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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읽기 -- 사이토 다마키,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by 상겔스 2017.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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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플러스 15 - 2013년 2월 - 철학의 기원 읽기 - 20211128 - 번역.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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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읽기

 

atプラス 15, 2013년 2

 

 

 

 *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출간되어 있습니다. 2년인가 3년 전에 관련 세미나와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번역했고, 회람을 했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여기에 공개합니다. 아래 글에서 등장하는 쪽수는 모두 일본어판 쪽수이며, 국역본과 대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역본을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17년 3월 26일부터 순차적으로 공개하겠습니다.]  

 

 

 

<목차>

 

1. <대담> : 데모크라시에서 이소노미아로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철학

가라타니 고진 고쿠분 고이치로

 

 

2. 중국에서의 철학의 기원 억압된 호적(胡適)의 노자기원설 ⇒ 미번역

나카지마 다카히로(中島隆博)

 

 

3.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사이토 다마키(斎藤環)

 

 

4. 이소노미아의 이름민주주의의 이름

오타케 고지(大竹弘二)

 

 

5.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으로 이소노미아의 관점에서

야기 유우지(八木雄二)

 

 

6. 고대그리스와 마주 보기 최신의 역사·철학사 연구의 성과로부터

노부토미 노부루(納富信留)

 

 

 *********************************

 

 

 

3. 이소노미아와 다원주의 : 엠페도클레스의 회귀

사이토 다마키(斎藤環)

 

들어가며

 대작 세계사의 구조에 비하면 본서는 아주 작지만, 내용의 응축 정도에는 압도된다. 요약을 할라치면 전문을 인용하게 돼 버릴 정도다. 다만, 본서를 읽어나가는 전제로서, 가라타니의 전작인 세계사의 구조를 이해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본서에도 저자 자신에 의한 해설이 있지만). 그래서 우선 최소한의 복습을 해두자.

 가라타니는 국가나 네이션 등의 상부구조에 대해, 하부구조로서의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에 주목한다. 교환양식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교환양식 A : 증여와 답례라는 호혜교환. 미개사회에서 우위.

교환양식 B : 수탈과 재분배, 또는 복종과 안도(安堵, 소유지나 구영토의 소유권을 인정받음). 국가사회에서 지배적.

교환양식 C : 상품교환. 근대 자본제 사회에서 지배적.

교환양식 D : A의 고차원에서의 회복. 도래할 미래에서 지배적.

 

 어떤 사회에서든, 네 가지 교환양식의 조합을 볼 수 있으나, 어떤 교환양식이 우위가 되느냐에 따라 사회의 모습은 달라진다.

 이어서 세계시스템의 역사가 네 단계로 나뉜다.

미니세계시스템 : 교환양식 A에 의해 형성된다.

세계=제국 : 교환양식 B에 의해 형성된다.

세계=경제 : 교환양식 C에 의해 형성된다. 여기서 자본=네이션=국가가 일반적이게 된다.

④ ③을 넘어선 새로운 시스템 : ‘세계동시혁명아래서, 교환양식 D에 의해 형성된다. 칸트는 이것을 세계공화국이라 불렀다.

 

 나는 세계사의 구조의 서평(atプラス6)에서, 가라타니가 자주 보로메오의 고리를 언급하면서 라캉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점에 주목하고, 굳이 라캉적 독해를 시도했다. 결론만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라캉 용어와의 대조관계를 생각한다면, ‘네이션상상계, ‘국가상징계, ‘자본실재계[일본에서는 대체로 현실계라고 번역한다]에 해당된다. 여기서 실재계-상징계-상상계자본-네이션-국가라는 하나의 보로메오의 고리가 대조관계에 놓인다. 라캉적으로는 보로메오의 고리를 꽉 매는 네 번째의 찌그러진 고리가 요청되는데, 바로 이것이 증상(생톰*)=전쟁이다. 칸트도 말했듯이, 당분간은 전쟁이라는 자연의 간지[狡知]’가 국가들의 연방을 강고하게 해 왔다. ‘신경증의 증상이, 어떤 차원에서 주체를 정신 차리게 하고, 광기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갖듯이, ‘전쟁에도 국가나 국민을 정신 차리게 하고, 광기를 절단하는 기능을 갖는다.

