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읽기
*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출간되어 있습니다. 2년인가 3년 전에 관련 세미나와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번역했고, 회람을 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여기에 공개합니다. 아래 글에서 등장하는 쪽수는 모두 일본어판 쪽수이며, 국역본과 대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역본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17년 3월 26일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겠습니다.]
<목차>
1. <대담> :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 중국에서의 철학의 기원 : 억압된 호적(胡適)의 노자기원설 ⇒ 미번역
| 나카지마 다카히로(中島隆博)
3.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 사이토 다마키(斎藤環)
4. 이소노미아의 이름, 민주주의의 이름
| 오타케 고지(大竹弘二)
5.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으로 : 이소노미아의 관점에서
| 야기 유우지(八木雄二)
6. 고대그리스와 마주 보기 : 최신의 역사·철학사 연구의 성과로부터
| 노부토미 노부루(納富信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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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1/3)
デモクラシーからイソノミアへ―自由―民主主義を乗り越える哲学
가라타니 고진 + 고쿠분 고이치로
(2012년 12월 6일, 太田出版会議案にて)
※ 질문 : 가라타니 고진 씨는 2012년 11월에 『철학의 기원』을 출판했습니다. 『철학의 기원』은 고대 이오니아[주1]의, 자유롭기에 평등하다는 이소노미아(무지배)[주2]에서 철학의 기원을 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그 이소노미아의 사상은, 소크라테스를 마지막으로 망각되어 버렸다고도 쓰셨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 서로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그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고대 이오니아에서는 탈레스[주3]를 시조로 하여 자연철학이 무르익었습니다만, 그 망각된 사상을 계승한 철학자의 한 명으로 이 책에서는 스피노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쿠분 고이치로 씨는 『스피노자의 방법』을 쓰고, 데카르트와 비교하면서 스피노자의 방법을 탐구하고, 비-스피노자적인 방향으로 진행된 17세기 이후의 철학에 맞서 다시금 스피노자의 가능성을 제기하셨습니다.
오늘은 두 분께 『철학의 기원』에 관해, 또 이 책이 제기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사상에 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주1] [편집부] 아나톨리아 반도(현재의 터키) 남서부 및 에게해 동부의 섬들에 고대에 존재했던 지방.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주2] [옮긴이] no rule은 비지배, 무지배로 모두 번역가능하다. 필립 페팃 등과 같은 신공화주의자들이 자유를 논할 때 <지배 없는 자유>와 <간섭 없는 자유>를 구별하여 언급하듯이, '아니다'라는 의미는 물론이고 '없다'는 의미도 가능하기에 ‘무지배’가 꼭 잘못된 번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3] [편집부] 기원전 6세기 전반기의 인물. 고대 그리스의 기록에 남겨진 가장 오래된 자연철학자이며, 이오니아의 밀레토스학파의 시조. 만물의 시원물질을 물이라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와 철학의 기원
고쿠분 : 가라타니 씨는 『철학의 기원』에서 소크라테스 이전(pre-socrates)의 철학자에 관해 논하고 계십니다. 아주 우연인데요, 사실 저도 3·11 이후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 경우는 하이데거가 계기입니다. 하이데거는 원자력 기술에 관해 철학적으로 고찰한 유일한 철학자인데요, 그 전제에는 그의 ‘기술(테크네*)’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연(퓌지스*)’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기술(테크네*)’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저는 하이데거가 그랬듯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연 개념에 관해 생각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기묘하게 생각될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원자력 발전의 문제를 경유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에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2011년부터 그 공부를 시작해, 2012년의 전반기에는 대학에서, 하이데거를 이용하면서 「전-소크라테스 기의 철학과 원자력 발전」이라는 테마로 수업도 했습니다. 아마 이런 제목의 수업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만(웃음).
