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ritsumei.ac.jp/acd/re/k-rsc/hss/book/pdf/no120_08.pdf
「歴史をつくる」─ジャック・デリダの系譜学的脱構築にむけて
« Faire l’histoire » : vers la déconstruction généalogique de Jacques Derrida
宮﨑 裕助*
한국어 번역본
이번에 출판된 가메이 다이스케(亀井大輔)의 『데리다 : 역사의 사고(デリダ : 歴史の思考)』(法政大学出版局, 2019年)를 둘러싸고 이 책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조금은 그 앞부분 혹은 주변에서부터 그 분위기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얼핏 보아서 알 수 있는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은 드디어 일본어의 데리다 연구가 한 권의 책으로서, 이른바 세계의 연구수준에 대적하는 형태로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까지 데리다에 대한 책이나 논문은 일본어로도 많이 쓰여 왔지만, 총론적인 입문서나 개설서가 아니라면, 많든 적든 자신만의, 각 저자 독자적인 문제의식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상을 타파하는 형태로, 동시대의 데리다 연구의 맥락을 의식하면서, 문제 설정이나 논의가 세워지고 있다.
이는 학술연구로서 데리다의 저작에 씨름하려는 경우는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향후 10년, 20년 후 일본어권에서도 새로운 독자를 얻고, 데리다의 작업을 계승하기 위해서, 어떠한 객관적 혹은 학술적 가치를 담보한다는 점에서 역시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초고의 연구이다. 이 책에는 UC 어바인에 소장된 초고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데리다 저작의 생성 연구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그것이 주된 연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것이 포함된 연구는 일본어로는 최초이다. 이 점의 중요성도 서두에서 강조해 두고 싶다.
그런 점을 먼저 강조하면 2차 문헌에 대한 언급이나 선행연구에 대한 변호 등 엄청난 수의 주석이 달린 번잡한 논의가 이어지는 연구서라고 상상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다. 독자는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이 책의 논술은 대체로 읽기 쉽고 명쾌하다. 간결하게 요점이 정리되어 있고, 데리다의 후설 연구나 하이데거 독해의 복잡한 논의도 스트레스 없이 읽을 수 있도록 문장이 잘 다듬어져 있다.
자성의 의미를 담아 말하면, 데리다론은, 자주 데리다 자신의 문장에 끌려간 결과, 논자의 문장과 논하는 대상인 데리다의 문장의 수준 차이를 알 수 없게 되며, 또한 데리다의 문장을 일본어로 번역했을 때에 발생하는 다양한 표현에 압도되어 버려 매우 읽기 어려운 것이 되고,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문장이 되기 쉽다. 미라를 잡으려다 미라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반해 이 책의 문장은 그런 점이 없이 안심하고 읽어 나갈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 점도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솔직히, 데리다의 번거로운 문장에 익숙해져 버린 평자에게는 반대로 자주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것은 오히려 데리다론으로서 모범적인 가독성과 맞바꾼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결점이 아니라 드문 장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테마는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이다. 데리다가 ‘역사’를 어떻게 묻고 생각해 왔는지가 주제다. 데리다 연구자가 보기에, 역사라는 토픽이 충분히 큰 문제이기를 계속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책에서도 논의되고 있듯이, 데리다의 최초의 간행 단행본 『기하학의 기원・서문』부터 후설의 초월론적 역사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 후의 데리다의 사고의 걸음으로부터 ‘역사’가 일관되게 핵심어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18~19쪽에 적혀 있듯이, 1990년의 석사논문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의 출판 이후, 데리다 연구에 있어 역사 또는 역사성은 데리다의 초기 사상 형성에서 큰 문제영역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레너드 롤러나 파올라 마라티 같은 중요한 데리다론이 출간되었다.[주1]
[주1] Leonard Lawlor, Derrida and Husserl: The Basic Problem of Phenomenology, Indiana University Press, 2002; Paola Marrati, La genèse et la trace : Derrida lecteur de Husserl et Heidegger,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8.
그리고 이 책이 데리다 연구사에서 새로운 시도에 속하는 것은 2013년의 『하이데거 강의』 이후, 또한 IMEC나 UC 어바인의 아카이브가 어느 정도 정비되고, 페터스의 데리다 전기나 에드워드 베어링의 초기 데리다 연구[주2]도 나온 후에, 이러한 유고들과 증언을 바탕으로 다시 데리다의 역사 문제에 착수하고 재검토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2] Benoît Peeters, Derrida, Flammarion, 2010〔ブノワ・ペータース, 『デリダ伝』, 原宏之・大森晋輔 訳, 白水社, 2014年〕; Edward Baring, The Young Derrida and French Philosophy, 1945-1968,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이리하여 이 책의 주제가 되고 있는 ‘역사의 사고’에 대해서, 데리다 연구의 틀 안에서 그 중요성은 명백하다. 여기서부터 조금씩, 이 책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 또는 질문을 섞어 가면서, 논평을 덧붙이고자 한다.
