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3/4)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 現代思想と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포스트모던의 정신병리를 살면서
우츠미 : 그런데 치바 씨는 들뢰즈의 흄론에 주목하셨네요. 그리고 흄철학에서 절단의 계기를 끄집어내고, 들뢰즈에게서 생기론이나 잠재성의 파시즘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측면을 찾아냈다.
치바 : 그렇습니다. 모종의 픽션론으로서의 흄론이었습니다.
우츠미 : 흄은 낱개의[개개별별의] 세계를 연합에 의해 묶으려고[통합·정리하려고] 했습니다만, 그 통합∙정리할 때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치바 씨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거론한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 흄의 경우, 파트그래피컬[パトグラフィカル, 바이오그래피컬의 오식인 듯. 즉, 전기적인]한 얘기인데요, 18세부터 23세까지 꽤 힘겨운 우울 상태에 있었고, 어쩌면 이인증(離人症)을 경험했습니다. 이인증에서는 사물을 서로 이어주는 ‘아교’랄까, 치바 씨의 말로는 ‘풀’ 같은 것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흄의 어소시에이션론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일단 아이러니적인 파괴를 경험한 곳에서부터 턴(turn)해온다. 유머적인 턴(turn)이랄까, 대타자 또는 초월론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은 통합·결말[まとまり], 마조히즘에 있어서의 억압을 변형하는 듯한 턴(turn)입니다. 그 언저리의 모습이, 살아가는 지혜랄까, 경험론의 진면목이 아닐까 합니다만.
치바 : 제 말투에서 유머를 흄의 맥락으로 연결한다면, 어떤 우연적으로 생겨난 연합을, 그렇게 해도 좋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정의나 시스템을 묻겠다고 생각한다면, 근거는 없습니다. 어떤 우연의 마주침, 즉 최초의 자체성애적인 것이 생길 때의 외부와의 마주침의 우연성 같은 것으로,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떠맡고, 우연히 뭔가와 뭔가가 서로 달라붙게 됐을 때, 그로부터 연쇄적으로 다른 것이 또한 달라붙게 되는 것을 좋다고 한다. 모든 것은 근가가 없다고 하는 곳으로 향해서 비판을 캐고 들어가는 아이러니만을 하다 보면 엉망진창이 되며, 모든 것이 붕괴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대조적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머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츠미 : 초월론적인 타자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되네요.
마츠모토 : ‘일단은’ 식으로.
치바 : 그렇죠. 저는 ‘어드혹(ad hoc)’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전에 기고한 「트랜스어딕션 : 동물-성의 생성변화(トランスアディクション───動物-性の生成変化」(『現代思想』, 「特集=人間/動物の分割線」, 2009年 7月号)와도 공명하네요. S1을 되풀이하는 것은 중독적이라고 밀러는 말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생각한 어딕션(addiction)도 그런 의미에서의 어떤 특이적인 증상이며, 또한 크리에이션(creation)과 결부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얘기로 말하면, S1이 몸을 옥죄어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변형하여 다른 크리에이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될 가능성을 ‘트랜스어딕션’이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우츠미 : 단독의 S1에는 그런 어딕션적·에크리튀르적인 측면과 더불어, 그런 단순한 ‘외침’으로서의 측면도 있습니다. 외침은 마츠모토 씨의 논의에서 원-상징계의 + - + - … 라는 곳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거기에서 상징적인 심급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정형발달의 경우, “이 칭얼거림[외침]은 이런 의미예요”라고 어머니가 유닛(unit)화한다. “배가 고프구나”라고. 어머니도 칭얼거림이 매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 그런 감각적인 차이에 “배가 고프다”라는 상징적 유닛을 덧씌운다. 그리고 그것을 되풀이함으로써, 칭얼거림이 “배가 고프다”가 된다. 그러나 자폐증의 경우는 그런 응답이 없기에, 칭얼거림인 채인 것입니다.
마츠모토 : 그래서 “늑대!”, “늑대!”라고 외칠 뿐이다.
