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카트린 말라부는 아나키즘에 대한 나쁜 평판을 바꾸고 싶어 한다.
Philosopher Catherine Malabou wants to change anarchism’s bad 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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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말라부는 킹스턴 대학교 철학과, 유럽대학원,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 캠퍼스 비교문학과 교수이다. Catherine Malabou is a Professor in the Philosophy Department at Kingston University, at the European Graduate School, and in the department of Comparative Literature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 중 일부는 왜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인정하지 않고서 아나키즘의 개념을 발전시켰을까? 그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대안 정치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지금, 프랑스 철학자 카트린 말라부는 그녀의 새 책 『도둑이야! 아나키즘과 철학(Au voleur! Anarchie et philosophie, 2022)에서 생존을 위해 주도되어야 할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상과 행동의 역사를 통해 변혁의 길을 개척하는 아나키즘 철학을 제시한다.
Why did some of the most important philosophers of the 20th century develop concepts of anarchy without ever recognising themselves as anarchists? What can we learn from them? In a time where the need for alternative politics is more urgent than ever, the French philosopher Catherine Malabou proposes, in her new book Au voleur! Anarchie et philosophie (Thief! Anarchism and Philosophy, 2022), an anarchic philosophy which questions the need to be led in order to survive, forging a transformative path through the history of ideas and actions.
<도둑이야! 아나키즘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피에르-조셉 프루동,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자크 랑시에르, 나탈리 잘츠만 등 오늘날 활동하는 다양한 아나키즘적 또는 아나키-이론을 만드는 사상가들을 통한 여행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말라부는 현대 정치 문제와 아나키즘의 해방적 잠재력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Au voleur! Anarchie et philosophie is structured like a journey through different anarchic or anarchy-theorising thinkers, from Aristotle via Pierre-Joseph Proudhon to Michel Foucault, Jacques Derrida, Giorgio Agamben, Jacques Rancière, Nathalie Zaltzman and others working today. Malabou offers an overview of contemporary political issues and the need for the emancipatory potential of anarchy.
종종 '가소성의 철학자'로 불리는 말라부는 오늘날 가장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저서로는 몇 가지만 언급해도 <<가소성 : 폭발의 약속>>(2022), <<말소된 쾌락 : 사고되지 않는 클리토리스>>(2022), <<자기와 감정적 삶 : 융합하는 철학, 정신분석학, 신경과학>>(2022), <<우리의 뇌를 어떻게 할 것인가?>>(2008) 등이 있으며, 그녀는 철학, 정신분석학, 정치학, 신경과학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헤겔, 마르크스, 하이데거, 칸트, 프로이트 등의 사상가들을 새롭게 읽으며 새로운 형태의 지식 생산, 저항, 행동, 자유를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Often called “the philosopher of plasticity,” Malabou is one of the most radical and innovative philosophers working today. In her books Plasticity: The Promise of Explosion (2022), Pleasure Erased: The Clitoris Unthought (2022), Self and Emotional Life: Merging Philosophy, Psychoanalysis, and Neuroscience (2014), What Shall We Do With Our Brain?(2008), to mention only a few, she has bridged the gaps between philosophy, psychoanalysis, politics, and neuroscience, offering new readings of thinkers such as Hegel, Marx, Heidegger, Kant, and Freud in a constant quest for new forms of knowledge production, resistance, action, and liberty.
말라부 교수는 킹스턴대학교 철학과, 유럽대학원,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캠퍼스 비교문학과의 교수로 데리다가 재직했던 직책을 맡고 있다. 나는 그녀를 만나 오늘날 아나키즘의 필요성, 우리가 겪고 있는 불확실한 시대와 관련하여 아나키즘의 긍정적 측면과 위험성, 그리고 아나키즘적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Malabou is a Professor in the Philosophy Department at Kingston University, at the European Graduate School, and in the department of Comparative Literature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a position formerly held by Derrida. I met her in order to ask some questions about the necessity of anarchy today, its positive and dangerous sides in relation to the uncertain times we’re going through, and the possibility of an anarchic future.
당신의 신간 『도둑이야! 아나키즘과 철학(Au voleur! Anarchisme et philosophie)』은 PUF(프랑스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책으로,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기다려온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에마뉘엘 마크롱 같은 권위주의적 권력 형상이 부활한 프랑스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아버지 형상의 오랜 쇠퇴와 실패를 보았습니다.
Your new book Au voleur! Anarchisme et philosophie, which has just been published by PUF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is, if I may say so, the book we have all been waiting for without knowing it. Especially in France with the resurrection of authoritarian power figures such as Emmanuel Macron. At the same time, we have, from a psychoanalytical point of view, seen a long decline and failure of the father figure.
맞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당신이 제안한 것처럼 쇠퇴는 느립니다. 이것은 아버지 형상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주인의 형상과 합쳐질 때 문제적이기 시작합니다.
This is true. At the same time, as you suggest, the decline is slow. This is not to say that the father figure is bad per se, but it starts to be problematic when it conflates with the master’s one.
아버지 형상의 쇠퇴 및 부활과 관련하여 이 책을 어떻게 포지셔닝하고 싶으며, 무엇보다도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How would you position your book in relation to the decline and resurrection of the father figure, and, foremost, how come you wanted to write this book?
우연한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18년에 목적론teleology[그리스어로 '끝', '목적', '목표'를 뜻하는 텔로스와 '설명', '이유'를 뜻하는 로고스에서 유래]에 관한 컨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목적론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나키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가톨릭 신부인 라이너 쉬어만(Reiner Schürmann, 1941~1993)은 지금까지 형이상학과 정치가 텔로스 개념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가 '텔레오크라시teleocracy'에 도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저는 철학적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아나키즘의 모티프가 많은 20세기 철학자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무렵 ZAD[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인 Zone á défendre], 블랙 블록, 노란 조끼 등의 운동이 아나키즘을 중심으로 어떤 면에서 공통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제가 평생 다양한 형태의 지배에 맞서 투쟁해 왔다는 사실에 공감이 갔습니다. 우선 여성에 대한 지배, 그 다음에는 지적, 상징적, 정치적 지배가 있었습니다.
It started with a contingent event. In 2018, I was to give a keynote at a conference on teleology [from the Greek telos, ‘end’, ‘aim’, or ‘goal,’ and logos, ‘explanation’ or ‘reason’], and I wondered what the most radical critique of teleology was. It appeared to me that it was anarchism. I knew that the German philosopher and Catholic priest Reiner Schürmann(1941–1993) had challenged what he called “teleocracy,” arguing that metaphysics and politics have until now revolved around the notion of telos. So, I started getting interested in philosophical anarchism, and discovered that the motif of anarchism was present in many twentieth-century philosophers. At that time, I also became aware that movements, like the ZADs [Zone á défendre, a French anarchist movement], the Black Bloc, and the Yellow Vests had common problems in some respects, all revolving around anarchism. It resonated with the fact that I’ve been struggling all my life against different forms of domination. First of all, the domination of women, then, intellectual, symbolic, and political domination.
하지만 아나키는 평판이 나쁩니다.
