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와 분열분석적 사고
: 그 세 가지 철학적 문제군
スピノザと分裂分析的思考
: その三つの哲学的問題群
** 이 글은 일본어판을 그대로 직역했다. 따라서 원문대조를 통한 용어의 변경은 이뤄지지 않았다. 가령 '비급'이라는 단어는 '투자, 투여'로 옮겨져야 하고, 감정과 정서를 구별해서 표기해야 하지만, 그런 것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기 바란다[2017년 3월 23일].
에가와 다카오(江川隆男)
『情況』第3期第5巻第7号 2004년 7월(情況出版)
우리는 이 삶에서, 특히 유아기의 신체를, 그 본성이 허용하는 한, 또한 그 본성에 도움이 되는 한, … 다른 신체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 스피노자, 『윤리학』 5부
스피노자는 모든 “정상병자(正常病者)”를 적으로 돌린다. 1 따라서 이 정상병(正常病)에 대한 비판의 실재적 경험이 실제로 <분열분석적 사고>를 형성하는 유인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정상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목적론, 다의성, 유비(analogy), 가능성, 부정, 의식, 선악, 표상, 말, 슬픔, 가족적 관계, 커플관계 등등에 매달리는 것, 실재성의 모든 것을 이것들 속에 에워싸는 것, 말하자면 메이저리티에 고유한 불치의 병이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확실히 사람들 속에서 기능해 왔으며, 현재에도 충분히 그 유효성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은 모든 것을 환상에 의해, 표상상과 말의 언어에 의해 해결하고, 그런 가운데 우리의 정신을 고정하는 한에서, 혹은 정신이라는 비물체적인 우주를 다의성과 유비로 가득 채우는 한에서만 기능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일의성의 철학의 퍼스펙티브에서 말하자면, 정신분석은, 역시 어디까지나 <존재의 유비>나 <이마주의 사고>에 대응하고, 또한 이것들을 분유하는 ― 예를 들어 전이나 대상 a 등등의 정신분석의 개념들이 얼마나 엄밀한 비례성(상이한 항들 사이를 전이하기 위해 전제가 되는 관계=비(比))의 사고 아래서 성립하는가 ― 의식의 형이상학적 “무의식”에 관한 상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사실, 정신분석적 사고는 반드시 유비나 다의성, 이마주의 사고나 말의 사고와 대립하지 않으며, 더욱이 그런 사고들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이것들을 파괴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안에서 제기하는 “분열-분석”(schizo-analyse)은, 정상병과 이것을 전제로 한 광의의 정신장애, 그리고 특히 이것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바로 <존재의 일의성>(혹은 <인식의 일의성>)을 형성하는 것, 달리 말하면, 현실에 이 일의성을 산출하고 배분하는 정신의 초월론적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에 있다. 특히 가타리가 도입한 이 “분열분석”에 의해 들뢰즈는, 정신분석과 일치하지 않으나, 그러나 그것과 화해 가능한 결과들을 산출한 그 이전의 철학적 사고를 철저히 하고, 바로 정신분석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의 사고를, 즉 <분열분석적 사고>를 획득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스피노자주의와 분열증의 위대한 종합 ― “실재적인 것[현실계]의 일의성” 혹은 “무의식에 대한 스피노자주의” 2― 이다. 이 경험, 즉 분열분석적 경험은, 실재적인 생산적 무의식의 발생의 요소이며, 각개의 양태, 그 생존의 양태 속의 혁명적 마이너리티의 부분들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이다.
1. 무의식의 형성 : 욕망하는 평행론
<분석하라>, 그리고 <형식화/이론화하라>, 결정적으로 쇠약한 사고, 모든 면에서 스콜라화된 현대의 죽어가는 분석적 사고여, 죽어가는 정신분석이여. 그러나 분열분석의 작업은 이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분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전히 종합이다. 그것은 <파괴하라>, <생산하라>이며, 이 두 가지 활동=동사의 종합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파괴하라>라는 제1의 부정적인 작업이, <생산하라>(즉, 각개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존재의 양태를 찾아내는 것, 사회적 영역을 투자[투여] 3하는 것, <강도=영>을 투자[투여]하는 것)는 제2의 적극적 작업과 떼어낼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여기서 생산이 파괴의 충동을 의식한 욕망의 생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는, 사실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정신이나 그 심적 과정으로부터 분열분석적 사고로의 실재적 이행과정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 속에 프로이트적인 마음의 심층으로서의 무의식을 찾아내려고 하는 노력이 항상 헛수고로 끝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서의 무의식이 의식을 넘어선 정신의 무의식이며, 그러므로 동시에 신체라는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념 적용의 질서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주어진 것도 아니며, 형성되고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한 단순히 신체의 본성을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무엇이 도출될 수 있는지를 모른다.” 4이 유명한 문장이 나타나는 긴 비고(備考)에서 스피노자는, 바로 정신은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의식에 정위한 인식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바꿔 말하면 의식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즉, 신체에 있어서의 ‘결정‘(determinatio)이 정신에 있어서의 ’결의‘(decretum)와 본성상 동시라는 것, 달리 말하면 우리의 활동은 의식 속에서 자각된 자유로운 결의 ― 스피노자는 이것을 눈을 뜨면서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말한다 ―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신경증적인 의식과 코기토의 철학을 넘어선, 정신의 결의=신체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다고 한다. 이것에 의해 바로 스피노자에게 고유한 무의식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즉, 이 평행론 자체가 <윤리학>에서의 무의식의 형성이다. 5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의 최대 특징은 스피노자에게서의 경험주의적 측면을 실천 철학으로서 개념들의 형성의 질서 아래서 밝힌 것에 있는 것이다. 6 스피노자의 일의성의 철학은 단순히 철학사에 있어서의 존재의 일의성의 계보 속에 자리 잡은 정위치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일의적 존재> 개념의 경험론적 형성 아래서만 사고될 수 있을 뿐인 하나의 결정적 사건, 모든 사건에 대한 유일하게 동일한 사건으로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오늘,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으로부터, 특히 그 평행론으로부터 이런 과격한 비판성이 거의 간과되고 있는 듯하다. 