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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6 : 질 들뢰즈

맑스 재장전 또는 긍정과 도주 :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성 유물론 소묘

by 상겔스 2018.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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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재장전 또는 긍정과 도주

: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성 유물론 소묘

マルクス・リローデッドまたは肯定逃走

ドゥルーズ/ガタリの偶発性唯物論素描

마츠모토 준이치로(松本潤一郎)

情況第三期第四券第十一号, 150-179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서 사고되어야 한다.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10

 

 

모순에 의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서술

역사를 다시[고쳐] 쓰는 <역회전(revolution)> 

혁명적 잠재력이 어떻게 현행화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전의식적 상태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정확한 순간에 실제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절단>이다.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며, 인과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다시 쓰기를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AO, pp.453-4).

* 한국어판 : 혁명적 잠재력의 현행화는 이 잠재력이 물론 포함되어 있는 전의식적 인과성의 상태보다는 어떤 정확한 순간에 리비도적 절단의 실효성에 의해, 즉 욕망을 그 유일한 원인으로 지니고 있는 분열의 실효성에 의해, 말하자면 심지어 현실계에 역사를 다시 쓰도록 강요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이상하게 다의적인 이 순간을 생산하는 인과성의 단절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L'actualisation d'une potentialité révolutionnaire s'explique moins par l'état de causalité préconscient dans lequel elle est pourtant comprise, que par l'effectivité d'une coupure libidinale à un moment précis, schize dont la seule cause est le désir, c'est-à-dire la rupture de causalité qui force à réécrire l'histoire à même le réel et produit ce moment étrangement polyvoque où tout est possible.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인과관계로부터 단절순간이라는 혁명의 잠재력이 우리에게 강제하는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이런 미증유의 <실험> 시도의 제1탄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근본적 주장 중 하나는 이것이리라. 그리고 이 기획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일관한다. 그렇다면, 그러나 이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도래하는가?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다음의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혁명으로서의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모순을 체현하는 계급의 한 쪽이, 그 모순의 최고 단계에 도달했을 때 저절로 찾아오는 필연적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 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먼저 계급은 기성의 모든 신분제·계층으로부터 탈코드화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AO, p.303), 그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계급이 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AO, p.302), 그리고 그 이름은 부르주아”(AO, p.303)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의 담지자는 계급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 “계급-바깥(hors-classe)”이어야 한다(AO, p.303)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혁명의 내실은 이렇게 될 것이다, “혁명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권탈취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로부터의 자본그리고 노동도주라고.

이리하여 혁명은 이 말이 기존에 품고 있던 필연사관에 의해 뒷받침되는 뜨거운(쓰라린) 코노테이션(connotation, 함의)나중의 천 개의 고원의 화법을 구사한다면 마이너스 1”(MP, p.31)하고 있다. 즉 여기서 채용되는 입론 구성은 기본적으로 모순혁명의 원동력을 맡기는 노동자 본체론적 구상, 더 나아가 묵시록적 내지 목적-종말론적인 혁명구상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이로부터 들뢰즈·가타리를 읽는 것에 있어서는 주지의 논의, 즉 기존의 균일화된 노동자상 또는 계급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오히려 이로부터의 일탈로 규정되는 마이너리티도주로서의 혁명의 잠재력 맡기는 논의 구성이 대척적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혁명(revolution)”, 앞에서 인용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다시[고쳐] 쓰기라는 의미에서, 역사의 역회전(revolution)”의 뉘앙스를 전면화시키게 되며, 그렇기에, 거기에 있어서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고 얘기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위와 같은 논점을 감안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는 역사의 인과관계로부터 해방된 무수한 사건이 이것임 hecceite”에 기초하여 개체화”(MP, p.318)하는 양상이, 거꾸로 스스로를 확립한 상태가 고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MP. p.32). 그것은 역사를 구성하는 질료-소재로서 생성변화의 질료-소재를 사용하는 것(MP, p.428)에 의해 역사로부터 누출-일탈해가는 을 측량하기 위해, 질료에 형상을 덧씌우는 형상-질료도식으로부터 질료-소재의 연속적 변화에 순종하는 질료[소재]-도식으로의 논점의 이행이기도 하다(MP, pp.509-12).

이렇게 매우 중요한 물음, 모순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를 기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들뢰즈·가타리에게 혁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상의 벡터에 있어서 역사에로 사건적으로 출현하는 이상, 그런 사람들의 도래는 사회 내부의 모순에 의해 담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 [내부] 모순들에 의해 정의된다는 주장은 잘못됐다(특히 맑스주의의 경우). 그러나 거대한 척도로 볼 때에만  그것은 참이다 [그것이 옳은 것은, 커다란 척도로 사물을 본 경우에 한정된다]. 미시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그 도주선에 의해 정의되는데 이 도주선은 분자적이다”(MP, pp.263-4) On dit à tort ( notamment dans le marxisme ) qu'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contradictions. Mais ce n'est vrai qu'à grande échelle. Du point de vue de la micro-politique, une société se définit par ses lignes de fuite, qui sont moléculaires.

그렇지만 이러한 맑스주의자에 대한 강한 비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맑스주의자가 동요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로부터 곧바로 도출되는 맑스주의자에 의한 반문은, “그러면 모순에서 유래하지 않는 자본주의(분석)란 무엇인가?”라는 대척적인 질문이어야 하며,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려고 하는 미증유의 <실험>을 시도하려 들기 때문이다. ,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는 모순이 아닌 우발성”이라는 어휘로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가 기술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재생-이전된[재장전된] 맑스(Ma[t]r[i]x reloaded)가 있다. 모순이 아니라 우연에 자리잡고 자본주의 분석을 <실천>하는 맑스,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흠뻑 빠진자라고 들뢰즈가 규정한 맑스가 있다. 또한 그렇다고 한다면, 앞의 가차 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나중에 또 다른 어떤 인터뷰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천 개의 고원은 맑스와 맑스주의에 의해 완벽하게 가로질러진 작품입니다. 현재 저는 저를 완전히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혹은 또한 인과관계로부터의 단절 = 역사의 고쳐 쓰기라는, 거기에 있어서 기괴하게도 다의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역사의 역회전-혁명(revolution)”을 향해서, 이런 우발성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 분석이, 맑스로부터 논리 필연적으로 계승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춰서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당하며맑스가 정식화한 규칙들을 정확하게 따른다는 조건에서, 역사 전체를 자본주의의 조명 아래 회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정당하다”(AO, p.163), 또한 자본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체의 음화(陰畵)이다”(AO, p.180)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도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 발생하는 <리비도에 의한 단절>”,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는 논점을 상기한다면, “인과관계의 단절<우연성>으로서의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자본주의 분석이 불가피해진다는 것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세계사는 우발들의 역사이지 필연의 역사가 아니며, 절단들과 극한[경계선]들의 역사이지 연속성의 역사가 아니기”(AO, p.163 et passim) 때문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 자본주의 그 자체가 <우발성> 내지 <조우>라는 <사건>에 의해 생겼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AO, p.265 et passim). 혹은 초기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으며, 거기에 노동자가 선행하는 시스템으로부터의라는 형태에 있어서 합류한다.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이런 사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들뢰즈가 말할 때,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연-조우의 견지에서 행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양태의 기술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까의 역사 ()기술의 문제와 관련해,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이 절단은 욕망을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분열이라고 서술됐다는 것도 상기한다면, “욕망은 마음속의 <우발>적인 것이라는 것도 거기에는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욕망의 교차점이며, 그 하부구조, 그 경제 자체가 얼마나 욕망이라는 현상과 밀접하고 불가분한가를 알려면, 자본주의의 기원에 있는 우연성의 총량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죠라고 들뢰즈가 말할 때,우연성욕망”,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점차 밝혀지게 된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에 의한 강제적인 역사의 다시 쓰기라는 역회전-혁명적인 사태가 발생하기 위한 평면이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에 맹아적으로나마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 또한 그 근저에 자본주의그 자체의 우발적인 탄생이 가로놓여 있으며, 이 우발성과 욕망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러한 우발적 조우가 발생하는 평면이 내재평면혹은 공립평면이라고 불리며, 더 나아가 이 조우가 이른바 사건론으로서, “이것임이나 개체화같은 개념을 열쇠로 하여 세련된다는 것이 대략의 그 흐름으로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전망 하에서 이 글에서는 모순의 어휘가 아니라 우발성그리고 조우에 의거한,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의 작동양태, 나아가 그것에 평행선을 그리는 우발적인 세계사의 기술을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전에,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실험>의 전단계로서, 실험에는 가설이 불가결한 이상, 그들이 세운 <가설> 혹은 <실험>에 대한 일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때, 미셸 푸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발과 허구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코드와 탈코드의 게임은 우연에 맡겨져 있다. 그것은 질병이나 결함이나 기형을 겪기 이전에 있는, 정보 시스템의 변조[교란] 내지 오인이다.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돌연변이와 진화 과정은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우발성 때문에, 생명은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결코 자기의 장소를 찾아낼 수 없는 생[명]체에 도달한다. 그것은 방황하고 잘못되도록 운명지어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특이하고 유전적인 이 잘못이다. 푸코, 생명 : 경험과 과학