Yet, anarchy has a bad reputation.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폭력을 의미합니다. 또한 진지하고 깊은 철학적 접근방법도 부족합니다.
For many people it means violence. It also lacks a serious, deep philosophical approach.
당신은 아나키즘에 대해 정말로 아름다운 정의를 많이 내리셨네요. 그것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아나키즘과 아르케(기원)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You have so many beautiful definitions of anarchism. If you had to explain it in a very simple way, what does it mean?And what is anarchism’s relation to arkhè (origin)?
어원을 쫓아 말하면, an-arkhia는 '없이'를 뜻하는 an-과 '시작' 및 '명령'이라는 두 의미를 모두 지닌 arkhè에서 유래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작은 항상 위계적 위치와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먼저 오는 것은 '첫 번째', 즉 상위의 것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 그리고 이것이 흥미로운데요 --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그리스 민주주의의 특징을 설명할 때, 민주주의는 시민들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을 내포한다고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an-archic입니다. 즉, 어떤 시민들도 다른 시민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안-아르키아(an-arkhia)가 없는 아르케(arkh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아르키아는 반역, 무질서, 카오스를 지칭하기 시작했지만, 그리고 이것은 또한 랑시에르가 설명하는 것인데요, 처음에는 아르케와 안-아르키아가 민주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Etymologically speaking, an-arkhia comes from an-, meaning ‘without’, and arkhè meaning both ‘beginning’ and ‘commandment’. Aristotle claims that a beginning is always linked to a hierarchical position (what comes first has to be ‘the first’, the superior one). At the same time – and this is interesting – when Aristotle characterises Greek democracy in his book Politics, he clearly states that democracy implies radical equality between the citizens. In that sense, democracy is an-archic, meaning that there are no citizens above others. So right from the beginning, there is no arkhè without an-arkhia. Over time, an-arkhia started to designate rebellion, disorder, and chaos, but initially, and this is also what Rancière explains, arkhè and anarkhia were intimately linked to democracy.
그리고 아나키와 철학을 연결시키셨군요. 어떻게 연결시키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And you link anarchy to philosophy. Can you tell us how?
전통적인 철학자들은 형이상학과 정치를 항상 아르케적(archic) 구조로 간주했으며, 그리하여 제1원칙을, 즉 나머지를 정의하는 모든 것의 시작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아르케적 사고는 우월성(supremacy)을 향한 탐구입니다. 누가 명령할까요? 누가 첫 번째여야 할까요? 그러나 20세기에 형이상학의 탈구축과 함께, 일부 철학자들은 철학을 아나키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쉬어만이 그랬고, 그다지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엠마누엘 레비나스, 푸코, 랑시에르, 아감벤도 마찬가지입니다.
Traditional philosophers have always considered metaphysics and politics as archic structures, thus trying to find the first principle, the beginning of everything that defines the rest. Archic thinking is a quest for supremacy. Who commands? Who has to be the first? But in the 20th century, along with the deconstruction of metaphysics, some philosophers started to understand philosophy as anarchy. Like Schürmann, as I mentioned, but also, though less explicitly, Emmanuel Levinas, Foucault, Rancière and Agamben.
President Donald Trump and President Emmanuel Macron in Paris, 2017. The return of the authoritarian father figure? Photo: Wikimedia Commons.
당신은 책에서 철학적 아나키는 아나키즘 없는 아나키라는 역설적인 형태를 취한다고 주장합니다.
You claim in your book that philosophical anarchy takes the paradoxical form of anarchy without anarchism.
아나키는 철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인정받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책에서 언급한 철학자들은 모두 매우 강한 아나키 개념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대 철학의 아나키 개념은 아나키즘 없는 아나키입니다.
Anarchy has been acknowledged philosophically and ethically, but not politically, which means that all those philosophers I’m referring to in the book have a very strong concept of anarchy, but they say, “we’re not anarchists.” So, the contemporary philosophical concept of anarchy is, following this, an anarchy without anarchism.
왜죠?
Why?
그들은 아나키즘이 모순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아나키즘은 자유, 이성, 인간 본성 등 형이상학과 오래된 원칙을 재창조합니다. 또한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너는 아나키스트일 수 있지만, 정부가 없으면 카오스를 겪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모두 오래된 통치[정부] 형태를 옹호합니다. 그게 역설이죠.
Because they argue that anarchism is contradictory. It recreates metaphysics and old principles, be they freedom, reason, or human nature. Also, as you say, it has a bad reputation. They say that you can be an anarchist in thinking, but that if we don’t have a government, we will have chaos. So, they all defend the old governmental forms. That’s the paradox.
당신은 또한 일부 사람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아나키스트로 본다고 언급하셨습니다.
You also mention that some people see Donald Trump as an anarchist.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좀 다른 얘기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매우 중앙집권적인 기능 형태에서 수평적인 기능 형태로, 플랫폼 자본주의로 바뀌었고, 이는 명백히 민주적인 존재 형태이며, 이는 곧 당신이 자기 자신의 관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나키적 시위 운동과 아나코-자본주의의 우연한 일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Yes, but this is something else. Capitalism today has changed from a very centralised form of functioning to a horizontal one, the capitalism of platforms, an apparently democratic form of being, which means that you can be the manager of yourself. We are living in this kind of coincidence of anarchic protest movements and anarcho-capitalism.
어떤 사람들은 이를 아나코-자본주의의 헤게모니라고 부릅니다.
Some people call it the hegemony of anarcho-capitalism.
네, 그래요.
Exactly.
그런 아나코-자본주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람은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겠죠?
And in that anarcho-capitalism, someone like Donald Trump would be an anarchist, is that right?
그럼요. 그것은 극도로 권위주의적인 권력의 한 형태이지만, 극도로 개방적인 사회의 가면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트럼프는 세금, 사회 보장, 모든 형태의 국가 복지에 반대하며 사람들은 자유로우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비트코인과 사이버 화폐 등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트럼프는 역설적으로 권위주의자를 구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의 자유화(liberalisation)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입니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정치적 수준에서는 권위주의자이고 경제적 수준에서는 아나코-자본주의자입니다.
Yes. It’s a form of power, which is extremely authoritarian, but that is just a mask of an extremely open society. Trump is, for example, arguing against taxes, against social security, against all forms of state welfare, saying people are free, they can do whatever they want, they can use bitcoins, cyber-currencies, etc. Trump paradoxically incarnates the authoritarian man, but behind that, he is for a liberalisation of the economy. He is a libertarian. Bolsonaro, in Brazil, does exactly the same. He is authoritarian on a political level and anarcho-capitalist on an economic one.
헤겔은 노예가 향락jouissance의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반면 주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주인이 향락을 대신하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Hegel used to say that the slave had access to the object of jouissance, while the master didn’t. Would you say that we’ve come to a point where the master has taken the place of jouissance?
네, 물론이죠. 하지만 주인의 향락은 숙달mastery 그 자체의 명백한 파괴에 의존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매우 정교한 숙달입니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를 연구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Yes, absolutely. But the master’s jouissance relies on the apparent destruction of mastery itself. It’s a very sophisticated mastery that denies itself as such. It would be interesting to study it from a psychoanalytical point of view.
