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9.10.29 02:12

伊吹浩(이부키 히로카즈) / 김상운 옮김

『情況』, 2006년 9~10월호, 115~133頁

고독

권모술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 이른바 정치사상사의 흐름에서 ‘악’의 딱지가 계속 따라다녔던 마키아벨리가 프랑스 현대사상가인 알튀세르의 두뇌를 통과하게 되자마자 다른 것으로 변모해갔다고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변해야 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자신이다. 이른바 문제는 의식의 저편에 있다. 알튀세르는 거기로 우리를 꾀려고 한다.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한테 매료됐다. 그러나 매료된 것은 알튀세르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의 매력의 자장(磁場)에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 곤혹스럽다. “도대체 어떻게 그를 이해하는 게 좋을까…”라고. 마키아벨리의 매력은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움”으로서 표출한다. 이것도 마키아벨리에게 따라다녔던 운명의 추세이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의 이 ‘이해하기 어려움’에 대한 해명으로 나아간다. “이 일격, 이 기습은 왜인가? 왜 생각에 잠기게 하는가? 맞서더라도 그의 사고가 우리 안에서 지속되기 때문이다. 왜 생각에 잠기게 되는가? 우리의 사고를 흐트러뜨리고 우리를 느닷없이 사로잡는 그것에 의해서만, 이 사고는, 우리 속에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느닷없이 그것에 붙들리지 않고서는 우리가 결코 마주칠 일이 없는 사고, 아연실색케 하는 저 놀라운 힘을 우리 위에 발휘하는 사고로서, 그것은 우리 속에 지속된다. 무엇이 우리를 아연실색케 하는가?”(SM314) 마키아벨리가 지닌 이런 불가사의함에 도전하는 것.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매력의 해명으로 이어진다.

‘고독’,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놓인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키아벨리의 고독 ― 이 말 자체는 뭐라고 말하기 힘든 매력을 내뿜고 우리를 사로잡지만 ― 여기에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생각이 응축되어 있다. 그렇다, 마키아벨리는 ‘고독’ 속에 있는 것이다.

 

사회계약론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사물을 생각할 수는 없다. 일정한 사고의 틀이 있기 때문에, 또한 반대로 그것이 없는 곳에서는 사고 그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물론 국가라는 것을 사고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사회계약론, 국가를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통해 사고하려고 할 것이며, 이런 기존의 틀을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사회계약론, 특히 루소의 그것에 대해 논한다. 게다가 비판적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적의 사상으로서 논한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에 대해 루소는 『불평등기원론』에서 자연상태에 대해 상이한 견해를 제시했다.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은 숲속을 방황하고, 생산기술도 언어도 주거도 전쟁도 동맹도 없이, 타자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해치기를 바라지도 않고, ‘자기애’와 ‘불쌍함’이라는 매우 적은 감정만을 품으면서 생활을 보냈다. 즉, 한없이 동물에 가까운 상태였다. 각자는 자유로우며, 불평등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고 사회적 존재가 됨으로써, 사유(私有)가 시작되고, 타인의 노동을 필요로 하게 되며, 이로부터 노예제와 빈곤, 불행과 악이 발생하며, 불평등이 발생한다. 부가 증대함으로써 욕망이 자극받고, 폭력과 강탈, 지배가 되풀이 되는 전쟁상태가 출현했다. 불평등은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주인과 노예의 상태로 나아가며, 전제주의에 이른다. 그리고 전제주의의 무질서는 다시 자연상태의 무질서로 돌아간다.

그리고 루소는 다른 세계관을 『사회계약론』에서 다시 묘사한다.

자연상태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이며, 거기에서 사람들은 인간 생존에 있어서의 극한점, 인류의 생사를 가르는 점에 도달한다. 인간 생존에 있어서의 장애는 인간적 관계들 내부 그 자체로부터 발생했다. 또 거기에서 위협받고 있는 것은, 자유로운 생활, 생명 그 자체, 생명을 보존하는 능력, 즉 루소가 말하는 ‘자기애’이다. 이 상태를 알튀세르는 ‘인간 소외의 상태’라고 성격 짓는다.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의 «힘»(신체적 힘(생명) + 자유)으로는 이 장애를 뛰어넘을 수 없다. 다만 전쟁상태에 도달한 인간의 힘은 증대하고 있으며, 사회화하고, 외화된 능력을 갖게 되며, ‘신체적 힘(생명) + 지적∙‘도덕적’ 힘 + 재산 + 자유’가 된다. 여기에서 ‘재산’이 등장함으로써, 인간의 생존양식에 있어서의 새로운 범주가 출현한다. ‘이해(利害)’이다. 각각의 인간이 ‘개별적 이해’를 갖고, 그 대립이 전쟁상태를 발생시켰다. 거꾸로 말하면, 개별 이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대립에 의해 성립한다. 왜냐하면 개별 이해는 대립하지 않는 자연상태의 동물 그대로의 인간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과 동시에 이것은 토지의 배타적 과점(寡占), 그리고 이 과점이 초래하는 직접적 결과(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주인과 노예)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암리에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은 인간의 능력을 변용시킴으로써 인간의 ‘자기애’를 개별 이해로 변용시킨다”(SM66). 그러나 ‘자유’의 소외된 표현인 이 개별 이해의 등장이 인간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바로 인간의 자기 소외이다. 이 상태에서 탈출해야 한다. 개별 이해의 대립이 사회의 설립을 필요하게 했다.

그래서 인간들은 다른 차원, 즉 ‘사회계약’으로 이끌리게 된다. 그때 루소는 질문을 던진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을 따를 뿐이고, 재산을 보존하고 전과 똑같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결사 형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전쟁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들은 장애보다 더 큰 힘을 가져야 한다. 장애는 개개인의 활동에서 산출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실제로 지금 있는 힘들을 하나로 결합하고 그것들에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다. «관계»를 대립으로부터 결합으로 이행시켜가는 것. 여기에서 ‘사회계약’이 등장한다. “강요된 최초의 사회화의, 그 효과들이 개인을 발전시키고, 또한 소외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 최초의 소외가 사회관계에 반작용하고, 그것을 서서히 외화시키면서, 지금 있는 사회관계로 발전시킨다. 실제로 이러한 변증법 속에서 인류사 전체의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SM67).

사회계약이란 “결합하는 각자가 자신과 자신의 모든 권리를 공동체 전체에 전면적으로 양도하는 것”이다. 이 계약에 의해 정치체를 형성하는 것인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자신들의 왕을 뽑는다고 한다면, 왕을 뽑기 전에 인민은 인민이 아니면 안 된다. 인민이 인민이기 위해서는 그들이 서로 결합해 하나의 정치체를 만든다는 만장일치의 약속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다수결에서 소수자가 다수자를 따라야 한다는 의무가 생기지 않는다. 이 만장일치의 ‘원초적 약속’,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 ‘사회계약’이다. 바로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행위이며, 그것이 마찬가지로 국가의 기원이 된다.

여기서 루소는 ‘양도’에 대해 음미해야 한다고 말한다. 양도에는 ‘주다’(교환 없는 무상의 행위)와 ‘매도하다’(무상이 아니다, 즉 교환의 대가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무상으로 자신을 주는 것은 하지 않는다. 교환 없는 무상 행위는 상궤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에 의해 사회가 성립해 버린다면, 권리들은 광기에서 생겨난 것이게 된다. 노예마저도 끼니와 맞바꿔서 자신을 팔아넘긴다. 그러니까 인간은 ‘주는’ 것이 아니라 ‘매도하는’ 것이며, 어떤 보답을 기대하고 ‘양도’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더욱이 루소는 매도한다고 해도, 자유만은 그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유를 양도해버리면, 인간으로서의 자격, 인간이라는 것의 권리,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포기하게 되어, 인간의 행위로부터 일체의 도덕성을 빼앗아 버리게 된다. 자유는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갈라놓는 표시이며, 감각적·경험적인 것에 맞서서 이것을 이루는 능력이다. 따라서 전면적 양도는 인간의 본질과 양립하지 않는다. 더욱이 자유를 타인에게 양도해 버리면, 타인의 노예가 되고 만다. ‘강자에 의한 지배’로부터 사회에 있어서의 권리나 도덕성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 루소의 신념이다. 그리고 벗어나야 할 것은 바로 강요된 소외상태(전쟁상태)이며,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되찾는 것이 사회계약이다.

