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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3 : 벤야민의 사유

역사인식이론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흔적 :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론』에서 운명과 해방

by 상겔스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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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식이론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흔적 
: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론』에서 운명과 해방 

프란시스코 나이슈타트(Francisco Naishtat)

Francisco NAISHTAT, « Les traces de la psychanalyse dans la théorie de la connaissance historique : Destin et délivrance dans les Passages benjaminiens (Passagen-Werk)», Philosophie et Éducation, UTCP Booklet 1, UTCP, 2008.

https://utcp.c.u-tokyo.ac.jp/from/publications/pdf/PE063-08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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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는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아니라 발테 벤야민의 표기를 존중해 ‘파사주론’으로 표기한다.

 

 

I. 서론

20세기를 통해, 역사기술은 인문과학의 형태와 그 변형과도 관련된 철학적 충격이나 인식론적 충격을 받아왔다. 역사이론의 변용에 수반된 다른 인문과학은 인식론적으로 새롭게 방향이 지어지고, 현대철학은 전회해 왔는데, 본론에서는 이런 변용의 전부를 열거할 수는 없다. 현대의 역사기술에서의 결정적인 변화를 세 가지만 지적한다.

 

 (1) 해석학적인 전환 : 역사가의 이해와 해석을 역사인식의 구조에 있어서의 능동적인 결과로 간주하는 것.

 (2) 사회학적인 전환 : 사회나 역사의 장기적인 구조에 입각해 역사기술의 차원을 재설정하는 것. 이 경우, 개별 사건에 대한 접근법으로부터 구성된 역사기술은 배격된다.

 (3) 언어학적인 전환 : 역사의 에크리튀르(역사 이야기), 더욱이 역사기술의 텍스트의 에크리튀르에 대한 인식론적 관점을 수정하는 것. 역사기술의 분야에 텍스트 이론이나 언어이론을 둘러싼 논의를 도입하는 것.

 

 이런 역사기술의 변용(우리는 20세기의 철학의 변용과 결부시켜, 이것을 굳이 ‘전회’라고 표현했다)에 있어서, 정신분석은 얼핏 보면, 별다른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정신분석의 작업에 있어서는, 피분석자의 기억이나 억압된 과거를 현재시와의 동적인 관계에 있어서 파악하기 때문에, 시간 형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역사학 갗은 학문 분야에서 정신분석이 인식론적 충격도 ‘전회’도 초래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시 기묘한 것 아닐까? 역사학의 사명은 바로 “현재시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반론은 다음 세 가지 유보를 포함할 것이다.

 

 (a) 최근의 역사기술은 분명히 정신분석의 충격을 받고 있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의 트라우마를 짊어진 희생자의 역사적 기억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제수용소, 전쟁, 학살, 민족간 폭력 등의 역사적 재앙의 기억이다. 그런데 트라우마의 물음은 분명히 담론이나 이야기의 단절에 관계한다. 즉, 통상적인 사건의 증언과는 달리, 희생자가 사건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파울 첼란이 “아무도 증인을 대신해 증언하지 않는다”(Niemand zeugt für den zeugen)1)라는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만 한다. 이 점에서 정신분석은 역사기술에 선행한다. 유아기나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은 누락 부분이나 트라우마의 어떤 기억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 앞에서 이야기가 단편화될 때, 담론의 한계가 드러날 때, 정신분석은 역사가에게 어떤 모델을 제공할 것이다. 즉, 그것은 이야기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뭔가를 지시하고, 상징하고 암시한다는 모델이다.2)

 

 (b) 정신분석에 대한 역사기술의 유보는 후자의 편만이 아니라 전자로부터도 생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집단적인 정신분석을 어떤 형식(문화, 사회, 역사)에 있어서도 금지했다. 초자아의 차원에서, 의식은 자기 동일성이나 승화 같은 문화적 모델을 포함시킬지도 모르지만, 무의식 쪽은 각 주체의 개별적인 역사와 밀접하게 결부되며, 항상 개인적인 채로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에게서는 집단적인 정신분석은 인정되지 않으며, 르 봉의 군중심리학에서의 집단심리도, 헤겔의 역사적 관념론에서의 민족정신도 상정되지 않는다.3) 무의식에서의 집단적 내지 개인적 지위status의 물음은, 프로이트(및 라캉)이 보기에, 이른바 정당한 정신분석과 미숙하고 잘못된 분석이론을 식별하는 시금석이다. 그래서 개인의 주체성의 차원에 한정된다면, 역사기술은 정신분석을 간접적이고 완곡하게 사용하게 된다. 대체로 역사 해석은 개인적 차원에 한정된 정신분석의 가능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개인들의 심리 ─ 프로이트나 라캉에게서의 주요한 쟁점 ─ 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c) 이런 설명은 더 나아가, 제3의 유보와 깊이 관련될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이론과 역사기술의 실천에 있어서 정신분석과 독자적인 관계를 발전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역사기술의 작업과 이른바 정치, 과거와 역사가의 현재 사이에서 중요한 접점 ─ 역사가가 공식적으로는 부정해왔던 접점 ─ 을 설치함으로써 실증주의와 역사주의라는 두 개의 극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과거와 정신분석의 관계에 관해서는 벤야민의 역사기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적어도 꼽을 수 있다.

