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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6 : 질 들뢰즈

히로세 코지, <들뢰즈와 시몽동 ―개체화의 작용에서 아나키한 초월론적 원리로>

by 상겔스 2017.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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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시몽동

―개체화의 작용에서 아나키한 초월론적 원리로


* 출  처 : 『情況』 제3기 제4권 제3호

* 글쓴이 : 히로세 코지(廣瀬浩司)

* 서지정보 : http://iss.ndl.go.jp/books/R000000004-I6564888-00


들어가며

“주체 뒤에 누가 올 것인가?”―이 물음에 답하는 형태로 쓰인 소론 「철학적 개념」에서 질 들뢰즈는 여태까지의 주체의 기능은 ‘보편화’와 ‘개체화’였다고 말한다.1) 보편적인 ‘나’(je)와 개체적인 ‘자기’(moi)라는 고전적 주체의 두 측면이 항상 결합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나, 흄에서 칸트를 경유해 후설에 이르는 주체의 철학은 이 두 가지 측면의 갈등과 그에 대한 해결책 제시의 역사였다.

들뢰즈는 이 ‘나’의 보편성을 ‘전개체적인 특이성’으로, ‘자기’의 개체성을 ‘비인칭적인 개체화’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글에서는 이 개념들의 의미에 관한 일단(一端)을 명확하게 할 것인데,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는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개체화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탐구가 있다.

물론 개체화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온 ‘질료형상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개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논의를 단서로 삼아 ‘개체화 원리’에 대한 물음, 즉 개체적인 실체를 개체이게 하는 원리에 대한 물음이 어떻게 하여 둔스 스코투스의 ‘존재의 일의성’,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 스피노자의 ‘양태론’, 그리고 니체의 ‘영원회귀’로 계승되었는가를 추적하는 존재론적 논의가 들뢰즈의 초기 사상의 핵심을 형성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2)

하지만 여기에서 검토하고 싶은 것은 철학사적인 계보에서의 개체화론이 아니라 들뢰즈에게 직접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질베르 시몽동의 개체화의 사유와 들뢰즈가 맺는 관계이다. 1924년에 태어난 질베르 시몽동은 ‘기계학’mechanology을 전개한 기술론의 고전인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태에 관하여』(1964)로 알려져 있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되었던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발생』(1964)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질료형상론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개체화의 작용opération’을 기술성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사고했다.3)

이 중에서도 들뢰즈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후자의 개체화론이다. 들뢰즈는 대부분의 저작, 특히 『차이와 반복』,4) 『의미의 논리』에서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참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미의 논리』에서 시몽동은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이론가로, 또 ‘초월론적인 것’에 관한 사고를 쇄신한 사상가로 소개되고 있다.5) 그리고 위에서 서술한 ‘개체화’나 ‘특이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들뢰즈가 자신의 것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문제적인 것’problématique, ‘변조’modulation, ‘잠재적인 것virtual의 현재화(顯在化, actualization)’라는 중요한 주제는 모두 시몽동의 것이며, 또 『시네마』 2권에서 제시된 ‘결정(結晶) 이미지’에 이르러 전개된 ‘결정’의 생성에 관한 고찰, 게다가 ‘막(膜)’이라는 ‘위상학적 표면’에 관한 고찰 등도 시몽동에게서 대개 그대로 차용된 것이다.

『차이와 반복』(1968)이 출판되기 약간 전인 1966년, 들뢰즈는 위에서 언급한 시몽동의 개체화론에 대한 서평을 썼다.6) 이 글에서는 이 서평을 실마리로 하여 시몽동과 들뢰즈 이 두 사람의 공통 테마를 확인한 후에, 『차이와 반복』의 들뢰즈가 그것을 ‘가역적이고, 아나키적이며, 노마드적인 원리’로 첨예화/급진화하고 있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 의미를 검토한다.


질료형상론 비판

시몽동은 개체의 실재성을 설명하는 데에는 두 개의 전통적 입장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원자론적 실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질료형상론이다. 하지만 시몽동에 따르면 두 입장은 모두 ‘이미 구성되어 있는 개체’에 존재론적인 우위를 부여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고 말한다.(IG, Introduction)

원자론적 실체주의는 복합체의 성립을 설명하기 위해서, 복합체를 결합하는 확고한 원리로서 개체화의 원리를 요청한다. 다른 한편, 질료형상론도 그것이 질료든 형상이든 간에, 이 둘에 개체화의 원리를 놓지만, 개체화는 단순히 이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두 입장 모두 ‘이미 구성된 개체’로부터 출발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개체화의 원리’를 탐구한다. 그리고 이 원리를 개체화의 ‘이후’(원자론적 실체주의)나 ‘이전’(질료형상론)에 상정하기 때문에 이 두 입장은 개체의 ‘생성’의 작동을 파악하는데 실패해 버리고 만다.

반면 시몽동은 이미 구성된 개체로부터 출발하는 대신 ‘선(先)개체적인 것’으로부터 ‘개체’를 생성시키는 ‘개체화의 작용’에서 출발할 것을 제창한다. 이 개체화의 작용은 질료와 형상의 대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공통의 작업으로서만 서술된다.