1. 데리다와 ‘역사의 사고’
데리다 연구라는 틀에서 벗어나 ‘역사의 사고’라는 주제를 조금 물러나서 본다면, 데리다의 작업을 특징짓는 것은 ‘역사의 사고’라는 토픽은 조금은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이 평자에게는 있다. 20세기의 유럽철학, 특히 포스트하이데거의 문제권 속에서 사고하고 있는 주요 철학자들 대부분이 역사를 어떤 형태로든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가까운 장-뤽 낭시나 필립 라쿠-라바르트 같은 사람은 물론이고 에마누엘 레비나스, 장-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르, 프랑스어권 밖에서는 발터 벤야민, 테오도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카를 뢰비트 등 각 철학자들에 관해 모두 역사의 사고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오히려 예를 들어 질 들뢰즈처럼 ‘역사의 사고’를 적극적으로 떠맡아 수행하지 않았던 철학자들이 ‘반역사적인 사고’로서 첨예한 물음이 두드러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한 경우에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를 특징짓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철학자들 중에서 부각되는, 역사 철학의 역사, 요컨대 ‘역사의 사고’의 역사, 적어도 그 전체의 배치 같은 것을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즉, 데리다 ‘역사의 사고’의 특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데리다의 저작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데리다의 기획과는 별개로, 그러한 시도가 처음에〔맨 먼저〕 조금은 행해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어디까지나 데리다 연구서라는 틀에 머물러 있으며, 그 겸손함에 있어서 데리다의 텍스트에 내재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책이 채택한 접근법은, 우선, 데리다의 특히 60년대 저작에 초점을 맞추어, 후설, 하이데거, 레비나스, 푸코와의 접점에서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를 데리다 자신의 저작에 입각해 떠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후설, 하이데거, 레비나스, 푸코와의 접점과 관련해, 평자 나름대로 느낀 점 등을 차례로 지적하겠다. 이하의 코멘트는 이 책에 대한 이의제기라기보다 이 책이 여전히 남기고 있는 여백을 어떻게 가리키는지, 그것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 그러한 점에 대해 특히 데리다의 말년까지의 저작 전체를 고려함으로써 질문하는 것이 될 것이다.
1.1 후설
우선 이 책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정성스럽게 논하고 있는 것은 데리다의 후설론이며, 그 역사주의 비판과 관련해서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를 밝힌다는 점이다. 어떠한 역사를 무반성적으로 전제하지 않고, 그리하여 역사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전에, 역사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초월론적인 역사성을 묻는 것, 나아가 그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초-초월론적 역사성’이라는 이름 아래 그 역사성의 임계점을 탐구한다는 것, 이러한 점들이 이 책 전체를 이끄는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의 틀을 가져오고 있다.
후설 현상학에서 시간론이 문제되는 경우에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책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칸트적 의미에서의 이념”이 가지는 통제적〔규제적〕 작동이다. 본래 무한히 계속될 수밖에 없는 체험의 유한성을 후설은 적극적 무한으로서 전체화하고, 거기에 역사의 이념적 지평을 설정했다. 데리다는 그러한 전체화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직관의 유한성을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이념을 하나의 무한 원점으로 설정함으로써 선취한다는 무한 개념의 이러한 취급은 역사의 목적론적 구성으로서 칸트 이후의 형이상학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절차가 되고 있다. 후설 자신은, 그러나 칸트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칸트에 입각해 그 함의를 밝히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의 기획은 후설의 청부 판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이러한 이념의 목적론은 칸트의 저작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의 목적론은 『판단력 비판』의 제2부를 이루는 목적론적 판단력에 대한 비판으로서 취급되고 있다. 거기에서는 자연을 최종 목적으로 삼은〔한〕 목적론적 체계를 초월하면서 그 근거가 되고 있는 ‘궁극 목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의 사명으로 간주되었다. 거기에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연의 목적론적인 질서에 최종적으로는 조화되도록 세워져 있던 반면, 『판단력 비판』 제1부의 미적 판단력에서는 목적 없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결정으로서 실현하는 보편성을 향해 판단력의 원리가 제시되고 있으며, 칸트의 목적론은 『판단력 비판』의 저작 자체 속에서 항상 중단되는 계기에 노출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주3]
[주3] 이 점에 대해서는 나의 『판단과 숭고(判断と崇高)』, 知泉書館, 2009年, 제2장, 특히 주 6(18 ~19 註頁)을 참조.