당신은 아나키적 주체의 책임[감]에 관해 글을 쓰면서, 책임 있는 아나키와 책임 없는[무책임한] 아나키를 변별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You’re writing about the responsibility of the anarchic subject and you differentiate between responsible and non-responsible anarchy. Can you explain what you mean by that?
책임[감]의 박탈은 제가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라고 기술하는 것입니다. 조만간 프랑스에서는 우리 스스로 건강 보고서를 관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권위는 없고 플랫폼만 있는 이 사실상의 아나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버림받았습니다[내던져져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 덕분에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힘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책임 있는 아나키즘의 이론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떤 종류의 정치 체제가 사회 정의를 보장할 수 있을까요? 프랑스의 모든 정치적 논쟁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여전히 19세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The deprivation of responsibility is what I describe as factual anarchy. Soon, in France, we will manage our own health reports. We are all caught in this factual anarchy, where there is no authority, only platforms. We’re abandoned, so to speak. We think that we are empowered by new technologies, but in reality we are absolutely disempowered. We have to create a theory of responsible anarchism. What do we want? And what kind of political regime will be able to guarantee social justice? All the political debates in France are out of place. They don’t treat this matter at all. They think we are still in the 19th century.
Gustave Courbet, Portrait of Proudhon and his Children, 147 cm × 198 cm, oil on canvas, 1865. Paris, musée des Beaux-Arts de la Ville de Paris, Petit Palais. The philosopher Pierre-Jospeh Proudhon is often considered to be the father of modern anarchism.
당신은 책에서 우리가 사이버 아나키즘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You claim in your book that we have reached a state of cyber anarchism.
네, 방금 말씀드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이버 아나키즘은 이러한 플랫폼을 통해 발생하는 모든 금융 은행 거래를 의미합니다.
Yes, that’s what I’ve just talked about. Cyber anarchism is all the financial bank transactions that occur through these platforms.
그리고 제가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사회의 이러한 수평화는 좋은 게 아닙니다. 수평적인 동시에 수직적으로 정치적으로 작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샹탈 무프 같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nd this horizontalisation of society is not good, if I understand you right. What do you think of someone like Chantal Mouffe, who claims that we should work politically both horizontally and vertically?
저는 [무프 같은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수직성은 지배의 형태 없이는 기능할 수 없습니다. 즉, 저는 수직성에 반대합니다. 플랫폼 같은 간단한 문제를 예로 들어봅시다. 어떤 종류의 수직성이 그것을 규제할 수 있을까요? 응답[대응]은 수평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평등과 공평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수직성을 믿지 않습니다.
I don’t agree with that. Verticality, for me, cannot function without a form of domination; I’m against verticality. Take a simple problem, like that of the platforms. What kind of verticality would be able to regulate it? The response has to be horizontal. Only in that way can we reach equality and equity. So no, I don’t believe in verticality anymore.
당신은 또한 정치적인 것과 정치를 구별합니다. 아나키는 어떻게 정치적 영역에 관여할 수 있을까요?
You’re also making this distinction between the political and politics. How could anarchy engage with the political sphere?
우선 영토를 재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역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시민 참여 의회 같이 시민과 권력 사이에 더 많은 플랫폼을 열어야 합니다.
I think that, first of all, we have to refashion territories. We have to give much more autonomy to the regions. We should open more platforms between citizens and power, like citizen participative assemblies.
이러한 플랫폼의 복수화pluralisation에는 위험도 따르지 않을까요? 당신은 책에서 복수적인 것the plural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는 데리다의 말을 인용하셨죠. 풍부한 플랫폼the abundance of platforms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를 죽일 수도 있을까요?
When it comes to the pluralisation of such platforms, there’s also a risk there, no? In your book you quote Derrida who says that the plural can kill you. Can the abundance of platforms also kill us in a way?
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수직성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복수화pluralisation 자체를 반대해야 합니다. 마크롱이 "인터넷을 폐쇄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중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중국은 독재 국가입니다.
Yes, but once again, I don’t see how verticality can help. We have to turn pluralisation against itself. Can you imagine if Macron would say, “we’re closing the internet”? It’s not possible. They can do that in China, but China is a dictatorship.
당신이 언급하신 아나키[즘]적 운동의 폭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What do you think about the violence in the anarchic movements that you mention?
아나키[즘]적 폭력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블랙 블록[회원]이 ATM 등을 파괴하는 것을 시위에서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첫째, 이것은 아나키의 일부일 뿐입니다. 둘째, 폭력 없는 정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우익 가톨릭에도 대규모의massive 폭력이 존재합니다. 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물론 아나키즘에도 폭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폭력 없는 정치 운동이 존재할 수 있는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이 질문은 사람들이 저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기 때문에 성가신 질문입니다.
There has been anarchic violence. And we have seen it in demonstrations when Black Bloc [members] were destroying ATMs or the like. But firstly, this is only a small part of anarchy. Secondly, there can’t be any politics without violence. There’s a massive violence in communism, but also in right-wing Catholicism. Violence is everywhere. Of course, anarchism has its violence. But we should start asking ourselves if there can exist any form of political movement without violence. This question is annoying, since people ask me very often about that.
프루동에 대해 조금 말씀해 주시겠어요?
Can you tell us a little bit about Proudhon?
19세기 전에 아나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피에르-조셉 프루동(1809-1865)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름으로써 이를 전복하고, 그리하여 이 용어의 의미를 뒤집어버린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는 아나키는 무질서라기보다는 또 다른 질서를, 즉 권력 없는 질서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통치받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people can’t live without being governed고 단언합니다. 그 반대를 사고하는 것은 그가 "통치에 대한 편견governmental prejudice"이라고 부르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는 통치[정부] 없이도 질서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며 이것에 도전합니다. 그는 1840년에 이를 주장했습니다. 그 후 19세기 말에, 예를 들어 미하일 바쿠닌과 표트르 크로포트킨을 중심으로 아나키즘이 체계적이고constituted 조직적인 정치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Before the 19th century, anarchy had a negative meaning. 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was the first to subvert this by calling himself an anarchist, thus inverting the meaning of the term. Instead of disorder, he explains, anarchy means another order, an order without power. He affirms that people can’t live without being governed. To think the contrary is to be unconsciously attached to what he calls a “governmental prejudice.” He challenges it by saying that we can have order without government. He claimed this in 1840. Then anarchism as a constituted, organised political movement developed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with Mikhail Bakunin and Pyotr Kropotkin, for example.
그는 그 재산이 도둑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He claimed that property is theft.
쉽게 이해되는 말은 아닙니다. "재산은 도둑질이다"라는 말은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정부가 실제로는 우리의 자율성을 박탈한다는 뜻입니다. 권력은 우리의 자유를 훔치는 도둑이 되고 있습니다.
It’s not that easy to understand. “Property is theft” means that in protecting property, governments in reality deprive us of autonomy. Power becomes the thief of our freedoms.
권력은 도둑질 중의 도둑질입니다.
It’s a theft of a theft.
맞아요
Exactly.
그리고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아나키는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And anarchy is not a disorder, if I understand you right, but an order.