 

① 벤야민은 성별(聖別)된 과거와 억압된 과거의 이분법을 시간성의 이론에서 끌어내고, 과거는 두 번 지나간다는 형태로 제시한다. 과거는 첫 번째에는 성취된 과거로서, 두 번째에는 현재시에 대한 새로운 기회chance를 포함한 아직 성취되지 못한 과거로서 지나가는 것이다.4) 실제로,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추도적 상기의 작업에 의해 과거는 현재시의 중핵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개인의 이야기가 신화로서 경험되고, 각자에게 이른바 숙명으로서 부과될 때, 그런 숙명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 있어서, 특히 19세기에 관한 그의 말년의 탐구에 있어서, 역사가의 작업은 과거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실증주의)도, 지나가버린 시대가 우리의 반성적 의식에 대해 보유하는 의식을 과거의 한복판으로부터 사후적으로 폭로하는[파헤치는] 것(역사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실들의] 응축이나 변증법적 이미지의 기법이나 몽타주에 의해, 시간의 연속된 흐름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의 족쇄를 현재시에 있어서 파탄나게 하는 섬광으로서 과거를 발생시키고, 현재시의 중핵에서 특이한 기회chance를 개시하는 것이다.5)

 

② 벤야민은 꿈과 각성의 대립을 정신분석으로부터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섭취한다[받아들인다]. 이 대립에 의해 우리는 모종의 도식을 손에 넣고, 그의 역사인식의 이론에 손을 댈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과거는 역사가에 의해 고정화되고 영원화되지 않고, 반대로 시간의 연속성을 파탄시킬 수 있도록 재활성화되는 것이다.6) 여기서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편으로, 벤야민에게서, 우리의 과거 ─ 이 경우는 19세기 ─ 는 판타스마고리를 포함한다. 판타스마고리가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분석하는 상품 물신주의의 현상과, 공산주의의 선구자나 계급 없는 사회라고 하는 죄 없는 유토피아주의이다. 상품의 물상화의 세계와 그 부정 ─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우정으로 가득 찬 유토피아적 소망 ─ 이라는 두 개의 극은 벤야민이 보기에, 같은 시대나 같은 역사적 현상, 즉 자본주의의 판타스마고리적 표현인 것이다.7) 사회주의적 진보주의는 인류의 역사의 텔로스[목적]를 권위적으로 설정하고, 죄 없는 유토피아를 바라지만, 그것은 결국, 천년낙원을 약속하거나 메시아의 회귀나 시대의 끝[종언]을 한없이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적어도 외관상, 역사유물론은 무적이 된다. 왜냐하면 목적론적 장치는 우리가 진정으로 승부하지 않고, 모든 승부에서 이기는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어떤 불행이나 카타스트로프가 생기더라도, 구원은 이윽고 도래한다는 카드[패]가 수중에 있다.8) 이리하여 상품 물신주의와 공산주의의 약속에 의한 목적론적 유토피아주의라는 두 개의 극은 동일한 판타스마고리로 집약되며, 그것은 역사를 사는 자에게 피험자의 꿈과 똑같은 의미를 띠게 된다. 즉, 운명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이 속박을 파탄시키려고 하는 바람이다. 둘 다 배우[행위자]는 꿈을 꾸는 방관자이다.9)

 

③ 벤야민에게서 과거의 인식이 우리의 현재의 조건의 마력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반대로, 벤야민은 독특한 몽타주 기법10)을 갖고서, 과거와 이른바 물신주의의 톱니바퀴가 연관되는 메커니즘을 내다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벤야민은 역사인식이 어떤 충격을, 즉 각성을 일으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때 역사인식은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의 역할을 맡으며, 우리는 어떤 출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운명의 마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체의 역사적 형이상학의 새로운 형태로서 해석하는 것에는 조심해야 한다. 정신분석 후에 ‘해방된’ 주체의 상태가 무엇을 닮고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은 정신분석의 사정거리를 넘어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회귀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하는 각성이 무엇을 닮고 있는지를 언표하는 것은 역사기술의 사정거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각성은 소묘되고, 예상될 수 있는 경험적 사태와 똑같은 차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각성을 인식하기 위한 기준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고, 각성은 바로 탈신비화의 사정거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적합한 때에 우리는 운명의 마력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운명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또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뒤집고, 역사의 필연이라는 무서운 기계장치를 멈출 수 있도 있을 것이다.11) 그러나 이런 역사인식은 독일관념론 및 역사주의에 의해 해명된 의식과 동등한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이성적이고 몽매한 의식의 안티테제로서, 꿈을 파탄나게 할 수 있는 현명하고 이성적인 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아주 기묘한 의미에서, 데리다가 벤야민에 관한 빼어난 텍스트12)에서 인정했듯이,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가는 꿈을 주의깊게 지켜봐야 한다〔veiller sur le rêve〕. 즉, 역사가는 꿈을 그 원천으로 소급시켜 감으로써 꿈과 대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이나 동질성을 파괴하는, 꿈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나 다름없다.13) 꿈의 허를 찌르고, 각성에 의해 기회chance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꿈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정신분석의 작업이 해석의 작업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적 삶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인내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무한하게 설정되는 해방을 목적론적으로 갈망[대망]하는 것과는 다르다. 분석작업이 무한하게 연장되는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분석을 헐뜯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거꾸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분석이 우리의 지성의 마력을 언어에 의해 배신하는 것을 가능케 했듯이, 분석작업에 의해 마력의 단절이 준비되는 것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게임을 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됐다고 해도, 사물이 무엇에서 어떻게 일어났는가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14) 이리하여 벤야민이 역사기술의 기회로서 논한 역사적 메시아주의는, 영원히 대망되는 메시아의 목적론적 차원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재시의 각 순간이 갖고 있는 기회이며, 출구의 문이며, 역사의 연속의 단절이다. 이런 단절의 시간성에 있어서 메시아적인 것 ─ 벤야민에게서의 진정한 신비 ─ 이란 도래하는 것(예를 들어 구원이나 낙원 같은 목적론적 사태)이 아니라, 도래 그 자체이다. 즉, 운명의 뒤통수를 치고, 우리 자신의 과거를 해방하는 시간의 열림, 마치 두 번째로, 다만 기회로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시간의 열림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기술의 작업에 있어서 해석 모델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정신분석을 다뤄왔지만, 그러나 집합적 무의식의 원형 ─ 선천적이고 비시간적으로 간주되는 원형 ─ 이라는 융의 실체적 해석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은 주체의 철학 및 역사의 목적론의 아포리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역사, 정치, 철학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파사주론』의 역사인식이론이 불러일으킨 반론의 몇 가지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15)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의 테제는 『파사주론』과 분리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 몇 가지의 단장에 입각해 논의를 계속하자. 벤야민이 역사이론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몇 가지 범주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더 예증해보자.

