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자연’
ドゥルーズと 「自然」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청자 / 해설]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정황』 3기 4권 3호, 2003년, 176-189頁
── 일본의 들뢰즈론은 일반적으로 “문학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고, 그의 난해한 문체를 문제 삼거나 예술∙비평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가운데 고이즈미 선생이 쓴 『들뢰즈의 철학(ドゥルーズの哲学)』(講談社現代新書)은 “이과(理科)”적이랄까, 들뢰즈의 사고법과 근대자연과학의 방법론의 연관이 클로즈업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관을 축으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우선 첫 번째 점으로 들뢰즈와 라이프니츠의 관계를 꼽고 싶습니다. 책에서도 “보편수학”이 언급되는데요, 이것은 원래 라이프니츠의 개념이죠.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에 걸쳐 일본에서 라이프니츠 유행(boom)이 일어났을 때, “보편수학”이나 “보편기호학”이 화제가 됐습니다만, 이것과 당시 역시 주목받은 들뢰즈가 『주름』에서 전개한 라이프니츠론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요? ― 원래 관계가 있다면 하는 얘기입니다만.
고이즈미 : 들뢰즈가 “보편수학”을 꺼낸 배경에는 현대의 수리과학의 기초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들뢰즈는 자연물도 생물도, 보편수학에 의해 일의적으로 파악된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생명이나 생물의 시스템론과 모델론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만, 거기서는 “수학”의 역할이 매우 컸고, 거기에 사고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보편수학 mathesis uiversalis”은 데카르트가 복권시키고 라이프니츠가 계승한 구상입니다. 라이프니츠 자신은 보편수학에 대해 짤막하게 여러 가지를 쓰고 있습니다만, 자연물이나 생물을 포함한 존재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정리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보편수학 구상이 꿈에 그칠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만, 들뢰즈는 현대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짐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10년 전의 라이프니츠 유행은, 들뢰즈의 라이프니츠관과 그다지 접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EU통합 붐의 일환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때 얘기된 라이프니츠의 “보편성”은 법학자 라이프니츠의 보편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럽적 보편”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습니다. 상당히 이전의 러셀이나 루이 쿠트라(Louis Couturat)의 고전적 라이프니츠 연구 쪽이 풍부합니다.
──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씨는 최근 나온 『들뢰즈(ドゥルーズ)』(NHK出版)에서 라이프니츠에 대한 긍정적인 면으로서 “보편성”을 추구했다는 것, 부정적인 면으로서 “예정조화”로 끝났다는 것을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성”의 철학자인 들뢰즈는 “예정조화”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고이즈미 : 라이프니츠는 다면적이고 가능성으로 넘치는 철학자입니다. 들뢰즈는 그 가능성을 이용하면서 고쳐서 새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능세계”론에 관해서도, 이것은 스즈키 이즈미(鈴木泉) 씨가 해명하고 있습니다만, 들뢰즈는 꽤 초기부터, “가능세계는 타자로서의 여성이 표출되는 장이다”고 고쳐 읽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주름 pli”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이 속에 “접혀져 있다 = 암시[함축]되어 있다 im-pli-qué”는 것이 “펼쳐져 있다 = 해명된다 ex-pli-qué”는 것이 “생명의 발생”이나 “세계의 진전”이라고 읽혀집니다만, 이것뿐이라면 단순한 “전성(前成)”설이며, 쓸모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많은 사람들은 들뢰즈의 『주름』을 “전성”설적으로만 읽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름은, 작게 접혀진 현실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주름을, 공간의 왜곡이나 다양체의 곡률로 재파악해서 현대화, 대수화할 필요가 있다. 주름 개념이라 해도, 그것을 현대수학적으로 깊어지고, 생명이나 자연의 잠재성과 생성을, “후성(後成)”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장치로 가다듬는 것이 들뢰즈의 보편수학의 목표였으며,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생성변화”라고 기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러면 속류 무상(無常)관과 다를 바 없습니다.