혹은 「세계시민적 견지에서의 보편사의 이념」이라는 칸트의 역사철학을 이야기하는 데 필수적인 텍스트가 있다. 인류사에서 자연의 숨겨진 계획으로서 보편적인 세계시민적 상태가 제시되고 있는 반면, 영구평화론에서는 그러한 세계공화국의 소극적 대체로서의 국제연맹이 제시되고 있으며, 즉 여기에는 결코 단선발전적으로 이념이 실현되는 진보사관이 아닌, 역사의 리얼리스트로서의 칸트가 있다. 칸트의 텍스트 속에서 그러한 역사적 도식의 문제를 데리다 자신이 후일 논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주4]
[주4] Jacques Derrida, Le droit à la philosophie du point de vue cosmopolitique(1991), Verdier, 1997〔「世界市民的見地における哲学への権利」, 西山雄二 訳, 『現代思想』 2009年 11月号 수록〕.
1.2. 헤겔
그런데 데리다의 석사논문인 후설 연구는 후설 현상학의 독해에 ‘근원적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초변증법주의에 의해 후설의 방법론을 이루는 이원론에 근원적인 착종-오염을 읽어내는 것이었다. 이 독해에서의 변증법이라는 용어는 트란 뒥 타오Tran Duc Thao나 장 카바이예Jean Cavaillès에 의한 용어법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당초부터 데리다의 접근법에는 일정한 변증법적 사고가 끼어들어 있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역사철학에 관한 이 책의 취급에 대해 한 가지 큰 불만이 있다면, 데리다와 헤겔의 관계, 특히 데리다가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해 기획한 격투가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헤겔철학은 데리다가 이폴리트 아래에서 박사논문집필 등록을 한 것도 있고, 데리다에게서 초기 무렵부터 큰 물음의 표적이었고, 실제로 박사논문의 주제이기도 했지만,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헤겔의 역사철학이 칸트의 이념적 목적론과는 또 다른 상이한 역사철학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즉, 헤겔에게서는 칸트처럼 역사의 목적이 언젠가 달성되어야 할 이상으로서 무한 원점에 놓이고 지연〔연기〕된다는 목적론적 구조가 아니라 바로 역사를 인식하고 서술하는 자신이 그 역사의 담지자가 되어 그 역사를 완성하고 성취함으로써 역사 그 자체를 완료시키는 그러한 역사의 모델이 제시되어 있었다. 거기에서는 역사의 모든 우연한 일이 사후적으로 재추적되고, 역사 자체의 완성 목적으로 재해석되어 필연화된다. 모든 것은 정신이 자기 실현을 위한 역사의 변증법을 구동하고 성취하기 위한 재료로 삼을 수 있는 강력한 논리가 여기에는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209頁에는 『유한책임회사』로부터의 인용이 있다. 여기서는 “목적론의 구조 내에 있는 내적 모순”이 거론되고 있으며, 지향성의 목적론이 텔로스를 설정하면서도 사실상 ‘끝〔종언〕’이 없는 목적론이라는 점이 설명되고 있다. “실제로는 이러한 끝〔종언〕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의도-지향의 목적론적 본질의 외재적 잔재인 것이 아니라, 가장 은밀하고 가장 환원 불가능한 그 타자로서, 타자 그 자체로서, 그 본질에, 그 본질에 있어서 속하고 있다.”[주5]
[주5] ジャック・デリダ, 『有限責任会社』, 高橋哲哉・増田一夫・宮﨑裕助 訳, 法政大学出版局, 2002年, 278頁.
이러한 목적론을 설정하는 입장 자체는 칸트의 그것과 다르지 않지만, 이 목적론의 구조를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역사철학의 일부로서 적극적으로 명시하는 것, 즉 ‘끝이 없음’ 그 자체를 목적론에 내재적인 타자로서 자각적으로 목적론의 구조에 편입시킴으로써〔끼워넣음으로써〕 이것을 떠맡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데리다는 목적론의 구조를 명시화하는 수준에서는 여기서 헤겔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입장에서 그 목적론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칸트의 목적론적 역사주의에 대한 것과는 별개의 대응이 필요하다. 아마도 우리는 1974년의 대작 『조종』을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 책이 처음부터 기획하지 않았던 것이라고는 해도, 본래는 이 책이 설명해야 할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 안에 포함되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주6]
[주6] 이와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것은 데리다에게 영향을 받으면서도 데리다에게 대항하고 폴 드 만의 맥을 잇는 형태로, 헤겔의 역사철학이 품고 있는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 베르너 하머허의 작업이다. 하마허의 주저 및 일본어 번역본이 있는 논문으로는 다음을 참조. Cf. Werner Hamacher, »pleroma : zu Genesis und Struktur einer dialektischen Hermeneutik bei Hegel«, in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Der Geist des Christentums«: Schriften 1796-1800, Ullstein, 1978, S. 7-333〔抄訳, 「ヘーゲルの読解行為─「吐き気」をめぐるトロープ操作」, 宮﨑裕助 訳, 『SITE ZERO/ZERO SITE』第0号, メディア・デザイン研究所, 2006年, 248~277頁〕. 또한 「文学的出来事の歴史と現象的出来事の歴史とのいくつかの違いについて」, 宮﨑裕助・清水一浩 訳, 『知のトポス』, 第11号, 新潟大学大学院現代社会文化研究科, 2016年, 173~206頁.
