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citron et le lait», Le Monde, no 10 490, 21-22 octobre 1978, p. 14. (Sur Le Ghetto judiciaire, Paris, Grasset, 1978.)
Dits et Ecrits Tome III texte n°246
* “Lemon and Milk” is Foucault's commentary on Boucher's Le Ghettojndiciare (Paris: Grasset, 1978). Boucher is a journalist, and a frequent contributor to Le Monde. The commentary appeared in the same newspaper in October 1978. [eds.]
http://1libertaire.free.fr/MFoucault325.html
P. Boucher, alors journaliste au Monde, était particulièrement attentif à l'histoire et aux enjeux du jeune Syndicat de la magistrature.
필립 부셰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에는 다음의 것도 있다. 법무부의 업무에 대한 만족도가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거꾸로 사법 기능이 더 이상 과거처럼 시민 권력 행사의 원칙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본질[필수]적이고 눈부시지 않다는 점은 중요하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탄생기의[초창기 형태의] 국가는 정의의[를 집행하는] 국가였는데도 말이다.
Parmi toutes les choses qu'on apprend dans le livre de Philippe Boucher, celle-ci : le plaisir d'être aux affaires ne se satisfait qu'à moitié du ministère de la Justice. Peu importe. Mais il importe en revanche que la fonction de justice ne soit plus aujourd'hui si essentielle et éclatante qu'elle puisse comme autrefois servir de principe à l'exercice du pouvoir civil: l'État naissant, nous disent les historiens, fut un État de justice.
오늘날 사법(la justice)은 그것이 내리는 형벌과 비슷하다. 즉, 사법은 자신을 너무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사법의 의례는 더 이상 소송[분쟁] 당사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재판관]들에게 약간의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긴 추문 목록을 든[엄포를 놓으며 시끄럽게 구는] 소송광들이 사라진 사법[법정]은 더 이상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거대한 사회 극장이 아니다.
De nos jours, la justice est un peu comme les peines qu'elle inflige : elle n'aime pas trop se montrer. Ses rituels ne servent plus à impressionner les justiciables, mais à conforter un peu les justiciers ; les plaideurs avec leurs longs tapages ayant disparu, elle n'est plus le grand théâtre social qu'elle fut pendant des siècles.
처음에는 다른 행정부 부서들과 유사하게 지루한 행정부 업무에 점점 더 많이 휩싸여 있었지만, 쇠락의 이중적인 움직임을 겪었다. [첫째] 사법부는 업무 영역 전체가 손에서 빠져나갔고[에 대한 장악력을 잃었고], 등 뒤에서 해결되는 업무가 점점 더 넓어졌다(경제에 대한 장악력은 단편적이거나 상징적이었다). [둘째] 게다가 미약하고 일상적이며[지루하며] 감사해 할 것 없는 통제의 '사회적' 기능으로 점점 더 전락했다.
Enveloppée d'abord dans les grisailles d'une administration de plus en plus semblable aux autres, elle a subi ensuite un double mouvement de repli: elle laisse échapper tout un domaine d'affaires, et de plus en plus large, qui se règlent derrière son dos (ses prises sur l'économique sont fragmentaires ou symboliques) ; en outre, elle se rabat de plus en plus sur des fonctions «sociales» de contrôle ténu, quotidien et ingrat.
* repli는 '사행(蛇行)운동'을 의미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이 쇠락은 의심할 여지없이 공중이 범죄, 중범죄 재판, 삶과 죽음의 게임이 있는 곳인 첨예한 형태 하의 정의[사법]에만 관심을 쏟는지를 설명해준다. 판사들은 빨간색으로만 보인다. (이것이 사형제 폐지를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요점이다. 즉, 사형권이 없다면 사법은 체신부보다 효율성이 떨어지고 사회보장보다 확실히 덜 유용한 공공 서비스에 지나지 않게 될까? 사형권은 그 지고성의 마지막 표시이다. 이를 통해 다른 모든 행정부를 능가할[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Ce repli explique sans doute que la justice n'intéresse plus le public que sous sa forme aiguë: là où il y a crime, assises, jeu de la vie et de la mort. Les juges ne sont visibles qu'en rouge. (Encore un des points qui rend si difficile de déraciner la peine de mort : sans le droit de tuer, la justice serait-elle autre chose qu'un service public un peu moins efficace que les P.T.T. et moins utile certainement que la Sécurité sociale ? Le droit de tuer est la dernière marque de sa souveraineté. Il lui permet de dépasser toutes les autres administrations de la tête.)