치바 : 그리고 똑같은 그 외침이 온갖 것에 적용 가능해진다면.
우츠미 : 자폐증의 언어적인 측면은 매우 다양하네요.
마츠모토 : 정형발달처럼 S1과 S2가 연쇄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자폐증자에게는 하나뿐인 S1과 알고리즘적인 S2가 존재하며, 그 양자 사이에서 이러저러한 언어의 병리가 생겨나는 거죠. 그것은 거꾸로 정형발달이 무엇인지를 겉으로 드러내는[해명하는,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도 되죠.
조금 전 치바 씨의 “트랜스어딕션” 말씀을 듣고서 생각한 건데요, 「인프라크리틱 서설 :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포스트인문학으로(インフラクリテイーク序説───ドゥルーズ 『意味の論理学』からポスト人文学へ)」(『思想地図β』, vol. 1, 2011年)에서는 장애를 짊어지게 된 후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썼습니다. 그 논의는 S1과 관계하고 있습니까?
치바 : 아, 역시. 그곳은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통할지도 모르겠네요. 그곳은 말라부에게서 얻은 발상입니다만….
마츠모토 :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S1에서 다른 것이 발생한다는 느낌이겠죠? 아니면 S1 자체가 유물론적으로 고쳐 써진다는 것일까요?
치바 : 그런 식으로 연결한다면, S1의 변형을 생각했던 게 되겠죠. 말라부를 좇아 말한다면, 데리다적인 똑같은 흔적의 이전(移転), 오배송[誤配] 모델이 아니고, 흔적 그 자체가 변형되어 버렸다는 그녀의 모델을 구별하지요. 그리고 원래 S1을 복수 갖고 있거나, S1을 새롭게 추가한다는 것도, 제 테마입니다. 마츠모도 씨의 논의에서도, 라캉과 가타리의 대비에서, 특이성을 단수적으로 생각하는가 복수적으로 생각하는가라는 갈림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네요. 제가 여기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라캉에게는 S1이라는 말을 ‘essaim(무리)’라는 단어로 바꿔 부르는 말놀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이면서도 거기에는 뭔가 무리성이 있다는 것일까요?
마츠모토 : ‘essaim’이 라캉파 안에서 사용되는 경우, 기본적으로는 스키조프레니인 자의 언어사용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즉, 말 하나하나가 현실계의 수준에 있으며, 상징적인 것으로서 서로 분절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곳(「언어의 병리의 행방言語の病理の行方」, 『유이티카ユリイカ』, 2012年 9月号)에 적은 사례인데요, 제가 전에 본 사춘기 유형의 환자로, 환청을 호소했습니다. 그 사람은 어느 날, “소리를 질러서[말을 걸어서] 잡아주세요[声をかけられたので取ってください]”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즉, ‘걸다[かける]’라는 말이, “물을 뒤집어썼으니까 닦아줘[水をかけられたから拭いてくれ]”라고 할 때의 ‘걸다[かける]’라는 뉘앙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적인 의미에서 ‘걸리는[かけられる]’ 것이었을 터인 “목소리”라는 말이 현실계와 직접적으로 이어지고, 물질화되는 언어사용이 모든 곳에서 이뤄지고, 메타포로 말하지 못하게 된다. 시니피앙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バラバラになり], 그것 자체로 자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열증의 정신병리로 말하면, 아마 콘크리티즘
concretism(
구상화 경향具象化傾向)이 될 것입니다.
다만, 처음에 언어가 들어올 때, 하나의 언어만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할 수 있으니까요. 밀러조차, ‘essaim’에 관해서, 클로스프스키=니체적인 주체의 동일성의 산란散乱을 말하고 있습니다.
