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라캉파의 논점들
― 자크-알랭 밀러의 논의를 중심으로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atプラス』 19호(2014년 2월)
* 치바 마사야의 『너무 움직이지 마라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를 국역 출판한지 좀 되었으나 반응이 별로 없어서 내심 걱정하고 있다. 치바의 책에 대해 내용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문체는 영 내 스타일이 아니다. 아무튼 옮긴이 해제도 붙이지 못한 채 출간된 책이라 내심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마음의 빚을 털기 위해 2개의 글을 준비했다. 하나는 지금 이 글이다. 뒤에 보면 치바의 책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다른 하나는 이 글의 필자와 치바 등이 나눈 대담을 번역한 것인데, 이것도 곧 공개할 예정이다.
1. 들어가며
플라톤(다이몬과 광기)과 아리스토텔레스(천재와 우울)의 시대에도 광기가 철학적 모티프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광기와 인간 사이의 떼어낼 수 없는 관계가 서양사상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된 것은 어쩌면 칸트 이후일 것이다.
가령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1789)에서 “지각의 랩소디”는 정신의학자가 정신분열증의 환각 내지 자아 장애에 대해 금세기에 이르기까지도 말하고 있는 논의를 확실하게 선취했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는 근원적 통각에 의해 산출되는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라는 표상이 다른 모든 표상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통은 대체로 생각할 수 없는 것들까지도 표상으로서 난무하게 된다(환각). 혹은 표상이 ‘나’의 것이라는 점이 확인되지 않으면, ‘나’는 그것이 의식하고 있는 여러 가지 표상에 따라서, 몇 가지 다양한 ‘자기’를 갖게 된다(자아장애, 인격의 이중화).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의식이 갖는 광기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이런 의미에서 말년의 칸트가 『실용적 견지에서 본 인간학』(1798년)에서 광기에 흥미를 갖고 이를 분류하려 시도한 것은 일종의 이론적 필연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똑같은 사태는 문학에도 지적할 수 있다. 푸코(1970년)에 따르면, 17세기 이후의 유럽에서 행해졌던 “광기의 감금”이라는 원리적 선택은 ― 이른바 “배제된 것의 회귀”처럼 ― 19세기 이후의 문학 속에서, 광기의 세계를 갑자기 출현시켰다. 19세기 이후, 광기라는 문제를 빼놓고, 더 이상 사상이나 문학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분수령이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있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가령 칸트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 근대적 자기의 구조였다고 한다면, 그 구조의 발견은 근대적 자기를 확고한 것으로 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그 자기라는 것이 고장나버릴 수 있다는 것,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그 구조적 필연으로서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들춰낸 것이다.
イマニュエル•カント, 『純粋理性批判』, 熊野純彦訳, 作品社, 2012年.
그 ‘광기’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친 서양사상의 한 가지 목표(objection)가 됐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은 바로 칸트가 말하는 바의 “나는 생각한다”를 수반하지 않는 표상의 존재와 그 표상의 복잡한 운동 메커니즘을 파악하기 위해 정교화된 개념이다(“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라캉의 말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칸트적 의미에서도 읽을 필요가 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증상을 만들고 그로부터 고통과 여러 가지가 뒤섞인 향락을 얻고 있다. 그것이 무의식이다. 프로이트는 그 무의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콤플렉스)라는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1950년대 라캉의 작업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이 무의식을 일종의 초월론적 시스템으로 체계화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에게서의 (말실수나 증상을 포함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언어사용의 메커니즘인 상징계는 <아버지의 이름>(le Nom-du-Père)이라는 특권적 시니피앙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그런 상징계에 지배되는 인간은 신경증자라고 불리며, 이른바 ‘정상인’과 이웃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이 시기의 라캉에게 신경증과 정신병은 분명히 감별 진단이 가능한 것인데, 그것은 이 <아버지의 이름>의 유무로 이 둘이 나뉘기 때문이다. 즉, 정신병자에게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배제되고 있다.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상징계를 지닌 그들은, 시니피앙(말)이 머릿속에서 난무하는 정신 자동증으로 대표되는 “지각의 랩소디”의 먹잇감이 되며, 배제된 <아버지의 이름>을 둘러싸고 생기는 “과정”을 따라 망상을 점차 발전시킨다. 이리하여 50년대 라캉의 이론에서는 정신병자만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예외자로 기능할 수 있다고 지목됐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이론 확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자도 있었다.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1972년)에서 비판했던 것은, 프로이트처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무의식의 유일하게 가능한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하는 입장 및 라캉처럼 “과정”을 정신병에서만 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즉, 무의식은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인간이 자신의 ‘과정’을 살 수 있는 것이며, 신경증·정신병·도착 등 여러 가지 병의 임상적 형태는, ‘과정’이 오이디푸스적인 벽에 부딪힌 결과로서 생기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여겨진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가타리는 모든 인간이 가진 ‘스키조 과정’을 해방하는 것을 사상적, 실천적 목표로 삼았다. 즉 그들은 라캉이 정신병자에게서만 찾아낸 ‘과정’ ― 즉 오이디푸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 을 모든 인간에게서의 가능성으로 재파악한 것이다.
한정된 지면으로는 충분히 검토할 수 없으나, 들뢰즈=가타리 및 이들과 동시대적인 몇몇 사유는 이런 라캉 비판의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 이에 대해 라캉파는 어떻게 대답할까? 확실히 정면에서 재반론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더라도, 필자가 보기에, 라캉의 사후, 현대 라캉파 1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론적 작업은 이런 비판에 대해 다소나마 자각적인 듯하다. 아무튼, 이른바 프랑스 현대사상의 반라캉적 모티프와 현대 라캉파의 논의를 비교하는 것은, 이 과거의 사상을 다시금 현대의 것을 삼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 작업의 단초를 시도하려고 한다.
2. 상징계의 쇠퇴와 <아버지>의 복수화
라캉과 들뢰즈=가타리의 대립은, 전자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인간에게 유일한 초월론적 시스템으로 파악한 반면, 후자는 그것을 비판한 것이라는 식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 견해가 유효한 것은 고작 1958년 전반기까지의 라캉 이론일 뿐이다.
