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2/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 現代思想と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S1, 또는 S1뿐인 세계
치바 : 그런데 초보적으로 투박하게 여쭈는데요, 자체성애가 처음 생길 때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언어 체험이 충격(shock)적으로 도입되고 그것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라는 것으로, 원래 갖고 있던 유전적, 기질적 경향성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의 특이성의 조합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는 건가요? 즉, 모든 것을 특이성에 기초해 말씀하신 거라면, 유소년기에 특수한 외적 사태가 있었다고 하신 것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요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질이 다르다”는 얘기에도 가깝다고 느껴지네요.
마츠모토 :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꽤 가까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에서, 도라의 기침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에서의 향락의 체질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시니피앙의 수준에서 증상을 해석하면,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 그러면 도라가 유년기부터 고무젖꼭지만 빨고 있었다는 등 신체의 소인(素因)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소인(素因)은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고 있으며,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유전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소질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거기까지 다다르지 않으면 정신분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치바 : 정신분석은 기질성이 아니라 심인성의 영역 안에서 어느 정도 할 수 있는가라는 이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으로는 너무 단순하죠. 라캉의 경우는 끝이 있는 분석을 믿었는데요, 왜 끝이 있냐 하면, 낫지 않고 제거할 수 없는 증상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충 말하면, 기질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계면界面으로서 있는, 움직이기 힘든 부분에 부딪칠 때까지 말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거기에 부딪침으로써, 정신분석의 한계이며, 또한 신체의 의학과 어울리는 듯한 장면이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는 것일 테죠.
마츠모토 : 그곳이 바로 라캉이 프로이트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입니다. 프로이트의 경우, 끝이 없는 분석에 왜 끝이 없냐 하면, 거세 콤플렉스와 페니스 선망이라는 벽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즉, 팔루스의 존재/부재에 대해 구축된 콤플렉스라는 곳에서 “끝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라캉의 경우는 그것을 뚫고 나온 분석을 목표로 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거기에서 프로이트로부터 라캉에게로라는 정신분석의 갱신 또는 재정의를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 아까 치바 씨의 물음에 대해서인데요,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애당초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폐증의 정신병리의 기본입니다. 반응은 일어나지만 응답은 없다. 즉, 타자로부터 이쪽으로 향해오는 지향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선이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처음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해서 이비인후과로 데려가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츠모토 씨”라고 부르면 마츠모토 씨는 이쪽을 봅니다만,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는 거의 자발적 운동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부모가 품에 안으면 그것에 맞춰서 몸의 자세를 취합니다. 그런데 자폐증 아이를 품에 안으면, 곡물이 든 배낭을 안고 있는 것처럼 너무 무겁습니다. 그렇게 품에 안는 것에 포함되는 지향성에 대해서도 신체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반응성의 결여가 자폐성의 핵심 특징입니다. 정형발달의 경우, 품에 안는 것에 대한 응답은 꽤 이른 단계부터 느껴집니다만, 눈빛이나 호명에 대한 응답은, 대부분 9개월부터 시작됩니다. 시선이 맞으면 수줍은 듯이 낯가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것이 자기라는 것의 밑바탕[元基] 같은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전반적인 짜임새가 없는 세계 속에 있습니다.
마츠모토 씨의 얘기와 관련되는 것은 『사람은 모두 망상한다』의 맨 처음에서 “원-상징계”에 대해 논한 대목입니다. 그곳에서는 부분대상과 전체대상이 전적으로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라캉적으로는, 부분대상은 현실적[실재적]인 것인 반면, 전체대상은 팔루스적인 다발[묶음]에 의해 만들어져 있으며, 상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클라인파는 발달사적으로 보면, 우선 부분대상이 있고, 그것이 통합되어 전체대상이 된다고 해설합니다만, 그것은 전혀 얘기가 다릅니다. 부분대상은 전체대상이라는 관점이 있고서야 비로소 소급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전체대상은, 시선이 마주치거나 부름에 반응하는 등의 상징적인 개체화로의 힘이 걸리는 9개월만에 한꺼번에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차원의 것입니다. 부분대상은 이런 상징적인 것의 설정의 피안에 있습니다.
자폐아의 행동에서, 부분대상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경우입니다. 그들이 뭔가를 갖고서 놀고 있는데, 그걸 집어들어 방해했다고 칩시다. 보통의 아이라면, 방해한 상대로 향합니다만, 자폐아는 방해를 하는 손으로만 향합니다. 혹은 카나의 논문의 있는 사례인데요, 바늘로 찌르면, 찌른 상대가 아니라 바늘 자체를 두려워한다. 이처럼 자폐아는 단편적 세계 속에 있으며, 그것을 자체성애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츠모토 : 부분대상만이 있고, 전체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일어서지 않는다는 거죠.