치바 : 과연 그렇군요. 복수의 언어가 상처로서, 이른바 ‘폴리트라우마틱’[polytraumatic]한 형태에서 들어온다. 「인프라크리틱(infracritique) 서설」 무렵, 저는 폴리트라우마티즘과 모노트라우마티즘이라는 대비를 했고, 50년대의 라캉은 전형적으로는 모노트라우마틱한 이론으로서 수용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 특히 가타리는, 폴리트라우마티즘을 도입했다는 것이 제 견해였습니다.
마츠모토 : 그것은 재미있네요. 라캉은 1974년에 외상(traumatisme)을 ‘구멍-외상(trou-matisme)’이라고 말합니다. 불가능한 것, 즉 존재하지 않는 성관계로서의 외상은 구멍이라고 말이죠. 그러면 언어의 도입에 의해 구멍이 몇 개 비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어요. 들뢰즈=가타리의 라캉 비판에 연결하면, 외상은 사실 다공적[구멍이 여럿]이고 이러저러한 곳에서 누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됩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 씨는 『존재론적, 우편적(存在論的, 郵便的)』(新潮社, 1998年)에서 불가능한 것은 부정신학에서처럼 하나인가, 아니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그 뒤에 나온 토가와 유키(十川幸司) 씨의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精神分析への抵抗)』(青土社, 2000年)은, 각주에서 히로키 씨의 논의를 다루었습니다. 라캉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분석을 통해 불가능한 것과 하나[한 가지] 만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것은 하나뿐이라고 해도, 동시에 불가능한 것은 복수적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각 주체는 각각에 있어서 상이한, 특이적인 정신분석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즉, 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신분석이라는 리미트(limit, 극한) 속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은 하나이게 되지만, 다른 한편 가타리는 집단성에 대해 생각하며, 시니피앙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불가능한 것이 단수인가 복수인가라는 대립은, 정신분석과 스키조분석의 양자에 있어서의 임상의 장면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개인의 정신분석이라면 역시 시니피앙의 주체를 원칙으로서 다루기 때문에, 구멍=불가능한 것은 하나가 되는 셈이지만, 라 보르도 병원처럼 집단적 실천에서 하면 복수가 된다.
치바 : 제 논의라면, 한 개인 속에 복수의 구멍이 있다는 사고방식에 집착하는데요, 그렇기에 해리(解離)나 다중인격을 문제 삼았던 것이죠.
90년대 말 경은, 페르소나의 다중성이 인터넷이나 버추얼한 것의 등장으로 강하게 의식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히로키 씨의 복수성에 대한 논의도, 멀티레이어(multi-layer)한 상황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죠. 저도 그 시기에 청춘기를 보냈기에, 그런 감각을 어떻게 이론과 결부시키면 좋을까, 줄곧 생각했습니다.
우츠미 : 우리는 본래 이디어트(idiot, 백치) 같은 것이며, 거기에 조금만 공약 가능한 곳이 있다는 거죠. 실제로 자신의 경험을 이른바 “의식의 흐름”처럼 관찰해 보면,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같은 매우 기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He war”가 아니라 “Ich denke” 같은 녀석이, 항상 가만히 들러붙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불가사의랄까, 어째서 그럴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의 “일자여라”, “개체여라”는 명령법이 지금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향후 그것이 어떻게 될까?
다른 방식으로?
치바 : 여기서 저는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일련의 화제는 특이성, 단독성, 각각의 별개[それぞれパラバラ]라는 방향을 향합니다만, 굳이 나쁘게 말한다면, 결국 “사람 각각”이라는 얘기가 되며, 그것은 이론적 퇴행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만일 이론에 재미가 있다면, 다소 폭력적이라고 할지라도, 복수의 것에 걸친 어떤 일반화를 행하는 곳에 있으며, 결국 임상의 현장에서 개개의 것에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례별]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면, 이론의 끝[종언]이 아닌가라고 말이죠. 마츠모토 씨는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마츠모토 :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모든 것은 싱귤라리티이다”라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 결론이 되면, 이론은 죽어버립니다. 라캉이 목표로 한 것은, 자기 자신의 분석에서 얻어진 싱귤라리티가 있다며, 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정신분석의 이론 자체를 갱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점입니다. 분석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싱귤라리티에 도달한 곳으로부터 새롭게 이론을 가다듬어 내어야 합니다. 그것이 “분석가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가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 분석가마다 주목의 중점이 다르다는 거네요. 그것은 분석가 자신의 생톰의 반영이며, 그것을 밑천으로 클라이언트와 관계함으로써, 변화를 야기한다.