── 라이프니츠의 “수학”과 “주름”은 반드시 정합성을 갖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들뢰즈가 그것을 해석에 의해 다소 무리하게 연결하고자 했다는 말인가요?
고이즈미 : 무한소라는 수학적 개념과 미소지각이나 미소표상과 주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을, 라이프니츠 자신에게 맞부딪쳐 보더라도, 명확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연구자도 그것들을 그저 나란히 늘어놓았을 뿐입니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를 바로크 철학자라고 보는 고색창연한 해석을 멋지게 복권시킨 셈입니다만, 실제로는, 라이프니츠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비판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라이프니츠의 무한소는 어디까지나 무한 표상에 불과하며, 헤겔보다는 덜하지만, 코시나 데데킨트가 달성하는 “극한” 개념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의미의 논리』나 『시네마』에서도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론이나 예정조화론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 들뢰즈는 “미분” 개념에서 “차이”를 도출하려고 한 것입니다만, 우리가 고등학교 수학에서 배우는 라이프니츠 당대 수준의 미분이라면, 하나의 값으로 예정조화적, 연속적으로 수렴되는 이미지이기에, 철학적인 “차이”와는 거리가 머네요. 대학에서 배우는 코시 이후의 수학이라면, 미분 속에는 불연속적인 것도 있으며, 결코 하나의 값으로 깨끗하게 수렴되어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금은 이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의 “차이” 개념은 라이프니츠 시대의 미분이라기보다는 더 현대적인 미분에 대응하는 셈입니까?
고이즈미 : 요는 대학 이후의 수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미분 방정식의 해(解)가 발산하고 분기하는 경우 등, 수학은 결코 얌전하게 길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규체역학으로 길들이려고 하고, 수치계산 시뮬레이션에 갖고 들어옵니다만, 이번에는, 기계에 설치된 수학이, 야만적이고 길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발판을 놓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라는 마이너과학입니다.
들뢰즈는 자연계에서도 생물계에서도, 차이가 제한없이 자라나서 현실화한다는 사실, 진화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변이가 점점 자라나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합니다. 그리고 차이를 산출하는 장을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 장치는 미분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를 생산하는 장이 현대의 수학에 의해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제 자신도, 차이를 발생시키는 장에 접근하려면 일상언어로는 안 되며, 해석학과 대수학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자주 사용되었던 “강도”라 해도, 들뢰즈 자신이 강도와 미분의 관계가 어렵다고 말했으며, 강도는 수학의 방정식에서 자유 변수(파라미터)입니다.
다만 동시에, 실제로 수학자∙자연과학자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철학자는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게다가 평가하는 쪽도 현대의 수리과학∙자연과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때, 말하고 싶은 것은, 최근의 철학∙윤리학은 수학∙자연과학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고,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회윤리도 경제학 비판도, 에코메트릭스의 횡포를 방치해두고 있습니다. 후생경제학 이후라고 말해도 좋습니다만, 환경경제학, 진화경제학, 블랙 숄즈 모델 같은 사이비 이론의 횡행에 대해 속수무책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분석철학이 철학 전체를 휩쓸었습니다만, 분석철학계의 과학론은 전혀 쓸모가 없다. 예를 들어, 현대자연과학에서는 자연법칙은 미분방정식으로 적히는 데도, 명제형식 밖에는 염두에 놓이지 않습니다. 전쟁부터 종전 직후까지, 수리철학도 생명철학도 꽤 높은 수준에 있었습니다만, 그 전통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미분”이라는 것은 인간이 “사물[物]”에 대해 점차 접근해갈 때에 나타나는 다양한 “차이”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거군요. 그렇게 하면, “미분”이란 주관적인 것이라는 게 되는 것 같습니다만, 선생은 그것을, 일상언어로 그대로 주관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그러면,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학의 언어로 엄밀하게 하나의 해답을 낼 수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주관적이라고도 객관적이라고도 단언할 수 없기에, 좀체 알기 어려워집니다만, “미분”은 “주체”인 “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다고 봐야 할까요?