1.3. 하이데거
헤겔을 둘러싼 문제는 하이데거에 의한 역사성에 대한 물음을 데리다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물음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이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를 묻는 배경에는, 2013년의 하이데거 강의의 출판이 있었다. 당시의 데리다가 하이데거에 접근하는 것은 특히 『존재와 시간』의 제72절 이후이며, 역사성과 시간성이 주제화되어 있는 제2편 제5장이다.
이 책이 하이데거의 강의록을 읽을 때 주목하는 것은, 데리다가 이 대목을 읽어 나가는 데 있어 언어의 물음을 제기하고, 메타포(은유)를, 역사성을 매개하는 본질적인 계기로 전개한다는 방향성이다. 이것은 『존재와 시간』의 논의에서는 직접적으로 끌어낼 수 없는 논점이며, 여기에 데리다의 접근법의 독자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만, 하이데거 고유의 방식으로 추구되고 있는 ‘시간성과 역사성’의 물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존재와 시간』의 해당 대목을, 데리다와 거리를 두면서 읽어 나감으로써 데리다의 접근법을 좀 더 비판적으로 검토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이데거가 거기서 격투를 벌이고 있는 역사철학자들, 딜타이나 요르크 백작의 역사철학과의 대결, 그리고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에 이르는 시간 개념이 통속적인 것으로 배척되는 그 논의를 좀 더 내재적으로 추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데리다의 텍스트 중에서 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여백』에 수록된 「우시아와 그람메」인데, 이 책에서는 언급은 있으나(149, 177頁), 이 텍스트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형태로는 취급되고 있지 않다. 시간론을 둘러싼 하이데거의 헤겔 비판을 근거로 하이데거는 어떤 방식으로 역사성을 다루고, 데리다는 그것을 어떻게 계승했는가 혹은 계승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역사’라는 주제에 입각해, 데리다 자신의 시간론과 관련 속에서 물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1.4. 레비나스
또 하나는 레비나스. 평자가 볼 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논점 중 하나는 목적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종말론에 대한 물음의 소재지를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끝〔종언〕, 인간의 끝〔종언〕, 역사의 끝〔종언〕, 바로 그렇게 말함으로써 오히려 끝〔종언〕을 계속해온 종말론을 데리다는 강하게 비판했지만, 결국 이는 역사의 목적론적 구조 자체로부터 요청되는 담론의 한 패턴이었다. 따라서 데리다의 초기 저작에서 목적론과 종말론은 동일시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메시아적 종말론을 전개하는 형태로 역사의 목적론적 전체성으로 회수〔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종말론의 소재所在를 지적하기에 이른다.
이 지적이 왜 중요한가? 90년대 이후 데리다는 종종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을 화두로 삼으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목적론과 동일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종말론의 가능성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메시아적인 것’의 사정거리는 하나의 역사적 구조 속에서 해명될 것이다. 정의가 특정한 종교에 의존하지 않는 아프리오리하게 메시아적인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적이라는 것, 데리다에게 이 또 다른 종말론의 소재所在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의 의미를 이해시켜 주는 단서가 될 것 같다.