이런 셈이어서, 『신조(新潮)』를 드문드문 보고 가라타니 씨의 ‘철학의 기원’의 연재를 봤을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아, “나만 이런 게 아니잖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거기서 공통되는 시대정신을 느꼈다고나 할까, 왠지 “나는 지금 시대의 파도에 올라타 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웃음).
음, 이러저러하게 시작한 프리소크라테스의 공부인데요, 처음에 느꼈던 것은 “어떤 책을 읽어도 같은 것이 써져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저는 처음에 프리소크라테스의 고전적 연구인 존 바넷의 『초기 그리스 철학』 등을 읽었습니다. 그 후 다른 책과도 맞춰봤지만, 물론 자세한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어디에든 같은 것이 써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하더군요. 이 시기의 철학에 관해서는 원래 자료가 적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상당히 한정되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초보적인 것을 확인해 두면, 그들이 기록한 책이 남아 있지 않고, 후세의 철학자에 의한 증언이나 인용밖에는 존재하지 않죠. 가령 탈레스가 만물의 시원물질을 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 때문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런 증언이나 인용으로 남겨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말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재구성했던 것이 헤르만 딜스가 편찬하고 나중에 발터 크란츠가 수정 증보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 단편집』(초판은 1905년, 수정증보판은 1951년)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프리소크라테스 연구의 출발점이 되어 있고, 아까 이름을 언급한 바넷의 『초기 그리스 철학』에서도 이 딜스=크란츠의 『단편집』이 전제에 있습니다.[주4]
[주4] [고쿠분] 딜스=크란츠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프리소크라테스 연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다만 당연하게도 비판도 있다. 버넷은 가령 헤라클레이토스의 단장의 나열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초기 그리스 철학』, 以文社、一九一頁). 딜스는 주제에 따른 배열의 시도를 일체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버넷은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단 하나의 단장에 관해, 그 단장의 첫 부분은 단장 자체를 전한 심플리키오스(Simplicius of Cilicia: c.490-c.560)에 의한 패러프레이즈라고 말한다(같은 책, 八三頁). 하이데거는 버넷의 설에 동의하면서, 같은 이유 때문에, 아낙시만드로스 본인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말미의 12 말에 불과하다고 한다(ハイデッガー, 「アナクシマンドロスの箴言」, 『杣道』〔ハイデッガー全集第五巻〕, 創文社, 378-380頁). 아마 이것 외에도 다양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딜스=크란츠의 작업의 의의는 향후에도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 김인곤 외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단편선집』, 아카넷, 2005, 218-266쪽.
이처럼 프리소크라테스적 철학은 자료가 아주 한정되어 있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 있는 셈인데요, 거기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온 것이 하이데거죠.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 돌아갈 필요를 강하게 주장하고, 아주 독창적인 독해를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주5]나 아낙시만드로스[주6] 등이 남긴 단편을 독특한 방식으로 독해했습니다.
[주5] [편집부] BC535년 무렵~475년 무렵. 에페소스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일컬어지는 자연철학자. 만물의 시원물질을 불이라고 생각했다.
[주6] [편집부] BC 610년 무렵 ~ 547년 무렵. 만물의 시원을 ‘무한정한 것’이라고 했던 밀레토스학파의 자연철학자.
이것은 정직한 감상으로 말하는 건데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을 하나의 강력한 전체적인 비전을 좇아 독해해 낸 사상가는 하이데거 이후, 가라타니 씨로 단숨에 건너뛴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하겠습니다.
단편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상을 해석한다는 것은, 이른바 몇 개만 남은 퍼즐 조각을 통해 퍼즐 전체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하이데거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시도했던 것은 그와 같은 작업입니다. 하이데거는 “결코 몰락하지 않은 것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어떻게 몸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인가/어떻게 하면 사람은 소멸하지 않는 것의 앞에서 숨어 있을 수 있을까!/결코 몰락하지 않는 것 앞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를 숨길 수 있는가?’”(단장 번호 16)이라는 단편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합니다. 그는 “결코 몰락하지 않는 것”이란, 달리 말하면 “줄곧, 바꿔 말하면 부단히 나타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요컨대 ‘자연(퓌지스*)’을 가리킨다고 단언합니다.[주7] 퓌지스는 원래 ‘나타나다[등장하다, 출현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자연(퓌지스*)’ 개념 자체의 해석에 씨름합니다. 확실히 하이데거의 독해에는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압도적인 매력이 있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을까요?