현대 라캉파의 지도자 자크 알랭 밀러 2에 따르면, 상징적 질서(대타자 l’Autre)가 ‘정상’적인 형태로 (즉,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통제된 형태로) 기능했던 것은 “정신분석의 프로이트적 시대”뿐이다. 즉 그것은 과거의 것이다. 한편, “정신분석의 라캉적 시대”는 오히려 “대타자의 부재”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그는 말한다. 무슨 말인가? 라캉은 세미나 5권 『무의식의 형성물』(1957-58년)에서 “대타자의 대타자”, 즉 상징계(=대타자)를 근거짓는 다른 대타자가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듬해 세미나 6권 『욕망과 그 해석』(1958-59년)에서 그는 갑자기 “대타자의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앞의 말을 뒤집어버린다.
pdf(해적판)
pdf(해적판)
“이것이 ‘대타자의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러분께 말씀 드렸을 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수많은 시니피앙의 그 어떤 표현의 구체적인 연속을 보증하는 그 어떤 시니피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빗금을 그은 A[대타자]라는 용어가 도입되는 것은 여기에서입니다.” 3
ジャック•ラカン, 『無意識の形成物』, ジャック=アラン ミレ一ル編,
俊々木孝次ほか訳, 岩波書店, 2005年
작년(2013년)에 정식으로 출판된 이 세미나 6권의 뒤표지에는 편집자 밀러가 쓴 설명문이 붙어 있다. 다음과 같은 이 문장은 이 시기의 라캉의 입장 변경이 가진 임팩트를 충분하게 나타내줄 것이다.
“동물이라는 종은 자연의 나침반을 갖고 있으며, 그 나침반은 [각각의 종에] 독자적이다. 인간이라는 종에 있어서 나침반은 복수적이다. 인간에게서 나침반은 시니피앙의 조합, 담론에 속한다. 이런 것이, 해야 할 것을 [인간에게] 알린다. 어떻게 사고하는가, 어떻게 향락하는가, 어떻게 번식하는가를 알리는 것이다. … 최근 시대까지, 우리의 나침반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똑같은 극을 향했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극이다. 가부장제는 인류학적인 불변의 것이라고 믿어졌다. 가부장제의 몰락은 신분의 평등, 자본주의의 힘의 증대, 기술의 지배에 의해 가속화됐다. 우리는 <아버지>의 시대의 출구라는 국면에 이르고 있다. …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시대에 있었다. 그는 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일을 저질렀다. 교회는 그것을 깨닫게 됐다. 라캉은 프로이트에 의해 열린 길을 추종했다. 그러나 그 길은 <아버지>가 하나의 증상이라고 상정하라고 그에게 부과했다.”
이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적어도 라캉은 1959년 시점에서, 가부장제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해 지배되는 무의식을 표준적인 모델로서 간주하기를 그만뒀다. 이 논의는 그 후에도 발전된다. <아버지의 이름>은 1960년대 전반에는 복수형으로 “아버지의 이름들(noms-du-père)”로 철자화되며, 1970년대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간의 심적 구조의 위상학적(topological) 매듭을 연결시키는 복수의 방법 중의 한 가지 종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버전이 다른 아버지(père-version)’라는 말년의 라캉의 말장난은 그렇게 읽을 필요가 있다).
현대의 라캉파에서 얘기되는 “배제의 일반화”, “부성 은유[=<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은유]는 사회적으로 공유된 망상적 은유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앞서 말한 1959년의 라캉의 논의로부터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대타자가 궁극적으로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보증되지 않는다는 것은, 작금의 ‘정상’으로 간주된 대타자도 일반화된 의미에서의 배제를 그 안에 끌어안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 배제로부터 귀결하는 집단적 망상을 살고 있으나, 그것이 ‘망상’이라고 불리지 않게 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한 ‘오이디푸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모티프는 라캉에게도 공유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과도한 단순화는 삼가야 하지만, 현대의 일본에서도 과거에 있었던 종신고용제도와 함께 가능해진 가부장제는 쇠퇴하고, 그것에 동반해 연애나 결혼의 모습은 실로 다양화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더 이상 대문자로 쓸 수 있는 <아버지>는 무효화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의 사상의 문맥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안할 수 있다. 1998년부터 2003년에 걸쳐, 현대에서의 ‘상징계의 쇠퇴’를 주장한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에 대해서, 정신과의사인 사이토 타마키斎藤環가 “상징계가 쇠퇴했다고 한다면, 모두 정신병에 걸려버린다”고 반론해 조금 논쟁이 된 적이 있다. 4 라캉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현대에서의 상징적 질서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아버지의 기능은 프로이트의 시대에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쇠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밀러에 따르면, 아버지의 기능의 쇠퇴는 전혀 현대에 한정되는 얘기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 왕의 머리를 잘라버린 프랑스혁명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며, 그 시점부터 이미 “아버지는 더 이상 사회적 명성의 보유자로서도, 왕년의 입법자로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5
사이토 다마키의 책들
다만 <아버지>가 더 이상 자명한 존재가 아니게 됐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될 가능성을 갖는다는 유토피아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라캉이 세미나 『생톰』에서 말했듯이, “<아버지의 이름>을 이용한다는 조건에서, <아버지의 이름> 없이 끝낼 수 있다”(S23, p.136). 즉 <아버지>가 부재하기 때문에, 겉보기(semblent)로서의 아버지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3. 보통정신병과 감별진단의 행방
<아버지>의 위상을 둘러싼 이런 이론적 변화와 평행하여, 1998년에 프랑스의 라캉파에서는 “보통정신병(psychose ordinaire)”이라는 용어가 제창됐다. 6
현대의 정신병(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정신분열증이나 협의의 파라노이아에 대부분 상당한다)에는, 옛날의 증례처럼 눈부신 환각이나 망상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정신병 구조를 가지면서도 발병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증례가 많다는 것이 자주 지적됐다. 지금까지 그런 증례에는 “하얀 정신병(psychose blanche)”이나 “미발병 정신병(psychose non-déclenchée)” 같은 진단명이 붙어졌다. 그런 증례는, 슈레버처럼 뚜렷한 발병(déclenchement)을 나타내거나, 남다른(extraordinaire) 망상을 개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양한 것으로부터 탈접속(débranchement)한다. 이런 증례는, 슈레버처럼 화려한 망상을 개화시키는 정신병(남다른 정신병psychose extraordinaire)과는 달리, <아버지의 이름>의 배제로부터 귀결하는 분명한 정신병의 표식(고전적 요소 현상 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한다.
