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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이스모, 주체성, 계급구성 (1)

by 상겔스 2017.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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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이스모, 주체성[주관성], 계급구성 (제1부)

Intervista a Gigi Roggero. Operaismo, soggettività e composizione di classe (1) 

히로세 준(廣瀬 純)


* 일본어 : 여기를 클릭


ジジ・ロッジェーロ

지지 로제로(Gigi Roggero)1973년 생으로, 볼로냐에 살고 있는 연구자. 주택과 학교공간의 점거 등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 볼로냐대학학생을 중심으로 한 그룹 Hobo의 멤버, 정치와 이론에 관한 인터넷 사이트 Commonware를 운영. 공저로 오페라이스모를 역사적이고 이론적으로 논한 Futuro anteriore. Dai «Quaderni rossi» ai movimenti globali: ricchezze e limiti dell’operaismo italiano (2002), 오페라이스타들에 대한 인터뷰집인 Gli operaisti (2005) (모두 DeriveApprodi 간행). 단독저서로 노동의 인지화의 관점에서 유럽 및 미국에서의 대학의 변용을 논한 La produzione del sapere vivo. Crisi dell’università e trasformazione del lavoro tra le due sponde dell’Atlantico (Ombre Corte, 2009), 이 책의 영어판 The Production of Living Knowledge. The Crisis of the University and Transformation of Labor in Europe and North America (Temple University Press, 2011), 커먼을 둘러싼 현대적 물음 속에서 레닌을 재독해하는 La misteriosa curva della retta di Lenin. Per una critica dello sviluppo del capitalismo oltre i «beni comuni» (La Casa Usher, 2010)


이하는 2016325일에, 볼로냐에서 로제로 등이 공동 운영하는 인포숍인 Gateway에서 이탈리아어로 한 인터뷰의 1부이다. 일본어 번역은 인터뷰어인 히로세 준이 맡았다.  [히로세 준의 저서 중 국역된 것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김경원 옮김, 바다출판사, 2012년)이 있다.]


Elogio della militanza

이번의 인터뷰에서는 네가 올해 1월 발표한 신작 밀리탄차를 치켜세우다 : 주체성과 계급구성에 관한 노트(Elogio della militanza. Note su soggettività e composizione di classe)(DeriveApprodi, 2016)에 대해 얘기를 듣고 싶다. 제목에는 세 개의 키워드가 포함되어 있다. ‘밀리탄차[투사]’, ‘계급구성’, 그리고 주관성[주체성]’. 오늘, 이런 용어들로 정치를 논할 필요가 있다면, 그 필요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고는 항상 대립에서 생겨난다. 사고한다는 것은 무언가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고 너는 쓰고 있다. 이번 책은 무엇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가? 위의 세 가지 키워드에 관한 설명도 곁들이면서 이 점에 관해 얘기해주면 좋겠다


이번 책의 부제인 주관성[주체성]과 계급구성에 관한 노트는 내가 제안한 것이지만, 주제목인 밀리탄차를 치켜세우다는 출판사의 제안으로, 책의 내용을 날카롭게 딱 들어맞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밀리턴트에 의해 쓰여지고, 밀리턴트에게 읽혀져야 할 것으로서 구상되었기 때문이다

부제에 포함된 개념인 주관성[주체성]’, ‘계급구성에 관해 우선 설명하고 싶다. ‘계급구성이라는 개념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전개된 정치운동인 오페라이스모에 의해 창출된 것이다. 더 엄밀하게는 로마노 알콰티(Romano Alquati)가 창조했다고 말해도 좋다. 알콰티는 오페라이스모의 중심인물 중 한 명으로, 토리노의 피아트사와 올리베티사의 공장에서 노동자들과의 ‘콘리체르카’(공동조사)를 실천하는 가운데 이 개념을 창출했다. 그가 당시 콰데르니 로씨클라세 오페라이오같은 잡지에 기고한 텍스트는 70년대에 들어서부터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된다(Sulla Fiat e altri scritti, Feltrinelli, 1975). 알콰티의 작업을 무시하고 오페라이스모를 얘기할 수는 없다