고이즈미 : 수학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천사도 신도 풀지 못한다고 증명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생물과 자연물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면서 생성소멸한다. 그렇다면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문제에 대해, 주관적이라고 평가해도 객관적이라고 평가해도, 엉뚱해진다. 주관∙객관 도식은, 이런 곳에서 파산할 것예요. 들뢰즈는 자주, “식물은 빛을 지각한다”는 말을 합니다. 식물은 빛에 자극되어 광합성을 하는 방식으로 빛을 지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물에는 지각하는 “혼”이 있고, 빛의 “정동affection”이 있다. 그 식물의 지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초월론적 장을 표현하는 것은 보편수학뿐이며, 식물은 보편수학이 표현하는 빛의 문제를 풀면서, 초월론적인 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보편수학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주관”의 범위 안에 잡힐 리가 없으며, 보편수학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주관일리도 없다.
기존의 철학자가 말하는 주관은 결국 인간의 주관입니다. 현상학은 지각의 수동적 종합 아래서는, 즉시 휠레(hyle)가 온다고 믿는다. 인간의 주관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은 형상 없는 제일 질료라고 믿고 있다. 구제할 길이 없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거기에서, 현상학 이후의 철학은, 인간주관의 “한계”를 이러저러하게 밀어 올리고, “역설”을 만지작거렸다[당치도 않게 내세웠다].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빛을 지각하는 모습은, 인간에게는 알 수가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내질 뿐이다, 알았다고 한다면 물리학주의에 불과하다, 고 얘기를 끝내고 사고를 포기했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한계나 역설을 꿰뚫고 긍정적인 인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의를 몇 군데에서 하며, 칸트론에서의 부조화적 능력론 등, 그것은 그 나름으로 세련된 것입니다만, 그런 것을 좇기보다는, 우선은 소박한 유물론, 소박한 실재론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인간중심주의적 인식론을 일단 벗어난 곳에서부터, 철학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종언”을 단순한 공상으로 끝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철학사적으로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자주 한 쌍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마이클 하트도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태도는 다른 철학자에 대한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죠. 경건하다고 해도 좋을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전기(傳記) 부분도 포함해서 그다지 만지작거려지지 않았기에, 상당히 정중하게 기술되어 있네요.
고이즈미 : 들리즈에게는 스피노자야말로 사랑하는 철학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부정적으로 읽히기 쉬운 『윤리학』 「3부」의 정서론도, “외부”와의 “마주침”으로서 긍정하며, 「5부」에서 신에 대한 사랑으로 [높이 날아] 올라가는 곳에서도, 유보없이 긍정한다. 들뢰즈가 통째로 긍정하고 있는 철학자는 스피노자 정도입니다. 들뢰즈에게는 스피노자가 “혁명가”입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스피노자 붐이 있고, 스피노자의 정치사상가로서의 면이 강조됐습니다만,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은 그것과는 매우 이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스피노자를 형이상학자∙윤리학자로서 평가하고 있다.
── 보통의 철학 교과서라면,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범신론적인 것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신적인 “실체”의 일부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나온 “정동”이라 해도, 순수한 “외부”로부터 온다기보다는 대우주와 소우주가 공명하는, 예정조화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리네요. 그런 교과서적 이미지에서 보면, 들뢰즈는 꽤 이상하게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고이즈미 : “실체”와 “속성”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은, 이른바 범신론적이고 내부예정조화적인 이미지를 타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강조해도, 아무리 차이를 무한하게 반복하는 것이 실체라고 다시 말하더라도, 기껏해야 차이의 정치의 담론이나 다문화주의의 담론으로만 청취될 뿐이죠. 예전부터 생각하는 것인데요, 이것으로는 17세기 철학의 영향력impact은 전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는 “권리”가 “역능”이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굉장히 대단한 견해인데도 그 영향력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또한 스피노자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신체의 정동”이라고 잘라 말한다. 정치경제적인 이슈에 대해 분노하고 논하고 행동하는 것도 정동이라고 한다. 들뢰즈나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정치나 사회의 장면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통해 정동이 야기되고, 마주침을 하도록 꾀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감정에 의해 수동감정을 능동감정으로 전환하는 민중이 형성된다는 것만이 중요하며,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건을 그렇게 볼 수 없게 되고 있다. 그만큼 상징적인 것이나 르상티망에 얽매여 있다.
