찌울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검토한다.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둬들이면, 인민은 가난해지고, 반란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리고 결국 국가는 파멸에 이른다. 세금이 너무 적으면 군주는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고,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외국의 공격을 받았을 때,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적절한 세금을 걷는 것, 그것이 군주의 중요한 과제이다. 보테로가 보여준 것은, 국가의 수입과 지출의 통계를 작성하는 것이다. 보테로는 통계학의 이른바 선구자이다.

 

인민을 해치지 않고, 지배자가 수중에 남겨둔 금액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국내에 반입되는 상품의 지불을 위해 어느 정도의 금액이 나라에서 나올 것인지, 국외로 수출되는 상품의 지불로 어느 정도의 금액이 나라에 들어오는가를 확인하고, 수중에 남겨둘 금액이 국가의 수입으로부터 지출을 뺀 금액보다 많아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중상주의의 견해를 선구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인민은 스스로의 부를 향유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되며, 세금을 내게 된다고 간주된다. 반란을 방지한다는 이런 관점은 국가의 두 번째 중요한 요소인 주민의 생산성에 대한 시선과 교차한다. 군주는 스스로 국가의 수입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주민이다. 이를 위해서 군주는 신하가 농업, 산업, 상업에서 열심히 일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보테로는 인민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사적 이익[私利]뿐이라고 생각한다. 인민이 풍족해지지 않으면, 국가는 부유할 수 없다. 사적 이익의 추구는 국가의 이익을 높이는 것이다.

이처럼 군주는 두 개의 기술, 즉 통계학과 중상주의에 의한 경제적 계산에 의해 국가를 부유하게 할 수 있는 동시에 인민을 복종시킬 수 있다. 인민을 복종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민이 풍요로워져 반란을 일으킬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귀족은 반란을 일으키면 처벌하면 된다. 반면 인민은 현실적으로 곤란하며, 현실적으로 위험하다. 통치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민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의 계산의 대상이 되는 것은 , 부의 유통, 세금 , 인민의 활동 그 자체이다.

사목의 기술에서는 복종 그 자체가 선이었다. 신도는 복종함으로써, 스스로의 구원을 확보할 수 있다. 국가이성에서는 복종 그 자체는 선이 아니다. 인민은 풍요로워짐으로써 자연에 복종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피안에서의 인민의 혼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 차안(此岸)에서의 인민의 경제적 행복에 의해 뒷받침된 국가의 구원이 목적이다. 그러나 인민을 복종시킨다는 목적을, 사목의 기술과 국가이성은 공유하는 것이다.

 

── 진리의 축

푸코가 사목과 국가이성을 비교하는 세 번째 축은 진리에 관한 관점이며, 이는 통계학이라는 학문에 관련된 것이다. 사목에서는, 사목의 기술의 전제가 되는 기독교의 교의가 우선 진리로서 가르쳐질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 사목자는 담당하는 양떼들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양들은, 스스로의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고백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신-사목자-양이라는 사이클이 사목의 진리의 사이클이라고 한다면, 국가이성에서는 진리의 대상이 되는 영역 그 자체가 바뀌게 된다.

국가이성이 등장하기 전에 지배자에게 요구된 진리와 지식은 교회법이며 자연법이었다. 더욱이 역사상의 다양한 예나 미덕의 모델에 대한 지식이었다. 그리고 지배자에게는 법을 신중하고 공평하게 적용할 것이 요구됐다. 그러나 17세기가 되자 지식의 내용 자체가 바뀌게 된다. 법이 아니라 국가의 현실 자체인 사물이 지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지배자에게는 국가의 세력에 관련된 모든 요소를 정확하게 인식할 것이 요구됐다. “인구의 계량, 사망률과 출생률의 계량, 국내의 다양한 범주의 개인들의 산정(算定), 그들의 부의 산정 , 조사해야 할 요소는 무수히 많다. 이것이 통계학(statistique)이다. 통계학이란 국가(state)의 학인 것이다. 그것만으로 통계 데이터가 국가의 비밀이며 제권帝権의 비밀(아르카나 임페리이[지고의 비밀])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이성에 있어서 중요한 지식은 단순한 영토가 아니며, 개별 국민도 아니고, 주민이며, 인구이며, 국가의 부의 총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무리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 양떼의 시선은, 사목의 기술과 국가이성에 공통되는 것이며, 국가이성은 바로 사목으로부터 이것을 배운 것이다.

 

세력균형과 영구평화

이 국가이성의 개념은 유럽에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이윽고 독일에서는 내치[폴리차이, 관방학]로 불리는 국가학을 만들어내게 된다. 다만 이 국가학에 대해 검토하기 전에, 국가이성의 이론을 채용한 유럽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다양한 힘이 경합하는 장에 있어서의 새로운 통치술에 특징적인 기술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내치[폴리차이]라는 학이 생겨나기 위한 하나의 전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테로는 이상적인 국가의 규모로 중간 정도의 국가를 상정했다. 너무 작은 국가는 타국의 침략을 받기도 쉽고 멸망하기도 쉬우며, 국가가 커지면 부가 증대하고, 부가 증대하면 악덕이 증대한다. 특히 사치와 오만과 방탕과 탐욕, 모든 악의 원천이 증대하기 때문에, 내적 원인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작고 멸망한 국가의 예로 보테로는 15세기에 중세 도시의 특권을 잃은 시칠리아의 라구사와, 14세기까지 피렌체와 함께 영화를 누렸던 토스카나의 도시 루카를 들고 있다. 또한 너무 큰 국가의 예로 보테로는 스페인 제국과 터키 제국을 들고 있다. 중간 규모로 바람직한 국가의 실례로서는 베네치아, 밀라노, 플랑드르, 보헤미아를 들고 있다.

문제는 중간 규모의 이상적인 국가를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인데, 보테로는 국가가 끊임없이 인구를 증대시키고 세력을 확대해가는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는 세력을 확대함으로써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국이 되면, 멸망이 눈앞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보테로는 국가의 인구를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하려 한다. 국가의 번영의 문제를 고찰한 『도시의 위대함에 대해』에서 보테로는 도시에는 생성적인 virture()의 요소와 영양적인 virture()의 요소가 있다고 지적한다. 생성적인 덕의 비율은 도시 인구의 증가율이며, 이것은 시간과 더불어 변동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과 모세의 시대에도, 현대에도, 인간은 똑같이 생식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영양적 덕은 도시나 국가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인데, 여기에는 어떤 종점이 존재한다. 다양한 도시의 발전 단계에서 생성적인 덕의 비율이 영양적인 덕의 비율을 넘어선 시점에 인구는 정점에 이르며, 그 뒤는 쇠퇴가 기다리고 있다. 국가는 항상 이런 탄생, 증강, 완성, 쇠퇴라는 사이클을 경험하는 것이다(이것이 당시는 ‘revolution’이라는 용어로 불렸던 것이다. 혁명의 원뜻은 여기에 있다). 보테로는 이런 완성의 단계가 찾아온 국가는, 식민이라는 수단으로, 너무 증가한 인구를 방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통치의 술은, 이 정점을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며, 국가이성은 국가를 본질적으로 그런 혁명에 맞서 유지하는 것이다.

다만 이 국가는 다양한 국가들 속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유지해야만 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국가의 경우에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방책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강대국들이 서로 싸우게 됐을 때 어느 한쪽을 도우면, 다른 나라를 분노케 할 것이다. 둘 다를 돕는다면, 쓸데없이 자금을 낭비하고, 어느 쪽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도 돕지 않는다면, 어느 쪽에 의해서도 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 국가이성의 외교정책은 유럽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것이었다. 이 시대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럽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단테 무렵까지는 아직 기독교적 제국의 힘으로, 유럽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됐으나, 종교개혁과 그 후의 종교전쟁이 그 환상의 뿌리를 완전히 잘라버렸다. 가톨릭과 개신교 국가들로 분열된 이 시대에는, 더 이상 기독교적 제국이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게 됐다. 단테의 레스 푸블리카 크리스티아나(기독교 공동체)의 환상이 붕괴한 후에 생겨난 것이 세력의 균형이라는 이상이었다. 이 이상이 목표로 한 것은 기독교의 국가와 군주 사이에 힘의 평형관계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국가이성이 찾아낸 것은, 자국이 타국들과의 공존 속에 있다는 것이며, 유럽의 현실은 국가들이 경합 공간에 나란히 있고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은 단순히 지리적 명칭일 뿐이게 되고, 다양한 국가가 모여 하나의 균형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단위가 됐다. 각각의 국가에는 주권자가 있고, 독립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국가의 종교는 그 국가의 주권자가 결정한다는 독일의 영방국가의 원칙이 유럽의 전체 원칙이 됐다. 이 시대의 유럽은 두 강대국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재상 올리바레스Olivares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스페인과 재상 리슐리외가 이끄는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이다. 이 대립에서, 둘 다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개신교의 네덜란드에 원조의 손을 내밀고, 독일의 -합스부르크의 개신교 제후를 극력 지원하는 게 리슐리외의 기본적인 외교 전략이었다.” 이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책이며, 앙리 4세 이후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뿐이었다. 전쟁에 있어서는 가톨릭의 국가가 개신교 국가와 동맹하고, “가톨릭 국가들이 개신교의 군대를 이용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그 반대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국가들에 세력의 차이는 있으나, 주권자라는 것에서 서로 대등하며, 이른바 절대적인 단위이다. 각각의 단위에 있어서, 국가는 자기를 주장하고 보존하려고 하며, 다른 국가와 경합하려고 한다. 국가에 있어서는 자기 보존이 자기 목적이 되며, 이를 위해 국가이성이라는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이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유럽 안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우선 스페인은 유럽의 국가들 중 하나이며, 다른 국가들과의 경합관계에 있다. 그러나 스페인은 해외에 거대한 식민지를 획득했으며, 세계 제국(帝國)에 가까운 세력을 뽐냈다. 남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금과 은은 거대한 부를 스페인에게 가져다주었는데, 그 식민지에서 생겨난 부 때문에 스페인은 급속하게 쇠퇴했던 것이다. 그 부 때문에 더욱 눈부시고 더욱 빠른 방식으로 빈곤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스페인 문제라고도 해야 할 것이 유럽 사람들의 머리를 괴롭혔다. 이 문제는 삼중의 의미를 가졌다. 첫째는 스페인이 식민지를 건설할 때, 원주민들을 노새처럼 다룬 것이 법적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 인간인지 아닌지, 동물처럼 학대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대하는 것은 허용되는가. 현지의 제국과의 사이에서 싸운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자연법과 만민법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둘째는 식민지의 운영의 문제이다. 스페인은 금과 은의 입수만을 위해 식민지를 운영하고, 이를 위해 현지의 사람들을 학대했다. 이런 식민지 경영은 적절한 것일까? 식민지는 모국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이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 이윽고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스페인에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며,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에 진출한다. 모국은 이런 식민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셋째는 스페인이 획득한 대단히 많은 재신이 모국을 몰락시킨 것은 왜인가라는 수수께끼였다. 부를 획득하는 것이 국력을 증강시킨다는 것은 당시의 중상주의의 신념이었다. 그런데도 스페인은 왜 몰락한 것일까? 이 부가 문제였던 것은,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가져온 부의 대부분이 전쟁이라는 암을 위해 소비됐기 때문이었다. 이 부는 유럽의 세력균형을 교란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며, 다른 국가들에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외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번째 문제가 단순히 스페인 일국의 문제가 아니라, 각 국가의 국부의 문제로 이해됐다는 것이다. 국가의 부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주권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보댕에게 주권자로서의 국왕이 얻은 부는 국왕의 행동방식의 문제로서 제기됐다. “과세의 인기가 낮은 것은, 지배자가 신하에게서 얻은 부를, 일반적으로 전 국민의 이익이 되는 용도로 사용함으로써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테로가 보기에 전통적인 기독교의 관점에서, 국왕의 부가 신하의 부에 의존하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제 군주의 부가 아니라, 각 국가의 국력의 총체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스페인의 네거티브 모델에 대항하는 형태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대항하는 부의 모델이 제기된다. “국가이성에 관한 이런 분석, 자기 정의하고 있었던 새로운 정치의 영역에 관한 이런 분석은 모두, 스페인의 적국이나 대항국에 있어서 특권적인 방식으로 발전된 것이다.