하지만 자유를 포함해 자신의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양도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계약의 본질이다. 그것이 ‘전면적’인 이상, 각자에게 조건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 첫 출발부터 불평등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유는 양도할 수 없다. 그러면 전면 양도하면서 자유를 확보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하면 이 모순된 문제에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을까? 게다가 무상 행위가 아닌 계약으로서. 그 열쇠는 사회계약의 특이한 성격에 있다.

 

계약일 수 없는 ‘계약’ : 법적 개념과의 ‘간극’

사회계약을 맺을 때, 제1 당사자는 제2 당사자(계약의 상대)에게 자신을 전면적으로 양도한다. 제1 당사자는 공동체, 개인들과 그들의 힘을 모은 결사체, 결사이다. 그런데 계약의 순간에는 제2 당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약 그 자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1 당사자는 누구와 계약할까? 자기 자신과 계약한다. 제2 당사자는 계약의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직후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결합체, 공동체로서. 제1 당사자는 자신들의 결합체로서의 공동체, 즉 자기 자신과 계약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약 상대가 없는 곳에서의 ‘자기 자신과의 계약’, 즉 그 순간에는 부재하는 ‘도래할 자신=인민’과의 계약이다. 결국 개인은 자신을 스스로 인민으로 결정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자유의 발동이다. 자유란 절대적 자발성을 갖고서 시작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법적 개념으로서의 계약과는 합치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이것을 ‘간극’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이야말로 불가능한 ‘전면적 양도’(자유를 확보한 ‘전면적 양도’)의 열쇠가 된다.

홉스의 사회계약에서는 계약의 외부에 있는 제3자(군주, 조정자)를 이롭게 하는 형태로 민중의 전면적 양도는 행해진다. 루소 왈, 그러나 제3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제3자가 왕이 된 경우, 왕은 신민에게 생활 자료를 주기는커녕 그것을 신민에게서 끌어내려고 한다. 또 왕은 신민의 사회의 안녕을 확보한다고들 하지만, 그러나 그의 야심이 야기하는 전쟁이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은 신민들의 불화에서 생기는 것 이상의 고통을 신민에게 주게 된다. 또한 이 무제약적인 제3자를 전제(專制)로 향하게 하지 않는 담보는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없고, 게다가 그의 이해(利害)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뢰도 두지 말고, 그의 의무를 수행케 하는 담보도 없다.

이 문제를 루소는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홉스의 외부적 계약을 내부의 그것으로 전화시킴으로써 ‘극복하고’, 더 나아가 무상이 아닌 교환으로 한다. 그런데 원래 루소에게서는 홉스 같은 제3자=강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루소에게는 폭력으로부터는 사회나 권리나 도덕은 생기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폭력의 배제가 루소의 논리의 핵심이다.

루소의 사회계약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주권자, 즉 전면 양도하는 상대란, 바로 개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의 주체=주권자”의 이해, 의무는 바로 자신들의 그것이다. 전제정치로의 전락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방해한다. 게다가 전면 양도를 하더라도 그 상대는 자신이기 때문에, 양도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 때문에 자유는 확보된다. 루소는 홉스의 아포리아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품고 있는 문제도 해결해 버린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 자유, 평등, 소유권

하지만 루소가 말하는 사회계약은 본래의 법적 개념인 계약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거꾸로 이것이야말로 사회계약의 특징이다. “사실 그의 <사회계약>은 계약이 아니다. 어떤 가능한 계약, 이뤄질 때에는 더 이상 원초적 계약이 아닌 그 계약을 위해 <제2 당사자>를 구성하는 행위인 것이다”(SM74). 사회계약은 바로 “원초적 약속”이며, 이것에 의해 사회의 기초를 쌓는[구축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 교환의 가능성에 구체성을 갖게 하듯이, 이 전면적 증여, 어떤 교환의 대상으로도 될 수 없는 이 증여가, 맨 처음에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루소는 어떤 교환에 의해서도 보답할 수 없는 이 전면적 양도를 모든 가능한 교환의, 선험적 조건으로서 둔다. 때문에 <제2 당사자>를 구성하는 것, 즉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교환을 하는 것이 아니며, (현실적, 경험적) 교환 일반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조건을 구성하는 것이다”(SM76). 그 때문에 사회계약은 본래적 의미의 계약이 아니다. 사회계약은 보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루소의 사회계약은 두 명의 당사자 사이의 법적 개념, ‘기브 앤 테이크’로서도 또한 기능한다. 루소는 말한다. “이 양도에 있어서 특이한 것은 개별 재산을 부여받음으로써 공동체가 개체로부터 그 재산을 빼앗기는커녕, 거꾸로 개체에게 그 재산의 합법적 점유를 보증하는 것, 횡령을 진정한 권리로, 공유를 소유권으로 바꾸는 것밖에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그들은 말하자면 준 것을 획득한 것이다”(『사회계약론』). 즉, 각자는 자신의 재산을 공동체에 주고, 보답으로서 소유권을 부여받는 것이다. 전면적 양도에 의해 잃는 것은 자연적 자유, 그리고 개인의 힘을 그 한도로 하는,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전체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힘의 결과나 점유자의 권리일 수밖에 없는 점유)이다. 그것에 비해 이득은 법에 의해 제한된 시민적 자유, 제도적으로 확립된 소유권이다. 여기에서 인민을 인민으로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계약이 이익 있는 교환으로 전화해버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평등’이다. 모든 사람은 전면적으로 양도한다. 그것이 전면적인 이상, ‘평등’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은 더 많은 것을 점유하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전쟁상태에서 더 많은 것을 잃을 우려가 있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 ‘이해’이다.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기 때문에, 그 조건을 다른 사람들한테 무겁게 하려고 하는 관심을 누구도 품지 않는다.” 왜냐하면 타자에게 조건을 무겁게 하면, 전면적 양도에 포함된 형식적 평등과 연동하여, 자동적으로 자기에게도 무겁게 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각자가 이루는 자기 우선”, 인간은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만 일을 한다는 인간관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이로부터 일반의지의 대상이 되는 ‘공통이해=일반이해’가 생겨난다.

더 나아가 “각자가 사회협약에 의해 양도하는 모든 것은 … 그 사용이 공동체에 있어서 중요성을 갖는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 동의되지만, 그러나 그 중요성을 판정하는 것이 주권자뿐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또한 동의되어야 한다”(『사회계약론』). 즉, 전면적 양도는 양도되는 모든 것 중의 일부에만 미칠 뿐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에 필요하지 않는 부분은, 양도한 자에게 권리로서 되돌려진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양도한 자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전면적 양도는 전면적이기 때문에 전면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전면적 양도’는 권리나 도덕의 원천이지만, 도덕적·금욕주의적 행위가 아니다. 전면적 양도는 ‘개인적 이해’의 추구, 즉 욕망을 원동력으로 삼아 이뤄지기 때문이다. ‘개인적 이해’의 효력 없이는, 전면적 양도의 자기 조정·자기 제한도 없고 이익 있는 교환으로의 전환도 없는 것이다. “요컨대 각자는 모든 구성원에게 자신을 주기 때문에, 자신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에게 양도한 것과 똑같은 자신에 대한 권리를, 결사의 구성원의 누구나, 반드시 타인으로부터 수여받는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모든 것과 등가적인 것이 획득될 뿐 아니라, 갖고 있는 것을 보존하기 위한 힘이 더 많이 획득될 수도 있다”(『사회계약론』). 각자는 스스로가 주는 것 이상의 것, 즉 이익을 수여받는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자유 아래에서만 주기 때문이다.