다만 ‘보통 정신병’이라는 진단명이 그런 증례에 대해 곧바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통 정신병’은 오히려 ‘신경증이다’라는 확실한 증거가 보이지 않을 때, 숨겨진 정신병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 진단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진단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도 밀러는 말한다. ‘보통 정신병’이라는 용어는 발병하는 대신에 탈접속이라는 모드에서 나타나는 현대적인 정신병을, 미세한 특징에 의해 진단 가능케 하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 미세한 특징을, 밀러는 다음의 세 가지 외부성의 양태에 의해 예시하고 있다. 7
(1) 사회적 외부성 : 루소를 필두로 하여, 정신분열증자의 방랑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자주 관찰되었지만, 이처럼 사회 속에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는 외부성을 가리킨다. 현대적인 정신병에서는, 직장이나 가정으로부터 탈접속하다는 특징이 보인다. 반대로, 사회(직장)에 대해 과잉 동일화하는 형식에서의 보통정신병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일자리를 잃는 것을 계기로 발병하는 것도 있다고 밀러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일자리를 갖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2) 신체적 외부성 : 보통 정신병에서는 신체가 자기에 접속되지 않고, 간극을 내포하는 것이 있다. 이 실례는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기술한, 자기의 신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체험이다. 이런 신체의 불안정성에 대한 대처 행동으로서, 밀러는 ‘타투’를 들고 있다. 즉, 그들에게서 “타투는 신체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아버지의 이름>이 된다”는 것이다.
(3) 주체적 외부성 : 보통 정신병에서는 독특한 공허감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런 공허감은 신경증에서도 보일 수 있지만, 보통 정신병의 경우는 그 공허감을 변증법적으로 부정할[변증법적 부정을 할] 수 없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한다.
밀러에 따르면, 보통 정신병이라고 하는 용어의 도입은, 그 이론적, 임상적 귀결로서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초래한다.
한편으로는, 보통 정신병이라는 존재를 깨닫게 된 이후, 임상가는 신경증의 진단의 정밀화를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환각이나 망상이 없다고 해서 신경증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1950년대의 라캉이 이론적 전제로 삼았던 <아버지의 이름>의 유무에 의한 신경증/정신병의 감별 진단의 원칙이 유지되게 된다.
반대로 다른 한편에서는 “정신병의 보편화”라는 방향을 얻게 된다. 정신병이 이전 시대처럼 명확한 발병을 나타내지 못하고, 게다가 신경증과 정신병을 나눈다고 간주됐던 <아버지의 이름>의 기능이 쇠퇴하고 있는 이상, 정신병이라는 병리가 희석된 형태로 만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과 호응하듯이, 최후기의 라캉은 “사람은 모두 광인이다. 달리 말하면 망상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신경증/정신병의 감별진단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는 이론도 또한 라캉으로부터 끄집어내지는 것이다. 토마스 스볼로스 8는 이 두 가지 방향성은 물리학에 있어서의 뉴턴과 아인슈타인 같은 관계에 있으며, 양립 가능하다고 말했다. 즉, 신경증과 정신병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임상과, “사람은 모두 광인(정신병)”이라고 위치짓는 임상이 양립할 수 있다는 절충적인 견해가 나오는 것이다. 9
* 토마스 스볼로스의 글은 다음 사이트를 클릭. http://www.lacan.com/symptom10a/ordinary-psychosis.html
4. 섹슈얼리티의 변화 : ‘노출’과 ‘중독/의존’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도 정신분석 이론에는 수많은 비판이 가해졌다.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함께 되는 것을 욕망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도식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친 유럽에서 국지적으로만 타당한 것일지도 모르고, 보편성을 갖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는 모계사회인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민족을 연구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여러 논고(「애정 생활의 심리학愛情生活の心理学」, 「문화 속의 편치 않음[문명 속의 불만]」 등)를 읽으면, 그가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문명과 성에 대한 사회적 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문명인’이라고 부르는 인간(근대 이후의 유럽인이라고 해석하듯이)에게 있어서는, 유아기의 성욕이 인세스트[근친상간] 금지의 관습에 의해 제한을 얻음으로써 그 완수가 아무런 결실도 없는 채 끝나는 것이 그/그녀들의 성애생활을 규정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리고 이 욕동의 단념에 의해 얻어지는 결여가 우리에게 다양한 대상을 욕망시키고, 다양한 증상을 만들고, 승화를 통해서 다양한 창조를 행하게 하는 원천이라고 프로이트는 파악했다. 즉, 우리의 섹슈얼리티, 욕망, 증상, 창조는 초시대적인 보편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결여의, 이른바 함수로서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에 대한 제도나 상황이 변화한다면, 우리의 섹슈얼리티도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확연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그 어떤 제한도 철폐한, 해방된 성의 모습도 결코 좋은 결과를 이끄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성의] 제도가 바뀌면, 다른, 혹여나 더 중대한 희생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여부”라는 의구심을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정신분석에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캉이 1970년대 전반에 행해진 지적 ― 현대의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문명에 있어서, 바로 욕망이나 섹슈얼리티에 있어서의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지적 ― 은 이런 프로이트의 고찰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시기의 라캉은, 이 변화를 담론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밀러가 말하는 “정신분석의 프로이트적 시대”에서의 주체(근대적 주체)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바탕으로 한 “주인의 담론”에 의해 구동됐다고 한다면, 신자유주의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석권하는 현대에서의 주체의 모습은, 더 이상 똑같은 주인의 담론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라캉은 “자본주의의 담론”을 발명한 것이다[그림1].