우츠미 : 그렇게 되면, 다음으로 S2 없는 S1의 신분이 문제가 됩니다. S1은 S2가 있어서 사후적으로 설정되는 것입니다만, S1밖에 없을 때, 그 양태는 어떻게 될까요?
마츠모토 : 얼마전 한밤중에 NHK 방송을 봤다면, 아르 브루트(Art Brut, 아웃사이더 아트)의 특집을 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장애인 시설에 있는 분으로, 해외에서도 개인전을 열게 된 시바타 에이이치(柴田鋭一) 씨라는 분의 작품을 소개했는데요, 그 분은 처음 무렵에는, ‘2’와 ‘3’만을 오로지 반복해서 캔버스에 그렸어요. 그것이 대단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2’와 ‘3’을 반복했는데요, 그 후에 “비누[石鹸, 세켄]의 ‘세[せ]’”라는 문자만 줄곧 그리게 됩니다. 그것이 해외에서 받아들여져 개인전까지도 열게 됐다고 합니다. 이 경우, ‘2’와 ‘3’, ‘세[せ]’ 같은 문자가 S1입니다. 이런 문자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본인도 자폐적이며 중독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극치인 것은, 반복하고 있는 ‘세[せ]’라는 글자가 다름 아닌 “비누[세켄]의 ‘세[せ]’”라는 것입니다. 본인은 단순히 ‘세[せ]’라고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 ‘세[せ]’는 예를 들어 ‘세계[세카이]’나 ‘석유[세키유]’ 등으로 분절화되는 세[せ]’가 아니라, 항상 “비누[세켄]의 ‘세[せ]’” 그 자체이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치바 : 문맥 형성을 하지 않는 문자로서의 문자.
마츠모토 : 바로 ‘레트르(lettre)’네요. 그런 자체성애적인 것의 향락성의 제시와 에크리튀르 사이의 관계를, 라캉은 조이스론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 마츠모토 씨는 에릭 로랑이 언급한 로신느 르포르Rosine Lefort의 분석에서, “늑대!”라고 고함을 지르는 사례를 참조했습니다. 저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받거나,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 패닉 상태가 됐을 때 외치는 것이었죠.
마츠모토 : 그(증례인 로베르Robert[Rosine et Robert LEFORT : Naissance de l'Autre, Seuil, 1980])는 자신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구멍의 출현에 대한 명명으로서 “늑대!”라는 소리를 지르는데요, 그 시니피앙은 분절화되지 않고, 항상 “늑대!”인 채입니다.
우츠미 : 반면 청년기 혹은 성인기의 자폐증 스펙트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일정한, 혹은 그것 이상의 언어능력이 있습니다. 그 경우의 특징은, 말을 도구처럼, 혹은 모국어인데도 외국어처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신체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고 할까, 말하자면 앱(App)처럼 사용됩니다. 바꿔 말한다면, 신체가 언어에 의해 포맷되지 않았다. 이 경우는 S2만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에릭 로랑이 언급한 사례처럼 중증 자폐아가 내뱉는 것은 단독적인 S1이며, 주술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즉, 지시한다고 하는, 처음 부분만 있습니다. 언어는, 이 지시에 의해 대상을 절취하고, 공동 주의(注意) 등에 의해 공유되는 과정을 통해서 생성합니다. 그러나 그 앞에서는, 무엇이든 “늑대!”라고 말하면 일단은 패닉 상태를 가라앉힐 수 있다는 식으로, 주술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치바 : 매직워드이며, 와일드카드인 거네요.
마츠모토 : 자폐증자에게는, 정형발달의 사람과 똑같은 의미에서 자신의 말이 되는 것은 그 말(S1)뿐이며, 그들은 그것에 이어진 S2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라캉은 그것을, 자폐증자는 “말에 대해 자신을 지킨다”고 표현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현행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S2를 S1과 떼어낸 상태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S1 없는 S2입니다. 그러면, 공공공간에서 그들이 이용하는 언어(S2)는, 일종의 컴퓨터 언어처럼 되어 버린다. 현대 라캉파에서는 자폐증에 있어서의 언어의 병리는, 이처럼 S1과 S2의 분리로서 파악되는 것입니다. 한편에는 주술적, 반복적, 중독적인 매직워드로서의 언어(S1)의 사용이 있으며, 그것이 똑같은 말에 대한 상동적(常同的)인 집착이 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S2를 인공언어로서 만들어냅니다.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상징적인 논리만으로 쓴 루이스 캐롤이 그 일례입니다.