우선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시몽동이 특히 질료형상론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거론하고 있는 예는 벽돌의 제작이다.(IG, 38~43) 벽돌이라는 ‘개체’의 성립을 주형이라는 ‘형상’과 점토라는 ‘질료’의 결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전적인 사고를 내부로부터 해체하기 위해 시몽동은 이 기술적인 모델을 상세하게 분석하면서 질료와 형상 사이에 있는 매개적인 작용을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이 예는 시몽동의 기술론 중에서도 가장 소박한 것이자, 이른바 ‘질료형상론’과 타협했던 논의이지만, 들뢰즈=가타리가 나중에 자세히 분석하고 있는 것이기에7) 이를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자.

시몽동에 따르면, 벽돌이라는 하나의 개체를 순수한 형상(주형)과 순수한 질료(점토)의 결합의 결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실제로는 주형이든 점토든 둘 다 세심한 정성을 들여 준비된 것이며, 이 두 가지 계열이 어떻게 하면 잘 매개되게끔 할 것인가에서 ‘기술성’이 발휘된다. 우선 점토의 경우, 틀에 넣어 잘 굳게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균질과 습기 등이 갖추어져야만 한다. 질료는 단순히 형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인 형상’으로서, 개체의 성립을 능동적으로 준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준비를 가능케 하는 것이 질료에 축적되어 있는 ‘잠재적 에너지’potential energy라고 불리는 것이다.

다른 한편, 형상인 주형의 경우, 이 점토에 잠재되어 있는 에너지를 잘 ‘현실화’actualiser시키게끔 만들어져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 바깥으로부터 형상을 내리누르는 것이 아니라, 점토가 품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잘 ‘한계짓고’limiter, ‘내적인 공명’이 생겨나게끔 해야만 한다고 시몽동은 말한다. 점토의 내부에서 서로 다투듯이 경합하고 있는 에너지를 평형상태로 변환시키는 것처럼 ‘경계’limite를 수립하는 것이 주형의 역할이다. 바꿔 말하면, 형상이란 질료의 수준을 변환시키는 것이며, 그 수준 변환 자체가 개체화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개체의 성립을 질료와 형상이라는 두 항의 결합으로 간주하는 대신, 에너지적 조건과 위상학적 조건의 교환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전통적으로 질료라고 불리는 것은 에너지적 조건이다. 그것은 여러 힘들이 서로 다투는 과잉의 상태로서, 잠재적으로 개체의 생성을 준비한다. 그에 반하여 형상이란 질료에 의한 형상의 선취를 재차 받아들여 에너지를 현재화시키고, 거기에 일반적인 평형상태를 성립시키는 ‘위상학적 경계’이다. 그 경계는 질료를 어떤 틀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잠재적 에너지를 ‘변조’시킨다.8) 질료와 형상간의 차원을 변조하는 것이 개체화의 작용인 것이다.



준안정적인 시스템과 그 ‘경계’

시몽동에 따르면 질료형상론을 비롯하여 여태까지의 사유가 개체화의 작용을 충분히 사고할 수 없었던 것은 평형상태를 사고하려고 할 때조차도 ‘준안정’métastable이라는 개념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안정’이란 에너지 확립이 이미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데도 겨우겨우 이전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과포화 상태를 말한다. 종래의 사유는 안정과 불안정, 평형과 비평형을 양자택일적으로 사고해 왔기 때문에 개체화의 작용을 포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질료형상론과 타협했던 벽돌의 예가 아니라, 역시 들뢰즈가 자주 차용하고 있는 ‘결정화(結晶化)’의 예를 검토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결정이 처음으로 생겨나기 전의 용액은 에너지론적으로는 과포화상태, 즉 준안정상태에 있다. 하지만 결정의 생성은 이 에너지론적인 조건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따라서 ‘핵’이 도입되어야만 한다. 이 최초의 불연속성의 도입이 기점(起點)이 되어 결정이라는 개체가 서서히 생겨나게 된다. 개체화는 개체와 그 매체의 끝없는 교환으로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결정이라는 개체의 생성은, 항상 그 ‘경계’에서 행해진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몽동은 개체란 ‘유한한 존재’étre limité(IG, 91)이라고 말한다. ‘유한한 존재’란 내부에 잠재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한정시켜 버리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질료형상론에 따르면, 개체의 성립은 질료와 형상의 순간적인 마주침으로서 설명되며, 질료는 형상 속에 밀어넣어져 버린다.

이에 반하여 ‘한계지어진 존재’로서의 개체화의 작용에는 원리적으로 끝이 없다.9) 예를 들어 결정의 무제한적인 성장에 있어서는, 생성의 결과가 다음 생성의 핵으로 된다. 이것은 중계relay처럼 연결되어 있고, 더욱 더 많은 양의 부정형적인 에너지를 동화시켜 간다. 이처럼 개체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이른바 ‘구성적’이고 ‘능동적’인 관계 자체이다. 그것은 외부를 한없이 개체화하는 동시에 그 부분적인 성과로서 내부를 점점 더 복잡화하게 된다. 개체란 연속적인 에너지론적인 조건(용액)과 불연속에서 생성하는 시스템(결정)의 무한한 교환의 장인 것이다.10)

이것을 시몽동은, 개체는 ‘그 자체의 경계에서 구성되며, 그 자체의 경계에서 존재한다’고 표현한다. 개체는 ‘질료’와 ‘형상’이라는 두 항의 결합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의 경계가 우선 능동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개체는 그 작동의 매개자 역할을 담당한다. 개체화란 경계의 활동 자체인 것이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개체화란 단독적인 개체의 성립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와 그 ‘환경’의 짝짓기couple의 성립이다. 이러한 환경을 시몽동은 ‘연합환경’11)이라고 부른다. 연합환경이란 어떤 개체가 성립할 때, 동시에 그 개체에 포함되어 있는 전개체적인 분야인 것이다.