[주7] [고쿠분] ハイデッガー, 「ヘラクレイトス」〔ハイデッガー全集第五五巻〕, 創文社, 九九頁 이하.
그러면 왜 이런 독해가 가능했는가? 그것은 하이데거 안에 ‘존재’나 ‘자연(퓌지스*)’에 관한 강렬한 퍼스펙티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퍼스펙티브 속에 다양한 단편을 던져 넣으면, 하나의 그림이 선명하게 떠오르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단편밖에 없는 철학자를 전체적으로 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런 독해는 실증적인 연구와는 구별해야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역시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철학의 기원』을 읽으면, 가라타니 씨에게도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퍼스펙티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퍼스펙티브의 구성요소 중 하나가 이 책의 중심적 테마인 이소노미아(무지배)라는 정치체제이죠. 가라타니 씨의 강렬한 퍼스펙티브 안으로 단편이 던져 넣어졌을 때, 하이데거에 필적하는 듯한, 그러나 하이데거와는 다른 독해가 선명한 그림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철학의 기원』이라는 책의 일관성과 전체성은 여기서 유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이데거 이후에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그런 독해상의 사건이 일어났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씨는 본서에서 철학의 기원을 이오니아에서의 이소노미아 ― ‘자유롭기에 평등하다’는 ‘무지배’의 자치적 사회 ― 의 위기에서 찾았습니다. 현재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아테네에서 시작됐고 이오니아에서는 단순히 그 싹이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됩”(『철학의 기원』 19頁)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스에 특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거의 모두 이오니아에서 시작됐다”(20頁)고 하면서, 이오니아의 몰락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이소노미아의 부활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철학은 시작됐다(“이소노미아의 위기에서 철학이 시작됐다”, 49頁)고 적혀 있습니다.
게다가 아테네에서 시작된 데모크라시도 이오니아에 있었던 이소노미아를 재건하려 했으나 그리 할 수 없었던 기획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오니아에 존재했던 이소노미아(무지배)는 아테네에서 ‘지배(크라시*)’의 한 형태인 데모크라시(다수자 지배)로 변질되고, 그것과 더불어 철학의 참된 기원인 이오니아는 망각되고, 철학은 아테네에서 기원했다는 통념이 만들어지게 됐다는 것이죠.
제가 하이데거에서 가라타니 씨로 단숨에 건너뛰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강렬한 퍼스펙티브를 갖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의 독해로 향함으로써, 아주 매력적인 그림을 부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가라타니 : 저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서는, 흔하게, 누구나 쓰고 있는 것밖에는 몰랐어요. 이렇게 말해도, 그것에 관해 특히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생각하게 됐던 것은 철학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제 관심은 보편종교에 있었습니다. 보편종교에서 처음으로 교환양식 D가 제시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2010년에 『세계사의 구조』를 다 썼을 무렵, 이른바 보편종교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교환양식 D가 제시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세계사의 구조』에는 이를 위한 지면이 없었습니다. 이번의 『철학의 기원』에서는 거기서 쓰지 못했던 것을 썼습니다.
※ 질문 : 가타라니 씨는 전작인 『세계사의 구조』에서 세계사를 네 가지 교환양식, 즉 A 호혜, B 약탈과 재분배, C 상품교환, A를 고차원에서 회복한 D 등으로 설명하고, 각각이 지배적인 교환양식의 사회로서, 씨족사회(A), 국가사회(B), 근대자본제사회(C)를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D의 강박적 회귀로서 보편종교가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철학의 기원』은 D가 사실은 철학의 기원이기도 한 이소노미아라고 간주하는 거네요.