라이프니츠도 스피노자도, 생리적 수준에서 생기는 미세한 변용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수준에서의 변용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만, 두 가지 수준의 변용의 얽힘이라고 사건을 볼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근대철학과 들뢰즈의 사고방식은 체득할 수 없습니다. 철학 교과서는 그것을 왜소한 심신 문제로 파악할 뿐이며, 입구에서 글러먹었습니다. 사고의 동기부여를 모른다.
── 즉, ‘정념’이라는 형태로 신체적으로 생기는 것의 «원인»을 가능성으로서 탐색하는 가운데, 초월론적인 “실체”가 나오는 것이며, 그것을 현대인이 역전시키고, “실체”를 출발점으로, ‘정념’, ‘정동’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진부한 예정조화론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거죠.
고이즈미 : 실체의 보이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의 조건인 초월론적인 장(속성)과 식물의 경험의 조건인 초월론적인 장(속성)을 차이화하면서 생산하는 것이 실체라고 본다. 즉, 인간의 생존양식과 식물의 생존양식이, 생태-윤리적으로 차이화되는 방식이 분명해진다.
인간의 편에서 말한다면, 인간은 모종의 생물로서, 정동의 경합을 경험합니다만, 그 경험을 통해 주관이 세워진다. 그때의 원리를, 초월론적이고 경험론적인 장의 원리로서 파악하는 것이, 들뢰즈의 흄론의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주관성이 세워지는 곳에, 신념이나 정념이 몰려들고, 사람들은 그것에 구속된다. 그 속박을 이용하면서도 그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윤리의 핵심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편하게 살자”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일체의 현상을 보는 것은 꽤 어렵다. 그만큼 우리는 인격이나 주관성 같은 것에 쾌적하게 얽매여 있습니다.
── 최근, 화제가 된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서, 키워드로서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다중multitude”이 나오네요. 그들더러 말하라면, “다중”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정동”입니다. 그 스피노자 독해방식을 그들은 들뢰즈로부터 계승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런 형태에서의 “정동”론의 응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이즈미 : 나는 “다중”을 “구성된 힘potestas”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potentia”이라고 해석하는, 네그리나 발리바르 등, 스피노자연구의 2세대의 논의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리가 있기에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저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multitude를 다양체로 끌어들여 사용하는 일은 있어도, 저런 “포텐셜”의 의미로 사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에 정치적으로 판돈을 거는 것은 모종의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면 들뢰즈에게 스피노자가 “혁명가”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의 방식”에 있어서의 혁명이라는 게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어떤 “삶의 방식”일까요?