맞아요.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선할 때, 이것은 유일하게 진정한 질서입니다.
Yes. When people choose the way that they want to live, this is the only real order.
아나키에 대한 프로이트의 독해도 알고 계시죠?
You also have a Freudian reading of anarchy, no?
음, 그것은 정신분석의 큰 질문입니다. 즉, 무의식은 아나키스트인가? 이 말을 이드는 아무런 법도 갖고 있지 않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무의식이 죽음 충동death drive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는 나탈리 잘츠만(1933~2009)의 저서 <아나키스트적 충동(La Pulsion Anarchiste)>(2011)에 매우 흥미를 느낍니다. 그리고 맞아요, 저는 무의식이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해요.
Well, that’s the big question of psychoanalysis: is the unconscious an anarchist? You can understand it as if the id has no laws. I’m very interested in Nathalie Zaltzman’s (1933–2009) book La Pulsion Anarchiste (The Anarchist Drive, 2011), which says that the unconscious protects us against the violence of death drive. And yes, I do think that the unconscious is anarchist.
* [옮긴이] <아나키스트적 충동>은 책 제목이 아니라 글 제목이다. Psyché anarchiste : Débattre avec Nathalie Zaltzman, PUF, 2011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현재 킨들판본만 제공되는 듯하다. 여기를 클릭.
The Yellow Vests Movement (Le Mouvement des Gilets Jaunes) in Brussels, 8 December 2018. Photo: Pelle De Brabander/wikimedia commons.
무의식은 저항의 장소, 고집[내속]하는 것의 장소입니다. 사람들이 무의식을 점점 더 식민지화하려고 하는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그 저항과 함께 작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예를 들어 엘론 머스크의 회사 뉴럴링크Neuralink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The unconscious is a place of resistance, of what insists. How can we work with that resistance today, when people are trying to colonise the unconscious more and more? I’m thinking, for instance, of Elon Musk’s company Neuralink.
일론 머스크를 언급하시니까, 재밌네요. 그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아세요? "유토피아적 아나키스트"라고 해요.
It’s funny that you mention Elon Musk. Do you know how he defines himself? As a “utopian anarchist.”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과 다른 과학자들이 각각 RTMS(repetitive 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반복적 경두개자기자극술)와 DeepTMS(deep 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심부 경두개자기자극술) 같은 장치로 뇌를 탐색하려고navigate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What do you think about the fact that people like him and other scientists are trying to navigate the brain with devices like RTMS and DeepTMS (repetitive and deep 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respectively)?
그들은 점점 더 뇌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뇌를 플랫폼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저는 당신이 뇌를 식민지화한다고 말함으로써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뉴럴링크는 더 빨리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인가요?
They are controlling the brain more and more. They are trying to transform the brain into a platform. I see what you mean by colonising the brain, absolutely. The thing we can do is to resist it, to say no. If I understood it right, neuralink is meant to make you think faster.
그것은 경미한 조증 피험자를 만들 것입니다.
It’s going to create hypomanic subjects.
* hypomanic subjects : 과도하게 자신감이 있고 긍정적인 등 경조증輕躁症의 특징을 나타내지만, 치료가 필요한 수준은 아닌 피험자.
정말 궁금하네요. 네... 하지만 저는 신경학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제 입장은 정신분석과 신경학 사이에 대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을 신경학의 현행성actuality과 완전히 단절된 채로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뇌가 결정론적 기관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심적] 삶도 뇌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화의 신경-정신분석적neuro-psychoanalytical 형태를 찾아야 합니다.
I really wonder. Yes… But I’m not opposed to neurology. My position is that we need to build a dialogue between psychoanalysis and neurology. It’s not possible to leave psychoanalysis totally cut from the actuality of neurology. We know that the brain is not only a deterministic organ, that our psychic life is also dealing with the brain. So yes, we need to find a neuro-psychoanalytical form of dialogue.
책에서 아나키에 대한 푸코의 견해에 대해서도 쓰셨습니다. 푸코는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사고에 중요했나요?
In your book you also write about Foucault’s take on anarchy. In which way has Foucault been important for you in your thinking?
푸코는 "아나르케올로지, an-archeology"이라는 개념을 통해 통치라는 개념에 대해 그 누구보다 많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인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아나키즘에 매우 가까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Foucault has more than anyone else interrogated the concept of government through his concept of “an-archeology.” I think he was very close to anarchism, even if he didn’t acknowledge himself as an anarchist.
그는 미시정치적인 것, 즉 소규모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믿었습니다. 아나키[즘]적 운동에서 어디까지 노력해야 할까요? 하나의 운동에서 물러나야 할까요, 아니면 운동과 운동을 서로 연결[접속]해야 할까요?
He believed in the micropolitical, the idea of working on a small scale. How far should one strive in one’s anarchic movement? Should one withdraw in one movement or connect movements to each other?
좋은 질문입니다. 저는 샹탈 [무프]과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서로 다른 운동 간의 연결접속을 창출하고 합의를 위한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그들은 "헤게모니" 또는 "사회주의 전략"이라고 부릅니다.
That’s a good question. I think that Chantal and Ernesto have worked a lot on that, trying to figure out how it is possible to create connections between different movements, to build a platform for agreements. This is what they call “hegemonies,” or “socialist strategies.”
당신은 또한 정치의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신중함, 즉 프로네시스(phronesis)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취급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중한 방식으로 아나키스트가 되어야 할까요, 혹은 좋은 아나키스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You also speak about the uncertainty of politics, reminding us of Aristotle’s take on prudence, phronesis. Should one be anarchist in a prudent way, or what does it mean to be a good anarchist?
저는 현재 학생들과 함께 폴 리쾨르의 저서 <타인으로서의 자기 자신(Oneself as Another)>(1990)을 읽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비판적 프로네시스"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네, 말씀하신 대로 좋은 아나키스트는 비판적 아나키스트입니다.
I’m currently reading Paul Ricœur’s book Oneself as Another [1990] with my students. He says that we have to engage with “critical phronesis.” So yes, a good anarchist as you say, is a critical anarchist.
존재론적 아키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복잡하게 한다고, 왜냐하면 우리를 아르케로 되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라고 당신은 주장하십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난해한 생각인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You assert that ontological anarchy makes the response to the question “what should I do?” complicated, since it throws us back to arkhè. It’s a very vertiginous thought, and I’m not sure what you meant by it.
슈어만은 하이데거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이 아니라 그냥 해야만 합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예시적[전조적, prefigurative]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Schürman notices that Heidegger refuses to answer these questions. We shouldn’t ask ourselves what we should do, we just have to do it. This is what anarchists call “prefigurative action.”
정신분석과 매우 가까운 얘기로군요.
That’s very close to psychoanalysis.
네, 그것은 "현실성[행위]로의 이행"입니다.
Yes. It is the “passage à l’acte.” [the passage to the act]
그렇다면 당신이 옹호하는 것이 욕망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욕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를 때에도 우리 자신의 욕망을 따라야 할까요?
Would you then say that what you’re advocating for is an ethics of desire? That we should follow our own desire even when we don’t know where it’s taking us?