B 약탈과 재분배 (지배와 보호) |
A 호혜 (증여와 답례) |
C 상품교환 (화폐와 상품) |
D X |
교환양식 |
가라타니 : 그렇습니다. 『세계사의 구조』에서는 보편종교를 꽤 상세하게 썼습니다. 일반적으로 철학과 종교는 별개로 나눠져 생각되어 왔습니다만, 보편종교의 경우는 그런 구별이 쉽게 성립하지 않습니다. 저는 베버의 윤리적 예언자와 모범적 예언자라는 개념을 빌려 생각했던 것인데, 윤리적 예언자는 예수나 무함마드처럼, 신의 신탁을 받고 그 의지를 고지하는 매개자가 됩니다. 반면, 모범적 예언자는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붓다나 노자나 공자처럼, 모범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범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리키는 자입니다. 즉, 모범적 예언자란 사실은 철학자 같은 자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도 예언자 같다는 겁니다. 원래는 철학자였던 것이 나중에 종교의 교조처럼 간주된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구약성서의 예언자는 “신의 말”을 이야기합니다만, 그것은 무함마드처럼 신이 깃든[접신된] 말이 아닙니다. 나미키 코우이치(並木浩一)가 『구약성서에서의 문화와 인간』에서 쓰고 있는데요, 사실은 예언자의 말이란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음미한 지식을 “신의 말”이라고 쓴 것입니다. 여기서는 종교와 철학이 판연히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사의 구조』에서 제가 보편종교에 관해 썼던 것은 철학에도 들어맞을 것입니다. 보편종교가 그 기원에 있어서 교환양식 D의 차원을 개시하는 것이라면, 철학의 기원에서도 같은 것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 셈입니다.
하지만 2011년 1월까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서는 저도 버넷과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의 이해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이데거의 논의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읽기는 했지만, 그다지 와 닿는 게 없었습니다. 다만 아까 하이데거에 관한 고쿠분 씨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 가지 생각이 드네요. 하이데거는 원래 신학과 출신입니다. 그래서 그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것은, 본질적으로 유대·그리스도교에 의해 제시된 사항과 유사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보편종교의 문제가 다른 형태로, 즉 철학으로서 발견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 자신은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죠. 저도 그것을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만일 이런 시각이 옳다면, 그것은 제가 보편종교의 문제로부터 이오니아 철학으로 향했다는 것과 어느 정도 평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는 것이고, 2011년 1월까지, 저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 관해, 그때까지의 틀을 넘어서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령 철학자의 역사적 순서는 책을 읽어 알고 있었지만, 진정한 순서, 즉 그들의 구조적 연관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급격하게 보이게 됐던 것이 그 무렵으로, 인도에 2주일 정도 체류한 이후입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도가 지리적으로 이오니아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보면 그리스는 아주 멀리 느껴집니다만, 인도에서 보면 비교적 가깝죠. 인도는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와 연결이 강하고, 언어에도 페르시아어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을 제패한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원정하려 했던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제가 거기서 문득 생각했던 것은 인도까지 찾아온 것으로 알려진 이오니아 출신의 철학자입니다. 그것은 피타고라스입니다.[주8] 일반적으로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아시아, 특히 인도에서 갖고 돌아간 것이라고 합니다. 초기 그리스 철학의 역사에서는, 피타고라스는 그렇게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한, 피타고라스의 수수께끼뿐 아니라, ‘초기 그리스 철학’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습니다.