라캉의 담론의 도식은 각각 좌우상하의 네 개의 위치를 갖고 있다[그림 2]. 좌측 상단은 동인(agent), 좌측 하단은 진리(vérité), 우측 상단은 타자(autre), 우측 하단은 생산물(production)의 위치이다. 이 네 개의 위치에, 주인의 시니피앙(S1), 지식(S2), 빗금이 그어진 주체(), 대상 a(a)의 네 개 항처럼 배치되느냐에 따라서, 각각의 담론은 규정된다. 기본적인 법칙으로서는, ‘진리’에 의해 뒷받침된 ‘동인’이 ‘타자’에게 명령하고, 그 결과로서 ‘생산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진리’와 ‘생산물’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림 1: 주인의 담론과 자본주의의 담론
주인의 담론 자본주의의 담론
그림 2: 담론의 도식
주인의 담론은 시니피앙 연쇄(S1 → S2)에 의해 주체()가 대리 표상됨으로써, 원초적으로 있었다고 상정되는 향락을 잃고, 이로부터 잉여향락(a)이 생긴다는 구조를 나타낸다. 즉, 이 담론에서는 결여(상실)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리하여 주체()와 대상 a 사이에는 판타슴(◇a)의 구조가 생기고, 주체는 그 판타슴 속에서 결여를 추구하는 욕망을 품게 된다.
자본주의의 담론은 주인의 담론의 좌측(S1/)의 상하를 역전시킨 것이다. 그것에 수반해, 주체()와 대상 a는 실선으로 묶이게 된다. 이 실선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후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잉여향락은 이제 계산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는 어떤 욕망의 대상을 통해 향락을 얻으려고 시도하지만, 거기서 제공되는 상품은 시장 원리라는 질서를 따르고, 계산 가능성의 논리에 의거한다. 이리하여 현대의 우리는, 대량 소비용의 균질화된 공업 제품을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차례차례 추구하는, 끝나지 않는 소비에 농락당하게 된다. 즉, 일찍이 욕망을 구동한 결여는, 상품에 의해 메워지게 된다. 달리 말하면, 차례차례 새로운 상품이 주체에 적용됨으로써 주체의 욕구나 요구를 일시적인 형태로 곧바로 만족시켜주게 될 때, 욕구의 피안에 나타날 터의 결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라캉은 생트안느 병원에서의 세미나 『정신분석가의 지식』(1971~72년)에서 “자본주의의 담론은 거세를 배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일찍이 욕망을 구조화한 상실(결여)의 무시 또는 무효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담론에 있어서 상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실 없이 향락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주체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츠이키 코스케(立木康介)의 최근작 『노출하라, 고 현대문명은 말한다(露出せよ, と現代文明は言う)』는 바로 이 상실(결여)의 무시 혹은 무효화를 주축으로서 현대문명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츠이키는 어쩌면 우리 인간의 섹슈얼리티라는 것은 퇴화하고 있는 기능이 아닌가? 라는 프로이트의 의심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立木康介, 『露出せよ、と現代文明は言う』, 河出書房新社, 2013年.
욕동의 원천으로부터의 대상의 분리(대상상실)가 적절하게 수행되지 않은 곳에, 과연 섹슈얼리티의 구조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츠이키가 다양한 문화 현상이나 현대예술의 예를 인용하면서 명료하게 제시하듯이, 현대문명은 ‘표상’(거기에 없는 것을, 대리함으로써 표현하는 시도)으로부터 ‘노출’(거기에 있는 것을, 벌거벗은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로 크게 조타를 꺾는다[방향을 바꾼다]. 과거 시대의 멘탈리티가, 그 장소에서 이미 부여되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중요성을 주고 있다고 한다면, 현대 멘탈리티는 주어진 것을 부정하는 계기를 잃고 있다. 그리고 상실을 더 이상 없는 것이라며, “뭔가가 무엇이든 향락한다”를 목표로 하고, 자신이 “우회에 의한 그 어떤 손실도 겪지 않고 생각한 그대로 향락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를 향해 과시하는 듯한 도착적 표현이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되고 있다. 츠이키의 논의는, 라캉이 자본주의의 담론을 이론화함으로써 조명한 현대 문명의 길의 끝에, 지금 현재 보여왔던 것을 ‘노출’이라는 키워드로 붙잡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의미에서 『노출하라, 고 현대문명은 말한다』는 21세기의 현 시점에서의, 우리의 시대의 ‘문화 속의 편치 않음[문명 속의 불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결여를 기반으로 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욕망이나 향락, 섹슈얼리티는, 앞으로 어디로 향할까? 밀러는 2011년 강의 『단 하나뿐인 <일자>(l’Un-tout-seul)』 10에서, 현대의 향락의 모습에 대한 대담한 방향전환을 제시했다. 우선 이 강의의 방향성을 요약한 인터뷰에서의 밀러의 발언을 살펴보자.
라캉이 결론을 내린 것은, 낡은 모델이 확실하지 않게 되며, 섹슈얼리티가 융합적인 ‘일자’(«Uu» fusionnel)로부터 ‘단 하나뿐인 <일자>(Un-tout-seul)’로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에, 자신의 길이 있다! 각각에, 자신이 향락하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라캉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자체애[자기애]라고 불렸습니다. … 이런 이유 때문에, 21세기의 일상생활의 일반 모델은 중독(addiction: 의존)입니다. ‘일자’는 자신의 마약과 더불어 홀로 향락합니다, 그리고 모든 활동이 마약(drogue)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포츠, 섹스, 일, 스마트폰, 페이스북…. 11***
인간의 기존의 섹슈얼리티가 남성과 여성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에로스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계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성관계의 부재의 시대의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결여를 포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포스트-성관계의 부재”라고도 해야 할 섹슈얼리티가 출현하고 있다. 그 모델을, 밀러는 프로이트의 “자체애”나 “중독”, “마약” 같은 실로 자극적인 용어로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상기하고 싶은 것이 『노출하라, 고 현대문명은 말한다』와 거의 동시기에 간행된, 치바 마사야의 『너무 움직이지 마라 :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이다. 치바의 논의는, 지금까지의 들뢰즈 이해가 마이너리티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일자>로서 하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접속적 들뢰즈’에 치우쳤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접속적 들뢰즈’의 대극에 있으면서, 언제나 들뢰즈의 사고 속에 잠재하는 ‘절단적 들뢰즈’를 들뢰즈의 텍스트 안에서 끄집어내 보여준다. 치바가 취하는 입장은 이 두 가지 극단적인 들뢰즈 사이를 왕래하며, 그 두 가지 사이의 중간에 머물 것을 제창하는 것이다.