이 전개체적인 분야는, 한편으로는 개체화의 조건 자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체에 선행하여 미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에 의해 발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의 관계는 순환적이지만, 바로 이러한 자기순환을 매개로 개체는 자신의 환경을 갱신하고 외부와의 새로운 관계를 창설한다. 개체의 그 자신에 대한 관계가 동시에 새로운 외부와의 관계로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체화의 작용이란, 개체가 자신의 조건이나 규범을 스스로 창출하는 것과 같은, 자기매개적인 동시에 발명적인 작용으로 간주된다. 이것을 시몽동은 개체란 이러한 능동적인 관계의 ‘무대’에서도 ‘동작주(動作主)’이기도 하다고 표현한다.(IG, 60) 개체화의 작용이란 전개체적인 지평과 이미 개체화된 지평을 내적으로 매개하고 그리하여 개체화라는 ‘사건’을 일으키게 하는 작용인 것이다.



불균등성disparité의 근원성

결정(結晶)이란 준안정적인 시스템이다. 이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특징에 관해 들뢰즈는 시몽동을 따라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첫 번째로는 ‘불균등성disparité’의 근원성이라는 문제이다. ‘불균등성disparité’, ‘불균등화disparation’, ‘불균등을 초래하는 것[계속되는 불일치, dispars]’라는 일련의 용어는 『차이와 반복』의 기본용어 중 하나이다.

시몽동에 따르면 개체화는 시스템 내의 ‘불균등성’을 실마리로 발동한다. 준안정적인 시스템은 적어도 두 개의 커다란 차원이나 수준 사이의 ‘불균등화’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이것이 개체화의 동력이 된다. 이 ‘불균등화’를 들뢰즈는 ‘그 자체에 있어서 차이’[즉자적 차이, différence en soi]라고 다시 취급한다. ‘그 자체에 있어서 차이’란 시스템이 품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라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잠재력의 내적인 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들뢰즈는 이 ‘즉자적 차이’를 ‘내포량’ 개념과 관련짓는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5장에서 시몽동 등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논하고 있는 ‘심화’profondeur의 예. 원래 ‘불균등성’이라는 시몽동의 용어 자체는 이른바 ‘심원한 지각’이라는 심리학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IG, 221, n. 30) 가령 좌우의 눈에 비친 부조화의 망막상이 통합되어 부조relief가 입체적으로 지각되는 예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심화란 지각 영역의 불균등성이 해소될 때 보여지는 것이다.

고전적으로는, 심화된 지각은 대상과의 ‘거리’, 그 외관상의 크기, 좌우의 눈에서 본 각도의 차이, 지각 분야의 질감의 차이로부터 ‘설명’된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그러한 설명에서는 ‘심화’가 연장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이것에 대해 들뢰즈는 일찍이 메를로-퐁티가 『눈과 정신』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심화를 연장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첫 번째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세 번째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연장의 매트릭스[matrix, 모체(母體)]’이며, 이로부터 연장이 출현하는 궁극적인 차원이다.

이미 메를로-퐁티가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우리들이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는 사물을 지각할 때, 그 사물은 일정한 크기로 지각되지만, 그때 우리들은 ‘외관상의 크기’의 변화 등으로부터 거리의 변화를 계측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선 깊이와 두께를 지닌 공간이 있고, 거기에서 사물은 측량가능한 ‘외관상의 크기’를 초월한 ‘절대적인 크기’로 우리 앞에 다가오거나 멀어지기도 한다. ‘거리’나 ‘크기’는 그 추상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 세잔이야말로 이러한 ‘절대적인 크기’의 캔버스에서의 공존을 그린 화가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는 깊이는 외관상의 크기로부터 계산될 수 있는 대상과의 ‘거리’로부터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선 깊이 자체가 내부에 여러 가지 ‘거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혀진’(impliqué) 거리가 ‘외관상의 크기’로서 펼쳐지기도(expliqué) 하며, 공간의 ‘질’로서 지각되기도 하며, 연장으로서 전개된다고 들뢰즈는 생각하는 것이다.(DR, 297/346)

깊이의 공간이란 이러한 여러 가지 거리나 관점이 경합하고 ‘불균등한disparité’ 장이다. 이 상호간에 불균등한 것이 내적으로 공명하며, ‘연장’으로서 스스로를 펼치게 될 때, 어떤 하나의 깊이가 지각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불균등이란 ‘출현’의 감추어진 조건이다.


“우리들이 <불균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한하게 이중화하고 무한하게 공명하는 차이의 상태이다. 불균등성, 즉 차이 또는 내포성=강도(내포성=강도의 차이)는 현상의 충족이유이며, 출현하는 것의 조건이다.”(DR, 287/334)


불균등이라는 내포성은 ‘출현하는 것의 조건’이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경험적으로는 확실하게 지각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를 감추면서도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깊이란 ‘지각될 수 없는 것’이지만 ‘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것 자체는 결코 그것으로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들은 지각을 통해서만 깊이를 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나 내포량은 ‘감성에 고유한 한계’(DR, 305/354-355)를 형성한다. 이 ‘감성의 한계’가 어떠한 ‘초월론적인’ 의미를 지니는가는 7절에서 검토하게 될 것인데, 그 전에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두 번째 특징을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전개체적인 특이성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두 번째 특징은 전개체적이면서도 특이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개체적이지는 않으나 특이하다는 것, 이것이 전개체적인 존재이다.