 

 

Ⅱ. 역사인식이론과 벤야민의 『파사주론』

『파사주론』(Pasaggen-Werk)으로 알려진 저작은 벤야민의 기념비적인 텍스트인데, 1940년 9월에 그가 자살했을 때에는 미완성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사후 42년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간행됐다. 1982년 아도르노의 제자 롤프 티데만 등의 손에 의해 편집되고, 주어캄프판의 전집 5권에 수록됐다(프랑스어로는 1989년, 장 라코스트에 의해 번역됐다). 이 책의 제목은 벤야민에 의해 착상된 것이며, 이미 1927년에는 이 기획에 대한 최초의 언급 속에 “파리의 파사주 : 변증법의 요정의 나라”(1928년 1월 30일, 게르숌 숄렘에게 보낸 편지)라고 적혀 있다. 파사주의 도시적인 오브제, 19세기 이후 건축된 파리의 갤러리는 벤야민의 텍스트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다(루이 아라공은 이미 이 대상들 ─ 특히 오페라 자리의 파사주에 시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파리의 도시와 19세기가 이 미완의 책에 통일을 가져다주는 중심적 쟁점이라고 하더라도, 『파사주론』은 단순한 역사론도, 도시론이나 문화해석론도 아니고, 오히려 원칙적으로 역사의 정치철학의 책이다. 「파리 : 19세기의 수도」의 처음 노트를 읽었을 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기대한 것은 이것이었다.

 『파사주론』은 미학, 도시론, 사회학, 역사학 등 이른바 이종혼합적인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그런 특징을 넘어서, 이 책이 전개하는 것은 분석철학의 조류에서 유행하고 있듯이, 역사의 의미를, 더 간결하게 말하면 역사인식의 틀을 철학적으로 파악한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철학적 인식과 현재의 철학적 존재론 사이의 정치적 관계, 즉 역사의 정치에 관련된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관계는 독립적 형태로 방법론으로서 미리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책의 내용 그 자체이며, 그 전체에 새겨져 있다. 즉 이것은 무엇인가를 언표하고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몽타주 장치를 통해 역사인식의 정치적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책인 것이다. 의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다양한 단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단순하게는 말할 수 없는 의미를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관건[내깃돈]으로 삼고 있다. 벤야민의 철학적 인식이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파사주론』은 미학, 역사기술, 사회, 정치 등 여러 차원의 역사인식을 통합하는 중심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을 통해서 그는 '역사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얘기하고 있다. 역사 개념에 대한 벤야민의 유명한 테제는 아도르노의 배려에 의해 이미 50년대에 출판됐지만, 이 테제는 『파사주론』과 독립된 형태로 읽혀져서는 안 되었다. 공교롭게도 따로따로 수용됐기 때문에, 벤야민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역사철학을 전개시키려고 했다고 간주되고, 19세기에 관련된 매우 특이한 조사는 떼어내져 버렸다.16)

  그의 인식이론에서는 페티시즘, 판타스마고리아, 무의식, 꿈, 몽상, 잠, 각성[잠에서 깸], 눈을 뜸, 기억, 신화적 이미지, 변증법적 이미지, 상기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것들은 여러 가지 영향의 혼합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만, 그 주된 것은 마르크스, 루카치, 프로이트, 프루스트, 초현실주의이다.  다만, 이미 첫머리에서 설명했는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파사주론』과 프로이트의 저작의 관계이다. 실제로 벤야민은 꿈, 모앙, 판타스마고리아 같은 정신분석의 개념을 자신의 분석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다만 그는 꿈이나 판타스마고리아를 개인적 심리상태의 차원이 아니라, 파리의 파사주나 만국박람회처럼, 집단이 물질이나 도시를 통해 구현되는 차원에서 이해한다. 또한 오스만, 블랑키, 푸리에, 보들레르 등과 같은 상징적인 역사적 인물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즉, 벤야민은 프로이트처럼, 개인의 심리의 현상에서 출발해서, 정신분석적 해석에 입각해 숨어 있는 논리적 구조를 해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구체적인 역사적 물질에서 출발해, 정신분석적 수법(꿈해석)에서 착상을 얻은 해석을 시행하는 것이다. 파사주나 만국박람회는 물질적 현실인 동시에 판타스마고리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로 자본주의의 상품 페티시즘의 욕망을 나타내며, 계급투쟁이 없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유토피아적 소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판타스마고리아의 현상은 맑스에 있어서는 경제이론에 한정되고, 아도르노나 루카치에 있어서는 맑스가 확립한 페티시즘 현상의 틀 안에서 설명되었다. 하지만 벤야민에 있어서 판타스마고리아 현상은 더 나아가 역사구조의 중핵에 위치지어진다. 즉, 판타스마고리아는 자본주의와 그 물질화라는 형태로 19세기 파리의 생활양식의 모든 수준에 침투해 있는 것이다. 판타스마고리아는 소외적이고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현상을 모순된 변증법으로서 표현하고, 게다가, 이 변증법은 이른바 19세기의 틀을 넘어서, 다음 세기로 연관하는 듯하다. 바로 이것이 『파사주론』의 철학적 힘인데, 꿈 개념은 지나가버린 시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시現在時로 연장된다. 19세기는 다음의 시대를 규정하고 조건짓는다. 즉, 벤야민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사회적 현실이며, 어떤 시대의 잠 ─ 그 꿈이 더 나아가 우리 시대를 조건짓는다 ─ 인 것이다. 즉, 벤야민은 추모적 상기의 작업의 계기를 이루는 "[잠, 꿈에서] 눈을 뜸=각성"과 꿈 개념을 관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개인의 심리에 있어서의 정신분석의 상기와 유사한, 꿈의 작업의 도달점을 이루고, 몽상의 출구나 해방의 조건을 이루는 ‘각성’과 꿈 개념을 관계시키는 것이다. 이리하여 『파사주론』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흔적은 해석상의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즉, 벤야민은 집단 수준에서 정신분석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아도르노는 35년의 편지에서 그것은 융 심리학의 아류라고 지적하고, 벤야민은 융과 선을 긋는다고 자기 변호했다.17) 벤야민의 말투는 그렇다고 치고, ‘각성’ 개념 ─ 꿈이나 판타스마고리 개념을 보완하는 개념 ー 의 사용에서부터, 그는 결국, 프로이트에 가깝다고 가정할 수 있다. 즉, 프로이트의 임상실천에 의한 마력에서의 해방의 구조 속에는, 벤야민의 각성 개념과 유사한 것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벤야민이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 개념을 사용하면 몇 가지 문제나 아포리아가 반드시 생겨난다. 다음 장에서는 이를 살펴보자.