평자가 이 물음에서 떠올리는 데리다의 택스트는 부정신학의 역사를 재검토하려고 한 「어떻게 말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가 ─ 부인의 여러 가지」(『프쉬케Ⅱ』), 믿음〔신앙〕의 철학사를 추적한 후에 데리다가 내던진 사막의 메시아주의에 대한 물음(『믿음과 지식』), 헤르만 코헨의 텍스트에 입각해, 독일 사상의 히브리즘적 전통에 씨름하고 있던 「전쟁중의 해석들 : 칸트, 유대인, 독일인」(『프쉬케Ⅱ』) 등이다. 레비나스에 입각해 전개하더라도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의 사정거리에 관한 부정신학 또는 종교론적 맥락을 고려하면 데리다가 말년에 향하려던 ‘역사의 사고’의 소재를 더 구체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1.5. 푸코
그리고 푸코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이 책이 데리다-푸코 논쟁에 페이지를 할애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데리다의 초기 역사 개념에는 구조주의와의 대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대결해야만 했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구조를 항상 비역사적인 것으로만 사고할 수 있는 경우에 어떻게 구조 그 자체의 발생이나 생성을 물을 수 있는가, 어떻게 구조는 변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구조주의 속에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주7] 일반적으로 데리다가 ‘포스트 구조주의’로 정리되는 데는 역시 이유가 있다. 다른 한편, 푸코는 『광기의 역사』의 초판 단계에서는 역사의 구조론적 기술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시도를 특징짓고 있으며, 이 책은 일종의 ‘역사의 구조주의’로서 당초에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주7] 이 문제와 씨름한 대표적인 논집으로는 다음을 참조. Post-Structuralism and the Question of History, eds. Derek Attridge, Geoff Bennington and Robert You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데리다의 푸코론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에크리튀르와 차이』 수록)는 결코 푸코 비판으로 시종일관하는 것이 아니고, 『광기의 역사』의 기획의 장대함과 중요성을 최대한 어림셈을 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획이 자주 빠져 있는 역사주의, 역사의 구조론적 서술의 함정을 지적하고 있다. 이 지적이 푸코에게 심각한 것은 푸코가 기존 역사주의의 도식 속에서 ‘광기’가 정당하게 다뤄지지 않고 배제되어 온 것을 문제시하고 이 도식에서 ‘광기’를 구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즉, 푸코는 그러한 기획 하에서 ‘광기의 고고학’이라고 칭하면서 광기의 역사를 그려내려고 시도했는데, 이러한 푸코의 기획 그 자체가 새로운 광기 배제에 빠져 버리고 있다는 점을 데리다는 문제 삼은 것이다.
푸코는 데리다의 초기 단계의 강연을 청중의 한 사람으로서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 감사와 찬사의 편지까지 썼다.[주8] 데리다의 입론은 신랄한 비판을 포함하지만, 바로 가능성의 중심에서 『광기의 역사』를 읽어낸 것으로서 푸코는 결코 데리다의 입론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주8] 앞의 책, 『デリダ伝』, 174~ 175頁.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푸코가 8년이나 지난 후에야 데리다에 대한 반비판을 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61頁). 이 책이 지적하지 않은 점으로서 아마도 외면적인 이유에 의해 우선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제라르 그라넬의 데리다론[주9]이 《크리틱》에 게재하기 위해 심사를 받았을 때, 이 논문은 데리다의 이름으로 푸코를 격렬하게 배척하는 대목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소 당파적인 내용으로 읽히기 때문에 푸코는 게재에 반대했다. 푸코는 데리다도 당연히 자신과 같은 의견이라고 생각했지만, 데리다는 불개입의 입장을 취한 채, 게재에 동의한 적이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주10]
[주9] Gérard Granel, « Jacques Derrida et la rature de l’origine », Critique 246, Novembre 1967〔ジェラール・グラネル, 「ジャック・デリダと起源の抹消」, 宮﨑裕助・松田智裕 訳, 『知のトポス』, 第10号, 新潟大学大学院現代社会文化研究科, 2015年, 215~253頁〕.
[주10] 앞의 책, 『デリダ伝』, 243~244頁.
이후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 등에서 자신의 역사 기술의 방법론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점차 『광기의 역사』 당시의 입장과 갈라서게 된다. 그것은 데리다와 논의를 공유할 수 있는 입장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책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결과적으로 데리다에 대한 반비판에 이르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데리다에 대한 응답 속에서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간과했다고 데리다가 비판했던 데카르트의 ‘악령’ 개념에 대해 대답하고 있다.[주11] 이 책은 이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듯이, 결국 푸코는 데리다의 물음을 본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의견교환에서는, 데카르트 성찰의 제1성찰에 대한 매우 세세한 논의의 응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상세한 데카르트 해석에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마 검증의 여지가 있었던 것은, 훗날 『지식의 고고학』 등 푸코의 방법론적 성찰에 데리다의 논의가 어디까지 관련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 것이다.
[주11] ミシェル・フーコー, 「デリダへの回答」(1972年), 増田一夫 訳, 『ミシェル・フーコー思考集成─ IV 規範/社会』, 筑摩書房, 1999年, 218~239頁 ; 同著, 「私の身体、この紙、この炉」(1972年), 増田一夫 訳, 『フーコー・コレクション3 ─言説・表象』ちくま学芸文庫, 2006年, 391~444頁.