고이즈미 : 들뢰즈가 혁명을 말한다고 했다면, “노마드(유목민)”나 “푀플(민중)”이라는 말을 쓰겠죠. 네그리와 하트는 “지배자의 명령에 따를 수 없는 신체”, “자연에 무시하는 신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신체”를 긍정하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위치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공화주의라든가 자유주의라든가 민주제라고는 지껄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배 속에서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따를 수 없는 신체가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노마드적 인간이 있다. 들뢰즈는 그런 인간에게 기대를 건다. 다만 그것이 “구성하는 권력”으로서 세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지배를 불러들인다고 말한 게 아닐까. “혁명”이라는 말은 사용합니다만, 이미지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들뢰즈도 개별 이슈들에 대해 정치적 견해를 밝히긴 했지만, 그것과 철학적∙윤리학적 전망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들뢰즈는 보통의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관리사회론이 자주 거론됩니다만, 정치론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고, 뭔가에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관리사회 속에서 신체의 역능이 여는 새로운 지평을 생각하려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가타리와의 공저이기도 한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도, 자본해체론으로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고이즈미 : 그렇습니다. 자본이나 화폐에 관해, 두 개의 책에서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것보다, 자본제에 대항하는 것이 분열자분석을 간과해 왔다는 것이 중대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왜 이토록 매력적이냐 하면, 서두에 나오는, 잡동사니 기계의 소년이나 산책하는 광인, “도래하는 광인”의 힘에 감동했습니다. 그 책이 나온 70년대 초반에는, 반정신의학∙반임상심리운동∙장애인자립운동의 물결이 있었고, 당시는 그런 맥락에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들뢰즈는 그 뒤 “새로운 생명체”나 “새로운 그리스도”를 만들어내자고 호소합니다. 즉,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근본적으로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안 된다고 인정한 다음, 인간을 소재로, 생명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새로운 생명체로 변용시킬 가능성에 건다. “도래할 광인”에 기대를 건다. 그런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는 기존의 정치적 대결도식을 송두리째 뒤집겠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모두 생명론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란 진화하고 변신하고 새로운 생명체를 낳는 힘입니다. 들뢰즈주의자는 항상 생명을 생활로 잘못 읽어왔습니다. 만일 들뢰즈로부터 아무래도 정치적인 것을 읽어내고 싶다면, 생명론의 정치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바이오인포매틱스(생명정보학)이라는 분야에서는, 수학을 응용한 해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가짜 보편수학이며, 그것을 구실로 어리석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저런 종류의 것에 대해서, 생명의 잠재적인 힘을 표현하는 보편수학을 내걸고, 어떻게 대항하느냐가, 들뢰즈적 정치라고 긴급하게 생각되어야 합니다.
── 책에서도 썼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의 “생명윤리”라고 할 경우, 뭐가 윤리의 주체이고 객체인가라는 전제 자체가 기존의 윤리학과는 다른 것 같아요. 개인의 생명의 존엄을 제일로 생각한다는 입장에서, “개인=주체”를 절대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체=생명”이라는 관점에서 개인을 말소해버리는 것도 아니다. “개체”와 “전체”의 이항대립에 얽매이지 않는 “생명”의 존재방식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고이즈미 : 개인에 관해 생각하면, 아무래도 인격이나 주관성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의 한계입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인용하여,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라고 몇 번이나 말합니다. 들뢰즈주의자는 이것을 신체적 행위의 수준에서 이해할 뿐입니다. 정치적 행위나 사회적 행위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육체 수준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체와 전체의 이항대립에서는 파악되지 않는 생물로서의 인간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육체의 포텐셜을 끄집어내는 윤리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들뢰즈의 생명윤리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병을 놓고 생각할 때, 왜 인간에게는 병이 되는 힘이나 질병에서 낫는 힘이 있느냐고 질문을 제기한다. 그 힘을 긍정적으로 붙잡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 살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힘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인식되면, 생명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소동에 대해 다른 태도가 취해지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제3종의 인식입니다. 그 언저리는 누구나 어슴푸레하게 몸으로 알고 있겠습니다만, 좀체 손을 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뭔가 명확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서 점차 변용되어 가는 거네요. “미분” 대목에서도 화제가 됐는데요, 그것을 고정한 “주관”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려고 해도,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게 되네요. 하지만 현재의 생명윤리는 “주체”에 있어서 무엇이 올바른 해답인가를 일의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간다는 것입니까?