헌데, 치바의 논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도 또한 ‘셀프 엔조이먼트(≒자체애)’, ‘중독’, ‘마약’이라는 키워드를, 고전적인 구조주의적 라캉(대략 50년대의 라캉 이론에 상당할 것이다)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장치로 등용한다는 것이다.
그림 3: 프로이트의 심적 장치
들뢰즈에 따르면, 정신분석이 생각하는 심적 시스템은, 욕망이 기억 흔적과 정서의 시스템에 대해 투여[투자]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마 유명한 프로이트의 심적 장치의 모델[그림 3]을 말하는 것이리라. 프로이트의 심적 장치는, 지각 말단에 있어서 외부세계로부터의 자극이 수용되는 것에서 시작되며, 그 자극이 기억흔적으로서 몇 층에 걸쳐 다양하게 처리되고, 최종적으로 운동신경에 이르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몇 층에 걸친 기억 흔적의 층의 일부가 무의식이다. 중요한 것은, 외부세계로부터 얻어진 유아기의 만족 체험의 기호가, 기억 흔적(시니피앙)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원초적인 만족 체험 그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으며, 결여(상실)를 안에 끌어안고 있다. 그 대신 이 결여를 추구하는 운동(욕망)이 무의식에 있어서 전개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욕망을 무의식에 있어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들뢰즈는 마약에는 “욕망이 지각의 시스템을 직접 투자[투여]한다”는 특수성이 있다고 한다. 즉, 마약은 기억 흔적에 의해 구성되는 시스템, 즉 시니피앙에 의해 구성되는 프로이트=라캉적 무의식의 층을 단숨에 뛰어넘어, 욕망을 직접적으로 지각으로서 만족시킬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12 그러니까 들뢰즈는 약물 분석을 정신분석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하는 것이다.
혹은, 치바가 주목하는 ‘의존’은 마치 아이가 한눈을 판 끝에 찾아낸 대상에 몰입하는 시야 협착적인 의존이다. 그것은 뛰어나게 비의지적인 것이며, 시니피앙의 연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과성을 비의미적으로 절단한다. 13 마약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기억 흔적(시니피앙)의 층을 통과하지 않는 것에 적극적인 의의를 찾아내는 논의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정신분석의 관점에서는, 실제로 마약에 의해 생기는 사태가 정말로 무의식을 뛰어넘고 있는지 여부, 혹은 들뢰즈가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신분석에서는 욕동[충동]이나 향락이라고 불리는 것 아닌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논의가 필요해질 것이다. 또한 라캉파의 관점에서는, 치바가 말하는 비의미적 절단이 “스키조 키즈”처럼 모종의 내키는 대로, [의식이] 흐릿한 형태로 행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절단은, 우리의 신체에 더 이상 떼어낼 수 없는 듯한 형태로 새겨져 있는, 우리 각각의 향락의 고립의 증거는 아닐까? 그러나 결여를 기반으로 하는 섹슈얼리티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 지평을 파악하기 위해, 현대 라캉파와 들뢰즈파의 양자가 ‘마약’, ‘의존’ 같은 은유를 사용하는 데에는 충분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5. 증상에서 생톰으로
앞 절에서 본 “단 하나뿐인 <일자>” ― 개개인마다 고립된 향락의 방식 ― 에 대한 주목은, 사실상 증상에 대한 논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여기서는 현대 라캉파에 있어서의 증상론을, 증상에서 생톰으로라는 절개면을 통해 개괄해보자.
우선 확인해 두어야 하는 것은, 정신분석에서의 증상은, 증상이 메타포(은유)로서의 성질을 갖는다는 프로이트의 발견에서 유래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의 히스테리 환자가 드러낸 “컵으로 물을 못 마신다”라는 증상은, “자신이 싫어하는 인물이 기르던 개에게 컵으로 물을 마시게 했다”라는 부정적인 장면을 바꿔버린[치환한] 메타포가 된다. 증상은 지금 거기에 없는 것(싫어하는 인물이 행한 견디기 힘든 행동)을 대리하는 표현이며, 그 증상의 원인이 된 사건을 상징적 표현으로 가공한 것이다. 증상은, 그 증상을 가진 환자 본인도 눈치 채지 못한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려 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증상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다면, 그 증상이 소실된다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라캉은 이런 증상의 원리를, 어떤 시니피앙이 다른 시니피앙에 의해 치환되는 메커니즘으로 재파악한 것이다.
