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스펙트럼의 시대
: 현대사상과 정신병리
自閉症スペクトラムの時代: 現代思想と精神病理
우츠미 타케시(内海健) / 치바 마사야(千葉雅也) / 마츠모토 타쿠야(松本卓也)
자폐증인가, 도착인가
치바 : 지금의 얘기와 연결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츠모토 씨는 이번 책에서는 도착 개념을 옆으로 치워둔다는 식으로 글을 쓰셨네요.
마츠모토 : 정신병과 신경증의 굳건한 이항대립을 제시하고, 그것이 후기가 되면 탈구축되어간다는 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여기에 도착 개념을 집어넣으면, 정리가 좋지 않게 된다는 속내도 있습니다만, 원래 프로이트의 단계에서 도착 개념은 제대로 된 개념으로 수립되어 있지 않다고 제가 생각한 것도, 도착을 배제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도착을 규정하는 메커니즘은, 보통 ‘부인’이라고 간주되죠. 제가 쓴 프로이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적었습니다만, 사실 ‘부인’ 개념은 정신병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꺼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페티시즘을 설명할 때 ‘부인’이라는 단어가 전용(轉用)됩니다만, 그것은 어머니의 페니스의 부재에 대한 태도를 논하는 것이지, 구조로서의 도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가장 말년에는 ‘부인’은 ‘자아분열’로서 일반화된다. 모든 주체의 구조화에 있어서, 어머니의 페니스의 결여를 부인한다는 사태가 일반화되는 것입니다.
라캉의 도착론은 프로이트의 도착 개념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라캉도 도착을 부인에 의해 생각하는 시기가 있습니다만, 진정으로 라캉적인 도착 개념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세미나 10권의 『불안』에서 11권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 이르는 여정에서입니다. 거기에서는 “도착자倒錯者는 자신이 대타자(=대문자의 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라는 것은, 대타자(A)한테서 비어 있는 구멍을, 자신이 대상 a가 되어 메워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출증자는, 타자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신의 페니스를 꺼내고 그것을 메워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부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원리로서 부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는 표현을 사용해 도착 개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논문 「칸트와 사드」가 보여주듯이, 신경증자의 판타슴은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된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생각됩니다. 신경증자는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대타자가 향락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것을 참을 수 없으니까, 신경증자는 여러 가지 회피의 술책을 부리는 것인데요, 도착자는 현실에서 대타자의 향락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신경증과 도착자는 네거티브라고 하는 것입니다. 라캉의 이런 도착 개념은 대략 60년대 종반(14권 『환상의 논리』, 16권 『어떤 대타자에서 타자로』)까지 유지되지만, 그 후 라캉의 논의에서는 도착 개념이 놓일 장소가 없어져버립니다.
우츠미 : 대문자 타자가 몰락하기 때문 아닙니까?
마츠모토 : 대문자 타자의 이론적 가치가 내려가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생톰』 세미나에서, “도착(perversion)”을 패러디한 “아버지를 향하는 방향(père-version)”에 대해 라캉은 얘기합니다만, 이 단어는 이 시점에서는 도착의 새로운 개념으로 제출되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복수로 있는 시대가 됐기에, 보로메오의 매듭을 매는 방식이나, 섹슈얼리티나 상징적인 것의 조직화의 방식은 “버전 차이의 아버지”라는 형태로 복수로 있어도 좋지 않은가라는 논의의 맥락에서 ‘père-version’이라는 말장난을 제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역시 라캉의 논의에서도 도착 개념이 놓일 장소가 없어져 버립니다.
최근 프랑스에서 논의되고 있는 도착 개념에는 크게 나눠서 두 가지가 있으며, ‘보통 도착’과 ‘일반화 도착’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것들도 또한 도착 그 자체를 구조로서 주제화하여 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도착을 보통화하거나, 일반화하는 것입니다. 각자 각각의 별개의 흩어져 있는 상태인 일자론적 향락, ‘하나뿐인 일자’라는 방식인 향락은, 그 자체가 규범적인 향락의 모습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도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그 논점을, 강조점을 바꿈으로써 일반화 도착이라는 방식으로 논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치바 : 그렇다면 일자론, 헤놀로지[hénologie]를 자폐증적으로 다루는 것을, 그대로 도착론이라고도 부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츠모토 : 그렇게 될 것예요.