평행론은, 실제로 그렇게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더 잘 설명하는 개념 따위가 아니라, 모든 의미와 가치의 변혁의 개념, 이것들의 새로운 형성에 관한 개념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말하는 이른바 존재론적 평행론에서 인식론적 평행론으로,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 심신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인식론적 평행론의 개별적 사례인 심신평행론, 즉 “정신적-물리적”(psycho-physique) 평행론 7으로 그 해상도를 올렸다고 해도 결코 감지할 수 없는, 형성의 차원 아래서 사고되는 평행론, 양태의 결정의 차원에서 생산되는 평행론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경험주의적 평행론, 욕망하는 평행론이며, 그 어떤 비례성도 전제하지 않고, 이것들 일체의 기존 관계성에 대한 절대적 원근법주의를 동반한, 파괴와 생산을 조건으로서 전이하는 평행론, 즉 <정신적-물리적>을 대신하는 <분열적-신체적>(schizo-corporel) 평행론이다(가타리 등은 더욱이 이 평행론 자체는 완전히 긍정적인 의미에서 ‘비물체=비신체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8 내가 여기서 제기하는 이 욕망하는 평행론은 정신에 있어서의 <비판의 문제>와 신체에 있어서의 <임상의 문제> 사이의 평행론이며, 여기서는 표현보다도 오히려 생산이 문제가 된다. 클레르 파르네가 “비판과 임상은 엄밀하게 동일시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옳다. 다만, 이 “엄밀하게”란 어디까지나 이것들이 평행론을 이룬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의 비판의 문제는, 표상상과 언어로부터, 혹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으로부터, 생성과 강도를 내용에 기반한 관념으로 정신의 사고 능력의 수준을 변형하는 것이며, 임상의 문제란 <거울> 자체 ― 예를 들어, 라캉의 거울상 단계를 산출하는 거울, 타자로서의 거울, 라이프니츠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인 살아 있는 거울, 반사 혹은 표현하는 거울 등등 ― 의 파괴 작업인 동시에, 어떤 유기적인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메이저리티의 언어인 분절 언어, 말의 언어로의 비판 없이 이 임상의 문제는 있을 수 없고, 이와 동시에 다른 어떤 비물체적인 것을 산출하는 신체를 문제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판의 문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9 이런 의미에서의 평행론은, 단순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형성하는 것이며, 욕망 속에서 원하는 내재적 실체를 구성하는 것, 즉 무의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스피노자에게서의 이 실천적인 <욕망하는 평행론>이라는 개념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는 분열분석적 사고의 철학적 문제들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불완전성이나 부정 등의 개념을 배제하고, 신체를 긍정하는 비판적 관계(혹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실재성의 <정도의 차이>의 관점)가 이 평행론 속에서 생각된다 ― 즉, 우리는 언제 어떻게 실재의 영역을 정립하는가?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정신이 혼란된 관념에 의해 자기의 신체 혹은 그 부분에 대해, 전보다 큰 혹은 작은 존재력을 긍정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물체들에 대해 우리가 지닌 모든 관념은, 외부의 물체의 본성보다도 우리의 신체의 현동적인 상태를 더 많이 표시하지만,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 혹은 그 어떤 부분의 활동 역능 혹은 존재력이 증대하거나 감소하기도 하는, 즉 촉진되거나 저해되기도 하는 것에 의해, 신체 혹은 그 부분이 드러내는 상태를 지시 혹은 표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10” 여기에는 부정이나 불완전성의 개념은 없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말해지는 완전성은 불완전성과 대쌍을 이루는 개념이 아니다. 더 적은 완전성은 더 큰 완전성의 결여나 부재를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슬픔이 있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기쁨의 결여가 아니라, 하나의 적극적인 이행상태(활동역능의 감소)를 나타내며, 사건으로서의 <슬퍼하는 것>에 고유한 강도를 지니는 것이다. 이 “긍정하는” 것은 동일한 신체의 두 가지 상태 사이의 비교나, 이것들의 관념 사이의 비교를 통한 행위도 아니라면, 그런 비교의 결과를 기다려서 결정되는 활동=동사도 아니다. “긍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실재성을 포함한 어떤 것의 영역을 정립하는 것이다. 바깥에서부터, 스피노자에게서의 정신을 의식으로, 혹은 관념을 지향성으로 환원하거나, 특히 스피노자의 관념을 관념론에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하는 한에서, 형성의 질서에 있어서 평행론을 구성하는 두 개의 요소는 결정적으로 어긋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내적인 이유가 오로지 어느 한쪽의 요소라고 할 의식 쪽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에 결코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평행론에 있어서, 분명히 신체가 정신에 대한 지도적 모델이 되는 장면이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11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식에 의한 자각의 울타리 바깥에 있으며, 그것을 넘어서지만, 그러나 이것이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신체의 정신에 대한 우월성 따위가 아니며, 의식의 자각을 넘어서, 이 신체의 활동 역능에 대응한 정신의 <할 수 있는 것?, 그 사고 역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비록 표상상과 표면의 언어의 본질이 “신체적 운동”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본질들을 습관과 기억의 질서를 지탱하는 실질로서 사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신 혹은 의식 쪽이다. 왜냐하면 신체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아르토는 만년의 텍스트에서 표상의 언어를 찢어버리는 말의 블록을 발하고 있다 ― “신체는 신체다 / 신체는 그것만으로 존재한다 / 기관은 필요 없다 / 신체는 반드시 유기체인 것이 아니다 / 유기체는 신체의 적이다. 12” 기관들, 혹은 기관들로 이루어진 유기체는, 기억이나 습관이 부착된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신체이며, 그저 그뿐이다. 즉, 신체는 <더 큰> 혹은 <더 작은> 실재성을 포함한 존재를 긍정하고 있을 뿐이며, 이런 한에서 신체는 끊임없이 <더 유능>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더 유능>하다는 것은 신체는 항상 <할 수 있는 것의 존재>에 다름 아니라고 하는 것이며, 더욱이 이런 신체의 본성을 바로 “대상의 본성”으로 하는 것이,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들이다. 이 신체의 가치에 의해서만 이런 관념들의 가치가 평정되고, 이것에 의해 그 긍정적인 표현형태의 수준이 결정된다. 13 이 신체의 존재, 즉 <할 수 있는 것의 존재>에 대응하도록, 관념의 표현활동은, 그동안 쉽게, 무비판적으로 결부된 표상상이나 표면의 언어와 연을 끊고, 형성의 평행론 아래서 그 사고활동 전체의 준위(準位)를 바꾸도록 결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평행론 이전의 <간극> ― 이것은 심신 사이에 실재적인 인과관계를 상정하는 것도 포함해 모두 의식에 고유한 착각이다 ―을 수정하려고 하는 조화에 대한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으로서의 평행론 자체가 지닌 욕망에 있어서의 결의=결정이며, 그때 바로 실재의 영역은 정립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있어서의 무의식은, 들뢰즈가 특히 강조하는 공통 개념의 형성의 질서에 고유한 평행론과 관련된 것이다. 이런 경험주의적 평행론에 있어서의 두 가지 요소, 두 가지 계열 사이에는, 단순한 <간극>이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신체와 정신의 <할 수 있는 것>을 동시에 정의하고, 이것들 사이에서 실천의 문제를 제기하는 미지의 한 가지 적극적인 부조화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즉, 무의식의 형성의 차원이 밝힌 것,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을 더 급진적으로 정의하는 것, 그것은 두 가지 계열의 <부조화적 일치>로서의 욕망하는 평행론이다.