고이즈미 : 실천의 장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채로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위에서 우선은 들뢰즈처럼 스토아파의 윤리를 계승해보죠. 생로병사에 있어서, 자기의 몫과 운명의 몫을 정확하게 분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주체로서의 자기의 몫을 과대하게 추측하고, 그것을 둘러싸고 수다를 떨고 싶어집니다. 인간의 잘못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면할 수 없다. 해답을 원하고, 수다를 떨고 싶어진다. 안 그러면, 아마 할 수 없다. 그래서 동시에, 이론인식을 삶의 방식에 더하는 것입니다. 분자생물학의 진전에 의해 생로병사의 시각은 근본적인 변용을 강요당하고 있다. 줄기세포를 생각한다면, 기관이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쓸 수는 없다. 신경계나 면역계는 엄청난 전망을 열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메이저과학으로 회수되고 바이오산업에 의해 빼앗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이너과학의 이론적 탐구의 기쁨을 알았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 생명윤리라면 반드시 “자기결정권”과 “인폼드 콘센트(informed consent: 의사가 환자에게 진료의 목적·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여 납득시킨 다음 치료하는 일)” 얘기가 나오죠. 할 수 있는 한, 생명을 “주체”로서의 “개인”의 통제화에 집어넣으려 하는 발상이 근저에 있는 것인데요, 지금 하셨던 말씀에서 보면, 들뢰즈적인 생명윤리에 있어서, 그런 문제의 제기방식에 과연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이즈미 : 저는, 바이오기술을 추진하는 쪽도, 그것에 우려를 표명하는 쪽도, 생명의 포텐셜을 조작 가능하고 지배 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 한통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포텐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단편적인 정보의 교환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으려 하는 모습을 보면, 슬퍼집니다.
자기 결정론 비판은 겁내면서 조금씩 나왔습니다만, 생식의 문제에서 자기결정론은 결정적으로 파탄 났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생명체를 낳을 때, 자기결정론은 잘 안 팔립니다. 현재의 생식기술의 동향에서 보더라도, 기존의 틀에서의 생명윤리는 꾸려나갈 수 없겠죠.
── 근대의 윤리학이라는 것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최후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데리다는 결정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마지막에는 구태여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면서 “결단”한다는 것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들뢰즈는 그런 누락은 없는 것 같아요.
고이즈미 : 결단했다는 것으로는 대단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인간 주관에 의한 결정 등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들뢰즈는 결정하지 않는 쪽이, 방목해 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봅니다. 스피노자론에서도 그것을 논하고 있고, 자기 결정은 자유로운 주체라는 환상을 퍼뜨리고, 모종의 지배와 복종의 방식을 살아남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 스피노자는 “자유의 사상가”라고 붐이 일었을 때 자주 얘기됐습니다만, 들뢰즈의 관점에서 봤을 경우의 “자유”란 기존에 생각됐던 것과는 꽤 다른 것이 되겠네요. «자유로운 상태»를 이상으로 내걸고, 이를 위해 자기를 “해방”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신체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에 중점이 놓여 있는 겁니까?
고이즈미 : 그것이 스토아학파의 윤리입니다. 그 위에서, 17세기의 자유론은, “마음대로 한다”는 것뿐의 얘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릅니다. 의료의 현장에서 환자가 되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어렴풋이 알았다면, 그것을 좋아하도록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자유론을 얘기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마음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마음대로는 안 되기에, 법적∙공동체적 규제를 가해 계속 운운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결론내립니다. 이것에 철두철미하게 “좋아하는 대로 하면 되잖아”라고 하는 것이 17세기의 철학이며, 들뢰즈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이상으로, 자유에 관해 사고하는 의미가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기가 막히게 되지만, 기가 막히게 만드는 것은 이쪽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좋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짓을 해도 좋냐”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들뢰즈더러 말하라면, “나쁜 짓”을 해도 되거든요. 나쁜 짓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한다면 그것이 더 착실한 것입니다.
── 즉, “선/악”이라는 구별에서도 자유로워진다는 거군요.
고이즈미 : 실제로 정말로 자유롭게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의무나 규제와 한 세트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버리자는 것입니다. 위험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안전한 것입니다.