우츠미 : 자폐증 스펙트럼의 S2는 사적 언어처럼 기능할 뿐인 곳이 있습니다. 사용하는 말은 우리와 공통이며, 대화가 가능하지만, Speech act[발화행위, 발화수행]로서는 기능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함께 [맞물려] 다른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기어” 같은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어떤 청년 사례는, 자신의 괴로움을 “현실감이 없다”, “이인감(離人感)이 있다[자신이 자신이라는 감각을 상실해버리는 것]”, “만족감이 없다”라는 세 개의 말로 나눠서 호소한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매회 그렇듯이, 그것이 어떤 괴로움인지를 물어보는 처지가 된다. 그도 끊임없이 그때마다 알려줍니다만, 역시 금방 잊어버린다. 즉, 사적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통증’의 경우처럼 ‘아파!’라는 것에 의해 공통의 코드가 열리고, 타인에게 이해되는 동시에 자신밖에는 모르는 고유한 감각이 남는다는 것이 되지 않는다. 감각만이 있고, 그것에 태그를 열심히 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치바 : 극히 사적인 기준으로 연합을 하기 때문에, 듣는 쪽에도 전해지지 않는군요.
우츠미 : 그렇군요. 에르곤, 즉 잘 만들어진 언어에 가까운, 개념 규정이 먼저 있고, 그 태그로서 말이 있다. 아까의 “늑대!”의 예에서는, 지시만 있고,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만, 이번에는 정반대로, 개념이 있고, 거기에 말이 붙어 있을 뿐, 지시가 기능하지 않는다. “여기가 아파”라든가 “이것 때문에 괴로운 거야”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치바 : 시스템이랄까, 언어 체계만이 있다. 논리의 공리계의 세계.
마츠모토 : 바로 수학기초론이라든가 분석철학 같은 세계네요.
그런데 우츠미 씨가 『방황하는 자기 :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さまよえる自己───ポストモダンの精神病理)』(筑摩選書, 2012年)의 마지막에서 논하신 것은, 근대의 노모스가 만들어져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던 시대 이후에 초월론적인 것이 절멸한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도래하면, 타자의 부름이나 시선에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비근한 예로 깊숙이 들어갑니다만, 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이, 떠들고 있는 학생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 시선을 눈치 챈 학생들이 차츰차츰 조용해진다. 선생님은 거기서 “여러분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3분이 걸렸습니다” 등이라고 말하는 거네요(웃음). “조용히 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눈빛의 힘에 의해,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묻는 자로서 기능하는 타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시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근대적 주체였던 것입니다.
치바 :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가 근대의 기조네요. 그러나 포스트모던에서는, 눈앞에 서 있어도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다를 떨 수 있다. 교실의 뒤로 돌아가면 판옵티콘의 기능이 작동한다는 예가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나오는 것입니다만, 현재에는 앞에 있든 뒤에 있든 관계가 없다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네요(웃음).
마츠모토 : 현대의 주체는 타자성과 시선이 기능하지 않게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츠미 씨는 그런 주체의 모습은 단순한 데이터베이스를 따른 계산기적 합리성이며, 거기에는 결단의 계기도 없고, 근대적인 의미의 자기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시네요. 이 논의는 확실히 그렇다고 실감할 수 있는 것도 많네요. 더 흥미롭게도 근대적 주체가 전제로 삼았던 타자성의 일어섬立ち上がり이나 시선과 목소리에 의한 주체화가 기능하지 못한 후에 등장한, 이런 포스트 휴먼적 인간상에, 국내의 정신병리학자들이 거의 동시대적으로 주목하고, 여러 가지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스즈키 쿠니후미(鈴木國文) 씨는 신자유주의란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자유는 가능한가?” 등의 물음을 빼고서, “자유니까 이렇다”, “자유니까 이래도 된다”고 말하는 원리라고 지적하십니다. 즉, 바로 직전에서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은 채, 어떤 전제를 바탕으로 알고리듬적으로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현대에서는 그런 논리가 이러저러한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고, 그것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발달장애의 임상풍경과 꽤 가까운 것이 있다는 것을 스즈키 씨는 지적합니다. 카토 사토시(加藤敏) 씨는 똑같은 사태를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부릅니다.
우츠미 : 그것은 자유가 S1에서 S2가 되었다는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의 보증인”으로서 있었던 S1을, 지금은 하인처럼 혹사한다[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전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가요?
마츠모토 : 아마 자유를 S2만으로 생각하게 되며, 진리(S1)가 배제되어 버린, 즉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 우리 세대가 보면, 그렇게 되는데요, 꽤 올드 패션한 시각이 아닐까요? 그래서 마츠모토 씨나 치바 씨의 세대에서는 어떻게 보는지, 흥미가 있습니다.