모든 양태의 현동적 본질(코나투스)은 내재적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부정법의 동사(형상)의 일정한 정도 또는 강도를 가진다. 그러므로 실체는 양태와 절대적으로 존재의 방식을 달리 하는 이상, <강도=영>이라는 존재의 방식으로 이 내재적 실체를 표현할 수 있다. 부정법의 동사가 가진 강도는 결코 그 동사의 부정형을 인칭 변화시킴으로써 생기는 사태, 그것은 더 이상 그 동사가 귀속될 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며, 그 사물의 단순한 속성=특성이 되며, 그 사물의 양이나 질을 오로지 표시할 뿐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사람들은 다시 목적론이나 부정성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표상의 언어에 빠지게 된다. 부정법의 동사(형상)의 다양한 강도 ― 이것들은 <강도=영>과의 사이의 어떤 일정한 내포적 거리에 있는 역능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다. 욕망 속에서 결정되는 비판의 문제는, 예를 들어, 생활의 형식과 합치한 간주관적인 언어사용(공통감각과 양식에 의해 정의되는)에 종속된 감성을 철저하게 능가하는 <감각 블록>과 이 언어사용에 대응하는 의미와 가치를 변형하고, 이 변형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산출하는 <사고의 파라-그래프>를, 즉 모든 가치의 가치 전환을 향하는 분자적 실천을 산출하게 된다. 아무튼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 활동 속의 어떤 부분에 있어서 생성하는, 표상상과 말의 언어에 의한 판단의 적용 차원으로부터 관념의 언어활동이라는 표현의 형성으로의 이행이다. 경험주의적 평행론에 있어서 신체를 모델로 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결의로 우리의 정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욕망, 그것은 바로 실재적인 것의 정립과 종합의 원천이다. 스피노자는 “욕망은 의식을 동반한 충동이다”고 말하고, 더욱이 이 “의식의 원인”을 동시에 드러내는 욕망의 실재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그 각각의 변양에 의해 어떤 것을 이루도록 결정된다고 생각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이다.” 의식은 이 “결정”의 단순한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며, 또한 이 “결정”은 무엇보다도 신체를 통해 경험되는 활동 역능의 증대∙감소라는 실재적 이행 속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욕망이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욕망은 자신의 외부를 따라야 하는 범형 따위를 갖지 않는 이상, 결코 이런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또한 욕망은, 이런 물음을 따르고 이것에 응답하려고 하는 <해(解)의 양태> 따위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항상 <무엇이 실재인가>, <어떻게 실재를 생산하는가>라는 문제의 양태이길 계속한다. 달리 말하면, 욕망은 판단에 선행하며, 그 때문에 그 어떤 욕구도 없이 실재의 영역을 정립하는 “생산의 질서”에만 속할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양성과 유비가 소용돌이치는 영역 ― 즉, 부정성을 매개로 한 <복수>의 생산이 있어도, 차이가 긍정되는 <다양>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 ― 과는 완전히 외재적인 관계에 있는 듯한 실재의 영역을 정립했다. 이 영역 전체는 바로 <기쁨의 지식>과 <욕망의 지혜>로 가득 찬 정동군들에 의해 성립하는 평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현상태와, 단순히 지나가는 현재로서만 도래할 뿐인 미래에 대해 몇 안 되는 비관적 시선을 기울이기 때문에, 지금에 영원으로서 도래하고 있는 미래를 조건으로 한 어떤 삶을, 혹은 그 퍼스펙티브를 어떻게든 긍정하려고 하는 활동의 평면이다. 일개의 양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욕망, 혹은 욕망하는 평행론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생산하는가를 찾아내는 것. 즉, 분열분석의 제1의 적극적인 임무, 혹은 스피노자에게서의 개념들의 형성은, 감정 속의 어떤 적극적인 것을 이용해, 어떻게 일개의 양태 속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이 작동하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며, 이것이 동시에 혁명적 무의식의 형성과정이 되는 것이다.