 

일반의지라는 신화

개별 이해의 대립은 사회의 성립을 필요로 하며, 개별 이해 사이에 있는 일치, 즉 ‘공통이해’는 그것을 가능케 한다. 이것이 없는 한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바로 이 공통이해에 기초하여 사회는 통치되어야 한다.” 이 공통이해를 실현하는 것이 일반의지, 즉 법이다. “의지는 의지를 가진 존재에 대한 안녕으로 항상 향하며, 항상 개별의지는 사적 이해를, 일반의지는 공통이해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일반의지가 사회체의 진정한 동력이며, 또한 그러해야 한다. … 실제로 사적 이해는 자기 우선으로, 공적 이해는 평등으로 향하는 것이므로”(『사회계약론』). 개별이해는 일반이해의 기초로서 있다. 전면적 양도는 이 일반이해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의지에 대해서 이뤄진다. 일반의지는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에게 행복과 이익을 가져다주며, 법의 원천이 된다. 그 때문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일반의지 아래에 둔다는 것은 법 아래에 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소에게는 법률을 정하는 행위가 ‘주권’에 다름 아니다. ‘주권’은 타자에게 물려줄 수 없다. 양도하자마자 타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자유는 항상 확보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체는 자유와는 양립하지 않는 강제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개인이 자신의 의지만을 좇아 자기를 규제하듯이, 정치체가 일반의지만을 좇도록 하면 된다. 거기에서는 주권자와 인민이 동일한 권리밖에 갖지 못하게 하는 상태를 실현하는 것이며, 즉 인민과 주권자가 동일한 인물이면 된다.

이러한 이상상태를 알게 하는 것이 사회계약이다. “입법행위란 실제로 각 ‘순간’마다 지속, 재개, 재발행되는 <사회계약>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인민을 인민으로 하는’ 기원적 ‘순간’은 역사적 ‘순간’이 아니다. 그것들은 항상 현재적인 것의 기원적 ‘순간’이며, <주권자>이며, <주권자>의 모든 행위마다 <주권자>가 입법의 결정을 이루는 그때마다, 즉 일반의지가 일반의지를 이루는 그때마다, 이 기원적 ‘순간’에 새로운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것이다”(SM84). 사회계약론이란 기원적, 원리적 순간을 현재에 되살리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얼마나 자유롭고, 그래서 의무를 짊어지는가를 계속해서 인식시키는 기능을 가진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일반의지는 개별의지의 합력(合力)이다. “… 이런 개별의지로부터, 서로 죽이는 과부족분을 빼내어라. 그러면 그 차이분의 합계로서 일반의지가 남는다. … 다수의 작은 차이분에서, 항상 일반의지가 결과로서 남는다.” 그러나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다. 우선 인민이 충분한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국가 안에 ‘도당’이나 ‘부분 결사’가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의견만을 따르는 것이다. 만일 부분 결사가 존재한다면, 거기서 사람들이 표명하는 의지는 더 이상 일반의가 아니라 부분적 의지(개별이해)이며, 나아가 그 부분 결사가 다른 집단을 압도하게 되면 우세를 차지하려는 의지가 지배적이게 된다. 그러면 평등한 사회가 구축될 수 없게 된다고 루소는 말한다.

개별이해는 일반의지의 본질이기도 하지만, 일반이해의 장애이기도 하다. 이 모순의 원인은 루소가 ‘개별’이라는 단어를 한 명 한 명의 개인에도 사회집단에도 사용하는 데 있다고 알튀세르는 말한다. 확실히 둘 다 일반이해에서 보면 ‘개별’이지만, 사회집단의 이해는 개인으로부터 보면 ‘공통이해’가 될 가능성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루소는 사회집단의 이해는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부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국가 안에는 다양한 사회집단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루소의 논리를 따르면, 현실의 사회는 불평등하게 된다.

게다가 “사회일반의 기초로서 일반이해가 존재하는 것을 한순간이라도 루소는 의심하지 않는다”(SM88). 그러나 일반이해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게다가 개별이해도 신화이다. 개별이해는 자연에서 나온다(자기애의 소외형태). 또 일반이해는 개별이해를 기초로 삼고, 이로부터 자연스럽게[자연에] 나온다. 그러므로 일반의지는 항상 있다. 사회집단의 이해만이 자연이 아니다. 일반의지도 개별이해도, 원초적인 것을 이야기에 의해 설명하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고립된 개인들만 존재할 뿐인 사회 ― 그것을 기초로 하는 것이 자본주의인데 ― 따위는 없다. 현실에서는 개인들은 어떤 사회집단에 영향을 받으면서 존재하며, 타자에게 영향을 주려고 하는 자도 많이 존재한다. 자연스레 사회집단의 개별이해가 생긴다. 결과, 어떤 사회집단의 이해가 지배적이게 되면, 일반이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루소는 사회집단의 이해를 오로지 부인함으로써만 배제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루소의 논리에 따르면, 평등의 이름 아래에서 체결되는 사회계약에 의해, 원래 대부분을 점유하는 자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며, 그 합법적 인지를 얻는다. 그리고 국가 안에 우세한 집단이 존재하면, 그들의 이해가 일반이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실재하는 ‘일반이해’는 어떤 특정한 사회집단의 이해 그 자체이다. 그러나 루소는 이를 은폐한다. 하지만 이 은폐는 겉을 꾸밀 수 없는 채 드러난다. 왜 그런가?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집단의 이해가 어떤 때는 개별, 어떤 때에는 일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익[利]>, 이데올로기적인 거울상적 쌍, 개별이해/일반이해가 지닌 <이익[利]>의 형편의 좋고 나쁨 여하에 대응하는 것이며, 실제로 이 쌍에는, 계급대립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다. 특정한 계급이해를, 개별자들에게, 그들에게서의 <일반>이해로서 들이미는 이데올로기가”(SM88-9).

여기에 이르러 루소의 기만이 분출한다. 모든 사람한테 일반의지에 복종할 것을 권유하고, 일반의지야말로 만인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역설하는 그 이면에는, 지배계급의 이익만이 증식해가는 계략이 감춰져 있다. 루소가 부인하는 사회집단이란 바로 지배계급이며, 이것이 드러나면 사람들을 사회계약에 동원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사회계약>을 솔선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은 ‘부유한 자’의 단체 아닌가? 그렇다면 [부자에 의한] <사회계약>의 논리의 무엇인가가 이렇게 드러나게 된다. <인류>사에서 최대 사기의, 대단히 잘 ‘궁리해낸’ 기획”(SM89). 루소의 사회계약은 그가 『불평등기원론』에서 묘사한 현실, 즉 불평등한 사회와 만난다.

 

법적 이데올로기

루소는 사회계약이라는 계약일 수 없는 것을 ‘계약’이라고 칭하면서 제시했다. 왜 자신이 말하려고 한 것에 개념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개념으로 표현했는가? “기존의 <법>이 지닌 현실적 개념(현실적 실천을 재가하는 개념)의 하나인 계약을 통해, 그 <법>에 접합해가며, 더 나아가 기존의 법적 이데올로기에 접합해가기”(SM74) 위해서이다. 말할 것도 없이, 법은 민중을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다.

