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6일, 안토니오 네그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월간 멀티튜드 2021년 11월호의 내용을 순차적으로 공개합니다.
/ 목차/
1.다중의 현재 : 원자력, 반내셔널리즘, 힘의 계기 007 / 안토니오 네그리
2. <공통체>에관해 021 / 마이클 하트와 레오날드 슈왈츠
3.일본의 다중:돌봄에 관한 실천 045 / 우에노 치즈코
4. “우리는 모두 네그리주의자이다” 혹은 분리의 논리의 행방 053 / 이치다 요시히코
5. 『공통체』를 둘러싼 서신교환 069 /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데이비드 하비
6. ‘여자’를 배제하지 않는 ‘공(共)’의 가능성 101 / 이다 구미코
7.네그리/하트의 제도론의 한계와 가능성: 〈공〉의 에콜로지를 향해 115 / 히로세 고지
8.네그리+아트 135 / 오카다 아츠시
9.분해의 철학 151 / 후지하라 타츠시
10. Multitude/Solitude :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네그리, 포콕, 알튀세르 173 / 오지 켄다
* 예전에 발행한 적이 있는 글이다. 목차 하단에 예전 글을 html로 읽을 수 있다.
11.대중의 정념의향방 :안토니오네그리와에티엔발리바르의스피노자론 201 / 오다 유스케
12.거기에 함께존재하는 것 :포스트미디어시대의정치적정서와일반적감정 223 / 미즈시마 카즈노리
13.탈주의 기예:포스트미디어의지평으로 247 / 시미즈 토모코
14.가난과 사랑의 리얼리즘 :네그리-하트의 스피노자해석에 대한 일고찰 263 / 가아무라 코우
15.제국과 테크노사이언스 281 / 츠카하라 토고
16.비대칭화된 네트워크에 균열을 넣다 301 / 오다마 코토
17.분노인가 치욕인가 :맑스주의정치철학을위하여 321 / 히로세 준
18.비물질적 노동 :안토니오 네그리와 앙드레 고르츠의 사상의 수렴점과 분기점 355 / 히라타 슈우
19.타이탄적 개념과네 명의 혼잣말 377 / 마뉴엘 양
Multitude/Solitude
: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네그리, 포콕, 알튀세르
오우지 켄다(王寺賢太, 사회사상사·프랑스문학)
『현대사상』, 2013년 7월 특집호, 129-143頁(각주는 생략했다)
“국가를 세우려면 혼자가 아니고서는 안 된다.”
― 마키아벨리
“공산주의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 알튀세르
시대착오적인 사상사가 : 『구성적 권력』 vs 『마키아벨리적 모멘트』
『구성적 권력 : 근대성의 대안들에 관한 논고(Le pouvoir constituant : Essai sur les alternatives de la modernité)』(1992)의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뿌리 깊게 시대착오적인 사상가이다. 소련 붕괴의 이듬해, 『역사의 종언』이 운운되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의 한복판에서, 마키아벨리에서 레닌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정치사상사를 다시 말하고, 그것을 결코 끝나지 않는 혁명 사상의 계보로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지하듯이, 네그리는 이 책에서 “구성된 권력”에 대해 “구성하는 권력” 편에 서서, 근대사에는 “구성하는 권력”과 그 주체인 “다중”이 편재한다고 주장한다. 네그리가 혁명을 어쩔 수 없이 수렴収束시키는 인과의 계열에 역공을 가하면서, 되풀이하여 혁명의 사전(事前)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구성적 권력』의 사상사가에게 특유한 시대착오가 있다. 종종 과감한 단정이나 무리가 추론에 의해 이뤄지는 이 시대착오를 파악하고, 네그리의 작업이 지닌 결점을 들춰내는 일은 쉽다. 다만 그 때에는 역사가가 사후로부터, 객관적으로 역사를 말하려고 할수록 ‘역사’의, 혹은 ‘시간’의 어떤 차원이 간과된다는 것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그리의 시대착오는 바로 그런 차원, 인간 주체가 그 안에서 존재하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역사’와 ‘시간’의 창조적인 차원을 탈환하기 위한 방법이다. 1990년대,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이었던 『구성적 권력』의 사상사가가, 2000년대에 반-전지구화 운동의 사상가로 일약 ‘시대의 인물’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구성적 권력』은 『맑스를 넘어선 맑스』(1978년)와 스피노자론인 『야생의 아노말리』(1981년)를 이어받아 네그리 개인의 작업의 집대성을 이루며, 2000년대에 연달아 간행된 마이클 하트와의 공저 『제국』 3부작의 현대정치경제론을 예고하는 전회점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서 중심에 놓인 ‘구성적 권력’이나 ‘다중’이라는 개념이 스피노자에 관한 정치적 독해로부터 도출됐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구성적 권력』에서 『제국』 이후의 연결을 나타내는 것은 네그리/하트의 가장 논쟁적인 개념인 ‘제국’이며, 『다중』에서 <제국>의 정치적 재편성의 도식을 제공하는 “일자∙소수자∙다수자”로 구성된 폴리비오스적 혼합정체론이며, 『공통체』에서 제창되는 ‘소유 없는 공화국’의 ‘공화국’ 개념이다. 왜냐하면 『구성적 권력』은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발단하고, 마키아벨리를 거쳐 근대 초기의 대서양 양안에 계승된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근대혁명사상의 계보로 고쳐 읽은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때 네그리에게 최대의 참조항은 『마키아벨리적 모멘트』(1976년)의 J. G. A. 포콕이다. 근대 초기의 유럽과 미국에서, 공공선의 실현에 헌신하는 시민의 ‘덕’ ― 멸사봉공의 군사적·정치적 에토스 ― 에서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보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추적하며, 공화국의 통일을 방어하는 시민의 ‘덕’과,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공화국의 통일을 위협하는 ‘운명’ 사이의 대립도식으로부터 역사주의의 생성을 묘사해낸 정치사상사가이다. 여기서 ‘역사주의’는 역사의 운동에 인간의 활동을 관여시키고, 역사 자체를 새로운 가치나 규범을 산출하는 것으로 그려내는 시도를 가리킨다.