 

 

Ⅲ. 『파사주론』에서의 벤야민의 아포리아

꿈과 깨어남의 물음은 『파사주론』 전체를 통해서, 벤야민 식의 역사기술의 방법과 결부된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 망라적인 분석을 행할 여유는 없으나, 역사기술과 꿈이나 깨어남의 관계에 관해서, 『파사주론』의 K 분류에 수록된 몇 가지 단장断章을 인용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그것과 함께 꿈에 가득 찬 새로운 잠이 유럽을 휩쓴 하나의 자연현상이며, 그 잠 속에서 신화적 힘들의 재활성화를 동반하는[따르는] 것이었다.18)[K1a,8]

 

19세기는 개인적 의식이 반성적 태도를 취하면서, 그런 것으로서 점점 더 유지되는 반면, 집단적 의식은 점점 더 깊은 잠에 떨어지는 시대〔Zeitraum〕(혹은 시대가 꾸는 꿈〔Zeit-traum〕)이다.19)[K1,4]

 

기디온의 명제로부터 더 전진하기 위한 시도. ‘19세기에 건축 구조는 하위의식의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건축 구조는 흡사 꿈이 생리적 과정이라는 발판에 들러붙어서 태어나듯이, 그 주위에 이윽고 ‘예술적인’ 건축이 들러붙는 신체적 과정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바꿔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20)[K1a, 7]

 

여기에서는 꿈의 현상은 단지 개인의 심리현상이 아니라, 집단 수준에서 분석된다는 사고방식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다른 대목에서는 판타스마고리와 묶이고 있다.

 

졸저의 조사는 문명의 이 물체화적 표상에 의해, 우리가 지난 세기부터 물려받은 새로운 생활의 형태들이나 경제적 기술적 기반에 선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하나의 판타스마고리에 돌입하는지를 나타내고 싶다.21)

 

분명히 벤야민은 판타슴, 꿈, 몽상 같은 정신분석 또는 심리학의 범주를 사회・경제적인 차원으로 이행시키고 있다. 물론 이런 개념의 이행 속에서,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전개한 상품 페티시즘 개념의 흔적을 인식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극히 환상적인 성질을 이미 기술하고 있다. 상품과 주체의 관계는 페티시즘이라는 표현으로 규정되며, 이것은 “사태들의 관계의 판타스마고리 형식”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바에서는, 상품의 사용가치 자체는 전혀 신비가 아니더라도, 거기에는 ‘신비적인 가치’나 ‘혼’ 같은 것이 부가되어 있다. 루카치도 또한, 『역사와 계급의식』의 「물상화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이라는 장에서 물상화 현상에 있어서의 ‘환상적 객관성’, 주체의 행동에 대한 그 영향을 강조했다. 상품은 그 외관에 의해, 욕망을 깨어나게 하며, 상기를 약속하는 그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힘을 성취시킨다. 욕망되는 대상이 끊임없이 연기되며, 유동적이고 표층적인 채로 머물기에, 욕구는 덧없는 현실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계열성, 나아가 로크의 “불안uneasiness”, 헤겔의 악무한 같은 유명한 개념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플라톤이 감각적인 것이나 현상의 왕국에 입각해 덧없음을 기술한 것도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상품의 소유는 항상 사라질 운명에 있지만, 그러나 항상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상품은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그림자처럼 상징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지각을 구성하고, 객관성의 기준을 산출한다. 우리의 신체는 꿈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되며, 욕망이 무제한으로 투영되는 장이 된다. 이런 욕망의 지연에 출구는 없으며, 외관상 이를 정복할 수도 없다. 그것은 악몽의 특징을 띠며, 다나이데스[다나오스의 딸들]나 시지포스의 신화처럼, 마술적 내지 신화적인 관계의 불명료한 가혹함을 연상시킨다.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인간의 끝없는, 불가능한 노력의 허무함이 암시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악몽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상이 항상 사라지고 만다, 그때마다 손 안에서 무로 돌아가버린다고 하는 악몽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페티시즘 이론에 남다른 특징을 덧붙인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어떤 시대 전체의 생활양식에 있어서 일반화된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품은 어떤 시대의 꿈이나 집단적 무의식에 바로 유혹을 거는 것이다. 장-미셸 팔미에는 벤야민의 사후 출판에 관한 연구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관계를 둘러싼 분석을 순수하게 경제학적인 것에 머물게 했으나, 벤야민은 페티시즘적 대상과 산보하는 관찰자의 복잡한 관계를 둘러싼 진정한 현상학을 묘사해냈다. 후자에게 상품은 사회 전체의 상징이나 소우주를 이루는 것이다.”22) 이것은 『파사주론』의 서두인 「파리 : 19세기의 수도」라는 유명한 도입부분에서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