마츠모토 : 그렇군요. 좀 더 근원적으로는, 학파 속에서 다른 분석가와 공유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다른 분석가와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분석가를 차례로 산출한다. 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분석가는 다시 새롭게 자신의 특이성과 만나서 정신분석 이론을 갱신한다. 이른바 영구혁명입니다.
치바 : 그래서 궁금한데요, 각각의 분석가가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고, 다른 분석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클라이언트와 마주대하려고 하며, 그 ‘다른 방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요?
마츠모토 : 예를 들면, 라캉의 단시간 세션은, 그가 특이적으로 발견한 방식이죠.
치바 :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는 장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마츠모토 : 24시간 내구(耐久) 정신분석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분석가도 있을지 모르죠(웃음).
치바 : 그래서 효과를 올리도록 별난 분석가가 나와도 원리적으로는 더 좋다고.
우츠미 : 치바 씨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치바 씨가 부분대상과 팔루스적 대상 사이에 “기관 없는 신체”, 또는 “전체화하지 않는 정리[모둠]”를 놓고 있는 곳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한쪽에 부분대상으로서의 현실적인 것이 있고, 다른 한쪽에 팔루스적인 대상으로서의 상징적인 것이 있다고 하며, 그 중간에 기관 없는 신체가 있다. 저는 팔루스적 전체성과 전체 대상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인이 말하는 부분대상은 오히려 기관 없는 신체와 닮은 곳이 있습니다.
치바 : 지금의 3항도식에서는, 클라인의 부분대상은, 팔루스적 통일과 전체화하지 않은 정리[모둠] 둘 다를 거듭[중첩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해석입니다.
우츠미 : 아까 말한 아이러니적 잠재성과 분화·현동성의 중간에 유모적 개체화가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치바 : 글쎄요, 그것을 저는 특히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츠미 : 현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상상적인 것, 혹은 요도[尿道]적인 것을 넣는 곳이 급소라고 하죠. 이 구도는 두 사람의 책에서 공통된 것으로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가 어디를 목표로 하는 것이냐 하면, 각각의 별개バラバラ의 단편으로부터 자그마한 턴[turn, 선회]을 만드는, 버추얼리티 쪽으로 확산하면서도, [갔던 길을] 약간 되짚어와서 기관 없는 신체 쪽으로 간다. 아마 여기에 싱귤라리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흄도 데카르트도 비슷한 것을 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 흄의 경우, 이인증(離人症)적으로 각각의 별개가 된[산산조각 난] 단편을 어소시에이트[associate, 연합]합니다만, 그렇다고 강력한 자기는 만들지 않는다. 일단 다발 같은 자신으로 좋다고 한다. 데카르트가 과장적인 회의를 하는 곳은 급진적인 사디즘이죠.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하고, 어느 정도의 네거티비티[부정성]을 견딜 수 있는가, 그 위에서 무엇이 남는가라는 물음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잠깐 “그래도 생각하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고 턴[turn, 선회]한다. “코기토” 등이라고 잘난 체 하는 느낌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자그마한, 잠깐 동안 생각한다는 형식뿐으로, 아무런 내실도 갖지 못하는, 미결정의 중지[허공에 붕 떠있는 것]로서 코기토가 산출된다. 마지막은 신이라는 상징적인 것을 증명하고 보증인으로 합니다만, 그것은 그가 정말로 했는가 여부는 의문입니다.
치바 : 그렇게 하면, 신-코기토-회의(악령)과, 상징-상상-현실이라는 3항도식을 할 수 있다.