국가를 생각할 때, 법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법은 그것만으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법은 준수해야 할 것들을 말할 뿐이며, 실제로 그것을 실행시키는 것은 법 그 자체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법은 준수된다. 이는 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징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고 얘기된다. “<법>은 징벌과 상관하는 체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달리 말해, <형법전> 없이 가능한 <민법전>은 없다는 것이며, <형법전>이란 <법>의 수준 그 자체에 있어서의 그 실현이다. … 그 때문에 <법>의 적용(또는 비적용)에 관한 <법>, 즉 법적 계약의 법칙의 준수(또는 준수하지 않는)에 관한 <법>이 존재해야 한다”(SR95). 이렇게 법 그 자체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법의 적용에 관한, 즉 법을 강제하는 또 다른 법이 없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도, 징벌을 실제로 행하는 것은 법 그 자체가 아니다. “강제라는 것은 징벌이라는 것이며, 징벌이라는 것은 억압이라는 것이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억압 장치라는 것이다. 이 장치는 좁은 의미의 억압적 국가장치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경찰 집단, 법원, 벌금, 교도소로 불린다. 법이 국가와 한 몸인 것은 그것에 의해서이다”(SR96). 억압적 국가 장치에 의한 징벌의 실천이 있기 때문에, 법은 준수된다. 억압 장치라는 구체적인 폭력의 발동 없이는 법의 준수가 없다. 이것은 ‘징벌의 공포’가 법의 준수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인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억압 장치는 그 장소에는 있지 않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설령 부재하더라도, 대개는 법은 준수된다. 모두가 경찰의 부재만을 이유로 법을 어기면, 이 세상은 범죄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법의 준수는 ‘징벌의 공포’에서만 오는 것 같지는 않다.

징벌의 공포에 “법을 지키려고 하는 의지”, “성실함”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는 ‘양심’. 이것들이 있기 때문에 법은 존중되는 것이다.

이 법을 떠받치는 관념, 예를 들어 ‘성실함’을 알튀세르는 “법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이것을 보완하는 ― 때로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 것을 “도덕적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이것들이 있기에 법은 법으로서 기능하고 존재한다.

법 그 자체와 법 이데올로기는 담론의 내용이 다르다. “<법>은 말한다, 개인들은 법 주체인 한에서 법적으로 자유로우며 평등하며, 의무를 짊어지는 법 주체이라고.” 법은 이른바 법 그 자체에 의해, 법 체계 안에서 말한다. 이에 비해 “법적 이데올로기는 말한다, 인간들은 생래적으로par nature[자연에 의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법적 이데올로기에 있어서는, 그 때문에 ‘인간들’(그리고 법주체가 아닌 것들)의 자유와 평등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은 ‘자연’이지 <법>이 아니다”(SR99). 법적 이데올로기는 법 이외의 말로, 법의 바깥에서 이야기하며, 그것에 의해 법을 정당화한다. 자유도 평등도, 그리고 법 자체도 ‘자연’인 것이다, 따라서 법에 따르는 것도 ‘자연’스러우며, 당연한 것이라고 말이다.

루소의 이론에서 생긴 ‘간극’은 법적 이데올로기를 생겨나게 하기 위한 교묘한 트릭이다. 루소는 교환 없는 무상행위를 상궤를 벗어난 것으로 부정하고, 이익추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찬양한다. 그리고 ‘이해’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추진력 삼아 사람들을 사회계약의 체결로 견인한다.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으면, 사회계약으로의 동원이 가능해지며, 스스로를 전면적으로 양도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사회계약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무와의 ‘교환’밖에 없다. 바로 루소가 말하는 ‘광기’를 기초로 하여 국가는 형성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일반의지라는 법의 원천 아래에 양도함으로써 사회가 성립하며,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개별의지를 일반의지에 합치시키는, 즉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보통이라면 거기에는 ‘강제=폭력’을 기능시키는 물질적 힘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루소에게서는 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자동적으로, 원만하게 진행되는 듯한 세계가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개별이해이다. 그 논리 전체를 지탱하는 것이 법적 이데올로기이다. 루소는 말했다. 인간은 생래[선천]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개별이해는 자연 속에서부터 자유 또는 자기애의 변형으로서 나타났다. 사회계약은 이 인간이 생래적으로 가진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별이해가 기초가 되며 일반의지가 세워지며, 그 표현이 법이다. 법의 지도를 따르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법이나 국가는 자연으로부터 생겨났다. 그 때문에 법과 국가만큼 자연적인 것은 없다고 말이다. 이런 이데올로기가 법을 뒷받침하게 된다. 루소가 성취한 것은 이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난한 자들은 가난한 채이며, 부유한 자들은 더욱 더 부유해질 것이다. 바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부유한 자들에게 입맛에 좋은 담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이렇게 불러도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통해 국가를 사고해버린다.

 

이데올로기 공간에서의 고독

기본적으로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한, 매우 표준적인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인간들의 현실적 생활과정들의 반영과 반향, 환상,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현실적 관계들을 에워싸 감추는 효과를 가진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종교, 그리고 철학, 특히 헤겔 철학, 소외론이 그 대표로서 거론됐다. 그리고 맑스주의 안에서는 등한시되기 쉬운 이데올로기를 중요하다고 의식했던 알튀세르는 이런 표준적 이데올로기론에 덧붙여, 더욱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분명히 이데올로기는 ‘환상’,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이기는커녕 진위성을 전혀 음미하게 하지 않는, 즉 ‘환상’이라든가 ‘허위의식’이라는 의념(疑念, 의구심)을 전혀 품게 하지 않는 ‘자명성’을 가진 것으로서 존재한다. “이데올로기는 외부를 갖지 않는다”(PO115).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지금 있는 이데올로기 공간 안에 가둬버리고, 외부로의 개방을 모조리 닫아버리는 효과를 가진다. 이 ‘폐쇄성’이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이룬다. 그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라고는 잘라 말할 수 없다. 바로 사람들 속에 무게를 갖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적인 존재를 갖고 있다.

우리의 국가에 관한 다양한 관념도 역시 이데올로기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도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인 한에서, 폐쇄성을 발휘한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의 공간 속에 있는 한, 자명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진다. 이것들을 상대화하는 자들도 이로부터 벗어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현실에 있는 국가는 국민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소유권을 보증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그 이데올로기가 물질적인 제도로서 존재하며, 그 안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고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된다. 우리는 지배적 이데올로기, 즉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마키아벨리의 “파악하기 힘듦”, “일격”, “갑작스런 불시의 타격”이 기인한다. 마키아벨리만은 전혀 다르다. 인류가, 아니 시대마다의 ‘승리자’가 계속 얘기한 국가론을 그는 얘기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혼자다. 왜냐하면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고립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고와 격투했던 사람은 끊임없이 있었으나, 그의 사고 속에서 생각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없었던 이유는, 그의 사고의 성질에도 있었지만, 또한 그의 이후의 사고가 놓인 사고의 틀에도 있었다. 누구나 알고 듯이, 17세기 이후,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은 하나의 뚜렷한 정치철학을 만들어냈다. 자연법 철학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할 것도 없이 마키아벨리의 사고도 파묻어버렸다. 법적 이데올로기에 뿌리내린 준-개념, 주체로서의 개인의 권리를 바탕으로 이 철학은 만들어지며, 그것은 법적 이데올로기가 인간 주체에게 수여하는 속성(자유, 평등, 소유)으로부터, 실정법과 정치국가 사이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연역하려고 했다”(SM318).

“마키아벨리의 고독.” 이것은 이런 이데올로기 공간 속에서 고립된 상태를 가리킨다. 확실히 마키아벨리는 그의 이후에 나타나는 사회계약론도 헤겔의 철학도 모르며,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마키아벨리를 이데올로기 공간 속에서 고립된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다. 다른 국가론과는 무관한 것으로서.

물론 마키아벨리는 다른 국가론과는 무관하다. 사실 그는 선행하는 국가론에 가세하지 않았다. 일체 입을 닫은 것이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시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와 기독교의 말로 얘기된 시대에, 이 침묵은 공공연한 단절과도 같다”(EPP48).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군주론』은 유명해지자마자, 맑스가 ‘이데올로기의 전문가’라고 불렀던 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샀다. 종교인이나 도덕가들이다”(EPP74). 알튀세르는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우리의 문화 그 자체가 신증경적 성질을 띠며, 때로는 환자가 정신분석적 임상에서 보여주는 ‘저항’과 똑같은 것을 출현시킨다고 말한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저항이다. 그것에 의해 현 상황을 영속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겪게 된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적 저항이다.