대항의 축은 더 이상 군주의 부가 아니라, 국가 자체의 부이며,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국가에 내속하는 부, 국가가 손에 넣고 있는 자원, 천연자원, 통상력, 교환 균형 등이며, 군주 사이의 대항관계가 아니라 국가의 경합관계이다. 반대의 의미에서는, 이 시대에는 광대한 영토를 지닌 스페인이 아니라 어째서 소국인 네덜란드가 풍요로운 국가인가가 문제로서 제기된 것이다. 어떤 중상주의의 이론가는 소국인 네덜란드가 자연적인 부도 식량도 목재도 또한 전시평상시의 그 밖의 자원도 거의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큰 욕망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함선무기삭구綱具곡물화약탄환 기타 등등을 근면한 무역에 의해 세계의 구석구석으로부터 모집하고, 이것을 타국의 왕후에게 공급하고 매각할 수 있는 것을 세계의 한 가지 수수께끼라고 부른다. “네덜란드 문제스페인 문제의 뒤쪽에 들러붙은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런 역학관계의 물음으로부터 유럽 국가들의 외교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시대에, 이윽고 산 피에르와 루소에 의해 영구평화라는 희망이 얘기되게 된다. 그리고 이 영구평화는 유럽의 국가들 사이의 외교적 수단에 의해 구축되게 되어 있었다. 유럽의 국가들의 힘관계가 완전히 균형을 이루었다면, 타국을 정복하려고 하는 강대국의 시도에는, 반드시 주위의 국가들로부터 견제가 가해지고, 실패로 끝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유럽의 내부에서는 평화가 실현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기대된 것이다.

그 본보기가 된 것은 프랑스의 앙리 4세의 시도이다. 이것은 아직 30년 전쟁이 종결되기 전, 즉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시도된 것이었다. 앙리 4세는 유럽을 통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복수의 유럽들 사이에서 이해관계의 그물망을 만들어내고, 단테의 기독교 공동체와는 다른 기독교의 공화국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했다. 그 계획의 중심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를 포위하여 제국의 유럽 지배의 야망을 종식시키는 데 있었다.

왕은 우선 영국에 작동을 건다. 이어서 스웨덴에, 사부아에, 로마 황제에게. 영국은 스페인이 국내의 가톨릭 교도에 작용하여 음모를 꾀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그동안 원조했던 네덜란드를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면, 더 이상 원조를 위해 높은 비용을 들일 필요는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스웨덴 왕은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손에 넣어 독일에 지반을 굳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부아공은 밀라노령과 롬바르디아의 왕관을 노렸다. 로마교황도 스페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나폴리를 중개로 이 계획에 참가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유럽 전역을 지배하려고 하는 합스부르크가를 포위하여 타도함으로써, 유럽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계획된 것이었다.

새로운 체제 아래서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열다섯 개의 지배력으로 분할하고, 이런 강국들 사이의 경계는 제대로 조정調整될 수 있도록, 더 이상 그 사이에서 언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권리나 주장의 다양성을 공평하게 조정調整한 것이어야 한다.” 이리하여 유럽의 마지막 전쟁이 될 터인 전쟁이, 불멸의 평화를 준비하고 있던 그때에 왕이 암살당하고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이는 합스부르크가가 목표로 삼은 단일한 유럽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수로 이루어진 유럽에 조화와 평화를 가져오려고 하는 계획이었다. 다만 이 계획이 목표로 하는 평화는 유럽 내부의 평화에 불과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계획에서는 동시에,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이 영토를 잃은 것을 보상하듯이, 스페인에 대외 식민지에서의 활동을 우선적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독점적으로 타국을 착취할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영토 상실을 눈감게 하는 동시에, 그 제국주의적 야망을 구역의 바깥으로 돌리게 할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 평화로운 유럽은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의 차이에 이용식민지화지배라는 관계를 갖는, 지리적 지역으로서의 유럽이며, 이 유럽의 사고와 역사적 현실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력균형을 목표로 하는 유럽에서, 외교를 틀로 삼은 국가이성은 세 개의 도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 첫째는 전쟁이다. 역설적인데, 평화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할 준비가 필요하다. 여기서 전통적인 전쟁과는 다른 근대적인 전쟁 개념이 등장한다. 중세에서 전쟁은 법이 침범당했을 때 행해지는 것이었다. “전쟁은 법적인 틀에 있어서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이성의 시대에는 전쟁이 전혀 다른 틀에서 전개된다. 우선 전쟁을 시작하는 이유가 완전히 외교적이게 됐다. 균형이 위협 받고 있는 것만으로 전쟁이 행해지게 된 것이다. 그 실례로 유명한 것이,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베네치아에 인접한 만토바공국(Ducato di Mantova)의 계승을 둘러싼 만토바전쟁이다. 1627년 말에 만토바공이 사망하자, 근친자는 조카인 마리아뿐이며, 여성이 계승할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 왕의 신하인 느베르(Nevers) 공이 나섰다. 그리고 만토바공국이 프랑스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 스페인의 밀라노 총독이 만토바와 몽페라트를 보장 점령하고, 이것이 곧바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으로 비화했다. 더 이상 전쟁은 사법과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국내와 국외의 정치와 결부되게 된다. 동맹국과의 결부라는 외교의 이유만으로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200년 후에는 전쟁이란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이다라는 정식화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도구는 외교이다. 이 시대에는 다양한 조약이 체결되고, 유럽의 균형이 유지된다. 이 조약들은 지금처럼 계승에 관한 법권리나 승리자의 법권리와 같은 낡은 법권리를 따라서가 아니라, 물리적 원칙을 따라서 이뤄진다. “영토, 도시, 교구, 항구, 수도원, 식민지가 교환되고 값이 깎이고, 옮겨지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 사이의 균형을 최대한 안정된 것으로 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다.

이를 위한 교섭을 행하는 목적으로, 상설 조직이 검토됐다. 앙리 4세의 계획에서는, 분쟁 처리를 위한 중앙 평의회가 설치되고, 열다섯 개의 강국의 각국으로부터 4명씩 선출된 대표 60명이 모여서 평등한 형태로 다수결로 분쟁을 해결하기로 했다. 산 피에르의 영구평화론에서는 열아홉 개의 강국이 유럽 연방의 연합의회를 설립하고, “전권 위원을 임명하고, 일정한 장소에서, 연합의회 또는 상설 회의를 전개할 예정으로, 이 회의에서 체결 당사자 사이의 분쟁은 모두 중재 또는 심판이라는 방법에 의해 조정되며, 해결되는 것이 된다. 이는 곧 국제연맹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빈회의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화려한 외교의 시대가 된다. “다양한 절차가 성문화되고, 외교 특권이 정의됐다.” 이리하여 외교관이 장군의 대를 잇게 된 것이다.

세 번째의 도구로서 푸코가 들고 있는 것이 항상적인 군사장치이다. “평화 시스템의 내부 자체에, 항상적인, 비용이 드는 중요한, 지식을 갖춘 군사장치가 존재한다는 역설이, 이 유럽의 균형을 떠받쳤던 것이다. 상비군에 의해 뒷받침된 정치와 군사의 복합체는, 안전 메커니즘으로서의 유럽의 균형의 구성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국가이성을 표방하는 프랑스의 리슐리외와 스페인의 올리바레스는 각각에 자국을 축으로 한 유럽의 세력균형 계획을 세웠다. 올리바레스가 목표로 한 기독교 세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서의 평화(팍스 아우스트리아나)이며, 로마교황청과 밀접하게 협력한 빈(Wien)의 신성로마 제국과 마드리드의 스페인 왕국이 유럽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리슐리외가 목표로 한 기독교 세계는 프랑스가 첫째 가는 군주국으로서 유럽에 집단 안전 보장을 실현한다는 앙리 4세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불가결한 수단이 전쟁이며, 프랑스와 스페인은 패권을 놓고 30년 전쟁을 전개한 것이다. 유럽의 평화란 끊임없는 전쟁상태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모든 것은 국가이성 안에서, 자국의 국력과 타국의 국력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시선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 시대의 정치이론가들은 군주가 이웃 나라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자명한 것이라고 했다. 1628년에 간행된 어떤 정치 팜플렛은 이웃 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막으려면, 누구든 그 시선을 열어두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국가이성의 이론은 관찰자 속에 완전히 새로운 정신을 심어준 것이며, 유럽의 해부학이 정치이론의 바탕이 된 것이다.

다만 유럽의 힘의 균형의 구상은 단명했다. 나폴레옹 전쟁 뒤에 그 꿈이 약간 되살아난다. 그러나 1815년의 빈조약에서 만들어진 유럽의 균형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약으로 유지할 수 있던 상황은 항상 그 내부로부터 위협받는다. 1848년에 유럽을 뒤흔든 혁명은 1870년대의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민국가의 형성을 통해 종식된다. “1870년대 초반에는 빈회의에서 구상된 서유럽은, 이제 거의 대부분 남아 잇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도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균형의 이념이 외부에 배제했던 세계의 다양한 지역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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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통치능력 : 미셸 푸코의 질서자유주의론

오모다 소노에(重田園江)

김상운 옮김


* 아래의 글은 『푸코 이후』에 수록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독서 겸 번역을 한 것인데, 검토 결과 『푸코 이후』에는 수록하지 않기로 했다. 그에 따라 세미나 참고용으로 공개한다. 출전은 다음과 같다. 重田(米谷), 「自由主義の統治能力 : ミシェル・フーコーのオルド自由主義論」, 鬼塚雄丞 외 편, 『自由な社会の条件』(新世社, 1996년), 196-222쪽.