맞아요. 저는 정신분석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신분석과 직접 행동 사이의 근접성을 믿습니다.
Exactly. I believe in the proximity between psychoanalysis and direct action, even if psychoanalysis takes time.
그러면 아나키의 권력[힘]은 욕망의 권력[힘]인가요?
So the power of anarchy is the power of desire?
아나키라고 해서 권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통치[정부] 없이 사는 것이며, 그래서 둘은 전혀 똑같지 않습니다.
Anarchy is not without power. It is about living without a government, which is not the same thing at all.
당신은 아나키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도 접근하고 계신데, 이에 대해 조금 말씀해 주시겠어요?
You also approach the impossibility of anarchy, can you tell us a little bit about that?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에는 기원이 있으며, 따라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아나키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네, 우리 모두는 기원으로부터 유래합니다. 제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저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오는 것이 반드시 우월하다는 관념에 대한 도전입니다.
Aristotle says that everything has an origin, and therefore, anarchy is not possible because there is necessarily a first, then a second, and then a third, etc. Yes, we all come from an origin. I have a mother and a father. But that doesn’t mean that my mother is superior to me. It’s the challenge of the idea that what comes first is necessarily superior.
말씀하신 것처럼 섭리와 명령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As you say, providence and commandment are not the same. They are not identical.
그리스인들은 케이크를 만들 때 달걀을 넣은 다음 밀가루를 넣었지만 그렇다고 달걀이 밀가루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1, 2, 3이 첫째, 둘째, 셋째... 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When the Greeks made a cake, they put eggs, then flour, but that didn’t mean that the eggs were superior to the flour. But Aristotle says that 1, 2, 3 have to become first, second, third…
당신은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탈구축[해체]하고 있습니다.
You’re actually deconstructing Aristotle here.
물론이죠. 아리스토텔레스 없이 지내는 것이 설령 불가능할지라도 말입니다.
Absolutely. Even if it is impossible to do without him.
Paul Signac, Opus 217. Against the Enamel of a Background Rhythmic with Beats and Angles, Tones, and Tints, Portrait of M. Félix Fénéon, 1890. Fénéon was the anarchist activist and critic who coined the term Neo-Impressionism to describe the pointillist technique of artist such as Signac and Georges Seurat, which Malabou considers to be “a technique of anarchist painting”. 페네옹은 아나키스트 활동가이자 비평가로, 말라부가 "아나키스트적 회화의 기법"으로 간주하는 시냑과 조르주 쇠라 같은 예술가들의 점묘 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신-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주조해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좋은 방식으로 시작해야 할까요? 그리고 시작과 재시작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요? 반복의 신경증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행위acting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Then how should one commence in a good way? And how should one dissociate between commencement and recommencement? How can we start acting without entering into the neurosis of repetition?
프로이트는 시작이 아니라, 시작 없는 시작의 루프loop인 쾌락 원리 너머의 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나키가 그런 반복의 반복이 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융합의 연결고리fusional links를 끊는[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잘츠만은 여기서 매우 도발적입니다. 그녀는 에로스가 파괴적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에로스가 구축하는 너무 강박적으로 감금하는 연결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그녀는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반복의 루프loop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로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죽음 충동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Freud is interrogating the nature of the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which is not a beginning, but a loop of a beginning without beginning. So how do you avoid that anarchy becomes a repetition of that repetition? By cutting fusional links. Zaltzman is very provocative here; she says that Eros is destructive. You have to cut from the too compulsively imprisoning links that Eros is building. She argues that survivors from concentration camps had to break the loops of repetition. They had to understand themselves as being radically solitary. It’s about returning the death drive against itself.
매우 흥미롭군요.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스스로를 끊어버린다는 뜻인가요?
That’s very interesting. You mean by cutting oneself from one’s origin?
그렇습니다. 원래의 트라우마가 반복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Yes. One has to cut oneself from the repetition of the original trauma.
어떤 면에서 신비주의자들이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Would you say that the mystics in a way did that?
네. 맞아요. 잘츠만은 또한 [프랑스 인류학자] 장 말로리의 연구를 참조하면서, 도시에 정착하여 길들여지기보다는 극한의 기후 조건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선호하는 이누이트족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이들은 보호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립을 옹호[방어]합니다.
Yes. Exactly. Zaltzman also takes the example of the Inuits – she refers to [French anthropologist] Jean Malaurie’s work – who prefer living on their own in extreme weather conditions rather than getting domesticated by settling in a city. They don’t want to be protected. They defend their isolation.
그것은 자유에 이르는 방법일까요, 아니면 자유에 대한 환상illusion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자유가 우리를 발전시키지 못하며 사막 속에서의 외침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Is it a way of attending liberty or is it an illusion of liberty? Some people claim that liberty doesn’t make us advance, that it’s a cry in the desert.
맞아요, 하지만 사막에서 외쳐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것이 역설적으로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Precisely, but there are situations where you have to cry in the desert because it is paradoxically the only way to survive.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해도요?
Even if no one is listening?
네, 이것이 바로 니체가 한 말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막에서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Yes. This is precisely what Nietzsche says. Zarathustra insists that we must learn how to preach in the desert.
이것이 바로 이분법적인 아르케-텔로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Would you say that this is precisely the way one can get out of the binary arkhè–telos?
바로 그거죠. 사막에서 말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우월감이나 권력 의지로 변질되지 않는 계시적 힘입니다.
Exactly. Speaking in the desert, for no one, is a revealing force that does not turn into supremacy or a will to power.
당신은 플로티누스에게서 영감을 받아, 행위가 없는 통일unification을, 즉 시작도 명령도 아닌 통일, 지배하지rule 않는 통일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분석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서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You wonder, inspired by Plotinus, if one could obtain a unification without an act, which is neither a commencement nor a commandment, a unification that doesn’t rule. That’s a very beautiful description of what it means to go into analysis, I think.
그래요, 혹은 예술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요. 갑자기, 어떤 명령도 없이 사물들이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모든 부분이 시작도 없이 하나의 통일성unity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나 그 유래를 알지 못합니다. 분석 세션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다는 당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Yes, or of what it means to do art. All of a sudden, things appear without any commandment. All different parts create a unity without commencement. But we don’t know why, or where it comes from. And you’re right, an analytical session can function like that.
그것이 작동할 때, 이상적인 경우에는, 네... 그런 다음 당신은 아름다운 것을 덧붙입니다. 즉, 슈어만에게서 영감을 받아, 당신은 사건이 수평적으로 발생하며, 이 사건이 사물들을 하나로 묶어준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예술 창작을 위한 이상적인 조건이기도 합니다.
When it works, in ideal cases, yes… And then you add something very beautiful: you say, inspired by Schürman, that the event takes place horizontally, and this event is what holds things together. It’s also the ideal condition for, as you say, the creation of art.
예, 그리고 그것은 정치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로부터 명령받지 않고도 통일성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슈어만은 플로티누스의 정치적 결과를 끌어냅니다. 그는 또한 마추픽추에 있는 이 돌들이 어떤 시멘트도 없이 서로 단단히 묶여 있다고 말합니다.