치바 : 그렇게 되면, 자폐증이라는 말은 적어도 들뢰즈 안에서는 사용하기 어렵고, 제 경우는 도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게 된다.
마츠모토 : 프랑스의 라캉파에서도 자폐증아냐 도착이냐라는 선택이 있네요. 밀러파는 자폐증자에게서 볼 수 있는 일자론적 향락을 최근에는 어딕션 쪽으로 끌어당겨 논합니다만, 최근 분파한 콜레트 솔레르(Colette Soler)는 일반화 도착이라는 개념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론의 중심을 자폐증 또는 어딕션에 둘 것인가, 도착에 둘 것인가라는 선택이 아마 있을 테죠.
우츠미 : 그것은 자폐증이 되면 타자가 나오지 않게 된다는 거죠.
마츠모토 : 정신분석을 추궁해 들어가면, 타자 없는 향락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자폐적이라는 문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치바 : 그렇게 되면, 자폐증은 적어도 중기까지의 라캉 이론에는 설 장소가 없고, 후기 이론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물을 수 있다는 구도와 유비적으로, 도착이라는 것의 설 장소 없음도 생각하게 된다면.
마츠모토 : 그렇습니다. 보충해서 말한다면, 라캉의 이론에는 사실상 자폐증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라캉은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키조프레니와 자폐증의 구별이 포퓰러하게 시작되는 81년에 사망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라캉이 70년대 후반에 스키조프레니에 관해 행한 발언 속에는, 분명히 그때까지의 이론을 갱신하는 포텐셜을 갖는 사항이 나오고 있으며, 그것을 자폐증론으로서 끄집어낸 것이 최근의 라캉파의 논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츠미 : 과거의 「분열병의 정신병리」에서도, 자폐증론이 꽤 섞여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끄집어내려는 작업을 해야 할 곳이네요.
마츠모토 : 네. 그 작업을 도착 쪽에서 첨예화하려고 하는 것이 코노 카즈노리(河野一紀) 씨입니다. 토가와 코지(十川幸司) 씨도 최근에 도착에 주목하고 계시죠.
‘y’의 현장성
── 3월 21일의 제4회 도쿄정신분석 서클의 콜로케에서는 ‘특이성’을 말하는 것이 분석의 종결에 있어서의 모종의 매직워드가 되지 않았거나, 종결에 있어서 분석가 자신의 변화를 어떻게 초래할 수 있는가 등의 물음이 던져졌던 것 같다고 기억합니다. 또한 ‘보통 정신병’이나 ‘일반화 도착’이라는 개념(이론)의 치료(론)적인 임플리케이션[implication, 함의]의 유무와 그 질에 대해서도.
우츠미 : 토가와 씨가 “임상경험 속에서 미지의 저항과 만나 산출되는 극히 강력한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생톰론 등을 비판했더군요.
마츠모토 : 라캉은 임상으로부터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60년대 후반이 되면 그때까지의 이론을 정리하기 위해서만 이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토가와 씨의 진단입니다. 그러나 『생톰』의 논의를 만들 때, 라캉은 그때까지의 이론의 정리에 머물지 않는, 꽤 새로운 것을 내놓고 있다. 그것이 특이성의 주제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치바 : 토가와 씨의 『도래할 정신분석의 프로그램(来るべき精神分析のプログラム)』도, “사람 각각”론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마츠모토 씨의 책에도 그것과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도발적으로 여쭙습니다만, 정신분석 또는 정신과 의료 실천에 있어서, 특이성과 마주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위에서, 뭔가 일반성 내지 규범의 틀을 끼우는 것의 의의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츠모토 : 라캉의 임상은 분석가의 강한 자아로의 동일화를 목표로 하는 자아심리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안티(anti)로서 나왔기에, 틀에 끼우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분석을 해서 자신의 향락에 충실해지고, 예를 들어 말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지향한다는 측면이 있네요. 그것은 확실히 “사람 각각”성의 긍정이라는 것이 되겠지만….
치바 : “사람 각각”이 되었을 때, 뭔가 타자와 전혀 공생할 수 없는 폭력적인 것이 발로発露한다는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있는 경우, “그런 것을 하지 않도록”이라는 규범을 끼워 넣을 필요가 있지 않나요?