계급구성개념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는 맑스의 개념을 참조한 것이다. 맑스에게서 문제가 된 것은 고정자본과 변동자본[가변자본] 사이의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오페라이스모가 문제 삼은 관계를 계급의 기술적 구성정치적 구성사이의 그것이었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계급의 기술적 구성이란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절합, 노동자와 기계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며, 정치적 구성이란 경향적으로 자율적인 정치주체로서의 노동자의 자기형성을 가리킨다

기술적 구성과 정치적 구성에 더해 알콰티는 재구성이라는 세 번째 요소를 중시했다. ‘재구성이란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절합의 그 절단을 가리키며, 새로운 자율적 주체의 형성을 가리킨다. 재구성은 이미 있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 자본에 의해 파괴된 계급의 그 본래적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성 상태에 있는 역능이 하나의 형태를 이룬다는 것이다. 계급의 정치적 구성은 적대적 혁명 주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히, 계급의 정치적 표현으로서, 어떤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양의성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페라이스모는 소외 없는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자는 휴머니즘도, ‘노동자로서의 노동자같은 것에 대한 맹신도 아니었다. 오페라이스타들은 대중 노동자’(테일러주의의 생산 라인에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라고 이들이 부른 특정한 계급구성을 식별identification한 다음, 단순히 자본에 맞설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맞서는 새로운 주체의 주체의 구축의 그 가능성을 문제 삼았다. 오페라이스타들에게서 노동자계급은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의 조건이며, 그래서 파괴해야 할 대상이었다. 문제는 계급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것이었다. 오페라이스모에서는 따라서 노동도 또한 찬양의 대상이 아니다. 오페라이스모에서는 소외외부성으로 고쳐 읽혀지고, 노동의 거부가 출발점에 자리잡게 됐다

계급구성개념이 중요했던 것은 계급의식이라는 맑스주의의 발상과 결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계급의식이라는 형이상학적이고 이념주의적인 이 실체는 맑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이며,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의 객관적이고 결정론적인 이행에 있어서 매개의 역할을 맡는다고 자리매김 됐다. 기술적 구성/정치적 구성은 즉자적 계급/대자적 계급을 달리 말한 것이 전혀 아니다. 내 책에서는 계급의식개념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면서도 이 개념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루카치를 다루고, 오페라이스모와 대치시켜 논했다. 1950년대의 이탈리아에서는 혁명투쟁과 사회변혁은 더 이상 노동자계급을 통해서는 이뤄질 수 없다, 노동자계급은 시스템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었다. 54년에 피아트의 공장에서 열린 내부선거에서는 CGIL(이탈리아노동총동맹) 산하의, 따라서 공산당 산하의 FIOM(철강노동직원조합)이 처음으로 패배했으며, 이것이 공산당에게 방향전환을 촉구하게 됐다. 공장에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며 공산당은 중간층으로 향하게 됐다. 이탈리아 국외에서도,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서양의 노동자계급이 기계 내부에 완전히 흡수되고, 더 이상 소비하는 것 말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혁명적 절단은 불가능하다고 외치게 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소위 3세계주의가 이탈리아에서도 출현하는데, 거기서 문제가 됐던 것은 제3세계라고 간주된 나라들에서의 실제의 투쟁이라기보다도, 혁명에 대한 욕망을 외부에 투영한다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 있는 역능이 아니라, 저편에서 상상되고 공상된 역능이었다.

오페라이스타들이 공장에서 찾아냈던 것은 따라서 의식적 주체, 자각한 주체가 아니었다. 맑스주의의 전통에서는 이 의식 혹은 자각에 의해 정당이나 노동조합과 노동자가 연결된다고 간주됐으나, 이런 의식 혹은 자각이 상실되고, 바로 그렇기에 정당은 노동자 이외의 것으로 향하게 됐다. 오페라이스타들이 주목한 것은 공장에 온 새로운 주체, 이탈리아 남부에서 온 이민이었다. 이민은 공산당이나 노조와의 관계 속에서 십 수년의 경험을 이미 쌓은 기존의 장이노동자와는 꽤 다른 문화를 그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로, 어용조합에 투표하기도 하는 기회주의자, 파업도 기존의 노동운동도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 바로 무자각적인 주체였다. 그러나 오페라이스타들은 그런 새로운 노동자의 출현에 관심을 갖고, 그들과의 콘리체르카[공동조사연구]를 조직하고, 그들이 왜 파업이나 노조운동에 참여하지 않는가를 이해하려 했다. 이 활동을 통해 오페라이스타들은 새로운 노동자들이 파업 등 무의미하며, 노동운동의 정체성의 재확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렇기에 더욱 구체적이고 물질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려는 어용노조에 투표하고, 최대한 적게 일하고, 최대한 많은 임금을 얻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오페라이스모가 등장한 시기의 이탈리아에서는 따라서 두 종류의 노동자가 있었다. 한편에서는 패배를 느끼는 노동자들, 즉 공산당이나 노조에 속해 있는 기존의 노동자계급이 있으며, 노동을 자랑했던 이런 장인노동자들은 생산 라인의 도입에 이해 공장이 자동화되고 기계화되고 장인노동 자체가 해체되는 가운데, 그 자랑의 근거를 더 이상 찾아내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주체, 무자각적인 주체가 있으며, 이들은 노동운동에 대해, 또한 노동문화 혹은 공장문화에 대해 외부성을 이루며, 이 외부성을 거부로서 표현했다.