시몽동에 따르면 이 ‘전개체적인 특이성’은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내적 변환과 관련된다. 원래 잠재적 에너지라는 것은 실체로서 선재(先在)하는 카오스가 아니다. 그것이 준안정적인 시스템에 있어서 현재화하는 것은 시스템 전체의 수준이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임계점에 있어서만 그럴 뿐이다.

바꿔 말하면, 잠재적 에너지의 ‘현재화’라는 사건은, 그것이 시스템의 어떤 특이한 점에 있어서 국지화localise되는 것과 동시적이다. ‘개체는 특이성으로부터 출현한다.’(IG, 60) 따라서 진정한 개체화의 원리는 ‘지금 여기’에 있어서의 특이성 자체인 것이다.

동일한 것을 ‘전개체적인 것’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개체란 전개체적인 것이 이중화하며, 이것에 대한 비틀기를 산출하며, 이른바 자기 자신을 내부로 말려들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변용시키는 특이한 매개적 장에 다름 아니다. 개체화라는 ‘사건’이 산출하는 불연속성은 시스템 내부의 균열을 낳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이면인 전개체적인 것을 현재화시키며 시스템 전체를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개체화란 시스템의 ‘내적 차이’를 전개체적인 지평으로 매개하는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전개체적인 지평은 항상 특이성과 결합되어서만 나타난다. 이것이 ‘전개체적인 특이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리라.

이것을 받아들여 들뢰즈는 여러 곳에서, 잠재적인 것은 ‘차이화=미분화(différentié)이지만, 이화=분화(différencié)하는 것’(DR, 276/323)이라는 명제를 반복한다. 베르그송의 독해에서 말해진, 이처럼 잘 알려진 명제에 관해 여기에서 깊게 파고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12)

그 대신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의 사유에서는 전개체적인 것의 존재론적 탐구와 시스템론적인 발상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전개체적인 것은 실체로서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변환과의 관계에서만 특이성으로서 현재화한다.

거기에서는 이 ‘전개체적인 것’에 어떠한 위치를 부여하면 좋을까? 여기에서 시몽동이 도입하고 『차이와 반복』이나 『의미의 논리』의 들뢰즈가 자신의 것으로서 상세하게 전개하는 것이 ‘문제적인 것’이라는 개념이다.


문제적인 것problomatique과 기호

들뢰즈에 따르면 ‘문제적인 것’이란 인식이 중단된 상태에서도 그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념의 고유한 대상’이자 객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3) 이 절에서는 이것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시몽동에게 이 개념이 도입된 것은, 예를 들어 생물이 외부 세계의 갖가지 문제에 직면할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신체를 통합과 분화를 반복하면서 행동을 변용시켜 나가는 과정을 기술하기 위해서이다. 시몽동에 따르면 이것은 ‘적응’이나 ‘학습’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오히려 그것은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불균등성disparité’을 출발점으로 하여 생물이 불균등성을 해결하는 새로운 수준을 창설하고 내부와 외부에 ‘내적인 공명’을 수립하려는 과정으로 생각되어만 한다. 이것은 적응이나 학습이 아니라 ‘삶이라는 구조적인 개체화에 참가하는 것’(IG, 207)이다. 개체화 자체가 생물의 신체나 행동의 통치와 분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오히려 개체화란 통합과 분화가 동시에 행해지는 역접적인 작용이다.

여기에서 시몽동이 배격하는 것은, 예를 들어 게슈탈트 심리학의 ‘좋은 형태’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긴장 완화에 의한 평형상태의 확립이라는 모델이다. 개체화 과정에서는 긴장이 결코 해소되지 않으며, ‘불균등’은 결코 ‘종합’되지 않는다.

깊이 있는 지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좌우의 망막상의 ‘불균등’은 지각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깊은 지각의 성립은 이러한 좌우 망막상의 ‘종합’이 아니라 양자가 상호 계속 어긋나면서 내적으로 공명하는 새로운 준안정적인 시스템의 창설에 다름 아니다.(IG, 203-9) 마찬가지로 생물의 발달과정에서도 불균등이나 긴장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행동이 가능한 긴장의 시스템을 발명하게끔 동기를 부여한다.14) 이런 의미에서 ‘문제적인 것’은 주체적인 정지상태가 아니라 개체화의 ‘객관적인’ 조건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적인 것’이 ‘객관적인 의미’의 출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적인 것의 개념은 새로운 의미의 이론을 요구한다.

시몽동에게 ‘의미’의 문제는 당시의 사이버네틱스의 정보이론을 채용하여 고찰되었다. 오늘날 이것을 자세히 검토할 필요는 없지만, 여기에서도 시몽동은 ‘불균등’의 개념을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불균등이란 예를 들어 신호를 기계로 수신할 때, 보내진 신호와 수신기에 이미 포함된 형식(=형상)과의 불균등이다. 정보란 서로 불균등한 두 개의 요소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수립하는 특이성이다. 주형과 점토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주형을 갖춘 형상과 점토의 분자가 어긋난 결과,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생성할 때, 거기에 정보가 개입한다. 또한 깊이 있는 지각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좌우 망막상의 불균등의 해결로서, 어떤 깊이의 지각이라는 정보가 지각 공간의 의미로서 확정된다.