마츠모토 : 그것은 “잘 하는 것” 속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츠미 : 현재의 정신과 임상에서 주류가 되고 있는 조작적 진단학은 도감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에 맞추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병자로부터 이쪽으로 향하게 해주는 벡터가 없다. 우리가 뭔가를 읽고, 임상가로서 촉발되는 것은, 그 논고가, 건너편에서 오는 것에 의해 변형된다고 느낄 때입니다. 오히려 병자에 의해 작성되고 있다고 할까, 이론이 삐걱거리고 있다고 할까, 그런 것이 있거나 없거나 하며, “이것은 좋은 임상론이다”라든가, “이것은 다르다”라든가,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치바 씨가 ‘강렬도의 윤리’로서 말한 것 ― “최저의 것을 긍정하는 것”과 “너무 설명하는 것” ― 은 임상가의 맥심[maxim, 금언]으로서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시기의 라캉파는 너무도 설명해버렸습니다. 마치 라캉을 대신한 듯한 주인의 담론에 의한 주장이라든가, 주인을 배경에 깐 대학의 담론으로 퇴색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에 싱귤라리티를 갖고 옴으로써 ‘너무 설명하지 않는’ 게 되어버린 것은 좋은 징후가 아닐까요?
마츠모토 : 세르주 르클레르(Serge Leclaire)가 말했듯이, 라캉파에서는, 이론을 점점 새롭게 갱신해가는 모티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분석할 때에는 이론을 전부 잊어버리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거든요.
분석의 종결이 “자신의 증상과 잘 지내는 것”이라는 정식화에 대해서는, 기존의 노하우를 사용해 “타협을 보다(savoir-faire)”와 “요령이 있다, 능란하다[빈틈없이 행동하다](savoir y faire)”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해야 합니다. “그 장소(y)”가 가진 현장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면접 현장의 세팅이나, 분석 주체의 삶의 방식 속에서, 그 장소 그 장소에서 어떻게 해가는가?
우츠미 : 그것이 본래의 정신요법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방금 말씀하신 인지 행동 요법 사이의 차이로군요. ‘y’가 하나 들어 있는가 아닌가이지만. 최근의 치료는 포뮬레숑(formulation) 대로 합니다. 그야말로 “자구성”이랄까. 그리고 그런 흔한 방식이 의외로 나쁘지 않은 곳도 있다(웃음). 다른 한편, 고전적인 정신요법가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해서, 모두 비슷한 것을 말하는데요, “오늘 내가 한 말을 잊어주세요”라든가. 도이 타케오(土居健郎) 씨는 사사건건 항상 ‘운수[임기응변]’이라고 말씀하셨고, 카와이 하야오(河合隼雄) 씨는 “제 작업은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전력을 경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기억합니다.
마츠모토 : 라캉은 마지막에 그런 것을 이론화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치바 : 개별적으로 “잘 하고 있다”고 할 때, 뭔가 모종의 공통의 사회통념이나 뭔가가 개입한다고 생각합니다만 ― 그것을 저는 ‘규범’이라고 부릅니다 ― 그런 심급과 개개의 향락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마츠모토 : 그렇군요. 이념적으로 생각하면,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 수 있겠지만, 분석의 섹션 속에서 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역시 틀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분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고, 모종의 행동요법적으로, 매주 같은 시간에 오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외형적인 것의 효과도 아마 있겠네요.
우츠미 : 상당한 금액을 치르게 되니까요.
치바 : 뼈를 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규범이 작동하기 때문에, “잘 하는 것”이 그래서 한정화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면, 모종의 사회론이랄까, 일반 인간론 같은 것으로서 “특이한 생톰”이라고 말한 경우, 개인의 정신분석 상황에서 작동하는 한정에 유비할 수 있는 것을 사회 일반 속에서 어떻게 위치지으면 좋을까, 이번에는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정기적으로 다니거나, 돈을 지불함으로써 체념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은, 일반론으로서 어떤 것인가?