 

개인은 오락산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기분전환에 잠기지만, 그 내부에서, 그는 밀집한 대중의 한 구성요소이길 계속한다. 이런 종류의 대중은 유원지의 제트코스터나 ‘회전장치’나 ‘애벌레’에 올라타,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즐기고 있는데, 그것에 의해, 산업적 혹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기대할 수 있는 전적으로 반동적인 복종에의 훈련을 받는 것이다─ 상품의 지고권의 확인과 상품을 에워싼 다양한 기분 전환용 빛, 이것은 그랑빌의 예술의 숨겨진 주제이다. 그의 유토피아적 요소와 시니컬한 요소 사이의 불균형은 여기에서 생긴다. 생명 없는 물체의 묘사에 있어서의 그의 교묘한 기교는, 마르크스가 상품의 ‘신학적 변덕’이라고 부른 것에 대응한다.23)

 

『파사주론』에서는 상품의 페티시즘적 성격을 꿈의 집단(Traumkollektiv)의 관념과 결부시킨다. 이런 연관은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구조가 아니라, 거꾸로, 19세기를 둘러싸고, 잠과 깨어남의 대칭 개념에 의해 정치의 기능을 상기의 역사서술의 내깃돈으로 하는 작업의 중핵을 차지한다. 물론 어떤 역사적 시대의 물질이나 도시의 현상에 있어서 꿈과 환상의 특징을 파악한 것은 벤야민뿐이 아니며, 그가 처음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1983년에 레모 보데이24)는 벤야민의 『파사주론』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분석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의 ‘물질적 의미론’을 논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루이 아라공의 『파리의 농민』 ─ 벤야민이 찬양한 작품 ─ 도 다시 주목해야 할 텍스트이다. 특히 「오페라좌의 파사주」라는 제목의 텍스트에서, 아라공은 부동산 투기에 의해 소멸하고 있던 19세기의 파사주의 분석에 전념하고, 자본주의의 판타슴적 구조에 의해 산출된 그 시대착오적 모양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벤야민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정치적인 의미 ─ 현재시에의 결정적인 방향 설정 ─ 를 부여받고 응축되어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런 현재시에의 방향 설정은 잠에서 깨어남[각성]의 관념과 떼어낼 수 없다(벤야민에게 있어서 잠에서 깨어남[각성]은 꿈의 집단의 범주에 부수한다). 『파사주론』의 몇 가지 단편을 더 인용하자.

 

19세기의 집단적 꿈의 현상형식은 무시할 수는 없으며, 또한 그런 현상인식은 과거의 그 어떤 세기를 특징짓는 것보다도 훨씬 결정적으로 19세기를 특징짓고 있다. ─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으며, 그런 현상형식들은, 올바르게 해석된다면, 매우 실천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우리가 항해하려고 하는 바다와, 우리가 떠나간 해변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하면, 19세기의 '비판'은 이 현상형식에서 시작해야 한다.25)[K1a, 6]

 

〔…〕 내가 아래에서 제시하려는 것은 깨어남의 기법에 대한 시론이다. 즉, 추모적인 상기의 변증법적 전환 혹은 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인식하려고 하는 시도이다.26)[K1, 1]

 

역사를 보는 데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이런 것이다. 즉, 지금까지 “일찍이 있었던 것”은 고정점으로 간주되고, 현재는, 더듬어가면서 인식을 이 고정점을 이끌려고 노력한다고 겨져졌지만, 이제 이 관계는 역전되고, 일찍이 있었던 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전환의 장소가 되며, 깨어난 의식이 갑자기 출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는 정치가 역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여러 가지 사실이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것이 되며, 그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상기의 작업이다. 실제로 깨어남은 이런 상기의 모범적인 경우, 즉 우리가 가장 가까운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자명한 것을 상기하는 것에 성공하는 경우이다. 프루스트가 깨어난 상태에서 가구를 실험적으로 재배치한다는 얘기에 의해 말하려고 한 것, 블로흐가 태어난 순간의 어두움이라는 표현으로 간파했던 것이, 여기에서, 역사적인 것의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확정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찍이 있었던 것에 대한 아직은 의식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지식의 발굴은 깨어남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27)[K1, 2]

 

이런 세 가지 단편에 의해 역사인식의 조감도의 핵심에 벤야민의 방법을 뒷받침하는 개념들의 경첩이 놓인다. 그것은 곧 꿈의 집단(Traumkollektiv), 19세기의 비판, 깨어남(Erwachen), 추모적 상기(Erinnerung, Eingedenken), 과거(Gewesene), 현재(Gegenwart), 지금(Jetzt),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등의 개념이다.