실제로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에서, 포콕을 좇아, 16세기 피렌체의 마키아벨리로부터 청교도혁명기 잉글랜드의 해링턴을 거쳐, 미국독립혁명의 이데올로그들까지 고전적 공화주의의 계보를 따라간 후, 그것에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관한 사상사적 분석을 접목하고 있다. 포콕에 의한 고전적 공화주의 재고가 자연법론과 계약론의 계보를 중시하는 서구정치사상사에서 ‘법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이의제기인 한, 이미 스피노자론에서 ‘반-법제주의’를 선명하게 했던 네그리가 『마키아벨리적 모멘트』에서 큰 자극을 받은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원래 17세기 네덜란드의 공화주의자 스피노자의 정치적 “구성 la constitution”의 논리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론에서 “헌법제정권력 le pouvoir constituant”을 법학적인 틀로부터 뽑아내어, 정치체를 ‘구성’하는 ‘다중’의 힘으로서 위치시킨 후에, 네그리는 포콕에 의거하면서, 이 ‘구성적 권력’을 근대혁명사상의 계보에 부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히려 포콕과 네그리의 차이일 것이다. 그 차이는 미국독립선언혁명으로 책을 닫는 『마키아벨리적 모멘트』의 ‘대서양’적인 전망과 러시아 혁명을 시야에 넣은 『구성적 권력』의 ‘대륙’적인 전망을 대비하는 것만으로도 분명해진다. 그 차이는 아렌트의 『혁명론』이 말하는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의 계보의 차이이기도 하다. 원래 ‘운명’에 대한 ‘덕’의 되풀이되는 패배를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역사주의에 근거한 보수주의를 표방하게 되는 포콕과 ‘덕’의 에토스를 본성상 끝나지 않는 혁명의 잠재력에 결부시키는 네그리는 정치적 입장이 전적으로 다르다. 이하에서는 『구성적 권력』에서 전개되는 마키아벨리론에 초점을 맞추서 네그리가 얼마나 포콕을 뒤따르면서도 포콕과 갈라서는가를 밝히고 싶다. 이 두 사람에게 마키아벨리는 각각의 책 전체의 테마를 단숨에 제시하는 사상가이며, 그곳에서는 모두 시간과의 관계에서 ‘덕’의 정치학이 문제가 되는 이상, 네그리의 근대혁명 사상사의 특이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것보다 더 나은 소재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우리는 또 한 명, 네그리의 시대착오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던 어떤 철학자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1990년, 네그리가 책임 편집자 중 한 명이던 잡지 『전미래』의 창간호에 게재된 「마키아벨리의 고독 La solitude de Machiavel」의 저자 루이 알튀세르이다. 아이러니한 공화주의의 역사가와, 고독 속에서 죽음의 침대에 있었던 맑스주의 철학자 사이에서, 바닥없이 낙관주의적으로도 비치는 ‘다중 la multitude’의 사상가가 스스로 껴안으려고 한 ‘고독’을 분명히 밝히는 것 ― 이것이야말로 본고의 목표이다.
변동의 정치학 : 정치이론가의 탄생
「덕과 운명 : 마키아벨리적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의 『구성적 권력』의 마키아벨리론의 중심에는 『군주론』과 『로마사논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놓여 있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마키아벨리 해석사에서의 큰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했다. 한편으로, “이탈리아적 전통”을 이어받은 자는 “마키아벨리즘” 책으로 유명한 『군주론』을 특권시하고, 이 책에서 획득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개념이 마키아벨리의 전체 저작을 지배한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이탈리아적 전통”에는 데 산크티스(Francesco de Sanctis)부터 그람시를 거쳐 트론티까지 포함되어 있지만, 그 끄트머리에는 그람시를 토대로 하면서 『군주론』의 저작을 ‘국민국가’의 ‘시작’의 사상가로 위치시킨 알튀세르도 연이어 있다. 다른 한편,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소재로 공화국론을 전개하는 『로마사논고』를 중시한 영미의 연구자들은 이 책의 공화주의를 마키아멜리의 중심적 사상으로 평가하면서, 『군주론』을 이론적으로 애매한 상황적 산물로 간주한다. 이런 연구자들 중 최대 거물이 포콕이다. 즉 네그리에게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의 관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알튀세르와 포콕 사이에서 마키아벨리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에 다름없으며, 그 반대도 또한 참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네그리가 갑작스럽게 이 커다란 문제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일단 『군주론』 이전,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 시절까지로 소급해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적·이론적 경력을 하나하나 추적해간다는 점이다. 게다가 네그리는 『로마사 논고』 이후, 『피렌체사』를 필두로 하는 후기의 저작에 대해서도 논급하기 때문에, 이 마키아벨리론은 마치 피렌체의 정치사상가에 대한 응축된 이론적 전기(biography)의 양상을 띤다. 알튀세르에게서도 포콕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마키아벨리의 ‘삶’에 대한 이런 관심을 통해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처럼 우뚝 일어서고 부서지며, 재차 더욱 강고하게 일어서려고 하는 모습을 그려내려고 하는 것이다.
잰 걸음의 태양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표면을 이미 1494번이나 돌았네. … / 그 이후, 서로 다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인들에게 문을 열었고, 야만인들에게 짓밟히는 고통을 겪었다네.
마키아벨리의 『10년사』(1504년)에서 인용한 이 문장을 네그리는 자신의 마키아벨리론의 첫머리에 둔다. 1494년 프랑스군 침공에 직면해 용병으로 맞선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맥없이 패배했다는 것을 전하는 구절이다. 그것을 계기로 시작된 11차에 걸친 이탈리아 전쟁은 유럽에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립을 중심축으로 한 세력균형의 체계를 산출하고, 이탈리아의 공화국들로부터 알프스 북부에서 할거[거점을 두고 활동]한 군주정 국가로 결정적으로 패권을 이행시켰다. 이 사건이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년)과 신대륙발견(1492년)과 더불어, 근대 유럽의 기점으로 지목된 것도 그 때문이다. 포콕은 이미,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지배가 일단 붕괴한 1494년부터 근대 공화주의 사상의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그리에게 이 날짜는 단순히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정치상황의 변화의 지표가 아니라 ‘근대’의 가장 근원적인 소여가 개시된 날짜이다. 그 주어진 이름이 바로 ‘변동[변전] mutatio’이다. 『10년사』의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 이후에 ‘변동’의 시작을 돌이켜봤듯이, 네그리는 ‘근대’의 끝에서부터 ‘근대’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거기에서 ‘변동’을 찾아내고 있다.
다만, 마키아벨리는 결코 ‘변동’을 소여로서 찾아낸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미 외교관 시절의 제언에서, 그는 ‘무력’과 ‘양식(良識)’의 종합에 정치적 ‘변동’을 관장하는 활동적 원리가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관찰의 대상이든 활동의 대상이든, 거기서는 ‘변동’이 주체에 대립하는 객체에 머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더 중요한 한 걸음은, 주객의 대립 이전의 차원에서 ‘변동’을 파악하고, 주체의 활동을 ‘변동’과 일치시키고, ‘변동’ 그 자체를 통째로 주체화하는 곳에 있을 것이다. 네그리가 “자연주의적 지평으로부터 역사적 구조로”라고 부르는 이 이행과 더불어, “변동”은 인간이 그 내부에서 활동하고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고 그렇게 “구성”된 현실을 돌파해서는 새로운 현실을 다시 ‘구성’하는 박동에 의해 획기화된 역동적인 과정이 된다. 피렌체에서, 혹은 신성 로마 제국이나 프랑스 왕국의 궁정에서, 역사적 회고를 감안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현실을 분석하고, 그 장래를 점쳤을 때, 마키아벨리는 이미 ‘변동’ 그 자체, ‘시간’ 그 자체에 ‘구성하는 권력’이 내재한다는 입장을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키아벨리가 이 역사의 역동성을 제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긴 과정을 경과해야 했으며, ‘생명의 철학’ 같은 역사주의로 마키아벨리의 ‘정치’가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긴장의 누적이며, 폭발의 기대이며, 기성 질서와 균형의 파탄으로 향하는 잠재력을 품고 있는 중층적 결정의 힘이 존재자 하에서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그런 “중층적 결정의 힘 = 위로부터의 결정의 힘 la surdétermination”을 체현하는 군주의 정치기술을, 1502년부터 1504년에 걸쳐 체류한 체사레 보르자의 궁정에서 목격했다. 시간 속에서 비롯되고 변동하는 상황 속에서 호기(好機)를 붙잡고, 시간을 지배하기 위한 그 기술 ― 즉, ‘운명’에 맞서는 ‘덕’ ― 의 관찰과 더불어, 마키아벨리는 또한, 관습에 의한 것도 계약에 의한 것도 아니라 활동 그 자체에 입각하여 자기를 유지하는 새로운 주권의 개념을 품게 된다.