선악의 관념은 때때로 변화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시대의 사상은 그 시대의 지배계급의 사상인 이상, 지배자들이 바뀌면 그것도 바뀐다. 그러나 시대를 관통하는 것이 있다. 선은 체제 유지에 봉사하는 것, 악은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관념이다. 물론 선악의 내용은 시대마다 변화한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현 상황이 영속하기를 바라고, 자신의 선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이데올로기 조작은 불가결하다. 그러나 그것도 어차피 그들이 날조한 것일 뿐이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이 덫에 사로잡혔다. 자유, 평등, 소유권을 찬미하지 않는 그의 사상은 악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이 딱지 붙이기를 추종한다. 이것에 의해 마키아벨리는 고독 속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자신, 선악을 둘러싼 이런 사정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문제는 선이냐 악이냐가 아니라, 그 피안으로 향하는 것이다. 바로 현실을 에워싸고 감추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선과 악이 수립되는 현장으로.

원래 마키아벨리에게 기성의 국가론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국내 할거와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는 통일 없는 국가인 이탈리아에서의, 국민국가 수립의 조건이라는 정치적 문제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 이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런 이상, 자신의 이론의 종류를 검토하는 것 따위는 안중에 없다. “이런 유형론을 마키아벨리는 수용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 특정한 통치유형이 지닌 본질의 규정을, 그는 자신의 사색의 과제로 삼지 않는다”(SM314-5). 그에게서의 문제, 즉 “통일 없는 국가인 이탈리아에서 국민국가 수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농락하고, 국가 수립의 순간의 진실을 분명히 하지 않으려 하는 기존의 국가론은 도움이 되지 않으며, 필요가 없다. “군주에 의해 통치되고 있든, 공화제를 취하고 있든, 교황령이든, 어떤 기존의 국가에 의해서도 이탈리아 국민국가의 건설이라는 정치적 사명은 성취되지 않는다. 기존의 국가는 모두 낡았기 때문이다”(SM315). 그렇다면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국가는 탄생하는가? 라고.

루소에게 최초의 약속=법은 바로 자연(상태) 속에서부터 태어났다. 인간들의 생존을 유일하게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인간 존재에 있어서, 이만큼 자연적인 것은 없다고. “태초에 자연상태가 있었다, 그것은 전쟁상태로 이어지며, 마침내 전쟁상태에서는 국가와 실정법을 탄생시키는 사회계약으로 종식된다. 완전히 신화적인 역사=이야기인데, 그것은 듣기에는 좋다. 국가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요컨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니까. 국가의 기원에는, 사소한 두려움도 없이, 거기에 있는 것은 자연과 법이다. 국가는 법적인 것에 다름없으며, 법처럼 순수하고 법처럼 인간의 본성=자연 안에 있다. 국가만큼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있을까?”(SM319) 이것은 마키아벨리에게서 현실을 에워싸고 감추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마키아벨리는 법의 말을 얘기하기 않는다. “법과 자연에서 국가는 생겨났다. 그렇지 않고 국가는 지속하려고 한다면, 또한 한 국민에 속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려고 한다면, 어떻게 생겨나야 할지를 그는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그는 법의 말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 어떤 국가를 구성하든 군대가 불가결하다고 얘기하는 말을 얘기한다. 국가의 발족에는 잔혹함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말을 얘기한다. 정치는 종교에 귀의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종교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정치는 도덕적이어야 하지만 도덕적이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며, 정치는 미움을 사서는 안 되지만 두려움은 불어넣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말을 얘기한다. 그는 계급투쟁의 말을 얘기한다. 권리, 법, 도덕에 대해서는, 그는 마땅한 자리에, 즉 종속적인 자리에 앉힌다. 우리가 아무리 역사의 폭력으로 통하려 하든, 그를 읽을 때, 그의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붙잡는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이야기로 모조리 덮어버리기 훨씬 전에 국가 탄생의 폭력을, 몸소, 겪거나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SM320).

마키아벨리는 법의 말을 얘기하지 않는다. 은폐되더라도, 국가는 폭력에서 생긴다. 그 때문에 군대의 존재는 불가결한 것이 된다. 기피되더라도, 그것이 현실인 이상, 폭력을, 군사를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이 현실을 숨긴다. 폭력의 부정이라는 형태로. 왜? 민중의 손으로 군사와 폭력을 장악하고, 스스로가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체제가 전복되는 것을, 새로운 사회가 구축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물론 루소에게 영향을 받아 법의 말을 얘기하는 헤겔도 마찬가지다. 원래 헤겔에게는 ‘정치’가 없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헤겔적 발상에 기초한 정치 따위는 도무지 보이지 않아”(SM214). 그에 반해 마키아벨리에게는 ‘정치’가 있다. 분명히 헤겔 자신은 마키아벨리에게 매료됐다. 하지만 중요한 곳을 놓쳤다. “헤겔과 마키아벨리의 만남에 있어서는, 헤겔철학에서만 나올 뿐인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정치를 생각하고 논의하고 얘기하는 방식으로부터 나오는 무엇인가가”(EPP50).

 

정치

확실히 마키아벨리도 헤겔도 정치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양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간격이 있다. “정치를 그 자체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위치 및 역사적 임무의 정의라는 형태로 생각하는 것”(EPP51), 이것이 헤겔에게는 누락되어 있으며, 미키아벨리에게는 있다.

새로운 맑스 독해를 통해 변혁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려고 한 알튀세르에게 맑스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알튀세르는 헤겔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법철학』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추상적 권리의 영역, 도덕성의 영역, 인륜의 영역이, 그것들을 낳는 객관적 <정신>의 변증법 속에서 나열된다. 어떤 영역도 부정의 부정을 통해 다음의 영역을 산출해가며, 최종적으로, 어떤 영역이 자신의 진리를 국가에서 발견한다. 많은 차이가 있고, 차이들은 ‘진리’의 관계로 연결되어 간다, 때문에 차이는 그저 자기 부정을 통해서 다른 차이로 자기를 극복해가기 위해서만 자기를 긍정한다. 그런 식으로 자기의 극복이 가능한 것은 어떤 차이 속에서도 미래의 대자의 즉자가 이미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SM213).