Yes, and it’s also adaptable to politics. People can create a unity without being commended from above. Schürman draws the political consequences of Plotinus. He also talks about these stones in Machu Picchu that hold together without any cement.
욕망은 아마도 그들을 단단히 묶여 있게 하는 것일 텐데요... 아나키[즘]적 경제에 대해서도 쓰셨습니다. 비트코인 통화의 블록체인적 욕망은 마추픽추의 돌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Desire is perhaps what holds them together… You also write about anarchic economy. Would you say that the blockchain desire of bitcoin currencies is a way of holding people together like these stones in Machu Picchu?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본주의가 철학자들에게서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자본가들은 아니키의 의미와 이를 전복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명령 없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자본주의의 역설적인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자유롭다는 환상[착각]을 줄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는 항상 비판을 자신의 체계 안에 통합해 왔으며, 아마도 그 반대자들보다 더 빠르게 통합해 왔을 것입니다. 뤽 볼탕스키Luc Boltanski와 이브 치아펠로Eve Chiappello는 이를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One thing for sure is that capitalism is perfectly able to steal ideas from philosophers. I think that capitalists have perfectly understood the meaning of anarchy and how to subvert it. How do we bring people together without command? That’s the paradoxical problem of capitalism. How can it give people the illusion that that they are free? Capitalism has always integrated criticism within its own system, more rapidly perhaps than its opponents. Such is what Luc Boltanski and Eve Chiappello call the “spirit” of capitalism.
슬라보예 지젝이 세계의 종말은 상상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자본주의 내부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자본주의의 아나키[즘]적 종말을 상상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When Slavoj Zizek says that we can imagine the end of the world, but not the end of capitalism, do you think that we should act within capitalism, or should we imagine an anarchic end to it?
우리는 어떤 것에 종말이 있을 수 있다고 계속 생각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생태 위기와 모든 것이 도처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죠. 하지만 저는 그것이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관주의가 이론적, 정치적 주요 신조가 되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I think that we should continue to think that there can be an end to it – with the ecological crisis and everything collapsing everywhere. Capitalism will not necessarily last forever. It will take time. But I don’t think that it’s eternal. Even if pessimism is becoming a major theoretical and political creed.
비트코인 경제가 자본주의의 붕괴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nd you think that the bitcoin economy can contribute to its collapse?
물론입니다. 어쨌든 자본주의는 현재 붕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태학은 이 논쟁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합니다.
Sure, absolutely. It is currently collapsing, by the way. And ecology has an essential part to play in this debate.
당신은 또한 [공영 라디오 채널] <프랑스 컬처France Culture>의 토론에서 생태학이 아나키를 위한 장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You also said in a debate for [the public radio channel] France Culture, that ecology was the place for anarchy…
그렇게 생각합니다. 경제의 장소에 생태학이 들어서는 거죠.
I do think so. Ecology in place of economy.
동시에 일반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은 죄책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아나키스트가 아나키스트이면서 동시에 부채를 갚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아나키[스트]적으로 영감을 줄 수 있을까요?
At the same time, anarchists in general don’t seem to feel much guilt. How can an anarchist be an anarchist and at the same time pay the debt? How can we anarchically inspire others to act responsibly?
글쎄요, 영토, 물, 자원 재분배를 지키기 위한 많은 운동이 있습니다. 저는 줄리엣 듀케네Juliette Duquesne라는 저널리스트와 함께 물과 물의 민주적 분배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인데, 물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Well, there are many movements for defence of territories, water, and redistribution of resources. I’m working with a journalist called Juliette Duquesne on a book on water and the democratic distribution of water, since we’re running out of it.
책에서 자신이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나키[즘]적 입장과 모순된다고 특정한 순간에 말씀하셨는데, 책 서두에서 당신은 자신이 아나키스트라고 말씀하셨어요.
You say at a specific moment in your book that claiming that one is anarchist contradicts the anarchic position as such, yet in the beginning of the book you say that you are an anarchist.
네. 제가 아나키스트라고 해서 제게 원칙 등을 갖춘 도그마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수평성과 수직성 사이의 논쟁에서 제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나키스트로서 도그마 등을 갖는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모순적이게 될 것입니다.
Yes. That I’m an anarchist doesn’t mean I have a dogma with principles and so on. I’m just positioning myself in the debate between horizontality and verticality. Having dogmas and so on, as an anarchist, would once again be contradictory.
스웨덴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매우 중요한 질문인 정체성 문제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정체성 운동identitarian movements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I would like to go over a question which is very important in Sweden and France, but also elsewhere, which is the question of identity. How would you define identity, and what do you think about the identitarian movements today?
아나키즘은 원래적인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긍정합니다. 정체성은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구축되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정체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원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치적인 어떤 것으로, 혹은 연극으로 바꾸자는 것이죠. 저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가소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에 형태를 부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서는 그 안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Anarchy affirms that there is no original identity. Identity is entirely constructed, politically. There is no such thing as an essential identity. It’s not a question of negating our origins, but to transform them into something political, or a play. I don’t defend identity politics. This is precisely why I talk about plasticity. It means that we have to give a form to our identity. Not just accept it like that, and become entrapped in it.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성(Liquid Modernity)>(2000)에서 유목민보다 더 정적인 것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아나키에 적용하면, 어떻게 주체는 스스로의 탈출에 갇히지 않고 아나키해질 수 있을까요?
Zygmunt Bauman claimed in Liquid Modernity (2000) that there is nothing more static than the nomad. Applied to anarchy, how can subjects become anarchic without getting entrapped in their own escape?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변화하고 자신을 가꾸는 것은 많은 노고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체성 정치라는 표준에 갇히게 될 뿐입니다.
I know it’s complicated. To change, to fashion yourself is a lot of work. But at the same time, if we don’t do that, we’re just imprisoned in the standards of identity politics.
제 친구인 정신분석가 실비아 리피Silvia Lippi는 정체성을 하나의 증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A friend of mine, the psychoanalyst Silvia Lippi, says we should look upon identity as a symptom.
맞아요. 그렇다면 그때 그 자신과 동일적일 수 없는 증상...
Yes. A symptom that can’t be identical to itself then…
아나키에 대한 데리다의 다소 무의식적인 사유와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조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Can you tell us a little bit about Derrida’s more or less unconscious thoughts on anarchy and the way you interpret them?