따라서 정보란 특이성 자체이며,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의 변환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시스템 내의 이질적이고 과잉된 요소로서 나타난다. 또한 그것은 ‘관계적’인 것이기도 하며, 시스템 내의 계열들의 ‘사이’에서 출현하며, 그 사이에는 ‘내적인 공명’을 수립하여 시스템을 재조직함으로써 ‘의미’로서 고정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기호’라고 부르는 것은 확실히 시몽동의 의미의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도입된다. 그것은 시스템 내의 계열 간에 ‘내적인 공명’을 수립하는 것인 동시에, 전개체적인 것이 특이한 장에 있어서 현재화할 때에 일어나는 ‘섬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은 ‘신호=기호’의 시스템에 있어서 번득인다. 우리들이 신호라고 부르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이질적인 계열, 커뮤니케이션 가능한 두 가지 불균등한 차원에 의해 구성되며, 치장되는 시스템이다. 현상이란 하나의 기호의 것, 즉 불균등한 것의 커뮤니케이션 덕분에 시스템에 있어서 번득이는 것이다.”(DR, 286/333)


‘기호’란 관계적인 것으로서 현상하는 특이성이다. 그것은 상호 이질적인 계열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설립인 동시에, 전개체적인 것이 섬광처럼 반짝이고 나서 꺼져간다는 ‘사건’의 기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개체적인 것은 특이성을 기호로서 발신함으로써 시스템을 변환한다.


바닥-없음(sans-fond)과 추상적인 선

들뢰즈는 지금까지의 서술에서, 기본적으로 시몽동의 개체화론을 뒤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시몽동 이상으로 불균등의 작용의 존재론적인 근원성을 강조하며, 그것을 ‘개체화 과정과 동시적인’ ‘초월론적 원리’로까지 끌어올린다.(DR, 56/72) 그것은 개체화의 작용을 모든 ‘유사’나 ‘유비’로부터 분리하여 “모든 것이 불균등에 토대를 둔 세계, 모든 것이 무한으로 울려 퍼지는 여러 차이의 차이에 토대를 둔 세계”(DR, 311/361)를 해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학적 관점으로 기운 시몽동의 사상에는 부재하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깊이 있는 지각의 예로 돌아가자. 내포량으로서의 깊이란 ‘지각될 수 없는 것’임과 동시에 ‘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감성에 고유한 ‘한계’를 형성하는 현상의 근거였다. 들뢰즈는 이 경험적으로는 볼 수 없는 한계를 ‘볼 수 있게’ 함으로써, ‘감각될 수 있는 것의 존재’에 다가서고자 한다.

그 때문에 필요한 것은 이 ‘한계’로서의 ‘내포량’을, 이른바 그 장소에서 직접 파악하는 초월론적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때 ‘경험론’은 ‘초월론적이 된다.’ 여기에서 도입되는 것이 유명한 ‘초월론적 경험론’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불균형으로 촉진된 사유의 운동으로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에 주의를 해야만 한다. 경험론은 이른바 그 현장에 있어서 초월론적인 것으로 생성한다.


“감각될 수밖에 없는 것, 감각될 수 있는 것의 존재 자체, 즉 차이, 포텐셜이라는 차이, 질적으로 잡다한 것의 이유로서의 내포량=강도라는 차이, 이것을 우리들이 감각될 수 있는 것 속에서 직접 파악할 때, 분명히 경험론은 초월론적으로 되며, 감성론은 필연-당연한 학문 분야가 된다. 현상이 번뜩이고, 기호로서 전개되는 것은 … 확실히 차이에 있어서이다.”(DR, 80/99-100)


경험론이 초월론적인 것으로 될 때, ‘깊이’ 자체가 ‘그것 자체로서 전개한다’(DR, 367/425)고 들뢰즈는 말한다. 한편으로는 깊이는 단순히 ‘연장’의 배후에 있고 ‘출현’을 가능하게 한 감추어진 원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것 자체로서 전개’할 때, 그것은 모든 개체성을 해체해 버릴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바탕’(fond)이 아니라 ‘바탕-없음’(sans-fond)으로서 나타난다.

‘바탕-없음’이 그것 자체로서 전개할 때, 그것은 결코 ‘형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개체화하는 것 사이에 미끄러져 들어가며, 우리들의 지각 시스템을 파괴한다. “그것은 거기에 있으며, 우리들을 응시하지만, 눈을 갖고 있지 않다.”(DR, 197/236)고 들뢰즈는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초월론적 원리’는 더 이상 단순히 ‘출현하는 것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형적이며 아나키적이며, 노마드적인 원리’(DR, 56/72)로 된다. 그것은 개체화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파괴한다. ‘바탕-없음’이 전개될 때, 그것은 질료와 형상이라는 가면을 쓰면서 모든 수준을 횡단하여 그것을 결합시키면서 재편성한다.

그 때 ‘불균형’이라는 ‘그것 자신에게 있어서의 차이’는 ‘감성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감각해야만 할 것을 부여하며 과거 자체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더욱이 사고를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원리가 된다. 바로 그렇기에 특이성 자체로서의 ‘정보’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해석을 재촉하면서 항상 스스로를 변용시켜 가는 ‘기호’로 바뀐다.