* 인용문이나 몇몇 단어, 구절은 원문과 완전하게 대조하지 않았지만, 하여간 대체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15년 1월 27일(화요일)



들어가며

20세기는 <자유로운 사회의 조건>에 관해서 19세기와는 상이한 사고방식이 크게 대두됐던 시대이다. 우선, 케인즈의 『자유방임의 종언』(1926년)의 제목이 드러내듯이, 경제정책에서 자유방임주의의 한계가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의회정치도 대중민주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된다. 20세기는 세계공황과 제2차 대전을 거쳐 <사회주의 국가>, <복지국가>를 형성함으로써 이런 경제적·정치적인 이중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꾀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사회>는 더 이상 대의제를 통한 형식적·법적 자유의 보장에 의한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추구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행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개입이나 보장을 수반한 집단주의적 정치·경제체제에 의해 실현된다는 이념이 주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념에 입각해 자본주의 세계에서도 사회보장의 확대, 압력단체의 의회정치로의 편입, 노동조합의 경영조직으로의 체제 내화에 의한 조직사회·조직자본주의가 실현된다.

그러나 조직화를 통한 <국민국가> 단위에서의 생활향상과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목표로 하는 체제는 1970년 이후 다시 커다란 동요를 경험한다. 이것은 클로지에·헌팅턴·조지 와타누키(線貫讓治)의 『민주주의의 통치능력(The Governability of Democracies)』(1975년), 하버마스의 『후기자본주의에서의 정당성 문제들』(1973년) 등에서 통치능력의 위기나 복지국가의 정치경제 시스템의 위기로서 문제시되기 시작한다.1) 또한 케인즈형의 거시경제정책이나 사회민주주의의 복지국가 노선을 비판하는 정치조류인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노믹스의 대두도 이 체제의 기능장애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신자유주의도 20세기 서구사회에서 주류가 된 케인즈 복지국가 모델을 비판하고 이와는 다른 사회질서의 방식을 모색한 사상체계이다.

이 사상은 1930년대, 즉 케인즈와 동시대에 형성되었던 것이지,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응하면서 비로소 출현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표면화되는, 경제·사회문제에 대한 국가관리가 품고 있는 문제를 많은 점에서 선취하고 비판하면서 70년대에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런 복지국가의 막다른 골목 이후의 사회질서의 대안 중 하나인 신자유주의에 관한 미셸 푸코의 논의를 다루고, 신자유주의가 구상하는 <자유로운 사회의 조건>에 관해 고찰을 시도한다.


1. 푸코의 통치성 연구에서 질서자유주의의 위상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1978년 및 79년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서양의 <통치성(gouvernmentalité)>의 역사를 논했다. 그 중 79년의 총12회 강의 중 7회를 (서)독일 및 미국의 신자유주의의 검토에 할애한다. 이 강의는 “현재와 관련된 과거의 역사”2)를 그려내는 것을 취지로 한 푸코에게는 드물게, 동시대의 사상조류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여기서 그는 현대를 신자유주의의 ‘국가공포증’(소련형의 계획경제나 나치즘과의 동일시에 의한 복지국가 비판. 뒤의 각주 7 참조)이 다양한 형태로 분출하는 시대라고 규정한다.3) 나아가 프랑스에서 74년에 대통령에 선출된 지스카르 데스탱 등의 정치경제전략을 이 조류의 하나라고 파악한다. 그는 지스탱을 프랑스에서의 étatisme(국가관리), dirigisme(관리경제/계획경제)의 전통과는 한 선을 긋는 새로운 유형의 자유주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동시대의 사상 정황과 프랑스의 정치 상황, 이 두 가지를 모두 시야에 넣은 신자유주의론의 전개를 시도한다. 이 글에서는 강의에서 특히 중점적으로 논해졌던 독일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를 중심으로 푸코의 신자유주의론을 검토한다.4)

우선 맨 처음으로, 푸코의 통치와 관련된 연구(이하, 통치성 연구) 전체의 개요를 제시하고, 그 속에서의 질서자유주의의 위상을 드러낸다. 통치성 연구는 서양근대에 있어서 개개인의 삶(생활·생명)이 어떤 형태로 전체질서와 관련되는 문제가 되고 정치적 개입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통치라는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역사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던 연구이다. 통치란 근대에서의 전체 질서의 형성과 관련된 문제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형성 방식, 사람의 행위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방법·유형의 관점에서 고찰하기 위한 개념틀이다. 이 개념을 사용해 푸코는 개개인의 삶에 개입해가는 근대의 통치를 그 첫 번째 형태로서의 <국가이성-폴리스의 통치>와 두 번째 형태로서의 <자유주의의 통치>로 나눠 고찰한다.

푸코는 여기서 케네나 스미스 등의 18세기의 자유주의 경제학설에서 볼 수 있는 통치성을 그 이전의 국가이성-내치에서의 통치성과 대비하고 있다. 내치 행정의 경우 사람들의 삶의 관리는 세세한 사항에 걸친 규제·감시·단속을 통해 이뤄진다. 내치란 일상생활을 구석구석까지 규율화하고 규제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하고, 생명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 통치의 테크놀로지이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에서는 규제(réglementation)가 아니라 조절(régulation)이라는 개입방법이 취해진다. 하나하나의 모든 그물망을 규제에 의해 정하는 게 아니라, 개개인의 행동의 자유를 용인한 위에서 거시 수준에서의 조절을 통해 전체 질서를 구축해가는 것이다.5)

푸코는 질서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이런 18세기 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를 재편한 것으로 규정한다. 18세기의 자유주의에서는 정치권력에 의한 무제한의 개입을 막는 자율적 영역으로서 <시장의 질서>가 발견되었다. 이에 반해 질서자유주의에 있어서는, 뒤에서 말하겠지만, 시장은 법이나 정치에 있어서 개입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법이나 정치를 통해 설계되고 구축되는 존재이다. 여기서는 시장이라는 <자연>적인 영역을 강제적으로 외부로부터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성을 존중함으로써 질서를 성립시키고자 하는 자유주의의 통치의 특징이 계승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질서의 정립에 있어서 개개인의 선택·행위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생활양식이나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정치권력의 존재가 불가결해진다. 이 점에서 질서자유주의는 18세기의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바라보면, 일종의 ‘중심이동(déplacement)’6)을 통한 통치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 통치성 연구의 시각 : 정치학 비판

이어서, 푸코의 통치성 연구를 필자가 어떤 각도에서 파악하는지, 또 그것을 기초로 푸코의 질서자유주의의 특징을 어디서 보는지를 밝혀두고 싶다.

필자는 푸코의 통치성 연구를 기존의 정치학, 그 중에서도 정치학사(정치사상사)에 대한 비판의 시도로 파악한다. 푸코 자신은 예를 들어 「전체적이고 개별적으로 : 정치적 이성의 비판을 향하여」(1979년)나 「개인에 관한 정치 테크놀로지」(1982년)에서 현재의 정치이론이 일상생활과 관련된 정치를 논하는 유효한 시각을 갖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 최대의 이유는, 정치이론이 국가의 법적 정당성이나 의회정치에서의 의사결정의 민주성 등을 중심으로 이론을 구축하고 있고, 18세기까지 만들어졌던 고전적 정치학의 인식틀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 있다. 그 때문에 그 틀에 걸맞지 않은 정치의 방식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1975년)의 규율권력론에서 이미 그는 정치권력에 관해 법과 권리의 것으로 밖에는 정치권력에 관해 사고할 수 없는 정치학의 현재 상태를 비판하고, 정치와 권력에 관해 말하는 새로운 언어의 탐구를 시작했다.7) 통치성 연구는 그 후의 『앎의 의지』(1976년)에서의 <생명권력>론을 통한 정치와 권력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법을 모색하는 시도로 자리 매김될 수 있다.

통치성 연구에서 푸코가 그려내는 것은, 17세기 이후 서양 <근대국가>의 틀 안에서 전개된 것, 즉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첫 번째 대상으로 하는 정치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분석대상이 “일상의 정치적 합리성(everyday political rationality)”8)에 있다고 서술한다. 그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정치를 분석하기 위한 <통치>라는 개념을 사용해 기존에는 <근대정치사상>으로 다뤄졌던 마키아벨리나 사회계약론이 아니라, 내치학이나 중농주의를 독해하고자 한다.

여기서 이 일상생활의 정치에 대한 착안의 독자성을 다른 <정치> 개념과의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밝히고 싶다. 우선, 푸코가 기존의 “정치이론의 실패”9)라고 할 경우의 정치이론이란 이미 말했듯이 정치를 그 법적 정당성의 관점에서 묻는 사상인 것 같다. 여기에는 사회계약론뿐만 아니라, 정치를 법권리(droit)의 용어를 사용해 파악하는 사상 일반이 포함된다.

나아가 한나 아렌트와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과 대비시켜보면, 통치성 연구에서의 푸코의 정치개념이 훨씬 명료해진다. 우선, 세 사람에게 공통되는 동시대 인식부터 봐두자.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1958년)에서 근대를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별을 애매하게 만드는, 혹은 그 양자를 집어삼켜 버리는 <사회적인 것>이 발흥하고, 이것에 의해 정치가 현저히 변질을 겪었던 시대로 파악한다. 또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년)에서 20세기를 국가와 사회의 구별이 애매해지고, 이것에 의해 정치가 국가적 사태(事象)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문제가 정치화되는 시대로 규정한다. 푸코도 이들과 시대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근대를 공과 사, 국가 전체와 사회의 말단을 관련시키는 <전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의 관리기술이 출현하는 시대라고 본다.10)

그러나 우선 아렌트가 <사회적인 것>의 발흥 이전의 세계, 특히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정치적인 것>의 범형을 찾아가는 반면에, 푸코는 아렌트가 정치가 사멸하고 있는 시대라고 본 근·현대 사회에 머물러서, 거기서의 정치의 현실에 다가서기 위한 언어를 찾아내고자 한다.

이에 반해 슈미트는 바람직한 정치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정치를 대상화하고자 한 점, 또 정치를 그 밖의 무엇인가의 활동영역과는 상이한 고유한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종교·경제·도덕 등 다양한 영역을 관통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 방식으로 파악했던 점11)에서 푸코와 공통적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을 친구와 적 사이의 구별로 파악하는 점에서는 상이하다. 슈미트의 친구·적 개념은 <전쟁으로서의 정치>라는 정치관과 결부되어 있는데, 통치성 연구에서의 푸코의 정치관에서 정치는 오히려 투쟁에 있어서의 불안정한 힘관계를 안정화시키고 지배와 질서를 이끄는 기능을 맡는다. 이것은 예를 들어, 푸코가 항상 관계의 역전 가능성을 품고 있는 ‘권력관계’를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배 상태’로 끌고 가는 기술로서, ‘통치의 테크놀로지’12)를 자리 매김하는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푸코의 권력관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투쟁>, <전투>, <끝없는 게임> 같은 측면이 자주 강조되었다. 이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며, 푸코 자신도 권력관계의 역전 가능한 게임으로서의 측면을 거듭 말했다. 그러나 푸코가 연구 속에서 했던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는, 끝없는 게임으로서 계속 변전할 터인 권력관계가 왜 현실에서는 고정된 지배상태나 질서상태를 초래하는가를 역사적으로 보여준 점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 권력관계를 지배로 끌고가는 이음매 역할을 맡는 것이 <통치의 테크놀로지>이다.