『광기의 역사』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이후 푸코의 역사 기술에 어디까지 타당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지식의 고고학』서 후설로부터 빌려서 제시된 ‘역사적 아프리오리’ 개념은 데리다에게는 어떻게 비쳤을까?[주12] 혹은 데리다의 「프로이트에게 공정하다는 것」(『정신분석의 저항』 수록)에서는 『광기의 역사』가 다시 다루어지고, 푸코에게서의 정신분석의 양의성 ─ 『광기의 역사』에서는 프로이트가 비판 대상으로서 동시에 의거하는 대상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 이 논의되고 있다. 혹은 데리다 말년의 『짐승과 주권자』 제1권에는 푸코가 역사를 다루는 방법이나 『성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도 있었고, 그러한 텍스트를 따라감으로써 푸코를 반사경으로 삼으면서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를 현상학과는 다른 맥락에서, 더 광범위한 방식으로 조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12] 이와 관련해 カトリーヌ・マラブー, 『明日の前に』(Catherine Malabou, Avant demain. Épigenèse et rationalité, PUF, 2014; 平野徹 訳, 人文書院, 2018年)가 ‘역사적 아프리오리’의 물음을 제기하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또 하나, 데리다-푸코 논쟁과 관련해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의 데카르트의 위상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의 제2부에서 차지하는 루소의 위상과 똑같지 않느냐는 구절이 있다(54頁). 즉, 『광기의 역사』에서 데카르트는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 배제를 가져오는 범례로서 불러들여지고 있었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루소는 파롤에 의한 에크리튀르의 억압을 가져오는 ‘현전의 형이상학’의 시대의 범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데카르트를 둘러싼 푸코 비판과 마찬가지로 루소라는 극히 다면적인 얼굴을 가진 글쓴이를 형이상학적인 한 시대에 가둬도 되느냐는 비판이 데리다 자신에게도 향하게 된다.
이 책의 지적을 확장하면, 이를 어떤 의미에서 전면 전개한 것이 폴 드 만의 데리다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드 만의 『맹목과 통찰』에 수록된 「맹목성의 수사학」(초출 1971년)[주13]에서 몇 개의 문장을 인용하자.
[주13] ポール・ド・マン, 『盲目と洞察』, 宮﨑裕助・木内久美子 訳, 月曜社, 2012年 참조.
그는 어쩌면 실제로 루소를 오독하고 있으며, 루소 자신을 루소 해석자로 착각하고 있다 ─ 그가 ‘루소’라고 쓸 때마다 우리는 아마 ‘스타로반스키’나 ‘레이몽’이나 ‘푸레’를 읽어야 한다 ─ 아니면, 자기 자신의 설명과 수사를 위해 일부러 루소를 오독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236頁)
루소를 탈구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루소 해석의 확립된 전통은 긴급하게 탈구축될 필요가 있다. (237頁)
루소에게 그의 비평가들을 탈구축시키는 대신 데리다가 가짜 루소를 탈구축하고 있는데, 이를 위한 통찰은 ‘진짜’ 루소에게서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같은 頁)
즉, 드망에게 말하면, 루소를 「현전의 형이상학」의 시대의 테두리 안에서 읽기 위한 루소상은, 스타로반스키나 마르셀·레이몽, 풀레라고 하는 지배적인 루소 해석자로부터 나온 것이지, 루소 자신으로부터는 아니다.
다만 푸코와는 달리, 데리다는 이것에 어느 정도 자각적이며,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자체에 이 문제도 적혀 있다. 이 점도 이 책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역사 구조의 외부의 지점을 참조하는 독해를 펼침으로써 역사주의를 회피한다”(59頁)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데리다가 이 통찰을, 루소 자신의 텍스트로부터 충분히 끌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결여가 드만의 비판점이었고, 데카르트에 관해서는 데리다의 푸코 비판의 요점이기도 했다.
데리다가 푸코를 향한 비판과 같은 유형의 비판이 드 만에 의해 데리다 자신에 대해서도 향했다는 것이 함의하는 것은 역사주의 비판을 철저하게 비판한 데리다 자신에게도 어떤 점에서는 일정한 역사주의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책이 말하는 ‘역사주의의 아포리아’가 여기에 실제로 증명되고 있다.