우츠미 : 예를 들어 스키조프레니 임상이라면, 아까 말했듯이 “관계의 싱귤라리티”를 만들 수 있는가 여부, 이것이 치료자의 자질로서 요구됩니다. 그 안에서는, 환자 이상으로 치료자 쪽이 상대에게 의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것은 잊혀지고 있는 것 같고, 의국에서 젊은 무리들한테 “정신분열증자와 만나고 있으면 한시름이 덜어지지 않니?”라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듯한 얼굴을 했습니다. 스키조프레니의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시간이 흐릅니다. 그런 싱귤라리티를 만드는 것은 조금 용기가 들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래서, 그 후에 어떻게 하니?”라는 단계에서, 사회와의 관계가 문제가 될 때, 뭔가 그들을 배신한다는 기분이 듭니다. 치바 씨의 말로 얘기한다면, “비의미적 절단”에 의해 치료관계를 만들어 왔는데, 이번에는 “의미적 절단”을 하라고 말해야 한다. 사회에 이러저러한 제도가 있는 가운데, 스스로를 스스로가 지키라고 하게 된다면, 하루 돌봄[데이케어]를 부탁한다거나, SST(Social Skills Traing)를 하게 된다. 이때 자신도 기회주의적이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지조는 없어도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二刀流でやるよりない. 자신이 담당하는 것은 “관계의 싱귤라리티”를 만드는 것, 어떤 안심할 수 있는 토포스를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사회 복귀는 사회복귀로 할 수밖에 없다.
마츠모토 : 진찰실을 하나의 피난처로 삼는다고나 할까, 싱귤라리티를 공유할 수 있는 곳을 만든 뒤, 이로부터 일단 바깥을 향해 접속하기 위해, 의미 있는 절단을 하는 것이 필요해진다고.
우츠미 : 산뜻하게 나누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것이로군요.
치바 : 진료실이나 분석가의 오피스가 그런 형태에서의 아질[Asyl, (극빈자·부랑자 등의) 보호 시설, (범죄자 등의) 은신처, 피난 장소]이며, 신체를 다시 만들어가는 주형 같은 것으로서 기능한다. 그 기능은 일부러 다니는 것의 큰 의의이죠. 만약 그런 곳에 다니지 않고 사회 속의 어딘가에서 그것을 조달할 수 있다면, 누구든 의사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으니까요.
마츠모토 : 정신과 의사의 진찰실과 정신분석가의 오피스라면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정신과 임상의 경우, 예를 들어 정신분열증 환자에 대해서는, “선생과 만나니 안심한다” 같은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장을 우선 확보할 수 없으면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분석의 장은 결코 그런 의미에서 안심하게 해주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죠.
우츠미 : 스키조프레니의 경우에는 직접 사회와 접속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알린다든가, 남에게서 생각이 들어온다든가. 이것들은 증상에 등록되어 버리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사실, 사회란 그런 거예요. 그것에 대해 우리는 무슨 까닭인지 셔터를 내리는데, 그들은 내리지 못한다. 그런 호소는 대체로는 [귀담아] 들어주지 못하며, 거칠게 말하면 “병이기 때문에 약이” 된다「病気だから薬ね」となる. 약은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좋다고 하더라도, 호소는 전혀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회로부터의 벡터가 직접 들어오기 때문에, 관계의 싱귤라리티를 만드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다만, 거기서 일단 안전보장감을 얻고, 그 후 사회로 돌아온다고 할 때, 치료자로서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마츠모토 : 숨기고 있고, 그러면 어떻게 바깥으로 꺼낼 것인가라는 데 어려움이 있죠. 정신분석도, 캐비닛의 소파에 숨기고, 분석 주체에게 공상하기 위한 스페이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정신과 임상처럼 본인을 전인격적으로 숨기고 있다기보다는, 본인 속의 공상을 전개하는 스페이스를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죠.
***
마츠모토 : 제 책에서는 라캉 대 들뢰즈-가타리, 라캉 대 데리다 등 기존의 대립을 재고하고, 후기 라캉이 가진 들뢰즈-가타리나 데리다에 대한 모종의 ‘가까움’을 강조한 것인데요, 이번의 간담을 통해, 그 ‘가까움’이 보다 명확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가까움’을 인정한 다음에, 더 미묘한 차이나 대립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나, ‘y’의 현장성을 더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이 과제로서 전망됐습니다. 앞으로 그 작업은 임상과 사상의 양자의 교점에서 이뤄지지 않을까요? 오늘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우츠미 타케시, 정신의학/정신병리학)
(치바 마사야, 철학/표상문화론)
(마츠모토 타쿠야, 정신병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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