 우선 벤야민에 있어서, 꿈의 집단이란 대중심리가 물상화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의 생리학”에 관한 19세기의 실증주의적, 자연주의적인 방법보다도, 오히려 초현실주의적,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가깝다. 마리오 페첼라가 지적하듯이,28) 벤야민에게서의 집단적 무의식의 관념에 있어서 “변증법이 첫 번째 계기를, 깨어남이 두 번째 계기를 이룬다. 즉, 깨어남이란, 타자성을 띤 꿈으로 우리의 의식을 열고, 이해와 해석을 위한 순간이다.” 이리하여 꿈의 집단은 현실 그 자체와 동일한 심리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역사적인 생활양식의 물질적 표현을 해석함으로써 역사가가 벗겨내는 상징적인 형식이나 상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벤야민은 융과는 달리, 이런 상징적인 형식들을 역사적 변화로부터 떼어내지 않고, 그래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그의 모델이 된다. 즉 역사가의 사명은 집단에 관계하면서도, 개인의 분석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사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페첼라가 더 논하듯이, “특정한 문화에 있어서 작용하는 신화적 요소란 변증법적 사고가 독해해야 하는 꿈의 상징이다. 이런 비평 활동의 절박을, 자아와 무의식 사이의 통합의 결여로부터 신경증이 생길 경우에서의 개인의 분석의 절박과 비교할 수 있다. 프로이트 자신, 문명의 집단적 병을 고찰할 필요를 느꼈다. 이러한 요구에 무관심한 논리는, 현대의 대중의 격정 속에서 해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29)

 그런데 벤야민은 “코페르니쿠스적 전개”라는 표현 속에서, 꿈과 깨어남의 관계 ─ 이것이 역사기술의 작업에 정치적 차원을 부여한다 ─ 를 둘러싼 모든 의미를 응축시킨다. 역사기술에 있어서 <일찍이 있었던 것(Gewesene)>은 역사가가 접근하고 관계해야 하는 고정점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있어서는, <일찍이 있었던 것>은 해석의 변증법에 의한 추모적 상기(Eingedenken)의 작동을 통해 위치를 바꾸고, 섬광처럼 현재시에 충격을 주고, 순간이나 지금(Jetzt)을 비연속적인 것으로 한다. 이리하여 『파사주론』의 작업은 비의지적 기억이나 연상의 작동을 결합한 프루스트적 상기를 연상시킨다. 억압되어 잠든 과거의 의식의 흐름을 그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일종의 유물론적 기호론은 깨어남을 초래하고, 시대의 물상화나 다음 시대로 계승되는 그 정치적 공허함의 허를 찌른다.

 이렇게 논한 단계에서, 벤야민의 역사기술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이나 아포리아가 생긴다. 우선 첫째로, 몇몇 비평가가 시사하듯이,30) 벤야민은 각성 개념을 통해서, 역사의 주체라는 역사적 범주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깨어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깨어 있어야 하는 걸까? 누구를 통해 예기치 않은 깨어남이 생기는 것일까? 자신의 시대에 명석한 의식을 향하는 벤야민의 역사가를,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올빼미]에 포개보고 싶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벤야민은 몰래 역사주의를 다시 도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자신, 근대성의 마약적인 잠을 초래하는 요인으로서 역사주의를 명백하게 비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에서 부정되었던 진보 관념이 부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본주의의 페티시즘의 형식들 속에서 과거가 마비하고 잠들어 있으며, 그에 반해 현재시가 깨어 있다고 하는 진보적인 구도가 도입되는 게 아닐까? 벤야민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각성한 집단(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의식)이라는 전위적이고 본질적인 관념을, 게다가 각성한 민족이라는 개념(예를 들어 전체주의적 관념)을 재도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굴욕과 자유주의의 해악에 맞서서 “독일이여, 깨어나라”라고 호소했다. 결국 벤야민은 빛이나 진리에 접근하는 특권적인 철학자-대화자라는 플라톤적 인물상을 부활시킬 우려가 없을까? 그것은 곧, 동물의 마력으로부터 처음으로 해방되고, 감각적 세계의 현상들 속에서 졸고 있는 집단을 깨우는 인물의 복권이다.

 이런 의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집약된다. 벤야민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범주들을 채용하여 집단을 독해하면서도 후자가 우려하는 지평에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즉, 천계설이나 엘리트적인 전위주의 ─ 이것이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에서의 ‘위인’ 이론을 가능케 한 것이다 ─ 와 접근함으로써, 분석 치료의 전체주의적 관념이 생긴다는 우려이다. 그것은 대중에 선행하는 역사의식이 정념에 사로잡혀서 과거의 낡은 형식을 오로지 파괴하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이런 물음은 이리하여 깨어남의 종말론적・신학적 관념을 경유하여, 주술사나 세기말의 지도자 같은 카리스마적 재능으로 귀착하는 모종의 신학정치와도 닮아 있다. 벤야민의 정치적 사상이 물리칠 권위적인 온정주의와 관계하는 것이다.

 

 