저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1967)로 시작하는 그의 작업에서 아나키에 대한 언급을 많이 발견해서 놀라웠습니다. 이 책에서 데리다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정부를 폭력적이라고 생각할 정도까지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합니다. 데리다는 또한 레비나스, 발터 벤야민, 아나키[즘]적 파업에 대해 성찰하고 프로이트의 『쾌락 원리를 넘어서』(1920)를 특출나게 읽습니다. "원칙을 넘어서"는 말 그대로 아나키를 의미합니다. 동시에 데리다는 자신이 "책임감 있는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그에게 아나키가 탈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전적 아나키가 너무 형이상학적이고 너무 독단적dogmatic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예와 아니오의 입장을 발명합니다. 먼저 '예'인데요, 우리는 아나키를 인정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아니오'인데요, 우리는 그것을 교리로 변형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예'와 '아니오'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프로이트를 읽을 때 '예'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아니오'라고[만] 말합니다. 질문은 이겁니다. 즉, 죽음충동 내부에 아나키가 있는가? 쾌락 원리를 넘어서는 것이 있는가, 아닌가? 그리고 데리다는 매우 놀랍게도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I was surprised to find many references to anarchy in his work starting with Of Grammatology [1967], in which Derrida claims that Claude Lévi-Strauss is an anarchist to the extent that he thinks of the government as violent, etc. Derrida also reflects on Levinas, Walter Benjamin, anarchic strikes, and he makes an extraordinary reading of Freud’s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1920]. “Beyond the principle” literally means anarchy. At the same time, Derrida declares that he is “a responsible anarchist,” which means that, for him, anarchy has to be deconstructed, since classical anarchy was too metaphysical and too dogmatic. He then invents a position of yes and no: yes, we have to acknowledge anarchy; and no, we shouldn’t transform it into a doctrine. So he constantly plays with the yes and no. At the same time, when he reads Freud, he stops saying yes and no; he says no. The question is: is there an anarchy within the death drive? Is there a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or not? And Derrida, very surprisingly, answers no.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책에서 당신이 특히 순수한 권력[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름다운 구절이 나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I don’t know if I understood it right, but it’s a beautiful passage in your book, especially when you talk about pure power. What do you mean by that?
순수한 권력[힘]은 어떤 형태의 통치[정부]로부터도 분리된 권력처럼 보입니다. 쾌락 원리는 통치[정부]이다, 라고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말합니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것이 있다면 통치[정부]는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남는 것은 순수한 권력[힘]이라고 데리다는 말합니다. 그것은 토치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데리다에게 아나키는 바로 이 순수한 권력입니다. 프로이트도 똑같이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Pure power appears like power detached from any form of government. The pleasure principle is a government, Freud is very clear on that. If there is a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the government disappears. So what are we left with? We’re left with pure power, Derrida says, which can be even more violent and destructive than the government. For Derrida, anarchy would be this pure power. I’m not sure that Freud thinks the same.
또한 당신은 에로스가 삶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타나토스가 항상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것들은 장소를 바꿀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nd you also say that Eros is not only linked to life and Thanatos is not always linked to death, they can change places.
맞아요. 그래서 데리다가 죽음 충동을 순수한 권력[힘]이라고 말한 것은 너무 성급한 것 같아요. 프로이트는 그것이 또한 분리detachment와 휴식rest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Exactly. So, I think that Derrida is perhaps too quick when he says that death drive is pure power. Freud is clear that it also means detachment and rest.
당신은 아나키적 권력과 아나키스트적 권력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You’re making a distinction between anarchic and anarchist power.
네, 아나키즘anarchic은 순수한 권력에 의해 추동되겠지만, 아나키스트가 되는 것은 새로운 조직화로 나아가기 위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프로이트는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Yes, anarchic would be driven by pure power, but being anarchist is maybe a way to proceed to a new organization. And I think that Freud is balancing between both options.
Audrey Tang, anarchist, computer programmer and former Minister of Digital Affairs (now Minister without a portfolio) in the Republic of China Taiwan. Photo: Wikimedia Commons. 아나키스트이자,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전 중화민국[타이완]의 디지털부 장관(현재는 포트폴리오가 없는 장관)인 오드리 탕.
아감벤에 대해 조금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Can you tell us a little bit about Agamben?
아감벤은 전통적인 아나키스트들이 종교를 너무 빨리 제거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나키의 문제가 처음부터 기독교 신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통치의 불가능성이 나타납니다. 아감벤은 기독교가 아나키의 한 형태라고 주장합니다. 존재하지만 명령하지 않는 신과 어떤 존재론적 본질도 갖고 있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아들 사이에는 불일치discrepancy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이러한 첫 번째 균열split을 숨기는 담론일 뿐입니다. 아감벤은 기독교 신이 아들을 보내서 자기 대신 일을 하도록 시키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후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며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권력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감벤은 우리가 최초의 아나키즘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적절하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즘을 탈신성화해야desacralise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나키즘은 19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라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 됩니다.
Agamben says that the traditional anarchists have eliminated religion too quickly. We have to see that the problem of anarchy is inscribed in the Christian God right from the beginning.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appears the impossibility of government. Agamben claims that Christianity is a form of anarchy, since there is a discrepancy between God that is, but is not commanding, and the son who doesn’t have any ontological essence, but is acting in this world. The church is just a discourse that hides this first split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Agamben shows that the Christian God can’t do anything, since he sends his son to do things in his place, but then the son is independent from the father and the father cannot recuperate the power from the son. So Agamben says that we have to go back to this first anarchism, but we have to desacralise it in order to appropriate it politically. Anarchism would not then be an invention of the 19th century, but has a long tradition.
그의 말에 동의하시나요?
Do you agree with him?
첫째, 진지한 신학자들이 그의 의견에 동의할지 확신이 서지 않네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할 것입니다. 어쨌든 아감벤의 사고방식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주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메시아적입니다.
First, I am not sure that serious theologists would agree with him. We would need more proof, you know. In any case, I think Agamben’s way of thinking is a messianism without messianism, which in itself is messianic.
네. 잃어버린 대상의 아우라가 돌아오는 거죠.
Yes. There is a return of the aura of the lost object.
제게는 그것은 매우 문제적입니다.
To me, it’s very problematic.
당신은 책에서 푸코에게 훨씬 친절한데요, 그때 당신은 푸코를 향한 비판,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자기-통치성에 관한 비판에서 그를 구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You’re much kinder to Foucault in your book, where you try to rescue him from this criticism that has been directed towards him, regarding his so-called neoliberal self-governmentality.
푸코를 읽는 데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저는 그가 정치적 사고를 재정의했다는 것을 발견했고, 특히 당신이 어떤 종류의 정치적 논고들을 읽는다면, 그는 첫 번째 정치적 질문은 통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통치에 대한 저항에 대한 것이라고 항상 말합니다. 우리가 정치철학을 해야 한다면 저항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항은 저항하는 것 이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고전적 정치 철학의 총체적 혁명입니다. 푸코의 사고에는 분명히 진정한genuine 혁명적 힘power이 있습니다.
It took me years to read Foucault. I discovered that he redefined political thinking and in particular, if you read any kind of political treaties, he always says that the first political question is not that of the government, but that of resistance to government. If we have to do political philosophy, we have to start with resistance, since resistance comes before that which it resists. And this is a total revolution of all classical political philosophy. There is obviously a genuine revolutionary power of Foucault’s thinking.
요즘 대안적 사실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파르레시아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When it comes to alternative facts these days, thank you for reminding us of the importance of parrhesia, meaning to speak freely, not only for oneself, but also for the common good.
사람들은 푸코가 마지막 세미나에서,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신자유주의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죠. 그건 완전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파르레시아는 엄청난 정치적 물음입니다. 지금도 그렇죠. 당신이 마크롱에게 가서 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정확히 말한다면 감옥에 갈 것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이것이 푸코가 저항, 즉 직접적 진실의 양태modality라고 부른 것입니다.