‘원환’, 알튀세르는 헤겔 철학을 그렇게 특징지었다. 물론 헤겔 자신도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보여주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는 정치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정치는 실천이다. 실천인 이상, ‘시작’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원환은 ‘시작’이 붙잡을 수 없다. 원환은 나타나자마자, 이미 끝나버린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일이 끝난 뒤에야 날기 시작한다. “실제로, 원환의 내부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원환을 붙잡을, 붙잡을 데는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형식적으로는 그에 대한 대답을, 맑스주의적 토포스론은 이렇게 가리킴으로써 준다. 최종심급에서 결정력을 갖는 것은 이것, 즉 경제, 곧 경제적 계급투쟁으로, 그것은 국가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계급투쟁으로 연장된다. 때문에 토대의 계급투쟁이 상부구조의 계급투쟁에 접합되는(또는 접합되지 않는) 구조는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렇게 지적함으로써, 맑스주의적 토포스론은, 역사 과정 속의 어느 부서에 앉혀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지시를 되돌려 보내준다. 네가 차지하는 장소는 이것, 때문에, 사태를 바꾸기 위해 네가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은 이것이다”(SM214). 헤겔 철학과 달리, 당연히 변혁=실천의 무기인 맑스주의에는 ‘시작’이, ‘붙잡을 곳’이 나타난다. 거기에서 정치의 ‘시작’이 고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정치는 실천이며, 현실에 대한 개입이다. “정치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사고에 의해서는 제거되지 않는 현실 속의 모순으로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모순을 제거하는 것은 현실이며, 현실은 필연적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생기[발생], 장소와 시간과 인물을 지정하지 못하는 생기이다. 생기하는 것은 일반적 조건밖에는 규정할 수 없는 정치적 마주침의 구체적 형태이다. 이리하여 정치실천의 자리는 마련되었다. 거리를 생각하고, 거리를 유지하는 이 이론 속에서이다. 그 자리를 마련한 것은, 갈가리 찢겨진 이론적 개념들의 뒤얽힘이며, 규정과 미규정, 필연적인 것과 예측 불가능한 것 사이의 간극이다. 사고되는 이 간극, 사고에 의해서는 해소되지 않는 이 간극이, 이론 그 자체 속에 현전하는 역사와 정치실천에 다름 아니다”(EPP751). 헤겔에서도 맑스에서도 ‘모순’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다. 변화는 모순 속에서 생기한다. 모순이 없으면, 현 상태가 계속될 뿐이다. 그러나 헤겔에게서는 모순은 모두 극복되며 해소된다. 게다가 단일한 원리에 의해 극복되게끔 극복되도록 미리 설정되고, 더 나아가 일이 모두 ‘사고’ 안에서 처리된다. 이리하여 역사의 전개는 일반적인 것으로서, 바로 법칙으로서 얘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에 반해 알튀세르가 맑스에게서 본 모순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는 예측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극복도 약속되어 있지 않다. 어떤 요소가, 어떤 조합으로 생기는가는, 바로 상황에 달려 있다. ‘모순’은 사고가 현실과의 대응관계에서 극한에 도달했음을 알려주기 때문에 모순이다. 모순은 ‘사고’의 영역으로부터 불거져나온다[초과한다]. 사고와 현실 사이에 정합성이 초래되었을 때, 모순은 해소된다. 그 때문에 사고의 외부에 있는 실천, 정치의 등장이 요청된다. 정치문제는 도망치는 현실을 붙잡으려고 한다. 그 때문에 상황에 따라 그 방식을 변형시킨다. 그렇기에 레닌은 말했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고. 상황은 그때마다 특이한 사건으로서 출현한다. 정치실천은 상황의 리듬에 맞춰서 전개된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최초의 상황의 이론가이며, 상황이라는 개념을 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상황이라는 개념을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반성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끊임없이 꾸준히, 집요하고 매우 깊은 방식으로, 상황 속에서 생각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즉 상황에 대해, 불확정한 특이 사례라는 개념을 갖고, 그 개념 속에서 생각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 상황 속에서 생각한다, 상황이라는 범주 하에서 정치실천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선 모든 규정, 모든 존재하는 구체적 사정을 고려한다는 것, 그것들의 일람표를 만들고, 정산하고 계산을 하고[셈을 치르고], 비교하는 것이다”(EPP60-1). 상황은 불확정적이기 때문에, 인식의 지평에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인식 대상인 상황 속에 자기를 기투하고, 그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즉, 실천이다. 그때, 사고도 상황에 맞추어 변화한다. “상황의 범주 하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구체적 데이터 전체를 반성하도록 하여 상황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다. 상황 하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는, 사례가 생기고 부과하는 문제에 따른다는 것이다. 국가의 일체성[통일]이라는 정치문제, 이탈리아를 국민국가로 구성한다는 정치문제가, 그 사례이다. 여기에서 항을 역전시켜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상황에 관계하는 어휘군으로 국가의 통일성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자신이, 부정적이지만 객관적인 방식으로, 이탈리아 국가의 통일성 문제를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행하는 것은 그저 상황이라는 사례가 객관적, 역사적으로 제출하는 문제를, 자신의 논리적 위치 속에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한 지적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하는 계급의 힘들의 대질[부대낌]과, 불균형으로 발전하는 그런 힘들의 문제를 통해서, 최종적으로는, 그런 힘들의 불확정한 미래를 통해서”(EPP61). 헤겔에게 정치적 포착은 현재를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마키아벨리는 미래를 포착한다. 현재는 항상 그 순간마다 과거가 되며 사라져간다. 원환 속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이다. 그 때문에 모든 시간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사건은 예측 불가능하다. 예측 가능한 ‘미래’는 ‘미래’라는 이름의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의 미래는 불확정적이다. 왜냐하면 상황이, 역사 그 자체가 불확정적이기 때문이다. “각각에 불균등한 발전. 문제를 제출하여 이탈리아의 역사적 임무를 결정하는, 진정한 차이. 상황이란 요소들의 단순한 목록이나 다양한 사정의 열거가 아니라, 그것들의 모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이 정치문제를 제출하고, 그 역사적 해결책을 지정하고, 역사적 해결책을 사실상의 정치 목표, 실천적 임무로 만든다. / 그때부터, 동일한 순간과 운동 속에서, 상황의 모든 요소가 의미=방향을 바꾼다. 그것들은 역사적 목표를 지향하는 투쟁 속에 놓이고, 현실의, 혹은 잠재적인 힘이 된다. 그리고 그런 관계들은 힘관계가 된다. 그것들은 힘관계로서, 도달해야 할 정치목표로부터 본 관여도에 의해 평가된다. 이때 문제의 일체는, 어떤 형태 하에서 긍정적 힘들을 모으는가가 된다. 국가의 통일성이라는 정치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이 형태에, 마키아벨리는 하나의 이름을 주고 있다. 그것이 군주이다. 군주란 비르투를 갖춘 예외적 인물이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부터, 혹은 아무것도 아닌 듯한 곳에서부터 출발해, 그가 지도하는 것, 이탈리아 국민을 통일하는 데 적합한 힘들을 동원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EPP62).

상황이 불확정이라도, 주춤해서는 안 된다. 상황에 몸을 던질 때, 상황이 우리에게 정치문제와 그 목표, 그리고 해결책을 지정한다. “일단 문제가 제출되고 해결의 형태가 발견되자마자, 즉 목표와 목표를 실현할 정치형태 … 군주 … 가 고정되자마자, 나머지는 그저, 군주의 정치실천,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주는 데 적합한 실천을 정의하면 된다. 군주의 정치실천의 형태, 수단, 절차를. 이것이 『군주론』과 『공략론』의 목적이다”(EPP62-63).

 

 

비르투와 포르투나

상황이 불확정이라고 해도, 그러나 상황에 대한 개입은 결코 암암리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일반이론을 갖고 있었다. 알튀세르는 그것을 역사 법칙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보편사에 관련된 테제’라고 말한다. “‘―하늘, 태양, 원소, 인간은 질서를 바꾼 적이 없으며,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이다.’ 『전술론』 39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는 자는 누구든 깨닫는다. 모든 도시, 모든 민중이, 항상 동일한 욕망, 동일한 정념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는 것, 변함없이 그렇다는 것에, 동일한 악, 동일한 변전이 끊임없이 재래하고 있다.’ 세계는 변화하지 않는다. … ‘인간적인 일의 행보에 대해 성찰한 결과, 나는 세계가 항상 동일한 상황에 있으며, 세계는 항상 이 상태에 있었다고 본다. 선의 총량과 악의 총량은 항상 바뀌지 않는다고 본다.’” 바로 마키아벨리는 역사의 불변성=보편성에 대해 말했다. 어느 지역에서도 어느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 공통하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적 명제를 산출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씨름하는 ‘사례’를, 실험적으로 비교하는 조건을 정치(定置)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만일 인간들의 세계가 똑같지 않다면, 고대와 현재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고대의 다양한 사건, 상황을 서로 비교한 후, 현재의 다양한 사건, 상황을, 즉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서로 비교하고, 마지막으로 고대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들의 세계가 똑같지 않고, 일정하지 않다면, 이 세계의 정수(定數)들, ‘법칙’들을 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오히려, ‘정량’을 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즉 세계를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EPP81-2).

“세계는 변화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러나 모순된 것이 동시에 얘기된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운동 속에 있다. 예측 불가능한 필연성에 따르는 불안정한 운동 속에 있다. 이 필연성은 운동의 여신(포르투나)이라는 신화적이고 개념적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EPP82).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는 변한다. 세계는 포르투나에 지배되고 있다. “『군주론』과 『정략론』의 여러 대목에서, 포르투나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에 따르며, ‘바람이 부는 대로 방향을 바꾸며, 일의 변이에 따라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녀의 법은 변화이다. 이 법이 역사적 시간의 법칙, 즉 역사 법칙을 단적으로 말한다. ‘시간은 변화하며’ 상황은 변화하며 인간은 변화한다. 그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끊임없는 운동 속’에 있다. … 모든 정체의 기원에는 (그러므로 정체는커녕 어떤 사회의 기원에도) 우연이 발견된다고 하는 테제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미, 이 테제를 포르투나와 어떤 형태로든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다”(EPP82-4).