제2의 문제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실제 속에서 어떻게 부정적인 것이나 결여나 무능력이 생기는가이다. 왜 이 문제를 다시금 제기하느냐 하면, 스피노자가 파악했듯이, 모든 개념의 형성은, 인간 신체의 활동 역능의 두 가지 상태(그 증대인가 감소인가) 중 어느 한 쪽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전개하려면, 선∙악의 개념에 의한 제2의 비판적인, 그러나 더 효과적인 방법론적 관점(혹은 활동 역능의 증대∙감소라는 실재적 이행과정의 <본성의 차이>의 관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방법론적 관점은 제1의 비판적 관계 이상으로 비판적, 즉 더 창조적이며, 생산적이다. “나는 이하에서 선이란 우리가 제기하는 인간 본성의 틀에 점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에 반해 악이란 우리가 이 똑같은 틀에 일치하는 것의 방해가 되는 것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더욱이 우리는 인간이 이 틀에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접근하느냐에 의해서, 그 인간을 더 완전 혹은 더 불완전이라고 부른다.” 14 중요한 논점은, 정립된 실재의 외부에 다의성 혹은 유비의 사고와 세계를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이 실재의 일의성과 이런 존재들의 다의성의 영역을 두 개의 다양체의 유형으로서, 혹은 체제의 차이로서 관계짓는 것이다. 헌데, “인간 본성의 틀에 점점 접근하는” 것이란 그 본질과 존재가 더 많이 일치하게 되는 것, 즉 개체로서의 인간의 존재가 더 많이 스스로의 본질과의 관계에서 규정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선은 더 많이 <좋은/나쁜> 실질을, 즉 더 많은 완전성을 갖게 될 것이다(인간 본성의 틀이란 그 본질과 존재 사이의 일치이며, 존재 속에서 그 본질의 변양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고 실현하려 하는 것 ― 욕망의 윤리학 ― 이다). 이에 반해, 그 본질과 존재가 더 적게 접근하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개물의 존재를 그 본질로부터 떼어내고 그 존재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계나 무능력 같은 부정적 사항을 좇아 그 사물을 평가하게 되는 것, 그 때문에 그만큼 자기의 정신이 부정이나 결여에 의해 더 많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경우의 악이란, 초월적 가치로서의 <선/악>에 의해 규정되는 더 불완전한 것으로 채워진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악=결여체는 항상 비교를 자신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활동 역능의 증대와 감소로부터, 즉 동일한 역능의 상이한 두 가지 사용으로부터, 실재의 일의성과 존재의 다의성이라는 두 가지 본질적으로 상이한 체제, 다양체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완전성=실재성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한에서, 사물의 본질이라고 풀이된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사물의 본질과 존재는 불가분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양태로서의 사물의 본질에는 그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 이상, 그 본질과 존재가 무비판적으로 동일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갖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그 존재 속에 작용하는 힘으로서의 코나투스를,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작용 원인으로서 갖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정도로 이 힘이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와 동일한 힘”으로 발휘된다는 점에서, 모든 사물은 “동등”(aequales)하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모든 코나투스에 대해 말해지는 신의 본성의 강도적인 <분유의 일의성>이다(거꾸로 말하면, 이것은 무한하게 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내재적 실체를 실재적으로 정의하고, 더 말한다면, 이 내재적 실체인 기관 없는 신체의 <강도=영>을 비급하는 것이다). 본질에는 절대적인 정도로서의 완전성=실재성이 속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의 존재에 의해, 즉 지속에 의해 이 본질의 상태만으로는 결코 생길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활동 역능의 증대와 감소가 이행 방향 ― 방향성으로서 우리에게 보이는, 실재성의 실질적 변이 ― 의 본성의 차이로서 포함된다. 15 기쁨의 수동적 종합(예를 들어 마주침의 조직화)은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산출한다. 자신의 신체와 적합하는 다른 물체=신체와 마주쳤을 때, 우리 속에 곧바로 수동적 감정으로서의 기쁨이 생기고, 이로부터 이 두 개의 신체=물체에 공통적인 일반성의 가장 철저한, 그러나 더 창조적이고 특이한 공통(일의적) 개념이 형성된다. 여기서는 내 신체의 활동 역능은 더 증대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내 신체라는 하나의 관계항 속에서 생기는 <사물의 상태>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하는 이런 두 개의 신체=물체들 사이에서 생기는 생성변화이다. 이에 대해 활동 역능의 감소를 보여주는 슬픔에 있어서, 나의 신체는, 거꾸로 기존의 불변적 관계 ― 그 때문에 여기서는 더욱 더 가능성이나 우연성이 유효한 개념이 된다 ―를 대전제로 한 그것들의 단순한 관계항으로 한없이 빠지고, 마지막에는 거기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다(사실 동일성이 소리 높여 외쳐지는 것은, 이런 슬픔의 상태에서이다). 공통 개념은 <사이> 개념이다. 따라서 이 개념이 만들어지는 한, 그것은 관계라는 비물체적인 것의 변형을 필연적으로 표현하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공통 개념의 형성의 유인이 되는 기쁨에는, 다른 신체=물체와 더불어 기존의 관계의 변형 자체에 대한 마주침과 욕망이 있다. “마주침/만남”이란 <관계=연관>(relation)이 외재화된 가운데서의 생성변화이며, 항을 정한 목적론적 배치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성 ― 이것은 오히려 <관계=비>(rapport)에 의해 표현된다 ― 의 필연성에 의한 기존의 관계들=연관들의 파괴∙변형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이든 양태이든 존재가 말해지는 모든 것은 필연이라는 존재의 양상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존재의 외부에 있으며, 그 존재가 따라야 할 법칙이나 범형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외재성, 마주침의 조직화, 관계의 변형, 이런 세 가지 사건은, 생산적 욕망 아래서 공통 개념의 형성으로 향하기 위한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헌데, 이런 내 신체의 활동 역능의 증대, 즉 내 신체(corps)와 다른 물체=신체 사이에서의 나의 신체의 생성을, 예를 들어 퐁주의 “사물 놀이[대상놀이]” 혹은 오히려 “사물 기쁨[대상기쁨]”이라는 말을 사용해 «objoie c»라고 부르기로 하자. 16 들뢰즈가 말하는 “마주침의 조직화”는 관계의 외재성 속에서의 기쁜 물체=신체 사이의 결합인 이상, 단순히 우연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불확정적 관계들” 속에서의 요소들의 편성화이다. 그것은 기계적 욕망이며, 우연성이 아니며, 오히려 필연성을 존재하는 양태들 자신의 본성으로 삼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는가”, “거기에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산 사이의 언어 내적인 일반적 관계가 문제인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 어떤 관계도 없다. 비관계 속에서의 <결합-생성>이 문제인 것이다. <어떤 맬로리 17에 있어서 거기서 에베레스트가 되는 것>이 발생할 뿐이다(부정법(不定法)의 동사, 고유명, 부정관사 혹은 대명사에 의해 구성된 욕망의 표현). 어떤 맬로리의 신체와 다른 물체, 에베레스트와의 사이에는 이 신체의 생성변화를 나타내는 «objoie c»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의 특이한 사건의 선을 긋는 형태로, 욕망을 내실로 한 어떤 <그것>(il)으로서의 무의식의 생산을 나타내고 있다. 이 문답, 혹은 동성애자 맬로리의 이 말은, 결합의 부재 속에서 어떻게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요소들이 기계적인 결합을 이루어 작동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은, 세계를 대상적으로 구성하는 주체도 아니라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공통의 질서” 속에서, 혹은 모든 기존의 불변적 관계의 가능성의 조건들 속에서 우연에 몸을 맡기는 정상병자도 아니고, 현실에서 구별되는 요소들이 불확정적인 관계 아래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욕망하는 기계의 한 부품이다. <산-등산가>, <사자-조련사>, <인간-말-활> …,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작동 편성된 생산적 욕망이며, 그런 한에서 욕망은 자기의 본성의 법칙들을 가장 잘 포함한 것이다.