이처럼 정신분석에서의 증상론은, 증상이 지닌(시니피앙의 치환에 의해 만들어진다) 메타포로서의 성질을 중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증상을 모조리 다 해석해도 여전히 증상이 소실하지 않는 사례를, 정신분석가들은 여러 차례 만나게 됐다. 증상의 시니피앙으로서의 측면을 침전시키는 것만으로는 증상이 소실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상은 시니피앙 이외의 측면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프로이트는 그런 의문에서 “음성 치료 반응”이나 “죽음의 욕동[충동]” 같은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을 평생토록 계속했다. 이렇게 라캉의 말로 하면, 증상이 지닌 향락으로서의 측면이 부각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정신분석이 상당히 진행되어도, 사람이 자신의 증상을 놓으려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증상이 지닌 ‘향락의 핵’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증상의 메타포로서의 측면이 아니라, 향락으로서의 측면을 더 중시하는 논의가 생기게 됐다. 라캉 자신이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증상(symptôme)에서 생톰(sinthome)으로 그의 증상론을 전회시킨 것도 이런 이행에 상응한다. 또한 밀러는 약 30년에 걸친 자신의 강의에서, 이 이행을 다양한 형태로 가다듬어왔다. 예를 들어, 생톰을 “증상과 판타슴의 혼합물”이라고 하는 1986-87년의 강의 『기장을 이루는 것(記章をなすもの)』 14에 있어서의 재정의는, 메타포로서의 증상과 그 증상 속에서 판타슴을 통해 주체가 은밀하게 얻고 있는 향락 사이의 혼합물로서 라캉의 생톰 개념을 재파악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1999년의 강의 『분석 치료에 있어서의 실재계의 경험』 15에서는, 증상이 지닌 이 두 측면은 “의미작용의 도래”와 “신체의 사건”의 두 가지로 재파악됐다. 이 정리는 메타포에 의해 의미작용을 발생시키는 증상과, 신체의 수준에서의 만족을 담당하는 증상이라는, 증상이 지닌 두 가지 측면을 나눠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게다가 2011년의 『단 하나뿐인 <일자>』에서는, 신체의 사건으로서의 생톰이 우선 처음에 있으며, 이 신체의 사건을 기점으로서 의미론적인 증상을 전개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식으로 양자의 관계가 위치지어졌다. 즉, 프로이트적인, 메타포적인 의미를 지닌 증상은 모두, 그 뿌리에 향락의 “단 하나뿐인 <일자>”, 즉 신체의 사건을 갖고 있다고 간주됐다. 모든 주체가 ‘의존’, ‘마약’ 하에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 고립된 향락이 주체 속에서 항상 반복되고, 주체가 스스로 떼어낼 수 없는 형태로 그 향락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 라캉파의 논의에서는, 이제 증상의 의미를 해독하고, 그 의미를 환자에게 베푸는 것의 중요성은 떨어진다. 오히려 증상이 뛰어나게 신체에 관련되는 국면, 즉 순수한 향락의 측면을 갖고 있다는 것에 분석가는 주목해야 한다고 간주된다. 다만, 그것은 시니피앙을 중시한 해석이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시니피앙은 아직도 라캉파의 실천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적인 증상의 해석은 시니피앙에 의해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삭감하는 방향으로 시니피앙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즉, 이미 어떤 증상에 대해 다른 의미를 덧붙이고, 의미의 포화상태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증상이 지닌 의미를 깎아 없애고, 모든 주체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무의미의 시니피앙(요소 현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신체 수준에서의 향락을 파악하는 것이 현대 라캉파의 해석에 있어서 내깃돈으로 걸려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의 기법은, 1964년에 라캉 자신이 “해석이란 주체에 있어서의 무의미의 핵을 추려내는[끄집어내는 것이다”(S11, p.226)라고 말했듯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라캉 이론 속에서 배태됐던 것이다.
밀러는 이런 현대적 해석을 “역방향의 해석(interprétation à l’envers)”이라고 부르고, 증상에 의미를 덧붙이는 순방향의 해석과는 구별한다. 16 이런 역방향의 해석이야말로 주체를 자신의 향락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현실계에 있어서의 신체의 사건을 취급할 수 있는 기법이다. 이 해석에 의해 꺼내지는 것은, 다른 누구와도 다른 주체에 고유한 향락의 모드, 즉 “단 하나뿐인 <일자>”라고 불리는 고립된 향락의 모습이며, 다른 시니피앙 S2로부터 격리된 “단 하나뿐인 시니피앙 S1”으로서의 요소 현상(phénomène élémentaire)이다. 17 이리하여 주체는 스스로에게 고유한 향락의 모드와 “잘 해가는 것(savoir y faire)”, 혹은 향락의 모드를 변경할 가능성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밀러가 말하듯이, 현대의 라캉파에게 “증상을 읽는다”는 것은 증상의 의미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상의 무의미를 읽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18
츠이키도 소개하고 있듯이, 1970년대 라캉에 의한 “생톰” 개념의 도입 이후, 라캉파는 “증상의 ‘의미론’(증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독해하는 것)으로부터 ‘어용론[화용론]’(증상이 무엇에 도움이 되는지를 밝혀내는 것)으로의 변동shift”을 어떻게 이론화하는가에 전념했다. 그 결과, 위에서 서술한 다양한 논의가 산출됐던 것이다. 이 이론은 조이스 같은, 우리를 당혹으로 데려가는 전대미문의 에크리튀르를, 그의 생톰으로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로부터는, 창조성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6. 남성의 식에서 여성의 식으로
지금까지 상징계, 정신병, 섹슈얼리티, 증상이라는 각각의 관점에서 현대 라캉파의 논의를 소개했다. 물론 이것은 망라적이라는 것에는 매우 거리가 먼 소묘 정도의 것이지만, 현대 라캉파의 대체적인 방향성은 전달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영역에서의 라캉파의 이론의 전회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까? 필자가 보기에, 이 일련의 움직임은, 라캉이 세미나 20권 『앙코르』(1972-73년)를 전후로 제시한 “성별화의 식性別化の式”[그림 4]에서의, 남성의 도식에서 여성의 도식으로의 이행과 깊게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림 4: 성별화의 식
확인하자. 라캉의 성별화의 식은, 남성의 식과 여성의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식의 발명에 의해, 단일의 예외에 의해 보편을 구축하고 안정화시키는 기존의 고전적 라캉이론은 남성의 식 속에 거두어지게 됐다. 남성의 식이란, 하나의 예외를 이용함으로써 ‘모두(tout)’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논리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제시한 원-아버지의 신화에서는, 어떤 원시 부족에서 막강한 힘을 가졌던 원-아버지가 모든 여성을 소유했다고 여겨진다. 이 원-아버지는 부족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 거세되지 않으며(), 다른 모든 남성에 대해 예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외의 존재가 보편(‘모든 여성’, ‘모든 남성’)을 안정화시키는 것이다. 19 첨언하면, 아즈마 히로키가 『존재론적, 우편적』(1998년)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른바 “부정신학적”인 라캉, 즉 단일한 결여=예외에 의해 상징 시스템 전체를 안정화시킨다는 라캉의 상(像)은, 이 남성의 식으로 거의 수렴된다.