 가라타니는 교환양식 D(어소시에이셔니즘)”가 억압된 교환양식 A”의 고차원에서의 회귀라고 하며, 의식적으로 되돌아오게 하는[다시 불러내는] 변화가 아니라, 변혁을 목표로 한 운동 속에, ‘억압/회귀로서 생각지도 않게 출현한다고 한다.

 “교환양식 A”억압/회귀로서 반복되는 이유는, 호혜성[互酬性] 안에 잠복해 있는 «증여의 외상성» 때문이다. 호혜성의 반복 회귀는 죽음충동에 기초하여 이뤄진다. 그 때문에 전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증여의 힘을 끄집어내는 것에는 정합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로메오의 고리를 깨뜨리지[부수지] 않고, ‘네번째 고리로서의 증상=전쟁, 같은 유래를 지닌 증상=증여로 치환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가 말하는 증여란 병의 자발적 포기”, 헌법9의 완전한 실행에 해당된다. 그것은 이른바 «전쟁이라는 광기» 대신 «증여라는 광기»의 옹호에 다름 아니다. 이 광기에는 감염성이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향락이 있기 때문이다. 향락(주이상스)은 인간에게 있어서 파괴적인 동시에, 인간의 행동의 최종 목적이기도 하다. 라캉이 이끄는[안내하는] 윤리적 공준, 욕망에 있어서 양보하지 않는 것은, 쾌락 원리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향락으로서의 평화에 대한 욕망으로 접속된다. 세계동시혁명은, 이런 윤리적 광기의 전이 혹은 반복 회귀에 의해 달성돼야 한다. 그것은 욕구냐 욕망이냐, 쾌락이냐 향락이냐, 제정신을 취하느냐 윤리를 취하느냐라는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이상이 내 나름의 세계사의 구조의 정신분석적 각색이다. 조금 주석을 달아둔다면, 가라타니 자신은 제 이론에 «향락»은 없어요라고 분명히 말한다(담화). 그런 의미에서는 향락으로서의 평화라는 해석이 어디까지 적절할지는 유보가 붙지만, 본고에서는 이런 이해에 기초하여 독해를 진행하고 싶다.

 

이소노미아와 교환양식 D

철학의 기원에서의 테마는 이소노미아=이오니아의 정치와 사상이다. 본서의 서두에서 가라타니는 이렇게 말한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에제키엘로 대표되는 예언자가 바빌론의 포로 안에서 나타나고, 이오니아에는 현인 탈레스가 나타나고, 인도에는 붓다와 마하비라(자이나교의 시조), 그리고 중국에는 노자와 장자가 나타났다. 이런 동시대적인 평행성은 놀라온 것이다”(철학의 기원, 3).

 가라타니는 이들 사상가의 출현을, 인류사에 있어서의 교환양식 D’의 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오니아에서의 철학의 기원을 검증하려는 것은 이 관점에서이다.

 그러면 왜 이소노미아에서는 종교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교환양식 D가 실현되었을까?

 과거에는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은 자연과학의 선구로 평가됐으나 사상으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테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 의해 형성된 편견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아테네의 사상은 그 모든 것이 이오니아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테네인은 이오니아의 사상이나 정치의 영향을 받으면서, 필사적으로 그것을 억압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원은 아테네에 있다고,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서조차, 근대의 민주주의가 품고 있는 문제가 모두 노출됐다. 가령 자유평등의 상극. 자유를 지향하면 불평등이, 평등을 사고하면 자유가 훼손된다는 모순. 이 딜레마는 원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와 사회민주주의라는 양극 사이에서 진동한다[동요한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의 최종형태이며, 처칠이 말하듯이, 최악의 정치형태이지만 다른 어떤 정치형태보다 낫다고 간주돼 왔다. 가라타니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최후의 형태 따위가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길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열쇠를 고대 그리스에서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27). 다만 그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이오니아라고 한다. 거기서는 자유이기 때문에 평등이 실현되고 있었다. 아테네의 데모크라시는 이소노미아의 성공하지 못한 재건 기획이다.