Au centre de ces problèmes, il y a celui de l’erreur. Car, au niveau le plus fondamental de la vie, les jeux du code et du décodage laissent place à un aléa qui, avant d’être maladie, déficit ou monstruosité est quelque chose comme une perturbation dans le système informatif, quelque chose comme une < méprise >. À elle aussi qu’il faut demander compte des mutations et des processus évolutifs qu’elles induisent. Elle également qu’il faut interroger sur cette erreur singulière, mais héréditaire, qui fait que la vie a abouti avec l’homme à un vivant qui ne se trouve jamais tout à fait à sa place, à un vivant qui est voué à < errer > et à < se tromper >.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시도한 미증유의 <실험> 및 그 준비로서 세운 <가설> 내지 <허구>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선으로, 여기서 푸코가 살아 생전에 마지막으로 인쇄 허가를 내주었다고 하는 생명 : 경험과 과학의 논의를 경유하자. , 이 시점에서의 푸코의 논의로부터 소급적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의 논의 쌍을 우발-조우및 그것에 밀접한 <실험-가설>허구라는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이라고 말해도 좋은 과학사가 조르주 캉길렘의 과학인식론의 동시대적 의의를 논한 이 논고의 끝 부근에서, 푸코는 이번 절의 서두에 인용한 대목에서, 삶이란 오인에 다름없다, 생명이란 잘못일 수도 있는 것, “오인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생체는 우발성에 의해 횡단되고, “오류의 역량을 부여받았다. 오류가 진리와 짝을 이룬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짝을 창조-발명하는 것을 우리 인간이라는 삶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우발성이라는 점의 이해가 긴요하다. 그래서 진리를 이 근원적 오류로부터의 파생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개념이란 생명 자신이 이 우발성에 대해 주는 해답이라고 인정한다면, 오류는 인간의 사고 및 역사를 형성하는 것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진위의 대립, 진위에 부여되는 가치, 사회들이나 제도들이 이 분할에 연결되어 고려하는 권력의 효과 같은 것은 모두, 생명에 고유한 잘못될 가능성에 대한 뒤쳐진 응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류는 약속된 완성의 망각이나 뒤늦음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나 종의 시간에 고유한 차원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오류로서의 우발성에서 진리의 원천을 발견하는 이러한 관점은, 물론 니체의 계보학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위치되어 있을 것이다. 푸코 자신이 이 텍스트에서 니체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니체에서 보이는 이러한 진리에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불식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란 더없이 깊은 거짓말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에 가까운 동시에 먼 캉길렘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란 생명의 긴 연대기에 있어서의 가장 새로운 오류라고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진위의 분할이나 진리에 부여된 가치는 생명이 발명하고 얻은 가장 특이한 삶의 양식을 형성하고 있다, 생명은 그 궁극적인 기원 이래, 오류의 가능성을 자신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캉길렘에게 오류는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오류-우발성을 겪고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생체가 지닌 역량이다. “인간은 오류-우발성에 의해 삶을 촉발되며, 이 삶의 특이성을 해방할 수 있도록, 오류-우발성으로부터 그 삶에 있어서의 진리혹은 개념을 생산하고 벼려나간다. “오류란 생명 및 인간의 역사가 뒤얽히는, 항상적인 우연이다.” 이 말을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에 대한 헌사로 고쳐 읽는다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감행한 <실험>을 준비하는 <가설> 혹은 <허구>의 필연성이 이해될 것이다. 삶은 마음속 오류-우발성에 흠뻑 젖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근저에서부터 진리-허구이다. 그리고 그 일을, 그것을 측량하는 개념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긍정해야 한다. 이 뜻을 잃어버리지 않고, 들뢰즈·가타리의 <실험>을 뒤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들뢰즈·가타리로 돌아가자.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조우의 문제계로서 초점화되는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자본주의에서의 조우, 사유재산상품생산”, 혹은 자본가가 소유하는 변환 가능한 재화의 몇 가지 흐름자신의 노동력밖에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하나의 흐름”(AO, p.164), “노동자자본”, “생산자들의 흐름화폐의 흐름”(AO, p.266) 등 다양하게 표현되는 두 가지의 조우에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두 가지 요소가 조우하는 역사적 조건으로 들뢰즈·가타리는 다음과 같은 사정을 열거하고 있다. , “생산내지 자유로운 노동의 흐름 쪽에서의, “전제군주(야만) 기계”(통사적으로는 이른바 봉건제 사회”)로부터 문명(자본주의) 기계”(이른바 자본주의 사회”)로의 누출의 과정에 있어서의, 사기업화에 의한 토지의 탈영토화, 사적 소유에 의한 생산수단들의 탈코드화, 가정과 조합의 분리에 의한 소비재의 사적 사용, 노동으로도 기계로도 사용 가능한 노동자의 탈코드화가 그것에 해당된다. 다른 한편 자본의 쪽에 있어서는, 추상적인 통화에 의한 재화의 탈영토화, 상인자본에 의한 생산의 다양한 흐름의 탈코드화, 금융자본과 공공부채에 의한 국가들의 탈코드화, 산업자본의 형성에 의한 생산수단의 탈코드화가 관찰될 것이다(AO, p.267).

최종적으로는 노동자본의 두 개의 계열로 정제할 수 있는, 이상의 다양한 흐름의 변화 탈코드화 및 그 조우에 의해 생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가, “전제군주와는 그 지위status를 달리 한다. 이 점을 들뢰즈·가타리는 전제군주 기계는 공시적이지만 자본주의 기계의 시간은 통시적이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역사를 창조적으로 구축해가는 일련의 과정에 속속 등장한다”(AO, p.264)고 표현하며, 이것은 이른바 시계열적인 역사, 즉 진보나 발전 같은 19세기적인 역사관이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났다고 하는, 그 자체로서는 항식에 속한다고 말해도 좋을 사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 있어서 제시한, 인간을 가로지르는 시간”, 유한성에 기초한 노동”, “생명”, “언어의 변용의 틀 안에, 즉 푸코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역사,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그 자체를 기입하려고 하는, 또는 고쳐 쓰려고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실험>의 사정거리가, 엿보이게 될 것이다.