[주8] [편집부] BC 570년 무렵 ~ 사망년도 불명확.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수학자. 만물의 시원을 수라고 봤다. 또한 음악에서의 화음의 발견자로도 알려져 있다. 사모스 섬을 떠나 각지를 방랑한 후, 남부 이탈리아에서 피타고라스 교단을 설립하고 플라톤 등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저는 인도에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생각은 인도가 아니라 그가 젊은 시절에 머물렀던 이오니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이오니아적인 것의 부정이지만, 이오니아를 매개체로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성질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가 만물의 시원에 수를 놓은 것은 명백히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발상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정치 혹은 이오니아 자연철학에서 나와서 더욱이 그것들과 결정적으로 대립되는 사상을 초래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도에서 수입한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가 윤회전생의 생각을 그리스에 가져왔다고들 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전에 오르페우스교[주9]로서 그리스 전역에 퍼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오니아인은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오니아의 풍토에서 나온 피타고라스가 윤회전생을 말했다면, 그것을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처리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오니아의 정치(이소노미아)와 철학(자연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주9] [편집부] 고대 그리스의 밀의교密儀教로, 기원전 6세기에 각지로 번졌다. 음악이나 계율에 의해 깨끗하게 정화된 혼만이 윤회전생의 고리 바깥으로 나가 천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제 생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주10]와 헤라클레이토스는 피타고라스에 대항하여 이오니아적인 정치와 철학을 옹호하려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심오한 해석을 부여했지만, 제게는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에, 또 누구에게 대항하는지 알았을 때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피타고라스에 대항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목표였습니다.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 등에게서 반-소크라테스=플라톤적인 사고를 보려고 했습니다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후계자가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후계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이오니아적인 것을 회복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상가들의 관계를 보려면, 피타고라스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피타고라스를 무시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피타고라스라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 저는 그 언저리의 사상가의 관계를 일순간 알게 됐습니다(웃음).
[주10] [편집부] BC515년 무렵 ~ 사망년도 불명확. 남부 이탈리아의 엘레아 출신 철학자. 알레아파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고쿠분 : 저도 『철학의 기원』을 읽다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피타고라스 얘기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사모스 섬에서 폴리크라테스와 함께 정치 개혁을 행하고, 그것에 좌절합니다. 그리고 사모스 섬을 떠났고, 그 후 40년 정도 방랑을 하고, 인도까지 갔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단을 만들지요.
『철학의 기원』에서는 피타고라스가 사모스 섬에서 실현하려 한 것도, 이오니아에서 상실되고 있었던 이소노미아의 회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와 폴리크라테스가 실시한 정치 개혁은 결과적으로 이소노미아와 언뜻 보면 비슷하나 실제로는 다른 ‘데모크라시(다수자지배)’(114頁)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폴리크라테스는 민중 자신의 요청에 의해 민중을 지배하는 참주가 되어 버리고, 피타고라스는 그것에 절망해 사모스 섬을 떠나고, 그리고 40년의 방랑 생활과 교단 설립에 이르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의 교단에서는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이 절대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것은 이른바 절대적인 규율에 의해 절대적 평등을 실현한 공동체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즉, 자신을 절대선=절대악의 위치에 둠으로써 절대적 평등을 실현했습니다. 가라타니 씨는 피타고라스가 과거 실패한 정치 개혁을 교단에서 다시 하려고 했다고 적으셨는데,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의 매우 엄격한 정치적 진리군요. 민중에게 지배를 맡기는 민주제는 최종적으로 참주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동지인 폴리크라테스도 참주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민중의 요구에 의해 그렇게 됐다. 그렇다면 민중의 평등을 위해서는 절대자를 둬야 한다 ….
피타고라스는 또 이오니아의 지적 전통을 매개하면서도 이오니아 자연철학과는 완전히 다른 관념론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자연(퓌지스*)의 근원(아르케*)을 탐구했다는 의미에서는 이오니아적이었지만, 그것을 수학적인 관계에서 구함으로써 이오니아 자연철학에 있던 자연(퓌지스*)의 관념을 한없이 멀리하고 말았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이런 의미에서, 정치에서도 철학에서도 이오니아에 대해 비틀린[엇나간] 관계에 있습니다. 가라타니 씨는 이것에 대해 “이소노미아를 추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가장 이소노미아에 반하는 정치형태, 혹은 가장 자연철학에 반하는 철학으로 귀결됐다”(123頁)고 쓰셨습니다. 이는 매우 설득력이 있고, 실제로 저는 이 책을 읽어 버렸기에 더 이상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만(웃음), 피타고라스에 대한 가라타니 씨의 이 설은 역시 독창적인 것이 아닐까요?