Ⅳ. 정신분석과 각성의 세속적 구조

우리는 정신분석의 모델을 바탕으로, 이런 아포리아로부터 『파사주론』을 구출해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는 정치적 역사기술에 입각해 그 의의를 다시 방향지을 수 있다. 깨어남에 대해서는 두 개의 모델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본질화된 집단 개념과 결합된 깨어남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의지적 기억이라는 프루스트적 기법과 결합된 깨어남이 있다. 그것은 꿈의 기억을 둘러싼 정신분석의 작업에 가깝다. 후자의 모델에 따르면, 깨어남은 시대에 앞선 의식의 도입이 아니라, 각자가 어떤 해석 기법에 의해 성취되어야 할 상기의 결과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파사주론』은 식견 있는 집단이 필연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현재의 조건이나 생활양식이 과거에서 유래하는 꿈이나 무의식의 구조에 얽매여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작업의 관점을 연 것이다. 정신분석이 드러내듯이, 각성의 진정한 경험이란 유물론적 역사가가 예기하고 기술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시대가 스스로에 대한 정치적 작업 ─ 이것은 데리다의 “꿈을 유심히 지켜본다”라는 실천(각주 13을 참조)과 불가분하다 ─ 으로서 이뤄져야 하는 경험이다. 벤야민에 있어서, 유물론적 역사기술은, 시대에 선행하는 ‘위인’이나 새로운 역사적 영웅에 대한 주의주의적인 호소로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신비를 드러내는 아이러니라는 더 겸허한 차원에 위치된다. 이제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아이러니에 의해, 우리는 운명의 마력의 허를 찌르고, 과거의 찬스[기회]를 새롭게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찬스는 집단이나 선택된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다. 즉, 메시아주의는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열림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다(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밝음〔Lichtung〕”31)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다시금 인용하면, “아무도 증인 대신 증언하지 않는다”(주1을 참조)는 것이며, 바로 각자가 유물론적 몽타주에 의해, 역사기술의 흐름을 뛰어넘어, 역사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우월 ─ 벤야민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중핵을 이루는 생각 ─ 을 개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벤야민의 단장을 두 개 인용한다.

 

따라서 한 마디로 말하면, 19세기의 ‘비판’은 이 현상형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즉, 착수되어야 할 것은 19세기의 기계론이나 동물기계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19세기의 마취적인 역사주의나 그 가장벽(仮装癖)에 대한 비판이다. 누가 뭐래도, 그런 가장벽(仮装癖) 안에야말로, 진정한 역사적 존재의 신호가 숨어 있다. 이 신호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이 신호를 해독하는 것, 이것이 당분간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혁명적・유물론적인 기초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여기서 화제가 되고 있는 진정한 역사적 존재의 신호에 있어서 19세기의 자신의 경제적 기초를 최고도로 표현한다는 것의 충분한 보증이 될 것이다.32)[K1a, 6]

 

모든 역사적 사건은, 메시아 자신이 도래해야 처음으로 완성된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 의미하는 바는, 역사적 사건과 메시아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메시아 자신이 처음으로 구제하고 완성하고 창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인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자신만의 힘으로, 자신을 메시아적인 것으로 관계시키려고 바랄 수 없다. 따라서 신의 나라는, 역사라는 가능태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신의 나라가 목표로서 설정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의 나라는 목표가 아니라 종언이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신의 나라라는 생각 아래에서 수립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신정정치에는 정치적인 의미는 없으며, 오로지 종교적인 의미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정정치가 가진 정치적 의미를 철저하게 부인한 공적에 있어서는, E.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33)

 

깨어남의 기법이 가져올 비판적 차원은, 벤야민의 역사적 메시아주의를 매우 특수한 것으로 한다. 즉 메시아주의가 정치적인 것의 신학화가 아니라, 역사를 정치화하는 충돌로서 이해된다. 이 충돌에 의해 시간은 내재적인 진보의 타성에서, 신의 초월성에 의한 신학적 기회주의에서 벗어난다.

 

 


1) P. Celan, Aschenglorie, in Strette, Mercure de France, 1971, tr. A. Bouchet, pp. 48-51, repris de J. Derrida, Fichus, Paris, Galilée, 2002, p. 51.

2) P. Ricoeur, La mémoire, l’histoire, l’oubli, Paris, Seuil, 2000. 트라우마와 역사적 이야기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María Inés Mudrovcik, Historia, narración y memoria(Buenos Aires, Paidós, 2007)를 참조.

3) S. Freud, Psychologie des masses et analyse du moi (Massenpsychologie und Ich analyse, 1921), Œuvres Complètes, vol. XVI, Paris, PUF, 2003 ; G. Le Bon, Psychologie des foules, Paris, PUF, 1991.

4) 이 표현은 프랑수아즈 프루스트의 것이다. “시간은 <두 번> 지나간다. 시간은 한 번은 죽은 이미지, 공허한 시간, 과거의 추억이 된다. … 하지만 동시에, 시간은 지나감으로써 다른 장소에 새겨진다. … 이것이 두 번째 시간, 두 번째 과거, 즉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첫 번째 시간의 그림자이다. 우리는 보는 자가 이 그림자를 부각시키고, 재독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Françoise Proust, L’histoire à contretemps. Le temps historique chez Walter Benjamin, Paris, Cerf, 1994, p. 104.

5) 역사실증주의나 역사주의와 벤야민의 대립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명백하다. 특히 테제 Ⅵ, ⅩⅥ, ⅩⅦ를 참조.

6) 「역사의 개념에 대해」의 테제 ⅩⅣ 등을 참조.

7) 장-미셸 팔미에는 벤야민의 사후 출판에 관한 최근 논고에서 판타스마고리의 내적 변증법을 해명하고 있다. 이 변증법은 상품 물신주의와 황금시대의 유토피아를 함의한다. 이런 이중성은 물신주의 현상에 대한 순수하게 맑스적, 혹은 아도르노적 사고방식과는 선을 긋는다. 왜냐하면 후자는 물신화된 상품에 있어서의 의식의 소외밖에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cf. J.-M. Palmier, Walter Benjamin. Le chifonnier, l’Ange et le Petit Bossu, Paris, Klincksieck, 2006, p. 447f.