 이소노미아(무지배)가 이오니아 도시들에서 시작됐던 이유는 식민지인들이 그때까지의 씨족·부족적 전통을 일단 단절하고, 그때까지의 구속이나 특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맹약 공동체를 창설했기 때문”(25)이라고 간주된다. 이 점에서 과거의 씨족적 전통을 멈춰 세우고 계급대립이 남은 아테네나 스파르타와는 다르다. 이오니아에서는 화폐경제가 발달했으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도 평등했다.

 이것 외에도 몇 가지 힌트가 있다.

 예를 들어 이오니아에서는 독립자영농민이 주를 이루며, 대토지소유자는 없었다. 사역 가능한 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지를 갖지 못한 자는 타인의 토지에서 일하기보다는 다른 토지로 이동했다. 그래서 노예제도 생겨나지 않았다.

 상공업이나 교역이 발전한 이오니아에서는 심각한 계급격차가 생겨나지 않았다. 국가가 교역을 독점하지 않고, 사적 교역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교역의 이윤은 평준화된다.

, 이런 것이다. 이소노미아는 사람들의 유동성을 전제로 성립하며, 상공업의 발전이 새로운 유동성을 초래한 것이다. 상공업의 발전, 즉 교환양식 C의 단계는, 활발한 유동성과 더불어 교환양식 D의 회복에도 기여한 것이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이 고차원에서 일치하게 된다.

 

이중세계 비판

 본서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중세계비판이다. 가령 피타고라스는 감각에 의한 앎은 가상이며, 참된 인식은 감각을 넘어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앎과 비-앎이 구별된다. 참된 세계와 가상의 세계라는 이중세계의 설정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쉽게 연상시킨다.

 사정이 다소 복잡한 것은, 피타고라스가 이중세계를 부정하는 이소노미아의 사상을 거쳐 간 경력을 가진 점이다. 이소노미아는 특별한 지위나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구분을 부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세계에서는 당연하게도, 참된 인식력을 독점하는 철학자라는 입장도 인정되지 않고, 그래서 가상과 참된 세계라는 구분도 무효가 된다.

 그래서 피타고라스가 이소노미아를 거쳐 왔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이중세계가 아시아적인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수학의 실천을 중시한 피타고라스는, 사물[]의 실재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성(, 수학)의 존재를 구분했다. 그리고 후자의 관계성이야말로 진정한 실재라고 봤던 것이다. 이것은 윤회전생이나 혼의 불멸 같은 이중세계론과는 차원이 다르다.

 만물의 시원을 수()로 본다는 것은,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태도를 따르면서도, 그것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것이다. 관계가 실재이며, 그것을 시원에서 찾는 것은, 관념적 실재를 참된 실재라고 하는 것이다. 헤겔과는 달리 가라타니는, 이데아론이 피타고라스보다 앞선 사고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수를 실재로 하는 생각에 의해 가능해졌다고 한다. 더욱이 현대의 소립자론에서는 근원적인 물질은 수학적으로만 존재한다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피타고라스의 이중세계론으로부터 이데아론이 도출되는 것은 필연일까?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가라타니가 피타고라스의 첨단적인 비판자로서 이름을 꼽고 있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시원물질로서 을 찾아냈다. 만물의 일자[]’성은 불의 운동성에 있어서 실현된다. 즉 헤라클레이토스는 피타고라스가 버렸던 운동하는 물질이라는 사고방식을 회복하고,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회복을 시도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파르메니데스는, 간접 증명의 수법에 의해 운동하는 물질의 주장을 시도했다. 무슨 말인가? 그의 제자인 제논의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이 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사이의 공간을 무한하게 분할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따라잡기가 쉽다. 이 역설은, 운동으로부터 분리된 물질의 존재라는 가정이 오류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간접 증명에 의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인 유[온전한 일자, 유일자]’의 올바름이 증명되는 것이다. 참고로 이런 간접 증명의 수법도 이오니아 자연철학에 원래 존재했다고 한다.