19627, 예년 이맘 때 열리는 노사협상 때, UIL(이탈리아노동연합)이 다른 노조와의 협조를 깨고 단독으로 피아트와 합의한 것을 계기로, UIL의 본부가 있는 토리노의 헌법광장을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경찰관과 충돌, 다수의 체포자가 나오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영자가 폭도를 고용한 것 아니냐고 그 당시는 천연덕스럽게 말해졌는데, 그 이유는 이 광장 점거가 공산당의 지도 아래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좌파의 사고방식에 있어서는, 의사결정은 모두 공산당에 맡겨져야 하며, 노동자계급이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공산당이 결정하는 것이며, 노동자계급의 자율적 발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겨졌다. 헌법광장을 가득 메운 사흘 동안 크게 활약한 사람들에 대해 경찰이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그들은 노동자치고는 너무 젊다, 그들의 복장이나 행동양식을 보더라도 그들은 노동자일 수 없다고 여겨졌다. 흥미로운 것은 보고서가 얘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실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면, 보고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바로 계급구성이 변형됐다는 것이었다. 계급의 기술적 구성도 정치적 구성도 변형되고 있었다. 테일러 시스템이 도입된 공장에서 기계는 노동력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직화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의 새로운 주관성[주체성]을 산출하기도 했다. 경찰의 보고서는 이런 변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행동양식이 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행동양식을 알콰티는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자발성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화라고 불렀다. 요컨대 자율성인 것이다.

내 책의 부제에 포함된 또 다른 개념인 주관성[주체성]’ 개념은 계급구성이라는 문제설정의 그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다. ‘주관성[주체성]’은 맑스주의가 생각하는 역사에는 등장할 수 없는 개념이다. 맑스주의에서 주관성[주체성]은 계급의식의 발전의 그 단계에 따라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며, 계급의식의 발전 그 자체는 자본주의의 발전의 그 단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오페라이스타들이 주목한 것은 새로운 노동자의 행동양식이며, 그 가능성이었다. ‘대중노동자라고 명명된 이 새로운 노동자는 당시, ()으로서 다수파를 이루고 있던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의 위계질서 속에서 중심적 존재였던 것도 아니다. 대중노동자의 중심성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새로운 행동양식이 잠재적으로 전복적인 것이며, 경영자들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60년대의 투쟁은 실제로 바로 그런 것의 실현으로, 이 투쟁 사이클은 대중노동자라는 주체 자신이 지양될 때까지 이어졌다. 지양도 투쟁의 한복판에서 이뤄졌다. 투쟁은 결국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존재 자체에 맞서는 투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투쟁은 거부이지만, 거부의 대상은 자본 아래서의 노동뿐 아니라, 노동력으로서의 주체 자신이기도 하다. 오페라이스모는 결국 투쟁의 선행성을 부르짖었다. 투쟁이 우선 있으며, 투쟁이 발전과정을 결정한다. 투쟁이 있기에 비로소 그것에 맞서는 자본의 반응이 있으며, 자본주의 시스템의 재편성(기술적 재편성, 생산노동의 재편성)이 이뤄진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60년대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 않으며,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도 또한 그렇게 오래가지 않으며, 역사는 더욱 앞으로 나아간다는 셈이다.