가라타니 : 초기 그리스 철학이라는 것은 자료가 제대로 없으니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처럼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자에게는 유리합니다만(웃음). 피타고라스의 위치가 정해지면,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뿐 아니라 플라톤의 위치도 정해집니다.
고쿠분 : 어떤 의미에서는 피타고라스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의 기원이라는 것이군요. 피타고라스가 감성적 세계와는 구분되며, 감성적 세계를 관장하는 수학적인 관계를 실체화하고 플라톤이 그것을 이데아론으로서 정치화(精緻化)했다고 말입니다. 반면, 이오니아 자연철학은 그런 관념적인 이중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고 가라타니 씨는 쓰고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 플라톤적인 철학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철학(필로조피아)’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앎의 방식을 “앎을 사랑하는 것(필레인 토 소폰)”이라고 말합니다.[주11] ― 물론 하이데거에게 낭만주의적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주11] [고쿠분] 하이데거는 ‘철학(필로소피아)’ 이전의 지적 노력을 그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필레인 토 소폰(φιλείν τό σοφόν)’이라고 부르고, 예를 들어 그 담지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아직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보다 위대한 사유자였기 때문입니다”(하이데거, 『철학이란 무엇인가』, 理想社, 一九頁). 또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ërtius)에 따르면, ‘철학(필로스피아)’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고,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 피타고라스라고 한다.
가라타니 : 이 책에서도 인용했지만 헤겔이 이오니아에 대해 매우 시사적인 것을 말해서 저는 사실 놀랐습니다. 헤겔은 “이오니아의 아름다운 세상이 끝날 때 철학이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오니아 철학이 이오니아적 세계가 끝나고 있을 때 나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점에서 현재의 학자와는 다릅니다. 다만 그는 “이오니아의 공화국”, “아름다운 세계”라고 말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헤겔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것은 하이데거의 경우보다 더 모르겠네요.
만약 한마디 해 둔다면, 저는 이 책에서 피타고라스를 비판적으로 썼지만, 최종적으로 피타고라스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피타고라스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물리학자는 궁극적으로 피타고라스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립자론의 근원적 물질은 수학적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실재한다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실증되지는 않겠죠. 왜냐하면 그를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드니까요. 저는 옛날부터 말했습니다. “돈이 떨어지면 진리도 떨어진다”[주12]고(웃음). 수학적으로 맞다면 그것은 존재한다는 생각은 피타고라스가 들여온 관념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는 다릅니다. 즉, 이데아는 물리칠 수 있지만 수학은 쉽게 물리칠 수 없거든요.
[주12] [옮긴이] 원문은 金の切れ目が真理の切れ目이다. 일본어에서 切れ目는 돈의 경우에는 떨어지다, 끊기다 등의 의미이지만, 진리의 경우에는 (효력이) 다 하다, (의미가) 없어진다 등의 의미이다. 따라서 "돈이 떨어지면 진리도 소용없다" 정도의 의미이다.