그러나 네그리가 마키아벨리에게 한층 더 중요한 전기(轉機)라고 생각하는 것은 1503년의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이었다. 그의 아버지∙교황 알렉상드르 6세 사후, 우유부단을 드러내고, 순식간에 상황이 그를 앞질러간 자신의 영웅의 모습과 더불어,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있어서의 ‘의지’와 ‘주체적 기투’의 중요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는 역사적 시간을 내면화하고, 인간적 시간에 통합하고, 공공연하게 드러난 잠재력을 특이한 것으로 하는 것이다.” 이후,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관찰자이기를 그만두고, 이탈리아의 종속상태를 타개하는 길을 물색한다. 정치이론가로서든, 스스로 활동의 주체로서,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본 ‘잠재력’을 제 것으로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권력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구성적 주체로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탐구는 1512년, 스페인군의 이탈리아 침공에 뒤이어 피렌체의 공화적 정부가 붕괴하고 메디치가가 권력에 복귀하는 것과 더불어 훨씬 절박해졌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궁정에서 쫓겨나고, 투옥의 쓰라림과 조우한 이 위기적 상황 속에서 씨름했는데, 우선 『공화국의 책』 ― 『로마사 논고』 ― 을 썼고, 이어서 투옥 이후, 이 『공화국의 책』을 중단하고 쓰게 된 『군주론』이었다, 이렇게 네그리는 단정한다. 이리하여 『군주론』이 “객관적인 한계와 주관적인 절망의 특이성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지어진다. “마키아벨리의 고독”이 우리의 시야에 부상하는 것이다.
구성적 원리의 고독 : 『군주론』
『군주론』을 논하는 데 있어서 네그리는 맨 처음에,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la principauté”가 폴리비오스 식의 정체 분류론에서 말하는 ‘군주정’도 ‘귀족정’도 아니고, 따라서 『공화국의 책』이 다루는 ‘공화국’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새로운 군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고찰은 “변동을 위로부터 결정하는 역사적 주체”, 혹은 “변동을 위로부터 결정하는 원리”에 바쳐지고 있다. 네그리에게 『군주론』은 ‘구성적 원리’의 책이며, 정치체를 정치체로서 ‘구성’하는 ‘기초’와 ‘조건’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론적’ 책인 것이다.
하기야 이 해석 자체가 반드시 네그리의 독자적인 것만은 아닐 터이다. ‘새로운 군주’에 대한 논의를, 활동 그 자체에 의해 정당성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정치적 혁신자’에 대한 고찰로 위치시키는 포콕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국민적 국가의 ‘시작’을 사고한 책으로 위치시키는 알튀세르도, 그다지 다른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렌트도 서양 근대에서 최초로 국가의 ‘창설’을 사고한 인물로 마키아벨리를 위치시켰다. 그러나 이 ‘구성적 원리’의 급진성을 평가하면서 네그리가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군주론』에 내포된 아포리아이며, 실천적인 불능(不能)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불능을 지적할 때에, 네그리가 참조를 요구하는 것이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이다.
이 원리가 지닌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존재론적 깊이를 부정하려고 한다든가, 그 고독과 기투의 반전이 얼마나 강력한 삶의 원천을 나타내는가를 잊자는 것이 아니다[주는 여기에 붙는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혁신은 귀결의 공허 위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나 그 때문에 절망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 실제,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원리는 여기에서 전복적이며, 전복적인 채로 머문다. 그의 사고의 운동은 적대의 운동이지 경향의 운동이 아니며, 위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해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혹은 그 해결을 찾아내려고 해도 미리 그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서 마키아벨리의 “고독과 기투”의 반전은, 혹은 (훗날 출판된 『마키아벨리와 우리』에 입각해 말한다면) 실천적·이론적인 ‘불능’과 ‘역능’의 교착은, 그가 자기 스스로는 해결 불가능한 물음을 제기한 점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달성[성취]된 사실”로서의 국가의 정당성을 묻는 근대의 모든 정치철학자들과 갈라서며, ‘고독’ 속에서, “성취[달성]되어야 할 사실”로서의 국가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현실적인 조건을 사고했기 때문에, 새로운 국가의 ‘시작’의 불가능성과 더불어, 그 ‘시작’에 있어서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효(実効)적인 힘을 폭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말투는 충분히 알고 있기에, 네그리는 이렇게 매우 알튀세르적인 반전에 그치려고 하지 않는다. ‘역능 = 잠재력 la puissance’과 ‘다중 la multitude’의 사상가 네그리에게 알튀세르의 ‘불능 l’impuissance’과 ‘고독 la solitude’은 너무도 관념적으로 비쳤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때, 네그리의 유물론이 시간과의 관계에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군주론』에는 “전복”의 운동만 있으며 “경향”의 운동이 결여되어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위기”를 인식하면서도 그 “해결”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구성적 원리”가 시간의 울타리 바깥에 놓여 있으며, 마키아벨리의 ‘고독’이 무엇보다도 역사적 과정으로부터의 고립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알튀세르와 네그리의 관계와 관련된 한, 사태는 조금 복잡하다. ‘역능’과 ‘불능’은, 혹은 ‘고독’과 ‘다중’은, 『구성적 권력』에 있어서도 또한, 서로를 뒷받침하면서, 끊임없이 반전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네그리에게서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네그리는 마키아벨리론의 말미에서 다시 알튀세르를 호출하고, 「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성원을 보내게 되는데, 그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제 잠시 동안 네그리의 논의를 추적해야 한다.