 파르메니데스가 물리치고 싶었던 것은 이성에 의해 산출된 가상이었다. , 피타고라스가 생각한 참된 세계이다. 이 가상을 정정하려면, 사유가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법밖에 없다. 이 방법은 칸트로 통한다.

 흔해빠진 오류로서 칸트의 현상과 물자체라는 구별이 피타고라스의 이중세계론의 표절[재탕] 아니냐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가 표적으로 삼았던 것은 오히려 참된 세계라는 가상 쪽이다.

 

 혹은 여기서 라캉의 3계론(三界論)을 연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라캉의 3계론도 이중세계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어쩌면 라캉이라면, “참된 세계라는 이미지를 상상적인 것이라며 물리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주장하는 실재계란 대충 진위라는 판단이 무효화되는 영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갈마(Agalma)의 위치

 라캉은 논문 주체의 불균등에서 본 전이(主体不均衡からみた転移)(세미나8)에서 플라톤을 인용하여 전이를 해설하고 있다.

 아가톤, 아리스토파네스, 소크라테스 등이 에로스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주연(酒宴), 만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난입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일찍이 멋진 미소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연모하다 여러 가지 속임수를 다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의 유혹을 전혀 상대하지 않았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왜 소크라테스를 사랑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의 사람됨의 멋들어짐을 극찬한다. 그의 덕은 누구보다 뛰어나고, 그의 말은 사람들을 황홀하게 한다. 전쟁터에서의 소크라테스의 행동거지도 훌륭하다 등등.

 이제부터는 라캉의 해석이다.

 라캉에 따르면,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의 연정이 전이성임을 본인에게 알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알키비아데스가 추구했던 빛나는 대상 라캉은 그것을 아갈마라고 부른다 은 사실은 소크라테스 안에는 없다. 알키비아데스는 사실은 시인인 꽃미남 아가톤을 사랑했으며, 아가톤을 칭송하는 소크라테스의 말 속에서, 자신의 이상상(아갈마)을 찾아낸 것이다.

 아갈마에의 욕망을 고백하는 것은 사실상 욕망의 주체인 알키비아데스 자신의 주체가 품고 있는 분열의 소재(所在)를 밝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 이 에피소드에서 알키비아데스의 욕망은 소크라테스 자신에게는 향해지지 않는다. 알키비아데스가 찾았던 것,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앎에의 욕망자체이다. ,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욕망을 욕망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전이현상의 한 가지 본질이 있다.

 이 에피소드를 가라타니가 지적하는 소크라테스의 수수께끼와 연결시켜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본서에서의 알키비아데스는 전형적인 데마고그이자 제국주의적이 된 아테네 사회의 타락의 상징으로서 위치지어진다. 공인이 아니라 사인으로서 정의를 위해 싸운다는 소크라테스의 자세로부터는, 아테네의 배신자이기도 한 알키비아데스의 구애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는 데마고그, 즉 공인으로서 부정의를 저지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동기수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라캉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 경우, “아갈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여기서 앎에의 욕망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아갈마는 과연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같은 것과는 어떻게 따를까?

 전이 현상의 해석은, 어떤 의미, 정신분석의 근간과 관련된 영역인 만큼, 이 질문이 지닌 의미는 중요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이 알키비아데스의 욕망인지 아닌지는 제쳐두더라도, ‘아갈마는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반응이나 질량을 동반한 물질 같은 존재와는 다르다. 그것은 가령 시니피앙, 혹은 관계가 존재한다면 동등한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주의하자. 여기서 내가 말하는 관계, 물질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개인 대 개인의 전이관계이다.

 그래서 재차 강조돼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에게서의 앎에의 욕망의 역동성이다. 항상 계속해서 사유하는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아갈마도 정물과도 같은 실체일 수 없다. 그것은 바로 파르메니데스가 시원물질로서 꼽은 불꽃 같은 존재이다.