나아가 푸코는 <테크놀로지>라는 말에도 특별한 의미를 집어넣는다. 그는 『말과 사물』(1966년) 등의 저작에서 성숙한 학문체계(물리학이나 천문학)가 아니라 오히려 <미성숙한 학문>(범죄학, 정신의학, 임상의학 등)에 주목하고 있다.13) 이 점은 통치성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며, 푸코는 정치이론의 주류로서 연구되었던 사상이 아니라 정치기술 또는 정책(그의 용어로는 <통치의 테크놀로지>)과 관련된, 그런 의미에서는 이론만큼의 일반성도 보편성도 갖지 못한 실천적 앎으로서, 이른바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사상에 주목하고 있다.

이 때문에 푸코의 연구대상은 정치학사보다는 행정사·국제사(國制史)의 그것과 가깝지만, 초기 이후 일관된 <인식틀의 비판>이라는 과학인식론의 계보를 잇는 방법론을 사용하는 점에 특징이 있다. 가령 내치 행정을 분석하는 경우에도, 중농학파를 분석하는 경우에도, 항상 실천을 떠받치는 <사물의 사고방식>, <사고양식>, <인식틀>의 수준에서 분석대상을 파악한다. 정치기술을, 이것을 떠받치는 사고방법, 인식방식의 관점에서 도려내고, 이것을 통치의 다양한 <유형>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푸코가 정치적 <합리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합리성이라는 말은 인식틀의 차원에서의 <사고의 유형>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통치 합리성의 형태들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추적해가는 것이 통치성 연구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으로부터, 통치성 연구에서 정치는 경제의 영역이나 사회의 영역과 구별된 <정치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사회의 영역을 포함한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있는, 이런 의미에서 사회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정치의 문제란 사람들의 경제활동이나 사회활동 전반을 포함한 생명의 행위[시도]를 어떻게 질서의 요소로서 편입해 가는가의 문제이다. 푸코는 이런 의미의 정치적 질서 구상 속에서 형성된 질서의 유형, 사람들의 행위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정비해가는 방법·방식을 통치 합리성, 즉 <통치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푸코의 신자유주의론은 신자유주의에서의 정치의 고유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로 규정될 수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경제정책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절서 전반에 걸친 포괄적인 사회편성 원리를 지닌 구상으로 파악한다.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의 경제이론보다는 오히려 통치술(art de gouverner)로서의 자유주의”14)이다. 푸코는 복지국가 이후의 시대에 자유주의가 새롭게 힘을 얻게 이유를 그 통치능력, 그의 용어로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의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지금까지 경제이론의 범주에 들어갔던 사상 속에서 현대의 정치구상을 독해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푸코가 경제사상이나 경제학의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있는 시카고학파나 오스트리아학파가 아니라 굳이 질서자유주의 학파라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이른바 변방을 다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사회의 실현에 있어서 경제정책과 국가의 역할을 정면에서 논하고, 전후 서독의 현실 정책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정책론을 전개했던 질서자유주의파는 “통치성의 문제에서 보면 [시카고학파에 비해] 더 중요”15)한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을 토대로, 이 글에서는 푸코의 질서자유주의론을 <질서자유주의의 정치구상>을 밝혀낸 연구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 내실을 푸코의 논의에 의거하여 재구축한다.


3. 질서자유주의 개괄

질서자유주의는 <프라이부르크학파>라고도 불리며,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경제학자·법학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중심인물인 오이켄(Walter Eucken, 1891-1950)은 1927년부터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교수였는데, 32년에 사법(私法) 교수에 취임한 그로스만 데르트(Hans Grossmann-Doerth), 1933년에 중앙 카르텔국에서 온 법학자 뵘(Franz Böhm, 1895-1977)과 함께 1936~37년에 <경제의 질서Ordnung der Wirtschaft>라는 총서를 간행한다.16) 이것이 질서자유주의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들은 경제학자와 법학자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제세계에서의 권력집중이라는 공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과 나란히 중요한 것이 반-나치적 언동 때문에 나치정권 성립 후 사망한 뢰프케(Wilhelm Röpke, 1899-1966), 마찬가지로 망명자인 뤼스토우(Alexander Rüstow, 1885-1963)이다. 그 밖에도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표어를 만들었던 뮐러-아르막(Alfred Müller-Armack, 1901-1978), 서독 경제장관으로서 질서자유주의파의 정책을 실행에 옮기게 된 에어하르트(Ludwig Erhard, 1897-1977)도, 이 파의 멤버이다. 그리고 전후에는 연간지 『오르도』가 그들의 주요한 활약 무대가 된다. 또 질서자유주의파는 오스트리아학파, 특히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 1899-1992), 미제스(Ludwig von Mieses, 1881-1973)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하이에크 자신이 『오르도』에 자주 기고했으며, 1962년부터 67년까지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질서자유주의파의 사상은 일괴암적이지 않지만, 그 중심은 그들이 표방하는 경제체제로서의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표어 속에서 표현된다.17) 그것은 시장에서의 가격기구를 완전히 기능하게 만듦으로써 경제질서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전체를 구축하고자 하는 사상이며, 이런 의미에서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질서구상이다. 그러나 나중에 말하듯이, 그들은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강한 회의감을 갖고 있으며, 시장의 기능을 충분하게 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유방임(laisser-faire)이 아니라 공적 기관이나 법제도의 정비를 통해 경제에 틀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사회민주주의의 복지국가론과도 자유방임이라는 의미의 자유주의와도 상이한 그들의 입장은 사회체제의 <제3의 길>이라고도 일컬어지며, 제2차 대전 후의 서독에서 경제정책의 버팀목이 됐을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는 서독의 재건과 부흥의 이념으로서 기능했다.

이상을 염두에 두고, 이어서 질서자유주의에 관한 푸코의 논의 내용에 들어가고 싶다.18)


4. 질서자유주의파의 급진성 : 경제에 의한 국가의 정초

질서자유주의는 시장에 있어서 가격기구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틀로서의 질서(Ordo)의 구축을 목표로 한 사상체계이다. 그 때문에 질서자유주의파가 소개될 경우, 이들이 주창한 질서체계인 <사회적 시장경제>의 설명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푸코는 처음부터 이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이들의 특징을 규정한다. 질서자유주의파의 사상은 양차대전 사이의 독일에서 형성되기 시작해 제2차 대전 후의 서독 부흥에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푸코는 에어하르트가 전후 독일의 진로를 결정했다고 일컬어지는 화폐개혁을 하기 전인 1948년 4월에 했던 연설의 한 대목을 인용하고, 거기서의 경제적 자유와 국가의 정당성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19) 에어하르트는 여기서 경제의 국가강제(나치독일)와는 상이한 경제와 국가의 관계 구축이 독일 국가에 대한 정당성 부여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푸코는 이것이 질서자유주의의 통치성의 근본적 부분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전후 독일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정초짓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경제적 자유의 보장에 다름없다는 생각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선 첫째로 당시의 독일이 처해 있던 특수한 상황과 관련된다. 나치 지배와 그 붕괴를 통해, 독일의 정치적 주권은 그 정당성에 현저히 상처를 입었다. 더욱이 당시 독일은 점령군의 지배 하에 있었고, 주권국가의 자립성을 결여한 종속상태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질서자유주의파의 사상은 유럽에 자유로운 시장과 경제적 부흥을 보장하기 위한 일익을 담당한다는 형태로, 독일이 국가의 정당성을 재정초한다는 선택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나치 경험에 의해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상실하고, 점령·분할에 의해 국민적 합의를 형성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 하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보장은 독일 국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20)

나아가 푸코는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가 정치적 주권형성의 기폭제(amorce)로서 기능한다는 사태는 전후 서독 국가가 시작되는 시점뿐만 아니라 이후 30년 동안 (즉 푸코가 강의를 행했던 당시까지) 서독에서의 정치적 주권 및 정치적 합의를 계속 창출하고 있다고 논한다. “자유로운 시장은 정치적 연대를 나타내고 있다. 독일 마르크화의 안정, 만족할 수 있는 성장률·구매력, 발전, 국제수지의 균형은 … 역사에 의해 법익[法益; 법률로 보호되는 이익]을 박탈당했던 국가를 [새롭게] 창설하기 위한 합의를 표현하고 있다. 국가는 경제적 자유의 존재와 실천 속에서 법과 그 현실적 기반을 다시금 찾아낸다. 역사는 독일 국가를 부정했지만, 이제 경제가 독일 국가를 긍정한다.”21) 이런 의미에서 질서자유주의는 “근원적으로 경제적인 국가”22)라는 경제와 국가의 새로운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바로 이것에 푸코가 현대의 통치성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질서자유주의파를 다루는 최대의 이유가 있다.23)

질서자유주의파에 의한 국가의 정초 방식을 18세기의 자유주의와 비교해보면, 이것의 특징이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18세기의 자유주의는 법적 주권에 의해 정초되고 내치 행정에 의해 질서화된, 즉 새롭게 설정된 국가 속에서 어떻게 경제적 자유의 영역을 확보하는가를 최대의 관심사로 삼았다. 이에 반해, 질서자유주의파의 문제는 경제적 자유와 발전이라는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어떻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국가를 정립하는가에 있다.24)

나아가 질서자유주의파의 구상은, 나치즘의 <공포정치>에 대해 휴머니즘이나 인권보장을 축으로 전후 독일 국가를 생각하는 경우와는 단적으로 말해서 사고의 순서가 다르다. 그들은 우선 무엇보다도 경제적 자유를 축으로 하여, 그로부터 인권의 옹호나 정치적 권리의 보장을 생각한다. 그들이 보기에 경제적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혹은 그것에 관해 진지한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채로 정치적 인권이나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불가능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를 기초로 하여 국가를 존립시키는 것. 여기서 푸코는 질서자유주의파의 사회질서구상의 급진성을 독해해낸다. 그리고 이 글이 집중적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 기존의 정치적 담론과는 다른 사고틀에 입각해 질서자유주의의 정치구상의 특징이 집약적으로 표현된다.


5. 질서자유주의파의 20세기 인식 (1) : 계획화의 시대

아래의 각 절에서는 질서자유주의파의 질서구상의 구체적 내용을 푸코의 논의를 따라 고찰한다. 이때 항상 참조점이 되는 것은 질서자유주의가 어떤 특정한 유형의 경제적 자유의 실현을 중심에 둠으로써 어떻게 사회질서 전체를 구축해가는가이다. 이 절과 다음 절에서는 질서자유주의파의 동시대 인식을 다루고, 이것들과 관련지어 그들의 사상의 특징을 명확히 한다. 이 절에서는 우선 질서자유주의파의 형성 역사를 다루고, 그들이 자신들의 동시대를 <계획화의 시대>로 비판적으로 파악했음을 밝힌다.