2. 역사주의의 아포리아에 대한 응답 가능성
마지막으로, 이 아포리아를 데리다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거기에서 어떠한 응답 가능성(책임)을 데리다는 보여주었는가 하는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를 해 두고 싶다. 이 책은 데리다의 초기 사상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데리다에게서 역사주의 비판과 역사주의의 아포리아를 훌륭하게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데리다의 모든 저작에 일관되게 들어맞는 것이다. 데리다는 그 후에도 철학자 이외의 역사가 또는 철학자의 역사 서술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 책에도 나오는 대상으로는 신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신조어, 신~주의, 포스트~주의, 기생 및 기타 작은 지진현상에 대한 몇 가지 성명과 자명한 이치」)이나 프란시스 후쿠야마에 대한 비판(『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전형적이겠지만, 평자가 생각하는 것으로는 『아포리아』에서의 필립 아리에스에 대한 비판이 있다. 또 『거짓말의 역사』 강연에서도 토니 저드에 대한 비판이 있으며, 역사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죽음을 주다』는 얀 파토츠카에 대한 역사철학적 저작을 논의의 도마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의문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는 결국 역사를 쓰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에 머무는 것이지, 역사 그 자체를 적극적으로 쓰는 것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에서 역사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실제로 푸코의 데리다에 대한 답변도 그러한 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푸코 입장에서는, 이쪽은 수백 페이지나 되는 역사 기술을 전개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3쪽 정도로 삽화적으로 언급한 데카르트에 대한 해석에 과잉 반응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즉, 역사주의를 비판하기 전에, 당신도 역사를 쓰는 것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푸코는 반문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는 이 점에 어떻게 답하는가? 이 점에서는 이 책의 제2장이 밝히고 있는 ‘탈구축의 전략’, 즉 〈일반적 에코노미의 해명에 의한 기성 질서의 전도〉와 그로 인해 생긴 배치 속에 〈고명(古名, paléonymie)을 다시 쓰는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일반적인 답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데리다는 도대체 어떤 역사를 썼는가 하는 것을 독자는 데리다 자신의 말에서 일단 벗어나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데리다의 저작을 재검토할 때, 어떤 의미에서 데리다의 저작 전체가 바로 ‘역사를 쓰기’ 위해서 초래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애당초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로부터 서양형이상학에서의 ‘에크리튀르의 역사’ ─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서 제시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 를 그려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특히 후기 데리다의 저작은 강의록 등도 포함하면, 즉시 떠오르는 바로는 ‘거짓말의 역사’ ‘촉각의 역사’ ‘동물론의 역사’ ‘사형론의 역사’ 등 여러 가지 역사에 씨름했거나 또는 씨름하려고 한 저작이 많이 있다. 혹은 한 권의 책, 한 편의 논문이라는 단위로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데리다의 저작 전체는 바로 한 사람의 역사가가 엮어낸 철학사이기도 하고 사상사이기도 하고, 혹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 문학이나 예술, 그 밖의 문화의 역사이며, 통째로 하나의 역사적 아카이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데리다의 인용문 속에 « faire l’histoire » 라는 표현이 몇번인가 나왔었다. ‘역사를 말하다’라고 번역된 곳이 있는데(188頁), 이는 문자 그대로 ‘역사를 만든다’ 혹은 ‘역사를 이룬다’는 것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어떻게 ‘역사를 만들었’는가, 심지어 ‘역사를 이루었’는가 ─ 여기에서의 물음은 그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이 책이 고찰하지 않은 데리다의 저작 중 『우정의 정치』를 참조하자. 강의를 바탕으로 한 저작이지만, 플라톤 이후 서양사상에서 우정의 계보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 한 사람의 계보학자로서의 데리다 나름의 역사적 저작이며, 역사를 쓰는 것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시도를 하고 있다.
말하는 것, 주제화하는 것, 형식화하는 것, 그것은 사후적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오는 중립적 또는 비정치적인 행동이 아니다.이러한 행동은 어떤 과정에서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 경험(왜냐하면 그것은 철학적, 이론적 또는 방법론적 언표이기 전에, 횡단하고 모험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을 ‘계보학적 탈구축[déconstruction généalogique]’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서 여기에서 명명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자주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계보학적인 분석・회고・재구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작은 더 이상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계보학적 도식의 탈구축, 역설적인 탈구축, 계보학적인 것에 대한 계보학적인 동시에 비계보학적인 탈구축일 것이다. 그것은, 특권적으로 거기에서부터 그 속사 ‘계보학적’이 나오는 것이지만, 이리하여 계보학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일 터이다.[주14]
[주14] Jacques Derrida, Politiques de l’amitié, Galilée, 1994, p. 128〔『友愛のポリティックス1』, 鵜飼哲・大西雅一郎・松葉祥一 訳, みすず書房, 2003年, 171~172頁〕.
데리다는 종종 탈구축을 ‘계보학적인’ 개입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은 ‘역사를 만드는 것’으로서 데리다의 저작 전체를 재검토하기 위한 불가결한 관점일 것이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언급했듯이, 하나의 니체적 계보학의 실천이기도 하며, 푸코와의 관련도 이 논점에서 재고해야 하지만,[주15] 어쨌든 이 책의 데리다의 ‘역사의 사고’는 계보학에 대한 관여로서 보충・전개될 필요가 있다. 평자가 보기에 데리다의 저작에 대해서는 말년에 접어들수록 그러한 활동이 전경화된 것 같다. 사실 일련의 강의록은 바로 계보학의 실천으로 다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주15] ミシェル・フーコー, 「ニーチェ、系譜学、歴史」, 伊藤晃 訳, 앞의 책, 『フーコー・コレクション3』 수록.