* P.T.T. : ministère des Postes, Télécommunications et Télédiffusion. 푸코가 살았던 시대에는 인터넷이 아니라 우편 제도가 있었던 시대였다. 전화뿐 아니라 우편 업무가 정부의 공식 업무 중 하나였다.
필립 부셰의 기사에서 항상 내 마음에 들었던 점은 그가 [사법이] 보이지 않게 되기 시작하는 곳에서 사법을 되찾으려[에 접근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는 법조계 담당 기자들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에게 '사건(affaire)'은 일상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드러내거나 준비하는 것이었다.사건은 그에게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중인 진행상황(fonctionnement)을 파악할 수 있는 각도를 열어주었다. 필립 부셰는 배심원이 아닌 법학자로서 사물을 바라본다.
Ce qui m'a toujours plu dans les articles de Philippe Boucher, ici même, c'est qu'il a cherché à ressaisir la justice là où elle commençait à devenir invisible : il a été l'inverse d'un chroniqueur judiciaire. L'«affaire» n'était jamais pour lui le cas singulier qui tranche sur le quotidien ; mais ce qui le révèle ou le prépare. Elle lui ouvrait l'angle pour saisir un fonctionnement silencieux en train de se mettre en place. Philippe Boucher voit les choses en juriste plutôt qu'en juré.
그의 책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만 아이러니했다면 내 관심은 절반뿐이었을 것이다[나도 지금 갖고 있는 관심의 절반만 가졌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이러니하다. 그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말한다. 그의 모든 분석은 다음을 강조한다. 즉, 사법은 게토도 요새도 아니며, 안개 속에서도 연약하고 투과성이 있으며 투명하다는 것이다. 사법은 "원하는 만큼 [유연하게] 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Son livre ne serait ironique qu'à l'égard des autres, il m'intéresserait à moitié. Heureusement, il est ironique à l'égard de lui-même. Il dit le contraire de ce que veut dire son titre. Toutes ses analyses le soulignent : la justice n'est ni ghetto ni forteresse ; elle est fragile, perméable, et transparente, malgré ses brouillards. Elle est «ployable à merci».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이를 즉시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즉, 사법은 '질서에 속한다'는 것이다. 필립 부셰는 오히려 그것이 '무질서에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질서' 중에서 정부 또는 법무부(chancellerie)의 '질서[명령]'는 한 측면에 불과하며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무질서는 사건사고도, 장애물도, 사법기구의 한계도 아니다. 심지어 교란도 아니다. 그것들은 기능[운영] 메커니즘이다. 사법은 장관의 무능함, 이해 관계의 요구, 야망의 일탈에 의해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 행사된다.
Vous dites cela, et on traduit aussitôt : la justice est «aux ordres». Philippe Boucher dirait plutôt qu'elle est «aux désordres». Et de ces «désordres», les «ordres» du gouvernement, ou de la chancellerie, ne sont qu'un aspect, et sans doute pas le plus important. Ces désordres ne sont, en effet, ni des accidents, ni des obstacles, ni des limites de l'appareil judiciaire. Ni même des perturbations. Mais des mécanismes de fonctionnement. La justice s'exerce par et à travers les incapacités d'un ministre, les exigences d'un intérêt, les égarements d'une ambition.
필립 부셰는 초상화를 많이 그린다[설명하는 묘사를 자주 한다]. (명백한 것인데) 생시몽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고 팅글리(Tinguely)를 떠올리게 한다. 불가능한 톱니바퀴,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하는 컨베이어 벨트, 움찔하게 만드는 기어 등 '작동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마침내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 중 하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Philippe Boucher dresse beaucoup de portraits. Ils ne font pas penser à Saint-Simon (évidemment), mais à Tinguely : on croit voir une de ces immenses machineries, pleines de rouages impossibles, de rubans qui n'entraînent rien et d'engrenages qui font la grimace : toutes ces choses qui «ne marchent pas» font finalement que «ça marche».
하지만 이 무질서의 게임에서 판사의 기분은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다. 사법기구의 주변이나 내부에는 무질서가 유용한 효과를 산출할 수 있도록 따로 마련된 전체 영역이 있다. 그리고 <사법적 게토(Le Ghetto judiciaire)>는 이러한 무질서가 관용이나 느슨함이 아니라 메커니즘의 일부라는 것을 놀랍게도 보여준다. 따라서 기소편의주의의 원칙은 법에 이질적인 요소의 변덕에 따라 눈을 뜨거나 감을 수 있는 놀라운 권리를 부여한다. 따라서 잘 알려진 경찰의 자율성은 사법적 개입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을 미리 (그 대상을 형성하지 않을 때를) 선별[마름질]한다. 따라서 추방과 봉쇄 조치는 이주자 주민이라는 이 중요한 주변부에 일종의 평행적인[유사한] 사법을 행사한다(심지어 그 평행적인[유사한] 감옥이 아렌트(Arenc)에 있다).