세계는 변화하지 않는다. 어디서든 비슷한 일이 일어나며, 사람들은 비슷한 생활을 지낸다. 어디에서도 선과 악이 있다. 그러나 세계는 변화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역사가 있다.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 조건이 갖춰지는지 여부는 상황에 달려 있다. 갖춰지더라도 다른 요소가 들어오면 기대했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연성의 개입. 각각의 사건은 특이하다. 모순이 있었을 때, 변화는 필연적이지만,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는 상황에 달려 있다. 이는 국가 수립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자가 국가 수립에 성공하고, 다른 자는 실패한다. 전자는 비르투를 더 모은 자이다. 비르투를 모은 자가 승리한다. 이것은 변치 않는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반드시 승리한다. “비르투란 마키아벨리에게서는 뛰어나게, 지속하는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적 조건들에 특유한 질이다”(EPP94). 비르투라는 “이 단어는 단순히 정치적 능력의 우수함의 정도, 군주의 지적 역능을 나타내고 있다”(EPP104). “총량이 정수적인 이 선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비르투이다”(EPP93). 선과 악은 역사적으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한다. 국가가 수립될 때, 거기에 비르투가 집중한다. 비르투의 양은 일정하다. 그 이동과 재분할이 있을 뿐이다.

세계는 변하지 않는다. 비르투를 더 모은 자가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 그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모을 수 있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포르투나의 여신에 따라, 우연성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주춤하는 자는 승리할 수 없다. 포르투나를 길들이는 자가 이긴다. “포르투나를 비르투로 변환해야 하며, 포르투나를 비르투로 응고시켜야 한다. … 마키아벨리에게 포르투나와 비르투의 만남은 새로운 군주에 의한 새로운 공국의 창설이라는 사례를 통해 극히 명확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 비르투에 고유한 작동이란 포르투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절호의 포르투나가 있어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의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즉 민중에 뿌리내림으로써(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소재인 절호의 국지적 상황을 정치적으로 구조화하고, 지속하고 커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항상 ‘미래의 힘’에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미치고, 멀리 쏘기 위해 표적을 높게 정하시오”(EPP133).

확실히 우연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성을 감수한 정체된 사고로부터 본 것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일을 사상(捨象)하는 추상적인 사고로부터는 현실은 도망친다. 현실에 과감하게 도전하고, 그것들을 분석하고, 축적할 때, 순간적으로나마 현실을 포착할 수 있다. 그 힘이 바로 비르투이다. 순간을 포착하는 것. “비르투를 갖춘 개인이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르투에 의해 포르투나를 붙잡을 수 있는, 혹은 지배할 수 있는, 따라서 또한 되찾을 수도 있는 개인. 타자의 힘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비르투에 의해 그 힘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힘을 만들 수 있는 개인. 비르투에 의해 민중 속에 뿌리내리고 ‘자신의 미래의 힘의 기초’를 둘 수 있는 개인”(EPP134). 마키아벨리에게는 그것이 군주였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목적의 달성에 가장 가능성이 있는, 비르투를 집중시킬 수 있는 예외적인 인물이다.

 

군사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국가가 폭력에 의해 수립된다는 현실을 은폐한다. 자신의 체제가 전복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폭력은 ‘악’이라는 ‘윤리관’을 만들어내고, 민중을 세뇌한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폭력의 존재를 백일하에 둔다. 선악의 피안으로 우리를 꾀는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처럼 우리를 농락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레닌도 말한, 국가란 억압 장치이다, 라고. 폭력 없이,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이 폭력을 구체적으로 담당하는 것이 군대이다. 군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국가 수립은 성취될 수 없다. “첫 번째 테제. 군대란 빼어나게 국가장치이다. 제일가는 국가장치이며, 국가를 힘으로서 구성하고, 국가에 물질적·현실적인 존재를 준다. 군대를 갖지 못한 군주는 무장 해제된 예언자에 지나지 않는다”(EPP142).

군대는 국가수립에 불가결한 요소이다. 다른 요소에 비해 절대적인 물리력을 가진 결정적 요소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 중요해진다. 군사에 농락당하지 않고, 교묘하게 그것을 통제하는 정치력이다. “두 번째 테제. 군대, 그 구성, 교육, 행사는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적 관계에 따라 고찰되어야 한다. 두 개의 유명한 정식을 참조하면, (1)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며, (2) 군사 문제에 있어서도 ‘정치를 지휘관의 지위에 앉히지 않으면 안 된다.’ 마키아벨리는 군사문제 그 자체 속에서, 군사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군사 기술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처음으로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정치의 우위에 따르게 한 최초의 이론가이다”(EPP142-3).

국가를 수립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강인한 군대의 창설은 불가결하다. 그때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전쟁의 관건은 좋은 병사들”이다(EPP143). 군대는 어떻게 편성되면 강해지는가? 외국인이나 돈으로 고용된 용병으로는 진정한 강함이 창출되지 않는다. “군주의 진정한 보루는 그의 민중이며, 병사이며, 무장한 민중이었다”(EPP143). 그 국가의 군대는 민중에 의해 무장되었을 때 최강의 것이 된다. “국가는 자력 구성해야 한다. 자력이라는 말에는 좁은 의미에서의 힘인 군대와, 넓은 의미에서의 힘 ― 동일한 힘인, 군주의 힘과 민중의 힘 ― 의 양쪽이 포함된다. 군주는 자신의 것인 힘, 자신에게 속하는 힘,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힘인 힘을 만들어내야 하며, 자기 자신의 힘에 의거하고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자기 자신의 힘의 완전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로 흐르는 라이프모티프이다”(EPP144).

군사를 매개로, 국가를 둘러싼 정치는 민중에게 열린다. 군주와 민중 사이의 끈끈한 유대가 맺어져야 한다. 이것은 군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군사력은 폭력을 사용하는 이 국가 영역에서의 정치의 실현이 된다. 법과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실현되는 것도 똑같이 정치이다. 따라서 힘/동의, 군대/이데올로기의 이중성은 적대적 성격을 지닌 이중성이 아니다. 한편에는 폭력, 다른 한편에는 설득이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이중성은 국가권력에 필요한 두 개의 형태를 하나의 주조음 하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군주의 민중적·국가적 정치라는 주조음이다”(EPP144). 민중의 지지가 없는 국가는 취약하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강제되지 않으면 선을 이룰 수 없다.” 그 때문에 “인간을 통치하려고 하는 자는 인간이 악의를 갖고 있다고 상정해야 한다.” 따라서 ‘강제’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억압 장치가 담당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너무도 효율이 나쁘다. 그 때문에 ‘법’이다. 법에 의한 강제이다. 법에 의한 두려움의 창출이다.

그때 종교가 하나의 유효한 도구이게 된다. “종교는 군대에 있어서의 복종, 법에 대한 복종의 조건이며, 또한 ‘신의 권위’에 의지함으로써 민중에게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승복시킨다”(EPP152).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사용해 민중 속에 군주에 대한 두려움을 창출한다. 두려움에 의해 국가 안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런 견해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은 ‘종교를 대중의 정치적·도덕적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종교관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우선 신민을 복종시키는 공포이며, 그리고 신민을 국가에 상응하는 행위, 활동으로 향하게 하는 비르투이다“(EPP153).