2. 강도 : 죽음의 분열증화
그런데 관계의 외재성은 실체주의와 관계주의에 대한 제3의 입장인데,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이 외재성이, 실체 개념과 함수 개념을 파괴하는 동시에 모든 관계들의 현실적인 비물체적 변형을 수반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대부분 부정적으로만 작용할 뿐인 현행의 조건들의 한복판에서, 이야기화된 인물론적 무의식도, 구조화된 기호론적 무의식도 아닌, 반시대적인 초월론적 무의식을 형성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토는 『이곳에 잠들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 앙토냉 아르토는 나의 자식이며, 나의 아버지이며, 나의 어머니이며, 그리고 나이다.” 18 아르토는 자식,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 자신의 계열을 편력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내포의 가혹한 변형의 여행이지 결코 그 각각으로의 동일화의 여행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동일화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이 내포의 여행은 방랑의 여행이다. 실제로 고정된 관계들 속에서, 욕망이 혁명적이었다는 것은 결코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제반 불변적인 <관계>(친자관계, 부부관계 등등) 개념의 동일성 속에서의 미리 정해진 관계항(자식, 아버지, 어머니, 나)으로 단순히 이행하고 그것과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관계들 자체를 변형하는 것 없이는 생성변화할 수 없는 강도적 양태로서의 자식, 아버지, 어머니, 나이다. 그렇다면 이 내포의 여행, 이 강도의 흐름은, 어떤 이동경로를 취하는가? 달리 말해보자. 나는 나의 원인이며, 나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와 아주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원인으로서의 아버지로부터 결과로서의 자식으로 향해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이행과 동시에, 원인∙결과의 관계(혹은 친자관계) 자체가 잔혹할 정도로까지 일그러지고 변형되는 것이다. 이 혹한과 작열의 이동 경로야말로 비물체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길이며, 이 길을 걷는 것 자체가 하나의 초월론적 경험, 즉 분열분석적 경험이다.
아르토라는 이름을 지닌 이 경련하는 존재는, 이런 불변적 관계들과 그 개념에 대한 투쟁, 비물체적 변형 ―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비물체적인 것의 물체적 변형이다(비물체적 유물론의 첫 번째 입장) ― 없이는 신체로서 실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신체가 발하는 レクトン 19의 증기, 비역사적 구름이라는 것은 바로 이 변형이다. 이 신체의 존재에는 기존의 그 어떤 관계도 귀속하지 않으며, 또한 거꾸로 이 존재를 그 어떤 관계들로 환원할 수도 없다. 주의해야 할 논점은, 이 변형은, 이른바 “정적 발생”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물체=신체에 대한 비물체적 변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물체=신체처럼은 결코 변형도 파괴도 될 수 없는 것, 즉 의미나 가치나 관계 같은 비물체적인 것에 관한 물체적=신체적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만 비물체적 변형은 신체에 귀속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재적인 것의 현동화가 구체적인 것에 대해 그 힘들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현동화가 이 비물체적인 변형의 물상화와 하나가 될 때이다(들뢰즈에게서의 잠재성의 철학이 맑스의 문제들을 구성하는 장이 여기에 있다). 혹은 관계의 물상화로부터 그 비물체적 변형의 현동화로. 아버지를 살해하고(살인소망), 어머니와 하나가 된다(성적 소망)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식을 해석장치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이 욕망 속에서는 친자관계, 부부관계라는 관계 자체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으며, 여전히 보존된 채로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래서 상정된 소망, 욕망, 질투, 증오, 해석, 관계에 대한 의지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가 주장하는 빗물체적 변형에 대해 무차이이다. 그러나 기존의 관계를 보존한 채로는 욕망이 혁명적일 수는 없다. 따라서 혁명적인 욕망하는 무의식은, 이런 일반적인 특정한 관계들 자체를 변형하고, 이것들의 불변적인 개념의 동일성의 효력을 잃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을 뿐이리라. “잔혹”이란 바로 이 변형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고뇌가 아니라 오히려 동물의 신체의 고통에 가까운 것이다. 아르토는 바로 이 빗물체적 변형의 고아이며, 사건 속에서 욕망하고 있는 독신자이다.
셋째로, 스피노자에게서의 신체의 탈-유기체화라는 형성 차원 아래서만 사고되는 임상의 문제(환언하면, <강도의 차이>의 본성)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 삶에 있어서, 특히 유아기의 신체를, 그 본성이 허용하는 한, 또한 그 본성에 도움이 되는 한, 가장 많은 것에 유능한 다른 신체에, 그리고 자기와 신과 사물에 대한 가장 많은 것을 의식하는 정신에 관계하는 다른 신체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강조는 인용자]. 20 여기에는 어떤 일정한 기관들로 구성된 유기체적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 ― 즉, 기관 없는 신체 ― 로의 변질∙변신의 문제, 혹은 현동적인 현재의 상으로부터 바라본 유기체적 신체의 존재로부터 영원의 상 아래서 바라본 비유기체적 신체의 본질로의, 즉 기관을 갖지 않은 신체로의 변화∙형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유아기의 신체로부터, 달리 말하면 거울에 비친 기관들의 총체로서의 유기체적 신체로부터, 타자가 개재하지 않고 그 결의=결단이 모두 강도로서 생겨나는 기관 없는 신체, 거울상 단계를 갖지 않은 실재적 신체, 거울에 비치지 않은 충실한 신체로. 다만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어떤 본질 혹은 형상(예컨대 말)을 다른 본질 혹은 형상(예컨대 인간 혹은 곤충)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체의 본질 혹은 형상의 강도의 문제이며, 역시 그 본성과 하나가 된 양상의 문제, 필연성의 문제이다. 이것은 형성의 질서에 있어서의 비판의 수준과 완전히 평행을 이루는, 스피노자에게 고유한, 그리고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생산적 무의식 자체로서의 욕망하는 평행론에 있어서의 임상의 문제이다.