, 푸코에게 <역사>는 결코 시계열적인 사태의 계기(繼起)-전개가 아니라, 오히려 표(tableau)[굳이 번역한다면 표-] 내지 공간에 있어서의 미세한 균열의 발생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서두에 인용한 들뢰즈·가타리의 역사의 고쳐 쓰기, 이른바 진화-발전의 시계열상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는, 목적론적 의미에서의 혁명을 가리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간 내지 평면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존립평면내지 내재평면 위에 있어서의 자본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적인 조우를 가리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타리는 푸코의 뜻을 계승하고 있을 것이다. 천 개의 고원에서 비판되는 이른바 역사와는 별도의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우발적인 <역사> , 천 개의 고원에서의 사건, 여기서 이미 문제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는 앞서 말한 자본주의 발생역사적 조건중 하나인 노동의 탈코드화를, 이른바 통역사적 구분에 있어서의 로마 시대에서 보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로마 시대에 있어서도, 재산의 사유화로 인한 부동산의 흐름의 탈코드화, 거대한 재산의 형성에 의한 통화의 흐름의 탈코드화, 상품생산의 발전에 의한 상업의 흐름의 탈코드화, 재산 상실이나 프롤레타리아화에 의한 생산자들의 탈코드화 등의 사태가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전제군주 기계의 체제화에 있기 때문에 노예제를 산출하는것에 불과했다(AO, p.264)는 논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논점에 대한 각주에는 명백히 맑스에 대한 참조가 제시되고 있다. 다른 한편 자본의 계열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조건은 통역사적 시대 구분에 있어서의 봉건제시기에 이미 갖춰져 있었다고 간주되고, 사유 재산, 상품 생산, 통화들의 합류, 시장의 확장, 도시의 진전, 금납 지대·계약 임금의 출현 등 사태가 열거되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들도 또한, 오히려 봉건적 하중·연관의 강화, 더욱이 원시적인 봉건제 단계 내지 노예제의 재건조차 산출하고 있는 등 사정을 이유로서, 그 자체로서는 자본주의 기계의 등장과는 반대의 결과를 이끌고 있다고 여겨진다(AO, p.264). 이런 통역사적 원근법으로부터 이탈된 지점에 있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고원개념이 확립되는 것은 명백하며, 이런 의미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얘기되는 고쳐 써진 역사, 이른바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도 명백할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가타리가 계획하는 필연성의 역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절단과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비연속적인 여러 가지 우발적 사건의 역사로서의 세계사의 기술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을 준비하기 위한 <가설>적 틀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곧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욕망하는 기계들이 편력하는 기관 없는 신체위에서의 야만기계”,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며, 천 개의 고원에서의 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의 한 쌍의 개념에 의해 기술되는, “추상기계의 기계적 및 집단적인 이중의 어레인지먼트에 의한, 정주/유목, 포획/도주, 국가장치/전쟁기계, 홈패임/매끈함 등등의 서로 얽힘-접합 양식의 가설적 모델이다.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된 모델과 천 개의 고원의 그것 사이의 최대의 차이점을, 전자가 생산의 양태에 중점이 놓인 반면, 후자에서는 예술·인문과학적인 분야를 넘어선 사회·정치적인 분야, 더 나아가 광물이나 동식물, 생물의 분야도 관통하여, 넓은 의미에서의 교통내지 번역의 양태로 역점이 이동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서 생산 측면에서부터 유통 측면으로 논점이 전면적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 하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이렇게 제시된 <가설>적 모델을, 그것이 이른바 역사<실험> 재료-소재(matériaux)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갖고서 다름 아닌 역사바깥혹은 계급-바깥으로의 누출-도주선을 찾아내려고 하는 <실험>이다 라는 점에서, 오히려 <허구> 내지 우화 만들기(fabulation)”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역사는 허구따위라는 것이 아니라, <가설>로서의 <허구>를 세움으로써 이뤄지는 <실험>에 있어서, 역사 속에 무수한 조우-우발성, 혹은 고원이 발견된다는 것이, 여기서는 중요하다. , 푸코에게 개념은 우발성에 의해 생기는 <허구>였지만, 들뢰즈·가타리에게 그것은 동시에, 우발성과 조우하기 위한 <허구>이기도 하다. 우발-오류에 의해 촉발되고 세워지는 가설-허구에 의해, 거꾸로 우발적인 세계사야말로 이른바 역사의 도처에서 스캔[주사]될 수 있다고 하는, 이 상호적 관계 속에서 허구와 우발은 포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자본주의가 그런 세계사를 가능케 하는, <조우>로서의 출신을 갖고 있게 될 것이다.

 

노동과 자본의 조우 : 몇 가지 이론적 <가설>

방법론으로서의 질적 분할

그렇다면 이 노동과 자본의 <조우>에는, 어떤 우연성이 발견되는가? 그것에는 자본의 축적에 밀접하게 관련되며, 다음의 두 가지 시기의 존재, 즉 우선 재화가 가치를 갖지 않고 그것을 모으는 데 유리한 기회”, 구체적으로는 재산-토지의 권리증서의 축적이 이뤄지는 시기, 이어서 이러한 재화의 가격이 오르고,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재화를 매각하는시기의 존재가 언급되며, “산업투자에 유리한 조건으로서 “‘가격혁명’, 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 원료자원[]에 대한 접근성, 도구·기계적 생산에 대한 호조건등이 있었다고 여겨진다(AO. pp.267-268). 따라서 여기서는 명백하게 맑스의 자본에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노동자의 과잉비축, 프롤레타리아트층의 형성에 관련하여 노동자의 상품화<역사>적 우연성의 양상에 밀접하게 논해지고 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의 말은 결정적이다. , “모든 우연적(contingentes) 요인이, 이러한 조우적 연결들(conjonctions)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런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조우(rencontres)가 있었는가, 이렇게 명명할 수 없는 사태[의 형성에 있어서]!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게 미치는 통제이다”(AO, p.268). 이리하여 자본주의는 근저에서부터 우발적이며, “그러나그 생산양식을 침투시켜간다. 이런 그러나라는 이상한 접속이야말로, 자본주의는 오작동에 의해만 만사가 순조롭게 작동한다(les choses ne marchent bien qu’condition de draquer)”(AO, p.274)라는 원리를 알고 있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의 저명한 정식의 ()작동 양태에 다름없다. 그러나 그런 지적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앞서 열거한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우발-조우>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런 논의는, 맑스가 자본에서 논한 산업자본주의에서의 노동력의 상품화를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의 정당성이라고 얘기될 때의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를 가리킨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혹은 그 절단의 정의, 즉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한 모든 흐름의 조우적 연결은, 상인 자본에 의해서도 금융 자본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고, 그것들은 탈코드화나 탈영토화와는 다른 흐름, 다른 요소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AO, p.268). 그러므로 앞의 그러나 이 조우적 연결의 효과-결과는,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점차 깊이 미치는 통제이다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하는 역사적 <우연성-조우> “이른바 본원적 축적, “그러나필요-필연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세계규모에서 반복되는 자본축적의 양태가, 아시아 등의 논의를 감안하여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고 명쾌하게 말해지고 있으며(AO, p.275), 이 관점은 물론 천 개의 고원에도 일관하고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반복되는 본원적 축적이라는 논점은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인간에 의한 잉여가치이 두 가지 잉여가치가 코드가 아니라 흐름 flux’의 잉여가치를 구성한다 사이의 영원한 불일치 나중에 보는 끝없는 이윤율저하경향라는 관점에서 분석되며(AO, pp.270-6), 게다가 이러한 자본주의의 작동의 핵심에 이윤율 저하 경향을 영원화하는 반생산”(anti-production)이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반생산주의로서의 무위(des-paevrement)의 공동체”(Jean-Luc Nancy)의 비판적 재검토를 요청한다 라는 논의가 이뤄지며,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본원적 축적이라는 폭력이, “포획장치또는 국가에 의한 이중적 폭력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비가시의 전제-메타수준으로 밀어 올린다 의 기제와 밀접하게 논의되고 있다(MP, pp.558-9)이라는 점을 확인해두자.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 대해서는 마지막 절에서 역사와의 관계에서 다시금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앞으로 더 나아가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여기서는 철학자질 들뢰즈의 18번이라고 해도 좋은, 본성상 상이한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질적으로 분할하는 기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에서도 완전하게 발휘되고 있을 것이다. 마조흐와 사드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결합관계도 발견되지 않은 듯이, 혹은 스피노자 윤리학이 서술 체계에 있어서 개체 사이에 나쁜 조우가 발생하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 자명하다고 간주되는 노임(salaire)”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화폐-자본, “본성상의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발-조우하는 양태가 <실험>적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가진 우발성에 기생하는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요소 노동력자본을 떼어내고, 각각을 그것 자체로서 파악함으로써, 모순에 기대는 것 없는 질적 분할에 의해 자본의 맑스가 여기서 재장전되고 있다. 거기서의 맑스는 이른바 유물사관에서 해방되고, “우발성의 세계사에 있어서 자본주의를 기술하는, 나중의 천 개의 고원에서 얘기되는 의미에서의 <역사가>이다. 따라서 맑스가 어떻게 재장전되어 있는가를 보기 위해, 질적으로 분할되어 각각 독자적으로 논의되는, 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코드의 잉여가치가 아니라 흐름의 잉여가치에 정위하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한다고 여겨지는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 “화폐의 이원성의 논의를 경유한 자본-화폐”, ②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형상-질료도식이 아니라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재장전된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도식의 반복으로서의 노동력을 둘러싼 논의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점을 감안한 위에서, 우발성 유물론에 기초한 재장전된 유물사관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논의되는 비신체적 형상으로서의 어레인지먼트”, “명령어등의 논점을 경유하여, “내재평면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1. “자본주의의 공리계의 표현으로 해석된 이윤율저하경향과 화폐의 이원성