질서자유주의는 1930년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사상이며, 나치즘의 한가운데서 형성된 학파이다. 이 때문에 나치즘을 어떤 각도에서 파악하고 그것과 어떻게 대결하는가가 질서자유주의의 기본적 입장을 형성한다. 이와 관련해 푸코는 “영원한 생시몽주의”25)라는 뢰프케의 표현을 인용한다. 이 표어는 생시몽주의의 과학만능주의·사회공학적 지향이 19세기를 통해 발전되고 20세기에 이르러 나치즘, 소련의 계획경제, 그리고 케인즈주의에 이른다고 하는 역사관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라는 구별이 그다지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계획이냐 자유냐가 근본적으로 중요한 지표로서 다뤄지며, 나치즘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국민사회주의의 특수한 체제로서가 아니라 여타 나라들에서도 동시대적으로 생기고 있는 경제의 계획화,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관리의 한 조류로 규정된다.26) 나치즘이 초래한 자유의 결여가 질서자유주의파에게는 무엇보다 우선 경제의 계획화에 의한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에 대한  비판은 계획경제가 초래하는 경제적 권력집중이 어떻게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활을 방해하는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나치즘은 경제적 자유의 결여를 축으로 비판되는 것이다.

이 비판 방식은 나치즘을 사상·언론·표현의 자유, 의회정치의 유무나 인권보장 같은 이른바 <정치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방법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질서자유주의파에도 이런 자유의 결여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4절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문제는 항상 경제질서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 그것을 축으로 비판된다. 그들에게 <자유로운 사회>의 버팀목이 되는 것은 경제체제·경제질서이며, 그 주변에 정치적·사회적인 자유가 자리매김되는 것이다.27)


6. 질서자유주의파의 20세기 인식(2) : 독점과 대중화

질서자유주의파는 반계획·반중앙관리를 표방할 뿐 아니라 자유방임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이 입장도 그들의 20세기 인식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질서자유주의파의 시대진단은 자유방임에 의한 경제의 자연적인 조화를 신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계획화의 진전과 나란히 그들이 동시대의 경제에서 간파했던 것은 독점의 경향이다. 물론 카르텔·트러스트 등의 형성에 의한 대자본의 독점자본주의가 국가관리에 의한 경제의 계획화로 손쉽게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양자는 밀접하게 결부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획화에 관한 인식이 계획경제 비판으로 이어진 반면, 독점 비판은 자유방임의 경제정책 비판으로 이어진다. 푸코는 독점론에 관해서는 더 파고들어 분석하고 있지는 않지만, 질서자유주의파를 고전적 자유주의와 나누는 중요한 점이기에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28)

우선 오이켄의 『경제정책원리』에 나타난 시대인식을 살펴보자. “우리는 19세기 초반 및 중엽에 생활한 사람들과는 완전히 상이한 정황 아래에 있다. 세기 중반의 자유주의자나 시스몽디, 생시몽주의자, 맑스, 푸르동 등 … 은 우리와는 다른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세계 속에서 거주했다. … 사람은 전(前)공업시대의 경제와 거대한 변혁의 시작 말고는 알지 못했다. 콘체른, 카르텔, 신용은행, 노동조합 등은 당시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막 발전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29) 그리고 현대의 커다란 문제가 되는 독점·과점에 의한 시장 지배라는 사태가 이런 <전공업시대>에 형성되었던 자유방임 정책에 의해 결과적으로 용인되고 조장되었다는 것이 문제로 간주된다.

오이켄에 의하면, 시장에는 항상 “독점의 형성으로 향하는 경향”30)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유방임 정책에서는 이에 대해 사전 예방조치를 취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자유방임 정책에서 한 가지 중심축이 되는 <영업의 자유> 원칙은 독점형성의 자유도 정당화한다. <계약자유>의 원칙은 카르텔을 결성하는 계약도 유효한 것으로 하며, 수요독점시장에서의 부당한 노동계약도 정당한 계약으로서 용인해버린다.31)

이런 자유방임의 결함을 극복하고 시장에 불가피하게 내포된 독점 경향에 제동을 걸기 위해 질서자유주의파는 국가의 적극적인 경제정책을 요구한다. 그들은 “시장경제와 자유방임 정책의 분리”32)를 행하는 것과 더불어, 경제정책의 방침을 생각하는 가운데 “어떻게 정치권력의 포괄적 행사를 시장원리와 서로 맞물리게 할 것인가”33)라는 물음을 설정한다.

이런 물음에 대답인 질서자유주의파의 질서정책을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보겠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이들의 시대인식에 관해 경제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좀 더 넓은 범위에서 검토하자. 푸코는 이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논하지 않지만, 질서자유주의파에게 경제정역과 사회·정치영역 사이의 관계, 또 그것들 전체를 포함한 사회질서에 관한 견해가 단적으로 표명되는 부분이 있다.

뢰프케에 의하면, 이 시대의 사회전체를 특징짓는 것은 ‘대중화(Vermassung)’와 ‘프롤레타리아화’이다.34) 또한 오이켄은 르 봉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특징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중’은 경제, 사회 및 국가의 전통적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합리적인, 만족한, 인간에게 걸맞는 질서의 건설을 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35) 그러나 이런 대중은 그저 단순하게 파편화되어 부유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도자 계층에 의해 인도된다. 그리고 하나의 대중 속에 몇 가지 정치집단이나 경제집단을 형성하고, 그것들의 집단이 서로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여나간다.

오이켄이 보기에, 이익단체나 압력집단을 의회정치의 내부로 도입하는 일종의 다원주의 정치, 그리고 직능단체의 편성에 입각한 조직단위의 경제는 대중화 시대의 산물이며, 이 경향이 점점 더 진행되고 있다. 권력집단의 형성과 그것들 상호 대립은 “집단 아나키”36)의 상태를 산출하며, 전체의 질서는 형성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대중화와 정치적·경제적인 집단형성이 결부되고, 그 양쪽을 없애가는 사회질서의 구상이 요구된다. 여기서는 정치영역에서의 의회정치의 변질과 경제영역에서의 조직화의 움직임이 단체주의나 권력의 집중·편재의 문제로서 동렬로 취급된다.37)

더 나아가 오이켄은 대중과 사회질서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분업이 고도로 발달한 산업혁명 이후의 사회 속에 매몰되어 있는 대중은 “복잡해진 질서의 틀 속에서만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38) 대중은 질서를 파괴하는 경향을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 충분하게 제어된 질서 없이는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여기서 질서는 경제질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사회를 형성하는 모든 질서를 포함한다. 그 때문에 “경제적 상호의존만이 아니라, 경제질서와 그 밖의 일체의 생활질서 사이의 상호의존관계가 존재한다.”39) 이런 전체 질서 속에서 파악된 경우에만 현대의 대중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질서 전체를 형성해 나감으로써만 대중화가 초래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의 질서의 창조가 질서자유주의파에게는 첫 번째 과제가 된다. 질서자유주의파의 분석은 나치 정권 하에서의 경제적 자유의 문제에서 출발해 대중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삶의 영위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의 사회질서의 전체적 구상,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구상에 다다르게 된다.

自余


7. 질서자유주의파의 질서정책 (3) : 경제정책

이 절부터 9절까지는 질서자유주의파의 경제·사회정책과 법치국가론을 검토한다. 앞 절에서 논했듯이, 그들은 반계획, 반자유방임의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축으로 각각의 내용을 정리한다. 이 절에서는 우선 그들의 경제정책을 검토한다.

맨 처음으로 푸코에 의거하면서, 질서자유주의파와 고전적 자유주의 사이의 시장원리의 파악 방식의 같고 다름을 보여주고,40) 이들의 반(反)자유방임의 측면을 분명히 한다. 푸코에 의하면,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시장원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교환이다. 그 때문에 국가에 가장 처음으로 요구되는 것은 교환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소유권 보장이다. 이것을 넘어서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유해할 뿐만 아니라 시장의 운행에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에 반해 질서자유주의파에게 중요한 것은 교환과 소유권이 아니라 경쟁이다. 오이켄은 “사회적, 경제정책적 문제의 해결을 소유권의 질서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19세기 및 20세기 초반의 경제정책논의 및 경제정책의 근본적 오류였다”41)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교환과 소유권을 중심에 두고서는 파악할 수 없는 <독점>이라는 문제를 그들은 시장질서를 파괴하는 경향이라 여기고 중시한다. 따라서 질서자유주의파에게는 독점을 배제하고 완전경쟁을 실현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중심이 된다. 여기서 완전경쟁이란 가격 카르텔 등을 포함하지 않고, 시장참가자에게 가격이 어떤 특정한 참가자에 의해 좌우될 수 없는 여건으로서 기능하는 상태에서의 경쟁, 또한 업적·실적에만 기초한 경쟁을 의미한다.42)

이런 완전경쟁은 소유권의 보장에 머물지 않는 국가의 적극적 활동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질서자유주의파에게 “경쟁은 [고전적 자유주의자가 생각했던] 자연적인 여건이 아니라 … 만들어진 특권[적 상태]”인 것이다.43) 시장과 국가의 관계는 자유방임에서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며, 경쟁 경제는 국가권력이 들어갈 수 없는 영역, 일종의 경제적 성역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통치의 관점에서 질서자유주의파와 고전적 자유주의를 나누는, “시장 메커니즘과 통치정책(politique gouvernemental) 사이의 포괄적인 결합”44)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서자유주의파가 목표로 한 질서, 오이켄의 용어로 이른바 <경쟁질서>란 어떤 것이며 어떤 정책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가. 푸코 자신은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는 정책내용을 검토함으로써 반계획의 측면을 포함한 그 정책의 실상을 보고 싶다.

우선 <경쟁질서>란, 그 가운데서 “개별 기업이나 가계가 자유롭게 계획하면서 행동하는”, “그들 자신의 노동력이나 생활수단이나 화폐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용도를 자신이 찾는”45) 질서형태이다. 다만 “게임의 규칙이나, 경제과정이 그 아래에서 전개되는 형태나, 혹은 시장형태나 화폐체계를 원하는 대로 만들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46) 시장참가자에게는 독점시장을 형성할 자유나, 시장 속에서 가격 메커니즘이 지닌 강제력 이외의 권력을 도입할 자격이 없다. 즉, 시장의 형태나 화폐체계 등의 틀은 질서정책에 의해 주어지며, 그 속에서 개별 시장참가자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체제이다. 거기서는 일상의 경제생활이 영위되는 전제가 되는 질서형태는 적극적으로 정립되지만, 일상의 경제 과정 자체에 대한 개입은 이뤄지지 않는다.

따라서 질서자유주의파의 질서정책에서 근본원칙이 되는 것은 경쟁질서가 유효하게 작동하기 위한, 완전경쟁 하에서의 기능적인 가격체계의 확립이다. 그를 위해 가장 중시되는 것이 통화정책이다. 통화정책은 화폐가치의 안정, 인플레이션/디플레이션의 회피에 의해 개별 경제주체가 올바르게 경제계산을 행하기 위한 전제를 만들어낸다. 구체적으로는 “할인정책, 공개시장정책, 유동성 준비율의 결정, 국가의 재정정책 및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투자”47)가 행해진다.