현재 자유주의자들은 “야만적인 폭력”에 떨고 있습니다. 새로운 단계의 문명화 작용에 대항하는 “야만”입니다. 그런 야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에서 “민족, 인종 환상에 얽매이는 것은 당연하다”며 불가사의한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환상에 홀려서 자유롭게 행동한다면, 그게 더 낫다는 것입니다. 전쟁기계라는 야만적인 폭력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도덕주의나 법적∙정치적인 것이, 야만적인 폭력을 조직화하고 있다. 국가와, 정치조직이나 종교조직이, 전쟁기계로서의 야만적인 폭력과, 문명화와 시민화에 대항하는 야만을, 폭력적으로 조직화하고 있다. 그런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야만의 제멋대로의 분출이야말로, 들뢰즈의 자유이죠.
[해설] 들뢰즈에게서의 “자연”과 “인간”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이번의 고이즈미 요시유키 씨와의 인터뷰의 중심적 주제가 된 것은 들뢰즈에 의한 근대적인 “인간/자연”관의 재독해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통상적인 철학사에서는, 데카르트 이후의 서양근대 지식의 기본적 틀은, “주관=정신 / 객관=자연”의 이분법이라고 한다. (순수) 주관인 “나”는 물리적인 “자연”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스스로가 회상하는 “관념들”을 매개로 해서만 «자연»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내” 속에 “대상”으로서 재구성된 «자연»은 “자연” 자체가 아니다. 나의 “내부”와 “외부”의 구별은, 내가 “주관”인 한에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 근대철학의 대전제가 되어 왔다. 헤겔이나 맑스는 이런 분열을 극복하려고 했으나, 결국 어떻게 “외부=물질”을 “주관=정신”의 지배권에 편입하는가(헤겔) 혹은 어떻게 “외부”를 “내부”에 객관적으로 반영시키는가(맑스)라는 이항대립적인 발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내부”와 “외부”가 깨끗하게 분리되어 버린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한, 이항대립을 회피할 수는 없다.
현대사상은 이런 이항대립적인 틀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이를 위한 유력한 열쇠로서 부상한 것이 메를로-퐁티의 “지각현상학”으로 대표되는 “신체”론의 계보이다. “신체”는 외적으로 보면 물질이지만, 거기서 생기는 다양한 지각이나 정동은 )무의식∙전의식 수준에서) “정신”의 “내부”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정신”은 «자신의 신체»의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외부”에 있는 “신체”의 존재방식에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현대사상은 “신체” 및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성적∙미적인 것을 실마리로, “주관/객관”의 이항대립과는 상이한 사고형태를 모색했다.
이런 신체론은 현대사상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데리다와 함께 현대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들뢰즈는 인터뷰에서 고이즈미 씨가 지적하듯이, 신체와 정동을 둘러싼 논의는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활약한 17세기가 현대보다 현실적actual이었다고 보고 있다. 이항대립적인 사고법에 아직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의 “신체” 주위에 생기는 다양한 정동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나와 자연의 관계에 관해 생각했다. 그것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사후적으로 돌이켜보면, “주관/객관”의 구분을 넘어서 신의 관점에 서고자 하는 신비주의, 소우주(=나)와 대우주(=자연)의 예정조화 같은 비합리주의적인 형이상학의 잔영밖에는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기존의 철학사에서도 신체 수준에서의 “정동”의 문제가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연결하는 “송과선”의 문제에 집착한 것이나, 『정념론』을 쓴 것은, 보통의 철학교과서의 데카르트의 항목의 말미에 일단 적혀 있다. 자세한 교과서라면, 라이프니츠가 우리의 지각에 생기는 “미소표상”(=미세한 것의 운동)에 관해 생각했다는 것에 대한 기술이 있다. 스피노자가 “실체”에 생기는 “정동”에 대해 논한 것도, 대개의 교과서에 언급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헤겔에게도, 신체적인 “수난Leiden”을 둘러싼 정동론적(스피노자적) 고찰이 있으며, 『경제학-철학 초고』의 맑스도 헤겔론이라는 형태로 “수난”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나름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철학사 전체의 흐름 속에서는 무시해도 상관없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로서 취급되기 일쑤였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로 “주권/객관”의 분리가 완성됐다고 본다면, 정동론은 이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는 쓸데없는 문제일 뿐인 것이다.