스피노자는 분명히 신체를 하나의 새로운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주장하듯이, 그것은 동시에, 혹은 필연적으로 신체를 <죽음의 모델>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를 <죽음의 모델>로 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그것은 초월성을 띤 부정이나 결여를 신체에 가져오는 것도, 혹은 양과 질에 관련된 죽음을 모델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체가 단순히 가멸적인 것이기 때문에도, 우리에게서 신체가 가장 절실한 가멸성을 갖는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가 모든 가멸성을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실재성을 드러내는, <강도=영>으로의 점근적 하강∙소멸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을 양과 질로부터 해방하는 것, 혹은 죽음을 둘러싼 양과 질의 관점을 무효로 하는 것이다. 그런 신체는 무엇인가? 기관 없는 신체는 결코 우리의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이 아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아무것도 가능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가능케 할 수 없는 소진된 것의 절대적 조건이며, 더 충분하게 말한다면, 모든 강도가 발생하기 위한, 즉 절대적 낙하∙소멸하기 위한 ― 강도가 내포량으로부터 구별되고, 바로 강도로서 파악되기 위한 ― 하나의 무조건적 원리이다. 21 “기관 없는 신체는 <죽음의 모델>이다. 22” 칸트는 분명히 “지각의 예측予料” 속에서 이 낙하, 소실을 파악했다. <부정성=영>과의 관계 아래서만 규정되는 양, 즉 이 <부정성=영>과의 내적인 긴장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양, 그것이 “내포량”이며, 점근적으로 이 <부정성=영>으로 낙하해가는 한에서만 그 정도에 고유한 수준을 나타내는 양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이미 근대 시민사회의 인간상 속에서, 혹은 새로운 형이상학, 새로운 합리주의 속에서, 혹은 이성의 자기 비판 속에서 간신히 ‘죽음의 욕동’을 언뜻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죽음은 결코 부정적인 것으로도, <부정성=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죽음에 걸맞는 것은 강도이며, 이 <강도=영>이다. “죽음을 분열증화하려”면, 무엇보다도 양과 질로부터 죽음 자체를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평행론으로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죽음의 표현을 발산시키는 것, 모든 <강도-생성>을 <강도=영> 위에서 경험되는 죽음의 생성으로 하는 것이다.
분명히 스피노자는 타자 없는 세계에서 살고, 그래서 타자의 욕망에도, 타자의 변증법적 스토리에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인간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다. 그리고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23 그러나 여기서 성찰되는 삶은, 실재 속에서 형성되는 삶이며, 그러므로 여기서 성찰되지 않은 죽음이란 상상과 상징 아래서 표상될 가멸적인 차이, 혹은 적용의 질서에 있어서의 잠재적 다양체의 현동화의 끝에서 취소되는 가멸적인 차이에 대응한 죽음, 부정이나 결여로 환원되는 죽음, 주체로서 고정된, 한 명의 타자로서의 <나>의 죽음이다. 따라서 여기서 성찰되지 않은 삶도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성찰되지 않은 죽음에 의해 잃는 것이 최대가 된 듯한 삶이다. <나>는 이런 삶의 별명이다. 그러나 <죽음의 경험> ― 기관 없는 신체라는 <죽음의 모델> 위에서 발생하는 (즉 낙하하는) 강도를 감각하는 것 ― 에 대해서는 이런 <나>에 대해 말해지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은 완전히 그 의미를 잃는다. 이것이야말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죽음이 그만큼 덜 해로워지며”, “죽음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24 왜냐하면 이 경험에 있어서 하나의 삶은, 죽음에 의해 잃는 것이 더 적을 뿐, 그만큼 더 많은 영원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의 탈근거화야말로 영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를 <나>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들 속에서는, 기관 없는 신체는 결코 차이화하지 않는 차이이며, 이에 반해 차이화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인 차이라는 필연성 속에서 이 신체의 비분할적인 내포 부분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강도=영>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어떤 강도의 차이 <e ― é>이다. 자유로운 인간의 ‘지혜’의 모든 것은 욕망의 지혜이다.
영원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 그것은 욕망하는 평행론에 있어서의 미래의 힘들, 분열분석적인 <반-실현>의 경험이다. 이 경험이 빗물체적 변형의 물상화 = 현동화의 실재적인 발생의 요소가 될 때, 처음으로 이 <물상화=현동화>론은 혁명의 힘들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 미래의 원인을 결코 목적인의 일종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적인은 그 과정을 이루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고, 나쁘다고, 즉 실현의 결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데, 그러나 이 새로운 작용원인=자기원인은 과정을 결코 부정하지는 못할망정, 그 자체로 오히려 질료적인 <과정인>으로서만 불릴 수밖에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문맥이 아니라, 또 문맥과는 전혀 관계없는 비통시적인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곳을 통과하는 자는 결코 통과한 공간을 산출하지 않는 걸음걸이를 하는 자들이며, 분열자의 산보(혹은 그 사고)란 그런 것이다. 사회적 영역은 오히려 이런 과정에 의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산출되는 실재의 영역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듯이, 바로 “분열증적 과정은 혁명의 잠재력이다.” 25 욕망은 이 과정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분열분석적 경험은 하나의 실재적 경험이며, 항상 <죽음의 경험>을 동반한 경험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열분석은 오히려 하나의 종합이다. 모든 피분석체의 그 현동적 조건들을 파괴하는 것, 변형하는 것, 이와 동시에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강도=영>을 비급하는 것, 이것이 그대로 분열분석적 경험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 경험은 파괴와 “동시에” 생산적이다. 26 이렇게 해서 분열분석적 경험은 그 사고가 비물체적인 것의 물질성임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사고의 물질성 ― 비물체적인 것을 물체적으로 변형하는 강도 ― 가 자기 속에서 사회적 영역을 실재적으로 정의하고, 또한 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실제로 사회를 생산하는 것이며, 이것이 <강도=영>을 비급하는 것의 의미이다. 27 분열분석은, 따라서 유물론적이고 초월론적이다. 그것은 욕망의 과정인을 찾아내어 긍정한다는 의미에서 빗물체적 유물론이며, <강도=영>을 비급한다는 강도의 완전한 본성을 찾아내고 긍정하는 한에서 초월론적이다. 스피노자와 분열분석의 가장 적극적인 임무, 그것은 어떻게 이 <강도=영>을 자기 속에 비급하느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무의식으로서의 욕망하는 평행론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따. 무의식의 형성, 즉 욕망하는 평행론에 의해 들뢰즈/가타리가 제기한 분열분석은 더 급진적으로, 더 많은 강도를 수반한 사고와 경험의 행사 속에서 그 임무가 전개되는 것이다.