Mais, dans ce jeu des désordres, les humeurs des juges ne sont pas la part essentielle. Il y a, autour ou à l'intérieur de l'appareil judiciaire, des plages entières qui sont aménagées pour que le désordre y produise ses effets utiles. Et Le Ghetto judiciaire montre, d'une façon, je crois, remarquable, que ce ne sont pas des tolérances ou des relâchements, mais des pièces du mécanisme. Ainsi, le principe de l'opportunité des poursuites, qui donne le droit étonnant d'ouvrir ou de fermer les yeux au gré d'éléments étrangers à la loi. Ainsi, l'autonomie bien connue de la police, qui découpe à l'avance (quand elle ne le façonne pas) ce qui doit constituer l'objet de l'intervention judiciaire. Ainsi les mesures d'expulsion et de refoulement, qui exercent sur cette frange importante qu'est la population immigrée, une sorte de justice parallèle (elle a même à Arenc sa prison parallèle).
여러분은 이 모든 것에 특별한 것이 없다고 내게 말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능[운영]되지 않는 민간 또는 공공 조직이 과연 있을까? 일상적으로, 불규칙성으로 숨을 쉬지 않는다면[숨을 쉬듯 불규칙성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어떤 규칙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사법[제도]은 앙시앵 레짐의 사법[제도]이나 19세기에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과 파리꼬뮌 가담자들을 재판했던 사법 제도와 비교할 때 불명예스럽지 않다.
Vous me direz: tout cela n'a rien de bien extraordinaire. Quelle est l'organisation privée ou publique qui ne fonctionne pas de cette manière? Quelle règle pourrait vivre si, quotidiennement, elle ne respirait l'irrégularité ? Notre justice n'est pas déshonorée quand on la compare à celle de l'Ancien Régime, ou à celle qui, au XIXe siècle, jugeait les grévistes et les communards.
필립 부셰가 잘 말했듯이, 문제는 무질서의 양이 많거나 적음이 아니라 무질서가 산출하는 효과의 본성에 있다. 사실 우리를 감시하는 사법기구에서 무질서는 '질서'를 산출한다. 그리고 세 가지 방식으로. 무질서는 (습관과 편리함의 도움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관용[의 상태]에 놓여 있는 '수용 가능한 불규칙성'을 산출한다. 이는 '사용 가능한 비대칭성'을 산출하여, 일부에게는 이점을 제공하지만, 이를 알지 못하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너무 멍청해서 항의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 일부에게만 혜택을 제공한다It produces “usable asymmetries” providing benefits to a few at the cost of the others who either don’t know it’s happening or are too dumbstruck to protest]. 마지막으로 그리고 특히, 우리의 것과 같은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회 질서를 산출한다.
Philippe Boucher le dit très bien: la question n'est pas dans la quantité plus ou moins grande de désordre, mais dans la nature des effets qu'il produit. Or, dans l'appareil judiciaire qui veille sur nous, le désordre produit de «l'ordre». Et de trois façons. Il produit des «irrégularités acceptables» à l'abri desquelles (l'habitude et la commodité aidant) on se retrouve dans une tolérance consentie à peu près par tous. Il produit des «dissymétries utilisables» assurant à quelques-uns des avantages dont pâtissent les autres qui ne le savent pas ou n'y peuvent mais. Enfin et surtout, il produit ce qui a la plus haute valeur dans des civilisations comme la nôtre : l'ordre social.
적어도 19세기 이래 우리의 사법[제도]에는 법을 적용하는 것 외에 다른 역할이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법이 허용하는 모든 예외와 법이 가하는 모든 침해[법적 왜곡]를 고려하면 매우 절름발이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작동하는 기구[운용 중인 장치]를 그 안팎으로 살펴보면, 법의[에 의한] 교란이 질서 보호의 원칙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립 부셰의 정식은 이렇다. "사법[제도]은 피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소란거리를 체포하는 것이다[에 관심이 있다]." 기소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질서를 위해서이다. 질서를 위해 경찰에게 자유롭게 행동할 권한이 부여된다. 질서를 위해 완벽하게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추방하는 것이다.