우츠미 : 그렇네요. 흄의 경우는 공간이 단편화하는 반면, 데카르트의 경우는, 악령이 시간적으로 절단하는 건데요, 이런 아이러니에서 유머로 턴[turn, 선회]한다는 도식이 임상적으로도 생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치바 : 단편화를 거쳐서, 가까스로 정리[모둠, 종합]로 돌아간다.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고 저라면 말할 것. 제 논의의 경우, 그 차원은 특히 상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판타슴이죠. 라캉파에서는, 판타슴의 횡단이라는 논의가 될까요?
마츠모토 : 판타슴의 횡단의 경우는, 모든 상징체계의 폐절까지를 지향하는 아이러니이죠. 모조리 없애버리는 듯한.
치바 : 그래도 뭔가가 남죠?
마츠모토 : 외상적인 핵이 남는다. 그 잔여를 꺼내기 위해, 라캉은 생톰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죠. 우츠미 씨가 지금 말했듯이, 조금 돌아온다고 할까, 당분간의 정리[모둠, 통일]를 만든다고 할까.
우츠미 : 생톰 그 자체가 이마지네르(imaginaire)한 것이라는 논의가 아닙니까?
마츠모토 : 콩시스탕스[consistance]의 이마지네르(imaginaire)라는 논의이죠(フィリップ・ジュリアン, 『ラカン, フロイトへの回帰』, 誠信書房). 밀러는 타투나 피어스로 무너지고 있는 신체의 고리를 지탱해도 되잖아, 라고도 말합니다.
우츠미 : 들뢰즈에게 “공백의 [바둑판] 칸(case vide)”이라는 개념이 있죠. 단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은 빈 그릇이 있어야 비로소 기능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드는 사례로, “나는 퍼즐에 비유하면 빈 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 혹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포화되어 버린다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자폐증 스펙트럼에 있어서의 상상의 부자유의 원형입니다. 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었고, 지금은 그 세계로부터 탈출하고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정형자의 얄팍한 세계いい加減な世界에 들어가는 것의 고통이 있다. 후설도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이 방의 건너편この部屋の向こう”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혹은 자신에게는 등이 없다背中がない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은 집들의 건너편에 사람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든가.
이른바 “장애의 세 쌍”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운데, 상상력의 장애는 매우 조잡한 취급방식을 하고 있습니다. 수집벽이나 철도 마니아 등, 흥미 관심의 폭이 좁다든가, 곧바로 그런 얘기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게 아니라, 경험 속에 빈 눈금을 어떻게 만들까, 이렇게 그들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마츠모토 : 빈 칸이 있어서 처음으로 전개되는 유형의 공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죠.
우츠미 : 다른 식으로 공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츠모토 : 당사자인 후지이 히로코(藤家寛子) 씨는, 분명,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보이는 수많은 집의 각각에 ‘가정’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고 썼네요. 집이 ‘집’일 뿐이고, 그 속에는 ‘가정’이 있고, 사람들의 생활이 있다는 공상이 미치는 공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일까요?
우츠미 : 그것을 가진다고 포지티브하게 파악되지 않을까요? 정형으로 이끌어가는 것만이 우리의 작업이 아니니까.
마츠모토 : 공상하는 공백의 칸이 없는 대신,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고.
우츠미 : 후설의 현상학도 하나의 예일 수 있죠. 가령 타인의 마음도 지금 보이고 있는 세계의 ‘건너편’이니까, 그에게 있어서는 자명한 것은 아닌 겁니다.
치바 : 얼마나 그것이 임시로 마련된 것인가에 대한 이론 구성이 되는 거네요.
우츠미 : 또 한 명을 거론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일까요? 그의 『논리철학논고』는 명제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도중에, 논리에서 윤리로 문제가 이행합니다. 이 전회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죽음이라는 것에 직면하여, 다시금 개체화가 촉진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관은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하듯이, 한계라는 막간隙間에, 가까스로 자신의 장소가 확보되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