에가와 타카오 : 도쿄도립대학(철학). 저서로 『존재와 차이 :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存在と差異— ドゥルーズの超越論的経験論)』(知泉書館), 번역서로 『베르그손 강의록 3(ベルクソン講義録III)』(공역, 法政大学出版局) 외.
- ‘정상병자‘(normopathe)는 라 보르도 정신병원의 창설자이며, 거기서의 가타리의 좋은 파트너였던 장 우리가 만든 말이다(Cf. Felix Guattari, Chaosmose, Galilee, 1992, p.103). [본문으로]
- Gilles Deleuze, Pourparlers. Minuit, 1990, pp.197-198 / cf. Note pour l’edition italienne de Logique du sens, in Deux regimes de fous, Minuit, 2003, p.60. [본문으로]
- [옮긴이] 일본 문헌에서 읽을 수 있는 '비급'이라는 단어는 한국어로는 투자, 투여로 옮기는 편이 좋다. [본문으로]
- 스피노자, 『윤리학』, 3부, 정리 2 비고. [옮긴이] 원문 및 국역본을 참고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 Cf. Gilles Deleuze, Quatre propositions sur la psvchanalyse, in DF, pp.73-74. “무의식, 당신은 이것을 생산해야만 한다. 무의식을 생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의 정신증후군, 당신들의 자아, 당신들의 정신분석가와 함께 있어라. … 무의식을 생산하기.” [본문으로]
- 개념의 적용의 차원에 있어서의 “사변적 관점”과 개념의 형성의 위상에 있어서의 “실천적 기능” 사이의 차이, 그리고 이 후자의 경험론적 의의 ― 이런 논점들이야말로 경탄해야 할 일의성의 사상을 제기한 혁명적 이분자異分子로서의 스피노자를 부각시키게 된다 ― 에 대해서는 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1968, pp.134-136, 259-262(이하, SP로 표기) / Spinoza-philosophie pratique, Minuit, 1981, pp.27-43, 127-129, 160-161(이하, S으로 표기)를 참조하라. 미뉘사에서 출판된 『스피노자 : 실천철학』은 그 11년 전에 PUF에서 나온 『스피노자』를 바탕으로 대폭 증보∙가필된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 구판에 있었던 「텍스트 발췌집」 부분(세 개의 구분, 전체 26쪽)은 신판에서는 완전히 생략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래에서 각각의 발췌에 붙여진 들뢰즈 자신에 의한 간단한 표제와 발췌 대목을 참고로 번역해둔다. 텍스트 발췌집 (A) 비판 1. 의식에 대한 비판 : 놀랍게도 신체는 … (『윤리학』 3부 정리2 비고). 2. 왜 우리의 관념은 본래적으로 비완전한가(『윤리학』 2부 정리28, 증명과 비고). 3. 법에 대한 비판 : 아담의 오해(『신학정치론』 4장). 4. 우리는 비완전한 관념에 따른 두 종류의 감정을 갖는다(『윤리학』 3부 정리 11 비고 / 정리 39 비고 / 감정의 일반적 정의). 5. 슬픔의 감정과 이 감정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윤리학』 4부 정리 45 비고 / 정리 63 비고 / 부록 13 / 5부 정리 10 비고). 6. 종교에 대한 비판과 종교의 의미 : 복종하는 것(『신학정치론』 13장) (B) 완전한 것의 획득 7. 방법 : 어떤 진정한 관념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과 신과 다른 물체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산출하는 것(『지성개선론』 37-40). 8. 왜 공통개념은 우리에게서 완전한 관념인가(『윤리학』 2부 정리 39 정리와 증명과 계). 9. 어떻게 우리는 공통개념에 도달하는가: 기쁨의 감정에서 출발해 외적 사물과 우리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는 것(『윤리학』 5부 정리 10 정리와 증명과 비고). 10. 공통 개념에서 신의 관념으로(『윤리학』 2부 정리 46 증명 / 정리 47 비고). 11. 신의 관념의 첫 번째 측면 : 속성에 의한 유일한 실체(『윤리학』 1부 정리 8 비고 2). 12. 신의 관념의 두 번째 측면 : 모든 속성에 대한 유일한 실체(『윤리학』 2부 정리 10 증명과 비고). 13. 원인의 일의성 : 자기원인과 똑같은 의미에서 말해지는 모든 사물의 원인인 신(『윤리학』 2부 정리 3 비고). 14. 속성들의 일의성 : 여러 가지 속성들이 신의 본질을 구성하고 여러 가지 산출물들의 본질 속에 포함된다(『윤리학』 2부 정리 7 비고) (C) 양태의 상태들 15. 존재하는 개체(『윤리학』 2부 정의 보조정리 4 5, 6, 7 비고). 16. 죽음이 의미하는 것(『윤리학』 4부 정리 39 증명과 비고) 17. 영원의 특이한 본질(『윤리학』 5부 정리 23 증명과 비고). 18. 악은 본질에 관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완복서한집』 편지 13[스피노자가 블뤼엔베르크에게 보낸 편지]. 19. 제3종의 인식과 본질들 : 나와 사물과 신(『윤리학』 5부 정리 25 증명 / 정리 31 증명). 20. 개체의 사멸 후에 본질적으로 남는 것(『윤리학』 5부 정리 38 증명과 비고)(Cf. Gilles Deleuze, Spinoza, PUF, 1970, pp.101-26). [본문으로]
- Cf. SP p.100. [본문으로]