 라캉의 생각을 간략하게 말한다면, 이런 전이가 가능해지는 것은,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가, 둘 모두 상징계의 네트워크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둘 다 시니피앙이라는 매질 속의 존재이며, 그 속에서 정보가 아닌 욕망의 전달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아갈마의 전달 또한 물체를 주고받는 이미지일 수는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욕망의 역동성이 발진(発振)하는 파동에, 문자 그대로 공명·공진하는 형태로, 전이가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 나는 아갈마와 다이몬의 평행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종의 환청으로서,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말리려고 하는 «다이몬의 목소리». 알키비아데스와의 관계를 거부한다는 판단에 있어서도, 다이몬의 목소리가 영향을 줬다고 한다면, 양자는 소크라테스의 행동 원리에 있어서, 액셀과 브레이크 같은 기능을 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원주의 쪽으로

 헌데, 본서에서 내가 특히 흥미 깊게 느꼈던 것은 엠페도클레스의 다원론이다.

 그는 만물의 근원으로 네 종류의 뿌리를 생각했다. , “, 공기, , 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오니아 자연철학에 빚지고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하나의 시원물질로부터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던 이오니아파와는 다르며, 네 개의 뿌리가 독립적이며 대등하다고 했다. 다만 하나의 시원 물질로 세계의 다양성을 환원해 버리려 하는 발상은, 공허로부터의 세계의 생성이라는 피타고라스적 이중세계의 발상으로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엠페도클레스가 4원소보다도 작은 원자를 상정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자론으로 향하지 않았다. 왜일까? 물질은 분자 수준, 원자 수준에서 각각 다른 성질을 지닌다. 이 특징은 생체가 되면 더욱 현저하다. 뇌내물질, 신경세포, 신경조직, 대뇌나 소뇌 같은 장기의 각각의 수준에서 활동원리는 완전히 다르다.

 사회철학의 영역에서도, 개인을 중시하는 원자론, 전체를 중시하는 전체론 혹은 개체와 전체의 변증법을 중시하는 헤겔 등,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는데, 가라타니는 이것들에 대해, 네 가지 교환양식의 결합과 분리에 있어서 사회사를 본다고 하는, 바로 다원적 시각을 주장하고 있다.

내가 놀랐던 것은 바로 나의 본업인 정신의학에서도, 이런 다원주의적 시각이 제창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정신의학에서는 아직도 뇌와 마음이라는 이중세계론이 주류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뇌와 마음을 대비시킨 경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가상이라고 간주되고, 물질로서의 뇌가 참된 세계라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아직도 정신의학에서는 복수의 이론적 패러다임이 서로 대립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특히 뿌리 깊은 대립은, 생물학주의와 심리주의 사이에 있다고 간주된다. 둘 다 하나의 입장에서, 정신장애가 수립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타프츠의료센터(タフツ医療センター)의 정신과의사인 나시아 가미ナシア・ガミー는 야스퍼스의 재평가를 통해 정신의학에서의 다원주의를 주장한다(현대정신의학원론, みすず書房). 다원주의의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의학자는 생물학과 심리학의 결합방법으로서, 과거에는 세 가지의 사고방식을 해 왔다고 한다. 각각 교조주의’, ‘절충주의’, ‘통합주의이다.

 교조주의는, 가장 단순한 환원론이다. 심리학이나 생물학의 단독적인 올바름만을 확신하고, 정신장애는 모조리 생물학적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입장에 대한 고집이 이것에 해당된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은 줄어드는 것 같다.

 가미가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절충주의이다.

 근래에는 bio-psycho-social 모델로서, 많은 정신과의사가 이런 사고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언뜻 보면 가장 온건하고 무난하게 보이는 이 입장은 어떤 이론과도 중첩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도입하였기 때문에, 당분간은 아니지만 유용성이 낮은 것이 되기 쉽다.

 통합주의에 있어서도 심적 사태를 뇌의 거시적 수준의 구조기능적 병태에 대응시키려고 하지만, 세포 내 분자 기구와 뇌의 거시적 수준의 구조적 혹은 기능적 관계는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과 뇌의 관계가 너무 희박해지지 않도록, 수준 사이를 이동할 때에는 관련이 깊은 곳을 추적하면서, 마음과 뇌의 관계를 가급적 통합적으로 기술하려는 입장이다.