마지막으로 『거짓말의 역사』의 흥미로운 기술을 예로 들어보자.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박해(베르디브 사건)의 과거에 대해 당시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그것이 프랑스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한 죄라고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승인이 의미를 갖는 것은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확립된 ‘반인도적 죄’라는 국제법상의 개념 아래 처음으로 전쟁범죄가 인정된 이후의 일로, 그 전에는 법적으로는 죄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는 정치적인 포즈일 뿐, 본래는 잘못된 사과, 거짓말의 사죄라고 할 수 있을까?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단순히 거짓말도 진실도 아니다. 시라크는 그런 국가적 죄를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동시에 ‘반인도적 죄’라는 법적 개념을 틀림없이 존중해야 할 기준으로 확증한 것이다.
여기에는 거짓말 개념이 미리 준거할 수 있는 법적인 사실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실상 역사적 사건에는 ‘진리를 만들어내는’ 차원이 있다는 것을 데리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해) 강조한다. [주16] 여기에는 ‘진리를 만들어낸다’, ‘역사를 만들어낸다’라는 것의 행위수행적인 실례가 존재한다.
[주16] ジャック・デリダ, 『嘘の歴史 序説』, 西山雄二 訳, 未來社, 2017年, 43頁 이하. 이 논점에 대해서는 이 책에 대한 다음의 필자의 서평도 함께 참고하기 바란다. 『図書新聞』, 2017年 5月 27日, 第3304号.
이러한 것은, 실제로는 역사 수정주의 ─ “애초에 사죄할 만한 사실은 없었다”의 입장 ─ 가 항상 회귀하는 동시에 항상 그것들에 저항할 수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 때문에 탈구축은 텍스트 해석의 상대주의 ─ 진리를 탈구축하면 어떤 의미든 텍스트에서 끌어낼 수 있다 등 ─ 로 종종 야유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주17]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가능성이며, 양자가 동일한 담론적인 무게[주18]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 자신은 한 명의 역사가로서 기존의 담론을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바로 그러한 역사수정주의에 항거하여 끊임없이 변동할 수 있는 역사의 맥락의 자기장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보학자로서 데리다를 평가하려고 할 때, 이러한 면에서 데리다의 작업을 재역사화하는 작업 ─ 탈구축의 통속적인 오해와는 별개로, 데리다의 저작이 항상 일정한 역사적인 기술을 초래하고 있던 그 내실을 해명하는 것 ─ 이 향후 필요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이 책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이 책에 의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며, 여백으로서 보충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텍스트가 그렇듯 여백은 본문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말할 필요도 없이 본문에 의존해야 비로소 의미를 이루는 것이다. 이 여백이야말로 본문으로서 이 책의 가능한 속편, 또 하나의 가능한 복수의 ‘역사의 사고’의 시도를 더욱더 구상하는 것이 이 책의 독자에게는 요구되고 있다.
[주17] 예를 들어 최근에는 ミチコ・カクタニ, 『真実の終わり』(岡崎玲子 訳, 集英社, 2019年)에서 탈구축을 다룬 것을 참조. 이 책에서 카쿠타니(カクタニ)는 데리다와 드 만의 텍스트와 직접 대면하지 않고 당파적 어조를 띤 기존의 2차 문헌 인용을 거듭하면서 “탈구축주의가 모든 텍스트가 불안정하고 환원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며, 독자와 관찰자에 의해 점점 더 가변적인 의미가 부여도니다고 가정”한 후에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퍼뜨리고 … 궁극적으로 허무적”(同書, 44頁)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이 폴 드 만과 탈구축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묶어서 조롱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적절하게 반론하고 있다. 土田知則, 「ポストモダニズムと「真実の死」」, 『思想』, 2019年 11月号, 24~34頁.
[주18] 다른 곳에서 데리다는 이 무게를 ‘맥락의 안정성’이라고 표현하며 형식적인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에 대해 경계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성을 고려한다”라고 할 경우에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한편으로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 안정성 그 자체를 위해 안정성을 보수하는 것을 선택하거나 용인하거나 시도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보수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본질상 항상 잠정적이고 유한한) 모종의 안정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영원성이나 절대적 견고함이라고 하는 표현으로는 말하지 않는 것, 역사성, 비-자연성을, 또 윤리, 정치, 제도성을 고려한다는 것입니다. … 제가 말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불가침의 자연-본성적인 안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안정성의 개념 자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정성은 변용 불가능성이 아니라 정의상 항상 탈안정화 가능한 것입니다”(앞의 책, 『有限責任会社』, 324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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