들뢰즈는 그런 근대철학사의 통설적인 견해에 얽매이지 않고 “신체”에 있어서 부상되는 «나»와 «자연» 사이의 긴장관계를,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텍스트로부터 소박하게 읽어내려고 한다. 흄을 논한 그의 교수자격논문 『경험주의와 주체성』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매우 쉽게 알게 된다. 인간의 «주관»이 외부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형태로 이미 성립하고 있다는 이항대립적 선입견을 갖고 『인성론』을 읽으면, 지각에 있어서의 “인과관계”는 “관습”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논의는 진부한 회의주의로만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내부/외부”의 경계선은 흄에 의해 자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 수준에서 카오스적으로 생기는 정념의 “관습적인 결합”을 통해 “내부”가 역사적으로 구성된다는 들뢰즈적 관점에서 보면, 흄의 포스트근대성이 돋보인다. 스피노자-흄-들뢰즈의 견지에서 보면, “나”라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자립한 폐쇄영역이 아니라 무정형의 “정념”과 함께 항상 “생성” 도상에 있는, “우연”으로 가득 찬 경계선 미확정의 영역이다. 가타리와의 공저인 『안티 오이디푸스』나 『천 개의 고원』에서 자아 성립 «이전»의 무의식=기계가 주제화되고 있는 것도,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신체”에 생겨나는 “정념”에 주목한다고 해도, “신체적인 것은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문학적∙«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고이즈미 씨는, 거기서 “수학”, 특히 현대적 미분∙적분학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미적분이라면, 일정한 값으로 «깨끗하게» 수렴되는 연속적인 함수밖에 나오지 않기에, 예정조화적 인상을 갖게 되기 쉽지만, 대학에서 배우는 더 엄밀하게 정의된 수학에서는, 그래프와 식으로 단순하게 표기할 수 없는 불연속함수나 복수의 변수를 지닌 함수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통 평면으로 취급하는 책상과 책의 표면에는 잘 보면 다양한 “주름”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으며, 그런 “주름”적인 것을 일일이 고려한다면, 물건의 길이와 면적을 산출하는 것은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통은 그런 “주름”적인 울퉁불퉁함은 무시하고, 단순화해서 계산하고 있지만, 자연계는 오히려 다양한 “주름”으로 가득하다. “주름”의 파악방식에 의해 (객관적인) “사물”을 보는 방식은 꽤 달라진다. 현대에서는 고도로 정밀화된 미적분에 의해, 17-18세기에는 수학과는 무관하다고 생각됐던, 생물∙생명의 세계의 «신비»가 서서히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해명되고 있다. 들뢰즈는 그런 현대수리과학과 신체∙정념론이 교차하는 지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그가 끊임없이 미적분을 언급하는 것은, 단순한 비유나 바로크로의 복고 취향이 아니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가 현대사상에 도입하려고 한 “프랙탈”도, 매우 대충 말하면, 자연계에서의 “주름”적인 불규칙성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학을 매개로 한 “자연-신체-정념”의 해명은,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가 “보편수학”이라는 표어 아래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17세기의 “보편수학”의 구상을, 현대에 있어서 더 구체적으로 계승하려는 것이다. 물론 현대수학에 대한 재접근에 의해 “주관/객관”의 이항대립 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면, 엥겔스-레닌적인 소박한 객관적 유물론의 우를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자연과학을 알아야 한다는 고이즈미 씨의 주장을, 아이러니라며 흘려듣고 넘겨버릴 수 없다. “주관/객관”의 분석 구조를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만으로는 철학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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