일단 『군주론』의 한계를 시간으로부터의 고립, 역사적 과정으로부터의 고립에 견줘본 뒤에, 네그리는 이 책의 ‘존재론적 깊이’와 실천적인 불능의 교착을 더욱 파고들어 검토한다. 그때 네그리가 우선 주의하는 것은 ‘구성적 원리’와 군사력의 연결이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새로운 군주’의 국가는 무엇보다도 ‘덕’에 의해 생기는 것이며, 그 ‘덕’은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구성적 원리’는 ‘무장한 덕’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마키아벨리에게서의 군사력 문제에 대해서 아렌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네그리는 그것을 기피해야 할 정치적 폭력의 행사 문제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그 배경에는, 시민은 스스로 무기를 취해 공화국을 방어하는 전사여야 한다는 주장에 고전적 공화주의의 한 가지 핵심을 인정한 포콕의 고찰이 똬리를 틀고 있음이 틀림없다. 실제로 포콕을 따라 말하면, 유럽의 군주정 국가가 국왕 상비군을 정비했던 시대에 시민의 민병조직에서 공화국의 자유의 요체를 본 마키아벨리의 관점으로, 근대주권국가에 의한 “정당성 있는 폭력 행사의 독점”(베버)에 근본적인 이의를 들이미는 현대적인 사정거리도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그리는 이 ‘구성적 원리’와 군사력의 연결에서 마키아벨리의 한계를 간파한다. 정말로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에게서도 군사력의 문제는 단순한 폭력행사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군사력은 정치체를 조직화하고, 그 구성원의 ‘덕’을 함양하므로 평상시에도 국가의 구성의 역동성을 체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군주’에게 ‘덕’이 절대적인 원리인 이상, 군사력이 절대화된 것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의 점에 있다. ― “무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군주를 위한 것인가, 인민을 위한 것인가?” 『군주론』의 마키아벨리는 이 가장 긴요한 물음에 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네그리는 민주정의 선택 그 자체의 포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는 더 나아가 『군주론』의 인식론적 한계도 지적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무장하고 덕이 높은 군주에게 “구성적 원리”를 인정하는 것과 더불어, 그 군주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거기에서는 분명히, 힘이 인식을 낳고, 인식이 힘을 낳는다는 직관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새로운 군주는 단순히 국가의 저자일 뿐 아니라 논리와 언어의, 혹은 윤리와 법률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다만, 체사레 보르자라고 생각되는 정치적 영웅을 모델로, 군주가 따라야 할 윤리적 규범을 역설하는 데 머문다. 그리고 이 윤리적 호소는 ‘구성적 원리’의 존재론적 차원을 파고 들어갈수록 강조되고 공회전하게 되는 것이다.
강렬한 군사주의와 극단적인 주관주의 ― 네그리가 『군주론』의 한계로 보고 있는 것은 네그리 자신도 포함한 70년대의 좌익운동의 조류들을 생각나게도 하는 그런 ‘전복’으로의 과격한 경도이다. 그 ‘구성적 원리’의 운동은, 흡사 체사레 보르자가 순식간에 몰락했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장애에 부딪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 장애의 유래를 물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의 “사고의 운동”은, 끊임없이 새롭게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려고 더 한층 군사력과 주관성에 박차를 걸고, “전방으로의 도주”를 결행한다.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 하에서 실행되는 작전의 절대성 외에 기초를 갖지 않는 이 [구성적] 원리는 항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구성적 권력이란 모든 한계의 돌파이며, 결코 편히 쉬지 않는 의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그리는 이 ‘구성적 원리’의 ‘전방으로의 도주’에 불모의 과격주의의 귀결을 보고 그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전방으로의 도주’에서 『군주론』의 중심적인 주제를 간파한다. ‘구성적 원리의 비극’이라고도, ‘덕의 비극’이라고도, ‘정치적인 것의 비극’이라고도 불리는 주제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비극은 필연적이다.” ‘구성적 원리’가 자신의 활동에 의해,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하는 이상, 그 활동 자체는 창조되어야 할 가치의 직전에, 진위와 선악의 저편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그 활동은 항상 ‘사후’의 관점에서 판가름될 수밖에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성적 원리’는 항상 우연적인 상황에서 “사물의 실효적인 원리”(마키아벨리)에 직면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원리’의 활동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활동 그 자체를 배반하고, 되풀이되는 활동에 대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네그리더러 말하게 하면, 『군주론』의 마키아벨리가, 다양한 상황을 열거하고, 지칠 줄 모르게 권모술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시도하면서, 항상 뜻대로는 안 되는 결과의 배신에 우롱당할 수밖에 없는, 이런 ‘구성적 원리의 비극’을 눈여겨봤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네그리의 ‘비극’에 대한 고찰은, 틀림없이 『마키아벨리적 모멘트』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포콕은 이미, 『군주론』의 주제가, 부단한 행위의 연속에 의해 자기 정통화를 꾀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닌 ‘정치적 혁신자’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항상 결과의 타율 ― 행위의 결과가 바로 그 행위의 의도를 배반한다는 것 ― 에 의해 아이러니컬하게 배반당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님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포콕에게 있어서 거기에, ‘운명’을 앞에 둔 ‘덕’의 불행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덕’의 불행의 인식이야말로 정치질서의 정통화는 단기적인 ‘혁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기적인 지속 속에서 ‘관용’에 의해 도모되는 것에 다름없다고 하는, 포콕의 역사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입장의 배경에 똬리를 틀고 있다. 아무래도 위대한 역사가에 어울리는 ‘사후’의 사상이다.
포콕과 더불어 ‘구성적 원리의 위기’를 눈여겨보면서, 네그리는 이 역사가의 비관주의를 단호하게 물리치려고 한다. 정말이지, 『군주론』의 말미에서 ‘덕’이나 자유의지에 의한 ‘운명’의 지배의 가능성이 역설되고, 도래할 ‘새로운 군주’에 이탈리아 재건의 꿈이 맡겨져 있다는 것을 보고, 네그리는 거기에서 마키아벨리의 막다른 골목을 볼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은 ‘덕’을 단념하고, ‘구성적 원리’를 포기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네그리에게 있어서, 『군주론』에서는 ‘구성적 원리’의 절대성이 철저하게 추구되지 않고 끝나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군사력이나 주관의 절대화 등에는 전혀 없다. 그와 반대로, 이 절대화가 불철저했다는 것, 그리고 ‘덕’이 ‘운명’에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구성적 원리’가 시간의 울타리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이야말로 문제이다. 이리하여 『군주론』에서 『로마사 논고』로의 행적이, ‘구성적 원리’의 심화의 과정으로서 독해된다. 마키아벨리는 ‘고독’의 사상가로부터 ‘다중’의 사상가로, 그리고 스피노자보다 훨씬 선구적으로 ‘절대적 통치’로서의 민주정의 사상가로 변모하는 것이다.
다중의 분리로부터 민주정의 구성으로 : 『로마사논고』
다만 네그리의 『군주론』과 『로마사논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단순한 직선적 도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네그리에게서 『군주론』의 사정거리는, 『로마사논고』와의 상호관계에 놓여서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로마사논고』의 사정거리도, 『군주론』이 가져온 ‘질적인 비약’ 없이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콕은 『로마사논고』에서의 로마를 “여러 공화국들 중의 새로운 군주”에 빗댔다. 네그리는 그 비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1512년부터 1513년에 쓴 『군주론』을 『공화국의 책』, 즉 『군주론』 이전에 기획되고, 일단 중단된 후에 1515년부터 1517년에 완성한 『로마사논고』의 생성과정 속에 다시 놓는 것이다.
