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미지의 운명> ‘1강’에서 랑시에르의 논의는 롤랑 바르트를 여러 면에서 활용하고 비판하고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즉, ‘스투디움’과 ‘푼크툼’만이 아니라 ‘디테일(세부)’*, (이미지나 사진의) ‘지표적 성질’이나 ‘그건 그랬지’ 등도 모두 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롤랑 바르트의 논의를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밝은 방> 전후의 롤랑 바르트를 보는 견해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책이 기존의 그의 작업과 단절적이라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적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당연히 두 가지의 절충도 있다. 즉, 단절과 연속을 모두 보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랑시에르는 단절적이라고 보는 견해에 가깝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랑시에르의 견해와는 다르게 다소 연속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미지의 운명> 곳곳에서 등장하는 용어들 속에 얼마나 바르트가 숨쉬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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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tails을 '세부'가 아니라 '디테일'로 옮길 때 유의해야 할 사항에 관해서는 <이미지의 운명> 34쪽, 각주 27을 참조.
2. 바르트는 이미 <신화론>(1957년)부터 사진에 관심을 보였다. 물론 그 전에도 바르트는 자신의 저작에서 사진을 언급하거나 사진 도판을 인용하곤 했다(가령 1954년에 출판한 <미슐레Michelet>). 가령 할리우드 영화배우인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의 얼굴 사진이나 영화에 나오는 로마인 사진 등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이 시기의 바르트의 관심은 시각 이미지에서의 상징·기호체계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 당시의 바르트에게 사진은 언어로 쓰인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읽어낼 수 있는 것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바르트에게 사진은 언어로 쓰인 텍스트와는 달리 독자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연결되는 특수한 매체로 간주되기도 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메시지Le message photographique」(1961년)에서 사진을 자신의 탐구 주제로 다룬다. 이 제목이 드러내듯이, 바르트는 여기서 메시지로서의 사진이라는 매체론적인 사진의 특성에 관해 논의하며, 이때 사진의 특징은 다음처럼 정의된다. ① 사진은 현실의 기계적인 유사물, 사르트르가 <상상력의 문제>에서 말했던 아날로곤analogon의 개념과 등가적이다. ② 그 때문에 사진은 ‘코드 없는 메시지’le message sans code이기에, 이를 읽고자 할 때 본질적으로는 문화적 코드가 필요하지 않은 메시지이다. 즉, 현실에 관해 어떤 표현적인 해석의 필터를 통한 매체(가령 데생, 그림, 영화)가 필연적으로 해석의 코드를 갖고 있는 반면에, 사진의 경우는 그것이 현실 그 자체의 평면적인 코드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읽기 위해 특히 미리 독해의 코드를 알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그 제작의 다양한 수준에서, 가령 화면구성이나 피사체의 선택 등에 의해서 문화적 코드를 부여받은 메시지, 즉 공시적 의미(connotation)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 바르트는 이런 특징을 들면서 이 「사진의 메시지」에서 사진의 기호적·상징적 기능의 분석, 코드의 분석을 중시한다. “공시적 의미(connotation)의 코드 덕분에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항상 역사적인 것이다. 그 독해는 독자의 지식에 의존한다”(O.C., t.I, p.1130. 주1).
3. 그리고 「이미지의 수사학」(Rhétorique de l’image, 1964년)에서도 바르트는 어떤 광고회사의 광고사진을 무엇보다 우선 공시적 의미(connotation)로서 분석한다. 이 분석은 전보다 훨씬 더 분류적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에는 세 개의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① denotation과 connotation을 모두 포함하는 언어적 메시지, ② 코드화된 도상적 메시지, ③ 코드화되지 않은 도상적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바르트는 앞의 「사진의 메시지」에서 더 나아가, 사진의 ‘본질’이라고 그가 나중에 부르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이 「이미지의 수사학」에서는 ③ ‘코드화 없는 메시지’로서의 사진의 특성이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 ‘코드 없는 메시지’로서의 사진을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지각이 필요하다. “이미지에서 모든 기호를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정보의 소재가 아직 남아 있다. 모든 지식이 결여되어 있더라도 나는 이미지를 계속 ‘읽는다.’ … 이미지의 이 마지막 (혹은 최초의) 수준을 ‘읽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지각에 결부된 지식 이외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O.C., t.II, p.576). 그리고 이 점에서 사진은 역사를 벗어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이것은 곧, 이 시점에서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그것이 단순한 기호의 매체와는 다른 측면을 갖고 있는 존재론적 매체라는 특권적 위치를 부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진이라는 매체가 확립하는 것은 ‘거기에 있었다’l’avoir-été-là라는 의식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실제로, 사진은 사물이 ‘거기에 있다’는 의식이 아니라 ‘거기에 있었다’는 의식을 설립한다. … ‘그건 그랬지’는 ‘그것은 나다’에 상처를 입힌다”(O.C., t.II, p.583). 여기서 이미 바르트가 <밝은 방>(1980년)의 2부에서 문제 삼았던 “그건 그랬지”Ça a été의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4.