왜 이런 개념을 오늘날 다시 새삼 거론할 필요가 있는가? 오늘날에는 포스트오페라이스모라는 것이 빈번하게 회자된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시계열적으로 봐서 뭔가 뒤에 왔다는 이유 때문에 포스트~’라고 알려진 모든 표현에 고루 내포된 애매함과 수동성이 역시 뒤따른다. 앵글로색슨 세계에서 새로운 대학의 모델로서 제창되고 있는 소위 글로벌 유니버시티의 정의로서도 포스트오페라이스모는 말해지고 있지만, 이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포스트오페라이스모라는 표현의 사용에는 오페라이스모의 이론을 갈등이나 계급구성, 혁명적 주관성[주체성] 같은 것으로부터 분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나 계급구성, 혁명적 주관성[주체성]으로부터 분리된 오페라이스모는 더 이상 오페라이스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앵글로색슨계를 중심으로 학자들이 자신의 업적 형성을 위해 오늘날 이탈리아 이론의 이름 아래 시도하고 있는 오페라이스모 이론의 포획은 바로 이 분리에 존재한다. 오페라이스모 이론의 포획은 바로 본원적 축적 자체, 공유의 지식의 에워싸기, 엔클로저이다. “이 지식은 나의 것이다, 만일 사용하고 싶으면 내게 임대비용을 지불하라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다.

 앵글로색슨 세계에서 창출된 포스트오페라이스모라는 말을 여기 이탈리아에서도 우리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알면서도 80년대 이후의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 편의상 사용하게 됐다. 이탈리아에서는 70년대의 투쟁의 패배 후에 출현한 새로운 노동과정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거기서 소위 포스트포드주의론이 형성되며, ‘비물질적 노동’, ‘인지적 노동이라는 새로운 노동개념이 창출됐다. 이것은 올바른 인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기에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파가 중심이 된 단일사상론이 전개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의 도래에 의해 세계는 더 이상 그 어떤 여백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며,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하는 역사의 종언에 진정 이르렀다는 논의이다. “포스트포드주의론은 이 논의에 맞서, 역사는 결코 종언하지 않는다, 실제로 새로운 노동형태나 생산형태가 출현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올바른 전제에서 출발하면서도 포스트포드주의론은 계급구성의 문제를 재고하려 하지 않았던, 주관성[주체성]의 문제에 씨름하려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계급구성(기술적 구성과 정치적 구성 사이의 관계)5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그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 테일러 시스템형 공장과 포드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그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포스트포드주의론의 최대 문제는 기술적 구성이 곧바로 정치적 구성으로 전화하는 것처럼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는 점에 있다. 앞서 오페라이스타들이 대중노동자를 새로운 형상으로 규정했을 때, 대중노동자는 자본주의의 위계에 있어서 중심적 형상을 이루었던 게 아니며, 대중노동자의 중심성은 그 외재성이 전복적 행동양식의 잠재성[역량]에 연결되는 것에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기술적 구성과 정치적 구성이 거울상의 관계를 이루는 일은 결코 없다. 그것들을 거울상으로서 파악하는 사고방식은 현실 사회주의속에서 창출된 것이다. 1930년대의 소련에서는 공장에서의 세포 리더는 노동의 조직화 속에서 더 기술적 능력이 뛰어난 노동자가 맡은 보직이었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오페라이스모에서는 주관성[주체성]이 문제로 여겨지고, 주관성[주체성]이야말로 기술적 구성/정치적 구성의 거울상 관계를 파괴한다고 간주됐다. , 주관성[주체성]이 정치적 구성이 취할 수 있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며, 주관성[주체성]이야말로 기술적 구성의 절단의 가능성을 산출하고 재구성으로의 길을 개척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비물질적 노동론에서는 비물질적 노동자가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위계질서에 있어서 중심을 이룬다고 간주되는 동시에 정치적 구성에 있어서도 중심을 이룬다고 간주되어 버린다. 이것은 잘못이다. 인지노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노동의 인지화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의 인지화란 자본 축적에 관해서도, 산 노동의 구성에 관해서도 지식이 그 위계질서의 형성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계급구성을 지식노동자혹은 크리에이티브 클라스(창조적 계급)” 등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부문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전체에 있어서 문제로 삼는 것이 가능해진다. 반대로 비물질적 노동이라 불리는 것(이 표현 자체가 원해 잘못이다. 인지노동은 비물질적이 아니라 산 노동에 지식이 구현되는 것이며, 노동은 항상 물질적인 것에 그친다)을 계급의 기술적 구성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이 중심성을 그대로 고스란히 정치적 구성의 그것으로 번역해 버리는 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물질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주관성[주체성]이 무시된다. 계급투쟁이 없으면 계급도 없다는 사고방식, 주체가 형성되는 것은 항상 투쟁 또는 대립을 통해서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포기되고 있다. 여기서 누락된 것은 새로운 노동에 있어서의 그 주관성[주체성]의 분석이다.