다만 질서자유주의파는 본래 완전고용정책, 국가투자에 의한 유효수요 창출 정책, 즉 케인즈형 정책에는 극히 비판적이다. 이런 정책은 필요 최소한으로 머물러야 한다고 간주되며, 더욱이 그 효과에 그다지 기대를 걸지 않는다.48) 이런 점에서 질서자유주의파의 경제질서 구상은 적극적인 국가의 역할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케인즈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완전고용 자체가 경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실현을 위해 화폐가치의 안정과 가격 메커니즘의 기능이 희생된다는 것이 비판된다. 전자가 후자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가 결과적으로 전자를 실현하는 그런 질서가 요구되는 것이다. “경쟁은 사회계층의 온존을 허용하지 않는다. 경쟁은 진정한 업적에 기초한 사회적 상승과 하강의 질서이다. 경쟁에 의해 경제의 소모나 장기적인 노동하지 않음 없이, 최고의 임금수준의 상태가 실현될 수 있다.”49) 『오르도』 창간호 서문의 이 구절에는, 우선 질서와 발전의 원천으로서의 경제적 경쟁이 있고, 그 결과로서 고용·임금의 안정이 생긴다는 생각이 표명되어 있다.

나아가 경쟁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독점금지정책, 경쟁에 합치하는 형태에서의 사유재산 및 계약의 자유의 보장, 그리고 기업이나 가계에 있어서의 책임원칙의 확립을 위한 정책이 취해진다.

이 밖에도 경쟁질서가 실현했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지닌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도 필요하다. 이것은 뢰프케의 용어로는 <구조정책Strukturpolitik>이라고 불리며, “소득 및 재산의 분배, 경영의 크기, 또는 도시와 농촌, 공업과 농업, 혹은 개개의 계급계층에 대한 인구의 분포 등이라는 시장경제의 사회적 전제조건을 더 이상 주어진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특정한 의도를 따라 바꿔나가고자 하는”50) 정책이다. 여기서는 경쟁질서 아래서도 나타날 수밖에 없는 특수한 독점의 감독, 누진과세 등의 조세정책, 환경이나 자원의 유한성이 초래하는 문제에 대한 대응 등이 포함된다.


8. 질서자유주의파의 질서정책 (2) : 사회정책

지금까지 봤던 경쟁질서의 창조·유지를 위한 정책 말고도 질서자유주의파에는 사회정책에 관한 독자적인 비전이 있다. 이것에 관해서도 반계획, 반자유방임이라는 두 측면에서 지적하고 싶다. 

푸코는 질서자유주의파의 사회정책론의 특징을 복지국가형의 사회정책론과 대비시켜 지적한다. 복지국가의 사회정책은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야만성>을 포함한 경제과정의 효과를 억제하기 위해, 그것에 대항하는 조치로서 내세워진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소비의 사회화·집단화라는 수단이 취해진다. 개인의 수입을 세금이나 보험료로서 징수하고, 이것들을 일단 집합화[집계]한 다음에 무료 서비스·보조·수당 등의 형태로 소비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과정이 활용된다.

질서자유주의파에게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정책 프로그램이 구축된다. 거기서는 “사회정책은 경제정책에 통합된다.”51) 푸코는 질서자유주의파의 사회정책을 복지국가 모델의 그것과 대비했을 때 그 최대 특징이란 사회정책의 목표로 간주되는 것이 사회화·집단화가 아니라 개인화의 완성이라는 점을 거론한다. 이것을 뮐러 아르막의 표현을 빌려 “사회화된 사회정책과는 대조적인, 개인화하는 사회정책”52)이라고 새롭게 표현한다. 사회정책은 리스크의 사회화가 아니라 개개인이 각각의 리스크에 직면하기 위한 힘을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경제정책을 보완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53) 질서자유주의파에게 이것은 사회정책이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 속에서 살기에 적합한 인간을 육성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국가나 단체 등의 대규모 집단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경제적으로 자립·자기결정하고 자기 책임을 갖기 위한 기초체력을 부여하는 것이 사회정책의 책무로 간주되는 것이다.

질서자유주의파의 사회정책에 관해 푸코는 이처럼 신자유주의 전체에서 볼 수 있는 반계획·반중앙지도의 지향을 보여주는 데 머문다. 거기서의 원칙은 시장의 경제 게임에 참가할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부조는 하지만, 사회 전체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소득의 재분배, 평준화의 정책에는 비판적이고, 개인이 리스크를 떠맡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만 사회정책을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것을 당시의 지스카르 데스탱의 사회정책 구상과 결부시키고 프랑스에서 앞 세기부터의 전통을 지닌 <국민적 연대> 모델과의 괴리를 강조하고 있다.54)

하지만 질서자유주의파의 사회정책은 반계획과 나란히 자유방임의 비판으로 이어지는 반독점이라는 또 하나의 입장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질서자유주의파의 사회정책 플랜을 구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이를 확인하고 싶다.

이들의 사회정책이 신자유주의 일반에 공통되는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이들의 주택정책이다. 이들은 소비의 사회화로 이어지는 강제적인 사회보험·사회보장에는 비판적이지만, 주택제공에 관해서는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정부의 대규모 투자를 용인한다. 그 배경에는 우선 첫째로 경제권력의 분산을 위해서는 개인의 주택소유를 촉진하고 개인 간 자산격차를 없애는 방책이 극히 유효하다는 인식이 있다. 또 둘째로, 주거를 자기 재산으로서 갖고 자립과 자기책임을 익힘으로써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에 참가할 수 있는 개인을 육성하고자 한다는 배려가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소유의 사회화에 의한 집단화와 독점에 의한 자산의 편재화를 둘 다 방지하기 위해, 소유의 분산과 개인화를 향한 정책으로서 주택정책이 중시된다.55) 개인 재산은 독점과 집산화에 대한 방파제로서 국가의 비호 하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질서자유주의파에게는 사회정책의 소극적 역할만이 용인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정책은 경제정책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시장질서 형성을 촉진하는 적극적 방책으로 이해된다. 사회적 시장이 정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 한, 그것은 시장의 무규제적인 발전이 초래하는 결함을 사회정책에 의해 시정하고자 하는 입장으로 이어진다. 경제정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정책에 있어서도 반계획·반중앙관리(소비의 사회화의 부인)와 반독점(자유방임이 초래하는 자산·재산의 집중과 편재의 부인)이라는 두 개의 기둥에 따른 정책 프로그램이 구상되는 것이다.


9. 질서자유주의파의 법치국가론

앞 절까지 봤던 구체적인 정책론을 토대로 이 절에서는 질서자유주의파의 법치국가론, 법과 경제의 관계맺음 방식을 살펴보고 싶다.

질서자유주의는 자신의 사상을 법치국가론이라는 독일 자유주의 사상사의 전통적인 논의와 관련짓는다. 법사상, 정치사상 영역에서 18세기 이래 계속 문제가 되었던 법치국가(Rechtsstaat) 개념을 자신들의 체계 속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들이 이 개념을 어떻게 취급하고 법과 경제사회와의 관계를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질서자유주의파에 있어서 정치와 경제·사회의 관계맺음 방식이 분명해진다. 여기서도 반자유방임과 반계획의 두 측면에서 정리한다.

우선, 법치국가론의 반자유방임이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푸코는 고전파 경제학에서의 <자연질서>와 질서자유주의파에서의 경제질서를 대비하고, 후자를 <법적 질서>라고 말한다. 그들이 경제생활을 가능케 하는 법 틀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들의 이론 체계의 중심에 법이론을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푸코는 질서자유주의파에서의 법과 경제사회 사이의 관계맺음을 두 가지 특징에서 정리한다. 첫 번째 특징은, 질서자유주의파에게 “법질서는 상부구조의 질서가 아니다”56)라는 점이다. 이것은 하부구조로서의 경제에 의해 결정된 사회구조 위에 법·정치가 상부구조로서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 영역 자체가 “다른 것으로부터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관습적 혹은 법적인] 규칙의 활동의 총체로서 이해된다”57)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경제사회를 “경제적이고 법적인(économico-juridique)” 시스템으로, 즉 역사적·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제도적 틀이나 실정적 규칙이 그 가능성의 조건을 부여하는 한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58)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발상에 의해 초래되는 “법적 개입주의”59)이다. 경제 영역과 법·정치 영역 사이의 상호관계, 상호침투의 중시는 법적·제도적으로 적절한 틀을 부여함으로써 보다 좋은 경제사회를 만들어내며, 또 그것을 더욱 새롭게 만들어내려고 하는 지향으로 이어진다. 법에 의한 개입은 바람직한 경제사회의 창설과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된다.60)

이어서 법치국가론의 반계획이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푸코는 국가개입의 형식성이라는 점에서 질서자유주의파가 옹호하는 법에 의한 개입과 계획경제 사이의 차이점을 집약시켜서 살펴본다.

푸코의 정리에 의하면 질서자유주의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계획경제에 있어서 개입은 명확하고 특정한 경제적 목적을 지니며, 개입의 결과 서서히 그 후의 조치가 수시로 변경된다. 이에 반해, 법치국가에서는 개입을 할 때 특정한 목적은 설정되지 않으며, 일반적·형식적인 개입 조치 말고는 이뤄지지 않는다. 결과에 따라 법이 수시로 변경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경제적 행위자가 자유롭게 결정을 행하기 위한 틀만 설정된다. 여기서 법은 어디까지나 행위자 간의 경제 게임에서 새롭게 정해진 규칙의 창설 말고는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질서자유주의파의 법적 개입주의는 계획경제에서의 개입과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61)

이것은 질서자유주의파의 법치국가론 중에서 법에 의한 틀의 설정이 자유로운 경제사회를 가능케 한다는 부분이다. 푸코는 이 부분만을 다루고 있지만, 질서자유주의파에게는 어떤 특정한 경제질서만이 법치국가를 가능케 한다는, 경제질서로부터의 법치국가의 정초라는 방향에서의 논의도 존재한다. “법치국가는 그 법률적·국가적 질서와 동시에 ‘적합한’ 경제질서가 실현되는 경우에만, 완전히 관철될 수 있다”62)는 것이다.

질서자유주의파에 의하면, 자유방임의 경제정책은 불가피하게 독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독점체는 <계약 자유의 원칙>에 입각해 사적인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또 “산업 혹은 노동자의 사적 권력단체”63)는 <단결의 자유>의 원칙에 입각해 단결을 강제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위험성이 있다. 거꾸로, 계획경제에서는 거대한 권력을 지닌 국가에 의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법치국가는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경쟁질서> 형태 아래서만 법치국가가 존속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질서자유주의파에게는 법치국가가 <경쟁질서>를 만들어내고 <경쟁질서>가 법치국가를 가능케 한다. 즉,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법치국가를 설립하기 위해 경제질서와의 관련이 일차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의미에서, 고전적 법철학이나 정치이론에서의 법의 정당성론과는 이질적인 법치국가론이 됐다. 나아가 질서자유주의파에게 법은 경제게임의 일반적 규칙으로 파악된다. 물론 여기서도 국가나 사적 단체, 그 밖의 개인에 의한 권리나 자유의 침해로부터 개인을 지킨다는 법의 역할은 불변의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침해의 내용이나 영역을 생각할 때, 거기서 상정되는 개인이란 항상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개인이며, 법은 항상 경제질서의 구축과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질서자유주의파에게 법칙국가란 최선의 경제질서를 보장하는 국가이며, 법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권리와 자유의 수호자인 것이다. 이런 법치국가 개념을 재편한 후에 경제영역에서의 정책을 중심으로 사회질서를 구상하는 질서자유주의파의 체계 속에서 법과 국가의 역할·기능이 어떻게 재규정되는가가 드러난다.