People think that in his last seminars, as you said, Foucault becomes neoliberal. Which is perfectly stupid. Parrhesia is an immense political question. Even now. Imagine you go to Macron and tell him exactly what you think of him; you would go to jail. That’s what Foucault calls resistance, the modality of direct truth.
또한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진실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의 자유로운 관계를 통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파르레시아의 내용이 진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You also say that it’s important to first tell the truth through a free relationship to yourself before going and telling it to others. But how do we know that the content of parrhesia is truthful?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타인을 통치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함께 얘기를 나눌 때, 내게는 당신을 통치하거나 올바르게 할 의지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렇죠. 저는 이것이 파르레시아, 즉 진정한 자유 토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권력을 가지려고 하자마자, 관계는 자유롭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파르레시아의 한계는 매우 허약합니다. 그것은 아첨이 없는 진실이어야 하고, 권력이 없는 토론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한계는 다공적입니다.
I think a criteria is to renounce, as you just said, governing others. For example, when we speak together now, I don’t have the will to govern you, or be right. And neither do you. I think this is parrhesia: a truly free discussion. As soon as you want to have power over the other, the relationship ceases to be free. Yet, the limits of parrhesia are very fragile. It has to be truth without flattery; it has to be a discussion without power. These limits are porous.
예술과 아나키의 관계, 그리고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에 대한 당신의 아름다운 구절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Let’s speak a little bit about art’s relation to anarchy, and your beautiful passage on Georges Seurat.
연구를 하면서 19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이 아나키스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테판 말라르메도 그중 한 명이었죠. 그는 많은 예술가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시는 폭탄이다"라고 말했죠. 많은 화가들도 아나키스트였습니다. 구스타브 쿠르베는 프루동과 친구였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그의 자화상 '화가의 작업실'(1855)에서 이를 알 수 있는 데요, 그것을 보면 뒤쪽의 외젠 들라크루아 옆에 프루동과 함께 있는 쿠르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조르주 쇠라나 폴 시냑Paul Signac 같은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잔 붓질little touches의 병치를 통해 급진적인 평등을 형상화하는 방법으로 점묘 기법을 발명했습니다. 이들에게 점묘법은 아나키즘의 회화적 번역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나키스트적 회화의 기법입니다.
During my research, I discovered that many artists in the 19th century were anarchists. Stéphane Mallarmé was one of them. He invited many artists to his home. He himself said that the “poem is a bomb.” Many painters also were anarchists. Gustave Courbet was friend with Proudhon. We can see it in his self-portrait The Painter’s Studio (1855) at Musée d’Orsay, where you see Proudhon next to Eugène Delacroix in the back. Neo-Impressionists like Georges Seurat and Paul Signac invented the technique of pointillism as a way of figuring radical equality by the juxtaposition of little touches. For them it was a pictorial translation of anarchism. It’s a technique of anarchist painting.
당신은 물감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운데의 흰색 입자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원자들의 비가 내리는 빈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모크리토스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당신은 사유를 자극하는 많은 질문과 예시로 책을 마치셨네요. 그 중 하나는 중화민국[타이완]의 장관인 오드리 탕인데요, 그는 또한 국가가 자신의 권력을 전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국가 해커이기도 합니다.
You speak about the white particles in the middle which hold the paint together. It made me think of Democritus, who speaks about the empty space in the rain of atoms… You end your book with so many thought-provoking questions and examples. One of them is a minister in Taiwan, Audrey Tang, who is also a state hacker, helping the state to subvert its own power.
맞아요. 그녀는 또한 트랜스젠더 여성입니다. 처음에 그녀는 대만 정부에 반대하는 해커 운동[해바라기 혁명]에 참여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시스템을 해킹할 방법을 찾았고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정의했습니다. 인터넷 초창기에는 인터넷이 아나키를 발전시킨다고, 또 우리 모두가 평등하며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규모 아나키스트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런 후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힘[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장관이 되자마자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오픈 플랫폼을 설치했습니다. 타이완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정말 아나키스트적인가요? 사람들은 제게 그것은 동시에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례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Exactly. She is also a transgender woman. In the beginning, she was part of this hacker movement which was against the Taiwanese government [Sunflower Revolution]. She found a way to hack herself into the system, and defines herself as an anarchist. In the beginning of the internet, there was a large anarchist movement, thinking that the internet would allow anarchy to develop, that we all would be equal, communicating through networks, etc. Then she understood that in order to be heard, she had to be powerful. But as soon as she became a minister, she installed these open platforms in which citizens can participate. I don’t know how it works in Taiwan. Is it really anarchist? People tell me that at the same time it’s capitalist. The case is nevertheless very interesting.
정치적 문제에 대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모른다는 말로 책을 끝낸 점이 마음에 듭니다. 매우 섬세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아나키스트는 자신의 의견을 너무 확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해줍니다.
I like the fact that you end your book with not knowing, without taking positions in political matters. I find it very delicate. You make us understand indirectly that a true anarchist is never too sure about their opinions.
제가 오드리 탕이나 아나코-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나키스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점을 발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아니, 아니, 이건 아나키즘이 아니야"라고 말하죠. 제가 보기에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는 경계[전선, frontiers]를 너무 확신할 수 없으며 기술적 발명을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은 더 이상 19세기가 아니니까요.
Thank you for discovering that, since I’ve been quite criticised by anarchists when I talk about Audrey Tang or anarcho-capitalism. They say, “no, no, this is not anarchism.” To me you’re right, we cannot be too sure of the frontiers, and we have to take into account technological inventions. We’re not in the 19th century anymore.
독단[교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현재의 사건들을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당신의 책은 역사의 흰 서판tabula rasa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태초부터 오늘날까지 철학적 사고에 숨겨진 -- 때로는 숨겨져 있고 때로는 무의식적인 -- 아나키적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나키적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I very much appreciate your non-dogmatic way of reflecting on current events and also giving us the tools to imagine a better future. I think that your book is not making tabula rasa of history, but, on the contrary, revealing the hidden – sometimes hidden, sometimes unconscious – anarchic parts in philosophical thinking from the beginning of times until today. I would like to ask you a last question: if you would have to imagine an anarchic future, what would it look like to you?
그것이 유토피아라고 한다면, 그 어떤 중앙 권력도 없이 모두가 제안, 토론, 탈중심화된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세계일 것입니다.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모든 것을 논의하는 세계 말이죠. 저는 기술의 좋은 측면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기술을 우리의 편익과 번영, 복지well-being를 위해 사용한다면 매우 좋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술이 아닌 모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혼성적 존재양식을 발명할 것입니다. 평등과 혼성은 함께 개념화되어야 합니다.
If it were to be a utopia, it would be that of a world in which everyone would directly participate in the management of society, through propositions, discussions, decentralised networks, without any central power – staying at the horizontal level and discussing everything. I would retain the good aspects of technology. There are very good aspects of it if we use it for our benefit, our prosperity, our well-being. And I would put them in the service of everything that is not technological, thus inventing hybrid modes of being. Equality and hybridity have to be conceptualised together.
ZAD [Zone á défendre, a French anarchist movement] de la Colline in the Canton of Vaud, Switz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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