한편, 바르트의 유작인 <밝은 방>은 발터 벤야민, 수잔 손택의 사진론과 더불어 사진론의 고전으로 취급을 받고 있다. 바르트는 이 책에서는 사진의 존재론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존의 사진론이 지닌 환원론적 체계에 이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독자적인 사진론을 전개한다. 이때 그는 기존의 현상학을 답습하는 대신 ‘대범한 현상학’을 전개한다. 즉, 사진경험에서의 ‘감정’, ‘파토스적인 것’의 요소를 가장 중요시하고, ‘마음의 상처’ 같은 것으로서 사진을 파고들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본다,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깨달으며 보며 생각한다.” 바르트의 현상학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소박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1부(1장~24장)에서는 ‘쾌락’의 관점에서, 2부(25장~48장)에서는 ‘사랑’과 ‘죽음’의 관점에서 사진의 본질에 도달하는 것으로 목표로 한다. 이처럼 이 책에서 바르트는 독자적인 현상학적 방법에 입각해 특히 ‘본다’라는 사진경험을 다루었으며, 사진경험의 시간성에 대해 심도 깊게 검토한다. 이 사진의 현상학을 본격적으로 밀고 나아가는 데 있어서 도입되는 것이 라틴어에서 채용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사진경험을 둘러싼 대립적 개념이다.
5. ‘스투디움’이란 사진을 경험할 때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요소이다. 우리는 다양한 사진에 ‘관심’을 품고, 그것들을 어떤 정치적 표현으로, 역사적 장면으로, 혹은 시민적 의식을 채우는 것으로 수용한다. 그 지향대상(인물이나 사물)에 공감이나 반감을 품는 것은 일반적, 문화적 관심에 기반을 둔다. 때로 그것들이 강한 감동이 가득 찬 관심을 낳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코드를 매개로 하며, 훈련이나 교육에 의해 익숙해진 것이다. 이 차원에 끌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영어의 like의 차원에 속한다. 다른 한편, love의 차원에 속하는 ‘푼크툼’은 코드화되지 않는 요소이며, 그것 자체는 명명/규정될 수 없다. 사진이 원래 정보로서 전달되고 공유되고 해독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스투디움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지만, 우리에게 사진을 보는 경험이란 이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보는 자를 콕콕 찌르고, 가슴을 죄여오는 우발적인 경험, 즉 스투디움적 수용에 한 순간 균열을 내버리는 사진 경험도 있다. 그 요소가 푼크툼이다. 바르트는 punctum이라는 라틴어에 포함된 ‘찔린 상처’,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금’과 같은 의미가 이 경험에 적합하다고 한다. 바르트는 자신이 불만을 품었던, 사진에 관한 기존 논의가 거의 스투디움에 해당되며, 따라서 당연히 그의 말년의 사진론은 푼크툼에 무게를 두고 기술된다. 왜냐하면 바르트 식의 사진 현상학에서는 푼크툼이라는 경험에 의해 보는 자가 ‘자극을 받는 것’, 바로 여기에 ‘사진’의 존재의의가 있기 떄문이다.
6. 쉽게 이해하기 위해 <밝은 방>에 등장하는 세 번째 사진을 예로 들자. 니카라과의 반란을 찍은 사진인데, 폐허가 된 도로에 헬멧을 쓴 두 명의 병사가 순찰을 돌고 있고, 그 뒤를 두 명의 수녀들이 지나가고 있다. 바르트는 이 사진이 관심을 끌고 호기심을 북돋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 존재(그 모험, 즉 불의의 도래)는 두 가지 요소, 즉 병사와 수녀가 공존한다는 것에서 온다는 것을 나는 곧바로 이해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같은 세계에 속해지 않다는 의미에서는 불연속적이며 이질적이다. (두 요소가 완벽하게 대조될 정도로 다를 필요는 없다.) 나는 (자신의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구조적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서둘러 그 규칙을 확인하기 위해서 똑같은 보도사진작가(네덜란드의 콘 베싱)의 다른 사진을 검토해 보았다. 다른 사진들도 방금 확인했던 이중성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내 주목을 끌었다.” 여기서 말한 다른 사진들 중에서 한 장, 하얀 천으로 덮인 아이의 주검, 부모와 그 친구가 그것을 에워싸고 비탄에 잠겨 있는 사진이다. 바르트는 이 사진에 관해서도 그 이중성을 지적한다. 구두가 벗겨진 시체의 한쪽 발, 어머니가 울면서 손에 쥐고 있는 천, 멀리서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 코에 손수건을 대고 있는, 부모의 친구로 보이는 또 한 명의 여자. 이것들 외에도 이 보도사진들에 관해 바르트는 살펴보지만, 다른 사진들은 이 사진만큼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화면에서의 균질성이 문화적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차이를 낳는 두 종류의 요소에 관해 붙인 이름이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다.