이것은 중대한 귀결점을 포함하고 있다. 앞의 논의에서는 개체화는 어디까지나 질료와 형상 사이, 또는 상이한 수준이나 계열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으로서 기술되어 왔다. 마치 일반적이고 형식적인 개체화의 분야 일반이, 여러 가지 수준이나 종에서 작동하고 있는 듯이 기술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수준 사이의 계층구조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개체적인 것’에서 ‘개체적인 것’을 경유하여 ‘초개체적인 것’에 이르는, 새로운 계층구조를 날조해 버릴 위험을 품고 있다.15)

하지만 오늘날 ‘바탕-없음’이 그것으로서 전개할 때, ‘초월론적 원리’는 여러 가지 수준에서 개체화의 작용을 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제 여러 가지 수준에서의 개체화의 작용 등은 메아리처럼 서로 번갈아가며 부르며, 모든 수준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건’(Evénement)으로 수렴한다.16) 그 때 ‘초월론적 원리’는 단순히 수준의 ‘사이’에서 작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그 때마다 ‘전체적이고 전체화하는 것’(totale et totalisant)으로 된다.

마찬가지로 ‘특이성’이나 ‘문제적인 것’도 그 의미를 변용시킨다. ‘바탕-없음’이 그 자체로서 전개할 때, ‘문제적인 것’은 단순히 특이성이나 그 계열 사이에 ‘내적인 공명’을 촉진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다. 각각의 특이성의 계열은 다른 특이성의 계열에 있어서 ‘반복’되며, 각각이 ‘상호 간 응축된다.’

이리하여 ‘그것 자체에 있어서의 차이’는 들뢰즈의 다른 하나의 테마인 ‘반복’과 접속한다.


“반복이란 무수한 특이성을, 항상 반향 속으로, 공명 속으로 투척하는 것이다. 이 반향, 이 공명에 있어서 각각의 특이성은 서로 다른 분신이 된다.”(DR, 257/304-305)


이 ‘반향’에 있어서 ‘특이성’은 더 이상 하나의 ‘문제적인 것’으로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물음’(question)에 있어서 공존한다. ‘물음’이란 유일한 사건에 있어서 갖가지 문제 속에 어떤 것을 배분하는 ‘존재론적인’ 것이며, 항상 새로운 문제화의 분야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들뢰즈는 확실히 ‘반복’의 테마를 도입함으로써 ‘깊이’를 ‘바탕-없음’에, ‘정보’를 ‘기호’에, ‘문제’를 ‘물음’에 접속한다. 그리하여 그는 시몽동의 ‘휴머니즘’에 잔존해 있는 계층론적인 발상마저 내던지고, “일체가 불균형에 토대를 둔 세계”를 구상하게 된다.17)

앞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주체 이후에 누가 올 것인가?” ― 들뢰즈가 ‘표상 = 재현전화’라고 부른 전통적인 주체(‘보편성’과 ‘개체성’)는 이 ‘바탕-없음’을 단순히 ‘차이 없는 보편’, ‘차이 없는 암흑의 문턱’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바탕-없음’의 ‘공포와 매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나’라는 형상과 ‘자아’라는 질료에 개체화의 작용을 얽어매고자 한다. 이리하여 ‘인칭적 개체성’과 ‘개체적 특이성’이 필요하게 된다.(DR, 354/411)

“주체 이후에 무엇이 올 것인가?” ― 이 물음에 들뢰즈가 ‘비인칭적 개체화’와 ‘전개체적인 특이성’이라고 답할 때,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자기를 다수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약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 ‘더 이상 자기도 나도 없는 별종의 영역’에 이르는 것이다. 거기에 있어서 ‘개체화의 카오스적인 지배가 시작된다.’(DR, 332/385) ‘자기’와 ‘나’란 개체화에 의해서, 그리고 개체화에 있어서 그때마다 새로운 ‘개체화하는 요인factor’(아나키적인 초월론적 원리)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사유는 이 ‘바탕-없음’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질료형상론의 비판의 철저화의 끝에서 들뢰즈가 발견한 것은 ‘추상적인 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질료와 형상의 커플couple은 한정의 메커니즘을 기술하기에는 대체로 불충분하다. … 형상, 질료와 그 결합의 충족이유로서 힘과 토대의 상보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이미 하나의 진보이다. 하지만 더욱이 깊이 놀라야 할 것은 추상적인 선과 바탕-없음의 커플이다. 바탕-없음은 질료를 해소하고, 살이 붙은 형상을 해체한다. 사유는 순수한 한정으로서, 추상적인 선으로서, 이 비한정적인 ‘바탕-없음’에 직면하야만 한다.”(DR, 353/409)


‘바탕-없음’에 직면한 ‘추상적인 선’이 왜 ‘선’이라 불리는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것은 ‘능동적인 경계’(시몽동)가 ‘조형적이고 아나키적이며, 노마드적인 원리’로 변화했다는 것이 어쩌면 확실할 것이다. 들뢰즈는 이후 이 ‘추상적인 선’을 여러 가지로 변용시키는데, 예를 들어 『푸코』론에서는 권력에 선행하고 그것을 변동시키는 ‘저항의 선’이나 ‘야생의 특이성’으로서의 ‘생명의 선’ 등에 관해서 말하게 된다.18)