- 가타리는 초기 스토아학파의 이 “비물체적”(incorporel)이라는 말을 들뢰즈 이상으로 많이 사용할 뿐 아니라, 그것 이상으로 새로운 의미를 그것에 부여한다. <비물체적인 것>의 개념을 쇄신하고, “비물체적 우주”를 입안한다는 의미에서, 가타리는 21세기의 사상가이기 전에 그 과격함에서 말하더라도 오히려 20세기의 크리시포스가 아닐까? 예를 들어 스피노자와 라캉을 관계시켜서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형태로 <비물체적인 것>의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스피노자를 달리 말해서 나는 비물체적 세계에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Felix Guattari, Cartographies schizoanalytiques, Galilée, 1989, p.196((『分裂分析的地図}作成法』、宇波彰・吉沢順 訳, 紀伊國屋書店, 1998년). “언어 표현의 실질과 비언어 표현의 실질은 미리 만들어진 유한한 세계(라캉적인 대문자 〈타자〉의 세계)에 속하는 담론의 연쇄와 무한한 창조적 잠재성을 지닌 비물체적 역치閾値(이는 라캉적과 ‘숫자집’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확립된다”(Chaosmose, p.43). “그러나 라캉은 … ‘욕망하는 기계들’ ― 그는 이 이론에 착수했는데 ―을 적절하게 비물체적인 잠재성의 권역에 위치시키지 않았다”[강조는 인용자](Chaosmose, p.132). 또 장 우리도 가타리의 영향을 받았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료적 기준의 틀은, 응축된 질의 차원에 있는 것을 측정할 수 없으며,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비물체적인 차원에 있는 것을 측정할 수 없다”(ジャン•ウリ序文, 『精神の管理社会をどう超えるかーー制度論的精神療法の現場から』, 松籟社, 2000년, 16頁). 다만 스피노자는 당연한 것인데, 이 “비물체적”(incorporeum)이라는 말 자체의 사용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지성개선론』 88-89頁 참조). [본문으로]
- 예를 들어 아르토의 「언어에 대한 편지」에는 문법적으로 분절된 “말의 언어”에 대한 비판과 고차적인 연극적 “관념”에 대한 철학적 주장이 있다(Cf. Antonin Artaud, Œuvres Completes IV, Gallimard, 1978, pp.101-117(『アントナン・アルトー著作集 I 演劇とその分身』, 安堂信也 訳, 白水社, 1996년). “한마디로 연극의 가장 높은 관념은 우리를 철학적으로 <생성>과 화해시키는 관념이며, 모든 종류의 객관적 상황을 통해서 단어 속에서의 감정들의 변화나 충돌에 대한 관념보다도 사물 속의 관념들의 통과와 변질에 관한 한순간의 관념을 훨씬 우리에게 암시하는 관념처럼 생각된다”(Ibid., p.105). [본문으로]
- 스피노자, 『윤리학』, 3부 「감정의 일반적 정리」 [옮긴이] 다시 말하지만, 일본어 문서를 그대로 직역했다. 따라서 '감정'을 '정서'로 바꾸지 않았다. [본문으로]
- 스피노자, 『윤리학』, 2부, 정리 12, 비고 참조. [본문으로]
- cf. Gilles Deleuze, Felix Guattari, Mille plateux. Minuit, 1980, pp.196-197(『千のブラトー』, 宇野邦一・他訳, 河出書房新社, 1994년), 또한 森島章仁, 『アントナン• アルトーと精神分裂病』, 関東学院大学出版会, 1999년, 「第五章 : 重さをひらく」のなかのとりわけ「三寸断化された身体/器官なき身体ーー性, 分身, 機械」를 참조. [본문으로]
- “그 대상의 본성을, 즉 인간 신체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 …”(스피노자, 『윤리학』, 2부 정리 13 비고) 및 “왜냐하면 관념의 탁월함[가치]과 그 현동적인 사고 역능은 대상의 탁월함[가치]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이다”(『윤리학』 3부 「감정의 일반적 정의」). [본문으로]
-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서문 참조. [본문으로]
- Cf. S. pp.54-58. [본문으로]
- 프랑시스 퐁주의 ‘사물 놀이’(objeu) ― 더 나아가 이것은 ‘사물 기쁨’(objoie)으로 이어진다 ― 에 대해서는 安部良雄, 『ポンジュ人・語・物』(筑摩書房, 1974년)을, 또한 라캉의 ‘대상 a’를 대신해 가타리와 장 우리가 제기하는 제도론적인 ‘대상 b’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三脇康生, 「精神医療の再政治化のために」(『精神の管理社会をどぅ超えるか』 수록)을 참조. [본문으로]
- [옮긴이] 등반가, 산악가인 George Herbert Leigh Mallory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 Cf. Antonin Artaud, Ci-git, in Œuvres Completes XII, 1974, pp.75-100. [본문으로]
- [옮긴이] 렉튼이라고 읽는데,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 스피노자, 『윤리학』, 5부, 정리39, 비고. [본문으로]
- Cf. Gilles Deleuze, L’Epuise, Postface a S. Beckett, Quod, Minuit, 1992, p.97/ “이마주는 사라지는 것, 소진되는 것, 하나의 낙하이다. 그것은 그 높이에 의해, 즉 0 이상의 그 수준에 의해 그 자체로 정의되는 순수 강도이며, 이 강도는 그저 하강하는 것에 의해서만 그 수준을 묘사하는 것이다.” Cf. Gilles Deleuze, Felix Guattari, L’Anto-Œdipe, Minuit, p.395[이하 AOE로 약칭]. “모든 강도는 그 고유한 삶 속에 <죽음의 경험>을 초래하며, 또한 <죽음의 경험>을 포함한다. 아마 모든 강도는 마지막에는 사라지고, 모든 생성은 그 자신 <죽음의-생성>이 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 Cf. AOE, pp.393-398. [본문으로]
- 스피노자, 『윤리학』 4부, 정리67. [본문으로]
- 스피노자, 『윤리학』, 5부, 정리38, 정리와 비고, 정리 39, 비고를 참조. [본문으로]
- AOE, p.408. [본문으로]
- Cf. AOE, pp.384-385. “[분열분석의] 두 가지 작업은 반드시 동시에 이뤄진다.” [본문으로]
- Cf. AOE, p.394. “각각의 강도가 무한하게 많은 정도 아래서 증감하는 것으로서 어떤 순간에 산출되는 것에서 출발해서, 자기 자신 속에 <강도=영>을 비급하는 것은 강도에 고유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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