8) 「역사의 개념에 대해」의 테제 Ⅰ에 묘사된 유명한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를 참조. 일반적으로 이 테제는 맑스주의의 신학적 요소를 지적한 대목으로 간주됐다. 그렇다고 한다면, 속류 맑스주의와는 다른 맑스주의를 벤야민은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목적론적 신학과, 역사의 연속을 현재시에 있어서 단절시키는 메시아주의가 있다. 자동인형의 알레고리에 있어서, 난쟁이는 거짓 자동인형이 모든 승부에서 이기도록 했지만, 이것은 이중의 해석을 띤다. 한편으로 그것은 벤야민이 격투한 역사적 기계론의 경향이다. 이 경우, 신학적 요소는 속류 역사주의나 진보주의 같은 목적론적 성격을 두르고, 현재시의 행동을 무디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메시아적 시간이며, 그 기회chance는 그때마다 꽉 쥐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작용하는 것은 모든 점진적인 기대를 경시하는 비속류적 유물론이다. 점진적 혁명에 의한 천년왕국의 테제와 마찬가지로, 속류 맑스주의는 어떤 패배도 피하고, 완전무결하게 되지만, 자동인형장치는 이런 협잡의 메커니즘의 뒤통수를 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는 현대의 사이버네틱스 장치에 의해 반전되는 게 아닐까? 살아 있는 인간의 배후에 지능 로봇이 숨어 있고, 목적론적 신학의 역할을 맡는다고 하는 사태를 상상해보자. 숨겨진 지능 로봇이 인간 대신 게임을 하고, 모든 승부에서 이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이 자신의 게임을 할 여지가 없어진다. ... 역사의 맑스주의 내지 목적론적 신학은 현재시를 무디게 하고, 끝없는 가상성에 우리를 내맡긴다. 이런 가상성은 사실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고, 승부에 한 번도 패하지 않고, 하지만 그 때문에, 역사의 행위자는 자신의 게임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 분명히 벤야민은 역사에 관한 텍스트에서, 이런 자동인형의 반전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사주론』 서두에서는 미슐레의 “어떤 시대도 그것에 이어진 시대를 꿈꾼다”는 문구가 인용되고 있는데, 그 의미를 깊게 이해하면, 이것은 충분히 시사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자동인형은 현대의 틀림없는 자동인형을 예견한 판타스마고리적인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현대의 자동인형은 인간이나 행동, 정치에 있어서 더욱 가혹하고, 어찌할 수 없이 무적이다.

9)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꿈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는, 그것과 더불어 꿈에 가득 찬 새로운 잠이 유럽을 습격하는 하나의 자연현상이며, 그 잠 속에서 신화적인 힘들의 재활성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K1a,8]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Le livre des Passages, Paris, Cerf, 2006, p. 408.〔이하 Le livre des Passages는 P-W의 약칭으로 표기한다.〕

10) 벤야민의 텍스트에서 몽타주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F. Naishtat, « La historiografía antiépica de W. Benjamin. La crítica de la narración en las Tesis « Sobre el concepto de historia » y su relación con los dispositivos heurísticos del Passagen-Werk », Actas del II Congreso Internacional de Filosofía de la Historia, Buenos Aires, 2008.

11) 흥미롭게도 벤야민에게서 혁명은 목적의 왕국의 도래를 앞당기는, 역사라는 증기기관차에 대한 급속한 접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런 증기기관차의 급브레이크이며, 시간을 중지시키고, 위기의 발생을 먹어치운다. 정의를 위한 혁명의 진정한 개입은 천상의 왕국의 약속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게 아니라, 솔직한 '아니오'의 힘, 즉 거절이나 항의를 내뱉는 폭력을 동반한다. 급브레이크로서의 혁명에 대해서는 W. Benjamin, Paralipomena, Gesammelte Schcriften, 1-3, 1228-1252, Berlin, ed. Rolf Tiedemann, Suhrkamp를 참조.

12) J . Derrida, Fichus, op. cit., pp. 20-21.

13) P-W., p. 493 [N10, 3].

14) 칸트에게서의 이성의 역사를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현대성과,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의 점진적 혁명의 가상성의 대립에 관해서는 다음의 졸고를 참조. F. Naishtat, « Revolution, discontinuity and progress in Kant. Copernican revolution and Asymptotic revolution in critical philosophy », Proceedings of the Xth Kant International Congress, Berlín, Walter de Gruyter, 2008.

15) 특히Rita Bischof et Elizabeth Lenk, « L’imbrication surréelle du rêve et de l’histoire dans les Passages de Benjamin », in H. Wismann compilateur, Walter Benjamin et Paris, Paris, Cerf, 1986, pp. 179-200.

16) 이 점에 관해서는 F. Naishtat, « La historiografía antiépica de W. Benjamin. La crítica de la narración en las Tesis « Sobre el concepto de historia » y su relación con los dispositivos heurísticos del Passagen-Werk », op. cit.

17) 『파사주론』의 K 및 N을 참조.

18) P-W, p. 408.

19) Ibid., p. 406.

20) Ibid., p. 408.

21) P-W,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Exposé de 1939, Introduction, op. cit., p. 47.

22) J.-M Palmier, op. cit. p. 458.

23) P-W, Paris, Capitale du XIX siècle, Exposé de 1939, section B. « Grandville ou les expositions universelles », op. cit. p. 51.

24) Cf. Remo Bodei, « L’expérience et les formes. Le Paris de Walter Benjamin et de Siegfried Kracauer », in H Wisman, op. cit. pp. 33–48.

25) P-W, p. 408.

26) Ibid., p.405.

27) Ibid., pp. 405-406.

28) Mario Pezzella, « Image mythique et image dialectique. Remarques sur le Passagen-Werk », H. Wisman, op. cit., pp. 517-428.

29) Ibid.

30) Cf. notamment Rita Bischof et Elisabeth Lenk, op. cit.

31) Martin Heidegger, « La fin de la Philosophie et le tournant », in Questions IV, Paris, Gallimard, 2005, p. 295.

32) P-W., p. 408.

33) Theologisch-politisches Fragment, GS II, 1, 203, en W. Benjmin, La dialéctica en suspenso, Santiago de Chile, Arcis, 1995, pp. 18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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