당장 네그리는 로마사에서 소재를 취하는 『로마사논고』의 정치적 고찰이 고대를 모델로 하는 온갖 사고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의 서론에서 얘기되는 고대인의 범례는 인간 본성이나 정념에 대한 보편적인 사정거리를 가진 고찰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며, 마키아벨리는 이 정념론을 매개로, 역사 속에 주체를 우뚝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로마사논고』에서는, 경험론적인 동시에 규범적인 『군주론』의 인식론적 한계가 처음부터 돌파되는 것이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로마사논고』 1편에서 제시되는 마키아벨리의 정체론이, 폴리비오스적인 도식으로부터 이탈한다는 지적이다. 정말이지, 거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분류에 기초하여, 군주정에서 폭적, 폭정에서 귀족정과 과두정, 나아가 민주정과 무정부상태로의 순환이 얘기되고 있다. 또한 그 정체의 ‘부패’의 순환에 맞서는 최선의 정체로서, 로마공화국의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혼합정체의 우위조차 역설될 것이다. 그러나 네그리는 이렇게 계속한다.
그러나 [혼합정체의 분석에 있어서] 민주정 원리의 도입은 … 전적으로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바로 혁명이다. 왜냐하면 그 헌정은 ‘혼합적인 한에서, 가장 완성된 공화국을 형성했다. 이 완성에 이른 것은 인민과 원로원의 분열 la désunion에 의해서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열’로부터 ‘소요로 가득 찬 공화국’이 생기고, 그 ‘소요’로부터 공화국에서의 자유를 방어하는 ‘좋은 질서’가 생긴다. 이리하여 『로마사논고』의 고명한 테제가 ‘민주정의 원리’의 도입과 결부되는 것이다. 다만 그때, 일반적으로는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균형에 기초한 헌정론의 틀을 돌파할 때까지 극화(劇化)시킨다. 그 결과, ‘la constitution’은 이제 ‘헌정’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성’의 문제로서 논해진다.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그 돌파를 수행하는 것이, 『로마사논고』 1편 17·18장이었다. “부패한 인민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에는, 자유를 계속 시키는 것은 곤란하다”고 역설한 뒤, 또한 “부패한 도시국가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정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보존할 수 있는가, 또한 자유로운 정체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에는 그것을 도입할 수 있는가”라고 마키아벨리가 묻는 대목이다. 네그리는 거기에서, 폴리비오스적인 순환사관, 정체의 ‘부패’아 자유의 상실을 필연으로 보는 역사가의 비관주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혐오를 읽어낸다.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공화국의 책』을 중단하고, 『군주론』에 씨름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군주론』은 이리하여 폴리비오스적인 비관주의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넘어서고, ‘부패’와 자유의 상실을 필연적인 것으로 하는 순환사관을 거부하는 책으로서 재파악된다. 그때 동시에, ‘시간의 절단’과 ‘군주에 의한 위로부터의 결정’이라는 『군주론』의 주제가, 역사 속의 주체의 활동의 계기를 강조하고, 그 주체의 구성 그 자체에 정치적 활동의 중심적 과제를 보는 입장과 결부되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군주론』의 ‘구성적 원리’는 인민과 원로원 사이에서 발견된 ‘분열’을 극화하고, ‘한 명·소수자·다수자’의 균형론의 틀로부터 ‘다수자=다중’을 분리하여, ‘인민의 창설’을 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던 ‘구성적 원리’가 인민이라는 신체를 획득하고, 민주정을 창조하기 위한 ‘구성적 권력’으로서 재정의된다. 그것과 더불어 ‘구성적 권력’의 주체는 인민 그 자체, 혹은 인민을 구성하려고 하는 ‘다중’ 그 자체가 된다. ‘군주’는 이 구성의 ‘원리=시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사논고』 1편에 민주정으로의 지향을 확인한 후, 네그리는 2편의 ‘덕’을 둘러싼 고찰에 대해, 거기에서는 ‘다중’이야말로 ‘덕’의 집단적 주체로서 위치지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덕’은 더 이상 단순히 ‘운명’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끊임없이 대치되는 장애를, ‘운명’에 기대면서 극복하는 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덕은 산 노동이며, 생명에 대립하여 견고한 것으로 된 전통이나 권력을 조금씩 파괴할 수 있다.” ‘덕’은, 혹은 ‘구성적 권력’은 ‘다중’이라는 집단적 주체와 더불어, 역사의 과정을 통해 현실화하는 ‘경향’의 운동, 혹은 자기 결정을 요구하는 ‘투쟁’이 된다. 여기에는 네그리에 의한 고전적 공화주의의 급진화가, 『맑스를 넘어선 맑스』의 도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혼합정체에 기초한 공화국의 통치체제가, 교환가치로 환원된 ‘죽은 노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사이클에 비유되며, ‘다중’이 영위하는 공동의 삶 그 자체가, 삶의 재생산을 자본의 재생산과정으로부터 점차 분리시키는 ‘산 노동’ 고유의 생산 사이클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구성적 권력』이, 즉 ‘민주정’의 ‘구성’이, 『로마사논고』 3편의 과제로서 부상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이 과제는, “르네상스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어디까지나 ‘근대적’인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유’와 ‘부’를 가져다준 르네상스에 편승하면서, 특히 ‘부 = 운명 la foritune’의 축적이 가져다준 나쁜 귀결에 맞서, ‘자유’의 원리로 회귀하면서, ‘덕’의 주체의 구성울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때, 네그리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군사의 조직화를 통한 ‘다중’의 집단적 주체로서의 ‘구성’이다. 이제 ‘무장한 덕’은 공화국 내부의 조직화와 ‘덕’의 함양이라는 문제계에 명확하게 결부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네그리는 이미 “민주정은 강하게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명제를 거론하면서, 이 민주정에서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덕’을 갖고서 조국의 방어에 종사하는 인민 그 자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때, 인민의 구성 요건, 민주정적인 자유의 구성요건으로 간주되는 것이 ‘평등’이다. “다중이 부패하지 않는 도시국가에서는 모든 것을 기능시키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평등이 지배하는 도시국가에서는 군주국을 만들 수는 없으며, 평등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공화국을 만들 수 없다.” ― 네그리에게 있어서는 이 고찰이야말로, 마키아벨리를 “민주정의 예언자”로 위치시키는 것을 허용한 것이었다.