10. 질서자유주의에서의 정치

이상으로 질서자유주의에 대한 푸코의 논의 내용에 관한 검토를 마치는데, 지금까지의 논의를 어떤 의미에서 앞의 2절에서 말했던 정치에 관한 새로운 언어를 탐구하는 시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에 관해 아래에서 약간의 고찰을 보태둔다.

푸코는 질서자유주의파의 질서구상의 중심에 항상 경제문제가 위치하며, 경제를 중심으로 사회질서 전체가 구상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질서자유주의파에게 모든 사태가 경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통치의 관점에서 질서자유주의파를 다룬다는 것은 거기서 경제의 정치화, 이것 이전에는 정치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영역이 정치화되어가는 과정을 독해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푸코는, 거기서 경제사회가 어떻게 정치의 대상이 되어가는가, 그 방법을 <신자유주의의 통치의 테크놀로지>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17세기 이래의 서양근대를, 경제활동을 포함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세부가 정치의 대상이 되어가는 시대라고 파악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자유>를 축으로 경제·사회·법질서의 전체상을 모색하는 질서자유주의파의 사상은 근대의 통치 테크놀로지의 한 가지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질서자유주의를 이런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인 개개인, 바꿔 말하면 대중의 생활과 삶의 모든 행위가 정치의 대상이 되고 정치적으로 구성되며 질서 부여되는 시대에서 새롭게 정치의 언어를 말하는 시도로 질서자유주의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푸코가 근대의 정치적 합리성에 관해 사고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통치>라는 개념 틀을 사용해 질서자유주의를 읽어냄으로써, 질서자유주의를 정치에 관한 새로운 언어를 정식화한 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질서자유주의파가 대중화의 시대에서 조직과 질서의 문제를 다루고(6절), 더욱이 그 해결을 위해 경제질서를 사회와 국가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했던(4절) 것은 근·현대에 있어서의 정치에 관한 사고방식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질서자유주의파의 법치국가론은 법-권리의 전문용어를 사용해 논의되었던 법과 국가의 문제를, 경제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틀로서 법이나 정책(정치)을 파악함으로써 재규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상생활과 관련된 정치의 관점에서 법치국가 자체에 새로운 내실을 부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9절). 질서자유주의파의 <자유로운 사회>는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4~9절).

이처럼 <통치>라는 시각에서 파악함으로써, 질서자유주의를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정치적 개입 대상이 되며, 그것을 어떻게 편성하고 질서를 부여하는가가 전체 질서에 있어서 일차적인 과제가 된 시대에, 경제적 자유를 축으로 사회 전체의 질서의 포괄적인 구상을 산출했던 사상,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정치의 언어를 수립했던 사상적 노력으로 위치지어질 수 있다.


마치며 

마지막으로, 푸코가 질서자유주의파의 사상에 대해 어떤 점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고 그런 비판이 푸코의 <자기통치>론과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관해 말하고 싶다.

본문에서 논했던 대로, 질서자유주의파에게 이상적 질서, <자유를 위한 질서>인 오르도(Ordo)는 질서를 위해 자유를 활용하고 또 그 자유를 질서의 요소가 되는 식으로 정치적으로 만들어가는 통치 테크놀로지의 구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질서자유주의파에 대한 푸코의 비판의 중심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나 복지국가를 전체의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라고 비판하고, 스스로를 자유의 옹호자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새롭게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자유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치의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는 전체의 질서나 번영과 양립할 수 있는 특정한 유형의 자유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스스로 받아들여 게임에 참가하는 개인을 만들어낸다. 확실히 그들은 직접적·강제적인 수단에 호소해 개개인을 관리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특정한 생활이나 행위의 양식을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인도하는 틀을 만들어내는 것도 다른 유형의 통치 테크놀로지이며, 다른 길을 통한 자유를 질서에 편입해가는 방법에 다름없다. 달리 말하면, 신자유주의란 일상생활에 개입하여 어떤 특정한 유형의 삶을 적극적으로 산출하고 만들어가는 <생명권력>의 한 유형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자유주의가 “자유를 생산하고, 조직화하는” 것과 더불어 자유 없이는 기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유의 소비자”라고 한다.64) 더욱이 거기서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전체 질서가 구축된다고 하는 구성이 취해지기 때문에, 질서 형성에 강제나 억압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비판적으로 재파악하기 위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에 의해 어떤 삶의 내실을 산출하는가를 고찰했던 것이 통치성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푸코의 <자기통치gouvernement de soi>라는 아이디어는 이런 자유를 산출하고 활용하는 통치에 대항하기 위한 구상으로서 이해 가능하다. 그는 자신이 그려냈던 신자유주의의 통치의 테크놀로지에 대해, 그것에 저항하고 그 외부로 탈출할 수 있는 방책을 직접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80년 이후의 강의에서 주제로 다뤄지고, 가장 만년의 『쾌락의 활용』, 『자기에의 배려』(1984년)로 결실을 맺는 자기통치라는 사고방식을 통치의 문제에 비춰본다면, 통치 테크놀로지에 대항하는 요소에 관해 생각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자기통치란 자기와 타자의 관계와는 구별된 자기와 자기의 관계, 자기가 자기에 대해 작용하고, 자기의 사고나 행위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79년까지의 통치성 연구에서 고찰되었던 타자의 행위에 대한 작용 가하기로서의 통치와 대칭을 이룬다. 푸코는 근대에서 국가 규모로 만들어졌던, 타자의 행위를 제어하는 통치의 테크놀로지에 대해, 이 자기 통치를 대치하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점점 더 교묘하고 비가시적이 되는 국가·사회의 권력작용에 대해, 그로부터의 탈주나 그 외부에 있을 수 있는 실존을 추구하는 방향성과는 다르다.

푸코가 자기통치에 관한 착상을 강의에서 처음 말했던 것은, 1978년 3월 1일의 강의에서 중세 그리스도교의 사목권력에 관해 논할 때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그는 사목권력에서 사용된 통치 테크놀로지를, 이것에 반항하고 저항하는 쪽이 자기 통치의 테크놀로지로서 이용했다고 지적한다. 이때 이미 자기 통치는 타자의 통치와의 대항관계 속에서, 통치가 타자의 지배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를 스스로를 위해 이용함으로써 통치에 대항하는, 자기와 자기의 관계성의 차원에서 파악했다.

자기통치와 신자유주의의 통치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구도로 생각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통치 테크놀로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 교묘함을 폭로하거나 교묘함을 그려냄으로써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통치에 의해 강제된 특정한 생활형태, 타자와의 관계방식을 변용시키는 것은 거기서 사용되는 통치 테크놀로지를 자기 통치로 전형(轉形)시켜 나감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위를 통제하고 다른 개인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를 편성해가는 통치 테크놀로지에 대항하는 것은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스스로 만들어감으로써 타자관계도 변용시켜가는, 이런 의미에서 자기의 삶에 유형을 부여해가는 자기통치의 행위인 것이다.






1) 佐々木毅, 「21世紀型体制についての一試論」, 『思想』 856호, 1995 참조.


2) M.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aris: Gallimard, 1975, p.35.


3) M. Foucault, «La phobie d’État», in Libération 967, 1984[1979년 발표].


4) 푸코는 신자유주의에 관해 1979년 강의와 강의 요약(M. Foucault, Résumé des cours 1970-1982, Paris: Julliard, 1989, pp.102-120.) 이외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필자가 파리의 푸코센터에서 청취한, 미간행 강의 테이프를 중심으로 강의의 내용을 재구성한다. 강의 날짜는 그 때마다 본문 속에 (1979년 1월 17일) 같은 모습으로 명시한다. 또한 이런 성립의 사정에서 푸코의 신자유주의론 자체가 미완성이기 때문에, 필자 자신의 분석에 의해 보충하며 전체상을 구성했다.

   이하에서는 신자유주의에 관해 논한 7회분의 강의의 개요를 제시한다.

   1979년 1월 31일 : 질서자유주의파에 관해서 / 역사적 배경으로서의 전후 독일 국가의 정초

          2월  7일 : 질서자유주의파에 의한 자유주의의 중심 이동déplacement : 교환에서 경쟁으로

          2월 14일 : 질서자유주의파의 사회정책 원리 / 사회의 모델로서의 기업

          2월 21일 : 질서자유주의파에게서의 법과 시장 : 법치국가의 경제운영

          3월  7일 : 질서자유주의의 프랑스로의 도입 / 오르도형 자유주의의 사회정책 플랜

          3월 14일 : 미국 신자유주의에 관해서 : 역사적 배경 / 인적 자본의 개념

          3월 21일 : 미국 신자유주의에 의한 다양한 사회현상에의 시장원리의 적용


5) 이상에 관해서는 米谷園江, 「ミシェル・フーコーの統治性硏究」, 『思想』 1996년 12월호[오모다 소노에, 「미셸 푸코의 통치성 연구」, 『푸코 이후』, 난장출판사, 2015년]를 참조.


6) 1979년 1월 31일.


7) 米谷園江, 「近代権力の複層性」, 『相関社会科学』 5호, 1996년을 참조. 


8) M. Foucault, “The Political Technology of Individuals,” in Technologies of the Self, Massachusetts: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88, p.161.


9) M. Foucault, “The Political Technology of Individuals,” in Technologies of the Self, Massachusetts: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88, p.161.


10) 다만, 아렌트와 푸코는 근대를 그 출발점 이후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화의 시대라고 보지만, 슈미트에게서는 17세기 이래의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시대”(Carl Schmitt, “Das Zeitalter der Neutralisierungen und Entpolitisierungen,”[1929년] in Der Begriff des Politischen, München: Duncker & Humblot, 1932) 뒤에 오는 20세기의 전체주의 국가야말로 정치화의 시대를 체현하고 있다.


11) Carl Schmitt, Der Begriff des Politischen, München: Duncker & Humblot, 1932를 참조.


12) M. Foucault, «L’étique du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1984년], in Dits et écrits, 4, Paris: Gallimard, 1994, p.728.


13) Ian Hacking, “Michel Foucault’s Immature Science,” in Nous 13, 1979 참조.


14) 1979년 2월 7일.


15) 1979년 1월 31일.


16) 푸코는 이 총서를 기관지 『오르도』와 동일시하는 듯하지만(1979년 2월 7일), 후자는 1948년 5월에 오이켄과 뵘에 의해 (그로스만 데르트는 전쟁 중에 사망했다) 창간된 기관지이며, 1930년대의 총서와는 다른 것이다. 질서자유주의파의 형성사와 기관지 『오르도』에 관해서는 Anthony J. Nicolls, Freedom with Responsibility, Oxford & New York & Toronto: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 Keith Tribe, Strategies of Economic Order, Cambridge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 大庭治夫, 「ドイツ新自由主義 : 「オルドー学派」」, 『経済論壇』 17권 1·2·5호, 1971을 참조.