한편, 여성의 식은 그런 보편(‘모두’)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보편의 양화자量化子 ‘∀’가 부정되어 ‘’라고 기록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남성의 식에서의 패러다임이 원-아버지-신화라면, 여성의 식에서의 그것은 돈 후안(Don Juan)의 전설이다. 라캉은 세미나 10권 『불안』(1962-63년)에서 이미 돈 후안이 ‘여성의 꿈’이라고 언급하고,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향락의 모습에 주목했다. 『앙코르』의 여성의 식의 논의에서 돈 후안이 중요해지는 것은, 그가 “여성들을 한 명 한 명(une par une) 다루기”(S20, p.15) 때문이다. 돈 후안은, 모든 여성을 소유하는 원-아버지처럼 여성을 하나의 집합으로서 움켜쥐고 에워싸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여성을 항상 새로운 플러스 1로서 취급한다. 즉 그에게 여성이란 “모두가 아니다(pas tout)”, 즉 “모두”라는 보편(집합)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 논리에서는 이미 보편을 성립시키기 위한 예외가 불필요해진다. 20
정신분석가 마리 엘렌느 브루스에 따르면, 전중기 라캉에서 후기 라캉으로의 이행은, 보편을 가능케 하는 남성의 식으로부터, 더 이상 보편이 불가능해지는 여성의 식으로의 이행으로 파악된다.
후기 라캉을 읽으면, 라캉이 (정관사 le, la가 붙은) 보편적인 것을 (부정관사인) ‘un, une’으로 점차 대체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이라는 것(l’homme), 여성이라는 것(la femme)이 어떤 남성(un homme), 어떤 여성(une femme), 어떤 해결법, 어떤 증상, 어떤 이름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 이행은, 완전하고 조직화된 클래스의 보편성으로부터 부정성(不定性), 비완전성으로 향한다. … 이 ‘le, la’는, 정해진 집합을 참조하는 것이, 집합에 있어서의 외부인 하나의 점의 존재를 요청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라캉은 이 점에 관해 논리학을 원용한다. ‘le, la’을 사용하는 것은, 집합의 기능에 대해 예외를 이루는 한 가지 점을 존재하게 만든다. 『앙코르』의 이른바 성별화의 식의 표의 좌측 부분을 여기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 식은 남성적 기능에 대응하는 것이다. … 이것의 귀결은 정신병은 더 이상 예외와의 관계에 있는 심적 조직화로서는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21
후기 라캉은, 정관사를 가능케 하는 예외와 보편의 논리(남성의 식)로부터, 더 이상 정관사나 보편이 성립하지 않는 논리(여성의 식)로 이행한다. 후자의 논리에 있어서는, 보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부정관사에 의해, 하나씩 열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 글에서 개괄한 사항을 잘 설명해줄 것이다. 즉, <아버지>에 대해서는, 대문자로 적을 수 있는 유일한 “<아버지의 이름>(le Nom-du-Père)”으로부터 복수의 “아버지의 이름(noms-du-père)”로의 이행이. 향락과 증상에 대해서는, 결여를 기반으로 한 섹슈얼리티/증상으로부터, 개인 각각에 특이적인 향락의 모드/생톰으로의 이행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브루스는 보통 정신병에 대해서도, 예외의 논리에서 예외가 성립하지 않은 논리로의 이행으로서 파악했다.
자크-알랭 밀러가, 슈레버를 예로 들어 ‘남다른 정신병’이라고 부른 것을 거론해보자. 남다른 정신병은, 남다른 망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 망상은 어떤 시니피앙이 결여되어 있는 장소에 상상계를 갖고 치료를 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이 경우, 주체는 스스로, 결여되어 있는 예외, 즉 결여되어 있는 ‘명명하는 아버지’라는 예외를 수육화하는 것에 헌신하고 있다. 이리하여 슈레버는 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이 된다. … 이 예외의 위치는, 우리가 ‘남다른 정신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한다. Φx가 아닌 x가 한 가지 존재한다는 공리를 지탱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 최초의 가설은, 보통 정신병은 이런 예외를 원리로 하는 방법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보통 정신병에 있어서는, 환자는 상징적 조직화에 결여되어 있는 예외의 기능을 스스로 수육화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때래서 보통 정신병에서의 ‘보통’이란, 예외적으로가 아니라, 공통의, 범용한이라는 의미이며, 그것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함’이라는 표현에 있어서와 같은 의미이다.
슈레버 같은 정신병자는, 예외의 위치를 스스로 떠맡는다. 즉, 그들은 원-아버지와 일체화하는 것이다. 한편, 보통 정신병에 있어서는, 더 이상 이 예외는 기능하지 않는다. 기괴한 망상 체계를 만들어내는 남다른 정신병으로부터, 커다란 비정상으로서는 두드러지지 않는 보통 정신병으로의 이행도 또한, 남성의 식에서 여성의 식으로의 이행과 관련지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사해둔다면, 치바가 『너무 움직이지 마라』에서 지적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생성변화론의 레토릭의 양면성[二面性], 즉 “단일한 X로의 수렴으로서의 <만물제동의 익명성>”과 “복수의 x, y, z …라는 <구별 있는 익명성>” 22의 두 극으로의 분화는, 이 라캉의 남성의 식과 여성의 식의 각각의 논리와 아주 비슷하지 않는가?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여성으로의 생성변화”가, 정관사가 붙은 여성, 즉 슈레버 같은 ‘신의 여자’라는 예외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되는 것, 새로운 존재의 자세를 취하는 것”, 즉 “n개의 성”이라는 형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현대 라캉파의 관점에서 다시금 후기 라캉 대 들뢰즈(=가타리)의 대결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3 이것은 『너무 움직이지 마라』가, 똑같이 남성의 식(부정신학 시스템)과 여성의 식(우편=오배송 시스템)을 대치한 『존재론적, 우편적』의 후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줄 것이다.