 

 주관성[주체성]의 분석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아래에서는 주관성[주체성]은 그 자체로 포지티브한 어떤 것, 아름다운 어떤 것, 자유로운 어떤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는데, 이는 어리석은 주장이다. 주관성[주체성]은 그것으로서는 포지티브한 것도 네거티브한 것도 아니며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주관성[주체성]이란 하나의 전쟁터인 것이며, 갈등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가 형성되는 곳이다. 적대와 갈등,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주관성[주체성]의 문제에 씨름할 경우, 주관성[주체성]이 그 대부분에 있어서 자본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는 것, 자본의 이 주관성[주체성] 형성을 절단하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된다. ‘비물질적 노동혹은 인지노동같은 논의에서는 협동의 중심성이라는 것이 동시에 문제가 되는데, 그 협동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협동인가? 자본을 위한 협동임에 틀림없다. 협동에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는 자본에 의한 주관성[주체성] 형성의 그 절단을 문제 삼아야만 한다. ‘대항 주관성[주체성]’의 형성 과정을 문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포스트오페라이스모는 기술적 구성/정치적 구성의 관계도 재구성도 문제 삼지 않고, 주관성[주체성]에 대해서도 그것을 대항 주관성[주체성] 형성의 관점에서부터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논의가 추상성 차원에 머물며, 사회적 과정의 물질성이 파악되지 않은 채 남아 버린다.