맑스가 빠져 있는 예언”?의 하나로서 저명한(악명높은)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제창한다 이 방침은 천 개의 고원에서도 일관하고 있다(MP, pp.578-9) . “공리계란 단적으로는 코드에 있어서의 잉여가치흐름에 있어서의 잉여가치로 변용사키는 장치, 다시 말하면 자본의 출신형태로서의 화폐의 이원성(dualité de l’argent)”이며(AO, p.273), “자본주의는 화폐가 화폐를 낳고, 가치가 잉여가치를 낳을 때 출신-친자 자본이 된다”(AO, p.269). , 통념과는 반대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끝나지 않는[=일치-해소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AO, p.271). 왜냐하면 자본과 노동력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 척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런 척도는 만약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설>로서의 순수한 허구이다(AO, p.273). , 우선은 자본주의가 이러한 <허구> 혹은 오작동에 의한 만사형통의 기예를 속속들이 알고-이용했다는 점이, 나중에 말해지듯이 중요하다. 어쨌든 들뢰즈·가타리는 이 기괴한 사정 말하자면 영원한 이윤율 저하을 설명하기 위한 문자()”로서, 미분의 비(Dy/Dx)를 제시할 것이다. , ‘Dy’가 노동력 혹은 가변자본의 유동을, ‘Dx’가 자본 그 자체, 혹은 불변자본의 유동을 구성하고, 자본의 출신-친자 형식으로서의 <x+dx> 즉 잉여가치는, ‘Dy’‘Dx’조우적 연결(conjonction)”에 의해 생긴다고 간주된다(이상은 AO, p.270). 그래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우발성 및 그 생산양식을 침투시키는 공리계로서의 작동이, 미분의 비에 있어서 완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음의 인용이 결정적이다. “경향적 저하는 극한(terme)을 갖지 않는다. 문제가 생산고의 견지에서 하는 생산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limite)라면 미분의 몫은 계산 가능하지만, 문제가 잉여가치가 생기는 생산의 흐름과 노동의 흐름[의 변화의 한계]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잉여가치], difference de natur...”(AO. p.273 강조는 인용자). 이로부터 유명한 테제, 자본주의는 자신의 끝-극한을 갖지 않는다혹은 극한을 스스로 치환함으로써 이 극한을 재생산한다라는 주장이 맑스에 대한 참조를 촉구하면서 도출된다(AO, p.273)는 것은 주지의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그것의 확인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공리계의 작동으로까지 관철되는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우발-조우>, 맑스에 의한 이윤율 저하 경향을 재장전시킨/에 있어서 읽어 들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 사이에는 그 어떤 공통의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한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바의 잘못된 만남을 하고 있다 . 문제는 지양이라는 공통척도, “‘모순이 아니라 우발성”, ‘본성의 차이에 준거한 위에서 이뤄지는 자본주의의 출신의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성의 차이에 근거함으로써, 생명으로부터 무기물에 이르기까지 관철되는 소재-도식의 연속 변화로서의 노동자의 역사가 기술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논점으로 이동하기 전에, 이상에서 개괄한 공리계의 구체적 작동양태의 아주 짧게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포획장치로서의 화폐를 둘러싼 논의를 일별해야 한다.

노동가 자본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의 증거로서의 두 가지 요소의 우발적 조우가, 잉여가치의 [종말]없는 발생으로서의 저하경향에 있어서도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예상되고 있으며, 화폐도 또한 이러한 이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 탈코드화되고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자유로운노동자를 노임관계 즉, 앞에서 본 미분의 비의 하나의 항인 <Dy>에 체류시키겠다는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재영토화의 기능을 갖는 동시에 코드들의 잉여가치를 흐름(flux)”의 잉여가치로 ― 『천 개의 고원에서의 규정을 이용한다면 탈영토화하는 기능을 가진다. , 잉여가치 내지 이윤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에 의해 창조된 가치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두 가지 흐름 사이의 통약 불가능성 그렇지만 서로에게 내재하는 이 두 가지 흐름을 표현하는 화폐(monnaie)의 두 측면 사이의 어긋남에 의해 정의된다(AO, p.283). 이러한 이원성을 들뢰즈·가타리는 한편으로는 교환가치의[/라는] 무기력한 화폐의 기호들, 소비재들이나 사용가치들에 관련된 지불수단의 흐름, 화폐와 공정구역의 생산물 사이의 11 대응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강력함의 기호들, 융자의 흐름, 지금 여기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장기적인 어림셈 내지 예측 능력을 나타내는, 추상량들의 공리계로서 기능하는 생산미분계수의 시스템과 구별하고 있다(AO, p.271). 물론 이 재영토화의 기능, 가 탈영토화의 기능에 대응한다. 어쨌든 여기에 주지의 안티 오이디푸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양의적 평가를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은 명료하다. , 자본주의는 탈영토화와 동시에 재영토화를 행하는 것이며, 에 그 공리계의 작동이 제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원성의 장치로서의 화폐를 통제하는 것이 국가― 『천 개의 고원에서는 더 추상적으로 포획장치라고도 불린다 이며,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서의 화폐의 기원을 국가에 있어서의 세금징수에서 찾는 논의까지 일관하고 있다(MP, pp.552-3). 이러한 화폐의 이원성에 의해, 유통 측면 또는 시장에서의 이른바 교환은 반드시 화폐가 아닌 통화로서, 즉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있어서 실현된다는 점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 사족인데, 이른바 전지구화현황 분석을 위해서도, 이 논점의 파악은 최소한의 전제로 여겨진다. 거기서의 문제는 맑스의 등가교환론 내지 가치형태론을 착취(exploitation)”수탈(expropriation)” 중 어느 쪽에 밀접하게 연결시켜 이해하는가라는 양자택일로 집약되지만, 지금은 이 점을 젖혀 둔다. 자본제 내부에서는 교환은 항상 합법혹은 등가라고 (표상)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들뢰즈·가타리가 화폐-교환을 수탈론으로서 전개하고 있는 것은 명료하다. 자본제 내부에서의 교환에 정위하는 착취론은 자본제 그 자체의 성립이라는 -바깥의 폭력의 수준에 정위되는 수탈의 측면을 간과하기 쉬운 반면, 들뢰즈·가타리의 화폐론에서는 화폐의 이원성이 고려되기 때문이다.

또한 구매력으로서의 소비재와의 11 대응의 기능만 담지할 뿐인 통화는 탈영토화된 흐름flux”회귀-환류(reflux)”로서도 파악되고 있다. , “돌연변이의 역능을 가진다(a pouvoir mutant)”라고도 형언되는 이 화폐의 이원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통화는 환류를, 즉 이 통화의 노동자나 생산요인들(이른바 반노동일半労働日에 상당하는 소비재 인용자)에 대한 배분에 의해 구매력을 이 통화가 획득하자마자 수많은 재화와 맺는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AO, p.282). 흐름과 환류의 서로에게 내재하면서도 통약 불가능한 관계에도 우발적인 조우가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논점은 천 개의 고원13고원 포획장치에서 일종의 집합론적 조작 마술 또는 신비라고도 불린다 으로서 다뤄지고 있는데, 거기서은 단적으로 분배나 보수로 여겨지는 한에서의 노임[급여(salaire)]은 구매라고도 말할 수 없다. 반대로 구매력은 노임으로부터 생긴다On ne peut donc même pas dire que le salaire, conçu comme répartition, rémunération, soit un achat ; c'est au contraire le pouvoir d'achat qui va en découler”(MP, p.556)고 서술될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이 마술무로부터(ex nihilo) 창조라고 불리며, 자본제 내부에서는 잉여가치는 완전히 합법적인등가교환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누구도 훔치지 않는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맑스주의자를 도발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AO, p.283). 즉 여기서도 앞에서 언급한 포획장치에 의한 이중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래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의 이상에서 살펴본 화폐론이 수탈에 정위하여 이뤄진다고 하는 점이 다시금 확인될 것이다. 따라서 이윤들은 수입[구매력 인용자] 창조의 흐름의 재가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의 일탈(déviation)에 있어서, 그것과 나란히(côte à côte) 유출한다”(AO, p.283). 이와 같은 화폐의 이중성을 둘러싼 논점을 바탕으로, 이어서 천 개의 고원에서의 소재-도식에 기초하여 논의되는 노동력을 살펴본다.

 