민중에게서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 전략이 불가결하다. 종교 같은 제도화된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 존재하는 사소한 것에까지 미친다. “인간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법에 의해’ 통치하는 것이다. 즉 도덕의 법을 사용하고, 선량, 충실, 자비, 신중한 발언 등등의 도덕의 법을 존중하는 통치이다. 여기에서 명확하게 이뤄지는 것은 민중의 동의를 얻으려면 도덕적 선을 실천하는 것이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폭력을 쓰지 않고, 위광과 승인을 통해 민중의 마음에 작동을 가하는 도덕적 선을, 그러나 법이 무력할 때에는, 힘에 의지할 수도 있어야 한다. 짐승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군주의 또 다른 측면이다. 거기에 도덕적 선은 없으며, 폭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폭력에 대해서, 결과만이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좋은 폭력은 파괴하는 폭력이 아니라 수복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EPP157). 억압 장치를 통한 지배만으로는 비효율적이다. 다른 헤게모니적 기제가 필요해진다. 그것이 ‘두려움’이며, 그리고 군주의 ‘평판’이다.

군주가 선량하면, 민중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잔인하다고 생각하면, 두려워할 것이다. 둘 다 헤게모니 구축에 도움이 되지만, 상황에 따라 양자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익혀야 한다. ‘사자와 여우’의 양면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자는 ‘잔인한’ 힘이며, 여우는 반대로 ‘간계’이며 ‘교지(狡智)’이다. 문맥에 애매한 점은 없으며, 여우라는 것은 간계에 능수능란한 자이다. 장치되어 있는 간계를 꿰뚫는 능수능란한 자인 동시에, 타인을 모함하는 간계를 장치하는 능수능란함. 덫, 위장 등, 전쟁술에서뿐 아니라, 인간의 통치 전반에 있어서 간계와 속임수의 능수능란함”(EPP158).

따라서 군주는 정말로 선량하거나 잔인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군주는 선량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간계의 필요성을 이해하려면 군주의 역사적 임무, 그에게 부과되는 예외적인 입장, 그가 사용하도록 강요당하는 수단, 그리고 그의 비르투로 돌아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실천이 어떤 극한을 취하는지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그는 할 수 있는 한 선량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선량하지 않다는 것, 악을 실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극한으로 내몰리는 경우에도 군주는 가능하다면(항상 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의 부도덕한 행태를 도덕적 행태인 양 ‘분장할’, 선을 위장할 수 있어야 한다”(EPP162).

“마키아벨리에게는 힘의 도덕 즉 군대, 동의의 도구 즉 종교와 군주의 평판, 서로 대립하는 기질을 ‘수로화하는’ 도구 즉 법이, 국가의 부분part을 이루며, 국가의 수단, 신체,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들에 정통하고 교묘하게 사용할 능력이 군주에게는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민중을 억압만 할 수는 없다. 민중의 반감을 사고, 국가의 유지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항상 민중의 지지, 동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지향하는 국가는 “힘이 법과 민중의 동의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는 전제(專制)의 반대물이며, 민중적일 수 있다”(EPP14).

 

선언

그람시는 『군주론』이 정치적인 선언이라고 말했다. 알튀세르는 이 견해에 찬성한다. 『군주론』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다. ‘선언’인 것이다. 물론 그때 그들의 염두에는 맑스-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이 있다. 그러면 ‘선언’, 게다가 정치적인 ‘선언’이란 무엇인가?

진리, 그것은 보편적·객관적일지라도, 우리 인간에게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진리가 존재했을 때, “이것이 참이다”, “그것 이외로는 생각할 수 없다”라고 사람들에게 생각하게 하는 구체적인 현실이 없으면,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 진리란 그런 신빙성을 낳게 하는 ‘효과’ 그 자체이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는 진정하게 선량할 필요가 없고, 선량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바로 ‘효과성’이며, 타자에게 “말 그대로다”라고 신빙성 있게 만들 수 있다면, 거기에 진리가 구성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생기고 있는 사태이다. 이 진리의 효과성은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는, “힘들의 충돌 속에서만, 당파투쟁 속에서만 실재할 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언’에 대해서, ‘이것의 효과로서 있는 진리’라는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이 선언은 하나의 단순한 텍스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흔한 텍스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문서의 세계에 속하며, 거기에 위치와 태도를 결정하는 텍스트이며, 더 정확하게는, 정치적 해결을 열렬하게 호소하고, 또한 정치적 해결을 알리는 텍스트이다”(EPP67).

마키아벨리는 ‘선언’했다, 자기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게다가 타자에게 호소했다. 때문에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왜 열정적이어야 하는가? 나는 불평부당하지 않다고 선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태도를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정치문제의 이론 ― 정치적인 배치를 모두 결정한 마키아벨리, 상황을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서로 충돌하는 힘들의 어휘군에 의한 마키아벨리, 그런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작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은 불편부당하지 않다고 선언해야 하며, 그의 대의에 찬동하는 자들을 획득하는 데 적합한 모든 레토릭과 정열을 기울여, 자신은 불편부당하지 않다고 선언해야 한다. … 그는 필자로서의 모든 정력을 기울이고, 자신의 태도 결정을 지배하는 대의에 봉사한다. 그는 공공연하게 이데올로기 투쟁에 참가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당파를 옹호한다”(EPP67).

맑스-엥겔스도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자기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위치에 두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으로 결집하라고. 하지만 마키아벨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민중이 아니라 군주에게 말을 건다. “군주에게 말을 건다는 형태로, 실제로는 민중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도래할 개인, 지금은 실재하지 않은 개인을, 단 한 명의 대화자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선언은, 사실상 인민대중에게 말을 걸고 있다. 한 명의 개인을 위해 선언이 작성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실재하지 않는 개인을 위해서는. 선언이란 항상 대중에게 말을 거는 것이며, 그들을 하나의 혁명적 힘과 결부시키려고 한다”(EPP70).

마키아벨리의 저작은, 그것이 저작인 이상, 많은 독자에게 읽히는 것이 목적이며, 실제로 읽혔다. 그것은 도래할 개인이라는 불확정적인 독자를 위해 쓰인 것이다. 확실히 마키아벨리의 텍스트는 잘 짜인 기초적인 책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처럼 민중을 농락하는 것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거꾸로, 국가 수립과 그 존속의 진실을 민중에게 소상히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텍스트 그 자체가 정치실천을 핵심으로 하여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호소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매력적이다. “그는 우리를, 하나의 텍스트로 가능한 한계까지 실천적, 정치적인 심판에 부치고, 또한 게임에 참여시키기 때문에, 매혹적인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의 장소로부터 호명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그 장소를 차지하라고, 가능한 정치실천의 가능한 ‘주체’(담지자)로서 차지하라고 호소한다. 매혹과 호소[호명]의 이런 효과가 산출되는 것은, 고전적 이론 텍스트가 교란되어 있기 때문이며, 정치문제가 문제로서 출현하고, 정치문제 속에 정치실천이 실천으로서 출현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텍스트 속에 정치실천이, 정치실천 속에 텍스트가 끼워 넣어져 있다는 이중적 반사[反照]가 있기 때문이다.”(EPP79)

마키아벨리는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새롭기 때문이다. “그가 새롭다는 것, 그가 창조자이며, 역사에서의 하나의 시작이라는 것, 그가 자신의 사고를 지배적 이데올로기 전체에 맞서 획득했던 것, 그것만으로 마키아벨리는 우리를 매혹할 수 있다”(EPP49). 마키아벨리는 모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자기 부담으로 이론을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이론을. 그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둘러싸여 감춰진 진리를 겉으로 드러낸다. 우리의 현 상태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공간을 돌파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매료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누구도 성취하지 않은 것을 성취하며, 이와 더불어 성취하는 것을 우리에게 호소한다. 고독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려 한다. “시작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EPP123) 이 고독을 견뎌내는 자가 매력적인 것이다.

 

 

인용문헌

인용문헌은 아래와 같이 약칭하여 원서의 쪽수만을 적었고, 이미 번역본이 있는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지만, 번역의 통일 등 적절하게 변경한 대목도 있다.

[SM] : Louis Althusser, Solitude de Machiavel,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8.

[EPP] : Louis Althusser,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2). Librsirie généralile çaise, 2001.

[SR] : 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ress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5.

[P0] : Louis Althusser, Positions, Editions sociales, 1976.

 

 

 

posted by 상겔스 상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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