베르그손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읽으면, 그는 그리스에서의 종교의 기원을 디오뉘소스교나 오르페우스교에서 보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닫힌 사회를 여는 ‘특권적 개인’을 그리스에서 찾으려 했지만 못했죠. 그래서 디오뉘소스교나 오르페우스교에서 그것을 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아시아에서 기원한 것이고, 원래 보편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에서 보편종교의 출현을 보고 싶다면, 그것을 오히려 ‘철학’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즉, 모범적 예언자로서의 철학자에게서 말입니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종교와 철학이라는 통속적인 구별을 넘지 못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피타고라스가 윤회전생의 관념을 그리스에 전했다는 설은 난센스입니다. 피타고라스의 문제는 ‘이중세계론’에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윤회전생이라는 생각이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붓다가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붓다는 그것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윤회전생이라는 관념에서 끌어내지는 종교적·정치적 태도를 비판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중세계론’을 비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붓다가 비판한 것은 이중세계입니다. 붓다는 종교가가 아니라 당시의 자유사상가의 한 명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무신론자도 있고 논쟁을 했습니다. 인도에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제자백가’ 시대가 있었습니다. 붓다의 생각은 나중에 종교가 되었습니다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노자나 공자의 철학이 후에 유교나 도교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한편, 그리스에서는 피타고라스가 가져온 이중세계론에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저항했습니다. 그것은 중국과 인도의 ‘제자백가’ 시대와 거의 평행합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시대와도 말입니다. 종교와 철학, 아시아와 그리스 같은 구별에 기초하면, 그런 연결이 안 보이지요. 저는 이오니아에서의 사건을 바빌론에서의 사건과 비교해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동시에 중국과 인도에서의 사건을 염두에 뒀습니다.
고쿠분 : 철학의 기원을 이오니아에서 본다는 것도 매우 재미있지만, 이 책의 서두에서 바빌론 유수[주13]에 관해 언급하는 대목도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바빌론 유수에서 끌려간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압도적인 문화나 종교에 에워싸여, 자신들의 종교를 재고하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엄격한 계율을 기초로 한 훗날의 유대교가 나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진정한 ‘기원’으로서의 바빌론 유수는 철학의 참된 ‘기원’으로서의 이오니아와 마찬가지로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주13] [옮긴이] 일본에서는 바빌론 유수(幽囚)가 아니라 捕囚라고 부른다. 포로라는 뜻도 있으나 유수를 이렇게 부른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시드기야왕을 비롯한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며, 기원전 538년에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약 50년 동안의 기간을 뜻하기도 한다.
가라타니 : 바빌론 유수란 유대교의 역사에서 오랜 시련의 한 장면[cut]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사실은 거기서 진정으로 유대교가 시작됐다고 해야 할 사건이군요. 지금까지의 종교에서는 어떤 초월적 신도, 국가가 멸망하면 신이 패한 것이 되며, 인간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미증유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을 버리지 못하고 반대로 인간의 책임을 묻게 됐습니다. 이때 신과 인간의 관계가 반전됐다고 해도 좋습니다. 즉, 주술적 사고에 있는 인간중심주의가 부정된 셈이죠. 그러나 바로 이로부터 유대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제사장들은 그것을 모세의 옛날에 투사하고, 그 이후의 유대인의 시련의 한 에피소드로 바빌론 유수를 보게 됐습니다. 물론 바빌론의 일을 숨기지 않습니다. 매우 중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빌론에서 일어났던 것을 감춰버립니다.
저는 그 부분이 그리스 정치 및 철학에 있어서 이오니아의 위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바빌론 유수에 관해서도, 이오니아에 관해서도, 누구나 피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책에도 아테네 이전에 “이오니아에는 고도의 경제 발전, 기술적 발전, 정치적 발전이 있다 …”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느새 이오니아가 펑 하고 사라지고,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성립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저로서는 “이오니아는 어떻게 된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지죠(웃음). 즉, 조금도 숨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오히려 그 때문에 가장 감춰져 있는 것이 이오니아와 바빌론인 것입니다. 늘 논하고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논하지 않았습니다.
고쿠분 : 마치 에드가 앨런 포우의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 같아요(웃음). 숨기지 않고 거기에 뒀기 때문에,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거죠.
가라타니 : 바로 그런 거예요. 이런 문제에 관해 그때까지 탐정이 없었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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