2. ‘소재-도식으로 쇄신된 생산력과 생산관계

우선 들뢰즈·가타리가 완전히 맑스 다만 재장전된 주의자이며, 따라서 교환주의자가 아니라는 것(AO, pp.224-6 et passim)의 확인이 긴요하다. 거기에는 또한 악명 높은(?) 맑스의 노동가치설특히 자본13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어서의 절대적 잉여가치설에 충실한 들뢰즈·가타리가 있고, 이 맑스에 대한 충실성(fidelité)”(Alain Badiou)가 겉보기에는 맑스에 대한 준거가 상대적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보다 적다고 생각되는 천 개의 고원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점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중요한 규정을 부여받았던 코드화, 탈코드화의 양태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인간적 틀을 넘어선, 무기물도 포함한 생명에서조차 발견된다고 여겨지는 잉여가치개념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 생명의 돌연변이 현상을 논한 3고원 도덕의 지질학에서의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조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ségmentarité)[코드의 구성요소 인용자]은 두 번 복제되며,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거기서 행해지는 것은 어떤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의 번역이 아니라 오히려 코드의 잉여가치 혹은 파생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부를 특이한 현상이 생기고 있다non seulement tout code a des suppléments capables de varier librement, mais un même segment peut être copié deux fois, le second devenant libre pour la variation. sans qu'il y ait traduction d'un code à un autre (les virus ne sont pas des traducteurs), mais plutôt phénomène singulier que nous appelons plus-value de code, communication d'à-côté”(MP, pp.69-70), 혹은 또한 이른바 예술론으로서 이해되면서 11고원 리토르넬로에 있어서의, “코드 변환이 행해질 때, 거기에 있는 것은 단순히 부가가 아니라, 항상 새로운 [코드로서의] 평면 그리고 잉여가치가 성립하고 있다Chaque fois qu'il y a transcodage, nous pouvons être sûrs qu'il n'y a pas une simple addition, mais constitution d'un nouveau plan comme d'une plus-value”(MP, p.386), “생명의 장에는 아마 존립성의 이득 즉 잉여가치가 포함되고 있다Or, s i nous nous demandons quelle est l a « place de l a vie » dans cette distinction, nous voyons sans doute qu'elle implique un gain de consistance, c 'est-à-dire une plus-value (plus-value de déstratification)”(MP, p.414), “영토의 어레인지먼트는 탈코드화를 동반하며, 어레인지먼트를 촉발하는 탈영토화와 불가분하다(새로운 유형의 두 가지 잉여가치)L'agencement territorial implique un décodage, et n'est pas lui-même séparable d'une déterritorialisation qui l'affecte (deux nouveaux types de plus-value)”(MP, p.414) 등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러한 생명현상에 있어서의 코드화와 탈코드화의 착종이, “자신의 지층 위에 있어서조차 유기체는 탈영토화된다. 유기체는 유기체의 자립성을 보증하고 유기체를 이끌도록 제반 내부 환경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Sur sa propre strate, un organisme est d'autant plus déterritorialisé qu'il comporte de milieux intérieurs assurant son autonomie, et le mettant dans un ensemble de relations aléatoires avec l'extérieu”(MP, p.70)라고 기술되어 있는 점에도, 앞에서 언급한 푸코의 오류-우연성으로서의 생명과도 밀접하고, 생체의 이른바 근원적인 우발성이 함의되어 있다는 점의 이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른바 생명의 영토에 있어서의 잉여가치에 밀접하는 “()코드화영토화의 양태의 규정은, 더 나아가 언어나 기호계 같은 이른바 인간적 영토에까지 연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거기에서는 이러한 생체의 우발성이, “비신체적 변형으로서의 언표행위의 집단적 어레인지먼트신체의 기계적 어레인지먼트”(MP, p.112)와의 조우라고 규정되는, “날짜-사건이라는 형태에 있어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인데(MP, pp.103-12), “우발적인 세계사를 기술하기 위한 우발성 유물사관에 관련된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아무튼 맑스에 있어서 인간이 존재하고 노동한다는 것 자체에 있어서의 과잉을 의미했던 절대적 잉여가치, 이리하여 “()코드화영토화개념에 의해 재규정된다는 점을 확인한 뒤에, “생명으로부터 무기물까지를 관통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소재-도식에 충실하게 전개되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재장전된 생산력과 생산관계론이 이해될 것이다.

우선 어떤 코드도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다양한 보충물을 가질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분절적 단편은 두 번 복제되고, 두 번째의 복제는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것이 된다에서 분명한 것처럼, 코드의 구성요소로서의 분절적 단편은 그 자체로 변이하는 내용이며 또한 표현이다. 내용은 이미 형성된 소재 내지 질료, 표현이란 실질로서의 힘이며, 또한 각각이 그 하위 구분으로서 형식-실질의 이중분절을 겪고 있기 때문에, 내용의 형식이란 표현의 실질, 표현의 형식이란 내용의 실질이며, 따라서 소재와 힘은 서로 구성하는, 그러나 대응도 부호도 갖지 않은불가분한 것이다(MP, pp.58-9). 천 개의 고원에서의 유물론의 재장전은, 이런 이중으로 분절된 표현과 내용의 동형성에 기초하여 <실험>된다. 따라서 내용과 표현이 구별되는 경우, 그것은 형태적 내지 형상적이지 않고 ‘distinction reelle’(MP, p.59) 현실적인 구별은 스피노자 윤리학1부 정리 10 및 그것에 붙여진 비고로부터 채용되고 있다 . 생산력의 발전이 기존의 생산관계를 질곡에 빠뜨리고 생산력이 반전하여 새로운 생산관계를 내재적으로 생기게 하듯이, 표현과 내용은 존립성의 집합”, 존립평면에 있어서는 서로 반전-생성변화할 것이다. 존립평면의 집합이라는 표현은, 매우 비등질적 성분이 모여 강화되며, 형상-질료의 규칙적 연속으로 바뀌어 계층의 단락短絡, 혹은 역회전의[역전된] 인과관계가 일어나고, 이질적인 소재와 힘 사이에 포획관계가 성립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마치 기계적 계통류(un phylum machinique)[물질의 흐름에 내재하는 어레인지먼트의 연속변화 인용자], 그리고 탈지층화적 횡단성이 요소, 차원, 형상과 질료,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관통해 질료를 해방하고 힘을 포획하듯이On parlera au contraire d'ensembles de consistance quand on se trouvera devant des consolidés de composantes très hétérogènes, des courts-circuits d'ordre ou même des causalités à l 'envers, des captures entre matériaux et forces d'une autre nature, au lieu d'une succession réglée formes-substances : comme si un phylum machinique, une transversalité déstratifiante passait à travers les éléments, les ordres, les formes et les substances, le molaire et le moléculaire, pour libérer une matière et capter des forces”(MP, p.414). 거기에 있어서 소재 내지 질료는 형식 또는 형상이라는 주괴[주형]에 집어넣어지게 되는 부정형의 것이 아니라, 소재 각각이 지닌 이것임자신의 특이성에 기초한 개체화 를 따라서 형식-실질을 형성하고, 따라서 그 자신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상호 반전을 내재적으로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법칙에 복종하는 질료보다도 노모스[질서 인용자]를 가진 물질성을 뒤따르는 , 질료에 특성을 부과할 수 있는 형상보다도 다양한 정서를 구성하는 표현의 물질적 특징을 뒤따르는 것이다il s'agit de suivre le bois, et de suivre sur le bois, en connectant des opérations et une matérialité, au lieu d'imposer une forme à une matière : on s'adresse moins à une matière soumise à des lois, qu 'à une matérialité qui possède un nomos”(MP, p.508). 그리고 이른바 인간/물질의 구분, 혹은 이른바 인간의 역사를 훨씬 넘어선, 생산관계의 형상을 정초짓는 생산력의 사례로서, 매우 아름다운 금속의 역사를 말하는 대목을 반드시 인용해야 한다. 야금술은 물질을 재용해하고 재이용할 가능성을 갖고, 그래서 물질에 주괴[주형]라는 형식을 부여한다 금속의 역사는 스톡과도 상품과도 다른 이 특별한 형식과 불가분하며, 화폐가치는 이로부터 생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환원적이라는 야금술의 관념은, 준비된 물질로부터 물질성의 해방 및 구체화되어야 할 형상으로부터의 변형의 해방이라는, 이중의 해방을 표현한다 거기에는 다양한 형상의 계기로 바뀌어 연속 발전하는 형상이, 다양한 물질의 변화로 바뀌어 연속 변화하는 물질이 있다Et pour finir, la métallurgie a la possibilité de refondre, et de ré-employer une matière à laquelle elle donne une forme-lingot : l'histoire du métal est inséparable de cette forme très particulière, qui ne se confond ni avec un stock ni avec une marchandise ; la valeur monétaire en découle. Plus généralement, l'idée métallurgique du « réducteur » exprime la double libération d'une matérialité par rapport à la matière préparée, d'une transformation par rapport à la forme à incarner. Jamais la matière et la forme n'ont paru plus dures que dans la métallurgie ; et pourtant c'est la forme d'un développement continu qui tend à remplacer la succession des formes, c'est la matière d'une variation continue qui tend à remplacer la variabilité des matières”(MP, p.511, 강조는 인용자). 생산력, 혹은 잉여가치의 변주로서의 “()코드화영토화에 기초한 이런 금속-화폐형태론적 관점이, 물질/인간의 구분을 넘어서, 자본과의 우발적 조우를 준비하는 이중으로 해방된노동자에 관해서도, 연속 혹은 일관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임금노동자의 기원, ‘국내의 노동자에게 정위하는 정주혹은 트리[나무]적 관점과는 상이한, ‘이민혹은 유목의 리좀적 관점으로부터 논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 정의로 되돌아간다 기계적 계통류는 자연인공[의 구별 인용자]과는 무관한 인공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물질성이며, 특이성과 표현 특징을 담지하는 한에서, 운동하고 흐르며 변이하는 물질이다. 이 정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백한 귀결들이 생긴다. 즉, 이런 흐름으로서의 물질만을 뒤따를[추적할] 수 있을 뿐이다. 필시 따르다[좇다]라는 동작은 그 장소에서도 가능하며, 대패질을 하는 장인은 자리를 바꾸지 않고서도 나무와 나무의 섬유를 뒤따른다. 그러나 이런 뒤따르기 방식은 더 일반적인 과정의 특수한 시퀀스일 뿐이다. 왜냐하면 장인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 뒤따르도록, 즉 필요한 섬유를 가진 나무를 그것이 있는 장소에까지 찾으러 가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오게 하는 수밖에 없지만, 이 경우는 상인이 반대방향에서 궤적의 일부를 담당하기 때문에 장인은 스스로 그 궤적을 만드는[이동하는] 것을 절약했을 뿐이다. 그러나 장인은 동시에 재료를 채집하는 것이 아니라면 장인으로서 불충분하다. 재료 채집자와 상인과 장인을 분리시키는 조직[분업체제의 확립 인용자]이란 이미 장인을 지체장애로 해서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장인은 물질의 흐름 즉 기계적 계통류를 뒤따르도록 정해졌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인이란 물질의 흐름이다. 물질의 흐름을 뒤따라가는 것은 이동하는 것, 방랑하는 것이다. (MP, pp.509-10).