마치며 ― 들뢰즈의 기술론을 향하여

지금까지 들뢰즈의 시몽동의 개체론의 해석을 검토함으로서 명백하게 된 것은 들뢰즈가 시몽동의 ‘전개체적인 특이성’의 현재화로서의 ‘개체화의 작용’이라는 사고방식을 기본적으로 이어받으면서 개체화를 가능하게 한 초월론적 원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니체=클로소프스키적인 ‘반복’의 사고에 접속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물어야만 할 것은 이러한 방향만이 유일하게 해방적인 방향인가 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시몽동 독해의 최대 특징은 그 개체론에서도 이미 명백하게 읽혀질 수 있었던 기술론적 측면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사상시켜버리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미 1958년에 출판되었던 『기술적 대상의 존재 양태에 관하여』는 내가 아는 한 초기 들뢰즈의 작품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것이 언급 된것은 1980년의 『천개의 고원』의 「유목론 ― 전쟁 기계론」에서이다. 하지만 시몽동의 이 저작은 ‘개체화의 작용’의 문제를 ‘기술성’의 문제로서 구체적으로 재파악한 것이며 개체화론과는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사유에서 폭력적으로 작동되는 ‘차이’나 ‘기호’의 문제는 이른바 사유의 ‘근원적인 기술성’이라고도 말해야 할 문제로 들뢰즈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19) 하지만 들뢰즈의 초기 조작에서는 기술성의 문제가 클로소프스키적인 ‘시뮬라크르’의 개념하에 감추어져 버린다. 그리고 ‘아나키적인 초월론적 원리’의 해방의 방향은 기술보다는 오히려 협의의 예술작품이나 병리학적인 것으로 수렴되어 간다고 생각한다.(DR, 371-6/430-4)

들뢰즈의 개체화론이 기술론으로서 전개되기 위해서는 『기계적 무의식』의 저자 가타리와의 마주침을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일까?20) 시뮬라크르 개념의 폐기는 여기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들이 씨름해야만 하는 것은 초기 들뢰즈의 개체화론(및 시몽동에 대한 거리)의 연장선상에서 들뢰즈적인 기술론을 구상해 보는 것일 게다. 사유에서 폭력적으로 작동되는 ‘그 자신에 있어서의 차이’를 기술성의 문제로 재파악하는 것, 그것은 어떤 논자가 말하듯이 사유를 ‘물질성’에 있어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일까?21) 그렇지 않다. 그것은 시몽동적인 질료형상론의 비판 바로 앞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들이 물어야만 하는 것은 시몽동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전개체적인 것’을 ‘바탕-없음’으로서 전개했을 때 인간과 기계의 ‘내적인 공명’에 어떻게 새로운 불균형이 생기고, 그가 이상화한 기술자 집단의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일 것이다.22) 이 기술적 집단성의 문제에 『천개의 고원』이 어떻게 답하는가, 그것은 다시금 검토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1) Gilles Deleuze, “Un concpet philosophique”, in Cahiers Configuration, no 20, hiver 1989, Aubier, pp. 80-90. 원래 텍스트는 영어로 1988년에 출판되었다.

2) 들뢰즈에게 있어서 ‘개체론’을 ‘개체과정론’으로 재독해하려는 시도로서는 이미 田中敏彦씨의 견실한 작업이 있다. 다나카 토시히코(田中敏彦), 「個体論 (1)․(2)」, 『고베외대논총』 제40권 제2호, 제51권 제5호.

3) 시몽동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 Aubier, 1958, 1969, 1989.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PUF, 1964.; Millon, 1995. (이하 IG로 약칭. 이 책은 들뢰즈가 인용한 1964년 파리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앞의 것의 증보판이기도 하다.)

   L’Individuation psychique et collective, Aubier, 1989. (박사논문의 미간행 2부)

   시몽동 사상 자체에 대한 평가에 관해서 필자는 『現代思想』 1996년 7월호 및 『外國語科硏究紀要』(동경대학 교양학부 제42권 제2호 및 제43권 제2호)에서 고찰하고 있으며, 졸고와 내용적으로 일부 중복되고 있다는 것도 밝혀둔다.

4) Gill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itition, PUF, 1969. (이하 DR로 약칭하고 앞은 불어판, 뒤는 한국어판 쪽수를 표기)

5) Gilles Deleuze, Logique de sens, Minuit, 1969, p. 126, n. 3.

6)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ése physico-biologique”,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l'etranger, vol. CLVI, n01-3, janvier-mars, 1966, p. 115-8; repris dand L'Ile déserte et autres textes, Minuit, 2002, pp. 120-4. [이 글은 김상운․양창렬 옮김, 「『개체와 그 물리적·생물적 발생』에 대한 들뢰즈의 서평」이라는 제목으로 ≪자율평론≫ 14호(2005)에 수록되었다.]

7) Deleuze et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p. 507과 이하. 또한 이 책의 「도덕의 지질학」은 언어학의 이중분절 이론과 시몽동의 질료형상론 비판을 결합시킨 것을 그 주된 이론적 틀로 삼고 있다. 이 장에 관한 흥미로운 분석으로는 河本英夫, 『メタモルフォーゼ』, 靑土社, 2002년, 제4장을 참조.

8) 이 ‘변조’ 개념은 들뢰즈의 여러 저작에서 활용되는데, 특히 흥미로운 것으로는 프랜시스 베이컨론에서 색채에 관한 분석을 참조. Cf. Logique de la sensation, Ed. de la différence, 1981, pp. 76-8.