Notre justice est censée, au moins depuis le XIXe siècle, n'avoir d'autre rôle que d'appliquer la loi. Ce qu'elle fait d'une manière bien boîteuse si vous considérez toutes les exceptions qu'elle tolère, toutes les entorses qu'elle inflige. Mais si vous regardez l'appareil en mouvement, avec ses tenants et aboutissants, vous vous apercevez que la perturbation de la loi obéit au principe de la sauvegarde de l'ordre. Formule de Philippe Boucher : «La justice ne se préoccupe pas du préjudice, elle appréhende les troubles.» C'est pour cause d'ordre qu'on décide de poursuivre ou de ne pas poursuivre. Pour cause d'ordre qu'on laisse à la police bride sur le cou. Pour cause d'ordre qu'on expulse ceux qui ne sont pas parfaitement «désirables».
질서의 이러한 우위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즉, [하나는] 사법[제도]은 점점 더 규범에 대한 관심을 법에 대한 존중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행동을 처벌하는 것보다는 범법행위에 대해 제재를 덜 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다룬 또 다른 훌륭한 책을 생각하면 필립 부셰의 책 제목이 "새로운 사법적 무질서(Le Nouveau Désordre judiciaire)"라고 불렸으면 좋았을 것 같다.
Ce primat de l'ordre a au moins deux conséquences importantes: que la justice substitue de plus en plus le souci de la norme au respect de la loi ; et qu'elle tend moins à sanctionner les infractions qu'à pénaliser les comportements. En pensant à un autre beau livre, mais où il est question d'amour, j'aurais aimé que celui de Philippe Boucher s'appelle : «Le Nouveau Désordre judiciaire».
필립 부셰의 책은 저자 자신이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최근 현상과 분리될 수 없다. 앙시앵 레짐의 고등 법원이 해산된 이후 처음으로 1968년에 치안판사들이 함께 모여 판사 조합(le Syndicat de la magistrature)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 "재결합[모임, réunion]"은 그 기원과 결과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의 형태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원칙적으로 법을 적용해야 할 운명에 처한 우리는 무엇이며, 사회 질서를 산출하라는 은밀한 압력을 받으며 심지어 큰 목소리로 요구받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판사 조합이 사법 행정을 '정치화'하려 한다는 말을 매우 자주 듣고 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고 싶다. 즉, 질서의 '정책'인 사법[제도]의 모종의 '정책'에 대해 법의 물음을 제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정책'에서 법이 어떤 교란의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On ne peut pas dissocier le livre de Philippe Boucher d'un phénomène récent, dont lui-même souligne l'importance :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que les parlements d'Ancien Régime ont été dissous, les magistrats se sont «réunis» en 1968 : ce fut le Syndicat de la magistrature. Et cette «réunion» a eu aussi bien pour origine que pour conséquence un réveil en forme de question : «Qu'est-ce donc que nous sommes et qu'est-ce qu'on nous fait faire, nous qui sommes, par principe, destinés à appliquer la loi, tandis qu'on nous pousse insidieusement, et qu'on nous demande même à haute voix de produire de l'ordre social ?» On a beaucoup dit que le Syndicat de la magistrature voulait «politiser» l'administration de la justice. Je serais plutôt porté à penser le contraire : il a voulu poser la question de la loi à une certaine «politique» de la justice qui était celle de l'ordre. Et il a montré quels effets de perturbation la loi pouvait produire dans cette «politique».
율법주의로의 회귀?
Retour au juridisme ?
우리는 거기에 있지 않으며, 거기로 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랑스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법 위기의 근원에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18세기와 19세기에 희망했던 것과는 반대로, 법의 구조(architecture)는 동시에 질서의 메커니즘이 될 수 없다. 법과 질서. 이것은 단순히 미국 보수주의의 모토가 아니라 혼성화에 의한 괴물이다. 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는 필립 부셰의 책이 상기시켜 줄 것이다. 사람들이 우유나 레몬이라고 말하듯이, 우리는 법이나 질서라고 말해야 한다. 이 양립할 수 없는 것에서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On n'en est pas là, et il ne faut pas y aller. Mais il faut affronter ce qui est à l'origine, sans doute, de la crise actuelle de la justice, et pas seulement en France: contrairement à ce que le XVIIIe et le XIXe siècle avaient pu espérer, l'architecture du droit ne peut pas être en même temps une mécanique de l'ordre. Law and Order : ce n'est pas simplement la devise du conservatisme américain, c'est un monstre par hybridation. Ceux qui se battent pour les droits de l'homme le savent bien. Quant à ceux qui l'oublient, le livre de Philippe Boucher le leur rappellera. Comme on dit lait ou citron, il faut dire la loi ou l'ordre. À nous de tirer de cette incompatibilité les leçons pour l'aven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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