그 선행하는 논의를 계승하면서,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한 ‘가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로마사논고』 3편에서의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고대 그리스-로마 이후의 공화주의의 판에 박힌 정형화로부터 분리되고, ‘부’의 축적의 해악에 맞서 ‘평등’을 유지하고, 시민의 ‘덕’을 함양하고, 민주적인 공화국의 ‘구성’으로 향하는 정치=경제학의 효시로 위치지어진다. 네그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이 ‘가난’의 정치=경제학이, 마키아벨리의 군사적 고찰을 정치적인 정념론에 접속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가난’의 옹호는 공화국에서의 군사력 유지의 요구에 뿌리를 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가난’이 가져다주는 ‘덕’은 자유를 요구하는 정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정념론에 정치적 구성에 대한 고찰의 요체를 간파했던 자신의 스피노자론과 평행하여, 이 ‘정념의 정치’에 대한 고찰에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권력’론의 정점을 찾아낸다. 거기서 마키아벨리는 “정념을 억제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을 현실의 구축, 새로운 현실의 구축을 향해 해방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해방된 정념은 공화국 속에 ‘소요’를 산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념은 ‘욕망’과 ‘사랑’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 한,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 정념적 주체인 ‘다중’은, 그 자체 유동적이고 시간적인 존재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타성[관성]이나 객관성과는 무관하게, 공화국을 위협하는 ‘부패’와 자유의 상실에, 부단한 재창설, 부단한 개혁을 갖고 맞설 수도 있다. ‘덕’의 주체를 집단적인 것으로 하고, 그 집단적 주체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념적인 양상에 있어서 파악함으로써, 마키아벨리는 시간의 주체화를, 즉 민주적인 자기 통치의 과정으로서의 역사적 과정의 절대화를 철저하게 추진해나간다. 네그리에 따르면,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로마사논고』 1편 17~18장에서 환기된 ‘질적 비약’의 도달점인 것이다.
위와 같은 분석을, 또 다시 포콕과 맞댈 수 있을 것이다. 포콕도 『로마사논고』가 “순환을 피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완전히 균형을 이룬 정체를 어떻게 수립하는가”라는 폴리비오스적인 문제설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지적한 뒤, 마키아벨리가 “새로운 군주”를 포함한 일체의 초월적인 차원의 개입 없이, 단지 우연적인 과정을 통해 정치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논했기 때문이다. 포콕에게서는, 그런 인식이야말로 『군주론』 이상으로 파괴적인 『로마사논고』의 핵심에 있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포콕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관심은, 제국적 확대에 의해 일정한 기간 동안 자기를 유지하는 것에 성공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유를 상실하게 된 로마공화국의 역사의 변천을, 그 특이한 헌정의 (불)균형에 기초한 것으로서 분석하는 데 있으며, 원로원과 인민 사이의 ‘분열’도 군사-경제-정념-정치를 잇는 ‘덕’론의 분석도 ― 이 점, 포콕의 분석은 분명히 네그리를 선취하고 있는데 ― 그 헌정론·역사론의 틀을 흔드는 것이 아니다. 포콕이 집단적인 역사과정에 정치질서를 창조하고, 정통화하는 힘을 인정하더라도, 그 힘은 최종적으로 과거의 역사적 순환의 설명원리를 제공해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포콕은 『로마사논고』에 공화주의적인 ‘덕’의 현양을 간파하기는커녕 오히려 “로마의 길에는 최종적인 쇠퇴에 대한 보증은 없다. 그러나 예상할 수 있는 근미래에 있어서는, … 로마의 길은 더 현명하며, 더 영광으로 가득 찬 길이다”라는 아이러니한 인식을 간파하게 됐다.
『로마사논고』론에서도 또한, 네그리가, 최종적으로 ‘운명’ 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덕’의 불행을 내다보는 포콕의 고전적 공화주의론을 전도하고, 그 틀을 돌파하고, ‘덕’을 ‘구성적 권력’에까지 철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네그리에게서, 마키아벨리는 결단코 역사철학자가 아니며, 정치적인 이론가=활동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네그리의 포콕에 대한 이런 관계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폴리비오스적인 균형론으로부터의 ‘다중’의 분리에 『로마사논고』의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을 인정한 네그리는, 동시에 그 마키아벨리의 논의가, 그람시가 말하듯이 민주적 결정의 주체형성으로 향하는지, 포콕이 보듯이 간신히 균형론의 틀 안에서의 다수자의 역할의 강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는 애매하다고 일부러 주석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유일한 해결의 길은 이런 애매함을 불식하는 것이 아니라 극화시키는 것이다.” 이 ‘애매함’의 극화는 단순히 공화주의적인 ‘다수자=다중’의 역할의 강조를 자의적으로 ‘민주정의 구성’으로 고쳐 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마, 고전적인 공화주의의 틀로부터 ‘다중’을 ‘분리’하고, 그 정치적 주체화를 도모하려고 하는 네그리의 시도에 내재하는 ‘애매함’이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네그리가 그 ‘애매함’의 이론적·실천적인 사정거리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를 겨냥한 고찰이다. 그리고 포콕도 알튀세르도 논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 저작의 독해를 통해서, 네그리는 다시 이 두 명의 선행자와 교착하게 된다.