그나저나, 이 형식상의 기묘한 수렴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24가 평했듯이, 치바의 논의가 “라캉 중심사관”에 서 있기 때문일까? 지금, 속단은 삼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이른바 프랑스 현대사상의 문맥에서 생각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필자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남성의 식과 여성의 식이 반드시 양자택일적이 아니라, 일종의 평행세계(parallel worlds)처럼 작동하는 세계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의 감별 진단이 가능하다는 입장과,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정신병이다)”라는 입장이 양립하는 것이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관계에서 파악됐듯이, 아버지의 쇠퇴는 더 못난 아버지의 회귀와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증상이 지니는 메타포로서의 의미와, 증상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라는 의의를 동시에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이것들은 열린 물음으로서 있다.
- 프랑스의 라캉파는 여러 단체로 분열하고, 이 모든 것을 조감하듯이 논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넘어선다. 이 글에서 ‘현대 라캉파’라고 지칭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대의파(Ecole de la Cause freudienne), 특히 자크 알랭 밀레르와 그 주변 논자들의 논의이다. [본문으로]
- Miller, J-. A., L’Autre qui n’existe pas et ses comités d’éthique, La Cause freudienne, no 35, 7-20, 1997. [본문으로]
- 라캉의 인용에 대해서는, 각주가 번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에크리에 관해서는 E 기호 뒤에 Seuil판의 쪽수를 적는다. 강의록인 세미나에 관해서는 이미 간행된 권에 대해서는 S 기호 뒤에 권수와 Seuil판의 쪽수를 적는다. 그 이외의 텍스트에 대해서는 주에 표시한다. [본문으로]
- 斎藤環, 『メディアは存在しない, NTT出版, 2007年. [본문으로]
- Miller, J.-A., Lacan disait que les femmes étaient les meilleures psychanalystes. Et aussi les pires, Lacan Quotidien, no205, 2013. [본문으로]
- Miller, J.-A., Effet retour sur la psychose ordinaire, Quarto, no94-95, 42-47, 2009. [본문으로]
- 밀러에 따르면 이런 외부성의 특징은 라캉이 1958년에 이미 “삶의 감각이라는, 주체에게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생기는 부조화”(E558)라고 부른 것에 대응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 Svolos, T., ‘Ordinary Psychosis’, Psychoanalytical Notebook, n。19, 79-82, 2008. [본문으로]
- 감별진단에 관한 라캉파의 이론 변천은 다음의 논문에서 정리했다. 松本卓也, 「ラカン派の精神病硏究───「精神病の鑑別診断」から「普通精神病」へ」, 『思想, 2012년 8월호, 25-44頁. [본문으로]
- Miller, J.-A., L’Un-tout-seul. Cours de 2011(indédit). [본문으로]
- Jacques-Alain Miller: les prophéties de Lacan. Le point. fr, 18/08/2011. [본문으로]
- 千葉雅也, 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ジル・ドゥルーズと生成変化の哲学』, 河出書房新社, 2013年, 75-6頁. [본문으로]
- 앞의 책, 36頁. [본문으로]
- Miller, J.-A., Le sinthome, un mixte de symptôme et fantasme. La Cause freudiennie, no 39, 7-17, 1998. [본문으로]
- Miller, J.-A., Biologie lacanienne et événement de corps. La Cause freudienne, no 44, 7-59, 2000. [본문으로]
- Miller, J.-A,, L’interprétation à l’envers. La Cause freudienne, no 32, 7-14, 1996. [본문으로]
- 이런 다른 것으로부터 고립된 향락으로서의 “단 하나뿐인 <일자>”, 다른 것으로부터 떼어내진 시니피앙 S1의 모습은, 치바가 말하는 “비의미적 절단”과 비교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바로 인과성의 틈새이기 때문이다. 다만 치바가 들뢰즈로부터 끌어낸 세계관이 “전면적으로 인과적이지 않은, 도처에 절단이, 비의미적 절단이 달리고 있는 세계사·자연사의 철학”(278頁, 강조는 인용자)인 한에서, 각각의 주체에 있어서의 비의미적 절단을 하나라고 하는 라캉파와는 차이화되어야 한다. [본문으로]
- Miller, J.-A., Lire un symptôme. Mental, no 26, 49-58, 221. [본문으로]
- 이 논의에서는 세계에는 존재라는 단 하나의 영원불변에 정지한 일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플로티누스의 일자(토 헨) 개념이 참조되고 있다. [본문으로]
- 일찍이 프로이트는, 리비도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남성적 리비도라고 말했다. 즉, 팔루스(페니스)에 의해 향락을 얻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또한 페니스 선망을 통해 남성의 성기관과 관련됨으로써 향락을 얻는다고 프로이트는 생각했던 것이다. 라캉은 성별화의 식에 의해 이 프로이트의 생각을 갱신했다. 즉, 남성은 평소에는 팔루스 향락밖에 얻을 수 없으나, 여성은 팔루스의 향락(페니스 선망)뿐 아니라, 팔루스 향락이 아닌 ‘<다른 것>의 향락’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본문으로]
- Brousse, M.-H., La psychose ordinaire à la lumière de la théorie lacanienne du discours, Quarto, no 94-95, 10-15, 2009. [본문으로]
- 千葉雅也, 前掲書, 六七頁. [본문으로]
- 그 단서는 다음의 논고에서 제시됐다. 松本卓也, 「人はみな妄想する──ガタリと後期ラカンについてのエチュ—ド」, 現代思想, 2013년 6월호, 113-127頁. [본문으로]
- 小泉義之, 「書評 『動きすぎてはいけない」, 文藝, 2013년 겨울호, 河出書房新社, 380頁.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