 내 책은 하나의 이론 사이클로서의 이상과 같은 포스트오페라이스모론의 그 이론적 유효 기간의 만료를 선언하는 것이다. 오페라이스타들이 맑스주의에 맞서서 맑스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오페라이스모에 맞선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러나 오페라이스모에서 재출발하고, 포스트오페라이스모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 , 계급 구성과 주관성[주체성]이라는 문제에 다시 대처한다는 방향이다. 그 때는 또한 동시에 정치 영역의 자율성이라는 더 문제가 많은 노선과도 싸워야 한다. 제도적 과정을 위에서부터파악하려고 하는 정치 영역의 자율성론은 오페라이스모가 항상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을 잃어버리고,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 주관[주체]적 행동양식의 표현의 그 양의성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의 경향을 이해한다는 작업을 재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무엇에 이견을 제기하는가? 무엇에 맞서서 쓰고 있는가? 말할 것 없이 많은 것에 맞서서 쓰고 있다. 무엇보다 우선 자본에 맞선다. 적대적 주관성[주체성], 밀리턴트적 주관성[주체성]은 항상 자본에 맞서서 생기는 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적대성도 이제 없다고 선전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이른바 약한 사고또한 이 책의 적이다. 우리들이 밀리턴트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 증오를 품고 있기 때문이며, 이 증오를 출발점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생산을 향해 몸을 던지고, 이 세계를 파괴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항상 거부이다. 내가 지금 처한 조건을 거부하고 그것을 변혁하고 전복하는 것으로, 그리고 새로운 조건을 구축하는 것으로 향한다. 내 책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또한 포스트오페라이스모의 미규정적인 추상성에 대해서이기도 하다. 포스트오페라이스모는 오늘날 기존 좌파의 싱크 탱크로 참여하면서 다양한 제안을 하게 되었다. 60년대에 노동자가 그 투쟁에서 행한 것은 제안따위가 절대로 아니다. 그들이 한 것은 거부이다. 노동을 거부하고 자신의 조건을 거부했다. “최대한 적게 일하고 최대한 많은 임금을 받는다제안따위가 전혀 아니다. 경영자가 10을 주면 100을 요구하고 100을 주면 1000을 요구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소득(기본소득)’에 관한 오늘날의 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포스트오페라이스모에는 자본가들에게 시민소득[기본소득]은 그들에게도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만약 자본가들에 유리하다면 우리에게 유리할 수 없다. 여기서 무시되고 있는 것은 주관[주체]적 행동양식이다. 시민소득[기본소득]에서는 누가 주체인가? 내게 관심사는 계급 주체가 시민소득[기본소득]을 얼마나 자신의 것으로 하냐는 것이지 "제안"으로서의 시민소득[기본소득] 따위가 아니다. 시민소득[기본소득]"제안"이 되어버린 순간부터 시민소득[기본소득]이 혁명적 절단의 도구가 되기 위한 공간은 닫힌다. 힘관계가 상실된다. 부의 재분배는 합리성 같은 용어(terms)로는 설명할 수 없다. 주체들이 자본가를 위협한다는 것이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위협 받지도 않았는데 왜 자본가들이 부를 재분배하거나 하는 일을 하겠는가? 구축을 통해야 비로소 부의 분배가 이루어진다. ‘제안의 차원에 자리잡는 한, 그러한 힘관계의 차원, 투쟁의 선행성은 상실[간과]된 채로 머물 수밖에 없다. 이번 책은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군주들의 생산을 새로운 맥락 속에 다시 두는 것이다. 내 책 자체가 군주들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이루는 것은 바로 밀리턴트이며, 바로 이들이 콘리체르카(conricerca, 공동조사)를 통해서 계급의 기술적 구성이나 정치적 구성, 주관성[주체성]과 대항 주관성[주체성]이라는 문제를 실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밀리턴시’, ‘밀리턴트라는 개념을 그 강한 의미에서 부활시켜야 한다. ‘밀리턴트라는 말은 앵글로색슨계의 액티비스트라는 말이 유행하는 가운데 잊혀졌다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입에 담는 것이 부끄러운 것으로 되어 버렸다. 오늘날 밀리턴트는 트로츠키주의와 맑스-레닌주의라는 낡은 구조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반면, ‘액티비스트는 더 현대적인 뭔가로 이해되고 있다. 액티비스트는 원자력발전과 같은 하나의 문제에 몰두하는 사람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액티비스트 자신도 액티비스트이기를 그만둔다. 이에 반해 밀리턴트란 혁명을 수행하려는 사람, 적을 파괴하려는 사람이며, ‘볼런티어등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밀리턴트는 계급 구성에서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않고 계급 구성을 만들어 낸다. 밀리턴트는 이른바 성 바울 같은 형상이며 이 세계에 살면서 이 세계에 속하지 않고, 계급 구성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그 내부에서 계급 구성에 항거한다. 밀리턴트는 정의상, 전면적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이다. 밀리턴트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재고하는 것은 밀리턴트임을 출발점으로 삼아 물질성을 재고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상승국면과 하강국면을 반복하는 일종의 순환 기질(조울)에 흔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상태와 울()상태를 반복하는 금융 시장의 순환 기질이지만, 똑같은 순환 기질은 밀리턴트의 세계에서도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투쟁의 하강 국면, 투쟁이 부재한 국면이 다른 단계보다 중요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어떤 국면보다 훨씬 중요하다. 투쟁이 존재할 때에는 밀리턴트는 그것보다 늦게 도래하지만, 투쟁이 부재할 때는 어떻게 하면 투쟁이 출현하는지를 이해해야 하며, 거기에 밀리턴트의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말에 한 인터뷰에서 로마노 알콰티는 62년 헌법 광장에서의 일에 대해서 당신들 오페라이스타는 투쟁의 그 같은 발발을 예측했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우리는 예상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직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바로 여기에 계급투쟁과 밀리턴트의 존재에 대한 진리의 모든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객관적이고 결정론적인 계급의식이라는 발상은 여기에는 추호도 없다. 당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다음의 계급투쟁을 결정한다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이 여기에는 추호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또 자발성주의적인 발상도 여기에는 없다. 밀리턴트가 거는 것은 가능성, 포텐셜리티가 있을 장소이며, 거기서 밀리턴트는 아직 포텐셜리티밖에 없는 것을 읽는 것이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읽는 것은 아니다. 밀리턴트는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전환할 가능성 있는 것으로 간다. 이 능력을 우리는 익혀야 한다. 특히, 투쟁이 출현하지 않은 국면에서 밀리턴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이 능력이다.

 

(제2부에 계속 : 일본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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