 가미가 주장하는 다원주의는 이상의 모든 것과도 다르다. 다원주의자는 개별 문제의 탐구에 있어서 복수의 방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방법을 선택한다. 방법의 조합이 아니라, 그때마다 단일한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울증의 병태 이해치료 방침 선택에는 생물학적정신약리학적 수법이 심리사회적인 접근법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퍼스널리티 장애의 경우는 심리학적 접근법이 생물학적 접근법보다 뛰어나다. 모든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생물심리사회의 모든 측면이 같은 정도로 중요하다고 하는 절충주의적 주장과는 크게 다른 입장이다.

 다원주의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나 자신은 최초의 저작 문맥병(文脈病)(青土社) 이후, 이런 입장을 고수했다. 그것은 인간의 주체에 관해 “PS : 정신분석적 주체“OS : 기질적 주체라는 두 개의 측면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실체가 없다. 이른바 위상학적인 구분이지 서술을 할 때에는 상호배제적, 접붙이기식의 채택은 허용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런 입장을 유지하지 않으면 사회적 은둔자문제 등에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생물학적 측면(발달 장애 등), 심리적 측면(정신요법에서), 혹은 사회학적 측면(사회적 배제의 맥락에서)이 있으며, 이것들은 안이한 통합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중성의 극복을 위해 다원주의가 필요해질 수 있다는 것. 여기서 엠페도클레스의 회귀를 보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만일 이런 추론이 맞다면, 정신의학도 이오니아적인 것의 회복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면, 가미도 가라타니와 마찬가지로, 다윈의 사상을 중시하고 있는데, 이 일치도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본고의 맺음말을 대신해,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해둔다.

 가라타니가 묘사하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묘사한 인물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그는 철인왕도 아니고 이데아론의 체현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다원론의 실천자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죽음에 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무가 되는가, 혼이 이동하는가, 어느 쪽이든 내기를 거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혼의 불멸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 죽음에 임해서는 법의 논리를 따른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가장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할 때 전대미문, 혹은 전무후무한 수법을 썼다. 그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고, 대신 시민 개개인과 문답을 했다. 그의 대화 세션이 그의 사상이었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달리 말하면, 시민의 수마다 원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른바 궁극의 다원주의이다.

 소크라테스의 다원주의에서 이소노미아의 이상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이소아노미아의 또 다른 측면, ‘자유와 평등의 일치와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개인과 개인의 연결은 개인, 양자관계, 가족, 커뮤니티, 네이션, 국가와 같은 단계를 거쳐 확장되고 있다. 다원주의자라면, 연결의 규모나 복잡성의 계층마다 상이한 위상의 가치와 진리를 발견할 것이다.

 반대로 이중세계론자는 모든 단계를 가상으로 간주하고 진정한 세계를 고집하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일관성 있는 정의를 부여하기 어려워진다. 가족의 이해관계와 커뮤니티의 이해관계의 대립 같은 모순을 진정한 세계는 해소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원주의에서는 모든 계층에 있어서 추구되어야 할 가치관이 자유일 것이다. 각 계층에서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평등을 가져다준다.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다원주의와 이소노미아의 이상을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는 플라톤의 저작을 믿지 않는 것이 확실한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것은 이소노미아의 원리와 세부 사항에 대해서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답답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적어도 본서 철학의 기원에는 수많은 조각[piece, 단편]이 파묻혀 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수께끼의 중간에서 보일랑 말랑하기 때문에 이소노미아는 훨씬 더 리얼한 질문으로서 우리 앞에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이토 타마키(斎藤環)

1961년 생. 정신과 의사, 평론가. 저작에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戦闘美少女精神分析)(ちくま文庫), 관계하는 여 소유하는 남(関係する女 所有する)(講談社現代新書), 은둔형 외톨이는 왜 다스리는? : 정신분석적 접근법(ひきこもりはなぜのか?──精神分析的アプローチ(ちくま文庫), 세계가 토요일 밤의 꿈이라면 : 양키와 정신분석(世界土曜なら──ヤンキーと精神分析)(角川書店), 원자력발전 의존의 정신구조 : 일본인은 왜 원자력을 좋아하는(原発依存精神構造──日本人はなぜ原子力なのか)(新潮社)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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