Nous retombons toujours sur cette définition : le phylum machinique, c'est la matérialité, naturelle ou artificielle, et les deux à la fois, la matière en mouvement, en flux, en variation, en tant que porteuse de singularités et de traits d'expression. Des conséquences évidentes en découlent : c'est que cette matière-flux ne peut être que suivie. Sans doute cette opération qui consiste à suivre peut-elle se faire sur place : un artisan qui rabote suit le bois, et les fibres du bois, sans changer de lieu . Mais cette manière de suivre n'est qu'une séquence particulière d'un processus plus général . Car l'artisan est bien forcé de suivre aussi d'une autre manière, c'est-à-dire d'aller chercher le bois où il est, et le bois qui a les fibres qu'il faut. Ou, sinon, de le faire venir : c'est seulement parce que le commerçant se charge d'une partie du trajet en sens inverse que l'artisan peut s'épargner de faire lui-même le trajet. Mais l'artisan n'est complet que s'il est aussi prospecteur ; et l'organisation qui sépare le prospecteur, le commerçant et l'artisan, mutile déjà l'artisan pour en faire un « travailleur ». On définira donc l'artisan comme celui qui est déterminé à suivre un flux de matière, un phylum machinique. C'est l'itinérant, l'ambulant. Suivre le flux de matière, c'est itinérer, c'est ambuler.

 

여기에서는 이른바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와 구별되는 장인, ‘이동체로서 물질에 순종한다고 정의된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이전以前의 상태는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소급적으로파악될 수 있는 우발적 세계사에서 발견된다. 그런 한에서 여기서의 장인은 소급적으로 그리고 소급적으로만 파악된 노동자의 전신前身이다. 이로부터 물질의 흐름에 순종하는 것으로서의 장인의 이동과는 상이한 두 번째 이동이 구별될 것이다. , “농민 또는 목축민이 계절이나 토지의 빈곤화에 부응해 토지를 바꾸는” “이동”,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숲이 재생하고 토지가 회복되면 출발점으로 회귀하도록 미리 정해진 회전을 행하는듯한 이동을 행하는 이동목축민이 그런 두 번째 이동을 담당한다고 간주되며, 그리고 상인도 또한 상품의 다양한 흐름들이 출발점과 도착점의 회전에 종속하고 있는 한에서 이동목축민les flux marchands sont subordonnés à la rotation d'un point de départ et d'un point d'arrivée ( aller chercher-faire venir, importerexporter, acheter-vendre)이라고 간주된다(MP, p.510).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의 기원상인자본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관점에 대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인용했듯이, 세계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정의된다라는 <가설>로부터 들뢰즈·가타리는 논의를 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의 이 관점은,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틀림없이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자.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소재-의 상에 있어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의 파악에 기초하여, “이동목축민이 진정한 이동자가 되는 것은, 토지나 목초의 회로가 피폐하고, 회로가 너무도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갈 때뿐이다Le transhumant n'est donc itinérant que par voie de conséquence, ou ne le devient que quand tout son circuit de terres ou de pâturages est épuisé, et quand la rotation est tellement élargie que les flux échappent au circuit”(MP, p.510)가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 회로가 자본제에 있어서의 생산-소비-분배의 회로의 알레고리라는 것은 명료하다. 따라서 여기서 얘기되는 진정한 이동자상인이다, 자본주의라는 회로너무 확대된때에 이 회로로부터 일탈’, 심지어 도주해가는 생산력으로서의 흐름혹은 기계적 계통류-물질로서의, 자본주의 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일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노동자란 물질의 흐름의 한복판에 있는 이동체라고 하는 정의가, 앞의 인용으로부터 논리적 혹은 오히려 <비정확>하게(MP, p.31) 도출되어야 한다. “회로가 너무 확대됐기 때문에 회로로부터 흐름이 일탈해간다는 것은 바로 흐름으로서의 물질에 대해이뤄지는 장인의 정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이동체라는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에 있어서의 자본제라는 결과로부터 볼 때 여전히 상실된 채인 다름 아닌 <가설> 혹은 <허구>로서의 기원, 들뢰즈·가타리는 이른바 전쟁기계와도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다. 유목론 혹은 전쟁기계라는 제목의 12고원에서의 국가의 전쟁을 총력전으로 하는 요인은 자본주의, 즉 전쟁에 관련된 자재·산업·경제에 투자되는 고정자본 및 육체적 정신적 인구로서 투자되는 가변자본과 밀접하게 결부시킨다”(MP, p.524)고 하는 구절 및 그것에 덧붙여진 폴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에의 참조를 촉구하는 각주(101)에서 그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에 덧붙여 14고원 매끈함과 홈패임에서의, 맑스 자본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른바 추상노동, ‘전쟁기계홈패임혹은 국가장치로의 회수로서 논의되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명백하게 맑스의 절대적 잉여가치가 숨쉬고 있다. ,

 

추상노동, 그 효과의 배가, 그 분업화 같은 문제가 최초로 출현하는 것은 핀공장에 있어서가 아니라 공공사업의 작업현장 혹은 또한 군대의 조직화(인간의 규율훈련뿐만 아니라 무기의 공업생산에 있어서도) 등에 있어서이다. 전쟁기계는 아마 최초로 홈패임화되고, 효과에 있어서는 배가하며, 분업화 가능한 추상적 노동시간을 산출하는 것이 됐다. <노동>의 물리적 사회적 모델이 국가장치의 발명으로서 국가장치에 속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며, 우선 첫째로 노동은 어떤 잉여의 성립에 의해서 처음으로 출현한다, 즉 스톡으로서의 노동만 존재할 뿐이며, 노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른바 잉여노동과 더불어 개시된다는 것, 둘째로 노동은 시공간의 홈패임화라는 보편적인 조작·자유활동의 예속화·매끈한 공간의 폐절 등을 행하는 것이며, 국가의 본질적 기획인 전쟁기계의 정복이 노동의 기원이며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MP, pp.611-2).

Ce n'est pas dans la fabrique d'épingles que se posent en premier lieu les problèmes du travail abstrait, de la multiplication de ses effets, de la division de ses opérations : c'est d'abord sur les chantiers publics, et aussi dans l'organisation des armées (non seulement discipline des hommes, mais production industrielle des armes). Si bien que la machine de guerre a peut être été la première à être striée, à dégager le temps de travail abstrait multipliable dans ses effets, divisible dans ses opérations. Le modèle physico-social du Travail appartient à l'appareil d'Etat, comme son invention, pour deux raisons. D'une part, parce que le travail n'apparaît qu'avec la constitution d'un surplus, il n'y a de travail que de stockage, si bien que le travail (à proprement parler) commence seulement avec ce qu'on appelle surtravail. D'autre part, parce que le travail effectue une opération généralisée de striage de l'espace-temps, un assujettissement de l'action libre, une annulation des espaces lisses, qui trouve son origine et son moyen dans l'entreprise essentielle de l'Etat, dans sa conquête de la machine de guerre .