다중과 고독 : 『피렌체사』
네그리는 이 『피렌체사』(1525-1527 완성)를, 『군주론』과 『로마사논고』를 거쳐 완전한 표현을 얻은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의 책으로 위치시킨다. 이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의 근간에는, ‘사물의 질서’가 ‘구성적 권력’에 의해 ‘구성’된 산물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으며, 그 인식은, 이미 본 듯한 시간의 주체화, 역사의 주체화의 귀결에 다름 아니다. 마키아벨 리가 정치적인 이론가=활동가라고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가 실천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인식하고, 그 인식에 의해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열고, 인식과 실천의 일치를 체현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더 나아가, 이런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을 “역사유물론”이라고 바꿔 말한다. 로마나 아테네 이상으로 다수의 분열을 품고 있었던 피렌체의 공화국이, 바로 이 분열 그 자체를 동력으로서 발전을 이룩해왔다는 것을 강조할 때, 마키아벨리는 ‘계급투쟁’에 역사의 동력을 보는, 맑스적인 인식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피렌체사』의 해석에 있어서, 네그리는 다시금, 이 책의 구성 그 자체에 들어 있는 균열에 눈길을 머문다. 그 서문도 증언하고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당초 이 역사서를 1434년의 코지모 디 메디치의 개선(凱旋) ―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에서의 메디치가 지배의 획기(劃期) ― 에서부터 얘기했는데, 그 당초의 예정을 변경하고, 1434년까지의 피렌체사 서술에 몰두하게 됐다는 것이다. 『피렌체사』는 그것이 “구성된” 후의 모습에 거스르며, “구성하는” 마키아벨리의 사고의 운동을 좇아 재독해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네그리는 우선 『피렌체사』 후반부의 독해에 착수한다. 처음에 다뤄지는 것은, 이 후반부의 첫머리, 5편 1장의 첫 구절이다. 마키아벨리는 거기에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국가의 끊임없는 요동을,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사물의 끊임없는 동요에 빗대고, 그것을 덕의 성쇠의 순환과도 결부시켰다. 거기에서 “폴리비오스적”이라기보다는 “전-소크라테스적” 냄새를 맡는 네그리는 이 ‘자연주의’와 ‘비관주의’에 『피렌체사』의 출발점이 있다고 단정한다. 『로마사논고』에서 폴리비오스적인 순환사관으로부터 벗어나 ‘다중’의 ‘분리’와 ‘구성’으로 향했듯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도 또한, 이 회귀하는 ‘비관주의’를 내다보면서 이로부터 몸을 떼어내고 ‘역사유물론’의 정교화로 향하는 것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피렌체사』 후반부의 서두에는 마키아벨리의 ‘자연주의’와, 의뢰주이기도 한 메디치가에 대한 예찬이 현저하게 간파된다. 서술이 기본적으로 연대기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연주의’와 메디치가 예찬은 뒤로 갈수록 사라지고, 정치분석은 보다 생동감을 띠게 된다. 7편의 로렌초 디 메디치의 시대의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균형’의 분석에는, 마키아벨리의 중요한 전기(轉機)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8편에서의 파치(Pazzi)의 음모의 분석에서는, 이미 유물론적이고 근대적인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 뚜렷하게 간파된다고 말한다. 거기에서 마키아벨리의 서술의 대상이 된 것은, 메디치가에 맞선 귀족집단의 반란과 메디치가에 가담한 민중봉기의 대결이었다. 거기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처음으로, “두 개의 구성적 권력”이 격돌하는 것이며, 그 격돌을 배경으로서, “엄숙하고도 쾌락적이기도 하며, 두 명의 상반되는 인간이 있을 수 없는 결합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 로렌초 디 메디치의 정치적 ‘덕’이 분석된다 ― 네그리는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피렌체사』 후반부의 운동을 소묘하면서, 네그리는 전반부로 되돌아가며, 특히 코지모 디 메디치의 개선(凱旋)까지의 15세기의 피렌체 정치사의 분석에 입각해, 마키아벨리의 ‘역사유물론’의 주요한 논점을 지적한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15세기 중반까지, 확대된 교황권 하에서 이탈리아는 분열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군주들은 나태 속에서 “비열한 무기사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침체하는 이 중세적 시간을 끊어내고, 제도의 변동을 초래한 것이,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계급투쟁의 전개였다. 실제로 『피렌체사』 3권의 치옴피의 난(Tumulto dei Ciompi)의 서술에는, 모직물업이 번창한 당시의 피렌체의 계급분석에 의거하여, 마키아벨리가 ‘부유민’과 ‘영세민’을 두 개의 정치적 주체로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네그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이런 유물론적인 계급분석 이상으로,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진 마키아벨리의 정치-경제적 진단이다. 즉, “피렌체는 혼합정체를 획득할 수 없다.” 근대적인 시장의 발전은, 계급투쟁의 심화가 혼합정체적인 균형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고, 그저 부유자의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뿐이었다. 떨쳐 일어난 “영세민”은 무장 해제되어버린 한에서, 더 이상 급진적인 민주정도 실현의 가능성을 단념해버렸다. 바로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양식적인 이데올로기의 중간적인 길”을 따라 “좋은 법률과 좋은 질서”를 대신해 “유일자의 덕”에 호소하고, 메디치가 지배의 현황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소수자’인 귀족의 패배와, ‘다수자=다중’인 인민의 주변화를 통해 메디치가의 발흥이 묘사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로렌체 디 메디치가 체현하는 “있을 수 없는 결합”이 전망된다. 네그리는 바로 여기에 마키아벨리의 사상의 핵심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리하여 마키아벨리의 사상의 중심적 모멘트에 도달했다. 이상이 현실화되기 위한 조건이 갖춰지고, 덕이 역사가 된 경우라도, 종합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발견에 말이다. 이상이 조금이라도 현실화되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결합’으로서일 뿐이며, 예외적인 경우로서 시간과 더불어 곧바로 소진한다. 단절은 사실상 종합보다도 훨씬 더 현실적인 것이다. 구성적 권력이 실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쟁란, 봉기, 군주 등처럼 잠깐 동안의 일일 뿐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마키아벨리의 역사유물론은 결코 역사적 변증법으로는 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종합과 지양의 모멘트를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단절이야말로 구성적인 것이다.
『군주론』에서 ‘구성적 원리’로서의 ‘덕’을 발견하고, 이 ‘구성적 원리’의 위기에 직면한 후, 『로마사논고』에서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 절대적인 ‘구성적 과정’을 파악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는 이 ‘구성적 과정’의 원동력으로서 ‘계급투쟁’을 찾아냈다. 그러나 ‘구성적 권력’의 탐구에 바쳐진 이 행로는, 이 『피렌체사』에서 결국 실패에 직면한다. 마키아벨리에 있어서는, ‘계급투쟁’이 종합되거나 ‘지양’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즉 ‘다중’이 담지하는 ‘구성적 권력 = 구성하는 권력’은 ‘구성된 권력’이 된 순간에, ‘구성적 권력’으로부터 이반(離反)하기 때문이다. ‘덕의 비극’이 회귀한다. 실제로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담론이 근대정치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저 그가 처음으로 의지와 미래에 대한 기획으로서 잠재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특히, 의지와 결과, 덕과 운명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문제적인 것으로서 삼았기 때문인 것이다.” ‘단절’은 ‘종합’보다도 현실적인 한에서, 모든 ‘종합’은 모름지기 일시적인 것, 사이비 융화로만 있을 수 있다. 주체화를 요구하는 ‘다중’의 운동은, 최종적으로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네그리에게서는, 이 미완성이야말로, 즉 ‘단절’이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 ‘지양’이 있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복음이다. 