9) 용어상으로는 간단하지만, ‘한계지어진 존재’라고 불리는 것은 들뢰즈가 ‘완결되었으나 한계를 갖지 않는’(achevé et illimité)다고 불리는 것에 대응하는 것이리라.(DR, 80/100) 영겁회귀란 ‘완결된 것’의 ‘한계성’에 다름 아니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10) 『시네마』 제2권의 「결정(結晶) 이미지」의 분석에 있어서 들뢰즈는 이것을 ‘현실적인 것’l'actuel과 ‘잠재적인 것’의 교환의 장으로서 서술한다. 경계로서의 개체란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이 ‘식별불가능’(indiscernible)하게 되면서, ‘구별되고’(distinct) 있다는 점이다. Cf. Cinema 2 (L'Image-temps), Paris, Minuit, 1985, pp. 93과 그 이하.

11)  IG, 61. De mode d'excistence des objets technique, p. 57. 기술론적 맥락에서는 ‘연합환경’이란 ‘기술적인 존재가 자기 자신의 주변에 창조하는’ 환경이며, ‘기술적 존재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동시에 ‘그것을 조건짓는다.’ 그것은 기술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순환적 매개이다. 이 개념은 특히 『천 개의 고원』에서 다시 끄집어내어진다. Cf. Mille Plateaux, p. 67.

12) 이 점에 관해서는 檜垣立哉, 『ベルグソンの哲學』, 勁草書房, 2000년을 참조.

13) Logique du sens, p. 70.

14) 들뢰즈는 ‘학습’을 ‘문제적인 영역’의 형성이라고 생각하고, 『차이와 반복』에서는 수영 배우기의 예를 들고 있다. “헤엄치는 것을 배운다는 것, 그것은 우리들 신체의 여러 가지 특별한 점을, 객관적인 <이념>의 여러 가지 특이점과 결합시키고, 문제적인 영역을 형성하는 것이다.”(DR, 214/55. 또한 248/292를 참조.) 들뢰즈에 따르면 이것은 학습에서의 ‘무의식의 역할’과 관련된다고 한다.

15) 이자벨 스탄제르는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과 들뢰즈+가타리의 ‘배치agancement’ 개념을 비교하면서, 전자는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은’ 결과일 경우 계층론적인 논의를 온존시키고 일종의 사명감으로 충만한 휴머니즘에 빠지기 쉬운 반면에, ‘배치’는 계층화 불가능한 다양체들을 하나의 평면에 놓는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초월론적 경험론’과 관련짓는다. Isabelle Stengers, “Comment heriter de Simondon”, in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opérative, coordoné par J. Roux, Publications de l'Université de Saint-Etienne, 2002, pp. 309-313.

16) 『의미의 논리』, 「제9 세리」를 참조.

17) 들뢰즈 철학의 이 전개가 ‘차이의 개념과 반복의 본질의 조우’에 있으며, ‘개체화의 자유로운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의 ‘형식적인 틀’의 ‘실효적인 실현’이 클로소프스키의 니체 해석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鈴木泉, 「들뢰즈 철학의 생성」(『현대사상』 2002년 8월호, 139~140쪽)의 세밀하고 정확한 분석을 참조.

18) G. Deleuze, Foucault, Minuit, 1986, p. 130.

19) 시몽동론도 집필한 브루노 파라디는 들뢰즈의 초월론적인 도식론과 기술성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시켰다. Bruno Paradis, “Schemas du temps et philosophie transcendantale”, in Philosophie, n° 47, 1995, Minuit, pp. 10-27. Cf. 또한 B. Paradis, “Technique et temporalité”, in Gilbert Simondon: Une Pensée de l'individuation et de la technique, Albin Michel, 1994, p. 233-6.

20)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차이와 반복』에서는 한 곳에서만 ‘기계’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확실히 차이야말로, 또는 규정된 것의 형식이야말로 사유를, 즉 미규정적인 것과 규정작용과의 기계 전체를 기능시키는 것이다.”(DR, 354/410) 하지만 바로 그 뒤에서 이 사고 기계는 예술적 <혁명>과 결합되게 될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서는 이 기계는 아직 충분하게 작동하지 않고 있다.

21) 이 점에 관해서는 Logique du sens, p. 259, n. 3을 참조. 시몽동의 뇌에 관한 언급을 거론하면서 들뢰즈는 “우리들은 뇌의 표면과 형이상학적인 표면을 동일시할 수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표면을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뇌 자체의 투영과 전개와 도출을 추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22) 이 점에 관해서는 졸고, 「생성하는 기계의 신체」(『현대사상』, 1996년 7월호)를 참조. 또한 시몽동과 메를로-퐁티의 관계도 놓쳐선 안 된다. 1964년의 개체화론은 메를로-퐁티에게 바쳐졌다. 이것은 1958년에 심사를 받은 박사학위논문의 일부인데, 1961년에 사망한 메를로-퐁티도 시몽동에 관해 말년의 미간행 원고에서 비판적인 논평을 남겼다. Cf. Stéphanie Ménase, Passivité et création, Merleau-Ponty et l'art moderne, PUF, 2003, p. 151.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시몽동의 지각론은 ‘초지각적’(transperceptif), 즉 ‘초개체적’이며, 진정한 ‘집단적인 것’(le collectif)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발언과 시몽동이나 들뢰즈의 ‘집단적인 것’에 관한 사유를 맞부딪쳐 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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