 

이리하여 맑스의 자본에 의한 자본제에서의 추상노동으로서의 과잉노동론은, 이른바 매끈한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활동홈패임화하고, (과잉)노동을 전인격적으로 착취 즉 수탈하는, 혹은 오히려 포획하는 양태 앞서 본 이중으로 발휘되는 폭력, “전쟁기계의 홈패임화에 입각해 얘기된다. 이로부터 대차적対遮的으로 전쟁기계는 맑스/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교역·전쟁을 포함한 이른바 <교통(Verkehr)> 형태를 담하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첨단에 의해 정의되, ‘소재-도식에 구현되는 구체적인 어레인지먼트로서 작동하는 추상기계’(MP, p.636)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136불변자본과 가변자본에 있어서 맑스가 전개한 기계론이, 앞서 언급한 기계도 또한 잉여가치를 산출한다라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미 논의됐던 사태(AO, pp.275-8)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기계과거의 / 죽은 노동의 보존과 전송을 관장하는 장치라고 맑스는 말했다. 이것에 현재 시점에 있어서의 인간-노동자의 산 노동”(이라는 원래부터 잉여일 뿐인 노동)이 부가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산출된다. ‘산 노동에 의해 과거의 / 죽은 노동억지로 되살리거나, 혹은 산 노동죽은 노동의 접속에 의해 잉여가치가 생긴다. 과거의 죽은 시간 혹은 노동을 재생시키고 착취하기 위해서만 산 노동은 동원된다. ‘산 노동은 그래서 그 자체로는 무가치하다고 말해도 좋지만, 다른 한편 그것 없이 착취는 수행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생기는가라는 위치 결정이 불가능하다는 사태가 생긴다. 천 개의 고원에서는 이 논의를 받아, 맑스의 근본적 성과는, 잉여가치는 위치 결정 불가능하다는 점의 해명 및 기계가 그 자체 잉여가치를 산출하고 자본의 유통이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구분을 무효화한다는 예지, 이렇게 두 가지 점에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MP, p.613). 또한 이런 맑스를 바탕으로 하여, 이제 산 노동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기계에 의한 잉여가치만으로 자본주의가 매끈한 공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즉 자본이 절대속도에 도달한 상태가 찾아왔다고 하는 것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현황 인식이다(MP, p.614). 거기에서는 이른바 냉전붕괴 이후에 전면화된 감시사회’, ‘전지구화’, ‘남북전쟁이나 걸프전’, 나아가 동시다발테러같은 사건에 대한 예언적 서술이 엄청나게 발견되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후적으로만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며, 여기서는 젖혀 두고 묻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시 되어야 하고 소급적으로 ()기술되는 우발적 세계사, 아래에서 개괄한 자본과 노동의 조우에 잇어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재장전된 유물론사관> 구상이 전망된다.

 

긍정과 도주 : 우발성의 유물사관을 위해 

각각의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가 되고 있는 속성 하에서 신이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만 신을 원인으로 하고, 신이 어떤 다른 속성 하에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 윤리학2부 정리6

 

노동력을 포함한 여러 상품들의 생산-유통-()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을 완결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이 원환을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조우를 기점으로서 기술하는 것. 이러한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의 기획에, 『『자본을 읽자에 수록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의 근본 개념에 대해논문이 크게 기여하는 점이 우선 확인되어야 한다. 이미 본 이윤율의 영원한저하 경향 법칙자본주의의 공리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 한에서의 으로서의 코드의 잉여가치흐름의 잉여가치로의 변용이라는 논의 그 논거는, ‘노동력자본사이에는 공통 척도가 없다는 점에서 찾아졌다 도 발리바르에 의거하여 이뤄진 것이었지만(AO, p.271), 이것에 덧붙여 “<잠재적으로는(virtuellement)> 별개로 존재하고 있자유로운 노동화폐-자본이라는 두 개의 요소의 조우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aurait pu ne pas se faire)”라는, 본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장에 이어서 곧바로 이뤄지는 두 요소에 대한 언급, 요소의 한쪽은 낡은 사회 신체를 구성하는 농지구조의 변용에, 다른 한쪽은 이 낡은 신체의 무수한 모공 속에 난외-여백적으로(marginalement) 존재하고 있는 상인과 고리대금을 경유하는, 완전히 다른 계열에 의존하고 있다”(이상은 AO, p.266)가해진 각주(76)에서 인용되는 발리바르가 결정적이다. 이하에서 보는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인용되는 발리바르의 논문의 해당 대목은 물론 4. 이행의 이론을 위한 요소들“1. 본원적 축적, 한 가지 전사(前史)”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조우를 둘러싼 맑스의 고찰에 대한 주석의 일부분이다.

 

자본주의의 구조가 지닌 통일성은, 한번 구성되면 자신의 배후에서는 찾아낼 수 없다[배후로는 되돌아가지는 않는다](ne se retrouve pas en arriere d’elle) (필요한 것은) 이것들의 조우적 연락(leur conjonction)의 결과에서 출발해 [소급적으로] 규정 [한에서의] 요소들과, 이런 결과들과는 그 개념에 있어서 무관한 왜냐하면 결과는 다른 생산양식의 구조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되어야 하는 역사 분야와의 사이의 조우(la rencontre)가 이미 산출되고 있으며, 또한 엄밀하게 사고되고 있는 것이다. 선행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구성된 이런 역사 영역에 있어서는, 그 계보가 추적되는 이런 요소는, 정확하게는 난외-여백적 상황, 즉 비결정적인 상황만 갖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에 의한 보충. ‘조우’, ‘조우적 연결의 강조도 들뢰즈·가타리의 것 인용자]

 

여기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구조는 자신의 통일성을 자본주의의 전사에서는 갖지 못하고, 통일성은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개의 요소조우적 연결이 요소들과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사고해야 할 역사 영역과의 사이의 조우에 있어서 획득됐지만, 다만 이런 요소들은 이 조우적 연결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결과와 이것들 각각의 역사를 지닌 요소들은 개념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본자본주의의 구조에 있어서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에 , 이런 요소들은 역사적으로 비결정적인 상황밖에는 갖지 못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전사로서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자본주의의 구조의 통일성이 부여되고 있는가에서 보이는 현재에 있어서도 부단하게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전사는 자본주의의 통일성에 있어서 필요하고 불필요한, 배제되기 위해서만 소환되는 난외-여백이며, 난외-여백으로서의 전사혹은 비결정적 상황, 노동과 자본의 <조우>가 발생하는 역사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는 이 <조우>, ‘자본주의의 구조로부터 소급적으로 발견되는 세계사속의 도처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조우>가 발생하는 상황을 구조에 있어서 소급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관점의 제시에 있어서, 발리바르와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 공유되는 것은, 스피노자의 이른바 인과성여기서는 필연사관 내지 목적론적 사관을 가리킨다고 생각해도 좋다 비판이며, 주지하듯이 그것은 알튀세르파에 있어서는 칸트파 정신분석의 무의식과 관련해서 무의식은 그 효과-결과에 있어서 실재한다고 하는 테제로 변주되고 있으며 무의식의 징후가 구조에 있어서의 전사의 발견으로서, 계급투쟁-개입의 계기가 된다 또한 들뢰즈에 있어서는 표현표출도 유출도 아닌 표현에 기초한 종합적 방법의 문제계에 있어서 정제되는데, 여기서는 들뢰즈·가타리의 우발적 세계사와 관련되는 한에서의 스피노자를 언급하고자 한다.