17) 이 말에 관해서는 Andreas Müller-Armack, “Das Konzept de Sozialen Marktwirtschaft-Gruadlagen, Entwicklung, Aktualität,” in Soziale Marktwirtschaft, Stuttgart: Kohlhammer, 1988을 참조.


18) 여기서 일본에서의 질서자유주의파 연구를 개괄한다. 일본에서는 질서자유주의라는 말 자체가 현대자유주의 경제사상 연구자들 외에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질서자유주의파의 사상을 <정치구상>으로서 독해하는 시도는 어쩌면 무리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동향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① 하이에크나 시카고학파의 연구자에 의한 것으로, 『경제논단』 등에서의 소개. ② <종교> <문화> <에토스> 같은 경제윤리의 측면을 사정거리에 둔 연구(鉢野正樹, 『現代ドイツ経済思想の源流』, 文眞堂, 1989 ; 山脇直司, 「倫理的経済学」, 加藤寛孝 編, 『自由経済と倫理』, 成文堂, 1995 등). ③ 노지리 다케토시(野尻武敏) 씨를 중심으로 한 비교경제체제론의 입장에서의 연구. 여기서는 질서자유주의파의 경제체제 사상으로서의 측면에 중시되며, 서독의 경제정책과의 관계도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있으며, <정책>의 측면을 강조하는 이 글의 독해와 통한다(野尻武敏, 「新自由主義の経済体制思想」, 『現代の経済体制思想』, 1976). ④ 전후 독일 경제사 연구 속에서의 소개(가령 出水宏一, 『戦後ドイツ経済史』, 東洋経済新報社, 1978).


19) 1979년 1월 31일


20) 미영불 점령지역에서 자유시장경제의 안정적 성장에 의한 국가의 정당성의 정초를 선택했던 것을 보여주는 통화개혁이 48년 6월 21일에 실시된 직후, 소련은 6월 24일의 서베를린 완전 봉쇄를 통해 이것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독자적인 통화, 이른바 <동독 마르크>를 발행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독일국가>에는 49년에 성립한 독일연방공화국(구 서독)만이 포함된다.


21) 1979년 1월 31일.


22) 1979년 1월 31일.


23) 푸코는 이 강의의 연장선상에서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 요강으로 결실을 맺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의 노선변경을 자리매김한다. 이 노선변경은 “새로운 독일의 정치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1979년 1월 31일) SPD가 취했던 전략으로 파악된다. 또한 SPD의 구상의 기초가 되고 전후 서독에서 <신자유주의>와 대비되었던 <신사회주의>에 관해서는 足立正樹, 「新社會主義の経済体制思想」, 野尻武敏 編著, 『現代の経済体制思想』, 新評論, 1976을 참조.


24) 1979년 1월 31일.


25) Wilhelm Röpke, Civitas Humana, Erlenbach-Zürich: Eugen Rentsch Verlag, 1944.


26) 1979년 2월 7일. 케인즈 정책, 소련, 나치즘을 계획화라는 공통항으로 묶는 것은 질서자유주의파의 강점이자 약점이기도 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케인즈 유형과는 다른 사회구상을 제2차 대전 후에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케인즈-복지국가 모델이 소련이나 나치 독일과 같은 <일당독재> 국가와는 이질적이라는 것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특히 신사회주의자에 의해 일찍부터 비판되었다. 또한 질서자유주의파의 근간에 있는 자유시장/통제경제의 이분법은 70년대 불황을 통해 공급중시의 국가간섭이 경제성장의 전략으로 중시되기 시작하자 다른 관점에서 비판받게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佐藤誠, 「社会的市場経済の行方」, 『経済評論』 1983년 3월호를 참조. 


27) 최근의 독일에서는 전후 서독 경제에 관해 전전·전중 사이의 연속면을 강조하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경제구조나 사회자본축적 등의 실증면을 중심으로 이 방향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일정한 성과를 낳고 있다고 생각된다(이에 관해서는 Michael Prinz, 山田武司訳, 「歷史家論爭から歷史(化)へ」, 『現代思想』 23권 7호, 1995; 永岑三千輝, 「ヨーロッパの戦後改革(ドイツ)」, 社会経済史学会 編, 『社会経済史の課題と展望』, 有斐閣, 1992를 참조). 최근에는 이 연장선상에서 질서자유주의파에 관해 그 나치시기의 활동이 새롭게 검토되고 있다. 가령 아벨스하우저는 질서자유주의파가 제3제국의 사상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시체제를 편드는 입장을 취했다고 지적한다(Werner Abelshausser, “Wartime Mobilization and Structural Transformations in Germany,” 東京外国語大学 『日本─ドイツ硏究集会』, 1995년 7월 18일자). 이 글은 질서자유주의파를 나치즘에 대립하는 사상으로 파악하는 지금까지의 통설을 따르지만, 나치 시기의 활동 실태를 포함한 상세한 고찰에는 들어갈 수 없다(질서자유주의파의 전중과 전후에 관해 실마리를 주는 연구로는 永岑三千輝, 「ナチ体制下の戦後構想とドイツ資本主義の組織化」, 権上康男 編,『20世紀資本主義の生成』, 東京大学出版会, 1996 ; 手塚真, 「ミュラー=アルマックと『社会的市場経済』」, 『帝京国際文化』 8호, 1995가 있다). 이 글에서는 질서자유주의가 경제질서의 실현을 위해 <강한 국가>를 요구하더라도, 그것은 경제의 계획화와 대규모의 고용창출 정책을 추진하는 나치의 강한 국가와는 동일시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친다.


28) 질서자유주의파 내에서는 특히 뵘이 독점이론을 집중 연구했으며, 오이켄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뵘의 독점이론에 관해서는 Franz Böhm, Wettbewerb und Monopolkampf, Berlin, 1933 ; Franz Böhm, Die Ordung der Wirtschaft als geschichtliche Aufgabe und rechtsschöpferische Leistung, Stuttgart: W.Kohlhammer Verlag, 1937 ; 鉢野正樹, 『現代ドイツ経済思想の展開』, 文眞堂, 1993, 69-78쪽을 참조).


29) Walter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Bern: A. Francke A.G. Verlag, Tübingen: J.C.B. Mohr, 1952, S.14f.


30)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31.


31) <영업의 자유>가 품고 있는 문제성에 관해서는 岡田与好, 『経済的自由主義』, 東京大学出版会, 1987을 참조. 또한 <계약자유>의 원칙이 형식적 평등의 배후에 실질적 불평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관해서는 맑스의 지적이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해 오이켄은 맑스가 독점(권력집중)의 문제를 생산수단의 소유형태의 문제로 살짝 바꿔치기 했기 때문에 문제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었다고 비판한다(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45).


32) 1979년 2월 14일.


33) 1979년 2월 14일.


34) Wilhelm Röpke, Civitas Humana, 1944 ; Wilhelm Röpke, Die Lehre von der Wirtschaft(9th ed), Zurich: EugenRentsch Verlag, 1961.


35)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16.


36)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146.


37) 다만, 특히 노동조합의 위상에 관해서는 질서자유주의파 속에서도 논자마다 파악방식이 다르다. 뢰프케는 복지국가의 사회보장정책, 노동자정당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이런 <기계적인 대중연대>에 대한 비판을, 아우타르키 사회의 평가와 결부짓는다. 그 때문에 노동자의 복지 향상에 관해서는, 가령 르 프레의 사회경제학(기업 안에서의 고용주와 노동자의 정신적 끈을 중시한다. 복지국가 노선이 주류가 되기 이전의 19세기 프랑스에서 유력했다)을 호의적으로 인용하여 논한다Wilhelm Röpke, Civitas Humana, 1944). 이것에 대해 오이켄은 노동조합이 경쟁질서의 형성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런 의미에서 나치시기의 직능단체와는 구별된다).

    또한, 전후 서독의 노동조합에 대한 질서자유주의파의 입장에 관해서는 가령 에어하르트 「자유로운 질서 안에서의 노동조합」(Ludwig Erhard, Deutsche Wirtschaftspolitik, Düsseldorf: Econ Verlag, 1962, pp.436-440)을 참조.


38)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14.


39)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14.


40) 1979년 2월 7일.


41)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270.


42) 野尻武敏, 「新自由主義の経済体制思想」, 52쪽 참조.


43) 1979년 2월 7일.


44) 1979년 2월 7일.


45)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246.


46)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246.


47)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259.


48) 예를 들어 W. Röpke, Die Lehre von der Wirtschaft, 8장.


49) “Vorwort: Die Aufgabe des Jahrbuchs,” in Ordo, Erster Band, 1948, S.IX.


50) W. Röpke, Civitas Humana, 1944.


51) 1979년 2월 14일.


52) 1979년 2월 14일.


53) Ludwig Erhard, Wohlstand für Alle, Düsseldorf: Econ Verlag, 1957, 12장 참조.


54) 1979년 3월 7일. 한편, 프랑스에서의 <연대solidalité> 개념의 역사에 관해서는 Jacques Donzelot, L’invention du social, Paris: Fayard, 1984를, 개인의 리스크가 사회화되어가는 역사에 관해서는 François Ewald, L’État providence, Paris: Bernard Grasset, 1986을 참조. 지스카르 정권 하에서의 사회보장 정책의 실제에 관해서는 工藤恒夫, 「1970~80年代のフランス社会保障政策」, 『社会政策叢書』 編輯委員会 編, 『社会政策の危機と国民生活』, 啓文社, 1986을 참조. 


55) 佐藤誠, 「社会的平衡の住宅政策」, 『社会政策の危機と国民生活』, 1986년 참조.


56) 1979년 2월 21일.


57) 1979년 2월 21일.


58) 1979년 2월 21일.


59) 1979년 2월 21일.


60) 이렇듯이 질서자유주의파가 법을 신뢰하게 된 것의 배경에 있는 독일 법치국가론의 전통과의 관계에 관해 여기서 약간 파고 들어보자. 이미 말했듯이, 그들은 파시즘이나 소련, 뉴딜에서의 권력의 집중이나 편재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에 기초한다는 조건에서 경제영역에 대한 개입을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것은 이들의 법 개념이 “개인으로부터도 공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법”(1979년 2월 21일)이라는 생각에 의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레히트슈타트[법치국가]의 이념은 폴리차이슈타트[내치국가]와의 대항 속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이 이념에는 <공권력>이나 <군주>의 이름에 의한 자의적 개입과 대립하며, 국가행정(내치)으로부터도 개인으로부터도 독립된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법이라는 의미부여가 포함되어 있다. 법에 대한 질서자유주의파의 신뢰는 개인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위협을 부과하는 권력이 되어버린 국가(중앙관리국가)로부터도, 국가 내의 사적 권력(독점체)으로부터도 독립적인, 사회 전체에 중립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라는 이념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법치국가론의 영향을 받았다.

    또 자유주의자가 <자유로운 경제사회>에 걸맞는 법을 사상사 안에서 추적해 갈 때 독일 법치국가론의 중요성은 가령 Friedrich A. Hayek, The Constitution of Liberty,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0, 13장에서 나타난다. 


61) 1979년 2월 21일.


62)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52.


63) W. Eucken, Grundsäzte der Wirtschaftspolitik, S.50.


64) 1979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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