치바 : 저는 우츠미 씨의 그런 감각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즉, 제가 신세대에 속해 있고 알고리즘적인 사물의 처리에 친화성을 느낀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 듯한 물음, 그 ‘문제성’이라는 부정성 ― 들뢰즈는 문제성을 부정성이라고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존재” 같은 식으로 불렀습니다만 ― 이 근본에 있은 다음에, 그 부정성을 달래면서, 가설(仮設)된 체계에서 어떻게 사물을 움직이는가? 그 위에서, 그래도 답할 수 없는 물음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런 답할 수 없는 문제와, 당장의 시스템 운용의 이중구조로 해온 것이 근대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가설되고 있는 것을 그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지금,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분석철학 등의 논의에는 그런 경향이 강하네요. 대륙철학에서는 사물의 정의가 반드시 약정되지는 않은 상황에서 얘기를 하기 때문에, 분석철학자로부터는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게 된다. 이쪽에서 보면, 거꾸로 그런 절차적 논의를 하고 있는 쪽이 섬뜩하고[낯설면서 친숙하고], 조금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 분석철학은 언어의 사용방식 자체가 S2적이고, “그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항상 듣는다. 그런 게 아니라, 사용이야말로 본래의 언어이죠. 그러나 그 전에, “정의는 무엇인가?”라고 함으로써, 단단하게 다져버린다[확고하게 해버린다].
마츠모토 : 저는 알고리즘적인 사고방식은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난날 눈에 띄게 됐던 S2만의 원리에는 자주 놀라며, 분석철학 책은 읽는 데 꽤 고생합니다. 자폐증자였던 템플 그랜딘은, “개”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못해 괴로워하고, 모든 개를 관찰한 결과, “개”라고 불리는 것은 코의 모양이 모두 한결 같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의해 “개”라는 개념의 내포를 처음으로 만들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치바 : 일부의 분석철학은 [단단하게 다져진 것이 아니라] 흔들림이 있는 프래그머틱스로 사용된 사물의 정의를, 형식적으로 원점으로 돌아가 재검토해 S2만의 구성으로 봤을 때, 이전의 애매함이 붕괴하고, “사실은 개의 본질은 그 코에만 있었던 것이다”처럼 이상하게 한정적인 결론이 되는 것을, 특별히 지적인 놀라움이나 학문의 발전인 것처럼 말하고, 그것의 향락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마츠모토 : 그렇게 함으로써 향락하고 있다.
치바 :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즉, 프래그머틱스에 있어서의 말의 두께가 S2적인 단조로움 속에서 해체되는 것을 기분 좋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리고 그것을, 말의 두께의 세계에 대해, 모종의 위협적으로 대치시키는 것에 쾌를 느끼고 있다.
우츠미 : 아이가 말을 배울 때에도, 혹은 부모가 말을 가르칠 때에도, 개념은 가르칠 수 없죠. 차를 보고 “붕붕”이라고 가르쳐보죠. 그래서 차가 아닌 것을 아이가 “붕붕”이라고 부르고, “그것은 ‘붕붕’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개념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처음에 지시가 있는 것입니다. 개념 규정에 너무 얽매이면 잘 안 되는 거죠.
치바 : 최근에는 여러 가지 절차적인 것을 직장에서 요구합니다. “이러저러할 때에는 이러저러한 목소리를 내고 몇 초 기다렸다가 이렇게 해라” 같은 것을 하는 것이 분명한 가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바로 “사회의 아스퍼거화”라고 말하고 싶은 상황입니다. 대학 업무에서도 그것에 가까운 것을 하도록 하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우츠미 :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 수십 시간의 연수가 있다고 합니다. 다만, 셀프엔조이먼트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커피가….
마츠모토 : 최근의 전지구적 기업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개의 고객에게 인간적인 대응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뉴얼로 인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치바 : 그런 건 왠지 섬뜩하죠[낯선 친숙함이죠].
마츠모토 : 섬뜩합니다[낯선 친숙함입니다]. 어떤 카페의 체인점에서는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사람에게 점장이 개인적으로 코칭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아요. 거기에는 꽤 심리학의 메소드가 들어 있어서, 그래서 나오는 것이 완전히 통제된 ‘인간미’가 있는 접객입니다.
치바 : S2밖에 없는 가설적 공리체계로서의 인간 같음.
마츠모토 : 인공지능은 그곳에서 이미 완성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바 : 불가능한 것이나 무한이라는 것이 지성에 있어서 문제였던 시대에는 인공지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만, 거꾸로 시대가 인간의 지성을 인공지능적으로 했다면, 그건 인공지능은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최근에는 알고리듬으로 문제 해결하는 것이 인공 지능이라고 꽤 흔하게(casual) 불리게 됐네요. “우리 회사에서는 이런 인공지능 알고리듬으로 …”라든가. 저런 캐주얼화는 기묘하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같으면 “인공지능이 만들었다”고까지 야단스럽게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요? 이렇게 인공지능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원래 모델이 되는 인간 문명이 인공 지능적으로 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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