윤리학1부 정리 10 “실체의 속성 각각은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어야 한다비고에서는,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 것이 현실적인 구별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현실적 구별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표현내용의 구별로서 나타난다 라고 규정되고 있다 속성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사고되는영역이 천 개의 고원에서의 내재평면이다 . 속성자본노동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구성하는 요소로 파악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런 요소각각의 현실적인 구별에 의해, (아직 그것이라고 동일시[규정]되지 않는 그런 요소들의) <조우>의 소급적으로 동일시[규정]되는 역사적 요소가, 그런 요소들에 있어서 파악됨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가 갖는 통일성, “이런 요소들 각각의 역사를 그 한복판에서 사고해야 하는 역사 영역과의 사이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것이 제시될 것이다. “자본주의그것에 비추어 세계사가 소급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를 성립시키는 노동자본전사<조우>로부터 뒤집어서, 더 소급적으로 세계사의 전역에 이런 전사<조우>를 찾아낸다는 구상에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우발적인 세계사는 기초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들뢰즈·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 있어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이른바 역사, 이런 의미에서의 전사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그리고 이 전사, 단서로부터도 목적으로부터도 일탈한 강도의 상태를 가리키는 고원’, 혹은 사물 각각의 이것임에 기초한 개체화-사건이 발생하는 내재평면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풀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과성에 근거한 시계열적인 사태들의 연쇄가 아니라,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서술된, 자본주의에 의해 소급적으로 파악되는 우발적인 세계사이다. 거기에 있어서 특히 중시되는 것이 비신체적 변형행위로서 상황에 개입하는 명령어이며, 이런 명령어들은 날짜혹은 사건으로서, 역사상에 출현한다 19231120일 독일에서의 신화폐교부 포고, 혹은 레닌의 191774. 이 집단-언표적 어레인지먼트, 혹은 사건, 이른바 자본제사회에 내재, 혹은 평행적으로 일어나는 비결정적인 상황혹은 전사의 영역에 있어서, 따라서 자본제사회의 언제 어디서든 일어난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잉여가치가 어디서 생기는지가 결정 불가능하다라는 것과 평행하여, 사건혹은 앞서 인용한 혁명적 잠재력의 현실화는, 언제 어디서 생기는가를 모른다 = 언제 어디서든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AO, p.454).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 공리계로부터의 도주내지 누출의 선분의 하나일 것이다. 또한 이런 명령어를 구성하는 분절적 단편이, 광물로부터 생물을 거쳐 언어, 더 나아가 인간의 집단적 어레인지먼트에까지 이르는, 이중분절을 겪고 표현에서 내용으로 혹은 그 반대로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소재-도식에 관통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사적 유물론우발성 유물론으로 재장전된 것이 이해될 것이다 그때 <matérialism>물질주의라기보다는 소재-도식에 있어서 내용과 표현이 서로 연속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소재주의로 번역된느 것이 적절하다 . 여기서의 역사는 목적론으로부터도 필연성으로부터도 누출-도주한 고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원으로서의 역사로, 이제 자본주의 그 자체를 도주시켜야 한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 성립을 위한 필요하고 불필요한 전사는 자본주의의/라는 결과의 안쪽에 있어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결과, ‘전사라는 자본주의의 원인혹은 오히려 조건이 내재 혹은 평행주행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말했듯이 요소 각각의 현실적인 구별, 자본노동<조우>의 결과로부터 소급적으로 규정[식별]되는 역사적 요소 각각의 파악에 의해, 이것들 사이에는 그 어떤 필연적인 결합관계도 발견될 수 없다는 것 비결정적 상황, 따라서 또한 이런 결합에는 우발적으로 조우하지 않는 한 부단하게 알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 노동의 각각을 그 자체에 의해서긍정적으로 파악하는 것, 현실적인 구별에 있어서, <>에 의한 접속 그 자체가, 단서도 목적도 갖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 한에서의 역사의 영역에 있어서의 우발적인 연결(conjonction)이었음이 제시된다. 이런 ‘conjonction’<> 또는 본성의 차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런 <> 그 자체를 그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한다면, 거기에는 무수한 <조우>의 가능성,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이 무수하게 열릴 것이다. 그때 자본주의의 성립에 있어서 발생한 저 우발적 조우, 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소급적으로 파악되는 세계사를 가득 채운다는 것을 소급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그 자체를 도주시킨다고 하는 명제의 내실이어야 한다.

이리하여 천 개의 고원에서의 상호 구성하는 <소재-> 도식에 근거한 내용-표현의 <유물론>적 구별을, 내재평면에 있어서의 사물들의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파악된다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적 구별과 들뢰즈·가타리가 상정한 것의 의의가 이해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어서 제시된, “혁명적 잠재력을 현실적인 것으로 하는” “인과관계의 단절로서의 절단실제로 발생하는” “어떤 정확한 순간이란, <>의 출현의 순간을 가리킨 것이며, 따라서 구별은 오히려 ‘~한 절단이다. 그리고 이 단절은 실재하는 것에 밀착한 역사의 고쳐 쓰기를 강제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기괴하게도 다의적인 순간을 산출한다. 이것이 들뢰즈·가타리에 있어서 재장전된 우발성 유물론사관이다. 거기에서는 현실적 구별에 있어서, 우발적으로 혁명의 잠재력이 현행화actualize된다. 내재평면에 있어서 무수한 어레인지먼트를 담지하는 표현과 내용은, 상호 연속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똑같은 것이며, 따라서 형태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구별된다. 스피노자가 윤리학2부 정리 6에서 말한, “각각의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가 되고 있는 속성 아래에서 신이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만 신을 원인으로 하고, 신이 어떤 다른 속성 하에서 생각되는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때의 내재평면으로 풀이할 때, 현실적 구별의 함의는 훨씬 명료하다. , 내재평면에 있어서는, “만일 세계사를 소급적으로 파악시키는 자본주의 그 자체가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 조우에 있어서 성립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세계사의 도처에 이러한 조우가 똑같이 발생한다고 하는 만일 ~라면(si), 그것들은 ~이다(donc)”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내재평면에 있어서는 자본주의(라는 원인)가 세계사(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는 인과성은, 세계사 앞서 말한 전사의 의미에서의 라는 여기서의 결과에 있어서, 자본주의라는 여기서의 원인의 성립 조건, <조우>가 발견되고, 뒤집어 자본주의라는 결과에 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안티 오이디푸스자본주의의 빛에 비추어 모든 역사를 소급적으로 파악하는것은 원인(자본주의)에서 결과(세계사)”라는 인과관계로 고쳐 써질 수 있다. 이 관계가 결과(자본주의)에서 원인(세계사)”으로 ()전도시킨 다음에, 다시금 원인(세계사)에서 결과(자본주의)”로 나아간다. 이때 은 자본주의에 의한 스스로에 대한 오인-전도였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노동력을 포함한 상품들의 생산-유통-소비-()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환을 완결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본과 노동의 각각이 그것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되는 것에 있어서, 이 원환을 자본과 노동의 우발적인 조우를 기점으로서 기술하는 것,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조우를 필연으로서가 아니라 무수하게 가능한 다른 조우와 더불어 기술하는 것에 의해서, 자본주의를 역사 앞서 언급한 푸코가 말한 의미에서의 로 귀환시키는 것, 그것이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의 들뢰즈·가타리의 미증유의 <실험>이었다. 그리고 이런 “sidonc의 논리를, 들뢰즈·가타리는 다름 아닌 맑스에서 찾아내고 있다(AO, p.266). 즉 맑스의 이른바 1844년의 경제학과 철학세 번째 초고 욕구, 생산, 분업이라는 절에서 나타난, <만일 라면, 그것들은 네게 c‘est donc à toi si>(원문에서는 라틴어 ‘conditio sine qua non’)라고 말한 산업 환관産業宦官의 악마의 계약이 그것이다. 환관宦官즉 자본제 사회에 있어서의 생산자, 이웃을 향해서 네가 바라는 것을 나는 네게 주겠다, 그러나 너는 sine qua non의 조건을 알고 있네, 즉 만일 네가 원한다면, 그렇다면 이라고 속삭인다, 이미 봤듯이 폭력을 겪는 대상을 산출하면서 그 폭력을 자본제의 불필요하고 불가결한 전제로 추켜세우는 국가장치, 혹은 미리 스톡되는 것으로서만 과잉이라고 지목한 뒤에 노동을 수탈하는 포획장치와 상동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의 이른바 개념인물이다. 따라서 이 일화를 언급하는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공리계가 이런 ‘si donc 의 논리를 재빨리 활용하는 기예를 터득하고 또한 맑스도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주장한다고 풀이해야 하며, 더욱이, ‘si donc 의 논리는 바로 자본주의 자체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들뢰즈·가타리는 매우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본<> 노동은, 이것들이 본성의 차이에 있어서 질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우발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결말을 대신해 : 원환의 파쇄

이리하여 역사를 자본주의에 봉사-동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를 역사로 귀환시키는 시도의 준비가, 여기서 정비됐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영원히 불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노동<> 자본의 쌍방이 자본주의라는 결합-어레인지먼트로부터 도주하는 사태를 조직화해야 한다. 노동<> 자본이 서로 잡아당기는, 즉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긍정적으로 파악됨으로써, ‘억지를 부린결합에서 도주-누출하는 계기가, ‘우발적인 세계사속에 깃들어 있다. , 자본주의의 원환은 파쇄되어야 한다, 혹은 이것들은 원래 파쇄되고 있는 두 개의 원환의 <이음매 joint>를 찾아내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원환을 형식적으로만 파악한다면, 원환은 닫힌 구조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자본 축적의 원환에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원환이 반드시 나란히 달리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자본주의의 원환은 초점을 두 가지 갖는 타원이라고 표현되어도 좋다. 원환의 중심은 하나가 아니며,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중심이 거기에 겹쳐져 있는 것이다. 이 타원을 찾아내어 두 개의 원환을 찾아내기 위한 <가설> 혹은 가정명제가, “만일 자본과 노동의 조우가 우발적이었다고 한다면이다. 이제 이 두 가지 원환의 결합을 푸는 기예가 탐구되어야 한다. 이 결합은 필연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음매 joint><벗어나는(out of)> 것은 <유물론>적으로 적어도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두 개의 원환을 지혜의 고리처럼 <벗어나고>, 그리고, 만일 있을 수 있다면, 결합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말하면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 대해서, “이 책은 각 고리가 다른 고리로 결합할 수 있는 파쇄된 고리의 집합이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이런 파쇄된 고리의 ‘떼어냄이음의 기예(operation), 자본주의의 원환에 대해서도 시행되어야 할 때이다. 그런 떼어내는 방식-이음매 없는 방식out of joint의 조사에 대해서는, 그러나 뒷날을 기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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