7. 다시 말하지만, 첫 번째 요소인 스투디움은 지식이나 교양, 어떤 전형적인 정보와 관련된다. 가령 니카라과와 반란에 관한 모든 기호, 즉 가난한 사복의 전투원들, 폐허가 된 거리, 사망자들, 태양, 둔탁한 눈의 인디오들 등. 확실히 그런 사진에 대해 일종의 일반적 관심, 때로는 감동으로 가득 찬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감동은 도덕적·정치적 교양(문화)라는 합리적인 중개물을 거친 평균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의범절에 의해 생기는 종류의 것이다. “이 말은 곧바로 ‘공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 어떤 사람에 대한 선호, 어떤 종류의 일반적인 숙고를 의미한다. 그 숙고는 확실히 열의가 담겨 있지만, 그러나 특별한 격렬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많은 사진에 관심을 품고 그것들을 정치적 증언으로서 받아들이거나 훌륭한 역사적 이미지로서 음미하는 것은 그런 스투디움(일반적 관심)에 따른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공에게, 표정에, 몸짓에, 배경에, 행위에 공감하는 것은 교양문화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스투디움 속에는 그것이 문화적인 것이라는 공시적인 의미connotation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 어떤 사람에 대한 선호, 어떤 종류의 일반적인 감정이입을 의미한다. 그 감정이입에는 확실히 열의가 담겨 있지만, 그러나 특별한 격렬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많은 사진에 관심을 품고, 그것들을 정치적 증언으로서 받아들이거나, 훌륭한 역사적 화면으로 맛보는 것은, 그리하여 스투디움(일반적 관심)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공에게, 표정에, 몸짓에, 배경에, 행위에 공감하는 것은 교양문화를 통하기 때문이다.”
8. 교양을 통해 얽어낼 수 있는 요소인 스투디움과는 달리, 두 번째 요소인 푼크툼은 다음과 같다. “두 번째 요소는 스투디움을 파괴(혹은 분해)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나의 지고의 의식을 스투디움의 장에서 충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의 장면에서 화살처럼 나타나 나를 꿰뚫고 나가는 것은 저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스투디움을 파괴하는 것, 앞에서 언급한 사진을 가지고 말하자면, 병사의 뒤를 지나가는 수녀들, 소년의 유해의 벗겨진 한쪽 구두, 코에 손수건을 대고 있는 여자 등. 그것은 문화적 문맥에서의 니카라과의 반란이라는 사진의 독해를 휘젓고 상처를 입히고 느끼기 쉬운 고통 같은 것을 아로새긴다. 바로 이 때문에 바르트는 라틴어로 ‘찔린 상처, 날카롭고 뾰족한 도구로 새겨진 표식’을 나타내는 ‘푼크툼’이라는 말을 배정한 것이다. 푼크툼은 ‘찔린 상처,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금’이며, “어떤 사진의 푼크툼이란 나를 콕콕 찌르고, 내 가슴을 죄여온다.”
9. 푼크툼의 경험을 일으키는 사진의 특성으로서, 바르트는 이 책을 통해 ‘세부’와 ‘시간’의 두 가지를 꼽는다. 1부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푼크툼은 ‘세부’이다”(CC: 58)라고 하며, 사진의 ‘세부’에서 우발성[‘모험’]의 매력을 찾아내며, 푼크툼에 등록한다. 이 ‘세부’성은 사진의 그 정확함에 의해 유지된다. 촬영자는 지향대상을 자신의 의도에 완전히 입각해 통제 하에 둘 수 없다. 이에 따라 사진이 촬영자가 의도한 사회-문화적 코드, 즉 스투디움적 요소에 어긋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이 담아내게 되며, 보는 자는 그 코드를 빠져나간 요소에서 우발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중요한 미디어 특성은 벤야민의 “무의식이 기입된 공간”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다양하게 표현을 바꾸면서 수많은 사진론에서 거듭 말해져 왔다.
10. 이 특성에 의해 사진은 작성자의 의식이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회화나 담론과 명확하게 구별된다. 앙드레 바쟁(Bazin 1958)이 일찍이 강조했듯이, 이 특성은 복수의 기계[기술성]의 교차라는 객관적 중개물에 의해 담보된다. 렌즈에 의해 포착되고, 셔터가 눌러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진은 화학반응으로서 빛이 필름이 직접 인화된다. 따라서 지향대상이란 빛을 통해서 물질적으로 ‘직접’적으로 연결을 갖는(‘빛photo’을 ‘기록하다graph’) 것이지만, 이 ‘직접’적 관계는 퍼스Charles Sanders Pierce,의 기호학에 따르면 ‘인덱스’가 된다. 이리하여 인덱스성은 일반적으로 사진의 미디어 특성의 중요한 요소로서 확고하고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바르트에게서도 이 인덱스성은 ‘모험’을 초래하는 사진의 우발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사진 속의 친화할 수 없는 엉뚱하고 부정합적인 요소가 보는 자의 눈이나 관심을 끌어들여 정동을 자극한다. 이것이 ‘세부’적 푼크툼이기 때문이다.
* 바르트의 사진론에 관해서는 몇 가지 특기할 것이 더 있으나, 올린Olin의 논의가 자못 흥미롭다는 것을 지적하고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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