그것은 ‘계급투쟁’이 끝날 수 없다는 것, 다중의 주체화의 과정이 열려 있는 것, 비판적인 과정으로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에서 포콕에 대한 네그리의 ‘애매’한 가까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네그리는 포콕처럼 구성적 과정의 중핵에 있는 ‘단절’을 헌정론의 틀 속에 가두고, 그 ‘단절’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된 공화국의 성쇠를 관조하며, ‘덕의 비극’을 비관주의적으로 확인하며 끝나지는 않는다. 네그리에게서 ‘계급투쟁’은 어디까지나 ‘다중’에 의해 담지되는 주체적인 투쟁이며, ‘계급투쟁’이야말로 헌정을 포함한 모든 제도의 근간에 있다. 그렇지만 ‘단절’을, ‘한 명·소수자·다수자’ 사이의 ‘균형’론의 테두리 안에 집어넣은 포콕이, 네그리가 고전적 공화주의를 ‘계급투쟁’의 중심에 있어서 재해석할 때의 중요한 참조항이 된다는 것도 의심스럽지 않다. 포콕은 균형의 관념에 의거하기 때문에, 헌정의 중심에 파고든 ‘단절’ 그 자체를 소거하는 것이 아니며, 바로 그렇기에, 공화국의 질서가 항상 허약한 균형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공화국의 유지를 위해서는 시민이 항상 직접적으로 헌정의 유지를 담지하는 ‘덕’이 높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 그렇지만 그 ‘덕’의 활동은, 뜻대로 되지 않는 귀결에 농락당하고, ‘운명’ 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 인식 위에 서서 보수주의를 선택하는 포콕에게, 네그리는 단호하게 등을 돌린다 ― 그러나 되풀이해서 회귀하는 ‘비관주의’가, 마키아벨리의 ‘구성적 권력’의 탐구의 배후에 항상 들러붙어 있었던 만큼, 포콕은 네그리에게 있어서 친근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네그리는 계속해서 말한다. 이 ‘단절’의 치유하기 어려움에, 어이없게도 ‘구성적 권력’의 비판적 권능의 끝이 없음을 보려고 하는 낙관주의를, 마키아벨리는 반드시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다. “구성적인 잠재력의 닫혀 있음은, 그에게 있어서는 다중의 힘과 그 기획의 내재적인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잠재력에 대립하는 장애로부터, 즉 지금 여기서 다중이 주체가 되는 것의 무능력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정치적 기투에 실패ㅎ나 패배자였다. 다중의 주체화, 민주정의 구성을 향한 모든 탐구는, 결국 마키아벨리를 자신의 이상의 실현을 방해하는 객관적 현실에 직면하게 했을 뿐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어디까지나 고독했던 것이다. 단, 네그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그 고독 속에서도, 결코 ‘구성적 권력’의 사상을 손에서 떼어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의 패배를 웃음과 더불어 받아들이고, 연애의 욕망의 놀이를 통해 개개의 주체에게 숨겨져 있는 힘을 응시하는 희극작품도, 주권을 법적인 정통화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시민의 군사로의 참여에 의해 계속 구성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전술론(Dell’arte della guerra)』도, 혹은 또한 ‘구성적 권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불가결한 ‘적합적 주체’의 신화적 이미지를 제출하는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La vita di Castruccio Castracani da Lucca)』도, 마키아벨리의 불굴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그 사정은, 1527년, 스페인군의 이탈리아 침공에 뒤이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개혁되지 못하고 종언한 것을 지켜본 뒤에도 변함이 없다. 말년의 사신(私信)은 “모든 것은 멸할 것이다”라는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그가 결코 쾌활함도 부드러움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삶을 그 종국까지 추적하면서, 네그리는 『구성적 권력』의 마키아벨리론의 말미에서, 다시금 “마키아벨리의 고독”의 알튀세르에게 인사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근대의 어떤 작가가 말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여느 때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근대 절대주의 국가의 사상가도, 구성을 요구하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도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원리와 민주정의 모든 조건의 부재의 이론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재, 이 공허로부터, 마키아벨리는 문자 그대로 주체의 욕망을 탈취하고, 그것을 프로그램으로서 구성한다. 마키아벨리에게서 구성적 권력은 그런 것이었다.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마키아벨리는 절대주의의 사상가도, 구성을 향하는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도 아니며, 원리와 민주정의, 즉 ‘달성[성취]되어야 할 사실’로서의 새로운 국가를 실현하는 조건의 부재의 이론가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는 뛰어난 구성적 권력의 사상가였던 것이다 ― ‘단절’의 치유하기 어려움이야말로 ‘구성적 권력’을 끝이 없는 운동을 향해 휘몰아댄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우리로서는 이 논의에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네그리에게서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조건의 부재”야말로, 주체의 욕망을 새로운 정치적 ‘구성’을 향해 활기를 북돋는다. 여기서 네그리는, 알튀세르에 대해, 포콕에 대해 행했던 것과 완전히 닮은 전도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 『구성적 권력』 집필 당시의 네그리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 사후 간행된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의 독자는, 이것과 똑같은 전도를 알튀세르 자신이 수행했음을 알고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일련의 마키아벨리론에서, 마키아벨리의 실천적인 ‘불능’과 이론적인 ‘역능’의 반전에 멈춰 섰던 알튀세르는, 그의 “우연성의 유물론”에 대한 논고에서는, “성취[달성]해야 할 사실”로서의 새로운 국가건설의 ‘조건의 부재’를 인식한 마키아벨리야말로 “성취[달성]된 사실”로서의 기존의 국가의 근간에 있는 ‘조건의 부재’ 혹은 ‘우연성’을 폭로하는 것이며, 그 ‘조건의 부재’ 그 자체 없이 “우연성의 필연성”의 인식에 의해, 항상 머물러 있는/그치고 있는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객관적 조건의 부재로부터 주체의 욕망으로 향하는 네그리와, 그 동일한 조건의 부재를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우연성’에서 찾아내는 알튀세르의 차이는 있더라도, 네그리에 의한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의 고독”의 전도는, 이 알지 못했던 알튀세르 자신에 의한 알튀세르의 전도에 정확하게 선행하며, 그것을 정확하게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의 구절에서 네그리의 관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더 이상 구성의 정치적 존재론도, 구성과정으로서의 역사도 아니다. 그런 ‘다중’의 ‘구성적 권력’이 전개되는 장소 바로 앞에서, ‘다중’의 ‘구성적 권력’에 대한 사색을 가다듬은 마키아벨리 그 사람의 고독에야말로, 네그리는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정치적 기투에 실패하고, 그 기투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의 부재에 직면하면서도 여전히, 거기에서 새로운 욕망의 주체를 찾아내려는 주체의 고독이다. 그런 ‘고독 la solitude’한 주체야말로 ‘다중 la multitude’의 주체화를 요구하는 모든 이론적=정치적 활동의 출발점에 있다. 그런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또한, 네그리 자신의 고독일 것이다. 사실 네그리는 다시금 알튀세르와 함께 이렇게 말한다. “마키아벨리를 읽을 때, 우리는 우리를 잊은 듯 그에게 사로잡힌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뭔가 억압된 것에 대한 친근감, 저 기묘한 친근감이다.” 마키아벨리가 억압된 사상가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은, 바로 그가 정치적인 것의 존재의 근간에, ‘조건의 부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포콕도, 알튀세르도, 그리고 네그리도 또한, 그 억압될 사상가의 인식에 주목한다. “마키아벨리”란, 모든 억압을 넘어서 정치를 사고하려고 하는 자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존재론의 지평의 이름인 것이며, 바로 그 지평에서, 네그리는 포콕이나 알튀세르와 함께, 정치의 비극과 동시에 그 가능성이, 혹은 정치의 가능성과 더불어 그 비극이 한꺼번에 개시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정치적 양가성을 둘러싼 교착과 반전에 이것 이상으로 계속 구애되는 것은,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을 것이다. 네그리는 마키아벨리의 뒤를 쫓아, ‘고독’에서 ‘다중’으로의 길을 쾌활하게 밟고 나선다. 그 바닥없이 쾌활한 낙관주의 끝에, 끝도 없는 ‘계급투쟁’의 장소가 열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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